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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2일 (토) 11:30 판

十九日,到桃渚所,是日大雨,兩千戶並馬驅臣等,冒雨以行,臣令程保告許清曰:“我等漂海,浮沈飢渴,臨死復甦,僅保餘喘,得到貴境,得遇官人,得飽昨朝之飯,以為得再生之地,乃於霖溪之雨,寧療之途,颠坑仆谷,撥石衝泥,體凍脚微,心焦力盡,昨夕不得食,今早又不得食,又驅出冒大雨而行,我其殆將半途而斃矣.”許清復曰:“昨因你走不到官司,自取飲,今若便到,則官自供給,速去速去”臣運步不得,仆路喂,四體委地不收,孝子、程保、金重、莫金、萬山、巨伊山等,環坐痛哭,適有牽牛而過者,程保 告諸千戶曰:“請解衣買此牛,以騎我員,”許清曰:“我亦豈不憐你難受此苦乎?緣拘國法,未得護汝耳,”李楨、孝枝、尚理等,又相代負臣過一嶺,可二十餘里,至一城,乃海門衛之桃渚所,行將近城七八里間,軍卒帶甲束乾號桶彭排夾道填街,至其城,則城有重門,門有鐵局,城上列建警成之樓,城中市店聯絡,人物繁富,引臣等至一公館許留焉,臣之形容枯,冠服塗泥,觀者絕倒,有姓名王碧者寫謂臣曰:“昨日已報上司,倭船十四隻,犯邊劫人,你果是倭乎?”臣曰:“我非倭,乃朝鮮國文士也.”又有姓名盧夫容者,自种措大,謂臣曰:“車同軌,書同文,獨你語音,不同中國,何也?”臣答曰: “千里不同風,百里不同俗,足下怪聽我言,我亦怪聽足下之言,習俗然也,然同得天所賦之性,則我之性,亦堯舜孔顏之性,豈嫌於語音之有異哉?”其人撫掌,曰:“你奔喪,可行朱文公《家禮》乎?”臣答曰:“我國人守喪,皆一遊《家禮》,我當從之,但為風所逆,今不得哭于柩前,所以痛哭.”其人又 問曰:“你作詩否?”臣答曰:“詩詞乃輕薄子嘲弄風月之資,非學道篤實君子所為也,我以格致誠正為學,不用意學夫詩詞也,若或有人先倡,不得不和耳.”又有一人寫臣掌上日:“看你也不是(反)(59人,只以言語不同,實同肯吃,誠可憐也,我告你一言,你其記之,善自處,慎勿輕與人言,自古倭賊____我邊境,故國家設備倭都指揮、備倭把總官以備之,若獲倭則皆先斬後聞,今你初繫舟處,轄獅子寒之地,守塞官汝為倭,欲獻截圖功,故先報云:“倭船十四隻,犯邊劫人,將領兵往捕汝汝之時,你輩先自捨,投入人多之里,故不得逞其謀矣,明日把總官來訊你輩,你其詳辨之,少有違

