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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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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며 김안국의 문인이다. 김인후는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학문을 닦았으며, 과거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홍문관 박사 겸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면서 인종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고, 그 점을 크게 평가받아 18명의 현인으로 추앙받았다. 그가 모셔진 필암서원은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생애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공자를 모신 사당(문묘)에 신주를 모신 우리나라 18분 선정 가운데 한분으로서 중종 5년(1510) 장성현 대맥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요, 호는 하서 또는 담재이고, 명종 15년(1560) 51세에 돌아가셨다. 호남 유림의 종장으로 추앙받았으며 22세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34세때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으며, 정조 20년(179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인후 선생은 열살 때 김안국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이황 등과 교우가 두터웠으며 세자 보도의 중임을 맡았다. 홍문관 박사 겸 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면서 인종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인종은 중종의 아들로 인품이 훌륭하고 학자들을 좋아했기때문에 연산군대 이후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출신 관료와 학자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병약하여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하였다. 정조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정이란 시호를 하사하였다.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선비들의 원한을 신원하였고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으로 돌아갔다. 그 후 모든 벼슬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오직 성.경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논설과 의리가 명백했던 선생은 내실을 소흘하고 밖으로만 열심인 선비들을 호되게 꾸중했다고 하며 도의와 절개로 일관했던 선비의 표상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인종의 스승이었던 점이 당대 및 후대 왕들과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던 큰 동기가 되어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있는 문묘에 모셔진 우리나라 18명의 현인 가운데 유일한 호남출신으로 이 지방 유림들의 큰 어른으로 추앙받아 왔다. 후에 대한민국에서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와 기업인 김연수의 선조가 된다.


하서의 문학과 예술

하서는 16세기 사림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시기에 도학자로서의 자기세계를 확고하게 살았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훈구관료들의 전횡에 반발하여 36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명분과 의리를 지켜 끝까지 현실에 나오지 않은 사실에서 그의 군자로서의 행동과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서는 1600여 수에 가까운 시를 남겼다. 16세기 호남에는 면앙정시가단과 성산시가단이 형성될 만큼 가사문학이 융성하였다. 하서 김인후는 면앙정 송순의 문인이며, 성산시가단 정철의 스승으로 시문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이로 인해 면앙정과 소쇄둰 등 여러 정자와 원림에 그의 시가 남아 있다. 하서는 중국의 유명한 칠언율시 가운데 두 대구가 서로 잘 맞는 시 100수를 골로 음과 훈을 달고 한글로 번역한 '백련초해'를 짓기도 했다.


평생을 바친 실천적 도학

하서 김인후 선생은 중국 송나라 정주학과 우리나라 포은 정몽주, 정암 조광조로부터 내려온 학통을 이어받은 도학자다. 소학, 대학, 중용, 효경, 서명, 역경을 평생 동안 연구하여 실천적 도학을 추구하였다. 우주관, 인성관, 수양론, 경세론, 의리론이 집약되어 있는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천명도 등을 저술하였는데 현재는 천명도만 남아 있다. 선생은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 예학에 밝았으며 필법은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서 모두 극치를 이루었다 자연을 벗 삼아 당대 명사들과 교류하고 백화정, 훈몽재, 낙덕정, 소쇄원, 면양정, 식영정, 환벽당 등에 출입하여 한시와 부 등 1,600여수를 지어 전하여 오는데 경구와 고사를 많이 활용한 맑고 우아한 도학자로서의 인품을 잘 나타낸 주옥같은 시들이다. 국문학에도 조예가 높고 깊어 국문학 가단에서는 면앙정(송순) 가단에서 성산(정철) 가단으로 이어지는 중간적 역할을 하여, 국문학의 새 장을 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의 국문학시는 '자연가', '도임사수원가', '백구가' 등 3수가 있다. 선생이 저작한 '백련초해'는 고대의 명시 100수를 모아 국문으로 음을 달고 해설하여 쓴 것이다. 근대 어휘 475개와 고어 사전류에도 없는 어휘 21개, 희귀한 어휘 19개가 나타나 있어 국어 어문학적인 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시 학자들이 천시하던 '한글'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광해 2년(1610) 판각하여 필암서원에 보관하고 있다.


호남사림의 형성

하서는 호남의 풍요롭고 활달한 분위기와 낭만적 정조를 시가로 즐겨 나타냈던 호남가단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호남가단의 최초형성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면앙정 송순의 가르침을 받았고, 호남가단을 완성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송강 정철이 자신의 문하를 드나들었던 것에서 하서가 호남가단의 형성과 전개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짐작하게 된다. 호남가단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로는 면앙정의 주인공 송군과 이른바 식영정 사선으로 알려진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을 들 수가 있다. 하서의 국문시가 작품활동은 송순, 정철에 비해 다소 뒤지지만 한시 활동에 있어서는 양인을 훨씬 능가하였다. 하서가 단순히 도학자로서 재도문학의 굴레에 얽매였다기 보다는 호방하게 시화하는데 충실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호남가단의 활동 작품을 보면 <어암잡영> 20수와 <소쇄원 48영>과 <면앙정 30영> 등의 자연시를 들 수 있다.

구국대열에 앞장선 장성 선비들

연산군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반정군을 일으키자고 격문을 돌리는 등 정의를 위해 늘 앞장섰던 김개, 의리사상을 깊게 간직한 호남사림의 큰 맥을 이루게 했던 신평인 송흠이나 울산인 김인후, 청백리로 명성을 떨친 태인인 박수량은 모두 장성이 낳은 인재들이다.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이 유린당할 때 의병에 앞장선 장성인들이 많았는데 김경수의 남문창의를 비롯하여 기효간, 기효근의 의병활동, 화차를 발명하여 행주싸움을 승리로 이끈 변이중, 동래산성에서 적을 맞아 순국한 양산군수 조영규 등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크게 공헌했고, 입암산성에서 순절한 윤진의 충절은 장성인의 정신을 웅변해 주고 있다.

하서선생이 세자때 인종에게 학문을 교육하는 모습을 재현

각별했던 하서와 인종

하서와 인종은 각별했다. 하서는 인종의 세자 시절 세자를 모시고 공부하는 곳인 세자시강원에서 세자보도라는 직책으로 인종에게 글을 가르쳤다. 인종은 하서의 강의에 매료됐고, 의기가 상통하여 그 정표로 세자가 직접 친 묵죽도를 하사했다고 한다. 이 묵죽도 하단에는 하서가 지은 시가 적혀 있다. 인종이 재위 9개월만에 병사하자 그 충격으로 하서는 낙향하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고 시작으로 마음을 달래며 후진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하서는 인종이 서거한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병을 가지고 집 남쪽에 있는 산에 올라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를 거듭해 밤을 지새고 내려오기를 평생동안 거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출처

필암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