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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관련인물 이동녕 이회영 장유순 이관식 이상룡 김창환 여준 이탁 1910년 7월 남만주 지역의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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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7월
 
1910년 7월
남만주 지역의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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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주 지역의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부지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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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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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삼원보 고산자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독립 기지 건설을 결의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5가지 원칙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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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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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전투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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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개농주의(모두 농사를 짓는다)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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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학교를 설립,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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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 간부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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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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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사장 이철영, 부사장 이상룡, 서무에 김동삼, 이원일, 학문에 이광, 여준, 재무에 이휘림, 김자순, 조사에 황만영, 박건, 조직에 주진수, 김창무, 외무에 송덕규, 정선백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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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는 외면적으로는 농사를 짓고 교육하는 회사 조직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신민회의 해외 정치조직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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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설기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장에는 이동녕이 선입되었고·교관은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김창환·남상복·이장녕·이세영·이관직 등이 맡았으며, 개교 첫 해에 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후 통화현 제6구 합니하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삼원보가 너무 번잡하여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새 부지비용은 이회영의 형 이석영이 전답 6,000석을 팔아 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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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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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학사 운영은 원만치 못했다. 개농주의에 따라 주민 전체가 농토를 개간했지만 수차례에 걸친 서리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는 곧 운영난으로 이어졌다. 이에 신민회는 경학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인 부민단을 창설했다. 이는 경학사보다 더욱 정치적인 기관으로, 조직을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10호·100호·1000호 단위로 나눠 패·구·지방으로 구분하였다. 패에는 패장(牌長) 또는 십가장(十家長), 구에는 백가장(百家長), 지방에는 천가장(千家長)을 각 1명씩 두었다. 이후 부민단은 부민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는데, 그 특징은 대표자대회에서 결의한 내용들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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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민단을 정부의 기능을 가진 보다 넓은 범위를 의미하는 부민회로 고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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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동포간의 소송 사건을 담당할 검찰과 사판제도를 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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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각 지방의 교육 기관은 해당 지방의 능력에 맡기고 군사 간부 양성 기구인 신흥학교의 경비는 일체 본관에서 책임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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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흉작과 인명 손실을 극복하고 조국 광복의 달성에 매진할 것.

2021년 3월 2일 (화) 15:37 판

관련인물

이동녕 이회영 장유순 이관식

이상룡 김창환 여준 이탁


1910년 7월 남만주 지역의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부지 확정

1911년 4월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삼원보 고산자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독립 기지 건설을 결의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5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투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주의(모두 농사를 짓는다)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 간부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할 것.

단체 신민회

경학사(사장 이철영, 부사장 이상룡, 서무에 김동삼, 이원일, 학문에 이광, 여준, 재무에 이휘림, 김자순, 조사에 황만영, 박건, 조직에 주진수, 김창무, 외무에 송덕규, 정선백 선임 경학사는 외면적으로는 농사를 짓고 교육하는 회사 조직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신민회의 해외 정치조직 역할을 담당했다. 부설기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장에는 이동녕이 선입되었고·교관은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김창환·남상복·이장녕·이세영·이관직 등이 맡았으며, 개교 첫 해에 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후 통화현 제6구 합니하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삼원보가 너무 번잡하여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새 부지비용은 이회영의 형 이석영이 전답 6,000석을 팔아 부담하였다.

부민단 경학사 운영은 원만치 못했다. 개농주의에 따라 주민 전체가 농토를 개간했지만 수차례에 걸친 서리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는 곧 운영난으로 이어졌다. 이에 신민회는 경학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인 부민단을 창설했다. 이는 경학사보다 더욱 정치적인 기관으로, 조직을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10호·100호·1000호 단위로 나눠 패·구·지방으로 구분하였다. 패에는 패장(牌長) 또는 십가장(十家長), 구에는 백가장(百家長), 지방에는 천가장(千家長)을 각 1명씩 두었다. 이후 부민단은 부민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는데, 그 특징은 대표자대회에서 결의한 내용들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첫째, 부민단을 정부의 기능을 가진 보다 넓은 범위를 의미하는 부민회로 고칠 것. 둘째, 동포간의 소송 사건을 담당할 검찰과 사판제도를 둘 것. 셋째, 각 지방의 교육 기관은 해당 지방의 능력에 맡기고 군사 간부 양성 기구인 신흥학교의 경비는 일체 본관에서 책임질 것. 넷째, 흉작과 인명 손실을 극복하고 조국 광복의 달성에 매진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