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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二十五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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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韶盡善, 武未盡善, 孔安國以來, 以受禪征伐分其優劣, 而美善無明解. 朱子據邢昺, 以美爲聲及舞之美, 善爲美之實, 果其言之是乎? 武爲實不足, 而外飾聲容之美也. 且所謂美之實者, 將何以見之? 其說以揖遜放伐言之, 則不關樂, 但就舜武行事斷之也. 且不及夏濩<ref>夏는 우임금의 악명이고, 濩는 탕왕의 악명이다.</ref>, 而止舉韶武, 亦何意也? 且揖遜獨爲盡善, 則夏傳子者謂何? 放伐必爲未盡善, 則何遺濩也? 要之後世儒者不識聖人與道, 忽見孟子性之身之<ref>「孟子」, “堯舜, 性之也, 湯武, 身之也, 五霸, 假之也.</ref>等言, 妄生優劣, 轉以解此章者已. 夫善美皆謂樂, 何關舜武行事哉? 蓋美誠聲容之美, 然亦德之美矣. 微德之美, 何以形諸聲容哉? 和正以廣, “極乎天而蟠乎地”<ref>「樂記」, "及夫禮樂之, 極乎天而蟠乎地(...)"</ref>, 泱泱渢渢, 熙熙乎以盛, “洋洋乎盈耳<ref>「論語」, “師摯之始, 關雎之亂, 洋洋乎盈耳哉.”</ref>, 是謂之美. 故美者以其大者言之也.<br/> | ||
+ | '韶는 지극히 좋고 武는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에 대해서, 공안국 이래로 선양받은 것과 정벌한 것으로 그 우열을 가르는 외에 아름다움과 좋음에 대한 분명한 풀이가 없었다. 주자는 형병에 근거하여 아름다움을 소리와 춤의 아름다움으로 여겼고 좋음을 아름다움의 실질로 여겼는데, 과연 그 말이 옳은가? 武가 실질이 부족하여 외적으로 소리와 용모의 아름다움을 꾸몄다면 또한 소위 아름다움의 실질이라는 것은 장차 무엇으로 보여지는 것인가? 그 설명이 사양하는 것이나 쫓아 벌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음악과 관계가 없고 다만 순임금과 무왕의 일을 행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한 夏나 濩를 언급하지 않고 韶와 武를 거론하는 데 그친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또한 사양하는 것이 유독 지극한 훌륭함이라면 夏의 아들에게 전한 것은 무엇이라 하겠는가? 쫓아 벌하는 것이 반드시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면 어찌 濩를 버려두었는가? 요컨대 후세의 유자들은 성인과 그 도를 알지 못하고 문득 맹자의 '性之', '身之' 등의 말을 보고서 망령되이 우열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이것으로 이 장을 풀이하였을 뿐이다. 대저 아름다움과 좋음은 모두 음악을 말한 것인데 어찌 순임금과 무왕이 일을 행한 것과 관련되었겠는가? 대개 아름다움은 실로 소리와 용모의 아름다움이지만 또한 덕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덕의 아름다움이 없다면 어찌 소리와 용모에 형상이 있겠는가? 조화롭고 바름으로써 넓어져서, "하늘에 다하고 땅에 서리며", 물소리 콸콸 흐르고, 밝고 밝아 성대해지며, "한없이 퍼져 귀에 가득하니", 이것이 이른바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그 큰 것을 말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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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善歌, 善舞, 善琴, 善笛, 皆以善言之, 善豈外聲容乎? 一事一節之細, 莫不曲當, "律小大之稱, 比終始之序," "使親疎貴賤長幼男女之理, 皆形見於樂,"<ref>「樂記」, "律小大之稱, 比終始之序, 以象事行, 使親疎貴賤長幼男女之理, 皆形見於樂, 故曰樂觀其深矣.</ref> 是謂之善. 故善者以其小者言之也. 聖人之作樂, 豈躬自作之? 亦必有后夔之倫爲之輔. 古今人才之盛, 唯虞與周. 故四代之樂, 韶武獨盡美焉耳. 至於武之未盡善, 則有司之失傳也. 不然, 周工之不及后夔也. 「樂記」曰, “聲淫及商何也? 對曰, 非武音也. ”子曰, ‘若非武音, 則何音也’? 對曰, ‘有司失其傳也. 若非有司失其傳, 則武王之志荒矣. ’子曰, ‘唯!丘之聞諸萇弘, 亦若吾子之言. ”是武未盡善之說也.<br/> | ||
+ | 노래를 잘 한다, 춤을 잘 춘다, 가야금을 잘 탄다, 피리를 잘 분다는 모두 善으로 말하는 것이니 善이 어찌 소리와 용모의 외적으로 꾸미는 것이겠는가? 일 하나 마디 하나의 세밀함도 곡진하고 마땅하지 않음이 없으니, "작고 큰 것의 무게를 조율하고, 처음과 끝의 차례를 비견하며", "친소와 귀천과 장유와 남녀의 이치를 모두 음악에 나타나도록 하게 하면", 이것이 이른바 좋음이다. 그러므로 좋음이란 그 작은 것을 말한 것이다. 성인이 음악을 만듬에 어찌 그 스스로 만들었겠는가? 또한 반드시 후기의 무리가 도왔을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재가 많았던 때는 오직 우나라와 주나라이니 그러므로 사대의 음악 중에서 韶와 武가 유독 그 아름다움이 지극하였을 따름이다. 武가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는 말은 유사가 전승을 잃어버림을 말한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주나라의 악공이 후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악기」에 이르기를, "소리의 탐욕스러움이 상나라에 미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답하기를, "武의 소리가 아닙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만약 武의 소리가 아니라면 무슨 소리입니까?", 대답하기를, "유사가 그 전승을 잃었습니다. 만약 유사가 그 전승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무왕의 뜻이 황폐해진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 제가 장홍에게 들었는데 또한 그대의 말과 같았습니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武가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는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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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二十六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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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居上不寬”章, 朱註爲得之. 言本立而其所行得失可得而觀也. 本之不立, 雖有善, 不足觀耳. 觀政, 觀禮, 觀喪, 古有此事, 觀其得失, 善者效之, 不善戒之也. 蓋寬者謂有容也. 一國之君子, 蓄一國之民, 天下之君子, 蓄天下之民, 唯寬也有所容焉. 有所容焉, 而後群下得措其身焉. 然後有所養而安焉. 故寬者仁之本也. 不曰仁者, 仁至矣, 不仁至矣. 苟不仁邪, 尙何須觀也? 不曰慈惠者, 慈惠而不寬者有之, 未有意而不慈惠者也. 聖人之言, 如遠而實近者, 如是邪. 禮以敬爲本, 敬天與祖宗也. 後儒或以寬假或以主一無適爲解者, 皆不識古言也, 不識聖人道也. 臨喪者吾臨他人之喪也. 臨他人之喪, 必哭, 故或謂哭爲臨. <br/> | ||
+ | "윗자리에 있으면서 관용하지 않고"에 대하여, 주자의 주석이 뜻을 얻었다. 주석에서 말하기를, 근본이 서면 그 행하는 바의 득실을 살펴 얻어볼 수 있다 하였다. 근본이 서지 않으면 비록 훌륭하다 하여도 살펴보기에는 부족할 따름이다. 政, 禮, 喪을 살핌에 옛날에 이러한 일이 있으면 그 득실을 살펴 훌륭한 것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을 경계한다. 대개 너그러움이란 용납함이 있음을 말한다. 한 나라의 군자는 한 나라의 백성을 기르고 천하의 군자는 천하의 백성을 기르니 오직 너그럽게 용납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용납하는 바가 있은 이후에야 여러 아랫사람들이 그 몸을 두니 그러한 연후에야 기르는 바가 있어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너그러움은 인의 근본이니 인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인도 지극하고 불인도 지극하여서이다. 만약 불인하다면 오히려 무엇을 살피겠는가? 자애와 은혜를 말하지 않은 것은 자애롭고 은혜로우면서도 너그럽지 않은 사람이 있지만 너그러우면서도 자애롭고 은혜로운 사람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의 말은 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까운 것이 이와 같다. 예는 공경을 근본으로 하니 하늘과 조종을 공경하는 것이다. 후세의 유학자들은 혹은 관가(寬假-너그러움)로, 혹은 주일무적(主一無適-마음을 하나로 모아 집중함)으로 풀이하였으니 모두 옛 말을 알지 못한 것이고 성인의 도를 알지 못한 것이다. 상에 임하여라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상에 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상에 임할 때에는 반드시 곡을 하니 그러므로 혹자는 哭을 臨이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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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6일 (월) 19:32 기준 최신판
목차
「八佾」
一章
○“八佾舞於庭” ‘八佾舞’連讀. 世人佾下斷句, 非也. 『春秋』隱公五年九月, “考仲子之宮, 初獻六羽.” 『左氏傳』, “公問羽數於衆仲, 對曰, ‘天子用八, 諸侯用六, 大夫四, 士二. 夫舞所以節八音, 而行八風, 故自八以下.’, 公從之, 於是初獻六羽, 始用六佾也.”, 『公羊傳』, “初者何? 始也. 六羽者何? 舞也. 初獻六羽, 何以書? 譏, 何譏爾? 譏始僭諸公也. 六羽之爲僭奈何? 天子八佾, 諸公六. 諸侯四. 諸公者何? 諸侯者何? 天子三公稱公, 王者之後稱公, 其餘大國稱侯, 小國稱伯子男. 始僭諸公, 昉於此乎? 前此矣. 前此則曷爲始乎此? 僭諸公, 猶可言也, 僭天子, 不可言也.”『穀梁傳』, “穀梁子曰, ‘舞夏, 天子八佾, 諸公六佾, 諸候四佾. 初獻六羽, 始僭樂矣.’ 尸子曰, ‘舞夏, 自天子, 至諸侯, 皆用八佾. 初獻六羽, 始厲樂矣.’” 何休杜預皆謂, “八八六十四人, 六六三十六人, 四四十六人, 二二四人.” 服虔謂, “六八四十八人, 四八三十二人, 二八十六人.” 服虔蓋以, “襄十一年, 鄭人賂晋侯以女樂二八”, 誤爲一佾也. 何杜以爲舞勢宜方, 是或然矣. 且天子六十四人, 則大夫三十二人, 爲太過矣. 况士豈能辨十六人乎? 故何杜於理爲優. 諸公六佾, 諸侯四佾, 恐傳譌也. 『左傳』尸子爲可據已. 杜預曰, “魯惟文王周公廟得用八, 而他公遂因仍僭而用之. 今隱公特立此婦人之廟, 詳問衆仲, 因明大典, 故傳亦因言始用六佾. 其後季氏舞八佾於庭, 知惟在仲子廟用六.”由比觀之, 他公僭用, 而季氏遂僭之也. 但「明堂位」無文王, 則杜預亦誤矣.
○“於庭”, 古來無解. 邢昺以爲“家廟之庭”, 殊爲不通. 竊疑成王賜伯禽, 以天子禮樂祀周公. 天子之廟, 八佾舞於庭, 伯禽迺造臺以舞之, 所以尊天子之樂也. 後世有舞臺, 或昉于是邪? 是誠臆說, 別無所據. 然於庭二字, 非此不通, 姑錄以俟後君子也.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邢昺曰, “季氏以陪臣, 而僭天子, 最難容忍.” 『集註』范氏因之, 是於忍字之義爲得之, 然非聖人之言矣. 小人唆人激變者, 其言率如此, 不可從也. 謝氏曰, “季氏忍此矣, 則雖弒父與君, 亦何所憚而不爲乎?” 是忍字, 本諸孟子. 孟子創言性善, 而與楊氏之徒爭仁內外. 故引不忍人之心, 以爲仁之端, 遂又有不忍人之政. 然求諸古言, 以忍爲美德, 而未有以不忍爲貴者矣. 求諸理, 聖人亦有不忍之心, 而聖人之思深遠焉, 故未有以不忍爲教者矣. 蓋其究必成婦人之仁故也. “小不忍, 亂大謀.” 此先王之法言. 『孝經』曰, “非先王之法言不敢道”, 故知非孔子之言矣. 且責季氏以心術, 豈不妄哉?
◎此章之義, 蓋爲昭公發之. 昭公亦小不忍, 以致乾候之禍, 故云爾. 季氏之僭, 不啻一世, 從前魯君所忍, 是尙可忍也, 僭之大者, 尙可忍也, 則無不可忍之事矣. 魯君能以此爲心, 季氏之僭可正, 而魯可治焉. 聖人之言, 皆有作用, 宋儒迺以理以心而已矣, 不可不察.
二章
○“三家者”, 者字語助, 無意義, 如三子者[1]之者. 古者歌詩, 皆有所取其義, 而「雍」詩於三家之堂, 莫有所取焉, 於魯君之堂, 亦莫有所取焉. 孔子不斥其非禮, 但以詩言之, 若訝之者然, 所以開喩也. 『集註』迺曰“譏其無知妄作, 以取僭竊之罪. ”大失聖人之辭氣也. 且“無知妄作”, 本作者之謂聖之作[2], 豈可引於此乎? 相, 儐相也, 訓助者, 字義耳. 其實相自相, 助自助, 不可混矣. 辟公, 王肅以爲國君諸公, 爲是. 鄭玄以辟爲卿士, 公謂諸侯, 『書』“惟辟玉食[3]”, 豈卿士之謂乎? 邢昺疏, “毛萇以爲諸侯及二王之後”, 然『毛傳』無之, 可謂妄矣. 「曲禮」“天子穆穆”, 『爾雅』“穆穆、美也”. 穆穆蓋深遠意. 天子行禮, 有辟公, 爲之儐相, 則天子迺若無所爲者, 唯見其穆穆然美已, 是「雍」詩之義也.
○程子曰, “周公之功, 固大矣, 皆臣子之分所當爲. 魯安得獨用天子禮樂哉? 成王之賜, 伯禽之受,皆非也.[4] 弇州先生曰, “叔子之爲此語也, 語於秦之君臣也, 非三代之君臣也. 唐虞之世, 其爲帝者, 茅茨不剪, 土階三尺而已. 都兪吁咈于其內, 得一言則君臣交相拜而相咏嗟, 非截然而不相及也. 堯得舜而三載, 命之陟位受終, 類上帝, 禋六宗, 望山川, 徧群神, 輯五瑞, 狩四獄. 不聞其以疑堯議也. 舜得禹而命之終陟, 受命於神宗, 率百官, 若帝之初. 不聞其以疑舜義也. 堯舜之於舜禹, 臣之者也. 成王之於周公, 師之者也. 以尊則叔父也, 以親則爲其父弟者也. 存而負扆以行天子之事, 沒而崇以天子之禮樂. 夫誰曰不可? 且以周公之功與舜禹並, 而尊親過之. 不復子則禪而帝, 復子則祀而王[5] 聖人之所以崇德報功也. 而曰非者何也? 夫秦而始君朕也, 君父皇考也, 而臣弗與也. 其尊若天而臣若草芥也. 吾故曰, ‘叔子之爲此語也, 語於秦之君臣也. ’”
◎茂卿曰, “大氐後儒謂禮萬世不易者, 是其心有自以爲禮者. 故妄意成王伯禽皆非矣. 夫禮爲一代之典, 周禮周公作, 而成王伯禽親受之. 故成王伯禽非禮歟, 則孰爲禮? 豈不肆乎? 故孔子所謂非禮者, 謂其後也. ”
三章
○禮樂者, 先王之道也. 先王之道, 安民之道也. 仁, 安民之德也. 故苟非仁人, 則禮樂不爲之用. 故曰“如禮何? 如樂何? ”此以在上之人言之也.
예악은 선왕의 도이고 선왕의 도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도이며 인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덕이니 그러므로 진실로 인한 사람이 아니면 예악이 그에게 쓰임새가 없다. 그러므로 예로 무엇을 하며 악으로 무엇을 하겠는가라 하였으니 이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위해 말한 것이다.[6]
○游氏曰, “人而不仁, 則人心亡矣. ”程子曰, “仁者天下之正理, 失正理, 則無序而不和. ”皆不知聖人之道爲先王之道也. 不知此章之言爲在上者發之也. 仁齋先生曰, “慈愛惻怛之心, 衆德之所由生, 萬事之所由立. 仁人之於天下, 何事不成, 何行不得? 況於禮樂乎? ”此不知禮樂者之言已.
유초는 사람으로서 인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이 없는 것이라 하였고 정자는 인이란 천하의 바른 이치이니 바른 이치를 잃으면 질서가 없어져 조화롭지 못하게 된다라 하였으니 이는 모두 성인의 도가 선왕의 도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고 이 장의 말이 윗사람을 위해 말한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진사이 선생은 자애 측달의 마음은 모든 덕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모든 일이 그로 말미암아 세워지니 인한 사람이 천하에 대하여 무슨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무슨 행동이든 결과를 얻지 못하겠는가? 하물며 예악은 어떠하겠는가? 라하니 이는 예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다.
◎辟諸搏埴作器, 雖器皆埴也. 先王作禮樂, 以仁而已矣. 故孔子曰, “夫仁者制禮者也.[7] ”又曰, “道二, 仁與不仁而已矣.[8] ”故不仁之人, 不能用禮樂也.
진흙을 치대 그릇을 만드는 것에 비교하자면 비록 그릇이지만 모두 진흙이기도 하다. 선왕이 예악을 만듬에 인을 가지고 할 뿐이니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대저 인한 사람이 예를 제정하였다 하였고 또 도는 인과 불인 두 가지일 뿐이다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하지 못한 사람은 예악을 쓸 수 없다.
四章
○孔子大林放之問. 蓋世人所見者小, 故徒以禮爲美觀, 林放獨能疑禮之意本不在是而問之. 是其所見者大, 孔子所以嘆也. 朱註, “蓋得其本, 則禮之全體, 無不在其中矣. ”是不得大哉之解. 以全體言之, 理學者流哉. 又其言曰, “世之爲禮者, 專事繁文”云云, 殊不知禮之有繁文, 乃其所以“物爲之制, 曲爲之防”. 豈可以爲非乎? 大氐後儒迫急之見, 未免直情徑行. 戎狄之道, 貴質賤文, 亦本諸二精粗耳.
공자가 임방의 물음을 크게 여겼다. 대개 세상 사람들의 소견이 작으므로 한갓 예를 아름답게 보이는 것으로 여기지만 임방이 홀로 예의 뜻이 본래 여기에 있지 않다고 의심하여 물은 것이다. 그 소견이 크므로 공자가 이를 탄식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 “대개 그 근본을 얻으면 예의 전체가 그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다”라 하였는데 이것은 “크도다”라 한 것의 해석이 될 수 없으며 전체로 말한 것은 이학자의 류이다. 또 그 말에 “세상의 예를 행하는 자가 오로지 번잡한 꾸밈을 일삼아” 운운하였는데, 예에 (이미) 번잡한 꾸밈이 있어, 이에 이른바 “사물에 대해서는 절제가 되고 곡진함에 대해서는 방비가 되었다.”[9]라 한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니 어찌 이를 잘못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대저 후세 유학자들의 급박한 견해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행동을 지름길로 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융적의 도가 질박함을 귀하게 여기고 꾸밈을 천하게 여긴다 한 것 또한 정밀하고 거침을 둘로 나눈 것에 근본할 뿐이다.
