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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4월 23일 (화) 21:2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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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큐레이션의 교육학적 연구

"오늘의 학생들을 어제처럼 가르치면 이는 학생들의 미래를 빼앗는 것이다.If we teach today's students as we taught yesterday's, we rob them of tomorrow." 존 듀이의 말이다. 엘빈 토플러는 “과거의 획일회된 정책으로는 교육, 의료, 고용 등 다양한 분량에 걸친 양극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대량 사회, 대중의 시대에 썼던 방법이 아니라 다원화되고 개인화된 문제에 걸맞는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또 “인터넷과 새로운 통신서비스의 공공활용을 확산시키는 것이 국익을 창출하는 길이다”고 조언했다. 그런가하면 한국의 교육방식에 대해 비판한 적도 있다. 그는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1]

디지털 큐레이션

디지털 큐레이션(Digital Curation)은 디지털 자원을 제공, 보존, 유지, 수집, 아카이빙하는 것을 지칭한다. 넓게 보면 현재와 장래에 이용될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정보를 유지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대체로 해석할 수 있다(Digital Curation Center). 즉 디지털 큐레이션은 연구자, 과학자, 역사학자 등이 현재와 장래에 참고할 수 있도록 디지털 자원의 장기 보존소를 설립하고 개발하는 과정이다. 이 정의는 디지털 아키이빙과 보존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수한 데이터 생산과 관리에 필요한 과정,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되도록 데이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용어이다. 디지털 정보원의 큐레이션과 장기적인 보존은 연구 및 교육 분야의 광범위한 활동에서 점차 더 중요해 질 것이다.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예측해 보면 디지털 정보원과 데이터들은 압도적인 비율로 증가하면서 복잡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 중에서도 과학데이터, 예를 들면 인공위성, 입자가속장치, 유전자염기서울분석과 같은 정보원의 생산비용은 매우 높다. 이러한 데이터는 학술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한 증거 기반이면서 그 결론을 확인하고 이를 재현하기 위한 기본원리로서 매우 중요하다. 큐레이션은 데이터가 학술적 및 과학적으로 관심대상이 되는 생애주기동안 이러한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이는 데이터의 재현과 재이용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2]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는 ‘보살피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류라레(curare)에서 유래했다. ‘보살피다’, ‘돌보다’는 뜻 외에도 이 단어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역사적으로 사회 기반 시설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를 두고 큐레이터(curator)라 칭했다. …. ‘보살피다’는 의미는 박물관 및 미술관 큐레이터의 기원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16세기와 17세기 당시 아주 부유한 수집가들은 이른바 ‘호기심의 방(Cabinets of Curiosities)’ 또는 ‘분더카머(Wunderkammer)’라고 불리는 방을 만들어 과학기기에서부터 고대 유물 조각에 이르기까지 온갖 진귀한 것들을 한데 모아두곤 했다. 그리고 그 수집품이 훼손되거나 도난당하지 않도록 돌보는 것은 하나의 직업이 됐다.”(책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저) “이제는 누구나 큐레이터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개인적 선택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기도 하지요. 요컨대 오늘날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는 개인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해 미술 비평가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큐레이션은 그 의미가 서서히 변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처음에는 보살피고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 그런데 박물관이 점차 단기전시를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물품을 선별 및 배치하고 전시하는 데 압박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큐레이터는 단순히 전시품을 건사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때로는 미술가로 때로는 기획자로서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주요 작품을 알아보는 역할까지 맡게 됐습니다.” (책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저) “정치 및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던 큐레이션은 미술계에서 사용되던 것을 지나 인터넷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개념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웹 콘텐츠의 과잉 현상에 대응했던 각종 기술은 이제 오프라인으로 넘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은 사실 긴 호황 직후의 과잉 현상에도 상당한 가치를 입증하기도 했다. 큐레이션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현상을 모두가 반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이 단어는 사용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며 그 의미 역시 한층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 구글 트렌드 결과를 보면 사람들이 어떤 단어를 검색했는지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검색된 단어부터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큐레이션 콘텐츠, 디지털 큐레이션, 데이터 큐레이션, 큐레이션 정의, 소셜 큐레이션, 큐레이션 도구, 큐레이션 의미, 아트 큐레이션, 미술관 큐레이션, 미디어 큐레이션. …. 여기서 말하는 큐레이션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활동’이다. 사람들은 큐레이션에 필요한 도구를 알고 싶어 한다. 콘텐츠 큐레이션은 그저 앉아서 구경하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는 활동이다.”(책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저) [3]

전세계적으로 빅데이터의 활용이 확대되는 가운데, 방대하고 복잡한 데이터에서 `질' 높은 정보를 선별해 발굴하는 것은 기업의 정보 취급 핵심역량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을 잘 반영하는 빅데이터가 있더라도 경영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빅데이터에 대한 하드웨어 투자는 비용 낭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즘에는 빅데이터를 최적으로 구축하고 분석, 활용하는 등 전 과정을 지휘하는 활동인 `빅데이터 큐레이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참고로 빅데이터 큐레이션은 데이터의 숨은 가치와 잠재력 발굴을 추구하는 활동을 얘기합니다. 일반적인 큐레이션(작품에 생기를 부여하는 활동)의 주 대상이 관람객이라면, 빅데이터 큐레이션의 수혜자는 기업의 각 부서와 최고 의사결정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통업체 시어스는 실시간으로 점포별 재고, 경쟁업체 가격, 날씨예보 등 다양한 빅데이터를 분석해 적당한 가격을 책정하고 재고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8주 걸리던 전체 품목의 가격탄력성 분석이 많은 데이터를 분석함에도 1주로 단축됐습니다. 유럽연합의 의료정보시스템 메디시스는 질병 발생 경고에 빅데이터 큐레이션을 도입했습니다. 의학전문사이트 400개, 뉴스포털 3750개 등에서 수집한 뉴스를 수백개 그룹으로 분류해 지속적으로 추적해 중요한 이벤트를 포착해 질병 경고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특히 아마존과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최고경영자(CEO)는 빅데이터 큐레이션을 적용한 후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해 낸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빅데이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회사를 빅데이터 큐레이션의 모범기업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아마존은 업무에서 파생되는 빅데이터를 차별화된 서비스 창출의 지렛대로 활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웹사이트에서 고객활동 데이터 확보→고객의 쇼핑 편의성을 높일 서비스 아이디어 도출→효과 검증을 위한 데이터 추가 확보 장치 마련하도록 반복적으로 독려하면서 아마존의 빅데이터 역량을 고양하는 순이었습니다. 현재 아마존의 서비스 중 인기를 끌고 있는 관심제품 추천 서비스와 원클릭 구매환경은 빅데이터 큐레이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빅데이터가 날로 발전하고 있는 현재, 빅데이터 큐레이션을 통해 빅데이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빅데이터의 부작용으로 꼽히고 있는 정보 보안 등의 불안 요소도 큐레이션을 통해서는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데이터 큐레이션이라는 개념도 등장했는데 데이터 큐레이션은 디지털 큐레이션의 하위범주로 연구데이터의 생애주기 동안 체계적인 관리와 보존을 통하여 지속적인 접근 및 재사용을 보장하는 활동을 말한다. [5]

2020년이 되면 전 세계 60억 인구가 인터넷을 사용하게 된다. 지금의 두 배다. 누구나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전 세계 어디서나 전자상거래는 물론 최상의 온라인 교육 기회를 누릴 수 있다. 문제는 정보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홍수다. 콘텐츠의 과잉이다. 시장이 원하는 것만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여과 장치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크라우드 소싱과 큐레이션이 대신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 콘텐츠의 과잉은 대중이 참여하는 소셜 큐레이션에 의해 필터링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크라우드 소싱에 의해 집단 지성을 이끄는 커뮤니티가 생겨난다. 커뮤니티는 콘텐츠 여과를 지속할 수 있는 장치로 큐레이션 플랫폼을 갖춰야 한다. 이를 알고리즘화하면 지식 재산이 되고 사업 모델이 된다. 디지털 큐레이션 플랫폼의 선구자는 페이스북과 네이버라 할 수 있다. 이제 스마트폰 사용과 함께 소셜미디어의 확산으로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가 빠르게 늘고 있다. 개인의 주관이나 관점에 따라 관련 콘텐츠를 수집·정리하고 편집, 이용자와 관련이 있거나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뉴스를 공유하는 플립보드, 사진을 공유하는 핀터레스트 등이 대표 기업이 됐다. 개인 맞춤 학습을 지향하는 에듀테크 역시 콘텐츠 큐레이션 서비스가 핵심이다. [6]

최근 들어 큐레이션의 적용이 미술 및 예술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물론 그 기본개념은 방금 위에서 살펴본 저들의 업무로부터 파생된 것이지만, 그 개념의 확장과 적용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오픈북 기사 ‘서점, 복합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하다’에서도 언급된 것과 같이 서점은 이제 다양한 책을 구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특정 주제와 컨셉을 가지고 편집 배치하는 큐레이션 서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전자 상거래 업계의 경우 큐레이션은 더욱이 보편화된 개념이다. 대표적으로, 유명 전자 상거래 사이트인 G마켓과 옥션을 운영하는 이베이코리아는 2013년부터 큐레이션 전문 쇼핑몰인 ‘G9’를 운영하고있다. ‘G9’뿐만 아니라 많은 유통관련 업체들 또한 과거 이월상품이나 할인된 상품을 판매하던 이른바 홈쇼핑 형식의 판매전략에서 벗어나 트렌드와 소비심리를 집중 분석하여 한 가지 주제의 여러 상품들을 한데 모아 판매하는 형식의 큐레이션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교육 컨텐츠 큐레이션, 시 큐레이션, 음식 큐레이션 등의 다양한 큐레이션이 생겨났다. 큐레이션이 유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너무 많은 양의 정보와 너무 다양한 자원(resource)이 우리의 현명한 선택을 방해하는 현실 때문이다. 따라서 큐레이션은 현대의 우리에게 어찌보면 필수 불가결의 서비스일지도 모른다. 경제학자이자 디지털 퍼블리싱 콘텐츠 기업 카넬로(Canelo)의 발행인인 마이클 바스카는 그의 책에서 현대의 큐레이션을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덜어내는 힘이자 선별과 배치를 통해 원하는 것을 가려내는 기술’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해석했을 때, 지금의 큐레이션은 특정한 주제와 목적을 가지고 방대한 양을 가진 어떤 한 콘텐츠를 편집 및 재생산하여 수용자에게 전달하는 일련의 서비스 행위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소비 목적과 부합한 큐레이션은 우리가 정보를 찾는데 들여야 하는 시간을 절약시켜줄 뿐만 아니라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해주는 좋은 창구가 되어준다. [7]

식음료업계에 따르면 매장을 찾아가 판매원에게 다양한 제안이나 서비스를 받는 ‘큐레이션 서비스’가 화장품이나 패션 등 쇼핑 영역을 벗어나 식품으로 확장하고 있다. 현대인의 고질병은 ‘결정 장애’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로 다양한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맞춰 전문가가 골라주는 큐레이션 서비스에 대한 선호도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스시치하루와 같은 ‘오마카세 스시집’이다. 오마카세 스시는 과거 고급 호텔 일식집 등에서나 만나볼 수 있었다. 이런 곳에 가더라도 메뉴판에 표기가 없어 단골 손님들이 알음알음 오마카세 서비스를 요청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오마카세 스시의 특별함을 누리고자 하는 고객이 늘면서 강남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 오마카세 스시집이 늘어나는 추세다. 가격대도 기존 오마카세가 ‘시가’로 책정돼 고가가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2~10만 원대까지 다양한 가격대에 비교적 저렴하게 즐길 수 있게 됐다. 스시치하루 역시 점심은 2~3만 원대, 저녁은 3~10만 원대에 선보이고 있다. 요새는 스시 전문점 외에 한우 구이 전문점 등에서도 오마카세 서비스를 서서히 도입하는 곳이 나오고 있다. 김나연 롯데백화점 식품컨텐츠개발팀장은 “온라인 쇼핑 시대에 오프라인 매장이 살아남는 방법은 소비자에게 전문적인 서비스와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기존에 뷰티와 패션 부문에서 이러한 큐레이션 서비스가 적극적으로 도입됐다면, 앞으로는 식음료 쪽으로 이 같은 맞춤형 서비스가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8]

이제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을 배우는 시대가 아닌 자기가 자료를 연결시켜 가며 스스로 학습을 하는 큐레이션 학습이 가능해졌다. 그 안에서 알기 어려웠던 내용이나 관심없던 내용이 생명력을 갖게 된다.


빅데이터

교육 빅데이터는 다양한 교육활동 속에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나이스(NEIS)나 에듀파인은 물론 학생들 스마트기기에 들어있는 데이터와 학교와 학급의 SNS상의 데이터들처럼 양 또한 방대하다. 여기에 교사의 학습지도안과 교과서, 교수자료로 쓰이는 이미지와 동영상 등 비정형 데이터까지 포함시킨다면 그 양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이처럼 교육분야는 다양한 데이터들이 존재한다. 지금까지는 교육과 직접 관련 있는 데이터들만 수집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데 이용해 왔다. 이제부터라도 빅데이터 분석·처리개념을 교육에 적용한다면 앞서 언급한 사례들처럼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 것으로 기대된다. [9]

2008년 미국 잡지 와이어드 편집장 크리스 앤더슨은 “데이터만 충분하다면 숫자들이 스스로 입을 연다”면서 “빅데이터가 이론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빅데이터 규모는 100기가 수준인 ‘페타바이트’(10의 15승 바이트)였다. 일주일 이내에 인류가 생산하는 정보가 ‘엑사바이트’(10의 18승 바이트)에 이르는 시대임을 고려할 때 그의 주장은 다소 우습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빅데이터 대두에 따라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으로 전망한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21세기의 석유’, ‘21세기의 금맥’으로도 불리는 빅데이터가 주목받는 이유다. 이런 빅데이터를 활용해 고등 교육의 질을 높이고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개선할 수도 있다. 교육 분야 데이터는 학습 활동 데이터, 콘텐츠 데이터, 학습자 프로파일, 커리어 데이터, 교육기관 운영 데이터 등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학습자의 성공적인 학습경험과 맞춤형 학습과정을 제공하기 위한 학습 분석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을 주축으로 가장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빅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학생 지원 서비스와 학교 경영을 위한 의사결정 자료로 활용하는 외국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미국 조지아 주립대는 수업료 부담과 낮은 학습 준비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별 학생들의 데이터와 800개의 관련 변수를 분석, 개인화된 수강신청 가이드를 제공한다. 또 시스템을 통한 5만 회 이상의 학생상담을 유도해 학습장애를 처방하고 비용을 절감했다. 애리조나 주립대는 학생들의 학습시간, 학습참여, 문제풀이 등의 데이터를 수집해 수준별 학습자료 및 학습과정을 제공하는 적응형 학습 플랫폼으로 기초수학과정 이수율을 65%에서 85%로 높였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만족도 역시 크게 향상됐으며, 현재는 이를 다른 강좌에 확대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미시간대는 기초과목 등에서 500명이 넘는 학생을 가르쳐야 하는 교수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지능형 시스템을 개발했다. 학습활동이나 시험 점수와 같은 학생 데이터와 코칭팀 행동 모델을 기반으로 맞춤형 메시지와 데이터 그래프를 개별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이후 피드백을 받은 학생들의 학업 성과는 비교 집단보다 10~20% 정도 올랐다. 데이터 분석은 신입생 모집전략에도 사용된다. 선발 시 실제 등록률을 높일 수 있는지 핵심성과지표를 분석한다. 광범위한 홍보 대신 선택과 집중 전략을 수립하고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잠재적 입학생들의 관심과 학업에 대한 행동모델 등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10]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빅데이터를 통한 분석과 예측에 머무른다.

