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鄭達可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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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정달가서」에서 ‘달가(達可)’는 정몽주(1337-1392)의 자(字)이다. 이 글은 전라도 나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도전(1342-1398)이 경상도 언양으로 유배갔던 정몽주에게 쓴(1376년 봄) 편지이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첫 만남은 “1360년 10월 정몽주가 과거에서 三場(초장, 중장, 종장)을 연속해서 장원으로 급제했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진 후의 일이다. (...) 과거 준비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주자성리학을 공부하고 있던 정도전은 정몽주가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그를 찾아갔다. 정도전은 장원급제한 것을 축하하고는 민자복이 전해준 소식에 따라 자신도 신심의 학문인 성리학을 그동안 공부를 해왔노라고 말했다. 이에 정몽주는 정도전을 평생의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정몽주가 장원한 과거가 1360년에 있었으니 이때 정도전의 나이는 19살, 정몽주는 24살이었다. 이후 정도전은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을 정몽주에게 물어서 알게 되었다. 성리학을 통한 두 사람의 학문적 우정은 깊이 쌓여갔다.” [1]


異端日盛, 吾道日衰, 驅民於禽獸之域, 陷民於塗炭之中. 四海滔滔, 未有紀極, 嗚呼痛哉. 伊誰正之? 必也學術之正, 德位之達, 爲人所信服者, 然後可以正之矣. 且下民昏愚, 不知取舍. 苟有一時之達者, 闢之則去之, 倡之則和之. 此蓋但知達者之爲所信服, 而不知道之有邪正也.
이단은 날로 번성하고 우리 [유학의] 도는 날로 쇠잔해져서 백성들을 짐승과 같은 지경에 몰아넣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온 천하가 [세상의] 풍조에 휘말림에 끝이 없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이를 누가 바로 잡는단 말입니까? 반드시 학술이 바르고 덕과 지위가 높아서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자가 된 뒤에라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백성들은 어리석어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만일 한 시대의 현달한 자가 있어서 [이단을] 물리치면 [백성들도] 버릴 것이고, [그가] 제창하면 [백성들은] 부화뇌동할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이] 대개 현달한 자를 믿고 따를 줄만 알지, [그가 믿는] 도가 사특한 지, 바른 것인지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昔孟子雖窮而在下, 卒能闢楊墨尊孔氏, 而天下從之. 蓋以德達, 而其德足以信服乎天下也. 蕭衍雖昏而無知, 卒能興佛敎, 易風俗, 而天下從之. 蓋以位達, 而其位足以信服乎天下也. 孔子曰,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其是之謂歟. 自是以來, 上無賢君, 下無眞儒, 世敎陵夷, 邪說橫流. 達而在上者, 又從而倡之, 嗚呼, 其弊有不可勝言者矣.
옛날에 맹자는 비록 곤궁하여 낮은 자리에 있었지만 마침내 양주와 묵적을 물리치고 [2] 공자를 높일 수 있게 되자, 천하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이는 맹자의] 덕이 뛰어나서 그 덕이 천하 [사람들을] 믿고 따르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풍속을 바꾸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지위가 높아서 그 지위가 천하 [사람들을] 믿고 따르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니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풀은] 눕는다” [4] 라고 하셨으니 이를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후로 위로는 어진 임금이 없었고, 아래로는 참된 유자가 없어서 세상의 교화는 점점 쇠해지고 삿된 설이 횡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현달하여 윗자리에 있는 자 마저도 [삿된 설을] 제창하였으니, 아! 그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及宋之盛, 眞儒迭興, 挾遺經繼絶統, 扶斯道闢異端, 而學者靡然從之. 斯亦以德達, 而爲人所信服故也. 惜乎, 有德無位, 不能大行於世, 永絶邪說之根本也. 然而中國學士, 尙賴其說, 莫不以扶斯道闢異端爲己任, 雖其弊之深也, 不能遽絶, 尙可望夫斯道之復振也.
[그러다가] 송나라가 융성하게 되면서 참된 유자들이 번갈아 일어나 [성인이] 남긴 경전을 옆에 끼고 끊어진 도통을 계승하여 유학의 도[斯道]를 붙들고 이단을 물리치자 학자들이 휩쓸리듯 따랐습니다. 이 역시 [그들의] 덕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그들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은] 덕만 있었고 지위는 없었기에 [도를] 세상에 크게 행하여 삿된 설의 뿌리를 완전히 뽑지는 못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학사들은 그래도 [참된 유자들의] 설에 힘입어서 유학의 도를 붙들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신들의 책임으로 삼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비록 그 폐단이 심하여 [삿된 설을] 단번에 끊어내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유학의 도가 다시 펼쳐질 것을 바랄 수는 있게 되었습니다.