○“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 ”蓋古語, 孔子不直語其本而引此, 使放思而得之. 孔子之教皆爾. 何以知其爲古語? 答與問不正相値也. 它如“忠信爲禮之本”, 以人學禮言之, 如恭敬, 以行禮之心言, 如上章“人而不仁”, 以在上之人言之. 至於此章, 則以人所行之禮言之. 奢謂其心以禮爲美觀, 務求備其財物, 而不知侈其用也. 儉謂其心在節財用, 而不知物不稱其義也. 易去聲. 包咸曰, “和易也”, 非矣. 朱註訓治, 得之. 但其說曰, “節文習熟而無哀痛慘怛之實者也”, 非矣. 蓋謂富貴之家, 助喪之人多, 而百官皆備, 衣衾棺椁之用不乏, 一切治辨也. 戚謂貧賤之家, 無助喪之人, 衣衾棺椁不備, 事事艱難, 轉增哀戚之甚也. 夫喪之爲禮, 所以致哀也. 節文之詳, 豈損哀乎? 且喪不可屢, 豈有所謂習熟者哉? 大氐宋儒忽略字義, 遷就以成其說. 如儉字, 本謂節用也. 朱子以溫良恭儉讓爲聖人威儀, 遂解儉爲節制. 至於此章, 亦以質勝而文不足爲儉, 遂引「禮運」“汙尊杯飲”爲說. 夫任口言理, 莫不可言者, 然字失其義, 亦影耳.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여야 하며, 상은 성대히 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여야 한다.”
대개 옛 말이니 공자가 그 근본을 바로 말하지 않고 이를 인용하여 임방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이를 얻도록 한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모두 이러할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옛 말임을 아는가? 답과 질문이 바로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충신이 예의의 근본이다.”와 같은 것은 사람이 예를 배우는 것으로 말한 것이고 “공경”과 같은 것은 예를 행하는 것으로 말했다. 앞 장에서 “사람이 인하지 못하면”과 같은 것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위해 말한 것이며 이 장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행하는 바의 예로 말한 것이다. 사란 그 마음이 예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고 그 재물을 구비하기 힘쓰나 그 쓰임을 호사스럽게 할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검이란 그 마음이 재용을 절약하는 데 있으나 물건을 그 뜻에 걸맞도록 할 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거성이다. 포함은 “화이함이다.”라 하였는데 틀렸다. 주자의 주석에서 “다스리다”라 풀이한 것이 뜻을 얻었다. 다만 그 설에 “절문만을 숙달되게 익혀서 애통해하고 참담해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는 옳지 않다. 대개 부귀한 집에서 상을 돕는 사람이 많고 백관이 모두 갖추어지고 옷과 이불과 관과 곽의 사용이 모자라지 않아 일체를 다스려 분별함을 이른 것이다. 척은 가난한 집에서 상을 돕는 사람이 없고 옷과 이불과 관과 곽이 갖추어지지 않아 일마다 어려워서 슬퍼하는 마음이 더욱 증폭되어 심해지는 것을 말한다.
대저 상에서 예를 하는 것은 슬픔을 다하기 위함이다. 절문을 상세히 함이 어찌 슬픔을 덜어 주겠는가? 또한 상이란 여러 번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숙달되게 익히는 것이 있겠는가? 대저 송나라 유학자들은 글자의 뜻을 홀연 생략하고 뜻을 비틀어 부합시켜 그 설을 이루곤 하였다. 예컨대 검이라는 글자는 본래 절용을 말하는데, 주자가 “온화하고 훌륭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사양함으로 성인의 위의가 된다” 하였으며 드디어 검을 절제로 풀이하였다. 이 장에 이르러서도 또한 바탕이 우세하고 문체가 모자란 것으로 검을 삼아 드디어 「예운」의 “웅덩이를 파서 그릇으로 삼고 손으로 움켜 마시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대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치를 말하면 말하지 못할 것이 없으나 이 때문에 글자가 그 뜻을 잃었으니 또한 그림자와 같을 따름이다.
○『易』「象」曰, “山上有雷小過, 君子以行過乎恭, 喪過乎哀, 用過乎儉. ”正與此章相發. 儉以用言之, 豈非財用乎? 戚易與奢儉對, 豈徒以節文言之哉? 夫“禮以敎中[10]”, 本文曰與其曰寧. 亦不得已以取儉戚者, 而非儉戚爲至也. 而孔子所以言之者, 何也? 「禮器」曰, “昔先王之制禮也, 因其財物而致其義焉. ”故君子之行禮, 亦必視其財物, 爲之進退, 古之道爲爾. 如“今也純儉, 吾從衆”, 豈不然乎?
『주역』「상전」에, "산 위에 우레가 있는 것이 소과이니, 군자가 이로써 행실은 공손함을 지나치게 하고 상례는 슬픔을 지나치게 하고 쓰는 것은 검소함을 지나치게 한다."라 하였으니 바로 이 장과 서로 밝혀주는 것이다. '검소함'을 쓰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어찌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픔'과 '넉넉함'은 '사치'와 '검소함'과 대를 이루니 어찌 한갓 절문으로 이를 말했겠는가? 대저 예의는 중을 가르치는 것이다."라 말하였고 본문에서 "~보다", "차라리"라 말한 것 역시 부득이하게 검소함과 슬픔을 취한 것이지 검소함과 슬픔을 지극하게 여김이 아니다. 공자가 이로써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예기』「예기」에, "옛날 선왕이 예를 만든 것은 그 재물로 인하여 그 뜻이 지극해지도록 함이다."라 하였으니 군자가 예를 행하는 것도 또한 반드시 그 재물을 보아 진퇴를 정하였으니 옛날의 도가 그러하였을 뿐이다. "지금 생사로 만든 천을 쓰니 검소하다. 나는 다수를 따르겠다."와 같은 말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檀弓」曰, “曾子曰, ‘晏子可謂知禮也已, 恭敬之有焉. ’有若曰, ‘晏子一狐裘三十年, 遣車一乘, 及墓而反. 國君七个, 遣車七乘, 大夫五个, 遣車五乘, 晏子焉知禮? ’曾子曰, ‘國無道, 君子恥盈禮焉. 國奢, 則示之以儉, 國儉, 則示之以禮. ’”“子游問喪具. 夫子曰, ‘稱家之有亡. ’子游曰, ‘有亡惡乎齊? ’夫子曰, ‘有毋過禮, 苟亡矣, 斂首足形, 還葬縣棺而封, 人豈有非之者哉? ’”“子路曰, ‘傷哉, 貧也. 生無以爲養, 死無以爲禮也. ’孔子曰, ‘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 斂首足形, 還葬而無椁, 稱其財, 斯之謂禮. ’”‘子思之母死於衛, 柳若謂子思曰, 子聖人之後也. 四方於子乎觀禮, 子蓋愼諸. ’子思曰, ‘吾何愼哉? 吾聞之, 有其禮無其財, 君子弗行地, 有其禮有其財無其時, 君子弗行也. 吾何愼哉? ’”是皆言君子行禮, 視財物與世進退之, 有時乎取儉與戚也. 「曲禮」曰, “貧者不以貨財爲禮, 老者不以筋力爲禮. ”「禮器」曰, “故天不生, 地不養, 君子不以爲禮, 鬼神弗饗也. 居山以魚鼈爲禮, 居澤以鹿豕爲禮. 君子謂之不知禮. 故必擧其定國之數, 以爲禮之大經. 禮之大倫, 以地廣狹, 禮之厚薄, 與年之上下. ”是皆言先王制禮時, 亦已視財物之所出, 定其度數也.
『예기』「단궁」에, "증자가 말하기를, '안자는 예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니 공경이 있다.'라 하니 유약이 말하기를, '안자는 한 벌의 여우 갖옷으로 삼십 년을 썼고 장례 때 수레 한 대를 썼으며 묘에 이르자마자 돌아갔다. 나라의 임금은 희생물이 일곱 개이므로 수레 일곱 대를 쓰고 대부는 희생물이 다섯 개이므로 수레 다섯 대를 써야 하니 안자가 어찌 예를 안다 하겠는가?'라 하였다. 증자가 말하기를, '나라에 도가 없으면 군자는 예를 넘치게 갖추기를 부끄러워한다. 나라가 사치하면 검소함을 보여 주고 나라가 검소하면 예에 맞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라 하였다. 또 "자유가 상례에 갖추어야 할 물건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집안의 있고 없는 것에 맞추어야 한다.'라 하였다. 자유가 '있고 없는 것으로 어떻게 가지런히 합니까?'라 하자 공자가 '있어도 예를 넘지 말고 만약 없다면 머리와 발의 형체를 염하여 바로 장례를 지내고 관을 매달아 내려 봉하더라도 사람들이 어찌 그를 비난하겠는가?"라 하였다. 또 "자로가 '슬프구나, 가난함이여. 살아서는 봉양할 것이 없고 죽어서는 예를 갖출 만한 것이 없구나.'라 하자 공자가 '콩을 씹고 물을 마시더라도 그 기뻐하시기를 다하도록 할 수 있으니 이것을 효라 이른다. 머리와 발의 형체를 염하여 곧 장례를 치르되 관이 없더라도 그 재물에 맞도록 하여야 하니 이것을 예라 이른다."라 하였고 또 "자사의 어머니가 위나라에서 죽자 유약이 자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성인의 후손입니다. 사방 사람들이 그대에게서 예를 보니 그대는 대개 신중하게 하여야 합니다.'라 하니 자사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신중하여야 하는가? 내 듣기로 예가 있으되 재물이 없다면 군자는 행하지 않으며 예가 있고 재물이 있어도 그 때가 맞지 않으면 군자는 행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어찌 신중하여야 하는가?'"라 하였다. 이는 모두 군자가 예를 행함에 재물과 세상을 보아 나아가고 물러나며 때에 맞추어 검소함과 슬픔을 취한다는 말이다. 『예기』「곡례」에, "가난한 사람은 재화로 예를 삼지 않고 늙은 사람은 근력으로 예를 삼지 않는다."라 하였고, 『예기』「예기」에, "그러므로 하늘이 낳지 않고 땅이 기르지 않으면 군자가 예를 하지 못하고 귀신이 흠향을 하지 않는다. 산에 살면서 물고기와 자라로 예를 삼고 연못에 살면서 사슴과 돼지로 예를 삼으면 군자는 예를 알지 못한다고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나라의 일정한 수를 들어서 이것으로 예의 큰 법도를 삼으니, 예의 큰 도리는 땅의 넓고 좁음으로 하고 예의 두텁고 박함은 당년의 풍흉으로 한다."라 하였다. 이는 모두 선왕이 예를 제정할 때에 또한 이미 재물이 나오는 바를 보고 그 정도와 수량을 정했다는 말이다.
◎孔子曰, “夫仁者制禮者也.[11] ”言先王之制禮, 求以安民也. “仁者愛物”, 謂其節用而不傷民也. 今林放苟知君子有時乎取儉與戚, 而思以求之, 則知先王所以制禮之意在仁焉. 是所謂本也, 是林放問本之所以爲大也. 宋儒昧乎字義而不知道, 乃以文質釋之, 謬之大者也. 遂至或謂, 孔子欲損周之文以就夏之質, 殊不知奢儉皆謂同行斯禮, 而其所以用財不同已. 豈有文質之異哉? 且林放豈與顔子同科, 而足以語制作之意哉? 可謂妄已. 又仁齋先生以禮貴得中, 非聖人之意. 蓋禮所以敎中也. 禮者先王所立以爲極也. 所以使賢者俯就, 不肖者企及也. 是乃以聖人所立禮爲中也, 非使人以己意取夫中也. 世多欲以己意求夫中, 則仁齋先生言之者是矣. 然儉自用財之道, 不與中相關, 而乃以儉與中對論者, 非矣.
공자가 말하기를, "대저 인한 사람이 예를 제정하였다."라 하였으니 선왕이 예를 제정할 때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를 구하였다는 말이다. "인한 사람이 재물을 아낀다."라 하였으니 쓰는 것을 아껴서 백성을 슬프게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지금 임방이 만약 군자가 때에 맞추어 검소함과 슬퍼함을 취한다는 것을 알고 이로써 생각하여 구한다면 선왕이 예를 제정한 뜻이 인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근본이며 이것이 임방이 근본을 물음이 큰 것이 되는 까닭이다. 송나라 유학자들은 글자의 뜻에 어두워 도를 알지 못하여 이에 이를 문과 질의 문제로 주석하였으니 오류가 크다. 드디어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공자가 주나라의 문을 덜어서 하나라의 질로 나아가고자 하였다고까지 이르렀으니 사치와 검소가 모두 이 예를 함께 행하는 것이며 그 재물의 사용만 같지 않을 따름인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어찌 문질의 다름이 있겠는가? 또 임방이 어찌 안자와 같은 급에서 족히 예의를 만든 뜻에 대해 말하겠는가? 가히 망령되다 말할 만하다. 또 진사이 선생은 '예에서 중을 얻음이 귀하다'라는 말이 성인의 뜻이 아니라 하였다. 대개 예란 중을 가르치는 것이고 예는 선왕이 세워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로 하여금 굽혀 나아가게 하고 불초한 사람들로 하여금 발돋움하여 미치도록 한 것이니 이것은 성인이 세운 예의가 중이 된다는 것이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뜻으로 저 중을 취하도록 한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대체로 자신의 뜻으로 저 중을 구하고자 하니 진사이 선생의 말이 옳다. 그러나 검소함은 재물을 쓰는 도에 관한 것으로 중과는 상관이 없는데 이에 검소함과 중을 대비하여 논하였으니 잘못이다.
五章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亡, 無也. 諸夏, 諸侯之國也, 是聖人之貴禮義也. 雖有君而無禮義, 是其去禽獸不遠焉. 孔子之時, 諸夏雖有君乎猶亡之然, 然先王之澤不斬, 禮義尙存, 故孔子以爲勝之矣. 程子解, 失於不如之詁, 不可從也.
"이적에게 임금이 있는 것이 제후국에 임금이 없는 것만 못하다" 망은 무와 같다. 제하는 제후의 나라이다. 이는 성인이 예의룰 귀하게 여긴 것이다. 비록 임금이 있더라도 예의가 없으면 이는 금수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공자의 때에 제후국에 비록 임금이 있었지만 마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선왕의 은택이 끊어지지 않고 예의가 아직 있었으므로 공자가 이것을 더 낫게 보았다. 정자의 해석은 불여의 훈고에 잘못이 있어 따를 수 없다.
六章
○『周禮』「大宗伯職」, “國有大故, 則旅上帝及四望. ”鄭玄註, “故謂凶烖. 旅陳也, 陳其祭事以祈焉. 禮不如祀之備也. ”此章, 古註以爲譏僭, 朱子因之. 然觀其引林放, 則孔子之譏, 必在奢而不在僭, 則必季氏爲魯侯旅者, 而其行禮徒務美觀故爾. 後儒每言及季氏, 則輒謂僭也, 豈不泥乎?
『주례』「대종백직」에, "나라에 큰 연고가 있으면 상제와 사방에 여제사를 지낸다."라 하였다. 정현의 주석에, "연고란 흉한 재앙이다. 여는 베푸는 것이니, 그 제사로 빌어 베품을 말한다."라 하였다. 이 장에 대해 옛 주석은 참람됨을 비웃은 것이라 여겼으며 주자도 이를 따랐다. 그러나 임방을 인용한 것을 보면 공자의 비웃음은 반드시 사치에 있었지 참람됨에 있었던 것이 아니며 아마 계씨가 노후를 위해 여제사를 지낸 것이 그 예를 행함이 한갓 미관에 힘썼던 까닭에 비웃었을 따름이다. 이후의 유학자들은 매양 계씨의 이야기를 함에 계속 참람되다 하는데 어찌 얽매인 것이 아니겠는가?
七章
○“揖讓而升下而飲. ”中間不可句. 王肅曰, “射於堂, 升及下, 皆揖讓而相飮. ”按『儀禮』, 射時, 升降皆揖讓, 飮射爵時, 亦揖讓升降也. 朱註升句, 非矣. 蓋射之爭, 爭於中禮, 射不主皮, 則所貴在和容, 故其爭以揖讓行之, 所以爲君子也. 皇侃曰, “它事無爭, 而於射有爭, 故云必也射乎. 於射所以有爭者, 古者生男, 必設蓬矢桑弧於門左, 至三日夜, 使人負子出門而射, 示此子方當必有事于天地四方, 故云至年長以射進仕. 禮王者將祭, 必擇士助祭. 故四方諸候, 並貢士於王, 王試之於射宮, 若形容合禮, 節奏比樂, 而中多者, 則得預於祭, 得預於祭者, 進其君爵土. 若射不合禮樂而中少者, 不預祭, 不預祭者, 黜其君爵士. 此射事既重, 非唯自辱, 乃係累己君. 故君子之人於射, 而必有爭也. 故顔延之曰, ‘射許有爭’, 故可以觀無爭也. ”
"읍하고 사양하며 오르내리며 마신다揖讓而升下而飲" 구의 중간은 끊어서 볼 수 없다. 왕숙이 말하기를, "당에서 활을 쏘면 올라가고 내려갈 때 모두 읍하고 사양하며 서로 마신다"라 하였으며 『의례』를 살펴보면 활을 쏠 때에 올라가고 내려갈 때 모두 읍하고 사양하며 활을 쏘면서 술을 마실 때에도 또한 읍하고 사양하며 올라가고 내려간다[12] 하였다. 주자는 이 구절을 끊어서 보았으니 틀렸다. 대개 활쏘기의 다툼은 다툼의 속에 예가 있으며 활쏘기에 과녁을 뚫기를 주로 하지 않음은 화용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다툼으로 읍하고 사양함을 행하는 것은 군자이기 때문이다. 황간이 말하기를, "다른 일에는 다툼이 없는데 활쏘기에는 다툼이 있으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반드시 활쏘기일 것이다.'라 하였다. 활쏘기에 다툼이 있는 까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옛날에 남자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쑥대 화살과 뽕나무 활을 만들어 문 왼쪽에 두고 삼 일 밤이 지나면 사람을 시켜 아이를 데리고 문 밖에 나가 쏘게 하였으니 이 자손이 바야흐로 마땅히 천하 사방을 섬길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활쏘기로 임관에 나아간다 하였다. 예에 왕이 장차 제사를 지낼 적에 반드시 선비를 뽑아 제사를 돕게 하여 사방의 제후들이 왕에게 선비를 바치면 왕이 활쏘는 곳에서 이들을 시험하여 형용이 예에 맞고 절주가 예에 비근하며 적중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면 제사에 참예하도록 하고 제사에 참예하도록 하면 그 임금의 봉토를 더해준다. 만약 활쏘기가 예악에 부합하지 않고 맞추는 것이 적으면 제사에 참예시키지 않고 제사에 참예시키지 않으면 그 군주의 봉토를 삭감한다 하였다. 이 활 쏘는 일이 이미 중요하니 오직 스스로 욕될 뿐 아니라 그 왕에게도 누를 끼치곤 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된 사람은 활쏘기에 대해 반드시 다툼이 있으니 그러므로 안연지가 말하기를, '활쏘기에서는 다툼을 허용한다.'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다툼이 없음을 볼 수 있다."
