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강화개신교
강화양명학과 함께 강화의 근대정신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의 수용이다. 18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공회, 감리교 등 기독교의 선교가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설립한 교회와 학교는 근대문물을 익히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특히 성재이동휘가 1907년 조선군대해산 당시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후일 교육운동으로 돌아서면서 합일학교, 보창학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게된다. 이때 이동휘 등이 설립한 학교와 교회는 1919년 강화군 3.1만세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강화양명학파의 해외망명과 독립운동이 있었다면 1919년 3.1운동 이후 강화의 독립운동은 상해임시정부와 사회주의운동으로 확산되어간다. 일본군 장교 살해협의로 인천감리서에 수용중이던 백범 김구는 기독교계열의 강화 독립지사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황해도를 거쳐 망명길을 떠났으며, 3.1운동으로 옥살이했던 죽산 조봉암은 일본유학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고 조선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설립한다. 일제시기동안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였던 죽산은 해방후 전향선언을 하고, 제헌국회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죽산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진보당사건’을 빌미로 1959년 사형되었으나 2011년 무죄로 판명되었다. [1]
19세기말 기독교가 유독 강화지역에 급속하게 성장하게 된 이유가 조선후기 그 지역에 퍼져있던 ‘하곡학(霞谷學)’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하곡학은 중국 양명학을 수용한 하곡 정제두의 호를 딴 것으로, 예전에는 ‘강화학파’나 ‘강화 양명학파’로 불리던 학문이다. 1900년에 강화읍에 잠두교회가 설립되고 10년만에 39개교회에 교인 수 3,230명으로 성장한 데에는 바로 이 하곡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실제로 강화군농업센터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은용 박사(인천대)에 의해서 설득력을 얻었다. 이 박사는 지난 3일 새문안교회 언더우드교육관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한규무) 학술발표회에 참석해 ‘하곡학과 강화의 초기 기독교’라는 주제로 발표하며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다. 먼저 그는 돌림자 신앙과 이 학파와의 관련성을 밝혔다. 강화의 초기 교인들은 하나같이 이름자의 끝을 ‘일’(一)자로 통일했는데 예수 믿고 기독인이 되면서 거듭남과 헌신의 표시로 바꾼 것이었다. 이를 두고 이 박사는 “이러한 현상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도 있었다”며 “봉건적 사회구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이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하곡학의 특징인 강력한 실천력이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어 그는 “돌림자 신앙은 1902년 미국 하와이로 이민간 이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흥미롭게도 그 당시 강화의 교인들이 그 이민단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세우고 운영하는 학교의 이름까지 일(一)자 돌림을 썼다며,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합일초등학교를 예로 들었다. 미국인 선교사 조원시와 박능일 전도사가 세운 것으로 원래 이름은 ‘잠두의숙’이었다가 1908년에 ‘강화합일학교’로 개칭했다. 이 박사는 이런 역사적 근거들로 미루어 보아 18세기 초 하곡 정제두의 ‘지행합일’ 사상이 강화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신행합일(信行合一)’ 정신으로 전이된 것이라며 “강화인의 내면에 배여 있는 실천정신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논평을 맡은 성백걸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는 “초기 개신교인들을 보면 한학을 공부하고, 그 소양과 지식, 세계관을 지닌 가운데 기독교 복음을 수용했다. 당시에는 그런 모습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며 “거기에는 근대 서구 패러다임의 기독교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한국적인 기독교가 형성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면을 삶을 규명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강화 지식인의 하곡학과 개신교의 성장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근거가 약한 것 같다”며 “하곡학과의 관련성을 넘어서서 강화도 전체 토박이들의 사상적 배경과 개종과정을 추적하고 접근한다면 더 좋은 연구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2]
대한제국 참령 이동휘(1873~1935)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직후 자신이 직접 매국 오적을 처단한 뒤 자결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고는 고종, 이천만 동포형제, 진신(縉紳·모든 벼슬아치), 법관, 을사오적, 각국 공사관 사절,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등에게 보내는 유서 8통을 썼다.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국가를 보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사와 자결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독교와 관계 깊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죽음 앞에서 동포들에게 쓴 유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심(相愛之心)이 없고, 기독교가 아니면 애국지심이 없으며, 기독교가 아니면 독립지심이 없다. 자수자강(自修自强)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충군애국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독립단합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다."
