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김근호
인물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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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한자이름 | 金根鎬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사망연도 | ? ~ 납북 |
출생지 | 강화 |
이력1 | 동양기선 전무 |
이력2 | 경기도의원 |
해설
김구와의 관계
해방이후 1947년 대명헌 앞에서 김구와 함께 찍은 사진. 맨 왼쪽이 김근호. 김근호는 6.25 이후 납북되었다고 알려져있다.
김근호와 김구 [1]
기사 모음
김근호는 식민지기 강화지역의 산업자본가, 교육가, 지역정치가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청년시절이던 1920년대부터 그의 기사는 경기도 의원으로 활동하던 1940년대까지 행적을 신문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 "소식"
동아일보 1940년 2월 10일 박제승씨강화군수강화도교 통동쇄해소인사차구일내사 김근호씨 강화유치원장경기도 회의원 동상
- "인사"
경향신문 1948년 10월 8일 김근호씨 동양기선전무 육일오전 강화도 자택에서 조외상
- "인사"
동아일보 1948년 10월 8일 김근호씨 동양기선 전무 육일강화향제에서 조외간
- "중학의 도시편중에서 지방적분산 끽긴"
동아일보 1940년 3월 8일 김근호의원(강화) 현재 이와같은 교원부족 싣에 도립사범을 폐교한 ㅎ후 이제 새로 설립할 의향과 지난날의 폐교에 대한 책임을 느기지 않는가 성동중학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활실한 설명이업삳. 지원자를 받는데 경중형인가경기형인가를 확실히 설명해주기 바라고 특히
- "경성엔거지가너무만타 수용시털이 긴요 농민의 베틀헐하게 사니 그들의 소비품도헐하게 팔어라."
동아일보 1940년 3월 12일 김근호 의원 강화해안시설을 육지의 시설과 함께 시설해 주어야 되겠고 수산학교의 설치가 특히 요양되는데 실시책이잇는가 강화십만도민의 매년빙설에 봉쇄되는것은 도당국으로 보아도 큰명예롭지못한일인동시에 동정되는 일이다. 속히 교통문제를 해결해주기 바란다. 잡곡의 가격통제를 위하야 그 가격일부를 보조해주는 것이 조켓다 중등학교의 지방분산을 재차 요망해둔다.
- "재경강화유학생회"
동아일보 1923년 7월 9일 강화도에 원자를 둔 재경유학생수는 실로 삼백을 산하나 아직것단결의 기관이 무함을 탄하야 배재최경희선생외제씨의 발기로 강화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동회제일차사업으로는 문화선전과 창립기념지방개량등을 목적하고 각면순회강연급음악환등영사와 정구축구경기등 협의하얏는대 동아일보강화분국후원을 어더가지고순회할지명과일정은 여좌하더라 칠월이칩일일강화부내면 오전중부내면단체와축구전 오후중에는동대정구전야간은 강연음악환등외이십팔일하체면에서 여전일이십구일 삼랑성전등사휴게삼십일 [..] 사교부장 김근호
- "강화학생순강 하기휴가중에"
동아일보 1925년 7월 14일 강화중앙청년회주최본사강화지국후원으로 금번하기휴가를 기하야 재경강화학생친목회에서 하기순회강연을 하리라는데 그일정과 순회지급연사는 여좌하며 군내각단체와 일반의 동정이 만키를 바란다고 일정급순회지: 칠월이십오일 부내면 칠월이십육일 하점면 칠월이십칠일 양도면 칠월이십팔일 길상면 연사 김근호
- "강화소년회 추긔가극대회"
