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동수
1923년 아버지김우제(김이제) 목사를 따라 상해로 가서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공시중학교(公時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34년 김구(金九)·장졔스[蔣介石]의 합의에 따라,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에 특설된 훈련반에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 등 한국인 훈련생 90여 명과 함께 입대하여 1년 동안 군사교육을 받았다. 1936년 7월 중국 육군 제25사단 견습 사관으로 군무를 수련하였으며,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8월 난징[南京]으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38년 3월 창사(長沙)에서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김인(金仁)·이하유(李何有) 등과 함께 중국인을 포함한 약 50명의 특수공작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적 점령 지구인 상해에 파견되어 정보수집·선전·초모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1939년 11월 한국 청년만으로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조직하여,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하고 자신은 부대장에 취임하였다. 그 해 겨울 이해평(李海平)·김천성(金天成) 등 대원 8명을 이끌고 일선지구인 산시성[山西省] 루안[潞安] 방면으로 가서 중국인 후쭝난[胡宗南] 직속의 유격대와 합류하여 정보수집·적정탐색·초모공작 등의 활동에 주력하였다.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 주관 아래 광복군 총사령부가 결성되고, 뒤이어 사령부가 시안으로 진주하여 항일 무장 역량의 총집결을 호소하자, 1941년 1월 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어 총사령부 호위와 사병 훈련을 맡게 되었고, 자신은 제5지대 간부로 임명되었다. 1941년 12월 광복군 제5지대 간부로 산시성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적 후방공작 및 유격전을 전개하고, 정보수집 및 광복군 초모활동을 하였다. 1942년 5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단 한국청년훈련반이 특설되자, 송호성(宋虎聲)·박기성(朴基成)과 함께 구대장(區隊長)으로 임명되어 일선공작에 필요한 군사훈련과 외국어 등을 가르쳤다. 1945년 5월 충칭으로 가서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 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6년 임시정부 중화대표단 동북특파원 자격으로 교포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귀환을 돕다가 1948년 6월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연대장·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공훈록 (국가보훈처, 1992)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 (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독립운동사』 4·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1972·1975) 자료 한국독립운동 (추헌수 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5)
참고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