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pattern
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12월 11일 (금) 11:02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到桃渚所。是日大雨。兩千戶並馬驅臣等。冒雨以行。臣令程保告許淸曰。我等漂海。浮沈飢渴。臨死復甦。僅保餘喘。得到貴境。得遇官人。得飽昨朝之飯。以爲得再生之地。乃於霖霪之雨。濘潦之途。顚坑仆谷。撥石衝泥。體凍脚微。心焦力盡。昨夕不得食。今早又不得食。又驅出冒大雨而行。我其殆將半塗而斃矣。許淸復曰。昨因你走不到官司。自取飢。今若便到。則官自供給。速去速去。臣運步不得。仆路隈。四體委地不收。孝子,程保,金重,莫金,萬山,巨伊山等環坐痛哭。適有牽牛而過者。程保告諸千戶曰。請解衣買此牛。以騎我員。許淸曰。我亦豈不憐你輩受此苦乎。緣拘國法。未得護汝耳。李楨,孝枝,尙理等又相代負。臣過一嶺。可二十餘里。至一城。乃海門衛之桃渚所。行將近城七八里間。軍卒帶甲束戟。銃㷁彭排。夾道塡街。至其城則城有重門。門有鐵扃。城上列建警戍之樓。城中市店聯絡。人物繁富。引臣等至一公館許留焉。臣之形容槁枯。冠服塗泥。觀者絶倒。有姓名王碧者寫謂臣曰。昨日已報上司。倭船十四隻。犯邊劫人。你果是倭乎。臣曰。我非倭。乃朝鮮國文士也。又有姓名盧夫容者自稱措大。謂臣曰。車同軌。書同文。獨你語音。不同中國。何也。臣答曰。千里不同風。百里不同俗。足下怪聽我言。我亦怪聽足下之言。習俗然也。然同得天所賦之性。則我之性。亦堯舜孔顏之性。豈嫌於語音之有異哉。其人撫掌曰。你奔喪。可行朱文公家禮乎。臣答曰。我國人守喪。皆一遵家禮。我當從之。但爲風所逆。迨今不得哭于柩前。所以痛哭。其人又問曰。你作詩否。臣答曰。詩詞乃輕薄子嘲弄風月之資。非學道篤實君子所爲也。我以格致誠正爲學。不用意學夫詩詞也。若或有人先倡。不得不和耳。又有一人寫臣掌上曰。看你也不是互人。只以言語不同。實同盲啞。誠可憐也。我告你一言。你其記之。善自處。愼勿輕與人言。自古倭賊屢劫我邊境。故國家設備倭都指揮,備倭把總官以備之。若獲倭則皆先斬後 聞。今你初繫舟處。轄獅子寨之地。守寨官誣汝爲倭。欲獻馘圖功。故先報云。倭船十四隻。犯邊劫人。將領兵往捕汝斬汝之時。你輩先自捨舟。投入人多之里。故不得逞其謀矣。明日把總官來訊你輩。你其詳辨之。少有違誤。事在不測云云。臣問其姓名則曰。我所以言之者。愛汝也。危之也。掉頭而去。臣聞其言。毛髮豎立。卽語程保等。保等曰。路人指我等爲斬伐之狀者。皆惑此謀故耳。日夕。千戶等官員七八人。置一大卓。環立卓邊。引程保於前。問曰。你一起一十四隻船。實否。保對曰。否。但一隻而已。揮程保以出。又引臣問曰。你衆所駕原船幾隻。臣曰。只一隻耳。問曰。我邊上瞭見。倭船一十四隻。同泊昨處海洋。我因守寨官之報。已報于上司大人。你船十三隻。置之何地。臣曰。我之到海岸時。有貴地人等乘船六隻。同泊一海。若要究六船人。則我之船數可知矣。問曰。你以倭人。登劫此處。何也。臣曰。我乃朝鮮人也。與倭語音有異。衣冠殊制。以此可辨。問曰。倭之神於爲盜者。或有變服。似若朝鮮人者。安知你非其倭乎。臣曰。觀我行止擧動。證我印牌冠帶文書。則可辨情僞。千戶等卽令臣拿印信等物來以質之。因問曰。你無乃以倭劫朝鮮人。得此物乎。臣曰。若少有疑我之心。姑令送我北京。與朝鮮通事員一話。情實立見。問曰。你姓何名誰。何州縣人。何職官。因何事幹。到我邊境。開寫情狀。毋敢謊虛。我其申報上司。臣曰。姓崔名溥。住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筮仕朝著者有年。去丁未秋九月。奉 國王命。往濟州等處海島。今閏正月初三日。犇父喪。顚倒還家。遭風漂海。得到于此。曰。你父名何職何。死在何地。臣曰。父名澤。格進士試。以養親不仕。闋孝服僅四載。又死于羅州。供畢後。館臣于別館。以供臣及從者。○我國人爲公爲私。往來濟州。或遭風無去處者。不可枚悉。終能生還者。十百僅一二。是豈盡沈於海波乎。其漂入島夷若暹羅,占城之國者。無復望還。雖或漂至中國之界。亦爲邊人所誤。誣以倭賊。折馘受賞。則誰能辨其情乎。如臣等者。若不先自下陸。若無印牌之信。豈復免於禍哉。我國家若依中朝制。凡百官給號牌錫牌。篆書職姓名以旌異之。奉使臣無大小給節鉞。以尊 王命。抑又沿海住人。雖以私商過海者。皆給號牌。書某國某州縣某姓名某形某年甲以別之。又置通事一員於濟州。凡奉 使臣及三邑守令往還。常川帶行。以圖後慮。然後庶可免於患。



