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pattern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인문기술자== * 디지털 인문학 * 컴퓨터 언어 코딩 교육 * 강화도교회.lst * 성경.lst * 조선왕조중농주의.lst * 떡살문양.lst * 서...)
 
(문서를 비움)
 
1번째 줄: 1번째 줄:
==인문기술자==
 
* 디지털 인문학
 
* 컴퓨터 언어 코딩 교육
 
* [[강화도교회.lst]]
 
* [[성경.lst]]
 
* [[조선왕조중농주의.lst]]
 
* [[떡살문양.lst]]
 
* [[서예]]
 
* Scholars of <b>[http://www.ganghwa.go.kr/ Ganghwa Island]</b>
 
* 토착화의 상징 성공회 강화읍성당 [[http://www.redian.org/archive/118894]]
 
* 이 시대, 우리의 교회건축을 생각한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26]]
 
* [교회건축을 말한다] (25)제5화 한국 교회건축의 반성과 대안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436638&path=201212]]
 
* 한국 교회건축의 상징적 의미와 특성에 관한 연구 [[http://www.auric.or.kr/User/Rdoc/DocRdoc.aspx?returnVal=RD_T&dn=3710#.XKX9bpgzaUk]]
 
* 개신교 교회건축의 변천과정과 한국개신교 교회건축의 특징 [[http://www.auric.or.kr/User/Rdoc/DocRdoc.aspx?returnVal=RD_R&dn=98498#.XKYyTJgzaUk]]
 
* 한국 현대 교회 건축물 순례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511100044]]
 
* 교회건축의 새 개념들과 실천적 유형 [[http://www.churchr.or.kr/news/articleView.html?idxno=5441]]
 
  
==데이터 아트==
 
 
==유열의 음악앨범==
 
*[[유열의 음악앨범]]
 
*[[유열의음악앨범.lst]]
 
*[[잭과콩나무.lst]]
 
 
==이만규와 한국근대교육자료 디지털 큐레이셔닝==
 
*[[이만규와 한국근대교육자료 디지털 큐레이셔닝]]
 
*[[이만규와 한국근대교육자료 디지털 큐레이셔닝.lst]]
 
 
==강화감리교==
 
*[[강화감리교]]
 
*[[강화감리교.lst]]
 
 
==강화중앙교회==
 
 
*[[강화중앙교회]]
 
*[[강화중앙교회.lst]]
 
 
==강화잠두교회 항일운동지==
 
*[[강화잠두교회 항일운동지]]
 
*[[강화잠두교회항일운동지.lst]]
 
 
==관련 항목==
 
{|class="wikitable"
 
!이 문서 || 관계 || 관련 문서
 
|-
 
|담양 소쇄원 || 부속 건조물 || [[소쇄원_제월당|제월당(霽月堂)]], [[소쇄원_광풍각|광풍각(光風閣)]], [[소쇄원_오곡문|오곡문(五曲門)]],
 
[[소쇄원_애양단|애양단(愛陽壇)]], [[소쇄원_대봉대|대봉대(待鳳臺)]]
 
|-
 
|담양 소쇄원 || 관련 인물 || [[양산보|양산보(梁山甫)]], [[양자징|양자징(梁子澄)]], [[김인후|김인후(金麟厚)]], [[송순|송순(宋純)]]
 
|-
 
|담양 소쇄원 || 관련 공간 || [[식영정|식영정(息影亭)]], [[필암서원|필암서원(筆巖書院)]]
 
|}
 
 
==표해록==
 
*[[최부의 인맥]]
 
*[[최부의 인맥.lst]]
 
*[[최부표해록.lst]]
 
 
==2019 데이터베이스 편찬 실습==
 
 
===Query===
 
{{SemanticQuery | db=s_jack | project=jChoi | key=지도}}
 
 
===1 Hop Network===
 
{{SemanticNetwork | db=s_jack | project=jchoi | key=PS0100100100500400700000}}
 
 
===클래스 설계===
 
정치: 왜적, 요동
 
외교: 조공, 황화집, 표류인, 해양사
 
지리: 조선, 중국의 여정
 
문화: 조선, 중국 각각 관제, 과거시험, 학교제도, 복식, 음식, 명절 등
 
역사: 조선, 중국의 역사, 임정청사(상하이, 항주)
 
한문학: 조선, 중국의 문학가
 
번역: 한문, 고증
 
경영: 인사
 
경제: 자본주의
 
철학: 유교, 불교, 도교
 
과학: 기후, 천문, 수차
 
건축: 교량, 성
 
인물:
 
해로(海路)·기후·산천·도로·관부(官府)·고적·풍속·민요
 
 
중국의 민속 등을 보고 조선의 것에 비교
 
 
==록 권1==
 
喪人臣崔薄,自濟州漂流, 泊甌東, 過越南, 經燕北,以今六月十四日到靑 坡驛,敬奉.
 
傳旨, 一行日錄撰集以進.
 
 
상인(喪人)인 신(臣) [https://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468100025 최부(崔薄)]<ref>[https://en.wikipedia.org/wiki/Choe_Bu#Pre-modern_publications Choe Bu]</ref><ref>[https://wikivisually.com/wiki/Choe_Bu]</ref>는 제주(濟州)로부터 [http://jeju.grandculture.net/Contents/Contents?dataType=01&contents_id=GC00702484&isTreeSpread=Y 표류]해서 구동(甌東)에 배를 대고, 월남(越南)을 지나 연북(燕北)을 거쳐, 올 6월 14일에 [http://www.museum.seoul.kr/archive/archiveList.do?type=A&type2=area&arcvGroupNo=3329&lowerArcvGroupNo=3355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여 삼가 전지(傳旨)를 받들어 이번 길의 일지를 편집하여 바치나이다.
 
 
I. Ch'oe Pu, while in mourning, went adrift from Cheju,1 landed east of Ou, and passed from south of Yüeh to north of Yen.2 On the 14th Day of this Sixth Month [July 22, 1488] I reached Ch’ðngp’a Station” and respectfully received a Royal edict for a diary of the journey. I have compiled it and now submit it.
 
 
1. 喪人=喪制라고도 한다. 부친상을 당한 최부가 喪中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 自稱이다.
 
2. 는 秦漢시대 浙江 남부에 있었던 東國을 말한다. 甌東이란 東盛의 동쪽 지역 즉 절강 동남부 연해 지역을 가리킨다.
 
3. 越은 春秋戰國時代에 江蘇일대에 있었던 越國을 가리킨다. 越南은 월국의 남쪽 지역 즉 오늘날 강소 남부 일대에 해당한다.
 
4. 燕은 戰國時代 北京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燕國을 가리킨다. 燕北은 연국의 북쪽 지역 즉 河北 북부 지역에 해당한다.
 
5. 이 해는 성종19년으로서, 明 弘治 원년이고, 서기 1488년이다.
 
6. 朝鮮 漢陽의 崇禮門 밖 약 3리의 거리에 있었는데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지역에 해당한다. 한양을 出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첫 번째 驛으로서 兵曹의 직할이었다. 驛에는 3등馬 50필이 배정되어 傳命을 받으면 즉시 달릴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한편 조선의 驛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의 왕래와 숙박, 官物의 수송 등을 돕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세조3년(1457) 驛丞을 察訪이라 개칭하고 전국에 538개의 역을 두고, 이를 4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찰방을 두었다.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察訪驛이라 불렀다. 역은 대체로 30리에 하나씩 두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형 등의 형편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성화(成化)23년 정미년 가을 9월 17일===
 
成化二十三年丁未秋九月十七日, 臣以濟州三邑推刷敬差官陛辭而 行至全羅道, 率監司依事目所差光州牧吏程保、和順縣吏金重及承仕郎李楨、羅州隨陪吏孫孝子、靑岩驛吏崔 (臣)(巨]伊山、戶奴萬山等六人及司僕寺安骥崔根等, 歸海南南縣候風, 十一月十一日朝, 與濟州新牧使許熙, 同乘舟于鏡頭梁, 十二日夕到泊濟州朝天館.
 
 
신(臣)은 [https://trv.kr/15525 제주3읍]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949 추쇄 경차관(濟州三邑推刷敬差官)]으로서 대궐에서 하직하고 떠나 전라도에 이르러서, 감사(監司)가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뽑아 보낸 [http://gjsgcc.or.kr/ko/22/view?SEQ=5&page=1 광주목(光州牧)]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4401 아전] 정보(程保)<ref>[광주목 출신의 아전으로 전라감사가 뽑아 최부를 보좌하게 했다. 해외문견록: 제주목사 송정규, 바다 건너 경이로운 이야기를 기록하다]</ref>, 화순현(和順縣)의 아전 김중(金重)과 승사랑(承仕郞)17, 이정(李植), 나주(羅州)의 수배리(隨陪吏) 손효자(孫孝子), 청암역리(靑巖驛吏) 최거이산(崔巨伊山), 호노(戶奴) 만산(萬山) 등 6인과 사복시(司僕寺)의 안기(安驥)인 최근(崔根) 등을 거느리고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5%B4%EB%82%A8%ED%98%84(%E6%B5%B7%E5%8D%97%E7%B8%A3) 해남현(海南縣)]으로 가서 순풍을 기다렸습니다. 11월 11일 아침에 제주의 신임 목사(牧使)인 [https://www.jeju.go.kr/culture/history/person.htm;jsessionid=vVY1EaTg6Isoajq1fqAF0dKf1W1xmPnFWkkY2HVne1iv9kbTypkHgR3DTaQSlJ4D.was2_servlet_engine7?nameCodeP=&_layout=playout&_view=print&pageSize=10&page=15&act=view&seq=536 허희(許熙)]와 함께 [http://www.hnsori.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03 관두량(館頭梁)]에서 배를 탔습니다. 12일 저녁에 [http://www.labortoday.org/%EC%A0%9C%EC%A3%BC%EC%9D%98-%EA%B4%80%EB%AC%B8-%EC%A0%9C%EC%A3%BC%EC%9D%98-%EA%B4%91%EC%9E%A5-%EC%97%B0%EB%B6%81%EC%A0%95%EA%B3%BC-%EA%B4%80%EB%8D%95%EC%A0%95/ 제주의 조천관(朝天館)]<ref>[https://kenarie.tistory.com/39 제주 조천읍 마을과 연북정]</ref><ref>[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17030 조천읍, 500여년 전 인연의 만남 '화제', 제민일보, 2013.09.05]</ref>에 도착하여 유숙하였습니다.
 
 
On the 17th Day, Ninth Month, Ch’êng-hua 23 [October 3, 1487], as a Commissioner of Registers for the three towns of Cheju,4 I took leave of the Court. I went to Cholla Province and gathered six men-Chòng Po,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Kwangju; Kim Chung, an official of Hwasun District, who had been sent by the Governor on orders; Appointee Yi Chong; Son Ilyo ja, a secondary official from Naju; Ch’oe Kõisan,*5 an official of Ch’ongam Station; and Mansan, a family slave – as well as Grooms An Ki and Ch'oe Kun. We returned to Haenam District and waited for the wind. On the morning of the 11th Day, Eleventh Month, we shared a ship with Hỏ Hủi, the new Prefect of Cheju, and went to Kwanduryang. On the evening of the 12th Day we reached Choch’on-gwan, Cheju, and landed.
 
 
 
7. 성종18년으로, 서기 1487년이다.
 
8. __는 조선시대 지방행정구획의 하나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__어는 행정구획의 단위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道가 州를 대신하는 행정단위가 되면서 州는 행정구획단위에서 지역명칭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9. 제주도의 濟州牧, 佐義縣, 大靜縣을 가리킨다. 한라산 북쪽이 제주목, 남쪽은 다시 동서로 나누어 동쪽이 정의현, 서쪽이 대정현이다. 《東國輿地勝覽》권38, 濟州牧, 佐義縣, 大靜縣.
 
10. 原籍地에서 이탈한 자를 찾아내어 송환하는 일을 말한다.
 
11. 조선시대 各道의 지방행정을 감찰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하는 臨時官으로 문관 가운데 堂下官이 임명되었다. 임무는 倭意 대책 등 군사적인 것에서부터 田穀의 손실 조사 등 경제적 임무, 救荒 등 災民의 구휼적 임무, 獄事·推刷·推과 같은 사법적 임무 등으로 크게 늘어 갔다.
 
12 - 조선시대 各道의 장관인 觀察使의 다른 명칭이다. 外官職 문관의 종2품 벼슬로 13道에 각기 1명씩 두었는데, 兵馬節度使·水軍節度使의 武官職을 대체로 겸하고 있었 다. 중요한 정사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을 따라 시행하였지만, 관할 道의 民政, 軍政, 財政, 刑政 등을 통할하여 지방행정상 큰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관하의 守令을 지휘하고 감독하였다.
 
13. 公事의 처리에 관한 규칙.
 
14. 牧은 조선시대의 道 즉 觀察使 소관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이다. 留守府의 다음 가는 등급으로 大都護府와 더불어 州府郡縣의 명칭등급에서 3등급에 속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기도에 3명, 충청도에 4명, 경상도에 3명, 전라도에 4명, 황해도에 2명, 강원도에 1명, 함경도에 1명, 평안도에 2명 등 모두 20명의 牧使를 두었다.
 
15.《朝鮮成宗實錄》19년 6월 丁巳. 성종은 표류했다가 돌아 온 정보 등 42인에게 음식을 내리고, 허상리 등 18인에게 綿布와 正布 각 2필씩을 상으로 내렸다는 기사가 있다.
 
16. 縣은 조선시대 지방행정 단위의 하나이다. 고려의 제도를 참작하여 大縣에는 縣令, 小縣에는 縣監을 두었는데, 현의 총수는 164개였다. 縣의 제도는 고종32년(1895) 官制改革 때 폐지되었다.
 
17.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종8품의 東班官階이다. 관직으로는 氷庫, 義賢庫의 別檢과 內需司의 典穀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寺, 院, 監, 署, 司, 庫에 배치된 奉事가 차지하였다.
 
18. 수행하며 시중을 드는 아전.
 
19. 驛吏는 驛站에 딸린 吏屬으로 王命의 전달, 稅와 貢物 등 官物의 수송, 사신 왕래와 使行에 따른 迎送 및 支供 등의 役을 세습적으로 부담하였다. 역리는 일반 향리보다 낮은 신분이었다.
 
20.조선시대의 관청으로 궁중의 乘輿, 馬匹, 牧場 등을 관장하였다. 태종5년(1405)에 兵曹의 屬衙門이 되었고, 成宗 때《經國大典》에 정3품 아문의 관청으로 편제되었다. 관원은 正(정3품), 副正(종3품), 僉正(종4품), 判官(종5품) 각 1명, 主簿(종6품) 2명, 잡직으로 馬醫 10명, 安驥, 調驥, 理驥, 保驥 각 1명, 牽馬 10명 등을 두었다.
 
21. 司僕寺의 雜職 최고인인 종6품의 관직명으로, 말의 조련이나 치료와 보양 등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
 
22. 조선시대의 지방관직으로 觀察使 밑에서 牧을 맡아 다스린 정3품의 外職 [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3-CKD-1240001&dataID=00011543@AKS-2013-CKD-1240001_DIC 문관]이다. 牧은 큰 道 내지 중요한 곳에 두었는데, 왕실과 연관된 지방은 작더라도 牧으로 승격시킨 경우도 있다. 23. 許熙는 昆陽 출신으로 世祖13년(1467)에는 都摠使 李浚 밑에서 軍官으로 있었다. 成宗3년(1472)에는 右道水軍僉節制使로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잘 검찰하지 못한 과오로 慶尙道敬差官 金春卿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0년(1479)에 通政大夫行定州牧使에 제수되었고, 11년(1480)에는 團鍊使가 되어 중국 사신의 송환을 맡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平安道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또한 돌아오는 길에는 遼東官人의 말을 듣지 않아, 오랑캐에게 변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이 일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 18년(1487)에 通政大夫濟州牧使가 되었으며, 19년에는 奔喪하는 崔溥에게 튼튼한 배를 구해주어 살아 돌아올 수 있게 한 공이 인정되어 성종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22년(1491)에는 北征軍에 右將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허희가 최부에게 튼튼한 배를 구해 준 공로는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7006_001 《朝鮮成宗實錄》 19년 7월 丁卯條]를 참조.
 
24. 제주를 왕래하는 배는 전라남도 海南縣에서 남쪽 41리에 있는 관두산 기슭에 정박하는데, 관두량은 그 포구를 가리킨다. 관두량은 ‘관머릿도’의 漢字 차용 표기이다.
 
25. 제주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 포구로서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가는 배는 이곳에서 순풍을 기다렸고, 전라도를 경유하여 제주도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모두 이곳과 涯月浦에 배를 대었다. 《東國輿地勝覽》권38, 濟州牧.
 
26. 제주 서쪽 18리 거리의 都近川 西岸에 있는 사찰이다. 한편 李齊賢의 解歌詩에 “도근천에 물 막은 둑이 무너지면 수정사 안도 바다가 되리라 하는 구절이 있다. 《東國輿地勝覽》권38, 濟州牧.
 
 
===[[홍치(弘治)원년(1488) 무신년 정월 30일]]===
 
*[[홍치(弘治)원년(1488) 무신년 정월 30일.lst]]
 
 
===윤 정월 1일===
 
間正月初一日, 雨.
 
收使最夕來, 乃以水精寺僧智慈之船, 固族行, 官船所不及, 命兵房鎮撫高益堅、吳純等, 回泊于則刀浦, 以為臣渡海之備,判官驗證遣軍官邊石山以出.
 
 
비가 내렸습니다.
 
 
목사(牧使)가 아침저녁으로 와서 조문(弔問)하였습니다. [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6064 수정사(水精寺)] 승려 지자(智慈)의 [https://news.joins.com/article/4551180 배]가 튼튼하고 빨라 관선(官船)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며, 병방(兵房)[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4679 진무(鎭撫)] 고익견(高益堅)과 오순(吳純) 등에게 [http://jejumaeul.or.kr/default/village/view.php?no=108&gubun=&search_city=%EC%A0%9C%EC%A3%BC%EC%8B%9C&search_town=&search_village=&p=6&sort=no&recnum=20 별도포 (別刀浦)]로 돌려 대도록 명하여, 신이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여 주었습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638 판관(判官)] 정전(鄭益)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6584 군관(軍官)] 변석산(邊石山)을 보내어 조문하였습니다.
 
 
Ist Day, Intercalary First Month. Rain.
 
The Prefect came twice, morning and evening, to express his sympathy. A boat of Chija, a priest of Sujong Temple, being strong, fast and unmatched by the official boats, [the Prefect] ordered military policemen Ko Ik-kyón, O Sun and others to take it round to Pyolto-p'o, moor it, and make it available for my crossing. Judge Chòng Chon sent Pyön Sok-san, an officer, to offer condolences.
 
 
<ref>[http://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184571 “왜인 배보다 튼튼하고 빠르니 그걸 참고하라”]</ref>
 
 
 
27. 兵房은 조선시대 漢城府나 지방 관아에서 兵曹의 일을 맡아보던 부서 또는 병조의 일을 맡은 향리로 六房의 하나이다. 지방의 군사훈련, 경찰업무, 군역 부과, 성곽·도로·봉수의 관리 등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다. 兵房은 戶房이나 吏房 중심체제의 三公兄 즉 이방·호방·형방에 비하여 실권이 적었으나, 군역과 경찰업무는 지방민의 생활에 직결되어 있었고 위세가 자못 컸다. 한편 鎭撫는 조선 초기의 무관직으로 義興親軍衛, 三軍鎭撫所, 五衛鎭撫所, 義禁府 등에 소속되어 있었다.
 
 
*인물
 
*선박
 
*관직
 
*지명
 
 
[[윤 정월 1일.lst]]
 
 
===2일===
 
初二日,陰,侵晨, 臣别刀浦候風韻,擁義縣訓導崔角、鄉校生徒金鼎  蹲等二十餘罪、內需詞典會重醉及崔根等,皆徒步以隨,至十五里許. 少選, 乾使咖至問關. 是日, 臣之帶去吏程保、金重等所造採 御乘監收 場辦公·私装,刷流移人,括溫占伴們,冒認良民等文籍,及資去全州府上 濟州三邑帳籍十七冊又一冊,濟州三色官上各年帳 戶籍 軍籍等文書, 輸付于牧使,藏之營廳,受書目回送而來.
 
 
흐렸습니다.
 
 
해뜰 무렵에 신은 별도포의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2790 후풍관(候風館)]으로 나아갔습니다.
 
정의현(佐義縣)[http://people.aks.ac.kr/front/tabCon/pos/posView.aks?posId=POS_6JOS_3KJ_000902 훈도(訓導)] 최각(崔角),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2880 향교(鄕校)]생도(生徒) 김정린(金鼎隣) 등 20여 명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2497 내수사(內需司)][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9776 전회(典會)]34 박중알(朴重幹) 및 최근 등은 모두 걸어 서 15리 남짓 따라왔습니다.
 
 
조금 후에는 목사가 말을 달려와 위문하였습니다. 이 날 신이 데리고 간 아전 정보와 김중 등이 어승(御乘)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0%90%EB%A7%88%EB%B3%84%EA%B0%90(%E9%BB%9E%E9%A6%AC%E5%88%A5%E7%9B%A3) 점마별감(點馬別監)]35 목장(牧場)의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변별하고, 유이인(流移人)을 추쇄(推刷)하고, 멋대로 반당(伴尙)으로 삼거나 양민(良民)으로 잘못 인준한 자 등을 적발한 것 등의 문적(文籍) 및 가져갔던 전주부(全州府)에서 올린 제주(濟州) 3읍 장적(帳籍) 17책과 또 다른 1책, 제주 3읍의 담당관이 올린 매년의 장적·호적(戶籍)·군적(軍籍) 등의 문서(文書)를 봉하여 목사에게 넘겨주어 영청(營廳)에 보관하도록 하고, 그 문서목록을 받아서 돌아왔습니다.
 
 
2nd Day. Cloudy.
 
 
Early in the morning I went to the Hup’ung-gwan in Pyolto-p’o. Ch’oe Kak, the Superintendent of Education of Sõnŭi District; over twenty students, including Kim Chong-nin, of the regional school;6 Pak Chung-han, a Secretary of the Office of Supplies; and Ch’oe Kun and others walked with me. When we had gone about fifteen li Hỏ, the new Prefect, came hurrying up and offered his condolences. This day the officials who had accompanied me, Chòng Po, Kim Chung, and others sealed records that they had kept of private venality, of exiles, containment of outbreaks, suppression of secret societies, and people falsely pretending loyalty; seventeen volumes plus one volume of dossiers we had brought from Chònju Prefecture to the three towns of Cheju; and various ledgers, house registers, and military registers presented by the officials of the three towns of Cheju; and turned them over to the office in charge of the Prefect's treasury. They received a list of the documents and brought it back.
 
 
28. 제주목 동쪽 8리 거리의 別刀川 어귀에 있는 浦口이다.
 
29.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에 둔 종5품 관직이다. 조선 초기에는 각 道와 大都護府에 판관을 두었으나 후에 폐지하고, 경기도에는 水運判官, 충청도와 전라도에는 海運判官을 두었다. 후기에는 경기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각 도 및 水原·江華·廣州·春川 등의 留守營과 濟州·鏡城·淸州 등 특정지역에 판관을 두었다. 30 조선시대 군사적 職任을 수행하던 武官의 일반 명칭이다. 각 군영에 속하는 勸武官, 제軍官, 知設官, 旗牌官, 別武士, 敎鍊官, 別騎衛 등과 지방관아에서 軍務에 종사하는 屬役 등이 포함된다.
 
31. 항해에 앞서 날씨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리는 곳으로 朝天館이라고도 한다.
 
32. 訓導는 조선시대 정품 관직이다. 戶曹의 算學, 刑曹의 律學, 觀象監의 天文學·地理學·命課學, 司譯院의 漢學·淸學·蒙學·倭學, 惠民署의 醫學訓導가 있었다. 또한 지방에는 종9품의 譯學訓導가 있었다. 33-鄕校는 조선시대 시골에 있는 文廟와 거기에 부속된 옛날의 학교를 가리킨다. 일명 校宮, 齋宮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원년(1392) 諸道의 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興廢로써 지방관 考課의 法으로 삼고 敎學의 쇄신을 꾀하였다. 이에 부·목·군·현에 각각 1校씩 설립을 보게 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生徒는 成均館·四學·鄕校·雜學의 학생을 범칭하는 용어이다. 다만 成均館과 四學의 일반 학생은 흔히 儒生이라 불렀다.
 
34. 內需司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미곡·포목·잡화 및 노비 등에 관한 일과 고려 때부터 내려온 왕실의 재산, 광대한 왕실 사유토지 등의 관리를 맡은 정5품 아문이다. 원래 本宮이라 하던 것을 세종 때 內需所로, 세조12년(1466)에 內需司로 고쳤다.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는 곳이므로 典需, 典貨의 관직은 모두 왕실과 밀접한 관직인 內官이 이를 겸하도록 하였다. 한편 典會는 內需司의 會計를 맡은 종7품 遞兒職으로 정원은 1인이다. 체아직은 조선시대 특별한 경우에 녹봉을 주기 위하여 만든 관직인데, 典會는 양반이 아니면서 東班 관직을 받지만, 체아직을 받아 正職과는 구별되었고 朝會 때는 西班에 자리 잡았다.
 
35. 각도의 牧場에서 기르는 말을 點考하는 일을 맡아보던 司僕寺의 관원.
 
36. 官府에 종사하던 賤人, 죄를 지어 종이 된 자 또는 관청 소속의 기생, 內人, 官奴婢, 驛卒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은 관노비였다. 15-60세까지 奴役에 종사해야 하는 이들 공천은 獨立戶를 이루고 살았다. 후사가 없이 죽으면 田宅은 소속 官衙에 반환해야 했다.
 
37.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 私·私奴라고도 하며, 官奴婢·公奴婢에 대응하는 말이다.
 
38. 原籍地를 떠나 타향으로 이주하거나 외지로 유랑하는 자.
 
39. 조선시대의 驅卒 즉 從卒로서, 王子와 功臣 및 堂上官 등을 우대하기 위하여 개인별로 주는 병졸을 말한다. 兵曹에서 상신하여 선발하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인은 뽑지 않았다.
 
40. 縣監이란 조선시대 지방행정관서인 縣에 둔 우두머리를 말한다. 縣監은 縣令(종5품)이 관할하는 현보다 작은 고을의 원님이었다. 당시 지방의 말단기관장인 驛의 察訪 (종6품)과 동격인,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다.
 
 
[[1월 2일.lst]]
 
 
===3일===
 
初三日,漂流海中,是日,午陰乍雨,東風微頁,海色深青,大靜具系監鄭圖瑞、訓導虛警, 聞臣遇喪, 來吊間,與崔角、朴重幹、倭學訓導金體郁、軍官崔仲眾、鎮撫金仲理等十余人、學長金存麗、金“得體、校生二十餘非,俱送別于浦口,存麗、得體等止臣行, 曰: “老僕生長海國,請經水路,漢拏山陰雨不調, 必有風變, 不可乘船. 且 家禮》 ‘始聞親__密行’註云:“日行百里, 不夜行, 雖哀戚猶避害也.’ 夜行尚不可, 況過此大海, 其可不慎乎?” 座中或動或止, 日高不決. 鎮撫安義來告日: “東風正好,可以去矣!”  重醇、仲__等亦勸行. 臣遂告別登船, 掉過五里, 軍人權山、許荷理等皆
 
 
日:“今日,風勢若作若,雪寵若卷若舒,當如此風候不順之日,行如此波譯險惡之海,恐有後悔,請還于别刀浦,待風復行,未為晚也,女義曰:“天之氣候,非人預料,頃刻之間,安知有披雲觀天之理乎!抑過此海者,私覆 沒,接踵相繼,唯奉王命朝臣前擁義縣監李暹外,鮮有漂流敗沒者,則都 是上德至重,无所知也,況謀之聚口,事未有濟,豈可登程而復路,以 致稽緩乎?”合張帆而行,經過大火脱島,府中人皆以謂向(巨}[E]要 梁,截海而上,順風泊概子島,甚駛也,桂山不聽其言,執其能從風所指,過 愁德島而西,海氣晦冥,風雨作,將近桃子品藏船處,沙勢甚急,天又昏 黑,督合格軍體之,軍人皆曰:“若此日發工,誰之過敗?”皆懷逆心,不聽從 以力船,退流至草菌岛,依西岸下可而泊,夜三更,尚理曰:“此島雖碍東風, 三面通,不合泊船,今又有北風之漸,進退無據,將乃何?且此船不在初 泊處, 漸却入海中,所泊之,伯或已破,今計莫若學们稍前,製之于岸,待 天明掉入狱子可也,遂舉,果破矣,梓之未及近岸,為北風所逆,驅出無 依之處,雨猶不止,風浪交惡,隨濤上下,莫知所適,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다 비 오다 하며 동풍이 조금 불고, 바다 물빛은 짙은 청색이었습니다.
 
 
[https://redmarine754.wordpress.com/daejeonghyeon/ 대정현(大靜縣)]감(監) 정사서(鄭嗣瑞)와 훈도(訓導) 노경(盧警)은 신이 친상 당한 것을 듣고 달려와 조문하고, 최각(崔角)·박중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9207 왜학훈도(倭學訓導)] 김계욱(金繼郁), 군관(軍官) 최중중(崔仲衆), 진무(鎭撫) 김중리(金仲理) 등 10여 인과 학장(學長) 김존려(金存麗)·김득례(金得禮) 및 향교생도 20여 명과 함께 포구에서 송별해 주었습니다.
 
 
존려와 득례 등은 신이 떠나는 것을 말리면서 말하기를, “저희 늙은이들은 섬에서 자라 바닷길을 잘 압니다.
 
 
한라산에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반드시 바람의 변화가 생기니 배를 타서는 안 됩니다.
 
 
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109 《가례(家禮)》]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5]의, 친상(親喪)을 듣자마자 길을 떠나라4는 조목의 주(註)에도, '하루에 100리를 가되 밤길은 가지 말아야 하니 비록 슬프더라도 몸을 해치는 일은 피해야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밤길을 가는 것도 안 되는데, 하물며 바다 건너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좌중에 권하는 이도 있고 말리는 이도 있어, 해가 높이 솟아오를 때까지 결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진무(鎭撫) 안의(安義)가 와서 알리기를, “동풍이 마침 알맞으니 떠날 만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중알과 최중중 등도 또한 떠나기를 권하였습니다.
 
 
신은 마침내 작별을 고하고 배에 올라 노를 저어 5리쯤 가니, 군인(軍人) 권산(權山)과 허상리(許尙理) 등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은 바람이 불다가 잦아들기도 하고, 먹구름이 꼈다가 개기도 하니 이처럼 바람이 고르지 못한 날에 이처럼 파도가 사나운 바다를 건넌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 듯합니다. 청컨대 별도포로 돌아가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다시 떠나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안의는 “하늘의 날씨는 사람이 미리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에 구름이 걷히고 하늘을 볼 수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바다를 건넌 사람으로서 민간의 배가 뒤집혀 침몰되는 일은 잇달아 일어났지만, 왕명을 받든 조신(朝臣)으로서는 오직 전 정의현감(産義縣監) [http://www.culturecontent.com/dictionary/dictionaryView.do?cp_code=cp0602&dic_seq=264 이섬(李__)]45 외에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된 적이 드물었던 것은, 모두 임금의 덕이 지극히 높음을 실제로 하늘이 알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다 보면 일이 끝이 없는 법입니다. 어찌 길을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감으로써 시일을 천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돛을 펼치고 가도록 소리쳐 명했습니다.
 
 
겨우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DdvV&articleno=11803420&categoryId=659545&regdt=20151010150545 대화탈도(大火脫島)]를 지났는데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배가 거요량(巨要梁)을 향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올라가서 바람을 따라 [https://www.yna.co.kr/view/AKR20160620038200056 추자도(秋子島)][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327471#cb]에 정박하면 매우 빠르게 갈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으나, 권산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키를 잡고 바람 부는 대로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8827 수덕도(秘德島)]49를 지나서 서쪽으로 갔습니다.
 
 
바다가 어두컴컴해지면서 바람은 약해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7889 추자도]의 배 정박할 곳에 가까이 갈 즈음에 물살이 아주 급해지고 하늘도 캄캄하여졌으므로, [http://dic.seamuse.go.kr/bbs/board.php?bo_table=bbs8_01&wr_id=908&page=11&mkind=2&mes=&mesc=&mesv=&order_col= 곁군[格軍]]을 독려하여 노를 젓도록 하였습니다.
 
 
군인들이 모두, “이 같은 날씨에 배를 출발시킨 것은 누구 잘못입니까?”라고 말하고는, 모두가 거역하는 마음을 품고 힘껏 노를 저으라는 말을 따르지 않아, 뒤로 흘러 내려 [http://www.ikorea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793#074z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서쪽 해안에 의지해서 닻을 내리고 정박하였습니다.
 
 
밤 3경(更)이 되자 허상리가 말하기를, “이 섬은 비록 동풍을 막고 있지만 3면이 트여 있어 배를 정박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합니다. 지금 또 북풍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는 데 기댈 곳이 없게 될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한 이 배는 처음 정박한 곳에 있지 않고 도리어 점점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으니 내린 닻줄이 이미 끊어졌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닻을 올려 조금 앞으로 나아가 해안에 매어 두었다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노를 저어 [http://boomup.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31/2017073100793.html 추자도]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닻을 올려보니 과연 끊어져 있었습니다. 노를 저었으나 미처 해안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북풍을 맞아 기댈 데가 없는 곳으로 몰려나오게 되었습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를 않고 풍랑이 사나워 파도를 따라 오르내리니, 향하는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인명: 정사서(鄭嗣瑞), 노경(盧警), 최각(崔角)·박중알, 김계욱(金繼郁), 최중중(崔仲衆), 김중리(金仲理), 김존려(金存麗), 김득례(金得禮), 권산(權山)과 허상리(許尙理), 안의, 이섬
 
심리(군인들): 이 같은 날씨에 배를 출발시킨 것은 누구 잘못입니까? 거역
 
심리(최부): 독려
 
 
제도(관직): 대정현(大靜縣監), 훈도(訓導), 왜학훈도(倭學訓導), 군관(軍官), 진무(鎭撫), 학장(學長), 군인(軍人), 향교생, 정의현감(産義縣監), 곁군[格軍]
 
사건: 표류, 신이 떠나는 것을 말리면서, 닻을 올려보니 과연 끊어져 있었습니다.
 
의전: 포구에서 송별
 
기물: 돛, 닻, 닻줄, 노
 
 
기후: 흐리다 비 오다, 바람이 불다가 잦아들기도 하고, 먹구름이 꼈다가 개기도 하니, 바다가 어두컴컴해지면서 바람은 약해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 하늘도 캄캄하여졌으므로, 비는 여전히, 동풍, 바다 물빛=짙은 청색, 물살이 아주 급해지고, 북풍, 풍랑이 사나워
 
시간: 해가 높이 솟아오를 때까지, 밤 3경(更)
 
지명: 한라산, 대화탈도(大火脫島), 거요량(巨要梁), 수덕도(秘德島), 추자도(秋子島), 수덕도(秘德島), 초란도(草蘭島)
 
역사: 정의현감(産義縣監) 이섬 표류
 
 
풍습(조문): 친상 당한 것을 듣고 달려와 조문
 
풍습(일반): 한라산에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날씨가 고르지 못하면 반드시 바람의 변화가 생기니 배를 타서는 안 됩니다.
 
유학: 가례(家禮), 임금의 덕
 
경천: 하늘의 날씨, 하늘이 알기 때문
 
 
3rd Day. At sea. This day was cloudy and sometimes rainy. The wind was from the east and slightly favorable. The sea was deep green.
 
Chong Sa-so, Junior Director of Taejšng District, and No Kyong, Superintendent of Education, had heard that there had been a death in my family and came in haste to express their sympathy. More than ten men – Ch’oe Kak, Pak Chung-han, Kim Kye-uk (the Superintendent of Japanese Studies),8 Ch’oe Chung-jung (an officer), Kim Chung-ni (a Security Officer), and others – and in addition School Masters Kim Chol-lyð and Kim Tủng-nye and over twenty students saw us off at the river mouth. Chol-lyo and Tùng-nye tried to stop me from going, saying, “We old men were born and grew up by the sea, and we know much about the sea lanes. When it is changeable on Mt. Halla, now cloudy, now rainy, the wind is sure to shift, and it will be impossible to sail boats. Not only that, the commentary under ‘Travel on First Hearing of a Relative's Death' in the Chia li says, 'One travels one hundred li by day, but not at all by night. Though grief is great one still avoids injury.210 If night travel is improper, how much more could crossing this great sea be disrespectful!".
 
 
Some of those in the room urged me on, some held me back. The sun was high, and I had not decided. Security Officer An Ui came and told me, “The east wind is just right. You can go.” Then Chung-han, Chung-jung and others also urged me to go. Finally I took my leave and got into the boat.
 
When we had rowed five li, Kwon San, Hð Sang-ni and other soldiers said to me, “Today first the wind waxes, and then it wanes; the clouds and fog roll in, and then they scatter. We fear that if on a day of such unsteady winds you travel in a heavy sea like this one, you will regret it later. Let us turn back to Pyõlto-p'o and wait for [a more favorable] wind before starting again. We shall not lose too much time that way.”
 
An Ui said, “Heaven's weather is not something people can forecast. How do you know that the clouds will not scatter and that we shall not see fair skies again soon? Moreover, private boats that cross this sea capsize and sink one after another, but the ministers of the Court who have received the King's command (except Yi Sõm, the former Junior Director of Sõnŭi District11) seldom go adrift or sink. All that is because His Majesty's virtue is extremely great and is known to Heaven. Anyway, with suggestions from everyone, the matter will never be settled. How can we set out only to return and delay?” He shouted a command to set sail.
 
Shortly after we passed Taehwat’al Island, all the men in the boat thought that if the boat headed for Sinyoryang and cut across the sea upwind, we should land at Ch’uja Island very quickly. Kwon San would not listen to them. He grasped the tiller and went with the wind. We passed Ch’udok Island and went west. The sea was dark, the wind weak. It began to rain. As we were approaching the harbor of Ch’uja Island, the evening tide was very swift, and the sky was dark. When the overseer gave orders to the troops, all the soldiers at the oars said, “Whose fault is it that we sailed on a day like this?” They nursed rebellion and would not obey and man the oars.
 
We drifted off to Ch'oran Island, dropped anchor off the west bank, and moored. In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Sang-ni said, “This island blocks the east wind, but we are open to the waves on three sides; it is not suitable. Now, too, the wind is shifting to the north. We can neither go on nor retreat; it is a bad position to be in. The boat, moreover, is not where we first moored it. It is gradually drawing off into the sea. I am afraid the anchor with which we moored may already have broken. Under the circumstances it is best to raise the anchor, go forward a bit, and make fast to the shore. It will then be possible to wait for the sky to clear and row into Ch’uja.”
 
Then we raised the anchor, and it was, indeed, broken. Rowing, we could not draw near the shore and were driven off by the north wind to an unprotected part. It rained on, never stopping, the wind beating upon the water. We rose and fell with the waves and did not know where we were going.
 
 
 
41.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일본어 통역을 맡았다. 태조2년(1393)에 司譯院에 정품관 2명을 두었다. 사역원 외에 왜인들의 到泊處인 경상도의 釜山浦와 琴浦에도 각각 종9품의 倭學訓導를 두어 통역을 맡게 하였다.
 
42. 조선시대 鄕校에서 교육을 담당한 교원을 말한다. 500戶 이상 郡縣의 향교에서는 生員과 進士 가운데 訓導官을 임명하고, 500戶 이하 郡縣에는 學長을 임명하였다.
 
43. 冠婚喪祭의 각종 儀式을 규정한 朱子의《家禮)를 말한다. 朱熹의 編著로 알려졌지만 朱熹의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朱子學的 儀禮의 典範으로 간주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44. 《家禮》의 원문은 “始聞親喪, 哭, 易服, 遂行”으로서, 여기에서는 “곡을 하고, 상복으로 갈아입은 뒤”라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家禮》 권7, 喪禮, 奔喪.
 
45-旌義縣監 李__은 成宗14년(1483) 2월 29일에 朝天館을 떠났다가 폭풍을 만나 표류했으나, 다행히 중국 揚州 長沙鎭에 표착하였다. 일행 47명 중 14명이 굶어 죽고, 33명은 北京을 거쳐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돌아온 뒤 〈行錄)을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이 《朝鮮成宗實錄》 14년 8월22일조에 기록되어 있다. 살아 돌아온 공으로 다섯 資級이 승진되었는데, 이는 당시 軍功 1등이 세 __자급인 점을 감안하면 아주 파격적인 것이어서, 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조정에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司果에 임명되었으며, 15년 (1484)에는 滿浦僉節制使가 되었고, 그 후 訓鍊院의 僉正과 副正을 지냈다.
 
 
[[1월 3일.lst]]
 
 
===4일===
 
初四日, 澳入大洋中, 是日, 雨大風, 驚濤浪, 狱天鼓海, 帆席盡破, 舟以二槽高大,尤易傾撓,勢將覆壓,命肖厅寶操斧去之,高以福鏈草芭附之舟尾以黎講,當午雨稍寧,東風又大作, 載傾载浮, 聽其所之, 臀眼間已入西海. 稍工指東北, 望有島若一點彈丸於漂渺間, 曰: “彼疑乃黑山島也. 過此以往, 四無島嶼, 水天相接, 汗漫無涯之海.”人皆知攸措, 僵卧舟中.
 
 
臣令安義督軍人以取露治船等事. 有軍人高迴者作聲曰: “濟州海路甚險, 凡往來者, 皆待風累朔. 至如前敬差官, 在朝天館, 在水精寺, 通計凡三朔以候, 然後乃行. 今此行當風雨不定之時, 不占一日之候, 以至此極, 皆自取也.”
 
 
餘軍皆曰: “執已如此, 取露治船, 雖竭心力, 終亦必亡. 吾寧用力而死, 莫如安队以待死.” 皆掩耳不從命, 或歐之亦不起. 宋真殘劣之甚者, 被國而怒, 曰:“長壽哉! 此船也. 等至於破, 何不速破!”
 
 
程保曰: “濟州人心, 外凝毒, 預慢(民)[原]悍, 以死為輕, 故其言類如此.” 臣意亦以謂溺死已決矣, 尚蒙天助, 幸不至於溺, 必漂流無定, 以至死日, 無如之何, 又憤軍人怠惰,遂點檢同舟人,則從者程保、金重、李禎、孫孝子、崔(巨) 巨] 伊山、莫金、萬山及濟州牧使所定送鎮撫安義、記官李孝枝、總牌 許尚理、領船權山、稍工金高面、格軍金怪山·肯斤寶·金仇迴·玄山·金石貴·高以福·金朝迴·文迴·李孝台·姜有·夫命同·高內乙 同·高福·宋真·金都終·韓每山·鄭實、護送軍金粟·金真音山·高迴·金松·高保終·梁達海·朴終回·金得時·任山海、官奴權松·姜內·李山·吳山等,合自身凡四十三人,臣招安義問曰:“我一人,非官員例,從者至煩,甚為未便,濟州人乘紅者至三十五人,何也?”
 
 
安義曰:“我牧使所以盡心者,對以敬差官之禮,且運紅,必用聚力,然後可行,况海路复遠,如於蔚島等處,水賊盛行,護送不可不嚴也.”
 
 
臣曰:“過海時,當精擇運紅人及水路語習者,則數雖少可矣,今此同舟人,皆懈怠暴藍者,虛張名數,而無其實,使船漂流,致之死地,徒增痛哭耳.”
 
 
叫謂軍人等曰:“我奔初喪,情不可少留,人或有勸之行,為人子者,其可頃刻需“滯乎?汝等之同我見漂,實由於我,然勢亦使之然也.况好生惡死,人情所同,汝等豈無欲生之心哉?舟或破碎或沈覆則已矣,觀舟今堅緻,未易至破,若不遇石嶼,能修補刮水,幸或風定波恬,則雖流至他國,可以得生,今汝等亦有父母,有妻兒, 有昆季親戚,皆望汝生,畏其不壽,汝等則不念其情,不愛其身,徒以给我之心,率相解體,自歸死地,惑之甚者,
 
 
尚理等十餘人曰:“軍人皆頑鈍無識之徒,故其用心不通若此,然人各有心,我等當"竭力從事,艷而後已,”夜風雨不止,巨濤尤甚,激入舶髓,隨人隨取,量可二更,驚濤鼓蕩,襄駕篷屋. 丹半沈,衣服行李,盡見沾滿,凍寒砭骨,命在瞬息,臣握李植手,枕程保膝,金重、孝子傍臣左右,狼藉以待死,傍有一人結項將絕,李楨解其結, 則乃吳山也,巨伊山、莫金等,竭力汲水,水猶不减,臣以謂舟尚完固,則
 
 
p. 354
 
自上激射, 自隙漏入之水, 不汲則坐待沈沒, 汲之則底有生理, 勉强而起, 叫權松贊爆得火,卷首席以烘之,又叫斤寶、高福、高面等,親檢綽漏處,以補塞之,又解衣分給權山、高面、巨伊山、怪山、尚理等,以勸勉所事. 程保、金重、孝子等散衣服,分諸軍人,軍人若仇迴、文迴、都終、每山、玄山等爭感奮出死力,刮水殆盡,舟僅獲全,不移時,舟又入石嶼錯亂中,權山運船不知所向,尚理、仇迴等,執篙無所施,幸賴天風驅出,得免碎破.
 
 
 
큰 바다 가운데로 표류해 들어갔습니다.
 
 
이 날은 우박이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놀란 파도와 무서운 물결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해면을 내리치니 돛이 모두 부서져 버렸습니다.
 
 
배는 높고 큰 돛대 2개 때문에 쉽게 기울어져 뒤집어질 기세였으므로 소근보(肖斤寶)53에게 도끼로 돛대를 제거하게 하고, 고이복(高以福)에게 거적을 엮어 선미(船尾)에 붙여 파도를 막게 하였습니다.
 
 
정오가 되어 비는 조금 그쳤으나 동풍이 또 크게 일어나 배는 기울어졌다 떠올랐다 하였으며, 그 가는대로 맡겨두었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서해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뱃사공이 동북쪽을 가리키기에 바라보니, 마치 한 점 탄환과 같은 섬이 아득한 곳에 있었습니다.
 
 
뱃사공이, “저것이 아마 [https://www.youtube.com/watch?v=3MliYIK8Lyc 흑산도(黑山島)][http://islands.jeonnam.go.kr/viewer/A_isle/isle/view.aspx?isle_idx=44][https://www.mk.co.kr/news/society/view/2018/09/583319/][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9052645331][http://www.ohmynews.com/NWS_Web/Issue/series_pg.aspx?srscd=0000011716]54일 것입니다.
 
 
이곳을 지나서 앞으로 간다면 사방에 섬이라고는 없고 물과 하늘이 서로 닿아 있는 끝없이 넓은 바다뿐입니다”라고 말하니,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배 안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신이 안의를 시켜 군인들에게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38145300 취로(取露)][https://www.youtube.com/watch?v=7itvEHXTw2A]하는 일, 배를 수리하는 일 등을 독려하도록 하였습니다.
 
 
군인 고회(高廻)란 자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제주는 바닷길이 매우 험난해서 왕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여러 달씩 순풍을 기다려! 전 경차관(敬差官) 같은 분으로 말하면 조천관(朝天節)에 있다가 수정사(水精寺)에 있다가 하며 모두 합쳐 석 달이나 기다린 뒤에야 길을 떠났거든, 지금 이 행차는 비바람이 고르지 않은 때 하루의 날씨도 살펴보지 않고 이러한 극한 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자초한 일이야!”라고 하였습니다.
 
 
나머지 군인들은 모두, “상황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취로를 하고 배를 수리하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더라도 끝내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야. 애를 쓰다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편안히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편이 나아”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두 귀를 막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며, 혹은 때려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송진(宋眞)은 모자라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자라, 맞으면서 성내 말하기를,
 
 
“명도 길구나, 이 배는! 파선되기만을 기다리는데, 왜 빨리 파선되지 않는 거야! 어차피 부서지게 될 것이라면 왜 빨리 부서져 버리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말하기를, “제주도 사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독하며 고집스럽고 사나워, 죽음을 가벼이 여기므로 그들의 말투가 이와 같습니다 56 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또한 물에 빠져 죽을 것이 분명하지만, 혹시 하늘의 도움을 입어 다행히 물에 빠져 죽지 않더라도, 정처 없이 표류하다가 죽는 날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군인들의 게으른 행동에 분개하다가 마침내 배에 같이 탄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종자(從者)인 정보(程保)·김중(金重)·이정(李)·손효자(孫孝子)·최거이산(崔巨伊山)·막금莫金)·만산(__山)과 제주목사가 보낸 진무(鎭撫) 안의(安義),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8%B0%EA%B4%80(%E8%A8%98%E5%AE%98) 기관(記官)] 이효지(李孝枝),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511001_003 총패(總牌)][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8209]58 허상리(許尙理),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27327800 영선(領船)][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8640]59 권산(權山), 사공 김고면(金高面), 곁군 김괴산(金怪山)·소근보(肖近寶)·김구질회(金仇此廻)·현산(玄山)·김석귀(金石貴)·고이복(高以福)· 김조회(金朝廻)·문회(文廻)·이효태(李孝台)·강유(姜有)·부명동(夫命同)·고내을동(高內乙同)·고복(高福)·송진(宋眞)·김도종(金都終)·한매산(韓每山)·정실(鄭實), [https://ko.dict.naver.com/seo.nhn?id=42668000 호송군(護送軍)][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60500330001&print=Y] 김속(金栗)·김진음산(金眞音山)·고회(高廻)·김송(金松)·고보종(高保終).양달해(梁達海)·박종회(朴終回)·김득시(金得時)·임산해(任山海),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4%80%EB%85%B8(%E5%AE%98%E5%A5%B4) 관노(官奴)] 권송(權松)·강내(內)·이산(李山)·오산(吳山) 등과 저까지 합해서 모두 43명이었습니다.
 
 
신이 안의를 불러 묻기를, “나는 한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241 상제(喪制)]로서 관원의 격식에 따를 처지가 아닌데 종자(從者)가 너무 많아 마음이 몹시 편치 않다. 제주 사람으로서 배를 탄 사람이 35명이나 되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니 안의가 말하기를, “우리 목사(牧使)께서 마음을 다한 것은 경차관에 대한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또 큰 배를 부리는 데는 반드시 많은 사람들의 힘을 써야만 항해가 가능합니다. 하물며 바닷길이 아득하게 멀 뿐더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433 울도(蔚島)][http://shindonga.donga.com/3/all/13/626269/2] 등지와 같은 곳은 해적이 많으니 호송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말하기를, “바다를 건널 때는 배를 부리는 자와 바닷길을 잘 아는 자만 가려 뽑으면 비록 수가 적어도 괜찮다. 지금 이 배를 같이 탄 사람은 모두 게으르고 사나운 자들로서 인원수만 늘려놓았지 그 실속이 없다. 배가 표류되어 사지(死地)에 이르게 되면 통곡 소리만 더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소리를 질러 군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초상(初喪)을 당하여 달려가는 몸이라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형편인 데다 사람들 중에 떠나기를 권하는 이도 있었다. 자식 된 자로서 잠깐 동안이라도 지체할 수 있었겠는가? 너희들이 나와 함께 표류를 당한 것은 실로 나 때문이지만, 형세가 또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물며 살고 싶고 죽기 싫은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은데 너희들도 어찌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배가 혹시 부서졌거나 뒤집어졌다면 끝장이지만 살펴보건대 지금 배는 단단하여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겠다. 만약 돌섬에만 부딪히지 않는다면 수리해 가며 물을 퍼낼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잠잠해진다면 비록 표류해서 다른 나라에 이르더라도 살아날 수가 있다. 지금 너희들도 또한 부모와 처자가 있고 형제와 친척도 있어서, 모두가 너희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일찍 죽을까 걱정할 것이다. 너희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 몸도 아끼지 않으며, 오직 나를 탓하는 마음으로 서로 마음이 뿔뿔이 흩어져 스스로 죽을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제 정신을 잃음이 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상리 등 10여 인이 말하기를, “군인들은 모두 고루하고 우둔하며 무식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씀이 이와 같이 막혔으나, 사람마다 마음가짐이 다르니 저희는 마땅히 죽을 때까지 힘껏 일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밤에도 바람과 비는 그치지 않고 큰 파도는 더욱 심하여 배 안으로 부딪쳐 들어왔으나 물이 들어오는 대로 퍼내었습니다. 밤 2경이 쯤 되니 성난 파도가 출렁대면서 봉옥(蓬屋)(거적으로 만든 집)) 위로 넘나들었습니다. 배는 반쯤 가라앉아 의복과 행장은 모두 물에 젖었습니다. 추위는 뼈를 깎아내는 듯하였고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신은 이정의 손을 잡고 정보의 무릎을 베고 누웠습니다. 김중과 효자는 신의 양쪽에서 어지러이 쓰러져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한 사람이 목을 매어 숨이 끊어지려 할 때 이정이 그 목맨 것을 풀고 보니 바로 오산이었습니다.
 
 
거이산과 막금 등이 힘을 다하여 물을 퍼내었으나 물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신은 배가 아직 튼튼하므로, 위로 세차게 쏟아져 들어오는 물과 틈에서 새어드는 물을 퍼내지 않는다면 앉아서 배가 침몰되기를 기다리는 셈이겠지만, 물을 퍼낸다면 살아날 길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억지로 일어나서 큰 소리로 권송을 불러 부싯돌을 쳐서 불을 지피고 짚자리를 말아 때게 하였습니다. 또 근보 · 고복·고면 등을 큰 소리로 불러 물이 새는 곳을 직접 찾아낸 다음 이를 막도록 하였습니다. 또 옷가지를 풀어 권산·고면 · 거이산 · 괴산 · 상리 등에게 나누어주며 맡은 일에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정보 · 김중·손효자 등도 또한 여러 군인들에게 의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군인들 중에 구질회·문회 · 도종·매산 · 현산과 같은 사람은 감격하여 죽을힘을 다해 다투어 물을 거의 다 퍼내니 배가 겨우 무사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배가 또 돌섬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권산은 배를 움직이며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알지 못했고, 상리와 구질회 등은 [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1146455 상앗대]를 잡고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바람에 힘입어 내몰려 나와, 부서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 표류, 돛이 모두 부서져, 자살미수
 
기후: 우박, 큰바람, 비는 조금 그쳤으나, 비바람이 고르지 않은,바람과 비는 그치지 않고
 
시간: 정오
 
지명: 서해, 흑산도, 제주, 울도(蔚島), 조천관(朝天節), 수정사(水精寺)
 
지리: 놀란 파도와 무서운 물결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해면을 내리치니, 동풍, 동북쪽, 큰 파도는 더욱 심하여, 돌섬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곳
 
 
인명: 정보(程保), 김중(金重), 이정(李), 손효자(孫孝子), 최거이산(崔巨伊山), 막금(莫金), 만산(__山), 진무(鎭撫) 안의(安義), 기관(記官) 이효지(李孝枝), 총패(總牌) 허상리(許尙理), 영선(領船), 권산(權山), 사공 김고면(金高面), 곁군 김괴산(金怪山), 소근보(肖近寶), 김구질회(金仇此廻), 현산(玄山), 김석귀(金石貴), 고이복(高以福), 김조회(金朝廻), 문회(文廻), 이효태(李孝台), 강유(姜有), 부명동(夫命同), 고내을동(高內乙同), 고복(高福), 송진(宋眞), 김도종(金都終), 한매산(韓每山), 정실(鄭實), 호송군(護送軍) 김속(金栗), 김진음산(金眞音山), 고회(高廻), 김송(金松), 고보종(高保終), 양달해(梁達海), 박종회(朴終回), 김득시(金得時), 임산해(任山海), 관노(官奴) 권송(權松), 강내(_內), 이산(李山), 오산(吳山)
 
심리: 당황, 포기, 불안, 불만, 반항, 분노-->감격 / 결의(저희는 마땅히 죽을 때까지 힘껏 일하겠습니다)
 
심리(최부): 독려, 불안, 종자(從者)가 너무 많아 마음이 몹시 편치 않다, 답답(모두 게으르고, 실속이 없다), 다행히
 
리더십: 제 정신을 잃음이 심하다, 억지로 일어나서 큰 소리로, 큰 소리로 불러,
 
 
제도(관직): 군인, 경차관(敬差官), 목사(牧使)
 
제도(교통): 배
 
풍습(초상): 상제(喪制)
 
행정: 상제(喪制)로서 관원의 격식에 따를 처지가 아닌데, 호송
 
의전: 경차관에 대한 예의
 
사회적 문제: 도적
 
기물: 돛대, 도끼, 거적, 행장, 부싯돌, 짚자리, 상앗대
 
 
유학: 초상(初喪)을 당하여 달려가는 몸이라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형편, 부모와 처자가 있고 형제와 친척도 있어서, 모두가 너희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일찍 죽을까 걱정할 것이다. 너희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 몸도 아끼지 않으며
 
유학: 경세제민(물이 새는 곳을 직접 찾아낸 다음)
 
경천: 하늘의 도움
 
 
[[1월 4일.lst]]
 
 
4th Day. Drifting into the Open Ocean. This day there were rain and hail. High winds roiled the sea. Terrible waves swelled into the sky and churned the ocean.
 
The sails were completely ripped. The masts, being tall, were in danger of breaking and crushing the [superstructure] of the boat. I ordered San Kŭn-bo to take his axe and cut them down. Ko I-hok bound straw mats to the stern of the boat to ward off the waves. At noon, the rain abated somewhat, and a strong east wind rose again. We went heeling and pitching along, and I realized immediately that we had already entered the Western Sea. The helmsman pointed to the northeast. I saw there an island like a pellet of shot on the horizon. He said, “That may be Hủksan Island.” After we went past it, there was no island in any direction. Water and sky met in endless space.
 
All the men, not knowing what to do, lay down prone in the boat. I commanded An ti to direct the soldiers to do such things as bail out the water and repair the boat. One soldier, Ko Hoe, shouted, “The Cheju sea lanes are very dangerous. Everyone who travels in them waits months for the wind. In the case of the former commissioners, they waited as long as three months at Choch’on-gwan and Sujong Temple before they went. This present voyage comes just at the time of unsettled wind and rain. We did not forecast the weather for a single day, and we have come to this extremity. We have brought it all upon ourselves.” | All the other soldiers said, “That is so. Even if we exhaust our will and strength bailing water and repairing the ship like this, in the end we still shall die. Rather than use up our strength and die, let us lie easy and wait for death.” They all closed their ears and would not obey orders. They would not even get up when whipped.
 
Song Chin, a great shirker, being beaten grew angry. He said, “A long-lived one, this ship! Since she is going to break up sooner or later, why doesn't she do it quickly?”
 
Chòng Po said, “Cheju men appear to be stupid, but inside they are wicked. They are obstinate, rude, rebellious, and cruel, and they take death lightly. That is why they talk like that.”
 
I, too, thought that we were sure to drown. If we received help from Heaven and were fortunate enough not to drown, then surely we should drift indefinitely until the day we died. What else could be? I was also exasperated at the insolence of the troops.
 
Then I counted over the men in the boat. There were my staff – Chòng Po, Kim Chung, Yi Chong, Son Hyo-ja, Ch'oe Kõisan, Makkům, and Mansan- ;, and those assigned by the Prefect of Cheju to escort us - Security Officer An Ui, Recorder Yi Hyo-ji, Keeper of the Seals Hỏ Sang-ni, Ship Captain Kwon San, Helmsman Kim Ko-myon, Privates Kim Koe-san, San Kūn-bo, Kim
 
Kujilhoe*, Hyon San*, Kim Sok-kwi, Ko I-hok, Kim Cho-hoe, Munhoe*, Yi Hyo-t'ae, Kang Yu, Pu Myong-dong, Ko Naeŭltong*, Ko Pok, Song Chin, Kim To-jong, Han Mae-san, Chồng Sil; Escort Troops Kim Sok, Kim Chinằmsan*, Ko Hoe, Kim Song, Ko Po-jong, Yang Tal-hae, Pak Chong-hoe, Kim Tủk-si, Im San-hae; and public slaves Kwon Song, Kang Nae, Yi San, and O San*. Altogether there were forty-three men, including me.
 
I called An Ui and questioned him: “I am a man in mourning. I am not in official standing. It is extremely awkward to have so many men aboard. How is it that the Cheju men on board come to thirty-five?”
 
An Ủi said, “What our Prefect was at great pains to do was to meet the protocol for a commissioner. Sailing a large boat, furthermore, takes the work of many, and when the sea route is long and, as at Wi Island and other places, pirates are active, the escort must all the more be strong.”
 
I said, “It is possible to cross the sea successfully with only a few sailors and navigators, if they are carefully chosen. These men, now, are all lazy and insolent. In numbers they swell the roster, but in fact they are nothing. If the boat should drift and we all die, their presence would only increase the number of wailing [widows and orphans].”
 
I called out to the troops, “I am hurrying into my first mourning. My feelings permit not even a slight delay. Since someone did urge me to go, as a son can I delay for a moment? It is true that you have been cast adrift on the sea because of me, but circumstances are also responsible.
 
"Since it is common nature to all men to love life and hate death, how can you not want to live?
 
"If the boat breaks up or sinks, that will be all. My view is that the boat is now sound and tight. Probably it will not break up easily, and if we do not strike a rocky island, we can repair it and bail out the water. If by luck the wind settles and the waves calm down, we may drift to another country, but we shall save our lives. You, too, have fathers, mothers, wives, children, brothers, and relatives, who hope that you will live and fear that you might die; yet, without considering their feelings or the danger to your own lives; you have refused to work because you think I am to blame. It is the height of stupidity to bring death upon yourselves thus.”
 
Over ten men, including Sang-ni, said, “The troops are a gang of stubborn ignoramuses. That is why they reason in such an absurd fashion. But everyone has his own way of thinking. We shall work with all our strength until we die.”
 
During the night, the wind and rain did not stop. The waves were enormous. They washed into the bow and stern, and as they came in, we bailed them out. In, perhaps, the second watch, terrifying waves swelled up and straddled the mat shelter. The boat half sank. The clothing and baggage were soaked through, and freezing cold pierced us to the bone. Our fate lay in the moment. I took Yi Chong's hand and pillowed my head in Chòng Po's lap. Kim Chung and Hyo-ja were at my left and right sides. Thus sprawled about, we waited to die. A man nearby was trying to hang himself and was about to die when Yi Chong untied him. [The man] proved to be O San.
 
 
Kõisan, Makkům, and others worked as hard as they could bailing out water. The water seemed not to diminish.
 
I assumed that if the boat was still sound and we did not bail out the water washing in above and leaking in through cracks, we should sit and wait and sink. If we did bail, it might be possible to survive. I forced myself to get up. I called to Kwon Song to kindle a fire by friction, roll up the mats and dry them. I also called to Kủn-bo, Ko Pok, Ko-myon, and others personally to search out the leaking places and plug them. Then I took off my clothes and divided them among Kwon San, Ko-myon, Kõisan, Koe-san, and Sangni as encouragement. Chòng Po, Kim Chung, and Hyo-ja also took off their clothes and divided them among the troops. Soldiers such as Kujilhoe, Munhoe, To-jong, Mae-san, and Hyon San, full of gratitude, exerted their utmost strength to bail all the water out of the boat. They had got it almost all out, and the boat seemed for the most part safe, when almost immediately it again headed into a rocky island. In the confusion, Kwon San, sailing the boat, had not realized where he was going. Sang-ni and Kujilhoe seized poles, but they were useless. Fortunately, we were driven off by a heaven-sent wind and avoided crashing.
 
 
46.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의 서북해상에 있는 무인도이다. 돌 봉우리가 삐쭉삐쭉하고 그 꼭대기에 샘이 있지만 수목은 없고 풀만 남아 있다고 한다. 《東國輿地勝覽》 권38, 濟州牧.
 
47. 제주도와 전라남도 海南縣 사이에 있는 섬이다.
 
48. 한반도와 제주도 본 섬과의 중간에 위치하는데 제주도에서는 가장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옛적에 제주도에 가려면 반드시 이 섬에 들렸다. 예를 들어 제주에 가는 자가 羅州에서 떠나면 務安, 靈岩, 海南 등을 거쳐 이 섬에 이르고, 海南에서 떠나면 三浦에서 巨要梁과 三內島를 거치고, 康津에서 떠나면 軍營浦, 삼내도를 거치는데 모두 삼 畫夜를 가야 추자도에 이르렀다. 한편 추자도를 경유하여 鼠島와 대화탈도, 소화탈도를 지나 애월포와 朝天館에 이른다. 《東國輿地勝覽》권38, 濟州牧.
 
49. 추자도의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북제주 추자면에 속한다. 추자도와는 거리가 6km이며 무인도로서 사자섬 혹은 사자도라고도 한다.
 
50. 格軍은 '곁군'의 取音으로 조선시대의 船夫, 水夫, 雜役水夫 등 노를 젓는 군인을 가리킨다.
 
51. 전라남도 신안군 岩泰面 康沙里에 속하는 섬으로, 추자도의 남쪽에 있으며 목포와의 거리가 24km이다.
 
52. 밤 11시에서 1시 사이.
 
53. 姓氏의 경우에는 '소'로 읽어야 한다.
 
54. 전라남도 羅州에서 서쪽 水路로 900리 되는 바다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무안군 흑산면에 속한다.
 
55. 바닷물을 끓여 수증기를 받아 식수로 만드는 일.
 
56. 제주도 사람의 성향을 묘사한 아래의 기록이 있다. “풍속이 유별나고 군졸은 사나우며 백성은 어리석다. 기쁘면 사람 같으나 노하면 짐승 같아, 통제하기가 어렵다.” 權近, 《陽村集》권20.
 
57. 조선시대 지방관청의 吏屬이다. 地方官府의 6房을 담당하는 鄕吏 층으로, 고려시대에는 이들을 記官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 이르면 官品·祿俸·科田도 받지 못하고, 綠에 平頂巾을 쓰는 행정실무자로 그 지위가 하락하였다.
 
58. 麗末鮮初 중앙군의 기간을 이룬 兵인 侍衛牌의 통할자이다. 시위패는 高麗末 이래 騎船軍과 함께 양인 농민으로 구성된 국방의 주요 담당 兵種으로, 일명 侍衛軍이라고 도 하였다. 正軍의 통할자를 百戶 및 千戶라 한 데 비해 시위패의 통솔자를 總牌라고 하였다.
 
59. 運船의 한 선박 내의 長인 漕軍을 말한다.
 
60. 인천에서 남서쪽 72km의 해상에 있는 섬이다.
 
61. 밤 9시에서 11시 사이.
 
62. 대를 엮어 배를 덮은 일종의 덮개로서 마치 집의 지붕과 같은 것.
 
 
===5일===
 
初五日, 澳大洋中, 是日, 昏霧四塞, 咫尺不辨, 向晚, 雨脚如麻, 至夜, 雨少止, 怒濤如山, 高若出青天, 下若入深淵, 奪衝擊躍, 敗, 決在呼吸之間. 莫金、權松等技淚謂臣曰:“勢已迫矣,無復望已,請替換衣服,以待大命之至,“臣如其言,懷印與馬牌,具喪冠與服,慌慌然按手祝天曰:“臣在世,唯忠孝友愛為心,心無欺,身無縫冤,手無殺害,天雖高
 
高,實所鑑臨,今又奉君命而往,奔父喪而歸,臣不知有何罪咎?倘臣有罪,罰及臣身可也,同舟四十餘人,無罪見溺,天其敢不矜乎?天若哀此窮人,返風息濤,使臣得再生於世,葬臣新死之父,養臣垂老之母,幸又得鞠躬
 
 
於丹墀之下,然後雖萬死無生,臣實甘心,”言未記,莫金遠抱臣身, 曰:“一家人百年苦樂,皆仰此身,有如十盲仰一枚,今至於此,無復再見一家之人.”遂瓣踊而哭,陪吏以下亦哭泣鑽手以天祐,
 
 
이 날은 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저녁때가 되면서 빗발이 삼대 같았습니다.
 
 
밤이 되자 비가 조금 그쳤으나 성난 파도가 산더미와 같아서, 높게 일 때는 푸른 하늘로 솟는 듯했고 내려갈 때는 깊은 못에 빠져 들어가는 듯하여,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찢는 듯하며, 모두 물에 빠져 썩어 문드러질 것이 순간에 달려 있었습니다.
 
 
막금과 권송 등은 눈물을 씻으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급박하여 다시 희망이 없으니 청컨대 의복을 갈아입고 죽음을 맞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도 그 말과 같이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D%B8%EC%9E%A5(%E5%8D%B0%E7%AB%A0) 인장(印章)]<ref>[http://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g=/inj/injang_sub02.jsp&pageNo=4_3_1_1 한국인장의 개요]</ref>과 [https://www.museum.go.kr/site/korm/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450615 마패(馬牌)]를 품에 넣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105 상관(喪冠)]과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233 상복(喪服)]을 갖추고는 벌벌 떨며 손을 비비면서 하늘에 빌기를,
 
 
“신은 살아오면서 오직 충효와 우애를 마음에 새기고, 마음으로는 속이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몸으로는 원수진 일이 없었으며 손으로는 누구를 죽이거나 해친 적이 없었음은 하늘이 비록 높고 높지마는 실로 굽어 살피시는 바입니다. 이번에도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신에게 무슨 죄와 허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신에게 죄가 있으면 신의 몸에만 벌이 미치면 될 것이지, 같이 배를 탄 40여 인은 죄도 없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하늘은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늘께서 만약 이 궁지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바람을 거두고 파도를 그치게 하여 신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다시 삶을 얻어, 갓 죽은 신의 아비를 장사지내고 늙으신 신의 어미를 봉양하며 다행히 다시 궁궐의 뜰 아래에 국궁(鞠__)할 수 있게 하신다면, 이후에는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신은 실로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미처 마치지 않았는데 막금이 갑자기 신의 몸을 안으면서,“한 집안 사람들이 평생의 고락을 모두 이 분에게 기대기를, 마치 '열 소경에 한 막대처럼 여겼는데,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집안 사람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고는, 마침내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피 통곡하였습니다. 배리(陪吏) 이하도 소리를 내어 슬피 울면서 손을 모아 하늘의 도움을 빌었습니다.
 
 
기후: 짙은 안개, 빗발이 삼대 같았습니다, 비가 조금 그쳤으나, 성난 파도,
 
시간: 저녁때, 밤
 
비유: 빗발이 삼대 같았습니다, 성난 파도가 산더미와 같아서, 높게 일 때는 푸른 하늘로 솟는 듯했고 내려갈 때는 깊은 못에 빠져 들어가는 듯하여,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찢는 듯, 열 소경에 한 막대처럼
 
인명: 막금, 권송
 
풍습(의복): 상복, 상관
 
풍습(기원): 손을 비비면서 하늘에 빌기를, 손을 모아 하늘의 도움을 빌었습니다
 
풍습(초상): 상복, 상관
 
기물: 인장(印章), 마패(馬牌),
 
심리: 불안(모두 물에 빠져 썩어 문드러질),포기,간절함
 
경천: 하늘에 빌기를, 하늘이 비록 높고 높지마는 실로 굽어 살피시는 바, 하늘은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늘께서 만약 이 궁지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바람을 거두고 파도를 그치게 하여
 
유학: 충효와 우애, 임금의 명령, 신의 아비를 장사지내고 늙으신 신의 어미를 봉양하며 다행히 다시 궁궐의 뜰 아래에 국궁(鞠躬)할 수 있게
 
사건: 부친상
 
 
 
 
5th Day. Adrift in the Open Ocean. This day a dense fog obscured everything.
 
 
Things a foot away could not be made out. Towards evening, rain streamed down heavily, abating somewhat with night.
 
The frightening waves were like mountains. They would lift the ship up into the blue sky and then drop it as if down an abyss. They billowed and crashed, the noise splitting heaven from earth. We might all be drowned and left to rot at any moment. Wiping away tears, Makkům and Kwon Song said to me, “Conditions are critical; there is no hope. Please change your clothes and wait for your fate to come.”
 
I did as they said. I pocketed my seal and horse permit against my chest and put on my mourning hat and gown. Anxiously I joined my hands and prayed to Heaven. “In the world I have tried only to be loyal, filial, friendly, and loving. My heart has had no deceit. I have done no wrong, I have killed no one. Far away above us though you are, Heaven, you must be aware of this. Now, again having gone out on my Sovereign's orders, I have been hurrying home to mourn for my father. I do not know for what sin I am to blame. If I have sinned, let punishment come to me alone. Will you, Heaven, presume to be so unmerciful as to let over forty innocent men drown with me? Heaven, if you pity this poor person, reverse the wind and still the waves. Let me return alive to the world, bury my newly dead father, and take care of my aging mother. If, by good fortune, I am also able to bow before the Court, then I shall truly be content to die ten thousand deaths after that.”
 
 
Before I had finished speaking, Makkům suddenly embraced me. He said, “A whole family for their entire life, in pain and pleasure, have relied on me. They have been like ten blind men leaning on one staff. Now it has come to this. I shall not see my family again.” Then he beat his breast, stamped his feet, and wept.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ose below them also wept. They folded their hands and prayed for Heaven's protection.
 
 
 
63. 尙書院에서 발행한 둥근 동판의 표지로서 관리들이 지방 출장 때에 驛馬 징발의 증명이 되었다. 표면에는 1-10마리의 말을 새겨 그 수효에 따라 말을 내 주도록 했고, 이면 에는 상서원 印의 字號와 年月日 등을 새겨 넣었다.
 
64. 몸을 굽혀 존경하는 뜻을 나타냄.
 
65.
 
66.
 
 
[[1월 5일.lst]]
 
 
===6일===
 
初六日, 漂大洋中, 是日陰, 風波少歇, 始督仇迴等尊片席以為帆, 建施竿以為橋, 劈舊橋之本以為, 隨風西向而去, 顧見洪濤間有物, 不知其大也, 其見於水上者, 如長屋廊, 噴沫射天, 波籬浪駭, 稍工戒舟人, 搖手合勿語, 舟過甚遠, 然後稍工呼曰:“彼乃鯨也,大則吞航,小能覆舟,今幸不相值,我其更生更生矣.”入夜,風濤還勁,舟行甚疾,安義曰:“嘗聞海有龍神甚食,請投行李有物,以讓謝之,臣不之應,舟人皆曰:“人有此身,然後有此物,此物皆身外物,”爭檢有染衣服、軍器、鐵器、口粮等物,投諸海,臣亦莫之能禁.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풍랑이 조금 수그러들었습니다.
 
 
비로소 구질회 등을 독려하여 조각이 난 돗자리를 기워서 돛을 만들고, 상앗대를 세워서 돛대를 만들고, 그 돛대의 밑둥을 잘라서 닻을 만들었습니다.
 
 
바람을 따라 서쪽을 향하여 가는데, 살펴보니 큰 파도 사이에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물 위에 드러난 것만 해도 기다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2810 행랑채]와 같고, 거품을 뿜어 내어 하늘에 솟구치는데 물결이 뒤집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공이 배 안의 사람들에게 경계하며 손을 흔들어 말을 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배가 멀리 지나간 후에야 사공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저것이 바로 고래<ref>[https://zapsrun.tistory.com/164 고래의 또다른 이름,海鰍 : 바다미꾸라지(海鰍) | 표해록,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雜's러운]]</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40072 바다의 로또, 고래? 천만에, 고래는 민폐였다, 오마이뉴스]</ref><ref>[https://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bcNJLNwjDNAJ:https://www.nifs.go.kr/download%3Fboard_idx%3D13360%26site_id%3Dnfrdi%26code_flag%3Dbbs%26code_rname%3Dwa_insmaterial%26file_idx%3D18784%26gubun%3DB+&cd=5&hl=ko&ct=clnk&gl=kr 고래와 한국의 문화,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장 김장근]</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3418 고래 뱃 속에서의 도박(─賭博)]</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7/2018112700218.html 혹등고래, 유행가 만들어 부른다]</ref>입니다.
 
 
큰 것은 배를 삼키고 작은 것도 배를 뒤엎을 수 있습니다.
 
 
지금 다행히 서로 마주치지 않아서 우리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풍랑이 다시 강해지므로 배가 가는 속도가 매우_________________
 
 
사건: 표류
 
기후: 흐렸습니다
 
지리: 바다, 풍랑이 조금 수그러들었습니다, 서쪽, 풍랑이 다시 강해지므로
 
인명: 구질회
 
기물: 돗자리, 돛, 상앗대, 닻,
 
비유: 행랑채와 같고,
 
제도(교통): 배
 
동물: 고래
 
심리: 다행
 
시간: 밤
 
 
6th Day. Adrift in the Open Ocean. This day was cloudy. The wind and waves were a little calmer.
 
First I directed Kujilhoe and others to repair the ripped mats for a sail, erect the mizzen for a mast, and split off the base of the former mast for an anchor. We went west with the wind.
 
Looking out over the broad waves, I saw something, the size of which I did not know. The part I saw above the water was like a long shed. It spurted spume into the sky and stirred up waves. Shaking his hand, the helmsman cautioned the men in the boat not to speak. Only after the boat had passed far beyond did he call out, “That was a whale. Big ones swallow boats, and little ones overturn them. It was luck that we did not meet. We live again!”As night fell, the wind and waves grew strong again. The boat went very fast.
 
 
An Ui said, “I have heard that the sea has a Dragon God who is very greedy. Let us throw away the baggage and things we have as a sacrifice to him.”
 
I would not permit it.
 
All the men in the boat said,“Men have their bodies first and things later. These are all things apart from the body.” They vied with each other searching out clothing, weapons, iron implements, and rations, and threw them into the sea. There was no way for me to stop them.
 
 
[[1월 6일.lst]]
 
 
===7일===
 
初七日,漂大洋中,是日陰,風勢甚惡,波浪淘湧,海色白,義縣監蔡允惠嘗謂臣曰:“濟州父老云:天晴日登漢拏山絕頂,則遙望西南絕域海外,若有白沙汀一帶者”以今觀之,非白沙,乃望此白海而云也,臣謂權山等日:“在高麗時,爾濟州朝大元,自明月浦,遇便風得直路,七書夜之間,過白海,渡大洋,今我漂海,直路散路,不可知也,幸得入白海之中,則竊疑中國之界必近矣,若得泊中國,則中國是我父母之邦也,當此時,生我死我,皆天所為,而風之順逆,天實主張,今東風不變,已經累日,則抑竊疑天必有生我之
 
心也. 爾等其各勉人所當為之事,以聽天所命耳,”至暮,風又變東北,權山猶指舵向西,夜未央,暴濤激躍,又駕入天篷,被人頭面,人皆皈目不能開,領船、精工皆痛哭,莫知所為,臣亦知不免於死,裂單灸纏身數圍,轉之于舟中橫木,盖欲死後屍與丹久不相離也,莫金、巨伊皆哭泣聯抱臣,曰:“死且同歸,”安義大哭,曰:“吾與其鹹水而死,莫如自絕,”以弓結自織,金粟救之得不死,臣叫領船、精工等曰:“舟已破乎?”曰:“否”曰:“舵
 
 
p. 356
 
 
 
 
p. 358
 
若之何其?”臣即點出所藏數領,令巨伊山承雨涯治,取汁以野,幾至數瓶,令金重用匙分飲之,重執匙以學,舟人張口,有如燕兒望哺然,自是始能掉舌噓氣,稍有向生之心.
 
 
 
p.43
 
 
있다면 중국은 우리 부모의 나라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모두 하늘이 하는 일이며, 순풍이 불고 역풍이 부는 것도 하늘이 실제로 주재하고 있다.
 
 
지금 동풍이 변치 않은 채 이미 여러 날이 지나고 있으니, 아마 하늘이 우리를 꼭 살리실 마음이 있는 듯하다.
 
 
너희는 각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힘쓴 다음에 하늘의 명을 기다려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해가 저무니 바람은 또 동풍이 변하여 북풍이 부는데, 권산은 그래도 키를 서쪽을 가리켜 향하였습니다.
 
 
아직 한밤중이 되지 않았을 때 사나운 물결이 부딪쳐 솟구치고 또 봉옥(蓬屋)으로 밀려들어 사람의 얼굴을 덮쳐버리니 모두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영선(領船)과 사공이 모두 통곡하면서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신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고 홑이불을 찢어서 몸에 여러 겹을 감아 배 가운데의 빗장나무에 묶어 매니, 이는 죽은 후 시신과 배가 오래도록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함이었습니다.
 
 
막금과 거이산도 모두 큰 소리를 내어 울면서 신의 몸을 나란히 감싸고 말하기를,
 
 
“죽더라도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하고,
 
 
안의는 큰 소리로 울면서, “나는 짠 바닷물을 마시고 죽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겠습니다”라고 하며, 활시위로 자기 의 목을 매어 죽으려고 하였으나 김속이 구해주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은 영선과 사공 등을 큰 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배가 부서졌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키를 잃었는가?”
 
 
“아닙니다.”
 
 
곧 거이산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비록 파도가 험악하고 사세가 급박하지만, 배는 실로 튼튼하여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겠다. 만약 물을 퍼내어 버릴 수만 있다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실로 몸이 건장하니 네가 다시 가서 물을 퍼내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거이산은 곧 명령에 따라 물을 퍼내려고 하였으나, 물푸는 그릇이 이미 모두 부서졌으므로 큰 소리로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안의가 즉시 칼로 작은북의 한 면을 찢어 버리고는 이를 그릇으로 삼아 거이산에게 주었습니다. 거이산은 이효지 · 권송·도종·현산 등과 함께 힘을 다하여 물을 퍼내었지만 그래도 무릎 깊이의 물이 남았습니다. 효자 · 정보 · 이정 · 김중 등이 몸소 물을 퍼내기도 하고, 군인 구질회 등 7-8명을 서서 독려하며 서로 잇달아 물을 다 퍼내어 내니 겨우 침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명: 막금, 거이산, 안의, 김속, 이효지, 권송, 도종, 현산, 효자, 정보, 이정, 김중, 구질회
 
심리: 불안, 결의, 독려
 
심리(최부): 의연
 
비유: 하늘이 우리를 꼭 살리실 마음이 있는 듯하다
 
리더십: 너희는 각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힘쓴 다음, 큰 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지리: 동풍, 북풍, 서쪽, 사나운 물결
 
시간: 해가 저무니, 한밤중이 되지 않았을 때
 
 
제도(관직): 영선, 군인
 
기물: 홑이불, 칼, 작은북
 
사건: 자살미수
 
모화: 중국은 우리 부모의 나라이다
 
경천: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것은 모두 하늘이 하는 일이며, 순풍이 불고 역풍이 부는 것도 하늘이 실제로 주재하고 있다, 하늘이 우리를 꼭 살리실 마음이 있는 듯하다, 하늘의 명
 
 
7th Day. Adrift in the Open Ocean. This day was cloudy. The wind was very bad, and the waves were heavy. The sea was white.
 
Ch'ae Ku-he, the Junior Director of Sõnúi District, had said to me, “The old men of Cheju say that if you climb to the top of Mt. Halla on a clear day and look southwest to the farthest reach of the sea, there seems to be a strip of white sand.” Now that I saw this, it was not white sand but this white sea that they saw and spoke of.12 .
 
I said to Kwon San and others, “In the Koryo period Cho Tae-won of your Cheju caught favorable winds from Myongwöl-p'o, kept a direct course, and crossed the ocean through the White Sea in seven days and nights. Now we cannot tell whether our drifting through the sea has been on a direct or erratic course. Since we have been fortunate enough to enter the White Sea, I suspect that the coast of China must be near. If we manage to land in China, well, China is our homeland. Right now, whether we live or die is up to Heaven. Whether the wind is favorable or otherwise is also at the disposition of Heaven. The east wind has not changed now for several days, so I suspect Heaven intends to let us live. Let each of you be diligent in the things that are within the power of men and accept the fate [decided] by Heaven.”
 
With evening, the wind again shifted from east to north. Kwon San still held the tiller bearing west. The night was not yet far advanced when violent waves rose wildly. They again broke over the mat awning, striking the men's heads and faces. All the men closed their eyes and could not open them. The captain and helmsman wept bitterly and did not know what to do. I, too, knew that we could not escape death. I ripped a sheet into strips, bound my body several times round, and fastened myself to a cross-beam of the boat, for I wished that after I died my corpse and the boat should not be separated for a long time.
 
Makkům and Kõisan wept. They both embraced me and said, “We shall even go to death together.”
 
An Üi wept loudly and said, “Rather than die from swallowing salt water I will kill myself.” He tried to strangle himself with a bow string, but Kim Sok saved him from dying.
 
I called out to the captain and helmsman, “Is the boat stove??' They said, “No.” I said, “Is the tiller lost?” They said, “No."
 
Then I turned to Kõisan and said, “The waves are dangerous and matters grave, but actually the boat is sound. It will not easily be lost. If we can keep on bailing to the very end, we may save our lives. You are strong, you go start the bailing.”
 
On receiving my command, Kõisan wanted bailing to be done, but the bailing buckets were completely smashed. There was no means to carry out the order. An Ui split off small drum heads with a knife to make buckets and gave them to Kõisan. Kõisan, Yi Hyo-ji, Kwon Song, To-jong, and Hyon San bailed water with all their might. It seemed to be knee-deep. Hyo-ja, Chòng Po, Yi Chong and Kim Chung either scooped up water themselves or oversaw seven or eight soldiers, including Kujilhoe. Going one after another, they scooped it all out. We had barely managed not to be sunk.
 
 
[[1월 7일.lst]]
 
 
===8일===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정오를 지나자 서북풍이 또 불었습니다.
 
 
배는 다시 뒤로 물러나 동남쪽을 향하여 밤새도록 갔습니다.
 
 
신은 권산·고면 · 이복 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키를 잡아 배를 바로잡고 있으니 방향을 몰라서는 안 된다.
 
 
내가 일찍이 지도를 훑어보니 우리나라 흑산도에서 동북쪽으로 향해 가면 곧 우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8237 충청도]<ref>[http://h21.hani.co.kr/arti/reader/together/29528.html 동서로 갈라져 있는데 왜 충청동도, 충청서도가 아닌가요? 한겨레신문, 2011.05.03] </ref>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5385 황해도]<ref>[http://www.cybernk.net/infoText/InfoFolkDetail.aspx?mc=FF0102&sc=C112120&direct=1 황해도의 음식]</ref>의 경계이며, 정북방은 곧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923 평안도]<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1&index_id=cp03012396&content_id=cp030123960001&print=Y ]</ref>의 경계이며, 정북방은 곧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923 평안도]<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1&index_id=cp03012396&content_id=cp030123960001&print=Y 평안도 평양]</ref>와 중국의 요동(遼東)<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11825/1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신동아, 2013.01.22]</ref><ref>[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626249.html 마오쩌둥 ‘요동은 원래 조선 땅’ 발언 확인, 한겨레신문, 2014.02.28]</ref><ref>[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501 요동(철령)은 대대로 고려의 강역 (1부)]</ref> 등지요, 서북방은 곧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hjang3&logNo=140177130445&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우공(禹貢)]에 나오는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HUF5&articleno=5480218 청주(靑州)]<ref>[https://youyue.co.kr/1047 고대도시 청주의 역사문화거리에서]</ref>와 [https://ko.wikipedia.org/wiki/%EC%97%B0%EC%A3%BC_(%EC%A4%91%EA%B5%AD) 연주(__州)] 지역이며, 정서방은 [https://news.joins.com/article/11210311 서주(徐州)]<ref>[http://www.ktnbm.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29 서주 직항편 타고 둘러 본 문화역사 현장, 한국관광신문, 2013.06.09</ref><ref>[https://m.blog.naver.com/businessinsight/221293676681 부유한 교통의 요지 서주는 왜 군벌의 각축장이 되었나]</ref>와 [https://ko.wikipedia.org/wiki/%EC%96%91%EC%A0%80%EC%9A%B0%EC%8B%9C 양주(揚州)] 지역이다. 송(宋)나라 때 고려와 교통할 적에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185&content_id=rp070201850001&search_left_menu=4 명주(明州)]에서 바다를 건너왔으니<ref>[http://www.memoryhonam.co.kr/sub10/sub02_detail.php?page=715&SeCate=&index=&searchword=&seq=2348 김양감]</ref><ref>[http://www.kwangsankim.co.kr/tech/board.php?board=pds&page=6&command=body&no=509 광산김씨대종보 제218호(7월 20일 발행) 2면 빛을 남긴조상님 <문안공 김양감> 편을 보고]</ref><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51FA&articleno=15904851&categoryId=713274&regdt=20130815065220 고려의 사신 김양감, 중국 제1시인 소동파와 교류하다]</ref><ref>[http://culturecontent.kr/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2&cp_code=rp0702&index_id=rp07020230&content_id=rp070202300001&search_left_menu=4 고려거상 풍물지, 정해 定海]</ref><ref>[https://www.culturing.kr/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212&content_id=rp070202120001&print=Y 남방항로 南方航路]</ref>, 명주는 곧 대강(大江) 이남의 땅이며, 그 서남방은 곧 옛날의 민(閩)지방<ref>[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4/12/1547120/ 매일경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역사를 찾아서 2014.12.19]</ref><ref>[복건성 민남인은 어떻게 화교가 되었나 http://aocs.inu.ac.kr/webzine/app/view.php?wp=328]</ref><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cQxa&articleno=2006&categoryId=26&regdt=20170823155002 중국오대십국]</ref>으로서 지금의 [https://ko.wikipedia.org/wiki/%ED%91%B8%EC%A0%A0%EC%84%B1 복건로(福建路)]<ref>[http://www.travelchina.gov.cn/sitefiles/gjly_ko/html/meijing/1944.shtml 복건토루(福建土楼)용정, 남정(永定·南靖)]</ref><ref>[http://m.blog.daum.net/gkdrndpdlfqjswl39/16540012 宋,元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복건토루(福建土樓)]</ref><ref>[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132536#09T0 중국의 유태인 객가인의 성공비결은? 프레시안, 2016.01.15]</ref><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906100066 푸젠(福建) 상인
 
“필사적으로 임해야 비로소 이길 수 있다”, 월간조선, 2009.6월호]</ref><ref>[http://eiec.kdi.re.kr/publish/nara/column/view.jsp?idx=11882 숨겨진 미개척 시장, 중국 푸젠(福建)성을 보라!, 나라경제, 2019년 01월호]</ref>요, 서남방을 향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면 곧 섬라(__羅)<ref>[http://egloos.zum.com/songij21/v/1942463 황청직공도-섬라국]</ref><ref>[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347847#cb 흑인용병, 임진왜란에 참전하다]</ref><ref>[http://theme.archives.go.kr/next/pages/new_newsletter/2017/html/vol_77/sub02.html 태국, 700여년 교류 임진왜란 때는 연합군 참전 자청, 국가기록원]</ref>4 점성(占城)<ref>[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20_0489_0010_0340 점성국(占城國)이 진랍(眞臘)에 귀속됨, 중국정사외국전, 동북아역사넷]</ref>5. [http://contents.kocw.or.kr/KOCW/document/2014/korea/leehaewon/18.pdf 만랄가(滿刺加)]<ref>[https://jmagazine.joins.com/art_print.php?art_id=288705 강명관의 물건의 역사 >> 안경 ①, 중앙시사매거진]</ref> 등의 나라요, 정남방은 곧 [http://www.culturecontent.com/dictionary/dictionaryView.do?cp_code=cp0602&dic_seq=63 대유구국(大琉球國), 소유구국(小琉球國)]<ref>[http://m.blog.daum.net/shanghaicrab/16156449?np_nil_b=1 대만(臺灣)과 유구(琉球)의 역사연원]</ref>이요, 정남방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면 곧 여인국(女人國)<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9140]</ref><ref>[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0/10/2006101077038.html 세조 때… “조선의 동남쪽 어딘가에 여인국(女人國)이”, 주간조선]</ref>과 일기도(一岐島)<ref>[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07024_001 겸판예조사 강맹경 등이 왜 호군 등구랑에게 구주의 토지·부락에 관하여 묻다, 세조실록 1권, 세조 1년 7월 24일 정유 1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ref>요, 정동방은 곧 일본국과 대마주(對馬州)<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213&content_id=rp070202130001&search_left_menu=4 고려거상 풍물지 대마 對馬]</ref>이다.
 
 
지금 배가 풍랑에 표류된 지 닷새 동안 밤낮으로 서쪽을 향하여 갔는데, 거의 중국의 땅에 닿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행하게도 또 이 서북풍을 만나서 동남방으로 거슬러 가게 되니, 만약 유구국과 여인국에 이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해(天海) 밖으로 흘러 나가서, 위로 은하수에 닿게 되어 가이없는 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니, 어찌 할 것인가?
 
 
너희들은 내 말을 기억하고서 키를 바로잡고 가야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권산 등은 “날이 개어 해와 달 그리고 별자리로 헤아린다고 해도 해상에서는 사방을 가리기 힘든데, 지금은 구름과 안개가 짙게 드리운 것이 여러 날 계속되어 새벽인지 저녁인지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바람의 변화만으로 사방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오니, 어찌 바른 방향을 가려내어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지리: 바다, 대강(大江) 이남의 땅
 
기후: 흐렸습니다, 구름, 안개
 
지명: 흑산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중국의 요동(遼東), 청주, 연주, 양주(揚州), 명주(明州), 민(閩)지방, 복건로(福建路), 섬라(暹羅), 대유구국(大琉球國), 소유구국(小琉球國), 여인국(女人國), 일본국, 대마주(對馬州)
 
 
인명: 권산, 고면, 이복
 
심리: 불안
 
 
기물: 지도, 우공
 
 
역사: 송나라, 고려, 민(閩)지방
 
 
제도(교통): 배
 
사건: 표류
 
 
8th Day. Adrift in the Ocean. This day was cloudy.
 
 
After noon a northwest wind again blew strong. The boat again turned off its course and headed southeast. We travelled through the night.
 
I said to Kwon San, Ko-myon, and I-hok, “In holding the tiller and trying to keep the boat steady, you must know where you are going. I have examined maps, and northeast from Hūksan Island of our country is the coast of our Ch’ungch’ong Province and Hwanghae Province. Due north are P'yong-an, Liao-tung, and such places. Northwest is the coast of the old Ch’ing-chou and Yen-chou of Yü kung. 13 Due west is the area of Hsü-chou and Yang-chou. In Sung times traffic with Koryo sailed from Ming-chou, which was the land from the Yangtze River south.14 Southwest is the old Min territory, the present Fu-chien-lu.15 South-southwest and then west are the countries of Siam, Champa, and Malacca. Due south are Great and Little Ryukyu. 16 Due south then east is I-ch’i-tao of Nü-jên-kuo. 17 Due east is Tsushima-shu of Japan. We have now drifted with the wind five days and nights, going west. I believe we almost reached Chinese soil, but then, unfortunately, we met this northwest wind and turned back to the southeast. If we do not reach Ryukyu or Nü-jênkuo, we shall sail out beyond the Sea of Heaven and rise through the Milky Way, and there will be no end. What are we to do then?
 
“Mark my words. Keep the helm steady.”
 
Kwon San and others said, “Even if the sky were clear and we could calculate by the sun, moon, stars, and planets, we still could not know the four directions of the sea. Now there are clouds, fog, and darkness day after day. We cannot even keep track of dawn and dusk, day and night. We only guess at the four directions from changes in the wind. How can we distinguish a right direction?” They huddled together and wept.
 
 
67.《尙書》의 篇名으로 중국 고대의 地理書이다. 중국을 九州로 나누어 각 지역의 산천, 교통, 물산과 貢賦 등을 서술하였다.
 
68. 九州의 하나로 지금의 山東 일대를 가리킨다.
 
69. 지금의 山東 일부와 河北 일대를 가리킨다.
 
70. 지금의 山東, 江蘇, 安徽 일대를 가리킨다. 기 지금의 江蘇 남부 일대를 가리킨다.
 
72. 境內에 四明山이 있던 데서 이름이 유래한 明州는 宋代에 市舶司가 두어져 高麗, 日本 등과의 주요 무역항이 되었는데 明 洪武14년(1381) 寧波府로 改名되었다.
 
73. 흔히 양자강이라 불려지는 長江을 말한다.
 
74. 샴 즉 오늘날의 타이를 말한다.
 
75. 참파 즉 오늘날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부 특히 베트남의 중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76. 말레이 반도 서남쪽의 항만도시인 말래카를 가리킨다.
 
77. 琉球는 일본 오끼나와(沖繩)의 옛 이름이다. 큐우슈우(九州)와 臺灣의 중간에 위치한 열도로 5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78. 여인들만이 산다는 전설상의 나라로 扶桑國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79. 對馬島와 九州의 사이에 있는 섬으로 九州의 마쓰우라(松浦) 반도 북서쪽 20km에 있다.
 
80. 對馬島를 가리킨다. 일본 九州와 한반도 동남단 사이에 위치한 섬이다. 지리적 조건으로 옛부터 韓日 양국 관계에서 중개 역할을 맡아왔다.
 
81. ?
 
 
*우공이 한서리지리의 우공인가? 서경의 우공인가? 산해경의 우공인가?
 
 
[[1월 8일.lst]]
 
 
===9일===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하늘에 조각구름이 떠 있고 바다 빛깔이 더욱 희어졌습니다.
 
 
이제 배는 오랫동안 파도에 부딪혀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ontent_id=cp023100390001 양두(梁頭)]82 · 풍초(風__)83. 비우(鼻偶)<ref>[http://www.3asian.org/NFUpload/nfupload_down.php?tmp_name=20181025181232.2000.6.0&name=2018_10_27_%ED%95%99%EC%88%A0%EB%8C%80%ED%9A%8C+%EB%B0%9C%ED%91%9C%EB%AC%B8.pdf]</ref>84의 세 판자가 모두 흔들거리며 부러지려고 하였고, 물이 또 새어 들면서 저절로 파선이 되려는 조짐이 있었습니다.
 
 
근보, 고면, 상리 등이 닻줄을 끊어 뱃머리와 선미를 얽어매고 나무를 깎아 이를 보수하였습니다.
 
 
마침내 서로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와 같이 배를 수리하면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지만, 굶주림과 목마름이 열흘에 가까우니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고 손발은 마비되어 몸을 가누지 못해 힘을 다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배를 수리하여도 또한 튼튼하게 할 수 없으니 장차 어찌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다 갈매기가 떼<ref>[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51214/75343797/1 갈매기 떼―서수찬(1963∼)]</ref><ref>[https://www.scienceall.com/%ED%9E%88%EC%B9%98%EC%BD%95-%EC%8A%A4%EB%A6%B4%EB%9F%AC%EA%B0%80-%ED%98%84%EC%8B%A4%EB%A1%9C%EA%B0%88%EB%A7%A4%EA%B8%B0-%EB%96%BC%EC%9D%98-%EC%8A%B5%EA%B2%A9/ 히치콕 스릴러가 현실로…갈매기 떼의 습격]</ref>를 지어 날아갔습니다. 뱃사람들이 이를 바라보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물새는 낮에 바다 위에서 놀다가 밤에 섬 모래톱에서 잔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푸른 바다 만리 밖에서 표류해 와 다행히 이 새를 보게 되었으니 모래톱이 반드시 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갈매기<ref>[https://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free_board&id=60 우리나라 갈매기 종류]</ref><ref>[http://plug.hani.co.kr/crane/491264 갈매기의 귀족, 고대갈매기를 아시나요]</ref><ref>[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11231_00132 괭이갈매기]</ref>는 한 종류뿐이 아니므로 강가 호수의 모래톱에서 사는 것도 있지만, [https://news.joins.com/article/22311593 바다갈매기]는 바다 가운데 떼 지어 있다가 조수를 따라 날고 항상 3월에 바람이 불어야 모래톱과 섬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정월이므로 갈매기가 떼 지어 나는 것이 바로 큰 바다 가운데 있을 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0331_00317 바다가마우지]<ref>[https://www.youtube.com/watch?v=BxGfJfBH2nc]</ref> 몇 쌍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으므로 신 또한 어쩌면 섬이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오에 남쪽을 바라보니, 구름이 진(陣)을 치듯 퍼져 있고 어렴풋이 산 모양 같은 것이 보였으며 또 인가에서 불 때는 연기 같은 것이 있었으므로, 유구국의 땅이라 여겨 가서 정박하려고 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동풍이 또 일어나서 배는 다시 서쪽으로 향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바람이 더욱 거세어져 배는 나는 듯 빠르게 내달렸습니다.
 
 
인명: 근보, 고면, 상리
 
심리: 좌절, 탈진, 환희
 
심리(최부): 단정, 의심
 
비유: 진을 치듯 퍼져 있고, 산 모양 같은, 불 때는 연기 같은 것, 배는 나는 듯 빠르게 내달렸습니다
 
동물: 갈매기, 바다가마우지
 
시간: 정월, 정오, 밤
 
지명: 지명, 유구국
 
기후: 하늘에 조각구름, 바다 빛깔이 더욱 희어, 남쪽, 구름, 동풍, 바람이 더욱 거세어져
 
제도(교통): 배
 
기물: 양두, 풍초, 비우, 닻줄
 
사건: 표류
 
 
9th Day. Adrift in the Ocean. This day floating clouds dotted the sky. The sea was extremely white.
 
By now, the boat had been pounded by waves for a long time. Three beams, the ridge pole, wind strut, and bow sprit, were shivering and straining to split. Moreover, water was seeping in, and the boat was about to break up. Kūn-bo, Ko-myon, and Sang-ni cut line and bound the boat bow to stern.18 They shaved wood and caulked it. Then they looked at each other and wept. They said, "It is not that we do not put all our will into repairing the boat, but hunger and thirst have afflicted us for almost ten days. Our eyes see nothing, our hands and feet are paralyzed. We can neither nourish our bodies nor fully exert our strength. Though we repair it, therefore, we still cannot make it sound. What are we to do?”
 
Suddenly a flock of sea gulls flew by. When the men in the boat saw them, they joyfully said, “We have heard that water birds disport at sea by day and roost in islands at night. We have drifted across a vast ocean. Since, such a great distance out, we have the good luck to sight these birds, islands cannot be far.”
 
I said, “Gulls are not of one kind only. There are some that bob about the islands of rivers and lakes. If they are ocean gulls, the flocks soar with the tides in the vast sea. Usually they only return to their islands when the winds of the Third Month come. Since it is now the First Month, it is just the time when the flocks of gulls are flying in the open ocean.” Before I had finished speaking, we saw several pairs of fishing cormorants fly past. I, too, wondered a little whether islands were perhaps near.
 
At noon we looked south. There were banks of clouds and, obscurely, the shapes of mountains. There was, too, an atmosphere of human settlement. I felt it was a shore of Ryukyu. We were going to go there and moor when in an instant an east wind again rose strongly, and the boat again headed west. With night, the force of the wind was very strong. We scudded along as if flying.
 
 
82. 뱃머리의 橫梁.
 
83. 키의 꼬리부분.
 
84. 뱃전의 널판지.
 
85. ?
 
86. ?
 
87. 虛空을 가리킨다. 허공의 넓음을 바다에 비유한 말이다.
 
 
[[1월 9일.lst]]
 
 
===10일===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리고 동풍이 어제처럼 불었습니다.
 
 
오후에는 바다 빛깔이 도로 푸르러졌습니다.
 
 
이에 앞서 제주도를 떠날 때 뱃사람이 무지한 탓으로 식수를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10&cp_code=cp0232&index_id=cp02320147&content_id=cp023201470001&search_left_menu=3 거룻배]85에 신고 따르게 하였는데, 풍랑에 표류된 뒤로는 서로 어긋나서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타고 있는 배에는 물 한 그릇이 없어 밥을 지을 수 없었습니다.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실 수 없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권송이 신에게 말하기를, “보아 하니 배 안의 사람들 가운데는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51229/75618760/1 황감(黃柑)]<ref>[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5300]</ref> 6과 청주(淸酒)<ref>[http://weekly.donga.com/3/all/11/1656750/1]</ref>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마구 먹어서 남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청컨대 이를 한 데 모아 배 위의 창고에 운반하여 저장했다가 목마름을 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거이산에게 명하여, 배 안의 행장을 모두 뒤지게 하여 황감 50여 개와 술 두 동이를 얻었습니다.
 
 
손효자에게 말하기를, “배를 함께 탔으면 호인(胡人)과 월인(越人)<ref>[http://andameero.com/archives/128]</ref>도 한 마음일 터인데, 하물며 우리들은 모두가 한 나라 사람으로서 정은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4325 골육지친(骨肉之親)]과 같으니,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이 감과 술은 한 방울이 천금과 같다. 네가 이를 맡아서 함부로 쓰지 말고, 배에 탄 사람의 절박한 목마름을 풀어 주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효자가 사람들 가운데 입술이 타고 입이 마른 사람을 보아서 고루 나누어 마시게 하여 겨우 혓바닥만 적시게 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황감과 술이 모두 없어지니 어떤 사람은 마른 쌀을 잘게 씹고 제 오줌을 받아 마셨지만, 얼마 안 가 오줌마저 없어지고 가슴속이 건조해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마침 비가 내리니 배 안 사람들이 손으로 봉옥의 처마를 들고 거기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기도 하고, 모자를 그릇삼아 아래로 떨어지는 빗물을 모으기도 하고, 돗자리를 구부려 뿌려지는 빗물을 받기도 하고, 돛대와 노를 세워 중간에 종이끈을 묶어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기도 하면서 한 잔 물이라도 기어코 얻어서 혀로 핥았습니다.
 
 
안의가 말하기를,“옷에 비를 적셔 이를 짜서 마신다면 얻는 바가 실로 많을 터이지만, 뱃사람의 옷은 모두 바닷물에 젖어 비록 비에 적셔 짜내더라도 마실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간수해 둔 옷 몇 벌을 찾아내어 최거이산에게 비에 적신 뒤 이를 짜게 하니 거의 몇 병이 되었습니다.
 
 
김중으로 하여금 숟가락으로 이를 나누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김중이 숟가락을 집어 들면 배 안 사람들이 입을 벌리기를 마치 제비 새끼가 먹이를 먹여주기를 바라는 듯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혀를 움직이고 숨을 쉴 수가 있어 조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85. 돛이 없는 작은 배.
 
86. 밀감의 일종으로 잘 익어서 빛깔이 누렇게 된 홍귤을 뜻한다. 《東國輿地勝覽》 제38권, 濟州牧 조항을 보면 제주의 물산으로 柑과 이 있는데 귤에는 金, 山橘, 洞庭橘, 倭, 靑橘의 다섯 종류가 있고 감에는 黃柑과 乳柑 등 몇몇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한편 《朝鮮成宗實錄》16년 10월 11일조 기사에 “제주에는 橘柑이 많이 생산된다"는 언급이 있다.
 
87. 胡는 북쪽, 越은 남쪽에 위치하니, 서로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풍속에도큰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胡越'은 《淮南子》 권2, 淑眞訓 편의 “是故自其異者視之, 肝膽胡越”에서 유래한다.
 
88. 부모와 자식처럼 지극히 가까운 사이를 뜻한다. 출전은 다음과 같다.
 
“故父母之於子也,子之於父母也,一體而兩分,同氣而異息,若草葬之有華實也,若樹木之有根心也,雖異處而相通,隱志相及,痛疾相敬,憂思相感,生則相歡,死則相,此之謂骨肉之親.” 《呂氏春秋》, 〈紀部), 第九卷, 第五篇, 精通.
 
 
인명: 권송, 효자, 안의, 김중,
 
심리(최부): 화, 좌절, 희망
 
심리: 절박, 필사적, 희망
 
리더십: 신은 즉시 거이산에게 명하여,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한다, 최거이산에게 비에 적신 뒤 이를 짜게 하니,
 
비유: 골육지친(骨肉之親)같으니, 한 방울이 천금과 같다, 마치 제비 새끼가 먹이를 먹여주기를 바라는 듯
 
 
지리: 바다, 동풍, 바다 빛깔이 도로 푸르러졌습니다, 풍랑
 
기후: 비가 내리니
 
시간: 오후
 
지명: 제주도,
 
식물: 황감, 쌀
 
고사: 호인(胡人)과 월인(越人), 골육지친(骨肉之親)
 
 
풍습(음식): 식수, 황감, 청주, 쌀
 
풍습(의복): 옷
 
제도(교통): 배, 거룻배
 
사건: 표류
 
기물:행장, 동이, 모자, 돗자리, 돛대, 노, 종이끈, 숟가락
 
 
10th Day. Adrift in the Ocean. This day it rained.
 
 
An east wind, as on the day before. After noon the sea became green again.
 
Previously when we had left Cheju, the boatmen had unwisely loaded water from land into a tender to be towed after us. After drifting away with the wind, we were separated from it and lost it. There was not one container of fresh water in the boat. We were not able to boil water or cook food and had nothing to eat or drink. We were in a desperate condition. Kwon Song told me, “I have noticed that some of the men in the boat brought yellow oranges and refined wine, and they are greedily eating them up. Let us have them collected and taken to the upper storehouse. We can store them and relieve our thirst with them.”
 
I ordered Kõisan to search through all the baggage in the boat. He got more than fifty yellow oranges and two jugs of wine.
 
I said to Son Hyo-ja, “When they are together in a boat, men of Hu and Yüeh are like one. 19 That is even more so with us, all men of one country, of the same flesh and bones. If we are to live, let us all live at the same time. If we are to die, let us all die at the same time. These oranges and this wine are all there are. One drop is worth a thousand pieces of gold. You take charge, therefore, and do not waste any, so that they can be used to relieve the thirst of the men in the boat.”
 
Hyo-ja inspected the men and gave those whose lips were parched and mouths cankerous some oranges and wine to eat and drink. He gave them only enough to moisten their tongues.
 
In a few days both the oranges and wine were consumed. Some of the men chewed dried rice grains fine and caught their urine in their hands to drink. Before long the urine, too, dried up. Their diaphragms dry and burning, unable to utter sounds, they were almost dead.
 
At that point, rain fell. Some of the boatmen held up the awning flaps and caught the drops, and some used rain hats and cauldrons to gather the drops. Some curved mats and got them, and some tied paper strings20 to the mast and oars and took what dripped down. [By these means] they hoped to get some water and lick it off with their tongues.
 
An Ui said, “If we took the moisture from clothing wet by the rain and drank it, we should really get a good deal. But the boatman's clothes have all been soaked by salt water. Even if we soaked them in the rain for moisture, we could not drink it. That being the case, what can be done?”
 
I then picked and brought out several pieces of clothing that had been stored. I ordered Kõisan to let them be soaked with rain and to collect the moisture from them. It came to several jars, I ordered Kim Chung to ration it with a spoon and let [the men] drink. Chung raised the spoon, and the boatmen opened their mouths wide, like fledgling swallows waiting to be fed. Only afterwards were they able for the first time to move their tongues and belch. They felt a little more like living.
 
 
[[1월 10일.lst]]
 
 
===11일===
 
十一日, 漂大洋中, 是日陰, 清晨至一島, 石壁嵯峨甚險峻,海波震荡,激上____,幾一二丈. 丹隨波直入,勢迫擊碎,權山大哭,遂竭力運船,孝子、程保等,亦親攬帆邊阿綱,視風波或縱或引,時則水從海入島,風從島出海, 舟從風回旋,得免於患,夕至一大島,島又岩石立,欲泊舟不得,以福脫衣躍入水中,搜舟游泳,綠島岸以繫,舟人喜倒蘭下寬溪流,不甘水而飲,負没欲做飯,臣曰:“飢餓之極,五臟塗附,若賺得食飽,則必死,莫若先飲藥水,繼之以粥,適可而止可也.”舟人皆颜粥而吸,島無避風風處,故夜又縱舟而去.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한 섬에 도착하니 석벽이 우뚝 솟아 매우 험준하였습니다.
 
 
바다 물결이 넘실대다 석벽에 부딪치면 거의 [https://smart.science.go.kr/scienceSubject/maths/view.action?menuCd=DOM_000000101001006000&subject_sid=282 1-2장(丈)]을 솟구쳤습니다.
 
 
배가 물결을 따라 곧장 들어가 부딪쳐 부서질 지경이 되니, 권산은 크게 울부짖다가 마침내 있는 힘을 다하여 배를 몰았습니다.
 
 
효자와 정보 등도 또한 돛대 가의 밧줄을 직접 잡고 풍랑을 보아가며 놓아주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물이 바다로부터 섬 쪽으로 들어가고 바람은 섬으로부터 바다 쪽으로 나오니, 배가 바람을 따라 휘돌아 나와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저녁에 어떤 큰 섬에 도착하였는데 섬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하였으므로, 배를 대려고 해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이복이 옷을 벗고는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배를 끌고 헤엄을 쳐서 섬 기슭에 붙들어 매었습니다.
 
 
배 안 사람들은 기뻐하며 구르듯이 마구 뛰어 내려가 시냇물을 찾아 손으로 움켜 달콤한 물을 떠 마시고는, 물을 지고 와서 밥을 짓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굶주림이 극도에 달하면 오장이 말라붙게 되는데 만약 갑자기 밥을 배부르게 먹는다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먼저 미음을 마신 뒤 죽을 먹되 적당히 먹고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배 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끓여서 먹었습니다.
 
 
섬에는 바람을 피할 곳이 없었으므로 밤에 또 배를 풀어서 떠났습니다.
 
 
기후: 흐렸습니다
 
지명: 바다, 큰 섬, 섬 기슭
 
기후: 배가 물결을 따라 곧장 들어가 부딪쳐 부서질 지경,물이 바다로부터 섬 쪽으로 들어가고 바람은 섬으로부터 바다 쪽으로 나오니
 
시간: 새벽, 저녁, 밤
 
풍경: 석벽이 우뚝 솟아 매우 험준, 섬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
 
 
인명: 효자, 정보, 권산, 이복
 
인물: 이복이 옷을 벗고는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배를 끌고 헤엄을 쳐서
 
리더십: 먼저 미음을 마신 뒤 죽을 먹되 적당히 먹고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비유: 부서질 지경, 섬은 바위가 깎아지른 듯
 
심리: 좌절-->필사적, 환희
 
 
풍습(의복): 옷
 
풍습(음식): 물, 밥, 미음
 
기물: 돛대, 밧줄
 
사건: 표류
 
 
11th Day. Adrift in the Ocean. This day was cloudy.
 
At dawn we came to an island that had sheer stone precipices and was extremely forbidding. The sea was heavy, and the waves dashed up the rocks some ten or twenty feet. The boat was following the waves directly in, threatening a crisis in which we should be broken to bits. Kwon San wept loudly and then tried with all his strength to turn the boat. Hyo-ja and Chong Po seized the ropes along the edge of the sail and pulled on them or let up according to the direction of the wind and waves. At the time, the current was from the sea to the island, and the wind was from the island to the sea. The boat followed the wind and turned back, and we avoided disaster.
 
In the evening we came to a large island. It, too, had cliffs and rocks rising steeply. We wanted to moor the boat but could not. I-hok took off his clothes, jumped into the water, and swam ahead, guiding the boat. He climbed the shore of the island and fastened the boat to it. The men, overjoyed, tumbled out recklessly, sought out a stream, took the fresh water in their cupped hands, and drank. Turning from drawing the water, they wanted to prepare food. I said, “In the extremity of hunger the five organs are stuck together. If you suddenly eat to the full, you will surely die. It is better first to drink rice water and follow it with congee. You should stop when you have had the right amount.” The boatmen all boiled congee and sipped it.
 
Since there was no place to escape the wind on the island, at night we freed the boat and went.
 
 
[[1월 11일.lst]]
 
 
===12일===
 
十二日,遇贼于寧波府界,是日,午陰乍雨,海色還白,哺,至巨島,連綿如屏,望有中船二艘,皆帶懸居,直指臣船而來,程保等羅跪臣前,曰:“凡事有經有權,請解喪服,權着紗帽團領,以示官人之儀,不然則彼必哄我為劫賊,加以修辱矣.”臣曰:“漂流海上,天也,屢經死地而復生,天也,到此島而遇此船,亦天也,天理本直,安可違天以行詐乎?”俄頃,二船漸近相值,一船可十餘人,人皆穿黑橘榜芒鞋,有以手帕裏頭者,有着竹葉笠棕皮囊者,喧麼叫噪,渾是漢語,臣度其乃是中國人,全程保書紙以遺曰:“朝鮮國臣崔溥奉王命,往海島,奔父喪過海,遇風漂到,不知是何國邑地也?”
 
 
其人復曰:“此乃大唐國浙江寧波府地方,”又曰:“要到本國去,润到大唐好.”程保以手指其口,其人以陸水二桶來遺,掉丹東去,臣令人嚮入一島以依,又有一艘亦帶懸居,有軍人可七八人,其衣服語音,亦與前所見同.來逆臣船,曰:“你是何國人?”臣又使程保答如前,因問曰:“此何國?”其人指其島,曰:“此即大唐寧波府地下山也,風水好,二日可回去,”臣又復:“他國人遭風萬死之餘,幸到大國之境,喜得復生之地,又問渠姓名謂誰,其人答曰:“我是大唐林大,你若大唐去,帶你進去,你有寶貨,可遺我:”臣答日:“僕奉使臣,非商賈者流,且漂流浮沈之後,安有寶貨乎?”即减米粮以之,其人受而復曰:“此山繫船,不怕西北風,但南風不好,隨我繫船,”引臣船指一泊舟島,曰:“此可泊可泊,”臣如其言,即往泊之,果無風風,環島中可藏船處也,其西岸有二草屋,如'''鮑作于'''家者,其人等泊舟于屋下,臣之同舟人,久久渴久勞久不寝寐之極,得食以食,得風定處以泊,困億支贏,相與
 
枕藉乎舟中,夜二更,所謂自稱林大者,率其黨二十餘人,或執鎗或帶刀而無弓箭,秉炬擁至,闖入臣船,賊魁書曰:“我是觀音佛,你有金銀,便須看,”臣答曰:“金銀非本國所產,初無有賣,”賊魁曰:“你若官人,豈不費來?
 
 
我當看看,”初臣及程保、李植、金重、孝子等,以濟州海外地,往來無期,具四節衣服數套而往,至是賊魁即叫其黨,窮搜臣及陪吏等包中衣裝、舟人糧物,輸載其船,其所遺者,若衣之濃沾鹹水者及諸般書册而已,賊中
 
 
p. 360
 
__一目者,惡之尤甚,程保謂臣曰:“賊之始至,示若從容,見我勢弱,剛成大賊,請一奮擊,以決死生:”臣曰:“我舟人皆以飢渴垂死之後,奪氣於賊,故賊乘勢肆暴,若與相搏,則我輩皆死於賊手,莫如盡付行李,以乞生活耳,”
 
賊魁又奪臣所賣印信、馬牌,納之懷袖,程保尾其後請還不得,臣曰:“船中有物,可盡取去,印與馬牌,乃國之信,私無可用,可還我.”賊魁以印牌還.繼出篷,與其黨列立船舷,喧嚣良久,旋入舟中,先脱程保衣榜,細而枚之,次以研刀,截臣衣紐,赤身脫,背手曲脚以綁之,以杖杖臣左臂七八下,曰:“你若愛生,便出金銀,”臣大號曰:“身可彎骨可碎,何所得金銀乎?”
 
 
賊不曉臣言,解臣轉,許以寫意,臣即寫之,贼魁怒,嗔目張喙,指程保而叫,指臣而叫,即更臣頭髮,還轉倒懸,荷刀指臣頸斷之,刀遍誤下右肩偶,刃舔在上,賊又荷刀將斬臣,有一賊來把荷刀之臂以泪之,賊黨齊聲大叫,莫知所謂,是時,舟人喘惧失常,奔竄無地,唯金重、巨伊山等,攤手拜跪,冀活臣命,俄而,賊魁蹂躏臣身,喝嚇人,引其黨而出,截去臣船牆諸緣,投諸海,遂以其船導緯臣船,指放大洋,然後乘其船遁去,夜已蘭矣.
 
 
[http://korean.ningbo.gov.cn/art/2017/2/28/art_1090_509953.html 영파부(寧波府)]<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7220 영파]</ref><ref>[http://boomup.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12/2014021204227.html]</ref>
 
<ref>[https://ningbo-travel.com/spot/#spot_area_a]</ref>
 
<ref>[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907246203Y]</ref>에서 해적
 
<ref>[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6744 황해 해양문명의 징검다리 저우산(舟山)군도, 중앙시사매거진, 201706호 (2017.05.17)]</ref>
 
<ref>[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3 중국해적, 명(明) 해금정책에 왜구와 결탁, 아틀라스뉴스, 2019.05.29]</ref>
 
<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8%81%ED%8C%8C%EB%B6%80%EC%A7%80%EB%B3%80(%E5%AF%A7%E6%B3%A2%E5%BA%9C%E4%B9%8B%E8%AE%8A) 영파부지변]</ref>
 
<ref>[http://m.kjdaily.com/article.php?aid=1515491701427468147 해상실크로드의 중국 거점, 영파 (6), 광주매일신문, 2018. 01.09]</ref>
 
<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712100043 대운하가 中國의 문화와 英傑을 낳았다!, 월간조선, 2007.12]</ref>을 만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다가 비가 오기도 하더니, 바다 빛깔이 도로 희게 되었습니다.
 
 
해질 무렵에 큰 섬에 이르렀는데, 섬이 병풍처럼 잇닿아 있었습니다.
 
 
바라보니 중선(中船) 두 척이 모두 거룻배를 매달고서 신의 배를 향하여 똑바로 왔습니다.
 
 
정보 등이 신의 앞에 빙 둘러 꿇어앉아 말하기를, “무릇 일에는 [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1436286 경상(經常)도 있고 권변(權變)]<ref>[http://blog.daum.net/spaceandtime/10429]</ref>도 있는 것이니, 청컨대 상복<ref>[https://thegoms.tistory.com/tag/%ED%91%9C%ED%95%B4%EB%A1%9D 최부 뜻밖의 중국 견문]</ref>을 벗고<ref>[http://www.atlasnews.co.kr/news/curationView.html?idxno=805 위기의 시대에 벌어진 조선의 예송논쟁, 아틀라스뉴스, 2019.08.10]</ref> 임시로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7049 사모(紗帽)]와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6928 단령(團領)]을 착용하여 관인(官人)의 위의(威儀)를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도적이라고 떠들어 대며 욕을 보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해상에서 표류하게 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여러 번 사지(死地)를 거쳤지만 다시 살아난 것도 하늘의 뜻이고, 이 섬에 도착하여 이 배를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다. 천리(天理)는 본래 곧은 법인데, 어찌 천리를 어기면서 거짓을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두 배가 점차 가까워져서 서로 만났습니다. 한 배에 약 10여 명이 타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모두 검은 솜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었으며, 그중에는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 맨 사람도 있었고, 대나무 잎으로 만든 삿갓과 종려(綜) 껍질로 만든 도롱이를 입은 사람도 있었는데, 요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모조리 중국말이었습니다. 신은 그들이 중국 사람인 줄 짐작하고 정보를 시켜서 종이에 글을 써서 건네기를, 조선국(朝鮮國)의 신(臣) [http://www.rootsinfo.co.kr/info/roots/view_people.php?id=8747 최부]는 왕명을 받들고 해도(海島)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바다를 건너가던 도중,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이 어느 나라 고을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회답하기를, “이곳은 곧 대당국(大唐國)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812100045&page=1 동북아 국제무역의 중심지 寧波 樂賓館에서는 고려 상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월간조선, 2018.12]</ref> 지방이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본국으로 돌아가려면 대당(大唐)으로 가는 것이 좋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의 입을 가리켜 보이니, 그 사람들은 먹을 물 두 통을 가지고 와서 주고는 노를 저어 동쪽으로 가 버렸습니다.
 
 
신은 배 안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노를 저어 한 섬에 들어가서 대게 하였습니다. 또 다른 배 한 척도 거룻배를 달고 있고 군인 7-8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의복과 말소리는 또한 앞에 보았던 자들과 같았습니다.
 
 
신의 배에 다가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또 정보에게 전과 같이 대답하게 하고는 이어서 물어보기를, “이곳은 어느 나라 땅이오?”라고 하니,
 
 
그 사람은 그 섬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곧 대당(大唐) 영파부의 하산(下山)<ref>[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04020969828 의문풀린 崔溥의 첫 중국 상륙지점, 한국경제, 2004.02.09]</ref>이오. 바람과 물길이 좋으면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타국 사람이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다행스럽게 대국(大國)의 땅에 이르러 다시 살아날 길을 얻게 되어 기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의 성명이 누군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대당의 임대(林大)요. 당신이 만약 대당으로 간다면 데리고 갈 터이니 보화(寶貨)가 있으면 내게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9%B8%EB%B0%A9%EC%82%AC%EC%8B%A0(%E5%A4%96%E6%96%B9%E4%BD%BF%E8%87%A3) 봉명사신(奉命使臣)]5이지 장사하는 무리가 아니며 또 바다에 표류하여 물에 떴다 가라앉았다 한 뒤인데 어떻게 보화가 있겠소?”라고 하고, 쌀을 덜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받고 나서 다시 말하기를, “이 산은 배를 매기에 서북풍은 걱정되지 않지만, 다만 남풍이 좋지 않으니 나를 따라와 배를 매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배를 인도하더니 배 댈 만한 섬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댈 만하오, 댈 만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의 말대로 곧 가서 배를 대었는데 과연 바람이 없었으며, 온 섬 안을 둘러보아 배를 매어 둘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 서쪽의 물가에는 초가집 두 채가 있었는데 보자기의 집 같았습니다. 그들은 배를 초가집 아래에 매었습니다.
 
 
신과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은 오랫동안 굶주리고 목말랐으며 지치고 잠자 지 못한 끝에 먹을 것을 먹게 되고 바람 잔 곳에 배를 대자 피로가 몰려들어 사지가 풀려서 배 안에서 서로를 베개 삼아 이내 곯아 떨어졌습니다.
 
