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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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최초의 개신교 교회

1893년 교항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현재 강화교산교회다. 1892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이며 인천 내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는 몇 차례 강화도에 들어오려고 시도했으나 강화 유수의 거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강화읍 남문에서 발길을 돌렸다. 이 때 강화도 시루미(지금의 양사면) 출신으로서 인천에 있던 이승환(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이 예수를 영접하고 인천 내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인천의 교회계(계) '계꾼 교인'의 한 명이었다. 한 명의 계꾼이 50명의 돈을 갖고 도망갔으나 이승훈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존스 목사는 세례를 주겠다고 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술파는 사람이라서. 그리고 천국같이 좋은 곳을 가는 일을 고향에 계신 어머니보다 먼저 할 수는 없다고 해서. 그리고 같은 해 여름, 존스 목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이승환의 요청으로 강화도 북쪽 해안까지 왔다. 그러나 지역 유지인 유학자 김상임(후에 김상임 전도사가 됨)의 반대로 육지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자 이승환은 한 밤중에 어머니를 업고 해안 갯벌을 지나 존스 목사가 있는 배로 갔다. 그리하여 존스 목사는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베풀 수 있었다.

이 장면을 헤스(M.Hess)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렸다.”[1]

인천에서 활동하던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가 시루미로 파송되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4~5명으로 시작한 예배는 불과 1년 만에 80명으로 부흥했다. 천민출신이 많은 시루미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다리목에 살던 양반 김상임이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마을 전체가 개종했다. 김상임 전도사가 1894년 자기 집 앞마당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시루미 마을교인들이 옮겨왔고 다리목(교항, 橋項)과 시루미(증산, 甑山)의 한자를 따서 교산교회라 이름 지었다.

교산 교회는 강화의 다른 지역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그 흐름은 크게 세 줄기로, 첫 줄기는 홍의(홍의교회)를 거쳐 강화읍으로 해서 남쪽으로, 둘째 줄기는 고부(고부교회)를 거쳐 중서부로, 셋째 줄기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섬인 교동으로 연결되어졌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흐름을 통해 강화는 선교 개시 10년 안에 강화전역에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현재는 150 여개의 감리교회가 있는 섬이 되었다.

박기현 목사(교산교회)는 "강화도 기독교의 특징은 복음을 있는 그대로 삶속에서 실천을 한다는 것이다"며, "그것이 강화 주민들에게 퍼져나가면서 기독교는 자유와 해방을 주는 실천적인 종교라는 인식이 확대 됐고, 강화도가 복음화 되는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2]

인물

존스 (G.H.Jones, 趙元時) 목사, 이승훈, 김상임 전도사, 종순일

시각자료

출처

  1. 출처: 남상학의 시솔길. [1]
  2. 출처: 강화도 선교 120년 역사를 한눈에. 노컷뉴스. 2013.04.25 [2]

기여

일자 역할 이름 전공
2019.6. 편집 최원재 교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