도저소[1][2][3][4][5][6][7][8][9][10]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천호(千戶) 두 사람이 말을 나란히 타고 신 등을 몰아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허청에게 알리기를,

“우리들은 바다에 표류하여, 풍랑과 기갈로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 겨우 잔명을 보전하여 귀국의 땅에 도착하게 되어 관인을 만나 어제 아침에 밥을 배부르게 먹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맛비와 진흙길에서 구덩이에 엎어지고 골짜기에 넘어지며 돌에 긁히고 진흙에 빠져, 몸은 얼고 발은 이지러졌으며 가슴이 타고 힘은 다 빠졌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밥을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도 밥을 먹지 못했는데, 또 몰아내어 큰비를 무릅쓰고 떠나게 하니 우리는 아마 도중에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대답하기를, “어제는 당신들이 관사(官司)[11]에 도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굶주림을 자초한 것이오. 이제 관사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관에서 지급할 것이니 빨리 빨리 갑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걸음을 옮기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길모퉁이에 넘어져서 땅바닥에 사지를 뻗어버렸습니다.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등이 빙 둘러앉아서 통곡하였습니다.

때마침 소를 끌고 지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정보가 천호에게 고하기를, "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말하기를, “난들 어찌 당신들이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당신들을 감싸줄 수 없을 뿐일세”라고 하였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한 성(城)에 이르니, 바로 해문위(海門衛)의 도저소였습니다.

성에 이르기 7-8리 앞에서부터 갑옷을 입고 창칼과 총통이나 방패를 든 군졸들이 길거리 양 옆을 꽉 메웠습니다.

그 성에 이르니, 성에는 겹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성 위에는 경수루(警成樓)가 죽 늘어 있고 성안에는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신 등을 이끌어 한 공관(公館)128에 이르러 유숙케 하였습니다.

신의 얼굴은 바싹 마르고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왕벽(王碧)이란 자가 글을 써서 신에게 보이기를,“어제 이미 상사(上司)에게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신은 정말 왜인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인이 아니라 곧 조선국 문사(文士)요.”

또 노부용(虛夫容)이란 자가 자칭 가난한 선비라고 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수레는 바퀴가 같고 글은 문자(文字)가 같은데,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천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백리에 습속이 같지 않은 것이오.130 족하(足下)는 내 말을 괴이하게 듣고, 나 또한 족하의 말을 괴이하게 듣는 것은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하늘이 준 성품을 같이 얻었으니 나의 성품 또한 요(堯) · 순(舜) · 공자(孔子) · 안회(顔回)의 성품인데, 어찌 말소리가 다름을 의심하겠소?”