 
밤 2경에 자칭 임대(林大)란 자가 그 무리 20여 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창을 쥔 자도 있고 칼을 찬 자도 있었지만 활과 화살은 없이 횃불을 잡고 들이닥쳐 신의 배 안으로 마구 들이닥쳤습니다.
 
 
해적의 괴수가 글로 써 보이기를, "나는 관음불(觀音佛)이라 네 마음을 뚫어본다. 네가 금은을 가지고 있으니 찾아보겠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금은은 본국에서 생산되지 않아서 처음부터 가져온 것이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벼슬아치라면 어찌 금은을 가지고 오지 않았겠는가? 내가 찾아보아야겠다.”
 
 
당초 신 및 정보 · 이정 · 김중·손효자 등은, 제주도는 바다 밖의 땅이라 갔다 오는데 기약할 수 없다고 해서 사철 의복 몇 벌을 갖추어 갔습니다.
 
 
이 때 와서 해적의 괴수는 곧 그 무리들을 큰 소리로 불러서 신 및 배리(陪吏)들의 보자기 속에 있는 의류와 뱃사람의 양식 등을 샅샅이 뒤져 가지고 가 그들의 배에 실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것은 바닷물에 흠뻑 젖은 옷과 여러 종류의 서책(書冊)뿐이었습니다.
 
 
해적 가운데 애꾸눈인 자가 특히 악독하였습니다.
 
 
정보가 신에게 말하기를, “해적이 처음 이르렀을 적에는 얌전하였는데, 우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더니 차츰 날강도로 변하였습니다.
 
 
청컨대 한 번 온 힘을 다하여 공격하여 사생결단을 내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우리 일행은 모두 굶주리고 목말라 거의 죽게 된 뒤이라 해적에게 기를 빼앗겼기 때문에 그들이 이러한 형세를 이용하여 포악한 짓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과 서로 싸운다면 우리들은 모두 해적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행장을 모조리 주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비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의 괴수가 또 신이 가졌던 [http://www.archives.go.kr/next/common/archivedata/render.do?filePath=2F757046696c652F70616c67616e2F313335373139353831353837352e706466 인신(印信)]과 마패를 빼앗아 그의 소매 속에 넣었습니다.
 
 
정보가 그 뒤를 따라가서 돌려주기를 청했으나 받지 못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배 안에 있는 물건은 죄다 가져 가도 되지만, 인신과 마패는 나라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4327 신표(信標)]라 사사로이 쓸 곳이 없으니 나에게 돌려주면 좋겠소”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의 괴수는 인신과 마패를 돌려주었습니다.
 
 
봉창(蓬窓)을 나서더니, 그 무리들과 뱃전에 죽 늘어서서 한참 동안 떠들다가 배 안으로 도로 들어왔습니다.
 
 
먼저 정보의 웃옷과 바지를 벗기고 묶어놓고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 칼로 신의 옷고름을 끊고 옷을 벗겨서 알몸을 만든 뒤, 손을 뒤로 젖히고 무릎을 굽혀 결박하더니, 몽둥이를 가지고 신의 왼팔을 일곱 여덟 차례 때리고 난 뒤에 말하기를, “네가 만약 목숨이 아깝다면 얼른 금은을 내 놓아라”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몸뚱이가 문드러지고 뼈가 가루가 될지라도 어디에서 금은을 가져온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해적은 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므로, 신의 결박을 풀어주고는 그 의미를 글로 쓰게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썼더니 해적의 괴수는 노하여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정보를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신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지르고 나서 곧 신의 머리채를 끌어당겨 도로 묶어 거꾸로 매달고는 칼을 메고 신의 목을 베려고 하였지만, 칼을 마침 오른쪽 어깨로 잘못 내렸고 칼날이 뒤집혀져 있었습니다.
 
 
다시 칼을 메고 신의 목을 베려고 할 때 한 해적이 와서 칼을 멘 자의 팔을 잡아 이를 저지시켰습니다.
 
 
해적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러 크게 떠들어 댔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뱃사람들은 두려워 제정신을 잃고 쥐새끼처럼 구석구석 숨어버렸습니다.
 
 
김중과 최거이산 등만은 손을 모아 절하고 꿇어앉아서 신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해적의 괴수가 신의 몸뚱이를 짓밟고, 뱃사람들을 공갈 협박하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나가면서 신의 배의 닻, 노 등 여러 가지 기구를 끊어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배로 신의 배를 끌어 큰 바다 가운데 놓은 다음 배를 타고 도망가 버렸는데 밤은 이미 깊었습니다.
 
 
인명-중국: 임대(林大)
 
심리-중국: 친절-->난폭, 분노 (해적)
 
 
지명-중국: 영파부
 
기후-중국: 흐렸다가 비가 오기도 하더니, 서북풍, 남풍, 바람이 없었으며, 바다 빛깔이 도로 희게, 큰 섬, 동쪽
 
지명-중국: 대당국(大唐國)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 대당(大唐) 영파부의 하산(下山)
 
풍경-중국: 서쪽의 물가에는 초가집 두 채가 있었는데 보자기의 집 같았습니다, 섬이 병풍처럼
 
시간-중국: 해질 무렵, 밤, 밤 2시경
 
 
제도(교통)-중국: 중선, 거룻배, 배
 
기물-중국: 통, 노, 창, 칼
 
사회-중국: 벼슬아치라면 어찌 금은을 가지고 오지 않았겠는가?
 
풍습(음식)-중국: 물
 
풍습(의복)-중국: 검은 솜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었으며, 그중에는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 맨 사람도 있었고, 대나무 잎으로 만든 삿갓과 종려(綜) 껍질로 만든 도롱이를 입은
 
사건-중국: 해적, 매질
 
사회-중국: 해적, 네가 만약 목숨이 아깝다면 얼른 금은을 내 놓아라
 
 
사상-중국: 관음불(觀音佛)
 
 
사건-조선: 부친상
 
사회-조선: 관인(官人)의 위의(威儀)
 
인명-조선: 정보, 최부, 김중, 최거이산
 
유학: 신의 앞에 빙 둘러 꿇어앉아 말하기를, 경상(經常), 권변(權變), 왕명
 
제도(관복)-조선: 사모(紗帽), 단령(團領)
 
제도(교통)-조선: 배
 
경천-조선: 하늘의 뜻
 
리더십: 천리(天理)는 본래 곧은 법인데, 어찌 천리를 어기면서 거짓을 행할 수 있겠는가?
 
심리-조선: 피로, 안심, 공포
 
기물-조선: 서책, 인신(印信), 마패, 닻, 노, 해도
 
풍습(음식)-조선: 쌀
 
리더십: 만약 그들과 서로 싸운다면 우리들은 모두 해적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행장을 모조리 주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비는 것만 못하다, 배 안에 있는 물건은 죄다 가져 가도 되지만, 인신과 마패는 나라의 신표(信標)라 사사로이 쓸 곳이 없으니 나에게 돌려주면 좋겠소,
 
모화: 대국(大國)의 땅
 
제도(관직)-조선: 봉명사신(奉命使臣)
 
지명-조선: 제주도
 
풍습(의복)-조선: 사철 의복, 의류
 
풍습(음식)-조선: 뱃사람의 양식
 
 
12th Day. An Encounter with Pirates at the Boundary of Ning-po Prefecture. This day was cloudy and sometimes rainy. The sea was again white.
 
At dusk we came to large islands that lay opened out like a screen. We saw that there were two boats among them. Both carried small boats. They pointed directly at my boat and came toward us.
 
Chòng Po and others knelt round me and said, “In all things there are rules and exceptions to the rules. Please take off your mourning clothes and, as an exception, wear your silk gauze cap and round collar and thus display the signs of an official. If you do not, they will make us out to be pirates and humiliate us.”
 
I said, “We have drifted at sea by the will of Heaven. We have repeatedly approached death and regained life by the will of Heaven. We have also arrived at these islands and met these boats by the will of Heaven. Heaven's principles are just. How can I go against Heaven to practice deceit?"
 
Very quickly, the two boats drew near and met us. In each boat there were about ten men, all of whom wore black, padded trousers and straw boots. Some had towels wrapped round their heads, and some wore bamboo-leaf rain hats and coir-bark raincoats.
 
They clamored and shouted loudly. It was all in Chinese, and I judged them to be men of China. I ordered Chòng Po to write sa message] on a piece of paper and send it to them. It said, “I, Ch'oe Pu, a minister of Korea, received the King's order to go to an island in the sea. I was hurrying to mourn for my father, and, crossing the sea, met a wind and drifted here. I do not know what land or district this is.”
 
The men answered, “This is the region of Ning-po Prefecture, Chekiang, China.” They also said, “If you want to reach your own country, it would be well for you to go to China [first].”
 
Chong Po pointed to his mouth with his hand. The men brought two buckets of fresh water and gave them to us. They rowed their boats away to the east.
 
I commanded the boatmen to scull into an island and seek shelter. There was another boat, which also carried a small boat and had about seven or eight soldiers. Their clothes and speech were the same as those of the men we had previously seen. They came to meet my boat and said, “What country are you from?”
 
I had Chòng Po answer again as before. Then we asked, “What country and place is this?”
 
The men pointed to the island and said, “This is Hsia-shan,21 in Ning-po
 
Prefecture, China. If the wind and water are right, you can return home in two days."
 
I replied, “We, men from a strange land, have encountered a storm and, despite ten thousand brushes with death, have been fortunate enough to reach the shores of China. We are happy to have reached a place where our lives are saved.” Then I asked them what their names were.
 
A man answered, “I am Lin Ta of China. If you are going to China, I shall accompany you. If you have valuables, you should give them to me.”
 
I answered, “I am an official on a mission, not a merchant. After drifting and bobbing about, furthermore, how could I have valuables?”'
 
I took rice from our rations and gave it to him. The man accepted it and replied, “If you moor your boat to this island you need not fear the northwest wind, but the south wind is not good. Follow me to moor it.” He led my boat to an island anchorage. He said, “Here, this is where you should moor.”
 
I did as he said. We went and moored the boat, and there was, true enough, no wind. It was a place ringed by the island, in which boats could find shelter. On the west shore were two thatched huts that looked like houses in which salt fish were prepared. The other men moored their boat below the huts. The men in my boat, at the extremity of prolonged hunger and thirst and having toiled without sleep for a long time, had got food and eaten and had got a place protected from the wind and moored. Then, exhausted, they dropped down in a jumble of limbs in the boat.
 
In the second watch of the night, the one who had called himself Lin Ta came at the head of his band of over twenty men, some carrying spears, some carrying swords, but without bows and arrows, and holding torches. They came without leave into my boat. The pirate chief wrote [a message] that said, “I am the Buddha Kuan-yin. I see through to your heart. You have gold and silver, and I am going to look for it.”
 
I answered, “Gold and silver are not produced by my country. I have not had any from the first.”
 
The pirate chief said, “If you are an official, how can you not have brought any? I'll take a look.”
 
Now I, Chòng Po, Yi Chong, Kim Chung, and Hyo-ja, because it was uncertain how long a voyage to Cheju and places at sea would take, had sailed with several pieces of clothing for all seasons. This pirate chief, now, shouted to his band to make a thorough search for clothes in my portmanteau and those of my secondary officials and for the boatmen's rations and to load them into his boat. They left behind only such things as the clothes drenched in salt water and all the books and documents.
 
Among the pirates there was a one-eyed one who behaved especially badly.
 
Chong Po said to me, “When the pirates first came, they showed something like courtesy. When they saw that we were weak, they gradually came to show their true colors. I suggest that we make one strong attack to decide who should die and who should live.”
 
I said, “Our boatmen, after being on the brink of death from hunger and thirst, have lost their courage before the pirates. The pirates, therefore, take advantage of the circumstances and inflict on us their violence. If we fought with them, our men would all die at the pirates' hands. It is better to give up all our baggage and beg for our lives.”
 
The pirate chief also seized the seal and horse permit that I had and put them into his sleeve. Chòng Po followed after him and asked him to return them but did not get them. I said, “Take away everything in the boat, but the seal and horse permit are symbols of state and of no use to unauthorized persons. You had better return them to me.” The pirate chief returned the seal and permit.
 
Then he went out the door of the shelter and stood lined up with his band on the gunwale of the boat. They argued noisily for some time and then came back into the boat. First, they took off Chòng Po's clothes, bound him and beat him. Next, they cut the frog of my gown with a sword and stripped me naked. They put my hands behind me, bent my legs, and bound me. They beat my left arm with a stick seven or eight times and said, “If you love life, better bring out the gold and silver.”
 
I shouted, “You can cut my body and break my bones, but where am I to get gold and silver?”
 
The pirates did not understand what I said. They untied my bonds to let me write what I meant, and I wrote it. The pirate chief was angry. He stared ferociously, his mouth wide open. He pointed at Chòng Po and shouted, pointed at me and shouted. He pulled me by the hair and again bound me. He raised his sword and aimed it at my throat to cut it, but the sword happened to miss and struck something by my right shoulder, the blade glancing off. The pirate again raised the sword and was about to behead me, when one of the pirates came, took hold of the arm that raised the sword, and restrained it. The pirate band all raised great shouts, but I do not know what was said. | At the time, the boatmen were beside themselves with fright. They scurried about to hide, but there was no place. Only Kim Chung and Kõisan clasped their hands and begged on their knees that my life be spared.
 
Then, after torturing me and terrifying the boatmen, the pirate chief led his band off. They cut away the boat's anchor, oars, and all ropes and threw them into the sea. Then with their boat they towed my boat toward the open sea and turned it loose. By the time they boarded their boat and disappeared, it was already late at night.
 
 
89. 항상 일정하여 변하지 않는 道義와 法則.
 
90. 임기응변의 조치.
 
91. 비단실로 짠 모자로서 魏晉시대에서부터 유래한다. 紗帽에는 황제가 쓰는 白紗帽와 文人 및 관료가 쓰는 烏紗帽 등이 있다. 원문에서 紗帽는 물론 烏紗帽를 가리키는데 明代에는 官帽의 대명사가 되었다.
 
92. 깃을 둥글게 만든 옷으로 圓領, 員領, 上領이라고도 한다. 漢魏 이전의 西域에서 기원한다. 六朝 이후 점차 中原에 들어와 隋唐 이후에 많이 입게 되었는데, 특히 官吏의 常服으로 사용되었다. 후에는 官服의 대명사가 되었다.
 
93.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 유래에 대해서는 《漂海錄》 3월 8일의 내용을 참조할 수 있다.
 
94. 三門縣의 地方志辦公室 金賢德 副主編은 최근 《漂海錄》에 나오는 下山이라는 섬은 府山列島의 ‘山’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연합뉴스》 2004년 2월 9일자.
 
95. 임금의 명을 받고 파견된 사신.
 
96. 원문은 '''鮑作干'''(포작한)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우리말 '보자기' 대신 漢字를 빌어다 쓴 말이다. '보자기' 즉 포작한은 바닷물 속에 들어가 조개, 미역 등 해물을 채취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편 《朝鮮中宗實錄》 35년 1월 10일조와 《朝鮮宣祖實錄》 33년 1월 3일조 등의 기사를 보면 포작한은 배를 능숙하게 부리므로 格軍 등으로 동원되고 있다.
 
97. 觀音은 아미타불을 보좌하는 보살로서 단독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불교의 여러 神 가운데 가장 널리 숭상되어 왔다. 浙江省 山群島에 속한 이 섬 부근에 있는 普陀山(보타산, 푸퉈산)<ref>[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9D%B4%EC%A0%9C%ED%98%84 이제현]</ref><ref>[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03717 해상 실크로드를 가다]</ref><ref>[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5 중국 보타도 관음신앙의 진실 / 이동식
 
사색과 성찰 [48호], 2011.09.01일]</ref> 7. 해상실크로드와 함께한 관음신앙]</ref><ref>[https://younghwan12.tistory.com/2838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상]</ref>은 五臺山·峨眉山·[http://kr.china-embassy.org/kor/djzg/zpd3/2zpd2/t83805.htm 九華山]과 더불어 중국불교 4대 名山 가운데 하나로서, 五代 때에 지은 不肯去觀音院을 비롯한 觀音道場이 특히 많다. 특히 潮音洞이란 동굴에 관음보살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宋代에 만들어진 이래 觀音信仰의 중심이 되었다. 해적 두목인 林大가 스스로 ‘觀音佛'로 칭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 저우산: 중국인들의 새해 일출 명소, 저우산과 한국의 특별한 인연<ref>[https://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3&nNewsNumb=002540100016 중국인들의 새해 일출 명소, 주간조선, 2019.01.07]</ref>
 
* 허무두유적박물관<ref>[http://korean.ningbo.gov.cn/art/2017/2/28/art_1110_756880.html]</ref>
 
* 저장성, 닝보, 허무두, 웨후<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schina&logNo=221493888727]</ref>
 
* 허무두문화<ref>http://blog.daum.net/gaundekr/15793871]</ref>
 
* 닝보<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mchi92&logNo=220522089432&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
 
* 아편전쟁과 닝보: <ref>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4/12/1507926/ 세계사 이야기 - 제1차 아편전쟁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세계사 1001 장면, 2014.12.09]</ref>
 
* 아편전쟁과 닝보: <ref>[http://www.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572781408652]</ref>
 
* 해상실크로드 <ref>[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407010352775596]</ref>
 
* [중국 민영기업의 천국 저장성] "심청전은 닝보서 왔다" <ref>[]http://mnews.imaeil.com/NewestAll/2006073108514227709</ref><ref>[http://kr.people.com.cn/203092/203191/7768620.html 심청전의 “심청”은 과연 실존인물이었을까?]</ref><ref>[http://www.jjan.kr/news/articleView.html?idxno=1127274 [⑧ 효녀 심청과 실크로드] 효녀 심청, 한·중 해로를 건너다, 전북일보, 2017.05.05]</ref>
 
* 고려 출신으로 중국 천태종 제16대 교조가 된 학승 의통(義通)을 기리는 닝보(寧波) 보운사(寶雲寺) 기념비 건립
 
* [中 축소판 저장성을 가다]1. 해상 실크로드 재현하는 닝보 <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606251833541 경향신문, 2006.06.25]</ref>
 
* 저장성 닝보, 중 ‘해상 실크로드’ 기점… 제조업 수출 관문 도약 <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206112138295#csidxaf91e2339e96c1b9b9c51800a24da08]</ref>
 
* 닝보상인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7220 중국인의 상술<5> 꽃중의 꽃, 닝보상인, 강효백 중국학 전문가,  2002.11.25]</ref>
 
* 고려 사행관 찾아 해상왕 장보고<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usinessinsight&logNo=221456305524&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directAccess=false 장보고, 동아시아 경제권의 허브를 만들다]</ref> 흔적 되새겨, 중국해상의 무역거점, 닝보 <ref>[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134]</ref>
 
* 전라도 문화와 연결된 영파 <ref>[http://www.igj.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072 [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20, 광주일등뉴스, 2018.07.18]</ref>
 
* 물동량 중국 2위 저장성 닝보항 가보니 <ref>[https://www.mk.co.kr/news/world/view/2012/06/353491/]</ref>
 
* 집단 탈북 류경식당 종업원 '기획 탈북' 논란…북송 여부 이목 쏠려<ref>[https://news.joins.com/article/22621666 ]</ref>
 
* 고려사관이 있는 월호 <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rangina&logNo=22082307337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
 
* [신(新)중국기행] 물류·항만도시 상하이와 투톱 장제스·장징궈 부자의 고향, 주간조선, 2011.02.28<ref>[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45100017]</ref>
 
* 중국 상인의 꽃 저장상인, 꽃 중의 꽃 닝보상인<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03500/1]</ref>
 
* 절강성 영파<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eesang_&logNo=130170117272 절강성 영파의 모든것 정리]</ref>
 
* 제주 동정귤, 고려 때 국제적 해상 교류 통해 유입 제주일보, 2017.02.08<ref>[http://www.jejuilbo.net/news/articleView.html?idxno=42326]</ref>
 
* 저지앙 닝보에 있는 고려사관 유적지 <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1742789&memcd=00025008&gb=reporter]</ref>
 
* 황해 건너온 '스파이' 번화한 개경에 '깜짝', 인천일보, 2018.08.24<ref>[http://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01961#08hF]</ref>
 
 
[[1월 12일.lst]]
 
 
===13일===
 
十三日, 復漂大洋中, 是日陰, 西北風大起, 又流入無涯之海, 臣及丹人所藏構衣,俱失於賊,所穿之衣,久清鹹水,天且恒陰,不得曝乾,凍死之期逼矣,舟載儲粮,盡為賊奪,餓死之期逼矣;以觸為賊所投,假帆為風所破,但隨風東西,隨潮出入,稍工無所施其力,沈沒之期亦逼矣,舟人皆填噴
 
 
p.361
 
莫能出聲,坐待死期,孝枝謂臣曰:“我等之死,分內事也,只以敬差官之死為痛惜耳!”臣曰:“爾何以死地為分內乎?”孝枝曰:“我州在大海中,水路九百餘里,波濤視諸海,尤為淘暴,貢船、商舶,絡繹不絕,漂沒沈溺,十居五六,州人不死於前,則必死於後,故境中男墳最少,闆闆之間,女多三倍於男,為父母者,生女則必曰:“是善孝我者,生男則皆曰:“此物非我兒,乃鯨量之食也,我等之死,如蜉蝣出沒,雖在平日,亦豈以死於痛下為心哉?唯朝臣往來,從容待風,舟楫價牢,故死於風波者,前古所罕,適丁今敬差官之身,天不陰佑,至於不測之地,是以痛哭耳.”
 
 
다시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서북풍이 크게 일어서 배는 끝이 없는 바다 속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신 및 배에 탄 사람들이 간직했던 솜옷은 모두 해적에게 빼앗겼고, 입은 옷은 바닷물에 절었는데 날씨 또한 계속 흐려서 햇볕에 말리지 못하였으므로 얼어죽을 날이 가까이 왔고, 배에 실은 양식을 해적에게 모두 빼앗겼으니 굶어죽을 날이 닥쳐왔으며, 배는 닻과 노를 도적이 던져버렸고 임시로 만든 돛은 바람에 부서졌으므로, 다만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기도 하고 조수를 따라 나왔다가 들어가기도 하여 사공이 힘을 쓸 수가 없었으니, 침몰될 날 또한 가까이 닥쳐왔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목이 막혀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효지가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의 죽음은 분에 맞는 일이지만 경차관의 죽음만은 매우 애석할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죽는 것을 분에 맞는 일이라 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효지가 말하기를 “우리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어, 수로가 900여 리나 되고 파도는 다른 바다에 비하여 특히 사납습니다. 공선(貢船)99과 상선(商船)의 왕래가 잇달아 끊이지 않는데, 표류되고 침몰<ref>[ https://www.jri.re.kr/contents/index.php?mid=040901&job=download&file_path=/periodical/4ee7f8fc7a30f3.pdf]</ref>되는 것이 10에 5-6척은 되어 제주사람은 일찍 빠져죽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빠져죽곤 합니다. 그런 까닭에 경내에는 남자의 무덤이 매우 적고, 마을에는 여자가 많아서 남자보다 3배나 됩니다.<ref>[ https://www.jeju.go.kr/download.htm;jsessionid=voXP19iZOFJ2p4wgLx0NSYg8v7pyxvHMiAuKOp09KM5sqVyUghaso1xPwiSN6w6F.was1_servlet_engine2?act=download&seq=1007722&page=6&no=5]</ref> 부모가 된 사람이 딸을 낳으면 반드시 이 애는 나에게 효도할 아이이다'라 하고, 아들을 낳으면 모두 '이 물건은 내 자식이 아니고 곧 고래와 거북의 밥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죽음은 하루살이와 같아서 평소에도 어찌 자기 집에서 죽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조신(朝臣)들이 왕래할 때면 조용히 순풍을 기다리고 선박도 빠르고 견고한 까닭에 풍랑으로 죽은 사람은 예전부터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차관만을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통곡할 따름입니다."
 
 
*사건: 표류
 
*지명: 바다
 
*기후: 흐리고, 얼어죽을 날이 가까이, 서북풍
 
-------
 
*심리-조선: 얼어죽을 날, 굶어죽을 날, 침몰될 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인명-조선: 효지
 
*비유-조선: 우리들의 죽음은 하루살이와 같아서,
 
 
*지명-조선: 제주도
 
*지리-조선: 수로가 900여 리나 되고 파도는 다른 바다에 비하여 특히 사납습니다
 
 
*제도(관직)-조선: 경차관, 조신(朝臣)
 
*제도(교통)-조선: 공선, 상선
 
*풍습-조선: 우리들의 죽음은 분에 맞는 일, 남자의 무덤이 매우 적고, 마을에는 여자가 많아서 남자보다 3배나 됩니다, 오직 조신(朝臣)들이 왕래할 때면 조용히 순풍을 기다리고 선박도 빠르고 견고한 까닭에 풍랑으로 죽은 사람은 예전부터 드물었습니다
 
*풍습-조선: 부모가 된 사람이 딸을 낳으면 반드시 이 애는 나에게 효도할 아이다'라고 하고, 아들을 낳으면 모두 '이 물건은 내 자식이 아니고 곧 고래와 거북의 밥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죽음은 하루살이와 같아서,
 
*풍습(의복)-조선: 솜옷
 
 
*유학-조선: 효도
 
*경천-조선: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13th Day. Adrift Again in the Ocean. This day was cloudy.
 
 
A strong northwest wind rose. We drifted again into the limitless sea. The padded clothing packed by me and the boatmen had all been lost to the pirates, and the clothing that we were wearing had been soaked in salt water for a long time. The sky, moreover, was constantly clouded, giving us no chance to dry it out, and the time when we should die of exposure was drawing near. All the rations loaded in the boat had been seized by the pirates, and the time when we should die of starvation was drawing near. Because the anchor and oars had been thrown away by the pirates and the makeshift sail ripped by the wind, the boat simply went east or west with the wind, or in and out with the tide. There was nothing for the helmsman to work at, and the time when we should sink was also drawing near.
 
All the boatmen had stopped-up throats and could not utter sounds. They sat and waited for the time to die. Hyo-ji said to me, “For us, death is part of the job. It is only the death of a commissioner we should lament.”
 
I said, “Why do you consider death part of your job?”
 
Hyo-ji said, “Our department is far out at sea, more than nine hundred li. The waves are much worse than those of other seas. Of the unbroken lines of tribute and merchant boats that sail out, five or six of every ten are driven out to sea and not heard from again, and the men are drowned. Most of the men of the department die thus sooner or later. The graves of men, therefore, within the borders are extremely few. In the villages there are three times more women than men. When as fathers and mothers the people produce a girl, they say, “This is one who will be good and dutiful to us.' When it is a boy, they all say, 'This thing is not our child, it is food for whales and turtles.' Our lives are as uncertain as the day-fly's. Even if we had continued in our normal way, we should not have expected to die in our own rooms, under our own windows.
 
“Ministers of the Court, however, going and coming, wait at their convenience for the wind. Their boats and oars are nimble and strong. Those who have died in the wind and waves, therefore, have been few in the past. But now this fate has befallen you, honored Commissioner, and, Heaven not rendering its unseen assistance, you have come to this extremely dangerous pass. That is why we mourn for your fate.”
 
 
 
99. 나라의 賦稅를 운송하는 배.
 
 
[[1월 13일.lst]]
 
 
===14일===
 
十四日,漂大洋中,是日晴,哺時,漂至一島,東西南三面,一望無際,唯可避北風處,顧以無為憂,初發濟州時,舟甚大無載物,故輸若干石塊于舟中,使不撓動,至是,尚理等以較索纏其石四齒,合為假碇以留泊焉,安義與軍人等相與言,使之聞之於臣曰:“此行所以至於漂死者,我知之矣,自古以來,凡往濟州者,皆祭於光州無等山祠及羅州錦城山洞,自濟州出陸者,又皆祭於廣壤、遮歸、川外、楚春等詞,然後行,故受神之枯,利涉大海,今此敬差官特大言非之,來不祭無等、錦城之祠,去不祭廣壤諸洞,慢神不敬,神亦不恤,使至此極,尚誰給哉?”軍人和之,咸臣,權松獨曰:“不然,前此李准義暹,三日致齋,精祀廣壤等神,亦至漂流,幾復甦,權敬差官景帖,俱不致祭,尚且往來快順,亡些子差,則過海便否,在於待風之如何耳,__關於神之祭不祭哉?”臣亦稱之曰:“天地無私,鬼神默運,福善禍,唯其公耳,人有惡者,論事以微福,則其可福之乎?人有善者,不惑邪說,不為顯祭,則其可稱之乎?會謂天地鬼神為語事飲食,而降禍福於人乎?萬萬無此
 
 
p.362
 
理也,况祭有常等,士庶人祭山川,非禮也,非禮之祭,乃谣也,溶以獲福者,我未之見也.爾濟州人,酷好鬼神,山澤川敷,俱設神祠,至如廣壤等堂,朝夕敬詞,靡所不至,其於涉海,宜無漂沈之患,然而今日某船漂,明日某船沈,漂沈之船,前後相望,是果神有靈應歇?祭能受福欺?况今我同舟人不祭者,唯我一人耳,爾軍人皆誠心齋祭而來,神若有靈,豈以我一人不祭之故,廢爾四十餘人齊祭之誠也?我之漂船,專是行李顛倒,不善候風之所致,反以廢祭尤我,不亦惑乎?”安義等猶以臣言為迂闊不以為是.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해질 무렵에 배가 표류하여 한 섬에 이르니 동, 서, 남 3면이 탁 터져 있고, 북풍은 피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살펴보니 닻이 없는 것이 근심거리였습니다. 처음에 제주도를 출발할 때는 배가 매우 큰데도 실을 물건이 없었으므로 몇 개의 돌덩이를 배 안에 실어서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습니다.<ref>[https://incheonport.tistory.com/1103 선박평형수]</ref><ref>[https://www.mk.co.kr/news/business/view/2018/02/92041/ 평형水 없는 친환경선박…현대미포 세계 첫 개발, 매일경제, 2018.02.08]</ref> 이 때 상리 등이 새끼줄로 그 돌 네 개를 얽어매어 합쳐서 임시 닻을 만들어 배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안의는 신(臣)이 들을 수 있도록 군인 등에게 말하기를, “이번 행차에서 표류하여 죽게 된 까닭을 나는 안다. 옛날부터 제주도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https://www.youtube.com/watch?v=AXG37qcAN5s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ref>[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525028007 [도시와 산] (8) 광주 무등산, 서울신문, 2009.05.25]</ref>의 신사(神祠)<ref>[http://gjstory.or.kr/sub.html?pid=11&formtype=view&code=71 무등산 신사와 천제단,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ref>와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의 신사<ref>[http://www.namdotimes.co.kr/news/article.html?no=869 금성산신앙(錦城山信仰), 나주사람들의 수호신앙!, 남도타임즈, 2018.04.26]</ref><ref>[http://www.sooasung.com/god/god58.html 전라도 나주 곡물신(神) 제주(濟州)에 들어와, 신들의 고향]</ref><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36_0040_0030_0020&whereStr= 지역별 세시 의례, 우리역사넷]</ref>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5173 광양(廣壤)]<ref>[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3295 광양당제]</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123 차귀(遮歸)]<ref>[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4964 차귀당제(遮歸堂祭), 한국민속대백과사전]</ref><ref>[http://www.ormstory.kr/index.php?mid=sketch&document_srl=2207 오름나들이]</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6157 차귀본향놀이]</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2526 천외(川外)]<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9112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濟州道 川外堂 巫神圖)]</ref><ref>[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2769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濟州道 川外堂 巫神圖), 한국민속대백과사전]</ref>·초춘(楚春)<ref>[http://www.ijeju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085 [한진오의 신화로 보는 제주 이야기] 모든 것을 신으로 三多, 제주투데이, 2016.0829]</ref><ref>[https://brunch.co.kr/@gutdoly/19 한진오블로그]</ref><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lisskim47&logNo=220683815639&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ref> 등의 신사102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서 떠났던 까닭에 신령님의 도움을 받아 큰 바다를 순조롭게 건너갈 수가 있었다. 지금 이 경차관은 특별히 이를 잘못이라고 큰소리치며 비난하며, 올 때도 무등산과 금성산의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갈 때도 광양 등 여러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신령님을 업신여겨 공경하지 않았으므로, 신령님 또한 돌보지 아니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또한 누구의 잘못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군인들은 동조하며 모두 신을 탓하였습니다.
 
 
권송만은 홀로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에 앞서 정의현감 이섬은 3일 동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13 재계(齋戒)]<ref>[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375 375 한국민속대백과사전]</ref><ref>[http://www.inyeon.org/M2/43-3.html 팔관재계]</ref>[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5944 ]</ref>[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5944 팔재계, 법보신문, 2007.04.18]<ref>[https://studybuddha.tistory.com/106 불교용어사전]</ref>한 뒤 광양 등의 신령님께 정성껏 제사를 지냈는데도, 표류되어 거의 죽을 뻔하다 다시 살아났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6826 경차관 권경우(權景祐)]<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0811021_004 성종실록 86권, 성종 8년 11월 21일 갑신 4번째기사, 1477년 명 성화(成化) 13년, 제주 경차관 권경우가 하직하다]</ref>는 아무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왕래가 아주 순조로웠고 아무 탈도 없었다. 결국 바다를 건너는 데 그 안전한가 아니한가는 순풍을 기다리는 여부에 달려 있지, 어찌 신령님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말고 하는 것과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 또한 일러 말하기를, “천지는 사심이 없고, 귀신은 말없이 운행(運行) 하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니 공평할 따름이다. 악한 사람이 귀신을 아첨해 섬겨서 복을 구한다면 그에게 복을 내리겠는가? 착한 사람이 사설(邪說)에 미혹되지 않아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그에게 재앙을 내리겠는가? 천지와 귀신이 아첨하는 음식을 올렸다 하여 그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이 일찍이 있었던가? 절대로 그런 이치는 없다. 하물며 제사도 일정한 등급이 있으니, 사대부와 서인(庶人)이 산천에 제사지내는 것<ref>[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4126 한국민속대백과사전]</ref><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82%B0%EC%B2%9C%EC%A0%9C(%E5%B1%B1%E5%B7%9D%E7%A5%AD)]</ref><ref>[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3-CKD-1240001&dataID=00011439@AKS-2013-CKD-1240001_DIC ]</ref><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82%B0%EC%B2%9C%EC%A0%9C(%E5%B1%B1%E5%B7%9D%E7%A5%AD)]</ref><ref>[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3-CKD-1240001&dataID=00011439@AKS-2013-CKD-1240001_DIC 조선왕조실록전문사전]</ref>은 예에 어긋난 일이다<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10_0040_0020_0010&whereStr= 우리역사넷, 국가의 제사는 누구에게 지내나]</ref><ref>[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38_0040_0040_0010_0030 우리역사넷, 기복의례]</ref>. 예에 어긋난 제사가 바로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D%8C%EC%82%AC(%E6%B7%AB%E7%A5%80) 음사(淫祀)]인데, 음사로써 복을 얻은 일은 나는 본 적이 없다. 너희들 제주도 사람들은 귀신을 몹시 좋아하여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82%B0%EB%A6%BC%EC%B2%9C%ED%83%9D(%E5%B1%B1%E6%9E%97%E5%B7%9D%E6%BE%A4) 산택(山澤)]과 [https://hanja.dict.naver.com/word?q=%E5%B7%9D%E8%97%AA&cp_code=1&sound_id=1 천수(川藪)]에 모두 신사를 세워, 광양 등의 신당(神堂) 같은 데는 조석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기를 지극하게 하거늘, 바다를 건너는 데 표류거나 침몰하는 재앙이 없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은 어느 배가 표류하고 내일은 또 다른 배가 침몰하여,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배가 앞뒤로 서로 잇닿으니, 이것이 과연 신령님의 영험이 있는 셈인가? 제사를 지낸다고 복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지금 함께 배를 탄 우리들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고, 너희 군인들은 모두 정성스런 마음으로 재계(齋戒)하고 제사를 지내고 왔는데, 신이 만약 영험이 있다면 어찌 나 한 사람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서 너희들 40여명이 재계하고 제사 지낸 정성을 저버릴 수가 있는가? 나의 배가 표류한 것은 오로지 일정을 서두르다, 순풍 기다리기를 잘못한 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도리어 제사 지내지 않은 일로 나를 탓하니, 또한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의 등은 여전히 신의 말을 물정에 어두운 탓이라 하며 옳다고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사건: 표류
 
*지리: 바다, 동, 서, 남 3면이 탁 터져 있고, 북풍은 피할 수 있는 곳, 
 
*시간: 해질 무렵
 
---
 
*인명-조선: 안의, 권송, 이섬, 권경우
 
*심리-조선: 비난, 화,
 
*리더십-조선: 천지는 사심이 없고, 귀신은 말없이 운행(運行) 하면서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니 공평할 따름이다. 악한 사람이 귀신을 아첨해 섬겨서 복을 구한다면 그에게 복을 내리겠는가? 착한 사람이 사설(邪說)에 미혹되지 않아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그에게 재앙을 내리겠는가? 천지와 귀신이 아첨하는 음식을 올렸다 하여 그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이 일찍이 있었던가? 절대로 그런 이치는 없다, 음사로써 복을 얻은 일은 나는 본 적이 없다, 오늘은 어느 배가 표류하고 내일은 또 다른 배가 침몰하여,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배가 앞뒤로 서로 잇닿으니, 이것이 과연 신령님의 영험이 있는 셈인가? 제사를 지낸다고 복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지명-조선: 제주도, 광주 무등산, 나주 금성산, 광양, 차귀, 천외, 초춘
 
 
*기물-조선: 닻
 
*기술-조선: 돌덩이를 배 안에 실어서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제도(관직)-조선: 군인, 경차관
 
*풍습(기원)-조선: 신사에서 제사를 지내고, 신령님
 
*풍습-조선: 경차관 권경우는 아무 제사를 지내지 않았지만 왕래가 아주 순조로웠고 아무 탈도 없었다,
 
*풍습-조선: 너희들 제주도 사람들은 귀신을 몹시 좋아하여
 
 
14th Day. Adrift in the Ocean. This day was fair.
 
Between 3 and 5 p.m. we sailed into an island. In three directions, east, south, and west, nothing met the eye. It was a place sheltered from only the north wind, and we were concerned about not having an anchor. When we had first left Cheju, because the boat was very large and carried nothing in it, we had put in a number of stones to keep it from rolling. Now Sang-ni and others tied four stones together with line for a makeshift anchor, and we moored there.
 
An Ủi talked with the soldiers in my hearing: “I know why we have come to the point of drifting off and dying on this trip. Ever since olden times, everyone going to Cheju has first sacrificed at Mudungsan Shrine in Kwangju and Kumsongsan Shrine in Naju. Everyone sailing from Cheju has first sacrificed at Kwangyang, Sogwi, Ch’onwoe, and Ch’och’un shrines. Therefore they received the aid of the gods and successfully crossed the ocean.
 
“The present Commissioner, however, has arrogantly ignored these measures. He came without sacrificing at Mudung and Kŭmsong shrines, and he went without sacrificing at Kwangyang and the other shrines. He is contemptuous of the gods. The gods, in turn, have not pitied us and have sent us to this extremity. Who is at fault?” The soldiers agreed with him and all blamed me.
 
Kwon Song, however, said, “That is not so. Before this, Yi Som of Sõnŭi fasted three days and sacrificed punctiliously to Kwangyang and the other gods. He, too, went adrift, almost died, and survived. Commissioner Kwon Kyong-u did not sacrifice at all, yet he came and went swiftly and surely, without the slightest discomfort. Thus, the ease or difficulty of crossing the sea depends on waiting for the wind; it has nothing to do with sacrificing or not sacrificing to the gods.”
 
I also admonished them, saying, “Heaven and Earth are not partial, and the gods and spirits do their work silently. They are strictly impartial in blessing good and damning evil. If a man is wicked and toadies for blessings, can they bless him? If a man is good and neither is deluded by heretical doctrines nor offers blasphemous sacrifices, can they damn him? Can one say that Heaven, Earth, the gods and spirits send down damnations and blessings on men for the sake of flattery, food, and drink? That cannot possibly be.
 
“Sacrifices, moreover, have fixed ranks. For gentry and commoners to sacrifice to mountains and rivers goes against the code of propriety. A sacrifice opposed to propriety is an evil sacrifice. I have never known of any man who obtained blessings by improper sacrifice.
 
“You Cheju men are devoted to gods and spirits. You build shrines to gods in all the mountains, marshes, rivers, and swamps. At such temples as Kwangyang you sacrifice respectfully morning and night, leaving nothing undone. That being so, when you cross the ocean you ought not to have mishaps like drifting and sinking. Yet today such-and-such a boat goes adrift, tomorrow such-and such a boat sinks, and so it goes with one after another. Can these things be taken to mean that these gods are powerful and that sacrifices to them can bring blessings?
 
“Of the people in this boat, moreover, I alone have not sacrificed. All you soldiers devoutly fasted and sacrificed and then came. If the gods are powerful, how can they deny the devotion of the fasting and sacrificing of you fortyodd men because I alone did not sacrifice? Our boat has gone adrift solely because the baggage was unevenly stowed and because we were not good at forecasting the weather. Is it not foolish to blame me for having neglected the sacrifices ?”
 
An Ui and the others seem to consider what I said irrelevant and wrong.
 
 
100. 무등산의 신사 즉 天祭壇은 신라 때 小祀를 올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는 명산대천에 올리는 제사를 大祀, 中祀, 小祀로 구분했는데 무등산 천제단에서는 소사를 지냈다. 고려 때에는 천제단에서 國祭를 모셨고 조선시대에는 國祭를 모시지 않는 대신 봄, 가을에 光州牧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101. 羅州에 있는 神祠로서, 나주인 뿐 아니라 전라도 각지에서 제사를 지내러 오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102. 廣壤堂은 제주의 남쪽에 있는 한라산 護國神祠에 있다. 遮歸祠는 제주 서쪽 3리에 있고, 川外祠는 제주 서쪽 79리, 楚春祠는 제주 동쪽 70리 정의현 경계에 있다. 《東國輿地勝覽》권38, 濟州牧.
 
103.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安東이고, 자는 융이다. 성종원년(1470) 別試文科丙科에 급제하고, 奉敎를 지냈다. 그 후 修撰을 거쳐 濟州敬差官, 經筵侍讀官, 司諫, 刑曹參議가 되었다. 연산군2년(1496) 都承旨로 승진, 이듬해 중추부동지사로 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8년 大司憲이 되어 연산군의 亂政을 直言하는 한 편, 任士洪 일파를 탄핵하다가 파직, 가산이 모두 籍沒되었다.
 
 
[[1월 14일.lst]]
 
 
===15일===
 
十五日, 漂大洋中, 是日陰, 海色赤而濁, 東風復起, 又順風指舵于西,舟中人若朴從迴、萬山、李山等,有疾病不堪事;高保終、梁達海、高迴、金朝迴、任山海等,自漂海以至是日,臥不起動,雖督之以(露)取「露]等事,聽之藐藐;鄭實、夫同、金得時、姜有、宋真、金粟、姜內、吳山、高內乙同等,十喚一應,或有不得已而從事者;肯斤寶、金怪山、高福、金松、金石貴、李孝台、金真山等,或畫勤夜食,或始勤終息;許尚理、權山、金高面、金仇迴、崔巨伊山、金都終、高以福、文迴、玄山、韓每山、權松、莫金等,畫夜不息,以運船為己任;程保、金重、李植、孫孝子、李孝枝、安義等,或親自服役,或檢督治船,以期完事,自遇賊復漂以後,人皆無意於生,漸不如前,丹為暴濤所擊,為日已久,百孔千瘤,旋塞旋缺,蹲漏有水,將不勝,臣曰:漏水若此,舟人之解體又若此,
 
 
p.363
 
我其妄自尊大,坐見溺死,胡可哉?”遂與程保等六人,親自到水幾盡,尚理以下十餘人,亦稍有奮力而起者,夜無風而雨,至一大島,為勢所逆,欲依泊不得,中流海上,
 
 
바다에서 표류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붉으면서 탁하였습니다.
 
 
동풍이 다시 일었으므로 또 바람 부는 대로 키를 서쪽으로 맞추어 갔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박종회, 만산, 이산 등은 병이 나서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보종, 양달해, 고회, 김조회, 임산해 등은 바다에서 표류가 시작된 뒤로 여태까지 드러누워 움직이려 하지 않고, 비록 취로(取露) 등의 일로 이들을 독려하여도 귀담아 듣지도 않았습니다.
 
 
정실, 부명동, 김득시, 강유, 송진, 김속, 강내, 오산, 고내을동 등은 열 번 부르면 한 번 대답하였으며, 마지못해 일을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소근보, 김괴산, 고복, 김송, 김석귀, 이효태, 김진산(金眞山)05 등은 낮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밤에는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고,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나중에는 나태하기도 하였습니다.
 
 
허상리, 권산, 김고면, 김구질회, 최거이산, 김도종, 고이복, 문회, 현산, 한매산, 권송, 막금 등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배를 운행하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으며, 정보, 김중, 이정, 손효자, 이효지, 안의 등은 몸소 일하기도 하고, 배를 수리하는 일을 점검하고 독려하기도 하며, 일을 끝내기를 기하였습니다.
 
 
해적을 만나 바다에 다시 표류한 이후로는 사람들이 모두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어 하는 일이 점차 전만 같지 못하여졌습니다.
 
 
배가 사나운 파도에 부딪친 지 오래 되자 수많은 구멍과 틈이 생겼고, 막는 즉시 곧 터져 새어 들어오는 물을 이루 다 퍼낼 수 없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물새는 것이 이러하고, 뱃사람들 마음이 흩어진 것이 또 이러하니, 무턱대고 높은 사람이라고 점잔만 빼다가 앉아서 익사 당하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정보 등 6명과 함께 몸소 물을 거의 다 퍼내었습니다. 상리 이하 10여명 또한 조금씩 힘을 내어 일어나는 자가 있었습니다. 밤에는 바람은 없었지만 비가 내렸습니다. 어느 큰 섬에 이르렀지만 썰물의 힘에 밀려 정박할 수 없었고 배는 바다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사건: 표류
 
*지리: 바다, 흐리고 바다 빛깔은 붉으면서 탁하였습니다, 동풍,  큰 섬, 썰물
 
 
*인명-조선:  박종회, 만산, 이산, 고보종, 양달해, 고회, 김조회, 임산해, 정실, 부명동, 김득시, 강유, 송진, 김속, 강내, 오산, 고내을동, 소근보, 김괴산, 고복, 김송, 김석귀, 이효태, 김진산, 허상리, 권산, 김고면, 김구질회, 최거이산, 김도종, 고이복, 문회, 현산, 한매산, 권송, 막금, 정보, 김중, 이정, 손효자, 이효지, 안의
 
*심리(최부): 독려
 
*심리-조선: 포기, 나태 / 책임감, 열심
 
*유학(최부): 경세제민(무턱대고 높은 사람이라고 점잔만 빼다가 앉아서 익사 당하는 것이 어찌 옳겠는가? 몸소 물을 거의 다 퍼내었습니다)
 
 
15th Day. Adrift in the Ocean. This day was cloudy.
 
 
The sea was red and muddy. An east wind had arisen again.
 
Again we went with the wind and set the helm heading west. Of the men in the boat, some, such as Pak Chong-hoe, Mansan, and Yi San, were sick and not able to work. Ko Po-jang, Yang Tal-hae, Ko Hoe, Kim Cho-hoe, and Im San-hae, from the time we went adrift until the present, had lain down and not risen to work. Though we directed them to bail and do other things, they ignored the commands completely. Chòng Sil, Pu Myong-dong, Kim Tủk-si, Kang Yu, Song Chin, Kim Sok, Kang Nae, O San, and Ko Naeŭltong had to be called ten times before they would answer once. Some worked only when they could not help it. Among San Kủn-bo, Kim Koe-san, Ko Pok, Kim Song, Kim Sok-kwi, Yi Hyo-t'ae, and Kim Chin-san*,23 some worked hard by day and slacked by night, and some worked hard at first and became lazy later. Hồ Sang-ni, Kwồn San, Kim Ko-Myặn, Kim Kujilhoe, Chooe Köisan, Kim To-jong, Ko I-hok, Munhoe, Hyon San, Han Mae-san, Kwon Song, and Makkům worked hard night and day and made the sailing of the boat their responsibility. Chồng eo, Kim Chung, Yi Chăng, Son Hyo-ja, Yi Hyo-ji, and An Ủi, either personally undertook jobs or oversaw the repairing of the boat in the hope of finishing the work. But after we met the pirates and again were set adrift, they gradually changed from what they had been before, and none of them cared whether he lived.
 
The ship had been pounded by violent waves now for many days. There were a hundred holes and a thousand strains; no sooner was one stopped than another leaked. So much water came through the cracks that we could not bail fast enough to keep up with it. I said, “With the water leaking like this and, too, the boatmen's loyalty as uncertain as it is, how can I in foolish pride sit and wait for death?”' Then with Chòng Po and five other men I myself bailed the water almost all out. More than ten men, from Sang-ni down, also regained a little of their strength and got up.
 
At night there was no wind, but it rained. We came to a large island, and though we wanted to approach and moor, we could not, since the evening tide was against us. We rode in the current at sea.
 
[[1월 15일.lst]]
 
 
===16일===
 
十六日,到泊于牛頭外洋,是日陰,海色赤黑中全濁,西望連宰疊嶂,撑天包海,意有人煙,駕東風而至,則見山上多有烽燧臺列時,喜復到中國地界,午後,風浪尤緊,雨下漆味,舟從風所驅,瞥然間忽漂至兩島間,傍岸而過,則望見有中船六隻列泊,程保等請於臣曰:“前至下山,不示以官人之儀,以招賊人,幾不免死,今宜從權具冠帶,以示彼船,”臣曰:“爾何以害義之事導我嗽?”保等曰:“當此之時,與死為鄰,何暇治禮義哉?姑當行權,便取生道,然後以禮治喪,不害於義,”臣拒之曰:“釋喪即吉,非孝也,以詐欺人,非信也,寧至於死,不忍處非孝非信之地,吾當順受以正,”安義來請日:“我姑着此冠帶,示若官人然,”臣曰:“非也,彼船若或如前所遇賊,猶之可也,若是好船,必驅我曹訪官府取供辭,將何辭以對?少或不直,彼必生疑,莫如守正之為愈也.”俄而所謂六船,掉圍臣船,一船有人可八九,其衣服語音,亦與下山所遇海賊一般,寫示臣等曰:“看你異類,來從那裏?”臣令程保亦寫以
 
答曰:“我是朝鮮國朝臣,奉 王事巡海島,奔喪過海,被風而來,不識此海何國地界?”其人答曰:“此海乃牛頭外洋,今隸大唐國台州府臨海縣界也.”程保以手指其口,其人以水桶來遺,又指北有山,曰:“此山有泉,你可取,做飯以吃,你有胡椒,可送我二三兩,”臣答曰:“本國不產胡椒,初不賣來!”其人等遂掉船稍却,圍包臣船,列立下訂,臣船亦依岸而泊,令安義、巨伊山、向理等下舟登山,通望人煙,則果是連陸處,
 
 
p.364
 
 
臣於此行所歷滄波,雖若一海,水性水色,隨處有異,濟州之海,色深青,性暴急,雖少風,濤上駕濤,激浪濡潤,無甚於此,至黑山島之西猶然,行過四畫夜,海色白,越二書夜愈白.又一畫夜還青,又二畫夜還白,又三畫夜赤而濁,又一畫夜赤黑中全濁,臣之行舟,視風從却,東西南北,萍漂無定,其間所見海色,大鑒如此,自由而還青以後,風力雖,濤不甚高,至還白以後,始有島醫,島皆岩壁,谷咸儡,上載土,有雜卉香草,翁蔚長青.水性悠弱,若不遇大風,則罕見驚波駭浪之患,臣於遇賊復漂之海,亦如濟州之海之險,則豈能復見得島津乎?大抵每歲正月,正當隆寒之極,则風怒號,巨濤震激,乘船者所忌,至二月漸得風和,濟州俗猶號為燃燈節,禁不渡海,且江南潮人,亦不於正月浮海,至四月梅雨既過,颯然清風,海舶初回,謂之舶()()風,臣之漂海,適當風波險惡之時,海天霾哇,日復尤甚,橋帆維權,或折或失,飢渴困苦,動經旬日,一日之間,溺敗之機,非一二度矣,然幸僅保性命,得泊海岸者,非特潰雨雨取汁,以沃焦鹏,舟實牢緻價駛,能壓風濤之故也.
 
 
우두(牛頭)<ref>[http://www.newswork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7579 [조선 선비 따라 중국 강남 여행] #1, 뉴스웍스, 2016.08.23]</ref>
 
<ref>[http://www.muannews.com/news/articlePrint.html?idxno=8594 ‘표해록’저자 최부 기념사업 가시화, 무안신문, 2006.08.09]</ref>
 
<ref>[https://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287163 '동방의 마르코 폴로' 최부…중국에 기념공원 생긴다, JTBC, 2016.08.08]</ref>
 
<ref>[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17030 조천읍, 500여년 전 인연의 만남 '화제', 제민일보, 2013.09.05]</ref> 앞 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잇닿아 겹친 산봉우리가 하늘을 버티고 바다를 둘러쌌는데 인가(人家)가 있는 듯하였습니다.
 
 
동풍을 타고 이르러, 산 위에 봉수대(峰燈臺)가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니 기쁘게도 다시 중국 땅에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오후에는 풍랑이 더 세고 보슬비가 자욱하게 내리는데, 배는 바람이 모는 방향대로 나아갔습니다.
 
 
잠깐 동안에 갑자기 표류하여 두 섬 사이에 이르러 기슭을 옆으로 지나가니, 중선(中船) 6척이 죽 늘어서 정박하고 있는 것이 멀리 보였습니다.
 
 
정보 등이 신에게 청하기를,“전일 하산(下山)에 이르렀을 때엔 벼슬아치의 위의(威儀)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해적을 불러들여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http://m.ipcs21.com/view.php?idx=15514 권도(權道)]를 따라 [http://www.ssu.ac.kr/web/museum/exhibit_e?p_p_id=EXT_MUSEUM&p_p_lifecycle=0&p_p_state=exclusive&p_p_mode=view&_EXT_MUSEUM_struts_action=%2Fext%2Fmuseum%2Fview&_EXT_MUSEUM_vPage=relic&_EXT_MUSEUM_orderSelection=TITLE_KR&_EXT_MUSEUM_subjectId1=46&_EXT_MUSEUM_subjectId2=464&_EXT_MUSEUM_relicId=182 관대(冠帶)]를 갖춰서 저들의 배에 보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는 어찌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죽음이 임박했는데, 어느 겨를에 예의를 차리겠습니까? 일단 권도를 행하여 살길을 찾은 뒤에 예로써 상사(喪事)를 치르더라도 의리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상복(喪服)을 벗고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8%B8%EB%B3%B5(%E5%90%89%E6%9C%8D)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효(孝)가 아니고<ref>[http://www.igj.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407 [강원구 칼럼]中國에서 孝의 상징인 崔溥(최부)先生, 광주일등뉴스, 2016.08.23]</ref>,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은 신(信)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孝)와 신(信)이 아닌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으니, 나는 마땅히 정당한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가 와서 청하기를, “제가 일단 이 관대를 착용하여 관인(官人)처럼 보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 된다. 저 배가 혹시 전에 만났던 해적과 같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만약 좋은 사람의 배라면 반드시 우리들을 관부(官府)로 데려가 공술서를 받을 것인데, 너는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저들은 반드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조금 후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와서 신의 배를 둘러쌌는데 한 배에 8-9인이 있었고, 그들의 의복과 말소리는 또한 하산에서 만났던 해적과 같았습니다.
 
 
글을 써서 신 등에게 보이기를,“보아하니 그대들은 다른 나라 사람 같은데 어디에서 왔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또한 글을 써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국 조신(朝臣)으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면서 바다를 건너다가 바람을 만나 이곳에 왔소. 이 바다가 어느 나라의 땅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이 바다가 바로 우두 앞바다로서, 지금의 대당국 [http://www.mapnall.com/ko/%EC%A7%80%EB%8F%84-%ED%83%80%EC%9D%B4%EC%A0%80%EC%9A%B0-%EC%8B%9C_1133041.html 태주부(台州府)] [http://www.mapnall.com/ko/%EC%A7%80%EB%8F%84-%EB%A6%B0%ED%95%98%EC%9D%B4-%EC%8B%9C_1133189.html 임해현(臨海縣)]에 속해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켰습니다. 그 사람이 물통을 가져와서 주고, 또 북쪽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산에 샘물이 있으니 당신들은 물을 길어 밥을 지어먹을 수 있소. 당신들에게 후추<ref>[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724017003 ‘후추 1알 = 진주 1알’ 값어치…신대륙 발견하게 만든 ‘5㎜ 향신료’,서울신문, 2017.07.23]</ref><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innerkr&logNo=220834878032&parentCategoryNo=&categoryNo=7&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조선 성종의 후추 재배 시도]</ref>가 있으면 우리에게 두세 냥 정도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후추<ref>[http://www.koreatimes.com/article/167600 후추 이야기, 한국일보, 2004.03.10]</ref>가 산출되지 않아 애초부터 가지고 오지 않았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마침내 노를 저어 조금 물러나 신의 배를 포위하여 죽 늘어서 닻을 내리므로, 신의 배도 또한 언덕을 의지하여 정박하였습니다. 안의, 거이산, 상리 등으로 하여금 배에서 내려 산에 올라 인가를 둘러보게 했더니, 과연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이었습니다.
 
 
* 네덜란드 후추 <ref>[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0027 네덜란드는 어째서 몰루카제도에 ‘정향나무숲’을 만들었을까?, 교수신문, 2017.10.24]</ref>
 
* 네덜란드 후추 <ref>[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98734 [홍익희의 음식이야기] 뉴욕과 바꾼 육두구 산지, 국민일보, 2018.02.08]</ref>
 
* 네덜란드 후추 <ref>[http://chefnews.kr/archives/7099 “고작 양념이 아니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다.” – 향신료에 취하기 시작한 인류, 셰프뉴스, 2015.08.10]</ref>
 
* 네덜란드 후추 <ref>[http://www.seehint.com/print.asp?no=11434 향신료의 역사, SeeHint.com  No: 11434]</ref>
 
* 네덜란드 청어잡이 <ref>[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nNewsNumb=20171227271&nidx=27272 네덜란드 경제를 일으킨 돈고기(Stock fish) 청어 이야기, 조선일보, 2017.12.18]</ref>
 
* 네덜란드 청어잡이 <ref>[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90719 [홍익희의 음식이야기] 중상주의 꽃피운 청어, 국민일보, 2018.01.25]</ref>
 
* 네덜란드 청어잡이 <ref>[http://www.webzinesean.kr/html/main/view.php?idx=247&keyword=&keyfield=&s_category= 청어, 역사 바꾼 물고기 이야기(1): ‘금요일의 물고기’, 유럽의 패권을 결정짓다, SEA, 김문기 부경대학교 교수, 2017.08.28]</ref>
 
* 대구전쟁
 
* 베네치아, 비잔티움, 후추 <ref>[https://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kS-nOsQolVQJ:https://ima.ac.kr/post_file_download.cm%3Fc%3DYTo0OntzOjEwOiJib2FyZF9jb2RlIjtzOjIyOiJiMjAxODEwMDk1YmJjYjY5N2MyNDg0IjtzOjk6InBvc3RfY29kZSI7czoyMjoicDIwMTgxMDA5NWJiY2JiM2NjYTU4MCI7czo5OiJmaWxlX2NvZGUiO3M6MjI6InAyMDE4MTAwOTViYmNiYjNkYjc3NjEiO3M6MTE6Im1lbWJlcl9jb2RlIjtOO30%3D+&cd=13&hl=ko&ct=clnk&gl=kr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과 지중해 향신료 무역,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남종국]</ref>
 
* 베네치아, 비잔티움, 후추 <ref>[http://clomag.co.kr/article/1155 역사속 물류 이야기(3) 베네치아 vs. 포르투갈, ‘향신료’ 무역 전쟁의 서막]</ref>
 
* 베네치아, 비잔티움, 후추 <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fFOzMgaxMngJ:web.yonsei.ac.kr/_ezaid/board/download.aspx%3Fmethod%3Ddownload%26pfkHomepageNo%3D1375%26fkBoardEntryPkNo%3D31%26attacheFileChoice%3D2%26pkNo%3D23999+&cd=17&hl=ko&ct=clnk&gl=kr 물과 환상의 도시, 베네치아]</ref>
 
* 조선(성종)과 후추 <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2G30&articleno=13728682&categoryId=186076&regdt=20160513035607]</ref>
 
 
신이 이번에 지나온 바닷물은 비록 동일한 바다지만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신의 배는 바람을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면서, 동, 서, 남, 북으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83955 부평초]처럼 표류하여 정처가 없었으니, 그동안에 본 바다 빛깔은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빛깔이 흰 데서부터 푸른 데로 되돌아온 이후 바람의 힘은 비록 세지만, 물결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빛깔이 푸른 데서 흰 데로 다시 되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섬이 나타났는데, 섬은 모두 층암절벽에 우뚝 솟은 바위더미로 위에는 흙을 이고 있어 잡초와 향초가 무성하게 푸르렀습니다.
 
 
물살은 느리고 약하므로 만약 큰바람만 만나지 않는다면 거센 물결로 인한 재난은 드뭅니다. 신이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바다가 또한 제주 바다처럼 험했다면 어찌 다시 섬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무릇 매년 정월은 바로 한창 추울 때로서 매서운 바람이 거세게 불고 큰 물결이 진동하여 부딪치게 되니, 배를 타는 사람들이 꺼리는 때입니다.
 
 
2월에 가서야 점차로 바람이 잦아들지만, 제주 풍속은 오히려 연등절(燃燈__)<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36_0040_0030_0020&whereStr= 지역별 세시 의례, 우리역사넷]</ref>이라 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게 합니다. 또 강남의 [http://kr.xinhuanet.com/2015-03/21/c_134085812.htm 조주(潮州)]<ref>[http://korean.cri.cn/1760/2015/03/20/1s224113.htm]</ref><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errysmart&logNo=220905787207&categoryNo=0&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ge=1&postListTopCurrentPage=1&from=postView]</ref><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1970herjunho&logNo=220695306068&categoryNo=1&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nd002&logNo=110123328338]</ref>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4월에 이르러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3745 매우(梅雨)]<ref>[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1638408 장마와 매우(梅雨), 이투데이, 2018.07.05]</ref>09가 지나가고 난 뒤 시원한 청풍(淸風)이 불면 바다를 다니는 큰 배들이 돌아오니, 이를 '[https://life.ytn.co.kr/issue/issue_view.php?key=201207051107037588 박초풍(舶連風)]'이라 부릅니다.
 
 
신이 표류할 적은 마침 풍랑이 사나울 때로서 바다날씨는 나날이 흐려졌고, 돛과 밧줄과 노가 부러지거나 잃어버렸습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받은 것이 열흘이었으며, 하루에도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해안에 배를 댈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빗물에 옷을 적셔 물을 짜내 타는 창자를 적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배가 견고하고 빨라 능히 풍랑을 이겨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건-중국: 정박
 
*기후-중국: 이 날은 흐리고, 보슬비가 자욱하게 내리는데, 바다 빛깔은 검붉었으며 완전히 탁하였습니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잇닿아 겹친 산봉우리, 동풍, 풍랑이 더 세고, 이곳은 육지와 잇닿은 곳, 물살과 빛깔은 곳에 따라 달랐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빛깔이 푸른 데서 흰 데로 다시 되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섬이 나타났는데,
 
*지명-중국: 바다, 우두, 중국, 대당국 태주부 임해현(臨海縣), 강남의 조주, 봉수대
 
*풍경: 인가(人家)가 있는 듯, 산 위에 봉수대(峰燈臺)가 죽 늘어서, 섬은 모두 층암절벽에 우뚝 솟은 바위더미로 위에는 흙을 이고 있어 잡초와 향초가 무성하게 푸르렀습니다
 
*시간: 오후, 풍랑이 사나울 때
 
*제도(교통): 중선(中船) 6척
 
*기물-중국: 물통, 노, 닻
 
*식물-중국: 후추
 
*풍습-중국: 강남의 조주 사람들도 정월에는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심리(최부): 안심
 
*인명-조선: 정보, 안의, 거이산, 상리
 
*리더십-조선: 너는 어찌 의리에 어긋나는 일로 나를 이끄는가?, 우리들을 관부(官府)로 데려가 공술서를 받을 것인데, 너는 장차 무슨 말로 답변하겠는가?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하면 저들은 반드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정도(正道)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지명-조선: 조선국
 
*기후-조선: 제주도 바다는 빛깔이 짙푸르고, 파도가 사납고 급하여 비록 바람이 조금만 일어도 파도 위에 파도가 덮쳐, 휘돌며 솟구치고 물살이 빠르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습니다. 흑산도 서쪽에 이르러서도 여전하였습니다. 나흘 밤낮을 가니 바다 빛깔이 희었고, 이틀 밤낮을 가니 더욱 희었습니다. 또 하루 밤낮을 가니 빛깔이 도로 푸르렀고, 또 이틀 밤낮을 가니 도로 희었다가, 다시 사흘 밤낮을 가니 붉으면서 탁하더니, 또 하루 밤낮을 가니 검붉으며 온통 탁하였습니다. 빛깔이 흰 데서부터 푸른 데로 되돌아온 이후 바람의 힘은 비록 세지만, 물결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바다가 또한 제주 바다처럼 험했다면 어찌 다시 섬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매우(梅雨), 청풍(淸風), 박초풍(舶連風)
 
*식물-조선: 후추
 
*시간: 정월, 2월, 4월, 풍랑이 사나울 때
 
 
*사회-조선: 벼슬아치의 위의(威儀)
 
*제도(관복)-조선: 관대(冠帶)
 
*행정-조선: 공술서, 왕명을 받아 해도(海島)를 순찰하였소
 
*제도(관직)-조선: 조신(朝臣)
 
*사건-조선: 부친상, 표류
 
*비유-조선,중국: 배는 바람을 따라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하면서, 동, 서, 남, 북으로 부평초처럼 표류하여 정처가 없었으니
 
*기물-조선: (강한) 배
 
*풍습-조선: 연등절
 
*모화: 기쁘게도 다시 중국 땅에 도착
 
 
*유학-조선: 권도(權道),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孝)와 신(信)이 아닌 일은 차마 할 수가 없으니
 
 
16th Day. Arrival and Mooring at Niu-t'ou-wai-yang. This day was cloudy. The sea was red and black and thoroughly muddy.
 
 
To the west we saw rows of peaks, range behind range, reaching up to the sky and cradling the sea. They gave an impression of people living there.
 
When we rode in on the east wind, we saw that on top of the mountains there were many beacon towers in a line along the peaks. We were overjoyed to have reached the shores of China again.
 
After noon, the wind and waves were exceedingly rough. Rain fell in a drizzle, and it was dark. The boat being driven by the wind, in the twinkling of an eye, we drifted between two islands. As we passed by a shore, we saw that there were six boats moored in a row. Chòng Po and others made a request of me, saying, “Previously, when we reached Hsia-shan, you did not display the signs of an official, and we attracted pirates. We barely escaped dying. Now you should follow the exception to the rule. Put on your cap and sash and show them to those boats.”
 
I said, “How dare you suggest to me a thing harmful to morals?”
 
Chòng Po said, “This moment we are close to death. What time is there to observe propriety and morality? For the time being, practice the exceptions so that we can survive; later observe your mourning with propriety. That is not harmful to morals.”
 
I disagreed with him. I said, “To take off mourning clothes and put on festive ones goes against filial piety. To take advantage of men by deceit goes against sincerity. I would rather die than oppose filial piety and sincerity. I must conform to what is right.”
 
An Ui came and made a request, saying, “For the time being, let me wear this cap and gown and appear to be an official.”
 
I said. “No. If those boats are of the type in which we met the pirates before, something like that would be all right. If they are loyal boats, they will surely drive us on to a public office to take a deposition. What statement would you make then? If there was the slightest discrepancy, it would give rise to suspicion. It is better to observe the strictest honesty.”
 
Suddenly the six boats rowed up and encircled my boat. There were about eight or nine men in each boat, and their clothing and speech were of the kind of the pirates we had met at Hsia-shan. They wrote and showed us a note that said, “We see you are foreigners. Where do you come from?”
 
I ordered Chòng Po likewise to write and answer them. We said, “I am a minister of the Court of Korea. I had undertaken to tour an island in the King's service and was hurrying across the sea into mourning when I was blown here by a wind. I do not know this sea or what country this land belongs to.”
 
The men answered, “This sea is Niu-t’ou-wai-yang. It is now part of the land of Lin-hai County, T'ai-chou Prefecture, China.”<ref>[This bay in which Ch'oe Pu arrived may have taken its name from a moderately prominent island, Niu-t’ou Island, off the coast of Lin-hai County, or Niu-t'ou-mên, in the same region. (Lin-hai-hsien chih, ed. by Hung Jo-kao, 1683, 15 ch.; ch. 1, 7r., 10r., 15r. It is not clear whether the three references are to the same island.). The beacon towers he noticed were those built in the Ming dynasty in a line from T'ao-chu Chiliad via Niu-t'ou to Chien-t'iao Chiliad. The beacons, five hundred boats, and seven thousand soldiers put at T'ao-chu Chiliad are said to have eliminated raids by pirates (Ibid., ch. 2, 4r., V.)]</ref>
 
Chòng Po pointed to his mouth. The men brought buckets of water and gave them to us and then pointed to the north, where there were mountains, and said, “Those mountains have springs, where you can draw water and cook a meal to eat. If you have black pepper, give us two or three ounces.”<ref>[25The demand for black pepper was characteristic of the times. There was “as great profit in taking spices to China as in taking them to Portugal”; pepper could be sent from Malacca to China at a profit of 300%. See Boxer, South China, p. XX.]</ref>
 
 
I answered, “My country does not produce black pepper. I did not start out with any."
 
The men then rowed their boats off a little, surrounded my boat, and dropped anchor. My boat, too, drew near the shore and moored. I ordered An Ŭi, Kõisan, and Sang-ni to disembark and climb a mountain. They looked round for human settlement. This was, indeed, a place joined to the mainland.
 
XXX26 Though the vast expanse of water through which I had passed on this voyage seemed to be a single sea, the current and color of the water differed according to the place. In the sea of Cheju, the color was deep green and the current violent and swift. Though the wind was slight, wave climbed over wave, boiling and swirling. There was nothing to equal it. It was like that as far as west of Hŭksan Island. When we had gone four days and nights, the color of the sea was white. In two more days and nights it became whiter, and in another day and night it was green again. In two more days and nights it was white again. Three days and nights after that it was red and muddy. One more day and night and it was red and black mixed with mud.
 
 
In sailing the boat we simply followed the wind, north, south, east, or west, drifting aimlessly. The colors of the sea that I saw in that time were generally as above, going from white back to green.
 
 
Though the force of the wind was strong, the waves were not very high. There were first islands from the time that the sea became white again. The islands were all precipitous, with cavernous valleys and masses of stones. On the tops lay earth, and there was a variety of plants and fragrant grasses, luxuriously green and vigorous. The current was very weak. When we did not meet high winds, we had little trouble with violent waves. If the sea in which I met the pirates and was set adrift again had been as perilous as the Cheju sea, we could never have sighted islands again. XXX
 
XXX In general, the First Month of every year being the middle of winter, violent winds rage, and enormous seas run. That is the season that travellers avoid. With the Second Month, the winds gradually grow calmer. In Cheju it is popularly called the Festival of Lights.27 But even then it is forbidden to cross the sea. Men in the bays of Kangnam28 do not sail the sea in the First Month either. After the rainy season of the Fourth Month has passed, the winds suddenly become steady, and ocean junks begin to cross. They are called the junk-driving winds.
 
 
I drifted to sea in the season of dangerous wind and waves. The sea and sky were darkened by violent storms for days on end. The masts, sails, lines, and oars were either broken or lost. We spent ten days at a time suffering from hunger and thirst, and more than once or twice a day we came close to sinking. But fortunately we were just able to survive and moor on a seashore. That was not only because we collected rain water that had soaked us to wet our parched insides but also because the boat was truly sound and nimble and could withstand the wind and waves. XXX
 
 
104. 《禮記》曲禮下에 “非其所祭而祭之, 名曰陰祀. 陰祀無福”이라 하였다.
 
105. 앞의 김진음산(金眞音山)과 동일 인물이다.
 
106. 수단이 常道에 반하지만 결과가 常道에 합하는 道, 임기응변의 수단. 常法을 행하기 어려울 때 취하는 방법.
 
107. 《孟子》, 盡心上. “莫非命也, 順受其正(命이 아닌 것이 없으나, 그 바른 것을 순조롭게 받아야 한다)”이란 구절이 있다.
 
<br>
 
燃燈은 원래 등불을 켜 놓음으로써 번뇌와 무지로 가득 찬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춰주는, 부처의 공덕을 기려 善業을 쌓고자 하는 공양의 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연등 의식 이 인도에서 중국에 전래되면서 연중 행사화하고, 또 신에 대한 제사를 함께 지내는 등의 성격 변화를 거치게 된다. 고려에서는 처음에 매년 1월 15일에 행사를 거행했는 데, 현종 때 거란의 침입으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돌아오던 중 淸州의 별궁에서 2월15일에 연 것을 계기로 형편에 따라 이 때에 거행하기도 했다. 제주에서는 2월 초하룻 날 歸德, 金寧 등지에 사는 자들은 나무 장대 열둘을 세워 신을 맞아 제사하고, 涯月浦에 사는 자는 나무 등걸 형상이 말머리 같은 것을 얻어 채색 비단으로 꾸며 말이 뛰는 놀이를 하며 신을 즐겁게 해주다가 보름날이 되면 파했다. 이를 燃燈이라 하였으며, 이 달에는 배타는 것을 금하였다. 《東國輿地勝覽》권38, 濟州牧.
 
<br>
 
108. ?
 
109. 중국의 江南 지방에서 梅實이 노랗게 익어갈 무렵 비가 많이 내리는 데서 유래한 말로서, 장마를 뜻함.
 
110. 원문에는 舶提風(박간풍)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는 舶連風(박초풍)'의 誤記이다. 박초풍에 대해서는 《平江紀事》에 “梅雨之際, 必有大風連晝夜, 謂之舶連風”이라 했고, 蘇武의(油連風)이란 시에 “三句已過梅黃雨, 萬里初來舶連風”이라 하였다. 《東坡 詩集註》권6, 〈述懷).
 
 
[[1월 16일.lst]]
 
 
===17일===
 
十七日, 捨舟登陸, 是日雨, 遲明, 所謂六船擁來, 語臣等曰:“看你也是好人,隨我可行,你有奇物,送些與我:”臣答曰:“漂流已久,所賣之物,盡撒海中,若指我生路,所乘船楫,皆焦的所有.”因問人居遠近,其一人曰:“此地也,近官,你要去不妨,一人曰:“過前一里,便有人家,一人曰:“此處人家便遠,不可止此,”臣又問官路遠近,其一人曰:“台州府距此一百八十里,”
 
一人曰:“一百五十里,一人曰:“二百四十里,”其語端彼此有違,不可信也.
 
 
其人等相率鬧擾,爭入臣船,目前寓雖些小物,無不壤歌,謂臣等曰:“不同我去,我當作怒,安義請舍船,乘其人船,隨其所去,李植欲擊殺一人以却之,臣曰:“爾等之計皆非也,觀彼人其言不實,劫奪又甚,情偽淺深,未可知也,彼若昔者下山海賊之類,則從安義之計而從歸,則彼必掉至絕島,沈殺我等,以減其跡,彼若或漁船若防禦之船,則從李慎之計而擊殺,則彼必掩其所為,反以我為異國人來劫殺人云爾,則大國之邊境騷然,我為戚,語且不通,難以辨明,必皆為邊將所戮,爾等之計,皆自取死途也,莫若權辭以
 
觀其勢,”臣謂其人曰:“我浮海日多,飢渴困德之極,危命僅一線耳,請做飯療飢,然後同行.”其人等復曰:“你少留緩行”即掉舟少却,可二三里許,復環臣船而泊,以兩故皆入船倉中,無觀望者,臣謂同舟人曰:“看彼人言語動止,也甚荒唐,看此山已連陸路,必通人居,不於此時善處,則我等之命,懸其掌握,終必為海曲之鬼,”遂率陪吏等先下船,諸軍人接踵而下,冒雨穿林,逃遁奔匿,過二嶺,領皆枕海,有石如甬道,行六七里,得一里社,臣謂陪史軍人等日:“同此生死之苦,無異骨肉之親,自此相保,則可以全身而還,汝等若遇患難則同救之,得一飯則分吃之,有疾病則相扶持之,無一人亡失可也.”皆曰:“唯命.”又曰:“我國本禮義之國,雖漂奔窘遠之間,亦當示以威儀,使此地人知我國禮節如是,凡所到處,陪吏等拜跪於我,軍人等拜跪於陪史,無有過差,且或於里前,或於城中,有墓聚來觀者,必作揖禮,無
 
 
p.366
 
敢肆突.”皆曰:“唯命.”至其里,則里中人老少男女爭怪臣等,觀者如墙,臣與從者而辑,皆合袖鞠躬以答之,臣即告以來自朝鮮之故,有二人,其容貌該非庸人,謂臣等:“你是朝鮮國人,緣何入我國界?你若是賊人,若是進貢之人,若是被風無定之人,逐一寫來,遞送還國.”臣曰:“我本朝鮮國臣,奉王命往海島,奔父喪過海,遭風風見漂,得到海岸,舍舟緣陸,望尋人煙而來,乞諸大人,聞于官府,以活垂死之命,”即以所費印信、冠帶、文書示之,其二人覽畢,指臣前鎮撫、陪吏等以次羅跪,末端軍人等亦以次俯
 
伏,謂臣曰:“聞貴國禮義邦久矣,果所聞,”即叫家僮,將米漿茶酒以體偏及軍人,任其所飲,指里前佛堂,曰:“你可住此堂安歇.”臣至佛堂,解濕衣以風,未幾,其二人又做飯來饋,果皆忠厚人也,而亡其職姓名,俄而其二人來言:“你可起身,送你好處,” 臣問曰:“好處幾里?”其二人謊辭曰:“還有二里,”曰:“其地名何?”曰:“西里堂也”曰:“雨甚路濤,時又向晚,奈何?”
 
曰:“去處不遠,不須憂矣.”臣從其言,率從者登途而行,則里中人或帶杖劍,或擊鋅鼓,前途有聞鋅鼓之聲者,羣聚如雲,叫號虞突,夾左右擁前後而驅,次次遞送,前里如是,後里又如是,行過五十餘里,夜已央矣,
 
 
배를 버려두고 상륙하였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날이 샐 녘에 앞서 말한 6척의 배가 빙 둘러싸고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당신들은 좋은 사람들 같소. 우리를 따라 오시오.
 
 
당신들에게 진기(珍奇)한 물건<ref>[http://m.blog.daum.net/chunhao/14327569]</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0508006_002 성종실록 46권, 성종 5년 8월 6일 무자 2번째기사, 1474년 명 성화(成化) 10년, 정괄의 청에 따라 유수의 집에서 기르고 있는 해청을 놓아 보내라 명하다]</ref>이 있으면 조금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바다에 표류한 지 이미 오래라, 가졌던 물건은 모두 바다에 버렸소. 만약 우리의 살길을 가르쳐 준다면 타고 온 배와 노는 모두 당신들에게 주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마을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의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은 관부(官府)에 가까우니 당신들이 갈 수도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으로 [https://korean.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01608&ctg= 1리]<ref>[http://www.metroseoul.co.kr/news/newsview?newscd=2010111700090 조선시대 10리는 4km가 아니다, 메트로신문, 2010.11.17]</ref>만 가면 곧 인가가 있소”라 하고, 한 사람은 “여기는 인가와 먼 곳이니,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오”라 하였습니다.
 
 
신이 또 관청과의 거리를 물으니, 그중 한 사람은 "태주부(台州府)는 이곳에서 180리나 떨어졌소”라 하고, 한 사람은 150리오.”라 하고, 한 사람은 “240리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서로 어긋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신의 배에 다투어 들어와, 눈에 보이는 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물건일지라도 모두 빼앗았습니다.
 
 
신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와 같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를 내고 말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안의는 배를 버려두고 그들의 배에 타고 따라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정은 그중 한 사람을 쳐 죽여서 그들을 물리치자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옳지 않다. 살펴보건대 저들은 그 말이 성실하지 못하고 물건을 겁탈하는 것 또한 심하니,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저들이 전일의 하산의 해적과 같은 부류라면, 안의의 계책대로 저들을 따라 가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노를 저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이르러 우리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는 흔적을 없애버릴 것이다. 저들이 어선(漁船)이나 [http://dic.seamuse.go.kr/bbs/board.php?bo_table=bbs8_01&wr_id=601&page=17&mkind=3&mes=search&mesc=wr_1&mesv=%EB%B0%B0%EC%9D%98%EC%A2%85%EB%A5%98&order_col= 방어선(防禦船)]이라면, 이정의 계책에 따라 쳐 죽이는 경우 저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한 짓은 숨기고 도리어 우리 이국인(異國人)이 와서 약탈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 할 것이니, 그렇다면 대국(大國)의 변경이 시끄러워지는 결과가 된다. 우리를 도적으로 무고하는데 말도 통하지 않아 해명하기가 어렵게 되면 반드시 모두가 [http://www.1392.org/bbs/board.php?board=sajodic&page=7&command=list&command=body&no=1008 변장(邊將)]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스스로 죽을 길을 취하는 것이니, 임시변통의 말을 하여 그 형세를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조) 길이 아니면 가지 마라. 조선선비의 정도, 학문하는 이유=격몽요결<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zU5jdZCqesIJ:humanities.u1.ac.kr/_prog/_board/common/download.php%3Fcode%3Dhuman_0503%26ntt_no%3D7146+&cd=10&hl=ko&ct=clnk&gl=kr 격몽요결 서문]</ref>
 
 
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바다에 떠다닌 지 오래고, 굶주리고 목말라 피곤함이 극도에 이르러, 위태한 목숨은 겨우 한 오라기 실과 같소. 청컨대 밥을 지어먹어 시장기를 면하고 난 후에 같이 가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시 말하기를, “당신들은 조금 머물렀다가 천천히 가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노를 저어 2-3리가량 조금 물러가더니 다시 신의 배를 둘러싸고 정박하였습니다.
 
 
비 때문에 모두 선창(船__)속에 들어갔으므로 망을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신은 같이 배를 탄 사람에게 말하기를, “보아하니 저 사람들의 말과 거동이 매우 황당하다. 이 산을 살펴보면 육로에 잇닿아 있으니 반드시 인가에 통할 것이므로, 이때에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목숨은 저들의 손에 달려 있어, 끝내는 반드시 바다 한 모퉁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배리(陪吏) 등을 거느리고 먼저 배에서 내리고, 여러 군인들도 잇달아 내려 비를 무릅쓰고 숲 사이를 뚫고 도망해 숨어 들어갔습니다.
 
 
두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는 모두 바다에 잇닿아 있으며 길 양쪽으로 돌담 을 쌓아 놓았습니다.
 
 
6-7리를 가니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신은 배리와 군인들에게 말하기를,“이처럼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 하니 골육과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서로 보호한다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재난을 당한다면 함께 구조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돌보아 한 사람의 목숨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ref>[https://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f2HQB3U21dUJ: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OrteServHistIFrame.kci%3FsereArticleSearchBean.artiId%3DART002069267%26sereArticleSearchBean.orteFileId%3DKCI_FI002069267+&cd=17&hl=ko&ct=clnk&gl=kr 예교 문화의 관점에서 본 조선과 중국]</ref><ref>[http://m.blog.daum.net/gusan0579/8011951?np_nil_b=-1]</ref>이니 비록 표류하고 도망하여 급박한 가운데 놓이더라도, 또한 마땅히 [https://hanja.dict.naver.com/word?q=%E5%A8%81%E5%84%80&cp_code=0&sound_id=0 위의(威儀)]를 보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예절이 이 같은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배리들은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고, 군인들은 배리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아 틀림이 없도록 하라. 또 마을 앞에서나 성(城) 안에서나 떼 지어 와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읍하는 예의를 차리고 감히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 마을에 이르니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신은 종자(從者)와 함께 앞으로 나아기 음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ref>[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63600.html 중국인은 허리 숙여 인사하지 않는다, 한겨레신문, 2018.09.27]</ref>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조선에서 온 연유를 알렸습니다.
 
 
용모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두 사람이 신 등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이 조선국 사람이라면 어떤 사연으로 우리나라 국경을 넘어 들어오게 되었소? 당신들이 해적인지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35991800 진공(進貢)]하는 사람인지, 혹은 바람을 만나 정처 없이 표류해 온 사람인지, 낱낱이 써 내면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게 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본디 조선국 신하로 왕명을 받들어 [https://www.culturing.kr/content/contentMain.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6&cp_code=cp0604 해도(海島)]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던 중, 바다를 건너다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해안에 도착하여 배를 버려두고 육지를 따라 인가를 바라보고 찾아 왔으니, 원컨대 대인(大人)<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8043001072612000001
 
‘니’는 ‘너’가 아니다]</ref>들께서는 관부(官府)에 알려 다 죽어 가는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곧 가지고 온 인신(印信)·관대(冠帶)· 문서(文書)를 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다 보고 나서, 신의 앞에 진무(鎭撫), 배리 등이 차례로 늘어 꿇어앉고, 말단 군인들도 차례로 부복한 것을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라고 하였습니다.
 
 
곧 가동(家童)<ref>[http://m.blog.daum.net/thddudgh7/16563625?np_nil_b=1]</ref>을 불러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9990 미음]<ref>[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c74ac15d558ac8c-c0bdc2dcb2e4/healthylife-02242017134600.html 죽과 미음]</ref>과 다주(茶酒)를 가져다 접대케 하는데, 군인들에게까지도 두루 마시게 하였습니다.
 
 
* 미음=米漿미장
 
 
마을 앞의 불당(佛堂)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들은 이 불당에 머물러 편히 쉬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불당에 이르러 젖은 옷을 벗어서 바람을 쏘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두 사람은 또 밥을 지어 와 접대했는데 과연 모두 충후(忠厚)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관직과 성명은 잊어버렸습니다.
 
 
조금 후에 그 두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떠나야만 하겠습니다. 당신들을 좋은 곳으로 보내 드리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그 곳이 몇 리나 됩니까?”
 
 
그 두 사람은 속여서 말하기를, “2리쯤 더 가면 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지명은 무엇입니까?”
 
 
“서리당(西里堂)입니다.”
 
 
“비가 많이 오고 길이 진흙길인 데다 해가 또 저물어 가는데 어찌하겠습니까?”
 
 
“가는 곳이 멀지 않으니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신은 그 말에 따라 종자(從者)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나니,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와 칼을 집어 들고 징과 북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앞길에서 그 징과 북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소란스럽게 큰 소리를 지르면서 사방에서 밀려들어 차례로 교대하며 호송하였습니다.
 
 
앞마을에서도 뒷마을에서도 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50여 리를 지나니 밤이 벌써 깊었습니다.
 
 
*심리(최부): 그들의 말이 서로 어긋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명-조선: 안의, 이정
 
*리더십-조선: 너희들의 계책은 모두 스스로 죽을 길을 취하는 것이니, 임시변통의 말을 하여 그 형세를 살펴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 보아하니 저 사람들의 말과 거동이 매우 황당하다. 이 산을 살펴보면 육로에 잇닿아 있으니 반드시 인가에 통할 것이므로, 이때에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목숨은 저들의 손에 달려 있어, 끝내는 반드시 바다 한 모퉁이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 하니 골육과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서로 보호한다면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만약 재난을 당한다면 함께 구조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으면 나누어 먹고,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돌보아 한 사람의 목숨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이니 비록 표류하고 도망하여 급박한 가운데 놓이더라도, 또한 마땅히 위의(威儀)를 보여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예절이 이 같은 것임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배리들은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고, 군인들은 배리에게 엎드려 절하고 꿇어앉아 틀림이 없도록 하라. 또 마을 앞에서나 성(城) 안에서나 떼 지어 와서 구경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읍하는 예의를 차리고 감히 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지명: 해도
 
*제도(관직)-조선: 신하, 진무(鎭撫), 배리, 군인 
 
*기물-조선: 인신(印信)·관대(冠帶)· 문서(文書),
 
*모화: 대국
 
 
*유학-조선: 골육, 위의(威儀), 예절, 예의, 나아가 읍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 왕명, 진무(鎭撫), 배리 등이 차례로 늘어 꿇어앉고, 말단 군인들도 차례로 부복한 것, 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
 
 
*기후: 비가 내렸습니다, 비가 많이 오고,
 
*시간: 날이 샐 녘, 해가 또 저물어, 밤이 벌써 깊었습니다
 
*지명-중국: 태주부(台州府),서리당(西里堂)
 
*지리-중국: 두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는 모두 바다에 잇닿아 있으며, 6-7리를 가니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50여 리를 지나니
 
*풍경-중국: 길 양쪽으로 돌담을 쌓아 놓았습니다, 길이 진흙길
 
 
*사회-중국: 마을 안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신 등을 괴이하게 여겨, 구경꾼이 담처럼 둘러 서 있었습니다, 해적, 진공하는 사람, 표류해 온 사람,
 
*풍습(음식)-중국: 미음, 다주, 밥
 
*심리-중국: 감동(귀국이 예의의 나라임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과연 듣던 바와 같구려), 속임
 
*기물-중국: 몽둥이와 칼을 집어 들고 징과 북,
 
*행정-중국: 교대하며 호송하였습니다
 
*제도(교통)-중국: 6척의 배
 
*사건: 당신들에게 진기(珍奇)한 물건이 있으면 조금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신의 배에 다투어 들어와, 눈에 보이는 것은 비록 보잘것없는 물건일지라도 모두 빼앗았습니다.
 
 
*유학-중국: 나아가 읍하니 모두 소매를 모아 몸을 굽혀 답례
 
 
 
17th Day. Leaving the Boat and Landing. This day it rained. At dawn the six boats came crowding round. They addressed us: “You are law-abiding men, we see. Come with us; if you have rare things, give us a few.”
 
I answered, “We have drifted a long time. All the things we had have been scattered in the sea. If you show me the way to rescue, the boat and oars by which we sailed are all yours as they are.” Then I asked how far we were from the nearest settlement.
 
One of the men said, “This place is near a public office. If you want to go there, it is no trouble.”
 
Another man said, “If you go ahead one li there is a settlement.”
 
Another said, “Even though a settlement is far from here, you must not stop here.”
 
Then I asked whether the public road was far. One of the men said, “T'ai-chou Prefecture is 180 li from here.” Another said, “150 li.” Another said, “240 li.” There were contradictions among them, and they could not be trusted.
 
The men, jostling and shoving one after the next, fought to come into my boat. Whatever their eyes fell on, though small, worthless things, they seized. They said to us, “If you do not go with us, we shall be angry.”
 
An Ŭi asked me, “Leave the boat, get into their boat, and go where they go.” Yi Chồng wanted to attack one man and kill him, to drive them away.
 
I said, “Neither of your plans will do. It seems to me that since what they say is untrue and since they have been robbing us greedily, it is impossible to tell how honest they are. If they are of the type of the previous ones, the Hsia-shan pirates, and we follow An Ui's plan and go with them, they will row to a remote island and drown us to cover their tracks. If they are fishing boats or defense boats and we follow Yi Chong's plan and attack and kill [a man], they will cover up what they have done and instead will make us out to be foreigners who have come to plunder and kill men. Then there will be an uproar along the coast of China and we shall be falsely accused of being pirates. Our language, moreover, is different, so that it will be hard for us to argue our case. We shall all be executed by the coast guards. By either of your plans, we should bring death upon ourselves. For the time being, it is best to refuse and see
 
what their attitude is.”
 
I said to the men, “We have sailed on the sea for many days. In extremities of hunger, thirst, and suffering, our lives hung by a thread. Please let us make a meal to satisfy our hunger, and after that we shall go with you.”
 
The men replied, “Stay here a little and do not go.” They rowed their boats off a bit and about two or three li away encircled my boat again and anchored. Because of the rain they all went into the cabins of the boats. No one was looking out.
 
I said to the men in the boat with me, “I see that the speech and actions of those men are untrustworthy. I see that this mountain joins a way to the mainland: it must lead to a settlement. If we do not make the best of this moment, our lives will lie in their grasp, and eventually we shall be ghosts in the briny deep.” I then led the secondary officials off the boat first, and the troops followed in our footsteps.
 
We fled hiding into the rain and woods. We crossed two ridges that overlooked the sea. There were rocks like those of a walled road. When we had gone six or seven li, we reached a village. I said to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e troops, “You share with me this mortal suffering;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us. If we defend each other from now on, we can return home safe and sound. If, when you meet troubles you overcome them together, when you get a meal you divide it to eat, when there is sickness you support each other, we can manage without losing a single man.”
 
They all said, “As you command.”
 
I said, “Our country is a country of propriety and morality. Though we are in flight and distressed, we ought still to show a dignified bearing and let the people of this land know that the formality of our country is as it is. Whereever we go, the secondary officials should bow to me, and the troops should bow to the secondary officials. There should be no skipping over ranks. When, moreover, crowds come and look at us in front of villages or in walled towns, we must bow with hands folded and not venture to be too abrupt.”
 
They all said. “As you command.”
 
When we came to the village, the people, young and old, male and female, all marveled at us. The onlookers were like a wall. I and my staff advanced and folded our hands in greeting. They all brought their sleeves together and bowed in answer. Then I informed them about how we had come from Korea.
 
There were two men whose appearance showed that they were not common. They said to us, “If you are Koreans, why did you enter our country? Write it all out for us, whether you are pirates, or bringers of tribute, or men displaced by a wind. We shall send you back to your country.”
 
I said, “I am a minister of Korea.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and went to an island. Hurrying into mourning for my father, I was crossing the sea and met a wind. I was blown adrift and came to a sea coast. I left the boat, went ashore, and, seeking human settlement, came here. I beg you gentlemen to inform the public office of this and save us from impending death.” Then I showed them the seal, cap, sash, and documents that I had. When the two men had finished looking at them, they pointed to the Security Officer and secondary officials in front of me, who were prostrated in order of rank. [The two men) said to me, “We have long heard that your country is a land of protocol and morality. This indeed proves what we have heard.” Then they summoned house servants and had rice water, tea, and wine brought to us all, including the troops. They let us drink and then pointed to a Buddhist temple in front of the village.
 
They said, “You may stay in that temple and rest.”
 
I went to the temple, took off my damp clothes, and aired them. Soon the two men had more food prepared, brought, and served to us. They were truly worthy men, but I have forgotten their names and positions.
 
Suddenly, the two men came and said, “You must get up. We shall send you to a good place.”
 
I asked, “How many li away is this good place?” They lied and said, “It is two li more.” I said, “What is the name of the place?” They said, “Hsi-li-t'ang."
 
I said, “It is raining hard, and the road is muddy, and, too, it is toward evening. How can we go now?”
 
They said, “The place where you are going is not far. You must not worry.”
 
I did as they said. As I set out at the head of my staff, some of the people of the village took up staves and swords and some beat gongs and drums. I heard the sound of gongs and drums on the road ahead, [and when we advanced that far] people gathered round like clouds and shouted at us threateningly. They pressed in on our left and right, crowded before and behind us, and drove us on. They passed us on successively, each new village like the previous one. When we had gone more than fifty li, the night was already well advanced.
 
 
111. 원문의 里社는 본래 향촌에서 土地神에게 제사지내는 祠堂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마을의 뜻으로 쓰였다.
 
112. 원래 官衙서 하급 관원이 上司를 지칭하는 敬語이지만 여기에서는 '나으리'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113. 臨海縣 承恩鄕 19都에 西里란 촌락이 있다. 民國《臨海縣志》 권4, 疆域.
 
 
(조) 최부 일행의 표류 종료: 표류 13일. 조선시대 선박의 선원조직: 천호는 조운선 30척 통솔, 통령은 조운선 10척, 영선은 조운선 1척 지휘. 격군(곁꾼)은 노를 젓고 사공은 배를 지휘하는 책임자. p. 128,129, 130, 131, 132
 
 
[[1월 17일.lst]]
 
 
===18일===
 
十八日,遇千戶許清於路上,是日大雨,子半,臣等因為里人所驅,路經一高阜,松竹成數,遇有自稱隱儒姓王名乙源者,憐臣冒夜衝雨,艱楚被驅,止里人少住,問臣所從來,臣亦告以漂風之故,乙源爛然,即呼酒勸臣,臣曰:“我朝鮮人守親喪,不飲酒食肉茹董及甘旨之味,以終三年,蒙饋酒,感恩則已深矣,然我今當要,敢辭,乙源遂饋臣以茶,體從者以酒,因問曰:“你國亦有佛否?”答曰:“我國不崇佛法,專尚儒術,家家皆以孝悌忠信為業,乙源握臣手眷顧相別,其里人驅臣等至一大嶺,臣足如蘭,不能前進,里人擁抱臣臂,前引後推而過,又遞至二十餘里,其里中有大橋,里人皆揮偶枚亂擊臣等,肆劫奪大甚,吳山者負臣馬鞍,有一人毆擊壤去,臣等被枚前驅,顛仆哭泣,過二嶺,見遞他里,向曙,問其有大橋之里,則人曰:“仙岩里也.”自登陸以來,道傍觀者,皆揮臂指頭,作斬頭之狀以示,臣等莫知其意,行至蒲室里,雨少止,有官人率軍史而來,問臣曰:“你是何國人?怎麼到此?”臣曰:“我乃朝鮮國人,再登文科, 為國王近臣,奉事巡海島,奔喪出陸,遭風漂到于此,飢渴萬死之餘,僅續殘命,復為里人所驅,辛苦萬端之極,得遇宫人於此,是我得生之時也.”其官人即先饋臣以粥,隨以飯具,又令臣從者做飯以吃,臣間官人姓名職事,有王适者曰:“此乃海門衛千戶許清也,守塘頭寨,聞倭犯界,專為捕獲而來,汝其慎之,臣困欧路周四肢莫舉,許清謂臣曰:“我大唐法度嚴切,你別處人,不可久在此亂為攪擾良民,”令軍史等疾驅臣等,行五里許有官廨,乃唐頭塞也,過一長堤,可十餘里,雨復大作,臣跛行蹣跚,(專)(全)未動脚,中途僵仆,曰:“我之筋力竭矣,將及於死,早知若此,莫如死於海上之為便,”程保以下,亦對臣痛哭,被軍吏甚督,莫能少留,李楨、孝枝、尚理、玄山等身實者,相遞負臣以行,過二嶺,幾至三十餘里,有人居甚繁盛,前有佛宇,天將暮,雨不止,故許清欲留臣等于佛宇以經夜,其里人皆以謂不可,許清謂臣曰:“此方人皆疑你為劫財,故不許留,你雖艱步,不可不行!”令軍史驅臣等,過一大嶺,夜二更,至一川邊,
 
 
p.368
 
________________
 
 
李楨等亦力盡,身且不保,不克負臣,從者等亦皆疲贏不能行,許清親執臣手以,臣之兩足梗塞,不運一步,高福大怒,指臣曰:“此漢此漢,無乃病狂嗽?汝若艱苦,宜委四肢,莫之能起可也.”臣辱其言,自以謂:我寧至死,宜死於此地,復臥不起,從者率皆顯队狼藉,許清軍吏或督或歐,而不得驅焉,良久,又有一官人領兵擁炬而至,甲胄、鎗劍、彭排之盛,嗩吶、喀曬、喇叭、鋅鼓、銳痛之聲,卒然重,拔劍使鎗,以試擊刺之狀,臣等驚駭耳目,喪魂飛魄,罔知所為,官人與許清整軍威驅臣等,可三四里,有大屋舍,以城郭,如關防然,問之則乃於賣場見桃知所,或云批驗所也,城中又有安性寺,止臣等于寺,許留宿焉,臣問其官人為誰,則有僧云:“此乃桃渚所千戶也,聞倭人犯境,領器械以備于此,因許千戶之報,率兵往驅你難以來,然未知你心真詐,明日到桃渚所,將訊汝.”
 
 
천호(千戶)114 허청(許淸)을 노상에서 만났습니다.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한밤중에 신 등이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서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은사(隱土)를 자칭하는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신이 밤에 비를 맞으며 고생스럽게 마을 사람에게 내몰려 온 것을 불쌍히 여겨, 마을 사람을 제지시켜 조금 멈추게 하고는 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신은 풍랑에 표류된 사연을 고하였습니다.
 
 
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을원은 마침내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이어서 묻기를,“당신 나라에도 불법(佛法)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을원은 신의 손을 잡고 뒤돌아보면서 작별하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신 등을 몰아 큰 고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 사마천과 환관 <ref>[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160909.22030190922 [강명관 칼럼] 사마천의 궁형과 스스로 환관이 된 사내, 국제신문, 2016.09.08]</ref>
 
* 사마천의 잠사(蠶史) <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23_0050_0040_0030&whereStr=]</ref>
 
* 역사와 환관<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486170/1 역사 속 환관 가문의 상속, 신동아, 2018.10.07]</ref>
 
* 역사속 환관<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echland&logNo=220868337219&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
 
*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NJ2018-23WJ1.lst 조선의 양잠]
 
* 잠실 <ref>[https://www.songpa.go.kr/user.kdf?a=songpa.menu.MenuApp&c=1001&cate_id=BC1901002000 잠실동 유래]</ref>
 
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그 마을에는 큰 다리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신 등을 마구 치면서 함부로 겁탈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오산이란 자는 신의 말안장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오산을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신 등은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37483400 체송(遞送)]되니,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큰 다리가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물었더니,“선암리(仙岩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육지에 오른 이후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을 지어 보였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다가 포봉리(蒲峯里)에 이르니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관인(官人)이 군리(軍史)를 거느리고 와서 신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이곳에 도착하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곧 조선국 사람으로 두 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9419 문과(文科)]에 올라18 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해도를 순찰하던 중 친상을 당하여 육지로 나오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서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기갈로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잔명(殘命)을 겨우 이어오다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천신만고 끝에 관인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살길을 찾은 듯합니다.”
 
 
그 관인은 곧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이어 밥 지을 그릇을 주어 신의 종자들에게도 밥을 지어서 먹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관인의 성명과 직업을 물으니 왕괄(王适)이란 자가 말하기를,
 
 
“이 분은 곧 해문위'9천호(海門衛千戶) 허청(許淸)인데, 당두채(塘頭寨)를 지키다가 왜적(倭賊)이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잡기 위해 왔으니 당신들은 조심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피곤하여 길가에 드러누워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대당(大唐)의 법도는 엄격하니, 당신들 딴 지방 사람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양민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군리(軍吏) 등에게 신 등을 빨리 내몰게 하였습니다. 5리가량을 가니 관해(官__)120가 있었는데 바로 당두채였습니다.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신은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걷다가 전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중도에서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나의 근력이 다하였으니 곧 죽겠구나. 이럴 줄 일찍 알았더라면 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정보 이하가 신을 마주하고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리들이 심히 독촉하므로 조금도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현산 등 몸이 튼튼한 자들이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인가가 매우 많고 그 앞에는 불사(佛寺)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허청은 신 등을 불사에 머물러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당신이 비록 걷기가 힘들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밤 2경에 어느 한 냇가에 이르자 이정 등도 또한 힘이 다하여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였으니 신을 업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자들 또한 모두 피곤하여 걷지 못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신의 두 다리가 절룩거려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습니다.
 
 
고이복이 크게 성을 내며 신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미쳐버린 것이겠지! 당신이 그렇게 힘들다면 사지를 뻗어버리고 일어서지도 못해야 할 것 아니겠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굴욕을 느끼고, '내가 차라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여기서 죽으리라' 하고 다시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자들도 모두 쓰러져 여기저기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허청이 군리들을 시켜 독려하기도 하고 구타하기도 했지만 몰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또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갑옷, 창검, 방패의 위세와 [http://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900 쇄납(瑣吶)](태평소의 일종)122<ref>[https://www.youtube.com/watch?v=wQhQRC7_QpI 嗩吶哥cover拉丁神曲《Despacito》 網友:不愧是傳說中最騷樂器]</ref>, 발라(__)123, 나팔, 징, 북, 총통(銃痛)의 소리와 함께 갑자기 겹겹 둘러싸더니, 칼을 빼고 창을 써서 치고 찌르는 동작을 해 보였습니다.
 
 
신 등은 눈과 귀가 몹시 놀라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관인은 허청과 함께 군사의 위용(威容)을 정돈하고 나서 신 등을 몰았습니다.
 
 
3-4리쯤 가니, 큰 옥사(屋舍)가 있고, 성곽이 빙 둘러서 관방(關防)124과 같기에 물었더니,
 
 
곧 두독장(杜瀆場)125으로 현재 도지소(桃知所) 도조서126 라고도 하고 비험소(批驗所)라고도 하였습니다.
 
 
성안에 안성사(安性寺)란 절도 있었는데, 신 등을 절에 머물러 유숙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그 관인이 누구인가 물으니,
 
 
어떤 중이 말하기를,“이 분은 곧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기를 가지고서 여기에서 대비하고 있었는데, 허천호(許千戶)의 보고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들을 몰고 온 것이오.
 
 
그러나 아직 당신 마음이 진실된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내일 도저소에 이르면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사건: 쫓김(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구타하기도 했지만,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신 등을 몰았습니다)
 
*제도(관직): 천호, 관인(官人), 군리(軍史),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
 
*인명: 허청,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 왕괄(王适)
 
*기후: 큰 비,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시간: 한밤중, 새벽녘, 날은 저물어 가는데, 밤 2시
 
*식물: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지리: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냇가, 3-4리쯤 가니 
 
*풍경: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심리: 동정(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의전: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풍습(음식)-중국: 술, 차
 
*토목: 큰 다리,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행정: 체송(遞送), 대당의 법도는 엄격하니,
 
*지명: 선암리, 포봉리(蒲峯里), 해문위, 대당(大唐), 두독장(杜瀆場)=도지소(桃知所)=도조서=비험소(批驗所) 
 
*기물: 밥지을 그릇, 갑옷, 창검, 방패, 쇄납(瑣吶), 발라, 나팔, 징, 북, 총통(銃痛)
 
*건축물: 당두채(塘頭寨)
 
*사회: 왜적,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
 
*제도(관직): 군리
 
*기후: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풍경: 인가가 매우 많고
 
*불교: 불사, 안성사
 
 
 
 
*사건-조선: 친상을 당하여, 표류
 
*사회-조선: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풍습(음식)-조선: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유학-조선: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사회-조선: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유학-조선: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비유-조선: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인명-조선: '''오산''', 정보, 이정, 효지, 상리, 현산
 
*기물-조선: 말안장
 
*제도(시험)-조선: 두 번 문과(文科)에 올라, 
 
*행정-조선: 해도를 순찰하던 중 
 
*제도(관직)-조선: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심리(최부): 좌절, 허탈(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 굴욕, 놀람(몹시 놀라 넋을 잃고)
 
*심리(고이복): 분노, 놀람(몹시 놀라 넋을 잃고)
 
 
18th Day. An Encounter with Chiliarch Hsü Ch’ing on the Road. This day it rained hard.
 
 
By midnight, then, as we were driven on by villagers, the road passed over a high hill, where pines and bamboo grew thickly. We met a man, named Wang I-yüan, who described himself as a recluse scholar. He pitied us for braving the night and the rain and being driven on painfully. He stopped the villagers briefly and asked me what had happened, and I informed him, too, of the circumstances of our being blown adrift by the wind. I-yüan grieved for me; he called for wine and urged it on me. I said, “When we Koreans observe mourning for parents, we do not drink wine or eat meat, garlic, oniony plants, or sweet things for fully three years. I am deeply grateful for your kindness in offering me wine, but I am in mourning now, and I venture to decline.”
 
l-yuan then served me tea and my staff wine. He asked, “Does your country have the Buddha, too?”
 
I answered, “My country does not revere the Buddhist law, it honors only the Confucian system. All its families make filial piety, fraternal duty, loyalty, and sincerity their concern.” I-yüan took my hands and looked at me compassionately, and we parted.
 
The villagers drove us on, and we came to a large mountain range. My feet were swollen like cocoons, and I could not go forward. The villagers seized my arms, pulled me from in front, pushed me from behind, and over we went. We were passed on for over twenty li [and came to another village, where] there was a big bridge. The villagers, who struck us indiscriminately with crooked sticks, were recklessly cruel and plundered greedily. O San was carrying my horse saddle, but a man beat him off, seized it, and took it away. Beaten forward with sticks, we fell down and wept.
 
We crossed two ranges and were turned over to another village. It was approaching dawn. When I asked what the vilļage with the big bridge had been, a man said, “Hsien-yen Village.”
 
Ever since we had landed, all the onlookers by the road had sawed their arms across their throats, making gestures at us as if to cut off their heads, and we did not know what they meant.
 
We reached P’u-fêng Village. The rain let up a little. An official came with military officers and asked me, “What is your nationality? How did you come here?”
 
I said, “I am a Korean. I have placed in the examinations twice and am a minister close to the King of the country. I had been given the state duty of touring an island, but hurrying into mourning, I put out from land, encountered a wind, and drifted here. Through hunger and thirst enough for dying many times, I have barely clung to life. I have been repeatedly driven on by villagers. In this extremity of suffering, I am fortunate enough to meet an official here, making it the moment of my rescue.”
 
The official first served me congee and then solid food. He also ordered my staff to prepare food and eat. When I asked the official's name and position, one Wang Kua said, “He is Hsü Ch’ing, Chiliarch [Ch’ien-hu] of Hai-men Garrison [Wei].29 He defends T’ang-t’ou Stockade; having heard that Japanese were raiding the coast, he came specifically to take them prisoner. Take care.”
 
I lay down exhausted at the side of the road; my four limbs would not move. Hsü Ch’ing said to me, “The laws of China are strict. You strangers may not stay here long upsetting the law-abiding people.” He ordered military officers to drive us on quickly. When we had gone about five li, there was a public office, which was T’ang-t’ou Stockade. We passed a long embankment, somewhat over ten li long. Rain fell heavily again.
 
 
I hobbled along, crippled, moving my legs hardly at all. I fell in the road and said, “My strength is gone, I am going to die. If I had known earlier that it was to be like this, it would have been easier to die at sea.” Chòng Po and those below him wept bitterly for me again. We were urged on by the military officers and could not delay a moment. Yi Chong, Hyo-ji, Sang-ni and Hyon San, men with sound bodies, took turns carrying me along.
 
 
We crossed two ranges, and when we had gone almost thirty li, there were many houses, in front of which was a Buddhist temple. Since it was about to get dark and the rain did not stop, Hsü Ch’ing wanted to put us up in the temple. All the villagers felt that could not be permitted. Hsü Ch’ing said to me, “All the people here suspect that you are bandits and, therefore, will not let you be put up. Though it is hard for you to walk, we have no choice but to go on.” He ordered the military officers to drive us on.
 
 
We crossed a large range and in the second watch of the night came to the bank of a river. Yi Chong and the others had also exhausted their strength and could not take care of themselves, nor could they carry me. My whole staff, too, were weary and wasted and could not go on. Hsü Ch’ing himself took my hands and raised me. Both my feet were swollen and lame, and I could not move them a step. Ko I-hok was enraged. He pointed at me and said, “These Chinese! They must be mad! If you are really at the end of your strength, you had better just drop and not get up.” I agreed with what he said. I would rather die, I felt, and it was just as well to die here, so I lay down again and did not get up. Most of the rest fell down helter-skelter. Hsü Ch’ing ordered the officers to urge some of us on and strike at others, but they could not make us move.
 
After some time, another official came with soldiers carrying torches. They were impressive with their armor and helmets, their spears, swords, and shields. Their gongs, drums, and firearms30 made a tumult. Without warning they surrounded us, drawing their swords and handling their spears in motions as if to practice attacking and cutting. The shock to our eyes and ears terrified us, and we did not know what to do.
 
 
The official and Hsü Ch'ing drew their forces up in formation and drove us on. In about three or four li, there was a big house, surrounded by a wall like a fortified pass. I asked about it. It was Yü-tu-ch’ang, the present T'ao-chih Chiliad;31 some said it was P’i-yen Chiliad.32 Inside the wall was An-hsing Temple. They stopped us at the temple and let us stay there for the night. When I asked who the official was, a priest said, “He is the Chiliarch of T’aochu Chiliad. He heard that Japanese were raiding the borders and had weapons brought here and set up. Then, receiving Chiliarch Hsü’s report, he led soldiers out to drive you on and bring you here. But he does not know yet whether you are honest or dishonest. Tomorrow you will reach T’ao-chu Chiliad, and he will question you.”
 
 
114. 所制度의 한 부대 단위인 千戶所의 長官으로 정5품이며, 世官으로 充任하였다.
 
115.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고 있는 儒者.
 
116. 파, 마늘, 부추 등 맵거나 냄새나는 素榮.
 
117. 臨海縣 承恩鄕 19都 소속. 民國《臨海縣志》 권4, 疆域, 坊鄕.
 
118. 조선에서는 태종7년(1407) 이후 이미 등용된 文臣들에게 다시 10년마다 실시하는 重試라는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여기에서는 최부가 성종13년(1482) 문과급제하고 17년(1486) 重試 乙科에 합격한 것을 뜻한다.
 
119. 臨海縣 縣治에서 동남쪽으로 90리 거리에 있다. 3면은 산으로 둘러져 있고, 1면은 바다에 접해 있다. 衛는 洪武20년(1387)에 설치되었다. 松門衛와 함께 松海備倭把總에 예속되었는데 海門前所, 新河, 桃濬, 健跳의 4所를 거느렸다. 康熙《臨海縣志》 권2, 建置; 民國《臨海縣志》권5, 建置;《浙江通志》권98, 海防, 台州府 등 참조.
 
120. 官司, 官署의 뜻.
 
121. 이 때 허청이 최부에게 시를 지어 마을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권하였으므로 최부는 絶句를 지어 보이기도 하였다. 이 부분은 최부가 성종에게 구두로 보고한 내용 속에 들어 있다. 《朝鮮成宗實錄》 23년 1월 乙酉.
 
122. 나무로 만든 긴 관에 혀를 넣고 부는 악기인 태평소를 가리킨다.
 
123. 바라 즉 소라고둥의 껍데기로 만든 옛 군대 악기.
 
124. 子兵이 지키는 關隘.
 
125. 杜灣靈場을 가리킨다. 元代부터 설치된 鹽場으로 武官 1인을 두었다. 康熙《臨海縣志》2, 建置.
 
126. 桃知所는 桃渚所의 誤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두독장과 도저소는 별개의 장소일뿐만 아니라 양자 사이에는 두 산이 있어 서로 보이지도 않는다. 본문에서 말하는 桃知所는 해안으로부터 桃者所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桃者中舊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籌海圖編》권1, 浙江 7.
 
 
[[1월 18일.lst]]
 
 
===19일===
 
 
十九日,到桃渚所,是日大雨,兩千戶並馬驅臣等,冒雨以行,臣令程保告許清曰:“我等漂海,浮沈飢渴,臨死復甦,僅保餘喘,得到貴境,得遇官人,得飽昨朝之飯,以為得再生之地,乃於霖溪之雨,寧療之途,颠坑仆谷,撥石衝泥,體凍脚微,心焦力盡,昨夕不得食,今早又不得食,又驅出冒大雨而行,我其殆將半途而斃矣.”許清復曰:“昨因你走不到官司,自取飲,今若便到,則官自供給,速去速去”臣運步不得,仆路喂,四體委地不收,孝子、程保、金重、莫金、萬山、巨伊山等,環坐痛哭,適有牽牛而過者,程保
 
告諸千戶曰:“請解衣買此牛,以騎我員,”許清曰:“我亦豈不憐你難受此苦乎?緣拘國法,未得護汝耳,”李楨、孝枝、尚理等,又相代負臣過一嶺,可二十餘里,至一城,乃海門衛之桃渚所,行將近城七八里間,軍卒帶甲束乾號桶彭排夾道填街,至其城,則城有重門,門有鐵局,城上列建警成之樓,城中市店聯絡,人物繁富,引臣等至一公館許留焉,臣之形容枯,冠服塗泥,觀者絕倒,有姓名王碧者寫謂臣曰:“昨日已報上司,倭船十四隻,犯邊劫人,你果是倭乎?”臣曰:“我非倭,乃朝鮮國文士也.”又有姓名盧夫容者,自种措大,謂臣曰:“車同軌,書同文,獨你語音,不同中國,何也?”臣答曰: “千里不同風,百里不同俗,足下怪聽我言,我亦怪聽足下之言,習俗然也,然同得天所賦之性,則我之性,亦堯舜孔顏之性,豈嫌於語音之有異哉?”其人撫掌,曰:“你奔喪,可行朱文公《家禮》乎?”臣答曰:“我國人守喪,皆一遊《家禮》,我當從之,但為風所逆,今不得哭于柩前,所以痛哭.”其人又
 
問曰:“你作詩否?”臣答曰:“詩詞乃輕薄子嘲弄風月之資,非學道篤實君子所為也,我以格致誠正為學,不用意學夫詩詞也,若或有人先倡,不得不和耳.”又有一人寫臣掌上日:“看你也不是(反)(59人,只以言語不同,實同肯吃,誠可憐也,我告你一言,你其記之,善自處,慎勿輕與人言,自古倭賊____我邊境,故國家設備倭都指揮、備倭把總官以備之,若獲倭則皆先斬後聞,今你初繫舟處,轄獅子寒之地,守塞官汝為倭,欲獻截圖功,故先報云:“倭船十四隻,犯邊劫人,將領兵往捕汝汝之時,你輩先自捨,投入人多之里,故不得逞其謀矣,明日把總官來訊你輩,你其詳辨之,少有違
 
 
p.370
 
誤,事在不測云云,問其姓名,則曰:“我所以言之者,愛汝也,危之也.”掉頭而去,臣聞其言,毛髮豎立,即語程保等,保等曰:“路人指我等為斬伐之狀者,皆惑此謀故耳”日夕,千戶等官員七八人,置一大享,環立卓邊,引程保於前,問曰:“你一起一十四隻船,實否?”保對曰:“否,但一隻而已.”揮程保以出,又引臣問曰:“你眾所駕原船幾隻?”臣曰:“只一隻耳.”問曰:“我邊上瞭見倭船一十四隻,同泊處海洋,我因寺案官之報,已報于上司大人,你船十三隻,置之何地?”臣曰:“我之到海岸時,有貴人等乘船六隻,同泊一海,若要究六船人,則我之船數可知矣.”問曰:“你倭人,登劫此處,何也?”臣曰:“我乃朝鮮人也,與倭語音有異,衣冠殊制,以此可辨.”問日:“倭之神於為盜者,或有變服,似若朝鮮人者,安知你非其倭乎?”臣曰:“觀我行止舉動,證我印牌、冠帶、文書,則可辨情傷,”千戶等即令臣拿印信等物來以質之,因問曰:“你無乃以倭劫朝鮮人,得此物乎?”臣曰:“若少有 疑我之心,姑令送我北京,與朝鮮通事員一話,情實立見.”問曰:“你姓何名 誰?何州縣人?何職官?因何事幹到我邊境?開寫情狀,母敢謊虛,我其申報上司:”臣曰:“姓崔名溥,住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签仕朝著者有年,去丁未秋九月,奉國王命往濟州等處海島,今閏正月初三日,父喪,顛倒還家,遭風漂海,得到于此,”曰:“你父名何?職何?死在何地?”臣曰:“父名澤,格進士試,以養親不仕,閔孝服僅四載,又死于羅州.”供畢後,館臣于別館,以供臣及從者,我國人為公為私往來濟州,或遭風無去處者,不可枚悉,終能生還者,十百僅一二,是豈盡沈於海波乎?其漂入島夷若暹羅、占城之國者,無復望還,雖或漂至中國之界,亦為邊人所誤,以倭賊,折敵受賞,則誰能辨其情乎?如臣等者,若不先自下陸,若無印牌之信,__復免於禍哉? 我國家若依中朝制,凡百官給號牌、錫牌,篆書職姓名以異之,奉使臣無大小給節鉞,以王命,抑又沿海住人,雖以私商過海者,皆給號牌,書某國某州縣某姓名某形某年甲以別之,又置通事一員於濟州,凡奉使臣及三邑守合往還,常川帶行,以圖後慮,
 
然後庶可免於患,
 
 
도저소<ref>[http://www.taizhou.com.cn/wenhua/2018-06/05/content_6012145.htm 崔溥笔下的桃渚城]</ref><ref>[http://m.blog.daum.net/osh46/15864258?tp_nil_a=1 도저성]</ref><ref>[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216599 최부 거쳐 간 도저성을 다시 보니…,월간중앙, 2004.11]</ref><ref>[https://www.sciencetimes.co.kr/?news=039%EB%AA%A8%EC%84%B8%EC%9D%98-%EA%B8%B0%EC%A0%81039-%EC%9D%B4%EC%9A%A9%ED%95%9C-%EC%B2%99%EA%B3%84%EA%B4%91%EC%9D%98-%EC%99%9C%EA%B5%AC-%ED%86%A0%EB%B2%8C%E3%80%80 ‘모세의 기적’ 이용한 척계광의 왜구 토벌, ScienceTimes, 2011.05.24]</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3tulwLBpl9A 풍운대전]</ref><ref>[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10107/33790599/1 왜구 소탕한 명나라 명장 척계광의 전법, 동아일보, 2011.01.08]</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zRfDQtmrXA4 [토크멘터리 전쟁史] 115부 동북아에 몰아친 피의 기록-명나라의 왜구 소탕작전 2부]</ref><ref>[http://zhtv.tving.com/zhtv/vod/view/clip/cg_88404 척계광의 왜구섬명]</ref><ref>[http://www.mooyenews.kr/sub_read.html?uid=5632&section=sc3 척계광(戚繼光)의 6기(六技)와 십팔기(十八技), 한국무예신문, 2015.06.22]</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qymxPMt2Hg0 원앙진법 재현]</ref>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천호(千戶) 두 사람이 말을 나란히 타고 신 등을 몰아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허청에게 알리기를,
 
 
“우리들은 바다에 표류하여, 풍랑과 기갈로 죽을 뻔했다가 다시 살아나 겨우 잔명을 보전하여 귀국의 땅에 도착하게 되어 관인을 만나 어제 아침에 밥을 배부르게 먹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맛비와 진흙길에서 구덩이에 엎어지고 골짜기에 넘어지며 돌에 긁히고 진흙에 빠져, 몸은 얼고 발은 이지러졌으며 가슴이 타고 힘은 다 빠졌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밥을 먹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도 밥을 먹지 못했는데, 또 몰아내어 큰비를 무릅쓰고 떠나게 하니 우리는 아마 도중에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대답하기를, “어제는 당신들이 관사(官司)<ref>[http://m.blog.daum.net/osh46/15864258?np_nil_b=1 도저성 관사]</ref>에 도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굶주림을 자초한 것이오. 이제 관사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관에서 지급할 것이니 빨리 빨리 갑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걸음을 옮기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길모퉁이에 넘어져서 땅바닥에 사지를 뻗어버렸습니다.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등이 빙 둘러앉아서 통곡하였습니다.
 
 
때마침 소를 끌고 지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정보가 천호에게 고하기를, "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말하기를, “난들 어찌 당신들이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는가?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당신들을 감싸줄 수 없을 뿐일세”라고 하였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한 성(城)에 이르니, 바로 해문위(海門衛)의 도저소였습니다.
 
 
성에 이르기 7-8리 앞에서부터 갑옷을 입고 창칼과 총통이나 방패를 든 군졸들이 길거리 양 옆을 꽉 메웠습니다.
 
 
그 성에 이르니, 성에는 겹 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성 위에는 경수루(警成樓)가 죽 늘어 있고 성안에는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신 등을 이끌어 한 공관(公館)128에 이르러 유숙케 하였습니다.
 
 
신의 얼굴은 바싹 마르고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왕벽(王碧)이란 자가 글을 써서 신에게 보이기를,“어제 이미 상사(上司)에게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신은 정말 왜인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인이 아니라 곧 조선국 문사(文士)요.”
 
 
또 노부용(虛夫容)이란 자가 자칭 가난한 선비라고 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수레는 바퀴가 같고 글은 문자(文字)가 같은데129,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천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백리에 습속이 같지 않은 것이오.130 족하(足下)는 내 말을 괴이하게 듣고, 나 또한 족하의 말을 괴이하게 듣는 것은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하늘이 준 성품을 같이 얻었으니 나의 성품 또한 요(堯)132 · 순(舜)133 · 공자(孔子)134 · 안회(顔回)135의 성품인데, 어찌 말소리가 다름을 의심하겠소?”
 
 
그 사람은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나도 마땅히 이를 따라야하는데 다만 역풍을 만나 지금까지 널 앞에 울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통곡하는 것이오.”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나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ref>[http://www.koreaa2z.com/viewer.php?seq=88#1879 한성주보, 論學政 第一, 1886년 1월 25일]</ref>을 공부하였지 시사를 배우는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소. 먼저 시를 지어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오.”<ref>[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2897388 탐라시]</ref> -->사림파는 경학 우선, 사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이 손바닥 위에 글을 썼는데,
 
 
“보아하니 당신은 나쁜 사람은 아닌데, 다만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이니 참으로 불쌍하오.
 
 
(조) 여기서 나쁜 사람을 호인이라고 함: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을 가진 사람
 
 
내가 당신에게 한마디 할테니 당신은 이를 기억하였다가, 처신을 잘 하고 부디 다른 사람과 경솔하게 얘기를 나누지 않도록 하시오.
 
 
예로부터 왜적이 여러 번 우리의 변경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138 와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을 두어 왜적을 방비하게 했소.
 
