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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남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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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남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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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성은 곧 모두성(旄頭星)이다.<br> 본래는 일곱 개의 점인데 몽고가 중원으로 들어와 황제가 되면서부터 그중에 한 점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서 여섯 개의 점이 되더니, 명나라 때에는 다시 나와서 묘성의 자리를 차지하였다.<br> 청나라 들어오게 되어서는 다시 미원성(微垣星)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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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중국인이 음역한 글자로, 은(銀)을 '몽고(蒙古)'라 하고, 호금(好金)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하며, 장사(壯士)를 '예락하(曳落河)'라고 하는 말이 이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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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몽고(蒙古)는 그 나라 말로 은(銀)을 의미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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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은 '태청(太淸)'의 의미를 취하니, 원(元)나라가 '건원(建元)'의 의미를 취하고 명(明)나라가 '대명(大明)'의 의미를 취한 것과 같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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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元史)》에서 '색목인(色目人)'이라고 칭하는 것은 대개 몽고 지역 밖의 오랑캐들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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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明史)》에서 "철현(鐵絃)은 본래 몽고의 색목인(色目人)이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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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전하는 말에 "청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와 혼인을 하고자 하니 마치 몽고와 고려의 고사와 같다.<br> 우리나라에서는 궁합이 불길하다고 하여 거절한다고 하니 대개 중국이 궁합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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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何基)가 죽자 그 제자 김이상(金履祥: 원나라의 학자)은 흰 두건에 머리끈을 묶었으니, 시마복을 입고 가는 모시로 만든 작은 띠를 묶는 것과 같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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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元史)》에는 금으로 사당의 신주를 주조한 것이 보이니, 바로 북위(北魏)에서 처음 임금이 즉위하면 금으로 동상을 만드는 의의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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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元史)》에서 "말을 잡아 제수로 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오랑캐의 풍습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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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元史)》에서 "몽고(蒙古)에서 대대로 기련곡(起輦谷)에 장사지냈는데, 봉분(封墳)을 만들지 않고 나무를 심지 않으며 능호도 없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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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통고(文獻通考)》(원나라 때 마단림이 편찬한 책 이름)에서 말하였다.<br> 한(漢)나라의 제도 중에 선비를 선발할 때에 간책(簡策)에 질문을 써두면 응시자들이 제비뽑기하여 답하는 것을 '사책(射策)'이라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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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자못 송, 원의 기습(氣習)을 변화시켜 스스로 일종의 체격(體格)을 이루었으나, 오직 사륙(四六)은 송나라보다 조금도 뛰어나지 못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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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식화법(食貨法)에서는 돈 열 꿰미를 '정(錠)'이라고 하고 열여섯 냥을 한 '근(斤)'이라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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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가 그 법을 따라서 교초(交鈔)를 만들었고 원나라도 중통원보초(中通元寶鈔)를 만들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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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원나라의 초(鈔)는 뽕나무 껍질로 만들고 글자와 문양을 인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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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여악은 예부터 있었는데 당송 시대부터 원나라까지가 가장 성하였으며 명나라 초기까지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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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세조(世祖)가 황성(皇城)을 짓는데 커다란 구멍에서 대가리가 붉은 벌레가 무려 만여 마리나 나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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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황극전(皇極殿) 문을 처음에는 '대원문(大元門)'이라고 하였는데 원나라가 들어오자 '대명문(大明門)'으로 바꾸었고, 명나라가 들어오자 '대청문(大淸門)'으로 바꾸었으며, 청나라가 들어오자 청나라는 그대로 둔 채 고치지 않고 몽고(蒙古)의 호칭을 그대로 따르니 몽고(蒙古)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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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이리의 태생이 돌궐이 되었고 푸른 사슴의 태생이 몽고가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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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석」에서 "흉노를 요순 이전에는 '산융', 또는 '훈육'이라고 하였다.<br> 하나라 때에는 '순유'라고 하였고 은나라 때에는 '귀방'이라고 하였고 주나라 때에는 '엄윤'이라고 하였다.<br> 진한 때에는 '흉노'라고 하였고 북위 때에는 '유연'∙'토곡혼'이라고 하였고 수당 때에는 '돌궐'이라고 하였고 오대와 북송 때에는 '거란'이라고 하였다.<br> 남송 때에는 '여진', '몽고'라고 하였고 명나라 때에는 '달단'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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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탈탈이 월준을 정벌한 후 활에 맞아 죽은 사람을 보니 어떤 사람은 꼬리의 길이가 세 치쯤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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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는 의당 진의 윤에 속해야 하고 육조 이후로 정통한 나라는 명일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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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치총서(格致叢書)』에서 "몽고에서는 성기[腎]를 복아(卜兒)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2021년 8월 15일 (일) 20:28 판

사회

문화와 사회상.

