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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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1월 13일 (수) 19:5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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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四日,到紹興府,是日晴,撑鑑水而上,水自鏡湖一派來繞城中,日出時到紹興府,自城南派鑑水,而東北過昌安鋪,(掉)[悼]入城,城有虹門,當水口,凡四重,皆設鐵局,過有光相橋等五大橋及經魁門、聯桂門、(枯)佑聖觀”、會水則碑,可十餘里許有官府,霍勇引臣等下岸,其闖間之繁,人物之盛,三倍於寧波府矣,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黃宗、巡視海道副使吳文元、布政司分守右參議陳潭,連坐于激清堂北壁,兵甲答枚,森列於前,置一卓,引臣至卓邊,西向而立,問以臣之姓名、所住之鄉、所签仕之官、所漂風之故、所無登劫之情狀、所資器械之有無,臣答以答把總宫之辭,却添載下山逢賊、仙嚴遇杖之事,所賣行李,又添馬鞍一部,三使相徐謂臣曰:“供辭有違,汝實有罪,汝宜膽寫前辭,無一字加减云云,臣便寫之,三使相又謂臣曰:“他日你到杭州,鎮守太監、矫衣、三司大人,到北京,兵部、禮部,亦更問汝情,其亦以是答之,少有相違,大不可也.”又問曰:“初以汝類為倭船劫掠,將加捕戮,汝若是朝鮮人,汝國歷代沿革、都邑、山川、人物、俗尚、祀典、喪制、戶口、兵制、田賦、冠裳之制,仔細寫來,質之諸史,以考是非,”臣曰:“沿革、都邑,則初檀君與唐堯並立,國號朝鮮,都平壤,歷世千有餘年,周武王封其子于朝鮮,都平壤,以八條教民,今國人以禮義成俗始此,厥後燕人衛滿,亡命入朝鮮,逐算子之後獲準,準奔馬韓以都焉,其間或為九韓,或為二府,或為四郡,或爲三韓,年代久遠,不能盡述,至西漢宣帝時,新羅朴氏初立國,高勾麗高氏、百濟扶餘氏相繼而起,三分舊朝鮮之地,新羅據東南界,都慶州,高勾麗據西北界,都遼東,都平壤,又屢遷廠邦,忘其地,百濟據中西南界,都稷山,都廣州,都漢陽,都公州,都扶餘,當唐高宗朝,新羅文武王與唐兵滅高勾麗,又滅百濟,合三國為一,後甄萱叛據全州,弓裔叛據鐵原,高麗王氏,功高德 盛,國人推戴,弓裔自霾,甄莹自投,新羅王封府庫,籍郡縣來降,再合三國,都開城,傳世幾五百年,今革為我朝鮮,都漢陽,盖將百年于兹矣,山川則長白山在東北,一名白頭山,横亘千餘里,高二百餘里,其顯有潭,周八十餘里,東流爲豆滿江,南流爲鴨綠江,東北流為速平江,西北流為松花江,松花下流,即混同江也,妙香山在北,金剛山在東,有一萬二千餘宰,智異山在南,九月山在西,右四山極高峻,多奇蹟,三角山,即國都鎮山,大同江、薩水、臨津渡、漢江、洛東江、熊津、豆恥津、榮山津,已上川之大者,人物則新羅金庾信·金陽·崔致遠·薛聰、百濟階伯、高句麗乙支文德、高麗崔冲·姜邯贊·趙冲·金就礁·禹悼·鄭夢周、我朝鮮不可歷數,俗尚則尚禮義,明五倫,重儒術,每春秋行養老宴、鄉射禮、鄉飲即下把忽官所報狀以示臣,日:“是何供辭前後詳略不同乎?”臣曰:“把稳官初,只答以漂流到泊之情,今日布政三司更問,詳舉遇賊等事耳!”三使相


p.384 酒禮,祀典則社稷、宗廟、釋、諸山川,刑制從大明律,喪制從朱子《家禮》,冠裳華制,戶口、兵制、田賦,我以儒臣未知其詳.”又問曰:“所謂推刷人丁,何事?”臣曰:“濟州在大海中,水路甚險甚遠,凡有犯罪者,皆逃入以避,久為逃之數,故往刷之,”又問曰:“濟州距我中國幾里?”臣虛張水路之遠曰:“不可知其詳也,大抵船遇便風於大海,則日可行千里,今我自濟州浮海,折畫夜則凡二十九日,為大風所驅,疾行如飛,到泊于中國海岸,則自中國距濟州路,大樂數萬餘里矣.”又問曰:“汝國與我朝廷相距遠近幾何?”臣曰:“傳聞自我國都過鴨綠江,經遼東城,抵 皇都,三千九百有餘里.” 總兵官三使相,即饋臣以茶果,仍書單(字)(子)”以賜,單(字)(子]50中:“送崔官禮物,猪肉一盤、鵝二隻、鍋四翼、魚二尾、酒一縛、米一盤、胡桃一盤、菜一盤、第一盤、麵筋一盤、索一盤、荳腐一盤,”又賜釀粮等物于陪史軍人有差,臣即做謝詩再拜,三使相亦起,答禮致恭,又謂臣曰:“看汝謝詩,此地方山川,汝何知之詳?必此地人所說:”臣曰:“四顧無親,語音不通,誰與話言?我嘗閱中國地圖,到此腹記耳,”對畢,臣與三四宫人,拱立卓邊,有勇之軍史一人在外頭,毆打臣之從者金都終有傷,臣寫以示諸官人,一官人奔告于總兵官,總兵官拿其毆打人,治罪杖之,又杖勇以不能駛下之罪,臣等退,復沿湖掉出城外,過迎恩橋,至蓬萊驛前留泊.夕,知府姓周及會稽、山陰兩縣官,皆優送糧餵.