동아일보 1926년 9월 25일 강화소년회 추긔가극대회 본보강화지국후원으로 이미 보도한 바와 가치 강화소년회ㅇ서는 추석날달밤은밤여덜시부터 신문리레배당에서 추긔가극대회를 열엇는데정각전부터 남녀관객이 물미러드러오듯하야 비인름업시대만원을 이루워 박수갈채로 텨진스러운어린동무들에 노래와연극이잇섯고 또지도자김근호씨의례사가잇섯는데강화에서는처음보는 성황을 이루엇담니다
- "강화에 기념식"
동아일보 1927년 9월 10일 강화 기념식 금반강화중앙청년에서는 국제청년데 이를 당하야 그날을 뜻잇게 지내자는 의미아래여러 방면으로 만흔 활동을 하여왓스며 모임에 대하야는 강화경찰서의 양해를 어더강연회만은 금지당하고다행이가념식만은 허가를 어더 지난 구월 사일 오후 구시에 강화소년군 총본부사무소내에서 기념식을 개최하고 김근호군의 간단한 식사가 끗나자 이여서 청년데이에 대한 유지의 의의를 소개한 후동십시십칠분 무사히 산회하엿다더라
- "지방인사소식"
동아일보 1928년 7월 21일 김근호씨 강화유치원 부원장 약일주간예정십구일향방결성
- "작일 박길양 시체되어 출억"
동앙일보 1928년 1월 22일 시톄는 위선로층에 안치 삼일운동당시로부터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투신하야 여러차례 텰창생활을 하다가 조선공산당 사건에 관련되어 삼개성상을 텰창에서 신음하든 박길양은 중병에 걸린 몸이 보석조차 못된 관계로 지난 십구일 오전여섯시에 한만흔이 세상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떠나버리엇다함은 긔보 하얏거니와 이급보를 들은 동지들은 조선청년총동맹에 모히어 장의는 사회단톄련합장으로 댕하고 삼십여명의장의 위원을 선거하얏든 바 경찰당국으로부터 금지를 당하고 동지들은 재작야에 상경한 고박길양의 부인김씨와 처남되는 김근호씨와 강화인천에서 온 사회단톄대표들과 리인 변호사와 함께 작이십일오전열시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시톄를 바다서 서대문뎡이뎡목에 이쓴 조선노농총동맹 회관에 안치하얏는데 수십여동지들이 회관내외를 수직하며 관압헤는 그의 부인 김씨가 안저 눈물괴인얼골로 울음석거 말하되 "지금은 무에라말할수없습니다그저한만흔일생이엇지오 사라잇슬때에 한번이라도 더보앗드면할뿐이외다"라고 말하다가 목이메어말끗을아물으지못하더라/"
- "공산당사건피고 고박길양이장"
동아일보 1928년 4월 8일 구일수로로 강화에 조선공산당사건의 피고로 삼년동안이ㅏㄴ 감옥에 가티어잇다가 몹쓸병을 어든결과 드듸어 옥중의원혼이된 박길양의 시톄는 그후경찰의엄중한감시하에 시외수철리 공동묘디에 무치어잇든 바 강화군에 잇는 그의 친족들은 불행히 하얏든 그의 유해나마 고향으로 이장을하여야하겟다하야 그동안준비를 하야 오든 중 오는 구일에 그의 매부 되는 김근호씨가 배를 가지고 강화를 떠나 시외마포에다 혀두고 수철리 무덤을 파서 마포까지는육로로 그곳으로부터는 배길로 강화까지 가져가게되엇다더라
- "학부형 궐기"
동아일보 1928년 6월 10일
- "강화공보장폭행사건"
당디중앙청년회 집행위원대표 김근호씨가 진상을 알고저 전긔정상교장을 방문한즉 그는 돌이어전긔김근호씨에게 당신은 나에게 물을 필요와 자격이 업다하여 다만 나는 감독관청의 지휘만바들분이라고 불온한말까지 토함으로 김근호씨는 "지금 당신이 한 소행과 여차한 폭언도 감독관청의 지휘로 하느냐"하얏더니 정상교장은 묵묵부담함오로 그ㅡㄴ 돌아왓다는 데 일반학부형급 사회단톄에 물의가 분본할 뿐 아니라 적극적 수단으로 대책을 강구중이며 그 이튼날 오전 열시반에 중앙청년회 대표 김근호 서해량씨와 동교후원회장 박종항 학부형대표 조봉원
- "기호지방"
동아일보 1929년 5월 20일
