誠下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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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下第二

주돈이의 통서 제2장의 원문 및 朱注이다.


聖, 誠而已矣.
성인다워지는 것은 성실히 해나가는 데에 달렸을 뿐이다.
聖人之所以聖, 不過全此實理而已, 即所謂“太極”者也.
성인이 성인다워지는 이유는 이 현실의 理를 온전히 실현해서이다. [‘이 현실의 理’란] 바로 ‘태극’을 일컫는다.


誠, 五常之本ㆍ百行之源也.
성실은 주요 덕목들[五常]의 근원이자 온갖 덕행들의 원천으로,
五常, 仁·義·禮·智·信, 五行之性也.[1] 百行, 孝·悌·忠·順之屬, 萬物之象也. 實理全, 則五常不虧, 而百行修矣.
‘五常’은 仁義禮智信인데, 五行 각각에 해당하는 덕성이다. ‘百行’은 孝悌忠順 등인데, 뭇 사람들의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현실의 理가 온전히 실현되면 五常이 어긋나지 않고 百行이 잘 행해진다.


静無而動有, 至正而明達也.
静의 차원에 머물러있을 시에는 감각할 수 없으면서도 動의 차원으로 드러나 나오면 감각할 수 있으니, 아주 본원적인 것이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자 사방에 통하는 것이다.
方静而陰, 誠固未嘗無也, 以其未形, 而謂之無耳[2]; 及動而陽, 誠非至此而後有也, 以其可見, 而謂之有耳.[3] 静無, 則至正而已; 動有, 然後明與達者可見也.
멎어들어 陰이 되려 하는 경우를 보아도 誠이 본디부터 없어본 적은 없는데 다만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해서 ‘無’로 일컬은 것일 뿐이다. 움직여 양이 되고 난 경우를 보아도 誠이 그 상태에 이른 이후라야 있게 되는 건 아닌데 다만 볼(감각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有’로 일컬은 것일 뿐이다. ‘静無’의 단계란 단지 正하고 그치는 것뿐이다. ‘動有’된 뒤라야 明과 達을 볼 수 있는 것이다.


五常百行非誠, 非也, 邪暗塞也.
주요 덕목들과 온갖 덕행들은 성실히 해나가지 않으면 그릇되어, 타락하고 흐려지고 막다르게 된다.
非誠, 則五常百行皆無其實, 所謂不誠無物者也. 静而不正, 故邪; 動而不明不達, 故暗且塞.
성실히 해나가지 않으면 五常과 百行이 예외없이 본모습을 잃게 되는데 이것이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4]는 말씀의 뜻이다. 멎어들되 본연의 상태에 맞지 않으면 타락하게 되고, 움직이되 분명하지도 못하고 통하지도 못하면 흐려지고 막다르게 된다.


故誠則無事矣.
그러니까 성실히 해나가면 문젯거리가 없게 된다.
誠則衆理自然無一不備, 不待思勉而從容中道矣.
성실히 해나가면 理가 많아도 자연히 하나도 빠뜨리는 게 없게 되고 골머리 앓으며 낑낑대지 않아도 시나브로 道에 들어맞게 된다.


至易而行難.
자연스럽게 이르도록 하면 쉽게 되지만 억지로 하려 들면 해내기 어렵다.
實理自然, 故易; 人偽奪之, 故難.
현실의 理는 자연스러우므로 쉽다. 억지스러운 짓이 그것을 방해하니까 어려운 것이다.


果而確, 無難焉.
추진력있게 밀어붙이되 지킬 것은 확실히 지켜 가면서 해나가면 방해물이 없을 것이다.
果者, 陽之決; 確者, 陰之守. 決之勇, 守之固, 則人偽不能奪之矣.
‘果’는 陽적으로 드러나는 실천이고 ‘確’은 陰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지키는 바이다. 실천이 맹렬하고 지키는 바가 확고하면, 억지스러운 짓이 바른 실천을 방해하지는 않게 된다.


故曰: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이러한 맥락에서 “하루만이라도 사욕을 해소하여 禮로 되돌아가면 사람들이 仁을 다 받아들일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온 것이리라.
克去己私, 復由天理, 天下之至難也. 然其機可一日而決, 其效至於天下歸仁, 果確之無難如此.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고 해소하여 천리로 되돌아가는 것은 세상에서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 출발점 정도는 하루만에라도 결심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결심의 효과는 사람들이 仁을 다 받아들이는 데에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추진력있게 밀어붙이되 지킬 것은 확실히 지켜 가면서 한다면 방해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의 뜻도 이와 같다.


주석

  1. 五行之性也 “行”, 原作“常”, 據大全本·劉本·徐本改.
  2. 而謂之無耳 “耳”, 劉本作“爾”.
  3. 而謂之有耳 “耳”, 劉本作“爾”.
  4. <중용장구> 25장. “誠者自成也, 而道自道也ᤲ 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