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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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벨베데레 궁전

벨베데레 궁전은 오스트리아의 궁전으로서 빈 남동쪽에 있는 바로크 양식 궁전이다.

왕가는 1697년 부지를 사들이고 사보이의 왕자 오이겐(Eugen von Savoyen)이 거대한 공원을 우선 조성하였다. 벨베데레 궁전은 도시 근교에서 왕족이 보낼 수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1714년 건축이 시작되어 일단 틀을 닦고 정원도 만들게 되었다. 그 주변으로는 오랑제리와 그림을 전시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건축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맡았으며 그는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양식을 극대화한 거장으로 손꼽힌다. 그와 함께 베네치아 출신의 조각가 죠반니 스타네티가 함께 하였다. 하부 벨베데레 궁전의 건설은 1716년 완공되었으며 천정은 마르니코 알트몬테라는 화가가 완성하였다.

서쪽에는 정교한 그로테스크 양식을 가미한 공간이 나타나며 침소로 쓰인 곳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회화 전시실도 있는데 그곳의 장칙은 도메니코 파로디(Domenico Parodi)가 맡았다. 내부의 또다른 화강암으로 된 방은 1720년부터 지아코모 델 포라는 사람이 천정 색채 작업을 하였다. 동쪽으로는 전체 응접실과 식사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1720-1723년에 걸쳐 상부 벨베데레가 완공되었는데 원래는 중앙 정원으로 하여금 궁전의 축을 잡고자 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궁전은 1752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에게 팔렸고 그녀가 최초로 이곳을 벨베데레라 명하였다. 합스부르크 가 하에 궁전은 더욱 더 명성을 다지게 되었다. 1775년 이후 벨베데레 궁전은 황실 회화 전시장으로 쓰였으며 하부 벨베데레 궁전으로 다른 궁전의 그림을 이전해오기도 하였다. 가장 마지막에 머물었던 사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갤러리 박물관이 벨베데레 궁전으로 정해졌다. 2차 대전 중 많은 피해를 입어 복구에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현재 외부 개보수 작업에 착수하고 있으며 주로 정원을 다시 꾸미는 일에 치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8년에 완공을 했다.

전시

<키스>

벨베데레 궁전 상궁에는 많은 예술작품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0년, 빈 분리파 그룹 내에는 글래스고 4인조도 끼어 있었다. 영국의 건축가 찰스 레니 매킨토시를 비롯한 3명의 예술가에 의해 결성된 글래스고 4인조는, 유럽 미술 및 공예운동의 행보에 크게 기여한 미술가 그룹이었다. 비록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가 1905년 분리파 그룹을 떠났다 할지라도, 그는 매킨토시의 아내 마가렛 맥도날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준보석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맥도날드의 양식은 클림트의 화풍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클림트가 그린 많은 주제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02년 완성된 <베토벤 프리즈>의 마지막 패널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이 작품은 실러의 '환희의 송가' 중 한 대목인 '전 세계에 보내는 키스'라는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클림트는 실러가 사용한 넓은 의미의 정치적 수사를 좀 더 개인적 의미의 어떤 것으로 대체해 놓았다. 그는 또 그 의미를 여성의 자궁 같은 공간에서의 포옹으로 뒤바꿔 버렸는데, 이는 <키스>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자의 드레스에 두드러지는 원형의 생물 형태와 남자의 옷에 보이는 힘찬 직사각형 장식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이 모든 장식은 클림트 개인의 상징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이미지는 너무 유혹적이라서 우리는 클림트의 다른 요소들, 이를테면 원시 표현주의 같은 요소들을 놓치기 쉽다. <키스>에서 흉측하게 굽은 여자의 발가락과 일그러진 손, 부패 중임을 암시하는 오싹한 피부색 등은 클림트의 원시 표현주의를 보여 주는 대표적 요소들이다. 관람자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장식적 · 관능적 과도함 역시 클림트 예술을 대표하는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주의 양식은 당대인의 반감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

위치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