강화신간간사회 긴간회 강화지회에서는 지난 십사일 오후 팔시 동아일보지국에서 제삼회간사회 부회장서봉준씨의 사회로 개하고 좌기사항을 토의결정한 후동구시에 폐회하얏다더라 일, 수원에서 개최되는 부대표 회원선거회의 김근호 최명식 양씨를 파견할 것 일, 여비는 작년도미납된 회비를 징수하야 매인당오원씩 지판한것
- "신간대표회 수원서 개최"
동아일보 1929년 5월 20일 거십칠일오전십일시경부터 신간회수원지회내 신간회구역대표회를 소집하얏든바 강화인천안성고아주수원등오개소지횡서 십삼인의 대표가 모이어 대표회원회를 임시의장염석주씨의 사회로 개회하고 간단한 개회사가 유한 후임시서기 박스욱씨로부터 대표회원 심사가잇엇스며 의장선거에 인천대표권충일씨가 ㅏㅇ선되어 인사소개와 각회원의견진술이잇슨뒤 곳무기경투표 대표으원 한사람을 선거하고 의장의 정중한 진술과 각의원간단한 소견이 유한 뒤 오후 일시경에 무사히 폐회되엇는데 피선된 대표의원은 여좌한다더라 각지대표강화최명식 김근호
- 김근호 사진있음
- "신지대회금지 의안이 불온타고"
동아일보 1929년 1월 17일 신간회강회지회에서는 거십삼일에 제일회정기대회 개최하라고 제반준비를 하얏든바 의안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경찰이 돌연히 동대회개최금지함으로 부득기대회는 연기하고 동일오후 이시에 강화유치원내에서 간친회만을 성대히 설하얏섯다더라 간사회만개최 : 별항의 보도와 여히 신간회강화지회정기대회는 중지하얏스나 동십삼일오후삼시반에 강화유치원에서 제이회 간사회를 개하고 좌기의 사항을 결의하얏다더라. 일, 대의원을 김근호 최명식양씨와 후보로 서봉준씨를 선정함. 일, 임시대회는 본부대회를 경한 후에 소집키로 함. 일, 간사의 결원을 유지영씨로 보선함. 일, 상무간사 유지영씨로 선정함.
- "기호지방"
동아일보 1929년 1월 3일 기호지방 강화신간간사회 신간회강회지회에서는 거십이월삼일 오후 오시에 해회관에서 총무간사회 부회장서봉준씨의 사회로 개하고 좌기의
- "강화인천간의 선박운임감하"
동아일보 1931년 4월 22일 백종물가는 폭락하고 잇는 이때 단톡인천강화간의 운임과 선임만의인하를 보지못한 강화상게의중진들로 조직된 운임감하 긔성운동회의 소식은 이미 본보에 보도한바어니와 해외위원장 김근호씨와 간부제씨는 목적을 필사적으로 달성하기위하야 모든일에 착착진행중이다. 지난 십구일 오후 칠시부터 해회관인 본보지국에서 갑곶항 선주 재래식목선 김승준씨와 이씨와 김하운도오히교섭위원 김갑정씨와 수씨등의 회합이 잇섯고 딸하운임에 대하야 감하운동회의 운임감하건ㅇ 들어가
등의 세 조항을 타협개정한이외 전부감히운동회의 요구 조건대로 백미외오십일정 승락하엿다는데 해회사명의 제일단은이로서 성공하얏스며 다음은 삼신기선회사의 요구조건뿐으로 칠만주민의 문제중에 잇든 선임감하에 잇서서도 수히해결을 어드러라고
- "자동차선로인가 강화도민이 요망"
동아일보 1931년 6월 2일
강화도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야 일즈강화경성사이의 자동차선로의 허가를 신청주이든 강화도의 유지 김근호, 장길환, 김영식, 이보인, 권태국, 강진희 고, 천희일랑, 김현식씨등의 구명은 지난 이십육일에 상경하야 이십칠일 경기도로 일삼보안과장을 방문하고 그의 허가를 속히 내어달라고 교섭하얏다한다. 원래 강화도는 사천여년의 역사를 가지엇슬뿐만 아니라 해육산의 특산물이 풍부한 곳으로 문물이 겸전한 고시나 항상 교통이 불편하야 문화발전의 지장은물론 일반도민의 교통상의 불편도 막심하얏다 그리하야 작년 십일월에 도민들의 경영인삼신기선회사의 명의로 경성간의 자동차선로 허가를 도청에 제출하얏든 것이라 한다. 금번 그들이 보안과장에게 교섭한결과 도당국에서 동지도민의 희망을 충분이 랑해하야되도록 선치하겟다는 것을 언명하얏슴으로 불원간 허가되리라하다.
