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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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8월 15일 (일) 20:06 판 (송남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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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

몽골을 배경으로 출세한 사람.

대동운부군옥

익재 이제현이 원나라에 벼슬하다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아미산'에 향을 내려 주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에 행성을 두어 세록노비법을 혁파하고자 하였다.
최유엄이 이때 나이 86세였는데, 중서성에 가서 옛날 제도를 그대로 따르도록 극력 청하였다.
귀국함에 나라 사람들이 손을 들어 경례를 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삼한을 있게 한 것은 최시중이다"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23년에 향시에 합력한 사람 김잠, 송문중, 조신 등을 원나라 서울에 보내어 회시에 응하게 했는데, 바닷길에 회오리바람 만나 거인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다.
왕삼석은 본래 남만 사람이다.
성격이 경박하고 조급하였으며 재주와 학예가 없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왕삼석이 왕을 찾아 뵙고 총애를 얻었다.
드디어 왕과 함께 고려에 돌아와 의술로써 총애를 받음이 비길 데가 없었다.
이공수가 원나라에 있을 때 기황후가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모시고 돌아가라고 하였다.
당시에 원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 벼슬을 받았는데 이공수만은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비록 목의 피를 덕흥군의 끌채에 뿌리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차마 따를 수 있겠는가?"라 하고 병을 핑계 대고 따르지 않았다.
목은 이색이 원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두 번 장원을 하니, 고관인 한림승지 구양현이 보고서 크게 칭찬했다.
본관은 청주이다.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한원에 있었는데 충직하고 문장의 재능이 있었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세조가 고려에 명하여 일본에 사신을 보내서 초유하도록 했을 때 서장관이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회피했으나 곽린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일에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절의이니 어찌 사양하랴?" 하니 재상이 기뻐하며 드디어 서장관에 들게 하였다.
본관은 포산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이 총량으로 원나라에 갔다.
전보문이 하정사로 원나라에 갔는데, 황제가 한림시강학사 지제고 동수국사 벼슬을 주었다.
전보문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매우 해괴하게 여겼다.
원나라 말기에 벼슬을 함부로 줌이 이와 같았다.
정가신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니, 원나라 세조 황제가 중히 여겨 융숭한 대우를 하였다.
송화는 자기 아버지를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
그는 어려서부터 말타기를 익히고 막대기를 잘 다루어 신묘하기가 고금에 드물었는데 황제가 매우 탄복하며 좌우에 말하기를 "만약 신의 도움이 아니라면 이는 반드시 환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현이 몽고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다.
후에 몽고의 병사를 따라 돌아와서 여러 성들을 항복하도록 회유하고 거기에서 얻은 재물을 모두 자기 것으로 삼았다.
여러 재상들이 그를 반역자라 논죄하여 그를 죽여 시신을 거리에 버리고 그의 가족들은 적몰하였다.
자가 자오이다.
행주 사람이다.
벼슬하여 총랑이 되었다.
정중부가 난리를 일으킨 뒤로 권신이 잇달아 일어났으나 자오는 시종 부지하여 옛 관직을 잃지 않았다.
그의 막내딸이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되어 태자를 생산하였다.
황제가 봉하여 영안왕으로 삼았다.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기식, 기철, 기원, 기주, 기륜이다.
황후의 세력을 의지하여 제멋대로 굴다가 모두 주살당하였다.
인후와 장순룡은 모두 몽고의 겁령구였는데 왕에게 총애를 얻어 다투어 집을 지음에 사치하고 참람함이 극도에 이르렀다.
기후는 처음 원나라 순제의 궁녀가 되었는데 성품이 영리하여 날로 총애를 받았다.
뒤에 황후가 되었다.
풍의가 아름답고 일에 주선을 잘하였으나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장자라 칭했다.
일찍이 몽고에 사신을 가서 남송과 일본과의 교류를 하지 않을 것을 변론하였다.
토산 사람이다.
성품이 질박하여 화려함이 없었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적에 부윤이 따라갔다.
비록 험난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절개를 지키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원나라 세조가 그 이름을 알고 정동행성의 관직을 주었다.
나중에 관직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본관이 안변으로 고려 말에 원나라의 제과 시험에 합격하였다.