八章
○"倩", 『毛傳』“好口輔. ”馬融曰, “笑貌. ”"盼", 『毛傳』“白黑分. ”馬融曰, “動目貌. ”義相通. 蓋笑之美, 在口輔, 動目之美, 在黑白分也.
"천"에 대해, 『모전』에서는 "보조개가 예쁜 것이다."라 하였고 마융은 "웃는 모양이다."라 하였으며, "반"에 대해, 『모전』에서는 "흑백이 분명함이다."라 하였고 마융은 "눈동자의 모양이다."라 하였으니 뜻이 서로 통한다. 대개 웃음의 아름다움은 보조개에 달려 있고 눈동자 모양의 아름다움은 흑백의 분명함에 달려 있다.
○“素以爲絢兮", 何註以爲『詩』「衛風·碩人」, 逸此一句, 朱子倂上二句, 直以爲逸詩, 未詳執是. "絢", 馬融曰, “文貌”, 而不解一句之義. 邢昺曰, “莊姜, 旣有巧笑美目倩盻之容, 又能以禮成文絢然”, 果其說之是乎? 詩之義, 本謂禮, 而孔子引繪事, 爲迂. 且詩之義, 本謂禮, 而子夏曰, “禮後乎? ”豈足爲起予乎? 朱註, “素粉地, 畵之質也, 絢, 采色, 畵之飾也. ”是因孔子引繪事, 而謂詩本言畵, 可謂泥矣. 且"後素"失義, 不可從矣.
"소이위현혜"에 대해, 하안의 주석은 『시경·위풍·석인』에서 이 한 구절이 빠진 것으로 여겼고 주자는 위의 두 구절을 아울러 바로 일시라 여겼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자세하지 않다. "현"에 대해, 마융은 "문채있는 모양"이라 하였는데 한 구의 뜻은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형병은 "장강이 이미 보조개가 아름다운 웃음과 흑백이 분명하여 예쁜 눈의 용모가 있어서 또한 예로써 문채의 모양을 이룰 수 있었다."라 하였으니 과연 그 설이 옳은 것인가? 시의 뜻이 본래 예를 이른다면 공자가 수놓는 일로 인용함이 어리석게 된다. 또 시의 뜻이 본래 예를 이른다면 자하가 말하기를, "예가 뒤라는 것입니까?"라 한 것이 어찌 "나를 일으키는" 것이 되겠는가? 주자의 주석에 "'소'는 칠하는 자리이니 그림의 바탕이고, '순'은 색을 칠하는 것이니 그림의 꾸밈이다."라 하였으니 이는 공자가 수놓는 일을 인용한 것을 가지고 시가 본래 그림 그리는 일을 말한 것이라 하였으니 천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후소"에 대해 뜻을 잃었으니 따를 수 없다.
○"繪事後素." 何安註鄭曰, “繪畫文也. 凡繪畫, 先布衆色, 然後以素分布其間, 以成其文. ”此說與『考工記』"凡畫繢之事, 後素功"合. 但鄭玄註曰, "素, 白采也. 後布之, 爲其易漬汚也. " 義爲迂矣. 朱註加一於字而曰, 謂“以粉地爲質, 而後施五采”, 是其意據『禮器』“甘受和白受采耳”. 殊不知彼主行禮得忠信之人, 此主學禮貴美質, 其義自別也. 且先素而謂之後素, 後素迺以何措辭乎? 且繪與畵不同, 畵泛言之, 繪則畵布. 如「虞書」, “予欲觀古人之象, 日月星辰山龍華蟲作會, 宗彝藻火粉米黼黻絺繡. ”「曲禮」, “飾羔鴈者以繢. ”「深衣」, “具父母, 大父母, 衣純以繢. ”皆爾. 朱子以粉地爲解, 則以爲畵圖, 可謂不識字義已. 蓋詩“素以爲絢兮”, 謂傳粉也. 絢者, 謂爛然有光也. 美人得粉, 美益彰, 繢事得布素分間, 五采益明, 美質學禮, 其美益盛. 非美人也粉適成醜, 非五采也布素何施, 非忠信之人也, 禮不可得而學. 此章之義也.
"회사후소"에 대해, 하안의 주석에서 정현이 말하기를, "'회'는 문채를 그리는 것이다. 무릇 그림을 그릴 때에는 먼저 여러 색을 칠한 이후에 흰색을 그 사이에 칠해서 그 문채를 이룬다."라 하였다. 이 설과 『고공기』의 "무릇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는 흰색을 칠하는 것을 뒤에 한다"가 합치된다. 다만 정현의 주석에, "'소'는 흰색으로 칠하는 것이며 뒤에 칠하는 것은 쉽게 더럽혀지기 때문이다."라 한 것은 뜻이 어리석은 것이다. 주자의 주석은 '어'자 하나를 더하여 "칠하는 자리로 바탕을 삼고, 그런 다음에 다섯 색을 칠하는 것을 말한다."라 하였다. 이는 그 뜻이 『예기·예기』의 "단 맛은 온 맛을 조화롭게 하고 흰색은 온 색에 칠해진다"에 근거한 것으로, 저 글은 예를 행함에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람을 얻어야 한다는 데 요지가 있고 이 글은 예를 배움에 아름다운 자질을 귀히 여기는 데 요지가 있어서 그 뜻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또 먼저 흰 바탕을 만들어야 하는데 "후소"라 하였으니 "후소"를 어떻게 의미를 둘 것인가? 또한 '회'와 '화'는 같지 않아서 '화'는 널리 말하는 것이고 '회'는 베에 수놓는 것이다. 예컨대 「우서」에, "내가 옛 사람의 상을 관찰하고자 하여 해, 달, 별, 산, 용, 꽃, 벌레를 그리고 종묘의 그릇, 물풀, 불, 쌀, 보불을 수놓았다."라 하였고 「곡례」에, "새끼 양과 기러기를 꾸미는 것은 수놓은 천으로 한다."라 하였으며 「심의」에, "부모와 조부모가 모두 있으면 옷의 가선을 무늬 있는 비단으로 한다."라 하였으니 모두 이러하다. 주자는 칠하는 자리로 해석하였으니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여긴 것이라 글자의 뜻을 알지 못했다 하겠다. 대개 시에서 "소이위현혜"라 한 것은 분칠을 더함을 말한 것이고 "현"은 밝게 빛남을 이른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분칠을 더하면 아름다움이 더욱 드러나고 수놓는 일에서 흰빛을 도포하여 사이를 분명히 하면 여러 색깔이 더욱 밝아지며 아름다운 자질에 예를 배우면 그 아름다움이 더욱 성대해진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면 분칠을 더하여도 추해질 뿐이고 여러 색깔이 아니면 흰빛을 도포한들 어찌 베풀 것이며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람이 아니면 예를 배운들 무엇을 더하겠는가? 하는 것이 이 장의 뜻이다.
○“起予”, 朱註盡之. 蓋聖人好學之篤, 與羣弟子相答問, 其意每謂藉此以廣己之意智, 迺所以誨而不倦也. 後人徒以謙虛無我贊之, 抑末矣.
"기여"에 대해, 주자의 주석이 뜻을 다하였다. 대개 성인이 배움을 좋아하는 독실함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문답할 때에 그 뜻이 매양 이러한 이름을 쌓음으로 자신의 뜻과 지혜를 넓히는 데 있으니 그러므로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다만 "겸허하여 내가 없는 것"으로 이를 칭찬하니 다만 말단일 따름이다.
九章
○“夏禮, 吾能言之. ”仁齋先生, 據『戴記』之訓適, 文辭各殊, 可謂泥矣. 朱註盡之. 古註, 文獻爲二國之君文章賢才, 徵訓成, 誤矣. 如子貢所謂“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是獻足徵也. 文獻不足徵者, 言二國無識夏殷禮之人與典籍也. 徵如『中庸』“無徵不信”也. 蓋孔子洞知古聖人作禮樂之心, 又熟知人情世變, 故夏殷之禮雖殘缺, 僅得一二, 推知其餘, 如視諸掌, 而謙曰“吾能言之”. 豈唯言其義而已哉? 然無徵則民不信, 故孔子不傳夏殷禮. 是此章之義也. 升庵曰, “『左傳』‘不徵辭’, 註, 徵音證. 唐貞觀中, 有"唐九證", 其名取『莊子』九徵說, 而字作證, 可以定其音矣. ”
"하례오능언지"에 대하여. 진사이 선생은 『대기』에서 '가다'라 훈한 것에 근거하여 어구를 각각 다르게 끊었는데 얽매여 해석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이 뜻을 다하였다. 옛 주석에 "문헌은 두 나라 군주의 문장과 현재를 말하며 징은 이룸으로 훈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틀렸다. 자공이 이른바 "어진 사람은 큰 것을 알고 있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작은 것만을 알고 있다."라 한 것과 같으니 이것이 문헌으로 족히 징험하는 것이다. 문헌이 징험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은 두 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예를 아는 사람과 전적을 알지 못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징험하다라는 것은 『중용』의 "징험하지 못하면 믿지 않는다"와 같다. 대개 공자가 옛 성인이 예악을 만든 마음을 밝게 알고 또한 인정과 세상의 변화를 익히 알아서 하은의 예가 비록 훼손되어 없어져 겨우 한둘만을 얻을 수 있으나 그 나머지를 유추하여 알 수 있으니 손바닥 위에 올려다놓고 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겸손하게 말하기를 "내가 능히 말할 수 있다."라 하였으니 어찌 오직 그 뜻을 말하였을 따름이겠는가? 그러나 징험할 것이 없으면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이므로 공자가 하은의 예를 전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 장의 뜻이다. 승암 양신이 말하기를, "『좌전』에 '말을 징험하지 않았다.'라 하였는데 그 주석에 징을 증으로 읽는다 하였다. 당나라 정관 중에 "당구증"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장자』의 아홉 가지 징조에 대한 설에서 가져온 것이나 그 글자가 증으로 되어 있으니 그 음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十章
○“禘自旣灌而往者. ”如“過此以往未之或知”也, 故訓後. 以天時言之, 往爲前, 來爲後. 以人事言之, 來者其所從來, 往者由此而後也. 禘體失傳, 故其詳不可得而知矣. 然灌所以降神也. 『易』曰, “觀盥而不薦, 有孚顒若, 下觀而化也. ”王弼引此章「祭統」曰“夫祭有三重焉. 獻之屬莫重於祼, 聲莫重於升歌, 舞莫重於武宿夜. 此周道也. ”灌盥祼, 通用. 觀, 示也. 上之所以示, 下之所以觀, 在灌而不在薦, 重故也. 「彖傳」曰, “大觀在上. ”蓋孔子之於禘, 欲觀其大者, 而不欲觀其小者, 貴本也. 孔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 ”亦言所觀在本也. 但『易』觀盥, 凡祭皆然, 此特言禘者, 禘爲大祭故特言之歟? 禘所以享帝也. 「祭義」曰, “唯聖人爲能享帝. ”此其所以特言禘歟?
"체자기관이왕자"에 대하여, '왕'은 "과차이왕미지혹지(이에서 더 뒤로 가면 혹 알아차릴 수도 없다)"와 같으니 '뒤로 가다'로 훈하여야 한다. 천시로써 말한다면 간 것이 앞이 되고 온 것이 뒤가 된다. 인사로써 말한다면 온 것은 그 소종래이고 간 것은 이로써 말미암은 이후이다. 체 제사는 실전되었으니 그러므로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물을 대는 것은 신을 내리게 한 것이다. 『역』에 이르기를, "보기를 손만 씻고 제수를 올리지 않았을 때처럼 하면 (백성들이)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존경하리라라 함은 아랫사람들이 보고 교화되는 것이다."라 하였다. 왕필은 이 장을 인용하여 「제통」에서 말하기를, "대저 제사에는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치는 등속의 일은 祼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소리에는 升歌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춤에는 武宿夜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주나라의 도이다."라 하였다. 灌, 盥, 祼은 통용된다. 觀은 보이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示라 하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觀이라 하니 물따를 때는 있고 희생물을 바칠 때는 없는 것은 중하기 때문이다. 「단전」에 이르기를, "위에 있는 것을 크게 본다"라 하였으니 대개 공자가 체 제사에 대하여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 큰 것이고,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그 작은 것이었으니, 근본을 귀히 여긴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위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못하고 예를 행함에 공경하지 못하며 상에 임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으로 그를 보겠는가?"라 하였으니 또한 보는 것이 근본에 있음을 말하였다. 다만 『역』의 손씻음을 봄은 무릇 제사에 모두 그러하니 여기에서 유독 체 제사를 언급한 것은 체 제사가 큰 제사여서 특별히 언급한 것일까? 체 제사는 상제를 배향한 것이다. 「제의」에 이르기를, "오직 성인이어야 상제를 배향할 수 있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특별히 체 제사를 언급한 까닭일까?
○何註以來, 以魯郊禘非禮爲說, 不知何以知其爲魯邪. 以非禮而不欲觀, 則灌以前何擇也? 又如朱註以誠意, 未散浸以懈怠解之, 大失其義矣. 夫灌而易能乎, 則『易』何以言“觀盥而不薦乎”. 且所謂禘者, 禘嘗之禘邪? 王者大祭之禘邪? 何以必以非禮解之? 可謂不通已. 皇侃曰‘先儒舊論灌法不同. 案鄭二註, 或神或尸. 故解者或云, 灌神是灌地之禮’, ‘灌尸是灌人之禮. ’而鄭註『尙書大傳』則云, “灌是獻尸, 尸乃得獻, 乃祭酒以灌地也. ”
하안의 주석 이래로 노나라의 교 제사와 체 제사가 예에 맞지 않는다고 일컬어졌는데 어떻게 그것을 노나라가 행한다고 알았는지 모르겠다. 예에 맞지 않아서 보고자 하지 않았다면 물을 따르기 이전에는 어떻게 구분하였겠는가? 또 주자의 주석과 같이 성의로써 하여 흩어지지 않았다가 해이하고 태만함이 침식하여 들어오는 것으로 이를 풀이한다면 그 뜻을 크게 잃은 것이다. 대저 물을 따르는 것이 쉽게 할 수 있었다면 『역』에서 어찌 "보기를 손만 씻고 제수를 올리지 않았을 때처럼 하면"이라 말했겠는가? 또한 소위 체 제사라 함은 체 제사와 상 제사라 할 때의 체 제사인가? 왕이 크게 제사지낼 때의 체인가? 어찌 반드시 예에 맞지 않음으로 이를 풀이하겠는가? 맞지 않다고 이를 따름이다. 황간이 말하기를, "선유의 구설에 물을 따르는 법이 같지 않다 하였다. 생각건대 정씨 둘의 주석은 혹 귀신이라 하고 혹 시동이라 하니 그러므로 풀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은 "신에게 물을 따르기 위해 바닥에 물을 뿌리는 예이다."라 하고 어떤 사람은 "시동에게 물을 따르기 위해 사람에게 물을 따르는 예이다."라 하였다. 『상서대전』의 정씨의 주석에서는 "시동에게 주기 위해 물을 따르니 시동이 따른 것을 받으면 제사 술을 땅에 뿌린다."라 하였다.
十一章
○“我觀周道, 幽厲傷之. ”孔子適周, 禮皆殘缺, 不可得而考也. “吾舍魯何適矣? ”“周禮盡在魯也. ”“魯之郊禘非禮也, 周公其衰矣. ”[13]“成王命鲁公, 世世祀周公以天子禮樂. ”[14] 故周公若是隆焉. 及後世惠公請郊廟, 遂祀群公皆用天子禮樂. 是天子禮樂, 不屬諸周公而屬諸魯. 屬諸魯而後周公之隆不可見矣. 故曰“其衰矣. ”郊祀天配后稷而不祀周公. 天與后稷, 非魯所得祀, 則昉乎惠公之請者審矣. 後世之禘, 又非伯禽時之禘, 故曰非禮.
"내가 주나라의 도를 보려고 하였으나 유왕과 여왕이 이를 손상시켰다."에 대하여, 공자가 주나라로 갔을때 예가 모두 손상되어 없어졌으니 얻어 상고할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내가 노나라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에 대하여, 주나라의 예가 모두 노나라에 있다는 말이다. "노나라의 교 제사와 체 제사는 예가 아니니 주공의 것이 쇠퇴하였다."와 "성왕이 노공에게 명하여 대대로 주공의 제사를 천자의 예악으로 하도록 하였다."에 대하여, 그러므로 주공이 이와 같이 융성하게 대접받았음을 알 수 있다. 후세에 이르러 혜공이 교 제사와 묘 제사를 청하였으니 드디어 여러 공을 모두 천자의 예악을 사용하여 제사지냈다. 이 천자의 예악은 주공에 속하지 않고 노나라에 속하였으니 노나라에 속하여 뒤에 주공의 융성함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주공의 것이 쇠퇴하였다."라 하였다. 교 제사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후직에게 배향하는 것으로 주공을 제사지낸 것이 아니다. 하늘과 후직은 노나라가 제사지낼 것이 아니니 혜공의 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후세의 체 제사는 또한 백금 때의 체 제사와 달랐으니 그러므로 예가 아니라 한 것이다.
○弇州先生, 以郊禘爲皆非後世之僭, 而謂“晉文雄伯而有崇勳, 襄孱王而卻請隧. 魯弱國而未聞以僭禮樂討. 且魯得僭之, 齊晉先矣. 奚待魯也? ”其言雖辯, 孔子既曰非禮, 則其非昉伯禽者審矣. 且『家語』曰, “魯無冬至大郊之事, 降殺於天子”, 亦不深考已. 夫祀周公以天子禮樂, 既爲非常之典, 則後世郊禘之非禮, 亦得藉口. 齊晉之不以僭討者, 周公之餘威也. “不王不禘”之法, 又魯之所當諱者, 故以不知答之[15], 此據程子之說, 而以成王伯禽爲非禮. 按「明堂位」, “季夏六月, 以禘禮祀周公於大廟. ”是祀周公用禘禮也. 不曰“禘周公”, 而曰“以禘禮祀周公”, 則非禘者審矣. 豈所謂天子禮樂者禘禮歟? 抑將所謂天子禮樂者不必禘禮, 而用禘禮者後世之僭歟? 是未可知矣. 意必因得用禘禮而遂禘焉耳. 『呂覽』惠公所請“郊廟之禮”者, 廟蓋謂禘歟? 要之孔子所謂魯郊禘者, 以當時言之, 而非伯禽之舊也.