그러케 된다면 강화경성간의 왕복은 당일로 되어 대단히 교통이 편리하게되디라 한다. 자도차 연락은 강화부내면갑관항과김포군 월곶면 성동리 사이의 나루에 발동긔선을 두리라한다.
- "소식"
동아일보 1932년 7월 17일 김근호씨 강화유치원장 상경 중십육일귀원
- "소식"
동아일보 1932년 8월 31일 김근호씨 강화양조주식회사 당무취체역 사무로 거일구일 상경
- "전강화정구성황 송금조가 우승"
동앙리보 1932년 8월 3일 본보강화지국주최 나산정구구락부후원의 제일회전강화개인정구선수권대회는 예정과 가티 지난 삼십일일 오전 구시반부터 남산구자에서 거행하얏다 전십오조는 회장김근호씨의 개회사가 잇슨 후 주심 박인범씨의 대회 규약과 선수의 주의사항 설명이잇슨후 개막되엇는데 오후삼시십오분 결승전에 드어가자 일반관중의 환호와 긴장미는 실로 중되엇스며 최후의 우승은 송두산, 김용운조가 벅전노장 이윤재, 박의병조를 이겨 우승하얏다 회장으로 우승기수여가 잇섯고 각조 부상수여후 폐회하엿다
- "전도촉망되는 강화산업조합"
동아일보 1933년 4월 28일 강화 산업조합은 대정 육년 십월 이십일도의 인가를 얻어 창립한 것으로 강화에서 생산되는 수십중의 산물을 취급하고 잇는 중요 기관이다. 현재 조합원 일천여명으로 업적이 조선적으로 우월하여 금번에 칠부의 배당을 하엿다 이만한 성적과 토대를 만들기에는 오로지 현리사 황우천씨의 수완과 활동의 효과라 한다.
이십삼일 강화 공보교에서 이회 정총을 마치고 이여 조합사무실로 옮겨 사무실과 창고등의 신축 락성식을 거행한 바 조합장 리원찬씨의 정중한 개회사와 황리사의 결과 보고가 잇슨 후 김근호 고천 량씨의 축사가 잇고 여춘관으로 옮겨 성대한 축하회가 잇엇다 한다
- "수얼뵤사할을 신학기부터 감하"
동아일보 1933년 3월 30일 강화유치원에서는 오는 신학기부터 보육료의 사할을 감하야 종래 오십전식 증수하든 것을 삼십전으로 감하를 단행하얏다는데 원장 김근호씨의 너그러운 힘이라한다.
- "전강화정구 우승은 박이조"
동아일보 1933년 8월 11일 강화지국주최인 제 이회 전강화개인정구선수권 대회는 예정과 같이 지난 육일 오전 구시부터 강화읍 남산구상에서 거행하였다.
대회장 김근호씨의 개회사와 작년대회 우승조의 우승기 반환식이 잇은후 경기의 막이열리엇는바 동 오후 사시경 대성황리에 끝을 막엇는데 이윤재 박의병조가 우승의월계관을 받엇다. 대회으 성황을 위하야 다음 제씨의 기증품이 잇었다. 김오원씌 삼신기선주식회사사장 유진식씨, 강화양조회사 사장 최창희씨, 강화유치원장 김근호씨 맥주일타전성록씨, 금일봉 홍재승씨
- 사진 상입장식, 하우승팀
- "강화에 전등, 전화 가설기성회조직"
동아일보 1934년 2월 1일
오랫동안 현안중에 잇든 전등 전화 가설 문제는 갈스록 일반의 기대가 많아 유지 최창희씨와 수씨의 발기로 문제를 토의하랴고 지난 입육일 오후 사시부터 강화양조회사회의실에서 군수조충현씨의 사회와 경과보고로 토의회를 열엇든바 만장일치로 기성회조직에 일치하야 초안중이던 회의규약을 통과하고 부서와 위원을 선정하엿다는데 이문제는 강화발전상 큰 문제의 하나로 금년 중에는 실현의 가능성이 잇다는데 과반 경전으로서 영업과장의 실지조사까지 잇엇다하야오랫동안 현안중의 전등, 전화가설 문제는 이로써 일단락을 보게되엇다한다. 회장 황우천/위원 김근호
- "소식"
동아일보 1934년 2월 8일 김근호씨 강화전등전화가설기 성회이사 요로당국왕방진정코 저 이월육일 상경 고천희 일랑 동상 황우천씨 동상
- "공화당 중학설치 지방주민의 환동에"