若東方則其弊尤甚, 人皆好之篤而奉之謹. 又號爲大儒者, 反爲讚誦歌詠, 助揚聲勢, 鼓舞振動. 彼下民之昏愚, 惟從達者之好者爲如何也? 於是, 先王之學, 寂寥無聞, 耳目所接, 無非異端, 襁褓孩兒, 學語之始, 卽誦其言, 嬉戲之時, 便設其儀, 習與性成, 恬不知非, 邪與心熟, 堅不可破.
우리 동방은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 사람들은 모두 [삿된 설을] 독실하게 좋아하고 근실하게 받들고 있습니다. 또 ‘대유(大儒)’라고 불리는 자들까지도 도리어 [이를] 찬송하고 노래하여 [삿된 설의] 명성과 위세를 고양시켜 [그 성세가] 소란하게 떨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뛰어난 자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따르는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이 날에 선왕의 학문은 적막해져 들리지가 않고, 귀와 눈이 접하는 것은 이단이 아닌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포대기에 싸인 어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에도 그 [이단의] 말을 배우고, 즐겁게 놀 때에도 문득 그 [이단의] 태도를 행하니, 습관이 성품으로 이루어져 그른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삿된 것이 마음에 익숙해지고 단단해져서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雖聰明之士, 眩惑其空玄, 暴悖之人, 喜懼其禍福, 莫不尊奉依歸. 毀倫滅理, 風俗頹敗, 傾家破產, 父子離散, 其禽獸之歸, 塗炭之苦, 亦不可旣矣. 幸玆秉彝, 極天罔墜, 雖在波頹之中, 尙有一二明經之士, 深知其害, 竊議而私歎之, 往往辨之於人, 則或有所聽信而開悟之者, 是理義之心, 人皆有之矣. 然下焉不尊, 民卒不從.
비록 총명한 선비라 할지라도 그 [이단의] 공허하고 현묘함에 현혹되었고, 사납고 패악한 사람들은 그 화복[의 설]을 좋아하기도, 또 두려워하기도 해서 높이 받들어 의지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윤리를 무너뜨렸으므로 풍속은 쇠퇴해졌고, 가세가 기울어 파산하여 아비와 아들이 헤어지고 있으니 짐승과 같이 되어 도탄의 고통을 또한 끝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람의 본성은 하늘이 다할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비록 혼란한 상황 속일지라도, 오히려 경륜을 밝히는 선비가 한 둘은 나와서 그 [이단의] 폐해를 깊이 깨닫고 가만히 생각하며 혼자 통탄하다가 이따금 사람들에게 [이단과 정도를] 분별해주면 간혹 [그 말을] 듣고서 믿어 깨우치게 되는 자가 있었으니, 이는 의리의 마음을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선비의 지위가] 높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끝내 따르질 않았습니다.


