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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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0월 12일 (토) 21:43 판 (새 문서: 二十一日,至楊子江,是日陰,臣等自南水關,(專)【輛]城河的,傍府城而南而西,過新壩,至京口驛留泊,夕步過京口閘,至通津遞運所,通津水淺,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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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日,至楊子江,是日陰,臣等自南水關,(專)【輛]城河的,傍府城而南而西,過新壩,至京口驛留泊,夕步過京口閘,至通津遞運所,通津水淺,必待潮至,乃可通大江,故改乘船,留待潮候,以為渡江之備,李節、金太等別臣曰:“隨路重蒙看顧,今日相別,君向楊州,我向儀真,我於春暮,又向北京,尋到會同館來看你,”鎮江府即聞州城,孫權從丹徒,築鐵瓮城,謂之京城,府治及丹徒縣之治在城中,城東又有鐵盒地,而無其城,向吳亭在城西南,北固山在西北,即梁武帝所名也,戴公山在西南,即宋武帝所遊也,甘露寺、多景樓,俱在城東北,焦山、銀山,俱建巨利在城北,金山在大江之中,與銀山相對,上有龍延寺,即宋真宗夢遊之地,府城東北隅臨江岸,江即楊子江,俗呼洋子江,江廣二十餘里,源出岷山,會漢水經南京,至此府朝宗于海,即《禹貢》岷山導者此也,東通吳會,西接漢沔,北達淮泗,南距閩浙,眞四方都會之地也.

양자강(揚子江)[1][2]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신 등은 남수관(南水關)263에서 전성하(甄城河)를 거슬러 올라가 진강부성(鎭江府城)을 끼고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서 신파(新鬪)를 지나 경구역(京口驛)에 이르러 머물렀습니다.

저녁에 걸어서 경구갑(京口)264을 지나 통진체운소(通津遞運所)에 이르니, 통진은 물이 얕아서 반드시 조수가 이르기를 기다려야 대강(大江)과 통할 수 있는 까닭에 배를 바꾸어 타고 머물러 조수가 이르기를 기다려 강을 건너갈 준비를 하였 습니다.

이절과 김태 등은 신에게 작별하면서 말하기를,

“길을 따라 다니면서 거듭 보살핌을 받았는데 오늘 서로 헤어져 당신은 양주(揚州)를 향하고 나는 의진(儀眞)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늦은 봄에 또 북경을 향하여 갈 것이니 바로 회동관(會同館)265 으로 당신을 찾아뵙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진강부는 곧 윤주성(州城)이니 손권(孫權)266이 단도(丹徒)[3]로 옮겨 철옹성(鐵瓷城)을 쌓고 이를 경성(京城)이라 불렀던 입니다.

진강부의 부치와 단도현의 현치는 성안에 있었습니다.

성 동쪽에 또 철옹지(鐵瓷地)가 있었으나 그 성은 없었습니다.

향오정(向吳亭)은 성 서남쪽에 있고, 북고산(北固山)은 서북쪽에 있었으니 곧 양무제(梁武帝)269가 명명한 것입니다.

대공산(戴公山)은 서남쪽에 있었으니 곧 송무제(宋武帝)가 노닐던 이었습니다.

감로사(甘露寺)와 다경루(多景樓)는 모두 성 동북방에 있었습니다.

초산(焦山)274과 은산(銀山)75에는 모두 거찰(巨刹)을 세웠는데 성 북쪽에 있었습니다.

금산(金山)은 대강(大江)의 가운데에서 은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며, 위에는 용연사(龍延寺)가 있었으니 곧 송진종(宋眞宗)이 꿈에 노닐던 278이었습니다.

부성(府城)의 동북 모퉁이는 강 언덕에 접해 있었으니 강은 곧 양자강으로서 속칭 '양자강(洋子江)'이라 하였습니다.

강의 너비는 20여 리나 되는데, 민산(眠山)에서 발원하여 한수(漢水)와 만난 다음, 남경을 거쳐 이 진강부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가니, 곧 우공>의 '민산(眠山)에서 강(江)이 발원하여'라는 곳이 이곳입니다.

동쪽으로 오군(吳郡)과 회계군(會稽郡)에 통하고, 서쪽으로 한수(漢水)와 면수(酒水)에 접하며, 북쪽으로 회수(淮水)와 사수(四水)에 이르고, 남쪽으로 복건과 절강에 도달하니 참으로 사방에서 모두 모여드는 큰 도시였습니다.

  • 기후
  • 인명
  • 지명
  • 지리
  • 고증(지명, 문학)
  • 도덕?예절
  • 역사

21st Day. Arrival at the Yangtze River. This day was cloudy.