재지와 품행과 그리고 이적이 있었다.
본관은 안동이며 문영공 김순의 아들이다.
젊었을 때 자는 나해라고 하였고, 호는 구봉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조적의 난에 시종하여 공을 세웠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들려 갔을 때 김영돈이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다"라 하고 여러 재상들과 함께 글을 올려 풀어 줄 것을 요청하려고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성사되지 못하였다.
충목왕 때에 벼슬은 정승에 이르렀고 상낙군에 봉해졌다.
본관은 안성으로 좌복야 김돈의 아들이다.
15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원종 때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어 일본을 타일렀는데, 김유성은 서장관으로 원나라 사신과 함께 가서 반역과 순종의 논리로 타이르니 일본이 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그 공으로 어사로 옮겼다.
충렬왕 때 원나라가 또 다시 사신을 일본에 보내는데 왕은 김유성이 말을 잘한다 하여 선유사로 삼아서 보냈는데 붙잡혀서 돌아오지 못했다.
국가에서 불쌍히 여겨 평리 벼슬을 영원히 주고 대대로 그 집에 녹을 주었다.
복주 춘양현 사람이다.
처음 이름은 지정(之琔)이었는데 뒤에 정미로 고쳤다가 충선왕이 이(怡)라는 이름을 내렸다.
성격이 활달하고 일찍부터 큰 뜻이 있어 장자의 기풍이 있었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처벌을 받는 수고로움을 겪었으나 시종일관 한결같이 절조를 지켰다.
벼슬은 중찬에 이르렀고 시호는 광정이다.
본관은 경산이다.
충선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가서 공을 세웠다.
벼슬은 정승에 이르렀다.
본관은 낙안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존오가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던 옥사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외지로 유배되었다.
세자가 원나라에 조회하러 갈 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시종하는 사람은 마땅히 바른 사람을 써야 하니, 변방의 무관직을 제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관직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본관은 광산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침중하여 말이 적었다.
원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 때 승선에 임명되었다.
원나라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때 대명포에 이르러 군사가 익사한 이가 많았는데, 주정이 계책으로써 건져서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일찍이 응방사가 되어 응견으로써 왕에게 아부하여 자못 위세를 떨쳤다.
관직은 도첨의에 이르고, 시호는 문숙이다.
아들은 심인데 아래 인명에 보인다.
본관은 서흥으로 무술과 지략으로 유명하였다.
일본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공이 있어서 원나라에서 관군총파에 임명하였다.
관직이 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서흥군에 봉해졌다.
만경현 군산도 사람이다.
젊어서 지혜와 용기가 있었으며 경서와 역사에 능통하였다.
고종 때 몽고 사신 저가등이 왓는데 왕이 김희제로 유회사를 삼았다.
저가등은 김희제의 처분을 한결같이 따랐다.
뒤에 전라도 순문사가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최이에게 참소하였다.
최이가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드디어 바다에 투신하여 죽었다.
원경이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문학을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몽고어를 배우니 원나라 세조가 납린합날이라 불렀는데 응대함이 자상하고 민첩하여 행동이 재빠르기 때문에 '납린'이라 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기이했기 때문에 '합날'이라 했다.
염제신이 원나라에서 벼슬하다가 고려에 돌아와서는 정동행성낭중이 되었다.
이순효는 성품이 맑고 깨끗하였는데, 일찍이 몽고에 사신으로 갔을 때 어떠한 물건도 뇌물로 받지 않고 돌아왔으므로 주머니와 자루가 모두 비었다.
전용보는 천한 노예로서 금박을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는데, 충숙왕 때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체류할 때 심왕 고가 왕위 찬탈을 꾀하고 간실들이 서로 결탁했다.
그때 왕이 재상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작은 광대가 큰 광대를 따라 강을 건너려는데 배가 없어서 큰 광대에게 '나는 키가 작아 물의 깊이를 알기 어렵지만, 그대는 키가 크니 먼저 수심을 재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드디어 물에 들어가 모두 빠져 죽고 오직 작은 광대만 죽음을 면했다.
지금 작은 광대가 나라에 있으니, 전영보가 그 놈이다.