소흥부(紹興府)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감수(鑑水)로 노를 저어 올라갔습니다.

물은 경호(鏡湖)234의 한 갈래로부터 와서 성안을 둘렀습니다.

해 뜰 무렵 소흥부[1][2][3][4]에 도착하였습니다.

성 남쪽에서부터 감수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창안포(昌安鋪)를 지나 노를 저어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에는 홍문이 수문(水門)의 구실을 하고 있었으며 네 겹으로 되었는데 모두 쇠로 만든 문짝을 설치하였습니다.

광상교(光相橋) 등 큰 다리 다섯과 경괴문(經魁門), 연계문(聯桂門), 우성관(佑聖觀), 회수칙비(會水則碑) 등을 거쳐서 10여 리쯤 가니 관부(官府)가 있었습니다.

적용은 신 등을 이끌고 기슭에 내리니, 그 저자의 번화함과 인구의 많음은 영파부의 3배나 되었습니다.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235 황종(黃宗),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236 오문원(吳文元), 포정사분수우참의(布政司分守右參議)238 진담(陳潭)239 이 징청당(淸堂)240 북벽(北壁)에 죽 늘어앉았는데, 병갑(兵甲), 태장(杖)이 그 앞에 삼엄하게 늘여져 있고 탁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신을 인도하여 탁자 옆에 이르러서 서쪽을 향해 서게 하였습니다.

신의 성명, 살던 지방, 역임한 관직, 그리고 표류하게 된 까닭, 상륙하여 약탈한 일이 없었는지의 정상, 가지고 온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신은 파총관에게 답하던 말로 답하고 난 뒤 하산에서 해적을 만나고, 선암에서 몽둥이를 맞았던 일을 더 보태고, 가져온 행장에는 말안장 1벌을 또 첨가하였습니다.

세 사상(使相)242 은 곧 파총관이 보고한 문서를 내어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공술서의 앞뒤의 상세함과 간략함이 같지 않소?”라고 하였습니다.

“파총관이 처음 심문할 적엔 표류하여 정박하게 된 사정만을 답했을 뿐이었고, 오늘 포정삼사(布政三司)243가 다시 심문하시니 해적을 만났던 일 등을 상세히 거론했던 것입니다.”

세 사상은 모두 신에게 천천히 말하기를,

“공술서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당신에게 실로 죄가 되오. 당신은 마땅히 앞서 쓴 말을 베껴 쓰되 한 글자도 가감이 없어야 하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신은 곧 베껴 썼습니다.

세 사상은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다음날 당신이 항주(杭州)에 도착하면 진수태감(鎭守太監)244 ·수의(誘衣)245 삼사(三司)의 대인(大人)246께서, 북경에 도착하면 병부(兵部)와 예부(禮部)에서 다시 당신의 사정을 물을 것이니 그 때에도 또한 이대로 답해야 하오. 조금이라도 서로 어긋나면 절대로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처음에는 당신들을 왜선(倭船)을 타고 와서 겁략하는 무리들이라고 여겨, 잡아다 죽이려고 했소. 당신이 만약 조선인이라면 당신 나라의 역대 연혁과 도읍 산천 · 인물·속상(俗尙) 247. 사전(祀典)248. 상제(喪制)·호구(戶口)·병제(兵制)·전부(田賦)·관상(冠裳)의 제도를 자세히 써 내면 여러 사서(史書)에 맞추어 보고 옳고 그름을 가리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진술했습니다.

“연혁과 도읍은 처음에 단군(檀君)249께서 당요(唐堯)[5]와 같은 시대에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평양(平壤)[6][7][8][9]에 도읍을 정하여 세대(世代)를 천여 년이나 지냈습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250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고, 평양에 도읍하여 8조252로 백성을 가르쳤으니, 지금 나라 사람들이 예의(禮義)로 풍속을 이룸이 이때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253이 망명하여 조선에 들어와서 기자의 후손인 기준(箕準)254을 내쫓으니 기준은 마한(馬韓)으로 달아나서 그 곳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그 중간에 구한(九韓)255이 되기도 하고, 이부(二府)256가 되기도 하고, 사군(四郡)257이 되기도 하고, 삼한(三韓)258이 되기도 했는데, 연대가 멀고 오래되었으므로 다 기술할 수 없습니다.