p.370 誤,事在不測云云,問其姓名,則曰:“我所以言之者,愛汝也,危之也.”掉頭而去,臣聞其言,毛髮豎立,即語程保等,保等曰:“路人指我等為斬伐之狀者,皆惑此謀故耳”日夕,千戶等官員七八人,置一大享,環立卓邊,引程保於前,問曰:“你一起一十四隻船,實否?”保對曰:“否,但一隻而已.”揮程保以出,又引臣問曰:“你眾所駕原船幾隻?”臣曰:“只一隻耳.”問曰:“我邊上瞭見倭船一十四隻,同泊處海洋,我因寺案官之報,已報于上司大人,你船十三隻,置之何地?”臣曰:“我之到海岸時,有貴人等乘船六隻,同泊一海,若要究六船人,則我之船數可知矣.”問曰:“你倭人,登劫此處,何也?”臣曰:“我乃朝鮮人也,與倭語音有異,衣冠殊制,以此可辨.”問日:“倭之神於為盜者,或有變服,似若朝鮮人者,安知你非其倭乎?”臣曰:“觀我行止舉動,證我印牌、冠帶、文書,則可辨情傷,”千戶等即令臣拿印信等物來以質之,因問曰:“你無乃以倭劫朝鮮人,得此物乎?”臣曰:“若少有 疑我之心,姑令送我北京,與朝鮮通事員一話,情實立見.”問曰:“你姓何名 誰?何州縣人?何職官?因何事幹到我邊境?開寫情狀,母敢謊虛,我其申報上司:”臣曰:“姓崔名溥,住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签仕朝著者有年,去丁未秋九月,奉國王命往濟州等處海島,今閏正月初三日,父喪,顛倒還家,遭風漂海,得到于此,”曰:“你父名何?職何?死在何地?”臣曰:“父名澤,格進士試,以養親不仕,閔孝服僅四載,又死于羅州.”供畢後,館臣于別館,以供臣及從者,我國人為公為私往來濟州,或遭風無去處者,不可枚悉,終能生還者,十百僅一二,是豈盡沈於海波乎?其漂入島夷若暹羅、占城之國者,無復望還,雖或漂至中國之界,亦為邊人所誤,以倭賊,折敵受賞,則誰能辨其情乎?如臣等者,若不先自下陸,若無印牌之信,__復免於禍哉? 我國家若依中朝制,凡百官給號牌、錫牌,篆書職姓名以異之,奉使臣無大小給節鉞,以王命,抑又沿海住人,雖以私商過海者,皆給號牌,書某國某州縣某姓名某形某年甲以別之,又置通事一員於濟州,凡奉使臣及三邑守合往還,常川帶行,以圖後慮, 然後庶可免於患,

도저소[1][2][3][4][5][6][7][8][9][10]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천호(千戶) 두 사람이 말을 나란히 타고 신 등을 몰아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허청에게 알리기를,

“우리들은 바다에 표류하여, 풍랑과 기갈로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 겨우 잔명을 보전하여 귀국의 땅에 도착하게 되어 관인을 만나 어제 아침에 밥을 배부르게 먹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맛비와 진흙길에서 구덩이에 엎어지고 골짜기에 넘어지며 돌에 긁히고 진흙에 빠져, 몸은 얼고 발은 이지러졌으며 가슴이 타고 힘은 다 빠졌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밥을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도 밥을 먹지 못했는데, 또 몰아내어 큰비를 무릅쓰고 떠나게 하니 우리는 아마 도중에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대답하기를, “어제는 당신들이 관사(官司)[11]에 도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굶주림을 자초한 것이오. 이제 관사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관에서 지급할 것이니 빨리 빨리 갑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걸음을 옮기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길모퉁이에 넘어져서 땅바닥에 사지를 뻗어버렸습니다.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등이 빙 둘러앉아서 통곡하였습니다.

때마침 소를 끌고 지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정보가 천호에게 고하기를, "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말하기를, “난들 어찌 당신들이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당신들을 감싸줄 수 없을 뿐일세”라고 하였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한 성(城)에 이르니, 바로 해문위(海門衛)의 도저소였습니다.

성에 이르기 7-8리 앞에서부터 갑옷을 입고 창칼과 총통이나 방패를 든 군졸들이 길거리 양 옆을 꽉 메웠습니다.

그 성에 이르니, 성에는 겹 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성 위에는 경수루(警成樓)가 죽 늘어 있고 성안에는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신 등을 이끌어 한 공관(公館)128에 이르러 유숙케 하였습니다.

신의 얼굴은 바싹 마르고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왕벽(王碧)이란 자가 글을 써서 신에게 보이기를,“어제 이미 상사(上司)에게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신은 정말 왜인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인이 아니라 곧 조선국 문사(文士)요.”

또 노부용(虛夫容)이란 자가 자칭 가난한 선비라고 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수레는 바퀴가 같고 글은 문자(文字)가 같은데129,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천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백리에 습속이 같지 않은 것이오.130 족하(足下)는 내 말을 괴이하게 듣고, 나 또한 족하의 말을 괴이하게 듣는 것은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하늘이 준 성품을 같이 얻었으니 나의 성품 또한 요(堯)132 · 순(舜)133 · 공자(孔子)134 · 안회(顔回)135의 성품인데, 어찌 말소리가 다름을 의심하겠소?”

