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釋同異之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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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동이지변
- 先儒謂‘儒釋之道,句句同而事事異。’今且因是而推廣之,此曰虛,彼亦曰虛,此曰寂,彼亦曰寂。然此之虛,虛而有,彼之虛,虛而無,此之寂,寂而感,彼之寂,寂而滅。此曰知行,彼曰悟修。此之知,知萬物之理具於吾心也;彼之悟,悟此心本空無一物也。此之行,循萬物之理而行之無所違失也;彼之修,絶去萬物而不爲吾心之累也。
-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유가(儒家)와 석씨(釋氏)의 도(道)는 문자의 구절구절은 같으나 구체적인 일 마다는 다르다.” [1]하였다. 지금 장차 이 말을 따라서 미루어 넓히면, 우리(儒家)가 ‘虛’라고 하면 저들도 ‘虛’라 하고, 우리가 ‘寂’이라 하면 저들도 ‘寂’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虛’는 ‘虛’하지만 있는 것이고 저들의 ‘虛’는 ‘虛’하여 없는 것이며, 우리의 ‘寂’은 ‘寂’하되 느끼는 것이고 저들의 ‘寂’은 적하여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知’와 ‘行’을 말하고, 저들은 ‘悟’와 ‘修’를 말한다. 우리의 ‘知’는 만물의 이치가 내 마음에 갖추어 있음을 아는 것이요, 저들의 ‘悟’는 이 마음이 본래 텅 비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며, 우리의 ‘行’은 만물의 이치를 따라서 행하는 것이 잘못되거나 빠뜨림이 없는 것이요, 저들의 ‘修’란 만물을 끊어버려 내 마음이 얽매이게 하지 않는 것이다.
- 此曰:“心具衆理”;彼曰:“心生萬法”,所謂‘具衆理’者,心中原有此理,方其靜也,至寂而此理之體具焉,及其動也,感通而此理之用行焉,其曰:“寂然不動,感而遂通天下之故”是也。所謂‘生萬法’者,心中本無此法,對外境而後法生焉。方其靜也,此心無有所住,及其動也,隨所遇之境而生,其曰“應無所住而生其心”。【按,此一段,出般若經,言‘應無所住’者,了無內外,中虛無物,而不以善惡是非介於胸中也,而‘生其心’者,以無住之心,應之於外而不爲物累也。謝氏解論語‘無適無莫’,引此語。】 又曰:“心生則一切法生,心滅則一切法滅”,【按,出起信論】 是也。此以理爲固有,彼以法爲緣起,何其語之同而事之異如是耶?
- 우리는 “마음속에 모든 이치가 갖추어져 있다” [2]고 하고, 저들은 “마음이 만법을 낳는다 [3]”고 하니, 이른바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원래 이 理가 있어서 바야흐로 고요한 때에 지극히 고요해지고 이 理의 體가 마음에 갖추어지며, 動하는데 이르러서는 느끼고 통하여 理의 用이 마음에서 행해지니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감(感)하여 천하의 모든 故에 마침내 통한다.” [4]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만법(萬法)을 낳는다.’는 것은 마음 가운데에 본래 이 법이 없다가 외부 상황을 대한 후에 법이 마음에 생기는 것이니 바야흐로 고요한 때에 이 마음이 머물러 있는 곳이 없고, 動하는데 이르러서는 만나는 바의 경계(境界)에 따라 생기니 “응당 주로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낳아라.”[5]라고 하였다. 【권안, 이 말은 반야경(般若經)에서 나온 것으로, ‘주착하는 바가 없음에 응한다’는 것은 안팎이 전연 없으므로 가운데가 허하여 물(物)이 없고, 선악 시비를 가슴 가운데에 두지 않는 것이고 ‘그 마음에 생긴다’는 것은 주착함이 없는 마음으로 밖에 응하여 물(物)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사씨(謝氏)가 논어의 ‘무적무막(無適無莫)’이란 글을 해석할 때에 이 말을 인용하였다. [6] 】 또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一切)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일체의 법도 사라진다.” 【권안, 기신론(起信論)에서 나왔다.】는 것이 이것이다.
