신중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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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주 신중엄 신도비'

신중엄 (1522~1604)은 조선의 문신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계모에게 효도하고 동생을 잘 돌본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수령을 지내면서 백성들을 교화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부족한 군량미를 개인 재산으로 군량미로 조달하는 등 국란 극복에 노력하였다.

자는 희범(希范), 본관은 고령으로 일찍이 4살 때 어머니를, 1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성장했다. 종조부의 덕택으로 음보로서 동궁의 하급관리로 나갔고 경복궁의 중수역을 맡았다. 그 뒤 군자감 직장, 예빈시 주부, 사헌부 감찰 등을 지내다가 1561년 용담현(龍潭縣)에서 지방관으로 5년 재임했고 1571년 다시 상주로 나갔다. 서울로 돌아와 종부시 주부, 상서원 판관, 장예원 사의를 지낸 뒤 순천군수로 나갔고, 1584년 사옹원 판관을 지내다가 수안군수로 나갔다. 다시 돌아와 상방 판관을 지내다 이듬해 작은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91년부터 계모와 계조모의 상을 치른 뒤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98년 명나라 원군이 식량이 떨어지자 집안의 곡식을 내어주었는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601년에는 80세의 나이로 첨추(僉樞)가 되어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이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604년 2월 사망했고, 42년 뒤에 자손의 공로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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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엄 hasStele 청주 신중엄 신도비
wasBornIn 1522
DiedIn 1604
isPartOf 고령신씨
hasType 문신
wasInvolvedIn 임진왜란

주석 References

  1.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주 신중엄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