나를 화의 그물 가운데 두고 좌시하니,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라 말에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자를 '광대'라고 한다.
이곡이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의 대책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독권관들이 크게 칭찬하며 특별히 제2등으로 뽑았다.
이색이 정동향시에 합격하여 원나라에 가서 정시에 합격하니 한림승지 구양현이 그의 대책에 답안지를 보고 크게 칭찬하면서 제2등으로 뽑았다.
고려의 염제신이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다.
황제가 잔치를 베풀고서 그를 보냈다.
공민왕이 친히 '그 얼굴을 그려서' 내려주면서 말하기를 "중국에서 배워서 성품 또한 고결하여 다른 신하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조일신이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돌아와 왕위에 오름에 조일신이 왕을 수행한 공을 믿고 횡포를 부리며 방자하였다.
이에 마을의 악하고 젊은 이들을 모집하여 기씨들을 제거하고 또 왕을 이궁에 가두고 숙직하던 위사들을 죽였다.
원나라에 있을 때 심왕을 보필하였다.
대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
고려에 돌아와서는 관직이 수정승에 이르렀다.
『본국편년강목』을 편찬하여 주자의 의논이 그르다고 주장하는데 이르렀다.
김수강은 만물에 정통했다.
일찍이 몽고에 사신으로 갔는데 황제가 참으로 유능한 사신이라고 칭찬했다.
원나라 조정에서 배신 가운데 현자를 불렀다.
최유엄이 이 명에 응하였다.
황제가 불러 보고는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본관은 남포이다.
대사성 백문절의 아들이고 호는 이재이다.
천성이 순박하고 후하여 재상의 기국이 있었다.
당시에 정주학이 처음 중국에서 일어나 아직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았는데, 백이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정주학을 배우니, 이제현 등이 먼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상당군에 봉해졌다.
본래 심양 사람인데 원나라 말년에 고려에 와서 공민왕을 섬겼다.
여러 번 전공을 세워 관직이 영삼사사에 이르고 원천 부원군에 봉해졌다.
신우가 폐위되어 여흥에 거처하니 공이 김저의 옥사에 연루되었다.
윤소종 등이 '신우를 맞이하는 일을 꾀한 죄'를 논하여 끝내 죽임을 당했다.
염제신이 원나라에 들어갔다.
일찍이 강소절강에 사신으로 갔는데 청백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이는 고려 충선왕을 오래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시종하여 왕을 보살핀 공로가 있었다.
조일신이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했는데 귀국하여 공을 기록함에 1등으로 등록되었다.
왕을 보살핀 공로를 믿고 횡포를 부리고 교만 방자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에서는 부형을 쓰지 않기 때문에 엄인이 없었다.
안락공주가 원나라에 몇 사람을 바쳤는데, 원나라 황제가 매일 보고 가까이 하여 총애했다.
이로부터 잔인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서로 본받아 아버지는 그 아들을 거세하고 형은 그 아우를 거세하고 또 강폭한 자는 조금만 분통과 원망이 있으면 문득 스스로 거세한 까닭으로 수십 년이 되지 않는 사이에 거세한 무리가 매우 많아졌다.
이능간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반전색이 되어 한 푼도 사사롭게 쓰지 않고, 깨끗하고 고생스레 지내면서 스스로 힘썼다.
이인복은 원나라 과거시험인 제과에 합격하여 태녕로금주판관에 임명되었다.
고려에 돌아와서는 충목왕이 그가 명망이 있다고 여겨 4번 관직을 옮겨 우부대언으로 삼았다.
최노성은 본래 원나라 색목의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충숙왕이 군에 봉하도록 명하고는 물의가 들끓을 것을 싫어하여 비목에 "사백 살의 노인 최노성"이라고 하였다.
이공수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여산참에 이르렀다.
거기에 노적가리가 들판에 쌓여있었는데, 따르던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와 말에게 먹였다.
공이 말하기를 "벼 한 묶음의 값이 면포 몇 자에 해당하는가?" 하고는 말한 그대로 면포 양쪽 끝에다 써서 노적가리 안에 두고 갔다.
유청신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몽고어를 익혔다.