- 此則曰:“酬酢萬變”,彼則曰:“隨順一切”,其言似乎同矣。然所謂‘酬酢萬變’者,其於事物之來,此心應之,各因其當然之則,制而處之,使之不失其宜也。如有子於此,使之必爲孝而不爲賊;有臣於此,使之必爲忠而不爲亂。至於物,牛則使之耕而不爲牴觸;馬則使之載而不爲踶齕;虎狼則使之設檻置阱而不至於齩人。蓋亦各因其所固有之理而處之也。
- 우리는 理가 진실로 있다고 하는데, 저들은 法이 인연을 따라 일어난다고 하니, 어찌하여 그 말은 같은데 일은 이렇게도 다른가? 우리는, “만 가지 변화를 수작(酬作)한다.[7]” 하는데, 저들은, “일체에 수순(隨順)한다. [8]” 하니 그 말은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이른바 ‘만 가지 변화를 수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사물이 올 때 마음이 그것에 응하여 각각 그 마땅한 법칙에 따라 알맞게 대처하여, 그 마땅함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 어떤 아들이 있으면, 그로 하여금 반드시 효도하게 하고 해치지 못하게 하며, 여기에 어떤 신하가 있으면 그로 하여금 반드시 충성하게 하고 난을 일으키게 하지 않는 것이다. 사물에 이르러서도 소라면 그것으로 하여금 밭을 갈되 사람을 떠받지는 못하게 하며, 말이라면 물건을 싣되 사람을 물지는 못하게 하며, 호랑이라면 함정을 만들어 사람을 무는데 이르지 못하게 하니, 대개 또한 각각의 그 고유한 이치를 따라서 대처하는 것이다.
- 若釋氏所謂‘隨順一切’者,凡爲人之子,孝者自孝,賊者自賊;爲人之臣,忠者自忠,亂者自亂。牛馬之耕且載者,自耕且載,牴觸踶齕,自牴觸踶齕,聽其所自爲而已,吾無容心於其間。佛氏之學如此,自以爲使物而不爲物所使。若付一錢,則便沒奈何佗,此其事非異乎? 然則天之所以生此人,爲靈於萬物,付以財成輔相之職者,果安在哉? 其說反復,頭緖雖多,要之,此見得心與理爲一;彼見得心與理爲二,彼見得心空而無理;此見得心雖空而萬物咸備也。故曰,“吾儒一;釋氏二,吾儒連續;釋氏間斷。”然心一也,安有彼此之同異乎?
- 석씨(釋氏)의 이른바 ‘일체에 수순(隨順)한다.’는 것은 무릇 남의 아들 된 사람의 경우에, 효자인 사람은 저절로 효를 행하고 적자(賊子)인 사람은 저절로 (부모를) 해치며; 남의 신하 된 사람의 경우는, 충신은 저절로 충성하고, 난신은 저절로 난을 일으킨다. 소나 말이 밭 갈고 물건을 싣고 하는 것은 저절로 갈고 싣고 하는 것이며, 사람을 떠받고 물고 하는 것도 저절로 떠받고 물고 하여, 저절로 되는 대로 따라갈 뿐이요, 내 마음을 그 사이에 씀이 없다. 불씨의 배움이 이와 같아서 저들 스스로가 사물을 부리기는 하되 사물에게 부림 받지는 않는다고 여겼다. 만일 돈 한 푼을 주어도 곧 그것을 어찌하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일이 다른 것이 아닌가? 그러하다면 하늘이 이 사람을 내어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고, 재성(財成)ㆍ보상(輔相)의 직책을 부여한 [9] 까닭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 설이 반복되어 실마리가 비록 많으나, 요컨대 우리는 마음과 理가 하나라고 본 것이요, 저들은 마음과 理가 둘이라고 본 것이며, 저들은 마음이 空하여 理도 없다고 보았고, 우리는 마음이 비록 空하나 만물의 理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우리 유가는 하나이고 석씨는 둘이며, 우리 유가는 연속되고 석씨는 끊어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동일하니, 어찌 우리와 저들의 같고 다름이 있겠는가?
