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최서해의 「담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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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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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나는 이 글을 쓰려고 종이를 펴놓고 붓을 들 때까지 ‘담요’란 생각은 털끝만치도 하지 않았다. 꽃 이야기를 써 볼까, 요새 이 내 살림살이 꼴을 적어 볼까, 이렇게 뒤숭숭한 생각을 거두지 못하다가, 일전에 누가 보내준 어떤 여자의 일기에서 몇 절 뽑아 적으려고 하였다. 그래 그 일기를 찾아서 뒤적거려 보고 책상과 마주 앉아서 펜을 들었다. ‘○○과○○’라는 제목을 붙여 놓고 몇 줄 내려쓰노라니, 딴딴한 장판에 복사뼈가 어떻게 박히는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놈이 따끔따끔해서 견딜 수 없고, 또 겨우 빨아 입은 흰 옷이 까만 장판에 뭉개져서 걸레가 되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다.  
 
{{Blockquote|나는 이 글을 쓰려고 종이를 펴놓고 붓을 들 때까지 ‘담요’란 생각은 털끝만치도 하지 않았다. 꽃 이야기를 써 볼까, 요새 이 내 살림살이 꼴을 적어 볼까, 이렇게 뒤숭숭한 생각을 거두지 못하다가, 일전에 누가 보내준 어떤 여자의 일기에서 몇 절 뽑아 적으려고 하였다. 그래 그 일기를 찾아서 뒤적거려 보고 책상과 마주 앉아서 펜을 들었다. ‘○○과○○’라는 제목을 붙여 놓고 몇 줄 내려쓰노라니, 딴딴한 장판에 복사뼈가 어떻게 박히는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놈이 따끔따끔해서 견딜 수 없고, 또 겨우 빨아 입은 흰 옷이 까만 장판에 뭉개져서 걸레가 되는 것이 마음에 걸리었다.  
  
[https://www.youtube.com/embed/Ngn-F7OS8Ng 따스한 봄볕이 비치고] 사지는 나른하여 졸음이 오는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신경이 들먹거리고 게다가 복사뼈까지 따끔거리니 쓰려던 글도 써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기일이 급한 글을 맡아 놓고, 그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한 계책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별 계책이 아니라 담요를 깔고 앉아서 쓰려고 한 것이다. 담요야 그리 훌륭한 것도 아니요, 깨끗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나마 깔고 앉으면 복사뼈도 따끔거리지 않을 것이요, 또 의복도 장판에서 덜 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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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봄볕이 비치고 [https://m.post.naver.com/viewer/image.nhn?src=https%3A%2F%2Fpost-phinf.pstatic.net%2FMjAxODAyMDhfMjQw%2FMDAxNTE4MDE2NjE2Mzc4.2RVw1R0AlwoalJmuJpm-jc19A189ZUnURHyOYNbhzSgg.EW0kvN386uc7AYIqPmeEFBHhHju8DSDVwr0wvz4M1s4g.JPEG%2Fimage_651442841518016608553.jpg 사지는 나른하여 졸음이 오는데],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신경이 들먹거리고 게다가 복사뼈까지 따끔거리니 쓰려던 글도 써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기일이 급한 글을 맡아 놓고, 그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한 계책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별 계책이 아니라 담요를 깔고 앉아서 쓰려고 한 것이다. 담요야 그리 훌륭한 것도 아니요, 깨끗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나마 깔고 앉으면 복사뼈도 따끔거리지 않을 것이요, 또 의복도 장판에서 덜 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불 위에 접어놓은 담요를 내려서 네 번 접어서 깔고 보니, 너무 엷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펴서 길이로 세 번 접고 옆으로 세 번 접었다. 이렇게 좁혀서 여섯 번을 접을 때, 내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생각과 같이 내 눈앞을 슬쩍 지나가는 그림자가 있다. 나는 담요 접던 손으로 찌르르한 가슴을 부둥켜 안았다. 이렇게 멍하니 앉은 내 마음은, 때(時)라는 층계를 밟아 멀리멀리 옛적으로 달아났다. 나는 끝없이 끝없이 달아나는 이 마음을 그대로 놓쳐버리기는 너무도 아쉬워서 그대로 여기에 쓴다. 이것이 지금 '담요'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 동기이다.  
 
이불 위에 접어놓은 담요를 내려서 네 번 접어서 깔고 보니, 너무 엷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펴서 길이로 세 번 접고 옆으로 세 번 접었다. 이렇게 좁혀서 여섯 번을 접을 때, 내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생각과 같이 내 눈앞을 슬쩍 지나가는 그림자가 있다. 나는 담요 접던 손으로 찌르르한 가슴을 부둥켜 안았다. 이렇게 멍하니 앉은 내 마음은, 때(時)라는 층계를 밟아 멀리멀리 옛적으로 달아났다. 나는 끝없이 끝없이 달아나는 이 마음을 그대로 놓쳐버리기는 너무도 아쉬워서 그대로 여기에 쓴다. 이것이 지금 '담요'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 동기이다.  

2019년 10월 6일 (일) 19: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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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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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서해, 『담요』(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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