전한(前漢)의 선제(宣帝)259 때에 이르러 신라(新羅)의 박씨(朴氏)260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高句麗)의 고씨(高氏)와 백제(百濟)의 부여씨(扶餘氏)가 서로 잇달아 일어나서 옛 조선 땅을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신라는 동남지방을 점거하여 경주(慶州)에 도읍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서북 지경을 점거하여 요동(遼東) 그리고 평양에 도읍했으며, 또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겼는데 그 지명은 잊었습니다. 백제는 중부의 서남지역을 점거하여 직산(稷山)에 도읍 했다가 뒤에 광주(廣州), 한양(漢陽), 공주(公州), 부여(夫餘)에 도읍하였습니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 때에 와서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당군(唐軍)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10], 또 백제도 멸망시켜 삼국을 통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뒤에 견훤(甄萱)262이 반란을 일으켜 전주(全州)를 점거하고, 궁예(弓裔)263가 반란을 일으켜 철원(鐵原)을 점거했으나, 고려(高麗)의 왕씨(王氏)264가 공적이 높고 덕망이 많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니, 궁예는 스스로 도망했고 견훤은 스스로 항복했으며, 신라왕은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장부에 기재하여 와서 항복했으니, 재차 삼국을 통합하여 개성(開城)에 도읍하고 대대로 전한 지 거의 500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조선으로 바뀌어, 한양에 도읍한 지 약 100년이 됩니다.

산천은, 장백산(長白山)은 동북방에 있는데 백두산(白頭山)이라고도 합니다. 가로는 천여 리 뻗쳤고 높이는 200여 리 되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 둘레가 80여 리 됩니다.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북으로 흘러서 속평강(速平江)이 되고, 서북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이 되는데, 송화강 하류가 곧 혼동강(混同江)입니다. 묘향산(妙香山)은 북쪽에 있고, 금강산(金剛山)은 동쪽에 있는 데 1만2천여 봉우리가 있으며, 지리산(智異山)은 남쪽에 있고 구월산(九月山)은 서쪽에 있는데, 이상 네 산은 매우 높고 험하며 기이한 유적이 많습니다. 삼각산(三角山)은 곧 국도(國都)의 진산(鎭山)65입니다. 대동강(大同江)·살수(薩水)·임진도(臨津渡)·한강(漢江)·낙동강(洛東江)·웅진(熊 津)·두치(豆恥津) · 영산진(榮山津) 등은 큰 강입니다.

인물은 신라의 김유신(金碩信)266 . 김양(金陽)267. 최치원(崔致遠)268. 설총(薛聰)269, 백제의 계백(階伯)270 ,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271, 고려의 최충(崔沖)272. 강감찬(姜郡贊)273 . 조충(趙沖)274 김취려(金就順)275·우탁(禹悼)276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우리 조선은 일일이 셀 수도 없습니다. 속상은 예의(禮義)를 숭상하고 오륜(五倫)을 밝히고 유술(儒術)을 존중합니다. 해마다 봄가을에 양로연(養老宴)278 향사례(鄕射禮)279.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합니다. 사전(祀典)은 사직(社稷)280, 종묘(宗廟)282,석전(釋奠)283과 여러 산천에 대한 제사가 있습니다. 형제(刑制)는 《대명률(大明律)》284에 따릅니다. 상제(喪制)는 주자(朱子)의 《가례》에 따릅니다. 관상(冠__)은 중화의 제도를 따릅니다. 호구(戶口), 병제(兵制), 전부(田賦)는 내가 유신(儒臣)이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을 모르겠습니다.”

  • 양저우(揚州)의 최치원 기념비 및 최치원 사료 진열실[11][12]

“인정을 추쇄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오?”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있어 수로가 매우 험하고 멀기만 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들어가 피하여 오랫동안 도망범의 소굴이 되었으니, 그런 까닭에 가서 이들을 잡아 오는 것입니다.”

“제주도는 우리 중국과 거리가 몇 리나 되오?"

신은 수로가 먼 것을 부풀려서 말하기를,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대개 배가 큰 바다에서 순풍을 만난다면 하루에 천리도 갈 수 있는데, 지금 나는 제주도로부터 바다에 뜬 것이, 주야를 따져 본다면 무릇 29일이나 되며, 큰바람에 몰려서 나는 듯이 빨리 달려 중국의 해안에 도착 정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제주도로 가는 길은 대개 수만 여 리나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당신 나라와 우리나라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오?”

“전해 듣기로는 우리나라 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을 지나 황도(皇都)285에 도착하자면 3천9백여 리나 된다고 합니다.”

총병관 등의 세 사상은 곧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고 이어서 단자를 써서 내려 주었습니다.

단자 속에는 “최관(崔官)에게 예물로 돼지고기 1쟁반, 거위 2마리, 닭 4마리, 물고기 2마리, 술 1동아리, 쌀 1쟁반, 호두 1쟁반, 채소 1쟁반, 죽순 1쟁반, 국수 1쟁반, 대추 1쟁반, 두부 1쟁반을 보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 반찬과 식량 등 물품을 배리(陪吏)와 군인에게 차등있게 내려주었습니다.

신은 곧 사례하는 시를 지어 두 번 절하니 세 사상들도 일어나 공손스레 답례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사례하는 시를 보건대 이 지방 산천을 어찌 그리도 자세히 알고 있소? 이는 필시 이곳 사람이 말해 준 것이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탐라시

"사방을 돌아봐도 친한 사람이라곤 도무지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얘기하겠습니까? 내가 일찍이 중국의 지도를 훑어보았기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여 기억나는 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답을 마치고 나서, 신은 서너 명의 관인들과 함께 탁자 가에 두 손을 마주잡고 서 있었습니다.