빅데이터가 교육분야에도 활용될 수 있을까? [11]

스몰데이터

한때 `잘 나가던 장난감 회사`로 이름을 날렸던 덴마크의 레고(LEGO)는 2000년대 초 파산 위기에 놓였다.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레고가 수차례 빅데이터 분석을 실시한 결과 도출된 결론은 한결 같았다. 바로 미래세대는 레고에 흥미를 잃는다는 것. `디지털 네이티브(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이전 세대와 비교했을 때 시간과 인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이상 레고 같은 블록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레고의 근본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흔들리는 암담한 결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고의 마케터들이 독일에 있는 한 11세 소년 집을 방문했다. 그 소년은 `레고 마니아`이면서 열정적인 스케이트보더였다. 마케터들이 소년에게 `갖고 있는 물건 중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한 운동화를 꺼내 들었다. 운동화는 낡고 헐었지만, 이 운동화는 소년이 동네에서 가장 스케이트보드를 잘 타는 사람이라는 `증표`였다. 이때 레고 마케터들은 어린이들의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본인이 선택한 `기술`을 발전시켜 이를 이뤘다는 증거가 되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레고는 그 자체로 아이들의 사회생활에서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빅데이터를 통해서는 알 수 없었던 정보였다. 이후 레고는 업의 기본으로 돌아가 `블록`에 다시 집중했다. 블록의 크기는 더 작아졌고, 조립 설명서는 더 상세해졌다. 고객들이 시간을 더 들여 `작품`을 만들어내 주변으로부터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게 말이다. 잘못된 분석으로 헛발질을 하던 레고는 이를 통해 극적인 턴어라운드에 성공했고 이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장난감 회사가 됐다. [12]

빅히스토리

내가 어렸을 때 빅 히스토리가 없었다는 것이 속상하다. 만약 있었다면 나는 더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어떤 형태로든 지식을 연결시켰을 것이다.”–빌 게이츠

“빅히스토리를 공부하는 건, 여러 종류의 책을 정리할 수 있는 책장을 가지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빅히스토리를공부하면)나중에 어떤 것을 공부할 때도 이것이 전체 맥락에서 어디쯤 위치한 것인지 금세 알 수 있다. 앞으로는 여러 학문이 융합하는 게 점점 많아지고 중요해진다. 빅히스토리를 하면 지식을 블렌딩하는 걸 더 잘할 수 있다.”[13]

하나고 이효근 교사는 "흔히 얘기하는 역사(歷史)는 문명의 발상부터 시작하지만, 빅히스토리는 137억년 전 우주 빅뱅(대폭발)부터 시작한다"면서 "모든 것의 역사를 찾아서 연결짓는 것이 빅히스토리"라고 설명했다. 잠시 후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나가 우주의 연대기(타임라인)를 함께 그렸다. 한 걸음을 1억년으로 하면 지구는 빅뱅부터 91걸음을 걸어야 나타난다. 거기서 20걸음을 더 걸어야 생명이 탄생하고, 인간과 문명은 마지막 한 걸음 사이에 다 모여있다. 학생들이 직접 빅히스토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활동이다. '생명은 왜 성(性)을 탄생시켰나' '인간은 왜 꼭 죽어야 하는가' 등 '빅퀘스천(거대질문)'에 대한 답도 탐구한다. "예를 들어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와의 경쟁에서 뒤처져 멸종했어요. 기존 교육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모습과 멸종한 시점만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5분이면 되죠. 빅히스토리 과목은 달라요. 2시간에 걸쳐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던 지역과 기후, 사회적 특성까지 배워 왜 현생인류에게 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고듭니다." 수업의 핵심은 학생들의 호기심과 탐구심이다. 박도은(17)양은 "수학이나 과학 문제를 풀고 공식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이충석(17)군도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1989년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크리스천 호주 맥쿼리대 교수가 처음 주창한 빅히스토리는 미국·호주 등에서 이미 활발히 보급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도 전폭 지원한다. 한국에 빅히스토리가 도입된 것은 2009년 고(故)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가 지구사연구소를 설립하면서다. 이 교사와 김 교사도 지구사연구소 교육에 참여하면서 빅히스토리를 접했다.

이 교사는 "통섭(統攝), 융합 등 학문 간 장벽을 허물기 위한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항상 구호에 그쳤다"면서 "그런데 빅히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학문을 동원해 문제를 푼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됐다"고 했다.

현재 서초고·풍문여고·대원국제중·성수중·상암중 등에서는 빅히스토리를 방과후 과목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나고의 실험이 성공하면 다른 학교로 전파될 가능성이 크다. 하나고에 문의해오는 다른 학교 교사들 중에는 '모든 것의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 교사는 "기존 수업이 패키지 여행처럼 가이드(교사)가 정해준 대로 따라다니는 수업이었다면, 빅히스토리는 배낭여행법을 알려주는 것"이라며 "교사가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자세만 가지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14]

디지털 큐레이션 교육법은 본격적인 프로그래밍을 가르쳐서 엔지니어를 양성하는 교육법이 아니다. 그보다 탐구정신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육방법이다.

연결주의

연결주의(connectivism)는 Siemens(2005)와 Downes(2005)에 의해 주장되었다. Siemens에 따르면 학습은 학습자가 새로운 정보와 지식, 사람, 인공지능 시스템 등과의 새로운 연결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연결은 결국 새로운 정보나 지식과의 접촉을 의미하며 이러한 접촉이 결국 그들 정보를 이용하여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학습의 의미를 갖게 된다. 네트워크 사회는 기존의 사회와는 다른 패러다임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웹 2.0의 새로운 테크놀로지 발달은 사회변화를 위한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들 인프라의 변화가 사회적 행동 유도성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사회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교육에도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육성해야할 인재상의 변화, 가르칠 내용 즉 교육과정의 변화, 교육환경의 변화, 학습자의 변화, 교사상의 변화, 교육방법의 변화 등 다양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현실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변화에 대해 교육차원의 변화가 나타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적절한 비전의 제시와 비전을 성취할 전략적 접근의 효과적인 제시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를 들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네트워크 사회에 대한 변화 읽기로 네트워크 사회, 웹 2.0, 연결주의, 넷 세대, 집단지성 등의 다섯 가지 요인들을 살펴보았고 이에 기초하여 개인학습에서 네트워크 학습 중심으로, 지식소비자에서 프로슈머 중심으로, 개별화에서 개인화 중심으로, 공식에 비공식 중심으로, 개별지성에서 집단지성 중심으로의 다섯 가지 새로운 교육의 변화 방향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교육의 변화 방향은 네트워크 사회에서 지향해야할 교육의 목적 혹은 가치 지향적 비전이라기보다는 네트워크 사회의 특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타날 교육의 변화를 기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학습과 지식은 의견의 다양성에 의존한다. 학습은 특별환 교점이나 정보자원과의 연결과정이다. 학습은 비인간적 기기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현재 무엇을 알고 있는지 보다 더 중요하다. 지속적 학습을 촉진하기 위해 연결들을 풍부하게하거나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역들, 아이디어들, 개념 들 간의 연결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핵심적 기술이다. 최신성(최신 지식으로 업데이트)이 연결주의 학습활동의 목적이다. 의사결정 자체가 학습과정이다. 최신의 시작과 변화하는 시각으로 무엇을 배울지 정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결정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연결주의(connectivism)의 핵심적 아이디어는 학습을 다양한 교점과의 연결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점이란 사람뿐만 아니라 정보, 지식, 인공지능시스템, 데이터 등도 포함하고 있다. 알고 있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는 능력 즉 사회적 변화에 따라 적응적으 로 학습내용과 방법을 결정해 갈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학습능력으로 판단한다.

Kop(2011)은 연결주의에 기초하여 학습이 이루어지는 네 가지 주요한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집적(aggregation) 활동으로 다양한 자원에 접속하고 수집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관계(relation) 활동으로 학습자가 어떤 콘텐츠를 읽고, 보고, 들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사전 경험과 연관시키거나 성찰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창조활동으로 성찰이나 의미형성 단계 이후에 학습자는 SNS를 통해 자신만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의미한다. 공유(sharing) 활동으로 학습자는 자신들의 작업을 네트워크를 통해 타인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연결주의는 개인학습에서 네트워크 학습 중심으로, 지식 소비자에서 프로슈머 중심으로, 개별화에서 개인화 중심으로, 공식에서 비공식 학습 중심으로, 개별지성에서 집단지성 중심으로 교육의 새로운 변화를 예상한다. 현재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네트워크를 십분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급내에서는 내신위주의 교육시스템에 따라 협력보다는 경쟁중심의 개인학습이 강조되고 있다. 최근 들어 스마트 교실이 구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교실 중심의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교실을 넘어선 다른 인적 혹은 물적 자원과의 네트워킹을 통한 학습활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학생들이 넷 세대인데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여전히 기존의 수업방식에 의존하며 변화를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 문제점이며 또한 넷 세대 학생들에게 네트워크를 이용한 수업을 하게 되면 기존의 수업보다는 소란스럽고 다른 문제점을 우려하여 교사들이 더욱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수업을 시도하고자 하는 교사가 많지만 교육과정이 자주 바뀌고 교육현장이 입시위주로 무한경쟁의 시대로 흐르고 있어 교사의 무기력증이 새로운 교육의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집단지성이 교육활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정보를 동료 학습자들과 함께 협업하여 창조하고 서로의 학습을 위해 학습자와 교사의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된다면 네트워크 사회에서 필요한 미래의 인재인 경쟁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인재양성이 될 것이다. [15]

4차 산업혁명의 3가지 키워드로 요약하면 초지능, 초연결, 초실감 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결합된 초지능, IoT/소셜네트워크/블록체인기술이 연결되는 초연결, 그리고 VR/AR 기술로 대변되는 초실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1:1 학습이 교실수업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벤자민 블룸이 제시한 2시그마의 문제, 이 문제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과 결합되어 1:1 수업의 대중화가 가능함을 기술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90% 학습이 발생하는 인포멀 수업에 대한 문제는 초연결 사회가 도래함으로 언제/어디서는 선생님과 학생이 연결되어 수업이 가능한 교육 환경으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또한 오프라인 수업보다 더욱 실감있는 수업이 VR/AR 등의 초실감 기술을 통해 구현이 가능하여 학습몰입이라는 교육의 근본적인 과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1 수업을 모두 진행할 수는 없었지요. 비용/대상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과외는 돈 많은 사람, 상위층에 한정되어 진행되어 왔떤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 교육은 교육 효과적으로 단점이 있음에 불구하고 One Size Fits All로 진행되었고 서바이벌 방식으로 개개인 학생들의 이해도와는 상관없이 진도를 나가기에 급급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비용 효율성이라는 측면과 현실적인 한계라는 측면에서 1:1 수업이 그 동안 불가능했던 것이지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의 등장은 이런 한계를 극복해 주고 있습니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통해 1:1 맞춤형 학습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다양한 엑튜에이터들이 나와서 나만의 학습방법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기술은 그 동안 교육에 있어서 난제로 여기어졌던 모든 학생에 대한 1:1 수업을 나만의 학습내용은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을 위한 교육서비스를 받는 것이 가능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702010의 법칙을 기반으로 한다면 사람들이 학습하는 것은 10%만 교육에서 20% 타인에게 70%는 경험을 통해 학습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입증 결과들이 이 이론을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육 현실은 학습이 일어나는 10%에 90%의 교육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90%에 관해서는 교육환경의 한계라 얘기하며 전혀 관여를 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즉, 자율에 맡긴다는 미명하에 교육은 실제 학습이 일어나는 90% 영역에 거의 투자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이런 시점에서 SNS 등 소셜 네트워크의 급성장은 소셜러닝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소셜러닝은 협의적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학습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론적 근거는 앨버트 반두라의 사회적학습이론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이론적 기반을 바탕으로 소셜미디어의 급성장은 조지 지멘스의 연결주의 이론까지 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과거 학습자 중심의 인지주의, 행동주의, 구성주의 교육학 이론에서 학습자 네트워크 중심의 연결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소셜러닝이 급성장하게 된 이유로는 다양한 기술의 발전과 라이프 스타일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여가시간에 미디어에 접촉하는 비율은 스크린 기반이 90%까지 이르렀고 과거 미디어 접촉비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대면, 라디오, 신문 위주의 미디어 접촉 비율은 10%까지 낮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스크린 기반으로 함께 하는 평균 시간은 여가시간에 4.4 시간이나 차지하고 있습니다. 스크린 접촉 비율과 더불어 모바일 사용시간 또한 급신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4시간에 육박하는 평균 모바일 이용시간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행동패턴과 더불어 우리는 초연결이라는 불리는 사회에 살게 될 것입니다. 500억에 달하는 디바이스로 연결되는 초연결 사회가 2020년이면 도래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서로 연결된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될 것입니다. 이런 초연결사회의 등장과 모바일, 스크린 기반의 생활패턴 변화는 교육환경 또한 거대하게 바꾸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선생님이 학생을 일방적으로 오프라인에서 가르치는 환경에서 "누구에게나 연결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소셜러닝 환경"으로 우리 교육환경을 급격하게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습몰입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학습몰입은 학습을 시작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학습자가 몰입되어 있으면 교육효과는 당연히 높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결국 학습이라는 것은 학습자 스스로가 얼마나 수용/이해/적용/성장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학습자의 학습몰입은 가장 중요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학습 몰입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적은 매우 훌륭한데 학습에 임하는 자신감이나 학습을 느끼는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이런 학습 몰입을 위해 등장하는 에듀테크 기술이 바로 초실감의 기술들입니다. VR/AR/게임 기술의 발전은 학습자의 몰입을 극대화하여 결국 교육효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초실감 기술을 활용하는 에듀테크 기업들의 목적이 되고 있습니다. [16]

  • 앨버트 반두라의 사회적학습이론
  • 자기효능감

온톨로지

온톨로지란 단어는 컴퓨터 과학 분야가 아닌 철학 분야에서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철학 분야에서의 온톨로지라는 단어는 '존재론'이라하며 원래 사물의 존재 의미를 논의하는 철학적인 연구 영역을 뜻하는 말입니다.1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쓰이는 온톨로지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의 온톨로지란 모든 개체(Entity)들 간의 관계를 '주어(Subject) - 서술어(Predicate) - 목적어(Object)' 형태로 정의한 것 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개체들 간의 관계를 정의함으로써 기계(컴퓨터)가 모든 개체의 의미(Semantic)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온톨로지의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이러한 온톨로지를 기반으로 하는 분야 중 가장 유명한 분야가 시맨틱 웹(Semantic Web) 입니다. 시맨틱 웹 분야에서는 트리플을 RDF/OWL이라는 언어를 이용하여 정의합니다. [17]