그 사람은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나도 마땅히 이를 따라야하는데 다만 역풍을 만나 지금까지 널 앞에 울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통곡하는 것이오.”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나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12]을 공부하였지 시사를 배우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소. 먼저 시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

또 한 사람이 손바닥 위에 글을 썼는데,

“보아하니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닌데, 다만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불쌍하오.

(조) 여기서 나쁜 사람을 호인이라고 함: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을 가진 사람

내가 당신에게 한마디 할테니 당신은 이를 기억하였다가, 처신을 잘 하고 부디 다른 사람과 경솔하게 얘기를 나누지 않도록 하시오.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번 우리의 변경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와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을 두어 왜적을 방비하게 했소.

만약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이번에 당신이 처음 배를 맨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지인데, 수채관(守寨官)140은 당신을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그러므로 먼저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고 보고했던 것이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을 잡아 목 베려는 참에 당신들이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갔던 까닭에 그들은 계략을 펴지 못했던 것이오.

내일은 파총관이 와서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니 당신은 자세히 해명하시오.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으니,“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을 아끼고 위태롭게 여겼기 때문이오”라고 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갔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하여 바로 정보 등에게 얘기했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길가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키면서 목 베는 시늉을 했던 것은 모두 이 계략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저녁 천호 등 관원 7-8인이 큰 탁자 하나를 놓고 탁자 가에 죽 둘러서 더니, 정보를 앞에 끌어내어 심문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함께 온 배가 14척이라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아닙니다. 한 척뿐입니다”라 대답하자 손을 휘둘러서 정보를 내보내었습니다.

또 신을 끌어내어 심문하기를, "너희들이 타고 온 원래의 선박이 몇 척이나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한 척뿐입니다.”

“우리의 변경에서 왜선 14척이 어제 그 곳 바다에 함께 정박한 것을 분명히 보았고, 내가 수채관(守寨官)의 보고에 따라 이미 상급 관청의 영감님께 보고를 올렸다. 너희 배 13척은 어디에 두었는가?”

“우리가 해안에 도착할 때 귀국 사람들이 탄 배 6척이 한 바다에 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6척의 배에 탄 사람을 조사한다면 우리 배의 수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왜인으로 이곳에 상륙하여 약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곧 조선 사람으로서 왜인과는 언어도 다르고 의관도 다르니, 이것으로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인으로서 도적질에 교묘한 놈은 혹 변장을 해서 조선 사람처럼 가장하는 자가 있으니 네가 그 왜인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나의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를 조사한다면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호 등이 즉시 신에게 인신 등의 물건을 가져오게 하고는 대조한 뒤, 이어서 묻기를,“네가 왜인으로서 조선 사람에게서 이 물건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선 나를 북경(北京)으로 보내서 조선 통사원(通事員)[13]과 한번 이야기를 시켜보면, 실상이 즉시 드러날 것입니다.”

“너는 성은 뭐고, 이름은 뭐며, 어느 주현(州縣) 사람이고, 무슨 관직이며, 무슨 일로 인하여 우리 변경에 도착했는가? 그 정상(情狀)을 쓰되 거짓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상사(上司)에게 보고하겠다.”

“저는 성은 최, 이름은 부로[14],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성내에 거주하였습니다. 두 번 문과[15]에 올라 조정의 반열에 올라 처음으로 벼슬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16].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네 부친의 이름은 뭐고, 관직은 뭐며, 어느 곳에서 죽었는가?”

“아버지 이름은 택(澤)인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어버이를 봉양키 위하여 벼슬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복을 벗은 지 겨우 4년 만에 나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공초(供招)를 마친 뒤 신을 별관(別館)에 숙박하게 하고,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공무로든 사무로든 제주도에 왕래하다가 바람을 만나서 행방불명된 자가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열 명, 백 명 가운데 겨우 1-2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어찌 모두 바다에 빠진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표류해서 도이(島夷)들이 사는 섬라, 점성(占城)국과 같은 나라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수도 없었고, 혹시 표류해서 중국 땅에 이르게 된 사람도 국경지대 사람들이 잘못 왜적으로 무고하고 목을 베어 상을 받는다고 해도 누가 그 실정을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신 등과 같은 사람도 만약 먼저 스스로 육지에 내려오지 않았거나, 인신과 마패와 같은 신표(信標)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다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든 백관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17]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th Day. Arrival at T’ao-chu Chiliad. This day there was heavy rain.

