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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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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24일 (수) 21: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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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내가 대학원 박사 때 (황순원) 선생님께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는 좀 나오시기 힘이 들어서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서 수업했어요."[1]


청량리 신현대아파트

  • 아파트가 노후해서인지 바퀴벌레가 많이 나온다.
  • 주로 여름에 바퀴벌레의 출몰 빈도가 잦아진다.
  • 각 세대와 화단에 정기적으로 방역을 실시하고 있다. 화단에 방역을 하면 화단에 살고 있던 외부 바퀴벌레가 집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 매주 목요일이 분리수거일이다.
  • 각 세대별로 음식물 쓰레기 양을 측정하는 RFID 종량제 시스템이 없다.
  • 일주일에 한 번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계란빵을 파는 아저씨가 온다. 계란빵은 1000원인데 아주 맛있다.
  • 아파트 바로 앞에 GS25가 위치해 있어 편의성이 좋다.

아파트 단지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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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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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1.jpg구조2.jpg

쉐어하우스

  • 경희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쉐어하우스가 들어서 있다.
  • 여성전용 쉐어하우스인 '휴먼 쉐어하우스'가 2동과 5동에 각각 하나씩 자리잡고 있다.

부동산 가치


▲ 청량리 신현대아파트의 부동산 상담 동영상[2]


최근 1개월 간 실거래 기준 가격 (2020.06. 기준)
23평
(54세대)
공급 77㎡ 매매 5억 800
전용 56㎡ 전세 2억 7,500
26평
(100세대)
공급 86㎡ 매매 5억 8,500
전용 60㎡ 전세 2억 6,750
27평
(100세대)
공급 90㎡ 매매 6억 4,900
전용 72㎡ 전세 4억 8,000
32평
(482세대)
공급 106㎡ 매매 7억 5,000
전용 85㎡ 전세 3억 5,881


황순원 관련 인터뷰

서덕순,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

서덕순: (전략) 대학원 수업은, 내가 대학원 박사 때 그 선생님께 수업 들었는데 그때는 좀 나오시기 힘이 들어서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서 수업했어요.

박도현(인터뷰어): 아, 선생님 댁으로요?

서덕순: 네. 선생님 댁이 어디였느냐면, 처음에는 학교에서 가까웠어요. 학교에서 가까운 거기…. 지금 그 시조사 뒤쪽에 현대아파트가 있어요. 그쪽이었어요. 원래, 처음에는. 그러다가 나중에는 사당동으로 이사를 하셨어요. 사당동 가서도 우리가 수업 몇 번 했어요. 선생님이 그러시니까 격주로 수업하시고, 이번 주 했으면 한 주 쉬고 다음에 하시고…. 대학원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어요. 한, 10명 안쪽이었기 때문에 그냥 뭐 음료수 같은 거 가지고 가서 쪼롬히(*나란히) 앉아서 수업 듣고 오고 그랬었어요. 그리고 사모님이 이렇게 떡이나 다과 이런 거 내주시고 그러셨어요. (후략)


각주

  1. 서덕순,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
  2. 집사면 흥하리, '[부동산 상담] 동대문구 청량리 신현대아파트 보유할까? 매도할까?', Youtube, 2019.08.01.,



황순원의 「곡예사」에서는 주인공 나(황순원)와 그 가족들이 등장한다. 가족들이 함께 피난을 왔다는 점에서 「밀다원 시대」의 이중구와 같이 가족과의 생이별한 슬픔은 없지만 잠잘 곳을 구하지 못하는 생활의 고통을 겪는다(황순원, 2012). 곡예사의 주무대는 임시 거처인 토성동 경남중학교 뒤쪽의 변호사 집이다. 방을 비우라는 변호사 가족들의 고압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갈 데 없는 피난민 신세인 황순원 가족들은 애걸하면서 하루 하루를 버틴다. 황순원의 아내는 남은 옷가지를 팔러 국제시장에 장사를 나가며, 첫째 아이인 동아와 둘째 아이인 남아는 서면까지 가서 미군들을 상대로 껌과 담배를 파는 장사를 한다. 몰락하는 자신의 신세가 애처로웠지만 부민동 개천둑에서 막내인 철부지 진아가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황순원은 자신의 가족들이 임시수도 부산을 무대로 재주를 부리는 곡예사임을 떠올린다. 이처럼 곡예사에 등장하는 장소는 변호사집, 부둣가, 국제시장, 동아극장 앞거리, 부민동 개천둑으로서 밀다원 시대의 이중구가 활동한 권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벌써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내는 남은 옷가지를 갖고 국제시장으로 나가고, 큰애 둘은 서면에 가서 미군부대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오만 원도 아내의 장삿돈에서 떼낸 돈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다. 나는 학교 나가는 날은 학교로 해서, 그렇지 않은 날은 아침에 직접 남포동 부모가 계신 곳에 가 하루를 보낸다. 이곳 피난민들은 대개 담배장사를 하느라고 애들만 남기고 모두 나간다. 부모도 그 축의 하나였다. 나는 여기서 서면 간 내 큰애들이 돌아오길 기다려 국제시장엘 들러 애들 엄마를 만나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한 일과였다. 그날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