蒙艮第四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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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艮第四十

주돈이통서 제40장의 원문 및 朱注이다. (끗★)


「童蒙求我」,我正果行,如筮焉。筮,叩神也。再三則瀆矣,瀆則不告也。
“어린아이가 나를 찾아와 배우면” [1] 나는(스승) 바른 도리로써 (그 어린아이가) 행동할 것을 결단해준다. [2], 마치 서죽으로 점치는 것처럼 한다. 서죽으로 점치는 것은 “신神에게 묻는 것이니, 두 번 세 번 물으면 더럽혀지고 더럽혀지면 알려 주지 않는다.” [3]
此通下三節,雜引蒙卦彖、象而釋其義。童,稚也。蒙,暗也。我,謂師也。筮,揲蓍以決吉凶也。言童蒙之人,來求於我,以發其蒙,而我以正道果決彼之所行,如筮者叩神決疑,而神告之吉凶,以果決其所行也。叩神求師,專一則明。如初筮則告,二三則惑,故神不告以吉凶,師亦不當決其所行也。
이것은 아래의 세 구절을 통틀어서 몽괘(蒙卦)의 단전과 상전을 섞어서 인용하여 그 뜻을 풀이한 것이다. 童은 어린아이이다. 蒙은 어두운 것이다. 나(我)는 스승이 된 사람을 말한다. 筮는 점치는 시초(蓍)를 나누어 길흉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어린아이가 와서 나에게 그 몽매함을 개발시켜줄 것을 구하면 그것으로 자신(아이)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면, 나는(스승) 바른 도로써 그가 행동해야 할 것을 과감하게 결정 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점치는 사람이 신에게 의심나는 것을 결정해 줄 것을 물으면, 신이 길흉을 그에게 알려주어서 그가 행동해야 할 바를 과감하게 결정해 주는 것과 같다. 신에게 묻거나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할 때, 한결같은 마음으로 해야 분명해지는 것이다. 만일 처음 점을 치면 곧 알려주지만 두 번 세 번 묻는다면 미혹되기 때문에 신은 길흉을 알려 주지 않으니, 스승 또한 마땅히 그가 실천해야 할 바를 결정해줘서는 안 된다


「山下出泉」,靜而清也。汩則亂,亂不決也。
“산 아래에서 샘이 솟으니” [4] 고요하고 깨끗하다. 그 샘을 이리저리 휘저으면 어지러워지고,어지러워져서 (물길이 막히면 선생이) 틔워주지 않는다.
「山下出泉」,大象文。山靜泉淸,有以全其未發之善,故其行可果。汩,再三也。亂,瀆也。不決,不告也。蓋汩則不靜,亂則不清。既不能保其未發之善,則告之不足以果其所行,而反滋其惑,不如不告之為愈也。
“산 아래에서 샘이 솟는다.”는 말은 몽괘(蒙卦) 대상(大象)의 글이다. 산이 고요하고 샘이 깨끗하다는 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善을 온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행동이 과감할 수 있다. 汩은 두 번 세 번 (다시) 하는 것이다. 亂은 더럽히는 것이다. 不決은 알려 주지 않는 것이다. 대개 이리저리 휘저으면 고요하지 못하고, 어지러워지면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이미 그 드러나지 않은 순수한 선善을 보존할 수 없다면 알려 주는 것이 그 행해야 할 바를 과감하게 하기에 부족하고 도리어 의혹만 더 기르게 되니,알려 주지 않은 것이 더 나은 것이 되는 것만 못하다.


慎哉!其惟「時中」乎!
삼가라! 오직 ‘時中’할 것이다!
「時中」者,彖傳文,教當其可之謂也。初則告,瀆則不告;靜而淸則決之,汩而亂則不決。皆時中也。
‘時中’이란 (몽괘) 단전의 글로, [5] 가르침이 적절한 상황에 이루어짐을 말한다. [6] 처음이면 알려주나 (두 세 번 하여)모독하면 알려 주지 않으며, 고요하고 깨끗하면 결정해 주고, 이리저리 휘저어서 어지러우면 터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들이) 모두 ‘時中’이다.


「艮其背」,背非見也。靜則止,止非為也,為不止矣。其道也深乎!
“그 등에 그친다.” [7]고 하였는데, 등은 보이지 않는 곳이다. 고요하면 그치게 된다. 그치면 작위함이 없으니, 작위함이 있으면 그치지 못한다. 그 도가 심오하다!
此一節引艮卦之象而釋之。艮,止也,背,非有見之地也。「艮其背」者,止於不見之地也。止於不見之地則靜,靜則止而無為。一有為之之心,則非止之道矣。○此章發明二卦,皆所謂「聖人之蘊」而主靜之意。
이 한 구절은 간괘(艮卦)의 상전을 인용하여 풀이한 것이다. 艮은 그침이며,背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 등에 그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삼간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삼가면 (마음이) 고요하고, (마음이) 고요하면 (사욕이) 그쳐서 작위함이 없게 된다. 하나라도 작위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간괘의) 그치는 도리가 아니다. [8] [9] ○ 이 장은 두 개의 괘가 모두 이른바 ‘성인의 깊은 온축’과 ‘고요함을 위주로 한다’는 뜻임을 드러내 밝혔다.