- 蓋人之所見,有正不正之殊耳。“四大身中誰是主? 六根塵裏孰爲精? 【按,地水火風四大,和合爲一身,而別其四大則本無主。色聲香味觸法六根塵,相對以生。而別其六根則本無精,猶鏡像之有無也。】 黑漫漫地開眸看,終日聞聲不見形。”【按,以慧照用則雖黑漫漫地開眸看,暗中有明,猶鏡光之暗中生明也。】 此釋氏之體驗心處。“謂有寧有跡,謂無復何存,惟應酬酢際,特達見本根。”【按,朱子詩】 此吾儒之體驗心處。且道心但無形而有聲乎? 抑有此理存於心,爲酬酢之本根歟! 學者,當日用之間,就此心發見處體究之,彼此之同異得失,自可見矣。
- 다만 사람의 보는 것이 옳게 보았느냐 잘못 보았느냐의 다름이 있을 뿐이다. (석씨가 말하기를), “사대[四大]로 된 몸 가운데 무엇이 주된 것인가? 여섯 감관의 번뇌[六根塵] 속에 무엇이 정수가 되는가? 【안, 지(地 : 뼈) 수(水 : 피ㆍ고름) 화(火 : 온기) 풍(風 : 호흡) 이 사대(四大)가 화합하여 하나의 몸이 되었으나 그 네 가지를 따로 떼내면 본래 주(主)가 없는 것이고, 눈에 대한 빛깔과 귀에 대한 소리와 코에 대한 냄새와 입에 대한 맛과 피부에 대한 감촉이 여섯 가지[六根]의 번뇌인데 그것이 서로 대경(對境)이 되어 생기지만, 그 6근(六根)을 따로 떼내면 본래 정(精)이 없으므로, 마치 거울에 비치는 형상을 있다고 하지만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캄캄한 어두운 땅에서 눈을 떠 보라, 온종일 소리는 들리어도 형체를 볼 수 없다” 【안, 지혜로써 용(用)에 비추면 비록 캄캄한 어두운 땅에서 눈을 떠 보아도 그 캄캄한 속에 광명이 있나니, 마치 거울 빛이 어두움 속에서도 광명이 있는 것과 같음이다. 】 하였으니 이것은 불교에서 마음을 체험한 경지이다. “있다고 한들 어찌 자취가 있으랴, 없다고 하니 달리 무엇이 있으랴 오직 일상생활에서야 다만 그 근원을 알 것이다.[10]” 【안, 이는 주자의 시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우리 유학에서 마음을 체험한 경지이다. 또한 도심(道心)이란 본래 형체가 없거늘 소리가 있겠는가? 다만 이 理를 마음에 간직하여 온갖 변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배우는 자는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이 마음의 발현되는 곳에 나아가서 실제로 체험하고 궁구(窮究)한다면 그들과 우리와의 같은 점, 다른 점과 옳게 본 것과 잘못 본 것을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請以朱子之說,申言之,心雖主乎一身,而其體之虛靈,足以管乎天下之理。理雖散在萬物,而其用之微妙,實不外乎人之一心,初不可以內外精粗而論也。然或不知此心之靈,而無以存之,則昏昧雜擾,而無以窮衆理之妙;不知衆理之妙,而無以窮之,則偏狹固滯,而無以盡此心之全。此其理勢之相須,蓋亦有必然者。
- 주자의 설로써 거듭 말하건대, 마음이 비록 한 몸을 주재하지만 그 體의 허령(虛靈)함은 족히 천하의 理를 주관할 수 있고, 理가 비록 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用의 미묘(微妙)함은 실로 사람의 한 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니, 애초에 (불교에서 말하는 심의) 안과 밖, 정(精)하고 조(粗)함을 논(論)할 수 없다. 그러나 혹 이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알지 못하여 이것을 간직할 수 없다면 어둡고 뒤섞이어 뭇 이치의 묘함을 궁구하지 못할 것이요, 뭇 이치의 묘함을 알지 못하여 궁구할 수 없으면, 치우치고 막히어 이 마음의 온전함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형세가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되는 점이 있다.
