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 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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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른다.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서인들, 특히 정철과 배후의 성혼에 원한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배경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이이와 정여립 사이에 서인과 동인에 대한 인식 차이로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두 사람 다 붕당에 얽매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이이는 평소 선조에게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한 바 있었고, 정여립은 이이 문하에 의외로 서인당이 많고 그들이 편견이 심하다는 사실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정여립은 이미 이이가 죽기 전에 서인당을 떠났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여립이 이이를 배반했다는 당시 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이이를 참다운 성인으로 숭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히려 이이는 정여립의 과격한 성격을 상기시켜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반대하였다.

이이가 죽자 이이에 대한 동인들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러자 이이에 대한 선조의 믿음도 점차 변하여 이른바 삼찬 사건(1583년 이이를 탄핵한 송응개, 박근원, 허봉을 유배시킨 사건으로 이들 셋을 삼찬이라 했다. 계미변란이라고도 한다.) 관련자들을 용서한 일이 일어났다.이때 정여립은 이러한 선조의 마음을 헤아려 경연에서 이이를 공격하는데 앞장 선 적이 있었는데, 이 일은 궁지에 몰린 서인들에게 절호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사건

이이의 문하생이었던 정여립은 1583년 수찬이 된 후 서인을 비판하다가 귀향하였다.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호남 금구현으로 간 뒤로는 전주에 거주하기도 하고, 김제와 진안의 별장을 왕래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그가 물러가는 것을 애석히 여겨 그에게 다시 벼슬길을 열어 줄 것을 간청하는 신하들이 나타났지마, 선조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589년 10월, 황해도 관찰사, 재령 군수, 안악 군수, 신천 군수 등이 그가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도성으로 와서 선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고 고변하였다.

선조는 이들의 세력이 막강함을 우려하여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정여립은 토굴에서 자결하고, 관련자 80명이 압송되었으며 점차 범위가 확대되어 2년간 국문장이 열렸다. 옥사는 1천 명의 희생자를 냈다. 형문을 담당하던 위관은 송강 정철이었다.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정철은 정여립의 도주를 예견하였고, 자원하여 입궐하였다.

정여립 반란 사건 초기에 위관이었다가 동인이었기에 물러 나온 정언신도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여립과 연루되었음이 드러났다.정언신은 체포 후, 정언신의 아들 율의 상소와 성혼의 권고로 죄가 감해졌으나, 정여립의 문서에서 정언신의 편지가 비교적 많이 들어 있었음이 드러나, 유배형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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