동아일보 1934년 12월 24일 공회당 중학설치지방주민의 활동에 강화도 의숙제인 중대문제 전등전화만은 겨우 완성 오랫동안 숙제중에 잇던 강화읍의 전등 전화 문제도 금년으로 전부해결을 짓게되엇다. 벌서 여러해전부터 유지들의 발기로 군내진흥책에 잇어 회합을 열때마다 강화도발전상없지 못할 여러가지 문제는 즉 일, 중학정도학교설치의 건, 일, 공회당급공설운동장의 건, 시내전등, 전화가설의 건 기타무제에 잇어 토의를 거듭하야오든바 그중의 한문제도 해결을 짓지못해 제자로서의 비소만을 받어온 것은 사실로서 전강화군수 이원찬씨 부임이후 단연히 문제에 해결을 짓기 위하야 민간유지들과 타협을 거듭한 결과 이것이 실현성을 가추게 되어 전기전화가설기성회를 조직하고 황우천 김근호씨등 교섭이원의 맹활동과 체신당국의 양해를 얻어 지난가을에 시내전화의 완성을 보고 그후 게속하야 전등가설공사를 하야오던바 지난 십구일부터 일부전등을 보게되엇다. 이로써 문명의 혜택으로의 문제등은 해결을 보앗으나 남어지문제 즉중학설립 또는 운동장과 공회당문제는 어찌될가하야 일반의 촉망은 자못 크다는 데 몇헤전 해소한 교풍회에서는 공유재산수천원을 공설운동장 기본재산으로 전부 기부하야 그의 처리도 게획중으로 멀지안흔 장래에 실현ㅇ르 띠고잇으나 다만 공회당과 중등학교문제만 남어잇는 바 이것은 오로지 지방유지등의 헌신적 활동과 일반재산가급의 각성여햐에 달린문제로 히망없는 금년의해도넘으려한다하야 일반은 큰유감으로 녁잇다한다.
- "전조선체육단체순례"
동아일보 1934년 1월 18일 강화육상 경기회
강화체육회는 강화군부내면 신문리 중앙청년회관내에 잇는데 소화육년사월에 창립되엇다. 간부는 회장이 서봉준 위우언에 김근호 홍재인, 최명식, 강흥석, 김부연제씨며 회원수는 사십명이다. 경영방침은 회원의 회비와 유지의 희사금으로 유지하여 온다. 연중행사는 강화체육계중진으로 매년일차의 전강화육상경기회를 개최하는바 참가단체가 임시단체가 대부분임. 십여로 출장선수 연인원은 칠팔백명의 다수에 달하는 성황이다. 부기 본사지국 주쵣의 전강화정구대회와 기타무명단체등의 정축구대회등이잇으나 특서할 공적이 없어 이것을 약한다.
- "강화개인정구 박이조가 우승"
동아일보 1934년 9월 7일
강화개인정구 박이조가 우승 본보강화 지국주최의 제삼회 전강화개인정구대회는 지난 이일 부내면남산구상에서 대회회장 김근호씨의 개회사가 잇은 다음에 작년우승조인 이윤재조로부터 우승기 반환이 잇고 박의병군이 선서를 한후 개막된바 그전적은 다음과 같이 박세병이 학신군에 돌아갓다
- "강화도전기금년내실현"
동아일보 1934년 3월 24일
오래전부터 숙제로 내려오는 강화도전등가설문제는 금년일월부터 급속도로 진전을 보게되여 지난 일월에 시내유지들의 망라로 전등전화가설기성회를 조직하고 활동한다함은 누보하엿거니와 관게당국에서도 이문제에잇어 신중고려한끝에 강화도의 발전을 크게깨닫고 지난 십구일부로 경전영업과 장도준일랑씨로서 당시진정위원이던 황우천김근호양씨에게 금년말까지에는 전기공급을 실현하도록 노력하겟다는 정식공문이 왓으므로 오래동안 문제이든 강화전기문제는 이로써 실현화하게 되어 지방발전도급속도로 문화의혜택을 입어 면목일신한 강화도의 융자도 금년안으로 실현을 보게되엇다하야 일반은 적지않은 기대를 가지고잇다는데 확문한바에 의하면 부평강화간의 선로연장공사에 약구만원의 공비로 오는 사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야 금년동기까지는 전등을 켜게되리라한다.