The two Chiliarchs, riding abreast, drove us on, into the face of the rain. I ordered Chong Po to say to Hsü Ch’ing, “Hungry and thirsty, we drifted at sea, staring at death and regaining life. Barely staving off our dying gasps, we reached your border, met an official, and, yesterday morning, ate a full meal. We thought we had got to a place of rescue, where now, in continuous rain and muddy roads we stumble and fall in gullies and strike rocks and mud. Our bodies are frozen, our legs have sores, our hearts are anxious, and our strength is exhausted. Last night we did not eat, nor did we eat this morning, yet we are driven on, into the rain. We shall probably die on the way.” Hsü Ch’ing replied, “Yesterday you brought hunger on yourselves by not walking far enough to reach the authorities. Now, if you get there in good order, the authorities themselves will supply you. Hurry, hurry!"

I took a step, failed, and lay down at the side of the road. My whole body had collapsed and would not rally. Hyo-ja, Chòng Po, Kim Chung, Makkům, Mansan, and Kõisan sat round me and wept bitterly. Just then, a man leading an ox happened to pass by. Chồng spoke to the Chiliarch: “Please let us take off our clothes and buy this ox to carry our chief.” Hsü Ch’ing said, “How can I, too, help but pity you all for the suffering you are undergoing? But since I am bound by the laws of the country, I cannot take your part.” Yi Chong, Hyo-ji, and Sang-ni again took turns carrying me. We crossed one range and in somewhat more than twenty li came to a wall, which was T’aochu Chiliad of Hai-men Garrison. As we approached the wall, for seven or eight li there were troops wearing armor and holding lances. Fire weapons and bold shields filled the roads. When we arrived at the wall, it had a double gate, and the gates had iron knockers. Watch towers were built along the top of the wall, and within it markets and shops were continuous and the people prosperous.

We were led to a public guest house and allowed to stay there. My appearance was emaciated, my hat and gown muddy. The onlookers doubled up with laughter. One Wang Pi wrote a statement to me: “Yesterday it was reported to the authorities that fourteen Japanese boats had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re you really Japanese?” I said, “I am not Japanese, I am a Korean gentleman.” There was also a Lu Fu-yung who called himself a scholar. He said to me, "Why, when your carriages have the same axle-width and your books the same writing as those of China, is your speech not the same?”

I answered, “The same wind does not blow over a thousand li, the same customs do not obtain over a hundred. If you wonder at the sound of my words, I wonder at the sound of yours. It is a matter of custom. But if we share the nature given by Heaven, my nature, too, is the nature of Yao, Shun, K’ung, and Yen.33 How can one object to a difference in speech?” The man applauded and said, “When you go into mourning, do you observe the [rules of] Chu Wen Kung's Chia li?” I answered, “In observing mourning, every one of my countrymen respects the Chia li. I should have followed it, but being driven off by winds, I have not yet been able to weep before the coffin. For that I grieve bitterly.” The man then asked, “Do you write poetry?” I answered, “Poetry is something by which the frivolous moan about the wind and moon and not a thing indulged in by sincere men devoted to the Way. I take as my study the investigation of things, extension of knowledge, and pursuit of truth. I do not pay much attention to poetry, but if someone addresses a poem to me, I am bound to respond with one of my own; that is all.” Another man wrote on my palm: “I see that you are not an evil man. But simply because your speech is not the same, you are really like someone blind and deaf. I truly pity you, and I shall tell you something; remember it. Be very careful of yourself. Do not talk freely to people. From olden times, Japanese bandits have repeatedly raided our borders. The state, therefore, has set up Anti-Japanese Commissioners and Anti-Japanese Commanders34 to cope with them. If they seize Japanese, they behead them all first and report it later. “Now the place where you first tied your boat was in the area of Shih-tzu Stockade. The Stockade Commander falsely accused you of being Japanese. He wanted your heads for the reward, and in his first report, therefore, he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have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s he was about to lead soldiers out to take you and behead you, your group left the boat and ran into a village, where many people were. He could not, therefore, perpetrate his scheme. Tomorrow, the Commander will come and question your group. Explain things to him minutely. If there is the slightest discrepancy or error, there is no telling what might happen.”