엄주선생 왕세정은 교 제사와 체 제사가 모두 후세의 참람된 것이 아니라 여겼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진나라 문공이 패자 중에 으뜸이고 높은 공이 있었으나 양왕은 약한 왕임에도 오히려 순유를 청한 것을 거절하였다.(좌전의 내용을 참조) 노나라는 약한 나라이나 예악을 참람되이 하여 토벌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또한 노나라가 참람되었다면 제나라와 진나라가 먼저 쳤을 것이니 어찌 노나라를 기다려 주었겠는가?"라 하였다. 그 말이 비록 그럴듯하나 공자가 이미 예가 아니라 말하였으니 백금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한 『가어』에 이르기를, "노나라에서는 동지에 큰 교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천자보다 낮추어야 하기 때문이다."라 하였으니 또한 깊이 상고하지 못한 것이다. 대저 주공을 천자의 예악으로 제사지냄이 이미 통상적이지 않은 전례였으므로 후세에 교 제사와 체 제사를 예가 아니라 보았으니 또한 구실을 얻었다. 제나라와 진나라가 참람되다고 토벌하지 않은 것은 주공의 남은 위엄 때문이다. "왕이 아니면 체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법은 또한 노나라가 마땅히 휘하여야 할 일이었으니 그러므로 이로써 알지 못한다라 대답하였다."라 하였으니 이는 정자의 설에 근거하여 성왕과 백금을 예가 아니라 여긴 것이다. 「명당위」를 보면, "계하 유월에 체 제사의 예의로 주공을 대묘에서 제사지낸다."라 하였으니 이는 주공을 제사지냄에 체 제사의 예를 사용했다 함이다. "주공을 체 제사 지냈다."라 하지 않고 "체 제사의 예로 주공을 제사지냈다."라 하였으니 체 제사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찌 소위 천자의 예악이란 것이 체 제사의 예이겠는가? 다만 장차 소위 천자의 예악이라는 것이 반드시 체 제사의 예는 아니었으나 체 제사의 예를 쓴 것이 후대에는 참람되었는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생각건대 반드시 인하여 체 제사의 예를 사용하고 따라서 체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여씨춘추』에 혜공이 "교 제사와 체 제사의 예"를 청한 것은 묘 제사가 대개 체 제사를 이른 것일까? 요컨대 공자의 소위 노나라의 교 제사와 체 제사는 당시의 말로 그러하고 백금의 옛 것과는 다르다.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古註, “如指示掌中之物, 言其易了. ”是不知示之爲視也. “其如示諸斯乎”, 如視天下於掌也. 孟子曰, “武丁朝諸候有天下, 猶運之掌也. ”語勢相同. 禘之說, 朱子以“仁孝誠敬之至”, 言之. 仁齋先生曰, “治天下之本, 在感應之孚”, 是一端耳. 夫禘禮弗傳, 故後世自言知其說者皆妄矣. 大氐古聖人之道, 奉天道以行之, 尊祖宗合諸天, 禮樂刑政, 皆受其命. 是其大端也. 諸儒爭務高其議論, 而遺其大端, 我所不取也.
"'그 설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천하를 보기를 이것을 보듯이 할 것이다'라 하고는 그 손가락을 가리켰다."에 대하여, 옛 주석에서는 "손바닥 안에 있는 물건을 보이는 것과 같으니 그 쉬움을 말하였다."라 하였으니 이는 '보이다'가 '보다'가 됨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보이는 것과 같다"는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본 것고 같다. 맹자가 말하기를, "무정이 제후들에게 조회받고 천하를 얻었으니 손바닥을 움직임과 같았다."라 하였으니 어세가 서로 같다. 체 제사의 설은 주자는 "인효성경의 지극함이다."라 말하였다.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은 감응의 믿음직함에 있다."라 하였으니 이 말 또한 일리가 있다. 대저 체 제사의 예가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후세에 스스로 그 설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망령될 뿐이다. 대저 옛 성인의 도는 천도를 받들어 이로써 이를 행하고 조종을 높이고 천도에 합쳐 예악형정이 모두 그 명을 받드니 이것이 그 큰 단서이다. 여러 유자들이 힘써 그 의론을 높이려 다투고 그 큰 단서를 내버려두니 나는 이를 취하지 않겠다.
十二章
○“祭如在”, 古經之言也. “祭神如神在”, 釋經之言也. 下引孔子之言以證之. 如"色斯擧矣"章[16]也. 大氐後儒深泥『論語』爲孔子語錄, 殊不知一時門人以其意錄之, 或記孔子言行, 或記『詩』·『書』之義, 故其例不同者, 如此也. 程子曰, “祭, 祭先祖也, 祭神, 祭外神也. ”本諸孔安國. 然祭豈必先祖乎, 神豈必外神乎? 可謂不知而爲之解已. 范氏曰, “有其誠則有其神, 無其誠則無其神. ”不曰至不至而曰有無, 宋儒之廢鬼神尙矣. 仁齋先生曰, “盡吾不得已之至情而已爾, 豈問其享與不享? ”大氐後之賢者, 其所見不勝阮瞻[17]而上之, 悲哉. 剖樹以求花於其中, 烏能見之? 謂之無花可乎哉? 『易』曰, “知鬼神之情狀”, 是聖人之事也. 後世儒者皆理學, 烏能知之? 又按, 不曰“如親在”而曰“如神在”. “事死如事生”, 語其心也, 禮則否, 雖親亦神之, 雖妻亦拜之, 可以見已. 後需昧乎禮而不知此義. 故文公作『家禮』, 主“事死如事生”之義, 可謂陋已. 『文獻通考』載天寶詔, 宗廟祭, 引"祭神如在”[18], 可見古來註家亦有不若孔安國說者矣.
"제사지낼 때에는 자리에 계신 것처럼 하였다"에 대하여, 이는 옛 경의 말이며 "신에게 제사지낼 때는 신이 계신 것처럼 하였다."에 대하여, 이는 경을 해석한 말이다. 아래에 공자의 말을 인용해 놓은 것으로 이를 증험할 수 있으니, "色斯擧矣" 장도 이와 같다. 대저 후세의 유학들이 『論語』를 공자의 어록이라 천착하였으니 한번씩은 문인들이 그들의 뜻을 기록하고 혹은 공자의 언행을 기록하고 혹은 『詩經』·『書經』의 뜻을 기록하여 그 예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제는 선조를 제사지내는 것이다. 제신은 천지신명을 제사지내는 것이다."라 하였으니 이는 본래 공안국에게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나 제사가 어찌 반드시 선조만이겠으며 제신이 어찌 반드시 천지신명만이겠는가?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이를 만하다. 범씨가 말하기를, "정성이 있으면 그 신이 있고, 정성이 없으면 신이 없다."라 하였는데, 오고 오지 않고를 말한 것이 아니라 있고 없음을 말하였으니, 송대 유자들이 귀신을 폐단으로 본 것이 오래다.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부득이하게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을 따름이니 어찌 그 흠향하고 흠향하지 않음을 묻는가?"라 하였다. 대저 후세의 어진 자들은 그 소견이 완첨의 위에 있지 못하였으니 슬프다. 나무를 쪼개어 그 속에서 꽃을 찾으니 어찌 찾아볼 수 있겠는가? 꽃이 없다 말하면 되겠는가? 『易經』에 이르기를, "귀신의 상태를 안다."라 하였으니 이는 성인의 일이다. 후세의 유자들이 모두 이학을 공부하니 어찌 이를 알겠는가? 또 생각건대 "如親在"라 하지 않고 "如神在"라 하였으니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한다"는 그 마음씀을 말한 것이고 예는 그렇지 않아서 비록 친족이라 하여도 신으로 모시고 비록 처라 하여도 절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후세의 유자들은 예에 어두워서 이 뜻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문공이 지은 『家禮』가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한다."를 주로 하는 뜻에 누를 끼쳤다 이를 만하다. 『文獻通考』에 천보 연간의 조서에서 종묘의 제사에 대해 인용하기를 "신을 제사지냄에 자리에 계신 것처럼 하였다."라 하였으니, 고래의 주석가들이 또한 공안국의 설과 같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十三章
○“孔安國“奥以喩近臣, 竈以喩執政, 天以喩君”, 而無五祀之說. 觀於“無所禱也”, 則朱註爲優. 朱註五祀之禮, 據鄭玄「月令」註. 又王孫賈意, 奥以喩君, 竈以喩執政, 而諷孔子, 孔子直以天答之, 若不知諷意者. 然其言也厲, 豈可謂之遜乎? 王孫賈托禱祀言之, 則孔子亦以禱祀答之, 若不知諷意者, 是所以爲孔子之言也. 天道福善禍淫, 故曰, “獲罪於天, 無所禱也. ”朱子乃曰“天卽理也. ”仁齋先生曰, “天之道, 直而已矣. ”其論非不美矣, 然皆以已心言之. 以知天自負, 豈不倨乎? 『集註』, “凡祭五祀, 皆設主而祭於其所. ”按鄭玄「月令」註. “祀戶設主于戶內之西”, “竈在廟門外之東”, “中霤設主於牖下”, “祀門設主於門左樞”, “行在廟門外之西". 爲軷壤, 厚二寸, 廣五尺, 輪四尺. 祀行之禮, 北面設主于軷上," 是也. 其主, 鄭註『周禮』, “以菩芻棘栢爲之. ”“菩音員. ”按字書, 菩陽宮『漢書』萯陽宮, 迺音負之誤. 鄭註「聘禮」, “禮畢乘車轢之而遂行”, 迺知其主皆權時設之, 祀畢弃之, 非若宗廟之主也.
공안국이 "아랫목은 가까운 신하를 비유하고 부뚜막은 정치를 집행하는 신하를 비유하며 하늘은 임금을 비유한 것이다."라 하였으니 다섯 제사 이야기가 빠졌다. "빌 곳이 없다."라는 말로 미루어보면 주자의 주석이 낫다. 주자의 다섯 제사를 지내는 예의에 대한 주석은 정현의 「월령」편 주석에 근거한다. 또한 왕손가의 뜻이 아랫목 귀신은 임금을 비유하고 부뚜막 귀신은 정치를 집행하는 신하를 비유하여 이로써 공자를 풍자하였는데 공자가 바로 하늘로써 이에 답하였으니 어찌 풍자의 뜻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 말하는 바가 귀신이라면 어찌 겸손하게 말하겠는가? 왕손가가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에 의탁하여 말하였으므로 공자가 또한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으로 대답하였으니 만약 풍자의 뜻을 몰랐다면 이것이 공자가 말한 바의 까닭이다. 천도는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죄를 받으면 빌 곳도 없다."라 하였다. 주자가 이에 말하기를 "하늘은 이치이다."라 하고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곧을 따름이다."라 하니 그 논리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모두 이미 마음으로 말하고 있으니 하늘을 앎으로써 자부한다면 어찌 거만하지 않겠는가? 『집주』에 "무릇 다섯 제사에 제사드릴 때 모두 미리 신주를 설치하여 그 곳에 제사지낸다."라 하였는데, 정현의 「월령」편 주석으로 미루어보면 "제사지내는 집의 집 안 서쪽에 신주를 설치한다"라 하고 "부엌은 사당 문 바깥의 동쪽에 있다."라 하며 "중류는 들창의 아래 신주를 설치한다."라 하고 "제사지내는 문의 왼쪽 지도리에 신주를 설치한다."라 하고 "길가의 신은 제사지내는 문 바깥의 서쪽에 있다."라 하고 "길가의 신에게 제사드리면서는 두께를 두 촌으로, 넓이를 다섯 척으로, 둘레를 네 척으로 하며 길가의 신을 제사드리는 예는 북향으로 하고 제사지내는 곳에 신주를 설치한다."라 하였으니 이와 같다. 그 신주는 정현의 『주례』 주석에서 "향초와 꼴, 가시나무와 측백나무로 이것을 삼는다."라 하고 "보의 음은 원이다."라 하니 자서로 미루어볼 때 보양궁을 『한서』에서 부양궁이라 썼으니 아마 "음은 부이다."를 잘못 쓴 듯하다. 정현이 「빙례」 주석에서 "예를 마치며 수레를 타고 이것을 짓밟고 나서 간다."라 하였으니 이로써 그 신주가 모두 때에 맞추어 설치되고 제사가 끝난 뒤에는 버려지며 종묘의 신주와 같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十四章
○“周監於二代. ”孔安國曰, “監, 視也. ”皇侃邢昺疏, 以比視廻視解之. 以余觀之, 如“儀監於殷”之監, 蓋以二代爲監戒, 曲爲之防, 故制度詳密, 所以文也. 孔子從之, 以備也, 以時也. 仁齋先生曰, 聖人每惡奢而從儉, 今於周之禮, 則獨從其文之郁郁者, 何哉? 蓋道得當爲貴, 自治之道, 不可不儉, 朝廷之禮, 不可不備. 夏商之禮, 質而不備, 周之禮, 文而得當, 此夫子所以特從周也. ”可謂不知而强爲之解者已. 林放問禮本, 何以知其爲自治之禮, 周監於二代, 何以知其爲朝廷之禮? 本文所無, 取諸臆, 豈不妄乎? 禮有財物, 奢儉皆以用財言之, 豈文質之謂乎? 季氏旅泰山, 可謂非朝廷之禮哉? 而孔子引林放, 豈非惡其奢邪? 夫朝廷之禮, 其用財物豈不廣乎? 朝廷而不貴儉, 豈聖人之心哉? 麻冕豈不用諸朝廷哉?
"주나라가 이대를 거울삼았다"에 대하여, 공안국이 말하기를, "監은 보다의 뜻이다."라 하였다. 황간과 형병의 소에서는 이로써 비겨 보아 돌아보다로 해석하였다. 나의 생각에는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삼아야 한다."의 監이어서 대개 이대로 경계를 삼아서 세세하게 방비하고 제도를 상세하고 정밀히 하여 이로써 문을 삼는 것이다. 공자가 이를 따라서 이로써 갖추고 이로써 때에 맞게 하였다.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성인은 매양 사치를 미워하고 검소함을 좇았으니 지금 주나라의 예에 대해서 유독 그 문의 번성함을 따른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도는 마땅함을 얻음을 귀하게 여기니 스스로 다스리는 도는 검소하지 않을 수 없지만 조정의 예는 갖추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예는 질박하되 갖추어지지 않았고 주나라의 예는 문이 마땅함을 얻었으니 이것이 공자가 특별히 주나라를 따른 까닭이다."라 하였으니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해석한 것이라 할 만하다.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물음에 어찌 그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예임을 알겠으며 주나라가 이대를 봄에 어찌 그것이 조정의 예라 알 수 있겠는가? 본문에 없는 것을 취하여 생각하니 어찌 망령되지 않겠는가? 예에는 재물이 드는데 사치와 검소가 모두 재물을 씀으로 이를 말하니 어찌 문질로 이를 이르겠는가? 계씨가 태산으로 여행간 것이 조정의 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임방을 인용한 것이 어찌 사치를 미워해서가 아니겠는가? 대저 조정의 예는 그 재물을 씀이 어찌 광범위하지 않겠는가? 조정의 예가 검소함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한다면 어찌 성인의 마음이겠는가? 삼베로 만든 면류관을 어찌 조정에서 쓰지 않았겠는가?
○且聖人之道, 文也, 夏以夏禮爲文, 殷以殷禮爲文, 周以周禮爲文, 皆以其時也. 當夏殷之時, 豈有意於爲質乎? 自後觀之而後以周爲文耳. 文即中也. 非比並文質而取其中也. 且以周爲文者, 非就殷之質而加之以爲文也. 且“道以當爲貴”者, 出於何典? 是朱子以當然之理, 訓道之見也. 孰謂仁齋先生知道也? 又曰, “孔子於自治之道不取周禮, 於朝廷之禮則取之, 聖人處事之權衡也. ”夫禮豈事之倫哉? 其人不知禮, 故輕視禮爾. 古曰, “先王制禮, 不敢不至”, 是孔門之教也. 不然, 子思何謂“憲章文武”? 大氐後儒動輒曰, “萬世不易之禮”, 斯見錮其胸中耳. 仁齋嘗謂“宋儒死定”, 豈非操戈入其室邪? 此章之言, 孔子自言制作之意, 當其時, 俾孔子制作, 則從周者獨多也. 亦如答顏子爲邦之問焉.
또 성인의 도는 문이다. 하나라는 하나라의 예가 문이 되고 은나라는 은나라의 예가 문이 되며 주나라는 주나라의 예가 문이 되니 모두 그 때에 맞기 때문이다. 하나라와 은나라의 때에 어찌 질박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겠는가? 이후로 이를 보아 뒤에 주나라를 문이라 하였을 따름이다. 문은 곧 중이니 문질을 견주어 그 가운데를 취한 것이 아니다. 또 주나라를 문으로 여겼다 하여 나아가 은나라의 질박함에 이를 더하여 문으로 삼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또 "도는 마땅함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말은 어떤 전고에서 나왔는가? 이는 주자의 당연한 이치라는 말로 도를 풀이한 견해이니 누가 진사이 선생이 도를 알았다 할 수 있겠는가? 또 말하기를, "공자가 스스로 다스리는 도로는 주나라의 예를 취하지 않고, 조정의 예로 이를 취하였으니 성인이 일을 처리하는 잣대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예가 어찌 일의 질서이겠는가? 그 사람은 예를 잘 몰라서 예를 경시하였을 따름이다. 옛말에, "선왕이 예를 제정하니 감히 이르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으니 이는 공문의 가르침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사가 어찌 "문왕과 무왕을 드러내어 밝혔다"라 하였겠는가? 대저 후세의 유자들이 걸핏하면 말하기를, "만세토록 바뀌지 않는 예"라 하여 이 견해가 그 흉중을 막았을 따름이다. 진사이 선생은 항상 "송나라 유자들은 죽어서 공로가 결정되었다宋儒死定"이라 하였는데 어찌 창을 들고 그 방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장의 말은 공자가 예를 제작할 때의 뜻을 말한 것이니 그 때에 공자가 예를 제작하도록 함에 주나라를 따르는 것이 유독 많았다. 또 안자의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냐는 질문에 대답한 것과 같다.
