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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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8월 15일 (일) 20:07 판 (대동운부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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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학문적 우수함, 학자들의 업적, 시를 짓는 모습, 학문적으로 소통하는 모습.

대동운부군옥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 조자앙 등이 모두 충선왕의 문에 놀았다.
왕이 한 연을 지어 읊기를 "닭 소리가 문 앞의 버들과 흡사하네"라고 하니, 여러 학사들이 용사의 출처를 물었다.
왕이 말없이 있자, 익재 이제현이 곁에서 설명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의 시에 '집 머리 처음 뜨는 해에 금계가 우니, 흡사 늘어진 버들 가지 간드러지게 긴 모양일세'라고 한 것이 있는데, 닭 소리가 연함으로써 버들가지의 가볍고 가는 것을 비유했으니, 우리 왕의 시구는 이 뜻을 쓴 것이다.
한퇴지가 거문고를 두고 읊은 시에 '뜬구름과 버들솜처럼 뿌리와 꼭지가 없네'라고 했은 즉 고인이 소리에 있어서 또한 버들솜으로 비유한 이가 있다"라고 하니, 자리에 가득 한 사람들이 칭찬 탄복했다.
익재 이제현이 원나라 서울에 있으면서 송도를 그리워하며 『송도팔경』을 지었는데 첫 번째가 '곡령춘청'이었는데 시는 이러하다.
"팔선궁은 푸르른 봉우리에 있으니 아련한 연하 몇 만 겹이던가? 하룻밤 사이 긴 바람이 비를 불어 지나가니 바다의 용이 옥연꽃을 받들고 나왔도다.
" 이공수가 원나라에 갔다.
황태자가 공수를 불러 함께 관한전에 올라가 금과 옥으로 이루어진 광한전의 기둥을 가리키며, "이러한 기둥을 본 적이 있는가?" 하였다.
공수가 대답하기를 "제왕이 어진 정치를 베풀면 비록 썩은 나무라도 오히려 견고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비록 금옥이라도 믿을 것이 못되옵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말을 전해듣고 이르기를 "짐이 진실로 이 노인이 어진 이임을 알겠노라" 하였다.
이공수가 원나라에 조회하러 갔다.
황태자가 이공수를 불러 함께 광한전에 올랐는데 거기에 걸려있는 현판 글씨 '인지'의 뜻에 대하여 물었다.
이공수가 대답하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 '지'이니, 제왕께서 이 두 글자를 사용하여 사해를 다스려 만세토록 태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정주학이 중국에서 유행하였지만 우리나라에는 보급되지 않았다.
충선왕 때 백이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것을 배웠는데 우리나라에 돌아오자 이제현과 박충좌가 먼저 그를 스승으로 모셔서 배웠다.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만권당을 짓고 이름난 선비 조맹부 등과 함께 담론했다.
왕이 동쪽으로 돌아올 때 문적과 서화 만 권을 실으니 조맹부의 필적이 동방에 가득했다.
우리 동방 사람들 가운데 조맹부의 필법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 이암 한 사람 뿐이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 때 연경의 사저에 만권당을 지어놓고, 이제현을 불러다가 부중을 채우고 문학하는 선비인 요수, 조맹부, 우집 등을 맞이하였다가 서사로 즐기도록 하였는데 종신으로 하여금 번갈아 대신하도록 하였다.
충선왕이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에 가니 원나라 황제가 세자를 불러 보고는 "너는 무슨 책을 읽는가?"라고 물었다.
"사유 정가신이 여기에 같이 왔기에 효경과 논어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정가신을 불러오게 하였다.
정가신이 들어오자 황제가 관을 쓰고 갑자기 일어나서 "네가 비록 배신陪臣이지만 유자儒者이다"라고 하고는 그를 앉게 하고서 고려국의 왕위 전승의 차례, 이난理亂의 자취, 풍속의 마땅함 등에 대하여 물으면서 경청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제현이 원나라에 조회했는데, 연구 때 처음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사천성 아미산에 있는 절에 향을 내리러 갔다.
이때 지은 시를 모은 『서정록』이 있다.
회재 선생이 갑술년에 서울로 과거보러 가면서 「서정시」 130운을 지었는데 이 해 과거에 올랐다.
고려 관종이 한림학사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으로 과거를 실시하고 진사를 시험하여 취했는데, 왕이 의봉루에 임하여 선비들을 시험하니 문풍이 이에 흥기했다.
원종이 옛 서울로 돌아와 감시의 방을 내거니 몽고 사신이 가서 보고 말하기를 "난리를 겪은 뒤에서 문풍을 실추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굉연은 자가 무설이고 호는 죽간인데 원나라에 들어가 구양현, 위소 등과 사귀었다.