When I asked his name, he said, “I have told you this because I like you. I have risked danger.”35 He turned and left. When I heard what he said, my hair stood up on end; so I said to Chòng Po and others, “When the people on the road pointed at us and made gestures as if to cut off their heads, it was because all of them were deluded by this plot.” In the evening, seven or eight officials, including the Chiliarch, had a large table put in place and stood round it. They had Chong Po brought before them and asked, “Is it true that your group had fourteen boats ?” Chong Po replied, “No. We had only one boat.” They motioned Chòng Po out, had me brought in, and asked, “How many boats did you start out in?”' I said, “Only one.” They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were sighted from above our coast. They were anchored together at sea yesterday. Because of the Stockade Commander's report, therefore, we have already reported the fact to our superiors. Where did you put the other thirteen boats?” I said, “When I arrived at the coast, men of your country were sailing there in six boats. We moored together. If you question the men of those six boats, you will know how many boats we had.” They said, “Why have you Japanese come here to raid?” I said, “I am a Korean. My speech is different from Japanese, my hat and gown are of different style. By those things you can tell us apart.” They said, “Some of the Japanese who are clever at banditry change their clothes and pose as Koreans. How do we know that you are not a Japanese like that?” I said, “If you observe my conduct and examine my seal, permit, cap, sash, and documents, you can tell the true from the false.” The Chiliarch and others then ordered me to bring my seal and other things and present them as evidence. They asked, “Are you not perhaps Japanese who robbed Koreans and got these things?” I said, “If you doubt me in the slightest, order me sent to Peking. A word with a Korean interpreter, and the truth will be apparent.” They asked, “What is your name? What are your department and county? What is your official position? On what business did you come to our border? Explain the facts in writing and dare not lie. We shall report this to our superiors.”

I said, “My name is Ch'oe Pu.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I have served notably at Court for some years. In the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go to Cheju and other islands, but on the 3rd Day of this Intercalary First Month I was setting out to mourn for my father. Returning home in confusion, I met a wind and was blown to sea, and I happened to come here."

They said, “What was your father's name? What was his position? Where did he die?” I said, “My father's name was T'aek. He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36 but in order to care for his parents did not take an appointment. He had laid aside his mourning clothes scarcely four years when he, too, died in Naju.”

When the deposition was finished, they lodged me in the guest house annex and gave me and my staff food. The people of our country go on official and private business to and from Cheju, and those who meet winds and get lost are beyond counting. Those who finally return home alive are barely one or two in a hundred; is it likely that all of them drown at sea? Those who drift to the island barbarian countries like Siam and Champa have no further hope of returning. Even if they drift to the borders of China, they are still wrongly accused by the people on the coast of being Japanese pirates. If their ears are cut off for the reward, who can tell the truth? How could people like us, if we had not landed beforehand by ourselves or did not have such signs as seals and permits, have escaped disaster?

Let our state follow the system of the Chinese Court and issue to all officials number tablets and pewter tablets with their names and positions thereon in seal characters to identify them. When any official, great or small, is sent anywhere, tallies and halberds should be provided to honor the King's command. Let even people living by the sea, though they cross the sea in private trade, be issued number tablets, inscribed such-and-such country, such-and-such department and district, such-and-such name, such-and-such appearance, and such-and-such date, to identify them. A consul should also be put at Cheju, and all commissioned ministers and magistrates of the three cities should always, coming or going, carry [their tablets] with them to provide for what may happen. If all that is done, then and only then will everyone be able to avoid tragedy.