적용의 군리(軍吏) 한 명이 밖에 있다가 신의 종자인 김도종을 구타하여 상처를 입혔습니다.

신은 이 사실을 글로 써서 여러 관인들에게 보였더니 한 관인이 달려가서 총병관에게 알렸습니다.

총병관이 구타한 사람을 잡아와서 죄를 다스려 곤장을 치고 또 적용에게 부하를 통솔치 못한 죄로 곤장을 쳤습니다.

신 등은 물러 나와 다시 호수를 따라서 노를 저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영은교(迎恩橋)를 지나 봉래역(蓬驛)286 앞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저녁에 지부(知府) 주(周)287라는 사람과 회계현, 산음현 두 지현(知縣)288이 모두 식량과 반찬을 넉넉히 보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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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th Day. Arrival at Shao-hsing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We poled into the Chien River and went upstream. The river came as a branch from Lake Ching, meandering round and through towns. At sunrise we reached Shao-hsing Prefecture. From south of the wall we went up the Ching River, first east and then north, passed Ch’ang-an Stop, and rowed inside the wall. The wall had an arched gate just at the mouth of the river. [The gate] was quadruple, and in each [section] an iron door was hung, through which we passed. There were Kuang-hsiang Bridge, four other big bridges, Ching-k’uei Gate, Lien-kuei Gate, Yu-sheng-kuan, and a hydrographic marker. When we had gone about ten li, there was a public office, and Chai Yung led us on to the bank. The profusion of gates and crowds of people were three times as great as those of Ning-po Prefecture. Supreme Anti-Japanese Commander and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Huang Tsung, Chekiang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the Maritime Circuit Wu Wenyüan, and Right Assistant Administration Commissioner Ch'en T’an, sat in a row along the north wall of the Ch'eng-ch'ing Hall.52 Arms, armor, and bamboo whips were massed like a forest in front of them. They had a table placed and summoned me to it; I stood facing west. They asked me my name, where I lived, what my position was, the circumstances of my being blown adrift, whether it was true that we had not pillaged, and whether we had implements with us. I answered with the answers I had given the Commander, but I added that we had met bandits at Hsia-shan and been beaten at Hsien-yen. To the [list of] baggage we had I also added one horse saddle. The three high officials then handed down the Commander's report and showed it to me. They said, “Why are there discrepancies in certain details ?” I said, “It is only that in the beginning, when the Commander questioned me, I answered only with the circumstances of our sailing adrift and arriving here. Today, when you Three Authorities question me again, I inform you in detail about our meeting bandits and other things.” The three high officials said to me gravely, “The statements differ; truly you have done wrong. You must copy your previous statement so that there is exact agreement.” I copied it. They then said to me, “Later, when you reach Their Excellencies the Grand Defending Overseer and Three Resplendent Authorities53 of Hang-chou and the Ministries of War and Rites at Peking, you will be questioned again on the circumstances. Then use this again to answer them. It will never do if there is the slightest discrepancy.” They then said, “At first we took you to be Japanese ships plundering, and we were going to arrest and execute you. If you are a Korean, write and bring to us [a statement of] the historical periods of your country, its changes of rule, the capital cities, the geography, the people, the customs, sacrifices, rules for mourning, population, military system, land tax, and styles of dress. We shall compare it with the Histories and note what is and is not so.” I said, “On the changes of rule and capital cities, at first Tan-gun and T’ang Yao rose side by side. The country was named Choson, and the capital was P’yongyang. The succession continued for over one thousand years. Wu-wang of Chou enfeoffed Kija (Chi Tzu) in Choson. He made P'yongyang the capital and instructed the people in eight articles. The observance by the people now of customs based on ritual (li) and righteousness (i) began from that. When Wei Man of Yen fled, he entered Choson and turned out Kija's descendant Kijun. Kijun fled to Ma-han and made his capital there. About this time, [the country may have been called] Kukwan, l-pu, Sagun, or Sam-han. It was a remote era, and the details are not clear. 54 With the time of Hsüan-ti of Western Han [r. 73-49 B.C.], the Pak family of Silla first established a state. The Ko family of Koguryð and the Puyo family of Paekche rose one after another. They divided into three the land of the old Choson. Silla occupied the southeast area and made Kyongju its capital. Koguryo occupied the northwest area and made Liao-tung and P'yongyang its capitals; it shifted boundaries several times, but I have forgotten the places. Paekche occupied the central and southwest areas and made Chiksan, Kwangju, Hamyang, Kongju, and Puy> [successively] its capitals. In the reign of Kao Tsung of T’ang [r. 650-683], King Wen-wu (r. 661-681] of Silla and T’ang soldiers destroyed Koguryo and then Paekche and united the three countries,55 Later, Chinwon rebelled and occupied Chònju, and Kungye rebelled and occupied Ch’ðlwon. The Wang