 
만약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이번에 당신이 처음 배를 맨 곳은 사자채(獅子寨)의 관할지인데, 수채관(守寨官)140은 당신을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그러므로 먼저 왜선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고 보고했던 것이오.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을 잡아 목 베려는 참에 당신들이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갔던 까닭에 그들은 계략을 펴지 못했던 것이오.
 
 
내일은 파총관이 와서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니 당신은 자세히 해명하시오.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는 등의 말이었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으니,“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신을 아끼고 위태롭게 여겼기 때문이오”라고 하고는 머리를 흔들며 갔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하여 바로 정보 등에게 얘기했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 “길가 사람들이 우리를 가리키면서 목 베는 시늉을 했던 것은 모두 이 계략에 현혹되었기 때문이었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저녁 천호 등 관원 7-8인이 큰 탁자 하나를 놓고 탁자 가에 죽 둘러서 더니, 정보를 앞에 끌어내어 심문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함께 온 배가 14척이라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정보가,“아닙니다. 한 척뿐입니다”라 대답하자 손을 휘둘러서 정보를 내보내었습니다.
 
 
또 신을 끌어내어 심문하기를, "너희들이 타고 온 원래의 선박이 몇 척이나 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한 척뿐입니다.”
 
 
“우리의 변경에서 왜선 14척이 어제 그 곳 바다에 함께 정박한 것을 분명히 보았고, 내가 수채관(守寨官)의 보고에 따라 이미 상급 관청의 영감님께 보고를 올렸다. 너희 배 13척은 어디에 두었는가?”
 
 
“우리가 해안에 도착할 때 귀국 사람들이 탄 배 6척이 한 바다에 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6척의 배에 탄 사람을 조사한다면 우리 배의 수효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왜인으로 이곳에 상륙하여 약탈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곧 조선 사람으로서 왜인과는 언어도 다르고 의관도 다르니, 이것으로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왜인으로서 도적질에 교묘한 놈은 혹 변장을 해서 조선 사람처럼 가장하는 자가 있으니 네가 그 왜인이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나의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를 조사한다면 진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천호 등이 즉시 신에게 인신 등의 물건을 가져오게 하고는 대조한 뒤, 이어서 묻기를, “네가 왜인으로서 조선 사람에게서 이 물건을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나를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선 나를 북경(北京)으로 보내서 조선 통사원(通事員)<ref>[http://www.heo.or.kr/jariosil/jario-sangsik/jario-kwanjik.htm 고대 관직 및 설명]</ref>과 한번 이야기를 시켜보면, 실상이 즉시 드러날 것입니다.”
 
 
“너는 성은 뭐고, 이름은 뭐며, 어느 주현(州縣) 사람이고, 무슨 관직이며, 무슨 일로 인하여 우리 변경에 도착했는가? 그 정상(情狀)을 쓰되 거짓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내가 상사(上司)에게 보고하겠다.”
 
 
“저는 성은 최, 이름은 부로<ref>[http://www.kumi.net/content/colum_view.php?cat=17&no=515&redir= 최부]</ref>,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성내에 거주하였습니다. 두 번 문과<ref>[http://www.leisuretimes.co.kr/news/photo/201507/16260_24021_910.jpg 최부교지]</ref>에 올라 조정의 반열에 올라 처음으로 벼슬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54_1_0013574 최부]</ref>.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을 당하여,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네 부친의 이름은 뭐고, 관직은 뭐며, 어느 곳에서 죽었는가?”
 
 
“아버지 이름은 택(澤)인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5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어버이를 봉양키 위하여 벼슬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복을 벗은 지 겨우 4년 만에 나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https://hanja.dict.naver.com/search?query=%E4%BE%9B%E6%8B%9B 공초(供招)]를 마친 뒤 신을 별관(別館)에 숙박하게 하고,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공무로든 사무로든 제주도에 왕래하다가 바람을 만나서 행방불명된 자가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마침내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열 명, 백 명 가운데 겨우 1-2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어찌 모두 바다에 빠진 것이겠습니까? 그중에 표류해서 [https://hanja.dict.naver.com/search?query=%E5%B3%B6%E5%A4%B7 도이(島夷)]들이 사는 섬라(羅__), 점성(占城)국과 같은 나라로 들어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기를 바랄 수도 없었고, 혹시 표류해서 중국 땅에 이르게 된 사람도 국경지대 사람들이 잘못 왜적으로 무고하고 목을 베어 상을 받는다고 해도 누가 그 실정을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신 등과 같은 사람도 만약 먼저 스스로 육지에 내려오지 않았거나, 인신과 마패와 같은 신표(信標)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다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제도에 의거하여 모든 백관(____)들에게 [https://www.museum.go.kr/site/korm/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873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0%84%EC%9E%90(%E7%AF%86%E5%AD%97) 전자(篆字)]<ref>[https://goodsensegirl.tistory.com/entry/%EC%98%A4%EC%84%9C%EC%A0%84%EC%84%9C%EC%98%88%EC%84%9C%ED%96%89%EC%84%9C%ED%95%B4%EC%84%9C%EC%B4%88%EC%84%9C 전서, 예서, 행서, 해서, 초서]</ref>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https://hanja.dict.naver.com/word?q=%E7%AF%80%E6%96%A7%E9%89%9E&cp_code=0&sound_id=0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명-조선: 효자, 정보, 김중, 막금, 만산, 거이산, 이정, 효지, 상리, 최부, 최택(澤)
 
*심리-조선: 기진맥진, 좌절, 간절(이 소를 타는 값으로 옷을 벗어줄 테니 우리 관원을 태우기를 청합니다), 공포(머리털이 곤두서는 듯)
 
*비유-조선: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
 
*심리(최부): 당당함(나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고)
 
*지명-조선: 조선국, 전라도 나주(羅州)
 
 
*경천-조선: 하늘이 준 성품
 
*모화-조선: 나의 성품 또한 요(堯), 순(舜), 공자(孔子), 안회(顔回)의 성품
 
*사회-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풍습-조선: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시-조선: 시사(詩詞)는 곧 경박한 사람이 풍월(風月)을 농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가 할 짓은 아니오. 화답(和答) 정도는 하지 않을 수 없을 뿐,
 
*기물-조선: 인신(印信), 마패, 관대(冠帶), 문서, 호패, 석패, 절월
 
*제도(관직)-조선: 두번 문과에 올라, 통사, 봉명사신, 3읍 수령
 
*제도(시험)-조선: 진사시
 
*행정-조선: 제주 등지의 해도에 갔다가
 
*사건-조선: 금년 윤 정월 3일에 부친상, 표류
 
 
*유학-조선: 이정, 효지, 상리 등이 또 번갈아 신을 업고, 나의 성품 또한 요(堯), 순(舜), 공자(孔子), 안회(顔回)의 성품,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을 당했을 땐 모두 한결같이 《가례》를 따르오, 도학(道學)을 배운 돈독한 군자,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지난 정미년 9월에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경세제민(모든 백관(____)들에게 호패(號牌)와 석패(錫牌)를 주어 관직과 성명을 전자(篆字)로 써서 평민과 다름을 드러나게 하고, 봉명사신(奉命使臣)에게는 대소를 논할 것 없이 절월(節鍼)을 주어 왕명을 높이도록 하고, 또 연해 지방에 기주하는 사람은 비록 사상(私商)으로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라도 모두 호패를 주어서, 어느 나라, 어느 주현, 성명 아무개, 어떤 형상(形狀), 나이 얼마를 써서 구별되도록 하며, 또 통사(通事) 1명을 제주에 두어서 모든 봉명사신과 3읍 수령이 왕래할 적엔 항시 데리고 다녀 뒷날의 근심을 고려해야만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인명: 허청, 왕벽, 노부용
 
*심리: 동정
 
*비유: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
 
 
*지명: 도저소, 해문위, 사자채, 북경(北京)
 
*동물: 소
 
*지리: 고개를 하나 넘어 20여 리쯤 지나, 성에 이르기 7-8리 앞
 
*시간: 저녁
 
*기후: 큰비가 내렸습니다
 
 
*제도(관직): 천호(千戶),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 수채관, 파총관, 조선 통사원(通事員)
 
*제도(교통): 말을 나란히 타고
 
*행정: 관에서 지급할 것, 나라의 법에 걸리기 때문에,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게 되어 있소
 
*기물: 갑옷, 창, 칼, 총통, 방패
 
*건축물: 성에는 겹문이 있고 문에는 쇠빗장이 있었으며, 경수루(警成樓)
 
*사회: 상점이 서로 잇닿아 사람들과 물건이 많고 풍부하였는데, 관(冠)과 옷에 진흙이 묻어 구경꾼들이 몹시 웃어댔습니다, 왜선(倭船) 14척이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했다, 왜적이라 무고하여 목을 베어 바쳐 공을 세우려 했소,
 
*언어: 문자(文字)가 같은데, 유독 당신들의 말소리가 중국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오? 언어가 달라 실제 장님이나 벙어리와 마찬가지
 
*시: 당신은 시를 지을 줄 아오?
 
*기물: 큰 탁자 하나
 
*의전: 신과 종자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유학: 당신은 분상(奔喪)을 할 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를 따르오?
 
 
19th Day. Arrival at T’ao-chu Chiliad. This day there was heavy rain.
 
 
The two Chiliarchs, riding abreast, drove us on, into the face of the rain. I ordered Chong Po to say to Hsü Ch’ing, “Hungry and thirsty, we drifted at sea, staring at death and regaining life. Barely staving off our dying gasps, we reached your border, met an official, and, yesterday morning, ate a full meal. We thought we had got to a place of rescue, where now, in continuous rain and muddy roads we stumble and fall in gullies and strike rocks and mud. Our bodies are frozen, our legs have sores, our hearts are anxious, and our strength is exhausted. Last night we did not eat, nor did we eat this morning, yet we are driven on, into the rain. We shall probably die on the way.”
 
Hsü Ch’ing replied, “Yesterday you brought hunger on yourselves by not walking far enough to reach the authorities. Now, if you get there in good order, the authorities themselves will supply you. Hurry, hurry!"
 
I took a step, failed, and lay down at the side of the road. My whole body had collapsed and would not rally. Hyo-ja, Chòng Po, Kim Chung, Makkům, Mansan, and Kõisan sat round me and wept bitterly. Just then, a man leading an ox happened to pass by. Chồng spoke to the Chiliarch: “Please let us take off our clothes and buy this ox to carry our chief.”
 
Hsü Ch’ing said, “How can I, too, help but pity you all for the suffering you are undergoing? But since I am bound by the laws of the country, I cannot take your part.”
 
Yi Chong, Hyo-ji, and Sang-ni again took turns carrying me. We crossed one range and in somewhat more than twenty li came to a wall, which was T’aochu Chiliad of Hai-men Garrison. As we approached the wall, for seven or eight li there were troops wearing armor and holding lances. Fire weapons and bold shields filled the roads. When we arrived at the wall, it had a double gate, and the gates had iron knockers. Watch towers were built along the top of the wall, and within it markets and shops were continuous and the people prosperous.
 
We were led to a public guest house and allowed to stay there. My appearance was emaciated, my hat and gown muddy. The onlookers doubled up with laughter. One Wang Pi wrote a statement to me: “Yesterday it was reported to the authorities that fourteen Japanese boats had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re you really Japanese?”
 
I said, “I am not Japanese, I am a Korean gentleman.”
 
There was also a Lu Fu-yung who called himself a scholar. He said to me, "Why, when your carriages have the same axle-width and your books the same writing as those of China, is your speech not the same?”
 
I answered, “The same wind does not blow over a thousand li, the same customs do not obtain over a hundred. If you wonder at the sound of my words, I wonder at the sound of yours. It is a matter of custom. But if we share the nature given by Heaven, my nature, too, is the nature of Yao, Shun, K’ung, and Yen.33 How can one object to a difference in speech?”
 
The man applauded and said, “When you go into mourning, do you observe the [rules of] Chu Wen Kung's Chia li?”
 
I answered, “In observing mourning, every one of my countrymen respects the Chia li. I should have followed it, but being driven off by winds, I have not yet been able to weep before the coffin. For that I grieve bitterly.”
 
The man then asked, “Do you write poetry?”
 
I answered, “Poetry is something by which the frivolous moan about the wind and moon and not a thing indulged in by sincere men devoted to the Way. I take as my study the investigation of things, extension of knowledge, and pursuit of truth. I do not pay much attention to poetry, but if someone addresses a poem to me, I am bound to respond with one of my own; that is all.”
 
Another man wrote on my palm: “I see that you are not an evil man. But simply because your speech is not the same, you are really like someone blind and deaf. I truly pity you, and I shall tell you something; remember it. Be very careful of yourself. Do not talk freely to people. From olden times, Japanese bandits have repeatedly raided our borders. The state, therefore, has set up Anti-Japanese Commissioners and Anti-Japanese Commanders34 to cope with them. If they seize Japanese, they behead them all first and report it later.
 
“Now the place where you first tied your boat was in the area of Shih-tzu Stockade. The Stockade Commander falsely accused you of being Japanese. He wanted your heads for the reward, and in his first report, therefore, he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have violated the border and attacked people.' As he was about to lead soldiers out to take you and behead you, your group left the boat and ran into a village, where many people were. He could not, therefore, perpetrate his scheme. Tomorrow, the Commander will come and question your group. Explain things to him minutely. If there is the slightest discrepancy or error, there is no telling what might happen.”
 
When I asked his name, he said, “I have told you this because I like you. I have risked danger.”35 He turned and left.
 
When I heard what he said, my hair stood up on end; so I said to Chòng Po and others, “When the people on the road pointed at us and made gestures as if to cut off their heads, it was because all of them were deluded by this plot.”
 
In the evening, seven or eight officials, including the Chiliarch, had a large table put in place and stood round it. They had Chong Po brought before them and asked, “Is it true that your group had fourteen boats ?”
 
Chong Po replied, “No. We had only one boat.”
 
They motioned Chòng Po out, had me brought in, and asked, “How many boats did you start out in?”'
 
I said, “Only one.”
 
They said, “Fourteen Japanese boats were sighted from above our coast. They were anchored together at sea yesterday. Because of the Stockade Commander's report, therefore, we have already reported the fact to our superiors. Where did you put the other thirteen boats?”
 
I said, “When I arrived at the coast, men of your country were sailing there in six boats. We moored together. If you question the men of those six boats, you will know how many boats we had.”
 
They said, “Why have you Japanese come here to raid?”
 
I said, “I am a Korean. My speech is different from Japanese, my hat and gown are of different style. By those things you can tell us apart.”
 
They said, “Some of the Japanese who are clever at banditry change their clothes and pose as Koreans. How do we know that you are not a Japanese like that?”
 
I said, “If you observe my conduct and examine my seal, permit, cap, sash, and documents, you can tell the true from the false.”
 
The Chiliarch and others then ordered me to bring my seal and other things and present them as evidence. They asked, “Are you not perhaps Japanese who robbed Koreans and got these things?”
 
I said, “If you doubt me in the slightest, order me sent to Peking. A word with a Korean interpreter, and the truth will be apparent.”
 
They asked, “What is your name? What are your department and county? What is your official position? On what business did you come to our border? Explain the facts in writing and dare not lie. We shall report this to our superiors.”
 
 
I said, “My name is Ch'oe Pu.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I have served notably at Court for some years. In the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go to Cheju and other islands, but on the 3rd Day of this Intercalary First Month I was setting out to mourn for my father. Returning home in confusion, I met a wind and was blown to sea, and I happened to come here."
 
 
They said, “What was your father's name? What was his position? Where did he die?”
 
I said, “My father's name was T'aek. He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36 but in order to care for his parents did not take an appointment. He had laid aside his mourning clothes scarcely four years when he, too, died in Naju.”
 
 
When the deposition was finished, they lodged me in the guest house annex and gave me and my staff food.
 
The people of our country go on official and private business to and from Cheju, and those who meet winds and get lost are beyond counting. Those who finally return home alive are barely one or two in a hundred; is it likely that all of them drown at sea? Those who drift to the island barbarian countries like Siam and Champa have no further hope of returning. Even if they drift to the borders of China, they are still wrongly accused by the people on the coast of being Japanese pirates. If their ears are cut off for the reward, who can tell the truth? How could people like us, if we had not landed beforehand by ourselves or did not have such signs as seals and permits, have escaped disaster?
 
 
Let our state follow the system of the Chinese Court and issue to all officials number tablets and pewter tablets with their names and positions thereon in seal characters to identify them. When any official, great or small, is sent anywhere, tallies and halberds should be provided to honor the King's command. Let even people living by the sea, though they cross the sea in private trade, be issued number tablets, inscribed such-and-such country, such-and-such department and district, such-and-such name, such-and-such appearance, and such-and-such date, to identify them. A consul should also be put at Cheju, and all commissioned ministers and magistrates of the three cities should always, coming or going, carry [their tablets] with them to provide for what may happen. If all that is done, then and only then will everyone be able to avoid tragedy.
 
 
127. __ 방지를 목적으로 손鹽區로부터 行鹽地에 이르는 중간의 교통 要地에 설치되어 상인의 기 및 상의 重量을 檢閱하는 기구이다. 大使와 副使를 각각 1인씩 두었다.
 
128. 公家에 설치된 官舍.
 
129. 이 구절은 《中庸》 28장의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에 보인다. 수레바퀴의 폭이 동일하고 書體가 통일되고 행동 윤리가 일치되었으니 이는 결국 천하 통일과 禮의 통일을 뜻하는 말이다.
 
130.《子春秋》권3, 內篇間上의 “古者百里而異習, 千里而殊俗”에 나오는 말이다.
 
131. 동년배끼리 혹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칭할 때 사용하는 경어.
 
132. 고대 중국 전설상의 임금으로, 舜과 아울러 堯舜의 治라 하여, 예로부터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 알려져 왔다. 五帝의 하나인 帝훨의 손자로,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위에 오르자 義和 등에게 명하여 달력을 만들었다. 또한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舜을 등용하여 자기의 두 딸을 아내로 삼게 하며 천하의 정치를 대신 맡아 하게 하였다. 요가 죽은 뒤, 순은 요의 아들 단주에게 뒤를 잇게 하려 하였으나, 제후들이 순을 추대하였으므로 순이 천자에 올랐다고 한다.
 
133.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으로 5帝의 한 사람이다. 부친으로부터의 모진 학대를 받았으나 효성을 다하여, 堯로부터 인정을 받아 요의 두 딸에게 장가들었다. 有虞氏 부락의 추장이므로 虞舜이라고도 한다. 4신을 몰아내고 주변 부락의 추대를 받아 동맹의 수령이 되었으며, 요로부터 선양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순 또한 만년에 治水를 잘 한 에게 禪讓을 하여, 堯임금과 함께 儒家에서 최고로 받드는 聖君의 한 사람이다.
 
134. 춘추시대 말기 魯나라의 사상가로, 儒家의 창시자이다. 이름은 丘이고, 자는 仲尼이다. 한 때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정치를 하는 사람은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가르침이 이상적인 지배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仁이라고 하였으며 이를 최고의 덕이라고 보았다. 그의 말과 행동은 제자들이 쓴 《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135. 춘추시대 말기의 학자로, 자는 子淵이다. 顔淵으로도 불린다. 魯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 공자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 安貧樂道하고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두 번 과실을 범하지 않아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늘 깊이 생각하여 29세에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32세의 나이로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라며 슬퍼했다. 후세에 復聖으로 追尊되었다.
 
136?
 
137. 四書의 하나인 《大學》에 나오는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8條目 중 일부.
 
138. 明 洪武 초에 沿海에 衛를 설치하면서 備倭都指揮使가 거느리게 하였다. 巡察海道도 함께 두었다.
 
139. 浙江에는 總督備倭都司 1員과 把摠指揮 4員이 두어져서 衛所를 통할하였다. 《紹興府志》 권25, 武備志 1.
 
140. 寨의 방어를 맡고 있는 지휘관.
 
141. 조선시대 때 10세 이상이 된 남자가 차고 다녀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던 패로 戶牌라고도 한다. 기원은 元에서 시작되어 고려 공민왕3년(1354)에 水陸軍丁에 한하여 실시하였으나 잘 시행이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사용범위가 확대되었다. TA, 관찰시 , , 兵使, 水使, 大將, 統制使 등이 지방에 부임할 때 임금이 내어주던 符節과 야이다. 竹節은 증명, 李鉉 즉 도끼는 권한을 각각 상징한다.
 
 
(조) 중국 명나라 시기의 연해방어체계<ref>[http://www.theoceandiscourse.com/download/2017_06/OceanDiscourse-2017_06_09.pdf]</ref>
 
(조) 한국해상세력 형성과 변천 <ref> [https://www.ilovesea.or.kr/img_upload/20140424/8116F3CEB4D14FA58DA8CB6CBFB58C90.pdf]</ref>
 
 
[[1월 19일.lst]]
 
 
===20일===
 
二十日, 在桃诸所, 是日午陰乍晴, 臣問桃诸所千戶姓名,則乃陳華也,華與一官人來看臣,指臣笠,曰:“此何帽子?”臣曰:“此喪笠也,國俗皆慮墓三年,不幸如我漂流,或不得已有遠行者,則不敢仰見天日,以堅泣血之心, 所以有此深笠也,”及至飯時,許清引臣同桌,座有一人以筋畫卓上曰:“你吃猪肉否?”臣曰:“我國人守喪三年,不食魚肉蘸董”其人以別器盛素,以饋臣. 許清又見臣之衣服沾濕未乾,謂臣曰:“今日有陽, 可脫衣以晒之.” 臣答日:“我衣皆濕,脫此則無可穿者,不能晒也.” 許清引臣坐諸面陽之地,以令晒乾, 有一官人來問曰:“你國 王稱皇帝否?”臣答曰:“天無二日,安有一天之下有二皇帝乎?我 王心誠事大而已,”又問曰:“你國官人果皆星帶乎?”曰:“一二品着金,三四品着銀,五六六品以下,皆着烏角而無厘帶,”又問日:“你國有金銀否?”曰:“金銀非本國所產,”曰:“然則何以有金銀帶?”曰:“皆來貿上國,所以貴也.”臣問其官人為何人,其人即出公文以示,則乃把總官先差此官人,給牌星馳前去桃诸所,護住臣等,按臨重解,毋得違恨者,姓名即薛景,又有一人來,曰:“我寧波府定海衛人,因此處都司公差到此.”
 
 
p.372
 
臣即問曰:“寧波府有下山否?”曰:“有之.” 臣因言前日到泊下山逢海賊復漂之故,其人曰:“我當持此文字,告知府往問之,臣問其姓名,則王海也,又有外人羣聚而至,爭持紙筆以問,不可勝對,有官人密書以示曰:“此處人輕薄,休與開講.”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다 개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도저소 천호의 성명을 물으니 진화(陳華)라고 하였습니다.
 
 
진화는 한 관인과 함께 신을 보러 와서 신의 갓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이것은 무슨 모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1657 상립(喪笠)]<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5333 기품과 절조의 미학 '갓', 오마이뉴스, 2007.04.19]</ref> 43입니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모두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215 3년 동안]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306 여묘(廬墓)] 44를사는데, 불행히 나처럼 바다에 표류하거나, 부득이 멀리 여행하게 된 사람은 감히 하늘과 해를 우러러 보면서는 비통한 마음을 견지할 수 없기 때문에 깊은 상립<ref>[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312160055117875 [한국의 老鋪] <13> 박창영 갓방]</ref>을 쓰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가 되자, 허청(許淸)은 신을 인도하여 식탁을 같이 하였습니다.
 
 
좌중의 어떤 사람이 탁자 위에 젓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묻기를,
 
 
“당신은 돼지고기를 먹습니까?”<ref>[http://www.bettertomorrow.or.kr/official.php/home/info/1938 한국의 생활사 : 우리 역사 속 돼지,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f><ref>[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51222/75508108/1 [황광해의 역사속 한식]돼지고기, 동아일보, 2015.12.22]</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205004_001 성종실록 129권, 성종 12년 5월 4일 무인 1번째기사, 1481년 명 성화(成化) 17년, 경기 관찰사 손순효가 별공하는 돼지를 소와 섞어 쓰자고 하다]</ref><ref>[http://www.kfood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2 한국인의 소울 푸드 1, 한국외식신문, 2017.11.21]</ref><ref>[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03/2017070302172.html 돼지의 맛, 조선일보, 2017.07.13]</ref>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ref>[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323 맛있는 종교이야기 7. 오신채, 금강신문, 2016.05.18]</ref>를 먹지 않습니다.”그 사람은 다른 그릇에 채소 반찬을 담아서 신을 접대하였습니다.
 
 
허청은 또 신의 의복이 젖어 마르지 않은 것을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햇볕이 있으니 옷을 벗어서 햇볕에 쪼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옷이 모두 젖었으니 이 옷을 벗으면 입을 것이 없으므로 햇볕에 쪼일 수 없습니다.” 허청은 신을 이끌어 햇볕이 드는 곳에 앉히고 옷을 말리게 하였습니다.
 
 
한 관인이 와서 묻기를, “당신 나라의 왕도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3_0030_0040_0030 황제]라 일컫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는데, 어찌 한 하늘 아래에 두 황제<ref>[http://m.blog.daum.net/shanghaicrab/16154849 명나라조정에 동시에 두 명의 합법적인 황제가 존재하다]</ref>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은 성심껏 대국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그대 나라의 관인들은 모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687 서대(犀帶)]를 맵니까?”
 
 
“1품·2품은 금대(金帶), 3품·4품은 은대(銀帶), 5품·6품 이하는 모두 오각대(烏角帶)를 띠지만 서대는 없습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0322#self 품대]</ref> 145
 
 
“당신 나라에는 금은이 있습니까?”<ref>[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18154 당신 나라에 금과 은이 있소?, 제민일보, 2009.04.28]</ref>
 
 
“금은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습니다.” <ref>[https://www.kyobostory.co.kr/contents.do?seq=1170 노려라, 일확천금의 꿈! 조선의 금광, 광화문에서 읽다거닐다느끼다]</ref>
 
 
“그렇다면 어떻게 금대, 은대가 있습니까?”
 
 
“모두 상국(上__)에 와서 매입하므로 귀한 것입니다.”
 
 
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더니, 그 사람은 곧 공문(公文)을 내어 보였는데, 바로 파총관이 먼저 이 관인에게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8C%A8%EB%AC%B8(%E7%89%8C%E6%96%87) 패문(牌文)]을 주어 도저소에 빨리 달려가 신 등을 잡아두고 조시하여 압송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한 자이니 성명은 설민(薛旻)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영파부<ref>[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02805 먼 길 온 고려인 '宋 나라 영빈관'에 머물다, 인천일보, 2018.08.31]</ref> 정해위(定海衛)148의 사람인데, 이곳 도사(都司)149가 파견하여 이곳에 온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곧 묻기를, “영파부에 하산(下山)이란 곳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있습니다.”
 
 
신은 이어서 전일 하산에 정박했다가 해적을 만나 다시 표류하게 된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 글을 가지고 가서 지부(知府)150에게 알려, 가서 조사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왕해(王海)라고 하였습니다. 또 바깥사람들이 떼 지어 와서 앞을 다투어 종이와 붓을 가지고 물으니 일일이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관인이 가만히 써 보이기를, “이곳 사람들은 경박하니,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풍습(의복)-조선: 상립(喪笠)
 
*풍습(음식)-조선: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를 먹지 않습니다.
 
*풍습-조선: 우리나라 사람은 부모상을 입으면 3년 동안은 어육(魚肉), 젓갈, 훈채를 먹지 않습니다.
 
*모화: 어찌 한 하늘 아래에 두 황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왕은 성심껏 대국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모두 상국(上國)에 와서 매입하므로 귀한 것입니다
 
*기물-조선: 1품·2품은 금대(金帶), 3품·4품은 은대(銀帶), 5품·6품 이하는 모두 오각대(烏角帶)를 매지만, 금은은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습니다.
 
*경제-조선: 모두 상국(上國)에 와서 매입하므로,
 
*사건-조선: 표류
 
*유학-조선: 여묘(廬墓)
 
*경천-조선: 하늘과 해를 우러러
 
 
 
 
*인명: 진화(陳華), 설민(薛旻), 왕해(王海)
 
*심리: 동정(허청은 신을 이끌어 햇볕이 드는 곳에 앉히고 옷을 말리게 하였습니다.)
 
*기후: 흐렸다 개었다
 
*지명: 도저소, 영파부 정해위(定海衛), 영파부 하산(下山)
 
*제도(관직): 천호, 파총관, 도사(都司), 지부
 
*시간: 밥 먹을 때
 
*기물: 식탁
 
*풍습(음식): 돼지고기
 
*의전: 다른 그릇에 채소 반찬을 담아서 신을 접대하였습니다.
 
*언어(어원): 당신 나라의 왕도 황제라 일컫습니까?
 
*기물: 서대(犀帶), 금은, 종이, 붓
 
*행정: 공문(公文), 패문(牌文), 내가 이 글을 가지고 가서 지부(知府)에게 알려, 가서 조사하게 할 것입니다
 
*사회: 해적, 이곳 사람들은 경박하니
 
 
 
20th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alternately cloudy and fair.
 
 
I asked the name of the Chiliarch of T'ao-chu Chiliad; it was Ch'ên Hua. Ch'ên Hua came with an official to see me. He pointed to my bamboo hat and said, “What kind of hat is that?”
 
I said, “This is a mourning hat. It is a national custom for everyone to dwell in a hut by the grave for three years. If, unfortunately, one should be cast adrift like me or must travel far, in order to maintain the mood of grief, one dare not look up at the sun and sky. That is why we have these deep hats.”
 
At meal time, Hsü Ch’ing led me to his table. A man seated there wrote with his chopstick on the table, “Do you eat pork?”
 
I said, “The people of my country observe mourning for three years and do not eat fish, meat, preserved meat, oniony plants, or garlic.” The man took separate plates, loaded them with vegetable courses, and served them to me.
 
Hsü Ch’ing then saw that my clothing was not yet dry. He said to me, “It is sunny today; you might take off your clothes and dry them.”
 
I answered, “All my clothes are damp. If I take these off, there is nothing I can wear. I cannot dry them.”
 
Hsü Ch’ing led me to a sunny place and seated me so that I might dry out.
 
An official came and asked, “Is the King of your country called Emperor?”
 
I answered, “In Heaven there are not two suns; how under the same Heaven can there be two Emperors? My King's one purpose is to serve your country devotedly.”
 
Then he asked, “Do all the officials of your country really wear rhinoceros [horn] girdles?”
 
I said, “The first and second ranks wear gold, the third and fourth silver, the fifth and sixth and all those below black horn, but there are no rhinoceros [horn] girdles. 37
 
He asked, “Are there gold and silver in your country?” I said, “Gold and silver are not products of my country.”'38 He said, “But then, how are there gold and silver girdles?”
 
I said, “They all come in trade from your country. That is why they are prized.” When I asked the official who he was, he took out a public document and showed it to me. It [showed that] the Commander had previously dispatched this official with a permit, sending him on to T’ao-chu Chiliad posthaste. He was to place us under guard, question us, and bring us back without fail. This, then, was that Hsieh Min.
 
Another man came and said, “I am from Ting-hai Garrison, Ning-po Prefecture. I was sent here by the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Tu-chih-hui shih-ssu] of that place.”
 
I then asked, “Is there a Hsia-shan in Ning-po Prefecture?” He said, “There is.”
 
I told him about our previous arrival and mooring at Hsia-shan, meeting pirates, and being set adrift again. The man said, “I shall take this paper and inform the Prefect so that he will make inquiries.”
 
I asked his name, which was Wang Hai.
 
Other outsiders came in crowds and eagerly took paper and brush and asked questions. I could not keep up with them in my answers. An official secretly wrote and showed me a note that said, “The people here are a bad lot. Do not talk with them.”
 
 
143. 服喪 중에 쓰는 삿갓.
 
144. 부모가 죽었을 때 자식이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
 
<br>
 
?《明鮮太祖實錄》元年 12월 12일조 기사에 의하면 예조에서 품계별 관직의 복식을 정하면서, 허리에 두르던 띠로 1품 관원은 서대, 2품 관원은 금대를 착용토록 한 바 있다. 서대는 물소 뿔로 장식했는데 朝服, 祭服, 公服, 常服을 입을 때 사용하며 서띠라고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분명치는 않으나 서대는 특별한 경우에만 착용하는 것으로 제한되면서 1품 관원도 금대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朝鮮 成宗》 8년 1월 13일조 기사를 보면 “이제는 대저 조정의 紳 사이에 犀帶를 띠는 사람이 30여 인이고, 金帶를 띠는 사람이 무려 수백 인이며, 銀帶를 띠는 堂上官은 수없이 많지만, 이들이 과연 다 어질겠습니까?”라는 언급이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최부가 서대는 없다는 말은 현재 품관들이 정식으로 착용하는 관대에 포함되지는 있는 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br>
 
?1) 중국을 가리킨다. A1공문서로서 下行文書의 일종이다. IAA 12년(1379)에 定海千戶所를 두었다가 20년에 衛로 바꾸었는데 定海縣 縣治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定海備倭把總에 예속되었는데 大嵩, 穿山, 舟山 등 6所를 거느렸_____
 
149. 都指揮使司의 약칭으로서 한 省의 軍政을 담당하는 官署이다. 布政使司, 按察使司와 함께 三司라고 부른다. 所屬衛는 나누어 五軍都督府에 예속되었으며, 軍政은 兵部의 명령을 들었다. 都指揮使, 都指揮同知, 都指揮僉事 등을 두었다. 流官으로 중임하였으며, 世官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 부속기관에는 經歷司, 斷事司, 司獄司 등이 있었다.
 
150. 明初에 元朝의 路를 府로 고치고, 官을 두어 한 府의 政事를 맡긴다는 의미에서 知府라고 하였다. 兩京의 順天府와 應天府 외에는 모두 설치하였다. 洪武6년(1373)에 所在府의 稅糧의 다소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官을 두었다. 20만석 이상이 上府로 종3품이고, 20만석 이하가 中府로 정4품이며, 10만석 이하가 下府로 종4품이다. 후에 모두 고쳐 정4품으로 하였다. 本府의 政令을 관장하여 해당 소속 州縣의 부역, 소송 등의 일을 총괄하여 布政司 및 按察司에게 보고하였다.
 
 
[[1월 20일.lst]]
 
 
===21일===
 
二十一日,在桃诸所,是日晴,外人麋至觀臣,王海指壁上真像,曰:“你知此畫乎否?”曰:“不曉得,”海曰:“此乃唐朝進士鍾馗也.”臣曰:“鍾馗平生不得進士,何以謂之進士?”海等喧噪大笑,又有白髮老翁來,臣問曰:“天台、腐蕩等山,距此地幾里?”翁答曰:“天台山在天台縣北,距此二日程,天台山之南一日程,有隔蕩山:”臣又問:“此城主山何?”曰:“石柱山也.”引臣出門,指點石柱山,則果石壁作,當山頂有大石如柱形,臣曰:“自此距北京幾里?”翁曰:“五千八百有餘里,”問:“距楊子大江幾里?”翁曰:“在北二千有餘里,臣又舉李暹所泊楊州府以問曰:“距此幾里?”翁曰:“在楊子江之北,你去過江,則便是揚州之境也.”又問:“距南京幾里?”翁曰:“在西北二千餘里,然皆腹料耳,未敢的知”云云,有大官人前後擁,軍儀整肅而至,坐
 
于皇華館,問之則乃把總松門等處備指揮劉澤也,招“臣等來前,日:“以汝類私越邊境,本當處以軍法,恐其中情有可粉,站未盡数,有無侵犯上國情狀,從實供寫施行:”臣供曰:“姓崔名溥,居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為國王近臣,去丁未九月十七日,奉王命為濟州等處敬差官,濟州今戊申正月三十日,聞父喪,正月初三日,不候風便,顛倒過海,為風所逆,驚濤掀浪,載沈載傾,飲食渴水,十生九死,以今月十二日到泊名不知海島,有漁船來問曰:“你是何人?”答以朝鮮國人漂流之故,因問:「此何國地面?”其人答曰:此大唐國寧波府下山云云,其夜有賊船二十餘人來,以研刀恐嚇欲斬,攘奪衣粮行裝等物,遂截去繼而去,復漂流大洋,十七日,又到泊地名不知海岸,又有漁船六隻列立,恐其如前所遇海賊之類,捨丹緣陸,過二嶺六七里許有人居,相次遞送,夜至仙岩里,其里人爭以偶枚亂擊劫体,遞至一處,遇有官人,驅至于此城,”又問曰:“你登第何年?歷仕幾官?
 
所帶人住何川縣地?行李有何器械?原有船幾隻?”臣曰:“我於成化丁酉,格進士試第三人; 壬寅, 中文科乙科第一人, 為校書館著作,為博士, 為軍資監主簿, 為成均館典籍,為司憲府監察,為弘文館副修撰,為修撰,丙午,中文科重試乙科第一人,為弘文館副校理,為龍襄衛司果,為副司直,所帶人陪吏四人,光州牧吏程保、(化)(和順縣吏金重、羅州牧吏孫孝子、濟州
 
收吏李孝枝,伴率一人李慎,京都人,鎮撫一人安義,濟州人,驛吏一人崔巨伊山,羅州青農驛人,奴子莫金等二人,濟州官奴權松等四人,(好)[護]送軍金來等九人,船格軍許尚理等二十人,皆濟州人,所乘船只一大隻,橋帆危样,遭風而失, 牆__遇賊失. 所賣之物, 印信一顆、馬牌一隻、紗__ 、角帶、所治文書、重試榜錄、書册、弓一張、刀一把及各人所穿衣
 
 
p.374
 
裳外, 無他器械,”把總官配點印信等物, 又問曰: “汝國地方遠近幾何? 府州幾何?兵粮約有幾何?本地所產,何物為貴?所讀詩書,尊崇何典?衣冠、禮樂,從何代之制?一一寫述,以憑查考:”臣曰:“本國地方,則無慮數千餘里,有八道,所屬州府郡縣,總三百有餘,所產即人材、五穀、馬牛雞犬,所讀而尊崇者,四書五經,衣冠、禮樂,則一遭華制,兵粮則我以儒臣,未會經請,未詳其數,”又問曰:“汝國與日本、琉球、高麗相通乎?”臣曰:“日本、琉球,俱在東南大海中,相距隔遠,未相通信,高麗革爲今我朝鮮,”又問曰:“汝國亦朝貢我朝廷否?”臣曰:“我國每歲如聖節、正朝,貢獻愈謹,”又問曰:“汝國用何法度?別有年號乎?”臣曰:“年號、法度,一大明.”把總官問罪,因曰:“汝邦屢歲朝貢,義有君臣之好,既無侵逆之情,當遇以禮,各宜安心,勿生他慮,轉送赴京,遣還本土,急促行裝,不許稽緩,”即饋以茶果.臣即做謝詩以拜,把總官曰:“不要拜,“臣不知所言,敢拜之,把總官亦起,
 
相對答禮.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왕해(王海)가 벽의 한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이 그림을 압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은 곧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151랍니다.”<ref>[http://newsplu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13/2010041300653.html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 이야기] ④ 귀신 잡는 귀신 이야기 중국판 전우치전, 종규전전(鐘馗全傳), 조선일보, 2010.04.13]</ref><ref>[http://yangco.net/bbs/board.php?bo_table=1china_6&wr_id=68 종규(鐘馗) - 중국의 역신(疫神)]</ref><ref>[http://m.blog.daum.net/hl0ftj/47?np_nil_b=-1]</ref><ref>[http://yonseisinology.org/archives/1667]</ref><ref>[http://www.epochtimes.com/b5/17/1/1/n8655183.htm]</ref><ref>[https://kknews.cc/history/mzj3lz.html]</ref><ref>[http://www.newsancai.com/b5/traditional/culture/2008/10/18/16738-%E9%92%9F%E9%A6%97%E6%8D%89%E9%AC%BC-%E5%9B%BE]</ref><ref>[https://read01.com/zh-hk/8ng0QR.html#.XWYj7ugzY2w]</ref>
 
 
“종규는 평생에 진사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진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또 백발노인이 왔기에 신이 묻기를, “[http://korean.cri.cn/1620/2018/07/31/1s259017.htm 천태산(天台山)]<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aYr&articleno=18311375&categoryId=938086&regdt=20090816231610 중국 천태산 지도]</ref><ref>[http://blog.daum.net/yoji88/1035 톈타이산]</ref>과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F66&articleno=15879469&categoryId=574902&regdt=20161229151820 안탕산(雁蕩山)]<ref>[http://picpen.chosun.com/view/picpenViewDetail.picpen?picpen_seq=15794 중국 10대 명산으로 꼽히는 절강성 안탕산]</ref> 등은 이곳에서 몇 리나 떨어져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천태산<ref>[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66093 천태산 국청사, 법보신문, 2011.06.08]</ref><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sq4&articleno=15863046&categoryId=288806&regdt=20180621063836 중국 천태산 고승들의 기담]</ref><ref>[https://www.pressreader.com/ 천태산과 한국불교의 깊은 인연]</ref><ref>[중국 천태종을 부흥시킨 의통법사義通法師, 관문사, 2018.06 Vol.234]</ref><ref>[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398 ⑨보운존자(寶雲尊者) 의통(義通), 금강신문, 2011.05.04]</ref><ref>[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70660 중국 대륙에 산재한 해동 구도자의 자취를 찾아서, 불교신문, 2006.01.08]</ref><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404&tabId=03&levelId=hm_067_0040 대각국사 의천의 해동 천태종 창시]</ref>은 천태현(天台縣)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이틀 거리이고, 천태산의 남쪽으로 하루 거리에 안탕산이 있습니다.”
 
 
“이 성(城)의 주산(主山)은 무슨 산입니까?”
 
 
“석주산(石柱山)152 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신을 이끌고 문밖에 나가서 석주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ref>[https://news.joins.com/article/22175278 [차이나 인사이트] 장안과 베이징 … 중국 왕조 도읍은 왜 변두리였나]</ref>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5천8백여 리입니다.”
 
 
“양자강(揚子江)<ref>[http://kcm.kr/dic_view.php?nid=40345]</ref><ref>[https://blog.naver.com/starcity0121/100208281973 장강과 양자강의 구분]</ref>은 몇 리쯤에 있습니까?”
 
 
“북쪽 2천여 리에 있습니다.”
 
 
신은 또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ref>[http://m.cafe.daum.net/ansan21/66Jh/39?q=D_LiONZMXRFIg0&]</ref>를 들어 묻기를, “여기에서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양자강 북쪽에 있습니다.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ref>[http://m.blog.daum.net/sbo3166/11319999 양주관광.1-수서호(瘦西湖).당성유지박물관.최치원기념관]</ref>입니다.”
 
 
“남경<ref>[https://news.joins.com/article/6338092 중국 도시 이야기 ⑪ 난징(南京), 중앙일보, 2011.10.05]</ref><ref>[https://amkorinstory.com/1531]</ref>과는 몇 리나 됩니까?”
 
 
“서북 2천여 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충 헤아린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고관이 앞에선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703701 갈도(喝道/喝導)]54하고 뒤에선 옹위하며 엄정하게 군대를 정렬시켜 오더니 황화관(皇華館)155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물어보았더니 곧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156 유택(劉澤)이었습니다.
 
 
그는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말하기를,
 
 
“너희들은 사사로이 변경을 넘어왔으니,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혹 불쌍히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을까 싶어 아직 죽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사실대로 공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공술하기를, “성은 최, 이름은 부로 조선국 전라도 나주 성내에서 살았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국왕의 근신(近臣)이 되었습니다. 지난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B%AF%B8 정미년] 9월 17일에 왕명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경차관이 되었습니다. 제주는 남해 가운데 있으므로 나주와는 거리가 수로로 천여 리입니다. 그 해 11월 12일에 바다를 건너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9889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일을 채 마치지 못했는데, 금년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8B%A0_(%EA%B0%84%EC%A7%80) 무신년] 정월 30일에 아비의 상을 듣고 윤정월 3일에 순풍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바다를 건너다가 역풍을 만났습니다. 노도와 격랑 속에 배는 잠겼다가 기울어지기도 하고 굶주리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달 12일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섬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어선이 와서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하고 묻기에, 조선국 사람으로서 표류해 온 까닭을 들어 답변하고 이어서 '이곳은 어느 나라의 땅이오?'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이곳은 대당국 영파부의 하산이오'라는 등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날 밤 해적선의 20여 인이 와서 칼로 위협하며 목을 베려다가 의복, 양식, 행장 등의 물건을 빼앗고 마침내 배의 노와 닿을 끊어버리고 떠나가 버려 다시 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7일에는 또 지명을 알 수 없는 해안에 이르러 정박하니, 또 어선 6척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앞서 만났던 해적과 같은 무리인 듯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고개 둘을 넘어 6-7리가량 가니 인가가 있었으며, 서로 차례로 번갈아 가며 다음 마을로 보냈습니다.
 
 
밤에 선암리에 이르니 그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각진 몽둥이로 함부로 치면서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체송(遞送)되어 한 곳에 이르자 한 관인을 만났으니 그가 이 성까지 몰아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는 어느 해에 등과하고, 어떠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느 주현에 거주하고, 행장에는 무슨 무기가 있으며, 원래 있던 배는 몇 척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 (乙科)58의 제1등으로 합격하여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160,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164, 수찬(修撰)165이 되었으며, 병오년(1486)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 제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166,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168이 되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으로는 배리(陪吏)가 4인으로,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이고,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입니다. 타고 온 배는 큰 배 1척뿐인데, 돛대와 상앗대는 바람을 만나 잃고, 닻과 노는 해적을 만나 잃었습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169, 서책, 활 1장, 칼 1자루와 각자가 입는 의상 이외에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파총관(把總官)은 즉시 인신 등 물건을 점검하고는 또 묻기를, “너희 나라의 영토는 얼마나 되며, 부·주(府州)는 몇이나 되며, 군량은 대략 얼마나 있으며, 그 땅에서 생산되는 물품에는 어느 물품이 귀한 것이며, 읽는 시서(詩書)는 어느 경전을 존숭하며, 의관과 예악(禮樂)은 어느 시대 제도를 따르고 있는가? 낱낱이 써 내어 조사하는데 근거가 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ref>[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261185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의 정비에 관한 연구 - 주 (州) 부 (府) 군 (郡) 현 (縣) 을 중심으로]</ref><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3%BC%EB%B6%80%EA%B5%B0%ED%98%84%EA%B0%81%EB%8F%84(%E5%B7%9E%E5%BA%9C%E9%83%A1%E7%B8%A3%E5%90%84%E5%9C%96) 주부군현각도]</ref>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이고,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군량은 내가 유신(儒臣)으로서 일찍이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 다.”
 
 
“너희 나라는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너희 나라도 우리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는가?”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ref>[https://www.asiae.co.kr/article/2017062315075196237 중국에 하던 조공, 굴욕이었을까 무역이었을까, 아시아경제, 2017.06.23]</ref><ref>[http://china.donga.com/Main/3/all/43/910919/1 조공국은 속국이 아니다]</ref>
 
 
“너희 나라는 어떤 법도를 사용하며, 별도의 연호가 있는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005 연호]<ref>[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23_0030_0040_0020 신명호]</ref>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파총관은 묻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이어서 말하기를,
 
 
"당신 나라가 해마다 조공을 하여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침범하거나 반역한 정상은 없어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이니, 각자 안심하고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급히 행장을 차리고 지체하지 마오”라고 하고 곧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절하려고 하니, 파총관은 “절할 필요는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기후: 맑았습니다
 
*지명: 도저소, 천태현(天台縣), 양주부(揚州府), 대당국 영파부 하산, 북경, 남경, 선암리
 
*지리: 천태산, 안탕산, 북쪽, 석주산, 5천8백여 리, 양자강(揚子江), 서북 2천여 리
 
*언어(어원):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인명: 왕해(王海), 종규(鍾道), 유택(劉澤)
 
*풍습: 부적(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역사: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
 
*심리: 즐거움(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건축물: 황화관(皇華館),
 
*제도(관직): 진사(進士),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
 
*사회: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갈도(喝道/喝導), 해적선, 약탈
 
*행정: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체송(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기물: 초상화
 
*제도(교통): 어선 6척
 
*유학: 갈도(喝道/喝導),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인물: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심리(안심)
 
*비유: 기둥처럼 생긴 큰 돌,
 
*제도(외교):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의전: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인명-조선: 이섬, 최부,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
 
*제도(관직)-조선: 경차관,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이 되었습니다,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
 
*제도(시험)-조선: 두 번 문과에 올라,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乙科)의 제1등으로 합격,
 
*지명-조선: 조선국 전라도 나주, 제주
 
*유학-조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 
 
*시간-조선: 정미년 9월 17일, 11월 12일, 무신년 정월 30일,윤정월 3일, 이 달 12일, 17일,
 
*지리-조선: 남해,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행정-조선: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주(州).부(府)·군(郡)·현(縣)이 300이 넘고,
 
*사건-조선: 부친상,
 
*역사-조선: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
 
*제도(교통)-조선: 큰 배 1척
 
*기물-조선: 돛대, 상앗대, 노, 닻,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 서책, 활 1장, 칼 1자루, 각자가 입는 의상
 
*모화: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 연호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제도(외교)-조선: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
 
*역사-조선: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시-조선: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21st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fair.
 
 
People came in crowds to look at me.
 
Wang Hai pointed to a portrait on the wall and said, “Do you know that picture?”
 
I said, “I am not acquainted with it.”
 
 
Hai said, “It is Chung K’uei, a Chin-shih of the T’ang Dynasty.”
 
I said, “Never in his life did Chung K’uei rise to Chin-shih. How can you call him a Chin-shih?” Wang Hai and the others laughed uproariously. 39
 
Then a white-haired old man came, and I asked him, “How many li from here are the T’ien-t'ai and Yen-tang mountains ?”?40
 
The old man answered, “Mt. T’ien-t’ai is north of T’ien-t’ai County, two days' journey from here. Mt. Yen-tang is one day's journey south of Mt. Tien-t'ai.
 
I then asked, “What is the guardian mountain of this town?”
 
He said, “Mt. Stone Pillar.” He led me outside the gate and pointed out Mt. Stone Pillar, which was, indeed, a mountain of stone cliffs, at the peak of which there was a great stone shaped like a pillar.
 
I sai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to Peking?” The old man said, “Over 5,800 li.”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the Yangtze River.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
 
I mentioned Yang-chou Prefecture, at which Yi Sõm had landed, and aske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The old man said, “After you cross to the north of the Yangtze River, you are in Yang-chou.”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Nanking.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west. But all these are only estimates; I should not presume to know.”
 
A great official came, heralds before him and throngs behind, troops impressively drawn up in display. He sat in the Huang-hua-kuan, and I asked about him. He was Liu Tse, Anti-Japanese Commander for Sung-men and Other Places.41 He called us before him and said, “Since you crossed the border illegally, you ought to be judged by military law, but because I think that some of the circumstances in the case may warrant sympathy, I have not, for the time being, put you to death. State truthfully whether or not you encroached on China, so that we can act accordingly.”
 
I stated, “My name is Ch’oe Pu, and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was a minister close to the King. On the 17th Day,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be a Commissioner for Cheju and other places. Cheju is in the South Sea and is over one thousand li from Naju by sea. On the 12th Day, Eleventh Month of the same year I crossed the sea. I was correcting entries on registers and the work was not completed when I heard, on the 30th Day of this First Month, that my father had died. On the 3rd Day, Intercalary First Month, not waiting for a favorable wind, I set out in confusion to cross the sea. We were driven off course by the wind and in the terrible, mountainous waves, would first almost sink and then almost capsize. We hungered for food, thirsted for water, and almost died. On the 12th Day of this month we arrived at an island,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nd moored there. Fishing boats came and asked, “What country are you from?' We answered that we were Koreans and [told] how we came to have gone adrift.
 
“Then we asked, 'What country's territory is this?' "The men answered, 'It is Hsia-shan, Ning-po Prefecture, China.'
 
"That night pirate boats and over twenty men came. They scared us with their swords and wanted to cut off our heads. They seized our clothing, rations, and baggage and then cut away our oars and anchor and left, and we drifted again in the open ocean.
 
"On the 17th Day we came again to land and moored on a shore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gain there were fishing boats, six in a row, and I was afraid that they were of the type of the pirates we had met previously. We left the boat, went ashore, and crossed two ranges. In about six or seven li there was a settlement, from which we were passed along successively, reaching Hsien-yen Village at night. The villagers fought to beat us with crooked sticks and rob us. They turned us over to a place where we met an official, and he drove us on to this town.”
 
He then asked, “What was the year in which you placed on the examination list? What offices have you held? In what departments and districts do the men who accompany you live? What articles are in your baggage? How many boats did you have originally?”.
 
 
I said, “I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 in third place in 1477, and 1482 I was the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 have been writer and Doctor of Learning in the Printing Office, Auditor in the Military Supplies Commission, Archivist in the National Academy, Supervisor in the Office of the Inspector-General, and Assistant Writer and Writer in the Oslice of Special Counselors. In 1486 I was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Second Examination. I was Junior Fifth Counselor in the Ollice of Special Counselors, and Lieutenant and Assistant Captain of the Yongyang Garrison.
 
"Of the men with me, there are four secondary officials – Chòng Po,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Kwangju; Kim Chung, an official of Hwasun District; Son Hyo-ja,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Naju; and Yi Hyo-ji,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Cheju. There is one companion, Yi Chòng, from the capital. There is one Security Officer, An Úi, from Cheju; one Station Master, Ch’oe Kõisan, from Ch’ongam Station, Naju; and two slaves, Makkům and another. There are four Cheju public slaves, Kwon Song and others; nine loyal escort troops, Kim Sok and others; and twenty marine privates, Hồ Sang-ni and others. They are all from Cheju.
 
“We sailed in only one large boat. Masts, sails,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wind, and anchor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pirates.
 
“As to the things we have, there are one seal, one horse permit, silk gauze hats, horn girdles, pertinent documents, an examination list for my Second Examination, books, one bow, one knife, and the clothes worn by the individual men. There is nothing else.”
 
The Commander checked over the seal and other things. He asked, “How far away is your country? How many prefectures and departments are there? About how great are the military supplies? What things produced in your country do you prize? Which of the books you read do you revere? Y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follow the styles of what dynasty? Answer in writing, one by one, as a basis for verification.”
 
I said, “My country is some several thousand li away. It has eight provinces, in which the prefectures, departments, counties, and districts total more than three hundred. Our products are talented men, the five grains, horses, oxen, fowls and dogs. The things read and revered are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ll 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honor the Chinese styles. As to military supplies, being a Confucian minister, I have had no experience with them and do not know the figures exactly.”
 
He asked, “Does your country have relations with Japan, Ryukyu and Koryo?”:42
 
I said, “Japan and Ryukyu are in the great sea to the southeast. They are far away, and we do not communicate with them.43 Koryo has become our present Choson.”
 
He asked, “Does your country, too, pay tribute to our Court?”.
 
I said, “Every year at such times as the Imperial Birthday and the New Year, we most respectfully pay tribute.”
 
He asked, “What regulations does your country have? Do you have your own reign-titles?”
 
I said, “In our reign-titles and regulations we follow Ming completely.”
 
When the Commander had ended his questioning, he said, “Your state has paid tribute for years; you have acted as a good subject state. Since there is nothing to indicate seditious intent, you shall be treated courteously. Be at
 
ease, each of you, and do not worry; we shall send you to the capital and let you go home. Hurry with your baggage. I will permit no delay.” He served us tea and cakes.
 
I wrote a poem of thanks and bowed. The Commander said, “You need not bow," but I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and ventured to continue bowing. The Commander rose, too, and returned the courtesy.
 
 
 
151. 와병 중이었던 唐玄宗의 꿈에 나타난 大鬼로서, 소란을 피우던 小鬼를 죽인 뒤 玄宗의 물음에 終南山의 進士 鍾道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玄宗이 꿈에서 본 종규는 검은 의관을 걸치고, 눈이 크고 수염이 많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칼을 차고 있었으므로, 唐玄宗은 그와 똑같은 畵像을 그려 수호신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종규는 민간에서 악귀를 잡는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권6. 1752. 1國《臨海縣志》권3, 疆域, 敍水.
 
115?). 처음 양자강은 揚州와 鎭江 사이의 河段을 가리켰으나, 후에 儀眞 이하의 長江을 지칭하다가, 마지막에는 長江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154. 지체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驅從이 소리를 질러 일반인의 통행을 잠시 금하는 일.
 
155. 지방에서 使臣을 접대하는 공관.
 
156. 松門衛·海門衛·昌國衛 등을 통할하는 把總指揮를 가리킨다.
 
154. 조선시대 文科試 합격자를 禮曹에서 殿試를 보아 성적에 따라 분류하는 둘째 등급. | km2로 시험하여 7명을 뽑았으며 이들은 정8품의 품계를 주었고, 기성 관리로 승진을 위해 응시한 자는 2품을 올려주었다.
 
194) 校書館은 經籍의 인쇄와 반포 및 香祝, 印蒙 등의 일을 관장한 조선시대의 관서이다. 태조 원년(1392)에 설치하였으며, 判校(정3품) 1명, 校理(종5품) 1명, 別座(종5품)
 
156.?
 
157. 고려 德宗 때 처음 실시한 國子監試의 별칭으로 賦와 詩를 시험했다. 조선 태조4년(1395) 12월에 없앴다가 세종 때 다시 두었고, 26년(1444)에 폐지했다가 단종 즉위년 (1452) 12월에 부활했다. 小科의 하나인 進士試의 합격자는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이 부여되고 또 하급관리로 등용될 수도 있었다. 소과는 가을에 실시하는 初試와 이듬해 봄에 서울에서 보는 2차 시험인 試를 보았다. 초시와 복시 모두 2場이 있었으니 이를 初場과 終場이라 한다. 초시와 복시의 초장은 賦 1편, 古詩, 銘, 箴 가운데 1편을 보았고, 종장에서는 五經義, 四書疑 2편을 보았다. 복시의 初場에 합격한 자를 進士라고 하였다.
 
 
158. ?
 
159. ?
 
 
160. 조선시대의 정7품 관직으로 중국의 經書를 위주로 한 古今의 학문을 섭렵하여 制撰, 敎育, 校 등의 일을 보좌케 하였다. 정원은 成均館 3인, 弘文館 1인, 承文院 2인, 校書館 2인이었다. 校書館 박사는 태종원년(1401) 처음 설치되었는데, 燕山君 때 他官員의 겸직으로 되었다가 1506년 中宗反正으로 환원되었다.
 
 
161. 軍資監은 조선시대의 관청으로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태조원년(1392)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本監과 分監으로 구분했다. 관원으로는 正(정3 품 堂下官)과 副正(종3품) 각 1명, 僉正(종4품) 2명, 判官(종5품), 主簿(종6품) 각 3명, 直長(종7품), 奉事(종8품), 副奉事(정품), 參奉(종9품) 각 1명이 있었다. 한편 主簿는 敦寧府, 奉常寺, 軍資監, 司譯院, 訓鍊院 등 東·西班의 30여 官衙에 설치되었던 종6품직으로, 세조12년(1466) 1월 관제 개정 때 종래의 注簿와 副使 등이 主簿로 개칭되었다. 각 아문의 문서와 簿籍을 주관하는 임무를 맡았다.
 
 
162.成均館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유학교육을 위한 국가의 최고학부로 일명 學宮 혹은 泮宮이라고도 한다.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祭酒, 樂正, 直講, 博士, 學正, 學錄, 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生員試와 進士試에 합격한 儒生 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 입학의 기회를 주었다. 한편 典籍은 成均館의 정6품직으로, 정원은 13명이었다. 圖籍의 收藏과 출납, 관리의 일을 맡았다. 司成 이하 典籍 이상은 宗學敎官을 겸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성균관의 전적 중 1인은 養賢庫의 注簿를 겸하고, 또한 典籍 이하는 四學의 學官을 겸하였다.
 
 
163. 司憲府는 조선시대 刑曹, 漢城府와 더불어 三法司 또는 出禁三衙門의 하나로, 당시의 정치에 관하여 논의하고 모든 벼슬아치의 비행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규탄하며, 풍기와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들 사이에 원성이 있는가를 살피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 다. 또 司憲府와 司諫院을 병칭하여 그 관원을 모두 臺諫이라 불렀다. 사헌부는 관원 의 인사에도 관여하여 임금이 결정 임명한 관원의 자격을 심사하여 이에 대한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署經기관이기도 했다. 한편 監察은 조선시대 司憲府의 정6품 관직을 말한다. 정원은 초기에 다소의 변화가 있다가 세조 때 24명으로 정해졌다. 전. 外官의 불법행위를 실제로 감찰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국고출납, 祠祭, 朝廷禮會, 科學 등 모든 면에 걸쳐 감찰하여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아보았다.
 
 
164. 弘文館은 조선시대 궁중의 經書, 史籍의 관리, 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玉堂, 玉署, 瀛閣이라고도 하며, 司憲府司諫院과 더불어 三司라고 불렀다.
 
 
165. 조선시대 弘文館의 관직으로 修撰은 정6품, 副修撰은 종6품이었다. 세조9년(1463)에 弘文館이 신설된 뒤에 증설된 것으로 생각된다. 修撰은 文翰 편수의 임무를 맡고, 副修撰은 修撰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는다. 副提學 이하 副修撰까지는 知製敎를 兼帶 한다. 三司 관원의 일원으로 언론활동에도 참여하였다. 문과 합격자 중 圈點을 통하여 선발하여 弘文錄에 등재하였다.
 
 
166. 副校理는 조선시대 弘文館의 종5품직이다. 세조 9년에 홍문관이 신설된 뒤, 정5품직의 校理와 함께 부교리의 직이 두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교리는 서적의 異同과 正誤를 조사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부교리는 교리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經筵 官, 史官, 知制敎를 당연직으로 겸임하였으며, 司憲府·司諫院과 함께 三司의 일원으로 국정의 시비를 가리는 諫言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61 龍康衛는 朝鮮前期 중앙군의 근간인 5衛의 하나이다. 1457년 용양사가 용양위로 바뀌어 5위 중 左衛를 맡았다. 5衛에는 각기 신분별로 편성된 2-3개의 특색 있는 단위 부대를 두었는데, 용양위는 別侍衛와 隊卒로 구성되었다. 별시위는 5衛의 12개 단위 부대 중 신분별로는 가장 상위의 서열에 드는 부대로서 태종 원년(1401)에 설치되어 軍의 성격을 띠었다. 한편 司果는 조선시대 5衛에 속하는 정6품의 무관직으로, 정원은 21명이다. 고려시대 2군, 6위에 200명 단위 부대의 지휘관으로 정6품의 郞將 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조선 건국 초까지 지속되다가 태조3년(1395)에 副司直으 로 개칭되었다. 세조12년(1466)의 관직 정비 때에 다시 사과로 고쳐져 고정되었다. 사직과 마찬가지로 正品職이므로 遞兒職으로 배정되지 않았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였다.
 
167. ?
 
168. ?
 
 
[[1월 21일.lst]]
 
 
===22일===
 
二十二日,在桃诸所,是日陰,把官又引臣於前,將昨日招辭,删削下山遇賊、仙岩威擊等事及文繁處,令臣更寫一幅,薛曼立卓邊謂臣曰:“此文字報上司,以達于皇帝,文宜簡略,故我老爹册删繁就簡,令你改寫,你勿疑也,臣不肯寫,曰:“供辭當以直,文雖繁何害也?且所删者,乃遇賊之事,却添一言曰:“軍人衣服俱有云云,沒我遇賊情實,抑何意軟?”薛曼密寫示曰:“ 今皇帝新即位,法令嚴肅,若見你前所供辭,帝意必謂盜賊盛行,歸罪邊將,非細事也,為你計,當以生返本國為心,不宜好為生事也“臣聞其言以為然,即學筆隨所删寫之,薛曼又謂臣曰:“你既為軍資监主簿,何以日不知兵之败?”臣曰:“我為軍資監,未滿月見遞,故未詳其數,”又問曰: “你浮海上, 不食幾日?” 臣曰: “自初三日至十一日.” 曰: “然則何不至於餓死?”:“間或噴乾米,飲尿,尿又盡,待天雨清衣汁飲,以續一髮之命, 不死幸耳.” 又問曰: “你年齒幾何?” 臣曰: “三十有五歲,”又問: “你辭家幾日?” 臣曰: “月已六度圓矣.” 曰: “你思家山否?” 臣曰: “父已云亡, 慈母在堂, 哭之已變國俗, 又以我為溺死, 益篤傷慟之心. 我今生到異邦, 念及至此, 無日不痛哭,” 曰:“為人臣者,國耳忘家,你因王事,漂到于此,當移孝為忠,何憶家為?” 臣曰:“求忠臣於孝子之門,未有不盡孝於親而忠於君者,况風樹不止,日迫西山,安得而不思吾亡父與慈母乎?”又問曰:“你國王姓譯何?”臣曰: “孝子不忍擧父母之名, 故聞人過失, 如聞父母之名. 况為臣子, 其可以國君之諱, 輕與人說?”曰:“越界無妨.” 臣曰: “我不是朝鮮之臣乎? 為人臣者, 其可以越界而負其國, 異其行, 變其言乎? 我則不如是也,”薛曼卽精與臣問答之辭呈于把總官,把總官或讀或點頭,顧謂臣曰:“明日差官送你起程,凡有隨身行李依件寫來,免致前路失所,”臣退舍館,有王者,許清之鷹犬也,或嚇或誘,誅求無厭,臣之行李無物,無以應之,至是又來,言曰:“我每天人之恩不可不報,”臣解所着構帖裏,以與許清之子隆.台州,古東國之地,在閩之東越之南,而牛頭外洋等處轄臨海縣地,又在台州東南絕微,風氣溫暖, 亘雨少日,實炎瘴癘之方,臣當正月而
 
 
p.376
 
到,氣候與三四月同,车麥欲穗,笋芽方盛,桃杏滿開,又山川高大,林數屏騎,人物繁夥,弟宅壯麗,別是一區天地也.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파총관은 또 신을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어제의 공술서 가운데 하산에서 해적을 만난 일과 선암에서 구타를 당한 등의 일 및 문장이 번거로운 대목을 삭제하고 신에게 다시 한 장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설민(薛旻)이 탁자 옆에 섰다가 신에게 말하기를,“이 글은 상사에게 보고하여 황제에게 전달되는 것이니 간결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으리께서 번거로운 것은 지워버리고 간략히 해서 당신에게 고쳐 쓰게 한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쳐 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공술서는 바른 대로 써야 하니 글자가 비록 많다 해도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또 지워 버린 것은 바로 해적을 만났던 일인데, 도리어 한마디를 보태어 '군인의 의복은 모두 그대로 있었다' 운운하면서 내가 해적을 만났던 사실은 없애 버렸으니 이 또한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설민은 몰래 글을 써서 보이기를, “지금 황제께서 새로 즉위해서 법령이 엄숙하니 만약 당신이 전일에 진술한 공술서를 보신다면 황제께서는 틀림없이 '도적이 횡행하고 있구나'하고 여기시고 변장(邊將)에게 죄를 돌릴 터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 헤아린다면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갈 것만을 염두에 두어야지, 일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하여 곧 붓을 들어 몇 곳을 뺀 대로 썼습니다. 
 
 
설민이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6700 군자감][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3274 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했는데, 어째서 군량의 수량을 모른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군자감주부가 된 지 한 달이 채 차기 전에 직책이 바뀌었던 까닭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바다 위에서 밥을 먹지 못한 것이 며칠이나 됩니까?”
 
 
“3일부터 11일까지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굶어 죽지 않았습니까?”
 
 
“간혹 마른 쌀을 씹고 오줌을 마시기도 하였으며, 오줌도 없어지면 비 오기를 기다려서 옷을 적셔 짜내어 마시고는 한 가닥 터럭과도 같은 목숨을 이어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입니다.”
 
 
“당신의 나이는 몇입니까?”
 
 
“35세입니다.”
 
 
“당신은 집을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습니까?”
 
 
“여섯 달입니다."
 
 
“당신은 고향집 생각이 나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이미 별세하셨고 살아 계신 어머니는 슬피 울어 이미 나라의 풍속을 바꾸었고 또 내가 물에 빠져 죽었으리라 여겨 슬퍼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실 것입니다. 나는 지금 살아  이국(異國)에 이르렀지만 생각이 이에 미치면 통곡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신하된 사람은 나라만을 위하고 자기 집은 잊어야 한다고 하였습 니다. 당신은 왕사(王事)로 인해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하였으니 마땅히 효도를 충성으로 옮겨야 할 것인데, 어찌 집을 생각합니까?”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15 하니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않고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ref>[https://jnilbo.com/2018/09/27/20180927210000560186647/ 배롱나무 아래서 물었다 忠인가 孝인가, 무엇이 우선인가, 전남일보,  2018.09.27]</ref> 하물며 나무에 부는 바람은 그치지 않고 해는 서산에 지려 하니, 어찌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살아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554 당신의 국왕]은 성명이 무엇입니까?”<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isdom5371&logNo=22087621156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조선시대 국왕이름]</ref>
 
 
“효자는 타인이 부모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참지 못하니, 타인의 과실을 듣기를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신하된 자가 임금의 이름을 경솔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경을 넘었으니 지장 없을 것입니다.”
 
 
“나는 조선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신하된 사람이 국경을 넘었다고 나라를 저버리고 행동을 달리하고 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설민이 곧 신과 문답한 글을 가져다 파총관에게 바치니 파총관은 읽다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일 관원을 시켜서 당신을 떠나보낼 것입니다. 휴대한 모든 물건은 건수(件數)에 따라 기록해, 앞길에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사관(舍館)으로 물러 나왔습니다.
 
 
왕광(王匡)이란 자는 허청(許淸)의 사나운 앞잡이로서 위협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염치없이 물건을 요구함이 끝이 없었습니다.
 
 
신의 행장에는 줄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에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와서 말하기를, “우리 대인(大人)의 은혜는 갚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입었던 솜으로 댄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6124 철릭]을 벗어서 허청의 아들 융(隆)에게 주었습니다.
 
 
태주(台州)는 옛날 동구국(東歐國)의 땅으로서 민(圃)180 지방의 동쪽과 월(越)지방의 남쪽에 있고, 우두(牛頭) 앞 바다 등지는 임해현(臨海縣) 관할이며 또 태주 동남방으로 가장 먼 변방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하고 늘 비가 와서 햇볕은 적었으니 실로 염황장려(炎荒障薦)의 땅이었습니다.
 
 
신은 정월에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기후는 3-4월과 같아서 보리가 이삭이 패려고 하고 죽순 싹이 한창 무성하게 크고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또 산은 높고 내는 크며 수풀은 무성한데다, 인구가 많고 물자는 풍부하며, 주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니 하나의 별천지였습니다.
 
 
*기후: 흐렸습니다
 
*인명: 왕광(王匡), 허청(許淸), 허청의 아들 융(隆)
 
*지명: 도저소, 태주(台州)
 
*행정: 황제께서 새로 즉위해서 법령이 엄숙,
 
*행정: 문장이 번거로운 대목을 삭제하고 신에게 다시 한 장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휴대한 모든 물건은 건수(件數)에 따라 기록해, 앞길에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두(牛頭) 앞 바다 등지는 임해현(臨海縣) 관할
 
*제도(관직): 황제
 
*유학: 신하된 사람은 나라만을 위하고 자기 집은 잊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효도를 충성으로 옮겨야 할 것인데, 어찌 집을 생각합니까?
 
*지리: 민(圃)지방의 동쪽과 월(越)지방의 남쪽에 있고, 우두(牛頭) 앞 바다 등지는 임해현(臨海縣) 관할이며 또 태주 동남방으로 가장 먼 변방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하고 늘 비가 와서 햇볕은 적었으니 실로 염황장려(炎荒障薦)의 땅, 산은 높고 내는 크며 수풀은 무성
 
*인물: 왕광은 염치없이 물건을 요구함이 끝이 없었습니다
 
*역사: 옛날 동구국(東歐國)의 땅
 
*식물: 보리가 이삭이 패려고 하고 죽순 싹이 한창 무성하게 크고 복숭아꽃과 살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시간: 3일부터 11일까지, 정월
 
*사회: 인구가 많고 물자는 풍부하며, 주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였으니 하나의 별천지
 
*비유: 하나의 별천지
 
 
*심리(최부): 안 내킴, 슬픔, 
 
*제도(관직)-조선: 군자감주부,
 
*인물-조선: 35세
 
*유학-조선: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 하니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지 않고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효자는 타인이 부모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을 참지 못하니, 타인의 과실을 듣기를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신하된 자가 임금의 이름을 경솔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된 사람이 국경을 넘었다고 나라를 저버리고 행동을 달리하고 말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풍습(의복)-조선: 솜으로 댄 철릭
 
 
 
22nd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cloudy.
 
The Commander had me brought before him again. He took the statement of the previous day and scratched off the parts about meeting the bandits at Hsia-shan and being driven and beaten at Hsien-yen and the wordy passages and ordered me to rewrite the sheet. Hsieh Min was standing by the table and said to me, “This document will be presented to the authorities and passed to the Emperor, so the text must be terse. That is why our chief erased the wordy parts, made them more concise, and asked you to rewrite them. You ought not to have misgivings.”
 
I would not write it. I said, “A deposition ought to be honest. Even if it is wordy, what is wrong with that? The part erased, moreover, was the matter of meeting the bandits, yet he has added a line saying, 'The soldiers' clothes were all intact...' He has suppressed the truth about my meeting the bandits; what does he mean by that?”
 
Hsieh Min wrote something secretly and showed it to me. It said, “The present Emperor has recently ascended the throne, and the laws and ordinances are strict. If he were to see what you wrote previously, His Majesty would infer that bandits are rampant and would punish the border commanders. That would be no small matter. As far as you are concerned, you should concentrate on returning home alive instead of making trouble.”
 
I listened to what he said and, thinking it was so, took up the brush and rewrote the statement as revised. Hsieh Min said to me, “You were Auditor in the Military Supplies Commission; why do you say that you do not know the amount of military stores?”
 
I said, “Before I had been in the Military Supplies Commission a full month, I was transferred. That is why I do not know the exact figures.”
 
He asked, “When you were sailing at sea, how many days was it that you did not eat?”
 
I said, “From the 3rd Day to the 11th Day.” He said, “But how did you keep from starving to death?”
 
I said, “For a while we chewed dried rice grains and drank urine. When the urine was gone, we waited for it to rain. We soaked our clothes and drank the moisture from them and prolonged our lives a hair's length. It was just fortunate that we did not die.”
 
He asked, “How old are you?” I said, “Thirty-five.”
 
He asked, “How many days have you been away from home?” I said, “There have been six full moons.” He said, “Do you think of home?"
 
I said, “My father is dead, and my dear mother has already deviated from the custom of our country in weeping for him at home.44 Now, in addition, she has been led to believe that I have been drowned, so she must be grieving all the more. When I, having now reached a foreign country alive, think of these things, there is not a day that I do not weep bitterly.”
 
He said, “Among those who serve, the state is all, the family forgotten. You drifted here in the King's service; you should turn your filial piety into loyalty. Why brood over family matters ?”
 
I said, “Look for the loyal subject at the gate of the filial son. Never was a man not thoroughly filial to his parents yet loyal to his lord. How can I help but think of my dead father and dear mother, especially when it is already too late to care for one and death from age approaches the other?”.
 
He asked, “What are your King's surname and taboo name?”
 
I said, “The son in mourning cannot bear to mention the names of his father and mother; he would as soon, therefore, hear of the scandals of others as hear the names of his father and mother. How much less can a subject speak loosely to anyone the taboo name of the ruler of his country?”.
 
He said, “It does no harm when you are beyond the borders.”
 
I said, “Am I not a Korean subject? As one who serves, can I, by crossing the border, turn my back on my country and change my actions and words? I am not like that.”
 
Hsieh Min gave the statement of questions and my answers to the Commander, who alternately read and nodded his head. He turned to me and said, “Tomorrow I shall commission an official to start out with you. Write out, item by item, and bring a list of the baggage that accompanies you, so as to avoid losing it on the road ahead.” I withdrew to my quarters.
 
One Wang K’uang, Hsü Ch’ing's henchman, was there. He had been first intimidating and then beguiling us with insatiable appetite, but in my baggage there was nothing for me to satisfy him with. Now he came again and said, “You must repay my chief's favors.” I took off the padded, figured lining I was wearing and gave it to him for Ch’ing's son Lung.
 
XXX. T'ai-chou is the land of the old Tung-ou-kuo.45 It was east of Min and south of Yüeh. But such places as Niu-t’ou-wai-yang are in Lin-hai County. In the extreme southeast region of T'ai-chou, then, the wind is warm. It rains most of the time, and it is seldom sunny. It is, in fact, a jungle-like, malarial region.
 
I arrived in the First Month, but the weather was the same as that of the Third or Fourth Month. The barley and wheat were about to come to head, bamboo shoots were at their height, and peaches and apricots were in full bloom. The mountains were high, the rivers large, and woods and preserves formed screens and shades. The people were thriving and the houses splendid. XXX
 
 
169. 重試에 급제한 자의 성명을 적은 榜目.
 
172. 《조선성종실록》19년 4월 戊申, 賀冊封使 安處良이 북경에서 베껴 가지고 온 공문을 보면, 최부의 공술 속에 所帶馬鞍一部, 及各人衣服具在라는 말이 들어 있다. 이는 軍人衣服具有’와 부합하는 내용으로서, 결국 최부 휘하 군인들의 의복이 없어진 것이 없고 그대로 모두 남아 있었다는 것을 강조한 뜻이 틀림없다.
 
113. 《孟子》告子下에 “華周杞梁之妻, 善哭其夫, 而變國俗”이란 고사가 있다. 戰國時代 齊나라 사람 華周와 杞梁이 전사했는데 그의 아내들이 슬피 울어 나라의 풍속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174.《漢書》권48 列傳 賈誼, “爲人臣者主耳忘身, 國耳忘家” 17) 《後漢書》권16 列傳 彪, “事親孝故忠可移於君, 是移求忠臣必於孝子之門” 17.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에서 유래한다.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韓詩外傳》 권9.
 
175.?
 
176.?
 
177. 연로하여 죽음이 임박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러한 뜻으로 쓴 대표적 용례로 元陸文圭의 《牆東類稿》권14의 “今吾老疾, 日迫西山”이란 구절이 전한다.
 
178. 《後漢書》권24 列傳 馬援, “吾欲汝曹聞人過失,如聞父母之名,耳可得聞,口不
 
可得言也.”
 
179. 원문은 帖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철릭의 取音으로 天翼 혹은 天益이라고도 한다. 관복의 밑받침으로 입는 포이다. 홑, 겹, 솜으로 지어 계절에 따라 바꿔 입었다. 깃이 곧고 상의와 하의가 1:1의 비율로 연결되었으며 치마 부분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색상은 堂上官은 藍色, 堂下官은 紅色이었다.
 
180. __江省의 옛 명칭.
 
 
[[1월 22일.lst]]
 
 
===23일===
 
二十三日, 自桃诸所登程, 是日陰, 把總官又引臣及從者於前, 今臣叫姓名點數,差千戶霍勇及軍史二十餘人,護送臣等于總兵官,臣及陪吏等,俱乘轎以行,梁達海奸狡者,托病扶杖,似不能步,把總官亦許轎,乘轎者凡八人,翟勇、許清、王臣等與臣等過山場、烏頭二嶺,間有三大川,烏頭嶺下又有鑑溪,許清邀臣等于溪邊人家,做飯以饋,又行過塘頭、蒲宰等地,犯夜至一道傍佛宇而宿,其前里開即仙岩里,自桃渚所至此,乃臣前此被驅所經之路也,夜,許清、霍勇,鞠其里長,捕其奪馬鞍者,報于官,還馬鞍于臣,軍人所見奪金子網巾等物,俱不得.
 
 
凡為劫盜者殺越人于貨,肆暴無忌,今江南人雖或被利心所使,為盗為劫者有之, 然下山之盗不殺臣等, 且有遺物, 仙岩之人不隱所劫, 竟還奪鞍,可以觀風氣柔弱, 人心不甚暴惡之驗也.
 
 
도저소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파총관이 또 신과 종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신에게 이름을 불러 인원을 일일이 세게 하였습니다. 천호 적용(望勇)과 군리(軍火) 20여 인을 차출하여 신 등을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B4%9D%EB%B3%91(%E6%91%A0%E5%85%B5) 총병]관(總兵官)182에게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신과 배리 등은 모두 가마<ref>[http://www.carlife.net/bbs/board.php?bo_table=cl_4_1&wr_id=2487 세도가의 ‘탈것’들 ‘가마법도’ 어기면 중죄로 엄벌, 카라이프]</ref><ref>http://www.museum.seoul.kr/archive/archiveView.do 가마와 말, 서울역사아카이브</ref>를 타고 갔습니다. 양달해는 간교한 자로서 병을 핑계하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걸을 수 없는 척하니 파총관이 또 가마를 타도록 허가하여, 가마 탄 사람이 모두 8인이었습니다.
 
 
적용, 허청, 왕광 등이 신 등과 함께 산장(山場)과 오두(烏頭) 두 고개를 지나가는데 그 사이에 큰 내가 셋이 있었습니다.
 
 
오두령(烏頭嶺) 아래에는 또 감계(鑑溪)가 있었는데, 허청이 신 등을 감계 가의 민가로 데려가 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또 길을 떠나 당두(塘頭)와 포봉(蒲峯) 등을 지나 밤을 타서 가다가 길가의 한 불사(佛寺)에 이르러 잠을 잤습니다.
 
 
그 앞마을이 바로 선암리인데 도저소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곧 신이 전에 내몰리며 지나갔던 길이었습니다.
 
 
밤에 허청과 적용이 그곳 이장(里長)을 국문하여 제 말안장을 빼앗은 사람을 잡아서 관사에 보고하고 말안장을 신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군인들의 빼앗긴 갓과 망건 등은 모두 찾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강도질을 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184 포학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지금 강남 지방 사람들 중에는 비록 더러 이익을 탐하는 마음 때문에 도적질을 하고 약탈하는 자가 있지만 하산의 해적은 신 등을 죽이지 않았고 또 남겨준 물건도 있었으며, 선암 사람은 약탈한 것을 숨기지 않고 빼앗았던 말안장을 마침내 돌려주었으니, 기풍이 부드럽고 인심이 그다지 포악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지명: 도저소, 선암리,
 
*기후: 흐렸습니다
 
*제도(관직): 파총관, 천호, 군리(軍火),총병관(總兵官)
 
*인명: 적용(望勇), 허청, 왕광
 
*인물: 양달해는 간교한 자,
 
*행정: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허청과 적용이 그곳 이장(里長)을 국문하여 제 말안장을 빼앗은 사람을 잡아서 관사에 보고하고 말안장을 신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제도(교통):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의전: 가마를 타고 갔습니다, 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지리: 산장(山場)과 오두(烏頭) 두 고개를 지나가는데 그 사이에 큰 내가 셋이 있었습니다, 오두령(烏頭嶺) 아래에는 또 감계(鑑溪)가 있었는데, 당두(塘頭)와 포봉(蒲峯) 등을 지나
 
*사회: 대개 강도질을 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포학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지금 강남 지방 사람들 중에는 비록 더러 이익을 탐하는 마음 때문에 도적질을 하고 약탈하는 자가 있지만 하산의 해적은 신 등을 죽이지 않았고 또 남겨준 물건도 있었으며, 선암 사람은 약탈한 것을 숨기지 않고 빼앗았던 말안장을 마침내 돌려주었으니, 기풍이 부드럽고 인심이 그다지 포악하지 않다
 
*시간: 밤
 
*불교: 불사(佛寺)
 
 
*기물-조선: 말안장, 갓, 망건
 
*제도(관직)-조선: 군인
 
 
23rd Day. Setting out from T’ao-chu Chiliad. This day was cloudy.
 
The Commander again had me and my staff brought before him and ordered me to call out the names [of the men] and check their number. He commissioned Chiliarch Chai Yung and over twenty military officers to escort us to the Regional Commander [Tsung-ping kuan]. I and the subordinate officials rode in sedan-chairs. Yang Tal-hae, a crafty one, pleading illness and leaning on a stick, appeared to be unable to walk, and the Commander allowed him a sedan-chair, too. In all, eight people rode in sedan-chairs.
 
Chai Yung, Hsü Ch’ing, and Wang K’uang crossed with us over Shan-ch'ang and Wu-t’ou ranges. Between them were three large rivers, and below Wu-t'ou Range was Chien Stream. Hsü Ch’ing took us to a house at the edge of the stream and had food cooked and served to us.
 
Even though it was night we went on, across T’ang-t’ou-p’u Ridge and other places. We came to a Buddhist temple by the road and lodged there. The village gate in front of it was that of Hsien-yen Village, and the road there from T’sochu Chiliad was that along which I had previously been driven. That night, Hsü Ch’ing and Chai Yung questioned the head of the village, arrested the fellow who had stolen the horse saddle, reported him to the officials, and returned the saddle to me. We did not get any of the rain hats, net wraps, or other things that had been stolen from the soldiers.
 
XXX Generally, bandits kill and plunder, and there is no limit to their violence. Now, though some of the Chiang-nan people, driven perhaps by motives of gain, rob and steal, the robbers of Hsia-shan did not kill us, and they even left some things behind. The men of Hsien-yen did not hide what they had stolen and in the end returned the saddle they had taken. From this we can see that their nature is mild and their hearts not wicked. XXX
 
 
181 남방의 무덥고 풍토병이 많은 곳.
 
182.. 한 지역의 武官으로 明代 초기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公·侯·伯·都督 중에서 추천하고, 가 끝나면 본래의 직무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후에 변경에 일이 많아 마침내 현지에 머물러 鎭守하게 하였다. 將軍의 印으로 제수한 사람을 桂印將軍이라 불렀 다. 또 애倭 혹은 總督漕運 등의 명칭이 있었다. 황제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으며 品級 이 없고 定이 없었으며, 권한이 매우 컸다. 중기 이후에는 설치된 곳이 날로 늘어나 점차 流官으로 充任되었으며, 總督과 巡撫의 지휘를 받았다.
 
183. 明代 향촌조직인 里甲의 長으로 모두 10戶로 구성되는데, 각종 正役을 부담하였다.
 
184. 원문은 殺越人于貨이고, 출전은 《尙書》 周書 康喆이다.
 
 
[[1월 23일.lst]]
 
 
===24일===
 
二十四日,至健跳所,是日晴,曉過穿岩里,里西有山,戴石壁,屹立写隆,有大寶洞,望如虹門,里之得名以此.又過田嶺,嶺上有僧作佛字横道路,行人從寺中以過,臣等平地雖或乘轎,領峻路險下轎步行為多,至此寺百技跛行,寺僧憐之,煎茶以供,少留,行至海浦,有兵船具戎器,循浦上下,示以水戰之狀,臣從鼻居以渡,則乃是健跳所也,城臨海岸,所千戶李昂,軀幹壯大,容儀丰美,具甲胃兵戎,導臣等入城門,門皆重城,鼓角號师,聲震海岳,其嗩吶等大小角末端皆上曲鉤,向吹者眉目間,城中人物弟宅視桃诸所尤豐盛,李昂引臣至一客館,與翟勇、許清、王匡、王海等及所之有姓莊也尹也,亡其名,俱是厚重老官人,皆環立卓之左右,問臣以漂
 
流之故,略陳首末云云,李昂請升堂行賓主之禮,昂由階,臣由東階而上,相對再拜後,昂饋臣茶果,又饋臣之從者以酒肉,頗示忠款之意,姓尹老官人引程保等,請私靠飲食之,因見其妻妾子女以展禮,其人心淳彪如此,有一人以丙午年登科小錄來示臣曰:“此吾的登科第榜錄也.”又指點錄中‘張輔’二字,曰:“此吾的姓名也.”因問曰:“你國亦貴其登科者乎?”曰:“然.”曰:“我國制,草茅士登第者,皆官給俸祿,確表門閭,刺銜亦書賜進士及第某科某等人”云云. 引臣至其家,則其家前街果以雕龍石柱,作二層三間之門,金碧眩曜,其上大書丙午科張輔之家之標,輔盖以己之登第誇示臣. 臣亦以'''浮誕'''之言之,曰:“我再中科第,歲受米二百石,难門三層,足下其不及於我矣.”輔曰:“何以知之?”臣曰:“我之族門,遠莫致之,我有文科重試小錄在此,”即撥示之,輔於錄中,見臣職姓名,下跪曰:“我不及矣.”
 
 
*浮誕: 경박하고 허황됨. <ref>[https://hanja.dict.naver.com/word?q=%E6%B5%AE%E8%AA%95&cp_code=0&sound_id=0]</ref>
 
 
건도소(健跳所)185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천암리(穿岩里)를 지났습니다.
 
 
마을 서쪽에 있는 산 위쪽으로 석벽이 높게 솟아있는데, 홍문(虹門)186처럼 보이는 동굴이 있었기 때문에 천암(穿岩)이라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전령(田嶺)을 지나니 전령 위에는 중이 불사(佛舍)를 짓느라 도로를 가로막았으므로, 행인들이 절 가운데로 지나갔습니다.
 
 
신 등은 평지에서는 더러 가마도 탔지만 고개가 높고 길이 험하므로 가마에서 내려 걷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절에 이르러 온갖 모양으로 절룩거리며 걸으니 그 절의 중이 불쌍히 여겨 차를 끓여 대접하였습니다.
 
 
조금 머물렀다가 출발해서 바닷가에 이르니 '''무기를 갖춘 병선(兵船)이 물가를 따라 오르내리며 수전(水戰)을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ref>[http://hankukmail.com/newshome/print_paper.php?number=13439 정지장군]</ref>
 
 
신은 거룻배를 타고 건넜는데 바로 이곳이 건도소였습니다.
 
 
건도소성(城)은 해안에 붙어 있었습니다.
 
 
건도소의 천호인 이앙(李扇)은 신체가 장대하고 용모가 준수하였는데, 갑주(甲周)와 무장을 갖추고 신 등을 이끌어 성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은 모두 겹성이었고, 고각(鼓角)187과 총통의 소리는 바다와 산을 진동시켰습니다.
 
 
그 쇄납(噴网) 등 크고 작은 피리는 끝이 모두 위가 굽어 있어 부는 사람의 미간(眉間)을 향하였습니다.
 
 
성 안의 사람과 저택은 도저소에 비해 더욱 많았습니다.
 
 
이앙은 신을 이끌고 한 객관(客館)에 이르러서, 적용, 허청, 왕광, 왕해 등 및 이름은 잊었지만 성이 장(莊)이니 윤(尹)이니 하는 중후하고 나이 든 건도소 관인들과 함께 탁자의 좌우에 빙 둘러서서 신에게 표류된 까닭을 물었습니다.
 
 
신은 대략 그 전말을 진술하였습니다.
 
 
이앙은 신에게 당(堂)에 올라서 빈주(賓主)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앙은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고 신은 동계(東階)로부터 올라가서 서로 마주보고 두 번 절한 뒤에 이앙이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고, 또 신의 종자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먹여 자못 환대하는 뜻을 보였습니다.
 
 
성이 윤(尹)인 노령의 관인은 정보 등을 이끌고 사저로 가서 음식을 먹이고 이어 그 처첩과 자녀로 하여금 인사 올리게 하였습니다.
 
 
'''그 인심의 순박하고 두터움이 이와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오년에 등과(登科)한 소록(小錄)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과거에 합격한 방록(榜錄)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방록 가운데 '장보(張輔)'189 (장푸, 送朝鮮崔校理序를 썼음) 란 두 글자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내 이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묻기를, “당신 나라에서도 등과한 사람을 귀하게 여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제도는 초야에 있던 선비로서 등과한 사람은 모두 관청에서 봉록을 주고 문가에 정문(陸門)을 세워주며, 명함에도 무슨 과 몇 등으로 진사급 제한 자 등이라고 써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신을 이끌고 자기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 집 앞의 네거리에 과연 용(龍)을 아로새긴 석주(石柱)로 2층 3간의 문을 만들었는데, 노란빛과 푸른빛이 눈이 부시도록 빛났고, 그 위에는 병오과(丙午科)189장보(張輔)의 가(家)'라는 글씨가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장보는 자기의 등과를 신에게 과시한 것입니다.
 
 
신 또한 떠벌리는 말로 그에게 자랑하며 말하기를, “나는 두 번이나 과거<ref>[http://www.1392.org/1392educ/1392tesa.htm 사이버 조선왕조 과거 제도 안내]</ref>에 합격하여 해마다 쌀 200석을 받았고 정문이 3층이나 되니 족하가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신은 “나의 정문은 먼 곳에 있으니 보일 수 없지만, 내게 문과(文科) 중시(重試)의 소록(小錄)이 있습니다”라고 하고 펼쳐 보였습니다.
 
 
장보는 소록 속에 신의 관직과 성명이 있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으며 말하기를, “내가 미치지 못하는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이 날은 맑았습니다.
 
*시간: 새벽
 
*지명: 건도소(健跳所), 천암리(穿岩里), 전령(田嶺)을 지나니 전령 위에는 중이 불사(佛舍)를 짓느라, 고개가 높고 길이 험하므로
 
*언어(어원): 홍문(虹門)처럼 보이는 동굴이 있었기 때문에 천암(穿岩)이라 불리는 것
 
*제도(교통): 가마
 
*심리: 중이 불쌍히 여겨 차를 끓여 대접하였습니다
 
*풍경: 무기를 갖춘 병선(兵船)이 물가를 따라 오르내리며 수전(水戰)을 하는 모습
 
*건축물
 
*인명
 
*인물
 
*의전
 
*제도(시험)
 
*사회(인심)
 
*제도(시험)-조선
 
*사회(인재대우)
 
*사회(인재대우)-조선
 
*제도(시험: 방록)
 
*제도(시험: 소록)-조선
 
*심리(과시)
 
 
 
24th Day. Arrival at Chien-t'iao Chiliad. This day was fair.
 
 
At dawn we passed Pierced Cliff Village. West of the village was a mountain, and on it were stone cliffs. Its peak was lofty and arched and had a great hole that looked like an arched gate. The village got its name from that. We crossed T'ien Range. At the peak, priests had built a Buddhist temple across the road, and travelers passed through the temple. Though on level ground we sometimes rode in the sedan-chairs, we frequently got out of the sedan-chairs and walked where the ranges were steep and the road difficult. When we came to that temple, we were limping along by whatever means we could. The priests of the temple pitied us, boiled tea and served us, and we stayed a little while.
 
Going on, we reached a bay in which were warships, all armed and patrolling up and down, looking as if they were in a sea battle. I crossed over in a tender to Chien-t'iao Chiliad. The wall overlooked the shore. The Chiliarch of the place, Li Ang, of powerful physique and handsome appearance, wore armor and carried weapons. He led us through a gate of the wall. The gates were all doubled-walled. The sounds of drums, horns, and fire weapons shook the sea and the hills. All the sournas and other large and small horns curved up in a hook at the ends and faced back toward the blowers' foreheads. The people and houses in the town were even more prosperous than those of T’ao-chu Chiliad.
 
Li Ang led me to a guest house. He and Chai Yung, Hsü Ch’ing, Wang K’uang, Wang Hai, and a Chuang and Yin from the place, I have forgotten their given names; they were both fat old officials - stood at the left and right of a table. They asked me how I had come to sail adrift, which I briefly outlined to them. Li Ang asked that we go up to the main hall and perform the ceremony between host and guest. Ang went up by the west stairs, I by the east, and we bowed twice to each other. Afterwards, Ang served me tea and fruit and my staff wine and meat. He showed a marked spirit of true hospitality.
 
The old official named Yin took Chong Po and others to his own house. After giving them food and drink, he introduced his wife, concubines, sons and daughters, and they extended greetings. The man's heart was as pure and full as that.
 
A man brought an abbreviated examination list for 1486 and showed it to me. He said, “This is the notice of my placing in the examinations.” He pointed to the two characters “Chang” and “Fu” on the notice and said, “There is my name.”?46 Then he asked, “In your country, do they honor those who place on the lists, too?"
 
I said, “Yes.”
 
He said, “Under our system, all provincial scholars who place on the lists are given public stipends. Banners are displayed at their gates, and on their name cards is written the rank Chin-shih of Such-and-such Place in Suchand-such Section.'” He took me to his house, and in front of the house in the street was, indeed, a gate of two stories and three doors, built of stone pillars carved with dragons. Its glitter and brightness were dazzling. At the top was written large the sign.“House of Chang Fu, Examination of 1486.” The reason Chang Fu had shown me this was to boast.
 
I, too, boasted extravagantly: “I placed on the list twice. I receive two hundred shih of rice annually,47 and my banner gate has three stories. You are not my equal."
 
Chang Fu said, “How do I know that?”'
 
I said, “My banner gate is far away, and I cannot bring it here, but I have a short list of the Civil Service Second Examination here.” I opened it and showed it to him.
 
When Chang Fu saw my name and position in the list, he knelt and said, “I am not at all your equal.”
 
 
184. 性所成은 寧海縣 縣治에서 동남쪽 130리 거리에 위치하는데 높이는 2 3R, 둘레는 31 17步, 문은 두 개이다. 洪武20년(1387) 信國公 湯和가 세웠다. 海門衛에 예속된다. 心寧海縣志》권1, 輿地; 권2, 建置 등 참조.
 
185. 무지개 모양의 문.
 
186. 의 城令에 사용하는 太鼓와 角館.
 
1? 學의 題名錄으로 榜錄을 뜻한다.
 
188.?
 
189. 누가 邦佐이다. 조상이 軍功으로 旗丁을 통솔하였으며, 대대로 健跳所의 관리를 지냈다. 海雪에 籍을 두었다. 그는 英敏하고, 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成化22년 (1418)에 鄕에서 천거되어 禮部乙榜에 합격하였다. 水敎諭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그만두고 집에 은거하면서 《寧海縣志》를 편찬하였다.
 
[[1월 24일.lst]]
 
 
===25일===
 
二十五日,到越溪巡檢司,是日陰霾,李昂、許清、王国及莊也尹也,俱这臣于海上,昂握臣手,曰:“我與足下千載一時,萬里一見,一別兩地,無復再見,”臣於船上敘別,曰:“僕之來也,將軍以百千兵甲,環城擁圓,雄旗凌亂,鼓轟馳,則將軍之示遠人嚴矣;僕之寓館也,升堂禮莫怠,饋食意益师, 開心見誠, 一見如舊, 則將軍之待遠人寬矣;及偿之去也,步出城西,遠送海曲, 扶僕登船,鼓辭以別,則將軍之送遠人厚矣,僕一遠人也,相逢未一日也, 而嚴以示之,寬以待之,厚以別之,其意固有在也,盖我朝鮮,地雖海
 
外,《冠文物,悉同中國,則不可以外國視也,況今大明一統,胡越為家, 則
 
p.378
 
一天之下,皆吾兄弟,豈以地之遠近,分內外哉?况又我國恪事天朝,貢獻不怠,故天子亦禮以待之,仁以撫之,懷紋之化,至矣盡矣,而僕朝鮮之臣也,將軍亦天子分關之臣也,則其體天子字小之心,而待遠人至於此極,斯不亦忠矣乎哉?其間情意之篤,則僕既感之深矣,然不得一日之暇,與將軍及莊、尹兩官人,從容談話,展布所懷,百歲之間,萬里之外,雲樹之望,渴維“其已?”又別許清,曰:“將軍與王足下,遇我於蒲宰之里,我於飢渴之極,生我於萬死之餘,以至杜賣場,以至桃诸所,以至於此城,崎嶇數百[里]”之地,扶護七八日之間,其恩情之篇,不勝枚悉,一別之後,會面難期,增黯然,“遂告別,與翟勇同舟過大海,勇謂臣曰:“浮此海而去,西可望天台山,今年雲霧四塞,不得觀望”云云,夕至(淨)(寧海縣之越溪巡檢司,城在山巔,軍卒皆帶甲,列立海傍,勇與其徒,下入城,留臣等于海岸,莫知所為.
 
 
월계순검사(越溪巡檢司)192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어두웠습니다.
 
 
이앙, 허청, 왕광 및 성이 장이니 윤이니 하는 분들이 모두 신을 바다에서 전송하였습니다.
 
 
이앙은 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나와 족하는 천 년 만에 만 리 밖에서 한번 만났다가 곧 헤어지니 다시 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배 위에서 작별을 고하며 말하기를,
 
 
“제가 올 적에는 장군께서 수백 내지 천여 명의 군인으로 성을 둘러싸 깃발이 어지럽게 펄럭이고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에게 '''위엄'''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가 사관(舍館)에 머물 적에는 당(堂)에 오르게 하였는데, '''예절'''이 틀림없고 음식을 대접하는데 뜻이 더욱 두터웠으며 마음을 터놓고 '''성의'''를 보여서 처음 보고도 옛 벗과 같이 친밀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신 것입니다. 제가 떠날 적에는 성 서쪽까지 걸어 나오고 멀리 바다 모퉁이까지 전송하며 저를 부축하여 배에 태우고 글을 지어 작별하였으니, 이는 장군께서 먼 지방 사람을 보내심이 '''후'''하신 것입니다. 저는 일개 먼 지방 사람인데 서로 만난 지 하루가 못되었는데도 엄함으로써 위엄을 보이고 관대함으로써 응대하고 두터움으로써 작별하였으니, 그것은 반드시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대개 우리 조선은, 땅은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의관, 문물은 모두 중국과 같으니 외국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명나라가 통일을 이루어 북방의 호(胡)와 남방의 월(越)도 일가가 되었으니, 한 하늘 아래에서 모두가 형제입니다. 어찌 지역의 거리로 안팎을 나누겠습니까? 하물며 또 우리나라는 천조(天朝)를 정성으로 섬겨 공물 바치는 일을 게을리 아니한 까닭에 천자께서 예절로써 대우하고 인애로써 어루만져 주셨으니, 감싸고 안정시켜 주신 덕화(德化)는 지극하였습니다. 또 저는 조선의 신하요, 장군은 천자(天子)의 지방을 맡은 신하인데 천자의 자소지심(字小之心)을 체현하여 먼 나라 사람을 대우하심이 이처럼 지극하시니 이 또한 충(忠)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의 두터운 온정은 제가 이미 깊이 느낀 바이지만 하루도 장군 및 장(莊), 윤(尹) 두 관인과 함께 조용히 담화하며 회포를 풀 짬을 얻지 못하였으니, 백년 한 평생을 만리 밖에서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이 어찌 그치겠습니까?"194라고 하였습니다.
 
 
또 허청에게 작별하며 말하기를,
 
 
“장군은 왕광 족하와 함께 나를 포봉(蒲峯)이란 마을에서 만나보고, 지극히 배고프고 목마른 나를 배부르게 먹이고, 나를 죽을 지경에서 살려주고, 두독장과 도저소 및 이 성에 이르기까지 산길이 험준한 수백 리의 땅에서 7-8일 동안을 돕고 보호해 주셨으니, 그 은정(恩情)의 두터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작별한 뒤에는 서로 만남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슬픔이 더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작별을 고하고 적용과 함께 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넜습니다.
 
 
적용은 신에게, “이 바다를 떠가노라면 서쪽으로 천태산이 보이는데, 지금은 구름과 안개로 사방이 막혀서 바라볼 수가 없겠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저녁에 영해현(寧海縣)의 월계순검사195에 도착하였습니다.
 
 
성은 산꼭대기에 있었고, 군졸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바닷가에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적용은 그 무리와 함께 배에서 내려서 성에 들어가고 신 등은 해안에 머물게 하였는데,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명
 
*인명
 
*심리(아쉬움)
 
*모화
 
*심리(유대감)
 
*유학
 
*심리(그리움)
 
*심리(고마움)
 
*지리
 
 
25th Day. Arrival at Yüeh-ch’i Police Station [Hsün-chien ssu]. This day was cloudy, with dust blowing.
 
 
Li Ang, Hsü Ch’ing, Wang K’uang, Chuang, and Yin escorted me to the sea. Ang took my hands and said, “There was one chance in a thousand years that you and I, from places far apart, would ever meet. Parted we shall not see each other again.”
 
I got into the boat and took my leave with these words: “When I came, General [Chiang-chün], you lined the wall and filled the gates with thousands of arms and shields. Masses of pennants fluttered. Gongs and drums rumbled. You displayed your might to a stranger, General.
 
“When I lodged at the inn, you went up to the main hall and performed the ceremony faultlessly. You served us food in great abundance. The sincerity in your heart was apparent; at a glance, it was as if we were old friends. You treated a stranger generously, General.
 
“As I leave, you walk out west of the city, escorting me a long way to a nook of the sea. You help me into the boat and say good-bye to me. You accompany a stranger kindly, General.
 
“I am a stranger, we have not been acquainted a day. Yet you have shown me your might, treated me generously, and taken leave of me kindly. Certainly that shows your feelings that though my Korea is beyond the sea, its clothing and culture being the same as China's, it cannot be considered a foreign country. That is especially so now, with Great Ming's unification and Hu and Yüeh under one roof. All under Heaven are my brothers; how can we discriminate among people because of distance? That is particularly true of my country, which respectfully serves the Celestial Court and pays tribute without fail. The Emperor, for his part, treats us punctiliously and tends us benevolently. The feeling of security he imparts is perfect.
 
"But I am a Korean minister. You, too, General, are the Emperor's minister outside the gates, and you embody the Emperor's love of the humble. Is it not also loyal service to treat a stranger to this extent? The magnanimity of your feelings in this period I have felt deeply. Though I have not had a day's free time to talk at leisure with you, General, and the two officials Chuang and Yin, to reveal what is in my heart, I shall always remember you, as long as I live and no matter how far away I am.”
 
Then I took leave of Hsü Ch’ing, saying to him, "You, General, and your Wang K’uang met me at the village of P’u-fêng, filled me in the last stage of my hunger and thirst, and put life into me when I should long before have died. Over many li of dangerous ground, to Tu-tu-ch'ang,48 to T’ao-chu Chiliad, and to this town, for seven or eight days you have helped and protected me. The extent of your kindness is immeasurable. Once we have parted, it is unlikely that we shall meet again, and I am sadder for that.”
 
I then bade them leave and, riding in the same boat as Chai Yung, went across a sea. Yung said to me, “When one sails out into this sea, Mt. T'ien-t'ai is visible in the west, but it happens to be cloudy and foggy everywhere now, and we shall not get to see it.”
 
In the evening we arrived at Yüeh-ch'i Police Station, Ning-hai County. The town was at the top of a mountain, and troops, all wearing armor, lined the shore. Yung and his staff got out of the boat and went into the town, leaving us on the shore. I do not know what they did.
 
 
192.巡檢司는 洪武 연간 각지의 關津과 要害에 설치한 부서로서 姦細·私鹽業者·逃軍 ·逃囚 및 文引이 없는 수상한 자의 검문과 체포 등 지방의 치안을 담당했다. 巡檢과 副巡檢을 두었는데 모두 종9품이었다. 《諸司職掌》 권5, 兵部.
 
193. 小國을 아끼고 어루만진다는 뜻이다. 용례로는 《左傳》 昭公 傳十六年의 “僑聞爲國非不能事大, 字小之難” 등이 있다.
 
194. 원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를 그리워함을 비유하여 표현한 雲樹之望'의 출전은 杜甫의 詩〈春日憶李白)의 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 이다. 어찌 그치겠습니까'의 원문인 ‘붉維其已'의 출전은 《詩經》國風 邯風 綠衣이다.
 
195. 2002년 7월 최부의 후손 催秉一 선생 등이 寧海縣 越溪鄕 越溪村의 希望初等學校 구내에 〈崔溥漂流事蹟碑)를 건립하였다. 碑文은 北京大學의 葛振家 교수가 썼다.
 
[[1월 25일.lst]]
 
 
===26일===
 
二十六日, 過寧海縣, 是日雨, 巡檢司對岸有越溪鋪,自鋪前舍舟乘陸,從溪岸而步,溪之通海口甚廣闊,不知其源之所從來,行過西洋嶺、許家 山,至市奥鋪,鋪中人體茶數棕,又行至白崎嶺,有軍卒二十餘人,擔轎來迎臣等,臣等八人,又乘過進士坊,至寧海縣之白崎驛,驛在縣治之中,有知縣姓唐者,供饋臣等,期至於飽,因乘轎冒雨而行,過桐山鋪、梅林铺、江淮嶺、紅寨鋪、海口鋪,其間有三大川、二大橋,亡其名,夜二更,至西店驛以信,驛有甲兵警成,如防禦所,
 
 
영해현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순검사의 건너편 언덕에 월계포(越溪鋪)196가 있었습니다.
 
 
월계포 앞에 배를 놓아두고 육지에 올라 시냇가의 언덕을 따라서 걸었습니다.
 
 
시내의 바다로 통하는 어귀는 매우 넓었는데 그 원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다가 서양령(西洋嶺) [https://www.google.com/maps/place/Xujiashan,+%ED%8E%91%ED%99%94+%EC%8B%9C+%EB%8B%9D%EB%B3%B4+%EC%8B%9C+%EC%A0%80%EC%9E%A5+%EC%84%B1+%EC%A4%91%EA%B5%AD/@29.6170731,121.2446341,14.17z/data=!4m5!3m4!1s0x344da2a82953392f:0x7ab21c203830f40!8m2!3d29.618012!4d121.262283 허가산(許家山)]<ref>[https://www.meipian.cn/1pzg3pog?share_from=self]</ref>을 지나서 시오포(市奧鋪)에 이르니, 포(鋪) 안의 사람이 차 몇 사발을 대접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백교령(白嶠嶺)에 이르니, 군졸 20여 인이 가마를 메고 와서 신 등을 맞이하였습니다.
 
 
신 등 여덟 사람은 또 가마를 타고 진사방(進士坊)을 지나서 영해현의 백교역(白嶠驛)197에 이르렀습니다.
 
 
역은 현치(縣治) 안에 있었습니다. 당(唐)이란 성을 가진 지현(知縣)198이 신 등에게 음식을 배부르게 먹였습니다.
 
 
가마를 타고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서 동산포(桐山鋪), 매림포(梅林鋪), 강격령(江__嶺), 항공포(__空鋪), 해구포(海口鋪)를 지났습니다.
 
 
그 중간에 큰 내 셋과 큰 다리 둘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잊었습니다.
 
 
밤 2경쯤에 서점역(西店驛)이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서점역에는 갑병(甲兵)202 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방어소(防禦所) 같았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의전
 
*제도(교통)
 
*인명
 
*지리
 
 
26th Day. Passing Ning-hai County. This day it rained.
 
 
On the shore opposite the police station was Yüeh-ch’i Stop [P’u]. We left the boat in front of the stop and went by land. We walked along the bank of the stream, the mouth of which, where it entered the sea, was very wide. I do not know the source from which it came. We crossed Hsi-yang Range and Hsü-chia Mountain and came to Shih-ao Stop. The people at the stop served us many cups of tea. We went on and reached Pai-ch'iao Range. Over twenty soldiers had come there carrying sedan-chairs to greet us. Eight of us riding again, we passed Chin-shih-fang and came to Pai-ch'iao Station [I] of Ning-hai County. The station was in the county seat, and the County Magistrate, T'ang, served us food. We ate enough to be full and then got into the sedan-chairs and went on, braving the rain. We passed T’ung-shan Stop, Mei-lin Stop, Chiang[chi?] Range, Kang-k’ung Stop, and Hai-k'ou Stop. In the interval there were three big rivers and two big bridges, the names of which I have forgotten. In the second watch of the night we came to Hsi-tien Station and put up there. The station was guarded like a defense point by armed men.
 
 
196 - 鋪 즉 急遞鋪는 공문을 遞送하기 위하여 연도에 설치한 기구로서 규모와 직능이 驛站보다 작았다. 중요한 일은 驛站, 사소한 일은 鋪를 이용하였다. 洪武26년의 규정에 의하면 10里마다 1鋪를 두었는데 鋪長은 1명, 鋪兵은 要路와 偏路에 따라 10명에서 45명 등이었다. 鋪兵은 부근의 丁力田糧이 15斗에서 2% 이하의 戶에서 點充하였다. 萬曆《明會典》권149, 兵部32, 驛傳五;《諸司職掌》 권5, 兵部 등 참조. 197. 즉 水馬驛은 공문의 遞送과 官物의 운송 및 왕래하는 관원이 잠시 쉬기 위한 곳으로 병부 소속이었다. 洪武元年 전국 각지에 水馬站과 急遞鋪를 둔 바 있는데 水馬站은 洪武9년에 水馬驛으로 바뀌었다. 馬驛은 衝要의 정도에 따라 所定의 馬驢를 구비했 고, 驛站 부근의 人戶를 馬夫로 點充하였다. 水驛도 정도에 따라 소정의 驛船과 水夫를 두어 대비하였다. 萬曆《明會典》권145, 兵部28, 驛傳一, 水馬驛上;《諸司職》 권5, 兵部 등 참조. 한편 白嶠驛은 縣治에서 서쪽으로 160步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 원래는 동으로 100보 거리에 이름도 迎恩이었는데 元 至正23년(1363)에 현재의 | 위치로 옮기면서 백교로 改名하였다. 崇禎《寧海縣志》 권2, 建置.
 
197.?
 
198. 弘治元年(1488) 寧海 知縣은 江(字는 景吳)으로 지방지의 名宮傳에 실려 있다.
 
당시에 이란 성을 가진 知縣은 찾을 수 없는데 姓氏 혹은 관직에 대한 최부의 착각이 있었던 듯하다. 崇禎《寧海縣志》 권2, 建置. 그렇지 않다면 다른 현의 知縣을 역임했거나 휴직으로 현지에 내려와 살던 唐이란 성을 가진 어떤 鄕紳을 지칭할 가능성도
 
199. 鋪에는 司 1명과 兵 4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하의 포도 동일하다. 崇禎《寧海縣志》 권2, 建置,
 
200. 治에서 40리의 거리에 있는 1窯얘를 가리키는 듯하다. 崇禎《寧海縣志》권2, 建置.
 
201. 봉화현치에서 남쪽으로 70리 거리인데 台州府 寧海縣과의 경계에 위치한다. 洪武 19년(1386) 信國公 湯和가 置하였고, 21년 驛丞을 두었다. 成化《寧波府志》권5, 佛字考, 한편 光緖《奉化縣志》 권2, 建置上에는 그 거리가 60리, 置한 연도는 홍무 20년으로 되어 있다.
 
202. 무장한 병사.
 
[[1월 26일.lst]]
 
 
===27일===
 
二十七日, 在西店驛, 是日大風大雨, 溪澗水漲, 不得已留于西店驛.
 
 
서점역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려서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하는 수습이 없이 서점역에서 묵었습니다.
 
 
27th Day. At Hsi-tien Station. This day there were high wind and heavy rain.
 
 
The stream was a flooding torrent. We had no alternative to staying at Hsi-tien Station.
 
 
*지명
 
*기후
 
*지리
 
 
[[1월 27일.lst]]
 
 
===28일===
 
二十八日, 到連山驛, 是日大雨, 霍勇謂臣曰:“我大唐法令嚴整,少有選緩,必致罪責,今雖大雨,不可復留,”勇之軍史及臣之從者,俱不欲,日:“今日雨大至,水溢洞壑,不可行.”勇曰:“洞壑滾水,滿而復除,且此驛支給,亦有限量,昨日之留,已為不可!”遂與臣等冒雨過圳墟鋪、拆開嶺、山隍鋪,又過大嶺、方門鋪,至雙溪鋪,鋪北有雙溪,溪水漲溢,人皆以衣而涉,經尚田鋪,止宿奉化縣之連山驛,縣距驛東二里,知縣姓名杜安也,驛丞見臣等雨透沾衣,肌寒帶粟,遂喂帽於堂前,臣及從者環坐親炙使自溫,有一人自外至,橫怒肆毒,跳踏帽相之火,臣等惧奔匿,勇及驛丞,俱被辱焉,勇謂臣曰:“外有一人說你是劫賊之人,阻當驛“官不要供給,我與他說汝是讀書君子,他復肆暴,你可寫狀,告他搶去衣包云云,呈于知縣.”臣曰:“彼人之惡,誠欲可懲,但以不見奪之物,為強奪,伏人非罪,甚悖於理,今足下護我等而來,治他以喝眾侵暴之罪,亦不為無辭,”勇即寫狀,送于縣官,
 
 
p.380
 
 
연산역(連山驛) 203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큰비가 내렸습니다.
 
 
적용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중국의 법령은 엄정해서 조금이라도 더디고 늦어지면 반드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지금 비록 큰비가 내리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의 군리(軍吏)와 신의 종자들이 모두 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려서 물이 계곡에 넘치므로 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이 말하기를, “계곡의 물은 가득 찼다가도 다시 줄어들고 또 이 역에서 지급하는 식량도 한정이 있으니, 어제 머문 것도 이미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신 등과 함께 비를 무릅쓰고 책허포(明墟鋪), 탁개령(拆開嶺), 산황포(山隍鋪)를 지나고, 또 대령(大嶺), 방문포(方門鋪)를 지나서 쌍계포(雙溪鋪)에 이르렀습니다.
 
 
쌍계포 북쪽에 쌍계(雙溪)가 있는데 시냇물이 불어 넘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옷을 입은 채 건넜습니다.
 
 
상전포(尙田鋪)를 지나서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A0%80%EC%9E%A5+%EC%84%B1+%EB%8B%9D%EB%B3%B4+%EC%8B%9C+%ED%8E%91%ED%99%94+%EC%8B%9C/@29.3513424,121.2103503,9.6z/data=!4m5!3m4!1s0x344d9a928a40f07b:0x61ab05ee01c7d990!8m2!3d29.655143!4d121.406995 봉화현(奉化縣)]<ref>[https://www.yna.co.kr/view/AKR20150812121100805 웅장한 계곡과 장제스 고향을 품은 시커우현, YTN, 2015.08.14]</ref><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D1DW&articleno=16538548&categoryId=774151&regdt=20150122150900]</ref><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schina&logNo=22103031368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의 연산역에서 유숙하였습니다.
 
 
현은 역 동쪽으로 2리쯤 떨어져 있었습니다.
 
 
지현의 성명은 두안(杜安)204이었습니다.
 
 
역승(驛丞)205은 신 등이 옷이 비에 젖어서 소름이 돋은 것을 보고 건물 앞에서 나무 등걸을 불태워 주었습니다.
 
 
신과 종자들은 빙 둘러앉아 불을 쬐어 온기를 취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마구 화를 내며 등걸불을 차고 짓밟았습니다.
 
 
신 등은 두려워서 달아나 숨었지만, 적용과 역승은 욕을 당하였습니다.
 
 
적용이 신에게 말하기를,
 
 
“밖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해적이라고 말하면서, 역관(驛官)이 지급해 주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습니다.
 
 
내가 그에게 저 분은 글을 읽는 군자라고 말했지만 저 사람은 여전히 횡포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 자가 의복을 빼앗아 갔다는 등의 내용으로 고소장을 써서 지현에게 바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저 사람의 나쁜 짓은 진실로 징계하고 싶지만, 빼앗긴 물건이 없는데도 빼앗겼다고 무고하여 남을 부당한 죄로 덮어씌우는 일은 매우 도리에 어긋납니다. 지금 족하는 우리를 호위해 왔으니 대중을 공갈하고 폭행한 죄로 저 자를 다스린다 해도 말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적용은 곧 고소장을 작성하여 지현에게 보냈습니다.
 
 
*기후
 
*지명
 
*행정(국법)
 
*지리
 
*인명
 
*사회(인심)
 
*사회(왜적)
 
*유학
 
*심리(정의)
 
*행정(고소장)
 
 
 
28th Day. Arrival at Lien-shan Station. This day it rained hard.
 
 
Chai Yung said to me, “The laws of China are strict; if there is the slightest delay, it will bring punishment upon us. It is raining hard now, but we cannot stay longer.”
 
Neither Chai Yung's military officers nor my own staff were willing to go. They said, “The rain today is extremely heavy, and the water is overflowing the gorge. We cannot go.”
 
Chai Yung said, “The waters of the gorge are in flood, but they will recede. The supplies of this station, moreover, are limited. Yesterday's [unscheduled] stay has already strained its resources.” With that he went with us into the rain, (past Shan-hsü Stop, Shang-t'ien Stop, and beyond].
 
We stopped at Lien-shan Station in Feng-hua County. The county seat was two li east of the station, and the County Magistrate was named Tu An.49 The Station Master saw that the rain had soaked through our clothing and that the cold had raised goose flesh on our bodies. He then had stumps kindled in a hollow in front of the main hall, and I and my staff sat in a ring close to the coals to warm ourselves. A man came from outside and, surly and malicious, kicked and trampled on the stump fire. We were frightened and ran for cover.
 
Both Chai Yung and the Station Master were humiliated by him. Chai Yung said to me, “This man, having been told by someone that you were bandits, did not want the station officials to give you supplies. I explained to him that you are a well-read gentleman, but he was still enraged. You may write a deposition saying that he took away your clothes, packages, and so forth, and present it to the County Magistrate.”
 
I said, “I certainly want the man's wickedness to be punished, but to accuse him falsely of seizing what has not been seized and to bring the man down for something of which he is not guilty, is highly contrary to justice. You, now, have come to protect us; it would not be unreasonable for you to handle the man by accusing him of assault.” Chai Yung then wrote a deposition and sent it to the county officials.
 
 
 
203. 봉화현 현치의 동쪽으로 5리 거리의 寧海縣과의 경계에 위치한다. 唐代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개명 끝에 明 洪武12년(1379)에 연산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成化《寧波府志》권5, 字考; 光緖《奉化縣志》권10, 兵制 등 참조.
 
204. 吏員 출신으로 南康人인 두안은 당시 知縣이 아니고, 봉화현의 縣丞이었다. 최부가 지현으로 착각한 것이다. 光緖《奉化縣志》권16, 職官表上.
 
205. 각 州縣의 驛站에 설치한 未之流 즉 從品 이하의 관리이다. 驛站의 郵傳, 車馬, 儀杖, 迎送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1월 28일.lst]]
 
 
===29일===
 
二十九日,過寧波府,是日雨,勇與臣等乘轎過大川,川畔有佛字,極華麗,前有五浮圖雙大塔,又過虛白觀、金鍾鋪、南渡鋪,至廣濟橋,橋跨大川,橋上架屋,橋長可二十餘步,橋所在之地,即寧波府界,舊為明州時所建也,又行至三里有大橋,橋之北有進士里,又行至十餘里,又有大橋,橋上亦架屋,與廣濟橋同而差小,忘其名,橋之南有文秀鄉,又過常浦橋,至北渡江,乘小而渡,自牛頭外洋西北至連山驟,幫宰列恤,糾紛繚繞,溪澗嚴壁,村錯亂.至此江則平郊廣野,一望豁如,但見遠山如眉耳,江之北岸築一壩,即挽丹上過之處,壩之北築堤臺江,有鼻居繞岸列泊,勇引臣等乘其舶,過石橋十三,行二十餘里,江之東堤,閱撲地,其西南望有四明山,山西南連天台山,東北連會稽、秦望等山,即賀知章少時所居也,掉至寧波府城,截流築城,城皆重門,門皆重層,門外重城,水溝亦重,城皆設虹門,門有鐵局,可容一船,(掉)「掉」入城中,至尚書橋,橋內江廣可一百餘步,又過惠政橋、社稷壇,凡城中所過大橋,亦不止十餘處,高宮巨室,夾岸聯絡,紫石為柱者,殆居其半,奇觀勝景,不可彈錄,掉出北門,門亦與 門同,城周廣狹不可知,府治及寧波衛、鄞縣治及四明驛,俱在城中,至過大得橋, 橋有三虹門. 雨甚, 留泊江中.
 
 
영파부(寧波府)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적용과 신 등이 가마를 타고 큰 내를 건넜습니다.
 
 
냇가에 절이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습니다.
 
 
앞에는 다섯 개의 부도(浮圖)와 두 개의 큰 탑이 있었습니다.
 
 
또 허백관(虛白觀), 금종포(金鐘__), 남도포(南渡鋪)를 지나서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uv486&logNo=220125269610&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광제교(廣濟橋)]209에 이르렀습니다.
 
 
광제교는 큰 내에 걸쳐 있었는데 다리 위에는 지붕을 얽었고 다리의 길이는 20여보(步)나 되었습니다.
 
 
다리가 있는 땅이 곧 영파부의 영역이니 옛날 명주(明州)였을 적에 세운 것입니다.
 
 
또 3리를 가니 큰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의 북쪽이 진사리(進士里)였습니다.
 
 
또 10여 리를 가니 다시 큰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 위에는 지붕을 얽었고 광제교와 같으면서 조금 적은 편인데 그 이름은 잊었습니다.
 
 
다리의 남쪽에 문수향(文秀鄕)이 있었습니다.
 
 
또 상포교(常浦橋)를 넘어 [http://blog.sina.cn/dpool/blog/s/blog_15a6abb780102yik6.html?md=gd&wm=3242_9002 북도강(北渡江)]<ref>[http://blog.sina.com.cn/s/blog_4b1644820100mhwu.html]</ref>에 이르러 작은 거룻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우두 앞바다에서 서북쪽으로 연산역에 이르기까지는 뭇 산들의 죽 늘어선 산봉우리가 어지러이 둘러싸여 있고, 시내와 암벽이 서로 얽히고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 강에 이르니 평평하고 넓은 들이 넓게 트여 있고, 다만 먼 곳에 있는 산들이 눈썹처럼 보일 뿐이었습니다.
 
 
강의 북쪽 언덕에 방죽 하나를 쌓았으니, 방죽은 곧 배를 끌어 올려서 지나가게 하는 곳이었습니다.
 
 
방죽의 북쪽에 제방을 쌓고 강을 파서 작은 거룻배가 강가를 둘러 죽 늘어서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적용이 신 등을 이끌어 그 거룻배를 타고 석교(石橋) 열 셋을 지나 20여 리를 갔습니다.
 
 
강의 동쪽 제방에는 민가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서남방에는 [http://www.mafengwo.cn/poi/4094901.html 사명산(四明山)]<ref>[http://travel.sina.com.cn/news/2015-11-16/1143317813.shtml 사명산]</ref><ref>[https://www.google.com/maps/place/Siming+Shan/@29.6351115,120.9745195,14.46z/data=!4m5!3m4!1s0x344db17e4932ed1f:0x4fcab44c4f63b221!8m2!3d29.635842!4d120.989414 사명산 지도]</ref>이 보였습니다.
 
