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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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노무현(盧武鉉), Roh Moo-hyun |
출생 | 1946년 9월 1일 |
사망 | 2009년 5월 23일 |
성별 | 남 |
국적 | 한국 |
직업 | 대한민국 대통령, 법조인, 정치인 |
경력 | 16대 대한민국 대통령 |
인물정보
정의
대한민국의 제 16대 대통령이자 정치인 및 법조인.
생애
노무현은 1946년 9월 1일에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업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해 1966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였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1971년 만기제대한 뒤 그만두었던 사법시험을 다시 준비하였으며, 1975년 네 번째 도전 끝에 30살의 나이로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이듬해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그러던 와중 1981년,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우연히 변론을 맡게 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0년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대하여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이듬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으며,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이듬해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 지역구를 포기한 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낙선 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김대중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었다.
이후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펼쳐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2004년 초,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 각지에서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잇따랐으며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오리농사, 마을청소에 참여하는 등 평범한 전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퇴임할 때 대통령 재임시의 기록물 복사본을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하여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의하여 측근과 친형, 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2009년 4월 30일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5월 23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내용의 유서를 컴퓨터에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1]
평가
긍정적 평가
- 법치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
사법 사상 최초로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과 서열을 무시한 여성 대법관(김영란), 지방대 출신 국세청장(이용섭)을 탄생시키는 능 능력을 우선시하는 인사 기용 성향이 있었다. 언론인 강준식은 선거공영제를 확대하여 돈이 들지 않는 선거제를 확립한 것이라든지, 부작용은 있었지만 시민단체의 활발한 정치참여를 유도한 것이라든지, 시장 개입을 없앰으로써 정경유착의 고리를 상당 부분 끊은 것이라든지, 인권을 신장시킨 것이라든지, 권위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했지만 권위주의를 청산한 것이라든지 하는 것 등은 다 그의 공이다.라고 말했다..[2]
- 역사의식개선(과거사 진상규명)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 시절 만들어졌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확대개편하여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해당 위원회에선 6.25전쟁 당시의 양민학살이나 전시 민간인 희생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각종 간첩조작 사건 등 그간 금기시됐던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용공조작 사건들을 조사, 정리하여 피해자들을 복권시키고 가능한 경우 뒤늦게나마 보상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3]
-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한 평가
2005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긴 후 수 년간의 동안의 조사 결과 확인된 것만 들어도 민간인 4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다. 하지만 추산되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 정도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위원회에서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싶어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군사정권이 대대적으로 관련 기록을 소각시키면서 피해자 수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이후 2008년 1월 24일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 대통령 노무현이 사과하였다.
부정적 평가
재임 기간 중에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으며,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이랜드 사태 등)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을 받아 진보, 보수 어느 진영에게서도 명확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 이 양립하고 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