十九日

到桃渚所。是日大雨。两千户并马驱臣等冒雨以行。臣令程保告许清曰:“我等漂海,浮沉饥渴,临死复苏,仅保余喘,得到贵境,得遇官人,得饱昨朝之饭,以为得再生之地。乃于霖霪之雨、泞潦之途,颠坑仆谷,拨石冲泥,体冻脚微,心焦力尽。昨夕不得食,今早又不得食。又驱出,冒大雨而行,我其殆将半途而毙矣。”许清复曰:“昨因你走不到官司,自取饥。今若便到,则官自供给,速去,速去!”臣运步不得,仆路隈,四体委地不收。孝子、程保、金重、莫金、万山、巨伊山等环坐痛哭。适有牵牛而过者,程保告诸千户曰:“请解衣买此牛以骑我员。”许清曰:“我亦岂不怜你辈受此苦乎?缘拘国法未得护汝耳。”李桢,孝技、尚理等又相代负臣过一岭,可二十余里,至一城乃海门卫之桃渚所。行将近城七八里间,军卒带甲束戟,铳熥、彭排夹道填街。至其城,则城有重门,门有铁扃,城上列建警戍之楼。城中市店联络,人物繁富。引臣等至一公馆,许留焉。臣之形容槁枯,冠服涂泥,观者绝倒。有姓名王碧者,写谓臣曰:“昨日已报上司,倭船十四只犯边劫人,你果是倭乎?”臣曰:“我非倭,乃朝鲜国文士也。”又有姓名卢夫容者,自称措大,谓臣曰:“车同轨,书同文,独你语音不同中国,何也?”臣答曰:“千里不同风,百里不同俗。足下怪听我言,我亦怪听足下之言,习俗然也。然同得天所赋之性,则我之性亦尧舜孔颜之性,岂嫌于语音之有异哉?”其人抚掌曰:“你奔丧,可行朱文公《家礼》乎?”臣答曰:“我国人守丧皆一遵《家礼》,我当从之。但为风所逆,迨今不得哭于柩前,所以痛哭。”其人又问曰:“你作诗否?”臣答曰:“诗词乃轻薄子嘲弄风月之资,非学道笃实君子所为也。我以格致诚正为学,不用意学夫诗词也。若或有人先倡,不得不和耳。”又有一人写臣掌上曰:“看你也不是歹人,只以言语不同,实同盲哑,诚可怜也。我告你一言,你其记之,善自处,慎勿轻与人言。自古倭贼屡劫我边境,故国家设备倭都指挥、备倭把总官以备之。若获倭,则皆先斩后闻。今你初系舟处,辖狮子塞之地,守寨官诬汝为倭,欲献馘图功,故先报云:‘倭船十四只犯边劫人’。将领兵往捕汝斩汝之时,你辈先自舍舟投入人多之里,故不得逞其谋矣。明日把总官来讯你辈。你其详辨之,少有违误,事在不测”云云。臣问其姓名,则曰:“我所以言之者,爱汝也,危之也!”掉头而去。臣闻其言,毛发竖立,即语程保等。保等曰:“路人指我等为斩伐之状者,皆惑此谋故耳。”日夕,千户等官员十八入,置一大桌,环立桌边,引程保于前,问曰:“你一起一十四只船.实否?”保对曰:“否,但一只而已。”挥程保以出。又引臣问曰:“你众所驾原船几只?”臣曰:“只一只耳。”问曰:“我边上瞭见倭船一十四只同泊昨处海洋。我因守寨官之报,已报于上司大人,你船十三只置之何地?”臣曰:“我之到海岸时,有贵地人等乘船六只,同泊一海。若要究六船人,则我之船数可知矣。”问曰:“你以倭人登劫此处,何也?”臣曰:“我乃朝鲜人也。与倭语音有异,衣冠殊制,以此可辨。”问曰:“倭之神于为盗者,或有变服似若朝鲜人者,安知你非其倭乎?”臣曰:“观我行止举动,证我印牌、冠带、文书,则可辨情伪。”千户等即令臣拿印信等物来以质之。因问曰:“你无乃以倭劫朝鲜人得此物乎?”臣曰:“若少有疑我之心,姑令送我北京,与朝鲜通事员一话,情实立见。”问曰:“你姓何名谁?何州县人?何职官?因何事干到我边境?开写情状,毋敢谎虚,我其申报上司。”臣曰:“姓崔名溥,住朝鲜国全罗道罗州城中。再登文科,筮仕朝著者有年。去丁未秋九月,奉国王命往济州等处海岛。今闰正月初三日,奔父丧颠倒还家,遭风漂海,得到于此。”曰:“你父名何?职何?死在何地?”臣曰:“父名泽,格进士试,以养亲不仕。阕孝服仅四载,又死于罗州。”供毕后,馆臣于别馆,以供臣及从者。我国人为公为私往来济州,或遭风无去处者,不可枚悉。终能生还者,十百仅一二。是岂尽沉于海波乎?其漂入岛夷,若暹罗、占城之国者,无复望还,虽或漂至中国之界,亦为边人所误,诬以倭贼,折馘受赏,则谁能辨其情乎?如臣等者,若不先自下陆,若无印牌之信,岂复免于祸哉?我国家若依中朝制,凡百官给号牌、锡牌,篆书职、姓名,以旌异之。奉使臣,无大小,给节钺”,以尊王命。抑又沿海住人,虽以私商过海者,皆给号牌,书某国、某州县、某姓名、某形、某年甲,以别之。又置通事一员于济州,凡奉使臣及三邑守令往还,常川带行,以图后虑,然后庶可免于患。