family of Koryo had great merit and were full of virtue, and the people of the country gave them their allegiance. Kungye fled, Chinwon gave himself up, and the King of Silla sealed his treasury and storehouses, made a register of his counties and districts, and surrendered. The three states were again united, 56 and Kaesong was made the capital. The line of succession continued almost five hundred years. The present change is to our Choson, with Hamyang57 the capital. That is how it has been now for almost one hundred years. “As to geography, the Changbaek Mountains are in the northeast. They are also called the Paedu Mountains and extend more than one thousand li, for over two hundred of which they rise to great heights. On one of the peaks is a deep lake, more than eighty li round. Its water flows east as the Tuman River, south as the Yalu River, northeast as the Sokp'yong River, and northwest as the Song-hwa River (Sungari River). Downstream the Sungari is the Kondong River. The Myohang Mountains are in the north; the Kŭmgang Mountains, with over twelve thousand peaks, in the east; the Chiri Mountains in the south; and the Kŭwol Mountains in the west. The above four ranges have extremely high peaks and many spectacular sights. Mt. Samgak is the guardian mountain of the national capital. The Taedong River, Sa River, Imjin, Tohan River, Naktong River, Nŭngjin, Tou-ch’ih-chin,58 and Yongsan-jin are the largest of the rivers. “As to the personages, from Silla there have been Kim Yu-sin, Kim Yang, Ch'oe Ch’i-won, and Sól Ch’ong; from Paekche Kyehaek; from Koguryð Ulchi Mun-dök; from KoryÕ Choe Chung, Kang Kam-choan, Cho Chung, Kim Ch’wi-ryò, Wu T’ak, and Chòng Mong-ju; and from our Chosón too many to list.59 “As to customs, we esteem the codes of etiquette (li) and righteousness (i), we understand the Five Relationships, and we respect Confucian methods. Every year in spring and fall we observe the Feast for the Care of the Old, the Regional Archery Ceremony, and the Regional Wine Ceremony. 60 “As to sacrifices, there are altars of the soil and grain, ancestral temples, the Rite to Confucius,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The penal code follows the Great Ming Code.61 The rules of mourning follow Chu Hsi’s Chia li. In our dress we follow Chinese styles. “As to the population, military system, and land taxes, I, being a Confucian minister, do not know the details.” Next they asked, “What do you mean by your statement about correcting entries on registers?” I said, “Cheju is in the great sea, and the sea lanes are extremely dangerous and long. All criminals flee there to escape. It has long been a refuge for outlaws in flight, so we go and investigate.” They asked, “How many li is it from China to Cheju?”' I exaggerated the length of the sea route and said, “I do not know exactly, but generally a boat that meets favorable winds in the great sea can go one thousand li a day. We, now, sailed at sea a total, combining days and nights, of twenty-nine full days. We were driven by high winds and raced along as if we were flying, coming down to the Chinese coast. The distance, then, from China to Cheju must be roughly several tens of thousands of li.”62 They asked, “About how far is your country from our Court?”' I said, “I have heard that it is more than 3,900 li from the capital of our country to the Imperial capital, going across the Yalu River and through the town of Liao-tung.” The Regional Commander and the other two high officials 63 served me tea and fruit and wrote a list of things to be presented to me. The list [read], “Honoraria for the Escorted Minister Ch'oe One plate of pork Two ducks Four chickens Two fish One beaker of wine One plate of rice One plate of walnuts One plate of vegetables One plate of bamboo shoots One plate of wheat noodles One plate of jujubes One plate of bean-curd.” They gave food and drink and other things to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e soldiers according to their rank. I wrote a poem of thanks and bowed twice. The three statesmen also rose and returned the courtesy with respect. They said to me, “We see from your poem of thanks that you are familiar with the geography of this region. How did you acquire such knowledge? It must have been explained to you by natives.” I said, “No one is close to me here, and my language is not understood. Who would talk with me? I have studied maps of China, and now I have simply drawn on my memory.” When the interview ended, I and three or four officials were standing, hands folded, at the table. Outside, one of Chai Yung's military officers was beating and hurting Kim To-jong, a member of my staff. I wrote [an account of the incident] and showed it to the officials. One official hurried to report it to the Regional Commander, who had the attacker seized and punished by flogging. He also had Chai Yung flogged for not having been able to keep order. We withdrew and again went along the lake. We rowed out through the wall, passed Ying-en Bridge, arrived in front of P'eng-lai Station, and stopped for the night. In the evening the Prefect, named Chou, and the Magistrates of the two counties K’uai-chi and Shan-yin sent abundant amounts of food and drink.