대동운부군옥

성호사설

송남잡지

"묘성은 곧 모두성(旄頭星)이다.
본래는 일곱 개의 점인데 몽고가 중원으로 들어와 황제가 되면서부터 그중에 한 점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서 여섯 개의 점이 되더니, 명나라 때에는 다시 나와서 묘성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청나라 들어오게 되어서는 다시 미원성(微垣星)으로 들어왔다" 예를 들면 중국인이 음역한 글자로, 은(銀)을 '몽고(蒙古)'라 하고, 호금(好金)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고 하며, 장사(壯士)를 '예락하(曳落河)'라고 하는 말이 이것이다.
또 몽고(蒙古)는 그 나라 말로 은(銀)을 의미한다.
청(淸)은 '태청(太淸)'의 의미를 취하니, 원(元)나라가 '건원(建元)'의 의미를 취하고 명(明)나라가 '대명(大明)'의 의미를 취한 것과 같다.
《원사(元史)》에서 '색목인(色目人)'이라고 칭하는 것은 대개 몽고 지역 밖의 오랑캐들이다.
《명사(明史)》에서 "철현(鐵絃)은 본래 몽고의 색목인(色目人)이다"라고 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청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와 혼인을 하고자 하니 마치 몽고와 고려의 고사와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궁합이 불길하다고 하여 거절한다고 하니 대개 중국이 궁합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하기(何基)가 죽자 그 제자 김이상(金履祥: 원나라의 학자)은 흰 두건에 머리끈을 묶었으니, 시마복을 입고 가는 모시로 만든 작은 띠를 묶는 것과 같다.
《원사(元史)》에는 금으로 사당의 신주를 주조한 것이 보이니, 바로 북위(北魏)에서 처음 임금이 즉위하면 금으로 동상을 만드는 의의이다.
《원사(元史)》에서 "말을 잡아 제수로 쓴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오랑캐의 풍습이다.
《원사(元史)》에서 "몽고(蒙古)에서 대대로 기련곡(起輦谷)에 장사지냈는데, 봉분(封墳)을 만들지 않고 나무를 심지 않으며 능호도 없다"라고 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원나라 때 마단림이 편찬한 책 이름)에서 말하였다.
한(漢)나라의 제도 중에 선비를 선발할 때에 간책(簡策)에 질문을 써두면 응시자들이 제비뽑기하여 답하는 것을 '사책(射策)'이라고 한다.
명나라는 자못 송, 원의 기습(氣習)을 변화시켜 스스로 일종의 체격(體格)을 이루었으나, 오직 사륙(四六)은 송나라보다 조금도 뛰어나지 못하다.
원나라 식화법(食貨法)에서는 돈 열 꿰미를 '정(錠)'이라고 하고 열여섯 냥을 한 '근(斤)'이라고 한다.
금나라가 그 법을 따라서 교초(交鈔)를 만들었고 원나라도 중통원보초(中通元寶鈔)를 만들었다.
금나라, 원나라의 초(鈔)는 뽕나무 껍질로 만들고 글자와 문양을 인쇄하였다.
대개 여악은 예부터 있었는데 당송 시대부터 원나라까지가 가장 성하였으며 명나라 초기까지 있었다.
원나라의 세조(世祖)가 황성(皇城)을 짓는데 커다란 구멍에서 대가리가 붉은 벌레가 무려 만여 마리나 나왔다.
또 황극전(皇極殿) 문을 처음에는 '대원문(大元門)'이라고 하였는데 원나라가 들어오자 '대명문(大明門)'으로 바꾸었고, 명나라가 들어오자 '대청문(大淸門)'으로 바꾸었으며, 청나라가 들어오자 청나라는 그대로 둔 채 고치지 않고 몽고(蒙古)의 호칭을 그대로 따르니 몽고(蒙古)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흰 이리의 태생이 돌궐이 되었고 푸른 사슴의 태생이 몽고가 되었다.
「의석」에서 "흉노를 요순 이전에는 '산융', 또는 '훈육'이라고 하였다.
하나라 때에는 '순유'라고 하였고 은나라 때에는 '귀방'이라고 하였고 주나라 때에는 '엄윤'이라고 하였다.
진한 때에는 '흉노'라고 하였고 북위 때에는 '유연'∙'토곡혼'이라고 하였고 수당 때에는 '돌궐'이라고 하였고 오대와 북송 때에는 '거란'이라고 하였다.
남송 때에는 '여진', '몽고'라고 하였고 명나라 때에는 '달단'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원나라의 탈탈이 월준을 정벌한 후 활에 맞아 죽은 사람을 보니 어떤 사람은 꼬리의 길이가 세 치쯤 되었다.
원나라는 의당 진의 윤에 속해야 하고 육조 이후로 정통한 나라는 명일 것이다.
『격치총서(格致叢書)』에서 "몽고에서는 성기[腎]를 복아(卜兒)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