 
산의 서남쪽으로는 천태산에 연해 있고, 동북쪽으로는 회계산(會稽山)<ref>[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17690276]</ref><ref>[https://story.kakao.com/ch/cheongdokorea/EYhYv5Pd1w9 소흥주와 회계산]</ref><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schina&logNo=80204557475&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콰이지산]</ref><>[http://m.blog.daum.net/thddudgh7/16535459?np_nil_b=1 ]</ref><ref>[http://m.blog.daum.net/thddudgh7/16535459?np_nil_b=1 회계산의 치욕]</ref><ref>[http://yangco.net/bbs/board.php?bo_table=jung&wr_id=181&page=5]</ref><ref>[http://m.kdnews.co.kr/19225 월왕구천]</ref>, [https://baike.baidu.com/item/%E7%A7%A6%E6%9C%9B%E5%B1%B1/16514 진망산(秦望山)]<ref>[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381 양해의 ‘도림백낙천문답도(道林白樂天問答圖)’,법보신문, 2019.07.23]</ref> 등과 연해 있었으니 곧 [http://magupeople.blogspot.com/2011/07/659744.html 하지장(賀知章)]<ref>[https://news.joins.com/article/7938576 당시로 배우는 중국어 賀知章 回鄕偶書 (하지장 회향우서), 중앙일보, 2012.04.19]</ref><ref>[https://sinology.org/2019/03/06/365%EC%9D%BC-%ED%95%9C%EC%8B%9C-%ED%95%98%EC%A7%80%EC%9E%A5%E8%B3%80%E7%9F%A5%E7%AB%A0-%EA%B3%A0%ED%96%A5%EC%97%90-%EB%8F%8C%EC%95%84%EC%99%80%EC%84%9C%E5%9B%9E%E9%84%95%E5%81%B6%E6%9B%B8/ 365일 한시-하지장賀知章 고향에 돌아와서回鄕偶書
 
2019년 3월 6일]</ref><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5EkC&articleno=13659423&categoryId=725784&regdt=20111130030255 음중팔선가]</ref><ref>[http://nabizone.net/nara/sub2_5/1877]</ref>이 젊었을 때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노를 저어 영파부성(寧波府城)에 이르니 물을 가로막아 성을 쌓았는데 성은 모두 겹 문, 문도 모두 겹 층, 문 밖도 겹 성, 그리고 수구(水溝)213 또한 이중이었습니다.
 
 
성에는 모두 홍문(虹門)을 설치했는데 문에는 쇠 빗장이 있었고 배 한 척이 드나들 만하였습니다.
 
 
노를 저어 성안으로 들어가서 상서교(尙書橋)214에 이르니 다리 안의 강의 너비는 100여 보(步)였습니다.
 
 
다시 혜정교(惠政橋)215와 사직단(社稷壇)을 지났습니다.
 
 
성안에서 지나간 큰 다리 또한 10여 곳이었고, 높고 큰 집들이 언덕 좌우에 죽 이어져 있었으며, 자석(紫石)으로 기둥을 만든 것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기이한 광경과 좋은 경치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노를 저어 북문으로 나오니 북문 또한 남문과 같았습니다.
 
 
성 주위의 둘레를 알 수 없었습니다.
 
 
부치(府治), 영파위(寧波衛), 은현(_縣)의 현치(縣治)와 사명역(四明驛)이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과대득교(過大得橋)에 이르니 다리에는 홍문 세 개가 있었습니다. 비가 세차게 내려 강에서 유숙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인명
 
*불교
 
*건축물
 
*토목
 
*역사
 
*기술
 
*제도(교통)
 
*고증
 
*풍경
 
 
29th Day. Passing Ning-po Prefecture [Fu]. This day it rained.
 
 
Chai Yung and we rode in sedan-chairs and crossed a large river. On the bank of the river was an extremely beautiful Buddhist temple, in front of which were five small pagodas and two big ones. Then we passed [from Hsü-pai-kuan to the Pei-tu River).
 
From Niu-t’ou-wai-yang northwest to Lien-shan Station, mountain peaks rose everywhere in clusters and ranges, some crossing others. Rushing streams and steep cliffs were scattered through them thickly. When we reached that river, flat, open lands and broad fields were apparent at a glance. We saw the distant mountains only as eyebrows. On the north shore of the river an embankment had been built, which was a place up over which boats were pulled. North of the embankment a levee had been built to canalize the river. Tenders were moored to the bank in a row.
 
Chai Yung led us into the boats, and we passed thirteen stone bridges and went more than twenty li. On the east levee of the river, village gates were everywhere. To the southwest we saw the Ssu-ming Mountains, adjoined to Mt. T'ien-t'ai in the southwest and to the K’uai-chi, Ch’in-wang, and other mountains in the northeast. It was where Ho Chih-chang had been when he was young: 50
 
We rowed up to the wall of Ning-po Prefecture. The wall was built across the stream, and all the gates of it were double and of two stories. Outside the gates was a second wall, and the moat, too, was double. All the gates of the wall were arched and had iron doors that would admit a single boat. We rowed inside the wall and came to Shang-shu Bridge. Beyond the bridge the width of the river was about five hundred feet. We passed Hui-cheng Bridge and Shechi-t'an. Altogether we passed more than ten big bridges in the town. I cannot record adequately the wonderfully beautiful sights. We rowed out the north gate, which was the same as the south gate. I do not know the circumference of the wall, but the prefectural capital, Ning-po Garrison, the seat of Yin County, and Ssu-ming Station were inside it.
 
We reached and passed Ta-te Bridge, which had three arches. It was raining extremely hard, and we moored for the night in the river.
 
 
206. 浮屠라고도 하는데 梵語 Buddha의 음역이다. 佛者와 승려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득도한 高僧이 죽은 뒤에 그 유골을 안치하여 세운 돌탑을 말한다.
 
207. 奉化縣의 동북에 위치한 道觀으로 舊名은 興唐觀인데 唐昭宗 時(889-903) 虛白으로 賜額받았다. 嘉靖《寧波府志》권18, 寺觀.
 
208. 봉화현치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舊名은 廣濟鋪이다. 成化《寧波府志》권5, 字考.
 
209. 春化縣 縣治에서 북으로 25리의 거리에 위치한다. 俗名은 南渡橋이다. 《寶慶四明》권14, 奉化縣志, 권1.
 
210. 明州는 唐 開元26년(738)에 두어졌는데, 宋 紹熙5년(1194)에 慶元府가 되었고, 元代에는 慶元路로 바뀌었다가 明初에 明州府가 되었지만 洪武14년(1381) 寧波府로 개칭되었다.
 
211. 四明의 鎭亭山에서 발원하며 舊名은 奉化江이다. 《浙江通志》권14, 山川, 寧波府, 奉化縣六下.
 
212. 唐나라의 시인으로, 어려서부터 文才로 이름을 떨친 會稽 출신의 하지장은 風流之士로도 유명하다. 만년에는 '四明狂客'으로 자칭하기도 했다. 695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太常博士, 禮部侍郞, 工部侍郞, 太子賓客을 거쳐 秘書監까지 지냈다. 만년에 관직을 버리고 도사가 되어 낙향했으나 곧이어 병사했다. 현종을 섬겼고, 시인 李白의 발견자로 알려졌으며, 그 자신도 호방한 성격으로 술을 좋아하여, 飮中八仙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작품에는 〈柳), 〈回鄕偶書〉 등이 있다. 《舊唐書》권190中, 列傳140, 文苑中; 嘉靖《寧波府志》권37, 傳13, 集異 등 참조.
 
213. 성을 빙 둘러 파놓은 해자 및 못을 가리킨다.
 
214. 乾隆《寧波府志》권7, 山川 上, 縣 上.
 
215. 봉화현 현치에서 동으로 3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舊名은 善勝 혹은 通세이다. 宋 乾德2년(964)에 처음 만들어졌다. 光緖《奉化縣志》권3, 建置下
 
 
[[1월 29일.lst]]
 
 
===2월 1일===
 
二月初一日,過慈溪縣,是日雨,經新清橋、進士鄉,至宋石將軍廟,廟大如官府,立雄表之門,自府城至此十餘里間,江之兩岸,市肆艦,全集如雲,過此後,松篁橙橘,夾岸成林,又過茶亭、景安鋪、繼錦鄉、俞氏貞節門,至西鎮橋,橋高大,所過又有二大橋,至西壩廳,壩之兩岸,築堤以石,斷流為壤,使與外江不得相通,兩傍設機械,以竹編為纜,乾舟而過,至西(週)[嶼】鄉“之新堰,堰舊為利子港顏公堰,後塞港廢墟為田,導水東涯,至于廣利橋之南,置此壩,外捍江湖,乾濟官船,謂之新堰,藥與西壩同,至此又乾丹而過,過新橋、開禧橋、姚平處士之墓,至慈溪縣,掉入其中,有經元門、鍾英門、都堂里門、都憲橋、進士門、德星橋、寶峯門, 至臨 清亭前,少停舟,夜又诉江而北,至雞報泊于岸待曙,而問其江,則乃姚江也,江邊有驛,乃車底驛也,驛丞乃秦高也.
 
 
자계현(慈溪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신청교(新淸橋)와 진사향(進士鄕)을 지나서 송(宋)나라 석장군(石將軍)의 사당219에 이르렀습니다.
 
 
사당의 크기는 관부(官府)처럼 컸고, 정표(佐表)220하는 문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부성(府城)에서 이곳까지 10여 리 사이에 강의 양쪽 언덕에는 상점과 큰 배가 구름처럼 모여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난 뒤에는 소나무, 대나무, 등자나무, 귤나무가 언덕 좌우에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또 다정(茶亭), 경안포(景安鋪), 계금향(繼錦鄕), 유씨정절문(兪氏貞節門)을 지나서 서진교(西鎭橋)에 이르니 다리가 높고 컸습니다.
 
 
또 두개의 큰 다리를 지나갔습니다.
 
 
서파청(西鬪廳)에 이르니, 방죽의 양쪽 언덕은 돌로 제방을 쌓아, 물을 가로막아 보[堰]를 만들어 바깥 강과는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양쪽 옆에 기계(機械)를 설치하고 대로 만든 새끼로 밧줄을 만들어 배를 당겨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서여향(西嶼鄕)의 신언(新堰)에 이르니, 신언은 옛날 찰자항(刹子港)과 안공언(顔公堰)으로서 후에 찰자항을 막고 안공언을 없애어 전지(田地)를 만들고 물을 끌어 동쪽으로 합류시켜 광리교(廣利橋)의 남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방죽을 설치하여 밖으로 강호(江湖)를 막고 관선(官船)을 당겨 건너게 하고 이를 '''신언'''이라 불렀는데, 대개 서파(西__)와 같았습니다.
 
 
이곳에 이르러 또 배를 당겨 지나야 하였습니다.
 
 
신교(新橋), 개희교(開禧橋)222, 요평(姚平)223 처사(處士)의 무덤을 지나서 자계현(慈溪縣)에 이르렀습니다.
 
 
노를 저어 그 안으로 들어가니 경원문(經元門), 종영문(鍾英門), 도당리문(都堂里門), 도헌교(都憲橋)224, 진사문(進士門), 덕성교(德星 橋)225, 보봉문(寶峯門)이 있었고, 임청정(臨淸亭) 앞에 이르러 배를 잠시 멈추었습니다.
 
 
밤에 또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가서 닭이 울 무렵 언덕에 정박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강 이름을 물으니 바로 요강(姚江)226 이었습니다. 강가에 역(驛)이 있으니 거구역(車廢驛)227이고, 역승(驛丞)은 진고(秦高)였습니다.
 
 
*기후
 
*지명
 
*토목
 
*역사
 
*지리
 
*건축물
 
*식물
 
*기술
 
*언어(어원)
 
*시간
 
 
1st Day, Second Month. Passing Tz'u-ch'i County. This day it rained.
 
 
We passed [two places) and came to the Shrine of General Shih of the Sung Dynasty.51 The shrine was as big as a public office and had a gate with banners. From the wall of the prefecture to that place was over ten li. In that distance, on both banks of the river, markets and warships were gathered like clouds. After we had passed there, pines, bamboos, and citrus and orange trees lined the banks in groves.
 
[We went on to Ch'e-chiu Station.]
 
 
219. 石將軍廟는 宋의 장군 石守信을 모신 사당으로 城의 서쪽 9리 거리의 望春橋 밖에 있다. 成化《寧波府志》권6, 祀典考.
 
220. 善行을 널리 드러내어 많은 사람이 알고 본받을 수 있도록 함.
 
221.《寶慶四明續志》권2, 郡面에廣利橋記)가 실려 있다.
 
222- 舊名은 夾田으로 慈溪縣 縣治에서 동남 방향으로 3리 거리이다. 驛路 왕래의 요충에 해당된다. 皇祐2년(1057)에 만들어지고, 紹興8년(1138)에 중건되었다. 開禧元年(1205) 知縣 趙希觀이 크게 확충하면서 연호를 따서 改名하였다. 《寶慶四明續志》권16, 慈溪縣志第一敘縣橋梁,
 
223. 後漢 사람으로 焦延壽의 易을 京房으로부터 전수받고 郞博士가 되어 京氏의 학문을 전한 인물.
 
224. 일명 御史橋라고도 하는데 자계현 현치에서 동남 방향으로 45리의 거리에 위치한다. 嘉靖《寧波府志》 권5, 山川; 成化《寧波府志》 권4, 固里考 등 참조.
 
225. 慈銘縣 縣治에서 서남 방향으로 1리 반의 거리에 있다. 원래는 大寶山과 가깝다고 하여 大寶橋라 했는데 開禧2年(1206) 知縣 趙希觀이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明洪武18년(1385)에 重建되었다. 《浙江通志》권35, 關梁三, 慈谿縣.
 
226. 姚縣 縣治의 남쪽에 있다. 潮水가 200여 리를 오르내리지만 강물이 짜지 않다고 한다. 舜江이라고도 한다. 《明一統志》 권45, 紹興府, 山川.
 
227. 府城에서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慈溪縣의 石臺鄕에 위치한다. 元 至元연간에 설치되었다. 成化《寧波府志》권5, 字考; 《浙江通志》 권88, 驛傳上, 慈谿縣 등 참조.
 
[[2월 1일.lst]]
 
 
===2일===
 
初二日,過餘姚縣,是日陰,早發船湖西北而上,江山高大,郊野平鋪,人煙稠密,景物萬千,日夕過五靈廟、驛前鋪、姚江曙、江橋,至餘姚縣,江抱城而西,有聯錦鄉曹墅橋,橋三虹門,又過登科門、張氏光明堂,夜三更到下新壩,壩又與前所見新堰同,又乾舟過壩,經一大橋,有大樹數十株,列立江中,將曙到中壩,壩又與下新壩同,又乾丹逆上江,即上虞江也.
 
 
여요현(餘姚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아침 일찍이 배를 출발시켜 서북방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강과 산은 크고 높았고 들판은 평평하게 펼쳐 있으며 인가는 빽빽하고 경치는 천태만상이었습니다.
 
 
저녁에 오령묘(五靈廟), 역전포(驛前鋪), 요강역(姚江驛)228, 강교(江橋)229를 지나서 여요현에 도착하였습니다.
 
 
강이 성을 안고 서쪽으로 흐르니 연금향(聯錦鄕)의 조서교(曹__橋)가 있었는데 다리에는 홍문(虹門) 세 개가 있었습니다.
 
 
또 등과문(登科門)과 장씨광명당(張氏光明堂)을 지나 밤 3경에 하신파(下新婦)에 이르니 하신파도 또한 앞서 본 신언과 같았습니다.
 
 
또 배를 당겨 하신파를 지나 큰 다리를 지나니, 큰 나무 수십 그루가 강 가운데에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때 중파(中__)에 이르니 중파 또한 하신파와 같았습니다.
 
 
또 배를 당겨 거슬러 강으로 올라가니 곧 상우강(上虞江)이었습니다.
 
 
*기후
 
*시간
 
*풍경
 
*토목
 
*건축물
 
*기술
 
*식물
 
*지리
 
 
 
2nd Day. Passing Yü-yao County. This day was cloudy.
 
 
We started early, the boats going upstream to the northwest. The rivers and mountains were big, the fields broad, and the settlements thick. The scenes of beauty were innumerable. [We went from Wu-ling Shrine by way of Yü-yao County to the Shang-yü River.]
 
 
 
228.《餘姚縣志》권4, 公.
 
229. 紹興府城에서 동북으로 약 2리의 거리이다. 萬曆《紹興府志》권8, 山川.
 
 
[[2월 2일.lst]]
 
 
===3일===
 
初三日,過上虞縣,是日晴,過二大橋而上,江之南有官人乘轎而來,乃上虞知縣,自縣來也,縣距江岸二三里許,又過黃浦橋、華渡鋪、蔡墓鋪、大板橋、步青雲門、新橋鋪,至曹娥睾,睾丞,徐深也. 睾北有壩. 舍舟過壩, 步至曹娥江亂流而渡,越岸又有壩,壩與梁湖巡檢司,南北相對,又舍舟過壩而步西二里至東關譯,復乘船過文昌橋、東關鋪、景靈橋、黃家堰鋪、
 
p.382
 
瓜山鋪、陶堰鋪、(弟)(茅】洋鋪,夜四更,至一名不知江岸留泊.
 
 
상우현(上虞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큰 다리 둘을 지나 올라갔습니다.
 
 
강 남쪽에서 어떤 관인이 가마를 타고 왔는데 바로 상우지현(上虞知縣)230이 현성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상우현성은 강 언덕에서 2-3리가량 떨어져 있었습니다. 또 황포교(黃浦橋), 화도포(華渡鋪), 채묘포(蔡墓鋪), 대판교(大板橋), 보청운문(步靑雲門), 신교포(新橋鋪)를 지나 조아역(曹娥驛)에 이르렀는데 역승은 서심(徐深)이었습니다.
 
 
역 북쪽에 방죽이 있었습니다. 배를 놓아두고 방죽을 지나 도보로 조아강(曹熊江)에 이르러 강을 가로질러 건넜습니다.
 
 
건너편 언덕에 또 방죽이 있었습니다.
 
 
방죽과 양호순검사(梁湖巡檢司)는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또 배를 놓아두고 방죽을 지나 서쪽으로 2리를 걸어서 동관역(東關驛)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배를 타고 문창교(文昌橋), 동관포(東關鋪), 경령교(景靈橋), 황가언포(黃家嘎鋪), 과산포(瓜山鋪), 도가언포(陶家堰鋪), 모양포(茅洋鋪)를 지났습니다.
 
 
밤 4경233에 이름을 모르는 강기슭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제도(교통)
 
*토목
 
*인명
 
*시간
 
 
3rd Day. Passing Shan-yü County. This day was fair.
 
 
We went upstream past two big bridges. On the south side of the river, an official came riding in a sedan-chair. He was the Magistrate of Shan-yü County and he came from the county seat, which was two or three li from the bank of the river.
 
We then passed [more bridges, stops, and a gate and] came to Ts'ao-ê Station, where the Station Master was Hsü Shen. An embankment was north of the station. We left the boats, passed the embankment, walked to the Ts'ao-ê River, and went straight across it. On the opposite bank was another embankment, which faced the Liang-hu Police Station north to south. Again we left the boats and walked past the embankment, coming to Tung-kuan Station, two li to the west. We got into boats again and [proceeded past several stops]. In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 we reached the bank of a river,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nd moored for the night.
 
 
230. 成化22년(1486)에서 弘治2년(1489)까지 상우지현을 역임한 자는 吳縣人 會機이다. 萬曆《紹興府志》 권26, 職官.
 
231. 曆《紹興府志》권7, 山川志 4, 海河江湖.
 
232. 上虞縣 百官市 남측의 百官驛이 梁湖巡檢司로 바뀌었다. 《浙江通志》 권89, 傳下上虞縣.
 
233.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
 
[[2월 3일.lst]]
 
 
===4일===
 
初四日,到紹興府,是日晴,撑鑑水而上,水自鏡湖一派來繞城中,日出時到紹興府,自城南派鑑水,而東北過昌安鋪,(掉)[悼]入城,城有虹門,當水口,凡四重,皆設鐵局,過有光相橋等五大橋及經魁門、聯桂門、(枯)佑聖觀”、會水則碑,可十餘里許有官府,霍勇引臣等下岸,其闖間之繁,人物之盛,三倍於寧波府矣,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黃宗、巡視海道副使吳文元、布政司分守右參議陳潭,連坐于激清堂北壁,兵甲答枚,森列於前,置一卓,引臣至卓邊,西向而立,問以臣之姓名、所住之鄉、所签仕之官、所漂風之故、所無登劫之情狀、所資器械之有無,臣答以答把總宫之辭,却添載下山逢賊、仙嚴遇杖之事,所賣行李,又添馬鞍一部,三使相徐謂臣曰:“供辭有違,汝實有罪,汝宜膽寫前辭,無一字加减云云,臣便寫之,三使相又謂臣曰:“他日你到杭州,鎮守太監、矫衣、三司大人,到北京,兵部、禮部,亦更問汝情,其亦以是答之,少有相違,大不可也.”又問曰:“初以汝類為倭船劫掠,將加捕戮,汝若是朝鮮人,汝國歷代沿革、都邑、山川、人物、俗尚、祀典、喪制、戶口、兵制、田賦、冠裳之制,仔細寫來,質之諸史,以考是非,”臣曰:“沿革、都邑,則初檀君與唐堯並立,國號朝鮮,都平壤,歷世千有餘年,周武王封其子于朝鮮,都平壤,以八條教民,今國人以禮義成俗始此,厥後燕人衛滿,亡命入朝鮮,逐算子之後獲準,準奔馬韓以都焉,其間或為九韓,或為二府,或為四郡,或爲三韓,年代久遠,不能盡述,至西漢宣帝時,新羅朴氏初立國,高勾麗高氏、百濟扶餘氏相繼而起,三分舊朝鮮之地,新羅據東南界,都慶州,高勾麗據西北界,都遼東,都平壤,又屢遷廠邦,忘其地,百濟據中西南界,都稷山,都廣州,都漢陽,都公州,都扶餘,當唐高宗朝,新羅文武王與唐兵滅高勾麗,又滅百濟,合三國為一,後甄萱叛據全州,弓裔叛據鐵原,高麗王氏,功高德
 
盛,國人推戴,弓裔自霾,甄莹自投,新羅王封府庫,籍郡縣來降,再合三國,都開城,傳世幾五百年,今革為我朝鮮,都漢陽,盖將百年于兹矣,山川則長白山在東北,一名白頭山,横亘千餘里,高二百餘里,其顯有潭,周八十餘里,東流爲豆滿江,南流爲鴨綠江,東北流為速平江,西北流為松花江,松花下流,即混同江也,妙香山在北,金剛山在東,有一萬二千餘宰,智異山在南,九月山在西,右四山極高峻,多奇蹟,三角山,即國都鎮山,大同江、薩水、臨津渡、漢江、洛東江、熊津、豆恥津、榮山津,已上川之大者,人物則新羅金庾信·金陽·崔致遠·薛聰、百濟階伯、高句麗乙支文德、高麗崔冲·姜邯贊·趙冲·金就礁·禹悼·鄭夢周、我朝鮮不可歷數,俗尚則尚禮義,明五倫,重儒術,每春秋行養老宴、鄉射禮、鄉飲(p.384)酒禮,祀典則社稷、宗廟、__釋、諸山川,刑制從大明律,喪制從朱子《家禮》,冠裳華制,戶口、兵制、田賦,我以儒臣未知其詳.”又問曰:“所謂推刷人丁,何事?”臣曰:“濟州在大海中,水路甚險甚遠,凡有犯罪者,皆逃入以避,久為逃之數,故往刷之,”又問曰:“濟州距我中國幾里?”臣虛張水路之遠曰:“不可知其詳也,大抵船遇便風於大海,則日可行千里,今我自濟州浮海,折畫夜則凡二十九日,為大風所驅,疾行如飛,到泊于中國海岸,則自中國距濟州路,大樂數萬餘里矣.”又問曰:“汝國與我朝廷相距遠近幾何?”臣曰:“傳聞自我國都過鴨綠江,經遼東城,抵 皇都,三千九百有餘里.” 總兵官三使相,即饋臣以茶果,仍書單(字)(子)”以賜,單(字)(子]50中:“送崔官禮物,猪肉一盤、鵝二隻、鍋四翼、魚二尾、酒一縛、米一盤、胡桃一盤、菜一盤、第一盤、麵筋一盤、索一盤、荳腐一盤,”又賜釀粮等物于陪史軍人有差,臣即做謝詩再拜,三使相亦起,答禮致恭,又謂臣曰:“看汝謝詩,此地方山川,汝何知之詳?必此地人所說:”臣曰:“四顧無親,語音不通,誰與話言?我嘗閱中國地圖,到此腹記耳,”對畢,臣與三四宫人,拱立卓邊,有勇之軍史一人在外頭,毆打臣之從者金都終有傷,臣寫以示諸官人,一官人奔告于總兵官,總兵官拿其毆打人,治罪杖之,又杖勇以不能駛下之罪,臣等退,復沿湖掉出城外,過迎恩橋,至蓬萊驛前留泊.夕,知府姓周及會稽、山陰兩縣官,皆優送糧餵.
 
 
即下把忽官所報狀以示臣, 日:“是何供辭前後詳略不同乎?”臣曰:“把稳官初,只答以漂流到泊之情,今日布政三司更問,詳舉遇賊等事耳!”三使相-->제자리 찾을 것!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A0%80%EC%9E%A5+%EC%84%B1+%EC%82%AC%EC%98%A4%EC%8B%B1+%EC%8B%9C/@29.8462623,120.5381329,8.25z/data=!4m5!3m4!1s0x344c42f9ba150bdb:0x1859ede150b9ddce!8m2!3d29.995762!4d120.586109 소흥부(紹興府)] 도착하였습니다.
 
 
**황주, 소흥주
 
**루쉰
 
**화가 서위
 
**주은래
 
 
이 날은 맑았습니다.
 
 
감수(鑑水)로 노를 저어 올라갔습니다.
 
 
물은 경호(鏡湖)234의 한 갈래로부터 와서 성안을 둘렀습니다.
 
 
해 뜰 무렵 [http://kr.people.com.cn/207554/209660/index.html 소흥부]<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TvLM&articleno=1034&categoryId=16&regdt=20150115081738 당시의 길(당시지로) 시작은 소흥(紹興 샤오싱) 에서]</ref><ref>[https://4travel.jp/travelogue/10922738]</ref><ref>[https://jp.123rf.com/photo_90897449_%E7%B4%B9%E8%88%88%E5%B8%82%E3%81%AE%E5%8F%A4%E4%BB%A3%E3%81%AE%E9%80%9A%E3%82%8A.html 写真素材 - 紹興市の古代の通り]</ref><ref>[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2981066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난정(蘭亭)의 공간 구성 및 유상곡수(流觴曲水) 고찰]</ref>에 도착하였습니다.
 
 
성 남쪽에서부터 감수를 거슬러 올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창안포(昌安鋪)를 지나 노를 저어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에는 홍문이 수문(水門)의 구실을 하고 있었으며 네 겹으로 되었는데 모두 쇠로 만든 문짝을 설치하였습니다.
 
 
광상교(光相橋) 등 큰 다리 다섯과 경괴문(經魁門), 연계문(聯桂門), 우성관(佑聖觀), 회수칙비(會水則碑) 등을 거쳐서 10여 리쯤 가니 관부(官府)가 있었습니다.
 
 
적용은 신 등을 이끌고 기슭에 내리니, 그 저자의 번화함과 인구의 많음은 영파부의 3배나 되었습니다.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235 황종(黃宗),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236 오문원(吳文元), 포정사분수우참의(布政司分守右參議)238 진담(陳潭)239 이 징청당(淸堂)240 북벽(北壁)에 죽 늘어앉았는데, 병갑(兵甲), 태장(杖)이 그 앞에 삼엄하게 늘여져 있고 탁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신을 인도하여 탁자 옆에 이르러서 서쪽을 향해 서게 하였습니다.
 
 
신의 성명, 살던 지방, 역임한 관직, 그리고 표류하게 된 까닭, 상륙하여 약탈한 일이 없었는지의 정상, 가지고 온 무기가 있는지 없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신은 파총관에게 답하던 말로 답하고 난 뒤 하산에서 해적을 만나고, 선암에서 몽둥이를 맞았던 일을 더 보태고, 가져온 행장에는 말안장 1벌을 또 첨가하였습니다.
 
 
세 사상(使相)242 은 곧 파총관이 보고한 문서를 내어 신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공술서의 앞뒤의 상세함과 간략함이 같지 않소?”라고 하였습니다.
 
 
“파총관이 처음 심문할 적엔 표류하여 정박하게 된 사정만을 답했을 뿐이었고, 오늘 포정삼사(布政三司)243가 다시 심문하시니 해적을 만났던 일 등을 상세히 거론했던 것입니다.”
 
 
세 사상은 모두 신에게 천천히 말하기를,
 
 
“공술서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당신에게 실로 죄가 되오. 당신은 마땅히 앞서 쓴 말을 베껴 쓰되 한 글자도 가감이 없어야 하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신은 곧 베껴 썼습니다.
 
 
세 사상은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다음날 당신이 항주(杭州)에 도착하면 진수태감(鎭守太監)244 ·수의(誘衣)245 삼사(三司)의 대인(大人)246께서, 북경에 도착하면 병부(兵部)와 예부(禮部)에서 다시 당신의 사정을 물을 것이니 그 때에도 또한 이대로 답해야 하오. 조금이라도 서로 어긋나면 절대로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처음에는 당신들을 왜선(倭船)을 타고 와서 겁략하는 무리들이라고 여겨, 잡아다 죽이려고 했소. 당신이 만약 조선인이라면 당신 나라의 역대 연혁과 도읍 산천 · 인물·속상(俗尙) 247. 사전(祀典)248. 상제(喪制)·호구(戶口)·병제(兵制)·전부(田賦)·관상(冠裳)의 제도를 자세히 써 내면 여러 사서(史書)에 맞추어 보고 옳고 그름을 가리도록 하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진술했습니다.
 
 
“연혁과 도읍은 처음에 단군(檀君)249께서 당요(唐堯)<ref>[(조, p. 287)최부는 동국통감 단군조선 대목에서 "단군의 즉위가 중국의 요임금보다 25년 뒤진다. 옛 기록의 '요와 더불어 함께 즉위했다'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했다.]</ref>와 같은 시대에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평양(平壤)<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11825/1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2013년 02월호]</ref><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95557.html “고구려 후기의 도읍 평양의 진짜 위치 탐구중입니다”, 한겨레신문, 2015.06.11]</ref><ref>[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63 北신문이 전한 `평양`이란 지명의 유래, 연합뉴스, 2001.12.27]</ref><ref>[https://www.yna.co.kr/view/AKR20090716206700005 "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2009.07.17]</ref>에 도읍을 정하여 세대(世代)를 천여 년이나 지냈습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250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고, 평양에 도읍하여 8조252로 백성을 가르쳤으니, 지금 나라 사람들이 예의(禮義)로 풍속을 이룸이 이때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253이 망명하여 조선에 들어와서 기자의 후손인 기준(箕準)254을 내쫓으니 기준은 마한(馬韓)으로 달아나서 그 곳에 도읍을 정하였습니다.
 
 
그 중간에 구한(九韓)255이 되기도 하고, 이부(二府)256가 되기도 하고, 사군(四郡)257이 되기도 하고, 삼한(三韓)258이 되기도 했는데, 연대가 멀고 오래되었으므로 다 기술할 수 없습니다.
 
 
전한(前漢)의 선제(宣帝)259 때에 이르러 신라(新羅)의 박씨(朴氏)260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高句麗)의 고씨(高氏)와 백제(百濟)의 부여씨(扶餘氏)가 서로 잇달아 일어나서 옛 조선 땅을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신라는 동남지방을 점거하여 경주(慶州)에 도읍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서북 지경을 점거하여 요동(遼東) 그리고 평양에 도읍했으며, 또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겼는데 그 지명은 잊었습니다. 백제는 중부의 서남지역을 점거하여 직산(稷山)에 도읍 했다가 뒤에 광주(廣州), 한양(漢陽), 공주(公州), 부여(夫餘)에 도읍하였습니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 때에 와서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이 당군(唐軍)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ref>[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6 고구려 영토도 축소시킨 중국인들, 아틀라스뉴스, 2019.07.28]</ref>, 또 백제도 멸망시켜 삼국을 통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뒤에 견훤(甄萱)262이 반란을 일으켜 전주(全州)를 점거하고, 궁예(弓裔)263가 반란을 일으켜 철원(鐵原)을 점거했으나, 고려(高麗)의 왕씨(王氏)264가 공적이 높고 덕망이 많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추대하니, 궁예는 스스로 도망했고 견훤은 스스로 항복했으며, 신라왕은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장부에 기재하여 와서 항복했으니, 재차 삼국을 통합하여 개성(開城)에 도읍하고 대대로 전한 지 거의 500년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 조선으로 바뀌어, 한양에 도읍한 지 약 100년이 됩니다.
 
 
산천은, 장백산(長白山)은 동북방에 있는데 백두산(白頭山)이라고도 합니다. 가로는 천여 리 뻗쳤고 높이는 200여 리 되는데 그 산꼭대기에 못이 있어 둘레가 80여 리 됩니다. 동쪽으로 흘러서 두만강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서 압록강(鴨綠江)이 되고, 동북으로 흘러서 속평강(速平江)이 되고, 서북으로 흘러서 송화강(松花江)이 되는데, 송화강 하류가 곧 혼동강(混同江)입니다. 묘향산(妙香山)은 북쪽에 있고, 금강산(金剛山)은 동쪽에 있는 데 1만2천여 봉우리가 있으며, 지리산(智異山)은 남쪽에 있고 구월산(九月山)은 서쪽에 있는데, 이상 네 산은 매우 높고 험하며 기이한 유적이 많습니다. 삼각산(三角山)은 곧 국도(國都)의 진산(鎭山)65입니다. 대동강(大同江)·살수(薩水)·임진도(臨津渡)·한강(漢江)·낙동강(洛東江)·웅진(熊 津)·두치(豆恥津) · 영산진(榮山津) 등은 큰 강입니다.
 
 
인물은 신라의 김유신(金碩信)266 . 김양(金陽)267. 최치원(崔致遠)268. 설총(薛聰)269, 백제의 계백(階伯)270 ,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271, 고려의 최충(崔沖)272. 강감찬(姜郡贊)273 . 조충(趙沖)274 김취려(金就順)275·우탁(禹悼)276 정몽주(鄭夢周) 그리고 우리 조선은 일일이 셀 수도 없습니다. 속상은 예의(禮義)를 숭상하고 오륜(五倫)을 밝히고 유술(儒術)을 존중합니다. 해마다 봄가을에 양로연(養老宴)278 향사례(鄕射禮)279.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합니다. 사전(祀典)은 사직(社稷)280, 종묘(宗廟)282,석전(釋奠)283과 여러 산천에 대한 제사가 있습니다. 형제(刑制)는 《대명률(大明律)》284에 따릅니다. 상제(喪制)는 주자(朱子)의 《가례》에 따릅니다. 관상(冠__)은 중화의 제도를 따릅니다. 호구(戶口), 병제(兵制), 전부(田賦)는 내가 유신(儒臣)이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을 모르겠습니다.”
 
 
*양저우(揚州)의 최치원 기념비 및 최치원 사료 진열실<ref>[http://m.blog.daum.net/sbo3166/11319999]</ref><ref>[http://m.gjnews.com/view.php?idx=25892]</ref>
 
 
“인정을 추쇄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오?”
 
 
“제주도는 큰 바다 가운데 있어 수로가 매우 험하고 멀기만 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들어가 피하여 오랫동안 도망범의 소굴이 되었으니, 그런 까닭에 가서 이들을 잡아 오는 것입니다.”
 
 
“제주도는 우리 중국과 거리가 몇 리나 되오?"
 
 
신은 수로가 먼 것을 부풀려서 말하기를,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대개 배가 큰 바다에서 순풍을 만난다면 하루에 천리도 갈 수 있는데, 지금 나는 제주도로부터 바다에 뜬 것이, 주야를 따져 본다면 무릇 29일이나 되며, 큰바람에 몰려서 나는 듯이 빨리 달려 중국의 해안에 도착 정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으로부터 제주도로 가는 길은 대개 수만 여 리나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당신 나라와 우리나라와의 거리가 얼마나 되오?”
 
 
“전해 듣기로는 우리나라 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을 지나 황도(皇都)285에 도착하자면 3천9백여 리나 된다고 합니다.”
 
 
총병관 등의 세 사상은 곧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고 이어서 단자를 써서 내려 주었습니다.
 
 
단자 속에는 “최관(崔官)에게 예물로 돼지고기 1쟁반, 거위 2마리, 닭 4마리, 물고기 2마리, 술 1동아리, 쌀 1쟁반, 호두 1쟁반, 채소 1쟁반, 죽순 1쟁반, 국수 1쟁반, 대추 1쟁반, 두부 1쟁반을 보냄”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또 반찬과 식량 등 물품을 배리(陪吏)와 군인에게 차등있게 내려주었습니다.
 
 
신은 곧 사례하는 시를 지어 두 번 절하니 세 사상들도 일어나 공손스레 답례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사례하는 '''시를 보건대 이 지방 산천을 어찌 그리도 자세히''' 알고 있소? 이는 필시 이곳 사람이 말해 준 것이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탐라시'''
 
 
"사방을 돌아봐도 친한 사람이라곤 도무지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데 누구와 얘기하겠습니까? 내가 일찍이 중국의 지도를 훑어보았기 때문에 이곳에 도착하여 기억나는 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답을 마치고 나서, 신은 서너 명의 관인들과 함께 탁자 가에 두 손을 마주잡고 서 있었습니다.
 
 
적용의 군리(軍吏) 한 명이 밖에 있다가 신의 종자인 김도종을 구타하여 상처를 입혔습니다.
 
 
신은 이 사실을 글로 써서 여러 관인들에게 보였더니 한 관인이 달려가서 총병관에게 알렸습니다.
 
 
총병관이 구타한 사람을 잡아와서 죄를 다스려 곤장을 치고 또 적용에게 부하를 통솔치 못한 죄로 곤장을 쳤습니다.
 
 
신 등은 물러 나와 다시 호수를 따라서 노를 저어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영은교(迎恩橋)를 지나 봉래역(蓬驛)286 앞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저녁에 지부(知府) 주(周)287라는 사람과 회계현, 산음현 두 지현(知縣)288이 모두 식량과 반찬을 넉넉히 보내주었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시간
 
*토목
 
*인명
 
*사회
 
*행정
 
*제도(관직)
 
*역사-조선
 
*지리-조선
 
*인명-조선
 
*유학-조선
 
*행정-조선
 
*모화
 
*언어-조선
 
*풍습(음식)
 
*유학
 
*심리(긍지,자긍심,과장)
 
*사건
 
*의전
 
 
4th Day. Arrival at Shao-hsing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We poled into the Chien River and went upstream. The river came as a branch from Lake Ching, meandering round and through towns. At sunrise we reached Shao-hsing Prefecture. From south of the wall we went up the Ching River, first east and then north, passed Ch’ang-an Stop, and rowed inside the wall. The wall had an arched gate just at the mouth of the river. [The gate] was quadruple, and in each [section] an iron door was hung, through which we passed. There were Kuang-hsiang Bridge, four other big bridges, Ching-k’uei Gate, Lien-kuei Gate, Yu-sheng-kuan, and a hydrographic marker.
 
When we had gone about ten li, there was a public office, and Chai Yung led us on to the bank. The profusion of gates and crowds of people were three times as great as those of Ning-po Prefecture. Supreme Anti-Japanese Commander and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Huang Tsung, Chekiang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the Maritime Circuit Wu Wenyüan, and Right Assistant Administration Commissioner Ch'en T’an, sat in a row along the north wall of the Ch'eng-ch'ing Hall.52 Arms, armor, and bamboo whips were massed like a forest in front of them. They had a table placed and summoned me to it; I stood facing west. They asked me my name, where I lived, what my position was, the circumstances of my being blown adrift, whether it was true that we had not pillaged, and whether we had implements with us. I answered with the answers I had given the Commander, but I added that we had met bandits at Hsia-shan and been beaten at Hsien-yen. To the [list of] baggage we had I also added one horse saddle.
 
The three high officials then handed down the Commander's report and showed it to me. They said, “Why are there discrepancies in certain details ?”
 
I said, “It is only that in the beginning, when the Commander questioned me, I answered only with the circumstances of our sailing adrift and arriving here. Today, when you Three Authorities question me again, I inform you in detail about our meeting bandits and other things.”
 
The three high officials said to me gravely, “The statements differ; truly you have done wrong. You must copy your previous statement so that there is exact agreement.” I copied it. They then said to me, “Later, when you reach Their Excellencies the Grand Defending Overseer and Three Resplendent Authorities53 of Hang-chou and the Ministries of War and Rites at Peking, you will be questioned again on the circumstances. Then use this again to answer them. It will never do if there is the slightest discrepancy.” They then said, “At first we took you to be Japanese ships plundering, and we were going to arrest and execute you. If you are a Korean, write and bring to us [a statement of] the historical periods of your country, its changes of rule, the capital cities, the geography, the people, the customs, sacrifices, rules for mourning, population, military system, land tax, and styles of dress. We shall compare it with the Histories and note what is and is not so.”
 
I said, “On the changes of rule and capital cities, at first Tan-gun and T’ang Yao rose side by side. The country was named Choson, and the capital was P’yongyang. The succession continued for over one thousand years. Wu-wang of Chou enfeoffed Kija (Chi Tzu) in Choson. He made P'yongyang the capital and instructed the people in eight articles. The observance by the people now of customs based on ritual (li) and righteousness (i) began from that. When Wei Man of Yen fled, he entered Choson and turned out Kija's descendant Kijun. Kijun fled to Ma-han and made his capital there. About this time, [the country may have been called] Kukwan, l-pu, Sagun, or Sam-han. It was a remote era, and the details are not clear. 54 With the time of Hsüan-ti of Western Han [r. 73-49 B.C.], the Pak family of Silla first established a state. The Ko family of Koguryð and the Puyo family of Paekche rose one after another. They divided into three the land of the old Choson. Silla occupied the southeast area and made Kyongju its capital. Koguryo occupied the northwest area and made Liao-tung and P'yongyang its capitals; it shifted boundaries several times, but I have forgotten the places. Paekche occupied the central and southwest areas and made Chiksan, Kwangju, Hamyang, Kongju, and Puy> [successively] its capitals. In the reign of Kao Tsung of T’ang [r. 650-683], King Wen-wu (r. 661-681] of Silla and T’ang soldiers destroyed Koguryo and then Paekche and united the three countries,55 Later, Chinwon rebelled and occupied Chònju, and Kungye rebelled and occupied Ch’ðlwon. The Wang family of Koryo had great merit and were full of virtue, and the people of the country gave them their allegiance. Kungye fled, Chinwon gave himself up, and the King of Silla sealed his treasury and storehouses, made a register of his counties and districts, and surrendered. The three states were again united, 56 and Kaesong was made the capital. The line of succession continued almost five hundred years. The present change is to our Choson, with Hamyang57 the capital. That is how it has been now for almost one hundred years.
 
“As to geography, the Changbaek Mountains are in the northeast. They are also called the Paedu Mountains and extend more than one thousand li, for over two hundred of which they rise to great heights. On one of the peaks is a deep lake, more than eighty li round. Its water flows east as the Tuman River, south as the Yalu River, northeast as the Sokp'yong River, and northwest as the Song-hwa River (Sungari River). Downstream the Sungari is the Kondong River. The Myohang Mountains are in the north; the Kŭmgang Mountains, with over twelve thousand peaks, in the east; the Chiri Mountains in the south; and the Kŭwol Mountains in the west. The above four ranges have extremely high peaks and many spectacular sights. Mt. Samgak is the guardian mountain of the national capital. The Taedong River, Sa River, Imjin, Tohan River, Naktong River, Nŭngjin, Tou-ch’ih-chin,58 and Yongsan-jin are the largest of the rivers.
 
“As to the personages, from Silla there have been Kim Yu-sin, Kim Yang, Ch'oe Ch’i-won, and Sól Ch’ong; from Paekche Kyehaek; from Koguryð Ulchi Mun-dök; from KoryÕ Choe Chung, Kang Kam-choan, Cho Chung, Kim Ch’wi-ryò, Wu T’ak, and Chòng Mong-ju; and from our Chosón too many to list.59
 
“As to customs, we esteem the codes of etiquette (li) and righteousness (i), we understand the Five Relationships, and we respect Confucian methods. Every year in spring and fall we observe the Feast for the Care of the Old, the Regional Archery Ceremony, and the Regional Wine Ceremony. 60
 
“As to sacrifices, there are altars of the soil and grain, ancestral temples, the Rite to Confucius,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The penal code follows the Great Ming Code.61 The rules of mourning follow Chu Hsi’s Chia li. In our dress we follow Chinese styles.
 
“As to the population, military system, and land taxes, I, being a Confucian minister, do not know the details.”
 
Next they asked, “What do you mean by your statement about correcting entries on registers?”
 
I said, “Cheju is in the great sea, and the sea lanes are extremely dangerous and long. All criminals flee there to escape. It has long been a refuge for outlaws in flight, so we go and investigate.”
 
They asked, “How many li is it from China to Cheju?”'
 
I exaggerated the length of the sea route and said, “I do not know exactly, but generally a boat that meets favorable winds in the great sea can go one thousand li a day. We, now, sailed at sea a total, combining days and nights, of twenty-nine full days. We were driven by high winds and raced along as if we were flying, coming down to the Chinese coast. The distance, then, from China to Cheju must be roughly several tens of thousands of li.”62
 
They asked, “About how far is your country from our Court?”'
 
I said, “I have heard that it is more than 3,900 li from the capital of our country to the Imperial capital, going across the Yalu River and through the town of Liao-tung.”
 
The Regional Commander and the other two high officials 63 served me tea and fruit and wrote a list of things to be presented to me. The list [read],
 
“Honoraria for the Escorted Minister Ch'oe
 
One plate of pork Two ducks Four chickens Two fish One beaker of wine One plate of rice One plate of walnuts One plate of vegetables One plate of bamboo shoots One plate of wheat noodles One plate of jujubes
 
One plate of bean-curd.” They gave food and drink and other things to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e soldiers according to their rank.
 
I wrote a poem of thanks and bowed twice. The three statesmen also rose and returned the courtesy with respect. They said to me, “We see from your poem of thanks that you are familiar with the geography of this region. How did you acquire such knowledge? It must have been explained to you by natives.”
 
I said, “No one is close to me here, and my language is not understood. Who would talk with me? I have studied maps of China, and now I have simply drawn on my memory.”
 
When the interview ended, I and three or four officials were standing, hands folded, at the table. Outside, one of Chai Yung's military officers was beating and hurting Kim To-jong, a member of my staff. I wrote [an account of the incident] and showed it to the officials. One official hurried to report it to the Regional Commander, who had the attacker seized and punished by flogging. He also had Chai Yung flogged for not having been able to keep order.
 
We withdrew and again went along the lake. We rowed out through the wall, passed Ying-en Bridge, arrived in front of P'eng-lai Station, and stopped for the night. In the evening the Prefect, named Chou, and the Magistrates of the two counties K’uai-chi and Shan-yin sent abundant amounts of food and drink.
 
 
235. 예전에는 公, 侯, 伯 등이 맡았으나, 洪武30년(1397)에 都指揮가 맡았다.
 
236. 전에는 侍郞, 都御史가 맡았으나, 洪武30년(1397)에 비로소 按察副使가 맡았다.
 
237. 寧人으로 巡按御史와 提刑按察司副使 등의 관직을 지냈다.
 
238. 布政司 즉 承宣布政使司는 省級行政機構이다. 한 省의 民政과 財政을 관장하였다.
 
명대에는 浙江, 江西, 福建, 廣西, 四川, 山東, 廣東, 河南, 陝西, 湖廣, 山西, 雲南, 貴州 등 13 布政司를 설치하였다. 각기 左 右布政使, 左·右參政, 左右參議 등의 正官을 두었다. 부속기관에 經歷司, 照磨所, 理問所, 司獄司, 庫, 倉, 雜造局, 軍器局, 寶泉局, 織染局 등이 있다.
 
239. 長樂人으로 成化 연간에 承宣布政司右參議를 지냈다.
 
240. 紹興府 府治의 동쪽에 있는 提刑司 내에 蓬萊館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 嘉定16년(1223) 知府事 겸 提刑 注綱이 건립하였다. 《會稽續志》권2, 提刑司,
 
2?? 무기와 갑옷.
 
242. 使相은 總督의 별칭이지만 여기서의 세 使이란 앞에 나오는 總督 황종, 副使 오문원, 參議 진담을 가리킨다.
 
243. 布政司 등 三司 즉 布政司와 按察司 및 都指揮使司에 각각 소속된 황종, 오문원, 진담을 가리킨다.
 
244. 鎭守는 원래 武官의 職銜으로 總兵이 충임되었다. 永樂元年(1403)에 成祖는 顧成, 韓觀, 何福을 파견하여 貴州, 廣西, 西夏의 변방에 出鎭시키면서, 동시에 환관을 선발하여 함께 가게 하면서 公侯의 服을 하사하였는데, 그 지위가 將帥보다 상위였다. 이것이 太監이 出鎭하게 된 시초이다. 洪熙元年(1425)에 太監 王安이 甘肅에 出鎭하 여 비로소 鎭守太監의 명칭이 있었다. 후에 각 省 각 변방에 모두 鎭守太監을 설치하여 武臣을 감시하고 軍權을 통제하였다.
 
245. 綺衣는 繡衣直指 즉 巡按御史의 별칭이다. 繡衣直指는 漢 武帝때 두었던 御史大夫의 임시직으로 파견된 直指使者가 수 놓은 비단옷을 입고 도끼와 符節을 지닌 데서 이르는 말이다.
 
246. 三司의 장관인 布政使, 按察使, 都指揮使를 가리킨다.
 
247. 세속에서 숭상하는 것.
 
248. 제사의 典禮.
 
249. 天帝인 桓因의 손자이며 桓雄의 아들로, B.C 2333년 아사달(평양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단군 조선을 개국하였다. 《三國遺事》(紀異篇)에 의하면, 인간 세상을 구하 고자 인간 세상에 내려온 환웅은 인간이 되기를 원해 환웅의 말대로 해서 인간이 된 熊女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단군왕검이다. 단군신화는 한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결을 요구하는 求心體的 역할을 해왔다.
 
250. 周나라 제 2대 왕이며, 사실상의 창건자이다. 아버지 文王의 뜻을 이어받아 殷나라 서부 諸侯의 맹주로서 은나라 토벌의 전쟁을 일으켜 河南省 牧野에서 王의 대군을 격파하여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지금의 陝西省 西安 부근인 당시의 鎬京에 수도를 정하여 周나라를 창건하고 아우인 周公 日 등의 보필을 받아 나라의 기초를 공고히 하였다.
 
251. 古朝鮮시대 전설상의 箕子朝鮮의 시조로, 이름은 胥餘, 須更이다. 殷나라의 賢人으로 周나라의 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1122년 동쪽으로 도망하여 조선에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하고, 예의, 田蠶, 방직, 八條禁法을 가르쳤다 한다.
 
252. 犯禁八條로 古朝鮮 시대 최초의 성문법이다. 《前漢書》 권28下, 地理志 第8下에는 그 가운데 아래의 3조가 기재되어 있다. “相殺以當時價殺, 相傷以穀償, 相益者, 男沒 人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253. 衛滿朝鮮의 창건자로, 본래는 燕나라 출신이다. 연왕 盧縮이 漢나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망명하여 浿水를 건너와 왕 箕準에게 항복하여 왕의 신임을 얻고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마침내 왕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워 王儉城에 도읍을 두었다. 위만은 준왕 때의 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불렀다.
 
254. 箕子朝鮮의 왕이다. 箕否의 아들로 秦 말기에서 漢 초기에 걸쳐 재위하였다. 漢高祖말년에 燕나라 사람 衛滿이 천여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망명하여 오자, 準王은 그를 신용하여 博士의 벼슬을 주었다. 위만은 중국 피난민을 통합하고 부근의 종족을 종속시켜 세력을 키우자, 準을 내쫓고 대신 朝鮮王이 되었다.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準은 宮人들을 거느리고 辰나라 북쪽 변방지방으로 가서 자리잡고 韓王이라 칭하여 마한의 시조가 되었다.
 
255. 九韓은 원래 신라의 이웃에 있다고 여겨지던 9국으로서 日本, 中華, 吳越, 托羅, 鷹遊, 株, 丹國, 女狄, 등을 지칭한다. 황룡사 9층탑은 이들 제국이 來朝한다는 理想에서 만든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구한은 고대 한반도 남부의 여러 부족에 대한 총칭으로서 九란 實數라기 보다는 많다는 정도의 뜻일 것이다.
 
256. 漢昭帝 始元5년 平那·玄菟郡을 平州都尉府, 臨屯·樂浪郡을 東部都尉府의 二府로 바꾸었다.
 
257. 기원전 108년 漢武帝가 古朝鮮을 멸하고 樂浪, 玄夷, 眞番, 臨屯의 四郡을 설치했다.
 
258. 馬韓, 辰韓, 弁韓의 총칭.
 
259. 前漢의 제9대 황제(재위 B.C.74-49)이다. 18세로 황위에 올랐을 때 崔光이 攝政을 하였으나, 곽광이 병들어 죽은 후에 곽씨 일족을 제거하고 親政을 하였다. 지방행정제 도를 정비하고 처음으로 常平倉을 설치하여 빈민구제를 도모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匈奴의 세력이 쇠퇴함을 틈타 烏孫과 손잡고 흉노를 격파하였다.
 
260. 신라의 시조 朴赫居世를 가리킨다. 고조선의 유민이 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어느 날 한 촌장이 숲 속에서 말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가 자 말은 없고 큰 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서 남자아이가 나왔다. 그 때 알이 매우 커서 박과 같다 하여 성을 박이라 하였다. 그가 13세가 되었을 때 매우 영특하여, 여섯 마을의 촌장들이 의논하여 왕으로 삼고 국호를 徐羅伐이라 하였다고 한다.
 
261. 신라 30대 왕(재위 661-681)으로, 성은 金이고 이름은 法敏이며, 태종무열왕과 文明王后의 맏아들이다. 655년 태자가 된 뒤 唐나라를 끌어들여 김유신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자기들의 영토로 삼으려 하자, 당나라 세력을 몰아 내고, 677년에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262.後百濟의 초대 왕(재위 900-935)으로,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신라가 혼란스러워지자 900년에 完山州(全州)에 후백제를 세웠다. 926년 신라 景哀王을 살해하고 金傳를 왕으로 내세워, 신라인들의 원성을 샀다.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점차 내분에 휩싸였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맏아들 神劍과 대립하다가 마침내 고려의 王建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263. 後高句麗를 세운 왕(재위 901-918)으로, 신라의 憲安王 또는 景文王의 서자라고도 전한다. 신라가 쇠약해져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梁吉의 부하가 되어 세력을 길러 898년에 松岳(지금의 開城)에 도읍을 정하여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264. 王建을 가리킨다. 궁예의 부하가 되어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백성을 잘 보살펴 신망을 얻었다. 세력이 커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저지르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918년 왕으로 추대되어 나라 이름을 高麗'라 하였다. 융화, 북진, 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 나가,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政誠》·《허百寮書》를 짓고 遺訓으로 訓要十條를 남겨 후세의 왕들에게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였다.
 
265. 지역의 主山.
 
266.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이다. 15세 때 花郞이 되어 몸과 마음을 닦았다. 654년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을 자식 없이 죽자, 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上大等이라는 최고 관직에 올랐다. 그 후 蘇定方이 이끄는 唐나라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고구려 정복 후 당나라가 신라마저도 정복하려 하자, 김유신은 망한 고구려, 백제군과 연합하여 이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267. 신라 신무왕 때의 공신으로, 자는 魏所이다. 흥덕왕3년(828)에 固城太守가 되고, 武州都督 등을 역임했다. 836년 흥덕왕 사후의 왕위 쟁탈전에 개입했다가 실패하여 산중으로 피신했다. 민애왕2년(839) 균정의 아들 佑徵(神武王), 淸海鎭의 張保皐 등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왕을 시해하고 우징을 왕으로 추대했다. 신무왕이 죽은 후 그 아들인 文聖王을 옹립했으며, 公檢校衛尉卿 등을 지냈다.
 
268. 신라의 학자로, 자는 孤雲, 海雲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13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879년 황소의 난 때는 〈討黃巢文)을 지어 문장가 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하여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894년 時務十條'를 올려 시행하게 하였고 아찬 벼슬에 올랐다. 그 후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관직을 내놓고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저서로 는 《桂苑筆耕》 등이 있다.
 
269.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로, 元曉大師의 아들이며, 호는 水月堂이다. 신라 十賢의 한 사람으로, 翰林을 지냈고 주로 왕의 자문역을 맡아보았다. 유학과 문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그가 만든 중국 문자에 토를 다는 방법은 당시 중국 학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두도 만들었다고 하나 그가 태어나기 전에 〈薯童謠〉, 〈風 謠) 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270.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階伯이라고도 표기한다. 관등은 達率이다. 660년 金碩信과 蘇定方의 羅唐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炭峴(지금의 대전 동쪽 馬道嶺)과 白江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黃山벌에 나가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이하 여 싸웠다. 계백의 결사대는 신라의 공격을 네 차례나 막아냈으나, 어린 花郞의 戰死로 사기가 오른 신라의 대군을 대적하지 못하고 패배하였으며,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271. 고구려 영양왕 때의 대신이자 명장이다. 612년 隋나라 30만 5천명의 대군이 고구려를 침범하여 양측이 압록강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하여 거짓으로 항복, 적군의 허점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적군이 이 사실을 알고 추격하자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하였는데, 우중문이 비로소 술수에 빠진 것을 깨닫고 지친 군사들을 후퇴시키자, 살수에서 수나라의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는 성품이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무용에 뛰어났으며, 시문에도 뛰어났다.
 
272.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海州이다. 자는 浩然이고, 호는 惺齋, 月面, 放晦齋이다. 1005년 문과에 장원하였고, 관은 門下侍中까지 지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제자들이 그를 文憲公徒라고 하였는데, 12공도 중의 하나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海東孔子로 불리었다. 주요 저서로는 《崔文憲公遺稿》가 있고, 개성에 있는 〈歸法寺題詠石刻)을 비롯하여 글씨가 남아 있다.
 
273. 고려시대의 명장으로, 본관은 州이고, 初名은 殷川이다. 성종2년(983) 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禮部侍郞이 되었다. 1018년에 침입한 거란의 10만 대군을 이듬해 무찔렀다. 그 이듬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가 1030년 왕에게 청하여 성을 쌓고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듬해 특진검교태사시중 천수국 開國侯에 봉해졌다. 현종 廟庭 에 配享, 수태사 겸 중서령에 追되었다. 저서에 《樂道郊居集》·《求善集》 등이 있다.
 
274.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橫川(횡성)이다. 성균관에서 공부한 뒤 명종 때 文科에 급제하였다. 그는 학문과 무술에 두루 뛰어나, 1216년 樞密副使, 翰林學士承旨로서 上將軍을 아울러 지냈다. 그 해 쳐들어온 거란족을 麟州에서 무찔렀으며, 그 뒤 몽골 군과 연합하여 거란군이 있는 江東城을 공격하여 항복하게 했다. 이어 政堂文學, 禮部判事, 守太尉 등을 지냈다.
 
275. 고려시대의 장군으로 본관은 彦陽이고, 시호는 威烈이다. 蔭官으로 正尉에 임명되어 東宮衛를 거쳐 정4품 벼슬인 장군이 되어 북동 국경(함경도)을 진압한 뒤 대장군이 되었다. 1216년부터 18년까지 계속된 거란군의 침략을 크게 무찔렀다. 전공으로 兵 部判事까지 되었다. 성품이 곧고 청렴 결백하였으며, 군기를 엄하게 다스렸고 부하들을 고루 아꼈으며, 싸움을 할 때마다 기발한 計巧를 써서 승리하였다.
 
276. 고려 후기의 유학자로, 호는 易東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寧海司錄으로 있을 때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귀신을 모신 사당을 없애 버렸다. 1308년 충선왕의 잘못을 간언하고는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충숙왕이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기고 여러 번 불렀 으나,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經史와 易學에 통달하였다. 뒤에 成均祭酒를 지내다가 致仕하였다. 당시 元나라를 통하여 들어온 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이해하고 깨우쳐, 이를 후진에게 가르쳤다.
 
277.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로, 호는 圃隱이다. 1360년 문과에 장원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389년에 藝文館大提學, 文下贊成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임금으로 모셨다.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그는 병으로 누운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살해되었다. 의창을 세워 가난한 백성을 구하고 유학을 널리 알렸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문집에 《圃隱集》이 있다.
 
278. 매년 봄가을에 연로하고 어진 자에게 饗宴을 베풀어 존경을 표하는 의식.
 
279. 鄕射禮는 원래 周代에 州의 장관이 봄가을에 백성들을 모아 州序에서 射禮를 하던 의식에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는 州府郡縣 등 각 지방장관이 主人이 되어 여러 賓과 庶人을 불러 활쏘기와 관련 儀式을 집행하였다.
 
280. 고을의 儒生이 모여 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절.
 
281. 社는 國土之主, 稷은 五穀之長으로 나라에서 백성의 복을 위해 제사하는 대상이다. 나라를 세우면 먼저 사직과 종묘를 만드는데 사직은 궁성의 서쪽에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3년(1394) 신라 중기의 壇과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현재의 종로구 사직동 인왕산 기슭에 세웠다.
 
282. 궁성의 동쪽에 위치한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妃 및 追尊된 왕비의 신주를 奉安한 廟이다. 太祖4년(1395) 준공했는데, 중앙에 정면 7칸의 太室을 남향으로 세우고, 좌 우에 7祀 및 공신의 配享廟를 두었다. 현재 종로3가에 남아있는 廟宇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선조41년(1608)에 중건된 건물이다.
 
283. 文廟에서 先聖과 先師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으로 일명 釋業·釋奠祭라고도 한다.《예기(禮記)》의 〈王制) 文王世子篇에 나오는 말로 釋과 漢은 놓는다는 뜻으로 간단하게 채소를 차려 놓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원래는 周公을 제사하다가 漢 이후 孔子를 모시는 의식으로 바뀌었다.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上丁 즉 2월과 8월의 첫째 丁 날에 거행하며 제물은 후세에 이르러서는 고기와 과일 등을 함께 올렸다.
 
284. 明의 官撰 律書로 洪武元年(1368)에 공포한 이후 7년(1374), 22년 및 30년에 각각 개수되어 반포되었다. 30년 律은 名例律 등 7律 30篇 460條로 구성되었다. 보통 明律이라고 하면 바로 30년 律을 가리킨다. 한편 朝鮮의 《大明律直解》는 洪武22년에 기초한 것이다.
 
285. 황제가 있는 明의 수도 즉 北京을 가리킨다.
 
286. 소흥부성의 迎恩門 밖에 있는데 唐代에는 西亭, 宋代에는 仁風이라 불렸다. 《浙江通志》 권89, 驛傳 紹興府.
 
287. 당시 지부로서 周姓인 자는 지방지에서 찾을 수 없었다. 周姓으로서 郡職인 자는 成化22년(1486)부터 홍치4년(1491)까지 推官을 지낸 周進隆이 유일하다. 萬曆《紹 興府志》 권27, 職官.
 
288.??
 
[[2월 4일.lst]]
 
 
==록 권2==
 
初五日,至西興驛,是日晴,總兵官等三使相並轎,曉到蓬萊驛,復引臣及從者,拿行裝至前,討東搬西以檢點之,臣所賣,則印信一顆,馬牌一隻,馬鞍一部,諸文書册入大·小箱二齒,衣、食、笙、櫻、銅碗入小皮袋一简,冠帽并匣,程保、金重、孫孝子、李植、安義、李孝枝、崔巨伊山及奴子二人,則無所資,與軍人同包,軍人所賣,或包或袋或無,點畢,謂臣日:“汝可先去杭州,鎮守太監、绣衣、三司大人更問之,一一辨對,無有錯,”又饋臣等以茶果,臣辭退,總兵官,盖指指揮僉事而言也,紹興府會越王舊都,秦、漢為會稽郡,居浙東下流,府治及會稽·山陰兩縣及紹興衛之治、臥龍山,俱在城中,會稽山在城東十餘里,其他若秦望等高山,重疊翠律,千嚴萬壑,競秀爭流于東西南三方,北濱大海,平衍無丘陵,蘭亭在妻公埠上天章寺之前,即王羲之修處,賀家湖在城西南十餘里,有賀知章千秋觀舊基,刻溪在秦望山之南(剩)嵊]縣”之地,距府百餘里,即子猷訪戴逵之溪也.江流有四條;一出台州之天台山,西至新昌縣,又西至嵊縣,北經會稽、上虞而入海,是為東小江;一出山陰西北,經蕭山縣東,復山陰抵會稽而入海,是為西小江;一出上虞縣東,經餘姚縣,又東過慈溪縣,至定海而入
 
 
p.386
 
海,是為餘姚江,是臣所經之江;一出金華之東陽,浦江、義烏合流至諸暨縣,經山陰,至蕭山入浙江,是為諸暨江,其間泉源支派,滙溺堤障,會屬從入者,如脉絡藤蔓之不絕,臣又調鑑水而西,經韻田鋪、嚴氏貞節門、高橋鋪,至梅津橋,距岸五里許有山隆起,東有石壁削成,前有二大石人立,其一天作,人形逼真,又過融光橋,至柯橋鋪,其中有小山,山脊有古亭基,人以謂“蔡邕見橡竹,取為笛之柯亭之遺址也,又過院社橋、白塔鋪、清江橋,至錢清疇,江名乃一錢江也,夜過倉館、白鶴鋪、錢清鋪、新林鋪、蕭山縣地方,至西興驛,天向曙矣,江名即西興河也.
 
 
5일 서흥역(西興驛)1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총병관 등 세 사상(使相)이 함께 나란히 교자를 타고 새벽에 봉래역에 도착한 뒤 다시 신과 종자(從者)들을 불러 행장을 앞으로 가져오게 하고는 이리저리 뒤적이며 점검하였습니다.
 
 
신이 가진 것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개, 말안장 1벌, '''여러 문서와 책이 든 크고 작은 상자 2개''', 의복 · '''이불''' · 갓 갓끈 · 구리그릇을 넣은 작은 가죽 부대 1개, 관모(冠帽)와 관모집뿐이었습니다.
 
 
정보 · 김중 · 손효자 · 이정 · 안의 · 이효지 · 최거이산과 총 2인은 가진 것이 없어 군인과 보자기를 함께 썼습니다.
 
 
군인들이 가진 것은 보자기에 싸기도 하고 부대에 넣기도 하고 짐이 없기도 하였습니다.
 
 
점검을 마치고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먼저 항주(杭州)에 가게 될 터인데 진수태감(鎭守太監), 수의(誘衣), 삼사(三司)의 대인(大人)이 다시 물을 것이니, 일일이 해명하고 대답하되 어긋남이 없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또 신에게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하직하고 물러 나왔는데, 총병관은 지휘첨사(指揮僉事)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소흥부(紹興府)는 곧 월왕(越王)2 의 옛 도읍으로 진한(秦漢) 시대에는 회계군(會稽郡)이었는데, 절강(浙江)의 동쪽 하류에 있었습니다.
 
 
부치(府治), 회계·산음의 두 현 및 소흥위의 치소(治所)와 와룡산(臥龍山)3 은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회계산(會稽山)은 성 동쪽 10여 리에 있고, 그 밖에 진망산(秦望山)4 과 같은 높은 산들이 겹겹이 솟아있고, 수많은 바위와 골짜기가 동·서·남 3방에서 빼어남을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북쪽은 큰 바다에 연해서 평탄하고 넓었으며 구릉이 없었습니다.
 
 
난정(蘭亭)5 은 누공부(婁公婢) 위쪽에 있는 천장사(天章寺)의 앞에 있었으니 바로 왕희지(王羲之)6 가 수계(修_)7 한 곳<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cr6402&logNo=220657101492 강남수향소흥난정]</ref><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kdmsaus&logNo=4009993184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난정]</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3/30/2017033002754.html 오늘은 음력 3월3일 '삼짇날'… 유교 경전은 이날 '프리OO'를 권했다, 조선일보, 2017.03.30
 
]</ref><ref>[http://dob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dobong&dataType=01&contents_id=GC04901572 삼짇날,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ref><ref>[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2281339038153 우리 명절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2018.02.28]</ref><ref>[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05100025 [그림, 詩에 빠지다]스타 따라잡기 조선에도 있었네 왕희지 난정집서, 주간조선, [2205호] 2012.05.07]</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212 수계도]</ref><ref>[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405_0000611092 옛날 사람들의 봄날,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인의 하루', 뉴시스, 2019.04.05]</ref><ref>[http://webzine.nfm.go.kr/2019/02/28/%EB%B4%84%EC%9D%84-%EC%A6%90%EA%B8%B0%EB%8B%A4/ 봄을 즐기다, 국립민속박물관]</ref><ref>[https://www.nongmin.com/opinion/OPP/SWE/ESY/289031/view 조용헌의 주유천하 (62)최고의 풍류 유상곡수(流觴曲水)]</ref><ref>[http://gujoron.com/xe/2535 포석정은 유상곡수시설로 볼 수 없다
 
]</ref>이었습니다.
 
 
* 왕희지 글씨가 조선에서 발견되다. <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0847&content_id=rp070308470001&print=Y 무장사]</ref><ref>[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09/2007010967005.html 추사의 금석학, 조선일보, 2007.01.09]</ref>
 
 
하가호(賀家湖)8는 성 서남쪽 10여 리에 있었고, 하지장(賀知章)의 천추관(千秋觀)9 옛 터가 있었습니다.
 
 
섬계(__溪)는 진망산 남쪽 승현(晦縣)의 땅에 있었으니 부(府)와는 거리가 100여 리나 되었는데, 바로 왕자유(王子獄) , 왕희지의 아들)10가 대규(戴達)11를 찾아갔던12 시내(=소강과 여요강(餘姚江, 위야오장)였습니다.
 
 
강은 네 갈래로 나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갈래는 태주(台州)의 천태산(天台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신창현(新昌縣)에 이르고, 또 서쪽으로 승현에 이르러 북쪽으로 회계현과 상우현(上虞縣)을 거쳐서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동소강(東小江)입니다.
 
 
한 갈래는 산음현 서북쪽에서 나와 소산현(蕭山縣) 동쪽을 거쳐 산음현으로 되돌아와서 회계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서소강(西小江)입니다.
 
 
한 갈래는 상우현 동쪽에서 나와 여요현(餘姚縣)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자계현(慈溪縣)을 거쳐 정해현(定海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서 여요강(餘姚江)이 되는데 이것이 신이 지나온 강입니다.
 
 
한 갈래는 금화현(金華縣)의 동양(東陽)에서 나와 포강(浦江)과 의오강(義烏江)과 합류하여 제기현(諸誓縣)에 이르고 산음현을 거쳐 소산현에 이르러서 절강(浙江)으로 돌아가니, 이것이 제기강(諸誓江)입니다.
 
 
그 중간에 천원(泉源)의 지류가 돌아가다가 제방에 막히고 모였다가 따라 들어간 것이, 마치 혈맥이 서로 연결되고 등나무가 얽혀 끊어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신은 또 감수(鑑水)를 거슬러 서쪽으로 가서 운전포(__田鋪) · 엄씨정절문(嚴氏貞節門) · 고교포(高橋鋪)를 거쳐 매진교(梅津橋)에 이르렀습니다.
 
 
언덕에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산이 불쑥 솟았는데, 동쪽에 깎아지른 석벽이 있고 앞에는 큰 석인(石人) 두개가 서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도 사람의 모습과 흡사하였습니다.
 
 
또 융광교(融光橋)를 지나 가교포(柯橋鋪)에 이르니 그 남쪽에 작은 산이 있고, 산등성마루에는 옛 정자 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채옹(蔡邑)13 이 연죽(__竹)을 보고 그것으로 피리를 만들었던 가정(__亭)의 유적'14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원사교(院社橋)·백탑포(白塔鋪)·청강교(淸江橋)를 지나 전청역(錢淸驛)에 이르니 강 이름은 일전강(一錢江)이었습니다. 밤에 염창관(鹽倉館) · 백학포(白鶴鋪) · 전청포(錢淸鋪) · 신림포(新林鋪) · 소산현(蕭山縣) 지방을 지나 서흥역에 이르니 날이 새었습니다.
 
 
강 이름은 서흥하(西與河)였습니다.
 
 
*기후
 
*인명
 
*시간
 
*제도(교통)
 
*기물-조선
 
*제도(관직)
 
*역사
 
*풍경
 
*불교
 
*지리
 
*건축물
 
*고증
 
 
5th Day. Arrival at Hsi-hsing Station. This day was fair.
 
 
At dawn the three high officials, the Regional Commander and the others, arrived together in sedan-chairs at P'eng-lai Station. They had me and my staff, bringing our baggage, brought before them again and had everything laid out and examined carefully, one by one. Of the things I had, one seal, one horse permit, one saddle, and a number of documents went into one large and one small box. The clothes, rain hat cords, and bronze bowls went into one small leather bag. My hats were together in a small box. Chòng Po, Kim Chung, Son Hyo-ja, Yi Chòng, An Üi, Yi Hyo-ji, Ch'oe Kõisan, and the two slaves had nothing, [their things] being wrapped with the soldiers'. Some of the soldiers had bundles, some bags, and some nothing. When the check was over, they said to me, “You may proceed. When Their Excellencies the Grand Defending Overseer and Three Resplendent Authorities of Hang-chou question you again, make distinct answers, one by one. Let there be no confusion or contradictions.” They served us tea and fruit, and I took my leave. Regional Commander was a term used in reference to the Assistant Commissioner.
 
Shao-hsing Prefecture was the old capital of the kings of Yüeh. In Ch'in [221 B.C.-207 B.C.] and Han [202 B.C.-A.D. 220] it was K’uai-chi-chün and was in the lower reaches of Che-tung. 1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s of K’uai-chi County and Shan-yin County, the headquarters of Shao-hsing Garrison and Mt. Wo-lung are within the wall. Mt. K’uai-chi is over ten li east of the wall. East, south, and west, other high mountains, such as Ch’inwang, rise in many lofty ranges, covered with rocks and cliffs and vying in grace. The north borders the sea and lies level, without hills. Lan-t’ing, on top of Lou-kung-pu in front of T’ien-chang Temple, was the place where Wang Hsi-chih held a purification ceremony.2 Lake Ho-chia is more than ten li southwest of the wall. The site of Ho Chih-chang's Thousand Autumns Hermitage [Ch’ien-ch'iu kuan] is there.3 Yen Stream is in Sheng County, south of the Ch’in-wang Mountains. It is over one hundred li away from the prefecture and was the stream on which Tzu-yu sought out Tai K’uei.4
 
The river system has four main streams. One rises in Mt. T’ien-t’ai, T'aichou, flows west to Hsin-ch'ang County, continues west to north of Sheng County, passes through K’uai-chi and Shang-yü, and enters the sea. That is the Tung-hsiao River. One rises northwest of Shan-yin, passes east of Hsiao-shan County, enters Shan-yin again, reaches K’uai-chi, and enters the sea. That is the Hsi-hsiao River. One rises east of Shang-yü County, passes through Yü-yao County, goes east through Tz'u-ch’i County to Ting-hai, and enters the sea. That is the Yü-yao River and is the river along which I passed. One rises in Tung-yang, Chin-hua. The P’u River and l-wu flow together and reach Chu-chi County. [The river] passes through Shan-yin to Hsiao-shan and into the Che River. That is the Chu-chi River. Throughout the region, the springs and branch streams that rise and disappear and the dikes and dams that are joined one to another are endless, like a labyrinth of veins and arteries.
 
I went up the Chien River to the west, [passing from Yün-t’ien Stop to Hsihsing Station). The sky was growing light. The name of the river was Hsihsing.
 
 
1. 蕭山縣 서쪽의 興場運河의 南岸에 있다. 唐代에는 莊亭, 宋代에는 邊驛이라 불렀다. 《大 淸一統志》 권226, 紹興府.
 
2.  春秋時代의 越王 句踐을 가리킨다. 처음에 吳王 鬪廬에게 패했으나 후에 이를 설욕하였다. 그 후 盧의 아들 夫差의 공격을 받아 대패를 당했지만 결국 吳를 격파하고 중원에 들어가 覇者가 되었다.
 
3. 舊名은 種山, 萬曆《紹興府志》 권4, 山川.
 
4. 秦望山이란 이름은 秦始皇이 이 산에 올라 東海를 바라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明一統志》 권45, 紹興府.
 
5. 紹興府城의 서남쪽 27리 거리에 있는 山陰의 會稽山麓에 있는 삼각형의 碑亭이다. 東晋 永和9년(353) 삼월 초3일 王羲之와 謝安 등 41인이 이곳에서 修하며 각기 시를 지었다. 특히 王羲之는 이때 유명한 〈蘭亭集序)를 지었다. 萬曆《紹興府志》 권 9, 古蹟.
 
6. 東晋의 서예가이다. 漢나라와 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楷書, 行書, 草書의 각 서체를 예술적으로 완성함으로써 書聖으로 불린다. 인생 후반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오직 산수 를 벗삼고 약초를 캐는 데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의 글씨는 우아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그의 아들 王獻之도 서예에 뛰어 나, 보통 이 두 부자를 '二王’이라 불렀다. 주요 작품으로는 行書體의〈蘭亭序) 등이 있다.
 
7. 三씨의 이후 삼월 초3일로 고정되었지만 원래는 삼월 上旬의 巳日에 물가에서 연회를 베풀며, 흐르는 물로 액을 없애는 의식을 말한다.
 
8. 賀家湖는 賀家池의 다른 이름이다. 소흥부성에서 동으로 22리의 거리이며 周圍는 47리에 달한다. 萬曆《紹興府志》 권8, 山川.
 
9. 唐 天寶3년(744) 하지장이 秘書監職을 사퇴하고 道士가 된 뒤 자기 집 이름을 道觀으로 바꾸고 이를 千秋觀이라 불렀다. 7년에 天長觀으로 개명하였다. 萬曆《紹興府志》 권 22, 祠祀.
 
10. 王羲之의 아들인 王徽之를 가리킨다. 역시 東晋의 이름난 서예가이자 詩人으로서, 子獄는 王徽之의 字이다.
 
11. 東晋의 조각가이자 화가로, 자는 安道이다. 관직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몰두했다. 조각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山陰 靈寶寺의 무량수불상을 제작하였다. 漢代의 조악한 불상 제작 방법에서 탈피하여 작품이 매우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물, 산수, 동물 등도 동적인 기법으로 그려내 산수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작품으로 〈三馬伯樂圖) 등이 있는데, 이미 唐 이전에 없어진 듯하다.
 
12. 東晋의 왕자유가 山陰에서 눈 내린 달 밝은 밤에 小船을 타고 대규를 찾아 갔다가 대규의 집 문 앞에서 되돌아왔다. 그 이유를 묻자 “내 본래 흥이 일어 갔다가 흥이 다하여 되돌아 왔던 것이다. 대규를 굳이 만나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 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흥에 거워 친구를 찾는다는 의미를 가진 山陰乘興'이란 고사가 유래한다. 《晉書》권80, 列傳 第50, 王徽之.
 
13. 後漢의 학자 · 문인 · 서예가이다. 젊어서부터 박학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문장이 뛰어났다. 靈帝 때 郞中이 되었으며, 諸經의 文字平定을 奏請하여 스스로 써서 돌에 새긴 후 太學의 문 밖에 세웠다. 이것이 '熹平石經’ 이다. 한때 모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사면을 받았으나 귀향하지 않았다. 후에 董卓에게 발탁되어 관직을 가졌으나 끝내 獄死하였다. 저서로는 조정의 제도와 칭호에 대하여 기록한 《獨斷》이 있다.
 
14. 채옹이 피난 차 會稽에 와서 柯亭에서 잘 때, 竹을 우러러다 거기에서 기이한 소리가 나는 것을 알고 피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드디어 寶器가 되었다고 한다. 《後漢書》권 60下, 列傳 참조.
 
 
===6일===
 
初六日,到杭州,是日陰,興驛之西北,平衍廣闊,即錢塘,江水潮壯則為湖,潮退則為陸,杭州人每於八月十八日潮大至,觸浪觀潮之處也,臣等自曝前舍舟登岸,乘車而行可十餘里,至浙江,復乘紅而渡,江流曲折傍山,又有反濤之勢,故謂之浙江,浙一作潮,江闊可八九里,江長西南直抵福建路,東北通海,華信所築捍潮之塘,自團魚嘴至范村,約三十里,又至富陽縣,共六十餘里,石築尚完固如新,故又謂江為錢塘江也,臣至其塘,復緣岸步行,則西望六和塔,臨江畔,行過延聖寺、浙江驟,至杭州城南門,重城疊門,門有三層樓,入其城,過文魁門、靈順宮、肅憲門、澄清門、南察院、祐聖殿、土地廟、芝松坊鋪,至武林驛,自城門至此驛,約十餘里矣.霍勇伴臣等,因雨留一日外,無留滯,或夜行遠涉千有餘里之地,鎮守太監張慶,猶責勇以遲緩之罪,杖之,夕,驛丞楊秀祿,以餵物來惠,
 
 
[http://www.mapnall.com/ko/%EC%A7%80%EB%8F%84-%ED%95%AD%EC%A0%80%EC%9A%B0-%EC%8B%9C_1133299.html 항주]<ref>[http://ko.lovechina.wikidok.net/wp-d/595def50325dc295222b014b/View]</ref><ref>[https://m.blog.naver.com/hayoonpa/221300586936]</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3Tzy2AvPXYE]</ref><ref>[https://baike.baidu.com/item/%E6%9D%AD%E5%B7%9E/147639]</ref>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서흥역의 서북방은 평탄하고 넓었는데 곧 전당(錢塘)15이었습니다.
 
 
강물은 조수가 불어나면 호수가 되고 조수가 빠지면 육지가 되었습니다.
 
 
항주 사람들이 매년 8월 18일에 조수가 크게 밀려오면 파도에 맞부딪치기도 하며16 <ref>[https://www.youtube.com/watch?v=hAUXp8A5nk8 中, 해일 같은 '첸탕강 파도'에 인산인해,
 
YTN NEWS, 2014.09.13]</ref>,  조수를 구경하던 곳이었습니다.17 <ref>[https://www.youtube.com/watch?v=R2BLG-o28cQ 음력 8월 18일 中 첸탕강 밀물 장관, CCTV 한국어방송, 2016.09.20]</ref><ref>[https://www.huffingtonpost.kr/2015/09/30/story_n_8218014.html 이것이 대륙의 서핑이다 : 항주 전단강의 역류를 이용한 서핑대회를 보라!, 허프포스트, 2015.09.30]</ref>
 
 
신 등은 서흥역 앞에서 배를 버려두고 언덕에 올라 수레를 타고 10여 리를 가다가 [https://baike.baidu.com/item/%E6%B5%99%E6%B1%9F 절강(浙江)]에 이르러서는 다시 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강의 흐름이 산을 끼고 구불구불 굽이치고, 또 거꾸로 물결치는 형세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절강이라 부르는데 절(浙)은 또 절(制)이라 쓰기도 하였습니다.
 
 
강의 너비는 8-9리이고 길이는 서남쪽으로 복건로(福建路)에 이르고, 동북쪽은 바다로 통하였습니다.
 
 
조수를 막기 위해 화신(華信)18 이 쌓은 제방은 단어취(團魚嘴)로부터 범촌(范村)까지 대략 30리이고, 또 부양현(富陽縣)까지 합계 60여 리입니다.
 
 
석축(石築)이 새것처럼 아직 견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또 강을 [http://www.simi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70635 전당강(錢塘江)]<ref>[http://yonseisinology.org/archives/5090 [중국 도읍지 이야기 33] 첸탕장대교와 마오이성, 연세대학교 중국연구원, 2019.05.01]</ref><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ahuon&logNo=221248193824&parentCategoryNo=&categoryNo=122&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용비어천가 67장]</ref>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신은 그 제방에 이르러 다시 언덕을 따라 걸어가니 서쪽으로 강가에 세워진 [http://yonseisinology.org/archives/5173 육화탑(六和塔)]19<ref>[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303786#cb 육화는 왜 전당강에 돌을 던졌을까, 오마이뉴스, 2006.01.10]</ref>이 보였습니다.
 
 
걸어서 연성사(延聖寺)와 절강역(浙江驛)을 지나 항주성의 남문에 이르니 겹성에다 이중문이었고 문에는 3층의 누각이 있었습니다. 그 성에 들어가 문괴문(文魁門)·영순궁(靈順宮)·숙헌문(肅憲門)·징청문(澄淸門)·남찰원(南察院)20 ·우성전(佑聖殿)·토지묘(土地廟)·지송방포(芝松坊鋪)를 지나서 무림역(武林驛)에 이르렀습니다.
 
 
성문으로부터 이 역에 이르기까지는 대략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적용(望勇)은 신 등을 이끌고 비로 인해 하루를 머무른 것 이외에는 지체한 적이 없고 밤길을 가기까지 하면서 천여 리의 땅을 거쳐 왔지만, 진수태감(鎭守太監) 장경(張慶, 장칭)<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gsmoFKjqee4J:www.inhakoreanology.kr/science/kor_study_dn.php%3Fsq%3D36%26att_sq%3D300+&cd=13&hl=ko&ct=clnk&gl=kr]</ref>은 오히려 적용에게 더디게 왔다는 죄를 물어 곤장을 쳤습니다.
 
 
저녁에 역승(驛丞) 양수록(楊秀祿)이 찬거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 중국 환관 <ref>[http://webbuild.knu.ac.kr/~china/CHR/chr2009/chr61pdf/CH61-02JeonSD.pdf 明朝 前期 宦官 勢力의 推移와 機能, 충북대, 全淳東]</ref>
 
* 중국 환관의 특징<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ymg98&logNo=22075720186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중국 환관의 특징 :: 환관의 역사 및 종류 그리고 사마천]</ref>
 
* 중국 환관<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412161135081 거세된 남성… 환관, 그들을 위한 변명, 경향신문, 2014.12.16]</ref>
 
* 중국 환관<ref>[https://www.mk.co.kr/news/world/view/2017/03/176621/ [중국부자열전-1]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명나라 환관 갑부 ‘류근’, 매일경제, 2017.03.15]</ref>
 
* 중국 환관 <ref>[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05/2018070500036.html
 
[숨어 있는 세계사] 조공 무역 위해 대규모 항해… 아프리카 해안까지 갔죠, 조선일보, 2018.07.06]</ref>
 
* 중국 환관 위충현 <ref>[http://www.jnuri.net/news/articleView.html?idxno=32289 ‘9900세’의 환관, 위충현魏忠賢, 제주누리, 2017.05.08]</ref>
 
* 환관<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23_0050_0040_0010&whereStr=]</ref>
 
* 환관<ref>[https://kornan.tistory.com/94 조선시대 왕 보다 장수한 '내시'의 삶]</ref>
 
 
*기후
 
*지리
 
*건축
 
*국법
 
*관직
 
 
6th Day. Arrival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Northwest of Hsi-hsiang Station was a broad, level plain, which was the Ch’ien-t’ang River. In flood tides it is a lake, but when the tide ebbs, it is land. On the 18th Day of every Eighth Month there is a big tide with great waves, and the people of Hang-chou watch the bore.5
 
We left the boats in front of the station, went ashore, got into carriages, and went on. In about ten li we came to the Che River. We got into boats again and crossed.
 
The river twists and turns, and the mountains on the side also have the effect of deflecting its waves; that is why it is called Che-chiang, Twisting River ... The width of the river is about eight or nine li. In length, it extends from Fuchien-lu in the southwest and enters the sea in the northeast. The wall built by Hua Hsin to hold off the tide extends from T'uan-yü-tsui to Fan Village, approximately thirty li, and then goes to Fu-yang County, making a total of over sixty li. Of stone construction, it is still as good as new. For that reason, the river is also called the Coin Wall (Ch’ien-tang) River.6
 
I came to that wall, landed again, and continued on foot. In the west we saw Liu-ho Pagoda, overlooking the river bank. We went past Yen-sheng Temple and Che-chiang Station and came to the south gate of the wall of Hang-chou. The wall was double, the gate multiple, and the gate had a tower of three stories. We went inside the wall, passed Wen-k’uei Gate, Ling-shun-kung, Suhsien Gate, Ch'eng-ch'ing Gate, Nan-ch'a-yuan, Yu-sheng Hall, T’u-ti Shrine, and Chih-sung-fang Stop, and came to Wu-lin Station. It was approximately ten li from the gate of the wall to that station.
 
Chai Yung had accompanied us for a great distance, over one thousand li, in which, except a one-day stop because of rain, we had not delayed and had sometimes travelled at night. Nevertheless, the Grand Defending Overseer, Chang Ch’ing," charged Yung with being dilatory and had him flogged.
 
In the evening, Yang Hsui-lu, the Station Master, came with food and paid his respects.
 
 
15. 府城의 남쪽에 있다. 海水를 막기 위하여 東漢代에 華信이 만든 塘이다. 土石 1__을가져온 자에게 千錢을 주겠다고 하니, 10일 만에 塘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錢塘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萬曆《紹興府志》 권4, 山川.
 
16.《民國杭州府志》 권23, 山水 4, 江潮. “每年八月十八日數百里士女共觀, 人漁子派 濤觸浪, 謂之弄潮, 秋中潮兪怒, 吳人輕生者, 乃無故以身試怒潮, 名爲弄潮, 往往沈 沒.” 여기서 ‘浪'이란 강 속에 뛰어 들어 직접 몸을 파도에 부딪치는 행위임을 알수 있다.
 
17. 海寧潮·浙江湖·錢塘 등으로 불린다. 매년 음력 8월 18일 錢塘江에는 潮水가 역류하며, 커다란 파도가 강을 거슬러 오르는 특이한 자연현상이 일어난다. 평균 2-3미터, 최고 9미터에 달하는 파도가 역류하는 이 장관을, 明代 馮夢龍은 《三言》에서 '天下四 '로 꼽았다.
 
18. 華信은 東漢代에 郡議曹를 역임하며 錢塘을 수축했다. 관련 기록은 아래와 같다. “錢塘,今杭州縣也.錢塘記云 昔郡議曹華信議立此塘, 以防海水, 始開募, 有能致 土石一, 與錢一千, 旬 日之間, 來者雲集, 塘未成而論不復取, 皆遂土石而去, 塘以之成也.”《後漢書》권71, 列傳 第61, 皇甫崇朱.
 
19. 전당강의 潮水를 누르고자 하는 기원을 담아 北宋 開寶 3년(970)에 세워졌다. 불교 六和敬'의 뜻을 취하여 '六和塔'이라고 이름 지었다. 밖에서 볼 때는 13층이나 내부는 7층으로 설계되어 있다.
 
20. 察院은 명대 都察院의 약칭이지만 외지에 파견된 巡按御史가 근무하는 아문도 찰원이라 하였다. 항주에는 北察院과 南察院 2곳이 있었다. 전자는 紀家橋 서측에 있는데 후에 按察分司가 되었고, 후자는 鳳山門 북측에 있는데 이곳이 巡按察院이 되었다. 萬 《杭州府志》권37, 公署.
 
 
===7일===
 
初七日,在杭州,是日陰,請朝,太監使官人來問曰:“鄭麟趾、申叔舟、成三問、金完之、趙惠、李思哲、李邊、李堅已上,俱係朝鮮人物,是何官職,一一開報來知”臣答曰:“鄭麟趾、申叔舟、李思哲,俱位至一品;成三問位至三品;李邊、金完之、趙惠、李堅,則我以後進之士,不知其人之職品,”有姓名顧壁掌曝中事者,謂臣等曰:“你所食之物,係是朝廷與的,作數支銷,待一年有文簿到部,本驛丞貴州夷人,專不曉得人事,就如孩童一般,不會票上司,以致你等食不敷也,”又曰:“來此看人都是人,不可與他說話,有傷神氣”云云,夕,按察提調學校副使鄭大人,與一大人借到于驛,招臣至前,問曰:“你國科目之制如何?”臣曰:“有進士試、生員試、文科·武科試,又有文·武科重試.”又問曰:“其試士如何?”臣曰:“每於寅、申、已、亥年秋,聚儒生精業者,試以三場;初場疑義論中二篇;中場賦表記中二篇;終場策文一道,取若干人,翌年春,又聚入格者,試以三場;初場背講四書五經,取通四書三經者,中場賦表記中二篇,終場策文一道,取“三十三人,又聚三十三人,試以策文一道分次第,謂之登文科第,許放榜,賜紅牌,給花盖,遊街三日後,又賜恩榮宴、榮親宴、榮貨宴,許通出仕之路.”又問曰:“文章體格如何?”臣曰:“表做宋元播芳,記論做唐宋,義括出五經文,疑拍出四書文為題,並遵華格,策文做《文選》對策,又問:“你治何經?”臣曰:“四書五經,雖未精研,粗嘗涉躍.”又問曰:“經書你可歷數其名?”臣曰:“庸、學、論、孟為四書,易、詩、書、春秋、禮記為五經.”又問曰:“易字何義?”臣曰:“以易字形言之,則合日月字也,以易字義言
 
 
p.388
 
 
之,則有交易變易之義,”又問曰:“易之位數,寓於何物?”臣曰:“河出圖,洛出書,聖人則之”又問曰:“非圖書,則不能作易乎?”臣曰:“天下萬物,皆有數,雖見賣者,亦可以推測易中之位數也.”兩大人相顧目擊,謂臣曰:“你實讀書士,此地人固不識也.”鄭大人忘其名,號東園子,齋名即復齋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태감(太監)21이 관인(官人)을 시켜 묻기를,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a_A1396_1_0012291 정인지鄭麟趾)]22<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7/01/2016070101504.html 서거정은 정인지의 묘비문에 왜 사주를 적어넣었을까, 조선일보, 2016.07.02]</ref><ref>[https://news.joins.com/article/15724394 [술 먹고 임금을 '너'라고 한 정승], 중앙일보, 2014.09.03]</ref><ref>[http://www.n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164 정인지, 취중에 세조를 꾸짓다, 남해타임즈, 2014.01.23]</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6/2017061601750.html 부친 묏자리로 富貴 얻고… 자신은 납작 엎드릴 곳 찾은 정인지, 조선일보, 2017.06.17
 
]</ref>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3134 신숙주(申叔舟)]23<ref>[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51018585&nidx=18586 언어천재-외교 달인 신숙주(申叔舟)...과연 변절자인가?, 조선일보, 2015.10.24]</ref><ref>[https://news.joins.com/article/22055199 신숙주는 변절의 상징? 되짚어보는 오해와 속설, 중앙일보, 2017.10.27]</ref><ref>[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6/01/34846/ 변절, 혹은 관리의 아이콘 ‘신숙주’…“얻기 위해선 받는 것은 적게, 주는 것은 후하게 하라”매일경제, 2016.01.13]</ref>  .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365 성삼문(成三問)]24<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05328/1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신동아, 2006.03.29]</ref> . 김완지(金荒之) · 조혜(__惠)25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538 이사철(李思哲)]26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4379 이변(李邊)]27 . 이견(李堅)은 모두 조선의 인물들인데, 이들이 어떤 관직에 있었는가를 일일이 적어 알려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 1450년(세종32년) 명나라 경제(景帝)의 즉위를 알리러 조선에 온 한림원시강(侍講)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8%88%EA%B2%B8(%E5%80%AA%E8%AC%99) 예겸, 니첸]을 접대하고 시를 화답한 조선의 관료들<ref>[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18082310921 조선·明나라 문학외교 기록, 국보 됐다, 한국경제, 2018.08.23]</ref>
 
* 성삼문·신숙주·정인지와 명나라의 봉사(奉使) 예겸의 시문 37편을 모아 수록한 문서<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7172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ref>
 
* 조선vs명 '시(poetry)배틀' <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831101200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vs 예겸' 한 중 시문배틀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경향신문, 2018.08.31]</ref>
 
* 중국 사신의 기록 <ref>[https://www.yna.co.kr/view/AKR20120309103600005 <한반도를 다녀간 중국 사신의 기록>, 연합뉴스, 2012.03.09]</ref>
 
* 명나라 문신의 사조선록<ref>[http://web.yonsei.ac.kr/yonmin/article/21/21-05.pdf 다른 나라에서 같은 점을 찾다: 명나라 문신의 사조선록(使朝鮮錄) 연구, 두후이웨(杜慧月)]</ref>
 
 
신이 대답하기를, “정인지 · 신숙주 · 이사철은 모두 관위(官位)가 1품까지 이르렀고, 성삼문은 3품에 이르렀으며, 이변 · 김완지 · 조혜 · 이견은 내가 후배28로서 그 사람들의 벼슬 품계를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역중(驛中)의 사무를 맡은 고벽(顧壁)이란 자가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먹는 물품은 조정에서 주는 것인데, 지출하려면 1년을 기다려야 문부(文簿)가 부(部)에 도착할 것입니다. 본 역승은 '''귀주(貴州)의 이인(夷人)'''29으로서 물정을 전혀 모르는 것이 꼭 어린애와 같고 상사(上司)에게 상신할 줄을 몰라서 당신들이 먹을 것을 넉넉하게 장만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고, 또“이곳에 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과 이야기해서 원기를 떨어뜨리지 마십시오”라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저녁에 안찰제조학교부사(按察提調學校副使) 정(鄭)대인이 어떤 대인과 함께 역에 이르러 신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는 묻기를,
 
 
“당신 나라의 과거 제도는 어떠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진사시(進士試) 생원시(生員試)30  · 문과시(文科試)31 ·무과시(武科試)32 가 있고, 또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중시(重試)가 있습니다.”
 
 
“사인(士人)의 시험은 어떻게 치룹니까?”
 
 
“인년(寅年)·신년(申年)·사년(巳年)·해년(亥年)의 가을마다 유생(儒生)으로서 학업에 정통한 사람을 모아서 삼장(三場)으로써 시험을 봅니다. 초장(初場)에는 의(疑) · 의(義). 논(論) 중에서 2편(篇)을 시험하고, 중장(中場)에는 부(賦) · 표(表) · 기(記) 중에서 2편을 시험하고, 종장(終場)에는 대책(對策)  1도(道)를 시험하여 몇 사람을 뽑습니다.
 
 
그 이듬해 봄에 또 합격한 사람을 모아서 삼장을 시험합니다. 초장에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외우게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사람을 뽑고, 중장(四書五經)을 외우게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사람을 뽑고, 중장에는 부 · 표 기 중에서 2편을 시험하고, 종장에는 대책 1도를 시험하여 33인을 뽑습니다.
 
 
다시 그 33인을 모아서 대책 1도를 시험하여 등급을 나누는데, 이를 일러 문과급제라 하며 방방(放榜)을 허가하여 홍패(紅牌)를 내리고 화개(花蓋)를 주어 3일 동안 유가(遊街)하게 한 뒤에 또 은영연(恩榮宴). 영친연(榮親宴). 영분연(榮墳宴)을 내린 다음 벼슬길에 나아가도록 합니다.”
 
 
“문체(文體)는 어떠하오?”
 
 
“표(表)는 송원(宋元)의 파방(播芳)을, 기(記)와 논(論)은 당송(唐宋)을 본보기로 하고, 의(義)는 오경(五經)의 글을, 의(疑)는 사서(四書)의 글을 집어내어 제목으로 짓되 모두 중화의 체제를 따르고, 대책은 《문선(文選)》의 대책을 본보기로 삼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서를 공부하였소?”
 
 
“사서와 오경을 비록 정밀히 연구하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대강은 섭렵하였습니다.”
 
 
“당신은 경서의 이름을 낱낱이 셀 수 있겠소?”
 
 
“《중용(中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가 사서이고, 《역경(易經)》 ·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춘추(春秋)》 · 《예기(禮記)》가 오경입니다.”
 
 
“역(易)자는 무슨 뜻이오?”
 
 
“역(易)은 글자 모양으로 말한다면 일(日)과 월(月)을 합친 것이고, 글자 뜻으로 말한다면 바뀌고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역의 방위(方位)와 괘수(卦數)는 무엇에 근거하였소?”
 
 
“황하(黃河)에서 도(圖)가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오니, 성인(聖人)이 이를 본보기로 삼은 것입니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아니면 역을 지을 수 없는 것이오?”
 
 
“천하의 만물에는 모두 수(數)가 있으니, 토끼를 파는 사람이 토끼를 보는 것만으로도 역 속의 방위와 패수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두 대인은 서로 돌아보고 눈짓을 하고는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실로 글을 읽은 선비라는 것을 이 지방 사람들이 잠시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소”라고 하였습니다. 정 대인의 이름은 잊어 버렸지만 호는 동원자(東園子), 재명(齋名)은 복재(復齋)였습니다.
 
 
*기후
 
*인명
 
*외교
 
*제도
 
*정책(이주민)
 
*모화
 
*유학
 
*질문?(의견?)문답?
 
 
7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At dawn the Overseer sent an official to question me. He said, “Chong In-ji, Sin Suk-chu, Sòng Sam-mun, Kim Wan-ji, Cho He, Yi Sa-choöl, Yi Pyốn, and Yi Kyon are all Koreans. What are their positions? Write a report for each of them and bring it here to let me know.”
 
I answered, “Chong In-ji, Sin Suk-chu, and Yi Sa-ch’ðl have reached First Rank. Sõng Sam-mun has reached Third Rank. Yi Pyon, Kim Wan-ji, Cho He, and Yi Kyon became Chinsa after me, and I do not know their positions or ranks."8
 
One Ku Pi, a fellow who managed things in the station, came and said to us, "Everything you eat is given by the Court. When we calculate our disbursements, we wait a year for the ledgers to reach the Ministry. The Station Master here is a barbarian from Kuei-chou who is as utterly incapable of managing things as a child. He does not know how to provide for all contingencies in his reports to the superiors and brings it about that you do not get enough to eat.”Then he said, “The people who come here and look at you are all idlers. Do not talk with them. It is a waste of energy.”
 
In the evening, His Excellency Cheng [Chi],9 the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Schools, and another eminent person came to the station. They summoned me before them and asked, “What is the system of scholastic degrees in your country?”.
 
I said “There are the Chinsa Examination, Saeng-won Examination, Civil Service and Military Service Examinations, and Civil and Military Service Second Examinations.”'10
 
They asked, “What are those examinations like?”
 
I said, “Every third year, the most accomplished of the Confucian pupils are brought together and examined in three sessions. The first session comprises two papers in explication, interpretation, or essay [forms on the classics]; the middle session comprises two papers in rhyme-prose [fu], memorial [piao], or narrative [chi] forms; and the last session comprises a problem-essay [tuits’ê]. From this a certain number of men are selected, and in the spring of the next year they are brought together and examined in three sessions. The first session is recital from memory from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nd expounding on them. Those versed in the Four Books and three of the Classics are passed. The middle session comprises two papers in rhyme-prose, memorial, and narrative forms; and the last session comprises a problem-essay. Thirty-three men are passed. Then the thirty-three are brought together and tested by a problem-essay. The standings are determined and called the Order of Graduates, and permission is given to publish the list. Royal presents of vermilion plaques are made and umbrellas given to the graduates, who parade in the streets for three days. After that, the King gives for them a Banquet of Honor, a Banquet on the Honor to Parents, and a Banquet on the Honor to Ancestors; and they are allowed to enter upon their public careers.”
 
They asked, “What are your literary styles ?”
 
I said, “The memorials follow the polished style of Sung and Yuan, the narratives and essays follow T’ang and Sung. Interpretations are required of passages from the Five Classics, and explications are required of passages from the Four Books. In everything we follow Chinese forms. The problem-essays follow that of Wen hsüan.”11
 
They asked, “What classics have you mastered?”
 
I said, “Though I have not studied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thoroughly, I have browsed in them here and there.”
 
They said, “Name the Classics and the Books in order.”
 
I said, “The Mean, Great Learning, Analects, and Mencius are the Four Books. The Book of Changes, Book of Odes, Book of History, Spring and Autumn Annals, and Book of Rites are the Five Classics.”
 
They asked,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character i [change]?”
 
I said, “In terms of form, the character i combines the characters jih (sun] and yüeh (moon). In terms of meaning, it has the meaning of 'exchange' and ‘substitute'.”
 
They asked, “In what were the diagrams of the Book of Changes lodged?”
 
I said, “The Yellow River put forth the plan, and the Lo River put forth the book. The sages took them as models.”
 
They said, “Without the plan and the book, would it have been impossible to write the Book of Changes?”
 
I said, “All the things of the world have numbers. Though one sees only a rabbit seller, one can deduce the diagrams in the Book of Changes.''12
 
The two personages stared hard at each other and said to me, “You are truly a well-read gentleman. The people here have not understood that at all.”
 
I have forgotten the given name of His Excellency Cheng. His hao was Tungyüan-tzu and his studio name Fu-chai.
 
 
21. 가장 품급이 높은 靈官으로 정4품이다. 內府 24衙門에 각각 掌印太監 1인을 두었다. 이 밖에 都督·秉筆·隨堂·守備太監 등의 명칭이 있었다. 처음 설치하였을 때에는 오로지 皇帝 및 皇室의 시중을 드는 일만을 하였으나, 후에 권세가 날로 강해져 出使 ·監軍·鎭守 및 신하와 백성의 감추어진 일을 적발해내는 등의 막강한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 본문에서는 鎭守太監 張慶을 가리킨다.
 
22.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河東이다. 자가 伯이고, 호는 學易齋이다. 1414년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세종의 신임을 받아 集賢殿 學士를 거쳐 直提學에 올랐다. 1427년 文科 重試에 장원 급제하여 左弼善이 되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453년 癸酉靖亂 때는 수양대군을 도운 공으로 우의정, 영의정까지 올랐다.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고, 안지 등과 함께〈龍飛御天歌)를 지었으며, 天文·曆法·雅樂 등에 대한 책을 펴냈다.
 
23.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保閑齋이다. 1439년 親試文科에 급제하고,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다. 1447년 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부제학 등을 거쳐, 1453년 부승지로 계유정난에 참여, 정난 공신 2등이 되었다. 1454년 도승지에 오르고, 세조가 즉위하자 병조판서, 우찬성, 대사성 등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 주로서 6대왕을 섬겼고, 《國朝五禮儀》 등을 책으로 엮었다. 주요 저서로는《保閑齋集》 등이 있다.
 
24.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호는 梅竹軒이다. 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1438년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여 집현전학사, 修撰 등을 지냈다. 그 뒤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고 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한글의 창제에도 참여하였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 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李豊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극형을 당하였 다. 저서로는 문집인 《成謹甫集》이 있다.
 
25.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楊州이다. 자는 濟夫이고 호는 施齋이다. 세종21년(1439) 전라도병마도절제사를 지냈다. 1442년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 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4년에 判中樞院事의 職을 받았다. 시호는 恭安이다.
 
26.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全州이고 자가 誠之이며, 시호가 文安이다. 세종14년 (1432)에 문과에 급제하여 集賢殿의 博士로 있다가 都承旨, 吏曹·禮曹判書, 左贊成 에 이르렀고, 문종2년(1452) 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고, 靖難공신이 되어 左議政으로 임명, 佐翼공신이 되었다.
 
27.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德水이다. 세종 원년(1419) 進士試에 합격하고 承文院 博士, 藝文館大提學, 工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漢語와 吏文을 잘하여 司譯院 의 提調를 겸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여러 관직을 지낸 다음 성종3년(1472)에 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28. 이변과 조혜는 모두 최부보다 활동시기가 앞선 인물이다. 예를 들면 그중에 이변은 세종원년(1419)에 급제하였으므로, 성종13년(1482)에 급제한 최부보다 급제한 해가 훨씬 이르다.
 
29. 漢族이 아닌 소수민족을 가리킨다. 貴州省에는 苗族·布依族·侗族 등 여러 소수민족이 있다.
 
30. 생원시는 진사시와 함께 小科에 해당하는데 五經義와 四書疑 2편을 시험보는 試의 終場에 합격한 자를 生員이라 하였다. 생원에게는 진사와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 및 하급관료에 취임하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 자격만으로 관직에 나아가기는 힘들었지만 免役의 특권은 향유하였다.
 
31. 문관의 등용자격시험으로 東堂試라고도 한다. 숭문정책의 영향으로 가장 중시되었다. 가을에 시험하는 문과의 初試는 漢城府에서 실시하는 漢城試, 성균관에서 시행하 는 館試 및 各道에서 실시하는 鄕試의 3종이 있다. 초시의 합격자는 이듬해 봄에 서울의 明倫堂 및 조堂에서 2차시험을 보는데 이를 위試라 하였다. 복시에 합격한 자는 다시 궁궐 안의 殿庭에서 임금이 친히 시험을 주재했는데 이를 殿試라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전시는 형식에 그치고 복시에 합격하면 사실상 최종 합격한 셈이 되었다.
 
32. 弓術과 講書 등을 시험과목으로 하고 문과시와 마찬가지로 초시와 복시 및 전시의 절차를 밟았다. 조선에서 무과시는 崇文정책의 영향으로 그다지 중시되지는 않았다.
 
 
===8일===
 
初八日,在杭州,是日陰,顧壁來,謂臣曰:“今聽說,將你等事,差人畫夜馳奏北京,直待回報,方放回,自此城至北京,水路幾五千餘里,你留此必多日矣!”臣曰:“我到此,言語有異,實同盲聾,望足下如此聞,隨即開說,以恤遠人.”壁曰:“國法甚嚴,律條甚重,漏泄夷情,新例充軍,凡我所言,不可與人見,只可自知.”點頭而去,有二官人來,云:“都總太監欲試看總兵官所驗點你一張、刀一把”云云,遂收去,有一人來,問曰:“景泰年間,我國給事中官張寧,奉使你國,做〈却金亭詩》《皇華集》,你曉得否?”臣對日:“張給事到我國,著《皇華集》,其中題〈漢江「樓)〉一詩,光搖青雀航,影落白鷗洲,望遠天疑盡,凌虚地欲浮之句,尤稱藉,”其人喜形於色,又云:“張給事致仕在家,家在嘉興府之海縣,距此百里,張公到此杭城,聞朝鮮文士漂海來,欲問朝鮮事,留待累日,前一日回去.”問其人姓名,則乃 王玠,係給事也,有自稱陳梁者來,言曰:“區區會與張寧靖之大人,往你
 
國回還,”臣曰:“張公位至何官?緣何不在家?”陳曰:“張公官至都給事,後任都御史,因無子不仕,四十二歲,回家養病,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고벽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지금 듣건대 당신들의 일은 사람을 시켜 밤낮으로 달려 북경에 가서 아뢰게 하고 회보(回報)를 받은 뒤에야 돌려보낸다고 합니다. 이 성에서 [http://www.visitbeijing.or.kr/detail.php?number=2909 북경에 이르기는 수로(水路)]<ref>[http://www.visitbeijing.or.kr/detail.php?number=2909 징항다윈허]</ref><ref>[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18804 남방·북방 이어주는 경항대운하, 제민일보, 2009.05.12]</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teM9UL8G__A China's Grand Canal]</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eo9Ebz1OKQc The Grand Canal]</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Xr35Y0nKbzM China's Grand Canal in foreigners' eyes]</ref><ref>[https://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315397 [서영수의 ‘돈이 되는 茶 이야기’] 대운하 따라 중국 전역에 퍼진 ‘차(茶)’, 중앙시사매거진 1371호, 2017.02.13]</ref>가 거의 5천여 리나 되니, 그대는 이곳에 여러 날 머물러야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도착해서는 언어가 달라 실로 장님이나 귀머거리와 같은데, 족하께서는 지금처럼 듣고 본대로 즉시 얘기 해 주어 먼 나라 사람을 돌보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벽은,
 
 
“국법이 매우 엄하고 율조(律條)가 아주 무거우니, 이인(夷人)에게 사정을 누설하면 새 법령에는 군호(軍戶)로 충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말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어서는 안 되고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라 하고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갔습니다.
 
 
두 관인이 와서,
 
 
“도총태감(都總太監)께서 총병관이 점검한 당신의 활 1장과 칼 1자루를 찾아 살펴보시겠다고 하오” 운운하면서 결국 거두어 가버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를, “[https://ko.wikipedia.org/wiki/%EA%B2%BD%ED%83%9C 경태(景泰)] 연간에 우리나라 [http://esillok.history.go.kr/front/glossary/properNouns/ProperNounsList.do?pageIndex=338&lang=ko 급사중(給事中) 벼슬을 한 장녕(張寧)]<ref>[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08019_002 세조실록 21권, 세조 6년 8월 19일 임술 2번째기사, 1460년 명 천순(天順) 4년, 주문사 윤자운·부사 윤길생 등이 명으로 가다]</ref>이 귀국에 사신으로 가서 <각금정시(却金亭詩)〉<ref>[https://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6BSKe3EUO2sJ: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OrteServHistIFrame.kci%3FsereArticleSearchBean.artiId%3DART002024716%26sereArticleSearchBean.orteFileId%3DKCI_FI002024716+&cd=12&hl=ko&ct=clnk&gl=kr 장녕(張寧) ≪봉사록(奉使錄)≫ 詩文硏究]</ref><ref>[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359649 장녕(張寧) ≪봉사록(奉使錄)≫ 시문연구(詩文硏究)]</ref>를 지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5407 《황화집(皇華集)》]<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PW2NXU-3H0UJ:web.yonsei.ac.kr/yonmin/article/21/21-05.pdf+&cd=15&hl=ko&ct=clnk&gl=kr 다른 나라에서 같은 점을 찾다]</ref><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L_NUUncCQ3QJ:www.yeoju.go.kr/com/file/filedown%3F_ci%3D420448%26_ck%3D5f9417624eaf46a9b911435d72b04888+&cd=9&hl=ko&ct=clnk&gl=kr 『황화집(皇華集)』과 세종의 국가경영
 
]</ref>에 실렸다는데 알고 있소?”라고 하였습니다.
 
* 조-청 문인들의 교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0962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신이 답하기를, “장(張) 급사(給事)가 우리나라에 와서 《황화집》을 지었는데 그중 한강(漢江) 이라는 제목의 시에,
 
 
“햇빛은 청작(靑雀)배를 흔들고, 그림자 떨어지는 백구(白鷗)의 모래톱. 저 멀리 바라보니 하늘은 끝이 없고, 공중으로 솟구쳐 땅이 문득 뜨려하네”라고 한 글귀는 더욱 칭송이 자자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기쁜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또 말하기를,
 
 
“장 급사는 벼슬을 그만 두고 집에 있는데 집이 가흥부(嘉興府)의 해염현(海鹽縣)<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kschina505&logNo=220674059079&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에 있으므로 이곳과의 거리가 100리입니다. 장공(公)이 이곳 항주성에 도착하여 조선의 문사(文士)가 바다로 표류하여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선의 사정을 묻고자, 여러 날 머물러 기다리다가 하루 전에 돌아갔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성명을 물으니 왕개(王恥, 왕제)였는데, 장 급사의 생질이었습니다.
 
 
자칭 진양(陳梁, 천량)이란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변변치 못한 내가 일찍이 정지(靖之) 대인과 함께 당신 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소”라 하였습니다.
 
 
신이, “장공은 어느 벼슬까지 하셨으며, 무엇 때문에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장공은 관직이 도급사(都給事)에 이르렀고 후에는 도어사(都御史)<ref>[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rCjF&fldid=6R1S&datanum=1480&q=%B8%ED%B3%AA%B6%F3%BF%CD%C3%BB%B3%AA%B6%F3&_referer=V7kfJwkeLEGMZxGlgqZEmUbIswVIUiwTGIn-aQXyOAZ88G.lujz1tQ9LRGW3W_x_HqWljDXK6bzK4LP2d-6Wmw00 명청의 관직 요약]</ref>에 임명되었는데, 아들이 없기 때문에 벼슬하지 않고 42세에 집으로 돌아와 병을 요양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심리(안심, 신뢰)
 
*관직
 
*기물
 
*풍습
 
*외교
 
*문학
 
 
 
8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Ku Pi came and said to me, “I hear now that a man has been commissioned to hurry night and day to Peking to submit a memorial about you. He will not come back until he has a reply. It is about five thousand li from here to Peking on the waterway; you must stay here for many days.”
 
I said, “In coming here with a different language, I am really like one blind and deaf. I hope that you will tell me things that you have seen and heard like this and pity me as a stranger.”
 
Ku Pi said, “The laws of the country are extremely strict, and the punishments decreed are very severe. A new regulation imposes banishment for divulging information to barbarians. Do not show others any of what I have written; it is only for you to know.” He bowed and left.
 
Two officials came and said, “The Supreme Commanding13 Overseer wants. to see the things examined by the Regional Commander – your bow and sword.” They took them and left.
 
A man came and said, “In the Ching-t’ai reign [1450-1456] Supervising Secretary [Chi-shih-chung kuan] Chang Ning14 of our country was made an envoy to your country and wrote ‘On Leaving Golden Pavilion' and Huang hua chi.15 Do you know about them?”
 
I answered, “Supervising Secretary Chang wrote Huang hua chi when he came to our country. In it, these lines, entitled “The Han River Tower,' were much praised:
 
“Light plays on the boat with the haw-finch bow, As I look into the distance - do I see the end of the world? –
 
I am air-borne; the earth floats under me.” The man's face took on a happy expression, and he said, “Supervising Secretary Chang has retired from office and is at home. His house is in Hai-yen County, Chia-hsing Prefecture, one hundred li from here. When His Excellency Chang came here to Hang-chou and heard that an educated gentleman from Korea had drifted here from across the sea, he wanted to ask about Korea and waited several days, but he went back a day before you arrived."
 
I asked the man's name. It was Wang Chieh, and he was a nephew of the Supervising Secretary.
 
A man who called himself Ch'en Liang came and said, “I went to your country and back with His Excellency Chang Ning [styled] Ching-chih.”
 
I said, “How high did His Excellency Chang rise? Why is he at home and not in office?”
 
Ch'en said, “He rose in office to Chief Supervising Secretary and later was appointed Censor-in-Chief [Tu-yü-shih], but because he had no children he did not take the position. At the age of forty-two he returned home to restore his health.”
 
 
===9일===
 
初九日,在杭州,是日晴,昨來取弓刀官人又來,曰:“你弓刀,鎮守老爹留下看:”臣曰:“唯命.”顧壁又來,言曰:“海上軍官行來文書,開說你還有船一十四隻在海涅功,今巡按御史說既有船十隻,原何不捉拿來?”以此罪他,鎭守及三司,議論不一,緣你供辭明辨,審知非倭,今已議定,差了指揮楊旺,送你赴京,轉送你回,並無他話,還有三四日在此,你宜可寬心,”又布政司大人徐圭、按察司副使魏福,同坐驛客館,引臣等曰:“送你還國,你可放心好還,”臣即做詩以謝,還退舍,北京人李節來見臣之衣服系藍縷,面目蒙垢,謂臣曰:“此地人以冶容是尚,故凡看你等,皆驚笑,以謂朝鮮人類皆若是,可於面陽地,洗灌你身:”臣即令從者各自沉醉,遂與程保等面陽環坐,洗去塵垢,李節又來,指點臣之皮膚盡換,足爪脫落,曰:“此是困於患難,不恤身膚之驗也,”臣曰:“我在海時,喉嘔血數,口無津三日,今又認為碱水所砭而換,足為徒險阻而傷,嘗聞身體髮膚,不敢毀傷,孝之始也,我之體膚之傷若此,其真不孝之子爾.”節曰:“無傷也,非你欲傷,天實傷你,雖傷何傷?不須傷心,李節之友人,失其姓名,袖《小學》一部,因節以遺臣,欲求詩,臣曰:“無功而受人之賜,是傷廉之地,敢辭,”節日:“此人欲求一試以為記爾”臣曰:“做得詩不好,舉得筆亦不好,以不好易人之好,非所欲也.”其人還袖去,李節謂臣曰:“交以道,接以禮,則孔子亦受,是何(部)(__)之之甚?”臣曰:“彼人非是肯捨册也,意在得詩,則交不以道,接不以禮,我若一受,則是賣詩取直,故(部)(卻之”節唯唯而退,夕,李節.
 
 
p.390
 
與其友金太等三人來饋臣及從者,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어제 활과 칼을 가져 간 관인이 또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활과 칼은 진수(鎭守) 나으리께서 남겨두었다가 살펴보려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분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벽이 또 와서 말하기를, “해상의 군관(軍官)이 보내온 문서는 당신이 배 14척을 가지고 바다에서 겁략하고 있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순안어사(巡按御史)는, '이미 배 14척이 있었다면 당초에 어찌 잡아오지 않았는가?'라 하면서 이 일로 그에게 죄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진수와 삼사(三司)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으나 당신의 공술이 명확하여 왜적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은 이미 의논이 정해져 지휘(指揮) 양왕(楊班)을 시켜 당신을 북경으로 보낸 뒤 귀국시키기로 하고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3-4일 동안은 이곳에 있어야 하겠지만 당신은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포정사(布政司)의 대인 서규(徐圭)와 안찰사부사(按察司副使) 위복(魏福)이 역의 객관(客館)에 함께 앉아서 신 등을 불러 말하기를,
 
 
“당신을 보내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할 터이니, 당신은 돌아갈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곧 시를 지어 사례하고 사관으로 물러갔습니다.
 
 
북경 사람 이절(李節)이 와서 신의 의복이 남루하고 얼굴에 때가 묻은 것을 보고 신에게 말하기를,
 
 
“이 지방 사람들은 용모 가꾸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당신들을 보면 모두 놀라고 비웃으면서 조선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다고 생각할 것이니, 양지바른 곳에서 당신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곧 종자들에게 명하여 각자 스스로 몸을 씻도록 하고, 드디어 정보 등과 함께 볕을 향하여 빙 둘러앉아서 먼지와 때를 씻어내었습니다. 이절은 또 와서 신의 피부가 모두 벗겨지고<ref>[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648527.html 조선의 왕들이 덜덜덜 떨던 바로 그것
 
2014-07-25]</ref> 발톱이 빠진 것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환란에 시달려서 몸을 돌볼 수 없었던 표가 되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바다에 있을 때 목구멍에서 피를 두어 움큼이나 토하고 입에는 침이 마른 지가 3일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또 피부가 짠물에 찌들어 벗겨졌고, 발은 맨발로 험한 땅을 밟아 다친 것입니다. 일찍이 '몸과 모발과 피부에 상처를 내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이라 들었지만 나의 몸과 피부의 상처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불효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절이 말하기를, “그럴 것 없습니다. 당신이 상처를 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실로 당신을 상하게 한 것이니 비록 상처가 났더라도 뭐 상심할 게 있겠습니까? 상심할 필요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명은 잊었지만 이절의 벗이 《소학(小學)》 1부를 소매 속에 넣어 이절을 통하여 신에게 주고 시를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공로도 없으면서 남이 주는 것을 받는다면 이는 염치없는 짓이므로 감히 사양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시가(詩歌)''' 한 장을 구하여 기념으로 삼고자 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여,
 
 
“시를 잘 짓지도 못하고 글씨도 또한 좋지 못한데 좋지 못한 것으로서 남의 좋은 것과 바꾸는 일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책을 도로 소매 속에 넣고 가버렸습니다.
 
 
이절이 신에게 말하기를, “도리로써 사귀고 예절로써 대접하면 공자(孔子)께서도 또한 받았사온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물리치시는 것인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책을 기꺼이 주려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시를 얻는 데 있었습니다.
 
 
도리로써 사귐이 아니고 예절로써 대접함이 아니니, 내가 만약 한번 받는다면 이는 시를 값을 받고 파는 셈이므로 이를 물리친 것입니다.”
 
 
이절은 “예, 예, 그렇습니다.” 하면서 물러갔습니다. 저녁에 이절은 그의 벗 김태(金太) 등 3인과 함께 와서 신과 종자들을 접대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기물
 
*풍습
 
*심리(안심)
 
*유학
 
 
 
9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fair.
 
 
The officials who had come the day before and taken the bow and sword came again and said, “Old Grand Defender has kept your bow and sword to look at."
 
I said, “As you command.”
 
Ku Pi came again and said, “A dispatch came from the naval officers setting forth that you were cruising about with fourteen boats, scourging the sea. Now the Regional Inspector16 says that if there were fourteen boats, why were they not seized in the first place and brought in? For that he has brought charges against them. The Grand Defender and the Three Authorities discussed the matter without reaching agreement, but since your deposition explained things clearly, they have adjudged that you are not Japanese. They have made their findings and have commissioned Commander [Chih-hui] Yang Wang to escort you to the capital, from which you will be sent home.
 
“There was nothing else. You will be here another three or four days. You may put your mind at ease.”
 
Next, His Excellency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Commissioner Hsü Kuei and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Wei Fu17 sat together in the guest house of the station and had us brought to them. They said, “We are sending you back to your country; you may be easy in your mind that you will go home all right.”
 
I wrote a poem to thank them and went back from the house.
 
Li Chieh, a man from Peking, came and saw that my clothes were tattered and my appearance filthy and said to me, “The people here set store by appearances. That is why all who see you laugh in amazement; they take it that all Koreans are like that. You might wash yourself in a sunny place.”
 
I ordered each of my staff to wash his clothes. Then I sat with Chòng Po and others in a circle in the sun and bathed away the dirt. Li Chieh came and pointed to the places where my skin had peeled off and my toe-nails fallen out and said, “That is proof that in your sufferings there was no mercy for your body.”
 