及與爲佛者辨之, 則彼亦有是心, 自知其非, 屢至辭窮. 然恥爲之屈, 惟務自勝. 援引公卿之尊奉, 大儒之讚誦, 以折辨者. 乃曰, 夫豈不義而某公信之? 以某公之位之德, 而尊奉讚誦如此, 汝反非之, 汝能賢於某公歟? 辨者若曰, 位爲公卿, 而於道有不學, 號爲大儒, 而於學有不正. 但當質諸本心, 辨其邪正而已, 豈以某公之故, 而遽以此爲是云爾, 則爲有說矣. 然此不惟獲以下訕上之罪, 人反不信, 以爲狂妄, 譏笑毀謗, 使無所容. 辨者默然無言. 彼爲佛者, 意氣洋洋, 自以爲吾說勝也.
부처를 믿는 자와 [옳고 그름을] 논변해보면, 저들도 이 [의리의] 마음을 지녔기에 스스로 그 그릇됨을 알아서 자주 말[의 논리가] 궁해집니다. 그러나 굴복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힘써 이기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경(公卿)들이 높여 받들고, 대유들이 [이단을] 찬송하는 말을 끌어다가 [상대] 변론자[의 말을] 꺾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어찌 의롭지 않은 일인데, 모공(某公)께서 믿으시겠는가? 모공의 지위와 덕으로도 높여 받들고 찬송하는 것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도리어 [佛道를] 그릇되다고 여기니, 그대가 모공보다 낫다는 말인가?”라고 말합니다. [상대] 변론자가 만약 “지위는 공경이 되었어도 도에 관해서는 배우지 못했거나 ‘대유’라고 불리어도 학문에 있어서는 바르지 못함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본심에서 판단하여 삿됨과 바름을 분별해야 할 따름이지, 어찌 모공이 [믿는다는] 이유로 덮어놓고 이를 옳다고 하겠는가?”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비방한 죄를 얻게 될 뿐 아니라, 사람들이 도리어 믿지 않고 미쳤다고 여기며 비웃고 헐뜯기에 받아들여질 곳을 없게 합니다. [그래서] 변론자는 [불자의 반론을 듣고도] 잠자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 부처를 믿는 자들은 의기가 양양해져 스스로 ‘나의 말이 이겼다’고 여기게 됩니다.


是知異端之邪, 不可以口舌爭也, 下民之惑, 不可以義理曉也, 惟其學術之正, 德位之達, 爲人所信服者然後可以正矣. 吾友達可其人也. 達可雖無其位, 達可之學, 學者素服其正也, 達可之德, 學者素服其達也. 以予昏庸, 不恤譏議, 慨然有志於闢異端者, 亦以達可爲之依歸也. 天生達可, 其斯道之福歟.
여기에서 이단의 삿됨을 입으로는 다툴 수가 없고, 백성들이 현혹된 것을 의리(義理)를 가지고 깨우칠 수 없으며, 오직 학술이 바르고 덕과 지위가 뛰어나서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된 뒤에라야 [그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벗 달가(達可)가 적격자입니다. 달가가 비록 그만한 지위는 없다고 해도 달가의 학문을 학자들은 평소에 바르다고 감복하였고, 달가의 덕을 학자들은 평소 뛰어나다고 감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어리석음으로도 [세상의] 조롱을 아랑곳하지 않고, 분개하여 이단을 물리치는 데 뜻을 둔 것도 달가를 의지처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달가를 내심은, 우리의 도에 복인가 합니다.


近聞往來之言, 達可看楞嚴, 似佞佛者也. 予曰, 不看楞嚴, 曷知其說之邪? 達可看楞嚴, 欲得其病而藥之, 非好其道而欲精之也. 旣而私自語曰, 吾保達可必不佞佛. 然昌黎一與太顚言, 後世遂以爲口實, 達可爲人所信服, 其所爲繫於斯道之廢興, 不可不自重也. 且下民昏愚, 易惑難曉, 達可幸思之.
[그런데] 요즘 떠도는 말을 들으니, “달가가 󰡔능엄경󰡕을 보니 부처에게 아첨하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나는 “󰡔능엄경󰡕을 보지 않으면 어찌 그 [불교의] 설이 사특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달가가 󰡔능엄경󰡕을 보는 것은 그 병통을 파악해서 치료를 하고자 하는 것이지, 그 [불교의] 도를 좋아하여 정진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후 나는 혼잣말로 “나는 달가가 분명 부처에게 아첨하지 않는 것임을 확신한다. 하지만 한유가 [승려인] 태전(太顚)과 한 번 이야기한 것이 후세에 [비난의] 구실이 된 것을 보면 [5], 달가는 사람들이 믿고 따르니, 그 행동은 우리 도의 흥폐와 관계되므로 자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은 어리석어서 미혹되기는 쉽고 깨우치기는 어려우니 달가는 부디 [이를] 헤아리시길 바랍니다.