그 사람은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나도 마땅히 이를 따라야하는데 다만 역풍을 만나 지금까지 널 앞에 울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통곡하는 것이오.”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나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12]을 공부하였지 시사를 배우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소. 먼저 시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13] -->사림파는 경학 우선, 사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이 손바닥 위에 글을 썼는데,

“보아하니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닌데, 다만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불쌍하오.

(조) 여기서 나쁜 사람을 호인이라고 함: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을 가진 사람

내가 당신에게 한마디 할테니 당신은 이를 기억하였다가, 처신을 잘 하고 부디 다른 사람과 경솔하게 얘기를 나누지 않도록 하시오.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번 우리의 변경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138 와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을 두어 왜적을 방비하게 했소.

만약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이번에 당신이 처음 배를 맨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지인데, 수채관(守寨官)140은 당신을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그러므로 먼저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고 보고했던 것이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을 잡아 목 베려는 참에 당신들이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갔던 까닭에 그들은 계략을 펴지 못했던 것이오.

내일은 파총관이 와서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니 당신은 자세히 해명하시오.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으니,“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을 아끼고 위태롭게 여겼기 때문이오”라고 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갔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하여 바로 정보 등에게 얘기했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 “길가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키면서 목 베는 시늉을 했던 것은 모두 이 계략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저녁 천호 등 관원 7-8인이 큰 탁자 하나를 놓고 탁자 가에 죽 둘러서 더니, 정보를 앞에 끌어내어 심문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함께 온 배가 14척이라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아닙니다. 한 척뿐입니다”라 대답하자 손을 휘둘러서 정보를 내보내었습니다.

또 신을 끌어내어 심문하기를, "너희들이 타고 온 원래의 선박이 몇 척이나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한 척뿐입니다.”

“우리의 변경에서 왜선 14척이 어제 그 곳 바다에 함께 정박한 것을 분명히 보았고, 내가 수채관(守寨官)의 보고에 따라 이미 상급 관청의 영감님께 보고를 올렸다. 너희 배 13척은 어디에 두었는가?”

“우리가 해안에 도착할 때 귀국 사람들이 탄 배 6척이 한 바다에 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6척의 배에 탄 사람을 조사한다면 우리 배의 수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왜인으로 이곳에 상륙하여 약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곧 조선 사람으로서 왜인과는 언어도 다르고 의관도 다르니, 이것으로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인으로서 도적질에 교묘한 놈은 혹 변장을 해서 조선 사람처럼 가장하는 자가 있으니 네가 그 왜인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나의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를 조사한다면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호 등이 즉시 신에게 인신 등의 물건을 가져오게 하고는 대조한 뒤, 이어서 묻기를, “네가 왜인으로서 조선 사람에게서 이 물건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선 나를 북경(北京)으로 보내서 조선 통사원(通事員)[14]과 한번 이야기를 시켜보면, 실상이 즉시 드러날 것입니다.”

“너는 성은 뭐고, 이름은 뭐며, 어느 주현(州縣) 사람이고, 무슨 관직이며, 무슨 일로 인하여 우리 변경에 도착했는가? 그 정상(情狀)을 쓰되 거짓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상사(上司)에게 보고하겠다.”

“저는 성은 최, 이름은 부로[15],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성내에 거주하였습니다. 두 번 문과[16]에 올라 조정의 반열에 올라 처음으로 벼슬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17].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네 부친의 이름은 뭐고, 관직은 뭐며, 어느 곳에서 죽었는가?”

“아버지 이름은 택(澤)인데,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어버이를 봉양키 위하여 벼슬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복을 벗은 지 겨우 4년 만에 나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공초(供招)를 마친 뒤 신을 별관(別館)에 숙박하게 하고,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공무로든 사무로든 제주도에 왕래하다가 바람을 만나서 행방불명된 자가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열 명, 백 명 가운데 겨우 1-2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어찌 모두 바다에 빠진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표류해서 도이(島夷)들이 사는 섬라(羅__), 점성(占城)국과 같은 나라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수도 없었고, 혹시 표류해서 중국 땅에 이르게 된 사람도 국경지대 사람들이 잘못 왜적으로 무고하고 목을 베어 상을 받는다고 해도 누가 그 실정을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신 등과 같은 사람도 만약 먼저 스스로 육지에 내려오지 않았거나, 인신과 마패와 같은 신표(信標)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다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든 백관(____)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18]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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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th Day. Arrival at T’ao-chu Chiliad. This day there was heavy rain.