From Nan-shui Pass we went [as far as T’ung Ferry). The water there was shallow, and it was necessary to wait for the tide to come in to be able to pass into the Yangtze River. Making ready to cross the river, therefore, we got into boats again and waited for the tide. Li Chieh and Chin T'ai took leave of me, saying, “We have been honored to come to your notice on the road. Today we part, you going to Yang-chou and we to I-chen. Late in the spring we shall go to Peking again. We shall seek out the Central Post Hotel [Huit’ung-kuan] and come to see you." Chen-chiang Prefecture was Jun-chou Walled City [ch’eng]. When Sun Ch'uan moved to Tan-t’u and built T’ieh-weng Walled City, he called it the Capital City [Ching-ch'eng]. The prefectural capital and the seat of Tan-t'u County are inside the wall. East of the wall is the site of T'ieh-weng, but its wall is not there.59 Hsiang-wu Pavilion is southwest of the wall. Pei-ku Mountain is in the northwest; it was named by Wu Ti of Liang [r. 502-549]. Tai-kung Mountain is in the southwest; there, Wu Ti of Sung [r. 420-422] visited. Both Kan-lu Temple and To-ching Tower are northeast of the wall. Mt. Chiao and Mt. Yin, on both of which large Buddhist temples are built, are north of the wall. Mt. Chin is in the Yangtze, opposite Mt. Yin, and Lung-yen Temple is on top of it. That is the place that Chen Tsung of Sung (r. 998-1022] visited and dreamed in. The northeast corner of the prefectural wall overlooks the bank of the river, which is the Yangtze, commonly called the Son of the Ocean. 60 The river is more than twenty li wide. It rises in the Min Mountains,61 joins the Han River, reaches the prefecture by way of Nanking, and enters the sea. This is the river of which Yü kung says, “From Mount Min he [Yü] surveyed the Chiang” [Legge, III: 137]. In the east it passes through Wu-k’uai, in the west it adjoins the Han and Mien, in the north it extends to the Huai and Ssu, and in the south it reaches Min and Che. Its region is truly one of great urban centers in all directions.

263. 水門의 하나. 關의 높이는 3 1이다. 光緖《丹徒縣志》권3, 輿地6. 264. 俗名은 大問으로 長江과는 1리 정도 떨어진 城의 서북방에 있다. 光緖《丹徒縣志》 권4,奧地九. 265. 京城內에 내외 使臣과 賓客을 접대하기 위하여 만든 官署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會同館이란 조선 등의 사신을 접대하는 南館 즉 玉河館을 의미할 것이다. 266. 삼국시대 吳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222-252)이다. 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었다. 208년 남하한 曹操의 대군을 蜀나라 劉備와 함께 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關羽를 격파하고 荊州를 공략하였다. 그 결과 魏·吳·蜀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다. 이후는 대체로 蜀漢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267. 鎭江의 별칭. 乾隆《鎭江府志》 권4, 形勝에 “子城, 吳大帝所築[...] 內外찮以, 號鐵護城”이라 하여 견고함을 강조했는데, 明 洪武9년 舊城을 폐하고 磚城을 쌓았다. 268. 일명 北顧山, 府治의 後城 북측 1리의 거리에 있다. 光緖《丹徒縣志》 권2, 輿地五. 269. 南朝 梁의 초대 황제(재위 502-549)로, 이름은 蕭衍이다. 博學하고 文武에 재질이 있어, 일찍이 南齊의 竟陵 王子良의 집에서 문인 귀족들과 교유하여 八友의 이름을 얻었다. 雍州의 刺史였던 그는 남제를 멸하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梁이라 했다. 그의 불교신앙이 정치면에도 나타나, 불교사상에서는 황금시대가 되었지만 정치는 파국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548년에 일어난 侯景의 반란 와중에 병사하였다. 270. 南朝 宋의 초대 황제(재위 420-422)로 이름은 劉裕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군에 투신하였다. 東晉末 내란에서 桓玄의 專權을 토벌하고, 揚州를 중심으로 군사권을 장악하여 南燕, 後泰을 멸망시켰다. 나아가 執政이 되어 호족을 탄압하고, 稅收의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이주민을 현주소의 호적에 등록시키는 土斷法을 단행 하였다. 419년 恭帝의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宋이라 하였다. 무공뿐만 아니라 통치 수완도 뛰어나 국력의 부강을 꾀하였으나, 즉위 3년 만에 죽고 말았다. 277 《南史》권75, 列傳 65, 隱逸 上, 戴題 참조. 271.? 272. 北固山 第一峯에 있는데 唐 寶歷 연간에 李德裕가 지었다고 한다. 光緖 《丹徒縣志》권6, 輿地 14 273. 臨江亭의 故址로 宋 熙寧 연간에 창건했는데 元明 이래로 여러 차례 수축을 했다. 光緖 《丹徒縣志》권7, 輿地 15. 274. 丹徒縣城에서 동쪽으로 9리의 거리에 있다. 금산과 10여리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本名은 燕山이다. 光緖《丹徒縣志》권2, 輿地 5. 275. 舊名은 土山, 元代에 金山과 마주하고 있다는 이유로 銀山으로 改名 되었다. 光 《丹徒縣志》 권2, 輿地 5; 《江南通志》권13 등 참조. 276. 원래의 명칭은 浮玉山으로 伏牛山이라고도 하였다. 송진종이 꿈에 금산에서 노닐었다는 이유로 한때 龍遊山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江南通志》권13. 277. 北宋 제 3대의 황제(재위 997-1022)이다. 그의 치세 초기에는 과거관료가 官界를 차지하고 천자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나, 문신정치의 취약점인 군사력의 약체화 현상이 나타나 1004년 契丹의 침입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맺은 潭州의 盟에 따른 거란에 대한 歲幣 지불로 인해 재정 부담이 증가한 한편, 泰山에서의 封禪 및 玉淸昭應宮의 건립 등 거듭된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송나라의 재정이 크게 어려워지는 전기가 되었다.

278.《江南通志》권13 참조.
  1. 수재민 2억… 1만여명 사망설/중국에 대홍수, 중앙일보, 1991.07.22
  2. 중 7일간 폭우… 양자강 범람/남부지방, 서울신문,1995.07.11
  3. 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