I said, “While I was at sea, I vomited several handfuls of blood. There was no saliva in my mouth for three days. Now I realize that my skin, pierced by salt water, has been peeling off and that my feet have been hurt from tramping over difficult ground. I have heard that not daring to injure any part of one's body is the beginning of filial piety. With my body hurt like this, I am certainly not a filial son.”
 
Chieh said, “There is no harm in that. It is not that you have deliberately hurt yourself, Heaven has hurt you. What does it matter, therefore, that you have been hurt? You need not feel badly about it.'
 
Li Chieh's friend, whose name I have lost, had a copy of a handbook [hsiao-hsüeh] in his sleeve and had Li Chieh present it to me. He wanted a poem. I said, “Accepting someone's gift without merit damages integrity. I make bold to decline it.”
 
Li Chieh said, “This man wants a poem to remember you by.”
 
I said, “I cannot write poems well; I cannot even handle a brush well. I do not want to exchange something not good for something good from him.” The man returned the book to his sleeve and left.
 
Li Chieh said to me, “When the exchange accorded with the Way and the meeting accorded with etiquette, even Confucius accepted something. 18 Why were you so firm in refusing him?”
 
I said, “That man did not want to give away a book, his mind was on getting a poem. Thus the exchange would not have accorded with the Way, and the meeting would not have accorded with etiquette. Once I accepted, it would have been receiving payment for a poem I had sold. That is why I refused him.” Li Chieh agreed and left.
 
In the evening, Li Chieh, his friend Chin T’ai, and two other men came and served me and my staff food.
 
 
===10일===
 
初十日,在杭州,是日晴,顧壁來言曰:“你去京師,前路不可不知,我國蘇、杭及福建、廣東等地,販海私船,至占城國、回回國地,收買紅木、胡椒、番香,船不絕,十去五回,其路絕不好,唯赴京一水河路,十分好也, 故琉球、日本、暹羅、滿剌加等國進貢,俱從福建布政司泊船,到此府,過嘉興,至蘇州,天下紗羅段匹及諸寶貨,皆出於蘇,自蘇州過了常州,至鎮江府,過楊子江,江距此府千餘里,其江淘恶,如無風浪,方可渡,過此江,直至京河,路幾至四十日程,你眾人喜得春天,若是夏天炎熱,蒸爐患病,何以得去?且山東、山西、陝西三布政司,連年旱荒,人食人肉,民各失所,過楊子江,行千有餘里,便到山東地面,你眾深自計較,可也.”因贈以爭,曰:“此素食也,你便可吃,貴國亦有此等否?”臣曰:“我國南方有爭,五月乃生.”顧壁曰:“此地冬春交生正月方盛,大者十餘斤,貴國與此地風土有異,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고벽이 와서 말하기를,
 
 
“당신이 경사에 가려면 앞길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https://samsungblueprint.tistory.com/201 소주(蘇州), 쑤저우]<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1810100045 쑤저우
 
한적한 시골마을로 변한 鄭和함대 출항지 劉家港]</ref><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TvLM&articleno=1440&categoryId=12&regdt=20160609103234 강소성 소주의 비단과 자수]</ref><ref>[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9E%A5%EC%91%A4+%EC%84%B1+%EC%91%A4%EC%A0%80%EC%9A%B0+%EC%8B%9C/@31.1804494,119.948735,8.75z/data=!4m13!1m7!3m6!1s0x35b3a0d19bd25e07:0x21e57f85bd766004!2z7KSR6rWtIOyepeyRpCDshLEg7JGk7KCA7JqwIOyLnA!3b1!8m2!3d31.298974!4d120.585289!3m4!1s0x35b3a0d19bd25e07:0x21e57f85bd766004!8m2!3d31.298974!4d120.585289]</ref>·[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A0%80%EC%9E%A5+%EC%84%B1+%ED%95%AD%EC%A0%80%EC%9A%B0+%EC%8B%9C/@30.2616855,119.8916691,10z/data=!3m1!4b1!4m13!1m7!3m6!1s0x35b700da314bc245:0x8d94eab66c8553b5!2z7KSR6rWtIOyepeyRpCDshLE!3b1!8m2!3d33.1401715!4d119.7889248!3m4!1s0x344bb629439aaa99:0xa7bfd183824de83a!8m2!3d30.2733004!4d120.1574707 항주(항저우)]<ref>[https://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lUDKacUcGQIJ: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OrteServHistIFrame.kci%3FsereArticleSearchBean.artiId%3DART002150349%26sereArticleSearchBean.orteFileId%3DKCI_FI002150349+&cd=24&hl=ko&ct=clnk&gl=kr, 20세기 초 조선인의 중국 여행기록을 통해 본 근대적명승(名勝)의 변용]</ref><ref>[http://m.blog.daum.net/naryspa/18032428?tp_nil_a=2]</ref> 및 복건(福建) ·광동(廣東)<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I&nNewsNumb=200902100046&page=31 [중국의 商人정신] 광둥(廣東)상인
 
돈이 된다면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는다, 월간조선, 2009.02]</ref><ref>[https://news.joins.com/article/5862400 [중국 상방(商幇) 탐방]③“돈은 곧 신이다”광동상방(廣東商幫)
 
, 중앙일보, 2011.07.28]</ref> 등 지역에서 바다로 장사하러 가는 사선(私船)들이 점성국(占城國)과 회회국(回回國) 지역에 이르러 홍목(紅木), 후추, 번향(番香)을 사들이느라 배가 끊이지 않는데, 열이 가면 다섯만 돌아오게 되니 그 길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6338092 경사(京師)]로 가는 수로만은 매우 좋기 때문에 유구(琉球), 일본(日本), 섬라(羅), 만랄가(滿刺加) 등의 나라에서 공물을 바칠 적엔 모두 복건포정사에서 배를 정박한 뒤 이 항주부에 도착하였다가 [http://koreachina.kr/archives/1913 가흥(嘉興)]을 지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alliya&logNo=220723223983&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소주]에 이르게 되니, 천하의 사라단필(紗羅段匹)과 여러 가지 값진 물건이 모두 소주에서 산출되는 것입니다.
 
 
* [https://hanja.dict.naver.com/word?q=%E7%B4%97%E7%BE%85&cp_code=0&sound_id=0 紗羅(사라)]
 
* 絲綢之路(사주지로): 실크로드
 
* 뽕나무-실크로드<ref>[http://www.cbmaker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38 뽕나무의 경제학 '실크로드', 충북메이커스, 2019.05.26]</ref>
 
* 중국의 여러 지명, 세레카 <ref>[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6311114&memberNo=4753342]</ref>
 
* 항주(월나라), 소주(오나라), 오월동주
 
 
소주에서 [http://changzhou.jiangsu.net/ 상주(常州)]를 지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schina&logNo=80204198333&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진강부(鎭江府)]에 이르러 양자강(揚子江)<ref>[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823893 사실상 멸종 '양쯔강 돌고래' 흔적 발견…중국 흥분, SBS뉴스, 2016.10.07]</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xuqx4pduqJE 멸종위기 양쯔강 악어 120마리 인공부화 방생, JTBC뉴스, 2019.06.04]</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23/2019042302109.html 11년간 양쯔강 헤엄쳐 출퇴근한 中 회사원, 조선일보, 2019.04.23]</ref>을 건너게 되니 [https://www.youtube.com/watch?v=K-WgENSRPCk 양자강]은 이 부(府)와의 거리가 천여 리나 됩니다. 강의 이 구간은 물이 세차고 험악하므로 풍랑이 없어야만 건널 수 있습니다. 양자강을 건너 곧장 경하(京河)에 이르기까지는 약 40일 걸리는 노정입니다. 당신들은 봄이어서 다행이지 여름철이라면 찌는 듯한 무더위에 병이 날 터이니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 경항대운하: 베이징(北京, Beijing)에서 항주(杭州, Hangzhou)까지 연결, 천진(天津, Tianjin), 하북(河北, Hebei), 산동(山東, Shandong), 강소(江蘇, Jiangsu)<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90528010017680 대기업 총수까지 관심…탈중국 러시 속 주목받는 장쑤성의 매력은, 아시아투데이, 2019.05.29]</ref>, 절강(浙江, Zhejiang)경유하고 해하(海河)와 황하(黃河), 회하(淮河), 장강(長江), 전당강(錢塘江) 등 동서향으로 흐르는 5갈래의 물길을 거친다.<ref>[http://www.visitbeijing.or.kr/article.php?number=11548]</ref>
 
 
또 [http://friendlyshandong.co.kr/friendlyshandong/2017/03/06/%EC%9C%A0%EA%B4%91%EC%A2%85%EC%9D%98-%EC%A4%91%EA%B5%AD-%EC%9D%B8%EB%AC%B8%EA%B8%B0%ED%96%89-8-%EC%82%B0%EB%91%A5%E5%B1%B1%E6%9D%B1-%EC%8B%A4%EC%9A%A9%EA%B3%BC-%EB%8F%84%EB%8D%95-%EC%96%B4/ 산동(山東)], [http://getabout.hanatour.com/archives/111736 산서(山西)]<ref>[http://visitchina.or.kr/m/area/area04.asp?Action=list&Type=5&Title=%EC%82%B0%EC%8B%9C%EC%84%B1a ]</ref>, [http://kr.people.com.cn/204015/204712/index.html 섬서(陝西)]의 세 포정사에서는 해마다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사람이 인육을 먹고 백성들이 그 터전을 잃었습니다. 양자강을 지나서 천여 리를 가면 곧 산동 땅에 도착하는데 당신들은 스스로 깊이 살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죽순<ref>[http://www.visitbeijing.or.kr/article.php?number=9750 중국음식이야기 - 최고의 죽순요리 문정산순(門政山筍)]</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zbEfDVwwnjg 중국 대나무 마을에서 맛보는 죽순 코스 요리!, EBS, 2017.11.29]</ref>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소식(素食)이니 드십시오. 귀국에도 죽순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남방에 죽순이 있는데, 5월이 되어서야 나지요.”<ref>[https://www.asiae.co.kr/article/2018053014151089112 [한국의 맛] 연한 죽순으로 만든 담백하고 정갈한 음식 '죽순채', 아시아경제, 2018.08.27]</ref><ref>[http://www.kfood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4 땅이 주는 선물, 죽순. 지금이 제맛, 한국외식신문, 2016.05]</ref>
 
 
“이 지방에서는 겨울과 봄에 나서 정월이 한창인데 큰 것은 10여 근이나 됩니다. 귀국은 이곳의 풍토와 다르군요."
 
 
*기후
 
*지명
 
*인명
 
*경제
 
*풍습
 
 
10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fair.
 
 
Ku Pi came and said, “Since you are leaving for the capital, you must know the road ahead. From Su-chou, Hang-chou, Fukien, Kwangtung, and other places in our country, sea-going smugglers go to Champa and Islamic countries and buy red sandalwood, black pepper, and foreign perfumes. The boats go endlessly, and for ten that leave five return. The passage is extremely difficult.
 
“For going to the capital by water, only the river route is quite good. That is why when Ryukyu, Japan, Siam, and Malacca send tribute [the embassies] all go by way of the Fukien Administrative Region [Pu-cheng ssu]19 They land their boats, come to this prefecture, pass Chia-hsing, and reach Su-chou. All the silks and treasures of the Empire come from Su-chou. From Su-chou they pass Ch’ang-chou and reach Chen-chiang Prefecture, where they cross the Yangtze River. The river is more than one thousand li from this prefecture. It is violent and fierce and can be crossed only when there are no wind and waves. They cross that river and reach the capital directly. The river route is about a forty-day journey.
 
“You people are fortunate to have spring weather. If it were summer, with its heat, humidity, and sicknesses, how could you go? In the three administrative regions of Shantung, Shansi, and Shensi, moreover, there has been drought for several years.20 Men are eating human flesh, and the people are losing their homes. After you have crossed the Yangtze River and gone more than one thousand li, you will be in Shantung. It will be well for you all to be very careful.”
 
Then he gave me some bamboo shoots and said, “That is a vegetable dish, so you can eat it. Are there bamboo shoots in your country, too?”
 
I said, “The southern part of my country has bamboo shoots. They sprout in the Fifth Month.”
 
Ku Pi said, “Here they sprout from winter to spring, and they are at their height in the First Month. Big ones weigh more than thirteen pounds. The climate here is different from that of your country.”
 
 
===11일===
 
十一日,在杭州,是日陰,楊秀祿、顧壁共來見臣,壁曰:“我杭城西山八盤嶺有古剎,名高麗寺,寺前有二碑記古跡,距此十五里,趙宋時,高麗使來貢而建也,你國人越境,尚且造寺,則其崇佛之意,可知矣!”臣曰: “此則高麗人所建也,今我朝鮮,關異端,尊儒道,人皆以入孝出恭、忠君信友,為職分事耳,若有影首者,則並令充軍,”壁曰:“凡人不事佛,則必祀神,然則你國事鬼神否?”臣曰:“國人皆建祠堂,以祭祖爾,事其當事之鬼神,不尚溢,”俄而楊秀祿辭出,壁以一公文示臣,乃杭州府報前路各府縣驛送臣等文也,其文曰:“杭州府:〈為海洋聲息事》,奉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简付抄,蒙欽差鎮守浙江司設監太監張慶、巡按浙江監察御史暢亨會案前事,「據總督浙江備倭署都指揮僉事黃宗、巡視海道浙江按察司副使吳文元呈,并定海、昌國等衛及台州府等衙門各狀申報,《弘治元年正月十七日,瞭見海門衛桃诸千戶所牛頭外洋有船,使入師子寨》等因,為照,係于海洋船隻重事,就經併行督、巡海、分守、分巡官員,督指揮僉事黃宗等呈,備桃诸千戶所申,《該千百戶柳春等,帶領旗軍,前去臨海縣二十都,與同當地火甲,獲住人船,押送到所審問,語言難辨,據寫姓名來歷緣由,抄單呈報前來》會同巡按浙江監察御史暢亨議,看得單內開《審夷人崔溥,雖據供寫,朝鮮國人往濟州等處海島,為暴風所逆,得到天子大國之界》等情,但恐夷人多許,真偽難測,況無開報所泊船內,會否點擔有何器械、并別項行李等件,俱合勘審,又經行據撼督備倭署都指揮僉事黃宗、巡視海道副使吳文元、分守右參議陳潭、分巡副使楊峻呈,《該把烟松門等衛所備倭指揮同知劉澤呈送夷人四十三人,會同審據一人寫名云云,再三會審無異,隨將印信、馬牌、枋錄、文籍、冠帽、衣包等件,點看明白,給與崔溥等收領,及將所獲夷船,拖閣上塢外,備由連人并刀一把、一張解送到職》會同浙江都布按三司掌印都指揮僉事崔徹、左布政使徐主、副使魏福,覆審相同,緣係遭風外夷人船事理,擬合通行,除外,仰抄領人案回司.」照依會案內事理,即將崔溥等,本司給批差委指揮僉事楊旺,管送赴京,及行所屬驛遞,應付差去官員虞給、站船,并伴送軍餘及崔一把擒并所屬沿海軍衛巡司出海等官,部領軍船哨究,操守備,續據署都力
 
 
p.392
 
溥等口粮、紅船、脚力,合行前路官司,一體應付,其發去刀一把、弓一張,轉發官庫收,取庫收繳報,仍仰徑自會 奏施行,先具抄案依准,各 另呈來.”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양수록(楊秀祿)과 고벽이 함께 신을 보러 왔습니다.
 
 
고벽이 말하기를, “우리 항주성 서쪽 산인 팔반령(八盤嶺)에 고찰이 있는데 이름을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D%95%AD%EC%A3%BC_%EA%B3%A0%EB%A0%A4%EC%82%AC 고려사(高麗寺)]<ref>[http://www.mediabuddha.net/news/view.php?number=12924 인파 끊긴 고려사, 인파 넘치는 영은사, 법의 알맹이는 사라지고 겉치레만 요란, 미디어붓다, 2010.08.19]</ref><ref>[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246818&language=ko_KR 고려 대각국사 의천과 항주 혜인사(慧因寺) 정황]</ref>라 합니다. 절 앞에 2개의 비(碑)가 있어 옛 사적을 기록했는데 이곳과는 15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곧 송나라 때 고려의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치고 세운 것입니다. 당신 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와서도 힘써 절을 지었으니 불교를 숭상하는 뜻을 알 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ref>[http://www-2.knu.ac.kr/~toegye/archive/chong/pdf/4-16.pdf 퇴계와 승려]</ref>
 
 
*고려 문종의 4남인 대각국사 의천은 중국에 건너가 송나라 철종의 환대를 받았으며 각지를 다니며 중국의 고승들과 토론했습니다. 항저우 혜인사원(慧因寺院)에서 존경하던 정원(淨源)법사를 만났고 7,500권 정도의 불경을 기증했습니다. 당(唐)대에는 도교 숭상정책으로 불교가 탄압 받아 경전들이 많이 멸실했기 때문에 의천이 기증한 경전은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 뒤로 절의 이름이 고려사가 되고, 선종에서 화엄종 절로 바뀌었습니다. 귀국한 뒤에도 의천은 화엄종 불경 170권과 화엄경각 보수를 위해 금 2,000냥을 쾌척했습니다. 절은 태평천국의 난 때 완전히 없어졌지요. 1989년에 가 보니 주춧돌과 우물만 있더군요. 그래서 3차례 방문해 중건 문제를 항저우시 당국과 협의했고, 지난달 왕궈핑(王國平) 시 공산당 서기와 만나 중건에 합의했습니다. 항저우시 종교국장도 중건에 참고하기 위해 해인사 불국사를 둘러보고 갔습니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항저우를 방문한 한국인은 20만명으로 외국인 중 가장 많았다"며 "고려사가 서호 인근인 데다 옆에 호텔 신축계획도 있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f>[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0412160071509606 한국인터뷰/ 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 - 한중교류의 성과와 나아갈 길, 한국일보, 2004.12.16]</ref>
 
 
신이 말하기를, “이는 고려 사람이 세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 조선은 이단(異端)을 물리치고<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2312004_004 성종실록 272권, 성종 23년 12월 4일 경자 4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이세좌·안호 등이 금승법을 시행할 경우의 이로움과 시행하지 않을 경우의 해로움을 다섯 가지씩 들어 상소하다]</ref> 유도(儒道)를 높이어 사람마다 모두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어른에게 공손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머리를 깎은 자가 있으면 모두 군역(軍役)에 편입시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사람들은 부처를 섬기지 않으면 반드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데, 그렇다면 당신 나라는 귀신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사당을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당연히 섬겨야 할 귀신만 섬기고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조금 후에 양수록은 하직하고 나갔습니다.
 
 
고벽이 '''공문(公文)''' 한 장을 신에게 보여주었는데 바로 항주부에서 앞으로 가야할 각 부·현·역(府縣驛)에 신 등의 호송을 통지하는 공문이었습니다. 그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항주부 : 〈해양 상황에 관한 건)
 
절강등처승선포정사사(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의 차부(箚付)를 받았는데 내용은 이하와 같습니다.
 
 
흠차진수절강사설감태감(欽差鎭守浙江司設監太監) 장경(張慶)과 순안절강감찰어사(巡按浙江監察御史) 창형(楊亭)의 전사(前事)에 대한 공동의안(議案)을 받들었는데,
 
 
“총독절강비왜서도지휘첨사(摠督浙江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黃宗), 순시해도절강안찰사부사(巡視海道浙江按察司副使) 오문원(吳文元)의 정문(呈文)과 아울러 정해위(定海衛), 창국위(昌國衛) 등 및 태주부(台州府) 등 아문(衙門)이 각기 올린 보고서는, 홍치(弘治) 원년 윤정월 17일에 해문위(海門衛) 도저천호소(桃渚千戶所)의 우두산(牛頭山) 앞 바다에 배가 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 사자채(師子寨)로 들어오도록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해양의 선박에 관한 중대한 일이므로 곧 총독(總督)·순해(巡海)·분수(分守)·분순(分巡)의 관원에게 아울러 이첩하여, '파총(把總) 및 소속 연해(沿海) 군위(軍衛)의 순사(巡司)·출해(出海) 등 관원을 독려하여 군선(軍船)을 거느리고 정찰하며 빈틈없이 방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또 이어서 받은 도저천호소의 보고서가 첨부된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 황종 등의 정문(呈文)에 해당 천호(千戶)·백호(百戶) 유춘(柳春) 등이 기군(旗軍)을 거느리고 임해현(臨海縣) 20도(都)로 가서 그 곳 화갑(火甲)과 함께 사람과 배를 붙잡아 유치하고, 도저소로 압송하여 심문했으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하며, 성명과 내력 및 사유를 쓴 초단(抄單)을 보내왔다. 순안절강감찰어사 창형과 회동하여 논의하며 초단을 살펴보니, 이인(夷人) [http://www.igj.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402 최부]를 심문하여 공술에 의거, <조선 사람으로 제주 등지의 섬에 갔다가 폭풍을 만나 천자가 다스리는 대국(大國) 땅에 도착한 것'이라는 사정을 써 놓았지만, 이인(夷人)들은 속임이 많아 사실인지 거짓인지 헤아리기 어렵고, 더구나 정박한 배 안에 무기나 별도의 행장 등을 점검했는지 여부를 보고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모두 실지 조사를 해야할 것이다. 다시 공문을 보내고 나서 받은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과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 오문원 · 분수우참의(分守右參議) 진담(陳潭)·분순부사(分巡副使) 양준(楊竣)의 정문(呈文)은 '해당 파총송문등위소(把摠松門等衛所) 비왜지휘동지(備倭指揮同知) 유택(柳澤)이 이인(夷人) 43명을 정문과 함께 보내 왔으므로, 회동하여 심사하고 한 사람씩 이름을 써서 ... 운운하였다. 두세 차례 모여 심사해 보았으나 별 이상이 없었고, 바로 인신(印信)·마패(馬牌)·방록(榜錄)·문적(文籍)· 관모(冠帽)·의포(衣袍) 등을 하나씩 점검해 보아도 분명하였으므로 최부 등에게 내주어 수령하게 하였다. 압류한 이인(夷人)의 선박은 선거(船渠)로 끌어다 올려두는 한편 사유서를 갖춘 관련 인원을 칼 한 자루, 활 한 장(張) 딸려서 본직(本職)에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에 절강 도(都) · 포(布)·안(按) 삼사(三司)의 장인도지휘사(掌印都指揮僉事) 최윤(崔__), 좌포정사(左布政使) 서규(徐圭), 부사(副使) 위복(魏福)과 회동하여 복심(覆審)해 보아도 앞뒤가 서로 동일하였다. 사연이 풍랑을 만난 외이(外夷)의 사람과 배에 관한 사항이므로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외에, 인원 인수의 건을 초록(抄錄)한 다음 포정사사(布政使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공동 의안(議案)의 사리(事理)에 따라 최부 등은 곧 본사(本司)에서 비문(批文)으로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__王)을 차출하여 북경으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지나는 각지의 역체(驛遞)에 이첩하여 파견 관원의 늠급(豪給, =봉급) · 참선(站船, 운수용 선박)과 아울러 호송 군여(軍餘) 및 최부 등의 구량(口糧)· 홍선(紅船). 각력(脚力, 운반비)을 지급하게 하라. 앞길의 관사(官司)도 이첩하여 모든 것을 제공하게 하라. 보내는 칼 한 자루와 활 한 장은 전송(轉送)하여 관고(官庫)에 보관하도록 하고, 창고에서 꺼낼 때는 보관증을 받도록 하라. 직접 상주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먼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초안(抄案)을 갖추니 각기 따로 보고하기 바란다.
 
 
*기후
 
*인명
 
*지명
 
*불교
 
*유학
 
*제도
 
 
11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Yang Hsiu-lu and Ku Pi came to see me. Ku Pi said, “On Pa-p’an Range in the mountains west of Hang-chou is an old monastery named Koryo Temple. In front of the temple are two stone tablets that commemorate the old ruins.21 They are fifteen li from here. In the Sung period an envoy from Koryo came with tribute and built [the temple). That your countrymen build temples even beyond their own borders must mean that they revere the Buddha.”
 
I said, “But that was built by a man from Koryo. Our Chosón, now, has exposed heresies and respects the Confucian Way. The people consider as their duties only filial piety in the home and courtesy outside it, loyalty to their lords, and sincerity with their friends. Anyone who shaves his head is banished.”
 
Ku Pi said, “All people who do not serve the Buddha sacrifice to gods. That being so, does your country serve gods and spirits?
 
I said, “All my countrymen build shrines and sacrifice to their ancestors. They serve the gods and spirits they ought to serve and do not respect unorthodox sacrifices.”
 
Presently Yang Hsiu-lu left, and Ku Pi showed me an official document. It was a document in which Hang-chou Prefecture notified each prefecture and county on the road ahead that they were sending us on by stations. The text said, “Hang-chou Prefecture on a matter of maritime intelligence:
 
“We have received a copy of orders from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of Chekiang and Other Places. We have received the joint judgment on the above matter of Chang Ch’ing, Overseer of the Imperial Grand Defending Directorate of Chekiang (Ch’in-ch'ai chen [shou] Che-chiang Ssu-she-chien t'ai-chien] and Ch’ang Heng, Regional Investigating Censor for Chekiang [Hsün-an Che-chiang chien-ch'a yü-shih].22 According to a report from Huang Tsung, Supreme Anti-Japanese Commander for Chekiang and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and Wu Wen-yuan, Chekiang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the Maritime Circuit, and reports of respective conditions in Ting-hai, Ch’ang-kuo, and other garrisons, and in T’ai-chou Prefecture and other garrison ports:
 
“On the 17th Day, Intercalary First Month, Hung-chih 1, a ship was clearly seen to sail into Shih-tzu Stockade from Niu-t’ou-wai-yang, T’ao-chu Chiliad, Hai-men Garrison. Accordingly, the matter was held to be an important one of seagoing ships, and we ordered maritime and local defending and touring offices of the Supreme Command, coast guards and naval officers in their commands, and warships under control of the Ministry to reconnoiter and take firm precautions.
 
“Continuing, according to the report of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Huang Tsung, etc., and the reports of the T'ao-chu Chiliarch:
 
“Liu Ch’un, Centurion [Po-hu] of the said Chiliad, and others led banner troops out to Division 20 in front of Lin-hai County and with the local militia of the area arrested the men, seized the boat, and drove [the men] to the Chiliad. When they were questioned, their speech was difficult to understand. Their names and backgrounds, as they wrote them, were copied into a statement, reported, and have come to hand. We met with Ch’ang Heng, Regional Investigating Censor for Chekiang, and discussed the matter. We saw that the contents of the statement began with an interrogation of the barbarian Ch’oe Pu. Although, according to his statement, he was a Korean who had gone to Cheju and other islands and been driven off by violent winds, arriving at the border of the country of the Son of Heaven, we feared that barbarians are often deceitful, and it is hard to judge what is true and what false. That was the more so in this case, since there was no report on the contents of the boat – whether they had been inspected, what implements there were, and what items of baggage there were. It was appropriate that all that be examined.
 
“According, then, to the report of Huang Tsung, Supreme Anti-Japanese Commander and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Wu Wenyüan,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the Maritime Circuit; Ch'en T’an, Right Assistant Administration Commissioner; and Yang Chün, Regional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23 and the report of Liu Tse, the said AntiJapanese Commissioner for Sung-men and Other Garrisons and Chiliads and Vice Commander [T’ung-chih]:
 
“The forty-three barbarians were brought together and investigated by having each man write his name and so forth. A second and third time they were all questioned, and there were no discrepancies. Accordingly, the seal, horse permit, records, documents, hats, bundles of clothing, and other things were taken and each checked carefully. Receipts were given to Ch’oe Pu and the others. The seized boat was also towed outside Ko-shang-wu and a statement of its details prepared. The men, a sword, and a bow were sent off together to this office.
 
“We have met with [representatives of]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Ts’ui Yin,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for Documents [Chang-yin tuchih-hui ch’ien-shih]; Hsü Kuei, Left Provincial Administration Commissioner; and Wei Fu,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and held another investigation. Since the facts and theories concerning the barbarians and their boat, aside from the encounter with the wind, are consistent and in harmony, we put aside that one fact and ordered that the notes of the proceedings in the matter of the men be turned over to this office. In accordance with the facts and principles involved in the case, in respect to Ch’oe Pu and the others, this office grants its endorsement and commissions Commander Yang Wang to take charge of escorting them to the capital. Let the stations and transfer stations under this office give to the dispatched official food and boats and to the escorting troops and Ch’oe Pu and his company rations, red boats, and laborers. It is fitting that all offices on the road ahead should comply. Let the sword and bow that have been sent out be turned over to the Public Treasury to be stored. When we have received a report from the Treasury that it has taken them in, we shall order direct individual and group memorials requesting the arrangements to be allowed. First, let copies of the handling of the case be prepared and, as acknowledgement, individually reported here.”
 
 
===12일===
 
十二日,在杭州,是日晴,臣謂程保等曰:“顧壁誠心待我,凡所聞所見,悉告無隱,俾我不迷,恩情甚重,欲表信物,顧我行李一無些子之儲,所有者,只此衣耳,我欲解以與之”保等曰:“前日解一衣,贈許千戶,今日又解贈顧公,則所穿之衣,只一件耳,迢遞萬里之路,敵誰改為?”臣曰:“古人以一衣三十年者有之,我之作客他鄉,只在一年之間,今時日漸懷,一布衣足以當之,且虫也魚感恩,亦欲報之,而況於人乎?”即解衣與壁,壁揮手以却.臣曰:“朋友之賜,雖車馬不拜,况此矮小之乎?昔韓退之留衣以別大顚,
 
則臨別留衣,即古人之意也.”壁曰:“本欲却之,恐阻盛意,”受而去之.O浙江布政司,東南至海,南至福建界,管十一府州,統七十六縣,內有杭州為第一,即五代時吳越國,宋高宗南渡遷都之地,所謂臨安府也,府治、仁和·錢塘兩縣之治及鎮守府、都司、布政司、運司、按察院、__法察院、中察院、府學、仁和學、錢塘學、武林驛,俱在城中,城中又有吳山,其景最好,上有十廟,伍子胥廟、三茅觀、四聖廟等也,又有九井、三潭,吳山大井為上,郭婆上八眼、下八眼、中八眼、西寺等井居次,又以小溝浚西湖之井,導入城中,府之鎮,乃武林山也,西湖在城西二里,南北長,東西徑十里,山川秀發,歌管瞬間之地,竹閣在廣化院,白樂天
 
所建,樂天詩宵眠竹閣間者此也,岳鄂王墓在棲霞嶺口,冷泉亭在靈隱寺前飛來宰下,古誌,許由嘗飲於靈隱潤者此也,表忠觀龍山南,有東坡所撰碑,風堂嶺在放牧馬場西,即東坡訪辨才之處,南屏山在興教寺後,崖壁剝落之餘,唯存司馬溫公隸書家人卦及米元章書琴臺二字,坡詩我識南屏金鯉魚者此也,蘇公與興教寺相對,東坡守杭時所築,長十餘里,中有六橋,难德觀在蘇公第一橋下,袁韶奏請建祠,取錢塘名人自許由至張九成及節婦五人等三十九人,摘傳立祠,豐樂樓在城西涌金門外西湖岸,其北有環碧園園,玉蓮堂在湧金門,北門內又有湧金池,玉壺園在錢塘門外,東坡詠南满堂杜鵑花節此也,門西有先得樓,雲洞園在昭慶寺北,花柳參差,中有婦人墓,石函橋在水磨頭,白樂天〈湖石記〉云:“錢塘一名上湖,北有石函者是也,宜園在德生堂西,摘東坡詩淡粒濃抹總相宜二字,御書堂扁,斷橋在宜園西,所謂斷橋斜口岸烏紗者此也.西石頭在石函橋西,秦始皇東巡浮海纜船之地,孤山在西湖孤山路西,山之東有林和靖隱廬古基及墓,三賢祠在蘇公第三橋下,乃白文公、林和靖、蘇文忠公祠,已上古蹟,皆顧壁所與臣說話,杭即東南一都會,接屋成廊,連成帷,市積金銀,人擁錦繡,蠻橋海舶,榆立街衢,酒帘歌樓,咫尺相望,四時有不謝之花,八節有常春之景,真所謂別作天地也,
 
 
항주<ref>[http://www.travi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62 항저우-낙원에도 전통과 역사가 있다면?, 트래비, 2010.04.29]</ref><ref>[http://m.blog.daum.net/birdie29/74?np_nil_b=1&categoryId=5 항주]</ref>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신이 정보 등에게 말하기를,
 
 
“고벽이 성심껏 나를 대하여 보고 듣는 바를 숨김없이 죄다 알려주어 나를 헷갈리지 않도록 하였다. 심히 두터운 은정을 신물(信物)로 표시하고자 나의 행장을 돌아보니,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가진 것은 이 옷뿐이니 내가 벗어서 주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보 등이 말하기를, “전일에 옷 한 벌을 벗어 허(許)천호(千戶)에게 주었는데, 오늘 또 옷을 벗어 고공(顧公)에게 준다면 입고 있는 옷은 다만 한 벌뿐입니다. 머나먼 만 리 길에 옷이 해지면 누가 고쳐 만들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 가운데 옷 한벌로 30년을 입은 이가 있었다. 내가 타향에서 손 노릇 하는 것은 다만 1년 동안뿐이며, 지금 날씨가 점차 따뜻해지고 있으니, 베옷 한 벌로도 감당할 수 있다. 또 뱀과 물고기도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를 갚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라 하고, 즉시 옷을 벗어 고벽에게 주니, 고벽은 손을 휘둘러 물리쳤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벗이 주는 것은 비록 거마(車馬)일 지라도 배례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이런 보잘 것 없는 옷이겠소? 옛날 [http://korean.cri.cn/1680/2010/11/24/1s166937.htm 한퇴지(韓退之)]는 옷을 남겨 두어 대전(大廟)에게 작별하였으니<ref>[http://www.jeju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68 태전 선사와 한퇴지, 제주불교신문, 2012.11.16]</ref>, 작별에 임하여 옷을 남겨 두는 것은 곧 옛 사람의 뜻이오”라고 하였습니다.
 
 
고벽은, “원래는 물리치려고 했는데 두터운 은정을 막을까 두렵군요”라고 하면서 받아 갔습니다.
 
 
절강포정사는 동남으로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는 복건의 경계에 이르러 11개의 부 · 주를 관할하고 76개의 현을 통할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항주가 제일인데 곧 오대(五代) 때의 오월국(吳越國)이고, 송나라 고종(高宗)이 남쪽으로 양자강을 건너 도읍을 옮겼던 땅으로서<ref>[http://www.bluetoday.net/news/articleView.html?idxno=3205 돈으로 평화를 사려던 송나라의 최후, 블루투데이, 2013.02.01]</ref><ref>[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6/08/588834/ 800년간 간신의 대명사, 송나라 재상 ‘진회 秦檜’…때로는 허리를 굽히고, 때로는 허리를 펴라, 매일경제, 2016.08.18]</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Dpqvcn40gYM 정강의 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 똑똑 오늘의 세계사, 2019.01.29.]</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9SZ9XELcvO4 [정강의변] Poor Chinese king 무능한 송나라 황제들의 처참하고 비참한 모습, 건하대한, 2015.05.04]</ref><ref>[http://egloos.zum.com/gil092003/v/9885293 송 황실 여인들의 웃통을 드러나게 한 비극의 견양례(牽羊禮)]</ref><ref>[https://motion7.tistory.com/entry/%EB%B9%84%EC%9A%B4%EC%9D%98-%ED%99%A9%EC%A0%9C-%EC%86%A1%EB%82%98%EB%9D%BC-%ED%9C%98%EC%A2%85%EA%B3%BC-%ED%9D%A0%EC%A2%85-%EB%B6%80%EC%9E%90%EA%B8%88%EB%82%98%EB%9D%BC-%EC%B2%AD%EB%82%98%EB%9D%BC-%EA%B3%BC%EC%97%B0-%ED%95%9C%EA%B5%AD%EC%82%AC%EC%9D%B8%EA%B0%80 비운의 황제, 송나라 휘종과 흠종 부자,금나라 청나라, 과연 한국사인가]</ref><ref>[http://egloos.zum.com/gil092003/v/580447 금나라 시조 함보에 관한 기록들]</ref><ref>[https://roadidea.tistory.com/entry/%EA%B8%88%EB%82%98%EB%9D%BC%EC%99%80-%EC%B2%AD%EB%82%98%EB%9D%BC-%EA%B3%BC%EC%97%B0-%EC%97%AC%EC%A7%84%EC%A1%B1%EC%9D%80-%EC%9A%B0%EB%A6%AC%EC%99%80-%EC%96%B4%EB%96%A4-%EA%B4%80%EA%B3%84%EC%9D%B8%EA%B0%80 금나라와 청나라, 과연 여진족은 우리와 어떤 관계인가?[Road Idea]]</ref><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4dwc&articleno=16154418&categoryId=686637&regdt=20130518213734 남송은 왜 항주를 수도로 삼았는가?]</ref> 이른바 임안부(臨安府)입니다.
 
 
부치(府治)와 인화현(仁和縣)·전당현(錢塘縣) 두 현의 현치(縣治)와 진수부(鎭守府)·도사(都司)·포정사(布政司)·염운사(鹽運司)·안찰원(按察院)·염법찰원(鹽法察院) · 중찰원(中察院)·부학(府學)·인화학(仁和學)·전당학(錢塘學)·무림역(武林驛)이 모두 성안에 있습니다.
 
 
성안에 또 [http://www.visitchina.or.kr/community/event.asp?Action=view&Title=1&idx=377 오산(吳山)]이 있는데 그 경치가 가장 좋습니다. 산 위에는 오자서묘(伍子胥廟)<ref>[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6/08/554138/ 춘추시대 불운의 아이콘 ‘오자서 伍子胥’ 리더가 바뀌면 처세도 달라져야 한다, 매일경제, 2016.08.03]</ref><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04586/1 오자서와 합려의 쿠데타 드라마, 신동아, 2005.06.29]</ref><ref>[https://news.joins.com/article/23449346 복수는 나의 힘, 그러나 소원 이룬 오자서의 비참한 최후, 중앙일보, 2019.04.24]</ref> · 삼모관(三觀) ·사성묘(四聖廟) 등 10묘(廟)가 있습니다.
 
 
또 9정(井)과 3담(潭)이 있으니, 오산의 대정(大井) 이 상등이고, 곽파(郭婆)의 상팔안(上八眼) · 하팔안(下八眼)·중팔안(中八眼), 서사(西寺) 등의 우물이 다음이고, 또 작은 도랑으로 서호(西湖)<ref>[http://www.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569906410508 서호, 서시의 민낯을 보다, 울산저널, 2019.05.15]</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8299 조선의 서호]</ref><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27_0050_0020_0050&whereStr= 조선 수원의 서호]</ref>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부의 진산(鎭山)은 무림산(武林山)입니다.
 
 
서호<ref>[https://www.youtube.com/watch?v=hkUJNt5q3cE 【K】China Travel-Hangzhou[중국 여행-항저우]중국 10대 명차, 서호 용정차/West Lake/Alpine/Green Tea/Longjing Tea,
 
걸어서 세계속으로, 2015.05.28]</ref>는 성 서쪽 2리에 있는데 남북은 길고 동서의 직경이 10리나 되고, 산천이 수려하므로 노래와 연주 소리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죽각(竹閣)은 광화원(廣化院)에 있었으니 백낙천(白樂天)이 세운 것입니다.
 
 
백낙천의 시에, '밤에는 죽각 사이에서 졸았다’는 곳이 곧 '''이곳'''입니다.
 
 
악악왕(__岳王)의 무덤<ref>[http://www.maybugs.com/news/articleView.html?idxno=636895 [항저우여행]악왕묘(악비묘)]</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W63DC-lXbzs 어디서아는척하기에딱좋은이야기-중국 송나라 악비 장군의 정충보국, 디딤돌TV, 2018.08.06]</ref>은 서하령(棲霞嶺) 입구에 있습니다.
 
 
냉천정(冷泉亭)은 [http://www.visitchina.or.kr/area/area11.asp?Action=view&Title=%EC%A0%80%EC%9E%A5%EC%84%B1&idx=371 영은사(靈隱寺)]<ref>[http://www.mjmedi.com/news/articleView.html?idxno=25255 지장보살이 된 ‘신라의 왕자’ 김교각, 민족의학신문, 2013.06.13]</ref><ref>[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A%B5%90%EA%B0%81 김교각]</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2309 중국인들, 고선지는 몰라도 김교각은 안다, 오마이뉴스, 2014.08.12]</ref> 앞의 비래봉(飛來峯)이 아래에 있으니, 고지(古誌)에, '허유(許由)<ref>[http://artminhwa.com/%EC%9A%94%E5%A0%AF%EC%9E%84%EA%B8%88-%EC%8B%9C%EB%8C%80%EC%9D%98-%EC%9D%80%EC%9E%90-%ED%97%88%EC%9C%A0%E8%A8%B1%E7%94%B1%EC%99%80-%EC%86%8C%EB%B6%80%E5%B7%A2%E7%88%B6/ 월간민화, 요堯임금 시대의 은자 허유許由와 소부巢父, 2015.10.14]</ref>가 일찍이 영은간(靈隱澗)에서 물을 마셨다’는 곳이 '''이곳'''입니다.
 
 
표충관(表忠觀)은 용산(龍山)의 남쪽에 있는데, 소동파(蘇東坡)<ref>[https://www.youtube.com/watch?v=sdOttc1d5nw 소동파가 직접 만든 요리, ‘동파두부’, ‘동파육’, EBS컬렉션, 2017. 11. 1.]</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C946FWR3MJA 환상적인 맛의 동파육 (how to make dongpo pork), happycooking120180, 2015.11.5.]</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FG2S6Bz7Yh4 소동파는 누구인가?_김성곤(1), 아트앤스터디, 2016.6.1]</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W2AYXvbOixo 소동파는 누구인가?_김성곤(2), 아트앤스터디, 2016.6.1]</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Rw93XD-OoMM 소동파는 누구인가?_김성곤(3), 아트앤스터디, 2016.6.1]</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A-TXBBQRc08 소동파는 누구인가?_김성곤(4), 아트앤스터디, 2016.6.1]</ref>가 지은 비문이 있습니다. 풍황령(風掌嶺)은 방목하는 마장(馬場) 서쪽에 있으니, 곧 소동파<ref>[https://www.youtube.com/watch?v=udjRUrQ-kQs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47회 소동파는 왜 고려를 증오한 ‘혐한파’가 되었을까, 이런 경향, 2015.9.17]</ref>가 변재(辨才)를 찾아보았던 '''곳'''입니다.
 
 
남병산(南屛山)은 흥교사(興敎寺)의 뒤에 있습니다.
 
 
낭떠러지가 벗겨져 떨어진 나머지에 다만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예서(隸書) 가인괘(家人卦)와 미원장(米元章)이 쓴 금대(琴臺)란 두 글자가 남았는데, 소동파의 시에, ‘내가 남병산의 금직어를 안다’는 곳이 곧 '''이곳'''입니다.
 
 
소공제(蘇公滉)는 흥교사와 서로 마주보고 있으니 소동파<ref>[https://www.youtube.com/watch?v=wLvmmh9wqYg 소동파의 과거시험 답안]</ref>가 항주의 지주(知州)로 있을 때 쌓은 것으로 길이가 10여 리나 되었고, 가운데에 6교(__橋)가 있습니다.
 
 
정덕관(佐德觀)은 소공제의 제일교(第一橋) 아래에 있습니다. 원소(袁韶)가 주청(奏請)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전당(錢塘)의 명인 허유(許由)로부터 장구성(張九成) 및 절부(節婦) 5인 등 39인을 취하여 전기(傳記)를 적고 사당을 세웠습니다.
 
 
풍악루(豊樂樓)는 성 서쪽의 용금문(湧金門) 밖 서호(西湖)의 언덕에 있는데, 그 북쪽에 환벽원(環碧園)이 있습니다.
 
 
옥련당(玉蓮堂)은 용금문(浦金門)에 있고, 성의 북문 안에 또 용금지(源 金池)가 있습니다.
 
 
옥호원(玉壺園)은 전당문(錢塘門) 밖에 있으니, 소동파가 남의당(南漪堂)의 두견화(杜鵑花)를 읊은 곳 이 곧 '''이곳'''입니다.
 
 
전당문 서쪽에는 선득루(先得樓)가 있습니다. 운동원(雲洞園)은 소경사(昭慶寺) 북쪽에 있는데, 꽃과 버들이 들쭉날쭉 섞여 있고, 가운데는 부인(婦人)의 무덤이 있습니다.
 
 
석함교(石函橋)는 수마두(水磨頭)에 있는데, 백낙천의 〈호석기(湖石記)〉에, 전당을 또한 상호(上湖)라 부르니 북쪽에 석함(石函)이 있다'고 한 곳이 곧 '''이곳'''입니다.
 
 
총의원(摠宜園)은 덕생당(德生堂) 서쪽에 있는데, 소동파 시의, 아담하고 짙은 분장이 모두 서로 알맞다’에서 '총의(摠宜)’ 두 글자를 따서 어필(御筆)로 당(堂)의 편액(扁額)에 썼던 것입니다.
 
 
단교(斷橋)는 총의원의 서쪽에 있으니 이른바 '단교의 지는 해에 오사모(烏紗帽)를 젖혀 쓴다고 한 곳이 곧 '''이곳'''입니다.
 
 
서석두(西石頭)는 석함교의 서쪽에 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동쪽으로 순행하여 바다에 떠서 배를 닻줄로 매었던 '''곳'''입니다.
 
 
고산(孤山)은 서호의 고산로 (孤山路) 서쪽에 있는데 고산의 동쪽에 [http://www.culturecontent.com/dictionary/dictionaryView.do?cp_code=cp0602&dic_seq=272 임화정(林和靖)]<ref>[http://m.blog.daum.net/framefree/57 조세걸의 고산방학도, 정선의 고산방학도]</ref><ref>[https://dbr.donga.com/article/view/1303/article_no/7406 서호의 학이 늘 내게 돌아오듯...동아비즈니스리뷰, 193호, 2016.1월]</ref><ref>[http://www.igj.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659 [강원구 칼럼] 강원구박사의 중국여행 16]</ref>이 숨어살던 초려(草廬)의 옛터와 무덤이 있습니다.
 
 
삼현사(三賢祠)는 소공제 제삼교아래에 있으니, 곧 백문공(白文公)·임화정(林和靖) · 소문충공(蘇文忠公) 의 사당이었습니다.
 
 
이상의 고적들은 모두 고벽이 신에게 얘기해 준 것입니다.
 
 
'''항주는 곧 동남방의 큰 도회(都會)로서, 가옥이 잇달아 행랑을 이루고 치맛자락이 이어져 장막을 이뤘으며, 저자에는 금은이 쌓여 있고 사람마다 비단옷을 걸쳤습니다. 그리고 만장(___), 해박(海舶)이 빗살처럼 죽 늘어서 있고, 거리에는 주렴(酒帝)과 가루(歌樓)가 가깝게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며, 사철에 시들지 않는 꽃이 있고, 팔절(八節)에 늘 봄과 같은 경치가 있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별천지였습니다.'''
 
 
*일호이탑삼도삼제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14789 뇌봉탑], 보숙탑
 
*완공돈, 호심정, 소영주 (세 개의 인공섬)
 
*백거이: 백제
 
*소동파: 소제
 
(조) p. 233-246
 
 
*기후
 
*인명
 
*도덕
 
*심리(온정)
 
*심리(보은)
 
*고사
 
*지리
 
*지명
 
*토목(물을 대는 기술)
 
*문학고사
 
*불교
 
*묘소
 
*사당
 
*분석(감상)
 
 
12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fair.
 
 
I said to Chòng Po and others, “Ku Pi has treated us sincerely. He has told us all he has heard and seen, hiding nothing, so that we have not been led into error. He has been very kind, and I want to give him a token of our esteem, but I have nothing in my baggage. All I have is this gown, which I am going to take off and give to him.”
 
Chong Po and others said, “You took off a gown previously and gave it to Chiliarch Hsü. If you take off another today and give it to His Honor Ku Pi, you will have only one gown to wear. When that wears out on the long journey, who will replace it?”
 
I said, “There were men in olden times who had one gown for thirty years; yet I have been traveling abroad for less than one year. The days are becoming warmer now, and one piece of clothing is enough. In any case, even snakes and fishes are grateful for kindness and want to repay it; how much more so with men?” I took off the gown to give it to Ku Pi, but he waved his hands and refused it. I said, “Between friends, no gift, not even a horse and carriage, need be refused. How much less [need one refuse] this short gown? Han T’ui-chih of old left a gown as a parting present to Ta-tien, so there is a precedent for leaving a garment with a friend at parting.”'24
 
Ku Pi said, “I really want to refuse, but I am afraid of offending you.” He took it and left.
 
XXX The Chekiang Administrative Region extends to the sea in the southeast and the border of Fukien in the south. It has charge of eleven prefectures and departments and controls seventy-six counties. In it, Hang-chou is preeminent, having been the Wu-Yüeh [908-932] of the Five Dynasties period [907-960] and the Lin-an Prefecture to which Sung Kao Tsung [r. 1127-1162] moved his capital when he crossed to the South.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s of Jen-ho and Ch'ien-t’ang counties, the Grand Defender's Headquarters,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Salt Distribution Commission [Yen-yün ssu], Provincial Surveillance Office, Salt Law Supervisory Commission [Yen-fa ch'a-yuan], Central Surveillance Office [Chung ch'a-yüan], Prefectural School, Jen-ho School, Ch’ien-t’ang School, and Wu-lin Station are all within its wall.
 
Also within the wall is Mt. Wu, a most pleasing sight.25 On it are ten shrines, Wu Tzu-hsü Shrine,26 Three Maos Hermitage, 27 Four Sages Shrine, and others. There are also nine wells. Three Lakes and Mt. Wu Great Well are at the top with Kuo-p'o, Upper Eight Eyes, Lower Eight Eyes, Middle Eight Eyes, West Monastery, and other wells following. [The water of] West Lake wells is also led through small conduits into the town. The guardian mountain of the prefecture is Mt. Wu-lin.28
 
West Lake is two li west of the wall and is ten li north to south and east to west. The mountains and rivers [there] are very beautiful. It is a pleasure resort where singing and music are heard on every side. The Bamboo Pavilion in the Kuang-hua Monastery was built by Po Lo-t'ien [Po Chü-i]. It is the one in Po Lo-t’ien's poem, “Sleeping the Night in a Bamboo Pavilion.”29 The tomb of Yo [Fei],30 Prince of E, is at Ch’i-hsia Range Pass. Cold Spring Pavilion is in front of Ling-yin Temple and below Fei-lai Ridge. This spring is the Ling-yin Stream from which, according to ancient records, Hsü Yu used to drink.31 Piao-chung Hermitage is south of Mt. Lung and has a stone with a memorial composed by Tung-p'o [Su Shih). Feng-huang Range is west of Fang-mu-ma-ch'ang. It is the place where Tung-p'o visited Pien-ts’ai.32 Nan-p’ing Mountain is behind Hsing-chiao Temple. There remain on the crumbling cliff only the Diagram of the Family, written in square style by Ssu-ma Wen Kung [Ssu-ma Kuang], and the two words “lute terrace”, written by Mi Yüan-chang. Tung-p’o's poem, “I Remember the Nan-p'ing Goldfish” [refers to] that place.33 Su-kung Dike is across from Hsing-chiao Temple and was built by Tung-p'o when he governed Hang-chou. It is over ten li long and has six bridges on it.34 Ching-te Hermitage is below Bridge No. 1 of Su-kung Dike. When Yüan Shao asked in a memorial to build a shrine, he selected thirty-nine people – famous men of Ch’ien-t’ang from Hsü Yu to Chang Chiuch'eng and five virtuous women-, compiled their biographies, and established the shrine.35 Feng-lo Tower is on the bank of West Lake outside Yung-chin Gate, a west gate of the wall. Aquamarine [huan-pi] Garden is north of it, and Yü-lien Hall is at Yung-chin Gate. Inside the north gate of the wall there is also Yung-chin Lake. Jade Vat Garden is outside Ch’ien-t’ang Gate. Tungp'o's poem, “The Rhododendrons of Nan-i Hall” [refers to] that place. West of the gate there is Hsien-te Tower. Cloudy Gorge Garden is north of Chaoch'ing Temple; flowers and willows grow profusely, and among them are women's graves. Stone Box Bridge is at Water Mill Head. When Po Lo-t’ien, in his “Record on Stone Concerning [Ch’ien-t'ang] Lake,” says, “Another name for Ch’ien-t’ang is Upper Lake; to the north there is a stone box,” [he refers to] it. Both Fair Garden is west of Te-sheng Hall. Two words were selected from Tung-p'o's poem, “Lightly powdered or heavily painted, both are fair,” and the Emperor wrote the name-plaque for the Hall.36 Tuan Bridge is west of Both Fair Garden. “On Tuan Bridge, slanting sunlight; / On the bank, [rich men's] hats,” [refers to] it.37 West Stone Head is west of Stone Box Bridge and is a place at which Ch’in Shih Huang [r. 221-210 B.C.], sailing the sea on a tour of the east, moored his boats. Mt. Ku is on West Lake Mt. Ku Road. East of Mt. Hsi there are the old foundations of Lin Ho-ching's secluded hut and his grave.38 Three Worthies Shrine is below Bridge No. 3 of Su-kung Dike and is a shrine for Po Wen Kung [Po Chü-i), Lin Ho-ching, and Su Wen-chung Kung [Su Shih]. All the above historical sites Ku Pi told me about.
 
Hang-chou is a major urban center of the southeast. Houses stand in solid rows, and the gowns of the crowds seem like screens. The markets pile up gold and silver; the people amass beautiful clothes and ornaments. Foreign ships stand as thick as the teeth of a comb, and in the streets wine shops and music halls front directly each on another. There are flowers that do not fade through the four seasons and the scenery of everlasting spring all the year round. It truly seems a different world, as people say. XXX
 
 
===13일===
 
十三日,自杭州登程,是日陰,指揮楊旺護臣等自武林驛起程,二十餘里, 至城北門, 門有三層重城, 外門又二層, 日 ‘武林之門’. 城內所過層門十四、大橋十餘、廟三、鋪二,臣乘臟疾驅,或不記其名,所可記者,唯水
 
 
p.394
 
亭公館、解元門、真教寺、登瀛洲門、雲鳳門、觀光門、進士坊、貢院、亨衢門、千勝廟、晏公廟而已,重城外有吳山驛,瞬前又有吳山鋪,又三大橋、四門,皆忘其名,自門外可十餘里間,市肆相接,亦與城中一般,行至天妃宮,宮前即德勝壩河,河邊畫筋綁繩,不可勝數,楊旺與其弟楊昇及松 門衛千戶傳榮、錢塘人陳萱及從者李寬·夏斌·唐敬·杜玉等七八人同一船,臣與陪史等及北京人李節、金太同一船,臣之帶去人許尚理等同一紅.過(薄)普濟橋,橋有三虹門,橋上有華光寺、江漲橋,橋有四虹門,橋
 
上有江漲鋪,至香積寺前小留焉,寺有兵房吏、典簿吏,寺即東坡所遊之地也,自德勝壩至此,溫州、處州、台州、嚴州、紹興、寧波等浙江以南商舶俱會,橋竿如簇,夜過通示橋等三橋,橋以水廣,皆設五虹門,甚高大.
 
 
항주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지휘 양왕이 신 등을 호위하여 무림역(武林驛)에서 길을 떠나 20여 리를 가서 성의 북문에 이르니, 문은 3층 겹성이었고 외문(外門) 또한 2층이었는데, ‘무림지문(武林之門)'이라 씌어 있었습니다. 성안에서 층문(門) 14개, 대교(大橋) 10여 개, 묘(廟) 3개, 포(鋪) 2개 등을 지나왔습니다.
 
 
신은 당나귀를 타고 빨리 달려갔으므로, 더러 그 이름을 적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수정공관(水亭公館)·해원문(解元門)·진교사(眞敎寺) · 등영주문(登流洲門)·운봉문(雲鳳門)·관광문(觀光門)·진사방(進士坊)·공원(貢院). 형구문(亨衛門)·천승묘(千勝廟)·안공묘(公廟)뿐입니다.
 
 
겹 성 밖에 오산역(吳山驛)이 있고, 오산역 앞에는 오산포(吳山鋪)가 있었는데 그 밖의 세 대교(大橋)와 네 문은 모두 그 이름을 잊었습니다. 문 밖으로 10여 리 가는 동안 상점이 서로 잇따라 있어 또한 성 안과 같았습니다.
 
 
가다가 천비궁(天妃宮)에 이르니, 천비궁 앞이 곧 덕승파하(德勝鬪河)였습니다.
 
 
강가에 화방(畵__)이 연달아 있어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양왕은 그 아우 양승(楊昇)과 송문위천호(松門衛千戶) 부영(傅榮), 전당 사람 진훤(陳萱)과 종자 이관(李寬)·하빈(夏__)·당경(唐敬)·두옥(杜玉) 등 7-8인과 한 배를 같이 타고, 신은 배리(陪吏) 등과 북경 사람 이절 · 김태와 한 배를 타고, 신이 데리고 간 허상리 등이 한 배에 탔습니다.
 
 
보제교(普濟橋)를 지나니 다리에는 홍문(虹門) 세 개가 있었고 다리 위쪽으로 화광사(華光寺)와 강창교(江張橋)가 있었습니다. 강창교 다리에는 네 개의 홍문이 있고, 강창교 위에는 강창포(江웠鋪)가 있었습니다.
 
 
향적사(香積寺)앞에 이르러 조금 머물렀는데, 절에는 병방리(兵房吏)와 전부리(典簿吏)가 있었으며, '''이 절'''은 곧 소동파가 노닐던 곳이었습니다. 
 
 
덕승파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온주(溫州)·처주(處州)·태주(台州)·엄주(嚴州)·소흥(紹興)·영파(寧波) 등 절강 이남의 상선이 모두 모였는데, 돛대가 총총 잇닿아 있었습니다.
 
 
밤에 통시교(通示橋) 등 세 다리를 지났는데, 강이 넓은 까닭으로 다리에는 모두 다섯 개의 홍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매우 높고 컸습니다.
 
 
*기후
 
*인명
 
*의전
 
*지리
 
*지명
 
*건축
 
 
13th Day. Setting out from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Commander Yang Wang escorting us, we set out from Wu-lin Station. When we had gone more than twenty li, we came to the north gate of the wall.39 It had three stories and multiple walls, and even the outer gate had two stories. Its name-plate said, “Gate of Wu-lin.” Within the wall we passed fourteen gates of more than one story, more than ten big bridges, three shrines, and two stops. Riding a donkey and going fast, I did not record the names of some of the places; I was able to record only those of Shui-ting-kung-kuan, Chiehyüan Gate, Chen-chiao Temple, Teng-ying-chou, Yün-feng Gate, Kuan-kuang Gate, Chin-shih-fang, Kung-yüan, Heng-ch'ü Gate, Ch’ien-sheng Shrine, and Yen-kung Shrine. Outside the multiple wall was Mt. Wu Station, in front of which was also Mt. Wu Stop. There were also three big bridges and four gates, the names of all of which I have forgotten. From outside the gates for more than ten li, markets stretched continuously, just as they did inside the wall.
 
We went on and came to T’ien-fei-kung. In front of the shrine was the Tesheng-pa River. Pleasure boats, tied together in uncountable numbers, were along the banks of the river. Yang Wang, his younger brother Yang Sheng, Chiliarch of Sung-men Garrison Fu Jung, Ch’en Hsüan of Ch’ien-t'ang, and seven or eight of their staff, including Li K’uan, Hsia Pin, T’ang Ching, and Tu Yü, shared one boat. I, my secondary officials, and Li Chieh and Chin T'ai of Peking, shared another boat; and my company, Hð Sang-ni and the others, shared a third boat. We passed P’u-chi Bridge, a bridge of three arches. Above it was Hua-kuang Temple and Chiang-chang Bridge, which had four arches, and above that was Chiang-chang Stop. We arrived in front of Hsiangchi Temple and stayed there a little while. At the temple were a quartermaster and an accountant, and it was a place that Tung-p'o used to visit. In the interval between it and Te-sheng Embankment, merchant boats from Chekiang and places south – Wen-chou, Ch'u-chou, T'ai-chou, Yen-chou, Shao-hsing, Ning-po, and other places - gather, their masts crowded thickly as in a forest.
 
At night we passed T’ung-shih Bridge and two other bridges. Because the river was wide, all the bridges had five arches and were extremely big.
 
 
===14일===
 
十四日,過崇德縣,是日陰,謝村河而東,則其南岸石築新堤,長三十餘里,問之則都·布·按三司所新築也,過十二里洋、堅濟橋、普安橋、大尹廟,水即鴻麗河,河上官解,乃塘(西)(樓】鎮也,有官人韓軸謂臣曰:“你母奶奶知你到此否?”臣曰:“海天茫茫,偶查魚沈,母必以我為已葬魚腹中,傷母心,不孝于親,莫我若也,今蒙大國厚恩,生還故鄉,則母子相見,有勝隆下之融融矣.”因過夸塘橋、萬壽橋、福祿壽橋、福德橋、普濟橋、彭和橋,問其水名,則丞沈河也,又過恩榮門、大德新橋、三里橋、山川壇、(语)(語】溪橋,到崇德縣,知縣趙希賢,字堯卿,以糧釀甚優.水夫謂臣曰:“所過有長安驛,大人知否?”臣曰:“我不知也.”水夫曰:“此則楊指揮從者陳萱私討支供粮釀,不使大人知也.”又自崇德河播舟而上,過終橋稅課局、永安橋、養濟院、朔義門,所過大虹橋有六七,夜三更,過皂林驛,徹夜而行,
 
 
숭덕현(崇德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사촌하(謝村河)를 거슬러 동쪽으로 가니, 그 남쪽은 돌로 쌓은 새 제방으로서 길이가 30여 리나 되었습니다.
 
 
물어 보니 도지휘사, 포정사, 안찰사 등 삼사(三司)에서 새로 쌓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십이리양(十二里洋)·견제교(堅濟橋)·보안교(普安橋)· 대윤묘(大尹廟)를 지나니 강은 곧 홍려하(鴻麗河)이고, 홍려하 위의 관해(官海)는 당서진(棲鎭)이었습니다.
 
 
관인(官人) 한신(韓神)이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 어머님께서 당신이 이곳에 도착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바다 위의 하늘이 망망한데 기러기는 아득하고 물고기는 가라앉았으니, 어머니께서는 필시 내가 이미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으리라 여기실 것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으니, 나처럼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없습니다. 지금 대국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게 된다면 모자가 서로 보게 됨이 수도(遂道) 밑에서 서로 만나는 기쁨보다 더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과당교(塘橋)·만수교(萬壽橋)·복록수교(福祿壽橋) ·복덕교(福德橋)·보제교(普濟橋)·팽화교(彭和橋)를 지나서, 그 물 이름을 물으니 승침하(丞沈河)였습니다.
 
 
또 은영문(恩榮門)·대덕신교(大德新橋) 삼리교(三里橋) · 산천단(山川壇)·어계교(語溪橋)를 지나서 숭덕현(崇德縣)에 도착하니, 자(字)가 요경(堯卿)인 지현 조희현(趙希賢)이 양식과 반찬을 매우 넉넉하게 보내왔습니다.
 
 
수부(水夫)가 신에게 말하기를, “지나온 곳에 장안역(長安驛)이 있었는데 대인께서는 알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몰랐소.”
 
 
“이는 양(楊) 지휘의 종자 진훤이 지급하는 양식과 반찬을 착복하고는, 대인이 알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또 숭덕하(崇德河)에서 배를 끌고 올라가 종교(終橋), 세과국(稅課局), 영안교(永安橋), 양제원(濟院), 삭의문(湖義門)을 지났는데, 지나온 곳에는 큰 [https://gonjiduk.tistory.com/149 홍교(虹橋)] 예닐곱 개가 있었습니다. 밤 3경에 조림역(自林驛)을 지나 밤새도록 갔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유학
 
*도덕
 
*부패
 
 
14th Day. Passing Ch’ung-te County. This day was cloudy.
 
 
[We went up the Hsieh-ts’un River to the Hung-li River.] At T'ang-hsi Market, a public office above the river, an official, Han Shen, said to me, “Does your mother know that you have reached here?”
 
I said, “The sea and sky are boundless; the wild geese are high, the fish are deep.40 My mother must think that I am buried in a fish's belly. No one has been as unfilial as I, no one has so broken his mother's heart. Now, if, through great kindness from your country, I return alive to my native place, then the joy of reunion between mother and son will be greater than that of Duke Chuang of Cheng and his mother when they emerged from the tunnel.”?41
 
[Then we passed from K’ua-t’ang Bridge to Tsao-lin Station and beyond.] We travelled through the night.
 
 
===15일===
 
十五日,過嘉興府,是日晴,三塔灣,過三塔鋪,至龍淵勝境之前,有三大塔臨河岸,地之得名以此.又過龍王廟、嘉禾遞運所、趙氏貞節門、社稷壇、香珠橋,至西水睾,睾前建石柱,作屋廊於河中百餘步,纜舟於廊下,驛丞何榮以詩三絕見遺,臣亦和之,榮另將荣碟、乾雞、八帶魚等物以贈,日:“我朝郎中祁順、行人張謹,會使朝鮮,著《皇華集》,國人實和,徐居正居首列也,其詩有曰:“明皇若問三韓事,文物衣冠上國同,今見足下,誠千載一遇,蒙不棄復承和詩,謹奉薄禮,少助舟中一膳,希目入,幸甚.”臣
 
曰:“郎中文章清德,人所欽慕,今為甚麼官職?張行人亦任甚麼職事?”榮曰:“郎中見貶,為貴州石阡府知府,今已卒矣,張行人被罪,今充錦衣衛之軍,”因問曰:“徐居正今為寧馨官職?”臣曰:“為議政府左贊成,”榮曰:“居正文章,亦海東人物也.”自西水驛過一大橋,至嘉興府,即古攜李城,越敗吳之地,城中有府治及秀水、嘉興兩縣之治,河抱城,自東南而南而西而北,其屋宇宏壯,景物繁華,亦與寧波府同,臣自城南過杉青間,至唐丞相
 
 
p.396
 
 
陸費故里,里在城西,有族門在河之畔,又經安洋門、雲程門、丹兵橋、永福橋、松青巡檢司,夜又冒雨順風,達曙至平望驛而泊.
 
 
가흥부(嘉興府)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삼탑만(三塔灣)을 거슬러 올라가 삼탑포(三塔鋪)를 지나 경치 좋은 용연(龍淵) 앞에 이르니, 큰 탑 셋이 강가에 있었습니다. '삼탑'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또 용왕묘(龍王廟), 가화체운소(嘉禾遞運所), 조씨정절문(趙氏貞節門), 사직단(社稷壇), 향주교(香珠橋)를 지나 서수역(西水驛)에 이르렀습니다.
 
 
서수역 앞에 돌기둥을 세워 강 가운데에다 100여 보쯤에 행랑집을 지었는데, 배를 행랑 아래에 닻줄로 매어 두었습니다. 역승 하영(何榮)이 '''시 세 절구'''를 지어 주므로 신도 화답하였습니다.
 
 
하영은 채찬(菜饌), 건계(乾雞), 팔대어(八帶魚) 등 물품을 특별히 가져다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조정의 낭중(郞中) 기순(部順)과 행인(行人) 장근(張__)이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407 《황화집(皇華集)》]을 지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시'''를 지어 화답했는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569 서거정(徐居正)]<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304 동국통감]</ref>166이 맨 첫줄에 있었습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2016_002 성종실록 64권, 성종 7년 2월 16일 경인 2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평양 선위사 임원준이 와서 복명하고 서거정이 명나라 사신에게 화답한 시를 바치다]</ref> 그의 시에, 영명한 황제께서 삼한(三韓)의 일을 묻는다면, 문물과 의관은 상국(上國)과 같다고 하오'라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족하를 뵈니, 진실로 천년 동안에 한 번 만나게 되는 좋은 기회인데, 저를 내치지 않으시고 다시 '''화답하는 시'''를 얻는 은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삼가 변변치 못한 예물을 드리오니 배 안에서 드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눈에 찬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기(郁) 낭중의 문장과 고매한 덕은 사람들이 흠모하는 바인데, 지금은 무슨 관직이며, 장(張) 행인은 어떤 일을 맡고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기 낭중은 귀주(貴州) 석천부(石F府)의 지부(知府)로 폄직(反職)을 당하였는데, 지금은 벌써 돌아가셨습니다. 장 행인은 죄를 받아 지금은 금의위(錦衣衛)의 군인으로 충당되었습니다.”
 
 
이어서 묻기를, “서거정<ref>[http://www.hsj.co.kr/7330 서거정 선생의 묘가 화성에 있는 이유는?, 화성저넉, 2019.01.10]</ref>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168입니다.”
 
 
하영이 말하기를, “서거정<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6304 동국통감]</ref><ref>[http://www.kumi.net/content/colum_view.php?cat=17&no=3950 안정복 동서강목서문]</ref>은 문장가로서 해동의 인물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서수역에서 큰 다리 하나를 지나 [http://www.chinacorea.com/krsw/201904/t20190401_800163875.html 가흥부]<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schina&logNo=220104528744&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저장성, 자싱, 난후]</ref>에 이르니, 곧 옛날의 휴리성(携李城)으로서 월(越) 나라가 오(吳) 나라를 격퇴시켰던 '''땅'''이었습니다.
 
 
* 오나라
 
* 월나라
 
(조) p. 251
 
* 손견, 손책, 손권: 오(吳, 229년 ~ 280년) 또는 동오(東吳)
 
* 산월족: 산월족은 장쑤 · 안후이 남부부터 장시 · 저장 · 푸젠 · 광둥에 이르는 광대한 산악지대에서 살았다. 이 영역이 어디인가. 바로 손권의 오나라 땅이다. ‘천하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실상 오나라는 통치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위로는 토착 호족세력이 강했고, 밑으로는 산월족 등과 민족갈등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미개척지를 개발해야 했고, 군사적으로는 위와 촉에 대비하는 것 말고도 산월족의 내란을 토벌해야 했다. 220년 위 · 촉 · 오 삼국이 정립된 후에도 오나라는 산월족에 시달렸다. 234년 제갈각이 단양군(안후이 쉬안청)의 산월족을 토벌하겠다고 했을 때, 오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단양군 평정을 만류했다.<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14095/1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신동아, 2015.07.22]</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w7m9PZQyr_0 오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힌 '산월족'은 어디서 왔을까?,
 
밀덕형, 2019.07.20]</ref>
 
* 먀오족(묘족) <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18/2009091800752.html]</ref>
 
 
성 안에 부치와 수수현(秀水縣), 가흥현(嘉興縣) 두 현의 치소가 있었습니다.
 
 
강은 성을 둘러싸, 동남쪽에서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 가옥의 크고 웅장함과 문물의 번화함은 또한 영파부와 같았습니다. 신은 성 남쪽에서 삼청갑(杉靑)을 지나 당 나라 승상 육지(陸)169가 '''옛날에 살던 마을'''에 이르니, 마을은 성의 서쪽에 있었으며, 정문(産門)은 강가에 있었습니다.
 
 
또 안양문(安洋門)· 운정문(雲程門)·단병교(丹兵橋)·영복교(永福橋)·송청순검사(松靑巡檢司)를 지났습니다.
 
 
밤에 또 비를 무릅쓰고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가서 새벽에 평망역(平望驛)에 도착하여 정박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언어(어원)
 
*풍경
 
*시
 
*문학
 
*외교
 
*인명
 
*관직
 
*역사
 
*지리
 
*감상
 
 
15th Day. Passing Chia-hsing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Three Pagodas Bay to Hsi-shui Station.] Stone pillars had been erected in front of the station, making an arcade into the river over five hundred feet long. We tied the boats to the foot of the arcade. Ho Jung, the Station Master, addressed three quatrains of a poem to us, and I, in turn, answered them. Ho Jung also presented to us fish and meat delicacies, dried chicken, eight-band fish, and other things. He said, “Senior Secretary [Langchung] Ch’i Shun42 and Messenger [Hsing-jen] Chang Chin of our Court went on an embassy to Korea and wrote Huang hua chi. The people of the country wrote verses in response to it, So Ko-jong43 being foremost among them. His poem had the lines, 'If the glorious Emperor asks about the Three Han,/Their rites, music, and clothes are the same as those of China.' My meeting you now is truly a rare occasion, and you have even condescended to give me a poem in response. Respectfully I offer you some poor gifts to eke out your provisions in the boat. If you will receive them, I shall be extremely fortunate.”
 
I said, “Senior Secretary Ch'i's literary accomplishments and virtue are much admired. What is his position now? And what post is Messenger Chang filling?"
 
Jung said, “Senior Secretary Ch’i was demoted to Prefect of Shih-ch’ien Prefecture, Kuei-chou. He is dead now. Messenger Chang was charged with wrongdoing and is now banished to the Imperial Bodyguard.” Then he asked me, “What position does So Kō-jong now hold?”
 
I said, “He is Fourth State Councillor.” Ho Jung said, “So Ko-jong, by virtue of his writing, is one of Korea's distinguished men.”
 
From Hsi-shui Station we passed one big bridge and came to Chia-hsing Prefecture, which was the old Hsi-li-ch'eng, the place where Yüeh defeated Wu.44 Inside the wall were the prefectural capital and the seats of Hsiu-shui and Chia-hsing counties. The river cradled the wall, going from southeast south, west, and then north. The houses were handsome and the scenery splendid, the equals of Ning-po Prefecture. From south of the wall, I passed Shan-ch’ing Lock and came to the native village of Lu Chih, a Minister of T’ang. The village was west of the wall, and there was a banner gate on the bank of the river.
 
We passed [five places]. At night we braved the rain and went with the wind till dawn, coming to P’ing-wang Station, where we stopped.
 
 
*가흥 김구와 임시정부
 
*김구, 지금 우리 돈으로 600억원의 현상금
 
*중국인 저보성(상해 항일단체 회장, 절강성장)이 김구를 도왔다.
 
*가흥 남호에 접한 저보성의 본가와 두 아들이 운영하는 종이공장, 실공장.
 
*가흥의 동쪽 첫째 며느리의 고향인 해염의 별장으로 김구 피신. 여기서 6개월 지내고 가흥 저보성의 둘째 아들 집으로.
 
*남호의 여자 뱃사공 주애보와 부부로 위장해서 지냄.
 
*가흥에서 3년 숨어 지내고 1935년 남경으로 떠남.
 
*매만가 76호. 임정식구 은거지. 남문가 일휘교 17호.
 
 
가흥은 산이 없으나 대신 호수와 운하가 낙지발처럼 사방으로 통하며 토지는 비옥하여 각종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과 풍속이 상해와는 딴 세상이었다. 상점은 값을 속여 받지 않고 가게에 손님이 무슨 물건을 놓고 잊어버린 채 갔다가 며칠 후 찾으러 오면 잘 보관하였다가 공손히 내어준다. 고 백범일지에 기술함.
 
 
 
166.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로, 호는 四佳亭이다. 1444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466년 다시 拔英試에 장원한 뒤 六曹의 判書를 두루 지내고 1470년 左贊成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經國大典》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또 왕명을 받고 《鄕藥集成方》을 번역하였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 지리, 의약 등에 정통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東人詩話》 등이 있다.
 
167. 明代 京衛 상의 直衛親軍指揮使司의 하나이다. 洪武15년(1382)에 원래의 儀靈司를 고쳐 설치하였다. 侍衛, 緝捕, 刑獄의 일을 관장하였다. 아래에 詔獄을 설치하였는데, 法司가 관여할 수 없었다. 소속의 鎭撫司를 남북 2司로 나누어, 北鎭撫司가 詔獄을 전담하고, 南鎭撫司가 軍匠을 전담하였다. 아래에 中, 左, 右, 前, 後 등 17所를 통할하였고, 所 아래에 鑾與, 擎盖, 扇手 등의 司가 있어, 將軍校尉를 거느리고 扈衛, 儀杖, 直宿에 대비하였다.
 
168. 議政府는 조선시대의 최고 관청을 말한다. 고려시대의 都評議使司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서 그 수반인 3인의 政丞 즉 領議政, 左議政, 右議政의 合坐기관이었다. 三政丞 은 국가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하고 그 합의를 거쳐 정사를 왕에게 稟達하며, 왕의 결재는 역시 의정부를 거쳐서 해당관서에 전달되었다. 한편 左贊成은 議政府에 속해 있던 종1품 벼슬이다. 세종8년(1426) 의정부를 개편하면서 처음으로 좌찬성과 우찬성 각 1명을 두었다. 相 또는 二宰라고도 하였는데, 百官을 통솔하고 일반 政事의 처리, 국토계획, 외교 등을 맡아보았다.
 
169. 唐代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자는 敬興이고 嘉興 출신이다. 德宗 때 翰林學士, 中書侍郞, 同平章事 등을 역임하면서 각종 개혁정책을 폈으며, 이로 인해 주변의 모함을 받아 忠州別駕로 좌천되어 거기에서 죽었다. 議論文을 잘 지었으며 時弊를 잘 지적하 기로 이름이 났다. 그의 저서 《陸宣公奏議》 24권은 唐代 중기의 사회경제 연구에 꼭 필요한 책이다.
 
 
===16일===
 
十六日,過吳江縣,至蘇州府,是日陰,手牽舟平望河,過迎恩門、安德橋、大石橋、長老鋪、野湖、(鴛鴦)【驚阳湖,湖岸石築堰,可十餘里.又過吳江湖石塘、大浦橋、徹浦橋,至九里石塘,塘限太湖,太湖即《禹貢》震澤底定,周職方楊州戴日具區是也,或謂之“五湖,以其長五百餘里故名,范蠡所遊處也,湖中有洞庭東·西兩山,一名营山,一日千里,崇嚴疊陽,點綴於浩渺間,湖之東北有靈岩山下瞰焉,一名硯石山,即吳築館娃於石者此也,山去姑蘇山十里,山勢連續,抱太湖,湖北又有一山,望之渺茫,乃橫山也,至太湖壩,壩石築跨湖之南北,可五十餘里,即垂虹橋,虹門無慮四百餘穴,窄窄相續,其大者,若木莊、萬頃等橋也,循太湖壩而北,過龍王廟、太湖廟、視門,門前有大塔,塔十四層,層皆架屋,望之若登天梯,又過駐節門,至松陵驛,小停舟而過,過恩榮門、會元門、都室造士門、進士門、譽髦門、儒學、大明橋、登科門,所謂大湖壩,又通跨驛前里開中,直抵吳江縣,其間又有石大橋,虹門凡七十餘穴,驛與縣皆在大湖之中,屋舍壯麗,下鋪礎砌,上建石柱,以營湖水紫迴,橋帆束立於闇闇之中,所謂四面漁家繞縣城者此也,掉過三里橋、迎恩蓋,尹山湖而上,問西望一山,則乃絲子山,其北有山,即姑蘇山也,松江在尹山湖之東,又掉過尹山鋪、尹山橋,左有造舟作浮橋,可三里許,至寶帶橋,橋又有虹門五十五穴,正舟車往來之衝,跨(詹)【灣】臺湖,湖山饒景,望若橫帶,即應博所重建也,夜三更,傍蘇州城東南而西,至姑蘇驛前,自寶帶橋至此驛,兩岸市店相接,商舶禁集,真所謂東南南一都會也,
 
 
오강현(吳江縣)을 지나 소주부(蘇州府)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배를 당겨''' 평망하(平望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영은문(迎恩門)·안덕교(安德橋) · 대석교(大石橋)·장로포(長老鋪) - 야호(野湖)·앵두호(陰虛湖)를 지났습니다.
 
 
호수가 언덕에 제방을 돌로 쌓았는데 10여 리 정도 되었습니다.
 
 
또 오강호(吳江湖)의 석당(石塘)·대포교(大浦橋)·철포교(徹浦橋)를 지나서 구리석당(九里石塘)174에 이르니, 석당(石塘)은 태호(太湖)를 가두고 있었습니다.
 
 
태호는 곧 <우공(禹貢)>의 '진택(震澤)이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곳과 《주례(周禮)》의 〈직방(職方)〉에 '양주(楊州)의 호수를 구구(具區)'라 한다'는 곳이 '''이곳'''입니다.
 
 
* 하는 하왕조. 중국 최초의 왕조. 華 혹은 華夏라고 하는 것은 하왕조의 夏자에서 연유함.
 
* 14대 17명의 임금. 400년 동안 지속. BC 2183부터 1752까지.
 
* 하의 역사로는 우공, 감서, 오자지가, 윤정 등.
 
* 회수(淮水)와 바다 사이에 양주(揚州)가 있다. 팽려 호수에 이미 물이 모여 흐르니 양조(=기러기)가 살게 되었다. 세 개의 강줄기가 이미 바다로 들어가니 진택이 안정되게 되었다.
 
* 여기서 진택이 태호다.
 
* 주례 직방이 양주의 수택을 구구라고 하였다. 주례 운운 구구도 태호.
 
 
어떤 이는 '오호(五湖)'라고도 부르는데 그 길이가 500여 리가 되는 까닭에 '''이름 지어진 것'''으로 범려(范義)가 '''노닐던 곳'''입니다. 179
 
 
호수 안에 동정동산(洞庭東山)과 동정서산(洞庭西山) 두 산이 있는데 '포산(__山)'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눈앞이 천리나 되었고, 높은 바위와 첩첩한 계곡이 광활한 물 사이에 점을 찍은 것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호수의 동북방에 영암산(靈岩山)이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연석산(視石山)'이라고도 불렀으니, 곧 오나라에서 관와궁(館娃宮)을 연석산에 건축한 곳이 '''이곳'''입니다.
 
 
연석산은 고소산(姑蘇山)과의 거리가 10리인데, 산세가 서로 이어져 태호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태호의 북쪽에는 또 산 하나가 있었는데, 이를 바라보면 한없이 넓어 아득했으니 바로 횡산(橫山)이었습니다.
 
 
태호 방죽에 이르니 방죽은 돌로 쌓은 것으로서 호수의 남북으로 가로질러 있었습니다.
 
 
*태호는 옛날에는 바다였으나 양자강 어귀의 삼각주가 발달하면서 형성된 담수호다. 섬이 48개 있고 산봉우리가 72개 있어서 태호 72峯으로 불린다. 山外유산 湖中유호.
 
*가흥-->오강-->소주-->무석-->상주
 
*태호 주위로 합여성, 월성유적지, 수나라 대운하, 당나라 보대교, 송나라 자금암, 원나라 천지석옥.
 
*55개의 홍문으로 이어진 보대교 317미터의 중국 최장의 석교, 현존.
 
*太湖石: 정원석으로 인기. 이화원, 열하의 피서 산장에도.
 
*태호석 때문에 반란. 송나라 휘종. 축산조원하는 취미.
 
*채경이라는 간신. 蔡京
 
*채경은 주면을 불러 나무와 암석 수집 시작.
 
*화석강. 강이란 지역에서 거둬들인 물건을 운반하는 선단을 의미.
 
*양지가 운반책임자.
 
*생일선문운반조직, 생진강.
 
*과정 1120년 방랍의 난 발생.
 
*1121 평정.
 
*1127 금나라에 의해 개봉 함락. 휘종, 흠종 포로.
 
*휘종의 9남. 조구가 난징으로 도망. 남송 건립.
 
*방랍의 난 진압, 한세충.
 
*농민출신 악비
 
*태호석이 수호지 만듦.
 
 
50여 리쯤 가니 곧 수홍교(垂虹橋)였는데 홍문은 400여 개의 구멍이 촘촘히 서로 잇따라 있었습니다. 그 큰 것으로는 목장교(木莊橋)·만경교(萬頌橋)84 등과 같은 다리가 있었습니다.
 
 
태호방죽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용왕묘(龍王廟)·태호묘(太湖廟)185 · 축성문(祝聖門)을 지났습니다.
 
 
축성문(祝聖門) 앞에 큰 탑이 있었는데, 탑은 14층으로서 층마다 모두 지붕을 얽었으므로, 이를 바라다보니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 같았습니다.
 
 
또 주절문(駐節門)을 지나서 송릉역(松陵驛)에 이르러 배를 잠시 멈추었다가 지나갔습니다.
 
 
은영문(恩榮門)·회원문(會元門)·도실조사문(都室造士門)·진사문(進士)·예모문(譽聖門)·유학(儒學)·대명교(大明橋) · 등과문(登科門)을 거쳤습니다.
 
 
이른바 태호방죽은 또 역 앞의 마을 가운데를 통해서 바로 오강현(吳江縣)에 이어졌는데, 그 사이에 또 돌로 만든 큰 다리가 있어 홍문이 모두 70여 구멍이나 되었습니다.
 
 
역과 현이 모두 태호의 섬 안에 있었으며, 옥사(屋舍)가 웅장하고 화려했는데, 아래에 주춧돌을 놓고 위에 돌기둥을 세워 호수를 둘러싸 돛대가 여염(__) 속에 나뭇단처럼 서 있었으니, 이른바 "사면으로 어가(漁家)가 현성을 둘렀다"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노를 저어 삼리교(三里橋), 영은암(迎恩養)을 지나 윤산호(尹山湖)를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서쪽에 바라다 보이는 한 산을 물으니 사자산(絲子山)이었습니다.
 
 
그 북쪽에 산이 있었으니 고소산(姑蘇山)189 이었습니다.
 
 
송강(松江)은 윤산호(尹山湖)의 동쪽에 있었습니다.
 
 
또 노를 저어 윤산포(尹山鋪), 윤산교(尹山橋)를 지나가니, 왼쪽에 배로 만든 부교(浮橋)가 있었는데 3리 정도 되었습니다.
 
 
보대교(寶帶橋)에 이르니 다리에는 또 홍문 55개192가 있어 배와 수레가 왕래하는 요충이었으며, 담대호(濬臺湖)193 건너 아름다운 호수와 산의 경치는 바라보면 허리띠를 두른 것과 같았으니 바로 추응박(鄒應博)이 다시 세운 것이었습니다.194
 
 
밤 3경에 소주성 동쪽에 가까이 가서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돌아 고소역(姑蘇驛)195 앞에 이르렀습니다.
 
 
보대교에서 이 역에 이르기까지의 양쪽 언덕에 시점(市店)이 서로 잇닿아 있고 상선(商船)이 한 곳으로 몰려드니 참으로 이른바 동남방의 큰 도시였습니다.
 
 
*기후
 
*지명
 
*기술
 
*고사
 
*언어(어원)
 
*풍경
 
*건축
 
*경제
 
 
16th Day. Passing Wu-chiang County and arriving at Su-chou Prefecture. This day was cloudy.
 
 
The boats were towed up the P'ing-wang River, past [bridges, lakes, and other landmarks), and came to Chiu-li Stone Dike. The embankment bounded Lake T'ai. Lake T'ai is the lake of which it is said in Yü kung, “And it became possible to still the marsh of Chen” [Legge, III:110], and is called in the Chou (Chih-fang, Yang-chou-sou), “Chü-ch’ü.” Some call it Five Lakes; it is so named because it is over five hundred li long. 46 It is a place that Fan Li47 used to visit. In the lake are two mountains, Tung-t’ing East Mountain and Tung-t'ing West Mountain. They are also called Pao Mountain. From them, one can see for a thousand li. Their lofty cliffs rise up in ranges, ornaments on the vast expanse of water. Northeast of the lake, Ling-yen Mountain looks down on it. Another name for it is Yen-shih Mountain. It is the Yen-shih on which Wu built Kuan-wa.48 The mountain is ten li from Ku-su Mountain. Mountains lie in ranges, cradling Lake T'ai. In the north there is also a single mountain vaguely visible in the distance. It is Mt. Heng.
 
We came to Lake T'ai Embankment, which was built of stone and straddled the lake north to south for over fifty li. It was Ch’ui-hung Bridge, 49 with at least four hundred arches, one slender one after another. In size it was like such bridges as Mu-chuang and Wan-ch’ing. Going north along Lake T'ai Embankment, we passed Lung-wang Shrine, Lake T'ai Shrine, and Chusheng Gate, in front of which was a great pagoda of fourteen stories. All the stories had rooms, and it looked like a ladder rising into the sky.
 
We passed Chu-chieh Gate and came to Sung-ling Station. We stopped the boats a little while and then went on, past [six gates, a school and a bridge). Lake T'ai Embankment passed along village gates in front of the station and extended to Wu-chiang County. Along that part, too, was a large stone bridge, with more than seventy arches altogether. Both the station and the county were in Lake T'ai. The houses were beautiful, with stone plinths and well walls laid below and stone columns erected above. The lake water wound in and about them, and masts and sails stood grouped in the villages. It is there of which it has been said, “On all sides fishermen's houses wind round the county wall.”
 
We went from San-li Bridge to Pao-tai Bridge, another great bridge] of fifty-five arches, a crossroads of boat and wheel traffic spanning Lake Tant'ai like a sash spread across the rich scenery of the lake and mountains. It had been rebuilt by Tsou Ying-po.50
 
In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we followed alongside the Su-chou Wall, east, south, and then west, and arrived in front of Ku-su Station. From Pao tai Bridge to that station, shops and markets one after another lined both river banks, and merchant junks were crowded together. It was well called an urban center of the southeast.
 
 
174. 乾隆《吳江縣志》권6, 塘路.
 
175. (禹貢)의 원문은 “三江旣入, 震澤底定”으로 ‘三江이 흘러 들어가니 진택이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뜻이다. 진택은 호수 이름이다.
 
176. 이 구절은 《周禮》에도 나오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書經》의 주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具區는 震澤 곧 太湖를 뜻한다. 원문은 “揚州藪曰具區”이다.
 
177.《國語》〈越語)와 《史記》〈河渠書〉 등에 의하면 五湖는 처음에는 太湖를 지칭하였던 듯한데, 후일에는 太湖 유역 일대의 모든 호수를 범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178. 춘추시대 말기의 정치가로 자는 少伯이다. 楚나라 사람이나 나라에 들어가 上將軍이 되었다. 越王 句踐이 吳나라에 패한 뒤 그는 대부 文鍾과 함께 월왕을 도와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兎死狗烹의 화를 염려하여 스스로 관직을 떠났으 며, 이후 장사를 시작해 큰 돈을 벌었다. 일설에는 그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오왕의 애첩인 西施를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179.《李太白集注》권32의 〈雜言寄李白〉에 “莊周萬物外, 范◇五湖間”이란 구절이 있다.
 
180. 包山 혹은 洞庭山이라고도 한다. 한편 포산은 동정서산만 지칭하기도 한다. 光緖《蘇州府志》권6, 山1.
 
181. 古名은 石鼓山, 《吳郡志》권15 山 참조.
 
182. 春秋時代 吳의 宮名으로 吳王 夫差가 연석산에 궁을 만들어 西施에게 살도록 했다. 오에서는 미녀를 娃라고 했기 때문에 館娃'라고 한 것이다. 이상 《吳郡志》 권8, 古蹟; 권 15, 등 참조.
 
183. 홍문은 실제로 72개이다.
 
184. 石 위에 있는데 元 至正 연간에 창건되고 明永樂연간에 重修되었다. 弘治《吳江志》 권5, 橋.
 
185. 太湖의 神을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宋 大中祥符 연간에 창건되었다. 乾隆《吳江縣권7, 壇廟祠.
 
186. 송대에 처음 만들어졌는데 洪武元年(1368)에 學宮 즉 江南儒學의 동쪽으로 옮겼다. 光緖《蘇州府志》 권23, 公署3; 弘治《吳江志》 권4, 官字 등 참조.
 
187.《方輿勝覽》권2에 의하면 이 시는 李貴의 吳江縣詩에 나온다고 한다.
 
188.北門 밖의 倉場 좌측에 있다. 元 泰定원년(1324)에 창건되었다가 무너진 뒤 天順6년(1462)에 重建되었다. 弘治《吳江志》 권5, 橋塘.
 
189. 府治에서 서쪽으로 30리의 거리에 있는데 橫山의 서북과 접해 있다. 일명 姑骨 혹은 姑餘라고도 한다. 光緖《蘇州府志》권6, 山1.
 
190. 吳江縣의 東門 밖에 있는데 일명 松陵으로 바로 吳淞江을 지칭한다. 光緖《蘇州府志》 권8, 水.
 
191. 隆慶《寶應縣志》권3, 建置, 鋪舍.
 
192. 홍문은 실제로 53개이다.
 
193. 원문에는 ‘隋臺湖'로 되어 있으나, 澹臺湖'의 誤記로 보인다. 隆慶長洲縣志》권10 水部, 城外運河에 의하면 澹臺湖는 長洲縣 南西界 太湖에 위치하고 있다.
 
194. 寶帶橋는 남북으로 30여 文 길이로 隨臺湖에 걸쳐 있다. 그 명칭은 唐의 王仲舒가 | 寶帶를 풀어헤치고 공사를 도운 데서 유래한다. 宋 紹定5년(1232) 郡守 鄒應博이 重建하였다. 《吳都文粹續集》권35, 橋梁.
 
195. 姑蘇水馬驛의 약칭으로 吳縣 胥門 밖에 있다. 宋 紹興14년(1144)에 건립되었는데 | 웅장하고 화려하여 三吳의 으뜸이라고 한다. 光緖《蘇州府志》 권23, 公署3.
 
 
===17일===
 
十七日,留泊姑蘇驛前,是日晴,蘇州即古吳王闔閭使伍子胥城而都之,城周又與杭州同,府治及吳縣、長洲縣之治,皆在城中,城之門,舊有姑蘇臺,今廢為驛,植木水中為混柱,作石堤三面,皇華樓據其前,昭陽樓建于後,臣問諸傅榮曰:“此驛若是姑蘇臺之址,則即古吳王所築臺之處乎?”榮曰:“非也,古所謂姑蘇臺在姑蘇山,吳王闔閭因山起臺,夫差侈大之,遺址猶存,紹興間又築臺於此,名姑蘇以存故事,今又廢而為驛,又於城中築臺,扁以姑蘇之名”云云,東有遞運所,又有山海鎮,而太湖之水,由石塘注運
 
河,由城東而西,以達于驛,因伍子胥所居,又名胥湖,湖廣可百餘步,北抱市衢,榮映射蘭櫃之間,光景浮動,而城西諸山,天平一室,號為郡鎮,其郡山之勝,日靈岩、五、仰天、秦臺,秩秩有序,而驛適臨之,真景致也,當午有按察御史二大人姓王若宋者來疇中,待我禮賓館,問:“你官何品?”臣對曰:“五品官,”又曰:“你能詩否?”臣曰:“我國士子皆以經學窮理.
 
 
p.398
 
為業,嘲弄風月為賤,故我亦不學詩詞,”又問曰:“算子封朝鮮,今有後否?且有廟墓祀事不廢否?”臣對曰:“算子之後算準為滿所逐,奔馬韓以立都,後為百濟所滅,今無嗣,算子廟在平壤,國家每歲春秋,降香祝牲幣以致祭”又問曰:“你國有何長技,能却隋唐之兵乎?”臣曰:“謀臣猛將,用兵有道,為兵卒者,率皆親上死長,故以高勾麗一偏小之國,猶以再却天下百萬之兵,今則合新羅、百濟、高句麗為一國,物聚地大,財富兵强,忠智之士,車載斗量,不可勝數,”二大人問罪,命外郎奉米一盤、黄腐一盤、麵節一盤以魄,臣作詩以謝,又有官人姓鄭者和約軒詩韻,臣即次之,其官人又以米六、鵝一集、菜一盤、胡桃一盤來贈,又有羅太監家偉姓柳者,年繼十五六,言詞清雅,自城中來饋,以及從者,李節、金大,亦買釀來饋,夜三更,又乘月掉舟而北,過間門,間門之外有通波亭臨湖,舊名高麗亭,宋元豐間所築,以待高麗朝貢之使,亭前接屋連槽,軸鱸如柳,(掉)[韓]至接官亭以泊,亭之西望有大塔,即寒山禪寺,所謂「姑蘇城外寒山寺者也.問其地名,則曰楓橋,問其水名,則日射潭河也.蘇州古稱吳會,東瀕于海,控三江帶五湖,沃野千里,士夫淵藪,海陸珍寶,若紗羅綫段,金銀珠玉,百工技藝,富商大賈,皆萃于此,自古天下以江南為佳麗地,而江南之中以蘇杭為第一州,此城尤最,樂橋在城中,界吳、長洲兩縣治間,市坊星布,江湖眾流,通貫吐納乎其中,人物奢侈,樓臺聯絡,又如間門、馬頭之間,楚商圈舶,輻禁雲集,又湖山明媚,景致萬狀,但臣等乘夜到姑蘇譯,翌日又不喜觀望,又乘夜傍城而過,故白樂天所謂“七堰八門六十坊、三百九十橋及今廢舊添新,勝景奇迹,俱不得記之詳也,
 
 
원전비어있음. 채울 것.
 
 
 
 
 
 
 
 
 
 
 
 
 
 
 
 
 
 
 
 
 
 
고소역 앞에서 유숙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소주<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09083/1 ‘동양의 베니스’ 중국 쑤저우(蘇州), 신동아, 2010.01.08]</ref>는 곧 옛날 오왕(吳王)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D%95%A9%EB%A0%A4 합려(固__)]<ref>[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C%99%80%EC%8B%A0%EC%83%81%EB%8B%B4 와신상담]</ref>196가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C%98%A4%EC%9E%90%EC%84%9C 오자서(伍子昏)]에게 성을 쌓게 하여 도읍으로 정했던 곳입니다.
 
 
성 둘레는 항주와 같았으며, 부치와 오현(吳縣), 장주현(長洲縣)의 치소도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성의 서문(胥門)197에 옛날에는 고소대(姑蘇臺)198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역이 되었습니다.
 
 
물속에 나무를 세워 황주(滉柱)를 만들고 돌 제방을 3면으로 만들었는데, 황화루(皇華樓)는 그 앞에 기대 있고, 소양루(昭陽樓)는 뒤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이 부영(薄榮)에게 묻기를, "이 역이 고소대의 터라면 바로 옛날 오왕이 대(臺)를 축조했던 '''곳'''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아닙니다. 옛날의 이른바 고소대는 고소산(姑蘇山)(소주의 소=蘇)에 있었으니, 오왕 합려가 산에 의거하여 대를 만든 것을 부차(夫差)가 다시 넓힌 것인데 허물어진 집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소흥(紹興) 연간에 또 대를 이곳에 축조하고는 고소대라 명칭하여 고사(故事)를 보존했는데, 지금 또 없어지고 역이 되었던 것을 다시 성안에 대를 축조하고는 '고소'란 명칭으로 액자를 붙였던 것입니다" 운운하였습니다.
 
 
동쪽에는 체운소(遞運所)가 있고, 또 산해진(山海鎭)이 있었는데, 태호의 물은 석당(石塘)을 거쳐 운하로 흘러 들어가고, 성 동쪽을 거쳐 서쪽으로 가서 역에 이르게 됩니다.
 
 
오자서가 살았기 때문에 또 '서호(胥湖)'(오자'''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호수의 너비는 100여 보나 되는데, 북쪽으로는 시가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난간 사이로 광선이 반사하니, 빛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듯'''하였습니다.
 
 
성서쪽의 여러 산 가운데 천평산(天平山)이 한 봉우리를 군(郡)의 진산(鎭山)이라 하였습니다.
 
 
그 군에서 경치 좋은 산은 영암산(靈巖山)202, 오오산(五鳥山), 앙천산(仰天山)203, 진대산(秦臺山)204 으로서 질서 정연하게 벌여 있었는데, 역이 적당히 위치하고 있어 참으로 '''경치가 좋았습니다'''.
 
 
정오에 성이 왕(王)과 송(宋)인 안찰어사(按察御史) 두 대인이, 역 안에 와서 저를 예빈관(禮賓館)에서 대접하고는,
 
 
“당신 벼슬은 무슨 품계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5품 벼슬입니다."
 
 
“당신은 '''시'''를 잘 짓습니까?”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모두 '''경학의 궁리(窮理)'''로 업을 삼고 풍월을 농(弄)하는 것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에 저도 시와 사(詞)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는데 지금도 후손이 있습니까? 또한 사당과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일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기자의 후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서 마한(馬韓)으로 달아나 도읍을 정했는데, 후에는 백제에게 멸망을 당하고 지금은 후사가 없습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8390 기자의 사당]은 평양에 있는데, 국가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에 '''분향'''을 하고 [http://www.zonmal.com/mhanja_sen.asp?se=%26%2339228%3B%DF%E5%DF%E6 생폐(性幣)]205를 올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귀국은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
 
 
“지모 있는 신하(=謀臣)와 용맹스런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데 적절하였고, 병졸은 모두 윗사람을 어버이처럼 따르고 그를 위해 죽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오히려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던 것입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400 여수전쟁]</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xxXHnQuL87k [토크멘터리 전쟁史] 43부 고구려-수나라 전쟁편]</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q5qgzEl5f2c 고구려가 수나라 100만 대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ref><ref>[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6958 고구려는 어떻게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나?, 민플러스, 2019.02.26]</ref><ref>[http://mahan.wonkwang.ac.kr/club/oh/%EC%88%98,%20%EB%8B%B9%20%EC%A0%84%EC%9F%81%EC%82%AC.htm 고구려 수당전쟁]</ref><ref>[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40218/60958791/1 고구려가 수-당과 벌인 90년 전쟁이 자기네 국내전쟁이라는 중국의 궤변, 동아일보, 2014.02.18]</ref><ref>[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3175 우리가 변해야 중국이 바뀐다, <칼럼>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통일뉴스, 2017.12.20]</ref>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서 한 나라가 되었으니 물산(物産)은 많고 땅은 크며, 재물은 넉넉하고 군사는 강성하며, 충성스럽고 지모 있는 선비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두 대인은 다 묻고 나서 외랑(外郞)을 시켜서 쌀 1쟁반, 두부 1쟁반, 국수사리 1쟁반을 받들고 와서 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시'''를 지어 사례하였습니다.
 
 
또 정(鄭)씨 성을 가진 관원이 약헌(約軒)의 시(詩)에 화운(和__)해 주기를 청하기에 바로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36604600 차운(次韻)]해 주었더니, 그 관인이 또 쌀 6되, 거위 1마리, 채소 1쟁반, 호두 1쟁반을 보내왔습니다.
 
 
또 나(羅) 태감의 가동(家__)으로 유(柳)씨 성을 가진 자는 나이 겨우 15-16세인데도 말씨가 맑고 단아하였습니다.
 
 
그는 성 안에서 와서 음식을 접대하였는데 종자들에게도 두루 미쳤습니다.
 
 
이절과 김태도 반찬을 사 가지고 와서 대접하였습니다.
 
 
밤 3경에 또 달빛을 이용하여 노를 저어 북쪽으로 가서 창문(門)을 지나니, 창문 밖에는 통파정(通波亭)08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예전 이름은 '고려정(高麗亭)'<ref>[http://book.interpark.com/blog/viewPostList.rdo?&blogName=sweetdr10&myCategoryNo=all&categoryNo=8296453&listType=B&listSize=3&contentLayoutNo=0&tdate=null&allView=allView&postSkinStyle=FFFFFF&pageNo=76 [박현규 교수와 함께 한 대륙 속 우리문화 흔적을 찾아서]<2> 장쑤 성 쑤저우 시의 고려정]</ref>이라 합니다.
 
 
송나라 [https://ko.wikipedia.org/wiki/%EC%9B%90%ED%92%8D_(%EB%B6%81%EC%86%A1) 원풍(元豊)] 연간209에 건축하여 고려에서 조공하던 사신을 대접했던 곳이었습니다. 고려정 앞에는 집과 담이 잇닿아 있으며, 배들이 빗살처럼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 접관정(接官亭)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접관정의 서쪽에 큰 탑이 보였는데 이곳이 곧 한산선사(寒山禪寺)로서 이른바 고소성 밖의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0414_00136 한산사]라는 곳입니다. 그 땅 이름을 물으니 [http://www.cim.chinesecio.com/hbcms/f/article/info?id=b4f4d4f5798c4580b59fc4c90d67c50b 풍교(楓橋)]<ref>[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72 楓橋夜泊(풍교야박), 한겨레신문, 2016.09.06]</ref>라 하고, 그 물 이름을 물으니 사독하(射흰河)라 하였습니다.
 
 
[http://m.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41100010 소주]는 옛날에 오회(吳會)라 불렸던 곳으로 동쪽으로는 바다에 연하고, 삼강(三江)을 끼고 오호(五湖)를 둘렀으며 비옥한 들판이 천 리나 되고, 사대부들이 많이 모인 곳입니다. 사라능단(紗羅綾殺), 금은주옥과 같은 바다와 육지의 진귀한 보물과 온갖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들과 부상
 
 
* 호구사,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0414_00130 호구탑]
 
* 합려 무덤, 검 3,000개.
 
 
 
178-179
 
 
백낙천의 이른바 ‘칠언(七堰)·팔문(八門)·육십방(六十坊)·[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0414_00134 삼백구십교(三百九十橋)]’
 
 
* [http://clipbank.ebs.co.kr/clip/view?clipId=VOD_20120414_00137 졸정원]
 
 
관장하고 있었는데, 지금 또한 소주를 지나 북경을 향해 가면서 먼저 와서 이곳에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어사(御史) 세 대인이 와서 배 위에서 전송하다가 신을 맞이하여 앞에 오게 하고는 예절로 대우하고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의 좋은 사람이므로, 우리들 모두 당신을 존경합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묻기를,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B2%9C%EC%88%9C(%E5%A4%A9%E9%A0%86) 천순(天順)],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84%B1%ED%99%94(%E6%88%90%E5%8C%96) 성화(成化)] 연간에 [https://ko.dict.naver.com/seo.nhn?id=39270900 태감]이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B9%99%EC%84%9C(%E5%8B%85%E6%9B%B8) 칙서(勅書)]를 받들고 당신 나라에 사신 갔었는데, 당신은 성명을 차례대로 댈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천순 연간에는 제가 강보 속에 쌓여(??????????????) 있었던 까닭에 나랏일을 알지 못합니다. 성화 연간에는 태감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0%95%EB%8F%99(%E9%84%AD%E5%90%8C) 정동(鄭同)]<ref>[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2/19/2006121977020.html [이한우의 朝鮮이야기(14)] 명나라의 환관 최고위직에 오른 정동, 주간조선, [1935호] 2006.12.25]</ref>222 · 강옥(__玉)223. 김흥(金興)224 이 서로 잇달아 사신으로 왔었습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407002_001 성종실록 156권, 성종 14년 7월 2일, 임진 1번째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모화관에 나가 사신을 맞고 경복궁에서 칙서를 받다]</ref><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gsmoFKjqee4J:www.inhakoreanology.kr/science/kor_study_dn.php%3Fsq%3D36%26att_sq%3D300+&cd=18&hl=ko&ct=clnk&gl=kr 15세기 말 중국(明)을 견문한조선 지식인의 환관 인식]</ref> 라고 하였습니다.
 
 
또 글을 써서 보이기를, “정 태감과 강 태감은 모두 이미 작고(作古)하고, 김 태감만이 북경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작고란 두 글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은 죽은 사람을 일러 작고라 하니, 이미 고인이 되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어서, “당신나라에서는 무엇이라 이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http://www.cbec.go.kr/hangeul/sub.php?menukey=219&mod=view&no=266158&page=18 물고(物故)]라고 합니다.”
 
 
“물고는 무슨 뜻입니까?”
 
 
“물(物)은 일이고 고(故)는 없음이니, 죽은 사람은 다시 일을 할 수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나라에서는 어떤 경서를 높이고 있습니까?”
 
 
“유사(儒士)들은 모두 사서와 오경만 배워 익히고 다른 기예(技藝)는 배우지 않습니다.”
 
 
“당신 나라에도 학교가 있습니까?”
 
 
“국도(國都)에는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또 종학(宗學)225과 중학(中學)·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 26이 있고, 주(州)·부(府)·군(郡)·현(縣)에도 모두 향교(鄕校)와 향학당(鄕學堂) 28이 있고, 또 집집마다 모두 국당(局堂)이 있습니다.”
 
 
“옛날의 어떤 성현을 숭상합니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230을 숭상합니다.”
 
 
“당신 나라에서는 상례(喪禮)를 몇 해나 행합니까?”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를 따르고, 참최(斬衰)와 자최(齊衰)는 모두 3년을 행하며, 대공(大功)232 이하의 상복(喪服)도 모두 등급이 있습니다.”
 
 
“당신나라의 예절에는 몇 조목이 있으며, 형벌에는 어떤 조목이 있습니까?"
 
 
“예절에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233가 있고, 형벌에는 참형(斬刑)·교형(敍刑)·유형(流刑)·도형(徒刑)·장형(杖刑)·태형(刑) 234 이 있어 한결같이 《대명률(大明律)》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당신나라는 어떤 정삭(正朔) 235을 사용하며, 어떤 연호를 사용합니까?”
 
 
“한결같이 대명(大明)의 정삭과 연호를 따릅니다.”
 
 
“금년은 무슨 연호입니까?”
 
 
“홍치(弘治) 원년입니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대명이 해상에 처음 돋아서 만방에 비치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대국과 한 집안이 되어 공물을 헌납함이 끊어지지 않는데,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당신나라의 관복(冠服)도 중국과 같습니까?”
 
 
“무릇 조복(朝服)236 · 공복(公服)237. 심의(深衣) 238 원령(圓領)239은 한결같이 중화의 복제와 같으나, 다만 철릭의 주름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이어서 신으로 하여금 배리(__吏) 이하 종자들을 불러 와서 상하의 주례(酒禮)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정보 이하 종자들에게 명령하여 [https://www.wordrow.kr/%EC%9D%98%EB%AF%B8/%EC%9D%8D%EC%96%91%ED%95%98%EB%8B%A4/ 읍양(揖讓)]240으로 예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태감은 세 대인과 함께 눈짓을 하며 담소하고는 이어 쌀 20되, 돼지고기 1쟁반, 채소 1쟁반, 약과(藥果) 1쟁반, 술 5동이를 주었습니다.
 
 
신 등은 사례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드디어 배를 타고 보원교(普圓橋)·보은교(普恩橋)·호서포(清單鋪)·오가점(吳家店)·장공포(張公鋪)·불평득승교(不平得勝橋) 242. 통병교(通兵橋) 243망정순검사(望亭巡檢司)·마묘포(馬墓鋪)·순안교(純安橋)를 지나, 밤을 타서 가다가 4경에 석산역(錫山驛)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기후
 
*지리
 
*인명
 
*고증(건축)
 
*지명
 
*언어(어원)
 
*건축
 
*감상(비유)
 
*감상
 
*의전(예절, 절차로)
 
*관직
 
*시
 
*유학
 
*역사
 
*심리(긍지)
 
*의전(음식으로)
 
*인물(분석=사람의 인품, 현재 상황)
 
*경제
 
*풍습(음식)
 
*고증(문학)
 
*외교
 
*언어(조어)
 
*풍습(교육)
 
*제도(교육)
 
*풍습(초상)
 
*제도(형벌)
 
*모화
 
*풍습(의복)
 
 
17th Day. Moored in Front of Ku-su Station. This day was fair.
 
Su-chou is the place to which Ho-lü [r. 514-496 B.C.], King of old Wu, sent Wu Tzu-hsü to enclose it with a wall and make it the capital.51 The circumference of the wall is equal to that of Hang-chou, and the prefectural capital and the seats of Wu County and Ch’ang-chou County are within it. At Hsü Gate in the wall was formerly a Ku-su Tower, which is now done away with for a station. Trees have been planted in the water, forming great pillars, and a stone levee has been built on three sides. Huang-hua Tower stands in front, and Chao-yang Tower is built in the back. I asked Fu Jung about it: “If this station is on the ruins of Ku-su Tower, is this the place where the tower was built by the old King of Wu?”
 
Fu Jung said, “No. What was called Ku-su Tower in olden times was on Ku-su Mountain. King Ho-lü of Wu put up the tower because of the mountain. Fu Ch'ai [r. 495-473 B.C.] enlarged it. The ruins still exist. 52 In the Shaohsing period [1131-1162], another tower was built here and named Ku-su to keep the tradition. Now it has been done away with for a station. A tower was also built inside the wall and given a signboard with the name Ku-su.”
 
To the east was a transfer station and also Shan-hai Market.
 
But the waters of Lake T'ai, flowing into the Grand Canal between stone levees, go east and west along the wall and come out at the station. Because Wu Tzu-hsü lived there, it is also called Hsü Lake. It is about five hundred feet wide. In the north it curves round markets and junctions, winding and sparkling among railings, light dancing from it.
 
Of the mountains west of the wall, the peak T’ien-p'ing is called the guardian mountain of the prefecture. The outstanding mountains of the prefecture are Ling-yen, Wu-wu, Yang-t'ien, and Ch’in-t’ai, one after another. It happens that the station looks out on them, making for an extremely beautiful view.
 
At noon, two eminent persons, Regional Inspecting Censors [An-ch'a yü-shih] named Wang and Sung, came into the Station and received me in the Li-pin-kuan. They asked, “What is your official rank?”
 
I answered, “Fifth Rank.” They said, “Can you write poetry?”
 
I said, “The gentlemen of my country consider studying the Classics and probing to principles to be their concern and moaning about the wind and moon to be cheap; 1, therefore, have not studied poetry.”
 
They asked, “Chi Tzu having been enfeoffed in Korea, are there now descendants of his ? And are his shrine, grave, and rites still kept up?"
 
I answered, “Chi Tzu's successor, Kijun, was expelled by Wei Man. He fled to Ma-han, set up a capital, and later was destroyed by Paekche. There are now no descendants. Chi Tzu's shrine is in P'yongyang, and every year in spring and fall, the state ritually burns incense and sacrifices animals and money.”
 
They asked, “What great technique did your country have, to have been able to repel the Sui and T’ang armies?”
 
I said, “The ministers, who planned well, and the generals, who were bold, knew the right way to wage war. All the soldiers cherished their leaders and died for them. That way, Koguryo, though a remote little country, was capable of twice repelling the armies of China. Now that Silla, Paekche, and Koguryo have been combined into one country, its resources are many, its land big, its wealth great, and its soldiers strong. Its loyal and wise gentlemen are too many to be counted.'
 
When the two eminent persons had finished their questioning, they ordered a deputy secretary to present to us one plate of rice, one plate of bean-curd, and one plate of wheat noodles. I wrote a poem and thanked them.
 
Then an official named Cheng wanted me to match the rhymes of “Yüeh hsüan shih," and I did so. He presented to me six bushels of rice, one duck, one plate of fish and meat delicacies, and one plate of walnuts.
 
One Liu, a house servant of Overseer Lo, was fifteen or sixteen years old and elegant of speech. He came from inside the wall and presented food to [me] and my staff. Li Chieh and Chin T’ai also bought food and came and presented it.
 
In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we rowed the boats north in the moonlight, past Ch’ang Gate. Outside Ch’ang Gate, T’ung-po Pavilion overlooked the lake. Its old name had been Koryo Pavilion, and it had been built in the Yüan-feng period of Sung (1078-1085] to receive tribute-bearers from Koryð. In front of the pavilion, adjoining roofs and rows of masts were as thick as the teeth of a comb.
 
We rowed to Chieh-kuan Pavilion and stopped. To the west, the pavilion looked out on a great pagoda, which was Han-shan Ch’an Temple, the one commemorated in the line, “Outside the Ku-su wall is Han-shan Temple.”53 I asked the name of the place, and [someone] said, “Feng Bridge.” I asked the name of the river, and [someone] said, “She-tu River.”
 
XXX In olden times, Su-chou was called Wu-k’uai. It borders the sea in the east, commands three large rivers and five lakes, and has a thousand li of rich fields. Learned men and gentry abound there; and all the treasures of the land and sea, such as thin silks, gauzes, gold, silver, jewels, crafts, arts, and rich and great merchants, are there. It has been accepted in China from olden times that the land south of the Yangtze River is the beautiful and good land and that within that land Su-chou and Hang-chou are the first departments, especially Su-chou. Yüeh Bridge is inside the wall and separates Wu and Chang-chou counties. Market quarters are scattered like stars. Many rivers and lakes flow through [the region], refreshing and purifying it. The people live luxuriously. There are solid rows of towers and stands, and in such places as the space between Ch’ang-men and Ma-t'ou (the wharves?], merchantmen and junks from Honan, Hopei, and Fukien gather like clouds. The lakes and mountains are fresh and stimulating, the scenic splendors innumerable.
 
But we came to Ku-su Station at night. The following day we did not have the pleasure of looking about either, but, traveling again at night, went along and past the wall. I have not been able, therefore, to record in detail any of the seven dams, eight gates, sixty quarters, or 390 bridges spoken of by Po Lo-t'ien,54 or old things now ruined, new things now added, unusually beautiful scenery, or marvelous remains. XXX
 
 
196. 춘추시대 吳나라 왕이다. 기원전 515년 楚나라에서 망명하여 온 伍子胥와 함께 자객 事諸의 힘을 빌려 오왕 僚를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오자서를 재상으로 삼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兵書인 《孫子》의 저자인 孫武로 하여금 군대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 여 초나라를 위협, 결국 그 수도를 공략하였고, 오나라의 세력을 中原에까지 넓혔다. 후에 越王 句踐에게 패하여 죽었다.
 
197. 府城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姑胥門이라고도 한다. 합려가 이 서문을 지어 고소대를 유람하고 太湖를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姑骨山에서 따온 이름이다. 光緖《蘇州府志》 권4, 城池.
 
198. 일명 胥臺 혹은 姑胥臺라 한다. 吳縣에서 서남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다. 光緖《蘇州府志》권35, 古蹟.
 
199. 제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심은 나무.
 
200. 춘추 말기 吳나라의 왕(재위 B.C. 496-B.C.473)으로, 間의 아들이다. 합려가 越나라에 패해 전사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월나라를 공격하여 월나라 군사를 대파하고 句踐을 신하로 삼았다. 또 艾陵에서 齊나라를 크게 물리치고 제후국간 會盟을 주도하 여 중원의 霸者가 되었다. 그러나 伍子骨의 충간을 물리치고 월나라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 한 데다 寵姬 西施에게 빠진 끝에 구천의 반격을 받아 나라를 잃고 자살하고 말았다.
 
201. 吳縣治에서 서쪽으로 20리 거리에 있는 산으로 府內에서는 가장 높고 기암괴석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光緖《蘇州府志》권6, 山1; 《吳郡志》권15, 山 등 참조.
 
202. 府治에서 서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는 산으로 일명 視石山이라 한다. 光緖《蘇州府志》권6, 1.
 
203. 천평산과 5리도 되지 않는 가까운 산이다. 舊名은 馬鞍山이다. 光緖《蘇州府志》권6,1.
 
204. 천평산의 서쪽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이 회계를 유람할 때 이 산에 올랐던 적이 있기 때문에 秦臺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光緖《蘇州府志》권6, 山1.
 
205. 제사 때 올리는 가축과 幣帛.
 
206. 지방 관아의 小吏
 
207. 約軒은 寧海人 方의 別號이다. 方에게는 〈約軒稿)라는 저작이 있다. “《約軒稿》寧海縣志 方 著”《浙江通志》 권249, 經籍 9, 集部 2.
 
208. 후에 通波新館으로 바뀌었다. 光緖《蘇州府志》 권23, 公署3.
 
209. 高麗亭이 세워진 것은 元豊7년(1084)이다. 光緖《蘇州府志》권23, 公署3.
 
210. 詔勅을 맞이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皇華亭이라고도 한다. 元代에 창건되었고 明洪武 연간에 重建되었다. 光緖《蘇州府志》 권23, 公署3.
 
211. 唐 張繼의 詩〈楓橋夜泊>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月落烏蹄霜滿天, 江楓漁火對愁民.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 《唐百家詩選》권.
 
212. 秦漢代에 會稽郡治가 吳縣에 있었기 때문에 郡과 縣을 함께 칭해서 吳會라고 했다. 來決代에 회계군은 吳郡과 會稽郡으로 분리되었는데 합쳐서 吳會라고 칭했다. 唐代이후에는 일반적으로 平江府, 즉 오늘날의 江蘇 蘇州 일대를 吳會라고 칭했다.
 
213. 吳松江, 錢塘江, 浦陽江을 가리킨다.
 
214. ___웬는 얇은 비단이고, 綾은 두터운 비단으로서, 絹織物을 총칭하는 말이다.
 
215.?
 
216.?
 
217.?
 
218.?
 
219.?
 
220.?
 
221. 成化 연간 蘇杭督織太監을 역임한 羅政을 가리킨다. 孫孤, 《蘇州織造局志》권1, 沿革; 권2, 職員 (江蘇人民出版社, 1959).
 
222. 鄭同은 조선 출신 환관으로서, 成化4년(조선 세조14년)에 세자를 왕(睿宗)으로 책봉하는 목적으로 出使하였다. 《明史》권320, 列傳208, 外國 1, 朝鮮.
 
223. 姜玉은 조선 출신 환관으로서, 세조14년에 조선에 出使하였고 후에도 여러 번 出使했다. 특히 성종11년 5월 1일에는 正使 정동과 함께 副使의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된 바 있다. 《朝鮮世祖實錄》 14년 2월 24일조;《朝鮮成宗實錄》 11년 5월 1일조 등 참조.
 
224. 성종14년에 正使 정동과 함께 副使의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되었으나, 정동이 병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자, 金興이 사실상 正使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 성종실록》 14년 7월 임진 ; 9월 신해 ; 9월 무오.
 
225. 조선시대 종실의 교육을 담당하던 곳으로 성균관의 司成 이하 典籍 이상의 관원이 겸직했다. 세종10년(1428)에 설치하여 연산군 때 폐지했다가 중종 때 복구했지만 후에 다시 폐하였다.
 
226. 조선시대 양반 자제를 위하여 京城에 설치한 교육기구이다. 중학은 북부의 觀光坊, 동학은 동부의 彰善坊, 서학은 서부의 餘慶坊, 남학은 남부의 誠明坊에 두어졌는데 이상을 줄여서 四學이라 하였다.
 
227. 고려시대 이래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이다. 孔子를 제사하는 文宣王廟를 중심으로 강당으로 明倫堂이 있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先哲과 先賢을 제사하는 東西無, 東西兩齋가 있다. 향교는 중앙의 四學과 같은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한 자는 생원과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 官位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중기 이후 향교는 과거를 준비하는 장으로 되고 書院이 발흥하면서 점차 쇠미하여졌다.
 
228. 각 지방에서 국자감에 들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설치한 관립학교,
 
229. 원래 평민층의 자제에게 經典과 弓術을 교습시키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한 고구 러의 사립 교육기관인 高堂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미혼의 평민자제를 교육시키던을 뜻한다.
 
230. 元 至大원년(1308) 7월에 加號된 孔子의 封號.
 
 
231. 喪服名이다. 五服 가운데 참최는 가장 무거운 상복으로 가장 거친 麻布로 만들고, | 자최는 두 번째 무거운 상복으로 조금 덜 거친 마포로 만든다.
 
232. 五服의 하나로 9개월의 喪服을 말한다.
 
233. 吉禮는 祭事, 凶禮는 喪事, 軍禮는 軍事, 殯禮는 葬事, 嘉禮는 結婚에 관한 예의를 뜻한다.
 
234. 참형은 참수형, 교형은 교수형, 유형은 邊遠지방에 보내어 勞役하도록 하는 형벌, 도형은 구금시킨 뒤 勞役하도록 하는 형벌, 장형은 大前條나 大竹板으로 둔부 등을 치는 형벌, 태형은 小前條나 小竹板으로 치는 형벌을 말하는데 이상을 합하여 六刑이라 한다.
 
235. 正朔은 정월 초하루를 의미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제왕이 새 왕조를 열고 새로 반포하는 曆法을 뜻한다.
 
236. 朝會時 君臣이 입는 禮服.
 
237. 帝王와 百官이 공무를 볼 때 입는 옷으로 官服의 통칭으로도 쓰인다.
 
238. 上衣와 下衣가 서로 연결되어 아래는 주름이 잡히고 소매는 넓은 옷으로 평상시에 입는 常服을 말한다.
 
239. 관리의 常服을 뜻하는 團領의 다른 이름이다. 團領에 대해서는 앞의 주 참조.
 
240. 賓主가 相見하는 禮.
 
241. 원문은 普恩橋'로 되어 있으나, ‘普思橋'의 誤記로 보인다. 본문에 의하면 普恩橋는 清單에 위치하고 있는데, 隆慶《長洲縣志》권12, 橋梁에 의하면 墅에 普思橋가 위치하고 있다.
 
242. 太平得勝橋의 誤記이다.
 
243. 원문에는 通兵橋로 되어 있으나, 通吳橋의 誤記로 보인다. 본문에 의하면 通兵橋는 望亭巡檢司로 가기 바로 직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光緖《無錫金眞縣志》 권5, 橋梁에 의하면 無錫縣과 長洲縣의 분계에 위치한 通吳橋는 일명 望亭橋라고 하였다고 한다.
 
 
===18일===
 
원전, 한역본 없음. 채울 것.
 
 
 
 
 
 
 
 
 
 
 
 
 
 
 
 
 
 
 
 
 
 
 
18th Day. Arrival at Hsi-shan Station. This day was fair.
 
 
When it was light, an official named Wu Mo, who was in the same boat as Yang Wang, sent me a letter that said, “I hear, sir, that you are a gentleman of rank and conduct and want to make your acquaintance. My colleague Yang is also in this boat, and we wish to invite you to come and see us. Do not refuse us.”
 
I went, led by Ch’en Hsuan. When I and Chòng Po reached their boat, Wu and Yang had put their chairs round a table. They folded their hands in greeting, and we sat down together. They served us tea and things to eat and were very courteous to us.
 
From Feng Bridge we [reached Ch’ao Barrier]. When boats passing north and south reached there, they were anchored in a cove and inspected before proceeding. An Overseer named Lo was there. Formerly he had been in charge of weaving and dyeing in Chekiang, and now he had left Su-chou and was going toward Peking. He had come there ahead of us and moored.
 