十五章
○“子入太廟, 每事問. ”古必有此禮, 故孔子曰, “是禮也”. 孔安國曰, “雖知之當復問, 愼之至也. ”是解禮意已. 朱註曰, “敬謹之至, 乃所以爲禮也. ”是禮無之, 而孔子以口給禦人也, 烏在其爲孔子乎? 孔子曰, “是禮也”, 豈無較然著明乎哉? 而猶云云者, 迺不信孔子之言, 而信或人之言也, 悲哉. “鄹人之子”, 輕孔子之辭. 它如“武氏之子”, “臧氏之子”, “顔氏之子”, 皆指少年言之.
"공자가 태묘에 들어서 매 일마다 물어보았다"에 대하여, 옛날에 반드시 이러한 예가 있었으므로 공자가 "이것이 예이다."라 말하였다. 공안국이 말하기를, "비록 이를 알더라도 마땅히 다시 묻는 것이니 신중함이 지극하다."라 하였으니 이는 예의(禮意)를 해석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 이르기를, "공경과 삼감의 지극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예이다."라 하였는데 이런 예는 없다. 공자가 말재주로 사람을 막았다면 공자다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공자가 "이것이 예이다."라 하였으니 어찌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겠는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공자의 말을 믿지 못해서이니 어떤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인가. 슬프다. "추 땅의 사람"은 공자의 말을 낮춰본 것이다. "무씨의 아들", "장씨의 아들", "안씨의 아들"과 같으니 모두 어린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十六章
○“射不主皮, 爲力不同科. ”馬融曰, “射有五善焉. 一曰和, 志體和. 二曰和容, 有容儀. 三曰主皮, 能中質. 四曰和頌, 合雅頌. 五曰興武, 與舞同. 天子三侯, 以熊虎豹皮爲之. 言射者不但以中皮爲善, 亦兼取和容也. 爲力, 力役之事, 亦有上中下, 設三科焉, 故曰不同科. ”『正義』曰, “二曰和容, 衍和字. 庶民無射禮, 因田獵分禽, 則有主皮者, 張皮射之, 無侯也.
"활쏘기에 가죽 뚫기를 주로하지 않는 것은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에 대하여, 마융이 말하기를, "활쏘기에는 다섯 가지 미덕이 있다. 첫째는 조화로움이니 뜻과 몸이 조화로워지는 것이다. 둘째는 조화로운 용모이니 용모와 거동이 있게 된다. 셋째는 가죽을 뚫음이니 가운데를 맞추는 데 능해진다. 넷째는 조화로운 음악이니 음악과 마음이 합해진다. 다섯째는 무력을 흥성하게 함이니 춤추기와 같다. 천자는 세 가지 과녁이 있으니 곰, 호랑이,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다. 쏘는 사람이 비단 가죽 뚫기만을 좋게 여기지 않고 또한 겸하여 조화로움과 용모를 취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힘으로 한다는 것은 힘을 쓰는 일을 말하니 또한 상중하가 있어 세 과를 설치하였으므로 과가 같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라 하였다. 논어정의에 이르기를, "둘째에 화용이라 하였는데 화 자는 잘못 들어간 글자이다. 서민은 활쏘기의 예의가 없으니 인하여 밭의 짐승과 사방의 날짐승을 잡을 때 가죽 뚫기를 위주로 하여 가죽을 걸어 놓고 이를 쏘지만 과녁은 없다."라 하였다.
○因按『周禮』, 「地官」“鄉大夫之職, 各掌其鄉之政教禁令. 正月之吉, 受教法于司徒, 退而頒之于其鄉吏, 使各以教其所治, 以考其德行, 察其道藝, 以歲時登其夫家之衆寡, 辨其可任者. 國中自七尺以及六十, 野自六尺以及六十有五, 皆征之. 其舍者, 國中貴者賢者能者, 服公事者老者疾者皆舍, 以歲時入其書. 三年則大比, 考其德行道藝而興賢者能者, 鄉老及鄉大夫帥其吏與其衆寡, 以禮禮賓之. 厥明, 鄉老及鄉大夫群吏, 獻賢能之書于王, 王再拜受之, 登于天府, 內史貳之. 退而以鄉射之禮五物詢衆庶, 一曰和, 二曰容, 三曰主皮, 四曰和容, 五曰興舞. 此謂使民興賢, 出使長之, 使民興能, 入使治之. ”此馬融所本, 力役與禮射相關者如此矣.
인하여 『주례』「지관」을 보면, "향대부의 직책으로 각자 그 향의 정교금령을 장악한다. 정월의 길일에 사도에게 교법을 받아서 물러나와 이것을 그 향리들에게 반포하여 각각 그 다스릴 것을 가르쳐서 이로써 그 덕행을 상고하고 그 도예를 살핀다. 세시에 그 가구의 많고 적음을 조사하고 그 복무할 자를 분변한다. 국중에서는 칠척에서부터 60세까지를, 야지에서는 육 척에서부터 육십오세까지를 모두 정으로 삼고 버리는 자로는 국중의 귀한 사람, 어진 사람, 능력있는 사람, 공사에 복무하는 사람, 늙은 사람, 병든 사람을 모두 버리고 세시에 그 문서를 들인다. 다음날이 밝으면 향로와 향대부와 여러 관리가 현능한 자를 기록한 문서를 왕에게 바치면 왕은 두 번 절하고 이를 받아 천부에 올리고 내사가 이를 두 개로 만든다. 물러나 향사의 예를 올리며 오물을 백성에게 물으니 처음에는 和를, 두 번째는 容을, 세 번째는 主皮를, 네 번째는 和容을, 다섯 번째는 興舞를 묻는다. 이것을 일러 백성들로 하여금 어진 자를 북돋아 나아가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능력 있는 자를 북돋아 들어와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함이다."라 하였다. 이는 마융이 근본으로 삼은 것이니 힘으로 하는 것과 예로 쏘는 것이 상관됨이 이와 같다.
○又按「鄕射記」曰, “禮射不主皮. 主皮之射者, 勝者又射, 不勝者降. ”鄭玄註曰, “禮射謂以禮樂射也, 大射賓射燕射是矣. 不主皮者, 貴其容體比於禮, 其節比於樂, 不待中爲雋也. 言不勝者降, 則不復升射也. 主皮者無侯, 張獸皮而射之, 主於獲也. 『尙書傳』曰, ‘戰鬪不可不習, 故於蒐狩以閑之也. 閑之者貫之也, 貫之者習之也. 凡祭取餘獲陳於澤, 然後鄉大夫相與射也. 中者雖不中也取, 不中者雖中也不取. 何以然? 所以貴揖讓之取也, 而賤勇力之取. 嚮之取也於囿中, 勇力之取也, 今之取也於澤宮, 揖讓之取也. ’澤習禮之處, 非所以行禮, 其射又主中, 此主皮之射與? ”
또 「향사기」을 보면, "예의 활쏘기는 가죽 뚫기를 주로하지 않으니 가죽 뚫기를 주로하는 활쏘기는 이긴 사람이 또 쏘고 이기지 못한 사람은 내려간다."라 하였다. 정현의 주석에 이르기를, "예의 활쏘기는 예악의 활쏘기를 말하니 대사, 빈사, 연사 등이 이와 같다. 가죽 뚫기를 주로하지 않는 것은 그 용체가 예에 맞고 그 절도가 악에 맞는 것을 귀히 여겨서이니 가운데에 맞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그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이기지 못한 자가 내려간다 하니 다시 올라가 쏘지 않는 것이다. 가죽 뚫기를 주로하는 사람은 과녁이 없더라도 짐승 가죽을 걸어놓고 쏘니 사냥을 주로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상서전』에 이르기를, "전투는 습득이 없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한가할 때에 사냥을 한다. 한가한 사람이 가죽을 뚫고 가죽을 뚫으면 익히게 된다. 대개 제사에 취하고 남은 사냥물을 활쏘기장에 걸어 둔 연후에 향대부가 서로 쏜다. 적중한 사람은 비록 뚫지 못했어도 취하고 적중하지 못한 사람은 비록 뚫었어도 취하지 않으니 어째서인가? 이른바 읍양하고 취함을 귀히 여기고 힘으로 취한 것을 천히 여기기 때문이다. 저번에 정원에서 취한 것을 음미하는 것은 용력으로 취한 것이고 지금 활쏘기장에서 취한 것은 읍양하고 취하는 것이다. '활쏘기장은 예를 익히는 곳이고 예를 행하는 곳이 아니며 활쏘기도 또한 맞추는 것을 위주로 하니 이것이 주피의 사격인가?'"라 하였다.
○朱子引此而失其義, 蓋疑爲力之爲力役, 遂以主皮爲貫革耳. 大氐後世儒者, 徒識字而不知古言. 爲力爲政古言也. 主皮亦古言也. 不知古言而欲以字解之, 所以失也. 古有禮射焉, 有主皮之射焉, 有貫革之射焉. 禮射主禮樂, 主皮之射主中的, 貫革之射主力. 凡言射者, 如“必也射乎”類, 皆禮射也, 是君子之射也. 主皮之射, 庶民之射也, 貫革之射, 力士之射也. 布侯而棲皮爲的, 故中的爲主皮. 朱子混皮革爲一, 大誤矣. 凡言革者, 如衽金革及兵革, 皆謂甲胃, 故貫革者謂其力穿甲札, 豈不誤乎? 又如楊氏“中可以學而能, 力不可以强而至. ”其於後世演武之射, 尙且不知之, 况於上古禮射乎? 可悲哉.
주자가 이를 인용하되 그 뜻을 잃었으니, 대개 힘으로 하는 것을 역에 종사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마침내 주피를 관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대저 후대의 유자들은 한갓 글자를 알았을 뿐 옛 말을 알지 못했다. 위력과 위정은 옛 말이며 주피도 또한 옛 말이다. 옛 말을 알지 못하고 그 글자를 풀이하려 하였으니 이 때문에 뜻을 잃었다. 옛날에 예의 활쏘기가 있었고 주피의 활쏘기가 있었으며 가죽을 뚫는 활쏘기가 있었다. 예의 활쏘기는 예악을 위주로 하였고 주피의 활쏘기는 가운데를 맞추는 것을, 관혁의 활쏘기는 힘을 위주로 하였다. 대개 활쏘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다툰다면)반드시 활쏘기에서일 것이다"와 같이 말한 것은 모두 예의 활쏘기를 말한 것이니 이는 군자의 활쏘기인다. 주피의 활쏘기는 서민의 활쏘기이며 관혁의 활쏘기는 역사의 활쏘기이다. 베를 두르고 가죽을 붙여서 과녁으로 삼았으니 적중을 위주로 하면 주피이다. 주자가 피와 혁을 헷갈려 하나로 보았으니 크게 잘못된 것이다. 대개 혁을 말하면 갑옷과 병기를 차고(衽金革)나 병장기와 갑옷(兵革)과 같아서 모두 갑옷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므로 관혁은 그 힘으로 가죽을 관통하는 것을 일렀으니 어찌 잘못되지 않았겠는가? 또 양씨(양시)가 "적중하는 것은 배워서 능할 수 있지만 힘은 억지로 이르게 할 수 없다."라 하였으니 이것은 후세의 무예를 연마하는 활쏘기라도 오히려 이를 알지 못하겠으니 하물며 상고의 활쏘기이겠는가? 슬퍼할 만하다.
十七章
○先王之禮, 古未載簡, 載簡自孔子始. 蓋孔子有得諸遺文者, 又有得諸聞見者. 如“文獻不足故也”,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豈不然乎? 去羊則禮不可得而見之, 孔子所以愛也. 且孔子求禮也艱, 故愛之. 且禮者體也, 道之體也. 禮亡則道隨亡, 豈不惜乎? 仁齋先生解曰, “禮理也, 羊物也. 禮隆則物賤, 禮汚物貴. 蓋禮隆則義爲之主, 用牛不可則用羊, 用羊不可則用豕. ”此其人尊孟子, 過於孔子, 蓋嫌此章之義似碍宣王以羊易牛之說, 故爲此言耳. 殊不知孔子惜周禮之垂亡. 孟子迺在禮亡之世, 誘宣王以仁政, 所主不同. 有何窒碍也? 且禮理也, 出『戴記』, 而理訓治, 其以義理解之, 謬矣. 古云“以禮制心, 以義制事”, 是禮與義殊也. 古曰“先王制禮, 不敢不至”, 如之何遽以義變之哉? 且子貢之愛羊, 豈憐其無罪就死地乎? 亦惜費耳. 孔子欲不廢羊, 而己則欲易以豕, 果何心乎?
선왕의 예가 예로부터 간에 실린 것이 없었다. 간에 실린 것은 공자의 때로부터이니 대개 공자가 남은 글들로부터 얻고 직접 보고 들어 얻었으니 "문헌이 부족한 까닭이다.", "어진 사람은 그 큰 것을 알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그 작은 것은 안다."와 같은 것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양을 없애면 예를 볼 수 없게 되니 공자가 이를 아꼈다. 또 공자가 예를 구하기를 어렵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아낀다 한 것이다. 또 예는 체이니 도의 체이다. 예가 망하면 도도 따라서 망하니 어찌 아끼겠는가? 진사이 선생이 이를 풀이하여 말하기를, "예는 이치이며 양은 사물이다. 예가 융성하면 사물은 천해지고 예가 오염되면 사물이 귀해진다. 대개 예가 융성하면 의로움을 주로 하니 소를 쓰려다가 못하겠으면 양을 쓰고, 양을 쓰려다가 못하겠으면 돼지를 쓴다."라 하였으니 이는 진사이 선생이 맹자를 존숭하고 공자를 지나친 것이다. 대개 이 장의 뜻을 선왕이 양과 소를 바꾼 설과 다르게 보일까 혐의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는 공자가 주나라의 예에 망조가 드리움을 안타까워하는 것과 맹자가 예가 이미 망한 시대에 이르러 선왕을 꾀어 인의 정치를 하고자 하는 것이 주로 하는 바가 다름을 알지 못한 것이니 무슨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또 예를 이치라 하였는데, 『戴記』에서 理의 훈을 治라 하였으니 의리라고 푼 것은 틀린 것이다. 옛 말에 이르기를, "예로써 마음을 제어하고, 의로써 일을 제어한다."라 하였으니 이는 예와 의가 다르다는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선왕이 예를 제정하니 이르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으니 무엇에 근거하여 의로 변하였다고 하는가? 또 자공이 양을 아낀 것이 어찌 죄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이겠는가? 또한 그 비용을 아끼고자 해서이다. 공자가 양을 바치는 예를 폐하고자 하니 않았는데 자기는 이를 돼지로 바꾸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대체 어떤 생각인가?
○“告朔之餼羊”僖三十三年『左傳』, “餼牽竭矣. ”餼與牽相對, 牽是牲, 可牽行, 則餼是已殺. 哀二十四年『左傳』, “晉師乃還, 餼臧石牛”, 是以生牛賜之也. 「聘禮」註及『論語』, 皆云牲生曰餼. 由不與牽相對故爲生也. “告朔. ”『周禮』「大史職」, “頒告朔于邦國. ”鄭玄曰, “天子頒朔于諸候, 諸侯藏之祖廟, 至朔, 朝于廟告而受行之. ”『春秋』文公六年, “閏月不告月, 猶朝于廟. ”『左氏傳』曰, “閏月不告朔, 非禮也. 閏以正時, 時以作事, 事以厚生, 生民之道, 於是乎在矣. 不告閏朔, 棄時政也. 何以爲民? ”文公十六年夏五月, “公四不視朔. ”『穀梁傳』曰, “天子告朔于諸候, 諸侯受乎禰廟, 禮也. 公四不視朔, 公不臣也. 以公爲厭政以甚矣. ”何休曰, “禮, 諸候受十二月朔政于天子, 藏于太祖廟, 每月朔朝廟, 使大夫南面奉天子命, 君北面而受之. 比時使有司先告朔, 謹之至也. 受於廟者, 孝子歸美先君, 不敢自專也. 言朝者, 緣生以事死, 親在, 朝朝莫夕, 已死, 不敢渫鬼神, 故事必于朔者, 感月始生而朝. ”
"곡삭례의 희생양"에 대하여, 『左傳』 희공 33년에, "餼牽이 고갈되었다."라 하였다. 餼는 牽의 상대어이며 牽은 희생물로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니 餼는 이미 죽인 것이다. 『左傳』 애공 24년에 "진나라 군대가 돌아와서 장석에게 소를 보냈다"라 하였으니 이는 살아있는 소를 준 것이다. 『論語』의 「聘禮」 주석에, 모두 이르기를 살아 있는 희생을 餼라 하였다. 牽과 짝지어서 말하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살아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곡삭례"는 『周禮』「大史職」에, "방국에 곡삭을 반포한다"라 하였다. 정현이 말하기를, "천자가 제후에게 삭을 반포하면 제후가 이를 종묘에 보관하였다가 삭에 이르면 종묘에 조회하여 고한 뒤에 이를 받아 행한다."라 하였다. 『春秋』문공 6년에, "윤달이라 달을 고하지 않았지만 묘에 조회하였다."라 하였고, 『左氏傳』에, "윤달이라 삭을 고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윤달을 두어 때를 바르게 하고, 때에 맞춰 농사를 지어서 농사로 백성들을 두텁게 하니 백성을 살리는 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윤달이라 삭을 고하지 않는다면 시정을 버리는 것이니 백성들은 어떠하겠는가?"라 하였다. 『左傳』 문공 십육년 여름 오월에, "공이 네 번째 삭을 보지 않았다."라 하였고, 『穀梁傳』에, "천자가 제후에게 삭을 고하면 제후가 이를 받아 아버지의 묘에 보관하는 것이 예이다. 공이 네 번 삭을 보지 않았으니 공이 신하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공이 정치를 싫어함이 이처럼 심하였다."라 하였다. 하휴가 말하기를, "예는 제후가 열두 달의 달력을 천자에게 받는 것이니 태조묘에 감추어 두었다가 매 그믐에 종묘에 조례하고는 대부들에게 남면하여 천자를 받들도록 명하고 천자가 북면하여 이를 받았다. 때가 되면 유사를 시켜 먼저 삭을 고하게 하고 삼가 이르렀다. 사당에서 받은 것은 효자가 선군에게 미덕을 돌리고 감히 스스로 독차지하지 않기 위함이다. 조회로 말하자면 산 사람을 섬기듯이 죽은 사람을 섬긴다는 것이니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는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이미 돌아가시면 감히 귀신을 소홀히 대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반드시 삭이 되어 달이 차기 시작할 때에 감응하여 조회하였다."라 하였다.