컴퓨터 분야에서의 온톨로지 역시 정보시스템의 대상이 되는 분야에 존재하는 개체와 개념에 대한 명세로서 철학적 용어를 빌어 쓰는 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모든 정보시스템은 정보시스템이 바라보는 적용영역(실재)에 대한 관점(view)의 반영이라 할 수 있는 온톨로지를 갖고 있다. 물론 그것이 독립된 형태로 구축되어 있지 않고 데이터베이스나 프로그램 코드에 스며들어 있을 수는 있으나 어쨌든 해당 응용의 개체나 개념, 프로세스 등은 엄연히 존재한다. 온톨로지는 의료·기계제조·부동산·금융 등 특정 응용영역에 대해 만들어지는데, 그 분야의 기본 개념에 대한 정의와 그들간의 관계에 대한 명세로 이뤄진다. 가장 단순한 형태로는 어휘사전이나 용어모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의 구조성과 구체성을 갖춰야 온톨로지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온톨로지의 기본은 해당 영역에 존재하는 개념들이다. 예를들어 책·컴퓨터·책상·의자·구매·입찰 등이다. 각 개념은 다시 그 개념을 설명하는 속성들을 갖게 되는데, 예를들어 책은 저자·출판사·쪽·가격 등의 속성을 갖고 입찰은 대상·날짜·방식·조건 등의 속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개념들은 서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상하포함관계다. 예를들어 동화책은 책에 포함되는 하위개념이 된다. 발전된 온톨로지에서는 속성의 특성, 좀 더 복잡한 형식의 관계 등을 정의함으로써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된다. 개방형 디렉터리 프로젝트(ODP http://www.dmoz.com)에서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인터넷 정보의 분류체계를 만들고 있으며, 이 분류체계는 구글(http://www.google.co.kr) 등 상용검색사이트를 비롯한 수많은 사이트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대표적인 웹정보 분류체계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처음 방문하는 사이트에서도 익숙한 분류 카테고리를 이용할 수 있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시맨틱 웹(semantic web)의 궁극적 목표는 컴퓨터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웹을 만드는 것인데, HTML 형태의 문서들로 이뤄진 현재의 웹은 사람에게 정보를 주는 역할은 하고 있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이 각 문서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18]


온톨로지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루버(T. Gruber)의 온톨로지 정의는 다음과 같다.“온톨로지란 관심 영역 내 공유된 개념화에 대한 형식적이고 명시적인 명세화다(An ontology is a formal, explicit specification of a shared conceptualization of a domain of interest).”온톨로지는 데이터베이스의 일종이라 할수 있는데, 이 데이터베이스에는 보통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의 경우와는 달리 개념들 간 위계 구조와 기타 다른 관계 및 제약이 표현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전산학에서의 온톨로지에 대한 비형식적인(informal) 정의이기도 하다. 온톨로지 공학(Ontology Engineering)이란 사람이 갖고 있는 각종 개념들을 이렇게 온톨로지화, 즉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기술이다. 온톨로지에 대한 연구는 인공지능 내 지식 표현 기술과 관련된 중요한 분야로서 시맨틱 웹과는 독립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맨틱 웹은 하나의 독립된 기술이라기보다는 RDF와 같은 메타데이터 언어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의 기술들이 연합하여 발전되어 온 기술로서, 최근 온톨로지 기술은 필연적으로 시맨틱 웹을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분야가 되었다. 따라서 웹을 기반으로 온톨로지에 대한 연구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응용범위도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19]


영상 세대, 이미지 세대

디지털 논술

논술 교육

디지털 교육

강화디아스포라

양명학

주자학과 양명학은 유학 경전 <대학>을 해석하는 데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대학>은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이 핵심이다. 이 중 특히 처음 두 조목인 격물, 치지의 뜻을 파악하는 데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다름이 두드러진다. 주희는 격물치지를 ‘사물의 이치를 철저하게 파악하여 앎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한 반면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은 격물치지를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해서 앎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즉, 주희는 진리탐구를 중시하고 왕수인은 도덕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 되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하게 된 것이다. 해석의 차이는 먼저 글자의 뜻을 달리 파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주희는 격물치지의 ‘격(格)’을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파악한다’, 즉 ‘궁리(窮理)’의 뜻으로 이해한 반면 왕수인은 격에 자격의 뜻이 있다고 하여, 격을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 즉 ‘정기부정(正基不正)’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할 경우 ‘물(物)’의 의미도 심각하게 달라진다. 주희에게 물은 나와 따로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일 뿐이지만 왕수인에게 물은 바를 수도 있고 바르지 않을 수도 있어서 내가 주체가 되어 파악하여야 할 ‘주관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왕수인은 평소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를 구한다는 것은 가령 부모에게서 효의 이(理)를 구한다는 말과 같다.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면 효의 이는 과연 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부모의 몸에 있는가?”(왕수인 <견습록>, 민음한국사총서 02, 92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왕수인이 주희를 비판한 말이다. 앞에서 양명학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한다고 했다. 왕수인에 의하면 부모를 모시는 데 불효한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이런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아 효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격물’이 되는 것이다. 주자학이 객관주의라면 양명학은 주관주의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인류 역사의 모든 사상은 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용어에 포괄된다. 가톨릭이 객관주의라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주관주의다. 가톨릭은 객관적 권위(교황)를 절대화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이 바이블이나 기도를 통해 교황의 개입 없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농업이 객관주의라면 상업은 주관주의다. 농사는 객관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상업에는 매번 개인의 주관적 결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으로 16세기는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농업에서 상업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중앙집권체제와 정착민의 삶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방분권체제와 유목민의 삶은 주관적이어야 한다. 조선에서는 16세기에 양명학이 대두되었지만 주자학에 밀려 세를 얻지 못했다. [20]

주자학 일변도로 정착되어 있던 당시의 유학계에서는 양명학 배척론이 우세하여 그 유입을 금하고, 양명학을 수용하고자 노력했던 학자들을 이단(異端)또는 사문난적(斯文亂的)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이것은 박세당(朴世堂)이 주자학을 비판하자 이를 사문난적이라 하여 유배시킨 사건과 흡사하다. 양명학 반대론자의 대표자는 이황(李滉)으로서, 그는『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양명의『전습록』이론을 성리학에 의하여 비판하였다. 그를 따르던 학자들과 후대의 성리학자들이 참여하여 양명학 배척의 분위기가 고조 되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왕양명이 주자학을 비판한 것을 다시 조목별로 반박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조선 유학계를 더욱 성리학 일변도로 만들어 고답적이고 고지식한 경향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양명학 찬성론자들은 주자학 일변도를 비판하고 조선 유학의 활성화를 위하여 양명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양명학을 연구한 학자로는 남언경(南彦經), 이요(李謠),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는 조선 양명학 연구의 최고봉이다. 후일 실학자 이익(李瀷)은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 경향의 공리공론을 비판하였으며, 구한 말 박은식(朴殷植)은 유교를 대중화하고 민중의 유교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양명학이 필수적이라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인보(鄭寅普)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미지의 영역이었던 한국 양명학의 연원을 찾는 데 중대한 시금석을 마련하였다.[21]

조선 양명학은 정제두에 이르러 집대성됨으로써 절정을 이루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활동하였던 정제두는 주자학을 정통 학술로 삼았던 조선 학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남언경과 장유의 학설을 수용하여 발전시키고 최명길의 학풍에도 접근하여 조선 양명학을 계통적으로 이어나갔을 뿐만 아니라, 정주학자 중에서 기대승(奇大升)과 윤증(尹拯)의 학문을 존중하여 자신의 양명학 체계에 수렴하였다. 주자학이 지배하던 학문 풍토 속에서 양명학에 대하여 심도 깊은 연구를 수행하던 그의 학문 태도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성학(聖學)에 대한 굳은 신념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이는 훗날 강화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계승 발전되었다. 정제두는 1711년(숙종 37) 8월 경기도 안산에서 강화로 이주하는데, 이를 계기로 생을 마칠 때인 1736년(영조 12)까지 그곳에 거주하면서 정후일(鄭厚一)과 이광사(李匡師) 등에게 강학하였다. 이후 이영익(李令翊), 이충익(李忠翊), 정동유(鄭東愈), 이면백(李勉伯), 이시원(李是遠) 등을 거쳐 신작(申綽), 이건창(李建昌), 이건방(李建芳) 등에게로 이어져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를 일반적으로 ‘강화학파’라고 부른다. 강화학파의 학풍은 근대의 정인보에게 전수되었으며, 박은식(朴殷植)이나 송진우(宋鎭禹) 역시 정인보와 교유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조선후기 실학파와 개화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학의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는 서구의 종교 및 과학 사상, 청대의 고증학과 양명학 등을 들 수 있는데, 학문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주자학의 편협성과 배타성을 비판하고 현실 타개를 중시하여 지도 이념과 현실 일치를 주장한 양명학의 사상과 정신이 실학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양명학은 주자학의 정통적 권위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통로를 열어 주었고, 실학사상의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 시대 사상사에 의미 있는 기능을 담당하였다.[22]

양명학은 기준과 중심이 내 마음 안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내 마음 밖의 이치와 원칙이 중심인 주자학과 대비한다. 주자학을 출세를 위한 관학(官學)으로, 양명학을 민학(民學)으로도 구분하기도 한다. 양명학은 지행합일, 즉 아는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양명학은 주자학을 지배 이데올로기화한 조선시대 지배층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양명학은 ‘양지’(良知)를 찾는 학문이다. 양지란 우리가 통상 말하는 양심(良心)이나 유교의 천성이나 본성. 불교의 불성, 기독교의 영성과도 다르지않다. “자기만 살려는 행동은 본래 양지가 아니다. 살면서 형성되어은 습심(濕心)이다. 우리가 경쟁적으로 자기 욕망만 위해 달리다보니, 본래 가진 양지를 잃어버리고 후천적 습관에 의해 형성된 습심에 의해 행동하고 만 것이다.”“양명학자인 독립운동가 정인보 선생은 ‘간격(間格·막힘)에 의해 죽고, 감통(感通·느낌이 통함)에 의해 산다’고 했다. 소통이 주로 언어가 통하는 것을 말하는데 비해 감통이란 감정이 통하고 마음이 통한 것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 그와 한마음으로 통해 구해주겠다고 물로 뛰어드는게 감통이다. 온 국민이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과 마음이 통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고 있다. 감통이 된 것이다.”그는 “왕양명 선생이 모든 유기체는 다 하나라는 천지만물일체론을 내놓았는데, 이해타산과 욕심이 차면 일체임을 잃어버리게 된다”며 “세월호 사건은 마음으로 우리의 일체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유교의 본질은 오륜이다. 삼강은 변질된 것이다. 진시황이 통일제국을 이루면서 법가의 이론을 유학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신하의 근본이라는 군위신강(君爲臣綱)같은 주종관계는 유학의 본질이 아니다. 군신유의(君臣有義)가 본질이다. 군신유의란 임금이라서 따르는게 아니라 옳은 것을 따르는 것이다. 군위신강은 깡패라도 따르라는 것이지만 군신유의는 옳지않으면 따르지 않은 것이다. 삼강은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지만 오륜은 사리와 공의를 구분해 정의를 실현하게 한 것이다.각자가 자신의 양지에 따라 정의를 지킨다면 이런 불행이 생길 수 없다.”[23]

주자학에서 이(理)는 도덕과 이념, 기(氣)는 욕망과 현실이다. 성리학이 ‘이’에 집착한다면 양명학은 ‘기’ 또한 중시했다. 조선은 ‘이’가 독주하는 나라였다. ‘이’에 집착하면서 사화가 반복해 일어났으며 위정척사가 탄생했다. 임건순은 “성리학과 달리 양명학은 상인과 무인에게 어울린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다. 기업을 창업하는 것과도 잘 맞는다”면서 “대한민국은 ‘고려 DNA’를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생전의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도 “우리는 대원제국과도 싸운 나라”라면서 “동아시아의 고슴도치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24]

한국인 집단정서의 이중구조를 잘 살펴야 한다. 한국인 집단정서에는 외곬의 순수주의 지향이 똬리 틀고 있다. 일테면 조선시대 시조에서 가장 빈번한 시어가 "명월(明月)"이고, "청산(靑山)"이며, "고죽(孤竹)", "송림(松林)" 등이다. 온통 지조-절개의 상징어들인데, 한국인은 그만큼 못 말리도록 순수를 좋아한다. 유감스럽게도 그게 때론 편협함으로 치닫는다. 조선조 당쟁도 그렇고, 양명학조차 사문난적으로 규정해 주자학만을 고집하는데서 보듯 우린 작은 차이나 현실에서 묻은 때를 참지 못한다. 그게 지나치게 명분에 매달리며 흑백논리에 대한 집착을 낳고 고질적인 근본주의를 키운다. 그렇다. 순수함이란 약이자 독인데, 그건 국민 심성의 차원을 넘어 정치사회사적 유산이기도 하다. 시시때때로 폭민(暴民)정치로 돌변하는 한국정치의 소용돌이, 지구촌 최악인 북한 전체주의의 광기도 결국엔 그 차원이다. 순수주의가 편협함으로 흐르고 그게 끝내 악성종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25]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며 동아시아 근세사상사에서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양명학은 근세 일본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까? 통설에 의하면 일본인이 양명학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660년 전후의 시기라고 한다. 또 이 17세기는 일본에서 신유교(新儒敎)가 활발하게 수용되어 사상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이며 주자학파와 양명학파 이외에도 유교사상의 안티테제로서 출발한 고학파(古學派), 고문사학파(古文辭學派) 등이 성행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자학의 사상사적 위상에 비하여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의 양명학은 비록 다수의 양명학자를 배출했다고는 하나 그다지 주목받는 사조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양명학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막말유신기이며, 메이지시대가 되어 비로소 그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근세 이후 일본 지식인층에서의 유교사상에 대한 인식은 다름 아닌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대한 초월과 극복의 과정이었으며, 양명학은 막말기(幕末期) 일본 지식인층들에게 지사정신(志士情神)으로서 높이 숭앙받았던 사상적 조류였다. 그 단적인 예가 주자학의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고학파(古學派)와 국학파(國學派), 미토학(水戶學)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양명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양명학(=요메이가쿠)이라는 명칭 자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조어(新造語)이며 본토 중국에서의 명칭은 요강학(姚江學)이나 심학(心學)으로 불리던 것이었다. 고지마 쓰요시(小島毅)는 근년 근대 일본의 양명학(近代日本の陽明学)(講談社, 2006)을 간행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 근대 메이지(明治) 제국을 지탱한 세 가지 사상 축으로서 칸트(독일 철학자)와 양명학 및 무사도(武士道)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 책의 에피소드 넷째 부분에서 소제목으로서 명명한 「제국을 지탱한 사상─칸트․무사도(武士道)․양명학(陽明學)─」이라는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 근대 메이지시대의 대표적 양명학자인 미시마 주슈(三島中洲)는 1877년 도쿄(東京) 치요다쿠(千代田区) 고지마치(麹町)의 자택에서 한학(漢學) 전문학교를 개설하고 후에 도쿄 구단(九段)에서 니쇼가쿠샤(二松学舎)를 설립하였다. 이 니쇼가쿠샤(二松学舎)는 미시마 주슈(三島中洲)의 학문정신에 의거하여 양명학에 의한 교육을 표방하는 학교였다. 지금도 일본의 양명학 연구의 메카라 하면 이 학교를 꼽고 있으며 양명학 정신에 의거한 건학 정신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덧붙이면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 일본 근대의 대표적 지식인들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일본 근대기에 양명학을 보편화시킨 인물로서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와 그가 참여한 국수주의자들의 문화단체인 세이쿄샤(政敎社)에 주목해 보면 이것은 양명학을 국수주의적 입장과 연결시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메이지시대에 양명학이 기독교와 매우 닮아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양명학을‘기독교화(基督敎化)’하려 했던 인물로서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의 존재도 있다. 우치무라 간조는 그 자신이 영어로 정리한 대표적 일본인代表的日本人(1894년)이라는 저서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양명학자였다고 하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구미(歐美) 지역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폭넓게 인지시키는 효과를 얻기도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의 무사도武士道(1899년)도 무사도정신의 기초로서 양명학을 언급한다. 이처럼 메이지시대가 되어 양명학은 다양한 측면에서 각광받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막말유신기부터 서서히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왜 주자학이 아니고 양명학이 일본에서 각광을 받았던 것일까? 그것은 양명학이 지닌 특징이 ‘이론 지향’보다는 ‘실천 지향’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담당자들이 활동한 시대적 상황이 막말유신기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중국 양명학은 명대 중기부터 명대 말기까지 성행하였는데, 이 시기는 명조(明朝)가 대내외적으로 혼란과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이며 이러한 점이 일본의 막말유신기와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중국의 양명학자들이 사회질서의 구축과 유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이 일본의 재야 지식인층에게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26]