여러 번 원나라에 사신을 가서 황제께 응대함을 잘 하여 드디어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본관은 경주인데 스스로 홍유후 설총의 후예라고 했다.
키가 크고 풍채가 아름다웠고 천성이 근후하였다.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대대로 의업을 이어 왔는데 의술에 자못 정통했다.
원나라 세조가 몸이 아파 의원을 구하자 설경성을 보냈다.
약을 쓰니 효과가 있었다.
이때부터 자주 왕래했는데 황제가 내리는 것을 이루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벼슬은 찬성사에 이르렀다.
자는 공원, 호는 근사재이다.
본래 회골 사람인데 시문에 능하였다.
원나라에서 진사에 합격하여 단본당 정자를 역임하였다.
지정 15년에 단주 수령이 되었을 때 창을 맞고 탈출했는데 뒤에 홍적적을 피하여 고려로 왔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상종하였기 때문에 예로 대우하여 군에 봉하였다.
원나라 말에 설씨가 가솔을 이끌고 동쪽으로 왔다.
그 선대는 도운인데 나라를 위하여 적을 토벌함에 굽히지 않고 죽어서도 신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여 이적을 드러내니 신하의 충성이고 부인은 일찍 과부가 되어 의를 지켰으니 부인의 정절이고 아들 총관은 10세에 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으니 자식의 효도이다.
한 가문 안에 삼절이 능히 갖추어졌으니 그 당을 삼절이라 한다.
이곡은 원나라 제과에 합격하여 중국의 문사들과 교유하며 강마해 진보한 바가 깊었다.
환자 최세연은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하였는데 날마다 호위병들에게 말똥을 줍게 하여 행군할 때의 땔감으로 준비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비웃었다.
이색이 원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어머니가 연로한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에 돌아와서 당시 정치에 대하여 여덟 가지 일을 상소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정방을 혁파하고 이, 병, 부의 관리 선발권을 회복시키라는 것이었다.
고려 때 권신이 날래고 용감한 병사를 뽑아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명칭을 신의군이라고 하였다.
백성들이나 또는 몽고에서 달아나 돌아온 사람들이 따로 한 부를 만들어 자칭 신의군이라고 하였으니 곧 삼별초의 하나이다.
공민왕이 처음에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황제가 환국하기를 명하였다.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 공신'의 칭호를 주었다.
왕이 김영후를 보내어 표를 올려 사례하였다.
용루에서 숙위에 충당되었으며 접역에서 번국의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열두 글자의 포상이 백 가지 가운데 하나도 능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미칠 줄이야" 자는 당지이고 호는 근재이며 본관은 흥주이다.
타고난 총명함에 힘써 공부하여 글을 잘 지었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원나라의 과거에도 합격하였다.
당시에 충숙왕이 원나라에 잡혀 있었는데 안축이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다"라 하고 글을 올려 충숙왕에 대해 따졌다.
여러 차례 관직에 있어 표전과 사명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공은 마음을 쓰는 것이 공정하고 집안을 근검하게 꾸렸으며 좋은 일을 보면 극구 칭찬을 하고 나쁜 일을 보면 피해버리고 가까이하지 않았다.
두 아우 보와 집을 가르치니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난 벼슬아치가 되었다.
벼슬은 찬성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이다.
지은 글로는 『관동와주집』이 있다.
이제현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그곳에서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강남에 갔는데, 그곳에 있는 삼왕묘를 배알하고 각각 송을 지어 올렸다.
삼왕은 우, 탕, 문왕을 말한다.
고려의 내시로 선발되어 원나라에 들어가 천자의 총애를 받은 자가 있는데, 그 중에는 천자의 조칙을 받들고 다시 고려에 사신으로 오는 자도 있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에 합격하는 사람은 관례에 따라 검열을 거쳐 예문관 응교에 임명된다.
고려시대 옛 제도에 예문관 응교가 있는데, 품계는 비록 낮지만 반드시 문장으로 두터운 명망이 있어 뒷날에 문단의 맹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뽑아 시키니, 그 선발이 지극히 중요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그것을 따랐다.
이조년은 큰 절의(節義) 다섯 가지가 있다.