○僖公五年『左傳』曰, “正月辛亥朔, 日南至. 公既視朔遂登觀臺, 以望而書, 禮也. ”杜註, “視朔, 親告朔也. ”襄二十九年正月, “公在楚”『左傳』曰, “釋不朝正于廟也. ”「玉藻」曰, “天子聽朔於南門之外, 諸侯皮弁以聽朔於太廟. ”『釋例』曰, “人君者, 設官分職, 以爲民極. 遠細事以全委任之責, 縱諸下以盡知力之用, 摠成敗以效能否, 執八柄以明誅賞. 故自非機事, 皆委任焉. 誠信足以相感, 事實盡而不擁, 故受位居職者, 思效忠善, 日夜自進而無顧忌也. 天下之細事無數, 一日二日萬端, 人君之明, 有所不照, 人君之力, 有所不堪. 則不得不借問, 近習有時而用之. 如此則六鄉六遂之長, 雖躬履此事, 躬造此官, 當皆移聽於內官, 廻心於左右, 政之粃亂, 恒必由此. 聖人知其不可, 故簡其節, 敬其事. 因月朔朝, 遷坐正位, 會群吏而聽大政, 考其所行而決其煩疑. 非徒議將然也, 乃所以考已然. 又惡其密聽之亂公也, 故顯衆以斷之. 是以上下交泰, 官人以理, 萬民以察, 天下以治也. 文公謂閏非常月, 緣以闕禮. 傳因所闕, 而明言典制. 雖朝于廟, 則如勿廟, 故經稱‘猶朝于廟’也. 經稱告月, 傳言告朔, 明告月必以朔也. 每月之朔, 必朝于廟, 因聽政事, 事敬而成禮, 故告以特羊. ”
○合而觀之, 告朔告月一也, 朝廟朝正一也, 視朔聽朔一也, 三者相因耳. 祗告朔, 據『論語』·『春秋』, 則告于廟之義, 據『穀梁』, 則天子告于諸侯, 而『周禮』似亦同『穀梁』也. 意者天子旣告于廟, 而以其所告于廟者頒之諸候, 故曰告朔, 而『穀梁』字誤耳. 所告之廟, 『穀梁』以爲禰廟, 何休以爲太祖廟. 以理推之, 何休爲優也. 然漢儒又以司樽彛職朝享, 合諸「祭法」月祭, 而謂卽朝廟之事. 月祭唯考廟王考廟皇考廟, 故『穀梁』以爲禰廟歟. 其實經無明文, 漢儒以臆道之. 蓋告朔之羊, 因告而祭之, 非正祭也. 故朝享月祭恐別矣. 又按文公十六年『公羊傳』曰, “公曷爲四不視朔? 公有疾也. 何言乎公有疾不視朔? 自是公無疾不視朔也. 然則曷爲不言公無疾不視朔? 有疾猶可言也, 無疾不可言也. ”解『論語』者, 謂魯自文公不視朔, 據『公羊』之文焉. 又皇侃曰, “鄭註『論語』云, ‘諸候用羊, 天子用牛. ’”
이를 합쳐서 보면, 삭을 고함과 달을 고함이 같은 말이고, 종묘에 조회함과 朝正이 같은 말이고, 삭을 봄과 삭을 경청함이 같은 말이니, 세 가지는 서로 관계가 있다. 삭을 고함을 살피면, 『論語』·『春秋』에 근거하면 묘에 고한다는 뜻이고, 『穀梁』에 근거하면 천자가 제후에게 고한다는 뜻이며, 『周禮』는 『穀梁』과 비슷하다. 뜻인즉 천자가 이미 묘에 고하였으면 그 묘에 고한 것으로 제후에게 반포하니 그러므로 고삭이라 하였으며 『穀梁』의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묘에 고하는 것은 『穀梁』에서 禰廟라 하였고 하휴는 太祖廟라 하였으니 그 이치로 이를 따지면 하휴가 우세하다. 그러나 한나라 유자들이 또한 사준이 직책을 만들어 조회하고 흠향하여 「祭法」의 월제에 부합한다 하고 종묘에 제사지냈다. 월제는 오직 아버지의 사당, 할아버지의 사당, 증조할아버지의 사당에 제사지냈으니 『穀梁』에서 禰廟라 함을 따른 것이다. 기실 경전에 명확한 문장이 없고 한나라 유자들이 이로써 억측하여 도로 삼았으니 대개 삭을 고함에 양으로 하고 인하여 고하고 제사지내는 것은 바른 제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월제에 조회하여 바치는 것은 아마 별도의 제사였을 것이다. 또 생각건대 『公羊傳』 문공 16년에, "공이 어찌 네 번을 삭을 보지 않았는가? 공이 질병이 있어서이다. 어찌 공이 질병이 있어서 삭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공이 질병이 없었는데 삭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공이 병이 없었는데도 삭을 보러 오지 않았다고 하였는가? 병이 있으면 말할 수 있지만, 병이 없으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論語』의 주석에 이르기를, 노나라는 문공으로부터 삭을 보지 않았다 하였으니 『公羊』의 글에서 근거한 것이다. 또 황간이 이르기를, "정현의 『論語』 주석에 이르기를, '제후는 양을 쓰고, 천자는 소를 쓴다.'"라 하였다.
十八章
○“事君盡禮, 人以爲諂也. ”爲魯發也. 孔安國曰, “時事君者多無禮, 故以有禮者爲諂也. ”此或然也. 然秦以後君臣之禮, 與三代異焉. 故後世讀春秋時之書, 以爲無禮者, 未必皆爲無禮. 且孔子未嘗事它國, 唯魯衛, 則爲魯發者審矣. 仁齋先生曰, “人臣之於君, 以盡禮爲本, 譏夫子以爲諂者, 本非昏愚柔懦之人, 必是揚己敖物, 不知遜讓者之言. 其流必至於賊道, 故君子惡焉. 荀子之言曰, ‘道義重則輕王候’, 非也. 王候豈可輕者邪? 其輕王侯者, 適其所以不知道義也. ”予讀其書至此, 益知其操心之僻也. 孟子曰, “說大人則藐之. ”在孟子則是之, 在荀子則非之, 果何心哉? 大氐山林之士, 召見於王侯之前, 廟堂之禮, 百官之儀, 皆其平生所不習見, 卒然遇之, 怯者氣奪而不能言, 勇者有所矜而言激. 是亡它也, 積威之漸也. 入門執戟森如, 上殿執法威如. 抗聲大言則譙之, 闊武徐步則訶之. 初而傴, 中而僂, 卒而膝行. 不敢仰視, 俯伏不敢興, 是世俗之禮也.
"임금을 섬길 때 예를 다하는 것을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여긴다."에 대하여, 노나라 때문에 말한 것이다. 공안국이 말하기를, "당시에 임금을 섬기는 자들이 대부분 예가 없었으므로 예가 있는 것을 아첨한다고 여겼다."라 하였으니 이는 혹 그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나라 이후로 임금과 신하의 예가 삼대와 달라졌으니 후세에 춘추 시기의 책을 읽는 사람이 예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반드시 예가 모두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공자는 다른 나라를 섬긴 적이 없고 오직 노나라와 위나라를 섬겼기 때문에 노나라를 말한 것이 확실하다.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신하는 임금에 대해 예를 다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공자가 아첨한다고 비웃은 사람은 본래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를 드러내고 남을 업신여겨 겸손과 사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그 흐름은 반드시 도를 해치는 데에 이를 것이므로 군자는 이를 미워한다. 순자의 말에, "도의가 중하면 왕후를 가볍게 여긴다."라는 말이 있는데 잘못되었다. 왕후를 어떻게 가볍게 여기겠는가? 왕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다만 도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내가 그 글을 읽다가 여기에 이르러 그의 마음이 편벽된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맹자가 말하기를, "대인에게 유세할 적에는 그들을 작게 여겨라"라 하였는데, 맹자에 대해서는 옳다고 하고 순자에 대해서는 그르다고 하니 과연 어떤 마음인가? 대저 산림의 선비가 왕후의 앞에 불리어 나오면 묘당의 예와 백관의 거동을 모두 평생 익히 보지 못하였다가 갑자기 이를 만나므로 겁이 많은 사람은 기가 막혀 말을 못하고 용맹한 사람은 자긍하여 말이 격해진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점차 위엄에 눌리기 때문이다. 문에 들어가면 창을 잡은 군사들이 빽빽하고 전에 올라가면 법을 집행함에 위엄이 있으며 소리를 높이고 말을 크게 하면 꾸짖고 활보하여 천천히 걸어도 꾸짖는다. 처음에는 몸을 구부리다가 중간에는 굽실거리고 마침내 무릎으로 기게 되니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고 엎드려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것이 곧 세속의 예이다.
○蓋先王之知其卒必至如此, 乃作人臣之禮. 進退有節, 佩玉鏘如者, 不欲若是遽也, 拜興有度, 張拱翼如者, 不欲若是其卑也. 是豈翅爲美觀哉? 所以優人臣也. 夫然後君不以奴隸視其臣, 而臣得盡其言. 此三代之禮也. 故先王之思淵矣哉. 士之見大人, 不能不見其巍巍然也. 是以制此優游不迫之禮, 使進退以之, 其心存乎禮樂, 而不見其巍巍然者. 既以此爲禮, 君亦不尤其似乎慢焉, 至矣哉. 如「曲禮」曰, “大夫見於國君, 國君拜其辱, 士見於大夫, 大夫拜其辱. 君於士, 不答拜也, 非其臣則答拜之. 大夫於其臣, 雖賤必答拜之. ”“國君不名卿老世婦, 大夫不名世臣姪娣, 士不名家相長妾. ”故孔子見南子, 南子拜, 非以客禮也, 雖臣亦然. 又如「聘禮」, 大夫使隣國, 其君迎于門. 其所以異於國君者, 以內外已. “君揖入. 每門每曲揖. ”入廟門三揖. 至于階三讓, 其所以異於國君者, 君一臣二已. 升堂君受玉, 其所以異於國君者, 亦君一臣二已. 豈不然乎?
대개 선왕이 반드시 여기에 이르게 될 것을 알았기에 신하의 예를 만들었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절도가 있어 몸에 찬 패옥이 울리는 것이 이처럼 갑작스럽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절하고 일어나는 데 절도가 있어 몸을 펴고 손을 잡음에 날개를 편 듯하게 함이 이처럼 낮추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 한갓 미관을 위해서이겠는가? 신하들을 배려한 것이다. 대저 이러한 이후에 임금이 신하를 노예처럼 보지 않고 신하가 할 말을 다할 수 있으니 이것이 삼대의 예이다. 그러므로 선왕의 생각이 깊다. 선비가 대인을 볼 때에는 그 우뚝한 위엄을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넉넉하고 박절하지 않은 예를 만들어 나아가고 물러감에 이를 따르게 하여 그 마음이 예악에 깃들어 대인의 우뚝한 위엄을 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미 이를 예로 삼았다면 임금도 또한 신하가 오만한듯 한 것을 탓하지 않으니 지극하다. 예컨대 「곡례」에, "대부가 임금을 뵐 때에 임금은 그 욕됨에 절하고, 사가 대부를 뵐 때에 대부가 그 욕됨에 절한다. 임금이 사에 대해 답하는 절을 하지 않는데 자신의 신하가 아니면 답하는 절을 한다. 대부는 그 신하에 대해 비록 천하더라도 반드시 답하는 절을 한다."라 하였고, 또 "임금은 나이 든 경이나 대를 이은 아낙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대부는 대를 이은 신하나 조카딸,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사는 집안일을 돕는 우두머리 첩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라 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가 남자를 보았을 때 남자가 절을 한 것은 손님의 예로 그러한 것이 아니고 비록 신하라도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 「빙례」에, 대부가 이웃 나라에 사신으로 가면 임금이 문에서 맞이한다. 임금이 갔을 경우와 달리하는 것은 문 안팎일 따름이다. "임금이 읍을 하고 들어간다. 매 문과 매 굽이에서 읍한다." 사당의 문에 들어가 세 번 읍한다. 계단에 이르러 세 번 사양하니 임금이 갔을 때와 달리하는 것은 임금은 한 번 하고 신하는 두 번 할 따름이다. 당에 올라 옥을 받는데 임금이 갔을 때와 달리하는 것은 임금은 한 번 하고 신하는 두 번 할 따름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戰國之時, 先王之禮廢, 而君益倨, 臣益卑, 故孟荀之言興, 究其弊, 亦或有若仁齋之言者. 及秦幷天下, 倨者益倨, 卑者益卑, 其所定以爲朝廷之制者, 世俗之禮耳. 後世不改, 一沿其制, 故秦漢以後, 以無禮責其臣者, 皆暗君也, 獲無禮之譴者, 多爲忠臣也. 何者? 喜則賞, 怒則罰, 賞罰之權在君, 臣安得輕之? 故能輕王侯藐大人者, 秦漢而後, 是爲君子, 禮殊故也. 假使後世人君視於三代人臣, 則其不以爲無禮者幾希矣. 仁齋不之知而非荀子者, 亦爲其不知禮故也. 且下章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是臣之事君, 不患其無禮, 而患其不忠, 勢之必至也, 故孔子不言禮. 以此觀之, 予故知此章之言, 孔子爲魯發焉. 三家强而公室弱, 人皆附三家而輕公室, 習以爲常. 故以孔子爲諂者有之, 而孔子違俗而必盡其禮, 亦所以張公室抑三家也.
전국시대에 선왕의 예가 버려지고 임금이 더욱 거만하며 신하는 더욱 낮아졌으니 그러므로 맹자와 순자의 말이 흥기하였지만 그 폐단을 살펴보면 또한 혹 진사이의 말과 같은 것이 있다. 진나라가 천하를 아우름에 미쳐 거만한 자는 더욱 거만해지고 낮은 자는 더욱 낮아져 조정의 제도로 정한 것이 세속의 예일 뿐이었다. 후세에도 이를 고치지 않고 한 줄기 그 제도를 따랐으므로 진나라와 한나라의 이후로 예의가 없다고 그 신하를 책망하는 자는 모두 암군이었고 무례하다고 견책을 받은 사람은 모두 충신이었다. 왜 그러한가? 기쁘면 상을 주고 노여우면 벌을 내리는데 상벌의 권한이 모두 임금에게 있으니 신하가 어찌 가볍게 여기겠는가? 그러므로 왕후를 가볍게 여기고 대인을 작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진나라와 한나라의 이후로는 군자가 되니 예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후세의 임금이 삼대의 신하를 본다면 에가 없다고 여기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진사이는 이를 알지 못하고 순자를 틀렸다 하였으니 역시 에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래 장에서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라 하였으니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에는 예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충성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으니 형세상 반드시 이에 이르기 때문에 공자가 예를 말하지 않았다. 이로써 보면 나는 이 장의 말이 공자가 노나라를 위해 말한 것임을 알겠다. 삼가는 강하고 공실은 약하여 사람들이 모두 삼가에 붙좇고 공실을 가벼이 여김에 습관이 되어 통상적인 것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공자를 아첨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었지만 공자는 습속을 어기면서 그 예를 다하였으니 또한 공실을 펴고 삼가를 억누르고자 한 것이다.
十九章
○君使臣以禮, 則臣事君以忠. 古文辭簡爾. 何者, 定公之問也. 臣者君之所與共天職也, 故君使臣以禮. 臣者代君之事者也, 故臣事君以忠. 然施之必由君始焉. 但以易簡易欺言之, 補弊之言耳.
"임금이 신하를 예로 대하면 신하가 임금을 충성으로 대할 것이다."라 한 것이니, 옛 말은 말이 간결할 따름이다.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何)는 것이 정공의 물음이다. 신하는 임금이 더불어 천직을 받드는 바이므로 임금이 신하를 예로 부린다. 신하는 임금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므로 신하가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 그러나 베푸는 것은 반드시 임금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니, "(임금은 신하를) 소홀히하기 쉽고 (신하는 임금을) 속이기 쉬우니"라 말한 것은 폐단을 보충하기 위한 말일 뿐이다.
二十章
○“關雎樂而不淫, 哀而不傷. ”語其聲也. 朱註, “關雎之詩, 言后妃之德, 宜配君子, 求之未得, 則不能無寤寐反側之憂, 求而得之, 則宜其有琴瑟鐘鼓之樂. 蓋其憂雖深而不害於和, 其樂雖盛而不失其正. 故夫子稱之如此, 欲學者玩其辭審其音而有以識其性情之正也. ”是主辭義言之, 非矣. 主辭義言之, “樂而不淫”, 尙可言矣, 至於哀字, 則如孤哀子之稱, 及哀哀父母, 皆施於死喪者, 於關雎之詩, 實無其事. 故朱子易以憂字, 可見其謬已.
"관저는 즐거우면서도 환락적이지 않고, 슬퍼하면서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에 대하여. 이는 그 소리(음악, 곡조)를 말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 "관저 시는 후비의 덕이 마땅히 군자와 짝할 만하니 구하여 아직 얻지 못하면 침상에서 몸을 뒤척이는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구하여 얻으면 마땅히 금슬과 종고의 즐거움이 있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대개 그 근심이 비록 깊지만 조화로움을 해치지 않았고 그 즐거움이 비록 성대하나 그 바름을 잃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공자가 칭찬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배우는 사람들이 그 말을 음미하고 그 음을 살펴서 성정의 바름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말의 뜻을 주로 하여 말한 것으로 틀렸다. 글자의 뜻을 주로 하여 말한다면 "즐거우면서도 환락적이지 않다"는 말이 되지만, "슬퍼하다"라는 글자에 이르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잃은 자식(孤哀子)"이라 부른 것과 "슬프고 슬프다 우리 부모여(哀哀父母)" 구절과 같은 것들은 모두 죽어 상을 치른 사람을 이르는 것인데 관저 시에는 실로 그러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주자가 "근심하다"라는 글자로 바꾸었으니 그 오류를 알 수 있을 따름이다.
○「樂記」曰, “治世之音, 安以樂, 亂世之音, 怨以怒, 亡國之音, 哀以思”, “宮亂則荒, 商亂則陂, 角亂則憂, 徵亂則哀, 羽亂則危”, “其聲哀而不莊, 樂而不安”, “絲聲哀.", "竹聲濫. ”『左傳』, 季札觀樂“爲之歌「豳」曰‘美哉, 蕩乎. 樂而不淫. ’, 爲之歌「頌」, 曰‘哀而不愁, 樂而不荒. ’”皆以聲言之, 可以見已. 孔安國曰, “樂不至淫, 哀不至傷, 言其和也. ”蓋言其得中和之聲也. 古註之不可易如此.