235. 예전에는 公, 侯, 伯 등이 맡았으나, 洪武30년(1397)에 都指揮가 맡았다. 236. 전에는 侍郞, 都御史가 맡았으나, 洪武30년(1397)에 비로소 按察副使가 맡았다. 237. 寧人으로 巡按御史와 提刑按察司副使 등의 관직을 지냈다. 238. 布政司 즉 承宣布政使司는 省級行政機構이다. 한 省의 民政과 財政을 관장하였다. 명대에는 浙江, 江西, 福建, 廣西, 四川, 山東, 廣東, 河南, 陝西, 湖廣, 山西, 雲南, 貴州 등 13 布政司를 설치하였다. 각기 左 右布政使, 左·右參政, 左右參議 등의 正官을 두었다. 부속기관에 經歷司, 照磨所, 理問所, 司獄司, 庫, 倉, 雜造局, 軍器局, 寶泉局, 織染局 등이 있다. 239. 長樂人으로 成化 연간에 承宣布政司右參議를 지냈다. 240. 紹興府 府治의 동쪽에 있는 提刑司 내에 蓬萊館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 嘉定16년(1223) 知府事 겸 提刑 注綱이 건립하였다. 《會稽續志》권2, 提刑司, 2?? 무기와 갑옷. 242. 使相은 總督의 별칭이지만 여기서의 세 使이란 앞에 나오는 總督 황종, 副使 오문원, 參議 진담을 가리킨다. 243. 布政司 등 三司 즉 布政司와 按察司 및 都指揮使司에 각각 소속된 황종, 오문원, 진담을 가리킨다. 244. 鎭守는 원래 武官의 職銜으로 總兵이 충임되었다. 永樂元年(1403)에 成祖는 顧成, 韓觀, 何福을 파견하여 貴州, 廣西, 西夏의 변방에 出鎭시키면서, 동시에 환관을 선발하여 함께 가게 하면서 公侯의 服을 하사하였는데, 그 지위가 將帥보다 상위였다. 이것이 太監이 出鎭하게 된 시초이다. 洪熙元年(1425)에 太監 王安이 甘肅에 出鎭하 여 비로소 鎭守太監의 명칭이 있었다. 후에 각 省 각 변방에 모두 鎭守太監을 설치하여 武臣을 감시하고 軍權을 통제하였다. 245. 綺衣는 繡衣直指 즉 巡按御史의 별칭이다. 繡衣直指는 漢 武帝때 두었던 御史大夫의 임시직으로 파견된 直指使者가 수 놓은 비단옷을 입고 도끼와 符節을 지닌 데서 이르는 말이다. 246. 三司의 장관인 布政使, 按察使, 都指揮使를 가리킨다. 247. 세속에서 숭상하는 것. 248. 제사의 典禮. 249. 天帝인 桓因의 손자이며 桓雄의 아들로, B.C 2333년 아사달(평양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 조선을 개국하였다. 《三國遺事》(紀異篇)에 의하면, 인간 세상을 구하 고자 인간 세상에 내려온 환웅은 인간이 되기를 원해 환웅의 말대로 해서 인간이 된 熊女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단군신화는 한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결을 요구하는 求心體的 역할을 해왔다. 250. 周나라 제 2대 왕이며, 사실상의 창건자이다. 아버지 文王의 뜻을 이어받아 殷나라 서부 諸侯의 맹주로서 은나라 토벌의 전쟁을 일으켜 河南省 牧野에서 王의 대군을 격파하여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지금의 陝西省 西安 부근인 당시의 鎬京에 수도를 정하여 周나라를 창건하고 아우인 周公 日 등의 보필을 받아 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251. 古朝鮮시대 전설상의 箕子朝鮮의 시조로, 이름은 胥餘, 須更이다. 殷나라의 賢人으로 周나라의 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1122년 동쪽으로 도망하여 조선에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하고, 예의, 田蠶, 방직, 八條禁法을 가르쳤다 한다. 252. 犯禁八條로 古朝鮮 시대 최초의 성문법이다. 《前漢書》 권28下, 地理志 第8下에는 그 가운데 아래의 3조가 기재되어 있다. “相殺以當時價殺, 相傷以穀償, 相益者, 男沒 人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253. 衛滿朝鮮의 창건자로, 본래는 燕나라 출신이다. 연왕 盧縮이 漢나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망명하여 浿水를 건너와 왕 箕準에게 항복하여 왕의 신임을 얻고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마침내 왕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워 王儉城에 도읍을 두었다. 위만은 준왕 때의 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불렀다. 254. 箕子朝鮮의 왕이다. 箕否의 아들로 秦 말기에서 漢 초기에 걸쳐 재위하였다. 漢高祖말년에 燕나라 사람 衛滿이 천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망명하여 오자, 準王은 그를 신용하여 博士의 벼슬을 주었다. 위만은 중국 피난민을 통합하고 부근의 종족을 종속시켜 세력을 키우자, 準을 내쫓고 대신 朝鮮王이 되었다.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準은 宮人들을 거느리고 辰나라 북쪽 변방지방으로 가서 자리잡고 韓王이라 칭하여 마한의 시조가 되었다. 255. 九韓은 원래 신라의 이웃에 있다고 여겨지던 9국으로서 日本, 中華, 吳越, 托羅, 鷹遊, 株, 丹國, 女狄, 등을 지칭한다. 황룡사 9층탑은 이들 제국이 來朝한다는 理想에서 만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구한은 고대 한반도 남부의 여러 부족에 대한 총칭으로서 九란 實數라기 보다는 많다는 정도의 뜻일 것이다. 256. 漢昭帝 始元5년 平那·玄菟郡을 平州都尉府, 臨屯·樂浪郡을 東部都尉府의 二府로 바꾸었다. 257. 기원전 108년 漢武帝가 古朝鮮을 멸하고 樂浪, 玄夷, 眞番, 臨屯의 四郡을 설치했다. 258. 馬韓, 辰韓, 弁韓의 총칭. 259. 前漢의 제9대 황제(재위 B.C.74-49)이다. 18세로 황위에 올랐을 때 崔光이 攝政을 하였으나, 곽광이 병들어 죽은 후에 곽씨 일족을 제거하고 親政을 하였다. 지방행정제 도를 정비하고 처음으로 常平倉을 설치하여 빈민구제를 도모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匈奴의 세력이 쇠퇴함을 틈타 烏孫과 손잡고 흉노를 격파하였다. 260. 신라의 시조 朴赫居世를 가리킨다. 고조선의 유민이 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어느 날 한 촌장이 숲 속에서 말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가 자 말은 없고 큰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서 남자아이가 나왔다. 그 때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다.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매우 영특하여,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의논하여 왕으로 삼고 국호를 徐羅伐이라 하였다고 한다. 261. 신라 30대 왕(재위 661-681)으로, 성은 金이고 이름은 法敏이며, 태종무열왕과 文明王后의 맏아들이다. 