공이 충렬왕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충선왕이 와서 문안함에 여러 신료들은 모두 의심을 품고 달아나 숨었으나, 공은 다른 일이 없을 것을 믿고 진퇴를 오직 삼갔다.
이것 때문에 멀리 귀양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일찍이 한 번도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이 첫째이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5년 동안 억류되었을 때 공은 여러 선비들과 종이에 서명하여 대궐로 달려가 청하고자 함에 공이 홀로 4천 이를 달려 그 글을 올린 것이 둘째이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에 삼가지 않음이 많았다.
이로 인하여 귀국을 고하고 경계의 말씀을 드리니 왕이 뒤에 자못 이를 생각하게 한 것이 셋째이다.
원나라 승상 백안에게 죽고자 한 것이 넷째이다.
왕이 탄알로 참새를 사냥하는 것을 간하고 용감히 떠난 것이 다섯째이다.
원나라 연우 3년에 장원급제하였고 벼슬은 간의대부에 이르렀다.
시를 잘 지었는데 일찍이 「춘강」이란 절구를 지었다.
안동 사람이다.
처음 성명은 권재고 몽고 이름은 탈환이며 정승 권보의 아들이다.
충선왕이 길러서 자신의 아들로 삼은 뒤, 성명을 내려주고 속적에 기록하였다.
충선왕이 토번에 유배됨에 미쳐서 왕후가 자신으로 대신해 주기를 원했다.
황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불쌍히 생각했다.
성품이 굳세고 바르며 장중하고 얼굴이 크며 훤출하여 바라보면 의젓하였다.
평소에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책을 읽을 줄 알고부터 글의 대의를 토하였다.
이의풍은 본래 원나라 사람인데 충숙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다.
대궐을 출입하며 권세를 이용해 뇌물을 받았다.
진양 기생 월아를 사랑하였는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것을 연줄로 하여 벼슬을 얻은 사람이 매우 많다.
선산군 해평 사람으로 정승을 지낸 윤석의 아들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위험한 곳에 가지 않았다.
또 몽고어를 잘 하였다.
벼슬이 문하성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간이다.
임박이 당초에 원나라에 있을 때 덕흥군을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하니 사람들이 모두 충절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다가 신돈과 사귀면서 일을 꾸미고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다니면서 자취를 숨기고 속이는 일을 많이 하여 사람들이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숨어서 간사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책망하기도 하였다.
자는 중보이고 본관은 한산이다.
스스로 가정이라고 호를 지었으며 초명은 운이다.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원나라의 과거에도 합격하여 한림원 검열에 임명되었다.
중국의 문사들과 교유하여 더욱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
문장을 짓는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이루었는데 전아하고 고고하여 외국인이라고 함부로 보지 못하였다.
후에 귀국하여 벼슬은 도첨의찬성사에 이르렀고 한산군에 봉해졌다.
성품이 단정하고 엄격하여 강직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효성스럽게 섬겼다.
시호는 문효다.
문집이 간행되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오래 머물러 있었는데, 권한공이 종신으로 연경의 잠저에 있었다.
다른 종신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지만, 권한공과 최성지는 같이 전주를 맡아 뇌물 받는 것을 이롭게 여겨서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원나라 하간부 사람이다.
원나라 순제때 병란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왔는데 나라에 공로가 있어서 상산군에 봉해졌다.
이 때문에 본관을 상산으로 하였다.
본관은 담양이다.
약관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후에 집안 사람들을 이끌고 촌사로 돌아가 벼슬을 구하지 않고 고서를 연구하기를 일삼아 장차 그렇게 일생을 마칠 것처럼 했다.
59세에 좌사보에 임명되었는데 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의 이름을 듣고 내서사인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자리를 옮겨서 좨주에 이르렀다.
가는 곳마다 학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본관은 한주. 사람됨됨이가 청백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물흐르듯 하였다.
일찍이 몽고에 사신을 갔다 돌아옴에 한가지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으니 고을의 아낙네와 역졸들이 "참다운 관인이다"라 하였다.
고종 때 관직이 전라도순문사에 이르렀다.
자는 휴휴이며, 경산 가리현 사람으로 호는 동안거사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힘써 공부해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정직하고 남에게 구함이 없었다.