악기에 이르기를, "잘 다스려진 세상의 음악은 편안하고 즐거우며 어지러운 세상의 음악은 원망하고 노여워하고 망한 나라의 음악은 슬프고 그리워한다.", "궁의 음이 어지러우면 거칠어지고, 상의 음이 어지러우면 기울어지고, 각의 음이 어지러우면 근심스럽고, 치의 음이 어지러우면 슬퍼지고, 우의 음이 어지러우면 위태로워진다.", "그 소리가 슬프면서도 장엄하지 않고, 즐거우면서도 편안하지 않다.", "실이 내는 소리는 슬프다." "대나무가 내는 소리는 넘친다."라 하였고 좌전에 이르기를, 계찰이 음악을 들음에 "그를 위해 빈을 노래하니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호탕하구나. 즐거우면서도 환락적이지 않다.'라 하였고, 그를 위해 송을 노래하니 말하기를, '슬프면서도 근심스럽지 않고, 즐거우면서도 거칠지 않다.'"라 하였으니 모두 소리로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안국이 말하기를, "즐거움이 환락에 이르지 않고, 슬퍼함이 다치게 함에 이르지 않으니 그 조화로움을 말한 것이다."라 하였으니, 대개 그 조화로운 소리를 말한 것이다. 옛 주석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二十一章
○“哀公問社於宰我. ”邢昺疏, “張包周本, 以爲哀公問主於宰我. 杜元凱何休用之以解『春秋』. ”皇侃疏亦曰, “鄭註『論語』爲問主. ”今按, 練主用栗, 見於傳記, 則作主爲是. “使民戰栗”, 敬也, 是宰我以意解之. “成事不說, 遂事不諫, 既往不咎. ”三句古語, 孔子誦之, 以責宰我. 蓋主用栗, 其義不傳, 若以意爲之解, 穿鑿傅會, 所由興也. 故孔子不取爾.
"애공이 재아에게 신주를 묻다" 구절에 대하여. 형병의 소에, "장우(張禹), 포함(包咸), 주씨(周氏)의 판본은 애공이 재아에게 신주를 물었다고 하였고, 두원개와 하휴가 이를 사용하여 춘추를 해석하였다."라 하였다. 황간의 소에도 또한, "정현의 논어 주석에 신주를 물었다고 하였다."라 하였다. 지금 살펴보면, "신주를 만들 때 밤나무를 썼다."가 기록에 보이니, 그렇다면 신주(主)로 보는 것이 옳다. "백성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였습니다."에 대하여, 경(敬)이니, 이는 재아가 뜻을 가지고 풀이한 것이다.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으며, 벌어진 일이라 말다툼하지 않으며, 이왕의 일이라 탓하지 않는다."에 대하여, 세 구절은 옛 말인데 공자가 이를 외워 재아를 꾸짖은 것이다. 대개 신주를 밤나무로 만드는 것은 그 뜻이 전해지지 않는데 만약 뜻을 가지고 이것을 풀이한다면 천착과 견강부회가 이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그러므로 공자가 취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孔安國本主作社, 曰“凡建邦立社, 各以其土所宜之木, 宰我不本其意, 妄爲之說, 因周用栗, 便云使民戰栗. ”朱子曰, “豈以古者戮人於社, 故附會其說與. 孔子以宰我所對, 非立社之本意, 又啟時君殺伐之心, 故責之. ”仁齋曰, “王者受命王天下, 必改前代之制, 以新人之觀聽. 三木皆老蒼堅強, 隨地能生. 故三代建國, 自王朝至于侯國, 植之以爲社主. 至周, 兼寓使民畏刑之意. ”是仁齋意, 謂社主之制, 通於天下, 故不取土宜之說. 朱子求孔子所以責宰我之意不可得, 則旁采戮人於社之義, 是豈宰我之附會哉? 夫周用栗, 其義在當時, 宰我旣已不知, 而數百載之後, 孔安國言之, 千有餘歲之後, 朱子又言之, 豈非臆斷乎? 使孔子聞之, 豈不以責宰我者責之邪? 旁考它書, 有“枌楡社”, “櫟社”, 而不必皆松柏與栗, 則社主通於天下者非矣. 且社豈有主哉? 祀天於郊圓丘, 地於方澤, 名山大川與社稷, 皆類焉耳, 其無主者審矣. 且松柏栗之爲社, 無徵也, “練主用栗”, 有徵也. 故舍彼而從是.
공안국의 판본은 신주(主)를 사당(社)이라 하며 말하기를, "무릇 나라를 세우고 사당을 지음에 각각 그 토지에 마땅한 나무를 쓰는데 재아가 그 뜻에 근본하지 않고 망령되이 이를 설명하여 주나라가 밤나무를 쓴 것으로 곧 '백성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였습니다.'라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아마 옛날에 사당에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이로써 견강부회하여 이처럼 설명한 듯하다. 공자는 재아가 대답한 것이 사를 세운 본래 뜻이 아니고 또한 당시 임금의 살벌한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꾸짖은 것이다."라 하였다. 인재가 말하기를, "왕은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천하에 왕 노릇함에 반드시 전대의 제도를 고쳐서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을 새롭게 한다. 세 나무는 모두 오래 살고 푸르고 굳세고 강하기 때문에 땅에 적응하여 능히 살 수 있으므로 삼대에 나라를 세울 때 왕의 조정으로부터 제후의 나라에까지 심어서 사당의 나무로 삼았다. 주나라에 이르러 겸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형벌을 두려워하게 하는 뜻을 갖게 되었다."라 하였다. 이 인재의 뜻은 사당 나무의 제도가 천하에 공통되었기 때문에 토지에 마땅한 나무를 썼다는 설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자는 공자가 재아를 꾸짖은 뜻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여 널리 사에서 사람을 죽였던 뜻을 끌어왔으니 이것이 어찌 재아가 견강부회한 바이겠는가? 대저 주나라가 밤나무를 씀에 그 뜻이 당시에 있었을 것인데 재아가 이미 알지 못하였으니, 수백 년이 지난 이후에 공안국이 말한 것과 천여 년이 지난 뒤에 주자가 또 말하는 것이 어찌 억측으로 단정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자가 이를 들었다면 어찌 재아를 꾸짖은 뜻으로 그들을 꾸짖지 않았겠는가? 널리 다른 책들을 살펴보면 "사당의 느릅나무(枌楡社)"나 "사당의 상수리나무(櫟社)"도 있어서 반드시 소나무, 잣나무, 밤나무인 것은 아니니 사당의 나무가 천하에 공통되었다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사당에 어찌 모두 신주가 있겠는가? 교외의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사당, 연못의 네모진 땅에서 땅에 제사지내는 사당, 명산대천과 사직에서 제사지내는 사당이 모두 같은 종류일 뿐이니 그 신주가 없음이 분명하다. 또한 소나무, 잣나무, 밤나무를 사당에 심었다는 것은 증거가 없고 "신주를 만들 때 밤나무를 썼다."라 한 것은 증거가 있으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따를 뿐이다.
二十二章
○孔子無尺土之有, 亦異於湯與文武焉. 使孔子見用於世邪, 唯有管仲之事已. 然其時距文武五百年, 正天命當革之秋也. 使孔子居管仲之位, 則何止是哉? 故孔子與其仁而小其器, 蓋惜之也, 亦自道也. 夫孔子小之, 而終不言其所以小之, 可以見已. 夫管仲以諸侯之相, 施政於天下, 可謂大器已. 而孔子小之, 或人之難其解, 不亦宜乎? 揚雄曰, “大器猶規矩準繩, 先自治而後治人. ”是書生常言, 程朱諸家所祖述. 是而爲大, 咀宋儒糟魄者, 皆能勝管仲而上之哉? 程子曰“奢而犯禮, 其器之小可知. ”是論經奪席者之言, 可謂能言此章之義, 而縱橫無敵已. 其不解孔子之言, 亦何殊夫或人哉!仁齋曰, “器小, 謂管仲所執之具甚小, 不濟用也. ”可謂不知字義已. 大氐詩學不傳矣, 後儒之不知微言也. 三歸未詳何謂.
공자는 땅을 소유하지 않았으니 또한 탕왕, 문왕, 무왕과 다르다. 만약 공자가 세상에 등용되었다 하여도 오직 관중의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문왕과 무왕으로부터 오백 년 뒤이기 때문에 바로 천명을 마땅히 고쳐야 할 때였다. 만약 공자가 관중의 지위에 있었다면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그러므로 공자가 그 인을 허여하면서도 그 그릇을 작다 하였으니 대개 애석하게 여긴 것이며 또한 스스로를 말한 것이다. 대저 공자가 이를 작다 하면서 끝내 그 작은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으로 가히 미루어 알 수 있다. 대저 관중은 제후의 재상으로 천하에 정치를 시행하였으니 큰 그릇이라 말할 만하다. 그러나 공자가 이를 작게 여겼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 풀이를 어려워하니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양웅이 말하기를, "큰 그릇은 마치 규구, 준승과 같아서 먼저 자신을 다스린 후에 남을 다스린다."라 하였으니 이는 서생이 항상 하는 말로 정자와 주자의 여러 무리들이 조술하는 바이다. 이를 크다고 여긴다면 송나라 유자들의 지게미를 씹는 자들은 모두 능히 관중을 능가하여 그 위가 되겠는가? 정자가 말하기를, "사치하고 예를 범하였으니 그 그릇의 작음을 알 만하다."라 하였으니 이는 경을 논하여 방석을 빼앗은 자의 말로, 능히 이 장의 뜻을 말하는 것으로는 종횡하여 그 상대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 공자의 말을 해석하지 못한 것으로는 또한 어찌 저 혹인의 말과 다르겠는가. 인재가 말하기를, "그릇이 작다는 것은 관중이 집은 도구가 매우 작아서 널리 쓰이지 못했다고 이른 것이다."라 하였으니 글자의 뜻을 알지 못했다고 할 만하다. 대저 시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아 후세의 유자들이 은미한 말을 알지 못하였으니, 삼귀(三歸)가 상세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무엇인가?
○『說苑』曰, “桓公立仲父, 致大夫曰, ‘善吾者, 入門而右, 不善吾者, 入門而左’, 有中門而立者. 桓公問焉, 對曰, ‘管子之知, 可與謀天下, 其强可與取天下. 君恃其信乎? 內政委焉, 外事斷焉, 驅民而歸之, 是亦可奪也. ’桓公曰‘善’, 乃謂管仲, ‘政則卒歸於子矣. 政之所不及, 唯子是匡. ’管仲故築三歸之臺, 以自傷於民. ”是三歸之爲臺, 審矣. 至於所以名三歸之義者, 或以左右中立, 或引算法, 皆鑿矣. 包咸謂"娶三姓", 而引“婦人謂嫁爲歸”, 最非矣.
『설원』에 이르기를, "환공이 관중을 재상으로 올리고 대부들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문으로 들어와 우로 서고,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문으로 들어와 좌로 서라."라 하니 문 가운데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환공이 물으니 대답하기를, "관중의 지혜는 가히 함께 천하를 도모할 만하고 그 강력함은 가히 함께 천하를 취할 만합니다. 군주께서는 그를 믿음이 굳건하십니까? 안으로 정치를 맡기고 밖으로 일을 결단하여 백성들을 몰아 그에게 돌아가면 이는 또한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라 하니 환공이 말하기를, "옳다."라 하고 관중에게 이르기를, "정치는 그대에게 모두 귀속시키고, 정치가 미치지 못한다면 오직 그대를 바로잡겠다."라 하였다. 관중이 그러므로 삼귀(三歸)의 대를 쌓아서 이로써 스스로 백성을 상하게 하였다."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면 삼귀는 대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삼귀라 이름한 뜻에 이르면 어떤 사람은 좌, 우, 중간에 섰기 때문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산법을 인용하는데 모두 착오이다. 포함이 "세 성의 여자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이다."라 이르고 "여자가 시집가는 것을 귀라 한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 가장 잘못되었다.
○按『晏子春秋』曰, “晏子相景公, 老辭邑, 公不許曰, ‘昔吾先君桓公有管仲, 恤勞齊國, 身老, 賞之以三歸, 澤及子孫. 今夫子亦相寡人, 欲爲夫子三歸, 澤至子孫. 豈不可哉? ’對曰, ‘昔者管子事桓公, 桓公義高諸侯, 德備百姓, 今嬰事君也, 國僅齊於諸侯, 怨積乎百姓, 嬰之罪多矣. 而君欲賞之, 豈以其不肖父, 其不肖子厚受賞, 以傷國民, 義哉? 且夫德薄而祿厚, 智惛而家富, 是彰汚而逆教也, 不可. ’公不許, 晏子出. 異日朝, 得間而入邑, 致車一乘而後止. ”則三歸, 桓公之所賜也. 以‘澤及子孫’及‘致車一乘’觀之, 豈如後世封戶之制歟!得食其入而不封戶, 則不得役其民也. 古者食采邑, 亦得食其入, 而車乘供公家之賦, 其併車乘之賦, 歸諸私家, 賞之厚者也. 其制蓋有三歸焉, 而管仲以此造臺邪? 然至於三歸之名, 則終未可知已.
살펴보면 『안자춘추』에 이르기를, "안자가 경공의 재상이 되었다가 늙어서 읍을 사양하자 공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옛날 내 선군 환공에게 관중이 있었는데 제나라를 구휼하고 일하다가 몸이 늙자 삼귀(三歸)로 상을 내려 은택이 자손까지 미쳤다. 지금 그대 또한 나를 위해 재상을 하였으니 그대를 위해 삼귀를 주어 은택이 자식에게까지 미치게 하고자 하니 어찌 불가하겠는가?"라 하였다. 대답하기를, "옛날 관중이 환공을 섬겼을 때 환공은 의리가 제후보다 높았고 덕이 백성들에게 갖추어졌습니다. 지금 제가 임금을 섬기는데 나라는 겨우 다른 제후들과 비슷하고 원망이 백성들에게 쌓였으니 저의 죄가 큽니다. 그런데 임금께서 저에게 상을 내리고자 하시니 어찌 불초한 아버지로부터 불초한 아들이 후하게 상을 받아 나라 백성들을 상하게 함이 옳겠습니까? 또한 대저 덕이 박한데도 봉록이 후하고, 지혜가 모자란데도 집안이 부유하니 이는 더러움을 드러내고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이니 불가합니다."라 하였다. 공이 허락하지 않자 안자가 나갔다. 다른 날에 조회하다가 틈을 얻어 읍에 들어가 수레를 보낸 후에 그만두었다."라 하였으니 삼귀는 환공이 관중에게 상으로 준 것이다. "은택이 자손에게 미쳤다"라거나 "수레를 보냈다"로 미루어볼 때 아마 후세에 호를 봉해주는 제도와 같은 것이다. 들여오는 양곡을 먹었지만 호를 봉하지는 않았으니 그 백성들을 부릴 수는 없었다. 옛날 식읍과 채읍 또한 그 들여오는 양곡을 먹었지만 (삼귀는) 타는 수레도 공실의 부세로 주었으며 그 수레를 타는 비용까지 아울러 사가에 돌아가도록 하였으니 상이 후한 것이다.그 제도에 이미 삼귀가 있었으니 관중이 이로써 대를 만들었는가? 그러나 삼귀라는 이름에 이르러서는 종래 이유를 알 수가 없다.
○反坫, 鄭玄曰, “反爵之坫, 在兩楹之間. ”皇侃曰, “坫者築土爲之, 形如土堆. ”又曰, “兩楹者, 古者屋當棟下隔之, 棟後謂之室, 棟前謂之堂. 假三間堂, 而中央之間堂, 無東西壁, 其柱盈盈而立, 故謂柱爲楹. 「郊特牲」曰, “壹門而旅樹, 反坫, 繡黼丹朱中衣, 大夫之僭禮也. ”「明堂位」曰, “山節藻梲, 復廟重檐, 刮楹達鄕, 反坫出尊, 崇坫康圭疏屏, 天子之廟飾也. ”鄭玄曰, “反坫, 反爵之坫也. 出尊, 當尊南也. 唯兩君爲好, 旣獻, 反爵於其上. 禮, 君尊于兩楹之間. 崇, 高也. 康讀爲亢龍之亢, 又爲高坫, 亢所愛之圭, 尊于上焉. ”孔穎達曰, “鄕飮酒是鄕大夫之禮, 尊於房戶間. 燕禮是燕己之臣子, 故尊於東楹之西. 若兩君相敵, 則尊於兩楹間. ”荊疏因之. 然但釋鄭註“在兩楹之間”耳. 其實「鄕飮禮」. 「燕禮」, 皆無反坫之文.
반점(反坫)은 정현이 말하기를, "잔을 돌려놓는 점이니, 두 기둥의 사이에 있다."라 하였고 황간이 말하기를, "점은 흙을 쌓아서 만드니 형태가 흙을 쌓아 놓은 것과 같다."라 하고 또 말하기를, "두 기둥은 옛날에 집의 기둥 아래를 나누어 기둥의 뒤를 실(室)이라 하고 기둥의 앞을 당(堂)이라 하였다. 가령 세 칸의 당이면 중앙 칸의 당은 동서의 벽이 없고 그 기둥만 우뚝하게 서 있었으므로 기둥을 영이라 하였다."라 하였다. 「교특생」에 이르기를, "대의 문에 나무를 늘어세우고 반점을 두며 중의에 비단을 두르고 붉은색을 칠하는 것은 대부가 예에 참람된 것이다."라 하였다. 「명당위」에 이르기를, "산 무늬를 조각한 짧은 기둥과 수초를 그린 동자기둥, 지붕을 겹으로 하고 처마를 겹으로 하는 것, 갈아붙인 기둥과 통하는 문, 반점을 남쪽으로 바치게 두는 것, 점을 높이고 규를 바치며 조각으로 병풍을 장식하는 것은 천자의 사당의 장식이다."라 하였다. 정현이 말하기를, "반점은 잔을 돌려놓는 점이다. 출존은 남쪽으로 바치게 하는 것이다. 오직 두 임금이 우호를 맺을 적에 이미 잔을 바치면 그 위에 잔을 돌려놓는다. 예에 임금은 두 기둥의 사이에서 공경한다. 숭은 높은 것이다. 항은 항룡의 항으로 읽으니 또한 높은 점으로 높이 그 아름다운 규를 들어 위에 바친다."라 하였다. 공영달이 이르기를, "향음주는 향대부의 예이니 방의 문 사이에 바친다. 연례는 자기의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것이니 동쪽 기둥의 서쪽에서 바친다. 만약 두 임금이 서로 적수라면 두 기둥의 사이에서 바친다."라 하였다. 형병의 소가 이를 따랐다. 그러나 다만 정현의 주석인 "두 기둥 사이에 있다."를 해석하였을 뿐이니 기실 「향음주」와 「연례」에는 모두 반점이라는 글이 없다.