대만과 중국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같은 유교권 국가에는 모두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 또는 대성전(大聖殿)이 있다. 문묘의 주인공은 물론 유학의 시조로 불리는 공자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한 문도의 위패를 모시고 함께 제사 지낸다. 4자(四子)라 하여 안자(안회) 증자(증참) 자사자(자사) 맹자(맹가)를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받든다. 공자의 수제자 10명을 뜻하는 공문십철(孔門十哲)이 그 다음이요, 다시 십철을 제외한 72현(賢) 중 다른 인물과 한대 송대 명대의 명유(名儒)가 포함된다. 이를 배향(配享)이라 부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현(聖賢)이라 함은 엄밀히 말해 여기에 배향된 유학자를 말한다. 그러데 그 구성원이 유독 한국만 다르다. 하나는 있음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없음에서 나온다. 있음은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같은 한국의 명유를 ‘동국18현’이라 하여 함께 모신 것을 말한다. 일본은 자체 유학자를 배향하지 않았다. 없음은 육구연과 왕수인(왕양명)으로 이어지는 심학(心學) 계열의 유학자가 빠져있는 것을 말한다. 심학은 곧 양명학이다. 성리학의 이칭인 이학(理學)에 대응하는 말이다. 성리학을 송대 유학자 주희가 집대성해 주자학으로 불리듯 양명학은 명대 유학자 왕양명이 확립했기에 양명학으로 불린다. 그런데 왜 양명학 계통의 유학자가 한국의 문묘에만 쏙 빠졌을까.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이 왕양명의 이론이 겉으론 유학을 내세우지만 속으론 불교와 도교와 다름없다며 유교의 이단자를 일컫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 유성룡은 왕양명에 대해 묻는 선조에게 스승의 말을 전했는데 “만약 이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그 뜻을 행하였다면 그 화가 진시황 때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심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퇴계는 오로지 전습록만 읽고 “주희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고 한 왕양명의 말이 거짓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유학의 본토였던 중국은 물론 조선을 통해 성리학을 수입한 일본에서조차 폭력의 위협과 이익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도덕성의 함양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으로 공인받았다. 주자학이 성현의 가르침을 이치에 맞게 이해하는 게 초점을 맞췄다면 양명학은 성현 말씀의 문자적 해석보다 내면의 깨침을 더 중시했다. 불교에 비유하자면 주자학은 교종이고, 양명학은 선종이다. 주희가 기독교 교부철학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경전을 집대성한 해석학의 대가라면 왕양명은 종교혁명을 촉발한 마르틴 루터처럼 그 말씀을 내면화해 각자의 실천(지행합일)을 역설한 혁명가였다. 이는 ‘대학’에 등장하는 성인의 덕목으로 팔조목의 해석차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팔조목이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다. 주자학은 뒤의 네 조목을 단계적으로 풀이한다. 먼저 자신의 심신을 닦고, 집안을 평안히 한 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리리라는 것이다. 반면 양명학은 이를 동시간적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는 일은 평생을 가도 끝내기 어렵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병행할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인군자가 되느냐를 두고도 차이가 발생한다. 중국의 계급질서는 ‘황제-제후-공경-대부-사-서인’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공경은 삼공과 구경이라는 고위직을 맡는 상층귀족을, 대부는 중하위귀족을 말한다. 사(士)는 중앙정부의 말단관료거나 제후나 공경의 가신을 뜻한다. 서인은 생산에 종사하는 농부 공인 상인이다. 고대에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황제나 제후여야 가능했다. 공자는 군자라는 말로 그 가능성을 확대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대부 정도까지만 가능했다. 송대 성리학은 이를 사대부로 확산시켰다. 사대부란 대부(大夫)와 사(士)를 합친 단어인데 하위직인 사(士)가 고위직인 대부(大夫)의 앞으로 나서는 역전이 발생했다. 혈통을 중시하는 귀족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선발된 전문 관료가 중앙정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현상에 조응한 변화였다. 명대에 성립한 양명학은 성인의 경지를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했다. 왕양명의 ‘전습록’에 등장하는 ‘만가성인(滿街聖人)’이란 표현이 이를 상징한다. 온 거리가 성인으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양명학의 이런 강렬한 평등의식을 퇴계와 그의 후예들은 간과했다. 동아시아 3국 중에서도 유독 한국에서 천주교 신자가 넘쳐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조선 유학자들이 사농공상 계층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양명학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명학이 상륙하지 못함에 따라 생긴 지적 공백을 ‘천주 앞에 만인의 평등’을 내세운 천주학이 대체했기 때문 아닐까. 2500년 전 공자는 이미 ‘만가성인’의 사상을 품고 있었다. 왕족과 귀족 자제를 위한 사교육 시장만 넘쳐나던 시대에 사립학교를 열고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육포 한 묶음의 수업료만 내면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너희도 학문을 통해 성인군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를 압축한 공자의 말이 ‘오직 가르침만 있을 뿐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의 ‘유교무류(有敎無類)’다. 공자가 만세의 사표로 불리는 진정한 이유다. [27]

강화양명학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와 이광려 등을 주축으로 한 학파를 이르는 말이다. 정제두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면서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이 확립된 이후 그 아들인 정후일(政厚一)과 그의 문인인 이광명(李匡鳴), 이광려(李匡呂)등에게 전승되었다. 이후 가학(家學)으로 전승되었는데, 이와 같이 정제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학통을 '하곡학', '강화학', '강화양명학', '강화하곡학', 등으로 부르고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를 강화학파라고 하였다. 학술의 내용으로 보면, 그들은 정제두 이래로 양명학을 수용하고 도교와 불교까지 섭렵하고자 했고, 이학(理學:유학)보다는 한학(漢學)을 연구하고 동시에 국학(國學)을 일으켰다.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소화했으며, 훈민정음연구·국어학·국사학·서법(書法)·문자학·문헌학 분야에서 탁월한 논저들을 남겼다. 강화학파의 학자들에는 서법에 이광사(李匡師), 국사학에 이긍익(李肯翊)과 황현(黃玹), 한학(漢學)에 신작(申綽), 훈민정음연구에 유희(柳喜), 문자학에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 남극관(南克寬) 등 오늘날 국학 분야에서 거론되는 선구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학맥에 속한다. 홍양호(洪良浩)나 이종휘(李種徽)같은 학자들도 이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28]

강화학파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인 1709년(숙종35)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기도 안산에 살던 61세의 정제두는 강화 하곡으로 이주했다. 이보다 17년전인 1692년 그는 스승 윤증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씨의 학문에 대해서는 구구하나마 조그만 소견이 없지 아니하여…그러나 누가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왕씨의 학문은 곧 양명학이다. 정제두가 강화로 이사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이 편지는 말해주고 있다. 당시 주자학은 국가의 유일사상이자 극히 배타적인 정치적 도그마였다. 이 길을 걷지 않는 사대부는 곧 사문난적에 다름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양명학 연구는 목숨을 거는 행위였던 것이다. 다시말해 정제두는 집권 노론의 압제를 피해 강화로 이주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것이 강화학파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찾아 스스로 유배의 길을 선택한 한 인문학자의 거대한 족적은 이긍익과 이건창, 김택영, 박은식, 정인보 등 조선 후기 기라성같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돼오다 일제시대 이후 맥이 끊긴다. [29]

“하곡 이전에 양명학을 연구한 남언경·장유·최명길·이유 등을 하곡학의 연원으로 꼽을 수 있다. 하곡학파를 형성한 초기 인물로는 이광명·이광사·이광신·심육 등이 있다. 그 다음 세대로는 이영익·이충익·신대우·정동유·이면백 등이며, 또 그 다음 세대의 이시원·이지원·이건창·이건승·이건방을 거쳐 정인보에 이르렀다.”하곡학의 특징은“조선 후기 실학의 실질적인 발상지였다. 하곡의 직계 제자들은 ‘실심실학(實心實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실심실학이 바로 하곡학의 핵심이다. 해방 이후 우리 학계에서 ‘실학’은 경세치용·이용후생의 실리적 측면만 주목 받았다. 하곡학으로 실학의 실체를 다시 파악해야 한다. 실학에서 학파로서 실제 존재했던 것은 하곡학파였다.”“‘실심’이란 자기를 속이지 않는 참된 마음을 가리킨다. 실학이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부단히 변화하는 현실에서 실천하는 학문을 말한다. 실심실학은 자기의 사적인 실리만을 챙기면서 도덕을 빠트린 ‘실용실학’과 차별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맹목적 명분에 빠진 이상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이다. 하곡학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실심을 강조하여 우리의 역사와 한글을 연구하는 실학의 원류가 되었다.”[30] 하곡과 같은 시대에 중국과 일본에선 조선과 달리 양명학이 번성했다. 20세기 이후 세계 유학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이다. 김수중 회장은 "안으로 내 마음의 양지(良知.배우지 않고도 선악을 구별할 수 있도록 타고난 마음의 본체)를 기반으로 하면서 밖으로 인간 사회를 여실히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대동정신이 양명학의 특징"이라고 했다. [31]

대동정신

강화학파는 1709년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가까이 지내던 소론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강화도로 물러나 은거하면서 소론학자 중심의 학맥이 200여 년 동안 형성된 것을 지칭한다.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의 양명학설을 따른 강화학파는 비록 이기론을 사상적 기초로 삼았지만 ‘공평의 원칙’과 시세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적인 실사구시’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주어 한말 민족주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을뿐 아니라 강화 3·1 운동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한국 전통사회에 전래된 가톨릭은 ‘척사위정’의 유교적 가치관과 갈등과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인해, 가톨릭에 대한 강력한 박해로 귀결되었다. 황사영이 로마교황청에 보내려다 중도에 발각된 것이 「황사영백서」 사건인데, 그 서신에 ‘전함 수백 척과 정병 5~6만을 내어 대포 등 강력한 무기를 다량으로 싣고 와서’ 엄포를 놓으라고 요청한 사실에서 ‘나라는 없어져도 교회는 존속해야한다’는 반민족적인 주장이 확인되었고 이는 한국전통사회가 반가톨릭적 입장을 견지하게 하여 나중에 전래된 개신교 또한 배척하기에 이른 것이다. 개신교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게 된 전통 유교사회에서 강화개신교는 적극적으로 한국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탈피하고자 ‘민족교회’로서의 방향을 설정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강화의 3·1운동은 길상면 지역의 감리교 교인이 중심이 되어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강화중앙교회 100년사』). 강화의 감리교 개신교의 전래와 강화학파와의 관련성을 보다 집중적으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제는 정제두의 양명학을 ‘강화학파’로 지칭하여 세계화에 힘쓰는 지역 지식인 중 다수가 크리스찬임을 생각할 때 강화의 문화지형은 감리교 개신교가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32]


- 주자학을 숭상한 조선의 지배층들이 양명학을 이단시한 이유는 무엇이죠? "양명의 사민평등사상 때문이에요. 왕양명은 사농공상의 우열을 인정하지 않았죠."

- 중국의 양명학파와는 달리 정제두는 신분타파까지 주장하는 혁명적인 요소는 없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리지 않고 주자학과 함께 쌍벽을 이뤘지만, 조선에서는 사정이 달랐죠. 그렇기 때문에 외주내양한 것이고요. 정제두도 살아생전에는 책 한권 내지 못하고 필사본만 있었죠."

- 양명학을 따랐던 대부분의 학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지 못하고 외주내양(겉으로는 주자학, 안으로는 양명학)했는데, 정제두가 외양내양한 데는 어떤 사연이 있나요? "위독한 병에 걸려서 유언 식으로 커밍아웃을 한 건데, 죽지 않았던 겁니다. 그 뒤로 협박성 편지를 많이 받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사상논쟁을 벌여나갔죠. 정제두를 빼면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외주내양을 했지요."

- 강화학파는 어떻게 형성된 건가요? "정제두가 정치와 담을 쌓고 강화로 옮겨 온 뒤에 이광명, 신대우 등 소론계 학자들이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주자학이 판치는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숨쉬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죠. 양명학은 이후 정제두의 가학으로 전승되면서 맥을 이어갔는데, 역사의 음지를 찾았던 양명학이 끼친 영향은 가학을 뛰어넘었어요.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상설, 박은식, 정인보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지행합일을 중시한 양명학자들은 이처럼 조선이 멸망한 후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선 경우가 많은데, 강화학파의 계보를 잇는 위당 정인보 선생이 해방직후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가운 물사태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어 장장 8천8백리 황하를 이룬다."

사상의 음지에서 역사의 양지로 되살아난 강화파의 감회가 풍기는 환영사가 아닌가 싶다. [33]



강화양명학은 하곡 정제두선생으로부터 이어져오는 강화의 대표적인 학문, 사상분파로서 당색으로는 소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강화양명학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 말과 실천은 하나(知行合一), 실천에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특징은 주자학과 달리 강력한 주체의식과 평등의식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학문적 경향으로 강화양명학자들은 구한말 명분을 내세우던 주자학자(이완용등 노론세력)와 현실참여를 지향하던 개화파(박영효등)의 상당수가 친일을 통해 현실과 타협한 데 비해 단 한명의 부역자 없이 현실에서는 쓰라리고 어려웠으나 올곧은 정신을 유지하였다. 서여 민영규 선생이 쓴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 이와 같은 사연이 절절이 담겨있다. 영재 이건창의 동생인 경재 이건승, 난곡 이건방, 그리고 그의 제자인 위당 정인보선생이 그러하다. 그들은 강화에 있으면서 계명의숙을 설립하여 교육운동에 매진하였으며, 만주로 망명해서는 정원하, 홍승헌, 이석영, 이회영, 이상설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34]