Three censors who were there came aboard the boats to send us on our way with wine and food. They invited me before them and received me courteously, saying, “You are a good man from a country of propriety and morality. Our important people all respect you.” Then they asked, “In the T’ien-shun and Ch’eng-hua periods [1457-1487], there were overseers who received Imperial orders to go to your country. Can you give their names in order?”
 
I answered, “In the T’ien-shun period I was not yet out of my swaddling clothes, and I knew nothing of affairs of state. In the Ch’eng-hua period, Overseer Cheng T’ung, Overseer Chiang Yü, and Overseer Chin Hsing came successively as envoys.”
 
They wrote something and showed it to me. It said, “Overseers Cheng, Chiang, and Chin have all become ancient. Only Overseer Chin is in Peking.”'55
 
I said, “I do not understand the two words, become ancient.' ”
 
They answered, “The Chinese speak of dying as becoming ancient, meaning that they have already joined the ancients.” Then they asked, “What do you say in your country?”
 
I said, “We call them things old (wu-ku).'” They asked, “What does things old' mean?”
 
I said, “ 'Things (wu)' means 'acts'; 'old (ku)' means ‘not to have.' The expression means not again to have power to act.”'56
 
They asked, “What classics does your country esteem?”
 
I replied, “All the Confucian scholars master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They do not study other disciplines.”
 
They said, “Does your country also have schools ?”
 
I answered, “The national capital has the National Academy and also the Peers' School, Central College, Eastern College, Western College, and Southern College. All the departments, prefectures, counties, and districts have regional schools and local academies. All families have branch academies.”'57
 
They asked, “What sages of old do you revere?” I said, “We revere Confucius.” They asked, “How many years do mourning rites last in your country?”
 
I said, “They follow entirely Chu Wen Kung's Chia li. Both the unhemmed garment and hemmed garment are for three years. The coarsely-woven garment and those below are respectively for shorter periods.''58
 
They said, “What are the sections of the Code of Rites of your country and of the Code of Punishments?”
 
I said, “In Rites there are Sacrifices, Laments, Military Rites, Visits, and Celebrations. In Punishments there are Beheading, Strangling, Banishment, Penal Servitude, and Flogging. They follow entirely the system of the Great Ming Code.”
 
They said, “What calendar and reign-title does your country use?” I said, “We follow the Great Ming calendar and reign-title.” They said, “What is the reign-title this year?”? I said, “It is the first year of Hung-chih.” They said, “It has not been so long; how do you know it?”
 
I said, “When the Great Light (Ta Ming) first came out of the sea, all nations were brightened. Especially when my country is of the same house as China and pays tribute without fail, how could I not know it?”
 
They said, “Are the caps and gowns of your country the same as those of China?”
 
I said, “In all court and official dress, long gowns and round collars, we follow fully Chinese dress. Only the figured linings and folds are slightly different.”
 
They then ordered me to summon the secondary officials and those below them and have them perform the ceremony as between host and guests. The Overseer and the three eminent persons looked on, talking and laughing. Then they presented to us twenty bushels of rice, one plate of pork, one plate of fish and meat delicacies, one plate of herbs and fruits, and five containers of wine. We thanked them and left.
 
We then got into the boats and went [from P’u-yüan Bridge to Hsi-shan Station).
 
 
===19일===
 
十九日,至常州府,是日晴,請朝,無錫縣知縣,忘其姓名,來遺礙物,自驛過建渡橋,入無錫縣治之中,縣即古句吳太伯所都,過建虹橋、都憲門、少司寇弟、億豐橋、進士坊,至錫山之下,山縣西北間,又自錫山過十里鋪、高橋巡檢司、(藩)【潘]鋪、洛社鋪、石潭橋、横林鎮鋪、橫林橋、戚墅鋪、興明橋,至劍井,井在東岸,作屋以覆,即瑞氣升騰之地,日夕,過鷹鋪、大橋,至宋菱橋,橋之東西,皆作二層,閣以當路,即進士牌樓也,又過大虹橋三,至常州府,從東水關入城,府治及武(晉)進縣”之治,俱在城中,所過虹橋,亦至七八,行十餘里,至毗陵曝泊,又出自西水關,府即延陵郡吳季子采邑,湖山之美,亭臺之設,自古稱道,又過遞運所、沛河橋,至(牛)(牛)大壩,手牽舟上岸,繞度壩限,日曙矣,
 
 
상주부(常州府)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아침에 성명은 잊은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9E%A5%EC%91%A4+%EC%84%B1+%EC%9A%B0%EC%8B%9C+%EC%8B%9C/@31.4742581,120.1446243,10z/data=!4m13!1m7!3m6!1s0x35b38e5843e0a6a5:0xd536ed17c4fd3526!2z7KSR6rWtIOyepeyRpCDshLEg7Jqw7IucIOyLnA!3b1!8m2!3d31.491169!4d120.31191!3m4!1s0x35b38e5843e0a6a5:0xd536ed17c4fd3526!8m2!3d31.491169!4d120.31191 무석현(無錫縣)](无锡, Wúxī, 우시)<ref>[http://kr.people.com.cn/n3/2016/1104/c313143-9137247.html 주말에 장쑤 우시(無錫) ‘수향 골목’ 다녀오기]</ref><ref>[https://amkorinstory.com/2601 [중국 특파원] 장쑤성 우시(무석)로 떠난 여행]</ref><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schina&logNo=221601516134 장쑤성 우시 둥린수위안]</ref><ref>[http://blog.daum.net/diverkorea/13745952 우시스튜디오]</ref><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F%99%EB%A6%BC%EB%8B%B9(%E6%9D%B1%E6%9E%97%E9%BB%A8) 동림당]</ref><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0%84%EA%B2%B8%EC%9D%B5(%E9%8C%A2%E8%AC%99%E7%9B%8A) 전겸익]</ref><ref>[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WDnJ&fldid=iBLm&datanum=112&q=%B9%DA%C1%F6%BF%F8%BF%A9%C0%DA%B8%EE%B8%ED%C0%CE%B0%A1&_referer=V7kfJwkeLEGMZxGlgqZEmZ5LeBDxE-YI7f38R4WGyA5WHXUCXu4wK7pN.A8aF7D.J3VU2mbkbxgk2RJDa7MbjOEX-Q3mea_S 동란섭필]</ref>의 지현244이 와서 찬거리를 주었습니다.
 
 
석산역에서 건도교(建渡橋)를 지나 무석현치(無錫縣治)의 안으로 들어왔는데, 무석현은 곧 옛날 구오(句吳) 태백(太伯)245이 도읍했던 곳이었습니다.
 
 
건홍교(建虹橋)·도헌문(都憲門)·소사구제(少司寇第)246. 억풍교(億豊橋)·진사방(進士坊)을 지나 석산(錫山)의 아래에 이르렀는데, 석산은 무석현의 서쪽과 북쪽 사이에 있었습니다.
 
 
또 석산에서 십리포(十里鋪)·고교순검사(高橋巡檢司) 247. 반봉포(潘q鋪) 248. 낙사포(洛社鋪)·석독교(石潭橋)·횡림진포(橫林鎭鋪)·횡림교(橫林橋)·척서포(戚墅鋪)·흥명교(興明橋)를 지나 검정(劍井)에 이르렀습니다.
 
 
검정은 동쪽 언덕에 있었는데 지붕을 만들어 덮었으니, 곧 상서로운 기운이 올라오는 곳이었습니다.
 
 
해질 무렵 마안포(行爲鋪)249, 대교(大橋)를 지나 채릉교(采__橋)에 이르렀습니다.
 
 
채릉교의 동쪽, 서쪽에는 모두 2층 누각을 지어서 길을 막고 있으니 곧 진사패루(進士牌樓)였습니다.
 
 
또 큰 홍교(虹橋) 셋을 지나 상주부에 이르러서 동수관(東水關)250으로부터 성에 들어갔습니다.
 
 
상주부의 부치와 무진현(武進縣)의 현치는 모두 성안에 있었습니다.
 
 
지나온 홍교 또한 7-8개나 되었습니다.
 
 
10여 리를 가서 비릉역(此陵驛)에 이르러 조금 머물렀다가 다시 서수관(西水關)으로 나왔습니다.
 
 
상주부는 곧 연릉군(延陵郡)이므로, 오나라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study0700&logNo=220935278322&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계자(季子)]<ref>[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9672392&memberNo=17146883 계찰계검(季札繫劍)]</ref><ref>[http://www.hangyo.com/news/article.html?no=45703 <사자성어로 교육읽기> 계찰괘검(季札掛劍)]</ref>252의 채읍(采邑) 253 으로서, 호수와 산의 아름다움과 정(亭)과 대(臺)의 설치는 예로부터 명성이 자자합니다.
 
 
또 체운소(遞運所)254와 패하교(流河橋)를 지나 분우대파(奪牛大廟)에 이르러, 배를 당겨 매고 언덕으로 끌어올려 겨우 방죽의 끝을 지나니 날이 샜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역사
 
*의전
 
*건축
 
*풍경
 
*기술
 
 
 
19th Day. Arrival at Ch’ang-chou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At dawn the County Magistrate of Wu-hsi County – I have forgotten his name - came and presented food to us. From the station we [continued on through Wu-hsi County and Ch’ang-chou Prefecture to Niu-pen Great Embankment].
 
 
 
244. 당시 지현이던 榮華를 지칭하는 듯하다. 영화의 字는 實이고 進士 출신이며 藍田人이다. 成化23년(1487)에 부임했는데 후에 감찰어사로 승진하였다. 正德《常州府誌續集》권2, 職官.
 
245. 句吳는 太伯의 호이다. 周代 전설적인 賢者로, 주나라 대왕 古公賣父의 장자이다. 아버지가 셋째 아들인 季歷의 아들 文王이 吉祥을 받고 태어나 총민하고 유덕한 데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을 알고서, 계력이 상속받게 하기 위해 동생은 虞仲과 함께 주나라를 도망쳤다. 동남의 蠻夷민족이 거주하는 蘇州지방에 정착하여 吳나라의 始祖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246. 少司寇는 刑部侍郞의 별칭이다.
 
247. 無錫縣治에서 서북으로 10리 거리에 있다. 洪武2년(1369)에 설치되었다. 康熙《常州府志》권12, 公署.
 
248. 원문에는 藩對鋪'로 되어 있으나, '潘對'의 誤記이다. 正德《常州府志續集》권4, 橋梁 無錫에 의하면 無錫縣 북 18里에 潘釣橋가 運河에 걸쳐 있고, 康熙《常州府志》 권12, 公署 無錫縣에는 鋪司名에 潘對이 있다. 이에 근거하여 바로잡는다.
 
249. 萬曆《重修常州府志》권2, 疆域 水에 의하면 淺鋪에 丁堰이 있는데, 이것이 혹시 僞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50. 상주부에는 東水關, 西水關, 北水關, 小西水關 등 4개의 水門이 있었다. 康熙《常州府志》 권5, 疆域.
 
251. 京門 밖 100 거리에 있다. 元代에는 水馬站을 두었으나, 洪武6년(1373)에 驛으로 바꾸었다. 康熙《常州府志》권12, 公署,
 
252. 春秋시대 吳나라의 현인으로, 吳王 壽夢의 넷째 아들인 季札을 가리킨다. 오왕은 계찰이 어진 것을 보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B.C.544년에 중원의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魯나라에서 周나라의 禮樂을 보고 德에 대해 말하였고, 徐君이 자신의 劍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서 귀국 도중에 그것을 주고자 하였으나, 서군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검을 그 집의 나무에 매어 그 初志를 이루었다고 한다.
 
253. 卿大夫가 받는 封地.
 
254. 京門 밖의 1리 거리에 있다. 洪武初에 奔牛鎭에 두었다가 天順6년(1462)에 옮겨왔으니 곧 비릉역의 舊址이다. 康熙《常州府志》권12, 公署.
 
 
===20일===
 
二十日,過呂城驛,至鎮江府,是日晴,午後雲暗,
 
 
朝過長店鋪、呂城鎮巡檢司、泰定橋, 至呂城驛, 過呂城壩、呂城閘、呂城鋪、清徽觀、青龍橋、唐家溝、栅口鋪、陸朝鋪、慈雲寺、聖墅鋪、七星橋、長樂鋪、定善院、惠政橋,到雲陽驛,河名即潤河,又過雲陽橋、承恩門、鬼
 
 
p.402
 
神壇、寧真觀、新橋、新河橋,至丹陽縣,縣枕河邊,過縣經新廟、廣福橋、七星廟、栢岡 廟,夜過减水閘、萬景湖、新豐鎮,大雨,徹夜行,至鎭江府新門.
 
 
여성역(呂城驛)을 지나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9E%A5%EC%91%A4+%EC%84%B1+%EC%A0%84%EC%9E%A5+%EC%8B%9C/@32.1883,119.156556,9z/data=!4m13!1m7!3m6!1s0x35b42ad8a70e54a3:0x3d27805b2c802e4c!2z7KSR6rWtIOyepeyRpCDshLEg7KCE7J6lIOyLnA!3b1!8m2!3d32.187849!4d119.425836!3m4!1s0x35b42ad8a70e54a3:0x3d27805b2c802e4c!8m2!3d32.187849!4d119.425836 진강부(鎭江府)]<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schina&logNo=80204198333&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ref>[http://image.chosun.com/boomup/pdf/jiangsu//%C1%F8%B0%AD.pdf 镇江 ZhenJiang]</ref><ref>[http://tour.haoshandong.net/info/detail.asp?autoid=9136&ptype=d&page=9&cat3= 진강]</ref><ref>[http://korean.cri.cn/2361/2018/07/05/1s258018.htm 진강]</ref><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kschina505&logNo=220731794543 강소성 진강시 역사와 인걸의 고장 -최치원-펄벅과 노벨문학상 -민국시절 강소성도]</ref><ref>[http://m.blog.daum.net/bobae5656/2210?tp_nil_a=2 진강]</ref><ref>[https://news.joins.com/article/23264925 아편전쟁, 진강함락]</ref><ref>[http://news.kyobobook.co.kr/comma/openColumnView.ink?orderclick=LIJ&sntn_id=13052 진강함락]</ref>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다가 오후에는 구름이 끼어 어둠침침하였습니다.
 
 
아침에 장점포(長店鋪), 여성진순검사(呂城鎭巡檢司)255, 태정교(泰定橋)256를 지나서 여성역에 이르렀습니다.
 
 
여성파(呂城) · 여성갑(呂城聞) · 여성포(呂城鋪)·청휘관(淸徽觀)·청룡교(靑龍橋)·당가구(唐家溝)·책구포(口鋪) ·육조포(陸朝鋪)·자운사(慈雲寺)257. 성서포(聖聖鋪)·칠성교(七星橋)·장락포(長樂鋪)·정선원(定善院)·혜정교(惠政橋)258를 지나서 운양역(雲陽驛)에 이르니, 강의 이름은 윤하(潤河)였습니다.
 
 
또 운양교(雲陽橋)259.승은문(承恩門)·귀신단(鬼神壇)·영진관(寧眞觀)·신교(新橋)260, 신하교(新河橋)를 지나서 단양현(丹陽縣)에 이르니, 단양현은 윤하가에 있었습니다.
 
 
단양현을 지나서 신묘(新廟)·광복교(廣福橋)·칠성묘(七星廟)261.백강묘(柏岡廟)를 거쳐, 밤에 감수갑(減水) 262 . 만경호(萬景湖)·신풍진(新豊鎭)을 지났습니다.
 
 
큰비가 내리는데 밤새도록 가서 진강부(鎭江府)의 신문(__門)에 이르렀습니다.
 
 
*기후
 
*지명
 
 
20th Day. Passing Lü-ch'eng Station and Arriving at Chen-chiang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after noon it was cloudy.
 
[We went from Chang-tien Stop to Chen-chiang Prefecture.]
 
 
255. 洪武元年(1368) 呂城驛의 동쪽에 설치했는데 9년에 鎭東運河 연변으로 옮겼다. 乾隆《鎭江府志》권16, 公署. 256. 단양현치의 동쪽 40리 거리의 여성진에 있다. 原名은 大橋로서 元 泰定 연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태정교라 이름 하였다. 光緖《丹陽縣志》 권4, 城郭.
 
257. 丹陽縣治에서 동으로 20리 거리의 陵口鎭의 漕渠 서측에 있다. 舊名은 慈雲院으로 宋 淳祐 연간에 세웠다. 明 天順3년(1459)에 改名하였다. 乾隆《鎭江府志》권20, 寺觀; 光緖《丹陽縣志》권11, 寺觀 등 참조.
 
258. 雲陽橋의 우측에 있는데 속칭 斜橋라 한다. 成化11년(1475)에 重建하였다. 乾隆 《鎭江府志》권18, 津梁.
 
259. 丹陽縣治의 동쪽 漕渠 위에 있는 다리로서 舊名은 淸化橋, 俗名은 賢橋이다. 成化5년(1469)에 重建하였다. 乾隆《鎭江府志》권18, 津梁; 光緖《丹陽縣志》권4, 城郭 등 ‘杭州府由蘇州至揚州府水路'에 의하면 丹陽縣 雲陽驛에서 7里 떨어진 곳에 七里廟가 있다.
 
260. 丹陽縣의 便民倉 측면의 漕渠 위에 있는데 正統 연간에 세웠다. 乾隆《鎭江府志》 권18, 梁,
 
261. 원문에는 '七星廟로 되어 있으나, 七里廟의 誤記로 보아야 할 듯하다. 《士商類要》권1,
 
262. 丹徒縣의 程公下 동쪽에 있는데 宋 咸淳 연간에 만들었다. 光緖《丹徒縣志》 권4,興地).
 
 
===21일===
 
二十一日,至楊子江,是日陰,臣等自南水關,(專)【輛]城河的,傍府城而南而西,過新壩,至京口驛留泊,夕步過京口閘,至通津遞運所,通津水淺,必待潮至,乃可通大江,故改乘船,留待潮候,以為渡江之備,李節、金太等別臣曰:“隨路重蒙看顧,今日相別,君向楊州,我向儀真,我於春暮,又向北京,尋到會同館來看你,”鎮江府即聞州城,孫權從丹徒,築鐵瓮城,謂之京城,府治及丹徒縣之治在城中,城東又有鐵盒地,而無其城,向吳亭在城西南,北固山在西北,即梁武帝所名也,戴公山在西南,即宋武帝所遊也,甘露寺、多景樓,俱在城東北,焦山、銀山,俱建巨利在城北,金山在大江之中,與銀山相對,上有龍延寺,即宋真宗夢遊之地,府城東北隅臨江岸,江即楊子江,俗呼洋子江,江廣二十餘里,源出岷山,會漢水經南京,至此府朝宗于海,即《禹貢》岷山導者此也,東通吳會,西接漢沔,北達淮泗,南距閩浙,眞四方都會之地也.
 
 
양자강(揚子江)<ref>[https://news.joins.com/article/2615984 수재민 2억… 1만여명 사망설/중국에 대홍수, 중앙일보, 1991.07.22]</ref><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19950711007002 중 7일간 폭우… 양자강 범람/남부지방, 서울신문,1995.07.11]</ref>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신 등은 남수관(南水關)263에서 전성하(甄城河)를 거슬러 올라가 진강부성(鎭江府城)을 끼고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서 신파(新鬪)를 지나 경구역(京口驛)에 이르러 머물렀습니다.
 
 
저녁에 걸어서 경구갑(京口)264을 지나 통진체운소(通津遞運所)에 이르니, 통진은 물이 얕아서 반드시 조수가 이르기를 기다려야 대강(大江)과 통할 수 있는 까닭에 배를 바꾸어 타고 머물러 조수가 이르기를 기다려 강을 건너갈 준비를 하였 습니다.
 
 
이절과 김태 등은 신에게 작별하면서 말하기를,
 
 
“길을 따라 다니면서 거듭 보살핌을 받았는데 오늘 서로 헤어져 당신은 양주(揚州)를 향하고 나는 의진(儀眞)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늦은 봄에 또 북경을 향하여 갈 것이니 바로 회동관(會同館)265 으로 당신을 찾아뵙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진강부는 곧 윤주성(州城)이니 손권(孫權)266이 단도(丹徒)<ref>[http://rexhistoria.net/three_supplement/60492 단도]</ref>로 옮겨 철옹성(鐵瓷城)을 쌓고 이를 경성(京城)이라 불렀던 '''곳'''입니다.
 
 
진강부의 부치와 단도현의 현치는 성안에 있었습니다.
 
 
성 동쪽에 또 철옹지(鐵瓷地)가 있었으나 그 성은 없었습니다.
 
 
향오정(向吳亭)은 성 서남쪽에 있고, 북고산(北固山)은 서북쪽에 있었으니 곧 양무제(梁武帝)269가 명명한 것입니다.
 
 
대공산(戴公山)은 서남쪽에 있었으니 곧 송무제(宋武帝)가 노닐던 '''곳'''이었습니다.
 
 
감로사(甘露寺)와 다경루(多景樓)는 모두 성 동북방에 있었습니다.
 
 
초산(焦山)274과 은산(銀山)75에는 모두 거찰(巨刹)을 세웠는데 성 북쪽에 있었습니다.
 
 
금산(金山)은 대강(大江)의 가운데에서 은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며, 위에는 용연사(龍延寺)가 있었으니 곧 송진종(宋眞宗)이 꿈에 노닐던 '''곳'''278이었습니다.
 
 
부성(府城)의 동북 모퉁이는 강 언덕에 접해 있었으니 강은 곧 양자강으로서 속칭 '양자강(洋子江)'이라 하였습니다.
 
 
강의 너비는 20여 리나 되는데, 민산(眠山)에서 발원하여 한수(漢水)와 만난 다음, 남경을 거쳐 이 진강부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가니, 곧 우공>의 '민산(眠山)에서 강(江)이 발원하여'라는 곳이 '''이곳'''입니다.
 
 
동쪽으로 오군(吳郡)과 회계군(會稽郡)에 통하고, 서쪽으로 한수(漢水)와 면수(酒水)에 접하며, 북쪽으로 회수(淮水)와 사수(四水)에 이르고, 남쪽으로 복건과 절강에 도달하니 참으로 사방에서 모두 모여드는 큰 도시였습니다.
 
 
*기후
 
*인명
 
*지명
 
*지리
 
*고증(지명, 문학)
 
*도덕?예절
 
*역사
 
 
21st Day. Arrival at the Yangtze River. This day was cloudy.
 
 
From Nan-shui Pass we went [as far as T’ung Ferry). The water there was shallow, and it was necessary to wait for the tide to come in to be able to pass into the Yangtze River. Making ready to cross the river, therefore, we got into boats again and waited for the tide. Li Chieh and Chin T'ai took leave of me, saying, “We have been honored to come to your notice on the road. Today we part, you going to Yang-chou and we to I-chen. Late in the spring we shall go to Peking again. We shall seek out the Central Post Hotel [Huit’ung-kuan] and come to see you."
 
Chen-chiang Prefecture was Jun-chou Walled City [ch’eng]. When Sun Ch'uan moved to Tan-t’u and built T’ieh-weng Walled City, he called it the Capital City [Ching-ch'eng]. The prefectural capital and the seat of Tan-t'u County are inside the wall. East of the wall is the site of T'ieh-weng, but its wall is not there.59 Hsiang-wu Pavilion is southwest of the wall. Pei-ku Mountain is in the northwest; it was named by Wu Ti of Liang [r. 502-549]. Tai-kung Mountain is in the southwest; there, Wu Ti of Sung [r. 420-422] visited. Both Kan-lu Temple and To-ching Tower are northeast of the wall. Mt. Chiao and Mt. Yin, on both of which large Buddhist temples are built, are north of the wall. Mt. Chin is in the Yangtze, opposite Mt. Yin, and Lung-yen Temple is on top of it. That is the place that Chen Tsung of Sung (r. 998-1022] visited and dreamed in. The northeast corner of the prefectural wall overlooks the bank of the river, which is the Yangtze, commonly called the Son of the Ocean. 60
 
The river is more than twenty li wide. It rises in the Min Mountains,61 joins the Han River, reaches the prefecture by way of Nanking, and enters the sea. This is the river of which Yü kung says, “From Mount Min he [Yü] surveyed the Chiang” [Legge, III: 137]. In the east it passes through Wu-k’uai, in the west it adjoins the Han and Mien, in the north it extends to the Huai and Ssu, and in the south it reaches Min and Che. Its region is truly one of great urban centers in all directions.
 
 
263. 水門의 하나. 關의 높이는 3 1이다. 光緖《丹徒縣志》권3, 輿地6.
 
264. 俗名은 大問으로 長江과는 1리 정도 떨어진 城의 서북방에 있다. 光緖《丹徒縣志》 권4,奧地九.
 
265. 京城內에 내외 使臣과 賓客을 접대하기 위하여 만든 官署이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會同館이란 조선 등의 사신을 접대하는 南館 즉 玉河館을 의미할 것이다.
 
266. 삼국시대 吳나라의 초대 황제(재위 222-252)이다. 孫堅의 둘째 아들로 200년에 형 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었다. 208년 남하한 曹操의 대군을 蜀나라 劉備와 함께 赤壁에서 격파함으로써 강남에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219년 조조와 결탁하여 유비의 용장 關羽를 격파하고 荊州를 공략하였다. 그 결과 魏·吳·蜀 3국의 영토가 거의 확정되었다. 이후는 대체로 蜀漢과 결합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국내의 발전에 힘썼다.
 
267. 鎭江의 별칭. 乾隆《鎭江府志》 권4, 形勝에 “子城, 吳大帝所築[...] 內外찮以, 號鐵護城”이라 하여 견고함을 강조했는데, 明 洪武9년 舊城을 폐하고 磚城을 쌓았다.
 
268. 일명 北顧山, 府治의 後城 북측 1리의 거리에 있다. 光緖《丹徒縣志》 권2, 輿地五.
 
269. 南朝 梁의 초대 황제(재위 502-549)로, 이름은 蕭衍이다. 博學하고 文武에 재질이 있어, 일찍이 南齊의 竟陵 王子良의 집에서 문인 귀족들과 교유하여 八友의 이름을 얻었다. 雍州의 刺史였던 그는 남제를 멸하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梁이라 했다. 그의 불교신앙이 정치면에도 나타나, 불교사상에서는 황금시대가 되었지만 정치는 파국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548년에 일어난 侯景의 반란 와중에 병사하였다.
 
270. 南朝 宋의 초대 황제(재위 420-422)로 이름은 劉裕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군에 투신하였다. 東晉末 내란에서 桓玄의 專權을 토벌하고, 揚州를 중심으로 군사권을 장악하여 南燕, 後泰을 멸망시켰다. 나아가 執政이 되어 호족을 탄압하고, 稅收의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이주민을 현주소의 호적에 등록시키는 土斷法을 단행 하였다. 419년 恭帝의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고, 국호를 宋이라 하였다. 무공뿐만 아니라 통치 수완도 뛰어나 국력의 부강을 꾀하였으나, 즉위 3년 만에 죽고 말았다. 277 《南史》권75, 列傳 65, 隱逸 上, 戴題 참조.
 
271.?
 
272. 北固山 第一峯에 있는데 唐 寶歷 연간에 李德裕가 지었다고 한다. 光緖 《丹徒縣志》권6, 輿地 14
 
273. 臨江亭의 故址로 宋 熙寧 연간에 창건했는데 元明 이래로 여러 차례 수축을 했다. 光緖 《丹徒縣志》권7, 輿地 15.
 
274. 丹徒縣城에서 동쪽으로 9리의 거리에 있다. 금산과 10여리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本名은 燕山이다. 光緖《丹徒縣志》권2, 輿地 5.
 
275. 舊名은 土山, 元代에 金山과 마주하고 있다는 이유로 銀山으로 改名 되었다. 光
 
《丹徒縣志》 권2, 輿地 5; 《江南通志》권13 등 참조.
 
276. 원래의 명칭은 浮玉山으로 伏牛山이라고도 하였다. 송진종이 꿈에 금산에서 노닐었다는 이유로 한때 龍遊山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江南通志》권13.
 
277. 北宋 제 3대의 황제(재위 997-1022)이다. 그의 치세 초기에는 과거관료가 官界를 차지하고 천자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나, 문신정치의 취약점인 군사력의 약체화 현상이 나타나 1004년 契丹의 침입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맺은 潭州의 盟에 따른 거란에 대한 歲幣 지불로 인해 재정 부담이 증가한 한편, 泰山에서의 封禪 및 玉淸昭應宮의 건립 등 거듭된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해 송나라의 재정이 크게 어려워지는 전기가 되었다.
 
278.《江南通志》권13 참조.
 
 
===22일===
 
二十二日,至廣陵辱,是日晴,自水府神祠開船,至楊子江,江邊五六里,__舟於陸者,前後相望,臣等懸帆至江之中,金山下江豚戲浪,若戰馬墓奔然,至西津渡馬頭石堤,建木竿於水中,以為長橋,往來者皆繼舟於橋下,線橋登堤岸,江淮勝槃樓,當道峥嵘,臣等步由樓下,過瓜洲鎮,至是禮河,一名鎮上河,復乘船而行,楊旺使傅榮謂臣曰:“你國有韓老老入在我國,知否?”臣曰:“聞有韓氏者入大國耳.”旺曰:“正是此韓氏,即你國婦人入我國為大行皇帝乳母,今已作古,起墳于天壽寺,”榮曰:“此指揮監葬韓氏者,故問云耳,”過攀桂門、南京颠廠、祈求雨澤祠、七錢鋪、花家園鋪、魚井鋪、城澤、楊子鋪,至楊子橋,橋廢只有閣懸標,又有橋倉,日幕,過清涼鋪,夜至廣陵睾,睾北一里,即楊州府城也,城中有府治及楊州衛、江都縣治、兩淮運鹽司,
 
 
광릉역(廣陵驛)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수부신사(水府神祠)279에서 배를 출발시켜 양자강에 이르니, 강가의 5-6리 사이에는 육지에서 배를 손으로 밀고 가는 사람이 앞뒤에 잇따라 있었습니다.
 
 
* 장강: <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6/2018062601782.htm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26/2018062601782.html 장강삼협]</ref><ref>[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211 장강의 물은 황하와 섞이지 않는다, 미래한국, 2014.10.23]</ref>
 
* 항우, 우희 <ref>[http://www.sj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38015
 
5년 초한쟁패기, 전설이 된 항우와 우희의 러브스토리, 세종포스트, 2019.01.21]</ref>
 
* 항우<ref>[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Premium/at_pg.aspx?CNTN_CD=A0002510667 패자 항우를 더 좋아하는 이유, 오마이뉴스, 2019.02.14]</ref>
 
* 항우 고사성어<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uS3g&articleno=104 항우 고사성어]</ref>
 
 
신 등이 돛을 달고 강 가운데에 이르니 금산아래의 강돈(江豚)280이 물결을 희롱하는 것이 마치 전마(戰馬)가 떼를 지어 달리는 '''듯'''하였습니다.
 
 
서진도(西津渡)의 마두석제(馬頭石堤)에 이르니, 나무 기둥을 물속에 세워서 긴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왕래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리 아래에 배를 매고는 다리를 따라 석제(石堤)의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강회승개루(江崔勝槪樓)282는 길을 막고 솟아 있어, 신 등은 누각 아래를 걸어 과주진(瓜洲鎭)283을 지나 일명 진상하(鎭上河)라고도 하는 시례하(是禮河)에 이르러서 다시 배를 타고 갔습니다.
 
 
양왕이 부영(傅榮)을 시켜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의 한노로(韓老老)<ref>[http://m.ch.yes24.com/Article/View/20031 중국 황제가 사랑하던 조선 궁녀의 비극]</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2074 한확]</ref>284란 분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아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한씨(韓氏)가 대국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양왕이 말하기를, “바로 이 한씨가 귀국의 부인(婦人)<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97867.html 공녀 한계란의 조국, 한겨레신문, 2019.06.14]</ref>으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대행황제(大行皇帝)285의 유모가 되었소. 지금은 이미 작고하여 천수사(天壽寺)에 무덤을 만들었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이 지휘(指揮)가 바로 한씨의 장례를 감독한 분인 까닭에 물어 보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 명나라 순장제도 <ref>[http://m.blog.daum.net/sksk8541/11081335?tp_nil_a=1 순장제도]</ref>
 
 
반계문(攀桂門), 남경전창(南京甄r), 기구우택사(祈求雨澤祠), 칠전보(七錢鋪), 화가원포(花家園鋪), 어정포(魚井鋪), 금성택(城澤), 양자포(揚子鋪)를 지나서 양자교(揚子橋)에 이르니, 다리는 없어졌고 표지가 달린 각(閣)과 교창(橋倉)이 있었을 뿐입니다. 날이 저물녘에 청량포(淸凉鋪)를 지나 밤에 광릉역(廣陵驛)에 이르렀습니다.
 
 
광릉역 북쪽으로 1리쯤 가면 곧 양주부성(揚州府城)입니다. 성안에 양주부치(揚州府治)와 양주위(揚州 衛)286, 강도현치(江都縣治), 양회운염사(兩進運鹽司)287가 있었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동물
 
*감상
 
*외교
 
*건축?토목?
 
*불교
 
*묘소
 
 
22nd Day. Arrival at Kuang-ling Station. This day was fair.
 
From Shui-fu-shen Shrine we pushed off the boats and came to the Yangtze River. For five or six li along the edge of the river, endless lines of people were moving boats across the country. We hoisted the sails and went into the river. Below Mt. Chin, porpoises played in the waves like galloping war horses. We [went from Hsi-chin Ferry to the Shih-li River).
 
Yang Wang sent Fu Jung to say to me, “A Dame Han of your country came to our country. Did you know that?”
 
I said, “I have heard that a Han woman entered China, but that is all.”
 
He said, “She was the one. This Han was a woman of your country who came to our country to be wet-nurse to the late Emperor. She is dead now, and her burial mound was put up at T’ien-shou Temple. This Commander is the one who took charge of burying the Han woman. That is the only reason he asked.”
 
[We passed several places and came to Kuang-ling Station.]
 
 
279. 水府란 전설상의 水神 혹은 龍王이 거처하던 곳을 가리키는데 전하여 水神의 稱號로 쓰이기도 한다.
 
280. 江豚은 흔히 '江猪'로 부르기도 하는데, 민물에 살고 있는 희귀한 돌고래 종류이다. 환경이 나빠지면서 1980년대 이후 크게 감소하여, 최근 長江 전 구역의 頭數가 2천마리 이하라고 보고된 바 있다.
 
281. 鎭江府治와 의리의 거리에 있다. 북으로 瓜洲와 마주 보고 있다. 舊名은 赤山渡이다. 乾隆《鎭江府志》권18, 津梁.
 
282. 江都縣의 瓜州鎭에 있다. 正統13년(1448)에 侍郞 周佐이 건립하였다. 光緖 《江都縣志》권16, 古蹟.
 
283. 江都縣城의 남쪽으로 40리 거리에 있다. 옛부터 屯戊의 요해지로 알려졌다. 雍正《揚州府志》권6, 都里.
 
284. 韓老老는 左議政 韓確의 누이로 이름은 桂蘭이다. 韓桂히은 태종17년에 永樂帝의 후궁이 되었다가 殉葬을 당했던 언니를 이어, 세종10년에 宣德帝의 후궁으로 뽑혀갔 다. 이후 成化帝를 양육하기도 한 韓桂蘭은 74세 되던 해인 成化19년(1427)에 죽었다. 明皇室에서의 오랜 생활로 궁실 내부의 사정에 밝아 嬪 사이에서 '老老'라 불렸 다. 한편 明朝에서는 勅書를 내려 聖節使는 반드시 韓氏의 族親으로 差遺할 것을 명하였기 때문에 여러 韓氏들이 중국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韓致亨의 경우 귀국 후 관직 제수와 賞賜가 지나치다는 비판이 일기도 하는 등 많은 말썽이 일었다. 《朝鮮成 宗實錄》 8년 9월 乙亥 ; 11년 7월 庚寅; 12년 12월 丙寅; 14년 8월 辛未 ; 18년 7월 癸丑 條 등 참조.
 
285. 大行이란 황제가 승하한 뒤 諡號를 올리기 전의 칭호로 여기서는 明憲宗 成化帝를 지칭한다.
 
286. 원명은 揚州衛指揮使司로 前後左右中의 五所가 예속된다. 府治의 서남쪽에 있다. 雍正《揚州府志》권13, 公署.
 
287. 都轉運鹽使司의 하나로서 泰州·淮安·通州가 예속되었다. 한편 運鹽司는 兩.兩浙·長盧·河東·福建·山東 등지에 설치하여 食鹽의 생산과 관리에 관한 일을 관 장하였다. 아래에 14分司를 관할하였다. 泰州·淮安·通州는 兩淮에, 嘉興·松江. 寧紹·溫台는 兩浙에, 滄州·州는 長蘆에, 萊·濱樂은 山東에, 解鹽의 東場·西場 ·中場은 河東에 각기 예속되었다. 都轉運使를 두어 司務·同知·副使·判官을 總領 하였다. 각 穀場倉을 독려하였으며, 場에는 鹽課司를 설치하였다. 모두 巡鹽御史 또는 鹽法道臣의 감독을 받았다.
 
 
===23일===
 
二十三日,過楊州府,是日雨,朝發廣陵驛,過楊州府城,府即舊隋江都之地,江左大鎮,十里珠簾、二十四橋、三十六陂之景,為諸郡最,所謂「春風蕩城郭,滿耳沸笙歌之地,臣等由舟而過,不得觀望,所可見者,鎮淮樓而已,樓即城南門,有三層,沿河而東北,過夏國公神道廟、觀音堂、懷遠將軍蘭公之整、晏公廟、黃中土貝、北來寺、竹西亭鋪、收釘廳、楊子 灣巡檢司、灣頭關荒廟、鳳凰橋墩、淮子河鋪、河泊八塔鋪、第伍淺舖、稅課局、四里鋪、邵伯寶公寺、迎恩門,所過有二座,至邵伯驟,
 
 
p.404
 
驛北有邵伯太湖,傍湖邊二三里許,至邵伯遞運所,因水漲風亂,不得夜過湖,故經宿焉,自杭城所經衛所,亦遞差百戶以護送之,有楊州衛百戶趙鑑者謂臣曰:“前六年間,你國人李暹,亦漂來到此還國,你曉得否?”臣曰:“然.”因問暹之漂還始末,鑑曰:“暹起初被風打,到楊州掘港寨,守塞官張昇差百戶桑慣,領軍捉獲,拘囚獄中,有一巡檢言說:“放在西方寺安歇,推所乘紅所去處,留在幾一簡月,沿海備禦都指揮郭大人,見運有“布帆十幅不遮風之句,知其為好人,以賓朋相待,”又問臣曰:“你所到泊海岸至此凡幾里?”臣曰:“自牛頭外洋至桃诸所,至杭州,又至楊州,所過路無虞二千五百有餘里,”鑑曰:“暹到此,猶以遠於家山為憂,今你所憂,倍於暹矣.”臣曰:“暹則徒以路遠為憂,我所痛者父新死未愈,母垂老在堂,子職已霍号,客路愈遠,悲痛之心,天蒼地黑.”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9E%A5%EC%91%A4+%EC%84%B1+%EC%96%91%EC%A0%80%EC%9A%B0+%EC%8B%9C/@32.4171449,119.2092242,10z/data=!3m1!4b1!4m5!3m4!1s0x35b67d5e11326c23:0xd2a9ae7df2b45af8!8m2!3d32.394209!4d119.412939 양주부]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아침에 광릉역을 떠나 양주부성을 지났습니다.
 
 
양주부<ref>[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208689]</ref><ref>[http://korean.cri.cn/2361/2018/06/25/1s257733.htm 양주 수서호]</ref>는 곧 옛날 수[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C%88%98 (隋)나라] 강도(江都)의 땅으로서 강좌(江左)288의 큰 진(鎭)이었습니다.
 
 
10리의 주렴(珠簾)289, 24교(橋)290, 36피(陵)291의 경치는 여러 군(郡) 가운데 제일이었으니, 이른바 '봄바람이 성곽을 흔들고, 귓전에 가득한 노랫가락' 292 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신 등은 배를 타고 지났기 때문에 구경할 수가 없었으니, 볼 수 있는 것은 진회루(鎭准樓)뿐이었습니다. 진회루는 곧 성의 남문으로서 3층이었습니다.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하국공(夏國公)의 신도묘(神道廟)·관음당(觀音堂)·회원장군(懷遠將軍) 난공(蘭公)의 무덤 · 안공묘(晏公廟)·황건파(黃巾)·북래사(北來寺)·죽서정포(竹西亭鋪)·수정청(收釘廳)·양자만순검사(揚子灣巡檢司)·만두관황묘(灣頭關荒廟)·봉황교돈(鳳凰橋數)·회자하포(子河鋪)·하박팔탑포(河泊八塔鋪)294. 제오천포(第伍淺鋪)·세과국(稅課局)·사리포(四里鋪)·소백보공사(卽伯寶公寺)·영은문(迎恩門)을 지났는데, 지나온 곳에 갑(開) 2개가 있었습니다.
 
 
소백역(邵伯驛)에 이르니 역 북쪽에는 소백태호(邵伯太湖)가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 호수를 따라 2-3리가량을 가서 소백체운소(邵伯遞運所)에 이르렀는데, 물이 불어나고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 밤에 호수를 지나갈 수가 없으므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항주성 이후부터는 지나온 위소(衛所)295에서 또한 백호를 번갈아 차출하여 호송하였습니다.
 
 
양주위백호(揚州衛百戶) 조감(趙鑑)이란 자가 신에게 말하기를,
 
 
“6년 전에 당신 나라의 이섬296 이란 분이 또한 이곳에 표류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이섬이 표착했다 돌아간 전말을 물으니 조감이 말하기를,
 
 
“이섬이 처음에 바람을 만나 양주 굴항채(掘港寨)에 도착하니, 수채관(守寨官) 장승(張昇)이 백호 상개(桑愷)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아와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어느 순검(巡檢)이 '서방사(西方寺) 298에 편히 묵게 하라’라 말하고, 배를 타고 지나온 길을 심문하느라 1개월 가까이 머물렀는데, 연해비어도지휘(沿海備禦都指揮) 곽(郭) 대인 299이 이섬에게 '돛 열 폭이 바람을 막아내지 못했네'라는 글귀가 있음을 보고는 그가 좋은 사람임을 깨닫고 손님과 벗의 예로 대접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신에게 묻기를, “당신이 배를 댔던 해안에서 이곳까지는 모두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두 앞 바다에서 도저소에 이르고, 항주를 거쳐서 또 양주에 이르렀으니, 지나온 길이 무려 2천5백여 리는 될 것입니다.”
 
 
조감이 말하기를, “이섬은 이곳에 이르러 오히려 고향이 멀다고 근심했는데, 지금 당신의 근심은 이섬보다 배는 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섬은 단순히 길이 멀다고 근심했지만, 내가 괴로운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염습도 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늙어 살아 계시지만 자식의 직분을 못했으며, 나그네의 길은 멀기만 하니, 비통한 마음은 천지가 캄캄할 정도입니다.”
 
 
*기후
 
*지명
 
*지리
 
*풍경
 
*인명
 
*외교
 
*역사
 
*유학
 
*심리(동정)
 
*심리(비통)
 
 
23rd Day. Passing Yang-chou Prefecture. This day it rained.
 
 
At dawn we left Kuang-ling Station and passed the wall of Yang-chou Prefecture. The prefecture was the site of the old Chiang-tu of Sui, the great market of the lower Yangtze. The splendors of the ten li of pearled blinds, the twenty-four bridges, and the thirty-six banks were the greatest of all the prefectures. This was the land celebrated by the lines, “The spring breezes caress the city, and music fills the ears.”62 Passing by boat, we could not look about, and the only thing we were able to see was Chen-huai Tower, which was the south gate of the wall and had three stories.
 
[From there we went to Shao-po Transfer Station.]
 
The garrisons and places through which we had passed since the city of Hang-chou had sent centurions in relay to escort us. The Centurion from Yang-chou Garrison, one Chao Chien, said to me, “Six years ago a countryman of yours, Yi Sõm, also drifted here and returned home. Did you know that?”
 
I said, “Yes.” Then I asked for the whole story of Yi Sõm's going adrift and returning.
 
Chien said, “In the beginning, Yi Som was driven by winds to Chüeh-chiang Stockade, Yang-chou. The Fortress Commander, Chang Sheng, sent Centurion Sang K’ai at the head of troops to arrest him. They imprisoned him. A Patrol Commander said that he should be placed in Hsi-fang Temple to stay, and they took him there in the boat in which he had come. He stayed there about a month. His Excellency Kuo, Coast Guard Commissioner, saw Yi Sõm's line, We spread ten sails but did not catch a wind,' and knew that he was a good man. He treated him like a visiting friend.” Then he asked me, “How many li is it from the coast on which you landed to here?”
 
I said, “The road we took from Niu-t’ou-wai-yang to T’ao-chu Chiliad, Hang-chou, and Yang-chou was altogether over 2,500 li long."
 
Chien said, “When he came here, Yi Sõm seemed to grieve because he was far from home. What saddens you now is many times (worse than what saddened] him.”
 
I said, “Yi Som was sad only because the road was long. What pains me is that my father died recently and has not yet been put into his coffin, and my mother is growing old in the house. I have neglected my filial duties, and the road to be traveled is very long; in my grieving heart, the world is black.”
 
 
288. 일명 江東, 魏禧《日錄雜說》에 “江東稱江左, 江西稱江右, 蓋自江北視之, 江東在左, 江西在右耳”라 하였다.
 
289. 東南之士가 京師로 과거에 응시하러 갈 때 모두 이곳을 경유하게 되면서 생긴 말이다. 杜牧 등의 시에 인용된 바 있다. 《方輿勝覽》 권44 참조.
 
290. 隋代에 만든 다리의 수로 杜牧, 蘇子 등의 시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方輿勝覽 권44; 雍正《揚州府志》 권8, 河渠 등 참조.
 
291. 王介甫의 〈題西太乙宮壁)에 인용된 바 있다. 《王荊公詩注》 권40.
 
292.《姚少監詩集》권6의 〈揚州春詞)에 실려 있다. 다만 본문의 “滿耳沸笙歌”는 “滿터是坐歌”로 되어 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江北煙光裏, 淮南勝事多, 市塵持燭入, 都里漾船過, 有地惟栽竹, 無家不養鵝, 春風蕩城郭, 滿耳是坐歌.”
 
293. 宋代에 지어진 甘泉縣城의 南門으로서 웅장한 누각이다. 光緖《甘泉縣志》권10, 古蹟.
 
294. 光緖《甘泉縣志》 권2, 疆域에는 八塔로만 되어 있다. 한편 회자하포와 팔탑포 사이에는 邵伯舖가 있다.
 
295. 明代의 軍事編制로서 기본적으로 1府에 所를 설치하고 여러 府에 衛를 설치하였다. 각 都司·行都司·留守司가 관할하면서 나누어 五軍都督府에 예속되었다. 대체로 5천6백인이 1衛, 1천120인이 1千戶所, 112인이 1百戶所가 되었다. 衛에는 指揮使司 를 두는데, 指揮使가 장관이고 指揮同知 및 指揮僉事가 副官이었다. 所는 千戶와 百戶가 각각 長官이 되고, 아래에 鎭撫, 總旗, 小旗 등을 두었다.
 
296. 作義縣監 李은 성종14년 2월 제주를 떠난 후 추자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10일간을 표류하다가 중국 揚州에 가까운 長沙鎭에 표착하였다. 일행 47명 중에서 14명이 표류 과정에 죽었고 남은 33명은 조사를 받은 다음 揚州를 거쳐 북경으로 이송되었다. 가, 조선의 千秋使 朴建을 따라 8월에 漢陽으로 귀환하여 〈行錄)을 지어 바쳤다. 《朝鮮成宗實錄》권157, 14년 8월 庚午, 壬申, 壬午.
 
297.《朝鮮成宗實錄》14년 8월 22일 壬午, 李이 桑愷 등과 응접한 일이 소개되어 있다. 다만《實錄》에는 百戶가 아닌 千戶, ‘桑愷'가 아닌 ‘桑鐘'로 나와 있다.
 
298. 西方禪寺는 감천현 西門 四望亭 북측에 있는데 唐 永貞 연간에 僧 智完이 건립하였다. 光緖《甘泉縣志》권, 寺觀.
 
299.《朝鮮成宗實錄》14년 8월 壬午, 郭 大人은 蘇州에서 온 總兵官 郭銃을 가리킨다.
 
300. 원문의 子職已은 자식으로서 부모를 섬기는 데 응당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이란 뜻으로 출전은 《孟子》〈萬章上)이다.
 
 
===24일===
 
二十四日,至孟城驛,是日晴,自邵伯遞運所,沿邵伯湖新塘,過邵伯巡檢司、邵伯鎮、馬家渡鋪、三溝鋪、腰鋪、露筋列女祠、露筋鋪、王琴鋪、八里鋪,新塘石築,長可三十餘里,又沿新開湖,夜二更,到孟城驛,驛在高郵州城南三里.
 
 
우성역(孟城驛)301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소백체운소(邵伯遞運所)에서 소백호(邵伯湖) 신당(新塘)을 따라 소백순검사(郡伯巡檢司)·소백진(郡伯鎭)302. 마가도포(馬家渡鋪)·삼구포(三溝鋪)·요포(腰鋪)·노근열녀사(露筋烈女祠)303. 노근포(露筋鋪)·왕금포(王琴鏞)·팔리포(八里鋪)304를 지났습니다. 신당(新塘)의 석축은 길이가 30여 리나 되었습니다. 또 신개호(新開湖)를 따라 밤 2경에 우성역에 이르렀는데, 우성역은 고우주(高郵州) 성 남쪽 3리 밖에 있었습니다.
 
 
*기후
 
*지명
 
 
24th Day. Arrival at Meng-ch'eng Station. This day was fair.
 
 
From Shao-po Transfer Station [Ti-yün-so] we went [as far as Mengch'eng station].
 
 
301. 고우주의 南門 밖에 있다. 洪武8년(1375)에 개설하였다. 雍正《揚州府志》권13, 公署; 道光《高郵州志》권1, 建置 등 참조. 우성역은 지금까지 중국에 남아 있는 몇몇 站의 유적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驛站으로서, 현재 중국의 유일한 郵驛博 物館이기도 하다. 뒤늦게 유적의 가치를 깨달은 高郵市가 그동안 민가로 쓰이고 있던 부분을 사들여 1995년에 복원시켰다. 복원된 것은 역의 중심 부분 10% 정도이고, 40%는 여전히 민가로 쓰이고 있으며 나머지는 완전히 훼손되었다. 복원된 우성역에는 正應과 손님을 접대하는 駐節堂, 驛丞의 주택과 숙소, 馬神祠, 鼓樓, 주방, 감옥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
 
302. 山泉縣城에서 북으로 40리 거리에 있다. 水陸의 要地로 사방의 物產이 다 모여 과주진과 함께 양주부의 대표적인 市鎭이다. 雍正《揚州府志》권6, 都里. 103 露筋廟라 한다. 감천현과 고우주의 交界에 있다. 道光《高郵州志》권1, 建置; 光 《甘泉縣志》권5, 祠祀 등 참조. 104. 道光《高郵州志》권1, 疆域, 鋪舍에 '王八里鋪란 명칭이 보이므로, 八里鋪는 '王八 I를 가리킬 가능성이 많다.
 
303 露筋廟라 한다. 감천현과 고우주의 交界에 있다. 道光《高郵州志》권1, 建置; 光 《甘泉縣志》권5, 祠祀 등 참조.
 
304. 道光《高郵州志》권1, 疆域, 鋪舍에 '王八里鋪란 명칭이 보이므로, 八里鋪는 '王八 I를 가리킬 가능성이 많다.
 
 
===25일===
 
二十五日,過高郵州,是日陰,雞報時,發孟城驛,過高郵州,州即古__州,__溝一名寒江,回抱南北水路之要衝,州城枕大湖,湖高郵湖也,江湖之勝,人物之繁,亦江北一澤國,盖夏禹時江淮未通,故《禹貢》沿于江海,達于淮泗,至吳王夫差,始開溝,隋人廣之,舟楫始通焉,又至西河塘,塘在湖邊,木栅長七十有餘里,湖中有島,島有七公廟,望之微茫如仙觀焉. 又過樊將軍廟、前總鋪、塘頭鋪、巡檢司、張家辅、井亭舖、地灣舖,至界首曝,驛與遞運所,東西相對,陳萱以軍史,隨楊旺而來,稍解文字,故旺任以書手,蕾貪婪無比,奸詐莫甚,至是怒我軍人金(來)「栗]諸旺,旺拿栗決杖十餘,臣令程保告于旺日:“指揮當護送我等而已,擅自決杖我異國人,亦有法文乎?我有軍眾,實同盲啞,雖或違誤,便當開說,在所矜恤,反為傷打,非上國護送遠人之道也.”旺不能答,傅榮密告於臣曰:“楊公元是北京人,調來杭州衛,他不讀書不錯事,我屢次練他,他不聽我們說,敢行情理之事,不足責他”云云,又冒雨行,過子嬰淺,沿界首大湖,湖邊亦有長堤,過巡檢司、槐角樓,夜泊(范)(泥)水鋪前,
 
 
고우주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첫 닭이 울 무렵 우성역을 떠나 고우주를 지났는데, 고우주는 곧 옛날의 한주(__州)였습니다.
 
 
한구(__溝)는 한강(寒江)이라고도 부르는데, 남북의 수로를 둘러싸고 있는 요충이었습니다.
 
 
고우주의 성은 큰 호수에 임해 있으니 호수는 곧 고우호(高郵湖)였습니다.
 
 
강호의 경치가 뛰어나고 사람과 재물은 많아 또한 강북의 수향(水鄕)305 이었습니다.
 
 
대개 하(夏)나라 우왕(禹王)306 때는 양자강과 [https://ko.wikipedia.org/wiki/%ED%99%94%EC%9D%B4%ED%97%88 회수]<ref>[https://ywpop.tistory.com/3106 중국 3대 큰 강: 황하, 장강, 회수]</ref><ref>[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15497 中 회수 건너면 귤은 탱자… 사람 수명은 3년 감소?, 국민일보, 2017.09.13]</ref><ref>[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8603.html 탱자가 회수를 건너면 귤, 한겨레21, 2014.12.19]</ref><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hirdbad&logNo=220596164070&parentCategoryNo=&categoryNo=77&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 중국 남북의 경계 "화이허강"]</ref><ref>[http://egloos.zum.com/manchoi/v/2944544 橘生淮南則爲橘 生于淮北爲枳]</ref>가 서로 통하지 못했던 까닭에 우공에는 강과 바다를 따라서, 회수와 사수(泗水)에 도달한다'30고 했고, 오왕 부차(夫差) 때에 이르러 비로소 한구(弔構)를 개통했으며, 수나라 사람이 이를 넓혀서 뱃길이 비로소 개통되었던 것입니다.
 
 
또 서하당(西河塘)에 이르니 서하당은 호숫가에 있었는데 목책(木__)의 길이가 70여 리나 되었습니다.
 
 
호수 가운데에는 섬이 있고 섬에는 칠공묘(七公廟)가 있었는데, 바라보니 아득하게 바라보이는 것이 도관(道觀)과 같아 보였습니다.
 
 
또 번장군묘(樊將軍廟)308·전총포(前總鋪)·당두포(塘頭鋪)·순검사(巡檢司)·장가포(張家鋪)309. 정정포(井亭鋪)·당만포(塘灣鋪)를 지나서 계수역(界首驛)에 이르니, 역은 체운소와 동쪽 서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진훤은 군리(軍吏)로서 양왕을 따라왔는데, 조금 문자를 터득했기 때문에 양왕이 서수(書手)를 맡겼습니다.
 
 
진훤은 욕심 많기가 비할 데 없었고 아주 간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우리 군인 김속(金喪)에게 노염을 품어 양왕에게 호소하니, 양왕이 김속을 잡아다 곤장 10대에 처하였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서 양왕에게 고하기를,
 
 
“지휘께서는 우리들을 호송하면 될 뿐인데, 마음대로 우리 이국인에게 곤장을 때리니 그런 법규가 있습니까? 우리 군인들은 실로 장님과 벙어리 같습니다. 더러 잘못이 있더라도 알도록 깨우쳐 주며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인데 도리어 구타하니 상국(上國)이 먼 나라 사람을 호송하는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하니, 양왕은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몰래 알려주기를, “양공(楊公)은 본디 북경사람으로서 항주위(杭州衛)로 배치되었는데 글을 읽지 못하여 사리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여러 번 그에게 간하였으나 그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행하니, 책망할 거리도 못 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비를 무릅쓰고 가서 자영천(子要淺)을 지나 계수대호(界首大湖)를 따라가니, 호숫가에 또한 긴 제방이 있었습니다.
 
 
순검사(巡檢司), 괴각루(槐角樓)를 지나서 밤에 범수포(가水鋪) 앞에 정박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시간
 
*풍경
 
*경제
 
*역사
 
*관직
 
*인물분석
 
*의견
 
*건축?토목?
 
 
25th Day. Passing Kao-yu Department [Chou]. This day was cloudy.
 
 
At cock-crow we left Meng-ch'eng Station and passed Kao-yu Department. The department had been the old Han-chou. Han-kou, also called Han River, curved round it, a strategic intersection in the north-to-south water route. The wall of the department overlooked a big lake, which was Kao-yu Lake. There, the scenery of the river and lake was splendid and the people numerous. It was another prosperous country, north of the Yangtze. In the time of Yü of Hsia (traditionally r. 2205-2197 B.C.], the Yangtze and the Huai were not yet connected. In Yü Kung, therefore, “They [tribute-bearers] followed the course of the Chiang and the sea, and so reached the Huai and the Ssu” [Legge, III: 112]. With King Fu Ch'ai of Wu, the Han-kou was first opened; when men of Sui widened it, boats first plied on it.
 
We then came to Hsi-ho Dike [and continued on as far as Chieh-chou Station].
 
Ch'en Hsüan had come as a military officer with Yang Wang. Since he understood a little about writing, Yang had appointed him scribe. Hsüan was extraordinarily greedy, and there was no one more deceitful. Now he became angry at Kim Sok, a soldier of mine, and accused him of several things to Yang. Yang had Sok seized and sentenced him to more than ten lashes. I ordered Chong Po to make a statement to Yang: “The Commander is supposed to escort us and nothing more. Is there any law by which on your own authority you may sentence and flog us foreigners? The soldiers I have are the same as the blind and the dumb. Even if they sometimes make mistakes, you ought to explain to them sympathetically. On the contrary, you beat them and hurt them. That is not the way for China to escort strangers.”
 
Yang could not answer. Fu Jung said secretly to me, “Originally His Excellency Yang was from Peking, but he was transferred to Hang-chou Garrison. He is illiterate and ignorant. I have corrected him repeatedly, but he will not listen to us and continues to act presumptuously and contrary to principles. It is not worth the effort to bring charges against him.”
 
We went on, into the rain, past Tzu-ying-ch’ien and along Chieh-shou Great Lake. On the edge of that lake, too, was a long embankment. We passed a police station and Huai-chüeh Tower and at night stopped in front of Fanshui Stop.
 
 
305. 강과 호수가 많아 수자원이 풍부한 지방.
 
306. 夏 왕조의 전설상 시조로, 儒家에서 받드는 聖人의 한 사람이다. 《尙書》와 《史記》에 묘사된 禹는 舜으로부터 司空에 임명되어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舜 다음에 천자가 되고, 중국 전역을 9州로 나누어 貢賦를 정하였다. 禹는 나라 이름을 夏라고 하고 재위 10년 뒤에 죽자, 제후들은 그의 아들 啓를 천자로 삼음으로써 중국 최초의 세습왕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307. 원문의 沿은 물 흐름에 따라 내려가는 것을 말한다. 江을 따라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 뒤에 바다에서 淮水로 들어가고 다시 泗水로 들어간다.
 
308. 漢初의 장군으로 沛縣人인 樊를 모신 사당.
 
309. 고우주의 州治에서 북으로 30리의 거리에 있는 張家溝鋪를 지칭하는 듯하다. 道光 《高郵州志》권1, 疆域.
 
310. 기록을 담당하는 役.
 
311. 원문에는 范水鋪'로 되어 있으나, 가水鋪의 誤記이다. 雍正《揚州府志》 권8, 河渠, 寶應縣에 의하면 가水淺이 寶應縣 남 60里에 위치해 있다.
 
 
===26일===
 
二十六日,至淮陰驟,是日陰,過(范)(沪光大湖及寶應大湖,至安平驛,又過寶應縣治,過白馬大湖及白馬鋪、黄浦鋪、平河橋、里涇河、鎮店、十里亭鋪,夜泊淮陰驛,自泡水鋪至此百餘里間,東岸築長堤,或石築或木栅,綿連不絕.
 
 
p.406
 
 
회음역(淮陰驛)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범광대호(가光大湖)와 보응대호(寶應大湖)를 지나서 안평역(安平驛)에 이르고, 또 보응현치(寶應縣治)를 지나고 백마대호(白馬大湖)와 백마포(白馬鋪), 황포포(黃浦鋪), 평하교(平河橋), 이경하(里8河), 진점(鎭店), 십리정포(十里亭鋪)를 지나서 밤에 회음역(淮陰驛)에 정박하였습니다.
 
 
범수포(1水鋪)에서 이곳까지 100여 리 사이에 동쪽 언덕에는 긴 제방을 쌓았는데, 돌로 쌓기도 하고 말뚝을 박아 울을 만들기도 하여 끊어지지 않고 죽 이어져 있었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건축?토목?
 
 
26th Day. Arrival at Huai-yin Station. This day was cloudy.
 
 
[We went from Fan-kuang Great Lake to Huai-yin Station.] For the one hundred li and more between Fan-shui Stop and there, a long levee built on the east bank ran without break, either as stonework or as wooden palisades.
 
 
===27일===
 
二十七日,過淮安府,是日雨,淮陰驛對岸馬頭城門外有漂母,其北又有胯下橋,即韓信寄食受辱之地,驛又與遞運所接,遞夫廠相對,自曝掉舟,傍淮安府,府即舊東楚州,實東南重鎮,其舊城內有府治、山陽縣治、淮安衛及都堂府、總兵府、御史府等諸司,舊城之東,又築新城,新城之中有大河衛,餘司未及設,新舊城間,隔一里許,湖水襟帶于兩城內外,而城與人居,皆在平島中,過自南渡門而北,至淮河,其間有金龍四大王廟、浮橋亭、龍興塔、鍾樓殿、雷神店、西湖河嘴、老和尚塔、鈔廳、板、移風閘、鳳翥門、工廠、清江削、騰蛟起鳳門、清江輻葉門、清江閘、常盈倉門、天妃廟、東嶽仁聖宮、靈慈宮、平江恭襄侯廟、漕運府、總廠東街、總廠西街、福興、玄帝、佑聖祠、新藏”閘,又其間有鳳陽中都、鳳陽左衛、龍虎右衛、龍江左衛、豹翰衛、豹韜前衛、淮安衛、大河衛、鎮江衛、高郵衛、楊州衛、儀真衛、水軍左衛、水軍右衛、府軍前衛、泗州衛、邳州衛、壽州衛、長淮衛、廬州衛等,淮南、江北、江南諸衛會于此造船,俱有廠,大抵大江、淮河四五百里間,地多大浸巨湖,如邵伯湖、高郵湖、界首湖、白馬湖等,湖之大者,四面無際,是日,冒大雨過淮河,一名黃河,臣問諸傅榮曰:“以《禹貢》觀之,黃河過積石、龍門、華陰、底柱、大諸山,又過泽水、大陸,為九河為逆河,東北入于海,淮水過桐柏山,會酒、沂,東入于海,林之奇以謂:河下流竞受
 
之,淮下流徐受之,然則進與河源出不同,流派不同,入海之地亦不同,今合爲淮河,何也?” 榮曰: “在我 大明朝, 整河路注之淮, 合流入海, 河失故道, 與《禹贡》有異”云云, 淮河實聚水所漂, 黃河與淮水,合流為西河,齊,潔、汶水,與洪、泗水合流,又會汴水,又東會于沂水為東河,西河水色黃,故謂之黃河,東河水色青,故謂之清河,二河合流于此,謂之淮河,河廣可十餘里,深無底,水流暴急,河邊有耿七公神祠,又有龜山臨河.趙鑑語臣曰:“此山足有神物,狀如彌猴,縮鼻高額,青驅白首,目光若電.諺傳:大禹治水時,以大索鎖此物,命住于此,俾淮水安流,今人有圖此物之形者,免淮濤風水之難,”臣曰:“此真怪誕不經之說,不足信也.”鑑默然,臣等過河東河而上,至清口驛,夜經清河縣,至泊無人煙之岸,嘗聞清河縣治,有韓信城、甘羅城,夜過不能見,
 
 
회안부(淮安府)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회음역의 건너편 언덕 마두성문(馬頭城門) 밖에는 표모사(漂母祠)가 있고, 그 북쪽에는 과하교(_下_)<ref>[http://korean.cri.cn/1620/2012/07/27/1s188083.htm  胯下之辱(과하지욕) 가랑이 사이로 기어서 지나가는 치욕]</ref>가 있었으니, 곧 [http://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57 한신(韓信)]이 밥을 얻어먹고 욕을 당했던 곳이었습니다.
 
 
회음역은 또 체운소와 접해 있고 체부창(遞夫__)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회음역에서 노를 저어 회안부에 다가가니, 회안부는 곧 옛날의 동초주(東楚州)로서 실로 동남방의 중요한 진(鎭)이었습니다.
 
 
그 구성(舊城)의 안에 회안부치(淮安府治)·산양현치(山陽縣治)·회안위(淮安衛)와 도당부(都堂府)· 총병부(總兵府)·어사부(御史府) 등의 여러 관사(官司)가 있었습니다.
 
 
구성의 동쪽에 또 신성(新城)을 쌓았는데, 신성의 안쪽에 대하위(大河衛)316가 있었으며, 나머지 관사는 미처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성과 구성은 사이가 1리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호수가 두 성의 안팎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성과 인가는 모두 평도(平島)안에 있었습니다.
 
 
남도문(南渡門)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회하(淮河)에 이르니, 그 사이에 금룡사대왕묘(金龍四大王廟)317·부교정(浮橋亭)·용흥탑(龍興塔)·종루전(鐘樓殿)·뇌신점(雷神店)·서호하취(西湖河嘴)·노화상탑(老和尙塔)·초청(廳)·판갑(板開)·이풍갑(移風間)·봉저문(鳳門)·공부창(工部v)318. 청강갑(淸江間)319, 등교기봉문(騰蚊起鳳門)·청강폭주문(淸江輻藤門)·청강갑(淸江間)·상영창문(盈倉門)·천비묘(天起廟)· 동악인성궁(東嶽仁聖宮)·영자궁(靈慈宮)320 · 평강공양후묘(平江恭襄侯廟)·조운부(遭運府)322. 총창동가(總r東街)·총창서가(總r西街)·복흥갑(福興間)·현제사(玄帝祠)323.우성사(佑聖祠)·신장갑(新藏間)324 이 있었습니다. 또 그 사이에 봉양중도(鳳陽中都)·봉양좌위(鳳陽左衛)·용호우위(龍虎右衛)·용강좌위(龍江左衛)·표도위(韜衛)·표도전위(霜前衛)·회안위(安衛)·대하위(大河衛)·진강위(鎭江衛)·고우위(高郵衛)·양주위(楊州衛)·의진위(儀眞衛)·수군좌위(水軍左衛)·수군우위(水軍右衛)·부군전위(府軍前衛)·사주위(泗州衛)·비주위(亞州衛)·수주위(壽州衛)·장회위(長淮衛)·여주위(廬州衛) 등이 있었습니다. 회남(淮南)·강북·강남의 여러 위(衛)가 이곳에 모여 배를 만드는데 모두 선창(船廠)이 있었습니다. 무릇 장강과 회하(淮河)의 400-500리 사이의 땅은 소백호(邵伯湖)·고우호(高郵湖)·계수호(界首湖)·백마호(白馬湖) 등과 같은 큰 호수에 침식당했으니, 큰 호수는 4면으로 끝이 없었습니다.
 
 
이 날 큰비를 무릅쓰고 회하를 건넜는데 [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D%95%98 황하(黃河)]라고도 불렀습니다.
 
 
신이 부영에게 묻기를,
 
 
“<우공>을 살펴보면, 황하는 적석(積石)·용문(龍門)·화음(華陰)·저주(底柱)·대비(大__) 등 여러 산을 지나고, 또 홍수(降水)와 대륙(大陸)을 지나 구하(九河)가 되고, 역하(逆河)325가 되어 동북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고, 회수는 동백산(桐柯山)을 지나 사수(泗水)와 기수(淨水)를 만나 동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게 됩니다.
 
 
임지기(林之奇)326는, '황하<ref>[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64100029 [동양화가 말을 걸다] “물을 물로 봤다가는 큰코다친다”]</ref>의 하류는 연주(州)가 받고, 회수의 하류는 서주(徐州)가 받는다'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회수와 황하는 연원도 같지 않고 지류의 갈림도 같지 않고, 바다에 들어간 땅도 또한 같지 않은데 지금 합하여 회하가 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우리 명나라 조정이 황하<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30/2018123001941.html 황허 물, 10분의 1로 줄어… 中 '낙타 경제' 온다, 조선일보, 2018.12.31]</ref>의 수로를 파서 회수에 유입시켜, 합류해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으므로 황하는 옛 길을 잃게 되었으니 <우공>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회하는 실로 여러 물이 모이는 강입니다. 황하와 회수가 합류하여 서하(西河)가 되고, 제수(濟水)·탑수(深水)·문수(汶水)가 수수(洙水)·사수(泗水)와 합류하여 또 변수(沐水)를 만나고, 다시 동으로 흘러 기수(所水)를 만나 동하(東河)가 됩니다.
 
 
서하는 물 빛깔이 누렇기 때문에 황하라 이르고, 동하는 물 빛깔이 푸르기 때문에 청하(淸河)라 이릅니다.
 
 
두 강물이 합하여 이곳으로 흐르니 회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WgaFNWW64cA 회하를 알면 삼국지가 더 재밌다! 삼국지 지명 이야기]</ref>
 
 
강의 너비는 10여 리나 되고 깊이는 끝이 없으며, 물의 흐름은 사납고 급하였습니다.
 
 
강가에는 경칠공신사(秋七公神祠)가 있었고, 또 귀산(龜山)이 강과 접해 있었습니다.
 
 
조감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 산 밑에는 신물(神物)이 있는데, 모양은 원숭이와 같으며 주름진 코, 높은 이마, 푸른 몸뚱이, 흰 머리털에 눈빛이 번개와 같습니다.
 
 
전해 오는 속담에,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큰 새끼로 이 신물을 잡아매어 이곳에 살면서 회수가 편안히 흐르게 하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 신물의 형상을 그려서 갖고 있으면 풍랑의 조난을 면한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터무니없고,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니 믿을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감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신 등은 회하를 거쳐 동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청구역(淸口驛)에 이르렀습니다. 밤에 청하현(淸河縣)을 지나서 인가가 없는 기슭에 정박하였습니다. 청하현치(淸河縣治)에 한신성(韓信城)과 감라성(甘羅城)328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었으나, 밤에 지나가 볼 수 없었습니다.
 
 
*기후
 
*지명
 
*고증(고사)
 
*소통(물음)
 
*소통(응답)
 
*지리
 
*동물
 
*풍습
 
*심리(자신감, 위풍당당, 불신)
 
 
27th Day. Passing Huai-an Prefecture. This day it rained.
 
 
On the bank opposite Huai-yin Station, outside Ma-t'ou-ch'eng Gate, was P’iao-mu Shrine. North of it was K’ua-hsia Bridge, which was the place where Han Hsin ate another's food and was disgraced.63 The station was opposite the transfer station keeper's storehouse, adjoining the transfer station.
 
From the station, we rowed the boats alongside Huai-an Prefecture. The prefecture had been the old Tung-ch'u Department, an important control point for the southeast. Inside the old wall were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 of Shan-yang County, Huai-an Garrison, and various posts, for the Surveillance organization [Tu-tang-fu], Regional Command [Tsung-ping-fu], Censoring organization [Yü-shih-fu], and others. East of the old wall, a new wall had been built. The Ta-ho Garrison was inside the new wall, but other posts had not yet been established. There was a space between the new and old walls of about one li. The water of the lake flowed round the walls inside and out, but both the walls and the houses were on flat islands. We left from Nan-tu Gate and went north.
 
We came to the Huai River. In the interval had been [numerous structures and garrisons). Garrisons for the regions south of the Huai and north and south of the Yangtze were gathered there to build boats, and they all had shipyards.
 
In general, for the four or five hundred li between the Yangtze River and the Huai River, the land has many big swamps and huge lakes. Of the lakes, the big ones like Shao-pu Lake, Kao-yu Lake, Chieh-shou Lake, and Pai-ma Lake seem to stretch endlessly in all directions.
 
This day we braved heavy rain and passed the Huai River, also called the Huang [Yellow] River. I asked Fu Jung about that: “According to Yü kung, the Huang River passes the Chi-shih, Lung-men, Hua-yin, Ti-chu, and Ta-p'ei mountains and then passes the Chiang-shui and Ta-lu, becoming the Chiu-ho and Ni-ho and entering the sea in the northeast. The Huai River passes the T’ung-po Mountains, joins the Ssu and I and enters the sea in the east.64 Lin Chih-ch’i65 thinks that the lower reaches of the [Huang] River lie in Yen and the lower reaches of the Huai in Hsü. Then the sources of the Huai and the [Huang] River are not the same, their courses not the same, and the places where they enter the sea not the same. How is it that now you put the Huai and the Huang River together?”
 
Jung said, “Under our Ming Court, we have channelled the bed of the Huang River and made it flow into the Huai; they flow into the sea together. The Huang River has lost its old course and is different from that in Yü kung.”
 
The Huai River truly receives many waters. The Huang River and Huai River flow together as the West River. The Chi, T'a, and Wen rivers flow together with the Chu and Ssu rivers and then join the Pien River and to the east meet the I River to become the East River. The water of the West River is yellow, so it is called Yellow River. The water of the East River is green, so it is called Green River. The two rivers flow together there; combined, they are called Huai River. The river is more than ten li wide, it is bottomless, and the current is violent.
 
On the bank of the river was Keng-ch'i-kung-shen Shrine, and Mt. Kuei overlooked the river. Chao Chien said to me, “There is a god at the foot of that mountain. He looks like a Macacus monkey; he has a turned-up nose, high forehead, blue body, and white head. His eyes flash like lightning. The legend is that when the Great Yü channelled the waters, he bound that creature with a great rope and ordered him to live there and make the Huai flow quietly. Today, people who have pictures of that creature are spared trouble from wind and waves on the Huai.”
 
I said, “There is nothing in the classics about this extraordinary tale; I cannot believe it.” Chien was silent.66
 
[We went up the East River and stopped at night near Ch'ing-ho County.]
 
 
312. 漂母는 韓信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빨래하는 아낙을 말하는데 漂母祠는 山陽縣城 望雲門 밖에 있다. 《大淸一通志》권65 ; 咸豊《淮安府志》 권26, 壇廟 등 참조.
 
313. 漢初의 武將이다. 秦나라 말 난세에 처음에는 楚의 項梁과 項羽를 섬겼으나 중용되지 않아 漢王 劉邦의 군에 참가하였다. 승상 蕭何에게 인정을 받아 군사 면에서 크게 공을 세움으로써 齊王, 이어 楚王이 되었다. 그러나 漢帝國의 권력이 확립되자 劉氏 외의 다른 諸王과 함께 차차 밀려나, B. C. 201년 淮陰侯로 격하되고, B.C. 196년 陳의 亂에 가담하였다 하여 呂后의 부하에게 慘殺 당하였다.
 
314. 淮陰侯 韓信이 어렸을 때 가난하여 漂母에게 靑食하고, 무뢰배 소년들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 들어가는 수모를 당하여 겁쟁이로 비웃음을 당한 고사를 말한다. 《史권 92, 列傳32, 淮陰侯 참조.
 
315. 화물의 장거리 운송을 담당하는 壯丁.
 
316. 옛 大淸觀基로서 洪武2년(1369)에 창건되었다. 咸豊《淮安府志》권17, 營制.
 
317. 宋朝 理宗의 외척 謝緖를 모신 사당이다. 사서는 남송이 멸망할 무렵 항주의 金龍山에 은거하였는데, 謝太后가 북쪽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물에 뛰어 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元代에 謝緖는 민간에서 黃河의 수호신으로 추앙되었고, 후에 顯佑通濟王이라는 爵號를 받았다. 《江南通志》권39; 咸豊《淮安府志》 권26, 壇廟 등 참조.
 
318. 工部分司의 제署를 가리킨다. 正堂 5間, 後堂 3間, 南房은 동서로 각 3間, 庫房 3間, 儀門 3間, 大門 3間, 更樓 1座, 牌樓 1座로 구성되어 있다. 正德《淮安府志》권6, 規制2, 公署.
 
319. 山陽縣城에서 서북으로 30리 거리로서 龍王聞이라고도 한다. 咸豊《淮安府志》 권5, 城池.
 
320. 天妃宮을 가리키는데 漕運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靈慈宮은 모두 3곳이 있는데 그 가운데 본문의 그것은 淸江浦에 위치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宣德 연간 平江伯 陳이 세웠는데 勅額을 下賜받았다. 少師 楊士奇의 〈記>가 있다. 正德《淮安府志》권11, 〈祀祠), 寺觀.
 
321. 明 永樂연간에 漕運에 공을 세운 平江伯 陳眞을 모신 사당. 다만 《江南通志》와 《山東通志》 등에는 ‘恭襄侯廟'가 아닌 ‘恭襄侯祠라고 되어있다. 《江南通志》 권40 ; 《山東通志》 권21 참조.
 
322. 벽運鎭守府를 가리킨다. 永樂 연간 總兵官 平江伯 陳寅이 漕運을 提督하기 위하여 세웠다. 正德《淮安府志》권6, 規制2, 公署.
 
323. 女帝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먼저 道敎에서 眞武帝를 玄天上帝 즉 女帝라 하기도 하고, 治水 사업에 大功을 세운 禹王을 玄帝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淮安이 漕運路上에서 차지하는 위치 등을 고려해 볼 때 여기에서의 女帝는 禹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324. 正德《崔安府志》권6, 規制2, 公署를 보면 開名은 新藏이 아니라 新莊이라 되어있다.
 
325. 黃河가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의 河流를 말하는데 潮水가 거슬러 들어온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326. 南宋 초기의 학자로, 세간에서는 三山先生이라 불렀다. 紹興21년(1151)에 진사가 되어, 지방을 거쳐 중앙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 후 外任을 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가 얼마 후 사임하였다. 남송 중기의 名儒 呂祖謙은 그의 제자로서 呂氏學問의 중계자 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는 훌륭한 시인이기도 하여 (江月圖〉와 〈早 春偶題) 등의 명작을 남겼다. 저서에는 《春秋周禮說論》 등이 있다.
 
327. 宋 耿遇德을 모신 사당이다. 그런데 《江南通志》에는 맛七公神祠가 아닌 歌七公雨'로 되어 있다. 康澤廟의 俗名으로 이곳에서 항해의 안전을 비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江南通志》 권40 참조.
 
328. 淸河縣의 舊 淮陰縣治 북측에 있는데 秦의 甘羅가 쌓은 것이라고도 하고 甘羅가 묻힌 곳이라고도 한다. 咸豊《淮安府志》 권28, 古蹟. 한편 甘羅는 戰國時代의 策士 로서 趙王을 설득하여 五城을 들어 秦에 割讓하고 奈을 섬기도록 한 인물이다.
 
 
===28일===
 
二十八日,陰大風,擋丹逆風清河口,過三汉淺鋪,又__白洋河,夜半至泊河岸,地名不知.
 
 
흐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배를 끌어 바람을 맞받으면서 청하구(淸河口)를 거슬러 올라가 삼차천포(三叉淺鋪)를 지났습니다.
 
 
또 백양하(白洋河)를 거슬러 올라가 밤중에 강가에 정박했는데, 지명은 알 수 없었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28th Day. Cloudy.
 
[We went past Ch’ing-ho-k’ou, up the Pai-yang River and beyond it.]
 
 
===29일===
 
二十九日,晴,曉發行,過張思忠淺、白廟淺,至桃源睾,驛西有三結義廟, 即劉備、關羽、張飛之廟也. 瞬中又有去思碑. 調龍溝河, 過桃源縣而北, 又過崔鎭, 昏, 至古城驛.
 
 
맑았습니다.
 
 
새벽에 길을 떠나서 장사충천(張泗沖淺)과 백묘천(白廟淺)을 지나 도원역(桃源驛)329에 이르렀습니다.
 
 
도원역 서쪽에 위치한 삼결의묘(三結義廟)330가 바로 유비(劉備)331·관우(關羽)332 · 장비(張飛)333의 사당이었습니다.
 
 
도원역 안에 또 거사비(去思碑)334가 있었습니다.
 
 
용구하(龍溝河)를 거슬러올라가서 도원현(桃源縣)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또 최진(崔鎭)을 지나 저녁에 고성역(古城驛)335에 이르렀습니다.
 
 
*기후
 
*시간
 
*지명
 
*인명
 
*역사
 
*지리
 
 
29th Day. Fair.
 
We set out at dawn and went [from Chang-ssu-chung Shoal to Ku-ch'eng Station].
 
 
329. 桃源縣治에서 북으로 무里의 거리에 있는데 洪武4년에 創建되었다. 正德《淮安府志》권6, 規制2, 公署.
 
330. 正德《淮安府志》권6, (祀祠), 祠廟에는 ‘三義廟'라고 기재되어 있다. 桃源縣治에서 동으로 80步의 거리에 있는데 洪武22년 知縣 陳德彰이 重建한 것이다.
 
331. 삼국시대 蜀漢의 건립자(재위 221-223)이다. 關羽, 張飛와 의형제를 맺어 黃巾賊을 토벌하였다. 뒤에 諸葛亮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孫權과 동맹하여 赤壁戰에서 曹操를 이기고, 三國 鼎立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황제에 오른 다음해인 222년에 형주의 탈환과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하여 吳를 공격하였으나, 夷陵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병사하였다.
 
332. 삼국시대 蜀漢의 무장으로, 자는 雲長이다. 후한 말기에 泳縣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었다. 뛰어난 학문과 무예를 겸비하여 蜀나라의 동방 방위를 맡아 위세를 떨쳤지만, 결국 荊州에서 조조와 손권의 공격을 받아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宋代 이후로 그를 武神 또는 財神으로 모시는 關帝廟가 각지에 건립되는 등 중국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333. 삼국시대 蜀나라의 무장이다. 劉備, 關羽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後漢末 동란기의 많은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다. 유비가 益州를 취한 후 車騎將軍이 되었다. 그 후 유비가 吳를 공격하는 東征 준비를 하던 중,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334. 善政을 편 지방관이 이임할 때 鄕民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비석.
 
335. 桃源縣治에서 西北으로 60리 거리에 있다. 洪武23년에 만들어졌다. 正德《淮安府志》권6, 規制2, 公署.
 
 
===30일===
 
三十日,過宿遷縣,是日陰,朝自古城驛,過武家溝,白洋河、陸家墩、小河口,至鍾吾睾,睾前有皇華、蓝英、雙桂等門,驛北乃宿遷也.又過遞運所,順風張帆,疾行若飛,過皂河、青墩、沙方”等淺,夜三更,至直河驛,五更,大震電雨雹.
 
 
[https://zh.wikipedia.org/wiki/%E5%AE%BF%E9%81%B7%E7%B8%A3 숙천현(宿遷縣)]<ref>[https://books.google.co.kr/books?id=w5yMBQAAQBAJ&pg=PT179&lpg=PT179&dq=%EC%88%99%EC%B2%9C%ED%98%84(%E5%AE%BF%E9%81%B7%E7%B8%A3)&source=bl&ots=ymV4nZfuKa&sig=ACfU3U3t77JxQlcLBbY0UsrEKN3b5Lb9zA&hl=ko&sa=X&ved=2ahUKEwi5vISN4OzjAhVpJaYKHaq6A58Q6AEwAHoECAUQAQ#v=onepage&q=%EC%88%99%EC%B2%9C%ED%98%84(%E5%AE%BF%E9%81%B7%E7%B8%A3)&f=false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 · 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ref>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아침에 고성역에서 무가구(武家溝)를 지나 백양하, 육가돈(陸家數), 소하구(小河口)를 거슬러 올라가서 종오역(鐘吾驛)336에 이르렀습니다.
 
 
역 앞에 황화문(皇華門), 비영문(基英門), 쌍계문(雙桂門) 등이 있었고, 역의 북쪽은 숙천현이었습니다.
 
 
또 체운소를 지나 순풍에 돛을 펼치니 마치 나는 듯이 빠르게 갔습니다. 조하(河), 청돈(靑數), 사방(沙)337 등의 천포(淺鋪)를 지나 밤 3경에 직하역(直河驛)338에 이르렀습니다.
 
 
5경에 큰 천둥소리가 나고 번개가 번쩍이며 우박이 내렸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시간
 
 
30th Day. Passing Su-ch’ien County. This day was cloudy.
 
[We went from Ku-ch'eng Station past Su-ch’ien County to Chih-ho Station.]
 
 
336. 宿遷縣治에서 서남으로 1리의 거리에 있다. 洪武元年 縣丞 葉仲康이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水驛이라 불렀으나 洪武5년에 鍾吾驛으로 改名하였다. 正德《淮安府志》권6, 規制2, 公署.
 
337. 원문에는 沙方'으로 되어 있으나, 沙’의 오기이다. 《士商類要》권1 南京由漕河至北京水路程'에 의하면 直河驛에서 12里 떨어진 곳에 沙坊이 있다.
 
338. 你州州治에서 동남으로 60리 거리에 있다. 洪武23년 知州 王毅가 創建하였다. 正德《淮安府志》권6, 〈規制2), 公署.
 
 
===3월 1일===
 
三月初一日,過邳州,是日陰,由直河驟,過龍江、北頭灣、合沂等淺,沂水自東北流合于此河,行至下100睾,睾在城南,邓州,古刻子國,城東有刻子廟,即仲尼問官處,西有艾山,即魯公、齊(候)〔侯〕"相會之地,又有半河山,山上有羊山寺,又有石黔山,距河岸六七里,《禹貢》‘泗濱浮整’註云:下有石磐山,或以為古取整之地,未知是否,自杭州以北,則地盡平野,間或有遠山,洋子江以北,一無丘陵,至此始見此等山,亦不高大,如我國南山然,之知州姓李、邳州衛指揮姓韓,來見臣,遇以禮,以麵筋一盤、荳腐一盤、素菜二盤魄之,自曝前西轉過邓州城,又過一津,渡白浪口、乾溝兒,雞報,過新安遞運所,平明至新安驛,臣等自東河以後,河水廣闊,兩岸高峻,不能時時觀望.
 
 
비주(__州)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직하역에서 용강(龍江)·시두만(起頭灣)·합기(合所)등의 천포(淺鋪)를 지나갔는데, 기수(淨水)가 동북쪽에서 흘러와서 이 강과 합해졌습니다.
 
 
가다가 하비역(下区驛)339에 이르니 하비역은 비주성(__州城)의 남쪽에 있었습니다.
 
 
비주는 옛날에 섬자국(__子國)340인데, 성의 동쪽에는 섬자묘(__子廟)341가 있었으니, 곧 중니(仲尼)가 관명(官名)에 대하여 물었다342는 '''곳'''입니다.
 
 
서쪽에 애산(艾山)343이 있었으니 곧 노공(魯公)344과 제후(齊侯)345가 서로 만났던 '''곳'''346 입니다.
 
 
또 반하산(半河山)이 있고, 반하산 위에는 양산사(羊山寺)가 있었습니다.
 
 
또 석경산(石塔山)347이 있었는데, 강 언덕에서 6-7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공>의 '사수(泗水) 물가에 뜬 경쇠'348라는 구절의 주(註)에 '하비(下区)에 석경산이 있는데 혹자는 옛날에 경쇠를 취했던 '''곳'''이라고 한다' 했으나, 이 말이 옳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항주에서 북쪽은 땅이 모두 평편한 들판으로 간혹 먼 산이 있었습니다.
 
 
양자강(洋子江)349에서 북쪽은 구릉 하나 없었는데, 이곳에 이르러 이런 산을 보았지만 높고 크지 않아서 우리나라의 남산'''만 하였습니다'''.
 
 
비주의 지주(知州)인 성이 이(李)350 라는 사람과 비주위지휘(邪州衛指揮)인 성이 한(韓)이란 사람이 와서 신을 보고 예로 대우하며, 국수사리 1쟁반, 두부 1쟁반, 소채(素榮) 2쟁반을 대접하였습니다.
 
 
하비역(下__驛) 앞에서 서쪽으로 가서 비주성(__州城)을 지나고, 또 한 나루를 거쳐서 백랑구(白__口), 건구아(乾溝兒)를 건넜습니다.
 
 
첫 닭이 울 무렵 신안체운소(新安遞運所)를 지나 날이 밝을 무렵에 신안역(新安驛)351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 등이 동하를 거슬러 올라온 이후에는 강이 매우 넓고 양쪽 언덕이 높고 가파르기 때문에 때때로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시간
 
*고증(??)
 
*의전
 
*풍습(음식)
 
*감상
 
 
Ist Day. Third Month. Passing P’ei-chou. This day was cloudy.
 
 
From Chih-ho Station we [went to Hsia-p’ei Station). The station was south of the prefectural wall.
 
P'ei-chou was the old Yen-tzu-kuo. East of the wall there is Yen-tzu Shrine, which is the place where Confucius asked about government.67 In the west there is Mt. Ai, which is the place where Lu Kung and Ch’i Hou met. 68 Pan-ho Mountain is also there, and on its top there is Yang-shan Temple. Then there is Resonant Stones (Shih-ch’ing] Mountain, which is six or seven li from the river bank. In Yü kung, under, “And the sounding stones that seemed to float near the banks of the Ssu” [Legge, III: 105, 107], a note says, “At Hsia-p’ei is Resonant Stones Mountain.”69 Perhaps in olden times it was considered a place where musical stones were gathered. I do not know whether it is true.
 
From Han-chou north the land had been quite flat, occasionally with distant mountains. From the Yangtze River north there had not been a single hill. We first saw some when we arrived there. Yet even those mountains were not big but like the Nam-san of our country.
 
The Director of P'ei-chou, named Li, and the Commander of P'ei-chou Garrison, named Han, came to see me. They met me courteously and presented to me one plate of wheat noodles, one plate of bean-curd, and two plates of vegetables and meat and fish delicacies.
 
From in front of the station, we [passed the wall of P'ei-chou and went to Hsin-an Station).
 
Since we had gone up the East River, the rivers had been broad and the banks on both sides high, and we had not been able to look about all the time.
 
 
339. 亞州州治에서 서남방에 있는 泗水의 북측에 있는데 洪武3년 知州 馬이 創建한 것이다. 正德《淮安府志》권6, 〈規制2), 公署.
 
340. 西周시대 세子가 分封받은 나라.
 
341. 正德《淮安府志》권11, 〈祀祠), 祠廟에는 亞州州治의 동북방에 있다고 되어 있다.
 
342. 孔子는 옛 西周의 각종 제도를 전해주는 典籍이 中原에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子가 來朝하자 官名에 대하여 질문했는데, 이에 대하여 세子는 黃帝 이래 역대의 연혁을 들어 설명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左氏傳說》권13, 〈세子來朝) 참조.
 
343. 亞州의 東北 100여 里 되는 곳에 있는데 쑥이 많이 산출되어 艾山으로 불렸다. 《江南 通志》권14 참조.
 
344. 周公 브의 아들 伯획을 가리킨다.
 
345. 齊桓公을 가리킨다.
 
346. 魯定公과 齊景公이 會盟한 일을 말한다. 《春秋左傳注疏》 권3 참조.
 
347. 石警山은 《明一統志》권7 ; 光緖《亞州志》 권4, 山川 등에는 警石山으로 되어 있다.
 
348. 泗水 가에 드러난 돌이 마치 떠 있는 듯 보이는데 이 돌을 경쇠로 삼을 만하여 결국 이것이 이 지역의 貢物이 되었다는 뜻이다.
 
349. 揚子江을 말함.
 
350. 弘治元年(1488) 环州知州로 부임한 紀縣人 李文廳을 지칭한다. 同治《徐州府志》권6, 職官表.
 
351. 邪州州治에서 북으로 60리 거리에 있다. 洪武23년 知州 王毅가 創建하였다. 正德《准「安府志》권6, 規制2, 公署.
 
 
===2일===
 
初二日,過房村疇,是日少雨大風,自新安驛,過馬家淺、雙溝、豐·沛·蕭·陽四縣大廠及房村集,又過金龍顯聖靈廟,至呂梁小洪,以竹索練舟而上,過尼陀寺,西岸有關羽、(蔚)尉遲公、趙昂之廟,又過房村驛,至呂梁大洪,洪在呂梁山之間,洪之兩傍,水底亂石,噬嚴峭立,有起而高聳者,有伏而森列者,河流盤折,至此開岸,豁然奔放,怒氣噴風,聲如萬雷,過者心悸神怖,間有覆舟之患,東岸築石堤,鑿翻翻以決水勢,雖鼻居舠,必用竹綱,演十牛之力,然後可挽而上,臣等自青山龍神祠前,逆洪水過形勝樓,夜過工部分司、王家橋、李家橋、老聃廟,至水首廟前,洪之湍急處可八九里,陳萱謂臣曰:“此呂梁洪也,大禹疏鑒以後,有秦叔寶者,管修此洪”云云,臣曰:“《禹貢》‘治梁及岐’注云: ‘梁, 呂梁山也.’ 勵道元云: ‘呂梁之石崇鍊,河流激盪,震動天地,此洪無奈是乎?”蕾曰:“果若然也,但《禹貢》呂梁載在冀州,此洪轄徐州,為可疑耳.”
 
 
방촌역(房村驛)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조금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신안역에서 마가천(馬家淺)·쌍구(雙溝)·풍현(豊縣)·패현(流縣)·소현(蕭縣)·탕현(陽縣) 등 4현의 부창(夫__)352과 방촌집(房村集)353을 지나고, 또 금룡현성령묘(金龍顯聖靈廟)를 거쳐 여량소홍(呂梁小洪)54에 이르러 대로 만든 새끼로 배를 끌고 올라가서 이타사(尼陀寺)를 지나니, 서쪽 언덕에 관우(關羽)와 울지공(尉遲公)355과 조앙(趙鬪)356의 사당이 있었습니다.
 
 
또 방촌역(房村驛)을 지나 여량대홍(呂梁大洪)에 이르니, 홍은 여량산(呂梁山)의 사이에 있었습니다.
 
 
홍(洪)의 양쪽 가의 물밑에는 여기저기 흩어진 돌과 가파른 바위가 높이 서 있었는데, 일어나서 높이 솟은 것도 있고 엎드려 죽 늘어선 것도 있었습니다.
 
 
강의 흐름이 꼬불꼬불하다가 이곳에 와서야 언덕이 탁 트여서 세차게 흐르는데, 세찬 기세는 바람을 뿜고 소리는 우레와 같아 지나가는 사람들은 두려워서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간혹 배가 뒤집힐까 걱정했습니다.
 
 
동쪽 언덕에는 돌 제방을 쌓았는데 서로 어긋나게 파내어 물살을 터놓았습니다.
 
 
비록 작은 거룻배일지라도 반드시 대로 만든 새끼를 사용하여 소 열 마리라야만 배를 당겨서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신 등은 청산용신사(靑山龍神祠)357 앞에서 홍수(洪水)를 거슬러 형승루(形勝樓)를 지나서 밤에 공부분사(工部分司)·왕가교(王家橋) · 이가교(李家橋)·노담묘(老聃廟)를 지나 수수묘(水首廟) 앞에 이르렀습니다.
 
 
홍의 여울이 급한 곳은 8-9리나 되었습니다.
 
 
진훤은,
 
 
“이것이 여량홍입니다. 우왕이 땅을 뚫어 막힌 물을 통하게 한 이후에 진숙보(秦叔寶)359 란 사람이 이 홍을 맡아 수리하였습니다” 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우공〉의 ‘양(梁)과 기(岐)를 다스린 다'는 구절의 주에, 양은 여량산이다'라 했으며, 역도원(鄭道元)은, 여량의 돌이 우뚝 솟았으므로, 강물이 이에 부딪쳐서 천지를 진동시킨다'고 했으니, 이 홍이 '''그게'''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과연 그럴 듯합니다. 다만 우공>의 여량은 기주(__州)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 홍은 서주(徐州)에 관할되어 있어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기술
 
*사당
 
*지리
 
*풍경
 
*심리(불안)
 
*인명
 
*소통(물음)
 
*소통(응답)
 
*고증(지명)
 
 
2nd Day. Passing Fang-ts’un Station. This day there were light rain and high winds.
 
 
From Hsin-an Station we (went past Fang-ts’un Station) and came to Lüliang Great Flood. The flood was in Lü-liang Mountains, and on both sides of it, scattered rocks jutted up sharply in the river bed. Some rose up high, and some were in low-lying clusters. The river twisted and turned, and when it came to those open banks it burst out free, angry and fuming, its voice like ten thousand claps of thunder. The hearts of those who passed pounded, and their spirits quaked. Boats occasionally met disaster. A stone levee that had been built on the east bank had been cut irregularly to check the force of the water, but even for tenders, it was necessary to use twisted bamboo rope and the power of ten oxen before they could be pulled up.
 
From in front of Ch’ing-shan-lung-shen Shrine, we went up the flood past [several places] and arrived in front of Shui-shou Shrine. The fastest part of the flood was eight or nine li long. Ch’en Hsüan said to me, “That was Lü-liang Flood. After the Great Yü did the dredging and channelling, there was a Ch'in Shu-pao who supervised the repairing of this flood.”70
 
 
I said, “In Yü kung [after the passage], [He] took effective measures at Liang and Ch'i' [Legge, III: 94], a note says, ““Liang” is Lü-liang Mountain.' Li Tao-yüan says, “The rocks of Lü-liang rise up high. The flow of the river us turbulent and shakes heaven and earth.'71 This flood must be none other than that one.”
 
Hsüan said, “So it seems, indeed, but in Yü kung [it says], 'Lü-liang lies in Chi-chou. '72 These rapids are in Hsü-chou, so it is somewhat puzzling.”
 
 
352. 機夫v이라고도 하는데 勞役을 撥付하는 곳이다.
 
353. 集은 明代 북방에서 集市를 부르는 명칭이다. 集市는 市集이라고도 하는데 상인이 장사를 하던 곳이다. 不定期市와 定期市 및 常市 등으로 나뉘었다. 대부분 인구가 밀집하고 경제가 발전하여 교통이 편리한 곳에 설치되었다. 地方官府가 장소와 날짜
 
354. 洪은 물길이 좁아져 급하게 흐르는 곳.
 
355. 원문의 遲公은 尉遲恭을 가리킨다. 字가 敬德인 尉遲恭은 唐太宗 때의 武將으로 建德, 王世光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鄂國公에 봉해진 바 있다. 關羽와 尉遲恭 의 사당이란 呂梁洪 가에 있는 關尉神祠를 가리킨다. 漢의 壽亭侯 關羽와 唐의 鄂國公 尉遲恭 두神을 모신 사당으로서, 元 皇慶 연간에 건립되었다. 嘉靖《徐州志》 권8, 人事.
 
356. 三國時代에 魏의 장군으로 馬超를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益州刺史가 되었다.
 
357. 徐州에는 呂梁洪神廟가 둘이 있다. 하나는 上洪에 있는 것으로 舊稱 河平王이라 한다. 다른 하나는 下洪에 있는데 舊稱 龍神이라 한다. 본문의 龍神祠는 후자를 지칭하는 듯하다. 嘉靖《徐州志》 권8, 人事.
 
358. 老子를 모신 사당. 老聃은 중국 고대의 사상가로, 道家의 창시자이다. 春秋時代 말기 周나라의 장서실 관리인이었다. 공자가 젊었을 때 洛陽으로 노자를 찾아가 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老子》 혹은 《道德經》이 老師의 저술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359. 唐의 開國功臣으로 이름은 ___이며 叔寶는 그의 字이다. 隋나라 大業 중에 士卒이 되었다가, 李密 등의 농민반란군에 가담하였다. 武德 2년(619) 唐에 투항하여 馬軍總 管으로서 李世民을 따라 黑 등을 평정하였다. 尉遲敬德 등이 이끄는 군대와 함께 당나라 군대의 정예가 되었다. 전투 때마다 선봉에 서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무덕9년에 玄武門의 變에 참여하고, 左武衛大將軍에 임명되었다.
 
 
===3일===
 
初三日, 過徐州, 是日雨大風, 曉過九女、子(方)「房」山, 至雲龍山, 山上有石佛寺, 甚華麗,其西有戲馬臺、拔劍泉,又過蝗虫集、夫廠、廣運倉、國儲門、火星廟,至彭城驛,登庸門、進士100%軒在驛前,徐州府城在曝西北二三里,徐州,古大彭氏國,項羽自稱西楚霸王,定都於此,城
 
 
p.410
 
之東有護城堤,又有黃樓舊基,即蘇軾守徐時所建,蘇轍有《黃樓賦》,至今稱道,臣等自曝過夫廠,廠在兩水交流之中,過至百步洪,泗、淋、濟、汶、沛水合流,自東北、雌二水合流,自西北至徐州城北,泗清濁,會流南注于是洪, 洪之湍急處, 雖不及呂梁之遠, 其險峻尤甚, 亂石錯雜, 嘉如虎頭鹿角, 人呼為‘離船石’. 水勢奔突,轉折壅遏, 激為驚湍, 湧為急溜, 轟震霆,噴霧霜,衝決倒瀉,舟行甚難,臣船自工部分司清風堂之前,用人奖百餘,兩岸手牽路,以竹索轉舟,逆挽而上,臣與傅榮等上岸,由于牵路步行,見鋪石堅整,問於榮曰:“治此路者其有功於後世乎!”榮曰:“在昔此路湫险,稍遇水漲,無路可尋,水退則土去石出,艱於步履,近年郭昇、尹庭用相繼修補,用石板砌,以鐵鏟,灌以以石灰,故若此堅且固矣.”夜至汴、泗交流之會留泊.
 
 
서주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새벽에 구녀총(九女塚)과 자방산(子房山)을 지나 운룡산(雲龍山)362에 이르렀습니다.
 
 
운룡산 위에는 석불사(石佛寺)가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습니다.
 
 
그 서쪽에는 희마대(戱馬臺)<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jschina&logNo=220993803996&proxyReferer=&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장쑤성, 쉬저우, 시마타이]</ref>363와 발검천(拔劍泉)364 이 있었습니다.
 
 
또 황충집(堤蟲集)·부창(夫廠)·광운창(廣雲倉)·국저문(國儲門)·화성묘(火星廟)365를 지나 팽성역(彭城驛)에 이르렀는데 등용문(登庸門), 진사주헌(進士朱軒)은 팽성역 앞에 있었습니다.
 
 
서주부성(徐州府城)은 팽성역 서북방의 2-3리에 있었습니다.
 
 
서주는 옛날의 대팽씨국(大彭氏國)으로,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1823&cid=40942&categoryId=34304 항우(項羽)]<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hean77&logNo=220391715221&categoryNo=20&proxyReferer=&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항우(項羽) = 초패왕(楚覇王) = 서초패왕(西楚覇王)]</ref>366가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자칭하고는 이곳에 도읍을 정했었는데367, 성의 동쪽에는 성을 보호하는 제방이 있었습니다.
 
 
또 황루(黃樓)의 옛터가 있었으니, 이는 소식(蘇軾)<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gxcH&articleno=1855&categoryId=103&regdt=20180310033322 팔방미인 소식]</ref>이 서주의 지주(知州)였을 때 368 세운 것이었습니다.
 
 
369 소철(蘇轍)370에겐 〈황루부(黃樓賦)>가 있어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신 등은 팽성역(彭城驛)에서 부창(夫v)을 지났는데, 부창은 두 강물이 서로 만나서 흐르는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백보홍(百步洪)을 지나가니 사수(泗水)·수수(洙水)·제수(濟水)·문수(汶水)·패수(流水)가 합류하여 동북방으로부터, 변수(沐水)·수수(唯水)는 합류하여 서북방으로부터 서주성 북쪽에 이르렀습니다.
 
 
사수는 맑고 변수는 흐렸으나 한곳에 모여 흘러 남쪽으로 이홍에 들어가는데, 홍의 물이 빨리 흐르는 곳이 비록 여량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 험준한 것이 더욱 심하여 난잡한 돌이 뒤섞여 많이 쌓여서 '''범의 머리나 사슴의 뿔'''과 같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배를 뒤집어엎는 바위 번석석[飜船石]이라고 불렀습니다.
 
 
물 흐르는 기세가 급하게 흐르다가 꺾이어 구부러지면서 막히기도 하고 세차게 부딪치면서 빠르게 흐르고 솟아오르면서 급류가 되어 벼락 치는 소리처럼 진동하고 물보라를 뿜어내며 맞부딪치며 뚫려 흐르다 엎어져 쏟아지니 배를 움직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신의 배는 공부분사(工部分司) 청풍당(淸風堂)의 앞에서 인부 100여 명을 써서 양쪽 언덕의 좁은 길을 따라 대로 꼰 새끼로 배를 얽어매어 당기면서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신은 부영 등과 함께 언덕에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걸어 가다가 돌을 단단하고 가지런히 깔아 놓은 것을 보고 부영에게 묻기를,
 
 
“이 길을 닦은 사람은 후세에 공로를 남긴 것이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이 길이 지형이 낮고 좁아서 조금만 물이 불어도 길을 찾을 수가 없으며, 물이 물러가면 흙은 사라지고 돌이 솟아나와 걸어가기가 고생이었습니다. 근년에 곽승(郭昇)과 윤정용(尹庭用)이 서로 잇달아 보수하여 석판(石板)을 깔고 이어 철정(鐵銃)을 두드려 박고 석회로 땜질을 한까닭에 이같이 단단하고 굳게 된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밤에 변수와 사수가 서로 만나 흐르는 곳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풍경
 
*감상
 
*역사
 
*문학가
 
*감상(비유)
 
*언어(어원)
 
*기술
 
*심리(감탄)
 
*소통(의견)
 
 
3rd Day. Passing Hsü-chou. This day it rained, and there were high winds.
 
 
[We went from Chiu-nü-chung to Peng-ch'eng Station, two or three li southeast of Hsü-chou Prefecture.]
 
Hsü-chou was the old Ta-p'eng-shih-kuo. When Hsiang Yü called himself Dictator King of Western Ch’u, he put his capital west of that wall.73 There is a levee to protect the wall, and there are the old foundations of the Yellow Tower, which was built when Su Shih was governor of Hsü. Su Che [wrote) a Yellow Tower Fu, praised to the present day.74
 
From the station we passed workers' quarters that were at the junction of two rivers and came to Hundred-Yard Flood. From the northeast the Ssu, Chu, Chi, Wen, and Pei rivers flowed together; and from the northwest the Pien and Sui flowed together. Arriving north of Hsü-chou wall, the Ssu, Ch’ing, Pien, and Cho converged and flowed south into this flood. The swift part of the flood, though not as long as that of Lü-liang, was extremely dangerous. Great numbers of rocks, like tigers' heads and deers' antlers, lay scattered in disorder. People called them the Boat-tipping Rocks. The water ran swiftly, twisting and turning past obstacles, turbulent with startling rushes, rumbling and shaking like thunder, and spuming like sleet and hail. It burst through some places and seeped through others, making it very hard for boats to pass.
 
From in front of Ch’ing-feng Hall, a local post of the Ministry of Works, it took over one hundred laborers, following the tow-paths on both banks, to pull the boats upstream with bamboo ropes that had been fastened to them. I, Fu Jung, and others climbed onto the bank and walked along the tow-path. I saw that the paving-stones were firm and in good repair, and I asked Fu Jung about them: “I imagine that the people who made this path must have bestowed a blessing on later generations.”
 
Fu Jung said, “In olden times, this path was low and narrow. When the river rose a little, there was no path that could be used. When the water receded, the earth came away and the stones came out, and it was hard to walk. In recent years, Kuo Sheng and Yin T'ing-yung in turn have repaired it. 75 They used stone slabs laid in layers, fastened them with iron bolts and cemented them with lime. That is why they are as strong and firm as they are.”
 
At night we came to the junction of the Pien and Ssu and stayed there.
 
 
360. 원문은 “旣載壺口, 治梁及岐”라 하여 호구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쪽으로 梁山과 岐山에 이르러 治水를 한다는 뜻이다.
 
361. 北魏의 지리학자로, 字는 善長이다. 그의 통치가 가혹하여 (酷吏傳에 실려 있다. 그가 東荊州刺史로 있을 때 蠻民의 원한을 사 면직되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다시 등용 되어 御史中제까지 지냈는데, 陝西 방면으로 행정사찰을 나갔을 때 암살당했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여 기이한 책을 일일이 살펴 《水經注》 40권, 《本志》 13편을 완성했다.
 
362. 서주성의 남쪽 2리 거리에 있다. 산에 雲氣가 婉延함이 용과 같다하여 雲龍山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石佛山이라고도 한다. 嘉靖《徐州志》 권4, 地理.
 
363. 項羽가 산에 臺를 쌓고 戱馬를 관람했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높이 數十例에 폭이 數百步여서 유사시에 군대의 주둔과 수비가 가능했다고 한다. 嘉靖《徐州志》 권4, 地理.
 
364. 漢高祖가 이곳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을 때 물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자 高祖가 칼을 빼어 들고 내리치자 샘물이 쏟아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嘉靖《徐州志》 권4, 地理.
 
365. 전설상의 火神인 回祿을 모신 사당을 말한다.
 
366. 秦나라 말기의 무장이다. 기원전 209년 陳勝吳廣의 亂으로 秦이 혼란에 빠지자, 叔父인 項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函谷關을 넘어 關中으로 들어갔다. 그 뒤 秦을 멸하고, 彭城으로 도읍을 옮겨 스스로를 西楚覇王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06-202년에 漢과 싸워, 처음에는 전세가 유리한 듯하였으나 마지막에 亥下에서 劉邦에게 포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67.《史記》권7〈項羽本紀)에 “項王自立爲西楚覇王, 王九郡, 都彭城.”이라는 언급이 있다. 《史記集解》에서 彭城이 西楚가 된다고 하였고, 《史記正義》에서는 彭城이 徐州라고 하였다.
 
368. 宋 神宗時에 徐州의 知州를 역임하였다. 嘉靖《徐州志》권11, 宮蹟.
 
369. 宋 熙寧 연간 소식이 徐州城의 東門에 세운 누각이다. 《江南通志》권33; 嘉靖《徐州志》 권8, 人事 등 참조.
 
370. 北宋 때의 문인으로,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호는 欒城이다. 부친 蘇河, 형 蘇武과 함께 ‘三蘇라 불렸다. 19세 때 형 蘇軾과 함께 진사 시험에 급제하여 정계로 들어갔 으나, 舊法黨의 일원이었던 그는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에 따라 높은 벼슬을 지내기 도 하였고, 귀양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시문 외에도 많은 고전의 주석서와 《模城集》, 《欒城應品集》, 《詩傳》, 《春秋集傳》 등이 있다.
 
 
===4일===
 
初四日,晴,至遞運所,前有起鳳門、淋浴堂,又以舟為橋截河流,號為大浮橋,橋之上下,橋竿如束,撥橋中二舟,以通往來船,船過,還以所撥之舟復為橋,臣船過是橋及搭應夫廠,至泊于蕭縣之水次倉前河畔.
 
 
맑았습니다.
 
 
배를 끌어 체운소에 이르니, 체운소 앞에 기봉문(起鳳門)과 목욕당(沐浴堂)이 있었습니다.
 
 
또 배로 다리를 만들어 강을 가로지르게 하니 이를 대부교(大浮橋)라 불렀습니다.
 
 
다리의 위아래에는 돛대가 나뭇단처럼 섰는데 다리 가운데의 두 배를 빼서 왕래하는 배를 통행시키고, 배가 지나고 나면 도로 뽑아냈던 배로 다시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신의 배는 이 다리와 탑응부창(塔應夫__)을 지나서 소현(蕭縣)의 수차창(水大倉)372 앞의 강가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기술
 
*토목
 
 
4th Day. Fair.
 
 
We pulled the boats and came to a transfer station, in front of which were Ch’i-feng Gate and Mu-yü Hall. Boats had been made into a bridge that spanned the river and was named Great Floating Bridge. Above and below the bridge, masts were like thorns. Two boats were removed from the bridge to let passing boats through, and when they had passed, the removed boats were put back and the bridge made again. My boats passed that bridge and Ta-ying workers' quarters and came to the river bank in front of Shui-tz’u Granary of Hsiao County, where we stopped.
 
 
371. 《模城集》권17〈黃樓賦).
 
372. 대운하 연변의 주요 지점에 설치한 창고이다. 각지로부터 民運으로 운송되어 온 漕糧을 받아들였다가, 運軍이 다시 이를 차례차례 북방으로 운송해 갈 수 있도록 한 禮運의 중계시설이다.
 
 
===5일===
 
初五日,過(劉)(留】城鎮,是日睛,曉發船,過九里山至洞山,山有十王殿,又過秦梁洪鋪、茶城店、梁山寺,至境山市鎮(29) 山有上下寺,皆巨殺, 又過集殿、白廟兒鋪" 夾溝淺,至夾溝驟,驛丞忘其姓名,不從陳萱之言,供饋臣等甚優,贈杜玉以一斗米,萱與玉爭奪,玉 董額,自曝至黃家閘,閘上有眉山萬翼碑,臣令程保告楊旺請觀之,旺不肯,强而後許之,其碑撰略曰:“洪惟我朝太祖高皇帝,龍飛淮甸,混一寰宇,建都南京,以臨天下,暨我太宗文皇帝,紹基鴻業,遷都北京,于時方獄諸鎮及四夷,朝聘貢賦,每歲成會於畿內,而滇蜀、荊楚、瓯越、閩潮,悉由楊子江泛東海,沿流北入天津,度潞河訪京師,其江海之闊,風波之險,京儲轉輸為難,故我太宗文皇帝慮東南海運之艱,乃召股肱大臣,往徐、楊、淮、濟,度地勢,順水性,東自瓜洲,西自儀真,成作土貝以截之,倒不泄於江,仍因近世舊矢見,臺灣引水為河,而總會于楊,由楊到准,由淮至徐,由徐至濟,自濟以南,則水勢南下接黃河,會進入海,自濟以北,則水勢北流接衛河,會白河,亦入於海, 上復以地形南北,高下不一,分泄水勢,無以貯蓄,非經久計,仍命有司置閘,或五七一聞,或十數"里一開,溺水水濟舟,迄今淵源不竭,自是方獄蕃鎮,與夫四夷朝聘會同,及軍民貢賦轉輸、商賈貿易,皆由於斯,而舟楫之利,始通乎天下,以濟萬民,無復江海風濤之厄,我太宗是作,實續禹之功,補天之不足,開萬世大平之盛典也,徐迪古彭城,東方大郡,襟淮帶濟,為南北兩京喉舌!徐之北黃家村之東,有山溪一派,南流入
 
 
p.412
 
閘,水勢湧多漱流,走沙壅塞淤淺,舟楫此,恒為阻隘,民甚病焉,天順戊寅春,有司具疏聞于朝,我英宗睿皇帝不讚洪休,益篤前烈,召有司,立閘以通之,設官以理之,自是舟楫往來,無復前患”云云,閘官開閘,令人奖__牽上臣船以過,又行過義井、黃家鋪(候)侯〕村鋪、李家中鋪,新興閘、新興寺、(劉)留城鎮,夜三更,至謝溝閘.
 
 
유성진(留城鎭)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배를 출발시켜 구리산(九里山)을 지나 동산(洞山)에 이르니, 산에는 시왕전(十王殿)374 이 있었습니다.
 
 
또 진량홍포(秦梁洪鋪)375, 다성점(茶城店), 양산사(梁山寺)를 지나서 경산시진(境山市鎭)에 이르렀습니다.
 
 
경산(境山)에는 상사(上寺)와 하사(下寺)가 있는데 모두 큰절이었습니다.
 
 
또 집전(集殿), 백묘아포(白廟兒鋪)378 협구천(夾溝淺)을 지나 협구역(夾溝驛)에 이르렀는데, 성명은 잊었지만 어떤 역승이 진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신 등에게 음식을 매우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두옥(杜玉)에게도 쌀 한 말을 주었는데, 진훤과 두옥은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다가 두옥이 진훤의 이마를 쳤습니다.
 
 
협구역에서 황가갑(黃家間)에 이르니, 황가갑 위에 [http://www.culturecontent.com/dictionary/dictionaryView.do?cp_code=cp0602&dic_seq=103 미산만익비(眉山萬翼碑)]380가 있었습니다.
 
 
신이 정보를 시켜 양왕에게 보기를 청하였습니다.
 
 
양왕은 내켜하지 않았지만 강하게 조르니 허락하였습니다.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회전(句)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통일하고 남경에 도읍을 세워서 천하에 군림하셨다. 우리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에 이르러 큰 제업(帝業)을 계승하여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셨다.<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attlcar&logNo=220862727510&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대도 북경을 설계한 승려 유병충]</ref> 당시에 방악(方嶽)과 제진(諸鎭) 및 사이(四夷)의 조빙(朝聘)과 공부(貢賦)가 해마다 모두 기내(畿內)383로 모였다. 그리고 전촉(蜀)·형초(荊楚)·구월(歐越)·민절(__浙)이 모두 양자강을 경유하여 동해에 떠서 물의 흐름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천진(天津)에 들어와 노하(路河)를 건너서 경사에 이르렀다.
 
 
그 강해(江海)의 광활함과 풍파의 험난함으로 경사로의 운반 수송이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우리 태종문황제께서 동남방의 해운이 곤란함을 염려하여 이에 고굉대신(股肱大臣)84을 불러 서주, 양주, 회남, 제남(濟南)에 가서 지세를 헤아리고, 물길을 따라 동쪽은 과주(瓜洲)로부터, 서쪽은 의진(儀眞)으로부터 모두 제방을 만들어서 물을 막아 [https://www.youtube.com/watch?v=tKRFvwoX7aI 장강]<ref>[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nNewsNumb=20151018567&nidx=18568 [여행] 장강 싼샤 단풍 따라 600㎞ 크루즈]</ref>으로 새지 않도록 하셨다.
 
 
이어서 근세(近世)의 구규(舊)385를 따라 뱃길을 파서 물을 끌어들여 강을 만들어 모두 양주에 모이게 했으므로, 양주를 경유하여 회안(淮安)에 이르고, 회안을 경유하여 서주에 이르고, 서주를 경유하여 제남에 이르게 하였다.
 
 
제남에서 남쪽은 수세(水勢)가 남쪽으로 흘러내려 황하와 접하여 회수를 만나 바다로 들어가고, 제남에서 북쪽은 수세가 북쪽으로 흘러 위하(衛河)에 접하여 백하(白河)를 만나 또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
 
 
황제께서는 다시 지형의 남쪽과 북쪽이 높고 낮음이 같지 않아 물길이 나뉘어져 물을 모아놓을 수 없는 것은 장기적인 계책이 못된다는 이유로 곧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갑(間)을 두되, 5-7리에 1갑을 두기도 하고 십 수리에 1갑을 두기도 해서 물을 모아 배를 건너게 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의 연원이 마르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방악(方嶽)과 번진(蕃鎭) 및 사이(四夷)의 조빙(朝聘)와 회동(會同)386, 군민(軍民)의 공부(貢賦) 수송, 상고(商賈)의 무역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게 되고, 배의 이로움이 비로소 천하에 통하여 만민을 구제하고 다시는 장강과 바다에 풍랑의 재액이 없게 되었다.
 
 
우리 태종께서 하신 이 일은 실로 우왕(禹王)의 공적을 계승하여 하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만세의 태평을 열어놓은 성대한 사업이었다. 하물며 서주는 곧 옛 팽성(彭城)으로서 동방의 큰 군(郡)이며, 회수를 끼고 제수(濟水)를 둘러싸 남경과 북경의 길목이 되었음에랴!
 
 
서주의 북쪽 황가촌(黃家村)의 동쪽에 산에서 흐르는 시냇물 한 가닥이 남쪽으로 흘러 갑문으로 들어가는데, 수세가 용솟음치고 돌아 흐르는 곳이 많아 모래가 밀려 내려와 쌓여 하천을 막으니, 배가 이곳을 지나는데 항상 장애가 되어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천순(天順) 무인년(1458) 봄에 유사가 자세히 상소하여 조정에 알리니, 우리 영종예황제(英宗睿皇帝)께서 유업을 계승하여 이를 빛내고 전대의 공업(功業)을 더욱 두터이 하려고, 이에 유사를 불러 갑문을 세워서 이를 통하게 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이를 관리하게 하셨다.
 
 
이로부터 배가 왕래하면서 다시는 예전과 같은 우환이 없어지게 되었다.”
 
 
갑관(官)이 갑문을 열더니 인부로 하여금 신의 배를 들어 올려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의정(義井)·황가포(黃家鋪)387 · 후촌포(侯村鋪)·이가중포(李家中鋪)388. 신흥갑(新興間)·신흥사(新興寺)·유성진(留城鎭)을 지나서 밤 3경에 사구갑(謝溝間)에 이르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불교
 
*의전
 
*인명
 
*다툼(중국인들간의)
 
*소통(요청)
 
*역사
 
*기술
 
 
5th Day. Passing Liu-ch'eng Market.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Chiu-li Mountain to Chia-kou Station.] The Station Master, whose name I have forgotten, did not go by what Ch’en Hsüan said and served us food lavishly. He presented a bushel of rice to Tu Yü. Hsüan struggled with Yü for it, and Yü hit Hsüan on the forehead.
 
From the station we came to Huang-chia Lock, on which was Mei Mountain Myriad Carriers Stone Marker [Mei-shan wan-i pei]. I ordered Chòng Po to ask Yang Wang to let us look at it, but Yang was not willing to do so. He gave permission only after we had insisted. Briefly, the inscription on the stone said,
 
“Magnificent, the Exalted Emperor T'ai Tsu [1368-1398] of our ruling house rose, a dragon flying, from the region of the Huai and united the world. He built his capital at Nanking to watch over the Empire. With the succession to the great duties of our Cultured Emperor Tai Tsung [1403-1424], he moved the capital to Peking. Then the Four Mountains, all the guardian mountains, and the Four Barbarians76 paid tribute and taxes to the Court. Every year, they all gathered in the Imperial domains. But Tien, Shu, Ching, Ch'u, Ou, Yüeh, Min, and Che77 sailed, by way of the Yangtze River, the Eastern Sea, following it north to Tientsin. They went up the Lu River78 and reached the capital.
 
“The distances of the river and sea and the dangers of wind and waves made transporting (grain) and accumulating it at the capital hard. Our Cultured Emperor T'ai Tsung, therefore, mindful of the difficulty of transport in
 
the Southern and Eastern seas, had his greatest ministers go to the Hsü, Yang, Huai, and Chi and survey the land and regulate the rivers. East from Kuachou and west from I-chen they built embankments along them all to block them and keep them from leaking into the Yangtze. Making use of existing channels, they cut canals and led in streams to make a river, converging in the Yang. From the Yang it went to the Huai, from the Huai to the Hsü, and from the Hsü to the Chi.
 
“From the Chi south, rivers flowed south and joined the Huang River. That converged with the Huai and entered the sea. From the Chi north, rivers flowed north and joined the Wei River. That converged with the Pai River and also entered the sea. His Majesty, realizing that the land north and south, being of uneven height, dissipated the waters and kept none and that such a condition was not good in the long run, ordered those in charge to put up locks: in some places one lock every five to seven li, in others one every ten li or more, in order to catch the water and let boats pass. To the present day, that fountainhead [of benefits] has not been exhausted. 79
 
“From then on, the gathering of tribute to the Court from the Four Mountains, the guardian mountains, and the Four Barbarians; the transportation and accumulation of military and civilian taxes; and all commerce and trade have come by way of it. For the first time, the advantages of water transport extend throughout the Empire to the benefit of the people. There will not again be danger from the wind and waves of the Yangtze and the sea.
 
“This act of our T’ai Tsung has truly carried on the virtuous accomplishments of Yü. It has made up a deficiency of Heaven. It has begun a glorious procedure for all ages and all alike.
 
"That is all the more so in that Hsü had been the old P’eng-ch'eng, a great prefecture of the east. It strategically dominated the Huai and Chi and was a controlling pass between the northern and southern capitals.
 
“North of Hsü and east of Huang-chia Village was a mountain stream that flowed south into a lock. Its force was torrential, and it had many whirlpools. Drifting sand having silted it up and made it shallow, boats passing there were constantly obstructed, and the people were extremely distressed by it.
 
"In the spring of T’ien-shun wu-yin [1458], the authorities drew up a memorial and laid it before the Court. Our Sagacious Emperor Ying Tsung [1457-1464] carried forward the tremendous and good work, adding much to the previous accomplishment. He ordered the authorities to set up locks and make a passage there, and he established an official to take charge of it. Thereafter, boats went to and fro, and there was no more of the previous distress.”
 
The lock official opened the lock and ordered laborers to pull my boats up, and we passed. [We went from l-ching-huang-chia Stop to Hsiehkou Lock.]
 
 
373. 서주성의 북으로 5리 거리에 있는 산으로 동서로 리가 이어져 九里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嘉靖《徐州志》 권4, 地理.
 
374. 불교에서 地獄을 관장한다고 일컬어지는 十王을 모신 殿堂이다. 十王은 秦廣王, 初江王, 宋帝王, 伍官王, 閻羅王, 變成王, 泰山王, 平等王, 都市王, 轉輸王을 가리킨다.
 
