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수도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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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6월 7일 (월) 14:24 판 (베네딕도회와 조선 근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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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회 조선 진출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성에 요청하여 이뤄졌다. 베네딕도회 조선 진출은 1909년 2월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 신부와 다른 한명의 수도 신부가 조선에 입국 서울 백동(栢洞, 현 혜화동)에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베네딕도회와 조선 근대 교육

서울

베네딕도회는 1927년까지 숭공학교[1910년(개교)~1920년(폐교)], 숭신학교(1911년)를 설립 운영하며 목공, 철공,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기능공들을 배출하였다. 원산교구가 설정되고 이 지역 선교를 위촉받으면서 1920년부터 서울에서 철수를 시작해, 1927년까지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주를 마쳤다.

원산

1927년부터 1949년까지는 원산교구의 사목을 담당하면서 학교, 유치원 운영, 시약소 개설, 출판 활동 등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이전 당시 5개 본당, 7,500여 명이었던 신자는 12개 본당, 89개 공소, 11,004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945년 분단과 함께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 1949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한 신부, 수사들의 체포로 수도원도 폐쇄되었다. 1928년부터 1946년까지는 만주 간도 지방이 원산교구에 편입됨으로써 만주 지방 선교에도 나서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본당 사목과 초등교육에 주력하였지만, 이곳도 중국의 공산화로 1946년부터 사실상 활동이 정지되었다.1952년부터 현재의 왜관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3년부터 대구교구로부터 위임받은 6개 군의 사목을 담당하기 시작했고, 순심 중고등학교 인수, 성 마오로 기숙사 운영, 분도출판사와 인쇄소 설립 운영, 철공소, 목공소와 같은 작업장 운영, 현대식 농장 경영, 피정집 운영 등을 해왔다. 2014년 현재 왜관수도원에 121명, 경기도 양주의 요셉수도원에 13명의 회원이 있다.

숭공학교

건전한 직공 양성을 통해 선교사업을 전개한다는 목적으로 베네딕토 수도회가 1910년 혜화동에 설립한 직업학교. ‘기도하고(崇), 일하라(工)’라고 한 베네딕토 수도회의 이념에 따라 학교명을 숭공(崇工)이라 하였다. 숭공학교는 우선 철공소와 목공소를 개설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목공예, 자물쇠, 제작, 양철제품 제작, 페인트칠, 제차(製車) 등의 기능을 연마케 했고, 제도(製圖), 한문, 일본어, 수학, 교리(敎理)교육도 병행하였다. 교과과정은 4년이었고, 전과정을 이수한 학생에게 이론과 실기시험을 치른 후 자격증을 교부하였다. 숭공학교는 제대, 촛대, 세례반을 주문받아 제작, 판매하였고, 자동차의 상부를 제작하거나 수리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숭공학교의 제작품으로 대표적인 것은 명동성당의 강론대가 있다.

1915년 3월 뮈텔 주교의 주교 서품 25주년을 맞이하여 선물로 제작한 명동 성당의 강론대


1914년에는 재학생 수가 70명이었는데, 200명이 지원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이 일본의 적성국(敵性國)이 되자, 독일에서 진출한 베네딕도 수도원에도 일제의 압박이 가해졌다. 특히 숭공학교와 관련해서는 11월 하순에 총독부의 폐쇄 요구가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인인 뮈텔주교가 사우어 아빠스 대신 교장 직을 맡게 되면서 승공학교는 계속 운영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교사로 일하던 4명의 수사가 징집되어 학생 수를 늘릴 수 없었고,독일이 패전국이 되면서 수도원은 독일로부터의 경제적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1919년 5월,일제는 독일인이 경영하는 승공학교를 적산(敵産)으로 몰수하려 하였다. 이에 서울 대목구에서는 형식적이지만 숭공 학교의 경영권을 넘겨받았고,프와넬 신부가 ‘분도회 소속 재산 관리 위원’ 이 되면서, 학교의 재산과 운영이 유지될 수 있었다.

1921년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 감에 따라 숭공학교도 폐교하게 되었다.

숭신학교

베네딕토 수도원이 1911년 설립한 일종의 사범학교. 당시 베네딕토 수도원이 있던 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 자리에서 개교하였다. 초대 교장은 안드레아 에카르트(Andrea Eckardt, 玉樂安,1884〜1974) 신부가 취임하였고 2대 교장에는 로머(Romer, 盧) 신부가 취임하였다. 학제는 2년제로 종교학, 윤리학, 교육학, 한국어, 한문, 일본어, 세계사, 지리, 수학, 박물학, 음악, 도화, 체육, 등 과목을 4명의 강사(한국인 2명, 수사신부 2명)가 담당하였다. 15~28세의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1911년 9월에 23명, 1912년에 26명, 1913년에 17명을 선발하여 교육시켰다. 1913년 9월 일제의 탄압으로 제1회 졸업생만을 배출하고 2년만에 폐교되었다.

제1회 졸업식은 1913년 7월 1일에 거행되었고,17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그러나 9월 베네딕도회 에서는 숭신학교의 폐교를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1913년 9월의 지원자가 4명 밖에 없다는 것이었지만,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인 교사의 양성을 원치 않았던 일제의 교육정책 때문이었다. 일제는 사범학교를 폐교시키고 대신 4년제 중등학교를 만들어 그 교육과정 중에 1년 동안의 교직 과목을 넣도록 하였다. 그러나 숭신학교를 그러한 체제로 변경하게 되면,적어도 2명의 일본인 교사를 채용해야 하며,매주 10시간의 일본어 수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일본어로 시험을 치러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은 숭신학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 결과 베네딕도회에서는 숭신학교의 폐교를 결정했던 것이다. 이외에 사우어 아빠스는 숭신학교를 폐교한 원인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재정난으로 졸업생들을 교사로 고용하여 봉급을 지불할 형편이 못되었다는 점과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종신토록 학교 교사로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점도 들고 있다.

  • [가톨릭사전]
  • [천주교서울대교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베네딕도회왜관수도원(聖─會倭館修道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