서울의 우당 이회영, 안동의 백하 김대락, 석주 이상룡, 충청도 진천의 홍승헌·정원하, 강화도의 이건승 등이다. 나라를 찾겠다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은 대부분 소론 계열이다. 이 집단 망명을 주도한 이는 우당 이회영이었다. 이회영과 이상룡 등은 전 재산을 털어 만주에 경학사, 부민단 등 민단자치조직을 만들고 신흥무관학교를 열었다. 독립전쟁사의 서막을 연 것이다. 전국적·조직적으로 이뤄진 이 집단 망명자들의 사상적 배경을 탐색해 나간다. 그 중심에 양명학이 있다. 홍승헌과 정원하, 이건승은 양명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망명일기’에서 ‘왕양명실기’를 읽은 소감을 적어놓은 석주 이상룡 역시 양명학에 깊이 공감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소론이라는 당파적 동일성과 양명학이라는 학문적 동질성으로 연결돼 있었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취급받은 양명학은 사대부의 계급적 우월을 절대시하는 성리학과 달리 인간의 선천적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세계관은 곧 천지만물을 하나로 보는 대동사회 건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저자는 공화주의와 아나키즘과 만난다고 본다.‘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는 명문 가문 출신으로 아나키스트가 된 이회영에게도 양명학의 연결고리가 있다. 양명학이 이회영이 속한 소론 가문의 전습 사상이었다는 점, 양명학을 공부한 이상설과 함께 공부했으며 평생지기였다는 점, 강화학파들과 사전 계획 끝에 동시에 망명했다는 점 등다. 저자는 아나키즘 이론이 양명학의 대동사회론과 비슷한 점이 많아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본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이회영은 고종의 망명을 추진하기도 했다.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가 고종의 복위나 조선왕조의 복벽을 시도한 건 아니란 평가다. 고종을 통해 독립을 세계적인 정치문제로 제기하고 한편으론 고종을 따르는 양반사대부들로부터 군자금을 얻어내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회영과 함께 집단 망명을 한 석주 이상룡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선임된 인물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내각책임제 책임총리였던 셈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군주제를 전면부인하고 공화제를 주장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1919년 공화제를 주창한 것에는 이상룡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저자는 평가한다. 저자는 특히 그가 이끈 대한협회 안동지회와 경학사 등 단체와 사상에 아나키즘적 요소가 적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집단 망명가들이 전 생애를 걸고 독립전쟁에 나선 사상적 배경을 동양의 전통사상에서 찾았다는 데 이 책의 새로움이 있다. 특히 전통적 사상인 양명학이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밝힌다. 독립운동가들은 양명학의 사해동포주의에서 공화주의의 근거를 찾았고 이런 사상으로 자치조직인 경학사, 부민단 등을 운영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것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35]

나라가 사라지고 만 1910년 경술년 겨울이었다. 중국 간도 땅 유하현 횡도촌에 몇 무리 사람들이 모였다. 모인 사람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강화도에서 온 양명학자 이건승과 홍승헌, 정원하 그리고 소론 출신 서울 갑부 이회영 6형제와 이동녕. 안동에서 온 이상룡도 합류했다. 이상룡은 부유하되 권력과 거리가 먼 남인 출신 안동 사대부였다.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회영, 이시영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합방이 되자 이동녕씨와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해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 그들이 만주로 향하는 동안 한 줌 되지 않는 친일파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있었다.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 일어나고 '위로 진산, 동으로 진주, 남은 목포로부터 일본군이 그물을 쳐놓은 것 같다. 강한 자는 적진에 돌진해 싸우다 죽고 다친 자는 꾸무럭대다 칼을 받았다. 갈 곳이 다하니 죽은 자가 무려 수천명이었다.'(황현, '매천야록') 의병 사망자가 1만7779명, 부상 376명, 포로 2139명. 말 그대로 초토화였다. 체포된 의병들은 해남에서 하동까지 이어지는 도로 건설에 투입됐다. 도로명은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했다.(한민족문화대백과)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과의 전쟁은 전선을 옮겨야 했다. 많은 무리가 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군으로 변신했다.

1909년 그 잔인한 가을, 광양 선비 황현은 강화도에 있는 이건창의 무덤 앞에 있었다. 이건창은 황현, 김택영과 함께 구한말 삼재(三才)라 불리던 사람이다. 이건창은 양명학자다. 할아버지 이시원은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가 프랑스에 넘어가자 동생 지원과 함께 자결했다. 막내 희원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며 담소를 나누다 숨이 끊겼다고 했다. 이건창은 그 피를 이어받고, 집안 대대로 공부한 양명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집권층인 노론이 성리학과 사대주의에 몰두해 있을 때 실용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던 학자였다. 벼슬아치 시절 이건창은 앞뒤 안 가리는 강퍅한 성질로 세도가들과 친하지 못했다. 대신 민심은 크게 샀다. 타협할 줄 모르는 그는 수시로 암행어사로 탐관오리들을 척결해 권력가들 불만을 샀다. 서울 송파와 강화도, 인천 모도에는 그의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이건창이 사는 강화도에는 많은 후학이 와서 공부를 했다. 이들 양명학자를 강화학파라 부른다. 제도권에는 있되 권력과 거리가 있던 소론파, 현실 직시파들이었다.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과 건방, 동학 정원하, 홍승헌과 함께 황현은 선배 이건창에게 술잔을 올리고 낙향했다. 이듬해 9월 10일 황현은 자결했다. 유언은 이러했다. '식자(識者)로 살기가 쉽지가 않구나.' 황현이 죽고 2주가 지난 1910년 9월 24일 새벽 이건승은 만주로 떠났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자살 미수에 그쳤던 그였다. 이건승에 이어 속속 만주에 합류한 이들은 홍승헌, 정원하 그리고 신채호와 박은식이다. 모두 양명학자다. 이건창의 막냇동생 이건방은 강화도에 남았다. 동행하겠다는 동생을 형인 이건승이 '양명학을 이으라'며 눌러 앉혔다. 그 이건방이 만든 계명의숙에서 사학자 정인보가 공부를 했다.[36]

1909년 가을, 매천 황현(黃玹)은 전라도 구례에서 서울로 향했다. 중국으로 망명했던 김택영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택영은 이미 재출국했고 황현은 이건방·이건승 같은 양명학자들과 강화도로 가서 이건창의 묘소를 찾았다. 황현은 이건창을 위로하는 오언율시를 지었다. ‘외롭게 누웠다고 슬퍼하지 말 것을/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在日已離群). 절창이었다. 황현은 귀로에 서울 남산에 올라가 대궐을 굽어보며 통곡했다. 이듬해 나라가 망하자 ‘난리 속에 지내다 머리가 세었네/ 몇 번이나 버리려던 목숨이었나’라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은 그가 스스로 끊은 목숨만큼이나 날카로운 붓으로 시대를 비판한다. ‘매천야록’은 고종이 스스로 노론(老論)으로 자처하면서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노론이면 ‘친구’(親舊)라고 부르고, 소론이면 ‘저쪽 편’(彼邊), 남인·북인일 경우에는 ‘그놈’(厥漢)이라고 비하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고종이 친구로 여긴 노론의 마지막 당수 이완용은 친구와 민족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다. 황현 자결 직후 이건방·이건승 등의 양명학자들은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숙의 끝에 이건방은 남아서 조선 양명학을 전수하기로 하고, 이건승은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건방은 국내에서 정인보 같은 양명학자이자 역사학자를 배출했고, 이건승은 망명해 극도의 궁핍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건승이 자리 잡은 곳은 만주 유하현 횡도촌(橫道村)이었다. 만주의 작은 마을 횡도촌에는 이건승뿐만 아니라 충청도 진천의 양명학자 정원하도 있었고, 서울에서 집단 망명한 우당 이회영 일가도 있었다. 경상도 안동에서 망명한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가도 모였다.

필자는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곳이 횡도촌이란 사실에서 전국적 규모의 집단 기획 망명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1911년 봄,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 자치 조직인 경학사(經學社)를 만들었으며 그 부설로 신흥무관학교를 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군사 교육 외에 역사 교육도 병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고대사를 중시했다. 민족의 뿌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독립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원동력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가 교재였다. 이 책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상룡이 망명하면서 쓴 망명 일기 ‘서사록’(西徙錄) 등의 기록을 보면 그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현재까지도 쟁점이 되는 것이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다. 조선총독부는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국사가 식민지로 시작한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이상룡은 일제가 이런 역사 왜곡에 나설 것을 알았다는 듯이 ‘한사군은 모두 요동에 있었다’고 갈파했다. 북한은 1962년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출간하면서 ‘낙랑군=평양설’을 폐기시키고 ‘낙랑군=요동설’을 채택했다. 그러나 남한의 강단 사학계는 북한이 56년 전에 이미 폐기 처분한 ‘낙랑군=평양설’을 이른바 ‘정설’이라고 떠받들고 있다. 북한이 남한을 식민지라고 비판했던 근거 중의 하나가 조선총독부 학설을 추종하는 ‘식민 사학’이었다. 현 정부는 석주 이상룡의 옛 집인 임청각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건물 복원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는 이상룡의 역사관을 복원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 적폐 중의 가장 오랜 적폐는 아직도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식민 사학 적폐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많은 국민들은 현 정권이 식민 사학을 청산하고 석주 이상룡과 단재 신채호 등의 역사관을 복원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현 정권 들어 식민 사학자들은 제 세상 만난 듯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바로 이런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공수처 실종 등 지지부진한 개혁 진행 상황과 함께 현 정권 지지율 하락의 근본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37]

1910년 서울, 이회영 형제

이건승이 만주로 떠난 석 달 뒤 서울에 살던 이회영 집안이 만주로 갔다. 건영, 석영, 철영, 회영, 그리고 시영과 호영 6형제다. 망명은 넷째인 이회영이 주도했다.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만든 민족단체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양기탁 같은 활동가와 독립운동을 기획해갔다. 1908년 만주로 답사를 떠난 이회영은 만주에 해외독립기지 설립을 결정했다. 뜻이 있었고, 돈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있었다. 이회영 집안은 충북 진천에 사는 양명학자 홍승헌 집안과 친했다. 역시 집안 어른인 이상설 또한 홍승헌과 동향이었다. 강화학파가 차례차례 만주로 떠나고, 이회영 일가는 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토지 수백만 평을 모두 팔았다. 이미 이상설은 용정을 거쳐 헤이그밀사로 갔다가 연해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11년 안동, 이상룡과 김동삼 안동은 반골 도시였다. 임진왜란 이후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였다. 권력은 없었으나 고집과 기개는 강했다. 석주 이상룡도 그러했다. 의병활동을 하고 있던 이상룡은 신민회와 이회영의 계획에 동참했다. 혼맥으로 인연을 맺은 김동삼도 동참했다. 그리하여 1910년 12월 안동의 사대부 이상룡과 김동삼과 김대락 가족은 집과 논과 밭을 팔아 만주로 떠난 것이다. 김동삼의 의성 김씨 문중과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이 각각 150명씩, 그리고 혼맥으로 이어진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안동의 흥해 배씨,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 문중이 모두 동참해 미래의 독립운동기지를 향해 떠난 것이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상룡씨는 경상도 혁명 대표로 오신 분이라.'(이은숙, '서간도시종기')

1911년 1월 횡도촌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만난 곳이 만주 땅 유하현 횡도촌이었다. '응당 거기엔 억제됐던 감정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승이 남긴 기록 어느 구석에도 그런 흔적을 찾지 못한다. 비정하리만큼 무장된 함구(緘口)가 있을 따름이었다.'(민경규, '강화학 최후의 광경' - 이덕일, '근대를 말하다' 재인용) 감정 폭발 대신 그들은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만들고 만주 독립운동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조선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을 길렀다. 자신들 또한 이념과 주장을 접고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해 요직을 지냈다.

1910년 10월 7일 조선 귀족 비장하고 스산했던 1909년과 1910년 그렇게 많은 이들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나라를 버렸다. 그런데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사라지고 두 달 뒤인 10월 8일, 조선 총독부 관보 38호 1면에 고시(告示)가 공포됐다. 제목은 '授爵, 敍任及辭令(수작, 서임 급 사령)'이다. 2면 한가득 명단이 게시돼 있는데, 모두 76명에게 '조선 귀족' 작위를 수여한다는 내용이다.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망명을 준비하는 사이, 고위직과 왕족으로 권세를 누리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다. 거액의 은사금과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작호를 받은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후작: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윤택영, 박영효 백작: 이지용, 민영린, 이완용(李完用) 자작: 이완용(李完鎔), 이기용,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민병석, 이용직(3·1운동 가담 박탈), 김윤식(3·1운동 가담 박탈), 권중현, 이하영, 이근택, 송병준, 임선준, 이재곤, 윤덕영, 조민희, 이병무, 이근명,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김성근 남작: 윤용구(거부), 홍순형(거부), 김석진(거부), 한창수, 이근상, 조희연(반납), 박제빈, 성기운, 김춘희, 조동희, 박기양, 김사준(독립운동, 작위 박탈), 장석주, 민상호, 조동윤, 최석민, 한규설(거부), 유길준(거부), 남정철, 이건하, 이용태, 민영달(거부), 민영기, 이종건, 이봉의, 윤웅렬(박탈), 이근호, 김가진(임시정부 망명), 정낙용, 민종묵, 이재극, 이윤용, 이정로, 김영철, 이용원, 김종한, 조정구(거부), 김학진, 박용대, 조경호(거부), 김사철, 김병익(박탈), 이주영, 정한조, 민형식 [38]


그간 한국 아나키즘의 사상적 뿌리에 대해서는 연구된 적이 드물었다. 필자(이덕일)가 앞에서 든 몇 편의 논문에서 아나키즘과 양명학의 상관성을 언급한 것이 최초의 분석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이런 착안을 하게 된 것은 모든 사상에는 연원이 있다는 철학사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이런 사고를 가지고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이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회영의 천진(天津) 우거(寓居)에 찾아와 “무정부주의로 전향한 동기”에 대해서 물었을 때 이회영의 답변에서 일종의 힌트를 얻었다. 이회영은 김종진에게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또는 전환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만 한국의 독립을 실현코자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그 방책이 현대의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서로 통하니까 그럴 뿐이지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식으로 본래는 딴 것이었던 내가 새로 그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이회영이 ‘지금 깨달으니 과거가 잘못되었다.’는 ‘각금시이작비’의 결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한국 아나키즘의 연원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받아들인 아나키즘 사상이 과거의 사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 따른 전향이 아니라 과거의 사상에 뿌리를 둔 연장선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이전에 어떤 사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먼저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인물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 약전(友堂 李會榮 先生 略傳)』을 저술한 이정규는 “(이회영)선생의 친척인 보재(溥齋) 이상설은 이러한 자유·평등의 혁명적인 면에서 선생과 친근하게 되었고 지기(志氣)가 서로 들어맞아 생사를 함께 하는 동지가 되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회영과 친척이자 지기였던 이상설은 고종 31년(1894) 문과에 급제한 후 1905년 정 2품인 의정부 참찬까지 올랐는데 고관 출신으로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려는 일제와 한치의 타협도 없이 싸웠던 인물로서 초기 독립운동의 기둥이었다. 이정규는 “(이회영)선생도 이상설과 사귀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정치·사회의 분야에서 많은 계발을 받았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상설은 세상을 떠나면서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는데, 이 유언을 들은 조완구, 이동녕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실제로 유언을 이행한 결과 이상설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직접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이회영이 젊은 시절 이상설과 함께 공부했다는 일부 사료가 남아 있어서 그 사상의 편린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李始榮)은 이상설이 서울의 장동(長洞)과 저동(苧洞:지금의 명동 성모병원 부근)에 살 때를 회상하며, “당시 보재(溥齋)의 학우는 자신(이시영)과 그의 백형(伯兄)인 우당 회영을 비롯하여 남촌(南村)의 3재동(才童)으로 일컬었던 치재(?齋) 이범세(李範世), 서만순(徐晩淳)과 미남이요 주옥같은 글씨로써 명필로 이름을 남긴 조한평(趙漢平), 한학(漢學)의 석학인 여규형(呂圭亨), 절재(絶才)로 칭송되던 시당(是堂) 여조현(呂祖鉉) 등이 죽마고우”라고 회상했다. 또한 이시영은 “보재(溥齋)가 16세 되던 1885년 봄부터는 8개월 동안 학우들이 신흥사(新興寺)에 합숙하면서 매일 과정을 써 붙이고 한문(漢文)·수학(數學)·영어(英語)·법학(法學)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고 회고했다. 이상설과 이회영·시영 등이 함께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관직도 “(이회영) 선생은 이상설과 숙의하여 이상설의 집에 서재(書齋)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모여 이상설·여준(呂準)·이강연(李康演) 등과 함께 담론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증언들을 통해 이회영은 이상설과 함께 합숙까지 하면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 이상설의 사상은 어떠했을까? 양명학에 대한 이상설의 사상을 알려면 그가 성리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를 살펴보면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설의 유학사상의 단초를 알 수 있는 글이 유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재(剛齋) 이승희(李承熙)에게 보낸 「강재 선생을 전별하면서(奉?剛齋先生)」라는 글이다.