- "당선된 면협의원"
동아일보 1935년 5월 25일
강화군 부내면 김근호
- "칠만군민의 십년숙제 고보교설치운동"
동아일보 1935년 3월 5일 강화에 중등 정도의 학교를 설치하자는 문제는 발서 십여년전부터 칠만군민의 일대숙제로 나려온 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서 그후 모든 사정으로 그 실현운동에 착수를 보지 못한 것은 군내 남녀노유 빈부 계급을 막론하고 커다란 유감으로 알고잇지만 안흔 사람이없엇다 한다. 이리하야 숙제는 숙제대로 어떠한집회장소나 사랑방의 한화의 재료로 또는 문제재료로 잇엇는 이만큼 뜻잇는 인사들은 이 문제가 일종의 한화나 남의 이야기 모양으로만 잇고 그 실현운동비없음애분개하야 도리어 강화에 일군이없음을 개탄하기를 마지안어재산의전부 혹은 반분을 그 사업에 바치겟다는 유지의 수효가 만흐리만치 이사업의 실현을 갈망하고 잇는 현상으로 그 사업에 실현성을깨다른 유지제씨의발기ㅗㄹ 옛날 전 부내면 한서의원에서 유경근씨의 사회로 강화중등학교설치 간담회를 열고 토의 한 결과 만장일치로 이에 찬성을 얻고 이어지난 일일재단 오십만원을 목표로 강화중등학교 발기준비회를 조직하엿다. 이리하야 항간의 문제이며 사회적숙제이던 문제는 단체적 실현운동의 발기회를 조직할날도 앞으로 옛날이남지안허일반은 하로바삐 발기회의 출현을 바라고잇는바 발서군민들의의사는 이에 찬동하야 이곳저곳으로서 기부를 자진의뢰하는 인사까지 생기게 된것으로 보아 전도가 자못 크게 기대된다는대 발기준비회 사무소는 당분간 부내면 회의실에 두기로 하엿으며 간부씨명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유경근, 김훈태, 최창희, 장길환, 서봉준, 김근호, 최명식, 금처, 오영섭, 홍영진, 최용희, 황우천, 유지만, 외수씨
- "소식"
동아일보 1935년 3월 29일 홍재인씨 본보강화지국장 용무대하고 동경, 대판방면여행중 김근호씨 강화유치원장 동상
- "소식"
동아일보 1935년 9월 4일 김근호씨 강화합일학교경영자 고최상현씨동상건립인사차본사내방3
- "소식"
동아일보 1935년 8월 19일 김근호씨 강화유치원장 사군련 합정구대회선수인을 하고 십칠일 장단에
- "고최상현씨동상"
동아일보 1935년 9월 2일 고최상현씨 동상 삼십년간 참담한 역사를 가진 강화합일학교에서 사재칠만원을 더저 반석우에 기초를 세운후 불행히 육십삼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고합일교장 최상현씨의 동상제막식은 예정과 같이 지난 삼십일 오후 이시부터 합일교정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동상건립위원장 김근호씨의 사회로 시작되어 서봉준씨의 경과보고 황우천씨의 약력보고 김위원장과 금동창회대표의 헌납식이 끝나고 학생중으로 고최선생 생전에 사랑이 가장 깊던 학생대표 이명의 손으로 제막하니 수백관중은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ㅏ였다. 내빈으로는 본사주필 김준연씨를 비로사야 중앙여사장 조선문일평씨등 수씨의 간곡하고 의미심장한 축사가잇어 자못성황리에 오후사시 무사히 폐회하고 이어 동교 이층대강당에서 내빈위안다과해ㅚ를 개최하엿다한다. 그리하야 강화교육계 은인 고최선생의 동상은 합일교의 수호신으로 일반 추모의 집중을 보게되엇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