655년 태자가 된 뒤 唐나라를 끌어들여 김유신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자기들의 영토로 삼으려 하자, 당나라 세력을 몰아 내고, 677년에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262.後百濟의 초대 왕(재위 900-935)으로,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신라가 혼란스러워지자 900년에 完山州(全州)에 후백제를 세웠다. 926년 신라 景哀王을 살해하고 金傳를 왕으로 내세워, 신라인들의 원성을 샀다.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점차 내분에 휩싸였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맏아들 神劍과 대립하다가 마침내 고려의 王建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263. 後高句麗를 세운 왕(재위 901-918)으로, 신라의 憲安王 또는 景文王의 서자라고도 전한다. 신라가 쇠약해져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梁吉의 부하가 되어 세력을 길러 898년에 松岳(지금의 開城)에 도읍을 정하여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264. 王建을 가리킨다. 궁예의 부하가 되어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백성을 잘 보살펴 신망을 얻었다. 세력이 커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저지르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918년 왕으로 추대되어 나라 이름을 高麗'라 하였다. 융화, 북진,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 나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政誠》·《허百寮書》를 짓고 遺訓으로 訓要十條를 남겨 후세의 왕들에게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였다. 265. 지역의 主山. 266.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이다. 15세 때 花郞이 되어 몸과 마음을 닦았다. 654년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을 자식 없이 죽자, 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上大等이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다. 그 후 蘇定方이 이끄는 唐나라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고구려 정복 후 당나라가 신라마저도 정복하려 하자, 김유신은 망한 고구려, 백제군과 연합하여 이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267. 신라 신무왕 때의 공신으로, 자는 魏所이다. 흥덕왕3년(828)에 固城太守가 되고, 武州都督 등을 역임했다. 836년 흥덕왕 사후의 왕위 쟁탈전에 개입했다가 실패하여 산중으로 피신했다. 민애왕2년(839) 균정의 아들 佑徵(神武王), 淸海鎭의 張保皐 등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왕을 시해하고 우징을 왕으로 추대했다. 신무왕이 죽은 후 그 아들인 文聖王을 옹립했으며, 公檢校衛尉卿 등을 지냈다. 268. 신라의 학자로, 자는 孤雲, 海雲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13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879년 황소의 난 때는 〈討黃巢文)을 지어 문장가 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하여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894년 時務十條'를 올려 시행하게 하였고 아찬 벼슬에 올랐다. 그 후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관직을 내놓고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 는 《桂苑筆耕》 등이 있다. 269.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로, 元曉大師의 아들이며, 호는 水月堂이다. 신라 十賢의 한 사람으로, 翰林을 지냈고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맡아보았다. 유학과 문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그가 만든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은 당시 중국 학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두도 만들었다고 하나 그가 태어나기 전에 〈薯童謠〉, 〈風 謠) 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270.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階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達率이다. 660년 金碩信과 蘇定方의 羅唐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炭峴(지금의 대전 동쪽 馬道嶺)과 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黃山벌에 나가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이하 여 싸웠다. 계백의 결사대는 신라의 공격을 네 차례나 막아냈으나, 어린 花郞의 戰死로 사기가 오른 신라의 대군을 대적하지 못하고 패배하였으며,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271. 고구려 영양왕 때의 대신이자 명장이다. 612년 隋나라 30만 5천명의 대군이 고구려를 침범하여 양측이 압록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 적군의 허점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는데, 우중문이 비로소 술수에 빠진 것을 깨닫고 지친 군사들을 후퇴시키자, 살수에서 수나라의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는 성품이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272.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海州이다. 자는 浩然이고, 호는 惺齋, 月面, 放晦齋이다. 1005년 문과에 장원하였고, 관은 門下侍中까지 지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제자들이 그를 文憲公徒라고 하였는데, 12공도 중의 하나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海東孔子로 불리었다. 주요 저서로는 《崔文憲公遺稿》가 있고, 개성에 있는 〈歸法寺題詠石刻)을 비롯하여 글씨가 남아 있다. 273. 