성리학과 양명학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리(理)를 해석하는 방식인데, 성리학은 심(心)과 성(性)의 개념을 구분해서 성즉리설(性卽理說)를 주장했다. 성즉리설은 성리학의 주요 이론 중의 하나이다. 이승희의 부친이 영남 유림의 거두였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인데, 그는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나 조선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같은 주자학자들이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 것과 달리 심(心)이 곧 리(理)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해서 성리학이 주도하던 유림(儒林)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심즉리설(心卽理說)은 퇴계이래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이단으로 몰았던 왕양명(王陽明)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이상설도 이런 심즉리설에 동조하는 글을 「강재 선생을 전별하면서(奉?剛齋先生)」에서 피력했다. 이상설은, “마음은 능히 선(善)을 알 수 있고, 선을 좋아할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선을 아는 능력이 있으며, 선을 좋아하는 능력이 있으며, 선을 행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주희의 성즉리설(性卽理說)을 부인하고 왕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동조한 것이었다. 1896년 약관(弱冠) 27세 때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에 임명되었던 저명한 유학자였던 이상설이 영남 유림의 거두이자 이진상의 아들인 이승희에게 심즉리설에 동조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자신이 양명학자라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다. 마지막 양명학자인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보재(이상설)와 치재(이범세)가 사랑채 뒷방에 몸을 숨기고 왕양명(王陽明)하며 하곡(霞谷:정제두) 등 강화소전(江華所傳)을 읽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나도 어디에선가 글로 쓴 적이 있다”라고 이상설이 양명학을 공부했다고 기술했다. 이상설의 「강재 선생을 전별하면서(奉?剛齋先生)」는 민영규 교수의 이런 글이 사실임을 말해준다. 이상설의 양명학을 받아들였다면 이상설이 망명 당시 국내의 모든 일은 “오직 (이회영) 선생에게 부탁할 뿐이라는 당부의 말을 여러 차례”했으며 망명하는 이상설을 성 모퉁이에서 전송한 인물도 이회영이었다.라는 둘의 사정을 비춰볼 때 이회영의 사상도 양명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망국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망국의 원인을 깊게 분석한 결과 유학 사대주의가 망국의 주요원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일제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사관에 맞서는 민족사학을 개척했던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이 성균관 대사성과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정통 유학자임에도 나라가 망하자 대종교에 입교하는 것이나 역시 유학자였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이 「몽배금태조전(夢拜金太祖傳)」을 저술해 금나라 태조 아골타를 우리 역사상의 인물로 포함시키는 역사관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 등은 모두 유학 사대주의를 버린 결과였다. 그러나 이상설·이회영 등은 성리학 비판과 동시에 양명학을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학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선천적인 것이며 이 계급만이 정치를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양명학은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힘쓰면 미칠 수 있’으면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부분이 조선의 주자학자들로부터 가장 큰 반감을 사서 이단으로 몰리게 된 대목이었다. 주자학자들은 표면적 왕양명의 ‘심(心)과 리(理)’, 또는 ‘양지(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에 대해 비판했지만 속으로는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양명학에 계급적 반감을 느껴 이단으로 몰았던 것이다.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양명학은 망국기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만주로 집단 망명한 양명학자들과 한국 아나키즘의 양명학 수용 과정을 살펴보자.

그간 양명학이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거의 없다. 『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만주로 망명해 1914년 순국한 양명학자 홍승헌(洪承憲)의 몰년(沒年)을 물음표(?)로 적고 있을 정도이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홍승헌과 함께 망명했던 정제두의 후손 정원하(鄭元夏)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원하는 『동아일보』 1925년 12월 2일자에서 그의 순국 사실을 보도했음에도 상황은 같았다.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이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던 강화학파들, 즉 한말의 양명학자들에 대해 부분적으로 서술한 것이 양명학과 독립운동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후 일제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하는 세력이 한국의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그간 이런 사실은 철저하게 베일에 갇혀 있었다. 홍승헌과 정원하의 말년 자체가 묻혀진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제 차차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망국 당시 주자학을 신봉하던 집권 노론이 당수 이완용을 필두로 조직적 매국에 나선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론 계열의 양명학자들과 이상룡, 김대락 등 성리학에 비판적이고 양명학에 우호적이었던 영남 남인들이 집단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사실도 차차 밝혀지고 있다. 당사자들과 함께 했던 가족들의 증언도 나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재종조부가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이자 그 자신이 석주의 손부(孫婦)였던 허은(許銀) 여사의 수기이다. 허은 여사는 이회영 집안과 이상룡 집안의 망명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이시영 씨 댁은 이참판 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이시영 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 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안동의 석주 이상룡이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를 알게 된 것에 대해 허은은 “그 전에 의병활동하면서 뜻 있는 사람들끼리 의기투합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의병 활동보다는 신학문이나 신사상 교육관계로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룡은 1909년 3월 대한협회 안동지회장에 취임했으며, 이상룡의 처남 김대락은 자신의 가옥을 출연하여 협동학교를 만들었다. 이회영은 1908년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한 이상설을 만나 “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교육을 장려할 것”을 결의했는데 교육 운동을 장려하는 과정에서 양자가 만나 의기투합했을 가능성이 크다. 독립운동 가문의 계보와 속사정에 정통한 허은 여사는 “(이상룡이) 이회영, 이시영 씨 형제분과 이동녕 씨와 의논해서 망명하기로 결정을 보았다”고 집단 망명임을 전하고 있다. 허은 여사는 망명 과정에 대해 “우당 이회영 씨와 함께 미리 와 서간도에 자리 잡고 있던 유기호 씨, 하재우 씨 등이 며칠 뒤 왕산댁이 계시는 다황거우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이분들이 이민 오는 동포들의 대책반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국 단위의 양명학자들을 주축으로 한 집단 망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조직적 구조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안동의 석주 이상룡은 망명 일기인 「서사록(西徙錄)」에서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를 읽고 그 소감을 적었는데, 여기에서도 양명학을 언급하고 있다.

“대개 양명학은 비록 퇴계 문도의 배척을 당했으나 그 법문(法門)이 직절하고 간요하여 속된 학자들이 감희 의론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또 그 평생의 지절은 빼어나고 정신은 강렬하였다. 본원을 꿰뚫어 보되 아무 거칠 것이 없었으며, 세상의 구제를 자임하였으되 아무 두려움이 없었으니 한대(漢代)와 송대(宋代)를 통틀어 찾는다 해도 대적할 만한 사람을 보기 드물다. 또 그의 독립과 모험의 기개는 더욱 오늘과 같은 시대에 절실하다 할 것이다.”

‘송대를 통틀어 찾는다 해도 대적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라는 말은 송나라 주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왕수인(王守仁:왕양명)을 주희보다 상위의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상룡은 나아가 “우리들 중 어떤 사람이 능히 의연하게 자임하여 300년간의 학설을 세속된 무리와 도전하여 결투할 것인가?”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300년간의 학설이란 퇴계 이래의 성리학을 뜻하는데 이 학설과 ‘도전하여 결투’하자고까지 말하는 것은 양명학에 깊이 공감하고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집권 노론에서는 당론 차원에서 나라를 팔아먹은 반면 조선 후기 내내 야당이었던 소론과 재야였던 남인 계열에서 집단 망명에 나섰는데, 그들의 공통된 사상 기반이 양명학이었던 것이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는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하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李宣九)씨가 마중 나와 처소(處所)로 간다”고 역시 조직적인 과정을 거친 집단 망명임을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상룡 일가가 1911년 2월 7일 첫 번째로 정착한 곳이 유하현 횡도천(橫道川)이다. 이상룡은 당일 “오후에 김비서장(金賁西長)이 계신 곳을 찾아갔다”라고 적고 있는데 김비서장은 이상룡의 처남 백하 김대락(金大洛)이다. 김대락은 그보다 이른 1911년 1월 15일 횡도천에 도착했다. 그런데 횡도천에는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양반 사대부들이 있었다.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인물들로서 모두 강화학파, 즉 조선의 양명학자들이었다. 횡도천이라는 만주의 작은 마을에 서울의 이회영 일가와 안동의 김대락·이상룡 일가, 그리고 충청도 진천과 강화도의 양명학자들이 모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 없다. 이회영은 신민회원들과 함께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사전 답사까지 다녀왔던 터였다. 횡도촌도 이 과정에서 이회영 일행이 물색한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 횡도천에 가장 먼저 망명한 양명학자는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였다. 정원하는 강화도로 이주해 조선 양명학의 기틀을 놓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의 7세 장손이다. 정원하의 가문도 소론이었는데 이회영 일가처럼 드물게 현달한 집안이었다. 정원하의 조부 정문승(鄭文升)은 고종 12년(1875) 종1품 숭정대부까지 올랐으며 부친 정기석(鄭箕錫)은 지평 현감, 안성 군수를 역임했다. 정기석은 충청도 진천에 터를 잡는데, 진천에는 역시 횡도천으로 망명했던 양명학자 홍승헌(洪承憲)의 조부 홍익주(洪翼周)가 진천현감을 역임하면서 별업(別業)을 일으켜 자손들이 진천에 정착할 터를 잡게 되었다. 홍승헌은 영조·정조 때의 명신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5대 종손인데, 홍익주와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음으로써 진천은 강화도와 함께 양명학의 주요한 근거지이자 소론 반향(班鄕)이 되었다. 역시 소론 가문이었던 이상설(李相卨)이 진천 출신인 것과 이건방의 문인 정인보가 한때 진천에 자리 잡은 이유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이는 진천 출신 이상설이 양명학을 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강화도에서 망명한 이건승(李建昇)은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이자 병인양요 때 자결 순국한 이시원(李是遠) 형제의 손자였다. 이건승이 강화도의 고향집을 나선 것은 1910년 9월 24일. 9월 26일에는 강화 승천포에서 개경으로 올라가 홍문관 시강(侍講)을 역임한 원초(原初) 왕성순(王性淳)의 집에 유숙한다. 왕성순은 이듬해(1911) 중국 상해에서 황현의 유고 문집 『매천집(梅泉集)』을 간행하는 양명학자 창강 김택영(金澤榮)의 문인이므로 역시 양명학자였다. 왕성순의 집에서 홍승헌을 만난 이건승은 10월 3일 신의주에 도착했다가 12월 초 하루 중국인이 끄는 썰매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현 단동)에 도착했다. 안동현 구련성(九連城)에서 망명객으로서 첫 밤을 보낸 이건승과 홍승헌은 아침 일찍 북상길에 올라 12월 7일 횡도촌(橫道村)에 도착했다.

홍승헌과 정원하는 모두 고종 때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인물들이었다. 홍승헌은 홍문관 교리와 수찬을 역임했고, 이조참판까지 지냈으며, 정원하도 고종 19년(1882)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고종 23년(1886) 이조참의, 고종 30년(1893)에는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다. 유하현 횡도촌이라는 작은 마을에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 안동의 백하 김대락·석주 이상룡 일가, 충청도 진천의 홍승헌, 강화도의 이건승 등 전국 각지의 사대부 출신 양명학자들이 집결했다. 민영규 교수는 “이건승·홍문원(홍승헌)·정기당(정원하) 일행과 이회영 일곱 가족과는 얼기설기 세교가 얽혀 있는 가족들”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런 세교는 소론이라는 당파적 동일성과 양명학이라는 학문적 동질성이 바탕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국망의 위기에 처하자 양명학자들은 해외로 망명했다. 이회영 등이 간여했던 비밀 결사조직인 신민회에서 1909년 봄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군관학교설치’를 결의하는데, 이런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론에도 왕양명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인식이 뒷받침되었을 수 있다.

이정규는 1908년에 이회영과 이상설이 이미 ‘만주에다 광복군 양성 훈련의 기지를 만들 것’에 대해 결의했다고 전하면서 상동 기독교회가 신민회의 비밀기지가 되어 이회영·전덕기·이동녕·양기탁 등이 조석으로 밀의를 거듭했다고 기록했다.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론은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꾸릴 인적·물적 자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더 설명할 것이 없다. 이들 양반 사대부들은 갖고 있는 사재를 모두 털어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섰다. 1911년 경학사가 이렇게 만들어지고, 신흥무관학교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1912년 부민단의 이념을 이상룡이 삼권분립에 의한 민주공화제로 삼고 있는 것 역시 양명학이 갖고 있는 사민평등 사상의 발현일 것이다.

그러면 양명학이 어떻게 아나키즘과 접맥되는지를 살펴보자. 1923년 이회영과 절친했던 유학자 김창숙(金昌淑)은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등의 아나키스트들과 북경 귀족들의 거처인 모아호동(帽兒胡同)에 사는 한인(韓人) 친일파 집을 털어 활동자금을 마련한 모아호동 사건을 일으켰다. 김창숙은 성즉리설을 비판하고 왕수인의 심즉리설을 지지해 파문을 일으켰던 영남 유림의 거두 이승희의 제자였다. 유학자가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김창숙과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사상적 친연성이 없었다면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김창숙은 끝내 아나키스트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혁신 유림으로 남지만 이회영은 달랐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회상기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에는 이런 회상이 있다.

?하루는 몽사(夢事)를 얻으니, 가군께서 사랑에서 들어오시며 희색이 만면하여,

“내 일생에 지기(知己)를 못 만나 한이더니, 이제는 참다운 동지를 만났다.”

하시며 기뻐하시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홀연히 깨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곰곰 몽중(夢中)에 하시던 말씀을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이 오려나 하였더니, 그 날 오정쯤해서 이을규(李乙奎)씨 형제분과 백정기(白貞基)씨, 정화암(鄭華岩)씨 네 분이 오셨다.?

이은숙 여사는 이때가 계해년(癸亥年), 즉 1923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때 이회영의 나이 이미 57세로 환갑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러나 정작 이때 이회영을 찾아온 4명 중의 한 명인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선생이 사상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확정된 때는 1922년 겨울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같은 책에서 “선생의 사상이 확정되는 계기”는 1923년 9월에 있었던 ‘이상 농촌 양타오 촌 건설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 회고를 종합하면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받아들인 때는 1922년 겨울쯤이지만 이를 실제 확정지은 때는 1923년 9월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촌 건설은 아나키스트들만이 아니라 대종교인들도 백두산 산록에 이상촌을 건설하여 했던 것으로 봐서 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공통의 과제이기도 했다.

이회영은 김종진과의 대화에서 “결론으로서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大同)의 세계, 즉 하나의 세계를 이상하는 것”이라고 규정지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대동(大同)이란 것이다. 이회영에 따르면 대동의 세계란 “각 민족 및 공동생활 관계를 가지는 지역적으로 독립된 사회군(社會群[국가군])이 한 자유연합적 세계 연합으로 일원화”되는 사회를 뜻한다. 즉 “각 민족적 단위의 독립된 사회나 지역적인 공동생활권으로 독립된 단위 사회가 완전히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 자체 내부의 독자적인 문제나 사건은 독자적으로 해결하고 타와 관계된 것이나 공동적인 것은 연합적인 세계 기구에서 토의 결정”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동은 서양에서 온 정치사상이 아니라 동양의 전통 사상이었다. 조선의 율곡 이이를 비롯해 대부분의 개혁정치가들은 대동 사회를 지향했고,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그 다음 단계인 소강(小康)사회를 지향했다. 동양 전통의 대동 사회는 “자?타의 구별을 넘어선 보편적 인류애”가 넘치는 사회이자 소외된 계급과 계층[矜寡孤獨廢疾者]이 없는 사회를 뜻한다. 제(濟)나라 공양고(公羊高)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세상을 난세(亂世)·소강(小康)·대동(大同)으로 나누어 해설한 삼세지학(三世之學)을 설파하는데, 물론 동양의 이상 사회는 대동 사회다.