375. 嘉靖《徐州志》권7, 人事에는 秦梁洪淺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376. 嘉靖《徐州志》 권4, 地理 上; 권7, 人事 등에 의하면 境山鎭이 있어 본문의 市字는 字로 보인다. II. 徐州城에서 40리 거리로 서쪽으로 泗水에 임해있다. 嘉靖《徐州志》 권4, 地理上. JTB.. 《徐州志》권7, 人事에는 白廟兒淺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119. __은 淺鋪를 의미한다. 嘉靖《徐州志》권7, 人事에 협구천이 백묘아천, 진량홍천 등과 함께 서주의 15개 淺舖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다.
 
380. 최부가 이곳을 지나기 30년 전에 세워진 眉山萬翼碑는 바로 다음 해 黃河의 대범람으로 마을 전체와 함께 水沒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碑文은 중국 문헌에서 찾아볼 수가 없으며, 오직 최부《표해록》에서만 남아 있는 귀중한 기록이다.
 
381. 淮河 流域을 일컬음.
 
382. 成祖 永樂帝를 지칭한다. 文은 諡號, 太宗은 廟號인데 嘉靖 연간에 묘호가 成祖로 바뀌었다.
 
383. 國都 즉 北京 부근의 땅.
 
384. 股肱이란 手足이 되어 보좌의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股成大臣이란 좌우에서 보좌하는 가장 믿을 만한 대신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工部尙書 宋禮를 가리키는 듯하다. 永樂9년(1411) 永樂帝의 명을 받은 宋禮는 특히 會通河 일대의 水利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이 결과 永樂13년에는 海運을 폐지하고 河運을 시행하게 된다. 《明史》 권85, 河渠志3 運河上 등 참조.
 
385. 元 至正11년(1351) 都漕運使 賈魯를 總治河防使로 삼아 民 15만 명, 軍 2만여 명을 동원하여 黃河의 水利사업을 수행토록 하였다. 후에 翰林學士承旨 歐陽玄은 順帝의 명을 받고 이 治水 공정의 구체적 方略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至正河防記)라는 碑文을 지어 남겼다. 《元史》권66, 河渠志3, 黃河 참조.
 
386. 사방의 近憐遠邦에서 天子에 來朝하는 것을 會, 衆見하는 것을 同이라 한다.
 
387. 徐州 지방의 15 淺舖 가운데 하나로 嘉靖《徐州志》권7, 人事에는 黃家淺이라고 되어 있다.
 
388. 嘉靖《徐州志》 권7, 人事, 漕政에 徐州地方 15淺 가운데 李家淺이 열거되어 있다. 李家中鋪는 李家淺을 가리키는 듯하다.
 
 
===6일===
 
初六日,過沛縣,是日晴,曉過頭下開、頭中間、社學、洁頭上 開、(刀)(陽湖、金溝兒淺有上中下三處,至沛縣,縣即漢高祖故里也,縣之東北有河,即泡河,河之越岸有高墩,其前建族門,(標)「標]以 ‘歌風臺’之名,即高祖歌大風之處也,縣之東南有亭躁,即高祖少為上亭長之處也,河之西岸有橋,即張良取履處,飛雲在河口,臣等其河,歷其間,觀其臺,訪其橋,至驛前,驛距河三十步,傅榮謂臣曰:“足下觀我大國制度,以謂何如?自江南抵北都,舊無河路,自至正年間以來,始為通路之計. 至我太宗朝,置平江(候)(侯]以治之,疏清源,濟濟、沛,整淮陰,以達于大江,一帶脉絡,萬里通津,舟楫濟,功保萬全,民受其賜,萬世永頼.” 臣曰:“響非此河路,則我等於崎嶇萬里之路,有百技跛行之苦,今乃安队舟中,以達遠路,不知顛仆之虞,其受賜亦大矣,”是日,自曝過水母神廟,冒夜而行.
 
 
[http://blog.daum.net/leeikhee/15581473 패현(__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고두하갑(活頭下閘)·고두중갑(活頭中閘)의 상·중·하 세 곳을 지나서 패현에 이르니, 패현은 곧 한고조(漢高祖)389의 고향이었습니다.
 
 
패현의 동북방에 강이 있었으니 곧 포하(泡河)였습니다.
 
 
포하의 건너편 언덕에 높은 돈대(數臺)가 있었는데, 그 앞에 정문(推門)을 세워 '가풍대(歌風臺)'란 이름을 붙였으니 곧 한고조가 대풍(大風)을 노래390 한 '''곳'''이었습니다.
 
 
패현의 동남방에는 사정역(四亭驛)이 있었으니 곧 한고조가 젊었을 때 사상정장(泗上亭長)으로 있던 '''곳'''이었습니다.
 
 
포하의 서쪽 언덕에는 이교(橋)가 있었으니 곧 장량(張良)이 신을 주워 준 '''곳''' 392이었습니다.
 
 
비운갑(飛雲間)은 포하의 어구에 있었습니다.
 
 
신 등은 그 포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을 지나 대(臺)를 구경하고 다리를 찾아보고 사정역 앞에 이르니, 사정역은 포하에서 30보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족하는 우리 대국의 제도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남으로부터 북도(北都)에 이르기까지는 옛날에는 강의 수로가 없었는데, 지정(至正)393 연간으로부터 비로소 수로를 개통할 계책을 세웠습니다.394 우리 태종대에 와서 평강후(平江侯)395를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여 청원(淸源)을 소통시키고, 제수(濟水)·패수(流水)를 깊이 치고 회음(淮陰)의 땅을 파서 대강(大江)에 도달하게 하니, 한 줄기 맥락이 만 리나 되는 수로로 통하여 배가 다니는 데 안전을 보장하여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어 만세에 길이 힘입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이 강의 수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기구한 만 리 길에 온갖 고통을 겪었을 것인데 지금 배 가운데 편안히 누워서 먼 길을 오면서 전복의 근심을 알지 못했으니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사정역에서 수모신묘(水母神廟)396를 지나 밤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인명
 
*고증
 
*소통(환담)
 
*심리(안심)
 
*모화
 
 
6th Day. Passing P’ei District.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Ku-t'ou Lower Lock to P’ei District,] which had been the native place of Han Kao Tsu (r. 202 B.C. -195].80 Northeast of the district was a river, which was the P’ao. On its far bank was a high mound, in front of which a banner gate had been erected. It displayed the name Ko-feng Tower and was the place where Kao Tsu had sung of the great wind. Southeast of the district was Ssu-t'ing Station, which was the place where Kao Tsu had for a short time been head of Ssu-shang Pavilion. On the west bank of the river was I Bridge, which was the place where Chang Liang had got the shoe [that the old man had dropped].81
 
Fei-yün Lock was at the mouth of a river. We went up that river through the lock, looked at the stand, visited the bridge, and arrived in front of the station. The station was 150 feet from the river.
 
Fu Jung said to me, “Now that you see our great country's system, what do you think of it? Formerly there was no river route from south of the Yangtze to the northern capital. From the Chih-cheng period [1341-1367] there was for the first time a plan for a passage. With the reign of our T’ai Tsung, a Marquis of P’ing-chiang was established to carry it out.82 He dredged the Ch’ing and Yüan, deepened the Chi and Pei, and channeled the Huai and Yin so that they passed into the Yangtze. Throughout the whole region for ten thousand li, streams interlace like veins. Boats are able to pass in safety because of the work. The people have received the benefits and will continue to do so forever.”
 
I said, “If there were not this river passage, it would be our misfortune to hobble along by whatever means we could over a long, hard road. Now we lie at ease in the boats all the long way and do not know what it is to fall down. The benefits we have received are great, indeed.”
 
This day we went from the station past Shui-mu-shen Shrine and on through the night.
 
 
389. 漢高祖(재위 B.C.202-B.C.195)로, 이름은 劉邦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하급 관리직에 있다가 秦始皇이 죽은 다음해(B. C. 209) 군사를 일으켜 市公이라 칭하였다. 그 뒤 項羽보다 앞서 진나라의 수도 咸陽을 함락시키고,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뒤 4년 간에 걸친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張良, 韓信 등의 도움으로 승리하여 천하 통일의 대업을 실현시켰다. 기원전 202년 황제에 오르고 수도를 長安으로 정하였다.
 
390. 劉邦이 天下를 정복하고 고향인 市로 돌아와 父老와 子弟를 모아놓고 술을 마시면서 子弟120명에게 詩를 읊도록 하고 자신이 의기양양하게 불렀다는 노래를 말한다. 《史記》 권8 (高祖本紀) 참조.
 
391. 漢高祖 劉邦의 功臣으로, 자는 子房이다. 한나라 명문 출신으로, B.C.218년 始皇帝를 습격했으나 실패하였고, 은신하고 있을 때 黃石公으로부터 《太公兵法書》를 물려 받았다고 한다. 陳勝·吳廣의 亂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項羽와 유방이 만난 '鴻門의 會'에서는 위기 속의 유방을 구하였다. 蕭何와 함께 책략에 뛰어나 한나라 창업에 힘썼다. 그 공으로 留侯에 책봉되었다.
 
392. 張良이 秦始皇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뒤 把橋를 지나게 되었는데, 黃石公이 신발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리고 집어 오라 하는 등 시험을 한 끝에 張良의 誠意를 칭찬하고 兵書를 주었다는 故事를 말한다. 《史記》 권55 (留侯世家) 참조.
 
393. 元惠宗 順帝의 연호(1341-1368).
 
394. 至正11년(1351) 賈魯가 주관한 黃河 水利사업을 가리킨다.
 
395. 平江伯 陳寅을 가리킨다. 字는 彦純, 安徽 合肥人이다. 永樂元年(1403) 總兵官이 되어 漕運을 總督하였다. 死後에 淸河縣에서 그의 공적을 기려 祠堂을 만들었다.
 
396. 沛縣治의 남측으로 泡水가에 있는 水母廟를 가리킨다. 水母는 水神을 뜻한다. 民國《縣志》권6, 古蹟.
 
 
===7일===
 
初七日,午陰雨,曉過廟道口、湖陵城閘,至兖州府地方,兖州即舊魯國也,過沙河驛少泊,又過孟陽泊間,至八里灣閘,閘西魚臺縣地,縣前有觀魚臺,即魯隱公觀魚之處,縣之得名亦以此,又過上·下淺二鋪、河西集場,至穀亭閘,登河岸以望,則東北望渺茫間,有山不甚高峻,傳榮指其山,日:“彼卽尼丘山,孔子所生處也.” 山之下有孔里、洙·泗·沂水. 又東北望, 若有高山連豆數百里,如雲氣然,榮指其山,曰:“彼乃泰山,即古岱宗山,虞舜及周天子東巡狩之處也,此行若緣陸路,經竞州曲阜縣,則尼丘可
 
經, 洙、泗可涉, 孔里可觀, 泰山可近望矣.” 過玉皇廟,至南陽閘以泊.
 
 
흐렸다 비가 내렸다 했습니다.
 
 
새벽에 묘도구(廟道口), 호능성갑(湖陵城閘)을 지나서 연주부(兖州府)지방에 이르니, 연주는 곧 옛날의 노국(魯國)이었습니다.
 
 
사하역(沙河)을 지나서 조금 정박했다가 또 맹양박갑(孟陽泊間)을 지나 팔리만갑(八里灣間)에 이르니, 팔리만갑의 서쪽은 곧 어대현(魚臺縣)의 땅이었습니다.
 
 
어대현의 앞에는 관어대(觀魚臺)가 있었으니 곧 노은공(魯隱公)398이 물고기를 구경399했던 '''곳'''이므로 현이 '어대'란 명칭을 얻은 것 또한 이 때문이었습니다.
 
 
또 상천포(上淺鋪), 하천포(下淺鋪)의 두 포와 하서집장(河西集場)400을 지나 곡정갑(毅亭間)에 이르러 강의 언덕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동북으로 아득히 바라보이는 사이에 산이 있었는데 그다지 높고 가파르지는 않았습니다.
 
 
부영이 그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산이 바로 이구산(尼丘山)<ref>[https://www.youtube.com/watch?v=98s3ZFe18Qo 공자]</ref><ref>[http://chinahumanitas.net/?bwl_kb=%EB%8B%88%EA%B5%AC%EC%82%B0%E5%B0%BC%E4%B8%98%E5%B1%B1-%EB%8B%88%EC%82%B0%E5%B0%BC%E5%B1%B1-mountain-ni-mount-ni-nishan-holynishan 니구산(尼丘山), 니산(尼山, MOUNTAIN NI, MOUNT NI, NISHAN, HOLYNISHAN),중국인문학 http://chinahumanitas.net]</ref>으로 공자<ref>[https://www.youtube.com/watch?v=QSGFK5DpAg0 공자, 장지훈, 2015.2.14]</ref><ref>[http://chinahumanitas.net/?page_id=47724 공자의 철학지도]</ref>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구산 아래에 공리(孔里)와 수수(洙水)·사수(泗水)·기수(淨水)가 있습니다.
 
 
또 동북쪽으로 바라보니 높은 산이 수백 리를 이어져 있었는데 마치 구름 같았습니다.
 
 
부영은 그 산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산이 태산(泰山)이니 바로 옛날의 대종산(俗宗山)입니다. 우(虞) 나라 순(舜) 임금과 주(周) 나라 천자께서 동쪽으로 순수(巡游)하던 '''곳'''입니다. 이번 걸음이 만약 육로로 연주 곡부현(曲阜縣)을 경유하게 된다면 이구산도 지날 수 있고 수수와 사수도 건널 수 있고 공리도 구경할 수 있고 태산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옥황묘(玉皇廟)를 지나 남양갑(南陽間)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인명
 
*역사
 
*고증
 
*지리
 
*소통(설명)
 
*감상
 
 
7th Day. Alternately cloudy and rainy.
 
 
[We went from Miao-tao-k’ou to Ku-t’ing Lock.]
 
When we climbed the river bank and looked, we saw that in the vast spaces to the northeast were mountains, which were not very high. Fu Jung pointed to them and said, “They are the Ni-ch’iu Mountains, the birthplace of Confucius. Below the mountains are Confucius' village and the Chu, Ssu, and I rivers.” We also saw in the northeast what appeared to be high mountains lying stretched out over several hundred li like clouds. Jung pointed to them and said, “Those are the T'ai Mountains, the old Tai-tsung Mountains. They are where Yü Shun (traditionally 2317-2208 B.C.) and the Chou emperors made eastern tours. If this group followed the land route by way of Ch’ü-fu District, Yen-chou, we could go through the Ni-ch’iu, cross the Chu and the Ssu, see Confucius' village, and look at the T'ai-shan from nearby.”
 
We passed Yü-huang Shrine and came to Nan-yang Lock and stopped.
 
 
397. 湖陵城間은 沛縣의 閘名이다. 《明會典》권159 참조. 한편 호능성은 패현의 서북방향 50리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데 묘도구와는 18리의 거리로 運河가 거쳐 가는 곳이다. 《江南通志》권33 참조. 한편 嘉靖《徐州志》 권4, 地理에는 호능성갑과 묘도구 갑의 거리가 20리로 되어 있다.
 
398. 춘추시대 魯나라의 군주로, 惠公의 長庶子이다. 이름은 息姑이고, 시호는 隱이다. 혜공이 죽자 어린 태자 允을 세워놓고는 11년 동안 攝政을 하였다. 후에 公子의 무고로 마침내 害당하였다.
 
399.《春秋左傳》隱公 傳五年 條 참조.
 
400. 集場은 墟場이라고도 하는데 集市 交易하는 장소를 말한다. 市鎭의 街, 河, 山場에 설치하여 官府가 稅를 거두었다.
 
 
===8일===
 
初八日,過魯橋驛,是日陰,自南陽開,過聚林閘,至魯橋驛,驛前有魯橋閘, 東道齊魯,西連鉅野,南引淮楚,北抵京師,四通之路,西有黑矾池,池水黑,有太監姓劉者,封王赴京,其疾病、甲胃、鍾鼓、管絃之盛,震盪江河,及是開,劉以彈丸亂射人,其狂悖如此,陳豈曰:“此舟中內官,如此歪爲.” 傅榮問諸臣曰: “貴處亦有此太監否?” 臣曰: “我國內官, 只任宮中酒
 
 
p.414
 
掃、傳命之役,不任以官事,”榮曰:“太上皇帝信任宦官,故若此刑餘人,持重權為近侍,文武官皆趨付之”萱曰:“醫、道、佛三法,貴國何重?”臣曰:“我國重儒術,醫方次之,有佛而不好,無道法.”豈曰:“成化皇帝最重道、佛二法,今新皇帝一切禁之,”庄問曰:“貴地今當大明之時,皆稱大唐,何也?”榮曰:“此無他,因大唐時傳習之舊而云,習俗然也.”臣又問曰:“自我到此,貴地人皆指我等,曰:大大的鳥也機,此何等語也?”榮曰:“此日本人呼我處大人之訓,此方人恐你等從日本來,故有此言:”臣等自魯橋閘,過通利王、魯津橋,至五樓橋,東魯諸水,交流于此,又過師家莊下·上鋪、仲家鋪、仲家淺閘,至新聞,傅榮謂臣曰:“此開會都水監丞也先不華所建也,會通河至此地,沙土遺,水勢散逸,不能負舟,前後置脯,自新店至師氏莊,猶淺澀有難處,每灣船過此,上下畢力終日號,進寸退尺,必資車於陸而運,自立此新以後,舟行得其安且順也”云云,之東有河神祠,西有公署,署南南有遐觀臺,臺上構亭,以東與鄉峰山對,扁曰瞻鄉’. 臣等過其,夜過新店開以行,
 
 
노교역(魯橋驛)401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남양갑에서 조림갑(聚林閘)403을 지나 노교역에 이르니 노교역 앞에 노교갑(魯橋間)이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제로(齊魯) 지방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거야현(鍾野縣)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회초(淮楚)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경사에 이르게 되니 사방으로 통하는 길이었습니다.
 
 
노교갑 서쪽에는 흑연지(黑視池)가 있었는데 흑연지의 물은 검었습니다.
 
 
성이 유(劉)라는 태감이 왕을 봉하고 북경으로 갈 때, 정기(産旗), 갑주(甲骨), 종고(鍾鼓), 관현(管絃)의 성대함이 천지를 진동시켰는데, 이 갑문에 와서는 유(劉) 태감이 탄환으로 뱃사람을 향해 함부로 쏘니 그의 난폭한 행동이 이와 같았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이 배의 내관(內官)404 이 이같이 못된 짓을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신에게 묻기를, “귀국에도 이런 태감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내관들은 궁중에서 청소하는 일과 왕명을 전달하는 일만 맡고 관부의 일은 맡지 않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태상황제(太上皇帝)께서 환관을 신임했던 까닭에 이 같은 궁형(宮刑)을 받은 사람들이 막중한 권력을 쥐고 근시(近侍)가 되어 문· 무관들이 모두 이에 빌붙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의술, 도교, 불교의 세 가지 가운데 귀국에서는 어떤 것을 중하게 여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술(儒術)을 중히 여기고 의방(醫方)은 그 다음이며, 불교는 있지만 좋아하지 않고 도법(道法)은 없습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952015 신선 김가기]<ref>[https://www.nocutnews.co.kr/news/5088814 두보 시비 옆 한국인 칭송비, 주인공 김가기를 아시나요?]</ref><ref>[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560897&memberNo=40398447 우화등선한 선인 김가기 이야기]</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906 종남산신라김가기석각(終南山新羅金可紀石刻)]</ref>
 
 
“성화황제(成化皇帝)께서는 도교, 불교의 두 가지 법을 가장 중하게 여겼는데, 지금 신황제(皇帝)께서 일절 이를 금지시켰습니다.”
 
 
신이 묻기를, “귀국은 지금 대명(大明)의 시대를 당했는데도 모두 대당(大唐)<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901291800275 정관의 치]</ref><ref>[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C%A0%95%EA%B4%80%EC%9D%98_%EC%B9%98 정관의 치]</ref><ref>[http://www.usjournal.kr/news/articleView.html?idxno=103447 정관의 치]</ref>이라 일컫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이는 다름이 아니라 대당 시대부터 전습되어 오던 대로 일컫는 것이니 습속이 그러하기 때문이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귀국에 도착한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우리들을 가리켜 '높으신 오야지[大大的鳥也機]라 말하니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1418.html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 후궁으로 보내라”한겨레신문, 2012.07.06]</ref> <ref>[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1999012770448#Redyho [일본] `오야지'의미 `아버지'서 `색골'로 추락]</ref><ref>[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23353 [중국인 장악한 건설인력시장] ‘오야지’ 90%가 중국동포… 중국인 거느리며 군림 <상> 건설현장 불법 무풍지대]</ref>
 
 
“이는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대인(大人)'을 그렇게 부르는 훈(訓)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은 당신들이 일본에서 왔을까 하여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신 등이 노교갑에서 통리왕묘(通利王廟), 노진교(魯津橋)를 지나 오루교(五樓橋)에 이르니, 동로(東魯) 지방의 여러 갈래의 물이 서로 만나 이곳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 사가장(師家莊)의 상포(上鋪)·하포(下鋪)405, 중가포(仲家鋪)406, 중가천갑(仲家淺間)을 지나서 신갑(新聞)에 이르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하였습니다.
 
 
“이 수문은 곧 도수감승(都水監丞) 야선불화(也先不華)가 세운 것입니다. 회통하(會通河)가 이곳에 이르면 모래 섞인 흙이 물에 밀리고 수세가 흩어져서 배를 띄울 수 없었으므로 앞뒤에 수문을 설치하였습니다. 신점(新店)에서 사씨장(師氏莊)까지는 오히려 물이 얕아 어려운 곳이 있으므로, 조운 선박이 이곳을 지날 적마다 상하가 힘을 다해서 종일 부르짖어도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를 물러나게 되므로 반드시 육지에서 수레를 이용하여 운반하여야 했는데, 이렇게 새 수문을 만든 이후로는 배의 운행이 안전하고 순조롭게 되었습니다.”
 
 
수문의 동쪽에는 하신사(河神祠)409가 있고 서쪽에는 공서(公署)가 있었으며 공서의 남쪽에는 하관대(__觀臺)가 있었습니다.
 
 
하관대 위에는 정자를 건축하여 동쪽으로 추역산(鄒山)과 마주보게 하고는 편액을 첨추(瞻鄒)라고 하였습니다.
 
 
신 등은 그 수문을 지나서 밤에 신점갑(新店開)을 거쳐 갔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인명
 
*기술
 
*토목
 
*언어(일본어)
 
*관직
 
*부패
 
*풍습(종교)
 
*유학
 
*언어(국가명)
 
 
8th Day. Passing Lu-ch'iao Station. This day was cloudy.
 
 
From Nan-yang Lock we passed Tsao-lin Lock and came to Lu-ch'iao Station, in front of which was Lu-ch'iao Lock. There was a crossroads, going east to Ch'i and Lu, linking in the west with Chü-yeh, leading south to Huai and Ch’u, and reaching the capital in the north.
 
West of the lock was Black Ink-slab Lake, the water of which was black. An Overseer named Liu was there on his way to the capital to be enfeoffed. His multitude of flags, arms, armor, bells, drums, and musical instruments set the rivers trembling. Having come to that lock, he was wantonly shooting at boatmen with round shot. That was how depraved he was. Ch'en Hsüan said, “It is a eunuch who is behaving so wrongly in that boat.”
 
Fu Jung asked me questions. He said, “Are there these overseers in your country, too?”
 
I said, “The eunuchs in my country are employed only in sprinkling and sweeping in the palace and conveying messages. They are not given charge of public affairs.”
 
Fu Jung said, “The Emperor's father trusted eunuchs and gave them appointments. That is why those castrated for punishment, like that one, have great power as ministers close to the throne. All the civil and military officials toady to them.”
 
Ch’en Hsüan said, “Which of the three Laws, Medicine, Taoism, or Buddhism, does your country respect?”
 
I said, “My country respects the Confucian practices. Medicine comes next. There are Buddhists, but people do not esteem them. There is no Taoism.”
 
Ch'en Hsüan said, “The Ch’eng-hua Emperor [Hsien Tsung, r. 1465-1487] respected Taoism and Buddhism most. The new Emperor now strictly prohibits them.”
 
I asked, “Now that it is the time of Great Ming in your country, why does everyone call it Great T'ang?”
 
Fu Jung said, “It is simply that the latter has become customary since Great T'ang times.”
 
I then said, “Ever since I arrived here, all your countrymen have pointed at us and said, “Ta-ta-ti-wu-yeh-chi.' What kind of speech is that?”
 
Fu Jung said, “That is what the Japanese call eminent persons in our land. The people here suspect that you have come from Japan. That is why they use those words.”83
 
[We went from Lu-ch'iao Lock to New Lock.] Fu Jung said to me, “This lock was built by Supervisor of Waterways Yeh-hsien Pu-hua.84 When the Hui-t’ung River85 reached here, sand and mud had silted it up. The stream had spread and could not carry boats. Sluice-gates were put in at both ends, from Hsin-tien to Shih-shih-chuang, but in shoals and [sections where the bottom was] rough, there were still difficult places. Every time a canal boat passed here, all the men, high and low, exhausted their strength, shouting through the day, gaining an inch and losing a foot, and being obliged to resort to carts on land for transport. Since this new sluice-gate was built, the movement of boats has acquired safety and regularity.”
 
[We went on, noting landmarks.]
 
 
401. 玉皇은 道敎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큰 神인 昊天金闕至尊玉皇上帝의 略稱이며 모든 禍福을 관장한다고 한다.
 
402. 充州府 경계에 있는 水驛으로 嘉靖45년(1566)에 沙河驛과 같이 河橋驛으로 병합되었다. 萬曆《州府志》권18, 驛傳.
 
403. 南陽에서 북으로 12리 거리에 있는 漕河間이다. 萬曆《州府志》권19, 河渠.
 
404. 환관의 별칭.
 
405. 師家莊上淺舖와 師家莊下淺論는 모두 運河淺舖의 하나이다. 萬曆《州府志》 권19, 河渠.
 
406. 萬曆《州府志》권19, 河渠를 보면 運河淺鋪의 하나로 仲家莊淺이 있는데 莊이란 글자가 생략이 된 듯하다.
 
407. 也先不花를 가리킨다. 元의 정치가로, 케레이트 부족의 사람이다. 태자 眞金이 燕王에 봉해지자, 世祖의 명에 따라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1286년에 雲南行省平章政事 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民을 평정하였다. 登, 雲 등 府州縣 60여 곳을 설치하고 20여 만 戶를 얻었다. 후에 湖廣行省平章에서 河南行省平章으로 옮겨 黃河가 범람하자 治水에 힘썼으며, 湖廣行省左丞相으로 승진하였다.
 
408. 元 至元26년(1289) 大都로의 漕道를 확보하기 위하여 오늘날 山東 臨淸縣에서 東平縣에 이르기까지를 開盤하여 會通河라고 命名하였지만 기술상의 문제로 水深이 충 분치 않아 수송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元代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 明 洪武24년 黃河의 범람으로 망가졌지만 永樂 연간 遷都 이후 江南과 北京 사이의 漕道 확보가 절실하게 되었다. 이에 濟寧州 同知 潘叔正의 上言에 따라 會通河의 준설에 착수하였다. 永樂9년(1411) 2월 工部尙書 宋禮의 지휘 아래 착공하여 6월에 준공되었다.
 
409. 전설상의 黃河를 관장하는 水神인 河伯을 가리킨다.
 
 
===9일===
 
初九日,至濟寧州,是日晴,欲曙過閘,則乃石(福)佛】開也,又過趙村閘,至南城驛,少停舟而行,又過真武廟,至下新聞,闡在越河口西(入)【八】百餘尺,越河東密澜天井開,北對會通河,二水縱橫十字然,由閘河而西者,或至流覆,越河而上者,艱於逆乾,置此間於兩口之下,時水盈縮而開縱之,聞之西北二十里許,有獲麟堆,即西狩獲麟之處,今嘉祥縣地也,臣等過其間,至濟寧城,則東北有酒從曲阜,光從祖,合鲁城東,來入漕河達淮,以入于海,踰淮為南京,西北有湖,東分入漕河,北分臨清,出衛河以達于海,驗海為北京,兩京相望三千餘里外,水皆從濟寧中分,城之東畔光河,西畔濟河,二河紫抱,合流于城南底,兩河之中有土阜,阜自東北起,蜿蜒而來,殆千有餘里,阜上有觀瀾亭,即孫蕃所建也,由亭下至通津橋,橋當城門道,橋南有靈源弘濟王廟,至宿于廟西北河岸,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82%B0%EB%91%A5+%EC%84%B1+%EC%A7%80%EB%8B%9D+%EC%8B%9C/@35.4101982,116.5158242,11.75z/data=!4m13!1m7!3m6!1s0x35c46533b87353f9:0x2bd94b0f3d17511d!2z7KSR6rWtIOyCsOuRpSDshLEg7KeA64udIOyLnA!3b1!8m2!3d35.414982!4d116.587282!3m4!1s0x35c46533b87353f9:0x2bd94b0f3d17511d!8m2!3d35.414982!4d116.587282 제녕주(濟寧州)]<ref>[http://friendlyshandong.co.kr/friendlyshandong/2017/11/29/%EC%82%B0%EB%8F%99%EC%84%B1-%EC%A0%9C%EB%85%95%EC%8B%9C/ 산동성 제녕시]</ref>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때 수문을 지나니 곧 석불갑(石佛聞)이었습니다.
 
 
또 조촌갑(趙村間)을 지나 남성역(南城驛)에 이르러 조금 배를 정박시켰다가 길을 떠났습니다.
 
 
또 진무묘(眞武廟)를 지나 하신갑(下新開)에 이르니 하신갑은 월하(越河) 어구에서 서쪽으로 800여 척이 되었습니다.
 
 
월하는 동쪽으로 천정갑(天井間)과 매우 가깝고, 북쪽으로 회통하(會通河)와 마주보고 있었는데 두 물이 가로 세로로 십(十)자와 같았습니다.
 
 
갑(間)과 하(河)를 경유하여 서쪽으로 가는 것은 흘러가다가 뒤집어지곤 하고 월하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거슬러 당기기가 어려워 이 갑문을 양쪽 어귀의 아래에 설치하고서 물이 차고 줄어드는 것을 보아 이를 닫고 열고 하였습니다.
 
 
갑 서북쪽 20리가량에 획린퇴(獲麟堆)가 있었으니 곧 '서쪽으로 사냥 가서 기린(麒麟)을 잡았다'413는 '''곳'''으로 지금의 가상현(嘉祥縣)지방입니다.
 
 
신 등이 그 갑문을 지나서 제녕주성(濟寧州城)에 이르니 동북쪽에 사수(泗水)는 곡부로부터, 황하(光河)는 조래(요양)로부터 노성(魯城)의 동쪽에서 서로 합류하여 조하(遭河)에 들어가 회수에 도달하여 바다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회수를 넘어가면 남경이 되고 서북쪽에 거호(鍾湖)가 있어 동쪽으로 갈린 것은 조하에 들어가고, 북쪽으로 갈린 것은 임청(臨淸)에서 위하(衛河)를 나와 바다에 도달하여 바다를 건너면 북경이 되니, 남경과 북경은 3천여 리 밖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강물은 모두 제녕(濟寧) 성중에서 갈라져 성의 동쪽 경계는 황하(河)이고 서쪽 경계는 제하(濟河)인데, 두 강이 빙 둘러서 있어서 제녕성 남쪽 밑에서 합류하고 있었습니다.
 
 
두 강물의 복판에 토산(土山)이 있었으니 토산은 동북방에서 일어나 구불구불하면서 길게 이어진 것이 거의 천여 리나 되었습니다.
 
 
토산의 위에 관란정(觀__亭)이 있었으니 곧 손번(孫菴)이 세운 것이었습니다.
 
 
관란정 아래를 경유하여 통진교(通津橋)에 이르니 통진교는 성 남문의 길이었습니다.
 
 
통진교 남쪽에 영원홍제왕묘(靈源弘濟王廟)가 있었으며 묘의 서북쪽 강 언덕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기후
 
*시간
 
*지명
 
*지리
 
*토목
 
*기술
 
*고증
 
*인명
 
 
9th Day. Arrival at Chi-ning Department.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Shih-fu Lock to Hsia-hsin Lock,] which was more than one hundred feet in to the west from the mouth of the Yüeh River. To the east, the Yüeh River came close to T’ien-ching Lock and against the Hui-t’ung River on its north. The two rivers met at right angles. People going west on the river from the lock sometimes were overturned by the current, and those going up the Yüeh River had trouble towing against the current. The locks had been established below the two mouths to await the flooding or ebbing of the water to be opened or closed.
 
About twenty li northwest of the lock there was Huo-lin Knoll, which had been the place of “hunting and trapping unicorns in the west.”86 It is now the land of Chia-hsiang County.
 
We passed the lock and came to the wall of Chi-ning Department. To the northeast the Ssu from Ch'ü-fu and the Kung from Tsu-lai joined east of Lu Bridge and came into the Grand Canal to pass the Huai and enter the sea. Beyond the Huai was Nanking. To the northwest was Lake Chü, which in its eastern part received the Grand Canal and in its northern part, in Lin-ch’ing, put out the Wei River to pass to the sea. Beyond the sea was Peking. The two capitals stood over three thousand li apart.
 
All the rivers from outside divided in Chi-ning. The Kung River, bounding the east wall, and the Chi River, bounding the west wall, curved windingly round and joined below the south wall. In the two rivers were earthen dunes. The dunes started in the northeast and came undulating down for more than
 
one thousand li.87 On top of a dune there was Kuan-lan Pavilion, which had been built by Sun Fan.88 From below the pavilion we came to T’ung-chin Bridge, which was on the road to the southern gate of the wall. South of the bridge was Ling-yuan-hung-chi-wang Shrine. We came to a stop on the river bank northwest of the shrine.
 
 
410. 河橋驛에서 북으로 90리 거리의 濟寧州城 南門 밖에 있다. 洪武5년(1372)에 건설되었다. 南城驛은 水驛이지만 濟寧州가 水陸의 요충인 만큼 말도 준비해두었다. 萬曆《克州府志》권18, 驛傳.
 
411. 眞武는 곧 玄武를 가리킨다. 道敎에서 신봉하는 전설상의 北方의 神이다. 大中祥符 연간에 避諱하기 위하여 玄武를 眞武로 改稱하였다.
 
412. 趙村開에서 서북으로 6리를 가면 在城聞, 다시 서쪽으로 2리를 가면 천정갑으로 元代의 會源閘이다. 萬曆《州府志》권19, 河渠.
 
413.《春秋左傳注疏》권59, 哀公 14年 條에 나오는 말이다. 이 구절은 孔子에 의한 《春秋》의 絶筆로 유명하다. 麒麟이란 仁로서 聖王의 상징이다.
 
 
===10일===
 
初十日,至開河驛,是日晴大風,曉發濟寧城,西過分水閘,至南旺湖,湖彌漫無際,但西望遠山而已,其東有青草茂塞之行,即《禹貢》大野既(滿)「豬」之澤,今為塞者湖中築石長堤,名官堰,臣等沿堤岸順風而北,過馬長坡、安民、牢正、曹井等鋪,至鉅野縣地方,過火頭灣、白嘴兒、黃沙灣、小長溝等鋪、大長滿集,又至嘉祥縣地方,過大長溝、十字河、寺前、孫村等鋪,又至上縣地方,過界首鋪、老坡閘,至分水龍王廟,有大水自東北來,至廟前分南·北派,南派即臣所已經,順流
 
 
p.416
 
南下,北派臣所將往,逆流北上,廟當其二水之分,故以分水名,問其東北來大水,則人口濟河之源也,未詳其實,楊旺與其徒入廟中,焚香禮神以祭,令臣等亦拜,臣曰:“祭山川,諸侯事,為士庶人者,特祭祖考耳,少驗其分,非禮也,非禮之祭,人為誼,神不享,故我在本國,不敢拜山川之神,況可拜異國之乎?”陳萱曰:“此洞,乃龍王祠也,有靈跡,故過此者,皆致恭拜祭,然後行,不然則必有風濤之險,”臣曰:“觀於海者難為水,我已經數萬里大海暴濤之險,若此中土中”江河之水,不足畏也.”語未畢,萱告于旺曰:“此人不要拜,亦不可屈其志”云云,又過嚴城鋪,至開河驛,夜已三更矣,所謂官堰,至嚴城鋪而絕,堰中有聞,相間或八九里、或 十餘里, 凡十有四,堰之長,亦過百餘里.
 
 
개하역(開河驛)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으나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새벽에 제녕성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분수갑(分水間)을 지나서 남왕호(南旺湖)에 이르니, 남왕호는 물이 가득차 끝이 없고 다만 서쪽으로 먼 산만 바라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동쪽에는 푸른 풀이 우거진 평지가 있었으니, 곧 〈우공>의 '대야(大野)에 물이 고이니415라는 '''못'''입니다.
 
 
지금은 메워져 있었는데 호수 복판에 돌로 긴 제방을 쌓고 명칭을 '관언(官恨)'이라 하였습니다.
 
 
신 등은 제방의 언덕을 따라 바람이 부는 대로 북쪽으로 가서 마장파(馬長坡)·안민(安民)·뇌정(牢正) ·조정(曹井) 등 포를 지나서 거야현(鍾野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화두만(火頭灣)·백취아(白嘴兒)·황사만(黃沙灣)·소장구(小長溝) 등 포와 대장만집(大長滿集)을 지나서 다시 가상현(嘉祥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대장구(大長溝)·십자하(十字河)·사전(寺前)·손촌(孫村) 등 포를 지나서 또 문상현(上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계수포(界首鋪)416 · 노파갑(老坡間)을 지나서 분수용왕묘(分水龍王廟)에 이르니, 큰 강물이 동북쪽에서 용왕묘 앞에 이르러 남쪽 갈래와 북쪽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남쪽 갈래는 곧 신이 이미 물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강이고, 북쪽 갈래는 곧 신이 장차 물길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갈 강이었습니다.
 
 
용왕묘는 그 두 갈래 물이 나뉜 곳에 있는 까닭에 분수(分水)라고 명명한 것이었습니다.
 
 
그 동북쪽에서 온 큰 강물을 물으니 사람들은 '제하(濟河)의 연원이다'라 하였지만 사실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양왕은 그 무리와 함께 용왕묘 안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용신(龍神)에게 배례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신 등에게도 또한 절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제후의 일로서 사서인(士庶人)은 조고(祖考)에게만 제사를 올릴 따름입니다.
 
 
조금이라도 그 분수를 넘으면 예절에 어긋난 일입니다.
 
 
예절에 어긋난 제사는 사람들이 아첨으로 보고 귀신도 제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본국에 있을 때 산천의 신에게는 절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사당에 절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진훤이 말하기를, “이 사당은 곧 용왕사(龍王祠)로서 영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공경스럽게 절하고 제사지낸 뒤에야 길을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풍랑의 조난을 당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다를 구경한 사람 앞에선 강물은 물이라 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417 나는 이미 수만 리나 되는 큰 바다에서 거센 파도의 험난함을 겪었으니, 이와 같은 중원의 강물은 두려워할 것도 못 됩니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진훤은 양왕에게, “이 사람은 절하려 하지 않으며 또 그의 뜻을 굽힐 수도 없겠습니다" 운운하였습니다.
 
 
또 감성포(闕城鋪)를 지나서 개하역(開河驛)에 이르니 밤이 벌써 3경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관언(官倭)'이란 것도 감성포에 이르러 끊어졌습니다.
 
 
관언 가운데 있는 갑문은 8-9리 혹은 10여 리 간격으로 모두 14개가 있었고, 관언의 길이 또한 100여 리가 넘었습니다.
 
 
*기후
 
*시간
 
*지명
 
*고증(지리)
 
*심리(의심)
 
*풍습(미신)
 
*심리(의연)
 
*사당
 
 
10th Day. Arrival at K’ai-ho Station. This day was fair, with high winds.
 
 
At dawn we left the wall of Chi-ning, went west past Fen-shui Lock and came to Nan-wang Lake. The lake was an endless expanse of water; only in the west did we see distant mountains. In the east were dense barriers of green grasses, which were the marsh in Yü kung: “The lake of Ta-yeh was confined within its proper limits” [Legge, III: 105]. Now it has become silted up, and in the lake a long stone levee has been built and named Public Dam.
 
[We went from Ma-chang-p'o to the Shrine of the Dragon King of the River Fork.]
 
A large river there came from the northeast, arrived in front of the shrine, and split into northern and southern branches. The southern branch was the one that we had come down, with the current. The northern branch was the one up which we were going to go, against the current. Because the shrine was at the fork of the two rivers, it had the name River Fork. I asked about the large river that came from the northeast, and someone said, “It is the source of the Chi River.” I do not know whether that was so.89
 
Yang Wang and his staff entered the shrine, burned incense, and worshiped the god with sacrifices. They ordered us to pray, too. I said, “Sacrificing to mountains and rivers is a matter for the nobility; gentlemen and commoners sacrifice only to their ancestors. To overstep one's place is improper, and improper sacrifices make fawners of men and do not satisfy the gods. In my own country, therefore, I do not venture to pray to the gods of mountains and rivers. How could I possibly pray at the altars of foreign countries ?”
 
Ch'en Hsüan said, “This is the altar of the Dragon King who once appeared here. For that reason, everyone who passes here sacrifices most respectfully before going on. Otherwise there would surely be trouble with the wind and waves.”
 
I said, “One who has looked at the sea is not easily impressed by other waters. I have passed through an ocean of tens of thousands of li and violent waves. The water of rivers like these, here in the land, is not enough to scare me.”
 
Before I had finished speaking, Ch'en Hsüan said to Yang Wang, “This man will not pray, and we should not bend his will."
 
We passed K’an-ch'eng Stop and came to K’ai-ho Station. It was already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What was called Public Dam went as far as K'anch'eng Stop and stopped. In it there were sluices, some eight or nine li apart, some over ten li apart, and fourteen in all. The dam itself was over one hundred li long.
 
 
414. 至元28년(1291) 黃河를 靈源弘濟王으로 加封한 바 있다. 《元史》 권76. 靈源弘濟王廟는 百步洪 가에 있는데 舊名은 聖女祠이다. 《明一統志》권18.
 
415. 원문은 '大野旣濟'이고 출전은 〈禹貢)의 '大野旣豬'로서 滿는 __의 誤記이다. 大野는 호수의 이름, 豬는 물이 깊이 고였다는 뜻이다.
 
416. 문상현의 14개 천포 가운데 하나이다. 萬曆《充州府志》권19, 河渠.
 
417.《孟子》〈盡心>上. “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
 
 
===11일===
 
十一日,晴,過開河鎭、劉家口、表家口、開渠、頭山津、張八口”、步家口等鋪,至東平州地方,東平,即《禹貢》東原底平者,沙土遺陀,水性下濕之地,又過新家口、栗家莊、李家口明、劉家莊、王忠口、馮家莊、長張口等鋪,至安山開,登岸四望,則有山連綿西北間,問之則若梁山,若土山,若孝堂山,或謂孝堂,即郭巨理子得金之山也,夜至安山驛.
 
 
맑았습니다.
 
 
개하진(開河鎭)·유가구(劉家口)·표가구(表家口)·개거(開渠)·두산진(頭山津)·장팔구(張入口)·보가구(步家口) 등 포를 지나서 동평주(東平州) 지방에 이르니 동평은 〈우공>의 '동원(東原)이 평안해졌다'419는 '''곳'''으로 모래 섞인 흙이 물에 밀리고 습기가 많은 땅이었습니다.
 
 
또 근가구(家口)·율가장(栗家莊)·이가구(李家口)·유가장(劉家莊)·왕충구(王忠口)·풍가장(馮家莊)·장장구(長張口) 등 포를 지나 안산갑(安山間)에 이르러서 언덕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산이 서북방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물어보니 양산(梁山)419·토산(土山)·효당산(孝堂山)420 등이었습니다.
 
 
효당산은 곽거(郭巨)가 자식을 묻다가 금을 얻었던 '''산'''이라고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밤에 안산역(安山驛)에 이르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고증
 
 
11th Day. Fair.
 
 
[We went from K’ai-ho Market to An-shan Station.]
 
 
418 평안해졌다는 것은 水患이 그치고 경작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419_東平州治에서 서남쪽으로 50리 거리에 있으며, 本名은 良山인데 漢光武帝가 숙부를 避諱하여 梁으로 改名하였다. 民國《東平縣志》권2, 山川.
 
420_ 本名은 巫山, 《山東通志》권6 참조. 421- 漢代의 郭巨는 24 孝子 가운데 1인으로 老母가 아들에게 밥을 덜어주는 것을 보고, 굶주리는 가난한 집안 형편을 생각해 아들을 생매장시키려다 도리어 金을 발견했다.
 
 
===12일===
 
十二日,至東昌府,是日晴,過堡粮食、安山保、譯家花、積水湖口、蘇家莊、那家莊、沙孤堆等鋪及戴家廟,至金線閘遞運所,所前有經魁門. 門右人家,掛雕籠苗有鳥,其形如鸠,其味赤而長,其吻徵黃而鉤,其尾長八九寸,眼黃背青,頭與胸水黑色. 其性曉解人意, 其語音清和圓轉,曲節分明,人或有言,皆應之,臣與傳榮往觀之,謂榮曰:“此鳥能言,其無乃鸚鵡乎?” 榮曰: “然.” 臣曰:“此即隴西鳥也,我卽海東人也. 隴西、海東, 相距數萬餘里, 今日得相見於此, 得非幸乎? 但我與此為客他鄉,同也, 思故國,同也,形容之憔悴,亦同也,觀此鳥,彌增悲嘆之情,”榮日:“此鳥長在籠中,終死他國,今足下好還貴國,盡職君親,胡可謂之同也?”鸚__亦有言,似若有知然,又至壽(長)「張」縣地方,過戴家廟·劉家口·
 
 
p.418
 
戴洋·張家莊·沙灣等鋪、感應祠,至東(河)[阿]縣地方,過沙灣淺鋪、大河神祠、安家口鋪、北浮橋、掛劍鋪、通汴梁、通濟聞、汉河、沙灣巡檢司、兩河口、鍾樓閣、鼓樓閣、雲津門,到荊門驛,驛丞引臣及傳榮于皇華堂前饋茶,又過平河水鋪、新添鋪、荊門上·下閘,至陽穀縣地方, 夜過灣東鋪、張家口鋪、七級上·下開、周家店開、阿城上·下閘、李海務聞,至崇武驛,夜五更矣,東昌府即舊齊之聊·攝地,城在驛北三四里河岸,城中有府治、聊城縣治及按察司、布政司南司、平山衛、預備倉、宣聖廟、縣學.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82%B0%EB%91%A5+%EC%84%B1+%EB%9E%B4%EC%98%A4%EC%B2%AD+%EC%8B%9C+%EB%91%A5%EC%B0%BD%ED%91%B8+%EA%B5%AC/@30.0271754,95.8213652,4.75z/data=!4m5!3m4!1s0x35c2dbb987da17db:0x51a681c6f752739e!8m2!3d36.434645!4d115.988491 동창부(東昌府)]<ref>[https://www.youtube.com/watch?v=rXypDJr1yCo 東昌府-中華水上古城聊城宣传片 Liaocheng Shandong]</ref><ref>[https://www.earticle.net/Article/A307643 중국 동창부(東昌府) 연화(年畵)의 현황조사 - 동창연화박물관 현장조사 및 지역연화 전문가의 구술을 통한 고찰]</ref>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보량창(堡糧倉)·안산보(安山保)·역가화(譯家花)·적수호구(積水湖口)·소가장(蘇家莊)·형가장(家莊)·사고퇴(沙孤堆) 등 포422와 대가묘(戴家廟)를 지나서 금선갑체운소(金線閘遞運所)에 이르니, 체운소 앞에 경괴문(經魁門)이 있었습니다.
 
 
이 경괴문 오른편의 인가에는 새장을 걸어놓고 새를 기르는데, 그 형상은 비둘기<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311&index_id=cp03110345&content_id=cp031103450001&print=Y 쌍비둘기 그림]</ref><ref>[http://www.hani.co.kr/arti/PRINT/128768.html 비로봉과 동해 양팔에 품은 ‘금강의 보석’
 
, 한겨레신문, 2006.06.01]</ref><ref>[https://www.sciencetimes.co.kr/?news=%EB%A9%B8%EC%A2%85%EC%9C%84%EA%B8%B0-%ED%86%A0%EC%A2%85-%ED%85%83%EC%83%88-%EB%82%AD%EB%B9%84%EB%91%98%EA%B8%B0 멸종위기 토종 텃새 ‘낭비둘기’, 사이언스타임즈2014.01.28]</ref> 같고 그 주둥이는 붉으면서 기다랗고, 그 입가는 조금 누르스름하면서 구부러졌고, 그 꼬리는 길이가 8-9치나 되었으며, 눈은 누르스름하고 등은 푸르며, 머리와 가슴은 먹 빛깔이었습니다.
 
 
그 새는 사람의 뜻을 잘 알아듣고, 말소리는 맑고 부드러워 음절이 분명하여 사람이 말을 하면 이에 응답하곤 하였습니다.
 
 
신은 부영과 함께 가서 보고는 부영에게 말하기를, “이 새가 말을 하니 앵무새<ref>[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475 김대환의 文響_ 29 백자 앵무새 모양 연적(白磁鸚鵡硯滴),
 
교수신문]</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5989 흥덕왕과 앵무새설화(興德王─鸚鵡─說話)]</ref><ref>[http://minbaek.aks.ac.kr/Contents/Item/E0035243 앵무가(鸚鵡歌)]</ref><ref>[https://coderlife.tistory.com/356 신라교역목록-당나라]</ref><ref>[http://kansong.org/collection/bulsuaengmu/ 불수앵무, 장승업]</ref><ref>[http://sports.khan.co.kr/bizlife/sk_index.html?art_id=201412102040156&sec_id=561801 [김재영의 S학사전]처녀성 감별의 비법 ‘앵무새 피’,경향신문]</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VPaOow0S3fM 앵무새감별법]</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06DMyM2l5-c 이마벗어진 앵무새, 북한]</ref><ref>[https://neverick.tistory.com/2 앵무새의 역사와 국내 취급 현황]</ref>가 아닙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농서(隴西)423의 새이고, 나는 곧 해동(海東)의 사람입니다. 농서와 해동은 거리가 수만여 리나 되는데, 오늘 이곳에서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나와 이 새는 타향에서 손 노릇한 것도 같고, 고국을 생각하는 것도 같고, 모습이 초췌한 것도 또한 같아서 이 새를 보니 비탄한 심정이 더할 뿐입니다.”
 
 
“이 새는 새장 속에 오래 갇혀 있다가 마침내 타국에서 죽겠지만 지금 족하는 귀국으로 잘 돌아가서 임금과 어버이에게 본분을 다 할 수 있는데 어찌 이 새와 같다고 하겠습니까.”
 
 
앵무새 또한 말을 하여 알아들은 듯하였습니다.
 
 
또 수장현(壽張縣)424 지방에 이르러 대가묘(戴家廟)·유가구(劉家口)·대양(戴洋) 장가장(張家莊)·사만(沙灣) 등 포425와 감응사(感應祠)를 지나서 동아현(東阿縣) 26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사만천포(沙灣淺鋪)·대하신사(大河神祠)427. 안가구포(安家口鋪)·북부교(北浮橋)·패검포(掛劍鋪)·통변량(通汴梁)·통제갑(通濟間)·차하(__河)·사만순검사(沙灣巡檢司)·양하구(兩河口)·종루각(鍾樓閣)·고루각(鼓樓閣)·운진문(雲門)을 지나서 형문역(前門驛)에 이르니, 역승이 신과 부영을 황화당(皇華堂) 앞에 인도하여 차를 접대하였습니다.
 
 
또 평하수포(平河水鋪)·신첨포(新添鋪)·형문상갑(荊門上)과 하갑(下間)을 지나서 양곡현(陽穀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밤에 만동포(灣東鋪)428. 장가구포(張家口鋪)·칠급상갑(七級上開)과 하갑(下間)429. 주가점갑(周家店) · 아성상갑(阿城上開)과 하갑430. 이해무갑(李海務間)을 지나서 숭무역(景武驛)에 이르니, 밤 5경431이었습니다.
 
 
동창부(東昌府)는 곧 옛날 제(齊) 나라의 요성(聊城)과 섭성(城)으로서 성은 역 북쪽의 3-4리쯤 되는 강 언덕에 있었습니다.
 
 
성 안에는 부치·요성현치(聊城縣治)와 안찰사(按察司)·포정사(布政司)·남사(南司)·평산위(平山衛)·예비창(預備倉)432. 선성묘(宣聖廟)·현학(縣學)433이 있었습니다.
 
 
*기후
 
*지명
 
*동물
 
*심리(비통)
 
*심리(감정이입)
 
*의전
 
*역사
 
 
12th Day. Arrival at Tung-ch'ang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Pao-liang-ts’ang to Chin-hsien-cha Transfer Station.] In front of the station was Ching-k’uei Gate. From a house to the right of the gate hung a carved cage in which a bird was kept that was shaped like a pigeon. Its beak was red and long, the tip somewhat yellow and hooked, and its tail was ten or eleven inches long. Its eyes were yellow, its back green, and its head and breast inky. It was gifted with the ability to understand men's thoughts. Its speech was coherent and glib, and its songs were clear. If a person said something, it repeated it all. I went to look at it with Fu Jung and said to him, “This bird can speak; is it not a parrot?"
 
Fu Jung said, “It is.”
 
I said, “This is a bird from Kansu, and I am a man from Korea. Kansu and Korea are tens of thousands of li apart; is it not a fortunate coincidence that we have come to meet each other here today! Traveling in a foreign country, I and the bird are alike. Thinking of our homelands we are alike. Anxious and haggard of appearance, we are alike. To look at this bird deepens my grief.”
 
Fu Jung said, “This bird is spending his life in a cage, and in the end he will die in a foreign country. You, now, are returning safe and sound to your own country and will carry out your duties to your lord and parents. How can you call that the same?” The parrot also said something, as if he understood us.
 
[We went from Shou-ch’ang County to Ch’ung-wu Station, in Tung-ch'ang Prefecture.]
 
Tung-ch'ang Prefecture was the Liao and She of the old state of Ch’i. The wall is three or four li up the river bank north of the station. Inside the wall are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 of Liao-ch'eng County, a post of the Provincial Surveillance Office, the south post of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P’ing-shan Garrison, Yü-pei Granary, Hsüan-sheng Shrine, and the county school.
 
 
422. 萬曆《州府志》권19, 河渠를 보면 東平州의 淺舖로서 안산보는 安山上淺(識)과 下淺, 담가화는 禪家莊, 적수호구는 積水湖, 사고퇴는 沙堆로 표기되어 있고 그 외에 소가장천, 형가장천 등이 있다.
 
423. 龍山 以西란 뜻으로 오늘날 甘肅 隴山 以西, 黃河 以東 일대에 해당한다.
 
424. 壽長은 壽張의 誤記이다. 東漢시대에 壽良縣을 壽張縣으로 改名하였다. 明 洪武3년(1370) 壽張縣을 須城과 陽谷 2縣으로 나누었다가 13년 다시 壽張縣을 두었다. 治所 는 오늘날 山東 陽谷縣의 동남쪽에 있는 壽張集에 위치한다. 牛平漢, 《明代政區沿革綜表》(中國地圖出版社, 1997) 등 참조.
 
425. 壽張縣의 5개 淺鋪이다. 그 가운데 대가묘는 上下 淺舖로 나뉘어지는데 上論는 東平州, 下論가 壽張縣에 속한다. 또 대양포는 萬曆《州府志》권19, 河渠에 의하면 戴 洋口淺(論)이다. 한편 사만포는 縣治에서 동쪽으로 30리, 장가장포는 동남쪽으로 35리, 유가구포는 동남쪽으로 45리, 대가묘포는 동남쪽으로 50리의 거리에 있다. 光緖《壽張縣志》 권2, 建置.
 
426. 東河는 東阿의 誤記이다. 秦代에 처음 설치된 이래 역대로 廢置가 반복되었다. 明 洪武8년(1375) 오늘날 山東平陰縣 서남쪽의 東阿鎭에 東阿縣의 治所를 두었다. 18년에는 濟寧府에서 州府로 소속이 바뀌었다. 牛平漢, 《明代政區沿革綜表》(中國地圖出版社, 1997) 등 참조.
 
427. 東阿縣治에서 서남으로 70리 거리로 沙灣運河의 北岸에 壽張縣과의 경계에 놓여있다. 正統14년(1449)에 黃河가 터진 후에 創建되었다. 民國《東阿縣志》 권8, 祠祀.
 
428. _殺縣의 淺 가운데 하나인 館驛灣東岸淺()를 지칭한다. 萬曆《充州府志》 권 19, 河渠.
 
429. 陽殺縣의 濟河閘으로서 아성하갑에서 북으로 12리가 칠성상갑, 다시 북으로 3리가 칠성하갑이다. 萬曆《充州府志》권19, 河渠.
 
430. 陽穀의 漕河閘으로 형문하갑에서 북으로 10리가 아성상갑, 다시 북으로 3리가 아성하갑이다. 萬曆《州府志》권19, 河渠.
 
431.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
 
432. __貸에 대비하여 각 州縣에 설치한 창고이다. 洪武3년(1370)에 전국의 州縣에 각각 4倉을 세우고, 官에서 鈔를 지급하고 곡식을 사들여 저장해서 흉년에 대비한 것으로, 현지의 나이가 많고 독실한 사람이 관리하였다. 正統 연간 이후 죄수의 贖米를 거두어 저장하여 창고에 들여 정해진 액수가 없었다. 成化 연간 이후 비로소 里當 양식 300석 또는 500석을 쌓아두는 규정이 있었다.
 
433. 지방의 官立學校인 儒學의 하나이다. 洪武2년(1369)에 처음 건립하였다. 府學에는 敎授를, 州學에는 學正을, 縣學에는 敎諭를 각각 1인씩 두었다. 또 府學에는 訓導 4인, 州學에는 3인, 縣學에는 2인을 두었다. 학생 즉 生員의 수는 府가 40명, 가30명, 縣이 20명이었으나 후에 점점 그 수가 늘어갔다.
 
 
===13일===
 
十三日,過清陽驛,是日晴,過通濟橋、東岳廟、進士門、東昌遞運所、免粮廠,又過堤口、稍長削、柳行口、房家莊、白廟、雙渡兒、呂家灣、(校)(梭]堤等鋪,河之東會堂邑縣地方,西即博平縣地方,又過洪家口、梁家口等鋪及梁家開、感應神祠,又過表家灣19·馬家灣·老堤頭·中開口等鋪、土橋閘、新開口鋪、函谷洞、减水閘,至清平縣地方.又過(趨)「趙]家口鋪 59,至清陽驛,又過朱家灣·丁家口·十里书·李家口等鋪、戴家灣閘,乘月達曙而行.
 
 
청양역(淸陽驛)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통제교갑(通濟橋)·동악묘(東岳廟)434. 진사문(進士門)·동창체운소(東昌遞運所)·태량창(糧r)을 지나고, 또 제구(堤口), 초장갑(稍長)·유행구(柳行口)·방가장(房家莊)·백묘(白廟)·쌍도아(雙渡兒)·여가만(呂家灣) 사제(__堤) 등 포를 지났습니다.
 
 
강의 동쪽은 당읍현(堂邑縣) 지방이고 서쪽은 박평현(博平縣) 지방이었습니다.435
 
 
또 홍가구(洪家口)·양가구(梁家口) 등 포와 양가갑(梁家間)·감응신사(感應神祠)를 지났습니다.
 
 
다시 표가만(表家灣)436. 마가만(馬家灣)·노제두(老提頭)·중갑구(中間口) 등 포와 토교갑(土橋間)·신개구포(新開口鋪)·함곡동(函谷洞)·감수갑(減水間)을 지나서 청평현(淸平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또 조가구포(趙家口鋪)를 지나서 청양역에 이르렀습니다. 또 주가만(朱家灣)·정가구(丁家口)·십리정(十里井)·이가구(李家口)437 등 포와 대가만갑(戴家灣)을 지나서 달밤을 이용하여 날이 샐 때까지 갔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시간
 
 
13th Day. Passing Ch’ing-yang Station.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T’ung-chi-ch'iao Lock past Ch’ing-yang Station to Taichia-wan Lock.]
 
 
434. 東岳은 泰山의 古稱으로 性宗 혹은 性岳이라고도 불린다.
 
435. 堂邑과 博平 두 현의 위치가 서로 바뀌었다. 民國《山東通志》권1上, 輿圖에도 박평은 동북, 당읍은 서북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436. 萬曆《東昌府志》권14, 河渠를 보면 博平縣의 淺로 袁家灣淺이 있는데 表는 '袁’의 誤字일 가능성이 크다.
 
437. 萬曆《東昌府志》권14, 河渠를 보면 淸平縣의 淺舖로 李家淺이 있다.
 
 
===14일===
 
十四日,晴,至臨清縣之觀音寺前,寺在兩河交流之嘴,東西設四開以水,寺東以舟作浮橋,以通于縣,縣城在河之東岸半里許,縣治及臨清衛治,俱在城中,在兩京要衝,商旅輻禁之地,其城中及城外數十里間,樓臺之密、市肆之盛、貨財之富、船(泊)(帕]]之集,雖不及蘇·杭,亦甲于山東,名於天下矣,臣等沿清泉河而北,過漏浮關、藥局、新開上開、衛河廠、板下閘、大浮橋,至清源驛前留宿.
 
 
맑았습니다.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C%82%B0%EB%91%A5+%EC%84%B1+%EB%9E%B4%EC%98%A4%EC%B2%AD+%EC%8B%9C+%EB%A6%B0%EC%B9%AD+%EC%8B%9C/@36.7824104,115.4958914,9.5z/data=!4m13!1m7!3m6!1s0x35c2b36452e46cad:0x36c9283db80bd313!2z7KSR6rWtIOyCsOuRpSDshLEg65607Jik7LKtIOyLnCDrprDsua0g7Iuc!3b1!8m2!3d36.838277!4d115.704881!3m4!1s0x35c2b36452e46cad:0x36c9283db80bd313!8m2!3d36.838277!4d115.704881 임청현(臨淸縣)]의 관음사(觀音寺)에 이르니 관음사는 두 강이 만나는 끝에 있었고 동쪽 서쪽에 갑문 넷을 설치하여 물을 모아 두었습니다.
 
 
관음사 동쪽에는 배로 부교(浮橋)를 만들어 임청현으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현성(縣城)은 강의 동쪽 언덕 반 리가량에 있었으며 현치와 임청위치(臨淸衛治)는 모두 성안에 있었는데, 양경(兩京) 사이의 요충이며 상인이 몰려드는 곳이었습니다.
 
 
그 성 안팎 수십 리 사이엔 누대가 빽빽하고 상점이 성대하며 재화가 풍부하고 선박이 모여들어 비록 소주와 항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산동에서 제일가고 천하에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신 등은 청천하(淸泉河)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누부관(漏浮關)·약국(藥局)438 . 신개상갑(新開上岡)·위하창(衛河__)·판하갑(板下間)439 · 대부교(大浮橋)를 지나서 청원역(淸源驛) 앞에 이르러 유숙하였습니다.
 
 
*기후
 
*불교
 
*경제
 
 
14th Day. Fair.
 
 
We arrived in front of Kuan-yin Temple of Lin-ch’ing County. The temple was on a spit at the junction of two rivers. To east and west, four locks had been built to hold water. East of the temple a floating bridge had been built of boats to give passage into the county [seat]. The wall of the county was about a half li from the east bank of the river. Both the county seat and the Lin-ch’ing Garrison headquarters were inside the wall. It was an important junction between the two capitals, a place to which traveling merchants flocked. For several tens of li inside and outside the wall, the multitude of pavilions and towers, the flourishing of the markets, the wealth of valuable goods and the fleets of moored boats, though not equal to those of Su-chou or Hang-chou, were still the greatest in Shantung and famous everywhere.
 
[We followed the Ch’ing-ch'uan River north to Ch’ing-yüan Station and stopped there.]
 
 
438. 酒運官卒을 치료하는 惠民藥局을 지칭하는 듯하다. 乾隆《臨淸州志》권3, 公署.
 
439. 西曆《東昌府志》권14, 河渠에 의하면 臨淸州에 위치한 南板開은 新開上開 북쪽 5里쯤에 위치하고 있다. 본문에 보이는 板下도 新開上開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板下間은 南板間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5일===
 
十五日,朝大雷電以雨,午後陰,有遼東人陳、王鑽、張景、張昇、王用、何玉、劉傑等,以商販事先到于此,聞臣等之至,以清酒三壶、糖__一盤、荳腐一盤、大餅一盤來饋臣及從者,且曰:“我遼東城,地鄰貴國,義同一家,今日幸得相見於客旅之中,敢將薄物,以為禮耳:”臣曰:“貴地即古高勾麗故都,高勾麗今為我朝鮮之地,地之沿革,雖因時有異,其實同一國也,今我喘息九死之餘,漂泊萬里之外,四顧無相識之人,得遇諸足下,又受厚惠,如見一家骨肉之親”曰:“我於正月起程,二月初吉到此,四月初,旬間回還,恐不得再相見也,若先過暖地安定門內,問有儒學陳瀛者,吾兒也,好傳吾消息”云云,相別而去,臣等撑舟至下津廠前留泊,
 
 
아침에 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렸다가 오후에 흐렸습니다.
 
 
요동 사람 진기(陳)·왕찬(王讚)·장경(張景)·장승(張昇)·왕용(王用)·하옥(何玉)·유걸(劉傑) 등이 장사하는 일로 먼저 이곳에 도착하였다가 신 등이 이른 것을 듣고, 청주 3병 · 엿 1쟁반 · 두부 1쟁반·떡 1쟁반을 가지고 와서 신과 종자들을 접대하고 말하기를,
 
 
“우리 요동성(遼東城)<ref>[https://www.youtube.com/watch?v=zxXiaetUVFg [앵커&리포트] "마오쩌둥 '요동은 원래 조선땅'이라 말했다", 연합뉴스, 2014.02.28]</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IWE3BQcbYhg "요동은 원래 조선 땅"]</ref>은 귀국과 접했으므로 정의(情義)가 한 집안과 같습니다.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만나게 되었으므로 감히 약소한 물품을 가져와서 예를 차리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귀지(貴地)는 곧 옛날 고구려의 고도(故都)입니다. 고구려가 지금은 우리 조선의 땅이 되었으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실은 한 나라와 같습니다. 지금 내가 거의 죽을 뻔하다가 만리 밖에서 표류 정박하여 사방을 돌아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족하를 만나게 되고 또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한집안 골육의 친족을 본 듯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기는, “제가 정월에 길을 떠나서 2월 초길(初吉)440에 이곳에 도착했고 4월 초순쯤에 돌아가게 될 것이니 아마 다시는 보지 못할 듯합니다. 만약 먼저 제가 사는 지방을 지난다면 안정문(安定門)안에 유학(儒學) 진영(陳婦)이란 자가 있는데, 제 아들이니 저의 소식을 전해 주기 바랍니다" 운운하고는 서로 작별하고 떠났습니다.
 
 
신 등은 노를 저어 하진창(下津__) 앞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의전
 
*소통(의견)
 
*상업?경제?
 
*풍습(음식)
 
*역사
 
*심리(동질성, 동의, 안심)
 
*유학
 
 
15th Day. At dawn, a violent thunder-storm. In the afternoon, cloudy.
 
 
There were some men from Liao-tung- Ch’en Ch'i, Wang Chih, Chang Ching, Chang Sheng, Wang Yung, Ho Yü, and Liu Chieh, who had arrived there previously on commerce. When they heard of our arrival, they brought three pots of refined wine, one plate of sweetmeats, one plate of bean-curd, and one plate of large pancakes and served them to me and my staff. They said, "The site of our city of Liao-tung is adjacent to your country, and we are like a single family. We are fortunate today to have met you on our journey and venture to offer these crude things only as tokens of courtesy.”
 
I said, “Your land was the former capital of old Koguryo, and Koguryo is now the land of my Choson. Though the conditions of rule of the land have changed with the times, it is really the same country. Now, when I am panting from the closest brush with death and a voyage of ten thousand li, and no one I know is around me, to meet you and, moreover, receive your warm kindness are like meeting someone of my own flesh and blood.”
 
Ch’en Ch’i said, “We started out in the First Month and arrived here on the first of the Second Month. In the first ten days of the Fourth Month we shall return home. I am afraid that we shall not be able to meet again. If you pass through my land ahead of me, ask inside An-ting Gate for Ch'en Ying, a Confucian scholar. He is my son. Be good enough to give him word of me.” We took leave of each other and left. We poled the boats to [a point) in front of Hsia-chin-ch'ang and moored them there.
 
 
440. 한 달을 4分하여 초하루부터 上弦까지를 初吉이라 한다.
 
 
===16일===
 
十六日,過武城縣,是日睛,沿河而北,至裴家圈鋪,東為夏津縣地方,西為清河縣地方,過巡檢司、孫家新開口、草廟、黃家口、平河口等鋪,
 
p.420
 
至渡口驛,又過商家道鋪,至武城縣,河抱城西,隔河有進士二門,又有祈雨堂,徹夜行,至甲馬營驛.
 
 
무성현(武城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위하(衛河)를 따라 북쪽으로 가서 배가권포(喪家圈鋪)에 이르니 동쪽은 하진현(夏津縣) 지방, 서쪽은 [https://baike.baidu.com/item/%E6%B8%85%E6%B2%B3%E5%8E%BF/2401667?fromtitle=%E6%B8%85%E6%B2%B3%E5%9F%8E&fromid=5432050 청하현(淸河縣)] 지방이었습니다.
 
 
순검사(巡檢司)·손가(孫家)·신개구(新開口)·초묘(草廟)·황가구(黃家口)·평하구(平河口) 등 포를 지나서 도구역(渡口驛)에 이르고, 또 상가도포(商家道鋪)를 지나서 무성현에 이르니 강이 성 서쪽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진사문(進士門) 둘이 있고 또 기우당(祈雨堂)이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가서 갑마영역(甲馬營驛)에 이르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16th Day. Passing Wu-ch’eng County.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P'ei-chia-chüan Stop past Wu-ch'eng County to Chia-maying Station.]
 
 
===17일===
 
十七日,晴,朝過鄭家口、河口鋪、陳家口鋪,至恩縣地方,過白馬河口鋪,又過下方遷無谷寺、河口鋪,至梁家莊驛,移轉過鍾閣,夕至故城縣前留泊,臣謂傅榮曰:“今夜月白風便,何以不去?”榮曰:“你見此河中有漂尸三簡乎?”曰:“見之.”榮曰:“此皆盜殺之也,此方連遭匈歉,相率而為盜者多,又不知你等為漂流行李掃地,反以為異邦人必寶貴物,皆有欲利之心,又前路人煙鮮少,盜多肆行,故不去也,”臣曰:“我之此行,已遇寧波府之盜,平生不願相逢者,盜也.”榮曰:“大抵中國人心,北方則强悍,南方則柔順,寧波之盜,江南人也,故雖或為盜,類皆劫而不殺人,你所以保其身也,此北方人,劫則必殺人,或置之溝壑,或漂之河海,今日所見漂屍,可知矣.”
 
 
맑았습니다.
 
 
아침에 정가구(鄭家口)·하구포(河口鋪)·진가구포(陳家口鋪)를 지나서 은현(恩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백마하구포(白馬河口鋪)를 지나고 또 하방천무곡사(下方遷無谷寺)·하구포(河口鋪)를 지나서 양가장역(梁家莊驛)에 이르러 노를 저어 종각(鐘閣)을 지나 저녁에 고성현(故城縣) 앞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신이 부영에게 말하기를, “오늘밤은 달이 밝고 바람이 순한데 어찌 가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당신은 강 한복판에 3구의 시체가 떠다니는 것을 보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보았습니다.”
 
 
“이는 모두 도적이 죽인 것입니다. 이 지방은 연이은 흉년<ref>[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7]</ref><ref>[http://www.atlasnews.co.kr/news/curationView.html?idxno=604 기상학과 역사학을 연관시키는 연구 활발…“중국 역대 동란은 기후변화 때문”기후가 역사를 뒤집었다…17세기는 ‘소빙기 위기’]</ref>으로 서로 이끌어 도적이 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또 당신들이 표류해서 행장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방인은 반드시 귀중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여겨 모두 탐내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또 앞길에는 인가가 적고 도적은 많이 횡행하기 때문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이번 길에 영파부(寧波府)에서 도적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평생에 서로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도적입니다.”
 
 
“무릇 중국의 인심은 북방은 억세고 남방은 유순합니다. 영파부의 도적은 강남 사람인 까닭에 비록 도적은 되었을지라도 대부분 약탈만 하고 사람은 죽이지 않으므로 당신이 그 몸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북방 사람들은 약탈하면 반드시 사람을 죽여서 산골짜기에 던져 버리거나 강과 바다에 떠내려 보내기도 합니다. 오늘 떠다니는 시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후
 
*지명
 
*지리
 
*중국인생활?(도적)
 
 
17th Day. Fair.
 
 
[We went from Cheng-chia-k’ou to Liang-chia-chuang Station and beyond.]
 
In the evening we arrived in front of Ku-ch'eng County and stopped. I said to Fu Jung, “The moon is bright tonight and the wind favorable. Why do we not leave?”
 
Fu Jung said, “Did you see the three corpses floating in this river?” I said, “I saw them.”
 
Fu Jung said, “They were all killed by bandits. This region has suffered successive famines, and many people have been driven into banditry. They do not know that you were set adrift and all your baggage lost. On the contrary, they will take it that as foreigners, you must have valuable things. All of them have greedy hearts. Then, too, on the road ahead settlements are few and scattered, and the bandits are many and reckless. That is why we do not leave.”
 
I said, “On this journey, I have already met bandits from Ning-po Prefecture. The last person I want to meet in my life is a bandit.”
 
Fu Jung said, “In general, the temperament of the Chinese in the north is forceful and violent. In the south it is mild and docile. The Ning-po bandits were men from south of the Yangtze; even though they were of the outlaw type, therefore, they plundered without killing people. That is what saved you. When these northerners plunder, they invariably kill the people. Either they put them in ditches or float them on rivers or the sea. That accounts for the floating corpses we saw today.”
 
 
===18일===
 
十八日,過德州,是日晴,大風揚沙,平明,過孟家口·兵河口·馬家等鋪、四女樹、文英門、劉皮口鋪、得意門、大浮橋,至安德驟,陳萱問臣曰:“貴國人對客醉用茶否?”臣曰:“用酒不用茶,”萱曰:“我地人對客,皆用茶,若有情厚遠來人,則或有用酒者:”臣問傅榮以上國傘、蓋、冠、帶、帶牌之制,榮曰:“傘與紗帽無等級,蓋則一品·二品茶褐羅表、紅網裏、三舊銀浮屠;三品·四品與前同,而浮屠則紅;五品青羅表、紅網裏、二詹紅浮屠;七·八·九品青油表、紅網裏、單簷紅浮屠,帶則一品玉,二品屋,三品花金,四品光金,五品花銀,六品光銀,七·八·九品角,牌則文職自一品至九品,皆有錫牌,一面(措)(楷]°書所任衛門,一面篆書常川帶四字,皂隸背之,武職有皂隸、衙門,皆佩之,”臣又問“韃靼或有入寇否?”榮曰:“彼時有之,今各邊有分方鎮守,總兵軍馬,常樣守禦,故不得來犯,”夜過德州城,河抱城西而北,城即古平原郡也,土廣人稱,商旅所會,至泊名不知河岸,傅榮謂臣曰:“大上皇帝同母弟有賢德,封鲁地,號魯王,在此德州境三百餘里之地,故時人稱為德王:”臣曰:“德王何以不在京師,在外方乎?”榮曰:“親王在內,恐有他意,故待年十六歲以上者,皆封為王,出之于外:”臣曰:“德王在山東所轄腹裏之地,亦自擅號令政事乎?”榮曰:“王府各司之官掌諸政,有教授之官,有護衛官,王與之講詩書、閱射御而已,號令政事,王不得有為,一出於朝廷,”
 
 
덕주(德州)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으나 큰바람이 모래를 날렸습니다.
 
 
새벽에 맹가구(孟家口)·병하구(兵河口)·마가(馬家) 등 포와 사녀수(四女樹)·문영문(文英門)·유피구포(劉皮口鋪)·득의문(得意門)·대부교(大浮橋)를 지나서 안덕역(安德驛)에 이르니 진훤이 신에게 묻기를, “귀국에서는 손님을 접대할 적에 차를 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술을 쓰지 차는 쓰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님을 접대할 적엔 모두 차를 습니다. 만약 인정이 두텁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술을 쓰기도 합니다.”
 
 
신이 부영에게 상국(上國)의 산(傘), 개(蓋), 관(冠), 대(帶), 대패(帶牌)의 제도를 물으니
 
 
부영이 말하기를, “산(傘)과 사모(紗帽)는 등급이 없습니다. 개(蓋)44는 1품과 2품은 겉이 다갈라(茶褐羅)442이고 안이 홍초(紅箱)443로서 삼첨은부도(三舊銀浮屠)444이고, 3품과 4품은 앞의 것과 같지만 부도(浮屠)가 홍색이고, 5품은 겉이 청라(靑羅)이고 안이 홍초(紅)로서 이첨홍부도(二簷紅浮屠)이고, 7품 · 8품 · 9품은 겉이 청유초(靑油箱)이고 안이 홍초(紅狗)로서 단첨홍부도입니다. 띠는 1품은 옥대(玉帶), 2품은 서대(犀帶), 3품은 화금(花金), 4품은 광금(光金), 5품은 화은(花銀), 6품은 광 은(光銀), 7품 · 8품 · 9품은 각대(角帶)입니다. 패(牌)는 문관직(文官職)은 1품에서 9품까지는 모두 석패(錫牌)를 갖는데, 한 면에는 임명받은 위문(衛門)을 해서(楷書)로 쓰고, 한 면에는 상천현대(常川懸帶)445란 네 글자를 전서(篆書)로 써서 조예(自隸)446가 이를 짊어지고, 무관직(武官職)으로 조예(自隸)와 아문(衙門)이 있는 자 모두 이를 차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달단(薩)447이 침범하여 오기도 합니까?”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각 변방에서 구역을 나누어 진수(鎭守)가 군마(軍馬)를 통할하며 늘 지키고 있기 때문에 침범하지 못합니다.”
 
 
밤에 덕주성(德州城)을 지났는데 강은 성 서쪽을 둘러싸서 북쪽으로 흘렀습니다.
 
 
덕주성은 곧 옛날의 평원군(平原郡)으로서 토지는 넓고 사람은 조밀하였으며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이름을 모르는 강 언덕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태상황제(太上皇帝)의 동모제(同母弟)가 덕망이 높았는데 노(魯) 지방에 봉함을 받고 노왕(魯王)이라 칭하여 이 덕주의 300여 리의 땅에 있었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이 '덕왕(德王)448'이라 불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덕왕은 무슨 이유로 경사에 있지 않고 외지에 있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친왕(親王)449 이 경사에 있으면 다른 뜻이 있을까 염려하는 까닭에 그들의 나이 16세 이상이 되기를 기다려서 모두 왕으로 봉하여 외지로 내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산동에 있는 덕왕이 관할하는 곳은 복심(腹心)의 땅인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까?”
 
 
“왕부(王府)의 각 관사(官司)의 관원이 정사를 관장하고 교수(敎授)하는 관원도 있고 호위하는 관원이 있어, 왕은 그들과 함께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사열할 뿐입니다. 정사를 호령하는 일은 왕이 할 수 없고 모두 조정에서 나옵니다.”
 
 
*기후
 
*지명
 
*지리
 
*풍습(의전)
 
*제도
 
*외교(전쟁)
 
*경제(상업)
 
*정치/제도
 
 
18th Day. Passing Te-chou. This day was fair; high winds blew up sand.
 
 
[We went from Meng-chia-k'ou to An-te Station.]
 
Ch’en Hsüan asked me, “Do the people of your country use tea to exchange drinks with their guests?”
 
I said, “They use wine, not tea.”
 
Ch'en Hsüan said, “All my countrymen use tea for guests. For people from far away for whom they have deep affection, some may use wine.”
 
I asked Fu Jung, “In China, what are the regulations for umbrellas, hats, belts and belt tablets?”
 
Fu Jung said, “For umbrellas and light silk gauze hats, there are no categories. As to kai umbrellas, the First and Second Ranks have yellowish-black gauze coverings, red raw silk linings, three tiers and silver spires. The Third and Fourth Ranks have the same, but the spires are red. The Fifth Rank has blue gauze coverings, red raw silk linings, two tiers and red spires. The Seventh, Eighth, and Ninth Ranks have blue, oiled, raw silk coverings, red raw silk linings, one tier and red spires.90
 
“As to the belts, the First Rank has jade, the Second Rank rhinoceros [horn), the Third Rank inscribed gold, the Fourth Rank burnished gold, and the Fifth Rank inscribed silver, the Sixth Rank burnished silver, and the Seventh, Eighth, and Ninth Ranks horn.91
 
“As to tablets, all the civil officials from First to Ninth Rank have pewter tablets. On one side the office in which one serves is written in square style, and on the other side the four words“Attached for all time,' are written in seal characters. Lictors carry them. All military officers for whom there are lictors and offices wear them.”
 
I asked, “Sometimes do the Tatars make raids?”
 
Jung said, “Formerly they did, but now there are grand defending regional commanders on each border. The infantry and cavalry are constantly on guard, and [the Tatars], therefore, do not get in to raid.” | At night we passed the wall of Te-chou. The river curved round west of the wall and then went north. The city had been the old P’ing-yuan-chün. It was a big place, crowded with people, and travelling merchants gathered there.
 
We came to a river bank,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nd stopped. Fu Jung said to me, “A younger brother of the previous Emperor, being virtuous, was enfeoffed in Lu and entitled Lu Wang, with a territory of over three hundred li within the borders of this Te-chou. That is why men of the time called him Te Wang.??92
 
I said, “Why did Te Wang live outside instead of inside the capital ?”!
 
Fu Jung said, “If princes of the blood were inside, disloyalty would be feared. When they are sixteen, therefore, they are all enfeoffed as princes and put outside.”
 
I said, “With Te Wang in Shantung, he dominated a strategic area. Did he also on his own authority administer public affairs?”
 
Fu Jung said, “Officials of the offices of the Prince's Palace [Wang-fu] take charge of palace affairs only. There are an education official and a defense official. With them the Prince discusses literature and reviews archery and charioteering, but that is all. The Prince has nothing to do with administering public affairs, which are all directed from the Court.”
 
 
441. 양산모양으로 된 儀杖 용구. 비단실로 꾸민 것으로 빛깔에 따라 靑蓋·紅蓋·黃蓋. | 黑蓋 등의 종류가 있다.
 
442. 茶褐은 다갈색 즉 약간 검은 빛을 띤 적황색, 羅는 絲織物을 뜻한다.
 
443. 붉은 색의 生絲로 만든 平織物을 뜻한다.
 
444. 세 개의 챙을 달고 은 칠을 한 浮屠를 가리킨다.
 
445. 常川이란 '항상'의 뜻, 常川懸帶는 '항상 차고 다닐 것'이란 뜻이다.
 
446. 官衙의 청사에 숙직하고 문을 지키는 사람 및 문무관원을 시종하면서 잡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각 아문과 각 품의 관원에게 할당되는 수가 달랐다.
 
447. 명대에는 몽골의 칭기즈칸 후예의 各部를 총칭하여 輕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元良哈, 서쪽으로 瓦과 접했다. 永樂帝의 漢北 親征 이후 분산되어 遼東, 宣府와 甘肅 등지에서 활동했는데 天順 이후 점차 河套로 침투하기도 하였다.
 
448. 德王은 英宗의 제2자이며 憲宗의 동생 朱見엘을 가리키는데, 成化3년德州에 親王으로 就藩하였다.
 
449. 宗室의 爵號이다. 皇子가 親王이 되어 성년이 되면 封地로 가서 王府를 열었다. 金冊과 金寶 등을 주었는데, 1년에 萬石을 祿으로 하였으며, 지위는 公侯의 위였다. 성년이 되면 비로소 封地로 나가 王府를 설치하였다. 官署와 護衛를 두었으며, 甲士 는 兵部의 籍에 예속되었다. 태조는 일찍이 24명의 아들과 從孫 1명을 전국 각지에 봉한 바 있다. 永樂 연간 이후 그 세력이 약화되어 사실상 食祿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19일===
 
十九日,過良店驛,是日晴,早發過皮口鋪、高家鳳鋪,至吳橋縣地方,又過羅家口、高官廠等鋪、關王廟,至濟南府地方良店驛,又過桑園兒、薄皮口鋪、狼家口鋪、郭家口鋪、舊連窩鋪,至連篇驛,又至連窩遞運所而泊,
 
 
양정역(良店驛)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일찍 출발하여 피구포(皮口鋪)·고가봉포(高家鳳鋪)鋪)를 지나서 오교현(吳橋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나가구(羅家口)·고관창(高官廠) 등 포와 관왕묘(關王廟)를 지나서 제남부(濟南府) 지방의 양점역(良店驛)에 이르렀습니다.
 
 
또 상원아(桑園兒)·박피구포(薄皮口鋪)·낭가구포(狼家口鋪)·곽가구포(郭家口鋪)·구련와포(舊連窩鋪)를 지나서 연와역(連高驛)에 이르렀다가 다시 연와체운소(連窩遞運所)에 이르러 숙박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19th Day. Passing Liang-tien Station.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P’i-k’ou Stop past Liang-tien Station to Lien-wo Transfer Station and stopped there.]
 
 
===20일===
 
二十日,晴,曉過王家口鋪,至景州地方任家口鋪,又過東光縣,縣治在河之東岸,又過油房口鋪、北下口鋪,至南皮縣地方,過北下淺鋪,又至交河縣地方,過曹道灣、薄頭鎮,至新橋,又過鎮武廟、藥王廟、戚家女医軍屯,夜二更,至泊薛家窩里前.
 
 
맑았습니다.
 
 
새벽에 왕가구포(王家口鋪)를 지나서 경주(景州) 지방의 임가구포(任家口__)에 이르렀습니다. 또 동광현(東光縣)을 지났는데 현치는 강의 동쪽 언덕에 있었습니다. 또 유방구포(油房口鋪)·북하구포(北下口鋪)를 지나서 남피현(南皮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북하천포(北下淺鋪)를 지나서 또 교하현(交河縣)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조도만(曹道灣)·박두진(薄頭鎭)450을 지나서 신교(新橋)에 이르고 또 진무묘(眞武廟) · 약왕묘(藥王廟)452. 척가언군둔(戚家堰軍屯)을 지나서 밤 2경에 설가와리(薛家窩里) 앞에 이르러 숙박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시간
 
 
20th Day. Fair.
 
 
We went from Wang-chia-k’ou Stop to Hsüeh-chia-wo Village and stopped there.]
 
 
===21일===
 
二十一日,過滄州,是日晴,早過三鎮道、馮家口、楊橋口、磚河南、戴河南口等鋪,至河驛,又過王家圈口·羅家圈口紅披口·南關等鋪、長盧巡檢司、鹽運司、遞運所、睡武科門,到滄州搬夫廠,州城臨河之東岸,即漢之渤海郡也,河邊有望上懸人頭以示眾,傅榮謂臣曰:“彼乃强盗首也,漢之巢遂以單車,入此地平墓盜,有賣買牛之說,此地盗多劫殺人,自昔猶然,”又過聯芳、應奎、司練等門,至泊長蘆遞運所前,臣問諸傅榮曰:“自過淮河以後,若兵部、刑部、吏部等各司之官之紅,絡繹不絕,何也?”榮曰:“今天子聖明,朝臣以舊日所為,或致小過者,皆降貶之,河路中帶錫牌而歸者,皆見貶下鄉朝士也,前日在紹興府,問你所從來之總兵官黃宗,亦貶罷歸,”臣曰:“朝臣貶秩者多,何以不斥官寺之徒,使得意以行?”榮曰:“宦官見殺降貶者,亦不可勝計,今在河進京者,皆先帝所差,回則亦難保,前日相見太監羅公、公,皆因回遲,貶作奉御之職,”臣曰:“當今天下,再得堯舜之君,學元凱,點四匈,朝廷肅清,四海安帖,不亦賀乎?”榮曰:“正是正是,我皇帝遠之者,小人與宦官也,日親經筵,與閣老學士講詩書、論政事,疊疊不已,以今三月初九日,躬幸國子監,釋奠先聖,崇儒重道之意亦至矣.”臣戲之曰:“天子亦拜於列國之臣乎?”榮曰:“孔子,萬世之師,豈以人臣之禮待之乎?但天子當釋奠時,贊禮官曰:“鞠躬拜,天子欲拜,傍又有一贊禮官曰:孔子會為魯司寇,贊禮官又唱曰:平身,禮當拜而實不拜,此尊先師尊天子之禮,兩不悖也,”臣曰:“孔子之道,大於天地,明於日月,信於四時,達之天下萬代而無窮,卿、大夫、士、庶人學其道,以修其身,諸侯學其道,以治其國,天子學其道,以平治天下,則自天子以至於庶人,皆當事以先聖先師之禮,又何舉魯司寇之稱,當拜而不拜乎?若舉司寇以稱孔子,則孔子是一小國陪臣,又安可屈天子之學以記之乎?”榮嘿然,夜間榮又來語臣曰:“方才中來者言:有一尚書與一學士對立,不知所言,校尉拿告于天子,命下錦衣衛,監問所言何事,學士身居內(閣)(閣], 至尊有大小事,皆與議,今與尚書相對言,尤恐有私囑,故問之!”
 
 
창주(滄州)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아침 일찍 삼진도(三鎭道)·풍가구(馮家口)·양교구(楊橋口)·전하남(磚河南)·전하남구(磚河南口) 등 포를 지나서 전하역(III河驛)에 이르렀습니다.
 
 
또 왕가권구(王家圈口)·나가권구(羅家圈口)·홍피구(紅技口)·남관(南關) 등 포와 장로순검사(長蘆巡檢司)·염운사(鹽運司)453. 체운소(遞運所)·종무과문(腫武科門)을 지나서 창주발부창(滄州撥夫__)에 도착하였습니다.
 
 
창주성(滄州城)은 강의 동쪽 언덕에 접하여 있으니 곧 한(漢) 나라 때의 발해군(渤海郡)이었습니다.
 
 
운하가에는 장대 위에 사람의 머리를 매달아 놓고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바라보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저것은 강도의 머리입니다. 한(漢)나라의 공수(襄遂)454가 단거(單車)로 이 지방에 들어와서 도적 떼를 평정하여 '칼을 팔아 소를 산다'455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지방 도적이 사람을 약탈하고 죽이는 일이 많은 것은 옛날부터 그러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연방문(聯芳門)·응규문(應奎門)·사간문(司諫門) 등을 지나서 장로체운소(長盧遞運所) 앞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신은 부영에게 묻기를, “회하를 지난 뒤부터 병부 · 형부 · 이부 각 관사(官司) 관원의 배가 계속 이어지고 끊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천자께서 영명하시어 조신(朝臣)들 중 지난날의 잘못된 행위나 작은 과오를 범한 자들도 모두 강직(降職)하거나 폄출(貶點)시키고 있습니다. 운하에서 석패(錫牌)를 차고 돌아가는 사람은 모두 폄직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는 조신들입니다. 전일에 소흥부에서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심문했던 총병관 황종도 평직되어 돌아갔습니다.”
 
 
“조신들 중에는 폄직된 사람이 많은데, 어찌하여 환관의 무리들을 물리치지 않아 마음껏 행세하게 합니까?”
 
 
“환관들 중에도 죽임을 당하고 강직되고 폄출된 사람 또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 운하로 경사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선제(先帝)께서 파견하셨던 자들이지만 돌아가면 또한 보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일에 만났던 태감 나공(羅公)과 섭공(公)도 모두 늦게 돌아갔다는 이유로 봉어(奉御)456의 직으로 평직되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다시 요순(堯舜) 같은 군주를 만나서 원개(元凱)457 같은 이가 등용되고 사흉(四凶)458 같은 이가 폄출되어 조정은 맑아지고 사해(四海)는 편안해졌으니 또한 경하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우리 황제께서 멀리하시는 자는 소인과 환관입니다. 날마다 경연(經筵)459에 몸소 나아가 꾸준히 각로학사(老學士)460들과 시서(詩書)를 강론하고 정사(政事)를 의논해 마지 않으십니다. 지난 3월 9일에는 몸소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하여 선성(先聖)462에게 석전례(釋奠禮)를 거행하셨으니 유교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존중하는 뜻이 또한 지극합니다.”
 
 
신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천자께서도 열국(列國)의 신하에게 절을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만세의 스승인데 어찌 신하의 예절로 대우하겠습니까? 다만 천자가 석전례를 거행할 때에 찬례관(贊禮官)463이 몸을 굽혀 절하시오'라 하면 천자께서 절하시려 합니다. 그럴 때 옆에 있는 또 다른 찬례관이 공자는 일찍이 노나라 사구(司寇)였습니다'라 하면, 찬례관이 또 소리를 높여 몸을 펴시오(平身]라고 합니다. 예(禮)로는 당연히 절해야 하는데도 실상은 절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선사(先師)를 높이고 천자를 높이는 예로서, 양 쪽 모두 어긋나지 않은 것입니다.”
 
 
“공자의 도(道)는 천지보다 크고 일월보다 밝으며 사시보다 믿음성이 있어 천하 만세로 두루 미쳐서 다함이 없습니다.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그 도를 배워서 몸을 닦고, 제후는 그 도를 배워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자는 그 도를 배워서 천하를 다스리니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땅히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대하는 예절로 섬겨야 할 것인데, 또한 노나라 사구란 칭호를 들어서 당연히 절해야 할 것인데도 어찌 절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사구를 들어서 공자를 일컫는다면 공자는 한 소국의 배신(臣)465인데 또한 어찌 천자의 존엄함을 굽혀서 그에게 제사하겠습니까?”
 
 
부영은 말이 없었습니다.
 
 
밤에 부영이 또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방금 북경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이 '어느 상서(尙書)와 어느 학사(學士)가 마주서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데, 교위(校尉)467가 천자께 알리니 천자께서 금의위(錦衣衛)에 내리어 무슨 말을 했는지 심문하도록 명하셨다고 합니다. 학사는 몸이 내각(內閣)에 있으며 지존(至尊)468께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그와 더불어 의논하시는데, 지금 상서와 서로 마주 서서 말하니 사사로운 청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여 이를 심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역사
 
*고증
 
*약탈(중국도적횡횡)
 
*제도(중국형벌-효수)
 
*관직
 
*인명
 
*정치
 
*유학
 
*예절
 
 
 
21st Day. Passing Ts'ang-chou.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San-chen-tao Stop to a workers' quarters of Ts’ang-chou.]
 
The wall of the department overlooked the east bank of the river. [The place] had been the Po-hai-chün of Han. At the edge of the river, a man's head fastened on top of a pole was displayed to all. Fu Jung said to me, “That is the head of a notorious bandit. Kung Sui of Han came to this land in a single carriage and subdued all the bandits. 93 There is a story that they sold their swords and bought oxen.
 
“The bandits here plunder much and kill people, and it has been so since olden times.”
 
We passed Lien-fang, Ying-k’uei, and Ssu-chien gates, came to Ch’ang-lu Transfer Station, and stopped in front of it. I asked Fu Jung, “Ever since we passed the Huai River there has been a steady line of boats of officials from the various bureaus of the Ministries of War, Punishments, and Personnel. Why?”
 
Fu Jung said, “Because some of the ministers of the Court may have made small errors in what they did in former days, the present Emperor in his wisdom is dismissing them all. All those who are carrying pewter tablets and going the other way in the river are ministers of the Court who have been dismissed and are going to their homes. Even Huang Tsung, the Regional Commander who asked you about your past the other day at Shao-hsing Prefecture, has been dismissed and gone home.”
 
I said, “If many court ministers are being degraded, why does [the Emperor] not dismiss the eunuchs instead of letting them have their way?”
 
Fu Jung said, “Eunuchs are also being executed and dismissed beyond number. All those now going to the capital on the river were commissioned by the previous Emperor. It is difficult to say what will happen to them when they go back. Both his Excellency Lo and His Excellency Nieh, the Overseers you met previously, have been degraded to the position of valet because they were slow in returning.”
 
I said, “Now the Empire has got again a ruler like Yao and Shun. He elevates good men and dismisses wicked ones. The Court is calm, and the Four Seas are steady. Shall we not give praise ?”'
 
Fu Jung said, “Quite so, quite so. The ones our Emperor keeps at a distance are the petty men and the eunuchs. He attends the exposition of the Classics daily and discusses literature and government with the chief ministers and scholars. He keeps it up without tiring. On the 9th Day of the Third Month he attended personally the National University and sacrificed to Confucius,
 
which shows indeed that he honors the Confucian scholars and the Way.”
 
Joking, I said, “Does the Emperor bow to a subject of a feudal state?”
 
Fu Jung said, “Confucius was the teacher of all ages; how could the Emperor treat him like a subject? But when the Son of Heaven attends the sacrifice to Confucius, a master of ceremonies says, 'His Majesty will bow.' The Son of Heaven is about to bow when from the side another master of ceremonies says, 'Confucius was Criminal Judge of Lu.' The master of ceremonies then calls out, ‘His Majesty is excused from bowing.' He is supposed to bow but actually does not. Thereby the ceremony honors Confucius and the Son of Heaven with slight to neither.”
 
I said, “Confucius' Way is greater than heaven or earth, brighter than the sun or moon, and more constant than the four seasons. It persists endlessly through all ages of the world. If the officials, gentry, scholars, and common people study his Way to train themselves; and the nobles study his Way to govern their states; and the Emperor studies his Way to put the world to order, all, from the Emperor to the common people, must pay homage through the Rite to Confucius. Why do you say the name ‘Criminal Judge of Lu,' and, ‘His Majesty need not bow?' If you use Criminal Judge to designate Confucius, that makes Confucius the secondary minister of a minor state. Then how can you humble the Emperor with such a sacrifice?" Fu Jung was silent. | At night Fu Jung came again and spoke to me. “Someone who recently came from the capital says that a minister (shang-shu] and a grand secretary [hsüeh-shih] were standing face to face and talking, it was not known about what. A captain of the police arrested them and reported it to the Emperor. They were ordered to be sent down to the Superintendent of the Imperial Bodyguard94 for questioning on the subject of their talk. The grand secretaries are in the Cabinet [Nei-ko], and the Emperor discusses all matters, large and small, with them. When this one talked intimately with a minister, then, it was greatly feared that there might be collusion for selfish ends. That is why they were questioned.”
 
 
453. 원명은 長蘆都轉運鹽使司로 滄州治의 서남쪽에 있다. 嘉靖《河間府志》 권4, 宮室.
 
454. 漢나라 南平陽 사람으로, 자는 少卿이다. 宣帝 초 渤海에 도적이 일어나 郡守가 잘 제압하지 못하였다. 선제는 龔遂를 渤海太守에 임명하여 결국 도적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후에 중앙으로 발탁되어 水衡都尉를 지냈다.
 
455. 漢 宣帝때 발해 지역은 도적들이 掠하고 농사를 기피하는 풍조가 심했는데 遂가 太守로 부임한 뒤로 도적이 없어지고 권농 활동이 큰 성과를 거두어 백성들이 다투어 무기를 팔아 耕牛를 샀다는 고사를 말한다. 《前漢書》 권89, 〈循吏傳59) 참조.
 
456. 奉御는 본래 隋代 殿內省과 唐代 中書省의 예하기구인 六合局의 長官이다. 六尙局 즉 食·尙藥·尙衣·尙舍·尙乘·輦에 각각 奉御가 2인씩 배치되어 사무를 관장했다. 隋代에는 5品이었고, 唐代에는 正5品 이하였다. 이후 奉御직은 송대와 명대를 거치며 계속 유지되었고 隋·唐때와 유사하게 궁궐내의 제반 실무를 담당했다.
 
457. 元라고도 한다. 《左傳》에 의하면 高辛氏의 才子 8인을 八元이라 하고, 高陽氏才子 8인을 八體라 하였다고 한다. 후에 元는 황제의 輔佐대신을 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458. 고대 4대 囚人으로 舜에 복종하지 않은 4개 부족의 수령 즉 敦, 窮奇, 饕餐을 말한다. 一說에는 궁기를 共工, 혼돈을 驩兜, 도철을 三苗, 도올을 縣으로 보기도 한다.
 
459. 황제가 經史를 講讀하는 儀制, 처음에는 시간과 장소가 유동적이었으나 正統元年(1436) 3월에 매월 2일, 12일, 22일에 文華殿에서 거행했는데 酷暑期와 酷寒期는 피하였다.
 
460. 內閣의 學士를 가리킨다.
 
461. 명대의 國學, 처음에는 南京에 京師國子學을 두었는데 洪武15년(1382)에 國子監으 로 바꾸었다. 永樂元年(1403) 北京에도 두었는데 18년에 천도 후 원래의 경사국자감 을 남경국자감, 북경의 국자감을 국자감으로 바꾸었다. 弘治年間에 국자감 내에 東西樓를 만드는 등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그 규모가 확대되었다.
 
462. 先世聖賢 즉 孔子를 가리킨다.
 
463. 國家祭禮時 황제의 儀禮를 도와주는 관리.
 
464. 孔子를 가리킨다. 唐初에 孔子를 先師로 추존했다.
 
465. 重臣이라고도 하는 臣은 원래 아래의 아래 단계의 신하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天子의 배신 즉 諸侯 밑의 卿大夫급임을 말한다. 《史記》〈孔子世家)에 의하면 孔子는 卿급에 해당하는 司空·大司寇 등을 역임했다.
 
466. 六部의 장관이다. 洪武元年(1368)에 처음 두었는데, 정3품이었으나, 13년에 中書省 | 을 없애면서 그 品을 정2품으로 높였다. 또한 황제에 직속시켜 전국의 정무를 나누어 관장하였다.
 
467. 明代의 層從衛士이다. 원래는 共衛司儀열司에 예속되었다가, 洪武15년(1382)에 錦衣衛에 예속되었다. 회簿의 儀杖을 떠받들어 잡거나 御駕 앞에서 관원을 宣召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였는데, 민간의 壯丁 가운데 악질과 과실이 없는 자를 선발하여 치任 하였다.
 
468. 황제를 가리킨다.
 
 
===22일===
 
二十二日,過興濟縣,是日陰,曉過安都(塞)(寨](口)鋪、清水王家口鋪,至乾寧驛,興濟縣之治,在驛之後,驛前有巨家,陳萱曰:“此 新皇后張氏之私弟也,初 新皇帝為皇太子時,欽天監奏:“后星照河之東南,先帝命選河東南良家女子三百餘人,皆聚京師,先帝與皇太后更選,張氏中選,封為正后,后之祖,知鳳陽府,父無職,舊為國子監生,今特拜為都督”云,過左衛鋪、柳巷口鋪、三聖祠”、盤古廟、高士圖,至蘆臺舊城,城北接青縣之治,俱在河之西北岸,縣前通真、保定、流三河所會,故謂之三叉,又過鍾樓閣、社稷壇、峭帆亭、中州集,至河間府地方,府城在河之北七八里許,又至流河驛,日已昏膜,過流河鋪,夜二更,至泊夏官屯.
 
 
흥제현(興濟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안도채포(安都寨鋪)469 - 청수왕가구포(淸水王家口鋪)470를 지나서 건녕역(乾寧驛)에 이르니 흥제현의 현청은 건녕역(乾寧驛) 뒤에 있었습니다.
 
 
건녕역 앞에 큰집이 있었는데 진훤이 말하기를,
 
 
“이것은 새 황후 장씨(張氏)의 사저입니다. 전에 새 황제께서 황태자로 있을 적에 흠천감(欽天監)이, 황후의 별이 황하의 동남방에 비칩니다'라 아뢰니 선제께서 황하 동남방의 양가 규수 300여 인을 뽑아 모두 경사에 모이도록 명하셨습니다. 선제께서 황태후와 함께 다시 선발한 결과 장씨가 이에 뽑혀 정후(正后)가 되었습니다. 황후의 조부는 봉양지부(鳳陽知府)이었고 부친은 관직은 없고 전에 국자감생(國子監生)473이었는데, 지금은 특별히 도독(都督)으로 배수되었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좌위포(左衛鋪)·유항구포(柳巷口鋪)·삼성사(三聖祠)474. 반고묘(盤古廟)·고토강(高土崗)을 지나서 노대(蘆臺)의 옛 성476에 이르니, 성은 북쪽으로 청현(靑縣)의 현청에 접해 있으며 모두 강의 서북쪽 언덕에 있었습니다.
 
 
청현의 앞은 통진하(通眞河)·보정하(保定河)·호타하(淳施河)477의 세 강물이 만나는 곳이므로 삼차(三叉)'라고 불렀습니다.
 
 
또 종루각(鐘樓閣)·사직단(社稷壇)·초범정(啪帆亭)·중주집(中州集)을 지나서 하간부(河間府) 지방에 이르니 하간부성(河間府城)은 강의 북쪽 7-8리쯤에 있었습니다.
 
 
또 유하역(流河驛)에 이르니 날이 벌써 어두웠습니다.
 
 
유하포(流河鋪)를 지나서 밤 2경에 하관둔(夏官屯)478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기후
 
*지명
 
*인명
 
*관직
 
*지리
 
*시간
 
 
22nd Day. Passing Hsing-chi County. This day was cloudy.
 
 
At dawn we passed An-tu-sai-k’ou Stop and Ch’ing-shui-wang-chia-k’ou Stop and came to Ch’ien-ning Station. The seat of Hsing-chi County was behind the station, in front of which was a huge house. Ch'en Hsüan said, “That is the private house of the new Empress, née Chang. At first, when the new Emperor was Crown Prince, the Directorate of Astronomy memorialized that the star of the Empress shone southeast of the Yellow River. The previous Emperor ordered that over three hundred daughters of good families southeast of the Yellow River be selected and assembled at the capital. The former Emperor and the Empress Dowager made a further selection, and Miss Chang was chosen and made Empress. The Empress's grandfather was Prefect of Feng-yang Prefecture. Her father did not hold office but formerly was a student in the National University. Now he has been made a general.”
 
[We went from Tso-wei Stop to Hsia-kuan-t’un and stopped there.]
 
 
469. 嘉靖《興濟縣志》 권上, 建置, 혀舍에 의하면 淺鋪 가운데 安都寨淺이 있는데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따라서 본문의 塞는 寨의 誤記이다.
 
470. 嘉靖《興濟縣志》권 上, 建置, 얘舍에는 '王家淺'으로만 표기되어 있다.
 
471. 河北 興濟人, 成化23년(1487) 太子妃로 뽑혔다가 바로 그 해에 다시 皇后가 되었다. 弘治帝의 총애를 받아 一族이 대거 발탁되었는데 후에는 그들의 전횡이 물의를 빚기까지 하였다.
 
472. 이름은 으로 鄕貢 자격으로 監生이 되었다. 딸이 孝宗의 敬皇后가 된 뒤 壽寧伯으로 봉해졌다.
 
473. 明代 國子監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통칭이다. 擧監, 貢監, 蔭監과 세監 등 여러 종류가 있다.
 
474. 嘉靖《興濟縣志》 권上, 建置, 祠廟에는 ‘三聖祠'가 아닌 ‘三聖廟’로 되어 있다.
 
475. 盤古는 天地를 처음 열었다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한편 盤古廟는 靑縣治의 남으로 15리 거리에 있다. 元世祖15년(1278)에 修築했고, 永樂4년(1406)과 成化20년(1484)에 각각 重修하였다. 嘉靖《河間府志》권3, 古蹟.
 
476. 靑縣의 경계인 衛河의 서남측에 있고 둘레는 32리이다. 唐代에 이곳에 盧臺軍節度를 둔 적이 있다. 嘉靖《河間府志》권3, 古蹟.
 
477. 潭定河 또는 淳池河라고도 한다. 嘉靖《河間府志》권3, 古蹟.
 
478. 《士商類要》권1 南京由漕河至北京水路程'에 의하면 唐官兒屯이 流河驛과 雙塘兒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본문의 夏官屯이 唐官兒屯과 마찬가지로 流河驛과 雙塘兒 사이에 위치한 것을 보면, 唐官兒屯의 誤記일 가능성이 있다.
 
 
===23일===
 
二十三日,過靜海縣,是日晴,丑時開船,過釣臺鋪、南家口鋪、雙塘
 
 
p.424
 
鋪,至奉新睾,睾在靜海縣治之前,臣語傅榮曰:“願學水車之制.”榮曰:“你於何地,見所謂水車乎?”臣曰:“翼者過紹興府時,有人在湖岸運水車,以灌水田,用力小而上水多,可為當旱農稼之助”榮曰:“其制,木工所知,我未之詳,“臣曰:“昔嘉祐中,高麗臣屬毛羅島人,橋崔桅折,風漂抵岸,至蘇州岷山縣,知縣事韓正彥篇以酒食,見其舊桅植舟木上不可動,使工人為治施造轉軸,教其起倒之法,其人喜,捧手而熊,毛羅,即今我濟州也,我往濟州,見漂來此,亦與其人一般,足下亦以韓公之心為心,教我以水車之制,則我亦捧手而喜.”榮曰:“水車只用汲水而已,不足學也,臣曰:“我國多水田,厦值旱乾,若學此制,以教東民,以益農務,則足下一唇舌之勞,可為我東人千萬世無窮之利也,望深究其制,有未盡,則問諸水夫,明以教我,”榮曰:“此北方地多沙土,無水田,故水車無所用,此水夫安知其制?我姑思之,”食頃間,榮略語機形之制、運用之方,臣曰:“我所見,轉之以足,此則運之手,且其形制小異,何也?”榮曰:“你所見必是蹈車者,然不若此制最便,止用一人,可以運之.”臣曰:“可造以松木否?”榮曰:“松木輕,不可造. 其機通上下用杉木,其腸骨用榆木,其板用樟木,其車腸用竹片約之,前後四柱要大,中柱差小,其車輪、腹板長短、廣(俠)狹]如之,如不得杉、榆、樟等木,須用木理堅韌者方可.”又過獨流巡檢司、沙寧鋪,至武淸縣地方, 과장청운__소, 인정시지장청역, 지명都是楊柳청야. 유박이시, 三更,復開__而行,
 
 
정해현(靜海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축시(丑時)479에 배를 출발시켜 조대포(釣臺鋪)·남가구포(南家口鋪)·쌍당포(雙塘鋪)를 지나서 봉신역(奉新驛)에 이르니 봉신역은 정해현치(靜海縣治) 앞에 있었습니다.
 
 
신이 부영에게 말하기를,
 
 
“수차(水車)<ref>[https://www.youtube.com/watch?v=MoEPUPnyOzA 호남기록문화유산-하백원]</ref>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당신은 어디에서 수차<ref>[https://www.youtube.com/watch?v=vawh8BZq-U0 조선시대에는 논에 물을 자동으로 공급할 수 있는 자승차 설계도가 있었다? / YTN 사이언스, YTN SCIENCE, 2017.06.21]</ref>란 것을 보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 소흥부를 지날 때 어떤 사람이 호수 언덕에서 수차<ref>[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88%98%EC%B0%A8%EA%B0%80-%EC%A1%B0%EC%84%A0%EC%97%90%EC%84%9C-%EB%BF%8C%EB%A6%AC%EB%82%B4%EB%A6%AC%EC%A7%80-%EB%AA%BB%ED%95%9C-%EA%B9%8C%EB%8B%AD 수차가 조선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까닭, 사이언스타임즈, 2009.11.05]</ref>를 운전하여 논에 물을 대고 있었습니다. 힘을 적게 들이면서 물을 많이 퍼 올리니 가뭄 시에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제작 방법은 목공이 아는 바로서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과거 가우(嘉祐)480 연간에 고려에 신속(臣屬)된 탁라도(E羅島)481 사람이 돛대가 부러져 표류되어 연안에 도착한 뒤 소주의 곤산현(混山縣)에 이르렀습니다. 지현 한정언(韓正彦)482은 그에게 술과 음식을 접대하였는데, 돛대가 배에 박혀 움직일 수 없음을 보고는 공인(工人)을 시켜서 돛대를 수리하여 전축(轉軸)을 만든 다음 그 일으키고 넘어뜨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도록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기뻐하면서 두 손을 맞잡고 감사해 마지않았습니다. 483 탁라는 곧 지금의 우리 제주입니다. 내가 제주에 갔다가 표류를 당하여 이곳에 왔으니 그 사람과 똑같습니다. 족하께서 또한 한공(韓公)처럼 마음을 쓰시어 수차의 제작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시면 나도 또한 두 손을 맞잡으며 기뻐할 것입니다.”
 
 
“수차는 물을 푸는 데만 시용될 뿐이니 배울 것이 못됩니다.”
 
 
“우리나라는 논이 많은데 가뭄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만약 이 제작법을 배워 동방 백성에게 가르쳐서 농사짓는 일에 도움을 준다면 족하의 한 번 말하는 수고가 우리 동방 사람의 천만대의 무궁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 제작법을 잘 알아보시되 미진한 점이 있으면 수부(水夫)에게 물어서 나에게 명백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북방은 사토가 많고 논이 없는 까닭에 수차가 소용이 없으니 수부들이 어찌 그 제작법을 알겠습니까?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끼 밥을 먹을 동안에 부영이 기계의 형태와 운용 방법을 대략 이야기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본 것은 발로 움직이던데 이것은 손으로 움직이고 또 그 형태도 조금 다르니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본 것은 도차(蹈車)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가장 간편해서 한 사람만으로도 운전할 수 있습니다.”
 
 
“소나무로 만들 수 있습니까?”
 
 
“소나무는 가벼워서 만들 수 없습니다. 틀은 위아래를 통하므로 삼나무를 쓰고, 장골(腸骨)은 느릅나무를 사용하고, 판(板)은 녹나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수레의 중심은 대쪽을 사용하여 묶고, 앞 뒤 네 기둥은 커야 하고, 가운데 기둥은 조금 작아야 하며, 그 수레바퀴와 중심의 판자(板子)는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해야 합니다. 만약 삼나무, 느릅나무, 녹나무를 얻지 못하면 모름지기 나무 결이 단단하고 질긴 것을 사용해야만 될 것입니다. 484 또 독류순검사(獨流巡檢司)·사령포(沙寧鋪)를 지나서 무청현(武淸縣) 지방에 이르고, 양청체운소(楊靑遞運所)를 지나서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 시각에 양청역(楊靑驛)에 이르렀는데, 지명은 모두 양유청(楊柳靑)이었습니다. 정박했다가 3경에 다시 배를 출발시켜 떠났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기술
 
*역사
 
*이용후생
 
*시간
 
 
23rd Day. Passing Ching-hai County. This day was fair.
 
Between 1 and 3 a.m. we pushed off the boats and passed Tiao-t'ai Stop, Nan-chia-k’ou Stop, and Shuang-t’ang Stop, and came to Feng-hsin Station, which was in front of the seat of Ching-hai County.
 
I said to Fu Jung, “I want to learn how water wheels are made.” Fu Jung said, “Where did you see something called a water wheel?”
 
I said, “Previously, when we passed Shao-hsing Prefecture, there were men on the shore of a lake turning water wheels and irrigating fields. Using little strength, they raised much water. That could be helpful to farming in droughts.”
 
Fu Jung said, “The construction is known to carpenters. I am not familiar with it.”
 
I said, “Long ago in the Chia-yu period (1056-1063], a man from T’o-lo Island,95 which was subject to Koryo, drifted with the wind, his mast and boom broken, to shore. He reached K’un-shan County, Su-chou. The Magistrate of the county, Han Cheng-yen, served him wine and food and saw his old mast, which had been stood in the wood of the boat and could not be moved. He had a craftsman repair the mast and make a windlass and taught [the man] how to raise what had fallen. The man was so happy he clasped his hands and danced round. 96
 
“T’o-lo is now our Cheju. I went to Cheju, was driven adrift, and came here; I am of the same type as that man. Make His Excellency Han's spirit your spirit, teach me how to make a water wheel, and I, too, shall clasp hands and be happy."
 
Fu Jung said, “The water wheel is used only for drawing water. It is not worth learning about.”
 
I said, “In my country there are many irrigated fields, and frequently there is drought. If I study this method and teach the Koreans to improve their farming, your work of a few words can be an inexhaustible benefit to my Koreans for all ages. I should like to study the method carefully. If there is anything you do not know, you can ask the sailors and explain it to me clearly.”
 
Fu Jung said, “Here in the North the land is mostly sandy soil, and since there are no irrigated fields, water wheels are not used. How can these sailors know their construction? However, I shall think about it.”
 
While we were eating, Fu Jung told me briefly how the machine was built and turned. I said, “The ones I saw were turned with the feet. Yours is turned with the hands, and its shape, too, is a little different. How is that?”
 
 
Fu Jung said, “The ones you saw must have been treadwheels. They are not so convenient as this kind, which can be turned by a single man.”
 
I said, “Can they be built of pine?”.
 
Fu Jung said, “Pine is light and cannot be used to build them. For the upper and lower axles (chi-t’ung], we use cryptomeria. We use elm for the trough [ch’ang-ku] and camphorwood for the paddles (pan). Bamboo strips are used to bind the spokes (she-ch'ang]. The four pillars in front and back must be big, but the central pillar, to the contrary, should be small. The dimensions of the wheels, spokes, and paddles are like this. If you cannot get cryptomeria, elm, and camphor-wood, you must use woods of tough, pliable grain; they will do.''97
 
[We went from Tu-liu Police Station to Yang-liu-ch’ing Station and beyond.]
 
 
479. 밤 1시에서 3시 사이.
 
480.?
 
481.?
 
482.?
 
483.?
 
484. 최부가 귀국한 후 成宗은 全羅道觀察使 李에게 최부의 지시를 받아 水車를 만들어 올리라고 성종19년 6월 24일에 명하였고, 8월 4일에 최부가 수차를 만들어 바쳤다. 《朝鮮成宗實錄》 19년 6월 丙辰;《朝鮮成宗實錄》 19년 8월 乙未.
 
 
===24일===
 
二十四日,過天津衛,是日陰,曉過直沽城,河名,即沾水也,至天津衛城,衛河自南而北,即臣所沿來之下水也,白河自北而南,臣所去之上水也,二河合流于城之東以入海,城臨兩河之會,海在城之東十餘里,即舊時江淮以南漕運,皆浮大海,復會于此,以達京師,今則疏鑿水道,置開閉縱,舟楫之利,通于天下,城中有衛司及左衛·右衛之司,分治海運等事,城東有巨廟臨河岸,大書其額,臣遠而望之,其上天宇,其下廟”字,其中一字,不知某字也,河過丁字沽、海口里、河東巡更所、桃花口、尹兒灣、蒲溝兒、下老米店,至楊村睾,睾西又有巡檢司,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D%86%88%EC%A7%84+%EC%8B%9C+%ED%86%88%EC%A7%84/@39.1236899,116.7350944,9z/data=!3m1!4b1!4m5!3m4!1s0x35edfc621e2c0e87:0x847194b730884031!8m2!3d39.3433574!4d117.3616476 천진위(天津衛)]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직고성(直古城)485을 지났는데 강의 이름은 고수(活水)였습니다.
 
 
천진위성(天津衛城)에 이르렀는데 위하(衛河)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니 곧 신이 흐름을 따라온 강의 순류였으며, 백하(白河)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니 곧 신이 거슬러 가야 할 강의 역류였습니다.
 
 
두 강이 성의 동쪽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성은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임해 있었습니다.
 
 
바다는 성의 동쪽 10여 리에 있었으니 곧 옛날 강회(江__) 이남의 조운이 모두 큰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이곳에 모인 뒤 경사로 가곤 하였습니다.
 
 
지금은 수로를 뚫어 열고 갑문을 설치하여 열고 닫으니 선박의 편리함이 천하에 통하게 되었습니다.
 
 
성안에 위사(衛司)와 좌위사(左衛司)·우위사(右衛司)486의 관사(官司)가 있어 해운 등의 일을 나누어 관장하였습니다.
 
 
성 동쪽에는 큰 사당이 강 언덕에 접해 있어 그 편액을 큰 글자로 썼는데, 신이 먼 데서 바라보니 그 위는 '천(天)'자, 그 아래는 '묘(廟)'자였지만 중간의 한 글자는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487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정자고(丁字法)·해구리(海口里)·하동순경소(河東巡更所)·도화구(桃花口)·윤아만(尹兒灣)·포구아(蒲름兒)488. 하로미점(下老米店)을 지나서 양촌역(楊村驛)에 이르니 양촌역 서쪽에는 또 순검사가 있었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토목
 
*사당
 
 
24th Day. Passing T’ien-chin [Tientsin] Garrison. This day was cloudy.
 
 
At dawn we passed Chih-ku. The name of the river by the wall was Ku River. We came to the wall of T’ien-chin Garrison.
 
The Wei River ran from south to north and was the river down which I had come, the Pei River ran from north to south and was the river up which I was to go, and the two rivers joined east of the wall to flow into the sea. The wall overlooked the junction of the rivers, and the sea was over ten li east of the wall. In olden times, all cargoes from the Yangtze, Huai, and places south of them sailed the open sea and reassembled there to reach the capital. Now, the benefits of canals cut, locks placed, and boats given passage reach throughout the Empire.
 
Inside the wall were garrison posts. The posts of the Left and Right Garrisons divided the administration of sea transport and other matters. East of the wall was a huge shrine overlooking the river bank, the inscription on its plaque so big that though I was far from it, I saw it. At the top was the word “Heaven” [t'ien] and at the bottom the word "Shrine” [miao]. There was a word in between them, but I do not know what it was. 98
 
[We went from Ting-tzu-ku to Yang-ts’un Station.]
 
 
488.《行水金鑑》권155, 運河水에 의하면 滿溝 다음에 下老米店이 있다. 蒲溝는 滿溝의 誤記일 가능성이 있다.
 
 
===25일===
 
二十五日,陰,早經上老米店、白河里、南蔡村、北蔡村、王家務、杜口、雙溪、蒙村、白廟兒、河西巡檢司,至河西睾,睾與遞運所,相距七 八步,傳榮謂臣曰:“潮江三司奏你等漂風之事,表本限在四月初一日,我奉表而來,恐未及限,自此驛乘先到京師,他日於兵部前相遇,莫敢辑禮以示相知之意,新天子法度嚴肅故”云.
 
 
p.426
 
 
흐렸습니다.
 
 
아침 일찍 상로미점(上老米店)·백하리(白河里)·남채촌(南蔡村)·북채촌(北蔡村)·왕가무(王家務)·두구(杜口)·쌍천(雙淺) 몽촌(蒙村)·백묘아(白廟兒)·하서순검사(河西巡檢司)를 거쳐서 하서역(河西驛)에 이르니, 하서역은 체운소와 7-8보 거리였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절강삼사(浙江三司)에서 당신들의 표류한 일을 아뢰었는데, 표문(表文)은 원래 4월 1일까지가 시한입니다. 내가 표문을 받들고 와서 시한에 맞추지 못할까 하여, 이 역에서 역마(驛馬)를 타고 먼저 경사로 가겠습니다. 훗날에 병부 앞에서 만날 때 습례(揖禮)를 하여 서로 아는 내색을 해서는 안 되니, 이는 새 천자의 법도가 엄숙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25th Day. Cloudy.
 
 
[We went from Shang-lao-mi Stop to Ho-hsi Station.]
 
Fu Jung said to me, “When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memorialized on your being blown adrift, their memorial was dated the 1st Day, Fourth Month. I brought the memorial with me, and I am afraid we may not meet the date. From this station I shall go by relay carriage ahead of you to the capital. Later, when we meet before the Ministry of War, do not greet me and show that we know each other. I say that because the laws of the new Emperor are strict.”
 
 
==록 권3==
 
 
===26일===
 
二十六日,晴,大風,沙塵漲天,且不能開,順風而行,過要兒渡口、下馬頭、納鈔廳、天妃廟、中馬頭、車榮兒、上馬頭、河西務、土門樓、葉青店、王家木罷渡口、魯家坞、攀繪口,至泊蕭家林里前河之越岸,臣船相對處,有十餘人乘桴,架屋榜上,亦來泊,有賊人來劫奪,乘人亦强健者,相與搏擊,陳萱曰:“盗肆行國掠若此,其分付你來,各自相警,小心過夜”云云,自天津以北,白沙平鋪,一望無際,曠野無草,五穀不生,人煙鮮少,即曹操征烏丸時,遣其將,自洱沱河入路沙,路沙即此地也.
 
 
맑았습니다.
 
 
큰바람이 불어 모래 섞인 먼지가 하늘에 가득하여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순풍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 요아도구(要兒渡口), 하마두(下馬頭), 납초청(納廳), 천비묘(天妃廟), 중마두(中馬頭), 거영아(車榮兒), 상마두(上馬U), 하서무(河西務), 토문루(土門樓), 엽청점(葉靑店), 왕가파도구(王家木混渡口), 노가오(魯家烏), 반증구(攀繪口)를 지나서 소가림리(蕭家林里) 앞 강가의 건너편 언덕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신의 배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10여 인이 위에 지붕을 얹은 뗏목을 타고 와서 대었습니다.
 
 
도적이 와서 겁탈하니 뗏목을 탄 사람도 또한 건장한 자라서 서로 치고 때렸습니다.
 
 
진훤은, “도적이 멋대로 때리고 빼앗기를 이와 같이 하니, 당신의 무리에 게 분부하여 각자가 경계하도록 하고 조심스럽게 밤을 지내도록 하십시오"라 운운하였습니다.
 
 
천진위(天津衛)로부터 북쪽은 고르게 깔린 흰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빈 들판에 풀이 없고 오곡(五穀)이 자라지 않았으며 인가가 드물었습니다.
 