고려시대의 명장으로, 본관은 州이고, 初名은 殷川이다. 성종2년(983) 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禮部侍郞이 되었다. 1018년에 침입한 거란의 10만 대군을 이듬해 무찔렀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開國侯에 봉해졌다. 현종 廟庭 에 配享, 수태사 겸 중서령에 追되었다. 저서에 《樂道郊居集》·《求善集》 등이 있다. 274.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橫川(횡성)이다. 성균관에서 공부한 뒤 명종 때 文科에 급제하였다. 그는 학문과 무술에 두루 뛰어나, 1216년 樞密副使, 翰林學士承旨로서 上將軍을 아울러 지냈다. 그 해 쳐들어온 거란족을 麟州에서 무찔렀으며, 그 뒤 몽골 군과 연합하여 거란군이 있는 江東城을 공격하여 항복하게 했다. 이어 政堂文學, 禮部判事, 守太尉 등을 지냈다. 275. 고려시대의 장군으로 본관은 彦陽이고, 시호는 威烈이다. 蔭官으로 正尉에 임명되어 東宮衛를 거쳐 정4품 벼슬인 장군이 되어 북동 국경(함경도)을 진압한 뒤 대장군이 되었다. 1216년부터 18년까지 계속된 거란군의 침략을 크게 무찔렀다. 전공으로 兵 部判事까지 되었다. 성품이 곧고 청렴 결백하였으며, 군기를 엄하게 다스렸고 부하들을 고루 아꼈으며, 싸움을 할 때마다 기발한 計巧를 써서 승리하였다. 276. 고려 후기의 유학자로, 호는 易東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귀신을 모신 사당을 없애 버렸다. 1308년 충선왕의 잘못을 간언하고는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충숙왕이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기고 여러 번 불렀 으나,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經史와 易學에 통달하였다. 뒤에 成均祭酒를 지내다가 致仕하였다. 당시 元나라를 통하여 들어온 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이해하고 깨우쳐,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다. 277.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圃隱이다.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389년에 藝文館大提學, 文下贊成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임금으로 모셨다.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그는 병으로 누운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살해되었다. 의창을 세워 가난한 백성을 구하고 유학을 널리 알렸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문집에 《圃隱集》이 있다. 278. 매년 봄가을에 연로하고 어진 자에게 饗宴을 베풀어 존경을 표하는 의식. 279. 鄕射禮는 원래 周代에 州의 장관이 봄가을에 백성들을 모아 州序에서 射禮를 하던 의식에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는 州府郡縣 등 각 지방장관이 主人이 되어 여러 賓과 庶人을 불러 활쏘기와 관련 儀式을 집행하였다. 280. 고을의 儒生이 모여 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절. 281. 社는 國土之主, 稷은 五穀之長으로 나라에서 백성의 복을 위해 제사하는 대상이다. 나라를 세우면 먼저 사직과 종묘를 만드는데 사직은 궁성의 서쪽에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3년(1394) 신라 중기의 壇과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현재의 종로구 사직동 인왕산 기슭에 세웠다. 282. 궁성의 동쪽에 위치한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妃 및 追尊된 왕비의 신주를 奉安한 廟이다. 太祖4년(1395) 준공했는데, 중앙에 정면 7칸의 太室을 남향으로 세우고, 좌 우에 7祀 및 공신의 配享廟를 두었다. 현재 종로3가에 남아있는 廟宇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선조41년(1608)에 중건된 건물이다. 283. 文廟에서 先聖과 先師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으로 일명 釋業·釋奠祭라고도 한다.《예기(禮記)》의 〈王制) 文王世子篇에 나오는 말로 釋과 漢은 놓는다는 뜻으로 간단하게 채소를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원래는 周公을 제사하다가 漢 이후 孔子를 모시는 의식으로 바뀌었다.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上丁 즉 2월과 8월의 첫째 丁 날에 거행하며 제물은 후세에 이르러서는 고기와 과일 등을 함께 올렸다. 284. 明의 官撰 律書로 洪武元年(1368)에 공포한 이후 7년(1374), 22년 및 30년에 각각 개수되어 반포되었다. 30년 律은 名例律 등 7律 30篇 460條로 구성되었다. 보통 明律이라고 하면 바로 30년 律을 가리킨다. 한편 朝鮮의 《大明律直解》는 洪武22년에 기초한 것이다. 285. 황제가 있는 明의 수도 즉 北京을 가리킨다. 286. 소흥부성의 迎恩門 밖에 있는데 唐代에는 西亭, 宋代에는 仁風이라 불렸다. 《浙江通志》 권89, 驛傳 紹興府. 287. 당시 지부로서 周姓인 자는 지방지에서 찾을 수 없었다. 周姓으로서 郡職인 자는 成化22년(1486)부터 홍치4년(1491)까지 推官을 지낸 周進隆이 유일하다. 萬曆《紹 興府志》 권27, 職官. 288.??

    • 황주, 소흥주
    • 루쉰
    • 화가 서위
    • 주은래
2월 4일.lst
  1. 당시의 길(당시지로) 시작은 소흥(紹興 샤오싱) 에서
  2. [1]
  3. 写真素材 - 紹興市の古代の通り
  4.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난정(蘭亭)의 공간 구성 및 유상곡수(流觴曲水) 고찰
  5. [(조, p. 287)최부는 동국통감 단군조선 대목에서 "단군의 즉위가 중국의 요임금보다 25년 뒤진다. 옛 기록의 '요와 더불어 함께 즉위했다'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했다.]
  6.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2013년 02월호
  7. “고구려 후기의 도읍 평양의 진짜 위치 탐구중입니다”, 한겨레신문, 2015.06.11
  8. 北신문이 전한 `평양`이란 지명의 유래, 연합뉴스, 2001.12.27
  9. "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2009.07.17
  10. 고구려 영토도 축소시킨 중국인들, 아틀라스뉴스, 2019.07.28
  11. [2]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