대동 사회는 공자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 “대도(大道)가 행해질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大道之行天下爲公],”라고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대동사상은 동양 사회의 개혁적 정치가들이 공통으로 주창했던 이상 사회의 모습이었다. ????예기???? ?예운?편은 대동 사회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대도가 행해질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발탁해서 신의를 가르치게 하고 화목을 닦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거나 자신의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편안히 인생을 마칠 수 있었고 젊은이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었다. 과부·고아·홀아비·병자를 다 부양했으며 남자는 직업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었다. 재물이 낭비되는 것은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신이 소유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음모도 생기지 않았고 도둑질도 일어나지 않았고 난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바깥문을 잠그지도 않았는데 이를 일러 ‘대동’이라고 한다.


이 대동의 동(同)에 대해 주석은 “동은 화해[和]와 평등[平]과 같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대동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이 항산(恒産)에 힘쓰지만 그 생산물을 자기만의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과 서로 나누면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회를 뜻한다.

대동 사회의 모습은 아나키즘에서 이상으로 삼는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양명학의 천하일가 사상도 공자의 대동 사회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회영과 신채호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이 ‘지금 깨달으니 과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회영이 김종진에게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의 세계”라고 규정지을 수 있었던 것은 이회영이 아나키즘 사회를 대동 사회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왕양명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양지를 깨닫게 하고 그것으로써 서로 편안하게 해주고 서로 도와주며 사리사욕의 폐단을 제거하고 시기, 질투하는 습성을 일소하여 마침내 ‘대동(大同)’을 실현”(王陽明, ????傳習錄???? 中)한다고 말했다. 왕양명의 이 말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회영이 ‘약관이 지나면서부터 스스로 솔선하여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하려 했다는 이정규의 설명은 단순히 이회영의 천품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양명학 학습의 결과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 아나키즘의 사상적 연원을 양명학으로 잡고 나면 많은 문제가 설명된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이서(吏胥)와 노비에 대한 차별적인 언사부터 평등한 경어(敬語)로 개(改)하려 노력하였으며 적서(嫡庶)의 차별을 폐하고 개가·재혼을 장려 단행”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도 젊은 시절 이상설 등과 함께 양명학을 공부한 사상의 실천일 수 있다. 단재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체계로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다가 끝내 여순감옥에서 옥사하게 된 것도 양명학의 대동사회를 아나키즘의 이상사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국 아나키즘이 서양에서 만들어진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동양 고대 사회에서 여러 지식인이 이상으로 삼았던 대동의 사회사상이 양명학을 거쳐 접맥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록 아직 신채호를 비롯해서 한때 유학자였던 인물들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는 과정 등에 대해서는 조명되지 못했지만 한국 아나키즘의 사상적 연원을 찾기 위해서 이 부분은 앞으로 깊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나키즘은 또한 과거의 사상이 아니라 21세기 현재에 실천 가능한 오늘의 사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39]

우당을 비롯해 구한말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적 뿌리는 '양명학'에서 출발한다. 우당과 뜻을 같이했던 경북 안동의 석주(이상룡 선생)는 망명 일기인 《서사록》에서 양명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대개 양명학은 비록 퇴계 문도의 배척을 당했으나 그 법문이 적절하고 간요하여 속된 학자들이 감히 의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양명학은 중국 왕수인이 명대에 집대성한 신개념의 유학이다. 사대부의 이익을 절대시하는 성리학과 양명학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달랐다. 나라의 국민은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며, 이런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도 서로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문헌엔 우당이 노비 등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경어를 썼으며 적서(嫡庶)의 차별을 없앴다. 재혼을 장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전국 팔도의 사대부들을 만주 유하현에 집단 망명시켜 만든 횡도촌(橫道村)은 지금으로 치면 적게는 협동조합, 크게는 지방자치조직이다. 상당수 양반 사대부들이 민족주의 노선으로 간 것과 달리 우당이 사회주의 사상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아나키즘을 선택한 것은 당시로선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성리학이 너무 조선왕조를 이상스럽게 만드니 그렇게 된 겁니다. 영조 때부터 위정척사파들이 임금을 꼼짝 못하게 하지 않았나요. 성리학이 극단화돼 나온 것이 위정척사 아닙니까. 이걸 깨지 못하면 개화도 어렵고, 부국강병도 어렵다고 본 게 당시 양명학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당도 그 생각을 따른 거지요. 양명학은 성리학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서 시작된 겁니다." 이종찬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우당의 형제 7명 중 6명은 "빼앗긴 나라에선 한시도 살 수 없다"며 가산을 모두 정리해 만주로 건너갔다. 일곱 형제 중 무려 여섯 형제가 뜻을 같이했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그렇게 만주로 가서는 삼원보에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결과적으로 우당은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아 숨졌지만 형제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끝내 광복의 기틀을 마련했다. 바로 아래 동생인 이시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초대 부통령에 올랐다.) [40]

우당은 노비 해방, 적서(嫡庶)차별 타파, 여성에 대한 부당한 인습에 반대, 개가(改嫁)를 장려하였다. 당시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사고를 했는데…. “우당은 진보적이었고, 어떤 점에서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래서 현실과 안 맞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철저한 행동주의자였다. 상해 임시정부에 가 있으니 서로 다툼을 하다 에너지가 다 소모될 것 같으니 다시 베이징에 와서 행동하는 흑색공포단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만들어 대일 항쟁을 했다. 당신이 66세였을 때, 아나키스트들이 누가 거사에 갈지 투표를 하는데, 투표를 정지시키고 이번에는 자기 차례를 달라고 하셨다. 당신이 여기까지 오느라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여기 남아있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하셔서 당신이 들어가겠다고 해서 들어갔다. 들어가다 잡혔지만 행동주의자, 이상주의자였다.”

-우당이 고종 망명계획에도 관여했나. “1910년에 망명할 당시, 우리 가문과 안동의 이상룡 가문, 강화도의 양명학파가 다 올라갔다. 따로 갔지만 만주 황도천에 모여서 경학사를 설립했다. 경학사에 기반을 두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흉년이 2년간 들었다. 돈이 다 떨어져가자 우당 선생이 1913년에 국내에 잠입했다. 예전에 ‘돈 다 대줄게, 따라갈게’하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니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일본의 통치가 강화돼 돈을 줄 수가 없다고 하니 우당의 고민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돈은 안 주고 세상은 변한 것이다. 그렇지만 고종을 망명시키면 돈을 안 낼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공작을 시작했다. 고종의 매부인 우리 외할아버지의 딸과 우당의 아들을 결혼시켰다. (그 결혼으로 낳은 아들이 이종찬) 당시에는 양자를 들이더라도 임금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결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고종에게 접근했다. 당시에는 일본이 고종도 감시하고 있었는데, 결혼 이야기를 하러 들어가서 슬쩍 망명을 이야기했더니 고종이 결심을 했다. 그러면서 고종이 ‘내 돈 중에 일부가 민영달한테 있으니 찾아서 쓰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당이 민영달한테 가서 고종의 허가를 받았다고 하니 당시 5만원을 줬다. 그 돈을 받아 베이징에 집도 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 고종은 독살당했다.”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광복군이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지청천, 이범석이고, 학생이 김원봉, 김학규다. 지청천은 광복군 총사령관, 김원봉은 참모장 겸 임시정부 군무부장·광복군 1지대장, 이범석은 2지대장, 김학규는 3지대장이다. 광복군은 창설할 때 3개 지대와 1개의 사령부로 이뤄졌다. 그 우두머리가 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아니면 졸업생이므로 전통을 이은 거라고 할 수 있다. 또 광복군의 모든 매뉴얼을 윤기섭이 만들었다. 전북 전주에 신흥고등학교가 있는데, 광복군 군가가 교가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신흥고를 나왔는데,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해서 북한에 갔을 때 공항에서 북한 사람들이 교가를 연주했다고 한다. 가사는 다르지만. 그래서 정 전 의장이 왜 북한에서 신흥 학교 교가를 연주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광복군 군가였다. 학교 설립자가 연결이 돼 있어 그렇게 됐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는 경희대학교와도 인연이 있다. 경희대는 원조를 따지자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학우단이 세운 학교다. 학우단이 이시영 부통령을 앞세워 설립했다. 그러나 조영식 전 총장이 부산 피난 당시 학교를 가져갔다.” [41]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보낸 고인은 경북 영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구 계명대 철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시간강사로 강단에 섰다. 이후 아나키스트 철학자 하기락의 영향으로 화담 서경덕에게 매료되어 동양철학에 눈을 떴다. 그리고 양명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유명종 박사를 찾아 동아대 대학원에서 박사를 마쳤다. 1998년 <전통문화와 미래사회>를 공저했다.[42]

  • 강화학파 이건승 [[1]]
  • 하곡학과 실학 [[2]]

만주독립운동

강화감리교

강화양명학과 함께 강화의 근대정신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의 수용이다. 18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공회, 감리교 등 기독교의 선교가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설립한 교회와 학교는 근대문물을 익히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특히 성재이동휘가 1907년 조선군대해산 당시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후일 교육운동으로 돌아서면서 합일학교, 보창학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게된다. 이때 이동휘 등이 설립한 학교와 교회는 1919년 강화군 3.1만세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강화양명학파의 해외망명과 독립운동이 있었다면 1919년 3.1운동 이후 강화의 독립운동은 상해임시정부와 사회주의운동으로 확산되어간다. 일본군 장교 살해협의로 인천감리서에 수용중이던 백범 김구는 기독교계열의 강화 독립지사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황해도를 거쳐 망명길을 떠났으며, 3.1운동으로 옥살이했던 죽산 조봉암은 일본유학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고 조선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설립한다. 일제시기동안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였던 죽산은 해방후 전향선언을 하고, 제헌국회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죽산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진보당사건’을 빌미로 1959년 사형되었으나 2011년 무죄로 판명되었다. [43]

19세기말 기독교가 유독 강화지역에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 이유가 조선후기 그 지역에 퍼져있던 ‘하곡학(霞谷學)’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하곡학은 중국 양명학을 수용한 하곡 정제두의 호를 딴 것으로, 예전에는 ‘강화학파’나 ‘강화 양명학파’로 불리던 학문이다. 1900년에 강화읍에 잠두교회가 설립되고 10년만에 39개교회에 교인 수 3,230명으로 성장한 데에는 바로 이 하곡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실제로 강화군농업센터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은용 박사(인천대)에 의해서 설득력을 얻었다. 이 박사는 지난 3일 새문안교회 언더우드교육관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한규무) 학술발표회에 참석해 ‘하곡학과 강화의 초기 기독교’라는 주제로 발표하며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다. 먼저 그는 돌림자 신앙과 이 학파와의 관련성을 밝혔다. 강화의 초기 교인들은 하나같이 이름자의 끝을 ‘일’(一)자로 통일했는데 예수 믿고 기독인이 되면서 거듭남과 헌신의 표시로 바꾼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이 박사는 “이러한 현상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도 있었다”며 “봉건적 사회구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이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하곡학의 특징인 강력한 실천력이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어 그는 “돌림자 신앙은 1902년 미국 하와이로 이민간 이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흥미롭게도 그 당시 강화의 교인들이 그 이민단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세우고 운영하는 학교의 이름까지 일(一)자 돌림을 썼다며,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합일초등학교를 예로 들었다. 미국인 선교사 조원시와 박능일 전도사가 세운 것으로 원래 이름은 ‘잠두의숙’이었다가 1908년에 ‘강화합일학교’로 개칭했다. 이 박사는 이런 역사적 근거들로 미루어 보아 18세기 초 하곡 정제두의 ‘지행합일’ 사상이 강화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신행합일(信行合一)’ 정신으로 전이된 것이라며 “강화인의 내면에 배여 있는 실천정신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논평을 맡은 성백걸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는 “초기 개신교인들을 보면 한학을 공부하고, 그 소양과 지식, 세계관을 지닌 가운데 기독교 복음을 수용했다. 당시에는 그런 모습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며 “거기에는 근대 서구 패러다임의 기독교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한국적인 기독교가 형성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면을 삶을 규명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강화 지식인의 하곡학과 개신교의 성장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근거가 약한 것 같다”며 “하곡학과의 관련성을 넘어서서 강화도 전체 토박이들의 사상적 배경과 개종과정을 추적하고 접근한다면 더 좋은 연구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44]

대한제국 참령 이동휘(1873~1935)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자신이 직접 매국 오적을 처단한 뒤 자결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고는 고종, 이천만 동포형제, 진신(縉紳·모든 벼슬아치), 법관, 을사오적, 각국 공사관 사절,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등에게 보내는 유서 8통을 썼다.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국가를 보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사와 자결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독교와 관계 깊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죽음 앞에서 동포들에게 쓴 유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심(相愛之心)이 없고, 기독교가 아니면 애국지심이 없으며, 기독교가 아니면 독립지심이 없다. 자수자강(自修自强)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충군애국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독립단합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다."


함남 단천에서 지방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이동휘〈사진〉(뒷줄 왼쪽. 오른쪽은 부인 강정혜, 가운데는 부친 이승교, 나머지는 자녀들)는 10대 후반 상경하여 군인이 되었다. 청렴강직한 군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그는 민영환·이준 등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개혁당이나 대한보안회 활동을 하면서 개혁구국의 뜻을 키웠다. 친위대 장교 시절에는 친기독교적인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에 정식 입교한 것은 1905년 3월 강화부윤과의 마찰로 강화도진위대장직을 사임한 뒤였다.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계몽운동가로 나선 그는 전도사 김우제의 권유를 받고,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 없이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길을 발견한 그는 자결하려던 마음을 바꾸고 전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그는 캐나다장로교회의 로버트 그리어슨에게 부탁하여 무보수로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강화도와 서북 지역을 순회하면서 기독교 전파와 교육진흥에 온 힘을 쏟았다. 1909년 무렵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함경도의 이동휘'는 '평안도의 안창호'와 쌍벽을 이루는 서북지역 교육지도자로 부상하였다.(서북학회월보, 1909. 10.)

1907년 7월 이동휘는 이갑·노백린 등의 무관들과 함께 고종 양위를 반대하는 무장항쟁을 계획했고, 강화도의 기독교도와 군인들을 동원한 대중집회를 주도하여 군대해산에 항의하도록 했다. 이에 연루된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없어 곧 풀려났다. '한일병합'을 앞둔 1910년 8월 3일 배일운동의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8월 29일 풀려났다. 풀려난 후 그는 기독교 전도사의 신분으로 북간도를 왕래하면서 광복단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안명근 사건에 연루·체포되어 유배처분을 받았지만, 광복단 조직은 발각되지 않았다.

1913년 국외로 탈출한 그는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3·1 운동 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는 가운데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독립투쟁을 계속하다 1935년 러시아에서 병사했다. 전통시대 군인에서 기독교 교육자로, 다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20세기 초 한반도 지식인들의 고뇌가 응축돼 있다.