두타산에 들어가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노모를 봉양하였다.
뒤에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는데 시사(詩詞)가 매우 훌륭하여 접대하는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양광도, 충청도 안핵사로 나갔을 때 탐학한 관리 7명을 탄핵하여 그들의 가산을 적몰하였다.
얼마 뒤 전중시사에 제수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열 가지의 일의 이해를 극론하다가 임금의 미움을 사 파직되어 삼척 구동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했다.
충선왕이 교서를 내려 다시 불러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밀직부사로 치사하였다.
만년에는 불법을 매우 좋아하였다.
원나라 온주 사람이며 호는 추재로 고려 말에 와서 벼슬하여 관직이 정에 이르렀다.
본관은 고성이고 초명은 인성이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예서를 잘 썼다.
원종 때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다.
몽고군이 일본국을 정벌할 때 군량과 전함을 조달함에 있어서 미리 날짜에 앞서서 수집하여 준비하였는데,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지 않아 고을이 편안할 수 있었다.
평창군 사람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에 합격하여 문명이 있었다.
관직이 산기상시에 이르렀다.
익재 이제현이 연우 기미년 왕을 따라 강남에 갔을 때 왕이 고향의 오수산을 불러 얼굴을 그리라 하고 북촌의 탕선생에게는 찬을 지으라 하였다.
북쪽을 돌아옴에 사람들이 빌려가서 어느 곳에 있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뒤 32년에 제현이 나라의 표문을 받들고 원나라 서울에 갔다가 다시 그 그림을 얻었다.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다름에 놀라고 떨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이 때가 있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이 사진은 다른 사진이 아니라, 후신을 정해 놓은 전신이라네. 아손은 전혀 알지 못하고 이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 정포가 유배지에서 개연히 멀리 중국에 가서 벼슬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한쪽 구석에서 답답하게 살겠는가?"하고는 드디어 원나라로 가서 원나라 승상을 만났다.
원나라 승상이 '한 번 보자마자 그를 기특하게' 여겨 황제에게 추천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병이나 죽고 말았다.
안동 길안현 사람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덕흥군의 변란에 죽음을 맹세하고 따르지 않아 원나라 학사 위소가 감탄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신돈에게 아부하여 속임수를 쓰고 억측을 행하다가 지윤에게 살해되었다.
이색이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고려에 돌아옴에 공민왕이 그에게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의 벼슬을 내려 문무의 관리들을 선발하게 하였다.
최린은 여러 번 몽고에 사신을 갔기에 전대의 재주가 있었다.
목은 이색이 원나라에서 인재를 뽑는 과거에 급제하니 규재 구양현이 크게 칭찬하여 전발이라는 말이 있었다.
뒤에 목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의발은 마땅히 해외에서 전해 받았으니, 규재의 한 마디 말 아직 낭랑하네"라고 했다.
이공수가 원나라에 가서 벼슬을 사직하고 고려로 돌아오는 도중에 말이 지치자 하인이 화살을 주고 콩단을 사서 먹였다.
이에 이공수가 "어찌 빈민의 곡식을 빼앗는가?"라 하고는 비단을 끊어서 대가를 치렀다.
본관은 광주 장택현이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렴하였다.
처음에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숙위하고 후에 기철을 죽인 공으로 1등 공신에 들었다.
8년에 홍건적이 서경에 침략하니 왕이 정세운을 서북면 도순찰사로 삼았다.
10년에 홍건적이 경성을 함락하니 세운은 밤낮으로 분노를 가슴에 품어 적을 소탕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경성을 회복하였다.
얼마 후 안우 등에게 살해되었다.
후에 첨의정승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봉화, 고려 충숙왕조에 급제했다.
성품이 강직했다.
일찍이 전주에 부임했을 때 원나라 사신이 수령을 능멸하고 죄를 주고자 하니, 운경이 예를 따라 굽히지 않고 그 날로 관직을 버리고 갔다.
공민왕이 처음 즉위하여 운경이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내전에 불러 들여 술을 하사했다.
여러 번 관직을 옮겨 형부상서 밀직제학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직하고 영주로 돌아가 세상을 마쳤다.