The two Chiliarchs, riding abreast, drove us on, into the face of the rain. I ordered Chong Po to say to Hsü Ch’ing, “Hungry and thirsty, we drifted at sea, staring at death and regaining life. Barely staving off our dying gasps, we reached your border, met an official, and, yesterday morning, ate a full meal. We thought we had got to a place of rescue, where now, in continuous rain and muddy roads we stumble and fall in gullies and strike rocks and mud. Our bodies are frozen, our legs have sores, our hearts are anxious, and our strength is exhausted. Last night we did not eat, nor did we eat this morning, yet we are driven on, into the rain. We shall probably die on the way.” Hsü Ch’ing replied, “Yesterday you brought hunger on yourselves by not walking far enough to reach the authorities. Now, if you get there in good order, the authorities themselves will supply you. Hurry, hurry!" I took a step, failed, and lay down at the side of the road. My whole body had collapsed and would not rally. Hyo-ja, Chòng Po, Kim Chung, Makkům, Mansan, and Kõisan sat round me and wept bitterly. Just then, a man leading an ox happened to pass by. Chồng spoke to the Chiliarch: “Please let us take off our clothes and buy this ox to carry our chief.” Hsü Ch’ing said, “How can I, too, help but pity you all for the suffering you are undergoing? But since I am bound by the laws of the country, I cannot take your part.” Yi Chong, Hyo-ji, and Sang-ni again took turns carrying me. We crossed one range and in somewhat more than twenty li came to a wall, which was T’aochu Chiliad of Hai-men Garrison. As we approached the wall, for seven or eight li there were troops wearing armor and holding lances. Fire weapons and bold shields filled the roads. When we arrived at the wall, it had a double gate, and the gates had iron knockers. Watch towers were built along the top of the wall, and within it markets and shops were continuous and the people prosperous. We were led to a public guest house and allowed to stay there. My appearance was emaciated, my hat and gown muddy. The onlookers doubled up with laughter. One Wang Pi wrote a statement to me: “Yesterday it was reported to the authorities that fourteen Japanese boats had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re you really Japanese?” I said, “I am not Japanese, I am a Korean gentleman.” There was also a Lu Fu-yung who called himself a scholar. He said to me, "Why, when your carriages have the same axle-width and your books the same writing as those of China, is your speech not the same?” I answered, “The same wind does not blow over a thousand li, the same customs do not obtain over a hundred. If you wonder at the sound of my words, I wonder at the sound of yours. It is a matter of custom. But if we share the nature given by Heaven, my nature, too, is the nature of Yao, Shun, K’ung, and Yen.33 How can one object to a difference in speech?” The man applauded and said, “When you go into mourning, do you observe the [rules of] Chu Wen Kung's Chia li?” I answered, “In observing mourning, every one of my countrymen respects the Chia li. I should have followed it, but being driven off by winds, I have not yet been able to weep before the coffin. For that I grieve bitterly.” The man then asked, “Do you write poetry?” I answered, “Poetry is something by which the frivolous moan about the wind and moon and not a thing indulged in by sincere men devoted to the Way. I take as my study the investigation of things, extension of knowledge, and pursuit of truth. I do not pay much attention to poetry, but if someone addresses a poem to me, I am bound to respond with one of my own; that is all.” Another man wrote on my palm: “I see that you are not an evil man. But simply because your speech is not the same, you are really like someone blind and deaf. I truly pity you, and I shall tell you something; remember it. Be very careful of yourself. Do not talk freely to people. From olden times, Japanese bandits have repeatedly raided our borders. The state, therefore, has set up Anti-Japanese Commissioners and Anti-Japanese Commanders34 to cope with them. If they seize Japanese, they behead them all first and report it later. “Now the place where you first tied your boat was in the area of Shih-tzu Stockade. The Stockade Commander falsely accused you of being Japanese. He wanted your heads for the reward, and in his first report, therefore, he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have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s he was about to lead soldiers out to take you and behead you, your group left the boat and ran into a village, where many people were. He could not, therefore, perpetrate his scheme. Tomorrow, the Commander will come and question your group. Explain things to him minutely. If there is the slightest discrepancy or error, there is no telling what might happen.” When I asked his name, he said, “I have told you this because I like you. I have risked danger.”35 He turned and left. When I heard what he said, my hair stood up on end; so I said to Chòng Po and others, “When the people on the road pointed at us and made gestures as if to cut off their heads, it was because all of them were deluded by this plot.” In the evening, seven or eight officials, including the Chiliarch, had a large table put in place and stood round it. They had Chong Po brought before them and asked, “Is it true that your group had fourteen boats ?” Chong Po replied, “No. We had only one boat.” They motioned Chòng Po out, had me brought in, and asked, “How many boats did you start out in?”' I said, “Only one.” They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were sighted from above our coast. They were anchored together at sea yesterday. Because of the Stockade Commander's report, therefore, we have already reported the fact to our superiors. Where did you put the other thirteen boats?” I said, “When I arrived at the coast, men of your country were sailing there in six boats. We moored together. If you question the men of those six boats, you will know how many boats we had.” They said, “Why have you Japanese come here to raid?” I said, “I am a Korean. My speech is different from Japanese, my hat and gown are of different style. By those things you can tell us apart.” They said, “Some of the Japanese who are clever at banditry change their clothes and pose as Koreans. How do we know that you are not a Japanese like that?” I said, “If you observe my conduct and examine my seal, permit, cap, sash, and documents, you can tell the true from the false.” The Chiliarch and others then ordered me to bring my seal and other things and present them as evidence. They asked, “Are you not perhaps Japanese who robbed Koreans and got these things?” I said, “If you doubt me in the slightest, order me sent to Peking. A word with a Korean interpreter, and the truth will be apparent.” They asked, “What is your name? What are your department and county? What is your official position? On what business did you come to our border? Explain the facts in writing and dare not lie. We shall report this to our superiors.”