[45]


한국의 가톨릭은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기 실학자들의 스스로 선택에 의해 이땅에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세계 종교사에서도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도 이 점에 있어서 큰 자부심을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야말로 구한말과 일제 민족지도자들의 결단에 의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정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 김약연, 이동휘, 이승만, 서재필, 김구, 유일한 등 먼저 깨어난 선각자들이 왜 개신교를 이 민족을 살릴 대안으로 선택한 것일까. 지금까지 개신교의 전래의 원인은 대부분 선교사의 노력과 성령의 역사로 풀이해왔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온 곳은 한국만이 아니다. 왜 일찍 선교사들이 갔던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도 동양의 어느 나라보다도 유·불·선의 기존 종교 사상이 확고히 뿌리를 내린 조선에서 유일하게 개신교가 착근에 성공한것일까. 처음 개신교를 받아들였던 선각자들은 대부분 유학자들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서당 훈장 앞에서 무릎 꿇고 사서삼경을 외우고, 상투를 틀고 산 그들에게 서양 선교사를 앞세운 예수쟁이들이 곱게 보일리는 없었을 것이다. 초기 가톨릭 신자들이 전통적인 제사의식을 거부한데 대해 분노하했던 박해자들의 의식 구조와 이들이 다를 게 뭐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이들은 결국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한 사회의 변혁을 고찰할 때 다차원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근대 종교의 변혁 또한 기독교만의 연구로는 그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이 땅에 기독교가 착근한 성공 요인을 타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에서 찾는다면, 왜 다른 동양 국가들과 중동의 이슬람권에는 기독교가 비교 우위성을 보이지못했는지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착근하지 못한 이유가 일본이나 이슬람권의 지독한 박해 때문이라는 논리는 엄청난 박해를 뚫고 선교한 초기 기독교의 역사 앞에선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전체를 볼 수 있지만, 흐린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을 전체라고 우긴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우물 안을 세계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구한말 선각자들이 개신교를 ‘선택’한 원인은 기독교 자체에서보다는 그 시대와 사회, 기존 종교의 실상에서 찾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외세에 나라를 잃지않고, 전쟁의 참화에 빠지지않은 채 안정돼 있었고, 기존 종교들이 제 구실을 했다면 개신교가 초스피드로 착근에 성공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선각자들은 나라가 망해 내 가족과 내 동포들이 하나같이 지옥이나 다름 없는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상태에서 국민 의식을 바로 세워줄 새로운 정신 사상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돼 놋그릇처럼 녹슬어버려 공자의 인륜과 붓다의 만인 평등과 같은 초심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타성에 젖어버린 기존 종교 사상으로는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초기 개신교는 약자들에게 개벽사상이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고려시대 귀족불교와 왕족불교로 변해 조선의 등장과 함께 여지 없이 심판을 받은 것처럼 조선 시대 500년간 국가 이념이었던 유교가 왕족과 양반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해 백성과 여성 등 약자를 핍박하는 수단이 된 데 대한 비판 의식이 싹틀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나라가 망해가며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는데도 민중을 수탈하는 유학자들의 모습에서 ‘윤리 종교’라는 유교의 진면목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초기 기독교의 전래 상황에서 기존 기득권과 종교에 대한 반발로 인한 두가지 특성을 주목한다. 하나는 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된 대표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널리 퍼졌다. 소외된 지역민과 상민·중인, 여성 등 약자에게 기독교는 개벽이었다.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어져버린 유교적 가르침은 삼종지도와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등을 강요하면서 약자들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아무데도 하소연할 데 없이 가슴앓이로 죽어가며, 가깝게는 양반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널리는 관아에 시달림을 당하던 약자들에게 발뻗고 울 수 있고, 하소연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 자체가 그야말로 말로만 들어오던 ‘개벽’이었던 것이다. 또 불교보다는 기독교와 상당히 가까운 교리적 틀을 갖춘 동학이 사회변혁운동이 이미 한차례 전국을 휩쓴 것도 기독교적 토양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각자들은 민족의 살길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민초들에게 부정의한 기존 종교와는 달리 평등한 모습으로 다가웠던 기독교가 약자의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민족을 살릴 선각자들이 개신교를 민족 벽혁의 기재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민족혼을 살리기 위해 선각자들에 의해 만든 이 땅의 초기 기독교공동체로 평북 정주 용동촌과 간도 명동촌을 꼽을 수 있다. 용동촌은 ‘겨레의 스승’으로 불리는 남강 이승훈(1864~1930)이 1899년 친인척들을 집단 이주시켜 세운 이상촌이다. 남강은 이미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되었지만, 그 때까지만도 개신교인이 아니었고, 유가적 이상촌 건립을 꿈꾸었다. 그런 그를 깨운 것은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와 다석 유영모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1905년)이 맺어져 나라를 잃을 위기에서 크게 당황하던 남강은 1907년 평양에서 도산의 연설을 듣게 된다. 도산은 “사람은 제가 자기를 업수이 여긴 후에야 다른 사람이 업수이 여긴다”고 했다. 나라를 잃고 이런 고난을 받는 근본 원인이 일제나 외부에 있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먼저 알야야 한다는 것이었다. 간디가 영국 제국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우리를 멸망시키고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 깨어나서 화합하지않고선 독립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호소하기 10년도 더 전에 안창호는 이런 호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남강은 용동촌에 오산학교를 설립해 ‘민족 깨우기’를 시작한다. 그에게 기독교를 가르쳐준 사람은 다석 유영모다. 다석 유영모는 이미 유학에 문리가 트인 사람이었다. 사서삼경은 물론 노자·장자까지 섭렵한 그는 오산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쳤고, 남강은 민족을 깨우는 종교로서 기독교를 선택한다. 이 오선학교에서 교사로 활약한 고당 조만식과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를 비롯 함석헌,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소설사 염상섭, 벽초 홍명희, 시인 김소월, 화가 이중섭 등 수많은 인재와 우국지사를 낳았다. 간도의 명동촌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규암 김약연(1868~1942) 선생이 1899년 함북 회령에서 141명을 이끌고 이주해 한민족공동체로 설립한 마을이다. 김약연은 본래 우리 조상인 고구려인들의 땅이므로 개간해 우리나라 땅을 만들어보자는 웅지를 품고 땅 수백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사들여 한인 집단거주지를 조성했다. 그야말로 한국판 모세였다. 그는 1901년 곧바로 규암재라는 서당부터 지어 교육을 시작했다. 규암재가 서전서숙으로 발전하고 서전서숙이 1909년 명동학교가 되었다. 명동학교에서 문익환·윤동주·나운규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와 오국지사들이 자랐고, 일제의 탄압으로 명동학교가 문을 닫고 1930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합쳐진 뒤에도 기독교장로회의 설립자인 김재준 목사가 가르치고, 안병무, 강원용, 문동환같은 인재들이 나왔다. 규암이 개신교인이 된 것은 명동학교에 초대된 교사 정재면의 권유가 시발이 되었다. 이미 함경도 일대에서 대표적인 유학자로 손꼽힐만큼 탁월했던 유학의 대가가 개신교를 받아들인 것은 정신을 새롭게 개혁하고, 개신교 선교사와 목사들을 통해 쉽게 들여올 수 있는 신문물, 신 교육이 아니고선 힘을 기르기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호남의 대표적인 교회인 전주 서문교회를 반석에 올린 경재 김인전 목사도 충남 서천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사서삼경을 깊게 공부해 한학에 조예가 깊은 유림이었다. 그 때만해도 보수적인 전주의 양반들은 기독교인들을 쌍놈이라며 멸시했는데, 향교에 있던 어느 유학자보다 박학다식했던 김인전 목사의 학문적 깊이와 인격에 매료돼 기독교를 함부로 폄하하지않는 풍토가 되었다. 김인전 목사는 3·1운동 뒤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의정원장으로 활약하다 서거한 독립지도자였다. 개신교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민족과 하나가 되었다 선각자들은 나라잃고 떠돌던 유대인들이 신앙심으로 뭉쳐 애굽을 탈출해 젗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가는 구약에 크게 고무되었다. 유대인들의 고난과 우리 민족의 고난은 너무나 유사했기에 이들의 신앙이 우리 민족이 이 고통의 시련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남강과 규암, 경재 등 초기 선각자들은 모두 3·1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개신교인이었다. 그 때도 역시 미국 등 제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독립운동을 돕기는 커녕 애써 ‘개인 구원’만을 강조함으로써 사회 참여를 저지했다. 부흥사 등 상당수의 목회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당시 3·1운동을 앞두고 평양에서 개신교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도, 길선주·손정도·신흥식 목사 등은 신중론을 폈다. 그 때 남강이 일갈했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자식과 형제 자매와 이웃과 동포들이 전부 지금 지옥에 있는데, 혼자 천당에 갈 생각을 해!” 그런 남강의 일갈이 없었다면 평양대부흥의 기세도 사그라들어 여전히 서양의 이방 종교에 불과했던 개신교가 한민족과 일심동체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유일무이하게 착근에 성공하는 것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3·1운동 당시에도 개신교인의 숫자는 20만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체 인구의 1%도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개신교가 3·1운동을 주도해 이 땅의 고난과 함께 하면서 함께 만세를 부르짖음으로써 소수 외래종교에서 단시일내에 우리 민족의 종교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함께 생사를 걸었던 사람들, 더구나 죽음을 불사르고 앞장 섰던 사람들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박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왜 가톨릭보다는 개신교가 역사의 헤게모니를 쥐었나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200년도 더 전에 들어왔다. 초기 조상 숭배를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가톨릭은 엄청난 박해를 받아 무려 1만여명이 순교했다. 이런 순교 영성은 세계 종교사에서도 드문 일로 신앙적으로는 고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가톨릭은 민족공동체적으로 일체감을 조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가톨릭인 민족공동체와 갈등을 낳은 그 대표적인 것인 ‘황사영 백서’ 파동이다.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조선의 가톨릭 박해상과 그 해결 방안을 적은 종이를 1801년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다. 백서엔 1785년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의 사정과 박해와 순교 상황 등을 적고, 조선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는 방안을 적었다. 황사영은 구베아 주교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해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척과 군대 5만~6만명을 조선에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 이후 조선이 외세에 의해 망해가며 백성들은 도탄의 위기에 있었지만, 프랑스 등에서 온 선교사들은 오직 선교가 목표일 뿐, 이 땅 민초들의 삶과 국권 회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의 예에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영웅이었고, 조선과 중국, 동아시아의 민족들에겐 철천지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계획한 안중근은 거사 준비 때부터 간도 용정의 천주교회를 찾아가 가톨릭 신부에게 협조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를 도와준 것은 개신교인 규암 김약연이었다. 안중근은 규암의 협조로 간도 명동촌 뒷산에서 권총 연습을 했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그런데 안의사의 의거에 대해 한국 가톨릭교단은 안 의사를 살인범이라는 이유로 신자 자격을 박탈해 파문에 가까운 조치를 취했다. 한국 가톨릭을 대표했던 뮈텔 주교는 안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일본인들이 안의사의 시체를 가족들에게조차 넘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그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논평했다. 안의사가 순교 직전, 자신이 18살 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빌렘신부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자 할 때도 뮈텔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자신의 말을 듣지않고 이를 행한 빌렘 신부에게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2개월 간 미사 집전을 금하는 성무집행 금지 조처를 내렸다. 당시 상황을 볼 때 신앙이 중요한가, 조국이 중요한가라는 게 논점은 아니다. 당시 뮈텔 주교는 당시 가톨릭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나라 잃은 백성이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일제에 의해 죽임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동정과 연민 없이 오히려 일제의 입장에서 도그마적인 신앙 교리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가톨릭 선교사들의 그런 분위기에 따라 전세계를 놀라게 한 비폭력평화시위였던 3·1의거를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가톨릭에선 단 한명도 포함되지않았다. 그랬기에 가톨릭은 제사의식을 수용해 문화적으로는 일체감 조성에 노력했으나 이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은 대표 종교로 남았다. 암울한 일제 36년 동안 이에 항거했던 대종교와 보천교, 백백교 등이 사이비 종교로 몰리면서 초토화되고, 민족종교인 천도교와 증산교 등도 와해 직전에 간 것과 달리 가톨릭은 별다는 피해 없이 교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민족과 일체감을 조성하긴 어려웠던 것이다. 남북 분단 이후 박해받은 개신교인들은 개인적 원한을 신앙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남북분단이후 남한 사회의 주도권은 미국이 잡았으므로, 남한에서 개신교가 누리는 특권은 막강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수인 가톨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쟁 이후 국민 다수가 기아선상에 헤메고 있을 때 비교적 교회는 미국에서 오는 원자물자가 풍부했다. 또 이승만 정권은 목사정치, 장로 정치를 한다고 할 정도로 개신교인들을 요직에 등용시켰다. 그것은 신식 교육을 받은 이들의 상당수가 개신교인인 때문이기도 했고, 미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미국 유학생 출신을 등용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빚어진 현상이기도 했다. 개신교는 미국, 남한 정권과 ‘함께’하면서 분단과 적대감을 부추기는 선봉에 섰다. 북쪽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공산당의 엄청난 탄압 끝에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가진 땅과 재산마저 모두 잃고 남하한 이들에게 어쩌면 이런 감정이 일어난 것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족적 비극이 한민족 내부의 원인보다는 외세의 놀음에 이용된 측면에 대해 고찰하고, 과거보다는 미래의 조국과 평화를 위해 개인적 원한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에 대한 종교인으로서 성찰은 지극히 부족했다. 남한에서 분단 이데올로기 조성엔 개신교가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그와 반대로 민주화에도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기독교 신앙이 가진 평등주의와 인권주의 등이 시민의식을 깨웠고, 많은 개신교인들이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희생을 감수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이미지는 현대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개신교와 가톨릭의 이미지는 뒤바뀌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펼치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사제들의 촛불시위 등이 국민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독재정권에서 김수환 추기경 등 가톨릭 지도자들이 보인 균형잡힌 제언 등이 국민들의 갈증을 해소해준 때문이었다. 개신교는 산업화와 성공주의가 지배하는 60~80년대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면서 거대한 성장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로인해 교회는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 논리가 깊숙히 자리하게 돼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이 지배하고 있다는 나오는 말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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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양명학 http://theologia.kr/board_korea/27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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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 이상설 http://m.blog.daum.net/gbbae56/11808742?tp_nil_a=1


  • 강화도성지순례 [[3]]
  • 한국 기독 교회사 [[4]]
  • 한국교회 문화유산 답사기 ⑫ ] 강화도 [[5]]
  • [202호 기독교 유적지 답사⑥] 이야기 섬, 강화 가는 길 [[6]]
  • 강화도 기독교 역사 이야기 8회 [[7]]
  • 한국교회사 [[8]]
  • 뼛 속까지 유교 숭배자, 예수 따르다 [[9]]
  • 이야기 한국교회사(1) 조선의 바울 김창식 목사 [[10]]
  • 장로교와 감리교 [[11]]
  • 개신교 감리교의 강화도 전래와 문화변동 [[12]]

미주독립운동

  • 강화 기독교인들, 3.18 만세운동 주도 [[13]]
  • 스무 살 청년 마음속'애국애족의 횃불'타오르다 [[14]]
  • 丁未의병서 만세운동까지.. 항일투쟁 맥 이은 '결사대장 유봉진'[[15]]
  • 강화도 백범길···역사 탐방지로 만든다 [[16]]
  • 1946년 11월 18일 김구선생 강화방문 사진 발견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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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개신교 성장, 하곡학과 관련있다" http://m.newspower.co.kr/a.html?uid=15506]
  • 출처: [군인 이동휘, 기독교 전도사로 변신하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6/17/2010061702409.html]
  • 출처: [종교전문기자가 본 한국 기독교 (1)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222298.html#csidxb6db77398ce5ce280533d8dc2b96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