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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金鍾泌)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직 군인이다.<br/>
 
김종필(金鍾泌)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직 군인이다.<br/>
 
1961년, 그는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에 참여했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br/>
 
1961년, 그는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에 참여했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br/>
5.16 군사 정변 이후 5월 20일 중앙정보부를 조직하여 부장으로 취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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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정변 이후 5월 20일 중앙정보부를 조직하여 초대 부장으로 취임하였다.<br/>
박정희 사망 후 '삼김시대'의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중 한 명으로 대표되는 정치인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 중앙 정치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충청권 보수정당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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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사망 후 '삼김시대'의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중 한 명으로 대표되는 정치인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 중앙 정치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충청권 보수정당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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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 사건과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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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사건은 주한 유엔군의 휴양지를 만들어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김종필의 착상으로 1961년석정선(石正善) 중앙정보부 제2국장 등이 주축이 되어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장동에 워커힐호텔을 세우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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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사건은 주한 유엔군의 휴양지를 만들어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김종필의 착상으로 1961년 석정선(石正善) 중앙정보부 제2국장 등이 주축이 되어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장동에 워커힐호텔을 세우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br/>
 
이들은 교통부가 워커힐호텔의 건설을 주관토록 조처하였고, 워커힐호텔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부진해졌다. 그러자 교통부장관 박춘식(朴春植)과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申斗泳) 등으로 인한 막대한 공작자금과 각 군의 공병감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등의 행위로 인해 이들 중 일부는 서울지검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교통부가 워커힐호텔의 건설을 주관토록 조처하였고, 워커힐호텔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부진해졌다. 그러자 교통부장관 박춘식(朴春植)과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申斗泳) 등으로 인한 막대한 공작자금과 각 군의 공병감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등의 행위로 인해 이들 중 일부는 서울지검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2020년 5월 20일 (수) 15:1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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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jpg


1. 개요

김종필(金鍾泌)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전직 군인이다.
1961년, 그는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쿠데타에 참여했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5월 20일 중앙정보부를 조직하여 초대 부장으로 취임하였다.
박정희 사망 후 '삼김시대'의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중 한 명으로 대표되는 정치인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 중앙 정치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충청권 보수정당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한다.

2. 김종필과 박정희

박정희와의 만남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 후 그는 육군본부 정보장교(소위)로 배속됐고, 작전정보실장인 박정희와 인연을 맺게 된다. 군부 내 남로당 조직책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사형 구형을 받았다 극적으로 회생한 박정희는 군복을 벗고 정보국 문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1951년 김종희가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하면서 처삼촌-조카사위라는 인척 관계를 맺게 된다. 이후 김종필은 박정희의 든든한 협력가이자 기획자로서 역할을 한다.

5.16 군사정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들어선 제2공화국 장면 내각시절,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정군운동을 벌이다 항명파동으로 강제 전역되었다. 그리고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5.16 군사정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쿠데타 성공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후 다시 예편했다. 군사정부에서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했다.
이후 강력한 정보기관의 설립을 주장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냈다.

최측근이자 갈등의 씨앗

향후 박정희의 최측근이자 정치인으로서 유신 이후에도 박정희에게 적극 협조하며 국무총리직을 장기간 유지했고, "통일, 외교, 국방, 중화학공업만 빼고 나머진 모두 임자가 알아서 하라"는 박정희의 신임으로 실세 총리로 군림했다. 그러나 정권의 2인자이기에 끊임없이 박정희와 갈등했고, 1975년 12월 18일 국무총리직에서 전격 경질되었다가 1979년 3월 제10대 국회의원에서 재선하였다.


박정희 사후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되고 김영삼, 김대중과 "빠른 시일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였다. 그 뒤로 40년이 넘는 정치 생활을 하다 정계를 은퇴하고 2018년 5월부터 2018년 6월 23일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호흡곤란 증세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학교병원 이송 중 사망했다. 향년 92세.


3. 워커힐 사건

사대의혹 사건

5·16군사정변 이후의 군사정권 밑에서 발생하였던 네 가지의 부정부패사건. 그 중 하나가 워커힐 사건이다.

워커힐 사건과 김종필

워커힐사건은 주한 유엔군의 휴양지를 만들어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김종필의 착상으로 1961년 석정선(石正善) 중앙정보부 제2국장 등이 주축이 되어 서울특별시 성동구 광장동에 워커힐호텔을 세우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들은 교통부가 워커힐호텔의 건설을 주관토록 조처하였고, 워커힐호텔 건설공사가 자금난으로 부진해졌다. 그러자 교통부장관 박춘식(朴春植)과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申斗泳) 등으로 인한 막대한 공작자금과 각 군의 공병감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등의 행위로 인해 이들 중 일부는 서울지검에 구속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