I said, “My name is Ch'oe Pu.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I have served notably at Court for some years. In the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go to Cheju and other islands, but on the 3rd Day of this Intercalary First Month I was setting out to mourn for my father. Returning home in confusion, I met a wind and was blown to sea, and I happened to come here."

They said, “What was your father's name? What was his position? Where did he die?” I said, “My father's name was T'aek. He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36 but in order to care for his parents did not take an appointment. He had laid aside his mourning clothes scarcely four years when he, too, died in Naju.”

When the deposition was finished, they lodged me in the guest house annex and gave me and my staff food. The people of our country go on official and private business to and from Cheju, and those who meet winds and get lost are beyond counting. Those who finally return home alive are barely one or two in a hundred; is it likely that all of them drown at sea? Those who drift to the island barbarian countries like Siam and Champa have no further hope of returning. Even if they drift to the borders of China, they are still wrongly accused by the people on the coast of being Japanese pirates. If their ears are cut off for the reward, who can tell the truth? How could people like us, if we had not landed beforehand by ourselves or did not have such signs as seals and permits, have escaped disaster?

Let our state follow the system of the Chinese Court and issue to all officials number tablets and pewter tablets with their names and positions thereon in seal characters to identify them. When any official, great or small, is sent anywhere, tallies and halberds should be provided to honor the King's command. Let even people living by the sea, though they cross the sea in private trade, be issued number tablets, inscribed such-and-such country, such-and-such department and district, such-and-such name, such-and-such appearance, and such-and-such date, to identify them. A consul should also be put at Cheju, and all commissioned ministers and magistrates of the three cities should always, coming or going, carry [their tablets] with them to provide for what may happen. If all that is done, then and only then will everyone be able to avoid tragedy.

