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일

pattern
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0월 12일 (토) 00:31 판 (새 문서: 初二日,陰,侵晨, 臣别刀浦候風韻,擁義縣訓導崔角、鄉校生徒金鼎 蹲等二十餘罪、內需詞典會重醉及崔根等,皆徒步以隨,至十五里許. 少選,...)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初二日,陰,侵晨, 臣别刀浦候風韻,擁義縣訓導崔角、鄉校生徒金鼎 蹲等二十餘罪、內需詞典會重醉及崔根等,皆徒步以隨,至十五里許. 少選, 乾使咖至問關. 是日, 臣之帶去吏程保、金重等所造採 御乘監收 場辦公·私装,刷流移人,括溫占伴們,冒認良民等文籍,及資去全州府上 濟州三邑帳籍十七冊又一冊,濟州三色官上各年帳 戶籍 軍籍等文書, 輸付于牧使,藏之營廳,受書目回送而來.

흐렸습니다.

해뜰 무렵에 신은 별도포의 후풍관(候風館)으로 나아갔습니다. 정의현(佐義縣)훈도(訓導) 최각(崔角), 향교(鄕校)생도(生徒) 김정린(金鼎隣) 등 20여 명과 내수사(內需司)전회(典會)34 박중알(朴重幹) 및 최근 등은 모두 걸어 서 15리 남짓 따라왔습니다.

조금 후에는 목사가 말을 달려와 위문하였습니다. 이 날 신이 데리고 간 아전 정보와 김중 등이 어승(御乘) 점마별감(點馬別監)35 목장(牧場)의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변별하고, 유이인(流移人)을 추쇄(推刷)하고, 멋대로 반당(伴尙)으로 삼거나 양민(良民)으로 잘못 인준한 자 등을 적발한 것 등의 문적(文籍) 및 가져갔던 전주부(全州府)에서 올린 제주(濟州) 3읍 장적(帳籍) 17책과 또 다른 1책, 제주 3읍의 담당관이 올린 매년의 장적·호적(戶籍)·군적(軍籍) 등의 문서(文書)를 봉하여 목사에게 넘겨주어 영청(營廳)에 보관하도록 하고, 그 문서목록을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2nd Day. Cloudy.

Early in the morning I went to the Hup’ung-gwan in Pyolto-p’o. Ch’oe Kak, the Superintendent of Education of Sõnŭi District; over twenty students, including Kim Chong-nin, of the regional school;6 Pak Chung-han, a Secretary of the Office of Supplies; and Ch’oe Kun and others walked with me. When we had gone about fifteen li Hỏ, the new Prefect, came hurrying up and offered his condolences. This day the officials who had accompanied me, Chòng Po, Kim Chung, and others sealed records that they had kept of private venality, of exiles, containment of outbreaks, suppression of secret societies, and people falsely pretending loyalty; seventeen volumes plus one volume of dossiers we had brought from Chònju Prefecture to the three towns of Cheju; and various ledgers, house registers, and military registers presented by the officials of the three towns of Cheju; and turned them over to the office in charge of the Prefect's treasury. They received a list of the documents and brought it back.

28. 제주목 동쪽 8리 거리의 別刀川 어귀에 있는 浦口이다. 29.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에 둔 종5품 관직이다. 조선 초기에는 각 道와 大都護府에 판관을 두었으나 후에 폐지하고, 경기도에는 水運判官,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海運判官을 두었다. 후기에는 경기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각 도 및 水原·江華·廣州·春川 등의 留守營과 濟州·鏡城·淸州 등 특정지역에 판관을 두었다. 30 조선시대 군사적 職任을 수행하던 武官의 일반 명칭이다. 각 군영에 속하는 勸武官, 제軍官, 知設官, 旗牌官, 別武士, 敎鍊官, 別騎衛 등과 지방관아에서 軍務에 종사하는 屬役 등이 포함된다. 31. 항해에 앞서 날씨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리는 곳으로 朝天館이라고도 한다. 32. 訓導는 조선시대 정품 관직이다. 戶曹의 算學, 刑曹의 律學, 觀象監의 天文學·地理學·命課學, 司譯院의 漢學·淸學·蒙學·倭學, 惠民署의 醫學訓導가 있었다. 또한 지방에는 종9품의 譯學訓導가 있었다. 33-鄕校는 조선시대 시골에 있는 文廟와 거기에 부속된 옛날의 학교를 가리킨다. 일명 校宮, 齋宮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원년(1392) 諸道의 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興廢로써 지방관 考課의 法으로 삼고 敎學의 쇄신을 꾀하였다. 이에 부·목·군·현에 각각 1校씩 설립을 보게 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生徒는 成均館·四學·鄕校·雜學의 학생을 범칭하는 용어이다. 다만 成均館과 四學의 일반 학생은 흔히 儒生이라 불렀다. 34. 內需司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미곡·포목·잡화 및 노비 등에 관한 일과 고려 때부터 내려온 왕실의 재산, 광대한 왕실 사유토지 등의 관리를 맡은 정5품 아문이다. 원래 本宮이라 하던 것을 세종 때 內需所로, 세조12년(1466)에 內需司로 고쳤다.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곳이므로 典需, 典貨의 관직은 모두 왕실과 밀접한 관직인 內官이 이를 겸하도록 하였다. 한편 典會는 內需司의 會計를 맡은 종7품 遞兒職으로 정원은 1인이다. 체아직은 조선시대 특별한 경우에 녹봉을 주기 위하여 만든 관직인데, 典會는 양반이 아니면서 東班 관직을 받지만, 체아직을 받아 正職과는 구별되었고 朝會 때는 西班에 자리 잡았다. 35. 각도의 牧場에서 기르는 말을 點考하는 일을 맡아보던 司僕寺의 관원. 36. 官府에 종사하던 賤人, 죄를 지어 종이 된 자 또는 관청 소속의 기생, 內人, 官奴婢, 驛卒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은 관노비였다. 15-60세까지 奴役에 종사해야 하는 이들 공천은 獨立戶를 이루고 살았다. 후사가 없이 죽으면 田宅은 소속 官衙에 반환해야 했다. 37.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 私·私奴라고도 하며, 官奴婢·公奴婢에 대응하는 말이다. 38. 原籍地를 떠나 타향으로 이주하거나 외지로 유랑하는 자. 39. 조선시대의 驅卒 즉 從卒로서, 王子와 功臣 및 堂上官 등을 우대하기 위하여 개인별로 주는 병졸을 말한다. 兵曹에서 상신하여 선발하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인은 뽑지 않았다. 40. 縣監이란 조선시대 지방행정관서인 縣에 둔 우두머리를 말한다. 縣監은 縣令(종5품)이 관할하는 현보다 작은 고을의 원님이었다. 당시 지방의 말단기관장인 驛의 察訪 (종6품)과 동격인,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다.

지명 건물 관직 인물 임무 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