『죽간집』이 있는데 '시가 아주 힘이 있다'. 중국 정주학이 우리나라에 아직 보급되지 않았었는데 백이정이 원나라에 들어가 이를 배웠고 이제현 등이 스승을 통해 수학하였다.
우리나라 이학은 백이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정가신이 원나라에 있을 때 황제의 명령으로 낙타조란시를 지어 올렸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면서 어갱 한 사발을 상으로 내렸다.
이제현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를 지었는데, "비 가는데 연못 개구리 시끄러이 다투고, 구름에는 우는 외로운 학 권태로이 돌아가려 하네"하고 하였다.
그 주에 "섬우와는 간신이 공을 바라는 것이고 여운학은 민유전이 충선왕의 일로 상소를 하여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방해하는 자가 있어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귀국하려 한 일을 말한다"고 했다.
김태현이 지공거가 되어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데리고 왕을 배알하니 왕이 잔치를 베풀어주도록 명하였다.
이때 원나라 사신 이학사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왕에게 말하기를 "천하에는 이런 의례가 없어졌는데, 귀하의 나라에만 고풍이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감히 절하며 하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규보는 경사 백가의 책을 한번 보면 문득 다 외웠다.
문정공 조용은 성품이 총민하여 한번 보면 다 외웠다.
어릴 때 어떤 서생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문선책』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일 동안만 빌려달라고 하였다.
문정공이 그 책을 빌려서는 하루 만에 다 외우고 약속대로 돌려주었다.
본관은 용안. 조부 장영이 진헌사로 원나라에 가서 천호에 제수되었다.
장원적도 또한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그때 지은 시에 말하기를 "삼한의 한 사람이 눈이 내리는 저물녁에 강가로 가네. 돌아가는 배 태평스러움을 싣고 가니, 이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네"라 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그 시를 보고서 관학에서 머물며 공부하게 하였다.
고려에 귀국하여서는 관직이 삼품에 이르렀다.
김구가 문한을 전담했는데 당시에 원나라의 요구가 매우 번다했으나 김구의 표의 말이 이치에 들어맞으니 원나라 학사들이 매양 칭송하여 찬미했다.
원나라 말 하남왕이 중서 검교 곽영석이 돌아가다가 평양에 이르러 기자묘에다가 가음과 같은 시를 썼다.
"무슨 일로 미친 체하여 풀어헤쳤던가? 은나라의 국조를 홀로 세워보려 함이었지. 나라 버리고 간 미자는 다만 몸을 길이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고, 간하다가 죽은 비간을 나라가 이미 위태로운 상황에서 누가 슬퍼하리? 노나라의 땅 한 구릉에 송백이 있으니 충혼은 만고에 귀신이 알아주리. 늦게 조선을 방문하는 길에서 말을 멈추니, 어렴풋이 「맥수가」를 듣는 듯하네." 타조 알의 크기가 독만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정가신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왕위를 충숙에게 전해주고 자칭 상왕이라고 하면서 천자의도성에서 즐겁게 지냈다.
연경에 있는 사택에 만권당을 짓고 글 잘하는 학자들을 초청하여 글과 역사에 대해 연구하면서 자기 생활을 즐겼다.
이제현을 불러 부중에 있게 하고 따르는 신하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번을 들어 교대하게 하였다.
원 황제가 매양 이색을 불러 볼 때마다 반드시 깨끗이 청소하고 향을 피웠다.
황제 왈 "이색은 용렬한 유학자가 아니니 그의 학문은 비록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또한 드물 것이니 어찌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조선 세종대왕이 유신에게 명하여 책을 편찬하게 했는데, 중국은 주나라 때부터 원나라에서 마치고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기자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의 흥하고 쇠함, 군신의 사특하고 바름, 풍속의 침체와 융성, 정교의 선하고 선하지 않음과 작게는 필부와 멀게는 사방 오랑캐의 일이 무릇 인륜 등의 일에 관련된 것은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책 이름을 『치평요람』이라고 하였다.
김구는 표를 쓸 때마다 일에 따라 문장을 꾸미는데 모두 이치에 들어맞았다.
원의 학사 왕악의 표의 글을 볼 때마다 반드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고려 충목왕이 나이 겨우 8세에 왕위를 이었는데, 원나라 황제가 묻기를 "그대는 아버지에게 배웠는가, 어머니에게 배웠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어머니에게 배웠습니다.
" 하자 황제가 그 천성이 총명함을 탄복했다.
최성지는 수학에 정통했는데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스승을 구하여 수시역법을 배워 고려로 돌아와 마침내 그 학문을 전했다.
김구는 문장에 있어서 한 때의 으뜸이었는데, 희종 때는 표문 짓는 일을 전담하였다.
원나라 한림학사 왕악이 매양 표사를 보고 반드시 칭찬하면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
목은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황갑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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