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관련인물
이동녕 이회영 장유순 이관식
이상룡 김창환 여준 이탁
발자취
1910년 7월 남만주 지역의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부지 확정
1910년 겨울 이삿짐을 실은 마차를 끈 62명의 대가족이 압록강을 건넜다. 살기 힘들어 떠나는 유랑민이 아니라 대대로 문벌이 높은 삼한갑족으로 이름난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등 6형제의 가솔들이었다. 이들은 전재산을 처분한 당시 돈 40만원(현재 시가로 600억원 상당)을 품에 안고 독립운동 기지를 찾아 나섰다.
1911년 2월 서간도로 간 이들 형제는 현재 길림성인 유하현 삼원보에 자리를 잡았다. 2월에는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 유림과 지사들인 석주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의 가족들이 합류했다. 이씨 형제들과 이상룡 등은 그해 5월 삼원보 대고산에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설립했다. 대표인 사장에는 이상룡을 선출했다. 경학사는 이름 그대로 낮에는 논밭을 경작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1911년 4월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삼원보 고산자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독립 기지 건설을 결의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5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투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주의(모두 농사를 짓는다)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 간부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할 것.
1911년 6월10일(음력 5월14일) 삼원보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강습소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중등과정 교육과 함께 군사과를 설치했다. 처음부터 독립투사를 키우겠다는 목표가 뚜렷했다. 신흥이라는 이름 역시 항일운동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이회영 등이 참가했던 비밀항일단체 신민회(1907년)의 ‘신’에다가 나라를 부흥케 한다는 의미의 ‘흥’을 붙였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맡았다.
1912년 7월
망명지사들은 이후 좀더 안전한 독립기지를 물색한 끝에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정도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했고, 여기서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했다.
1914년에는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이 중심이 돼 통화현 소백차에 백서농장을 만들었다. 단속을 피할 목적으로 농장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실제로는 정예 용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이 넘치자, 유하현 고산자 부근으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겼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압력으로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약 3500명의 무관, 즉 독립투사들을 길러냈다.
단체
신민회
경학사(사장 이철영, 부사장 이상룡, 서무에 김동삼, 이원일, 학문에 이광, 여준, 재무에 이휘림, 김자순, 조사에 황만영, 박건, 조직에 주진수, 김창무, 외무에 송덕규, 정선백 선임 경학사는 외면적으로는 농사를 짓고 교육하는 회사 조직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신민회의 해외 정치조직 역할을 담당했다. 부설기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장에는 이동녕이 선입되었고·교관은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김창환·남상복·이장녕·이세영·이관직 등이 맡았으며, 개교 첫 해에 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후 통화현 제6구 합니하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삼원보가 너무 번잡하여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새 부지비용은 이회영의 형 이석영이 전답 6,000석을 팔아 부담하였다.
부민단 경학사 운영은 원만치 못했다. 개농주의에 따라 주민 전체가 농토를 개간했지만 수차례에 걸친 서리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는 곧 운영난으로 이어졌다. 이에 신민회는 경학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인 부민단을 창설했다. 이는 경학사보다 더욱 정치적인 기관으로, 조직을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10호·100호·1000호 단위로 나눠 패·구·지방으로 구분하였다. 패에는 패장(牌長) 또는 십가장(十家長), 구에는 백가장(百家長), 지방에는 천가장(千家長)을 각 1명씩 두었다. 이후 부민단은 부민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는데, 그 특징은 대표자대회에서 결의한 내용들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첫째, 부민단을 정부의 기능을 가진 보다 넓은 범위를 의미하는 부민회로 고칠 것. 둘째, 동포간의 소송 사건을 담당할 검찰과 사판제도를 둘 것. 셋째, 각 지방의 교육 기관은 해당 지방의 능력에 맡기고 군사 간부 양성 기구인 신흥학교의 경비는 일체 본관에서 책임질 것. 넷째, 흉작과 인명 손실을 극복하고 조국 광복의 달성에 매진할 것.
신흥강습소
1913년 5월 신흥중학교로 개칭한 신흥강습소는 중학반과 군사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유지하였다. 이후 신흥중학교는 1919년 5월3일에 신흥무관학교로 개명되면서 본격적인 무관 양성기관으로 자리매김 했다. 이후 일본 육사 출신 지청천을 비롯하여 윈난 사관학교 출신 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학교의 명성은 점점 올라갔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의 유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 설립 이후 2년간 지속된 대흉작으로 재정난을 겪어야 했고, 학생들 사이에 출신 지역을 바탕으로 한 갈등이 심화되어 피살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마적들의 습격으로 교감을 맡고 있던 윤기섭을 비롯하여 교관과 학생들이 납치당하는 등 악재가 이어졌고 1920년 8월, 끝내 폐교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비록 신흥무관학교는 사라졌지만, 그간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 2,000여 명은 항일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섰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의 핵심들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서간도 지역의 독립무장단체 서로군정서 등에도 상당수의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졸업생 활동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있었던 주요한 항일투쟁의 주역이었다. 독립군이 최초로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던 봉오동 전투(1920년),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맞서 싸워 대승했던 청산리 전투(1921년)의 주축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특히 청산리 전투에는 이청천, 김동삼이 이끄는 400여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가 참전해 활약했다.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던 김좌진 장군도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흥무관학교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이끌었던 석정 윤세주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윤세주는 1942년 일본군 40만명의 포위로 비롯된 태항산(산동성과 산서성 경계에 위치)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음으로써 중일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윤세주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교가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 영절에 여러 만만 헌헌 자손 업어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것들 품에 다 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장백산밑 비단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거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맡기고 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쇳문이 온다. (후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