주석

  1. (박홍규, 󰡔(정치학자 박홍규 교수가 만난) 삼봉 정도전: 생애와 사상󰡕(서울: 선비), 2016, 90-92쪽)
  2. 󰡔孟子󰡕 「滕文公 下」 9章.“聖王不作, 諸侯放恣, 處士橫議, 楊朱墨翟之言盈天下, 天下之言, 不歸楊則歸墨, 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 公明儀曰, 庖有肥肉, 廐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 楊墨之道不息, 孔子之道不著, 是邪說誣民, 充塞仁義也, 仁義充塞, 則率獸食人, 人將相食, 爲此懼,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 作於其心, 害於其事, 作於其事, 害於其政, 聖人復起, 不易吾言矣.”
  3. [양나라 무제] 소연(蕭衍)은 비록 어리석고 아는 것은 없었으나 마침내 불교를 진흥시켜 “梁 武帝(464-549)는 天監 원년(502) 4월 8일 황제에 즉위, 侯景의 난 이후 549년 굶어 죽기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梁을 통치했다. 중국 역사상 그의 통치는 유례없이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소현숙, 「양 무제의 불교정책」, 󰡔韓國古代史探究󰡕 제2권, 2009, 126-127쪽)
  4. 󰡔論語󰡕 「顏淵」 19章.
  5. “한유는 불교를 극력 반대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지만 그의 시문에는 많은 승려들과 교유한 글들이 보인다. (...) 후세에 많은 의론을 불러일으킨 太顚禪師와의 관계를 살펴보겠다. 韓愈가 <論佛骨表>로 인해 潮州로 좌천된 후, 그는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太顚禪師를 영접하면서 ‘오래전부터 도와 덕을 갖추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간절히 뵙기를 원했습니다’, ‘만일 잠시라도 뵐 수 있다면 실로 큰 행복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광대하고 심회함을 보이시고’, ‘말씀이 무척 해박하십니다’ 등등의 말을 한 것으로 보아 韓愈가 太顚禪師에 대해 비교적 숭앙하였고 왕래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금방 韓愈의 친구 孟簡에게 알려졌으며, 孟簡은 매우 불만스러워 편지로 이 일을 물으니, 한유는 답장에서 그 말을 얼버무렸다. (...) 韓愈가 비록 이처럼 해명했지만 여러 사람들의 의심을 풀지는 못했다. 예를 들면, 宋代의 周敦頤는 ‘퇴지는 자기가 스스로 夫子같다고 하면서, <原道>에서 석가와 노자가 틀렸다고 심히 배척했는데, 太顚이 누구와 비슷하다고 몇 통의 편지를 진중히 여기고 더욱이 의복까지 남겼는지 알 수 없다’고 했고, 歐陽修는 韓愈가 太顚禪師에게 보낸 편지 세 통이 후인의 僞作이 아니라고 여겼으며, 蘇軾은 이를 후인의 假托이라고 여겼다. 이에 대해 朱熹는 <韓文公與太顚書>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고증을 하면서 ‘韓公의 글은 타인이 지을 수 있는 글이 아니라’라고 하면서 僞作이 아니라고 했다. (...) 韓愈는 여러 부류의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한편으로는 불교를 반대하여,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 때문에 후세 사람들의 비평을 받았다.” (고팔미, 「한유 시와 불교와의 관계」 󰡔중국학󰡕 제31집, 2008, 318-3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