함남 단천에서 지방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이동휘〈사진〉(뒷줄 왼쪽. 오른쪽은 부인 강정혜, 가운데는 부친 이승교, 나머지는 자녀들)는 10대 후반 상경하여 군인이 되었다. 청렴강직한 군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그는 민영환·이준 등의 애국지사들과 함께 개혁당이나 대한보안회 활동을 하면서 개혁구국의 뜻을 키웠다. 친위대 장교 시절에는 친기독교적인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가 기독교에 정식 입교한 것은 1905년 3월 강화부윤과의 마찰로 강화도진위대장직을 사임한 뒤였다. 강화도에 보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계몽운동가로 나선 그는 전도사 김우제의 권유를 받고,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 없이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길을 발견한 그는 자결하려던 마음을 바꾸고 전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그는 캐나다장로교회의 로버트 그리어슨에게 부탁하여 무보수로 기독교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강화도와 서북 지역을 순회하면서 기독교 전파와 교육진흥에 온 힘을 쏟았다. 1909년 무렵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함경도의 이동휘'는 '평안도의 안창호'와 쌍벽을 이루는 서북지역 교육지도자로 부상하였다.(서북학회월보, 1909. 10.)
1907년 7월 이동휘는 이갑·노백린 등의 무관들과 함께 고종 양위를 반대하는 무장항쟁을 계획했고, 강화도의 기독교도와 군인들을 동원한 대중집회를 주도하여 군대해산에 항의하도록 했다. 이에 연루된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없어 곧 풀려났다. '한일병합'을 앞둔 1910년 8월 3일 배일운동의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8월 29일 풀려났다. 풀려난 후 그는 기독교 전도사의 신분으로 북간도를 왕래하면서 광복단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안명근 사건에 연루·체포되어 유배처분을 받았지만, 광복단 조직은 발각되지 않았다.
1913년 국외로 탈출한 그는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3·1 운동 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는 가운데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독립투쟁을 계속하다 1935년 러시아에서 병사했다. 전통시대 군인에서 기독교 교육자로, 다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20세기 초 한반도 지식인들의 고뇌가 응축돼 있다.
한국의 가톨릭은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기 실학자들의 스스로 선택에 의해 이땅에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세계 종교사에서도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도 이 점에 있어서 큰 자부심을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야말로 구한말과 일제 민족지도자들의 결단에 의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정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 김약연, 이동휘, 이승만, 서재필, 김구, 유일한 등 먼저 깨어난 선각자들이 왜 개신교를 이 민족을 살릴 대안으로 선택한 것일까. 지금까지 개신교의 전래의 원인은 대부분 선교사의 노력과 성령의 역사로 풀이해왔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온 곳은 한국만이 아니다. 왜 일찍 선교사들이 갔던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도 동양의 어느 나라보다도 유·불·선의 기존 종교 사상이 확고히 뿌리를 내린 조선에서 유일하게 개신교가 착근에 성공한것일까. 처음 개신교를 받아들였던 선각자들은 대부분 유학자들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서당 훈장 앞에서 무릎 꿇고 사서삼경을 외우고, 상투를 틀고 산 그들에게 서양 선교사를 앞세운 예수쟁이들이 곱게 보일리는 없었을 것이다. 초기 가톨릭 신자들이 전통적인 제사의식을 거부한데 대해 분노하했던 박해자들의 의식 구조와 이들이 다를 게 뭐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이들은 결국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한 사회의 변혁을 고찰할 때 다차원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근대 종교의 변혁 또한 기독교만의 연구로는 그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이 땅에 기독교가 착근한 성공 요인을 타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에서 찾는다면, 왜 다른 동양 국가들과 중동의 이슬람권에는 기독교가 비교 우위성을 보이지못했는지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착근하지 못한 이유가 일본이나 이슬람권의 지독한 박해 때문이라는 논리는 엄청난 박해를 뚫고 선교한 초기 기독교의 역사 앞에선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전체를 볼 수 있지만, 흐린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을 전체라고 우긴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우물 안을 세계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구한말 선각자들이 개신교를 ‘선택’한 원인은 기독교 자체에서보다는 그 시대와 사회, 기존 종교의 실상에서 찾는게 더 정확할 것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외세에 나라를 잃지않고, 전쟁의 참화에 빠지지않은 채 안정돼 있었고, 기존 종교들이 제 구실을 했다면 개신교가 초스피드로 착근에 성공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선각자들은 나라가 망해 내 가족과 내 동포들이 하나같이 지옥이나 다름 없는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상태에서 국민 의식을 바로 세워줄 새로운 정신 사상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돼 놋그릇처럼 녹슬어버려 공자의 인륜과 붓다의 만인 평등과 같은 초심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타성에 젖어버린 기존 종교 사상으로는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초기 개신교는 약자들에게 개벽사상이었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고려시대 귀족불교와 왕족불교로 변해 조선의 등장과 함께 여지 없이 심판을 받은 것처럼 조선 시대 500년간 국가 이념이었던 유교가 왕족과 양반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해 백성과 여성 등 약자를 핍박하는 수단이 된 데 대한 비판 의식이 싹틀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나라가 망해가며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는데도 민중을 수탈하는 유학자들의 모습에서 ‘윤리 종교’라는 유교의 진면목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초기 기독교의 전래 상황에서 기존 기득권과 종교에 대한 반발로 인한 두가지 특성을 주목한다. 하나는 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된 대표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널리 퍼졌다.