아들이 세 명 있다.
충목왕이 정치도감을 설치했는데 판사, 판관 등의 직책이 있었다.
무릇 빼앗긴 노비나 전답, 집 등은 모두 분변하여 처리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 소속관원을 나누어 파견하여 각도의 전답을 측량하도록 하였다.
기황후의 일가들이 그 세력에 의지해서 토지나 사람을 빼앗았으므로 형장을 때려 옥에 가두었더니 죽었다.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정치도감의 관원들에게 형장을 때렸다.
오윤부가 복서에 능하니, 원나라 세조가 듣고 불러서 시험했는데 모두 맞추자 이로 말미암아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이승경이 원나라에 벼슬하여 누차 벼슬하여 요동참정으로 옮겼다.
후에 고려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본관은 한양, 쌍성 만호 조휘의 아들인데 대대로 덕원부의 용진 땅에 살았다.
나이 13세 때 김방경의 부장이 되어 원나라 장군을 따라 동쪽으로 일본을 정복하러 갔다.
황제가 비단 전포와 옥띠를 내려 주었다.
최유엄이 원나라에 가서 대대로 노비를 물려주는 법을 요청하였다.
그가 돌아오자 백성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 삼한을 보존시킨 것은 최시중이다"라고 하였다.
김부윤이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는데, 비록 험난한 일을 만나도 '지절을 지켜 변치 않았다'. 본관은 평강인데 평자사 채송년의 아들이다.
음서로 벼슬에 나갔는데 지조가 굳세었다.
원종이 몽고에 갈 때 호종해 갔는데 공이 있고 도운 바가 많았다.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고 원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본관은 철원이고 평장사 최유청의 후손이다.
젊어서 자잘한 행실에는 삼가지 않고 호걸이나 협객들과 노름방이나 술집에 어울려 다녔다.
나이 삼십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분발해서 독서를 하여 강종 때에 급제하였다.
기국이 크고 깊었으며 여러 차례 몽고에 사신으로 갔는데 독자적으로 외교를 하는 재주가 있었다.
고종 때에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본관이 영천이다.
성품이 통민하고 중국어에 능통하였다.
가동에게 사사로이 원나라 사람들이 화약 만드는 법을 익히게 하여 화통을 설치하였다.
심덕부와 왜적을 치면서 적선 30척을 태워 영성군에 봉해졌다.
본조에 들어와서 관직이 참찬문하부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해주이고, 태자 자의 아들이다.
성품이 고요히 물러나기를 좋아했는데, 충렬왕이 오래 그 이름을 듣고 등용하여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찬성사에 이르렀다.
당시에 원나라 황제가 곁에서 모실 어진 신하를 구했는데, 유엄이 당시 나이 86세였으나 명에 응하여 원나라에 갔다.
황제가 세록 노비의 법을 없애고자 하니, 유엄이 힘껏 그만두게 했다.
네 임금을 내리 섬겨 관직은 정승에 이르고 시호 충헌이다.
자는 언보, 호는 소재이다.
고려 말 원나라 제과에 합격하였다.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
권한공은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왕이 환국하기에 이르러 항상 대궐에 출입하고 왕이 불러 봄이 일정한 때가 없었다.
권한공이 상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았다.
뒤에 충숙왕이 명하여 국문하게 했는데, 한공이 변소 구멍을 따라 도망하니 잡아서 옥에 가두었다.
김방경이 원나라에 불려 들어갔을 때 황제가 문지기에게 명하여 빨리 들여보내라고 하였으니 총애를 받은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원나라 추밀원사부를 지낸 배주로 자호는 나재이다.
조선조 태조가 동녕부를 공격할 때 그와 같이 돌아왔다.
공민왕이 한복이라는 성명을 내리고 벼슬을 시켜 판전농시사에 임명하였다.
조건 건국 후 다시 태조를 섬김에 매우 삼가고 공손하였다.
자는 사고이고 본관은 한양이며 호는 복재이다.
젊어서 당시의 명사들과 왕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가 나라일을 보필할 그릇인 줄을 알았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충선왕 때는 악양으로 유배되었다.
원나라에서 한종유를 불러 충목왕을 맡겼다.