- 是以聖人設敎,使人默識此心之靈,而存之於端莊靜一之中,以爲窮理之本;使人知有衆理之妙,而窮之於學問思辨之際,以致盡心之功。巨細相涵,動靜交養,初未嘗有內外精粗之擇;及其眞積力久而豁然貫通焉,亦有以知其渾然一致,而果無內外精粗之可言矣。
- 이 때문에 성인이 가르침을 베풀되,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마음의 신령스러움을 默識하게 해서 단정(端正)하고 엄숙(嚴肅)하고 정일(精一)한 가운데 있도록 하여서 理를 궁구하는 것의 근본으로 삼게하는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이치의 묘함이 있는 줄 알게 하여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는 그 사이에 궁구하여 마음을 극진히 하는 공(功)을 이룩하게 하는 것이다. 크고 작음을 서로 품고 動靜을 함께 길러갈 뿐, 처음부터 그 어느 것이 안이고 밖이고, 어느 것이 정하고 조한지를 가리지 않는 것이니, 참으로 오랫동안 힘을 쌓아 활연(豁然)히 관통하는 데에 이러서도 혼연히 하나가 되어서 말할 만한 안이고 밖이고 정하고 조함가 과연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今必以是爲淺近支離,而欲藏形匿影,別爲一種幽深恍惚、艱難阻絶之論,務使學者,莽然措其心於文字言語之外,而曰:“道必如是,然後可以得之。”則是近世佛學,詖淫邪遁之尤者,而欲移之,以亂古人明德新民之實學,其亦誤矣。朱子之言,反復論辨,親切著明,學者於此潛心而自得之可也。
- 지금 반드시 이러한 것을 천근(淺近)하고 지리(支離)하게 여겨 형체를 숨기고 그림자를 감추려 고 하여 따로 일종의 심오하고 황홀하고 까다롭고 앞뒤가 막힌 논리를 만들어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막연히 그 마음을 문자와 언어 밖에 두게 하는데 힘쓰며 말하길, “도(道)는 반드시 이같이 한 후에야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이것은 근세의 불씨의 학의 피ㆍ음ㆍ둔ㆍ사(詖淫遁邪)[11]가운데서 더 심한 것인데, 이것을 옮겨와서 옛 사람의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참된 학을 어지럽히고자 하니 그 또한 잘못이다. 주자의 말이 반복하고 변론하여 친절하게 밝혔으니, 배우는 자는 이에 대해 잠심(潜心)하여 스스로 얻어야 할 것이다.
주석
- ↑ 주자대전, 권 59. 불교가 우리 유학과 비록 비슷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이른바 “모습은 같지만 마음은 다르며 옳은 듯하면서 그르다”고 한 것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도(明道) 선생께서 “구절구절이 같고 일마다 합치되지만 같지는 않은 것”이라고 한 말씀이 진실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해가 깊지 않았다면 어떻게 감히 이렇게 판단하겠습니까? (佛學之與吾儒雖有略相似處, 然正所謂貌同心異, 似是而非者, 不可不審. 明道先生所謂句句同, 事事合, 然而不同者, 眞是有味. 非是見得親切, 如何敢如此判斷耶? )
- ↑ 孟子集註, 「盡心章句上」, 第一. “孟子曰:「盡其心者,知其性也。知其性,則知天矣。” 【注】 心者,人之神明,所以具眾理而應萬事者也。性則心之所具之理,而天又理之所從以出者也。人有是心,莫非全體,然不窮理,則有所蔽而無以盡乎此心之量。故能極其心之全體而無不盡者,必其能窮夫理而無不知者也。既知其理,則其所從出。亦不外是矣。以大學之序言之,知性則物格之謂,盡心則知至之謂也。