소외된 지역민과 상민·중인, 여성 등 약자에게 기독교는 개벽이었다.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어져버린 유교적 가르침은 삼종지도와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등을 강요하면서 약자들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아무데도 하소연할 데 없이 가슴앓이로 죽어가며, 가깝게는 양반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널리는 관아에 시달림을 당하던 약자들에게 발뻗고 울 수 있고, 하소연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 자체가 그야말로 말로만 들어오던 ‘개벽’이었던 것이다.
또 불교보다는 기독교와 상당히 가까운 교리적 틀을 갖춘 동학이 사회변혁운동이 이미 한차례 전국을 휩쓴 것도 기독교적 토양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각자들은 민족의 살길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민초들에게 부정의한 기존 종교와는 달리 평등한 모습으로 다가웠던 기독교가 약자의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민족을 살릴 선각자들이 개신교를 민족 벽혁의 기재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민족혼을 살리기 위해 선각자들에 의해 만든 이 땅의 초기 기독교공동체로 평북 정주 용동촌과 간도 명동촌을 꼽을 수 있다. 용동촌은 ‘겨레의 스승’으로 불리는 남강 이승훈(1864~1930)이 1899년 친인척들을 집단 이주시켜 세운 이상촌이다. 남강은 이미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되었지만, 그 때까지만도 개신교인이 아니었고, 유가적 이상촌 건립을 꿈꾸었다. 그런 그를 깨운 것은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와 다석 유영모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1905년)이 맺어져 나라를 잃을 위기에서 크게 당황하던 남강은 1907년 평양에서 도산의 연설을 듣게 된다. 도산은 “사람은 제가 자기를 업수이 여긴 후에야 다른 사람이 업수이 여긴다”고 했다. 나라를 잃고 이런 고난을 받는 근본 원인이 일제나 외부에 있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먼저 알야야 한다는 것이었다. 간디가 영국 제국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우리를 멸망시키고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 깨어나서 화합하지않고선 독립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호소하기 10년도 더 전에 안창호는 이런 호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남강은 용동촌에 오산학교를 설립해 ‘민족 깨우기’를 시작한다. 그에게 기독교를 가르쳐준 사람은 다석 유영모다. 다석 유영모는 이미 유학에 문리가 트인 사람이었다. 사서삼경은 물론 노자·장자까지 섭렵한 그는 오산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쳤고, 남강은 민족을 깨우는 종교로서 기독교를 선택한다.
이 오선학교에서 교사로 활약한 고당 조만식과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를 비롯 함석헌,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소설사 염상섭, 벽초 홍명희, 시인 김소월, 화가 이중섭 등 수많은 인재와 우국지사를 낳았다.
간도의 명동촌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규암 김약연(1868~1942) 선생이 1899년 함북 회령에서 141명을 이끌고 이주해 한민족공동체로 설립한 마을이다. 김약연은 본래 우리 조상인 고구려인들의 땅이므로 개간해 우리나라 땅을 만들어보자는 웅지를 품고 땅 수백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사들여 한인 집단거주지를 조성했다. 그야말로 한국판 모세였다.