○「士冠禮」曰, “爵弁·皮弁·緇布冠, 各一匴. 執以待於西坫南. ”「大射禮」曰, “取公之決拾於東坫上. ”「士喪禮」曰, “牀第夷衾, 饌于西坫南. ”「旣夕禮」曰, “設棜于東堂下南, 順齊于坫. ”「內則」曰, “天子之閣, 左達五, 右達五. 公候伯於房中五, 大夫於閣三, 士於坫一. ”『爾雅』曰, “垝謂之坫. ”郭註, “在堂隅, 坫端. ”疏曰, “坫者堂角也. ”『說文』曰, “坫屛也, 垝垣也. ”『汲冢周書』「作雒解」曰, “五宮, 大廟宗宮考宮路寢明堂, 咸有四阿反坫. ”孔鼂註, “廟四下曰阿. 反坫外向室也. ”『升庵外集』引此作回阿, 而曰“此外向之坫也. ”
「사관례」에 이르기를, "작변, 피변, 치포관을 각각 하나의 상자에 넣는다. 그것을 잡고 서점의 남쪽에서 기다린다."라 하였다. 「대사례」에 이르기를, "공의 깍지와 어깨보호대를 동점의 위에서 얻었다."라 하였다. 「사상례」에 이르기를, "상과 대자리와 이불을 서점의 남쪽에서 올린다."라 하였다. 「기석례」에 이르기를, "가자를 동쪽 당의 아래 남쪽에 설치하는데 남쪽을 따라서 점과 나란히 한다."라 하였다. 「내칙」에 이르기를, "천자의 각은 왼쪽으로 다섯에 다하고 오른쪽으로 다섯에 달한다. 공후백은 방 가운데 다섯이고 대부는 각에 셋이며 사는 점에 하나이다."라 하였다. 『이아』에 이르기를, "궤는 점을 말한다."라 하였고 곽씨가 주석하기를, "당의 모서리에 있고 점의 끝이다."라 하였다. 소에 이르기를, "점은 당의 모서리이다."라 하였다. 『설문해자』에 이르기를, "점은 병풍(屛)이고 궤는 담장(垣)이다."라 하였다. 『급총주서』「작낙해」에, "다섯 궁은 태묘, 종궁, 고궁, 노침, 명당이니 모두 네 모퉁이에 반점이 있다."라 하였다. 공조의 주석에, "사당의 네 모퉁이 아래를 아라고 한다. 반점은 바깥쪽으로 향한 방이다."라 하였다. 『승암외집』에 이것을 인용하여 회아라 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바깥쪽으로 향한 점이다."라 하였다.
○合而觀之, 蓋坫在堂角, 其制如屛垣, 其上可厝物, 貴賤之室皆有之. 唯反坫爲天子廟飾已, 所以謂之反坫者. 豈其制外向, 有異於群下之坫歟? 曰“邦君爲兩君之好有反坫”, 則雖廟飾亦屛類已, 可移而撤之, 爲兩君之好則設之, 否則撤之. 若後世所傳之坫, 則托子類, 其物極小, 豈可謂之廟飾乎? 陳祥道『禮書』謂“此反爵坫也, 此庋食坫也, 此堂隅坫也者”, 誤矣.
합하여 이를 보면, 대개 점은 당의 모서리에 있고 그 만듦새는 병풍이나 담장과 같으며 그 위에는 물건을 올릴 수 있고 귀천의 방에 모두 이것이 있다. 오직 반점은 천자의 묘당을 장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반점이라 말한다. 아마 그 만듦새가 바깥쪽을 향하여서 여러 이하의 점들과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집주에)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두 군주의 우호를 맺을 적에 반점을 둔다."라 하였으니 비록 사당의 장식이나 또한 병풍의 종류일 따름이어서 이를 옮기거나 물릴 수 있었으니 두 임금이 우호할 때는 이를 설치하고 아닐 때에는 이를 철거하였다. 만약 후세에 전하는 점과 같다면 찻잔 받침의 종류라 그 물건이 매우 작으니 어찌 사당의 장식일 수 있겠는가? 진상도의 『예서』에 이르기를, "이것은 잔을 되돌려놓는 점이고 이것은 음식을 갈무리하는 점이고 이것은 당 모퉁이의 점이다."라 하였으니 이는 잘못되었다.
二十三章
○“樂其可知也. ”樂至難知, 然伶人爲樂, 唯翕純皦繹而已, 故曰樂其可知也. 古註, “五音始奏, 翕如盛也. ”莫以尙焉. 蓋凡樂之初起也貴盛, 不盛不繼, 猶如詩之起句邪. 然必竢放縱之然後和, 和則若一, 謂之純如. 謝氏曰, “五音六律不具, 不足以爲樂, 翕如言其合也. ”朱註因之. 仁齋先生曰, “樂有八音, 初起氣聚而不舒也. ”殊不知翕純皦繹, 皆語樂之物也. 如二家之說, 不善樂者亦爾. 且五音六律之具, 通樂之一終者也, 豈初起而皆具乎? 可謂不知而爲之解已. “皦如也. ”古註, “言其音節明也. ”莫以尙焉. 仁齋曰, “五音六律明而不混”, 妄哉. 豈有五音六律並奏者乎? “以成. ”古註, “縱之以純如皦如繹如, 言樂始作翕如, 而成於三. ”莫以尙焉. 朱註, “成樂之一終也”, 非也. 言始作至一終, 唯此耳. 本文唯言始作縱之二者, 而純皦繹, 節節皆爾. 豈得謂若是而一成乎?
"음악은 알 만하다."에 대하여, 음악은 지극히 알기 어려우나 악관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오직 성대하고 순수하고 밝고 계속됨(翕純皦繹)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음악을 알 만하다 말한 것이다. 옛 주석에, "다섯 음으로 연주를 시작하니 翕如는 성대함이다."라 하였으니 이에 더할 것이 없다. 대개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성대함을 귀하게 여기니 성대하지 않으면 계속하지 않아서 마치 시의 기구와 같다. 그러나 반드시 자유롭게 풀려나기를 기다린 이후에 조화를 이루니 조화로워지면 하나와 같아서 이를 순수해진다(純如)라 하였다. 사씨가 말하기를, "오음 육률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음악이라 하기에 부족하니 翕如란 그 모인 것을 말한다."라 하였고 주자의 주석이 이를 따랐다. 인재선생이 말하기를, "음악에 여덟 음이 있으니 처음 일어날 때에 기가 모여 흩어지지 않는다."라 하였으니 성대하고 순수하고 밝고 계속됨이 모두 음악에 대한 말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의 설과 같기로는 음악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도 또한 그러하다. 또한 오음과 육률의 갖추어짐은 음악이 끝날 때에 통하니 어찌 처음 일어날 때에 모두 갖추어지겠는가? 잘 알지 못하고 해설한 것이라 말할 만하다. "밝다(皦如)"라 한 것을 옛 주석에, "그 음절이 밝음을 말한다."라 하였으니 이에 더할 것이 없다. 인재가 말하기를, "오음과 육률이 밝아서 혼탁하지 않은 것이다."라 하였으니 망령될 뿐이다. 어찌 오음과 육률이 한꺼번에 연주되겠는가? "이로써 이루어진다.(以成)"에 대하여, 옛 주석에, "음악을 풀어놓아 이로써 순수해지고 밝아지고 계속되어지니, 음악의 시작은 성대함에서 시작되어 세 가지가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다."라 하였으니 이에 더할 것이 없다. 주자의 주석에, "成이란 음악이 끝남이다."라 하였으니 잘못되었다. 시작에서부터 끝남에 이르기까지 오직 이러함을 말하였을 뿐이다. 본문은 오직 시작과 풀어놓음의 두 가지를 말하였으니 순수하고 밝고 계속됨은 마디마다 모두 그러한 것이다. 어찌 이와 같이 말하여 마지막에 이루어졌다고 하겠는가?
二十四章
○武事振金鐸, 文事振木鐸, 以狥道路爲義, 朱註後說爲是. 儀封人之言, 知命之言, 知孔子爲萬世師, 蓋孔子取之, 故錄. 以當得位爲解, 非矣.
무의 일에는 쇠방울을 흔들고, 문의 일에는 나무 방울을 흔들었다 하기도 하고, 도로를 순찰하는 것으로 (목탁을 흔드는) 뜻을 삼았다고도 하는데 주자의 주석은 뒤의 설을 옳게 보았다. 의 땅에 봉해진 사람의 말은 천명을 아는 말이니 공자가 만세의 스승될 것을 알았고 공자가 이를 취했으므로 기록하였다. 마땅히 지위를 얻을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二十五章
○韶盡善, 武未盡善, 孔安國以來, 以受禪征伐分其優劣, 而美善無明解. 朱子據邢昺, 以美爲聲及舞之美, 善爲美之實, 果其言之是乎? 武爲實不足, 而外飾聲容之美也. 且所謂美之實者, 將何以見之? 其說以揖遜放伐言之, 則不關樂, 但就舜武行事斷之也. 且不及夏濩[19], 而止舉韶武, 亦何意也? 且揖遜獨爲盡善, 則夏傳子者謂何? 放伐必爲未盡善, 則何遺濩也? 要之後世儒者不識聖人與道, 忽見孟子性之身之[20]等言, 妄生優劣, 轉以解此章者已. 夫善美皆謂樂, 何關舜武行事哉? 蓋美誠聲容之美, 然亦德之美矣. 微德之美, 何以形諸聲容哉? 和正以廣, “極乎天而蟠乎地”[21], 泱泱渢渢, 熙熙乎以盛, “洋洋乎盈耳[22], 是謂之美. 故美者以其大者言之也.
'韶는 지극히 좋고 武는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에 대해서, 공안국 이래로 선양받은 것과 정벌한 것으로 그 우열을 가르는 외에 아름다움과 좋음에 대한 분명한 풀이가 없었다. 주자는 형병에 근거하여 아름다움을 소리와 춤의 아름다움으로 여겼고 좋음을 아름다움의 실질로 여겼는데, 과연 그 말이 옳은가? 武가 실질이 부족하여 외적으로 소리와 용모의 아름다움을 꾸몄다면 또한 소위 아름다움의 실질이라는 것은 장차 무엇으로 보여지는 것인가? 그 설명이 사양하는 것이나 쫓아 벌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음악과 관계가 없고 다만 순임금과 무왕의 일을 행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한 夏나 濩를 언급하지 않고 韶와 武를 거론하는 데 그친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또한 사양하는 것이 유독 지극한 훌륭함이라면 夏의 아들에게 전한 것은 무엇이라 하겠는가? 쫓아 벌하는 것이 반드시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면 어찌 濩를 버려두었는가? 요컨대 후세의 유자들은 성인과 그 도를 알지 못하고 문득 맹자의 '性之', '身之' 등의 말을 보고서 망령되이 우열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이것으로 이 장을 풀이하였을 뿐이다. 대저 아름다움과 좋음은 모두 음악을 말한 것인데 어찌 순임금과 무왕이 일을 행한 것과 관련되었겠는가? 대개 아름다움은 실로 소리와 용모의 아름다움이지만 또한 덕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덕의 아름다움이 없다면 어찌 소리와 용모에 형상이 있겠는가? 조화롭고 바름으로써 넓어져서, "하늘에 다하고 땅에 서리며", 물소리 콸콸 흐르고, 밝고 밝아 성대해지며, "한없이 퍼져 귀에 가득하니", 이것이 이른바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그 큰 것을 말한 것이다.
○善歌, 善舞, 善琴, 善笛, 皆以善言之, 善豈外聲容乎? 一事一節之細, 莫不曲當, "律小大之稱, 比終始之序," "使親疎貴賤長幼男女之理, 皆形見於樂,"[23] 是謂之善. 故善者以其小者言之也. 聖人之作樂, 豈躬自作之? 亦必有后夔之倫爲之輔. 古今人才之盛, 唯虞與周. 故四代之樂, 韶武獨盡美焉耳. 至於武之未盡善, 則有司之失傳也. 不然, 周工之不及后夔也. 「樂記」曰, “聲淫及商何也? 對曰, 非武音也. ”子曰, ‘若非武音, 則何音也’? 對曰, ‘有司失其傳也. 若非有司失其傳, 則武王之志荒矣. ’子曰, ‘唯!丘之聞諸萇弘, 亦若吾子之言. ”是武未盡善之說也.
노래를 잘 한다, 춤을 잘 춘다, 가야금을 잘 탄다, 피리를 잘 분다는 모두 善으로 말하는 것이니 善이 어찌 소리와 용모의 외적으로 꾸미는 것이겠는가? 일 하나 마디 하나의 세밀함도 곡진하고 마땅하지 않음이 없으니, "작고 큰 것의 무게를 조율하고, 처음과 끝의 차례를 비견하며", "친소와 귀천과 장유와 남녀의 이치를 모두 음악에 나타나도록 하게 하면", 이것이 이른바 좋음이다. 그러므로 좋음이란 그 작은 것을 말한 것이다. 성인이 음악을 만듬에 어찌 그 스스로 만들었겠는가? 또한 반드시 후기의 무리가 도왔을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재가 많았던 때는 오직 우나라와 주나라이니 그러므로 사대의 음악 중에서 韶와 武가 유독 그 아름다움이 지극하였을 따름이다. 武가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는 말은 유사가 전승을 잃어버림을 말한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주나라의 악공이 후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악기」에 이르기를, "소리의 탐욕스러움이 상나라에 미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답하기를, "武의 소리가 아닙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만약 武의 소리가 아니라면 무슨 소리입니까?", 대답하기를, "유사가 그 전승을 잃었습니다. 만약 유사가 그 전승을 잃은 것이 아니라면 무왕의 뜻이 황폐해진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 제가 장홍에게 들었는데 또한 그대의 말과 같았습니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武가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는 말이다.
二十六章
○“居上不寬”章, 朱註爲得之. 言本立而其所行得失可得而觀也. 本之不立, 雖有善, 不足觀耳. 觀政, 觀禮, 觀喪, 古有此事, 觀其得失, 善者效之, 不善戒之也. 蓋寬者謂有容也. 一國之君子, 蓄一國之民, 天下之君子, 蓄天下之民, 唯寬也有所容焉. 有所容焉, 而後群下得措其身焉. 然後有所養而安焉. 故寬者仁之本也. 不曰仁者, 仁至矣, 不仁至矣. 苟不仁邪, 尙何須觀也? 不曰慈惠者, 慈惠而不寬者有之, 未有意而不慈惠者也. 聖人之言, 如遠而實近者, 如是邪. 禮以敬爲本, 敬天與祖宗也. 後儒或以寬假或以主一無適爲解者, 皆不識古言也, 不識聖人道也. 臨喪者吾臨他人之喪也. 臨他人之喪, 必哭, 故或謂哭爲臨.
"윗자리에 있으면서 관용하지 않고"에 대하여, 주자의 주석이 뜻을 얻었다. 주석에서 말하기를, 근본이 서면 그 행하는 바의 득실을 살펴 얻어볼 수 있다 하였다. 근본이 서지 않으면 비록 훌륭하다 하여도 살펴보기에는 부족할 따름이다. 政, 禮, 喪을 살핌에 옛날에 이러한 일이 있으면 그 득실을 살펴 훌륭한 것을 따르고 좋지 않은 것을 경계한다. 대개 너그러움이란 용납함이 있음을 말한다. 한 나라의 군자는 한 나라의 백성을 기르고 천하의 군자는 천하의 백성을 기르니 오직 너그럽게 용납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용납하는 바가 있은 이후에야 여러 아랫사람들이 그 몸을 두니 그러한 연후에야 기르는 바가 있어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너그러움은 인의 근본이니 인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인도 지극하고 불인도 지극하여서이다. 만약 불인하다면 오히려 무엇을 살피겠는가? 자애와 은혜를 말하지 않은 것은 자애롭고 은혜로우면서도 너그럽지 않은 사람이 있지만 너그러우면서도 자애롭고 은혜로운 사람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의 말은 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가까운 것이 이와 같다. 예는 공경을 근본으로 하니 하늘과 조종을 공경하는 것이다. 후세의 유학자들은 혹은 관가(寬假-너그러움)로, 혹은 주일무적(主一無適-마음을 하나로 모아 집중함)으로 풀이하였으니 모두 옛 말을 알지 못한 것이고 성인의 도를 알지 못한 것이다. 상에 임하여라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의 상에 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상에 임할 때에는 반드시 곡을 하니 그러므로 혹자는 哭을 臨이라 하였다.
- ↑ 論語 先進에 증점이 "세 사람의 택함과는 다르다(異乎三子者之撰)"라 하였다.
- ↑ 禮記 樂記에 "(예악을) 만드는 사람을 성이라 하고 서술하는 사람을 명이라 하니(作者之謂聖, 述者之謂明)"라 하였다.
- ↑ 書經 弘範
- ↑ 近思錄에, "성왕이 어려 주공이 섭정하다가 주공이 죽으니 성왕이 그 훈덕을 생각하여 노나라에 천자의 예악을 내리고 주공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이에 대해 공자는 성왕이 하사한 것과 백금이 받은 것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成王幼, 周公攝政, 周公沒, 成王思其勳德, 錫魯以天子之禮樂, 使祀周公焉, 孔子曰, 成王之賜, 伯禽之受,皆非也.)”라 하였다.
- ↑ 앞에서 왕세정이 요순우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書經 舜典, 大禹謨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復子는 周書 洛誥에 "주공이 배수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 밝은 군주에게 복명한다(周公拜手稽首曰, 朕復子明辟.)에서 유래한 말이다.
- ↑ 인을 안민지덕이라 하여 통치술로 보아 이치를 논한 성리학과 궤를 달리하였으며, 1~3장에서 일관되게 공자의 말을 제언적인 강한 말이 아니라 청유하는 말이라 하였다.
- ↑ 孔子家語 曲禮子夏問
- ↑ 孟子 離婁
- ↑ 漢書·禮樂志에,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를 본받았으되 예와 문이 더욱 구체적이어서 사물에 대해서는 절제가 되고 곡진함에 대해서는 방비가 되었으므로 칭하기를 '지켜야 할 예절은 삼백 가지요, 몸가짐을 바르게 할 계는 삼천 가지라'.(周監于二代, 禮文尤具, 事爲之制, 曲爲之防, 故稱禮經三百, 威儀三千.)"라 하였다.
- ↑ 周禮 地官 大司徒, "以五禮防民僞, 而敎之中."
- ↑ 孔子家語 曲禮子夏問
- ↑ 『儀禮』, "揖讓而升, 謂飲射爵時, 揖讓非射時也."
- ↑ 이상 인용문은 모두 『예기』『예운』을 출전으로 한다.
- ↑ 이 인용문은 『예기』『명당위』를 출전으로 한다.
- ↑ 『논어집주』의 내용이다.
- ↑ 『論語·鄕黨』
- ↑ 阮瞻은 위진시기 인물로, 여기에서는 그가 유학과 노장학의 차이에 대해 "아마 같지 않을 것이다.(將無同)"라 대답한 것에 대해 有無의 화법을 쓴 부분에 주목하여 말한 것이다.
- ↑ 『文獻通考』卷97
- ↑ 夏는 우임금의 악명이고, 濩는 탕왕의 악명이다.
- ↑ 「孟子」, “堯舜, 性之也, 湯武, 身之也, 五霸, 假之也.
- ↑ 「樂記」, "及夫禮樂之, 極乎天而蟠乎地(...)"
- ↑ 「論語」, “師摯之始, 關雎之亂, 洋洋乎盈耳哉.”
- ↑ 「樂記」, "律小大之稱, 比終始之序, 以象事行, 使親疎貴賤長幼男女之理, 皆形見於樂, 故曰樂觀其深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