  • 지명: 도저소, 해문위, 사자채, 북경(北京)
  • 기후: 큰비가 내렸습니다
  • 제도(관직): 천호(千戶),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 수채관, 파총관, 조선 통사원(通事員)
  • 제도(교통): 말을 나란히 타고,
  • 인명: 허청, 왕벽, 노부용
  • 행정: 관에서 지급할 것,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 동물: 소
  • 심리: 동정
  • 지리: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성에 이르기 7-8리 앞
  • 기물: 갑옷, 창, 칼, 총통, 방패
  • 건축물: 성에는 겹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경수루(警成樓)
  • 사회: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 언어: 문자(文字)가 같은데,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
  • 유학: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
  • 시: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 비유: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
  • 시간: 저녁
  • 기물: 큰 탁자 하나
  • 의전: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 지명-조선: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 인명-조선: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이정, 효지, 상리, 최부, 최택(澤)
  • 심리-조선: 기진맥진, 좌절, 간절(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 공포(머리털이 곤두서는 듯)
  • 비유-조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
  • 유학-조선: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나의 성품 또한 요(堯), 순(舜), 공자(孔子), 안회(顔回)의 성품,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경세제민(모든 백관(____)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경천-조선: 하늘이 준 성품
  • 모화-조선: 나의 성품 또한 요(堯), 순(舜), 공자(孔子), 안회(顔回)의 성품
  • 사회-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 풍습-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 시-조선: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
  • 기물-조선: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 호패, 석패, 절월
  • 심리(최부): 당당함(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 제도(관직)-조선: 두번 문과에 올라, 통사, 봉명사신, 3읍 수령
  • 제도(시험)-조선: 진사시
  • 행정-조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 사건-조선: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 표류
  • 崔溥笔下的桃渚城
  • 도저성
  • 최부 거쳐 간 도저성을 다시 보니…,월간중앙, 2004.11
  • ‘모세의 기적’ 이용한 척계광의 왜구 토벌, ScienceTimes, 2011.05.24
  • 풍운대전
  • 왜구 소탕한 명나라 명장 척계광의 전법, 동아일보, 2011.01.08
  • [토크멘터리 전쟁史 115부 동북아에 몰아친 피의 기록-명나라의 왜구 소탕작전 2부]
  • 척계광의 왜구섬명
  • 척계광(戚繼光)의 6기(六技)와 십팔기(十八技), 한국무예신문, 2015.06.22
  • 원앙진법 재현
  • 도저성 관사
  • 한성주보, 論學政 第一, 1886년 1월 25일
  • 고대 관직 및 설명
  • 최부
  • 최부교지
  • 최부
  • 전서, 예서, 행서, 해서, 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