그는 1901년 곧바로 규암재라는 서당부터 지어 교육을 시작했다. 규암재가 서전서숙으로 발전하고 서전서숙이 1909년 명동학교가 되었다. 명동학교에서 문익환·윤동주·나운규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와 오국지사들이 자랐고, 일제의 탄압으로 명동학교가 문을 닫고 1930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합쳐진 뒤에도 기독교장로회의 설립자인 김재준 목사가 가르치고, 안병무, 강원용, 문동환같은 인재들이 나왔다.
규암이 개신교인이 된 것은 명동학교에 초대된 교사 정재면의 권유가 시발이 되었다. 이미 함경도 일대에서 대표적인 유학자로 손꼽힐만큼 탁월했던 유학의 대가가 개신교를 받아들인 것은 정신을 새롭게 개혁하고, 개신교 선교사와 목사들을 통해 쉽게 들여올 수 있는 신문물, 신 교육이 아니고선 힘을 기르기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호남의 대표적인 교회인 전주 서문교회를 반석에 올린 경재 김인전 목사도 충남 서천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사서삼경을 깊게 공부해 한학에 조예가 깊은 유림이었다. 그 때만해도 보수적인 전주의 양반들은 기독교인들을 쌍놈이라며 멸시했는데, 향교에 있던 어느 유학자보다 박학다식했던 김인전 목사의 학문적 깊이와 인격에 매료돼 기독교를 함부로 폄하하지않는 풍토가 되었다. 김인전 목사는 3·1운동 뒤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의정원장으로 활약하다 서거한 독립지도자였다.
개신교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민족과 하나가 되었다
선각자들은 나라잃고 떠돌던 유대인들이 신앙심으로 뭉쳐 애굽을 탈출해 젗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가는 구약에 크게 고무되었다. 유대인들의 고난과 우리 민족의 고난은 너무나 유사했기에 이들의 신앙이 우리 민족이 이 고통의 시련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남강과 규암, 경재 등 초기 선각자들은 모두 3·1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개신교인이었다.
그 때도 역시 미국 등 제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독립운동을 돕기는 커녕 애써 ‘개인 구원’만을 강조함으로써 사회 참여를 저지했다. 부흥사 등 상당수의 목회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당시 3·1운동을 앞두고 평양에서 개신교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도, 길선주·손정도·신흥식 목사 등은 신중론을 폈다. 그 때 남강이 일갈했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자식과 형제 자매와 이웃과 동포들이 전부 지금 지옥에 있는데, 혼자 천당에 갈 생각을 해!”
그런 남강의 일갈이 없었다면 평양대부흥의 기세도 사그라들어 여전히 서양의 이방 종교에 불과했던 개신교가 한민족과 일심동체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유일무이하게 착근에 성공하는 것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3·1운동 당시에도 개신교인의 숫자는 20만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체 인구의 1%도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개신교가 3·1운동을 주도해 이 땅의 고난과 함께 하면서 함께 만세를 부르짖음으로써 소수 외래종교에서 단시일내에 우리 민족의 종교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함께 생사를 걸었던 사람들, 더구나 죽음을 불사르고 앞장 섰던 사람들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박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왜 가톨릭보다는 개신교가 역사의 헤게모니를 쥐었나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200년도 더 전에 들어왔다. 초기 조상 숭배를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가톨릭은 엄청난 박해를 받아 무려 1만여명이 순교했다. 이런 순교 영성은 세계 종교사에서도 드문 일로 신앙적으로는 고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가톨릭은 민족공동체적으로 일체감을 조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가톨릭인 민족공동체와 갈등을 낳은 그 대표적인 것인 ‘황사영 백서’ 파동이다.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조선의 가톨릭 박해상과 그 해결 방안을 적은 종이를 1801년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다. 백서엔 1785년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의 사정과 박해와 순교 상황 등을 적고, 조선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는 방안을 적었다. 황사영은 구베아 주교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해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척과 군대 5만~6만명을 조선에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 이후 조선이 외세에 의해 망해가며 백성들은 도탄의 위기에 있었지만, 프랑스 등에서 온 선교사들은 오직 선교가 목표일 뿐, 이 땅 민초들의 삶과 국권 회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의 예에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영웅이었고, 조선과 중국, 동아시아의 민족들에겐 철천지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계획한 안중근은 거사 준비 때부터 간도 용정의 천주교회를 찾아가 가톨릭 신부에게 협조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를 도와준 것은 개신교인 규암 김약연이었다. 안중근은 규암의 협조로 간도 명동촌 뒷산에서 권총 연습을 했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그런데 안의사의 의거에 대해 한국 가톨릭교단은 안 의사를 살인범이라는 이유로 신자 자격을 박탈해 파문에 가까운 조치를 취했다. 한국 가톨릭을 대표했던 뮈텔 주교는 안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일본인들이 안의사의 시체를 가족들에게조차 넘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그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논평했다. 안의사가 순교 직전, 자신이 18살 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빌렘신부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자 할 때도 뮈텔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자신의 말을 듣지않고 이를 행한 빌렘 신부에게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2개월 간 미사 집전을 금하는 성무집행 금지 조처를 내렸다.
