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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9일 (화) 22: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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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홀.jpg

개관

퍼시픽홀은 워커힐 호텔 안에 위치한 나이트클럽, 슬롯머신[1], 수영장·볼링장이 모여 있었던 공간을 통칭한다. 그 중에서도 '워커힐 퍼시픽 나이트클럽'[2]은 1963년 4월 8일 워커힐호텔의 개관일부터 '워커힐 쇼'가 열렸던 최초의 극장식당이다. 퍼시픽홀의 무대 설계는 김희춘이 맡았다. 그는 퍼시픽 나이트클럽 무대 장치를 설계할 때는 미국과 일본에 직접 방문해 시설을 참고했다고 증언한다. 무대는 앞 부분을 둥글게 하고 무대 맨 뒤에 좌우로 이동하는 슬라이딩 장치와 무대 한가운데에 상하로 올라갔다 내려가며 회전하는[3] 이중무대로 가설했다. 이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무대였으며, 오케스트라 피트가 침하하는 기능과 객석 곤돌라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일반 극장에서 찾아보기 힘든 최신 구조였다.

퍼시픽홀의 무대공연은 호텔쇼 전용이었고, 하니비쇼단의 무대였다. 객석은 2층 구조로 되어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무대를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나이트클럽에 가까운 무대였기에 쇼가 끝나면 손님들이 내려와서 춤을 추는 사교공간의 기능을 겸했다.

변천사

연도에 따라 퍼시픽홀은 명칭을 달리한다.

  • 1960년대(탄생기): 퍼시픽 나이트클럽

현대무용과 외국가수 초청 공연

  • 1970년대(전개기): 퍼시픽홀

민속, 현대무용

  • 1980년대(발달기): 가야금 극장식당

민속쇼, 외국쇼

  • 1990년대(중흥기): 민속쇼, 외국쇼

민속쇼, 외국쇼

  • 2000-2012(쇠퇴기): 워커힐 시어터

민속공연, 외국쇼, 한국전통단일

워커힐 쇼

  • 워커힐 쇼는 1963년 개관과 동시에 시작되어 2012년 막을 내렸다. 워커힐 하니비 쇼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국내 공연관광의 시초이자 국내 최초의 호텔쇼였다.
  • 퍼시픽홀 시대의 워커힐 쇼는 외국쇼와 국내 무용수·연예인의 공연으로 편성되었다. 당시 외국쇼의 주요 공연자는 개관기념 공연을 한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하여 수전 베럿, 밀스 브러더스 등이었다. 국내 무용수의 공연은 민속무용과 현대 무용으로 편성되었고 윤복희, 김상희, 패티 김, 정훈희 등이 이 시기 워커힐 무대를 거쳐간 유명 연예인들이다.
  • 워커힐 쇼는 서커스나 마술쇼, 외국 무용수들과 민속 무용수들의 군무 등 다양한 공연예술을 선보임으로써 TV 수상기가 없었던 당대에 가장 대표적인 문화 보급로의 역할을 했다.
  • 관객은 유엔 주한군, 미국인 관광객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내국인은 정부 고위급 인사나 외국인이 초대했을 경우에만 입장 가능했다. 각 부처 장관들은 연말연시에 연례행사처럼 국장급 이상 간부를 부부동반으로 하니비 쇼에 초대하였다.
  •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에서는 1960년대 워커힐 쇼장의 무대와 식당 및 여러 무대 장치와 소품을 관람할 수 있다.


각주

  1. 미8군을 제외하고는 최초로 생긴 슬롯머신이었다.
  2. 호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약칭 'PTR'로 불렸다.
  3. 리볼빙 스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