귀국해서 다섯 임금을 내리 섬기니 뛰어난 충성과 큰 절개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권세 있는 사람들이 일을 꾸미는 것을 미워하였다.
만년에 한영의 저자도에 물러나 살았다.
한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절이다.
전녹생이 일찍이 해액에 있을 때 권세가에게 미움을 받아서 원나라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가 없었다.
본관은 김해이다.
원종 말기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선왕이 토번에 유배되었을 적에 허유전이 민지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소환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허유전은 당시에 나이가 81세였다.
아내 또한 늙고 병들어 가지 못하게 하였다.
허유전이 답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 있으니 아내가 병들고 자신이 늙었다는 이유로 임금을 잊고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드디어 영결하고 떠났다.
그 뒤 9일 만에 아내가 죽었다.
듣는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관직이 정승에 이르렀다.
자는 문야이고 본관은 남양인데 그 선조는 중국에 살았다.
충숙왕이 참소를 당하여 원나라에 머물 때 왕을 위하여 사력을 다하여 그 억울함을 아뢰어 밝혔다.
충숙왕이 복위되어 돌아올 때 홍빈이 따라왔다.
벼슬은 정승에 이르렀다.
자는 운지, 본관은 남양. 충평공 관의 후손이다.
타고난 바탕이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자태가 아름답고 컸으며, 재간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모두들 재상감으로 기대하였다.
충렬왕 때에 벼슬이 첨의중찬에 이르렀고 세 번 수상이 되었다.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
일찍이 원나라에 들어가 이왕을 받들어 고려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이곡이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에 합격하여 검열에 임명되었지만, 본국 고려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는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공민왕 3년 갑오년에 이색이 원나라에 가서 전정에서 대책 시험을 보았다.
독권관 구양현이 이색의 대책문을 보고 크게 칭찬하면서 드디어 갑과 2등으로 뽑았다.
처음에는 갑과 1등에 뽑혔지만 고시관이 이색이 외국사람이라고 하여 2등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려 충렬왕 때 오기는 참소와 말재주로 총애를 받았는데, 왕의 부자간을 이간질하자 사람들이 이를 갈았다.
원나라 이 학사가 돌아갈 때 안유가 교외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이 학사가 먼저 "흰 술은 사람의 얼굴을 붉게 하고"라고 하고서 안유에게 화답을 청했는데 안유가 머뭇거렸다.
이 학사가 스스로 화답하기를 "누런 금은 관리의 마음을 검게 하네"라고 하였다.
이는 대체로 원나라 사신 불화가 오기의 뇌물을 받고 그의 죄를 느슨하게 다룬 것을 풍자한 것이다.
제국공주가 원나라에 소인 내시를 바친 이후로 잔인한 무리들이 서로 앞다투어 모방하고 부러워하여, 궁형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내시들이 모두 본국 고려를 멸시하게 되었다.

성호사설

신우(辛禑) 3년(1377)에 화통 도감(火㷁都監)을 설치했을 때 판사(判事) 최무선(崔茂宣)이 원(元) 나라 염초장(㷔焇匠) 이원(李元)과 함께 한 마을에 살게 되었다.
안축의 아우는 정당문학(政堂文學) 보(輔)인데, 형제가 함께 원(元) 나라 조정의 제과(制科)에 뽑혀서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제2황후(皇后)는 바로 우리나라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고 기철(寄轍)의 누이로서 태자(太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다.
그리고 여자로 중국에 들어가 존귀하게 된 자는 원 순제(元順帝)의 황후(皇后) 기씨(奇氏)와 명 태종(明太宗)의 비(妃) 권씨(權氏)ㆍ한씨(韓氏)같은 이들인데, 이들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거니와 명 선종(明宣宗)의 황후 오씨(吳氏) 같은 이는 알고 있는 자가 적은데 오씨는 바로 진천(鎭川) 사람이다.
문정공도 역시 이미 괴과(魁科)에 뽑혔었고 또 행성(行省)의 향시(鄕試)를 제일로 합격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충임(充任)되어 원(元) 나라에 가서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크게 칭찬하여 제이갑(第二甲)의 제이명(第二名)에 두었었다.

송남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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