- ↑ 宗鏡錄, 卷第九十八. “龐居士頌云。萬法從心起。心生萬法生。生生不了有。來去枉虛行。寄語修道人。空生有不生。如能達此理。不動出深坑。”
- ↑ 周易, 「繫辭傳」, “易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 ”
- ↑ 大乘起信論, 第1卷. “…當知世間一切境界,皆依眾生無明妄心而得住持,是故一切法,如鏡中像無體可得,唯心虛妄。以心生則種種法生,心滅則種種法滅故。”
- ↑ 論語集註, 「里仁」, 第十. “子曰:「君子之於天下也,無適也,無莫也,義之與比。」” 【注】 適,專主也。春秋傳曰「吾誰適從」是也。莫,不肯也。比,從也。謝氏曰:「適,可也。莫,不可也。無可無不可,苟無道以主之,不幾於猖狂自恣乎?此佛老之學,所以自謂心無所住而能應變,而卒得罪於聖人也。聖人之學不然,於無可無不可之間,有義存焉。然則君子之心,果有所倚乎?」
- ↑ 孟子集註, 「告子章句上」, 第十一. “孟子曰:「仁,人心也;義,人路也。” 【注】仁者心之德,程子所謂心如穀種,仁則其生之性,是也。然但謂之仁,則人不知其切於己,故反而名之曰人心,則可以見其為此身酬酢萬變之主,而不可須臾失矣。義者行事之宜,謂之人路,則可以見其為出入往來必由之道,而不可須臾舍矣。
- ↑ 華嚴經, 「離世間品第三十三之二」. “佛子!菩薩摩訶薩有十種自知受記法,令彼菩薩自知受記。何等為十?所謂:一向發菩提心菩薩受記;不厭菩薩行菩薩受記;於一切劫修諸苦行菩薩受記;隨順一切佛法菩薩受記;於一切如來所說決定信向菩薩受記;具足修習一切善根菩薩受記;令一切眾生安住菩提菩薩受記;於一切善知識和合隨順菩薩受記;於一切善知識生如來想菩薩受記;守護菩提本願菩薩受記。佛子!是為菩薩摩訶薩十種自知受記法,令彼菩薩自知受記。”
- ↑ 周易, 「泰」. “「상전」에서 말하였다:천지가 서로 사귀는 것이 태(泰)이니, 임금이 그것을 본받아 천지의 도를 마름질하여 이루며, 천지의 마땅함을 도와서 백성을 돕는다. (象曰, 天地交, 泰, 后以, 財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 以左右民)”
- ↑ 주자대전, 「二詩奉酬敬夫贈言, 幷以爲別」 昔我抱氷炭 지난날 내가 얼음과 숯 같은 모순 가졌을 때, 從君識乾坤 그대를 좇아 건곤의 이치를 알았네. 始知太極蘊 처음으로 태극의 깊은 뜻 알았느니, 要眇難名論 오묘함을 말로 하기 어려웠다네. 謂有寧有跡 있다 하나 다시 무엇이 있을 것이며, 謂無復何存 없다 했으니 어찌 다시 있으리요? 惟應酬酢處 오직 술잔을 주고 받으며 응대하는 곳에서는, 特達見本根 다만 태극을 (일상생활에서야) 알게 될 것이다. 萬化自此流 온갖 조화가 여기에서 생겨나나니, 千聖同玆源 모든 성인이 이 근원을 공유하고 있네. 曠然遠莫禦 너무나 넓고 멀어 막을 수 없고, 愓若初不煩 두려워 조심하면 처음이라도 어렵지 않을 것이 云何學力微 왜 공부가 부족하다 하는가? 未勝物欲昏 물욕의 어두움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라네. 涓涓始欲達 졸졸 흐르는 냇물 비로소 이르려는데, 已被黃流呑 마침내 누런 물결 속에 삼키어졌네. 豈知一寸膠 어찌 알리오 한 치의 아교가, 救此千丈渾 천 길의 혼탁함 구하는 것을. 勉哉共無斁 힘쓰세, 함께 싫증내지 말고, 此語期相敦 이 말로 우리 함께 돈독함을 기약해보세.
- ↑ 孟子集註, 「公孫丑章句上」, 第二. “「何謂知言?」曰:「詖辭知其所蔽,淫辭知其所陷,邪辭知其所離,遁辭知其所窮。生於其心,害於其政;發於其政,害於其事。聖人復起,必從吾言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