주석

  1. 󰡔周易󰡕, 「蒙卦」_彖. “‘몽(蒙)은 형통함’은 형통함으로써 행함이니, 때에 맞춰 행함이다. ‘내가 철부지 어린이를 찾음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가 나를 찾음’은 뜻이 호응함이다. (蒙亨, 以亨行, 時中也.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志應也.)”
  2. 󰡔周易󰡕, 「蒙卦」_象. “「상전(象傳)」에서 말하였다: 산 아래에 샘이 솟아남이 몽이니, 군자가 그것을 본받아 과감하게 행하며 덕을 기른다. (象曰, 山下出泉, 蒙, 君子以, 果行育德.) ”
  3. 󰡔周易󰡕, 「蒙卦」_彖. “처음 점치거든 알려 줌”는 강건하고 알맞음으로 하기 때문이고, “두 번 세 번 점치면 욕되게 하는 것이니, 욕되게 하면 알려주지 않음”은 몽매함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니, (初筮告, 以剛中也, 再三瀆, 瀆則不告, 瀆蒙也.)
  4. 각주 2번 참조.
  5. 각주 1번 참조.
  6. 通書, 「聖蘊第二十九」, “不憤不啟, 不悱不發, 舉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注】 説見《論語》. 言聖人之教, 必當其可, 而不輕發也. (이 말은 『논어』에 보인다. 성인의 교육방침은 반드시 적절한 경우에만 행하셨지 경솔하게 드러내지 않으셨음을 말하였다. )
  7. 󰡔周易󰡕, 「艮卦」_卦辭.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을 다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으리라.(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
  8. 󰡔易傳󰡕, 艮卦_卦辭. “사람이 그 그침에 편안할 수 없는 까닭은 욕심에서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욕심이 앞에서 끄는데 그침을 구하니 (그침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괘의 도리는 그 등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앞에 있는데 등은 등지는 것이니,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그치면 욕심이 그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어 그침이 편안할 것이다. “그 몸을 얻지 못한다(不獲其身)”는 것은 제 자신을 보지 않음이니, ‘나를 잊음[忘我]’을 이른다. ‘나’가 없다면 그칠 것이고, ‘나’가 없을 수 없다면 그칠 방도가 없다. “그 뜰을 다녀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行其庭不見其人]”는 것은 뜰이 아주 가까운 거리로 등 뒤에 있는 것이니, 아무리 가까워도 보지 못하는 것으로 ‘바깥 사물에 관계하지 않음’을 이른다. 바깥 사물을 접하지 않으면 내 속의 욕심이 싹트지 않으니, 이처럼 그쳐야 그침의 도리를 얻는 것이고, 그침에 허물이 없게 된다. (人之所以不能安其止者, 動於欲也. 欲牽於前, 而求其止, 不可得也. 故艮之道, 當艮其背. 所見者在前而背乃背之, 是所不見也. 止於所不見, 則无欲以亂其心, 而止乃安. 不獲其身, 不見其身也, 謂忘我也. 无我, 則止矣, 不能无我, 无可止之道. 行其庭不見其人, 庭除之間, 至近也, 在背, 則雖至近不見, 謂不交於物也. 外物不接, 內欲不萌, 如是而止, 乃得止之道, 於止爲无咎也.) ”
  9. 󰡔朱子語類󰡕. 유지: “‘그 등에 그친다’고 하였는데, 등은 보이지 않는 곳이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희: 이것은 단지 “예가 아니면 보지말라”는 말과 같으니,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간사한 소리와 어지러운 빛을 귀와 눈에 담아두지 않고, 음란한 음악과 사특한 예를 마음에 접하지 않는 것”이니, “그 등에 그친다”는 것은 다만 이와 같을 뿐이다. 정자는 “그 등에 그친다”는 것을 풀이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치는 것”이라 하였는데, 아마도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힘을 낭비하는 것 같다. 이른바 ‘등’이란 단지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다. 사람의 사지는 모두 움직이지만 오직 등만이 움직이지 않고 마땅히 그치는 것이다. 아래 문장의 “그쳐야 할 곳에 그친다”고 한 것을 보면, ‘지(止)’자는 ‘배(背)’자를 풀이하였으니, 그래서 “그 제자리에 그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마땅히 그쳐야 할 곳에서 그치는 것은 예컨대 “군주는 인(仁)에 머무르고, 신하는 경(敬)에 머무른다.”는 말과 같으니, 완전히 하늘의 이치뿐이어서 다시 인욕(人欲)이 없다면 안으로는 내가 있는 것도 보지 못하고 밖으로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보지 못하며, 단지 이치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등에서 그치니, 그 자신의 몸을 갖지 않고, 뜨락을 지나가면서도 그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유지> <서우의 기록에는 다르게 나온다.> (問: “‘艮其背’, 背非見也.” 曰: “這也只如‘非禮勿視’, 非謂耳無所聞, 目無所見也. ‘姦聲亂色, 不留聰明; 淫樂慝禮, 不接心術’; ‘艮其背’者, 只如此耳. 程子解‘艮其背’, 謂‘止於所不見’, 恐如此說費力. 所謂‘背’者, 只是所當止也. 人身四體皆動, 惟背不動, 所當止也. 看下文‘艮其止’, ‘止’字解‘背’字, 所以謂之‘止其所’. 止所當止, 如‘人君止於仁, 人臣止於敬’, 全是天理, 更無人欲, 則內不見己, 外不見人, 只見有理. 所以云‘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正謂此也.” 砥. <㝢錄別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