127. __ 방지를 목적으로 손鹽區로부터 行鹽地에 이르는 중간의 교통 要地에 설치되어 상인의 기 및 상의 重量을 檢閱하는 기구이다. 大使와 副使를 각각 1인씩 두었다. 128. 公家에 설치된 官舍. 129. 이 구절은 《中庸》 28장의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에 보인다. 수레바퀴의 폭이 동일하고 書體가 통일되고 행동 윤리가 일치되었으니 이는 결국 천하 통일과 禮의 통일을 뜻하는 말이다. 130.《子春秋》권3, 內篇間上의 “古者百里而異習, 千里而殊俗”에 나오는 말이다. 131. 동년배끼리 혹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칭할 때 사용하는 경어. 132. 고대 중국 전설상의 임금으로, 舜과 아울러 堯舜의 治라 하여, 예로부터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 알려져 왔다. 五帝의 하나인 帝훨의 손자로,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위에 오르자 義和 등에게 명하여 달력을 만들었다. 또한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舜을 등용하여 자기의 두 딸을 아내로 삼게 하며 천하의 정치를 대신 맡아 하게 하였다. 요가 죽은 뒤, 순은 요의 아들 단주에게 뒤를 잇게 하려 하였으나, 제후들이 순을 추대하였으므로 순이 천자에 올랐다고 한다. 133.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5帝의 한 사람이다. 부친으로부터의 모진 학대를 받았으나 효성을 다하여, 堯로부터 인정을 받아 요의 두 딸에게 장가들었다. 有虞氏 부락의 추장이므로 虞舜이라고도 한다. 4신을 몰아내고 주변 부락의 추대를 받아 동맹의 수령이 되었으며, 요로부터 선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순 또한 만년에 治水를 잘 한 에게 禪讓을 하여, 堯임금과 함께 儒家에서 최고로 받드는 聖君의 한 사람이다. 134. 춘추시대 말기 魯나라의 사상가로, 儒家의 창시자이다. 이름은 丘이고, 자는 仲尼이다. 한 때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정치를 하는 사람은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가르침이 이상적인 지배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仁이라고 하였으며 이를 최고의 덕이라고 보았다. 그의 말과 행동은 제자들이 쓴 《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135. 춘추시대 말기의 학자로, 자는 子淵이다. 顔淵으로도 불린다. 魯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 공자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 安貧樂道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두 번 과실을 범하지 않아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늘 깊이 생각하여 29세에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32세의 나이로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라며 슬퍼했다. 후세에 復聖으로 追尊되었다. 136? 137. 四書의 하나인 《大學》에 나오는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8條目 중 일부. 138. 明 洪武 초에 沿海에 衛를 설치하면서 備倭都指揮使가 거느리게 하였다. 巡察海道도 함께 두었다. 139. 浙江에는 總督備倭都司 1員과 把摠指揮 4員이 두어져서 衛所를 통할하였다. 《紹興府志》 권25, 武備志 1. 140. 寨의 방어를 맡고 있는 지휘관. 141. 조선시대 때 10세 이상이 된 남자가 차고 다녀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던 패로 戶牌라고도 한다. 기원은 元에서 시작되어 고려 공민왕3년(1354)에 水陸軍丁에 한하여 실시하였으나 잘 시행이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사용범위가 확대되었다. TA, 관찰시 , , 兵使, 水使, 大將, 統制使 등이 지방에 부임할 때 임금이 내어주던 符節과 야이다. 竹節은 증명, 李鉉 즉 도끼는 권한을 각각 상징한다.

(조) 중국 명나라 시기의 연해방어체계[19]

(조) 한국해상세력 형성과 변천 [20]
  1. 崔溥笔下的桃渚城
  2. 도저성
  3. 최부 거쳐 간 도저성을 다시 보니…,월간중앙, 2004.11
  4. ‘모세의 기적’ 이용한 척계광의 왜구 토벌, ScienceTimes, 2011.05.24
  5. 풍운대전
  6. 왜구 소탕한 명나라 명장 척계광의 전법, 동아일보, 2011.01.08
  7. [토크멘터리 전쟁史 115부 동북아에 몰아친 피의 기록-명나라의 왜구 소탕작전 2부]
  8. 척계광의 왜구섬명
  9. 척계광(戚繼光)의 6기(六技)와 십팔기(十八技), 한국무예신문, 2015.06.22
  10. 원앙진법 재현
  11. 도저성 관사
  12. 한성주보, 論學政 第一, 1886년 1월 25일
  13. 탐라시
  14. 고대 관직 및 설명
  15. 최부
  16. 최부교지
  17. 최부
  18. 전서, 예서, 행서, 해서, 초서
  19. [1]
  2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