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氏心跡之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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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심적지변

정도전불씨잡변 제5장의 원문 및 번역이다.


心者, 主乎一身之中, 而跡者, 心之發於應事接物之上者也. 故曰, ‘有是心, 必有是跡’, 不可判而爲二也. 蓋四端五典萬事萬物之理, 渾然具於此心之中, 其於事物之來, 不一其變, 而此心之理, 隨感而應, 各有攸當而不可亂也. 人見孺子匍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是其心有仁之性, 故其見孺子也, 發於外者便惻然, 心與跡, 果有二乎? 曰羞惡曰辭讓曰是非, 莫不皆然.
心은 한 몸에 主가 되고, 跡은 心이 일에 감응하고 物에 접하는 상황에서 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心이 있으면 반드시 이 跡이 있다.’고 하였으니 나누어서 두 가지로 만들 수 없다. 대개 四端·五典·萬事·萬物의 理는 완전히 이 心에 갖추어져 있어서 사물이 오는 상황에서는 마음의 변화가 일정하지 않아도 이 마음의 理가 느낌을 따라 감응하여 각각 마땅한 바가 있어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아이가 기어서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두려워 놀라서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되니 이는 그 마음에 ‘仁’의 性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아이를 보고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측은한 감정인데 心과 跡이 과연 둘이겠는가? 羞惡、 辭讓、 是非라고 말한 모두가 그러하지 않음이 없다.


次而及於身之所接, 見父則思孝焉, 見子則思慈焉, 至於事君以忠, 使臣以禮, 交友以信, 是孰使之然耶. 以其心有仁義禮智之性, 故發於外者亦如此, 所謂“體用一源, 顯微無間”者也. 彼之學, 取其心不取其跡, 乃曰, “文殊大聖, 遊諸酒肆, 跡雖非而心則是也.” 他如此類者甚多, 非心跡之判歟.
다음으로는 몸이 접하는 것까지 미치니 아버지를 보면 孝를 생각하고 자식을 보면 사랑을 생각하고 군주를 섬기는 경우에는 忠으로 하고 신하를 부리는 경우에는 禮로 하고 交友하는 경우에는 信으로 하니 이는 누가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인가? 그 心에는 仁義禮智의 性이 있기 때문에 밖에 발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이른바 “體· 用은 하나의 근원이고 顯· 微에 간격이 없다” [1]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저들의 학문은 그 心을 취하지만 그 跡을 취하지 않고 바로 말하기를 “문수보살이 술집에서 놀았는데 跡은 비록 잘못일지라도 心은 옳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이와 같은 유사한 경우가 매우 많으니 心과 跡을 구분한 것이 않은가?


程子曰, “佛氏之學, 於敬以直內則有之矣, 義以方外則未之有也. 故滯固者入於枯槁, 疏通者歸於恣肆, 此佛之敎所以隘也.” “然無義以方外, 其直內者, 要之亦不是也.” 王通, 儒者也, 亦曰, “心跡判矣”, 蓋惑於佛氏之說而不知者也, 故幷論之.
정자께서 말씀하시길 “불씨의 학문은 ‘敬以直內’에 대해서는 있었지만 ‘義以方外’ [2]는 없다. 그러므로 막히고 꽉 막힌자는(滯固) [3]은 말라버린 나뭇가지 같은(枯槁)[4] 상태로 들어가고 트인 자는 방종한 상태에 귀결되니 이것이 불씨의 가르침이 좁은 까닭이다.” [5]라고 하고 “그러나 ‘義以方外’가 없이 안으로만 바른 것은 결론적으론 그 또한 옳지 않다.”고 하였다. 왕통 [6]은 유학자인데 역시 말하기를 “心과 跡은 구별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불씨의 설에 미혹되어서 알지 못한 자인 것 같으니 때문에 아울러 논한다.


주석

  1. 󰡔伊川易傳󰡕, 「序」 “…未有不得於辭, 而能通其意者也. 至微者理也, 至著者象也. 體用一源, 顯微无間, 觀會通以行其典禮, 則辭無所不備, 故善學者, 求言必自近易, 於近者非知言者也…”
  2. 󰡔周易󰡕, 「坤卦_文言」. “곧음은 바름이고, 방정함은 의(義)이다. 군자가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으니, ‘곧고 방정하며 커서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음’은 그 행하는 바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直, 其正也, 方, 其義也.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弧, 直方大, 不習, 无不利, 則不疑其所行也. )”
  3. 󰡔한어대사전󰡕, 滯固 : 固執而不變通。
  4. 󰡔한어대사전󰡕, 5. 謂窮困潦倒
  5. 󰡔二程遺書󰡕, 卷四 “…彼釋氏之學, 於敬以直內則有之矣. 義以方外則未之有也, 故滯固者入於枯槁, 疏通者歸於肆恣,一作放肆. 此佛之敎所以爲隘也. 吾道則不然, 率性而已. 斯理也, 聖人於易備言之”
  6. 왕통(王通, 584-617), 중국 수대(隋代)의 철학가. 자는 중엄. 문인들이 '문중자'라는 시호를 붙였다. 강주 용문 사람이다. 20세 때 경세의 뜻을 가지고 수도인 장안으로 가서 수나라 문제(文帝)를 알현했다. 이때 12조의 태평책을 올렸으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고향인 용문현으로 돌아가 저술에 전념하면서 제자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는 1,000명을 넘었으며 그중에는 당나라의 문무대관이 된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당시에 이들을 '하분문하'라고 불렀다. 그는 유·불·도 3교의 합일을 주장했으며, 기본 바탕은 유학에 두었다. 저작으로는 〈中說〉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