당시 상황을 볼 때 신앙이 중요한가, 조국이 중요한가라는 게 논점은 아니다. 당시 뮈텔 주교는 당시 가톨릭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나라 잃은 백성이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일제에 의해 죽임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동정과 연민 없이 오히려 일제의 입장에서 도그마적인 신앙 교리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가톨릭 선교사들의 그런 분위기에 따라 전세계를 놀라게 한 비폭력평화시위였던 3·1의거를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가톨릭에선 단 한명도 포함되지않았다. 그랬기에 가톨릭은 제사의식을 수용해 문화적으로는 일체감 조성에 노력했으나 이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은 대표 종교로 남았다.
암울한 일제 36년 동안 이에 항거했던 대종교와 보천교, 백백교 등이 사이비 종교로 몰리면서 초토화되고, 민족종교인 천도교와 증산교 등도 와해 직전에 간 것과 달리 가톨릭은 별다는 피해 없이 교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민족과 일체감을 조성하긴 어려웠던 것이다.
남북 분단 이후 박해받은 개신교인들은 개인적 원한을 신앙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남북분단이후 남한 사회의 주도권은 미국이 잡았으므로, 남한에서 개신교가 누리는 특권은 막강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수인 가톨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쟁 이후 국민 다수가 기아선상에 헤메고 있을 때 비교적 교회는 미국에서 오는 원자물자가 풍부했다. 또 이승만 정권은 목사정치, 장로 정치를 한다고 할 정도로 개신교인들을 요직에 등용시켰다. 그것은 신식 교육을 받은 이들의 상당수가 개신교인인 때문이기도 했고, 미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미국 유학생 출신을 등용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빚어진 현상이기도 했다.
개신교는 미국, 남한 정권과 ‘함께’하면서 분단과 적대감을 부추기는 선봉에 섰다. 북쪽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공산당의 엄청난 탄압 끝에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가진 땅과 재산마저 모두 잃고 남하한 이들에게 어쩌면 이런 감정이 일어난 것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족적 비극이 한민족 내부의 원인보다는 외세의 놀음에 이용된 측면에 대해 고찰하고, 과거보다는 미래의 조국과 평화를 위해 개인적 원한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에 대한 종교인으로서 성찰은 지극히 부족했다.
남한에서 분단 이데올로기 조성엔 개신교가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그와 반대로 민주화에도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기독교 신앙이 가진 평등주의와 인권주의 등이 시민의식을 깨웠고, 많은 개신교인들이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희생을 감수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이미지는 현대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개신교와 가톨릭의 이미지는 뒤바뀌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펼치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사제들의 촛불시위 등이 국민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독재정권에서 김수환 추기경 등 가톨릭 지도자들이 보인 균형잡힌 제언 등이 국민들의 갈증을 해소해준 때문이었다.
개신교는 산업화와 성공주의가 지배하는 60~80년대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면서 거대한 성장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로인해 교회는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 논리가 깊숙히 자리하게 돼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이 지배하고 있다는 나오는 말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4]
유교나 불교와 달리 그것이 사람을 다시 나게 한다. 기존의 종교나 가치로는 사회를 못 바꾼다고 생각. [5]
- 강화도성지순례 [[1]]
- 한국 기독 교회사 [[2]]
- 한국교회 문화유산 답사기 ⑫ ] 강화도 [[3]]
- [202호 기독교 유적지 답사⑥] 이야기 섬, 강화 가는 길 [[4]]
- 강화도 기독교 역사 이야기 8회 [[5]]
- 한국교회사 [[6]]
- 뼛 속까지 유교 숭배자, 예수 따르다 [[7]]
- 이야기 한국교회사(1) 조선의 바울 김창식 목사 [[8]]
- 장로교와 감리교 [[9]]
- 개신교 감리교의 강화도 전래와 문화변동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