 
조조(曹操)가 [http://www.culturecontent.com/dictionary/dictionaryView.do?cp_code=cp0602&dic_seq=227 오환(烏丸)]을 정벌할 때 그 장수를 보내어 호타하(滹沱河)로부터 노사(路沙)로 들어가게 했었는데 노사가 곧 '''이곳'''이었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사회(도적)
 
*인명
 
*역사
 
 
26th Day. Fair. High winds; dust and sand filled the sky, and we could not open our eyes.
 
 
[We went from Yao-erh-tu-k’ou to Hsiao-chia-lin Village and stopped there.]
 
In the place across from my boat were more than ten men on rafts that had shelters on top of them. They, too, had come and stopped. Bandits came to rob them, but the men on the boats were also strong and fought back. Ch’en Hsüan said, “That is how outrageously the bandits beat people and rob them. You had better warn your people to be on guard, and let us pass the night cautiously.”
 
From T’ien-chin Garrison north, white sand lay flat as far as the eye could see. There was no grass in the waste land. The five grains did not grow, and settlements were few and far apart. When Ts’ao Ts’ao subjugated the Wu-wan, he sent his generals from Hu-t'o River into Lu-sha. Lu-sha was that place.1
 
 
===27일===
 
二十七日,晴大風,平明至和合驟,又過縣,縣治在河之東岸,馬頭巡檢司、崔氏園亭在其中,至此沙堆高大,如丘陵然,又過火燒屯、公雞店、李二寺、長店兒、大通關、渾河口、土橋巡檢司,至張家灣,即諸路貢賦、朝貢、商賈之船之所集處也.
 
 
맑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해뜰 무렵 화합역(和合驛)에 이르고 다시 곽현(鄕縣)을 지났는데, 현치(縣治)는 강의 동쪽 언덕에 있었습니다.
 
 
마두순검사(馬頭巡檢司)와 최씨원정(崔氏園亭)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이곳에 이르니 모래더미가 높고 커서 구릉과 같았습니다.
 
 
또 화소둔(火燒屯), 공계점(公雞店), 이이사(李二寺),장점아(長店兒), 대통관(大通關), 혼하구(河口), 토교순검사(土橋巡檢司)를 지나서 장가만(張家灣, 장씨성을 가진 만호가 여기에 살아서 생긴 이름)<ref>[http://www.visitbeijing.or.kr/article.php?number=15551 장가만]</ref>에 이르니, 곧 여러 로(路)의 공부(貢賦)와 조공(朝貢) 그리고 상고(商賈) 등의 배가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건축
 
 
27th Day. Fair. High winds.
 
 
[We went from Ho-ho Station to Chang-chia Bay,] which was the place at which the tax, tribute, and merchant boats from everywhere assembled.
 
 
===28일===
 
二十八日,至北京玉河館,是日晴,舍舟乘聽,過東嶽廟、東關鋪,至路河水馬驛,一名通津疇,中門大書寰宇通衢,驛西有遞運所,西北有通州舊城,通路亭在城之東南,東抱白河,白河一名白遼河,或謂之東路河,臣等步入城之東門,過族表田拱尚義門、大運中倉門、進士門,出舊城西門,又過新城第一鋪、大運西倉門、玄靈觀,又出新城西門,城與舊城相接,通州卽秦之上谷郡也,今轄于順天府,州治之南,有通州衛左衛·右衛、定邊衛、神武中衛,臣等於新城西門外,乘聽過永濟寺、廣惠寺,至崇文橋,橋在北京城門之外,楊旺與李寬、唐敬、夏斌、杜玉等,引臣等步入皇城東南崇文門,行至會同館,京師乃四夷所朝貢之地,會同本館之外,又建別館,謂之會同館,臣等所寓之館,在玉河之南,故亦號為玉河館,
 
 
북경의 옥하관(玉河館)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배를 놓아두고 당나귀를 타고 동악묘(東岳廟), 동관포(東關鋪)를 지나서 통진역(通津驛)이라고도 하는 노하수마역(路河水馬驛)에 이르니 중문(中門)에 '환우통구(豪宇通衢)'<ref>[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60218/76510950/1 정몽주 詩에서 明 남경行 사신의 길 밝혀, 동아일보, 2016.02.18]</ref><ref>[http://www.daesan.or.kr/webzine/sub.html?uid=1763&ho=43 정몽주 남경사행길]</ref>라고 크게 씌어 있었습니다.
 
 
역 서쪽에는 체운소(遞運所)가 있고 서북쪽에는 통주(通州)의 옛 성이 있었습니다.
 
 
통로정(通路亭)은 성 동남쪽에 있었으며 동쪽으로 [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jsessionid=E38DBCBB198B24B27B2D9B57146F268A?dataId=13662&sType=&q=&secType=uf&&fq=cateArea1_fct%3A%EC%A4%91%EA%B5%AD&fq=cateType2_fct%3A%EC%A7%80%EB%AA%85%2F%EC%9E%90%EC%97%B0%EC%A7%80%EB%AA%85 백하(白河)]가 감아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백하는 일명 '백수하(白遂河)'라고도 하고 '동로하(東路河)'라고도 불렀습니다.
 
 
신 등이 걸어서 성의 동문으로 들어가서 정표전공상의문(佐表田拱尙義門), 대운중창문(大運中倉門), 진사문(進士門)을 지나서 구성(舊城)의 서문으로 나오고, 또 신성제일포(新城第一鋪), 대운서창문(大運西倉門), 현령관(玄靈觀)을 지나서 또 신성(新城)의 서문으로 나오니, 신성은 구성과 서로 잇닿아 있었습니다.
 
 
통주는 곧 진(秦)의 상곡군(上谷郡)으로 지금은 순천부(順天府) 소속이었습니다.
 
 
주치(州治)의 남쪽에 통주위(通州衛), 좌위(左衛), 우위(右衛), 정변위(定邊衛), 신무중위(神武中衛)가 있었습니다.
 
 
신 등은 신성의 서문 밖에서 당나귀를 타고 영제사(永濟寺), 광혜사(廣惠寺)를 지나서 숭문교(景文橋)에 이르니, 숭문교는 북경 성문 밖에 있었습니다.
 
 
양왕(楊旺)은 이관(李寬), 당경(唐敬), 하빈(夏斌), 두옥(杜玉) 등과 함께 신 등을 인도하여 걸어서 황성(皇城) 동남쪽에 있는 숭문문(崇文門, 지금의 동교민항(東交民巷))으로 들어가 회동관(會同館)<ref>[http://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2pdf/chr82-05ParkHG.pdf 明淸 시대 北京 朝鮮使館 고찰]</ref>에 이르렀습니다.
 
 
경사는 곧 사이(四夷)가 조공하는 곳이므로, 회동본관 이외에 또 별관을 세워서 회동관이라 불렀습니다.
 
 
신 등이 머문 관사는 옥하(玉河)의 남쪽에 있었던 까닭에 '옥하관'<ref>[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21226/51842225/1 明淸 조선사절 숙소‘옥하관’ 자리는 現최고인민법원, 동아일보, 2012.12.26]</ref>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건축
 
*외교
 
*인명
 
*동물
 
 
28th Day. Arrival at Jade River House [Yü-ho-kuan], Peking. This day was fair.
 
 
[We left the boats and, at first riding donkeys and later walking, went from Tung-yüeh Shrine through T’ung-chou.]
 
T’ung-chou was Shang-ku-chün of Ch’in. Now it is under Shun-t’ien Prefecture. South of the department headquarters are T’ung-chou Garrison, Left Garrison, Right Garrison, Ting-pien Garrison, and Shen-wu Center Garrison.
 
Outside the west gate of the new wall we got on donkeys and passed Yungchi Temple and Kuang-hui Temple and came to Ch’ung-wen Bridge. The bridge was outside the gates of Peking.
 
Yang Wang, Li K’uan, T’ang Ching, Hsia Pin and Tu Yü led us on foot through the Imperial City Southeast Ch’ung-wen Gate and to the Central Post Hotel [Hui-tung-kuan]. The capital was the place to which tribute was brought by the Four Barbarians; [consequently], in addition to the Main Building of the Central Post Hotel, an annex had also been built and called Central Post Hotel. That building, in which we were lodged, was also called Jade River House, because it was south of the Jade River.
 
 
===29일===
 
二十九日,兵部,是日晴,楊旺引臣等出玉河館門,顧見東衢有橋,橋兩傍建門,扁玉河橋,步由西衢,過上林(院)(苑」監100、南薰坊鋪、大盤院、欽天監、鴻爐寺、工部,至兵部,有尚書余子俊坐一廳,左侍郎姓何、右侍郎姓阮,對坐一廳,郎中二員、主事官員,連坐一廳,臣等先調侍郎,次調尚書,然後請郎中、主事官廳,郎中等不復問臣以漂來事,指庭中槐陰為題,今做絕句,又以渡海為題,令做唐律,又有職方清吏司郎中戴豪,引臣至廳上,廳壁掛天下地圖,臣所經之地,一見瞭然,郎中等指謂臣曰:“你發自何地,泊于何地?”臣以手指其漂舟之地、所歷之海、所泊之
 
 
p.428
 
清,海路正經于大琉球國之北,戴郎中曰:“你見琉球地乎?”臣曰:“我漂白海之中,遇西北風南下,望見山樣在有無中,且有人煙之氣,恐是琉球界也, 然未可知.”又問曰:“你所帶來人有死亡者乎?”臣曰:“我四十三人,頁皇恩如海,皆得保性命而來,”又問曰:“你國治喪,用文公《家禮》否?”臣曰:“我 國人生子,先教以《小學》、《家禮》,科學亦取精通者,及其治喪居家,一皆遵之,”又問:“你國王好書否?”臣曰:“我 王一日四接儒臣,好學不厭,樂取諸人.”問畢,饋臣餅茶,唐敬引臣等還玉河館,夕,有姓名何旺者,頗解我國言,來謂臣:“你國貿册封使安宰相處良等二十四人來此館,留四十餘日,今三月二十二日還程”云云,臣嘆其不得相見,何旺曰:“你亦還 國, 何嘆之甚?” 臣曰:“憔悴他鄉,四顧無親,若見本國人,則如見父兄,且父新死母當喪,弟又少不更事,家又資寞,不保朝夕之際,我適漂海,其存其沒,家莫聞知,徒以為鯨濤鼓天,滄海無涯,必見臭載,葬身魚腹,以資奠之家,治重疊之要,其老母弱弟之痛為如何也?我若得遇安令公之行,一時還鄉,則得免道路之虞,若不得同歸,他先歸國,好傳吾消息,則可以少舒母弟之痛,天不恤我,只隔七日間,不得相見本國之使,胡可不自痛恨也?”
 
 
병부(兵部)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양왕이 신 등을 안내하여 옥하관 문을 나오니 동쪽 거리에 다리가 보였습니다.
 
 
다리 양쪽 가에는 문을 세웠는데 '옥하교(玉河橋)'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습니다.
 
 
서쪽 거리로 걸어서 상림원감(上林苑監), 남훈방포(南薰坊鋪), 태의원(太醫院), 흠천감(欽天監), 홍려시(鴻__寺), 공부(工部)'를 지나 병부에 이르렀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7%AC%EC%9E%90%EC%A4%80 상서(尙書) 여자준(余子俊)]이 한 청사에 앉아 있고, 하(何) 좌시랑(左侍郞)과 완() 우시랑(右侍郞)이 다른 청사에 마주앉아 있으며, [http://chinesewiki.uos.ac.kr/wiki/index.php/%EB%82%AD%EC%A4%91 낭중(郞中)] 2인과 주사관(主事官) 4인<ref>[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rCjF&fldid=6R1S&datanum=1480&q=%B8%ED%B3%AA%B6%F3%BF%CD%C3%BB%B3%AA%B6%F3&_referer=V7kfJwkeLEGMZxGlgqZEmUbIswVIUiwTGIn-aQXyOAZ88G.lujz1tQ9LRGW3W_x_HqWljDXK6bzK4LP2d-6Wmw00 명나라와 청나라의 관직 요약]</ref><ref>[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menu/254?brdType=R&bbIdx=5450 ]</ref>은 또 다른 청사에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신 등이 시랑을 먼저 뵙고, 다음에 상서를 뵙고 난 뒤에 낭중과 주사관이 있는 청사로 갔습니다.<ref>[https://sso3208.tistory.com/123 명대(明代) 관제(官制)와 군제(軍制) : 중앙과 지방을 중심으로]</ref>
 
 
낭중 등은 신에게 표류해 온 일에 대해서는 다시 묻지는 않고, 뜰 안의 홰나무<ref>[http://kr.people.com.cn/203090/8264269.html 산시(山西) 천년의 역사를 지닌 홰나무]</ref><ref>[https://hhk2001.tistory.com/5303 서울 조계사 홰나무]</ref> 그늘을 가리키며 시제(詩題)를 삼고는 절구(絶句)를 짓도록 하고, 또 도해(渡海)로써 시제를 삼고는 당률(唐律)을 짓도록 하였습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IK7LNUpSV0k 일암 김주호선생 한시작법 제1강]</ref>
 
 
또 직방청리사(職方淸吏司)의 낭중 대호(戴豪)의 안내에 따라 대청 위에 이르렀는데, 청사 벽에 천하의 지도가 걸려 있어 신이 지나온 지역이 한 눈에 환히 보였습니다.
 
 
*직방청리사주사였던 원황 <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B%90%ED%99%A9(%E8%A2%81%E9%BB%83) 원황]</ref> 
 
 
낭중 등은 지도를 가리키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에 정박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손으로 배가 표류하기 시작한 땅과 지나온 바다와 정박했던 섬을 가리켰습니다.
 
 
가리킨 해로(海路)가 대유구국(大琉球國)의 북쪽을 지나고 있을 때 대(戴) 낭중이 말하기를, “유구 지방을 보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표류하여 백해(白海)로 들어가 서북풍을 만나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멀리 보니 산 모양이 보일락말락 했고 또 인가의 기색이 있어 유구의 땅인 듯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데리고 온 사람 중에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43인은 바다와 같은 황제의 은혜를 입어서 모두 목숨을 보전하여 올 수 있었습니다.”
 
 
“당신 나라에서 초상을 치를 적엔 주문공의 《가례》를 씁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먼저 《소학(小學)》과 《가례》를 가르치고, 과거(科擧)에서도 또한 이에 정통한 사람을 뽑으며, 초상을 치를 때나 일상생활에서 한결같이 《가례》를 따릅니다.”
 
 
“당신의 국왕은 글 읽기를 좋아합니까?”
 
 
“우리 국왕은 하루에 네 번 유신(儒臣) 을 접견하고, 배우기를 즐겨하여 싫증을 내지 않으며 남의 장점을 취하기를 좋아하십니다.”
 
 
다 묻고 나서는 신에게 떡과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당경이 신 등을 인도하여 옥하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에 우리말을 제법 할 줄 아는 하왕(何旺)이란 사람이 신에게,
 
 
“당신 나라의 하책봉사(賀冊封使)인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64_001279&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 안처량(安處良)] 재상(宰相)<ref>[http://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id=kja_104070&did=kja_10407002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일 병신 1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ref> 등 24인이 이 옥하관에서 40여 일을 머물다가 이 달 3월 22일에 돌아갔습니다”라 운운하였습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1021_001 성종실록 211권, 성종 19년 1월 21일 병진 1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이조 참판 안처량을 북경에 보내어 중궁의 책봉을 하례하게 하다]</ref>
 
 
신은 그들과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하왕이 말하기를,
 
 
“당신도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데, 어찌 그리 심히 한탄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타향에서 고생에 시달려 초췌해지고 사고무친의 처지에 본국 사람을 만난다면 마치 부형을 만난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버지가 갓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상사(喪事)를 치러야 하는데 아우는 어려서 경험이 부족하고, 집안은 또한 가난하여 조석(朝夕)도 보전하지 못하는 마당에 내가 바다에 표류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집에서는 알 수 없을 터인데, 다만 하늘에 솟구치는 큰 파도와 가이없는 푸른 바다 속에서 배가 뒤집혀 필시 물고기 밥이 되었을 줄로 여길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거듭되는 상사를 치르게 되었으니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우의 비통함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만약 안(安) 영공(令公)의 행차를 만나서 같이 고향에 돌아갔다면 길에서 생기는 근심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만약 함께 돌아가지 못하였더라도 그가 먼저 본국에 돌아가서 내 소식을 잘 전해 준다면 내 어머니와 아우의 아픔을 조금 덜어줄 수 있을 것인데, 하늘이 나를 돌보지 않아 겨우 7일이 어긋나 본국 사신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크게 한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기후
 
*인물
 
*건축(관청)
 
*식물
 
*시
 
*토목(교량)
 
*유학(서적)
 
*제도(교육)
 
*지리
 
*외교
 
*심리(허망, 안타까움, 한탄)
 
*유학
 
*모화
 
 
29th Day. Going to the Ministry of War. This day was fair.
 
 
Yang Wang took us outside the gate of Jade River House. Over our shoulders we saw that on East Street there was a bridge, on both sides of which gates had been built. A plaque said, “Jade River Bridge.” We walked along West Street past the Directorate of Imperial Parks, Nan-hsün Ward Stop, Imperial Academy of Medicine, Directorate of Astronomy, Court of State Ceremonial, and the Ministry of Works and came to the Ministry of War. Yü Tzu-chün, the Minister, was there, sitting in one hall. Left Vice-Minister Ho and Right Vice-Minister Yüan were sitting in a hall across from him.2 Two Senior Secretaries and four Administrative Secretaries were sitting in a row in another hall. First we went to the Vice Ministers, next to the Minister, and afterwards to the hall of the Senior and Administrative Secretaries.
 
The Senior Secretaries and the others did not question me again on my drifting there. They pointed to the shadow of a Japan pagoda tree (huai) in the garden and ordered me to write a quatrain (chüeh-chü) on that subject. Then they ordered me to write an eight-line poem in the T’ang style on the subject “Crossing the Sea.” Tai Hao, Senior Secretary for the Bureau of Maps,3 took me up into the hall, on a wall of which a map of the Empire was hung. The places through which I had passed were clear at a glance. The Senior Secretary pointed at it and said to me, “Where did you start and where did you land?” I pointed out the place where the boat had gone adrift, the sea through which we had passed, and the island on which we had landed. Our course passed directly north of Great Ryukyu.
 
Senior Secretary Tai said, “Did you see Ryukyuan land?”
 
I said, “While drifting in the white sea, we met a northwest wind and went south. We saw vague mountainous shapes, and there was also an aura of settlement. I suspected that it was the shore of Ryukyu, but still I do not know.”
 
He asked, “Did any of the men who accompanied you die?”
 
I said, “All forty-three of my men, trusting to an Imperial benevolence as great as the sea, kept alive.”
 
He asked, “When you observe mourning in your country, do you use Wen Kung's Chia li?”.
 
I said, “When my countrymen have children, they first teach them from the Hsiao hsuëh and Chia li. Even in the examinations, we choose those wellversed in it. It governs our mourning, and everyone follows it in daily life.”
 
He asked, “Does the King of your country like books?”.
 
I said, “Our King receives the Confucian ministers four times a day. He never grows tired of learning, and he likes to select worthy scholars. 4
 
When all had stopped asking questions, they served me tea and cakes. T'ang Ching took us back to Jade River House.
 
In the evening one Ho Wang, who understood our language somewhat, came and said to me, “Prime Minister An Ch’ð-ryang, an Envoy of Congratulations, and twenty-three men from your country came to this guest house and stayed more than forty days. They set out to return on the 22nd Day, Third Month.”5 I expressed sorrow that we had not met. Ho Wang said, “You will return to your country, too. Why do you grieve so much?”
 
I said, “I am suffering abroad, with no relatives anywhere around me. If I should see someone from my own country, it would be like seeing my father or elder brother. My father, moreover, has died recently, and my mother is in mourning. My younger brother is young and inexperienced. The family is poor and insecure from morning to night.
 
“I drifted out to sea, and whether I am dead or alive my family have not heard. They can only assume that in the mountainous, heaven-shaking waves of the great, endless sea, I must have blackened my name and buried myself in a fish's belly. My poor family will be observing double mourning. How great must be the grief of my old mother and weak, little brother!
 
“If I had met His Excellency An's party and returned home at the same time as he, I should have avoided mishaps on the road. If I had not returned with him but he had gone home first and kindly delivered word of me, it would have been possible to mitigate a little my mother's and younger brother's grief. Heaven has no pity on me; I have missed meeting an envoy from my own country by only seven days. How can I not have deep regret?”
 
 
===4월 1일===
 
四月初一日,晴,話朝,鴻臚寺主(薄)【簿]16 李翔來謂臣曰:“今日兵部將你事入奏,你可寬心,漂流事,當報禮部,浙江三司直報兵部,不報于禮部,故禮部入奏罪他,兵部亦指揮揚旺二十”云云,且曰:“汝國謝恩使,十日間必到于此,汝可留待同歸可也.”臣曰:“我奔初喪,一日作客,如過三秋,請足下圖我速還,”李翔點頭,自浙江以來不見通事之人,至此方見此人,
 
 
맑았습니다.
 
 
새벽에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9%8D%EB%A0%A4%EC%8B%9C(%E9%B4%BB%E8%87%9A%E5%AF%BA) 홍려시(鴻爐寺)]주부(主簿) 이상(李翔)이 와서 신에게,
 
 
“오늘 병부에서 당신의 일을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20339001 상주(上奏)]하려고 하니 마음을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표류에 관한 일은 당연히 예부(禮部)에 보고해야 할 터인데, 절강(浙江) 삼사(三司)가 병부에 직보를 하고 예부에는 보고하지 않았던 까닭에 예부가 그들을 벌주도록 상주하였으며, 병부 또한 지휘 양왕(楊旺)에게 곤장 20대를 쳤습니다”라 운운하였습니다.
 
 
또, “당신 나라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5870 사은사(謝恩使)]<ref>[http://m.cafe.daum.net/munmoo-chosunsa/3U53/1534 조선시대 사은사 정리]</ref>24가 열흘 안에 반드시 이곳에 도착할 것이니, 당신은 머물러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는 초상을 당하여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므로 하루 동안 손 노릇 하는 것이 마치 3년을 보내는 것과 같으니, 청컨대 족하(足下)께서 내가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이상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렸습니다.
 
 
절강에서부터 그 후로는 통사(通事)<ref>[http://dongguk.koreanhistory.or.kr/file/download.do?type=boardFile&fileId=220 조선시대 외교 실무자 통사]</ref>를 만나 보지 못했는데, 이곳에 이르러서야 이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기후
 
*시간
 
*인명
 
*행정
 
*국법
 
*외교
 
*심리(다급함, 조바심, 안절부절)
 
*지명
 
*관직
 
 
1st Day, Fourth Month. Fair.
 
 
At dawn Li Hsiang,6 Auditor [Chu-pu] of the Court of State Ceremonial, came and said to me, “Today the Ministry of War will submit your case in a memorial; put your mind at ease. Cases of drifting ought to be reported to the Ministry of Rites, but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reported directly to the Ministry of War and did not report to the Ministry of Rites. The Ministry of Rites, therefore, has put in a memorial charging them with fault. The Ministry of War, moreover, has flogged Commander Yang Wang twenty lashes.” He also said, “An Envoy of Thanksgiving from your country is sure to arrive here within ten days. You can wait here and go back with him.”
 
I said, “For me, going to my first mourning, one day as a traveler is like spending three autumns. Please arrange for my speedy return.” Li Hsiang nodded his head.
 
From Chekiang I had not met an interpreter until I arrived there and met that man.
 
 
24. 정기적인 使行은 아니지만 明朝내지 淸朝가 조선에 대하여 은혜를 베풀었을 때 이에 보답하기 위하여 수시로 파견한 조선의 임시사절이다. 일에 따라 謝恩進表使, 進賀謝 恩使 등 여러 이름을 붙여 수시로 보냈다. 사행의 구성은 正使, 副使, 書狀官, 堂上官 등 34인 이상이었다.
 
 
===2일===
 
初二日,陰,會同館副使李恕來謂臣等曰:“你四十三人,不保本國差來進責人,一日一人支給,正是陳老米一升而已,無饑”云云,臣步出館門,適遇(傳)【傳】榮,相話于玉河橋邊,臣問曰:“我所經處浙江有通州,北京亦有通州;徐州府有清河縣,廣平府亦有清河縣.一海內州縣有同名者,何耶?”榮曰:“名雖偶同,所管布政司有異,實無害也.”
 
 
흐렸습니다.
 
 
회동관부사(會同官副使) 이서(李恕)가 와서 신 등에게,
 
 
“당신들 43인은 본국에서 파견한 조공사절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 한 사람에게 묵은 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938 1승(升)]을 지급할 뿐이고 반찬은 없습니다” 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신은 걸어서 회동관 문을 나오다가 마침 부영(傅榮)을 만났습니다.
 
 
옥하교 가에서 서로 이야기하다가 신이 묻기를,
 
 
“내가 지나온 곳 가운데 절강에도 통주(通州)가 있고 북경에도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86%B5%EC%A3%BC(%E9%80%9A%E5%B7%9E) 통주]가 있으며, 서주부(徐州府)에도 청하현(淸河縣)이 있고 광평부(廣平府)에도 청하현이 있는데, 한 해내(海內)에서 이름이 같은 주현(州縣)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명칭은 비록 우연히 같지만 관할하는 포정사(布政司)가 다르니 실제로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원주 포정루<ref>[http://www.wonju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824 선화당·포정루, 원형 찾는다, 원주투데이, 2018.05.14]</ref> <ref>[http://m.blog.daum.net/inksarang/16879333 원주포정루]</ref>
 
* 성종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963 이주]의 통주시 (조) p.384
 
 
*기후
 
*인명
 
*의전
 
*외교
 
*행정
 
*지명
 
 
2nd Day. Cloudy.
 
 
Li Chu, the Assistant Commissioner of the Central Post Hotel, came and said to me, “Since you forty-three men are not tribute-bearers for your own country, the daily ration a man will be only one quart of old rice. There will be no salt or other foods.”
 
I walked out the gate of the house and happened to meet Fu Jung, and we talked at the foot of Jade River Bridge. I said, “Among the places that I have passed, there was a T’ung-chou in Chekiang, and Peking also has a T’ungchou. Hsü-chou Prefecture had a Ch’ing-ho County, and so did Kuang
 
p’ing Prefecture. How is it that among the departments and counties of the · country there are [different] places with the same name?”.
 
Fu Jung said, “Though it happens that their names are the same, the public offices by which they are governed are different, and really no harm is done.”
 
 
===3일===
 
初三日,陰,夕雷電雨霜,李翔來曰:“我實你朝鮮通事也,前一二日,兵部及內庭有事,故不入奏你等事,今日若又不奏,則明日必入奏之”臣答曰:“天下之窮人,莫如我也,父已死,母又老,弟幼弱,家貧變,治喪所需,皆關如也,我又漂流,未報存亡,母與弟豈知我得蒙聖天子鴻恩,生到大國乎?必并治我要,悲慟極天,請足下告于禮部,使我母久留于此.”翔曰:“你之生來事,你國安宰相處良已詳回還,”臣曰:“安宰相何以知之?”曰:“浙江鎮守差指揮楊暢,將你事緣陸路書夜馳報,於三月十二日來到,安公膽寫奏本而去,你家當於四五月之交,必知你不死於海,不足憂也,但你之情理甚切,誠可憐恤,我當告于兵部、禮部,”
 
 
흐렸으며 저녁에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습니다.
 
 
이상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실은 당신네 조선 통사입니다. 1-2일 전에 병부와 내정(內庭)25에서 일이 있었던 까닭에 당신들에 관한 일을 상주하지 못했는데, 만약 오늘도 상주하지 못하게 된다면 내일은 반드시 상주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천하의 곤궁한 자로서 나만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또한 늙으셨으며, 아우는 어리고 약한데 집은 가난하니, 초상을 치르는 데 필요한 아무것도 없는 형편입니다. 내가 또한 표류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리지 못했으니, 어머니와 아우는 어찌 내가 성천자(聖天子)의 큰 은혜를 입어 살아서 대국에 이른 것을 알겠습니까? 반드시 내 초상까지 아울러 치르며 슬픔이 하늘에 닿았을 것입니다. 청컨대 족하께서는 예부에 이 사실을 알려서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살아서 온 일은 당신 나라의 안처량 재상이 이미 자세히 알고 돌아갔습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4015_002 성종실록 215권, 성종 19년 4월 15일 무신 2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하책봉사 안처량이 돌아오다가 요동에 이르러 통사를 보내어 치계하다]</ref>
 
 
“안 재상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절강진수(浙江鎭守)가 지휘 양노(楊啓)를 보내어 당신의 일을 육로로 밤낮으로 달려 보고하게 하여 3월 12일에 도착하였으므로, 안공(安公)이 주본(奏本)을 베껴 가지고 갔습니다.
 
 
당신의 집에서는 4월 말 5월 초에 반드시 당신이 바다에서 죽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사정이 매우 절박하여 참으로 가여워 도와줄 만하니 내가 마땅히 병부와 예부에 보고하겠습니다.”
 
 
*기후
 
*시간
 
*인명
 
*지명
 
*관직
 
*행정
 
*심리(다급함)
 
*외교
 
*심리(동정)
 
 
3rd Day. Cloudy; thunder, lightning, rain, and hail in the evening.
 
 
Li Hsiang came and said, “I am an interpreter for your Korea. For the past one or two days, the Ministry of War and the Palace have had things to do, and the memorial of your case, therefore, was not sent in. If it is not presented today, it will surely be tomorrow."
 
I answered, “Of all the unfortunates in the world, none is so ill-fated as I. My father is dead, my mother is old, my younger brother is delicate, and the family is poor. Everything needed to observe mourning is wanting. I, moreover, have drifted away, and they have not been informed whether I am dead or alive. How are my mother and younger brother to know that I have received great kindness from His Majesty the Emperor and have reached China alive? They must be mourning for me also; they must have boundless grief. Please petition the Ministry of Rites not to keep me here a long time.”
 
Li Hsiang said, “Prime Minister An Ch’-ryang of your country has learned all about your arrival here alive and has turned back for home.”
 
I said, “How did Prime Minister An know about it?”
 
Li Hsiang said, “The Overseer of Chekiang sent Commander Yang Lu speeding night and day by the land route to report your case. He arrived here the 12th Day, Third Month. His Excellency An copied the memorial and left. Between the end of the Fourth and the beginning of the Fifth Month, your family will know that you did not die at sea.? It is not worth grieving over. But the strain on you must be severe; truly I can sympathize with you. I shall make known your anxiety to the Ministries of War and Rites.”
 
 
25. 宮禁 즉 궁정 안을 뜻한다.
 
 
===4일===
 
p. 430
 
初四日,晴,何旺引臣至其家饋誤,臣謝,旺日:“漂流遠來,情可矜憐,故饋之,不必謝也.”
 
 
맑았습니다.
 
 
하왕이 신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음식을 대접하므로 신이 감사를 표하니 하왕이 말하기를, “멀리서 표류해 와서 사정이 딱하기 때문에 대접하는 것이니,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사회
 
*심리(동정)
 
 
4th Day. Fair.
 
 
Ho Wang took me to his house and served me food. I thanked him and he said, “You have drifted here from far away; I can pity your condition, and that is why I have served you. There is no need to thank me.”
 
 
===5일===
 
初五日,陰,楊旺來謂臣曰:“奏本,初三日已下禮部”云云.
 
 
흐렸습니다.
 
 
양왕이 와서 신에게, “주본(奏本)은 초3일에 이미 예부로 내려갔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5th Day. Cloudy.
 
 
Yang Wang came and said to me, “The memorial was sent down to the Ministry of Rites on the 3rd Day.”
 
 
*기후
 
*인명
 
*행정
 
 
===6일===
 
初六日,晴,琉球國人陳善、蔡賽等,盛辦餅誤來饋臣及從者,臣感其恩,無以報之,即减粮五升以與之,揮手却之,時琉球使正議大夫程鹏等二十五人,以進貢來寓後館,善與賽盖其從者也,禮部遣辦事吏王敏喚楊旺,臣問其何事,敏曰:“你每進的抄出來了,因此來叫.”
 
 
맑았습니다.
 
 
유구국의 진선(陳善), 채새(蔡賽) 등이 떡과 음식을 풍성하게 준비해 와서 신과 종자들에게 대접하였습니다.
 
 
신은 그 은혜에 감격했으나 보답할 것이 없어 양식 5승을 덜어 그에게 주었더니 손을 내저으며 물리쳤습니다.
 
 
이때 유구국 사신인 정의대부(正議大夫) 정붕(程鵬) 등 25인이 공물을 바치는 일로 와서 후관(後館)에 머물러 있었는데, 진선과 채새는 그의 종자였습니다.
 
 
예부가 실무를 담당하는 서리 왕민(王敏)을 보내어 양왕을 불렀습니다.
 
 
신이 무슨 일인가 물으니 왕민이 말하기를,“당신들에 관하여 올린 주본(奏本)의 초본(抄本)이 나와 이 때문에 부른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풍습(음식)
 
*지명
 
*외교
 
*행정
 
 
6th Day. Fair.
 
 
Ryukyuans Ch'en Shan and Ts'ai Sai brought a feast of delicacies and served it to me and my staff. I was moved by their kindness but had nothing with which to repay them. I took, therefore, five quarts of rice from our rations and offered it to them, but they waved their hands and refused it.
 
At the time, Ryukyu had sent Ch'eng P’eng,: Doctor of Canonical Law, and twenty-four men to bring tribute. They were lodged in the rear house (houkuan), and Ch'en Shan and Ts'ai Sai were of that staff.
 
The Ministry of Rites sent Wang Min, a clerk, to summon Yang Wang. I asked what it was about, and Min said, “Your memorial has been returned; that is why I have come.”
 
 
===7일===
 
初七日,洒雨,禮部吏鄭春、李從周等,資兵部所移禮部咨來示臣,其文‘據浙江三司所報’云云,其末端云:“其崔溥案,仰浙江布政司差委官指揮僉事楊旺管送,及行沿途衛所,量撥官軍,防護赴京外,開坐具本,該本部官欽奉聖旨該部知道,欽此欽遵,抄出送司案,候間續奉本部运據浙江布政司批差指揮楊旺件送前項夷人前來,查得成化六年十一月內,該浙江鎮守等官奏朝鮮國遭風夷人金盃迴等七名,本部已經奏准,量給禦寒衣服及應付脚力口粮還國去,今該前因案呈到部,看得朝鮮遭風夷人崔溥等四十三名,雖係海洋哨獲夷人,已該浙江鎮守、巡按、三司等官,會同審驗,別無姦細情由,况各夷風波飄蕩,衣粮缺乏,揆之朝廷柔遠大體,相應優恤,合無行移禮部,量給替換衣服,本部應付官崔潭站馬虞給,餘人脚力口粮,通與車輛,裝載行李,及行該府差官一員伴送,沿途軍衛,量撥軍夫防護,至遼東聽鎮巡等官另差通事人員,运朝鮮地界,令其自行回還,緣係處置遭風外夷歸國,及奉欽依該部知道事理,未敢擅便,弘治元年四月初一日,太子太保本部尚書余等具題,次日奉聖旨是,欽此欽導,擬合通行,除外,合開啟前去,煩照本部奏奉欽依內事理,欽遵施行,須至咨者:”臣孝子將米粮換酒,以饋鄭春等,春謂臣曰:“我二人來討些人情面皮,或銅錢,或土布,或諸般產物,以去用耳,意不在一醉也,臣曰:“我當漂海,四體不保,僅能得生,豈有身外之物乎?你看吾行李,若有一物,便將去之,”徐觀其意,意在臣之所穿衣,臣令李楨减糧換錢十文以贈之,李從周不受,撒之臣前,與鄭春盛怒而去,夜,臣偶謂安義、李孝枝等曰:“當在宋時,爾濟州人漂至蘇州界,其船有麻子,如蓮仁大,蘇人得而種之,後年差小,與尋常麻子一般.今爾土有所謂麻子乎?”義曰:“此,古代事也,今則尋常麻子,亦且稀貴,故凡公暖收貢,皆納葛麗199布,無用於國,有害於民,若貢以隨土所產如物,則庶可便矣.”
 
 
부슬비가 내렸습니다.
 
 
예부의 서리 정춘(鄭春), 이종주(李從周) 등이 병부에서 예부로 보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글은 절강삼사(浙江三司)의 보고에 의하면 운운했는데 그 끝머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최부의 안(案)은 절강포정사(浙江布政司)가 파견한 위임관인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楊旺)을 시켜 호송케 하고, 연도의 위소(衛所)에도 공문을 보내어 적절히 관군(官軍)을 차출(差出)하여 경사(京師)로 호송토록 한 것 외에 낱낱이 열거하여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습니다. 본부관(本部官)이 삼가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의안(議案)의 초본(抄本)을 직방청리사(職方淸理司)에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다시 본부(本部)의 명을 받고 절강포정사의 비문(批文)에 의거 파견된 지휘 양왕이 전항(前項)의 이인(夷人)을 호송하여 왔습니다. 조사해보니 성화(成化) 6년(예종1년; 1470) 11월 중에 해당 절강진수(浙江鎭守) 등 관원이 아뢰고 송치해 온 조선국의 풍랑 만난 김배회(金益廻)<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0201007_003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 1월 7일 경진 3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한치의가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오다]</ref><ref>[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0633 ‘조선국’ 세 글자 써 보였더니, 차와 죽을 대접했다, ‘조선국’ 세 글자 써 보였더니, 차와 죽을 대접했다, 제주신보, 2019.06.24]</ref>32 등 7명을 본부에서 상주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 방한복을 적절히 지급해 주고, 각력(脚力)과 구량(口糧)을 제공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한 바 있었습니다. 지금 올라온 상기 의안(議案)이 본부에 도착하였는데, 살펴보니 조선의 풍랑 만난 최부 등 43명은 비록 해양에서 정찰 중 체포한 이인(夷人)이기는 하지만, 이미 해당 절강진수, 순안(巡按)과 삼사(三司) 등의 관원이 회동하여 조사해 본 결과, 특별히 간세(姦細)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각 이인(夷人)이 풍파에 밀려 떠다니느라 의복과 식량이 결핍되어 있는 만큼 조정에서 먼 나라 사람을 회유(懷柔)하는 대의(大義)로 헤아려 보더라도 응당 후하게 구휼해야 하니, 마땅히 예부(禮部)에 이문(移文)을 보내어 갈아입을 옷을 적절히 지급해 주도록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35
 
 
본부에서는 응당 관인(官人) 최부에게 참마(站馬)와 [https://www.wordrow.kr/%EC%9D%98%EB%AF%B8/%EB%8A%A0%EA%B8%89/ 늠급(廩給)], 나머지 사람에게 각력(脚力)과 구량(口__)을 지급해 주며 전 구간에 걸쳐 수레를 주어 행장을 싣게 하고, 해당 부(府)37에 이첩하여 관원 한 사람을 차출하여 호송토록 하며 연도(沿途)의 군위(軍衛)에서는 군부(軍夫)를 적절히 차출해서 호송토록 하되, 요동(遼東)에 이르러서는<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saNoYixNwkkJ:contents.nahf.or.kr:8080/directory/downloadItemFile.do%3FfileName%3Ddn_058_0050.pdf%26levelId%3Ddn_058%26type%3Dpdf+&cd=14&hl=ko&ct=clnk&gl=kr 조선 전기 요동에서 사행(使行)호송군(護送軍)의 역할과국제무역의 경계]</ref> 진수(鎭守)(명대 무관직, 진수 장교에는 5등급이 있다. (조)p.185), 순안(巡按) 등 관원의 지시에 따라 별도로 통사(通事)인원을 차출하여 조선 국경까지 보내주어 그들 스스로 돌아가도록 해야하겠지만, 풍랑 만난 이인(夷人)을 귀국시키는 일이고 또 삼가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성지(聖旨)의 사리(事理)를 받들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홍치(弘治) 원년 4월 1일 태자태보(太子太保) 본부상서(本部尙書) 여(余) 등이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고, 다음날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옳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외에, 자문(咨文)을 보내오니 번거롭겠지만 본부에서 상주하여 받은 성지(聖旨)의 사리(事理)에 따라 삼가 그대로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자문을 보냄.”
 
 
신은 효자를 시켜 쌀을 술로 바꾸어서 정춘 등에게 주도록 하자 정춘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체면을 무릅쓰고 와서 선물을 달라는 것은 동전이든 토포(土布)는 다른 여러 가지 산물(産物)이든 가져다 쓰려고 하는 것이지, 술에 한번 취해보자는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표류되어 사지도 보전치 못하다가 겨우 살게 되었으니 어찌 몸뚱이 외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의 행장을 살펴보고 만약 한 가지 물건이라도 있으면 가져가시오.” 천천히 그들의 의중을 살펴보니 신이 입은 '''옷'''에 생각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신은 이정을 시켜서 양식을 덜어 돈 10문(文)을 바꾸어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종주는 받지 않고서 신의 앞에 내던져 버리고는 정춘과 함께 몹시 성을 내면서 가 버렸습니다.
 
 
밤에 신이 우연히 안의· 이효지 등에게 말하기를, “송(宋) 나라 때 너희 제주 사람이 표류되어 소주(蘇州)에 이르렀는데, 그 배에 크기가 연밥만한 삼씨가 있었다. 소주 사람이 이를 얻어서 심었더니 몇 년 후에는 점점 작아져서 보통 삼씨와 같아졌다. 41 지금 너희 지방에 이른바 삼씨가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의가 말하기를, 그것은 옛날 일입니다. 지금은 보통 삼씨도 희귀한 까닭에 무릇 공천(公賤)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541 공포(貢布)]를 거둘 적엔 모두 갈추포(葛덟布)를 바치게 되니, 나라에는 소용이 없고 백성에게는 해만 있습니다. 만약 공물을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따라서 해산물 같은 것으로 정한다면 편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행정
 
*경제(화폐)
 
*겅제(물물교환)
 
*경제(화폐교환)
 
*심리(불쾌, 분노)
 
*지명
 
*식물
 
*역사
 
*기물
 
*경제(세금)
 
*경세제민, 이용후생
 
 
7th Day. Showers.
 
 
Cheng Ch’un and Li Ts’ung-chou, sub-officials [li] of the Ministry of Rites, came with a statement that the Ministry of War had sent to the Ministry of Rites and showed me the text:
 
“According to a report of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9 At the end it said:
 
“In the case of that Ch’oe Pu, we instructed the Chekiang Administration Commissioner to send Assistant Commander Yang Wang on special commission to take charge of the escort and instructed the garrisons and transfer stations on the way to allot officials and troops to guard [the party] on the journey outside the capital, and to hold hearings and prepare reports.
 
"The officials of this Ministry received His Majesty's instructions: 'Let the proper ministry take note. Respect this.' Between the time that we respectfully copied that out and the time that we sent the authorities' decision, this Ministry continuously sent on whatever it received.
 
“According to the endorsement of the Chekiang Administration Commissioner, he has sent Commander Yang Wang to escort forward the aforementioned barbarian. Research has shown that in the Eleventh Month, Ch’eng-hua 6, the said Chekiang Grand Defender and other officials memorialized, [asking] to send forward Kim Maeng-hoe* and six other barbarians of Korea who had encountered winds. The Ministry memorialized and received permission to issue clothing against the cold and appropriate porters and rations and send them back to their country. Now, in the matter stated above, which has been sent to the Ministry, it is our view that though Ch'oe Pu and the forty-two other barbarians from Korea who encountered winds fall into the class of barbarians arrested by maritime patrols, the said Chekiang Grand Defender, Regional Inspector, and Three Authorities have met and judged that they are not spies, especially since the winds and waves have battered them all and they lacked clothes and food. Considering the general policy of the Court of bringing peace to distant areas, it is proper that they be treated with consideration. It is fitting that the matter not be transferred to the Ministry of Rites and that we allot a change of clothing to them. This Ministry will provide post horses and official rations to the official Ch’oe Pu and porters and rations to the other men. They will go with carriages, into which they will load their baggage, passing through the proper prefectures. We shall send one official to escort them to the Korean border and let them return home themselves. Since the case is one of managing the return to their country of foreign barbarians who have encountered winds, and since we have received the notation, ‘Let the proper ministry take note,' we have not ventured to arrange matters on our own initiative alone.
 
“1st Day, Fourth Month, Hung-chih 1. Prepared by Yü, Senior Guardian of the Heir-Apparent and Minister [of War), and others.
 
“On the following day an edict was received by this Ministry, saying 'Respect this; carry it out.' In addition to setting the correct procedure, it is proper that we should refer the matter to your Ministry. Hence this communication.”
 
I order Hyo-ja to barter some rations of rice for wine and offered it to Cheng Ch'un and the other. Cheng Ch’un said to me, “The two of us hoped to receive some gratuity, some cash or cloth or any kind of goods that we can take away to use. We do not intend to get drunk.”
 
I said, “When I was drifting across the sea, my own limbs were not safe. I was barely able to survive; how can I have anything but what is on me? Look at my baggage. If there is a single thing there, feel free to take it away.” When I considered their motives carefully, [I found] that they wanted the clothes I was wearing. I ordered Yi Chong to reduce the rations, exchange some for ten cash, and give them that. Li Ts’ung would not take it; he scattered it in front of me and left with Cheng Ch’un, very angry.
 
At night I happened to be talking with An Ŭi and Yi Hyo-ji: “In the Sung period a man from your Cheju drifted to the shores of Su-chou. In his boat were hemp seeds as big as lotus pods. A man of Su-chou got them and planted them, but in later years they grew small, like ordinary hemp seeds.10 Do you have such hemp seeds in your land now?”
 
An Ủi said, “That is a thing of the past. Now even ordinary hemp seeds are rare. That is why, when both nobles and commoners assemble tribute, they give coarse, arrowroot cloth, which is useless to the country and harmful to the people. If the tribute were governed by what is produced in the land, such as things from the sea, everyone would be benefitted.”
 
 
32. 표류했던 金죠廻가 공술한 내용은 압축되어 있으나 대체로 최부의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저희들이 지난해에 제주에서 貢物을 압송하여 서울에 도착해서 일을 마치고 本州로 돌아가다가, 해상에서 大風을 만나서 표류하게 되었는데, 무릇 13일 만에 중국의 浙江 지방에 도착하였습니다. 두 척의 배가 바닷가에 정박하여 있는 것을 보고, 저희들이 朝鮮國'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배 위에 있는 사람에게 보였더니, 그 사람들이 우리 배에 와서 차와 죽을 먹여 주고, 이어 저희들을 데리고 한 小官人이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火炮를 쏜 뒤에서야 만나주었으며, 5, 6인을 시켜 大官人이 있는 곳으로 압송하였습니다. 또한 전과 마찬가지로 한 銀帶를 띤 관인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정말 高麗 사람이다'고 하고, 다음날 사람을 시켜 한 늙은 閥人이 있는 곳으 로 압송하였는데, 저희들의 根期을 묻고서, 이어서 음식을 먹여 주고, 또 쌀 10斗를 준 다음에, 사람을 시켜 한 大官人이 있는 곳에 압송하였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莊 毛·靑綿布·帖裏· ··鞋를 지급하고, 8일 동안 머물러 두며, 하루에 세 끼니를 먹여 주었습니다. 한 관인을 보내 北京으로 압송하여 5일 동안 머물러 두었다가, 聖節使에게 붙여 돌려보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성종실록》 권, 2년 1월 庚辰;辛巳;甲午.
 
33.《朝鮮成宗實錄》2년 1월 庚辰 條와 辛巳條의 기사에 1470년 8월 濟州人 김배회 등이 貢物을 바치러 서울에 왔다가 濟州로 되돌아가던 중 羅州 일대에서 풍랑을 만나 13일 만에 浙江에 漂着하여 北京으로 압송된 뒤 聖節使 일행과 함께 돌아온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에도 兵部에서 禮部에 협조를 구하는 咨文을 보내었다고 한다.
 
34-戰國時代에 移書는 各國 사이, 각국의 官員 사이, 國內의 서로 예속 관계가 없는 官署사이에 주고받는 일종의 平行문서였다. 漢代에 移書는 동급 기관끼리 주고받는 공문서가 되었고, 三國時代 이후 移文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35- 원문의 合無'는 공문서의 결론 부분에서 함부로 專斷하지 않고 완곡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36. 驛站에 비치한 馬匹.
 
37. 4월 21일 左軍都督府의 付에 의하면 해당 부는 左軍都督府를 가리킨다. 左軍都督府에는 京師의 일부 衛와 지방의 浙江都司, 遼東都司, 山東都司가 포함된다. 《諸司 | 다掌》 권5, (兵部).
 
38. 太子三師의 하나로 太子太師, 太子太傅와 함께 모두 종1품이다. 太子三師는 明初에 東宮大臣으로 朝臣이 겸임하여 太子를 輔導하고 敎諭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그 후에는 점차 虛街이 되어 勳戚 내지 文武大臣의 加官 혹은 官으로 되어 太子를 輔導하는 職掌과는 사실상 관계가 없게 되었다.
 
39. 4월21일 左軍都督府의 付에 의하면 余는 兵部尙書 余子俊을 가리킨다.
 
40. 永樂 연간에 출현한 상행문서. 처음에는 京官이 황제에게 긴급한 公事를 보고하는 데 사용되었다. 奏本에 비하여 크기는 조금 작지만 글자는 크게 썼다. 嘉靖 연간에 京城 內外에서 公事는 題本을 사용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京城내외를 막론하고 官署의 명의로 황제에게 올리는 데에는 점차 題本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41. 宋嘉祐年間(1056-1063)에 蘇州 崑山縣에 제주인 30여 명이 탄 배가 표착하였는데 배 안에 있던 연밥만한 삼씨가 있어 후에 이를 심었더니 첫 해에는 그 크기가 연밥만 했으나 다음해부터 점차 작아져 몇 년 후에는 中國의 보통 삼씨와 같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夢溪筆談》 권24, 〈雜誌)1 참조.
 
 
===8일===
 
初八日,陰,國子監生員楊汝霖、王演、陳道等,戴黑頭巾,穿青團領,來曰:“你國學徒亦服此乎?臣曰:“幼學雖在窮村僻巷者,皆服之,”又曰:“你國亦有專經否?”臣曰:“我 國科學, 取精通經書者, 故學徒精研四 書五經,其專治一經者,不得齒儒者之列.”
 
 
흐렸습니다.
 
 
국자감생(國子監生) 양여림(楊汝霖)·왕연(王演)·진도(陳道) 등이 흑두건(黑頭巾)을 쓰고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B2%AD%EA%B8%88%EB%8B%A8%EB%A0%B9(%E9%9D%91%E8%A1%BF%E5%9C%98%E9%A0%98) 청금3단령(靑__團領)]<ref>[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C%B2%AD%EA%B8%88%EB%B3%B5 청금복]</ref>을 입고 와서 말하기를,
 
 
“당신 나라의 학도(學徒)들도 이 옷을 입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학동(學童)들은 비록 궁벽한 마을에 있다 해도 모두 이 옷을 입습니다.”
 
 
“당신 나라에서도 경서(經書)만을 전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과거는 경서에 정통한 사람을 뽑기 때문에 학도들이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열심히 연구합니다. 한 가지 경서만 전공한 사람은 유자(儒者)의 반열에 낄 수 없습니다.”
 
 
*기후
 
*인명
 
*풍습(의복)
 
*제도(학교)
 
*제도(시험)
 
*유학
 
*사회
 
 
8th Day. Cloudy.
 
 
Yang Ju-lin, Wang Yen, and Ch'en Tao, students of the National University, wearing black hats and blue collars round their throats, came and said, “Do the students in your country also wear these?”
 
I said, “All young students, even though they are in remote villages or secluded lanes, wear them.”
 
They said, “In your country is there also “specialization in Classics’?”.
 
I said, “In the examinations in my country, those versed in the Classics and Books are passed. The students, therefore, study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thoroughly. Those who have mastered only one Classic do not attain the rank of full-fledged Confucian scholars.”
 
 
===9일===
 
初九日,在玉河館,是日晴,有張元·張凱兄弟家住館前對門,共來墨話.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장원(張元), 장개(張凱) 형제의 집이 옥하관 앞에 문을 마주해 있었는데, 함께 왔기에 맞아들여서 환담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건축물
 
 
9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There were two brothers, Chang Yüan and Chang K’ai, whose house was opposite the guest house. They both came and chatted.
 
 
===10일===
 
p.432
 
初十日,在玉河館,是日晴,李恕謂臣曰:“你等還國車馬、關文來,你不久在此.”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이서가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이 귀국하는 데 쓰일 거마(車馬)와 관문(關文)이 왔으니, 당신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0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Li Shu said to me, “The carriages, horses, and passports for your return home have come. You will not be here long.”
 
 
*기후
 
*건축물
 
*인명
 
*기물
 
*의전
 
 
===11일===
 
十一日,在王河館,是日陰,李翔來謂臣曰:“你國謝恩使,何至今不來乎?”臣曰:“道路遼遠,他行止遲速,我不能料念,惟僕之到此,不係國家事,特蒙大國深恩,生還本國,祇自仰天祝手而已,但逗逼,遷延日月,不得全吾哭枢盧墓之心,所以痛哭耳.”翔曰:“我已詳說你言于禮部,禮部已入奏,近當回還,勿憂也”又有姓名王能者,善曉解我國言語,謂臣曰:“我祖父世居遼東東八贴之地,來往義州,我亦是高麗人也,我年十三,父 沒,隨母而居,退計三十一年間,我與母俱為兀良哈所掠,轉往韃靼之國,竟得生返,仍居于此,若有你國使來,未嘗不來相看也.”即以所將錢換酒,慰臣及從者,又語臣曰:“聞你從者無有亡失,然乎?” 臣曰:“然”能曰:“得非幸乎?盖人口聚而為日多,則雖平居無事,間有患死者,况遭被惡風,過盡大海,一無亡失,千古所稀,想必你於平昔積善所致也.”臣曰:“此是皇恩覆冒,使萬物各得其所,故我等亦幸得保此生也.”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이상이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의 사은사(謝恩使)가 어찌하여 지금까지 오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길이 아주 멀어 그들의 거동이 더디고 빠름을 내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국가의 일이 아닌데 특별히 대국의 깊은 은혜를 입어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하늘을 우러러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유랑하는 처지에 발이 묶인 몸이 시일만 지체시키면서, 나의 아버지 영구(靈甁) 앞에 곡을 하고 분묘(墳墓) 옆에 여막(廬幕) 살려고 하는 마음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되니 이 때문에 통곡할 뿐입니다.”
 
 
“내가 이미 당신의 말을 예부에 상세히 보고했더니 예부에서 벌써 상주하였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반드시 돌아가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 왕능(王能)이란 사람은 우리말을 잘 하였는데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는 요동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6842 동팔참(東八站)]<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F%99%ED%8C%94%EC%B0%B8(%E6%9D%B1%E5%85%AB%E7%AB%99)]</ref><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8024_003 성종실록 219권, 성종 19년 8월 24일 을묘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성절사 채수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와 문견 사건을 올리다]</ref><ref>[http://m.blog.daum.net/manjumongol/334?np_nil_b=2 조선과 명의 경계 역시 텐진일대였다]</ref>45 지방에 대대로 거주하면서 의주(義州)에 왕래하였으며 나 또한 고려 사람입니다. 내 나이 13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따라 살았는데, 되돌아보니 대략 31년간입니다. 나와 어머니는 함께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8%AC%EB%9F%89%ED%95%A9(%E5%85%80%E8%89%AF%E5%93%88) 올량합(元良哈)]에게 약탈되어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B%AC%EB%8B%AC(%E9%81%94%E9%81%94) 달단(達旦)]의 나라로 갔다가 마침내 살아 돌아와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 나라의 사신이 오면 와서 서로 만나 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가진 돈으로 술을 사서 신과 종자들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또 신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당신의 종자(從者) 가운데 죽거나 실종된 사람이 없다고 하니 그렇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사람이 많고 시일이 많이 흐르게 되면 비록 평상시에 별 일이 없을 때에도 혹 병환으로 죽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모진 바람을 만나 큰 바다를 지나왔는데도 한 사람도 죽지 않았으니 천고에 드문 일입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당신이 평소에 '''적선'''을 한 덕택일 것입니다.”
 
 
“이것은 황제의 은혜가 하늘처럼 덮어 만물로 하여금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한 까닭에, 우리들 또한 다행히 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후
 
*건축물
 
*인명
 
*외교
 
*모화
 
*경천
 
*심리(안타까움, 슬픔)
 
*행정
 
*역사
 
*지명
 
*사회
 
*풍습(음식)
 
*심리(다행)
 
*심리(감사)
 
*유학, 도교? 불교?<--적선<ref>[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http://www.chungnam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9495]</ref>
 
 
11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cloudy.
 
Li Hsiang came and said to me, “Why has the Envoy of Thanksgiving from your country not come by now?”
 
I said, “It is a long way; I cannot tell when he is moving and stopping or whether he is going fast or slow. All I think of is that my own coming here has nothing to do with affairs of state and that if only I receive the profound kindness of China and am returned home alive, I shall look up to Heaven and join my hands in prayer. But wasting away, loitering about, delaying for days and months, I shall not satisfy my desire to weep at the coffin and keep watch at the grave. It is that over which I grieve.”
 
Li Hsiang said, “I have explained in detail to the Ministry of Rites what you say, and the Ministry has put in its memorial. You will soon be sent back; do not grieve.”
 
There was a man named Wang Neng who understood our language well. He said to me, “For generations my ancestors lived in Tung-pa-hu, Liao-tung, and they went to and fro between there and Ŭiju. I, too, am a man of Koryð. When I was thirteen, my father died, and I went with my mother and for thirtyone years lived in Liao. I and my mother were captured by Urianghai11 and moved to Tatary. In the end we got back alive and have been living here. Whenever envoys have come from your country, I have always met them.” He bought wine with cash that he had and comforted me and my staff. He said to me, “I have heard that none of your staff died; is that so?”
 
I said, “Yes.”
 
Wang Neng said, “Wasn't that fortunate! Even ordinarily, among a large group of people over a period of time occasionally someone dies; how much more likely is that when violent winds are met and a great ocean crossed. Not to have a single death is rare in history. I imagine it must have been brought about by your amassing of virtue in ordinary life.”
 
I said, “It is that the mantle of Imperial graciousness causes all things to take their place. We, too, therefore, survived.”
 
 
45. 義州에서 遼東都司가 있는 遼陽까지의 도로에 설치한 8개의 驛館으로 조선의 사신이 留宿하던 곳이었다. 八站은 鎭江城, 湯站堡, 鳳凰城, 鎭東堡, 鎭夷堡, 連山關, 岳水站, 狼子山站이었다.
 
46. 吾都里, 狄哈 등과 함께 女眞 部族의 일파이다. 조선에서는 오랑캐라 불렀다. 永樂元年(1403) 올량합의 於虛出(阿哈出) 등의 來朝를 계기로 建州衛가 설치되었는데, 建州衛는 이후 女眞을 招撫하는 明의 전초기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후에 올량합은 淸朝 皇室의 조상이 되는 오도리와 함께 建州女眞의 중심세력이 된다.
 
 
===12일===
 
十二日,在玉河館,是日朝雨午陰,有姓名李海,亦解我國語音,來語臣曰:“我從使臣往還你國已六度矣,徐宰相居正,尚亡悲乎?”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아침에는 비가 내렸고 낮에는 흐렸습니다.
 
 
이해(李海)란 사람도 우리말을 알았는데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내가 사신을 따라서 당신 나라에 다녀온 것이 벌써 여섯 차례입니다. 서거정(徐居正) 재상께서는 잘 계시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건축물
 
*인명
 
*외교
 
 
12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it rained in the morning and was cloudy at noon.
 
 
There was one Li Hai who also understood our language. He came and said to me, “I have gone with envoys to your country and back six times. Is Prime Minister Sỏ Ko-jong still well ?”
 
 
===13일===
 
十三日,在王河館,是日陰,張夔者,張元之季也,聰慧勝兄,謂臣曰:“寂旅館,何以消過日月?”以醋醬來遺,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장기(張愛)란 사람은 장원(張元)의 막내 동생으로서 총명함이 형보다 나았는데, 신에게 “쓸쓸하고 적막한 여관에서 무엇으로 소일합니까?”라 하면서 초(醋)와 장(醬)을 보내왔습니다.
 
 
*기후
 
*인명
 
*인물
 
*풍습(음식)
 
 
13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cloudy.
 
 
One Chang K’uei was the youngest brother of Chang Yüan and was more perceptive than his eldest brother. He said to me, “How do you while away the days and months in this desolate house?” He brought vinegar and soy sauce and presented them to me.
 
 
===14일===
 
十四日,在玉河館,是日晴,有姓名孫錦者謂臣曰:“若此夏日之長,難以經過,我甚憐之,”即魄臣以米一斗、菜一盤、鹽·醬·醋各一器,臣令程保往謝之,錦曰:“你等在陳之嘆,專是會同館官員不取票之過也,皇帝豈知若此乎?”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손금(孫錦)이란 사람이 신에게, “이같이 긴긴 여름날은 지내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매우 딱하게 생각합니다”라 하고는 즉시 쌀 1되, 채소 1쟁반, 소금, 장, 초 각기 1그릇씩을 보내 왔습니다.
 
 
신은 정보를 보내 사례했더니 손금이 말하기를,
 
 
“당신들이 '''진(陳)''' 땅에서 내뱉는 탄식 47은 오로지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A%8C%EB%8F%99%EA%B4%80(%E6%9C%83%E5%90%8C%E9%A4%A8) 회동관(會同館)] 관원이 품신을 올리지 않은 잘못 때문입니다.
 
 
황제께서 어찌 이 같은 사실을 아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심리(동정)
 
*풍습(음식)
 
*건축물
 
*행정
 
*관직
 
 
 
14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A man named Sun Chin said to me, “Long summer days like these are hard to pass; I am very sorry for you.” He presented to me one peck of rice, a plate of vegetables, and one container each of salt, soy sauce, and vinegar. I ordered Chong Po to go and thank him, and Sun Chin said, “The fact that you are short of rations is the fault of the officials of this Central Post Hotel. How can the Emperor know that matters are like this ?”
 
 
47.《論語》〈衛靈公)의 “在陳絶糧”에서 유래하는데 온갖 苦難 속에 처해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춘추시대의 陳은 현재 河南省 陳州를 수도로 하던 小國이었다. 衛國을 떠난 孔子는 黃河를 건너 동남쪽으로 향하여 山東의 小國인 曹나라로 가려 하였으나 曹나라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西南으로 방향을 돌려 河南의 宋으로 간 뒤 다시 그 西南의 陳國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陳은 吳의 침략을 당하고 있던 때였던 만큼, 공자 일행은 이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끼니를 잇기도 힘든 형편이었다.
 
 
===15일===
 
十五日,在王河館,是日晴,有官吏自禮部來問臣職姓名及帶來人姓名, 寫以歸,莫知何為.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예부에서 온 어떤 관리가 신의 관직, 성명과 데리고 온 사람의 성명을 물어서 적어 가지고 돌아갔는데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기후
 
*건축물
 
*행정
 
 
15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An official came from the Ministry of Rites and asked my position and name and the names of the men who had come with me. He wrote them down and went back; I do not know why.
 
 
===16일===
 
十六日,在王河館,是日晴,有錦衣衛後所班劍司校尉孫雄者來,臣曰:“寓空館無所事,淹留已過旬望,不知何日還國?”雄曰:“禮部 奏聞討賞,然後可回去.”臣曰:“我等來此,不因國家事,九死之後,只求生還耳,今則殘喘已壯,焦腸已沃,傷足已完,瘦骨已實,都是皇上懷撫遠人之恩,重且大也,我無一絲毫之補於大國,得蒙此重大之恩,固已措躬之無地矣,又何有賞賜之為哉?我所願,早還家山,巢老母葬死父,以終吾孝,此人子之切情,禮部豈能知道?”雄曰:“禮部近有事,故致今次事稽緩,我當詳告汝情于尚書,後又來看你.”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금의위(錦衣衛) 후소(後所)의 반검사(班例司) 교위(校尉)인 손웅(孫雄)이란 사람이 왔기에 신이 말하기를, “빈 여관에 머물며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벌써 보름을 지냈습니다. 언제나 귀국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손웅이 말하기를,“예부에서 황제에게 상주하여 상 내려 주실 것을 청한 후에야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곳에 온 것은 나랏일 때문이 아니고, 거의 죽을 뻔한 뒤인지라 살아서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지금은 끊어질 듯하던 숨도 돌아왔고 말라버렸던 창자도 기름기가 돌고 다친 발도 다 나았고 쇠약했던 몰골도 이미 실해졌으니 모두 황상께서 먼 나라 사람을 품안에 넣어 어루만져주시는 은혜가 무겁고도 크기 때문입니다. 나는 대국에 조그마한 보탬도 없으면서 이런 무겁고도 큰 은혜를 입게 되어 진실로 몸 둘 곳도 없는데 또 어찌 상을 내리신다는 것입니까? 나의 소원은 얼른 고향에 돌아가서 늙은 어머니를 뵙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지내 나의 효도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 자식된 자의 간절한 심정을 예부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예부에서 근자에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의 일이 지체되었습니다. 내가 마땅히 당신의 사정을 상서(尙書)에게 상세히 알린 후에 다시 와서 당신을 뵙겠습니다.”
 
 
*기후
 
*관직
 
*인명
 
*행정
 
*모화
 
*유학
 
*심리(간절, 근심, 슬픔)
 
 
16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One Sun Hsiung, Captain of the Dress Swords Post of the Rear Office of the Imperial Bodyguard [Chin-i wei hou-so pan-chien ssu chiao-wei], came. I said, “We have been lodged in this empty guest house with nothing to do, waiting and hoping, for more than ten days already. We do not know when we shall return home.”
 
Sun Hsiung said, “After the Ministry of Rites has memorialized asking for awards, you may go back.”
 
I said, “Our coming here had nothing to do with affairs of state. After being on the verge of death, we sought only to return home alive. Now, our dying breath has grown strong, our dried guts have softened, our hurt feet have healed, and our weak bones have hardened. That is all because the graciousness of the Emperor in caring for strangers is generous and great. I, without having served China in the slightest, have received that generous and great kindness. I am already embarrassed; why, then, should there be a giving of awards ? What I want is to go home quickly, see my old mother, bury my dead father, and carry out my filial duties. How can the Ministry of Rites know what urgency this son feels?”
 
Sun Hsiung said, “Recently there has been some trouble in the Ministry of Rites, causing them to order your case to be delayed. I shall set all the circumstances concerning you 'before the Minister and later come see you.”
 
 
===17일===
 
十七日,在玉河館,是日洒雨,琉球人陳善、蔡賽、王忠等來告回國,遂以矮扇二把、踢席二葉贈臣,日:“物雖至薄,情實有在”臣曰:“我所遇
 
 
p.434
 
知於足下者,在情不在物也.”陳善曰:“我國王會在二十年前,差我父送貴回還,大為人人見愛,常想恩情,我又得與大人相善,得非幸乎?”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부슬비가 내렸습니다.
 
 
유구국의 진선(陳善)·채새(蔡賽)·왕중(王忠) 등이 와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됨을 고하였습니다.
 
 
마침내 작은 부채 두 자루와 방석 두 닢을 신에게 선사하면서 말하기를, “물건은 매우 하찮은 것이지만 저희들의 정이 담겨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족하와 알고 지낸 이유도 정에 있었던 것이지 물건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선이 말하기를, “우리 국왕께서 일찍이 20년 전에 나의 아버지를 귀국에 보내어 다녀오게 하신 적이 있는데<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wKq8Z4YSEzwJ:contents.nahf.or.kr:8080/directory/downloadItemFile.do%3FfileName%3Ddn_051_0080.pdf%26levelId%3Ddn_051%26type%3Dpdf+&cd=5&hl=ko&ct=clnk&gl=kr 『해동제국기』 의 「유구국지도」 와 오키나와현립박물관 소장 「유구국도」]</ref><ref>[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601100048 ‘아우의 나라’ 자처한 流球國, 월간조선, 2016.01]</ref> 귀국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아 항상 은정(恩情)을 생각하셨습니다.
 
 
나 또한 대인과 친해졌으니 다행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건축물
 
*지명
 
*외교
 
*기물
 
*심리(정)
 
*심리(아쉬움)
 
 
17th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there were showers.
 
 
The Ryukyuans Ch'en Shan, Ts'ai Sai, and Wang Chung came and announced that they were returning home. Then they presented to me two small fans and two floor mats and said, “Though they are poor things, our feelings truly go with them.”
 
I said, “Our friendship is based on feelings, not things.”
 
Ch'en Shan said, “Twenty years ago, the King of my country sent my father to your country and back. He was extended great love by numbers of people, and he always remembered their kindness. Is it not fortunate that I, now, have found so much in common with you?”
 
 
===18일===
 
十八日,禮部,是日陰,辦事吏王瑛,持牌子來叫臣,其牌書仰喚朝鮮漂海夷官崔溥,火速赴司,毋違云云,臣從王瑛,過南薰鋪,至文德坊,城之正陽門內,建大明門,門之左為文德坊,右為武功坊,正陽三層,大明二層也,行至禮部,主客司郎中李魁、主事金福·王雲鳳等承尚書周洪謨、左侍郎倪、右侍郎張之命,謂臣曰:“明早引入朝,給賞衣服,可易吉服,事畢便打發回去,”臣對曰:“我漂海時,不勝風浪,盡撒行李,僅守此喪服來,無他吉服,且我當要配吉,恐不合於禮,且以喪服入朝,義又不可,請大人__的禮制,更示何如?”李郎中將臣言歷議,良久,使吏鄭春謂臣曰:“明早受賞時,無展禮節次,可令你從吏代受,明後日謝恩時,你親拜 皇帝,不可不參”云云,臣還王河館,夕,孫錦又以栗二、醬瓜一器來醜之,有一人驅羣羊,過玉河館門而去,其一羊有四角,二羊毛長垂地.
 
 
예부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사무를 주관하는 서리 왕환(王煥)이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8C%A8%EC%9E%90(%E7%89%8C%E5%AD%97) 패자(牌子)]를 가지고 와서 신을 불렀습니다.
 
 
그 패자 속의 글은, 바다를 표류해 온 조선의 관원 최부를 불러 급히 관사(官司)로 가게 하라. 어김이 없어야 할 것이다. 운운하였습니다.
 
 
신은 왕환을 따라 남훈포(南薰鋪)를 지나서 문덕방(文德坊)에 이르렀습니다. 성의 정양문(正陽門)49 안에 대명문(大明門)을 세웠는데, 대명문의 왼쪽은 문덕방(文德坊), 오른쪽은 무공방(武功坊)이었고, 정양문은 3층, 대명문은 2층이었습니다.
 
 
가서 예부에 이르니, 주객사낭중(主客司郞中) 이괴(李魁), 주사(主事) 김복(金福), 왕운봉(王雲鳳) 등이 상서(尙書), 예(倪) 좌시랑(左侍郞), 장(張) 우시랑(右侍郞)54의 명을 받들어 신에게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함께 입조하면 의복을 상으로 줄 것이니, 길복(吉服)으로 바꾸어 입도록 하오. 일을 마치면 즉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나는 표류할 때 풍랑을 견디지 못하여 행장을 모두 버리고 이 상복(喪服)만을 겨우 입고 왔으므로 다른 길복은 없습니다. 또 내가 친상을 당하여 길복을 입는 것이 예(禮)에 맞지 않을 듯하고, 상복 차림으로 입조하는 것은 의(義)에 맞지 않으니 청컨대 대인께서는 예제(禮制)를 참작하여 지시를 바꾸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李) 낭중은 신의 말을 여러 사람과 의논하다 한참을 지난 후에 서리 정춘(鄭春)을 시켜 신에게, “내일 아침 상 받을 때는 예를 차리는 절차가 없으니 따라온 아전으로 하여금 대신 상을 받도록 하고, 모레 황제의 은혜를 사례할 때는 당신이 몸소 황제에게 배례(拜禮) 해야하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는 등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신은 옥하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에 손금(孫錦)이 또 좁쌀 2되와 장아찌 1그릇을 보내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 마리의 양떼를 몰고 옥하관 문을 지나갔는데, 그중 한 마리는 뿔이 네 개나 달려 있고 두 마리는 털이 길어 땅바닥에 드리웠습니다.
 
 
*기후
 
*인명
 
*관직
 
*행정(패자)
 
*건축물
 
*풍습(상)
 
*풍습(의복)
 
*유학
 
*모화
 
*풍습(음식)
 
*동물
 
 
 
18th Day. Attending the Ministry of Rites. This day was cloudy.
 
 
Foreman Wang Huan, carrying a placard, came and summoned me. On the placard was written, “We summon Ch’oe Pu, the barbarian official of Korea who drifted across the sea, to come to this office in great haste.”
 
I followed Wang Huan past the Nan-hsün Stop to Wen-te Ward. Inside the Cheng-yang Gate of the wall stood the Ta-ming Gate. To the left of the gate was Wen-te Ward; to the right Wu-kung Ward. Cheng-yang had three stories, Ta-ming two. We arrived at the Ministry of Rites.
 
Li K’uei, Senior Secretary of the Bureau of Receptions, and Chin Fu and Wang Yün-feng, Administrative Secretaries, receiving commands from Minister Chou Hung-mo, Left Vice Minister Ni, and Right Vice Minister Chang,12 said to me, “At dawn you will be taken to Court to receive awards of clothing. You should change your clothing to festive dress. When that is over we shall send you off to go back.”
 
I replied, “When I was drifting at sea, I was overwhelmed by the wind and waves and let all my baggage go. I came here barely having saved these mourning clothes; I have no festive dress. At any rate, I am afraid that to be festive when I should be in mourning would not measure up to what is proper. To enter Court in mourning clothes, moreover, could not loyally be done. I beg of your Excellencies to weigh the ceremony; would it be possible to change your instructions ?”
 
Senior Secretary Li talked about what I had said in detail and for some time and had the sub-official Cheng Ch’un say to me, “When you receive the awards tomorrow morning, there will not be an elaborate performance of ritual. You may order a subordinate officer to receive them for you. When you acknowledge the Imperial graciousness the day after tomorrow, you yourself will bow to the Emperor. You must take part in that.” I returned to Jade River House.
 
In the evening, Sun Chin came again and presented to me two pecks of grain and one container of melons in soy sauce. A man drove a flock of sheep past the gate of Jade River House. One of the sheep had four horns, and two of them had hair so long it hung to the ground.
 
 
48. 통지서.
 
49. 明淸時代 北京 內城의 正門이다. 俗稱으로 前門이라고도 한다.
 
50. 正陽門을 들어가면 바로 大明門이 있는데 동으로 禮部, 서로는 前軍都督府의 사이에 위치한다. 淸代에는 大淸門이라 불렸지만 후에 철거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編, 《明淸北京城圖》(地圖出版社, 1986) 참조.
 
51. 主客司는 禮部 소속 4淸吏司의 하나로서 洪武29년(1396)에 원래 禮部 소속의 主客部를 고쳐 설치하였다. 郞中 1인(정5품), 員外郞 1인(종5품), 主事 1인(정6품)을 두었다. 土司와 변방지구의 각 민족 및 외국의 조공 왕래, 접대, 賞賜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52. 이 당시의 예부상서는 周洪謨이다. 《明史》권184, 列傳72 周洪謨,.
 
53. 倪左侍郞은 兒岳을 가리키는 듯하다. 天順8년(1464)에 進士가 된 岳은 成化22년(1486) 禮部右侍郞이 되어 弘治初에 左侍郞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明史》권 183, 列傳71, 岳 참조. 그런데 《明孝宗實錄》弘治元年(1488) 12월 癸卯 條에는 “禮部右侍郞 倪岳을 左侍郞으로 승진시켰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어 혼란스럽다. 하 지만 다음 각주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成化23년부터 弘治2년까지 禮部右侍郞은 張悅 이었다는 점에서 위 《實錄》에서 언급한 내용의 실상에 대해서는 고증이 필요하다. 아마 成化22년 右侍郞이 되었던 岳이 23년 張悅이 右侍郞이 되면서 실질적으로 左侍郞 역할을 하다가 12월에 들어와 정식으로 임명받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54. 張悅을 가리킨다. 《明憲宗實錄》成化23년(1487) 11월 辛酉 條에 工部右侍郞이었던 張悅을 禮部右侍郞으로 임명한 사실이 보인다. 한편 《明孝宗實錄》 弘治2년 (1489) 7월 丁丑 條에 “禮部右侍郞 張悅을 吏部右侍郞으로 보직을 바꾸었다”고 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張은 成化23년부터 弘治2년까지 右侍郞을 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일===
 
十九日,受賞賜,是日陰,禮部吏鄭春、王敏、王瑛等來叫臣之手下程保等四十餘人以歸,臣獨留館,程保等入關庭,受賞賜而來,臣所受,素粉絲衣一套、內紅段子圓領一件、黑綠段子裙子一件、声段子搭禮一件、華一雙、禮一對、綠棉布二匹,程保以下四十二人,胖換各一件、綿袴各一件、革翁鞋各一雙,李翔討錢,與市傍寫書求錢者寫狀,報鴻爐寺云:“朝鮮國人崔溥等為賞賜事,為因漂海到於浙江,解送到京,今蒙欽買衣服、胖德、華笑等件,合赴鴻爐寺報名,四月二十日早謝恩云云,翔謂程保曰:“告你官,明早以吉服來謝 皇帝之恩,”有徐序班者,忘其名,來點程保等具冠帶,教以肅拜節次之儀,徐雖號為通事,不善解我國之語,臣令程保同把門者一人,往尋李翔之家,告臣意曰:“親要固所自盡也,若服華盛之衣,謂之非孝,我亦人子,其可輕釋喪服,處身於非孝之名乎?”翔曰:“今日我與禮部尚書大人已議之,當是時,親喪輕天恩重,拜謝之禮,不可廢也,夜四更時分,東長安外,都要賞賜衣服來,莫恨,夕,韃靼大寧衛男女十五人,自其國逃來,寓于西會同館,
 
 
상을 받았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예부의 서리 정춘(鄭春), 왕민(王敏), 왕환(王煥) 등이 와서 신의 손아랫사람 정보 등 40여 인을 데려갔으므로 신은 혼자 객관(客館)에 남았습니다.
 
 
정보 등이 대궐에 들어가 상을 받아 왔습니다.
 
 
신이 받은 것은 소저사의(素__絲衣, 흰 모시옷)56 1벌, 내홍단자[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0640원령](內紅段子圓領, 붉은 비단으로 속을 댄 원령)57 1건(件), 흑록단자습자(黑綠段子智子, 흑록색 비단으로 만든 습자)58 1건, 청단자[https://koup15.tistory.com/11 답호](靑段子裕樓, 청색 비단으로 만든 답호)59 1건, 신발 1쌍, 전말(旣樓, 털로 짠 버선) 1대(對), 녹면포(綠綿布) __필이고, 정보 이하 42인이 받은 것은 반오(胖模)이 각 1건, 면고(綿榜)2 각 1건, 옹혜(鞋) 각 1쌍이었습니다.
 
 
이상(李__)이 돈을 달라고 하여 시장 가에서 돈 받고 글을 써 주는 사람에게 주어 홍려시(__鴻寺)에 올리는 서장(書狀)을 쓰도록 하였는데,
 
 
“조선국 사람 최부 등 : 상을 내려주신 데 대하여 바다에 표류되어 절강에 도착했다가 경사로 호송되어 왔는데 지금 황제께서 내려주시는 상으로 의복, 반오, 신발 등을 받았으니 마땅히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9%8D%EB%A0%A4%EC%8B%9C(%E9%B4%BB%E8%87%9A%E5%AF%BA) 홍려시]에 나아가서 이름을 등록하고, 4월 20일 아침에 황제의 은혜에 사례하겠습니다” 라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상이 정보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상관(上官)에게 알려서 내일 아침에 길복 차림으로 와서 황제의 은혜에 사례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을 잊었지만 서(徐)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84%9C%EB%B0%98(%E5%BA%8F%E7%8F%AD) 서반(序班)]이란 사람이 와서 정보 등이 갖춘 관대(冠帶)를 점검하고 숙배(肅拜) 절차의 의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서 서반은 비록 통사라고는 했지만 우리말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정보를 시켜 문지기 1명과 같이 이상의 집을 찾아가서 신의 뜻을 알리기를,
 
 
“친상은 진실로 자기의 진실을 다해야 하는 것인데 만약 화려한 옷을 입는다면 효가 아닙니다. 나 또한 자식된 자로서 어찌 경솔히 상복을 벗어 불효의 오명을 뒤집어 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말하기를,
 
 
“오늘 내가 예부상서 대감과 함께 이미 의논했는데, 지금 이 때는 친상이 가볍고 천은(天恩)이 무거우니 배사(拜謝)하는 예절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밤 4경쯤에 동장안문(東長安門)65 밖에서 상으로 하사받은 의복을 입도록 해야 하며, 어김이 없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녁에 달단(達旦)의 대영위(大寧衛) 남녀 15인이 그들의 본국에서 도망해 와서 서회동관(西會同館)에 묵었습니다.
 
 
*기후
 
*인명
 
*풍습(상, 의복)
 
*행정
 
*경제
 
*유학
 
*외교
 
*건축물
 
 
19th Day. Receiving Awards. This day was cloudy.
 
 
Sub-officials of the Ministry of Rites, Cheng Ch’un, Wang Min, and Wang Huan, came and summoned Chong Po and the other forty-odd men in my charge and went back. I stayed alone at the house. Chong Po and the others entered the Palace, received the awards, and came back. The things I had received were one undyed grass cloth gown, one inner red satin round-collar, one black and green satin lined gown, one blue satin money-bag, one pair of boots, one pair of felt socks, and two rolls of green cotton cloth. For each of the forty-two men from Chong Po down, there were one padded jacket, one pair of padded trousers, and one pair of Wu boots.
 
Li Hsiang demanded money and, with a man at the side of a market who wrote letters for money, wrote an account to report to the Court of State Ceremonial. It said, “In the matter of awards, the Koreans Ch’oe Pu and others, having drifted across the sea to Chekiang and been sent to the capital, have now respectfully received awards of gowns, padded jackets, boots, and other things. It is fitting that their names be reported to the Court of State Ceremonial. On the morning of the 20th Day, Fourth Month, they will acknowledge the Imperial graciousness.”
 
Li Hsiang said to Chòng Po, “Inform your official that tomorrow morning he is to come in festive dress and give thanks for the Emperor's graciousness.”
 
There was a ceremonies official, Hsü, whose given name I have forgotten, who came and inspected Chong Po and the others, putting on their hats and sashes and teaching them the order of prostrations. Although Hsü was called an interpreter, he did not understand our language well.
 
I ordered Chong Po to go with one gate-keeper to seek Li Hsiang's house and tell him how I felt: “Mourning for a parent is something that one must observe. To wear beautiful clothes is to be unfilial. I am human; how can I take off my mourning clothes and put myself in the position of being unfilial ?”
 
Li Hsiang said, “I discussed that today with His Excellency the Minister of Rites. For the time being, mourning for a parent will be unimportant and Heaven's graciousness important. In the fourth watch of the night, all the necessary award clothing will come to the outside of East Ch’ang-an Gate. Do not cause delay.”
 
In the evening, fifteen men and women from Ta-ning Garrison, Tatary,13 came in flight from their country and lodged at the West Central Post Hotel.
 
 
56. 융絲는 비단으로 만든 衣服을 말한다. 素統絲衣는 흰색 비단으로 만든 옷.
 
57. 속을 붉은 색 비단으로 넣어 만든 둥근 깃의 公服.
 
58. 검은 녹색 비단으로 만든 주름잡힌 옷.
 
59. 푸른 색 비단으로 만든 안에 입는 옷.
 
60. 털버선,
 
61. 明代 九邊의 將士 및 錦衣衛의 군인이 입는 솜으로 만든 상의, 길이는 무릎까지 내려오고 소매는 좁은데, 안에는 솜으로 채워 만들었다.
 
62. 면바지.
 
63. 솜을 넣은 방한용 장화.
 
64. 鴻廬寺의 속관으로 종9품이다. 司儀署와 司賓署에 설치되었는데, 조정 의례의 두班, 齊班, 糾儀와 傳贊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65. 지금 天安門 동남방에 있던 長安左門을 가리키나, 현재 철거되어 남아 있지 않다.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編, 《明淸北京城圖》 地圖出版社, 1986) 참조.
 
 
===20일===
 
二十日,謝恩于大內,是日陰,丑時,李翔自其家來,謂臣曰:“你今具冠服,入朝謝恩,不可緩也.”臣指頭上要冠,曰:“當此喪,衣夫錦戴紗帽,於心安乎?”曰:“你在殯側,則爾父為重,今在于此,知有皇帝而已,皇帝有恩,若不往謝,大失人臣之禮,故我中國禮制,宰相遇喪,皇帝遣 人致,則雖在初要,必具吉服,融入關拜謝,然後反喪服,盖以皇恩
 
 
不可不謝,謝之則必於關內,關內不可以衰麻入,此嫂溺援手之權也,你今從吉,事勢然也臣曰:“昨日受賞之時,我不親受,今謝恩之時,亦令從吏以下往拜若何?”翔曰:“受之之時,無拜禮節次,雖代受可也,今則禮部鴻爐寺,俱議你謝恩事,已入奏云:「朝鮮夷官崔溥等云云,你為爾等之班首,其可安然退坐乎?”臣不得已率程保等,從李翔步至長安門,猶不忍穿吉服,李翔親脫臣喪冠,加以紗帽,曰:“若國家有事,則有起復之制,汝今自此門吉服而入,行謝禮畢,復出此門時,還服喪衣,只在頃刻間耳,不可執一無權也,”時皇城外門已啟鑰,常參朝官,魚貫而入,臣迫於事勢,服吉服入關,過一層門、二層二大門而入,則又有二層大門,乃午門也,軍威嚴整,
 
 
p.436
 
燈燭輝煌,李翔坐臣於中庭,有項,擊鼓於午門之左,撞鐘於午門之右__,三虹門洞開,門各有二大象守之,其形甚奇偉,昧爽,朝官以次列班於門前,李翔引臣齒於朝班,又引程保等別作一隊,序於國子監生員之後,五拜三叩頭後,出自端門,又出承天之門,門在大明門之內,又東出長安左門,復穿喪服,過長安街,還于玉河館,李孝枝、許尚理、權山等,皆帶賞賜衣榜,來調于臣曰:“前此框義人從李縣監暹,亦漂到于此,皇帝無賞賜之恩,今我等從行次來,特蒙此不意之賞,展拜於皇帝之前,得非幸默?”臣曰:“夫豈
 
偶然哉?賞者,賞有功也,汝等有何功於大國乎?漂死復甦,生還本國,皇帝之恩,亦已極矣,况又以汝暖陋,得入形聞,受此賞賜!汝等其知之乎?帝之撫我賞我,都是我 王畏天事大之德,非汝等所自致.汝其勿忘我 王之德,勿輕,帝賜,勿壞,勿失,勿賣,以為他人之有,使汝子孫世守,永為寶藏也.”
 
 
대궐에서 황제의 은혜를 사례했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축시(丑時)에 이상이 자기 집으로부터 바로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지금 관복을 갖추고 입조하여 황은에 사례해야 하니 지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머리 위의 상관(喪冠)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친상을 당하여 비단옷을 입고 사모(紗帽)를 쓰는 것이 마음이 편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빈소 곁에 있다면 당신의 아버지가 중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있으니 황제가 계심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황제의 은혜가 있는데 만약 가서 사례하지 않는다면 인신(人臣)의 예절을 크게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국의 예제'''는 재상이 친상을 당할 적에 황제께서 사람을 보내어 부의(博儀)를 보내시면, 비록 초상 중에 있더라도 반드시 길복을 갖추고 달려가 대궐에 들어가 사례하고 난 후에 상복을 도로 입습니다. 황제의 은혜는 사례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사례한다면 반드시 대궐 안에서 해야 하고, 대궐 안은 상복 차림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을 잡아 꺼내주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6877 권도(權道)]입니다.
 
 
당신이 지금 길복을 갖춰야 함은 상황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상을 받을 때 내가 친히 받지 않았으니 지금 사은(謝恩)할 때도 따라온 아전 이하로 하여금 가서 배례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상을 받을 때는 배례하는 절차가 없으니 비록 대신 받아도 되지만, 지금은 예부와 홍려시가 함께 당신의 사은할 일을 의논한 뒤 상주하여 조선의 관원 최부 등 운운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들의 우두머리로서 어찌 태평스럽게 물러나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은 마지못해 정보 등을 거느리고 이상을 따라 걸어서 장안문까지 이르렀으나 그래도 길복을 차마 입지 못하였습니다. 이상이 몸소 신의 상관(喪冠)을 벗기고 사모를 씌우며 말하기를,
 
 
“국가에 일이 있으면 기복(起復)하는 제도도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이 문에서부터 길복을 입고 들어가 사은하는 예를 마치고 다시 이 문을 나올 때 다시 상복을 입게 되면 그 시간은 잠깐 사이일 뿐이니 한 가지에만 집착하여 권도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황성(皇城)의 바깥문이 열려, 상참(常參)하는 조관(朝官)들이 죽 늘어서서 들어갔습니다.
 
 
신은 사세에 몰려 길복을 입고 대궐에 들어갔습니다.
 
 
1층 문과 2층 두 대문을 지나서 들어가니 또 2층 대문 이 있었는데 바로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8%A4%EB%AC%B8(%E5%8D%88%E9%96%80) 오문(午門)]<ref>[https://younghwan12.tistory.com/1639]</ref>이었습니다.
 
 
군대의 위용은 엄정하였고 등불은 휘황하였습니다.
 
 
이상이 신을 중정(中庭)에 앉혔습니다.
 
 
조금 있으니 오문의 왼쪽에서 북을 치고 오른쪽에서 종을 치자 홍문(肛門) 셋이 활짝 열렸습니다.
 
 
문마다 두 마리의 큰 코끼리가 지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기이하였습니다.
 
 
먼동이 틀 때 조관들이 차례대로 문 앞에 늘어섰습니다.
 
 
이상이 신을 인도하여 조관의 반열에 나란히 서게 하고 또 정보 등을 인도하여 별도로 1대(隊)를 만들어 국자감생(國子監生)의 뒤에 서게 하였습니다.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난 뒤에 단문(端門)으로 나오고, 또 승천문(承天門)으로 나오니 승천문은 대명문(大明門)의 안쪽에 있었습니다.
 
 
다시 동쪽으로 장안좌문(長安左門)으로 나와서 다시 상복을 입고는 장안가(長安街)를 지나서 옥하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효지, 허상리, 권산 등은 모두 상으로 하사받은 옷을 가지고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전에 정의(佐義) 사람이 현감(縣監) 이섬을 따라나섰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는 황제께서 상을 내려주시는 은혜가 없었는데, 지금 우리들은 행차를 따라왔다가 특별히 이런 뜻밖의 상을 받고 황제의 앞에서 절을 하게 되었으니 행운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어찌 우연이겠는가? 상이란 것은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너희들은 대국에 무슨 공로가 있는가? 표류되어서 죽을 뻔하다가 다시 소생하여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황제의 은혜는 이미 지극하다. 하물며 또 너희들의 비천한 신분으로서 황궁에 들어가 이런 상을 받게 되었음에랴! 너희들은 알고 있는가? 황제께서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상을 내리시는 것은 모두가 우리 임금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여 사대를 하신5 덕택이지 너희들이 스스로 가져온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우리 임금의 덕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황제의 상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를 손상시키거나 잃어버리지 말고, 팔아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며, 너희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지키도록 하여 영원히 간직하는 보물로 삼아라” 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시간
 
*의복
 
*유학
 
*심리(불편)
 
*관직
 
*모화
 
*행정
 
*건축물
 
*제도
 
*풍경(경치? )
 
*역사
 
*심리(기쁨, 자랑, 뿌듯)
 
*경천
 
*충의
 
*심리(가르침)
 
 
20th Day. Acknowledging Graciousness in the Palace. This day was cloudy.
 
Between 1 and 3 a.m. Li Hsiang came from his house and said to me, “You will now put on the hat and clothes, go into Court, and acknowledge graciousness. You must not be slow.”
 
I pointed to the mourning hat on my head and said, “in my mourning, if I wear brocade and a light silk gauze hat, will I be easy in my heart?”
 
Li Hsiang said, “If you were beside the coffin, your father would be important. Now you are here; know only that here is the Emperor. When the Emperor is gracious it is a great breach of ministerial courtesy if one does not go and thank him. That is why by our Chinese code of etiquette, if a prime minister goes into mourning and the Emperor sends a man with a funeral donation, though (the minister] is in deepest mourning, he must put on festive dress and hurry to the Palace to bow his thanks. Only after that may he change back to mourning dress.
 
 
“Imperial graciousness must be acknowledged. To acknowledge it, one must be inside the Palace. To get inside the Palace, one may not be in sackcloth. It is a matter of expediency, like giving a hand to a drowning sister-in-law.14 If you fall in with the festive mood now, you will be bowing to circumstances.”
 
I said, “When the awards were received yesterday, I did not receive them personally. How would it be if now, at the time of the acknowledgement of graciousness, I again ordered my staff and those below them to go and bow?"
 
Li Hsiang said, “When you received the things, there was no elaborate series of bows, and it was all right to delegate someone. But now, the Ministry of Rites and the Court of State Ceremonial have discussed the matter of your acknowledging graciousness and have already put in a memorial that says, 'The Korean barbarian official Ch'oe Pu and others . . .'You are at the head of the list. Can you afford to be absent?”.
 
I could do nothing but lead Chòng Po and the others behind Li Hsiang and walk to Ch’ang-an Gate. Still, I could not bear to put on festive dress. Li Hsiang himself took off my mourning hat and put on a light silk gauze hat. Not only that, he said, “When state business comes up, there is a way to rise from mourning and return to duty. You will now go in through this gate in festive dress; when you have finished the rite of acknowledgement and left through this gate again, you will change back to mourning dress. It will be only for that short while. There can be no complete regulation without exceptions.”
 
By that time, the outer gates of the Imperial City had already been unlocked, and the ministers of daily attendance were entering in order. Compelled by circumstances, I put on festive dress and entered the Palace. We passed through a one-story gate and two large two-story gates. Then there was another big two-story gate, which was Wu Gate. Troops were drawn up smartly, lights burned brightly. Li Hsiang seated me in the central courtyard. Soon, drums were beaten at the left end of Wu Gate and bells struck at the right end. Three arched gates opened, and at each gate two big elephants stood on guard, their forms spectacular.
 
Just before daylight, the officials of the Court lined up by ranks in front of the gate. Li Hsiang led me to my place in the Court ranks and then led Chong Po and the others to form a separate group. They followed after the students of the National University.
 
After five genuflections with three kowtows each, we went through Tuan Gate and passed through the Gate of Ch'eng-t'ien, which was inside Ta-ming Gate. We went to the east, passing out through Ch’ang-an Gate again, and I put back on my mourning clothes. We passed Ch’ang-an Street and returned to Jade River House.
 
Yi 'lyo-ji, Hồ Sang-ni, and Kwon San came in the clothing that had been awarded them and visited me. They said, “Before this, men from Sõnŭi under Junior Director Yi Sõm also drifted here, but the Emperor did not graciously make awards. Next we come, and we alone receive these unexpected awards and bow before the Emperor. What good fortune we have had!”
 
I said, “Can it possibly have been by chance? An award is awarded for merit. What merit have you in China? Drifting to death you were saved and will be returned alive to your country; the Emperor has already been extremely gracious, the more so since you worthless bodies have been let inside the Vermilion Gate to receive those awards. Do you understand that? The Emperor's taking care of us and giving us awards are due to the virtue of our King, who fears Heaven and serves China, and not to you. Do not forget our King's virtue, do not treat Imperial gifts lightly. Neither damage them nor lose them; do not sell them to others. Let your descendants keep them as treasures forever.”
 
 
===21일===
 
二十一日,在玉河館,是日陰,有百戶張述祖來言曰:“我是左軍都督府總兵老爹所差送你東者也,兵部及會同館關文,皆已出了,二三日間,你們都起程了.”袖出差付以示之,其文曰:“左軍都督府:〈為海洋聲息事》,該經歷司__呈, ‘            本, _____________________
 
 
呈,奉本部送於 內府,抄出鎮守浙江司設監太監張慶題前事,轉行該府,差官一員伴送,沿途軍衛,量撥軍夫防護,至遼東聽鎮巡等官另差通事人員,送至朝鮮地界,令其自行回還,緣係處置遭風外夷歸國,及奉欽依《該部知道》事理,未敢擅便,弘治元年四月初一日,太子太保本部尚書余子俊等具題,次日奉聖旨《是》,欽此欽遵,擬合通行,除外,仰行該府經歷司呈府,照依本部奏奉欽依內事,欲遵差委的當官一員伴送,仍行鎭守遼東太監韋朗、總兵官綠謙并沿途軍衛衙門,一體欽遵施行.」連送到司,合用手前去,左軍都督府經歷司呈府,依文施行,手本案呈到府,擬合通行,除備由連人移咨外,合約仰本職即將夷人崔溥等,用心防護,伴送前去遼東鎮守總兵官綠議處交割,另差通事人員伴去人,母致延不便,須至__付者.”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백호(百戶) 장술조(張述祖)가 와서 말하기를,
 
 
“나는 좌군도독부(左軍都督府)의 총병(總兵) 영감의 부름을 받아 당신을 요동으로 호송할 사람입니다. 병부 및 회동관의 관문(關文)이 모두 나왔으니 2-3일 사이에 당신들 모두 길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소매 속에서 차출의 차부(__付)를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좌군도독부 : 〈해양 상황에 관한 건 경력사(經歷司)에서 올린 정문(呈文)에 병부(兵部) 직방청리사(職方淸吏司)의 수본(手本)에 의하면 '본부(本部)의 명을 받들어 본부의 제본(題本)을 함께 발송하고, 본 직방청리사가 올려 보낸 정문(呈文)을 본부의 명을 받아 내부(內府)로 발송하고, 진수절강사설감태감(鎭守浙江司設監太監) 장경(張慶)의 상기 안건에 대한 제본(題本)의 초본(抄本)을 작성하여, 해당 도독부에 이첩(移牒)하여 관원 한사람을 차출하여 호송토록 하고, 연도(沿途)의 군위(軍衛)에서는 군부(軍夫)를 적절히 차출하여 호위토록 하되, 요동(遼東)에 이르러 진수(鎭守),순안(巡按) 등 관원의 지시를 받아 통사(通事) 인원을 따로 차출하여 조선과의 경계 지점까지 보내주어 그들 스스로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데, 풍랑 만난 외이(外夷)를 귀국시키는 일이고 또 삼가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성지(聖旨)의 사리(事理)를 받들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홍치(弘治) 원년 4월 1일 태자태보본부상서(太子太保本部尙書) 여자준(余子俊) 등이 제본을 갖추어 올렸고, 다음날 성지를 받았는데 옳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 외에 해당 도독부의 경력사는 그 도독부에 정문(呈文)을 올려 본부(本部)에서 상주하여 받은 성지의 사리(事理)에 비추어 삼가 적절한 관원 1명을 파견하여 호송하도록 하고, 이어 진수요동태감(鎭守遼東太監)위낭(朗)과 총병관(總兵官) 구겸(縱謙) 및 연도의 군위(軍衛) 아문(衙門)에게 이첩하여 그대로 준수하여 시행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으로, 함께 발송한 문서가 본 경력사에 도달하여 수본(手本)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좌군도독부 경력사에서 본 도독부에 정문을 올려 문서 내용에 의거하여 시행하라는 수본(手本)과 안정(案呈)이 본 도독부에 도달되었다.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할 것이다. 사유서를 갖춘 관련 인원을 칼 한 자루 활 한 장을 딸려 자문(咨文)과 함께 보내는 한편, 차부(付)를 주어 본직(本職)으로 하여금 바로 이인(夷人) 최부 등을 성심껏 호송하여 요동진수(遼東鎭守)와 총병관 구겸(綠)에게 데리고 가 인계하고, 따로 통사 인원을 차출하여 가는 사람들과 동반시켜 소홀히 지연되어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차부(付)를 보냄.”
 
 
*기후
 
*인명
 
*건축물
 
*행정
 
 
21st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cloudy.
 
 
Centurion Chang Shu-tsu came and said, “I am commissioned by the chiefs [tsung-ping lao-tieh] of the General Headquarters of the Left Army15 to escort you to Liao-tung. The documents of the Ministry of War and the Central Post Hotel have already been issued; you will set out in two or three days.” He took the commission from his sleeve and showed it to me. The text said,
 
“The General Headquarters of the Left Army. A matter of maritime intelligence.
 
“The report of the Registry [Ching-li ssu] has been submitted, and permission has been granted. Identity cards of the Bureau of Maps of the Ministry of War have been received by the Ministry and sent successively on. The memorial of the said Ministry and the report of the said Registry have been taken by the Ministry and sent to the Headquarters [Nei-fu]; and copies of the memorial of Chang Ch’ing, Grand Defending Overseer for Chekiang, on the previous matter have been circulated.
 
“The Headquarters has commissioned one official to escort [the Koreans] by way of the military garrisons, adding and subtracting troops for protection. When they reach Liao-tung, the patrol and defense officials will be responsible for sending individually interpreters to escort them as far as the Korean border and letting them return home themselves.
 
“Because this concerns the management of the return to their country of foreign barbarians who have encountered winds, and because we have received and respectfully complied with (the Imperial order], 'Let the proper ministry act according to the principles and facts involved,' we have not presumed to act without authority.
 
“1st Day, Fourth Month, Hung-chih 1.
 
“Memorial drawn up by Yü Tzu-chün, Senior Guardian of the Heir Apparent and Minister, and others.
 
"'The next day:
 
“We have received His Majesty's rescript: 'Let it be so. Respect this.' Besides making all general arrangements, we have sent to the Registry of the Headquarters a report for the Headquarters. This Ministry has memorialized and received [the instructions], ‘Respectfully comply with the principles and facts of the matter. Respect this.' Accordingly, we have sent one appropriate official, commissioned to accompany (the party] as escort. Wei Lang, Grand Defending Overseer for Liao-tung, and Kou Ch’ien,16 Regional Commander, will go with the party by way of the military garrisons. Let all public offices respect this. The successive posts should carry out these orders thoroughly.
 
"It is fitting that identity cards should be used for the advances forward. When the Registry of the General Headquarters of the Left Army reports that the staff has complied with this text, the identity cards will be issued. When the report of the case reaches the General Headquarters, they will make all arrangements. Besides making preparations for sending on the men and transferring despatches, they will draw up tallies.
 
“The basic task is to protect Ch’oe Pu and the other barbarians well and to escort them forward. Kou Ch’ien, Grand Defending Regional Commander for Liao-tung, will take care of handing them over to separately commissioned interpreters to be escorted away. Let the men not be lax or awkward. Let this be the necessary authorization.”
 
 
===22일===
 
二十二日,在玉河館,是日晴,臣自是月初五日,得疾首之證,十七日向愈,至是日,卒得心痛,胃腸相反,手足不仁,冷氣遍身,喘息危在喉咽間,程保、金重、孫孝子、高伊福等,之無效,帶率人等,罔知攸措,李(預)[植]"、莫金在傍哭泣,有一人不知姓名,頗知醫病,見臣危殆,以大針針臣十指端,黑血进湧,其人曰:“殆哉哉.”金重、程保奔告于禮部主客司,會同館之報又至,禮部即差(大)(太醫院士朱晏,來救臣病,臣脉曰:“此證本緣七情所傷,重之以感寒,因得此疾,用心調理,”程保問曰:“治以何藥?”曰:“用香火大氣湯治之.”晏疾走太醫院,賣藥來,乃加減七氣湯也,手自調煎以飲臣,晏告去,夜二更,臣區所飲之藥,
 
 
??經歷司案呈,准兵部職方清吏司手本,「奉本部連送該本部題,該本司案??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신은 이 달 초5일부터 머리 아픈 증세가 생겨 17일에는 조금 나았는데 이날에 와서 갑자기 가슴이 아파 가슴과 배가 서로 뒤틀리고 손발이 마비되며 찬 기운이 몸에 퍼지더니 가쁜 숨이 겨우 목구멍에 걸려 있었습니다.
 
 
정보, 김중, 손효자, 고이복(高伊福)82 등이 '''축원을 올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이정과 막금은 곁에서 통곡하였습니다.
 
 
성명을 모르는 한 사람이 자못 병 치료할 줄을 알았는데, 신의 위태함을 보고서 큰 침으로 신의 열 손가락 끝을 찌르니 검은 피가 마구 솟구쳤습니다.
 
 
그 사람은 “위태롭구나! 위태롭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김중과 정보가 달려가서 예부의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A3%BC%EA%B0%9D%EC%82%AC(%E4%B8%BB%E5%AE%A2%E5%8F%B8) 주객사(主客司)]에 사실을 알렸습니다.
 
 
회동관의 보고도 이르자 예부는 즉시 태의원사(太醫院士) 주민(朱旻)을 보내어 신의 병을 치료케 하였습니다.
 
 
주민은 신의 맥박을 짚어 보고 말하기를,
 
 
“이 증세는 본디 칠정(七情)이 손상된 데다 감기가 겹쳐 생긴 것이니 조심해서 몸조리를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보는, “무슨 약으로 치료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향화대기탕(香火大氣湯)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주민은 급히 태의원(太醫院)으로 달려가서 약을 가지고 왔는데 바로 [http://old.koreaa2z.com/hb/weblib.cgi?recordno=1763&imgcnt=0&imgfile=; 가감칠기탕(加減七氣湯)]이었습니다.
 
 
손수 약을 달여서 신에게 마시게 하고 주민은 돌아갔습니다.
 
 
밤 2경에 신은 마셨던 약을 토해 버렸습니다.
 
 
*기후
 
*인명
 
*건축물
 
*병환
 
*심리(불안,염려,슬픔)
 
*치료
 
*탕약
 
*행정
 
*시간
 
 
22nd Day. At Jade River House. This day was fair.
 
 
From the 5th Day of this Month, I had had a headache. On the 17th Day it had improved, but this day I suddenly got a pain in the heart. My chest and diaphragm were both stiff, my hands and feet were numb, and there were chills throughout my body. My breath was short in my throat. Chòng Po, Kim Chung, Son Hyo-ja, and Ko I-hok prayed for me without effect. The men we led were at a loss what to do. Yi Chong and Makkům wept at my side. There was one man- I do not know his name - who knew a little about treating sicknesses and saw that I was in danger. He punctured my ten finger tips with a big needle, and black blood spurted forth. The man said, “Very dangerous, very dangerous!”
 
Kim Chung and Chong Po hastened to inform the Bureau of Receptions of the Ministry of Rites; a report from the Central Post Hotel also reached the Ministry of Rites. They sent Chu Min, a Doctor of the Imperial Academy of Medicine, to come and treat my sickness. Chu Min felt my pulse and said, “This sickness is primarily because of injury to the seven affections and secondly because you have caught cold. That is why you have this sickness; you must take good care of it.”
 
Chong Po said, “What medicine shall we use to treat it?”
 
Chu Min said, “Treat it with fragrant fire vitality tonic [hsiang-huo-tach’i-tang].” He hurried to the Imperial Academy of Medicine and came back with a drug. It was seven spirits regulating tonic [chia-chien-ch’i-ch’i-tang]. He mixed it and simmered it with his own hands, made me drink it, and took his leave. In the second watch of the night, I vomited the medicine I had drunk. 16For Kou Ch'ien see CKJM 1525; FSJW 98: 43v. The latter source misprints his surname "Hou."
 
 
82. 高伊福의 伊는 以의 잘못으로 앞에서 나온 곁군 高以福이다.
 
 
===23일===
 
二十三日,在玉河館,天陰而雷,話朝,朱曼又來點臣脉,曰:“昨日看得三遲二敗之脉,今日脉氣有回生之理,專要調治,”又敵人參養胃湯以飲之,臣p.438
 
服藥以後,體漸平和,向夕,李恕、張述祖借來,謂臣曰:“明早你輩還國,今你病不好,可於二十六日起程,何如?”臣曰:“我奔初要,漂寄他國,情理甚切,一日之過,實同三秋,昨者病,今日小愈,車上队在,可以去矣,請行.”述祖曰:“然則我請順天府遞運所,討車輛聽馬來.”我 大明太祖高皇帝定都于南京, 南京卽金陵, 六朝帝王所都之地.太宗文皇帝遷都于北平府,為北京,然南京之治,亦自若也,南京畿內應天府等十八府,有所屬州縣,北京畿內有順天府等十一府,亦有所屬州縣.兩京畿州縣,直隸六部,又分天下為十三布政司,曰:“山西、山東、河南、陝西、浙江、江西、湖廣、四川、福建、廣東、廣西、雲南、貴州,”以統諸府州縣.又錯置都司、衛所以防禦之,府一百四十九,州二百十八,縣一千一百有五,又有宣慰、招討、宣撫、安撫等司.京城即元之大都城也,永樂間,增廣修築,城門有九,其南正陽,正陽之右為宣武,左為崇文,其東東直、朝陽,其西西直、阜成,其北安定、德勝.城之中又有皇城, 皇城之中有西苑、太液池、瓊華島、萬歲山、社稷壇、太廟,皇城之長安左門南,宗人府、吏部、戶部、禮部以次而南,宗人府之後,兵部、工部、鴻爐寺、欽天監、大醫院亦以次而南,長安右門南,五軍都督府中·左·右·前亦以次而南,後府在中府之後,後府之南,行人司、大常寺、通政使司、錦衣衛亦以次南,旗手衛在通政之後,刑部、都察院、大理寺皆於貫城坊以次而南,又翰林院在玉河之西,詹事府在玉河之東,國子監在安定門之內,光祿寺在東安門之內,大僕寺在萬寶之坊,又有五兵馬司、府軍四衛、羽林三衛、金吾衛、虎賁左衛、燕山三衛、大興左衛、武廳二衛、騰廳二衛、永清二、武功三衛、濟陽衛、濟州衛、彭城衛衛、四夷會同之館及順天府、大興 · 宛平兩縣之治,元世祖、文天祥、玉皇等廟,俱在城中,天壽山在北一百里,即皇都鎮山,山下青有永安城,城內有長陵、獻陵、景陵三衛,今大行成化皇帝葬于此,西山、金山、覺山、泉山、仰山、香山、盧師、平坡、韓家、雙泉、棋盤、翠鳳、潭柘、玉泉、五華諸山,俱在城西北三十餘里間,崎岖磅礴,拱向皇都,以固億萬年之基,玉河源出玉泉山,經皇城大內中,出都城東南為大通河,至高麗庄,與桑乾河俱入白河,海子有二,一在皇城西三四里,諸山之水皆應為,一在城南,即域養禽獸之所,其他有樓若披雲閣閣、若中心館、若永平亭、若匏瓜·玉泉·南野之類,不可枚數,北京即虞之幽州之地,周為燕薊之分,自後魏以來,習成胡俗,厥後遼為南京,金為中都,元亦為大都,夷狄之君,相繼建都,其民風土俗,皆襲胡風風,今大明一洗舊染之污,使左之區,為衣冠之俗,朝廷文物之盛,有可觀焉,然其間闆之間,尚道佛不尚儒,業商賈不業農,衣服短窄,男女同制,飲食腥穢,尊卑同器,餘風未够,是可恨者,且其山童,其川汗,其地沙土揚起,塵埃漲天,五穀不豐,其間人物之夥,樓臺之盛,市肆之富,恐不及於蘇杭,其城中之所需,皆自南京及蘇杭而來,朝廷視臣等以漂海夷人,令把門館夫劉顯等直臣等,非奉上司明文票
 
 
p. 440
 
帖呼唤,不許擅自出館,亦不許容放牙行及無籍之徒,入館串引交通,故劉顯嚴加防制,且無通事,就與盲聾同類,故凡朝廷有事,不得聞而知之.
 
 
옥하관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천둥이 쳤습니다. 새벽에 주민이 또 와서 신의 맥박을 짚어보고 말하기를,
 
 
“어제는 삼지이패(三遲二敗)<ref>[http://ostmedizin.de/osboard/bbs/board.php?bo_table=board_korean&wr_id=1093]</ref>의 맥(脈)이 있었는데 오늘은 맥의 기운이 회생할 기색이 있으니 조리에만 전념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http://www.iksaeng.com/prescription/predong_One.jsp?prescription=yoxlv9qv 인삼양위탕(人蔘養胃湯)]을 달여서 먹여 주었습니다.
 
 
신은 약을 먹은 뒤로 몸이 점차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저녁에 이서(李恕)와 장술조(張述祖)가 함께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당신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지금 당신 병이 낫지 않았으니 26일에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초상을 당하여 급히 돌아가다가 표류하여 타국에 머무르고 있으니, 사정이 매우 절박하여 하루를 지내는 것이 마치 3년 같습니다. 어제의 병이 오늘은 조금 나았으므로 수레 위에 누우면 갈 수 있으니 가기를 청합니다.”
 
 
장술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순천부(順天府)의 체운소(遞運所)에 가서 수레와 노마(__馬)를 부탁해 놓고 오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명나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남경에 도읍을 정하셨으니, 남경은 곧 금릉(金陵)으로서 육조(六朝)의 제왕(帝王)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었습니다.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북평부(北平府)로 도읍을 옮겨서 북경이 되었지만 남경의 치소(治所)는 여전하였습니다.
 
 
남경의 기내(畿內)에는 응천부(應天府) 등 18부와 그에 속한 주현이 있고, 북경의 기내(畿內)에는 순천부 등 11부와 그에 속한 주현이 있었습니다.
 
 
양경(兩京) 기내의 부·주·현은 육부(六部)에 직속되어 있었습니다.
 
 
또 천하를 13 포정사로 나누었으니 산서(山西), 산동(山東), 하남(河南), 섬서(陝西), 절강(浙江), 강서(江西), 호광(湖廣), 사천(四川),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 운남(雲南), 귀주(貴州)로서 여러 부·주·현을 통할하고 있었습니다.
 
 
또 도지휘사(都指揮司)와 위소(衛所)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부가 149, 주가 218, 현이 1105곳이었습니다.
 
 
또 선위사(宣慰司), 초토사(招討司), 선무사(宣撫司), 안무사(安撫司) 등의 관사(官司)가 있었습니다.
 
 
경성(京城)은 곧 원(元) 나라 대도성(大都城)이었습니다.
 
 
영락(永樂) 연간 늘리고 넓혀 수축하였습니다.
 
 
성문은 9개가 있었으니, 그 남문이 정양문(正陽門)으로서 정양문의 오른쪽이 선무문(宣武門), 왼쪽이 숭문문(崇文門)이고, 그 동문은 동직문(東直門), 조양문(朝陽門), 그 서문은 서직문(西直門), 부성문(阜成門)이며, 그 북문은 안정문(安定門), 덕승문(德勝門)입니다.
 
 
성안에 또 황성(皇城)이 있고, 황성 안에 서원(西苑), 태액지(太液池), 경화도(華島), 만세산(萬歲山), 사직단(社稷壇), 태묘(太廟)96가 있습니다.
 
 
황성의 장안좌문(長安左門) 남쪽에 종인부(宗人府), 이부(吏部), 호부(戶部)98, 예부(禮部)가 남쪽으로 차례로 있고, 종인부의 뒤편99에 병부(兵部), 공부(工部), 홍려시(鴻__寺), 흠천감(欽天監), 태의원(太醫院)이 또한 차례로 남쪽으로 있으며, 장안우문(長安右門)의 남쪽에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의 중부(中府)·좌부(左府)·우부(右府)·전부(前府)가 또한 차례로 남쪽으로 있고, 후부(後府)는 중부(中府)의 뒤편에 있습니다.
 
 
후부의 남쪽에 행인사(行人司)이, 태상시(太常寺)·통정사사(通政使司)102 . 금의위(錦衣衛)가 또한 차례로 남쪽으로 있고, 기수위(旗手衛)는 통정사(通政司)의 뒤편에 있습니다.
 
 
형부(刑部), 도찰원(都察院)아, 대리시(大理寺)05는 모두 관성방(貫城坊)에 차례로 남쪽으로 있습니다.
 
 
또 한림원(翰林院)은 옥하(玉河)의 서쪽, 첨사부(管事府)는 옥하의 동쪽에 있고, 국자감(國子監)은 안정문의 안, 광록시(光祿寺)는 동안문(東安門)의안, 태복시(太僕寺)는 만보방(萬寶坊)에 있습니다.
 
 
또 오병마사(五兵馬司)·부군사위(府軍四衛)·우림삼위(羽林三衛)·금오사위(金吾四衛)·호분좌위(虎貢左衛)·연산삼위(燕山三衛)·대흥좌위(大興左衛)·무양이위(武讓二衛)·등양이위(騰讓二衛)·영청이위(永淸二衛)·무공삼위(武功三衛)·제양위(濟陽衛)·제주위(濟州衛)·팽성위(彭城衛)·사이회 동관(四夷會同館)과 순천부, 대흥현(大興縣)·완평현(平縣)의 치소(治所)가 있고, 원세조(元世祖), 문천상(文天祥), 옥황(玉皇) 등의 사당도 모두
 
 
P. 286-287
 
 
차고 오곡은 풍성하지 않았습니다.
 
 
그 곳의 사람과 물자의 많음과 누대와 저자의 풍성함은 소주와 항주에는 미치지 못할 듯하였습니다.
 
 
성안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은 모두 남경과 소주·항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신 등을 표류해 온 이인(夷人)으로 간주하여 문 지키는 관부(館夫) 유현(劉顯) 등으로 하여금 신 등을 지키게 하였고, 상사(上司)의 명문으로 된 품첩(稟帖)을 받들고 와서 부르는 것이 아니면 마음대로 객관(客館)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아행(牙行)122 및 신분이 불분명한 무리들이 객관에 들어와서 서로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유현이 엄중히 통제를 가하였고, 또 통사(通事)도 없으니 곧 장님이나 귀머거리와 마찬가지였으므로 조정에 사건이 생겨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기후
 
*인명
 
*치료
 
*건축물
 
*탕약
 
*행정
 
*심리(안정)
 
*심리(급함,절박)
 
*역사
 
*지명
 
*지리
 
*경제
 
*심리(답답함)
 
*관직
 
*행정
 
 
23rd Day. At Jade River House. The sky was cloudy, and there was thunder.
 
 
At sunrise Chu Min came again and took my pulse. He said, “Yesterday I found a pulse of three beats slow and two skipped. Today the pulse has regained vitality. We need only treat you.” Then he simmered some ginseng digestive tonic (jen-shen-yang-wei-tang]17 and made me drink it. From the time that I drank the medicine, my body gradually recovered.
 
Toward evening Li Shu and Chang Shu-tsu came and said to me, “Early tomorrow morning your party will start back to your country, but if you are not well now, you may set out on the 26th Day. Which is better?”
 
I said, “I was on my way to the deepest mourning, [when] I drifted to another country. The circumstances are very pressing; the passing of a single day is like three autumns. Yesterday I was sick, today I am a little better; if I lie down in the carriage, I can go. Let us go.”
 
Shu-tsu said, “In that case I shall call on the Shun-t'ien-fu [Peking] Transfer Station and order carriages, donkeys, and horses to come.”
 
XXX The Exalted Emperor T’ai Tsu [r. 1368-1398] of our Great Ming established the capital at Nanking, which had been Chin-ling, the place at which capitals were established by the emperors and kings of the Six Dynasties. The Cultured Emperor T'ai Tsung [r. 1403-1424] moved the capital to Pei-p’ing Prefecture and made it Peking. But the administrative system of Nanking remains as before.18 There are eighteen prefectures, Ying-t’ien Prefecture and others, in the Imperial domains of Nanking, with the departments and counties that belong to them. In the Peking Imperial domains there are eleven prefectures, Shun-t'ien Prefecture and others, and also the departments and counties that belong to them. The prefectures, departments, and counties of the Imperial domains of both capitals are controlled by the Six Ministries. The Empire is also divided into thirteen administrative regions called Shansi, Shantung, Honan, Shensi, Chekiang, Kiangsi, Hu-kuang, Szechwan, Fukien, Kwantung, Kwangsi, Yunnan, and Kuei-chou. They control the prefectures, departments, and counties. Regional military commissions, garrisons, and chiliads are also established to defend them. There are 149 prefectures, 208 departments and 1105 counties. There are also pacification, suppression, security, control, and other offices.19 XXX
 
XXX The wall of the capital was the wall of the Great Capital of Yüan. It was enlarged and repaired in the Yung-lo period [1403-1424]20 and has nine gates: at the south is Cheng-yang. To the right of Cheng-yang is Hsüan-wu and to the left Ch’ung-wen. At the east are Tung-chih and Ch'ao-yang, at the west Hsi-chih and Fu-ch'eng, and at the north An-ting and Te-sheng. Inside that wall there is also an Imperial Wall (huang-ch'eng), inside which are West Garden, T'ai-i Lake, Ch’iung-hua Island, Wan-sui Hill, She-chi Altar, and Great Shrine. South of Ch’ang-an Left Gate of the Imperial Wall, the Court of the Imperial Clan, the Ministry of Personnel, the Ministry of Revenue, and the Ministry of Rites stand successively to the south. Behind the Court of the Imperial Clan, the Ministry of War, the Ministry of Works, the Court of State Ceremonial, the Directorate of Astronomy, and the Imperial Academy of Medicine, are also in a line going south. South of Ch’ang-an Right Gate, the Central, Left, Right, and Forward General Headquarters of the Five Armies stand in a line to the south. The Rear General Headquarters is behind the Central General Headquarters. South of the Rear General Headquarters, the Messenger Office, the Court of Imperial Sacrifices, the Office of Transmission [T’ung-cheng-shih ssu], and the Imperial Bodyguard also stand in a line going south. The Color Guard [Ch’i-shou-wei] is behind the Office of Transmission. The Ministry of Punishments, Censorate, and Grand Court of Law are in Kuan-ch'eng Ward, standing in a line going south. The Hanlin Academy is west of Jade River, and the Office of the Imperial Tutor [Chan-shih fu] is east of Jade River. The National University is inside An-ting Gate, the Court of Banquets [Kuang-lu ssu] is inside Tung-an Gate, and the Court of the Imperial Stud is in Wan-pao Ward. There are also the Five Warden's Offices [Wu ping-ma ssu), four garrisons of Prefectural Forces, three Yü-lin garrisons, four Chin-wu garrisons, a left Hu-pen garrison, three Yen-shan garrisons, a left Ta-hsing garrison, two Wu-hsiang garrisons, two T'eng-hsiang garrisons, two Yung-ch’ing garrisons, three Wu-kung garrisons,21 Chi-yang Garrison, Chi-chou Garrison, P’eng-ch'eng 'Garrison, the Four Barbarians Institute [Ssu-i kuan], and the Central Post Hotel. There are, in addition, the capital of Shun-t’ien Prefecture, the seats of Ta-hsing and Yüan-p'ing counties, and the shrines of Yüan Shih Tsu [Kubilai Khan, r. 1260-1294), Wen T’ien-shang,22 the Jade Emperor, and others. All are inside the wall.
 
T’ien-shou Mountain is one hundred li to the north and is the guardian mountain of the capital. Below the mountain is Yung-an Wall, inside which there are Ch’ang-ling Garrison, Hsien-ling Garrison, and Ching-ling Garrison. The late Ch’eng-hua Emperor was buried there. Mt. Hsi, Mt. Chin, Mt. Chüeh, Mt. Ch'uan, Mt. Yang, Mt. Hsiang; and Lu-shih, P’ing-p'o, Han-chia, Shuang-ch'uan, Ch’i-p’an, Ts’ui-feng, T'an-chih, Yü-ch'uan, and Wu-hua mountains are all about thirty li northwest of the wall. Sheer and massive, they shield the capital, making it a sure bastion forever.
 
Jade River rises in Jade Spring [Yü-ch'uan] Mountain, passes through the Imperial Wall and the Palace and goes out of the capital wall to the southeast, becoming the Ta-t’ung River. When it reaches Koryo Village, it enters the Pei River with the Sang-ch’ien River.
 
There are two lakes, one of which is three or four li west of the Imperial Wall. All the rivers from the mountains flow into it. The other is south of the wall and is a ground for the raising of game.
 
Otherwise, there are towers, such as P’i-yün; pavilions, such as Chunghsin; guest houses, such as Yung-p'ing; and arbors, such as P’ao-kua, Yüch'üan and Nan-yeh. There are too many such things to be counted. XXX
 
XXX Peking was the land of Yu-chou of Yü. In Chou times [1122-249 B.C.], it was divided between Yen and Chi. From the Later Wei [386-534] on, it grew accustomed to northern barbarian ways. After that, Liao [916-1125] made it Nan-ching, Chin [1115-1234] made it Chung-tu, and Yüan [12601368], in turn, made it Ta-tu. Barbarian chieftains built capitals there one after another, and all their customs were customs acquired from the northern barbarians.
 
Now Great Ming has washed off the old dirt and made those who buttoned their coats on the left take the ways of hat and gown. That can be seen in the splendor of the Court ceremonial. But in the streets, they revere the Taoist gods and the Buddha, not Confucius. They work at business, not farming. Their clothing is short and tight, and men and women dress the same. Their food and drink are rancid. The high and the low use the same implements. There are still habits that have not been obliterated, and that is regrettable.
 
The mountains, moreover, are bare and the rivers filthy. Sand and dirt rise up from the ground, and dust fills the sky. The five grains are not abundant. In that setting, the numbers of people, the profusion of buildings, and the richness of the markets do not, I am afraid, come up to those of Su-chou and Hang-chou. Everything needed in the city comes from Nanking, Suchou, or Hang-chou. XXX
 
XXX The Court, regarding us as barbarians who had drifted across the sea, ordered Liu Hsien and others, porters who kept the gate at the guest house, not to let us leave the house on our own if we had not received a clearly written authorization or summons from a superior official, and not to let brokers or vagrants into the house to hobnob with us. Liu Hsien, therefore, took strict precautions. Since, moreover, there was no interpreter, I was as if blind and deaf and was therefore not able to learn of anything done at court. XXX
 
 
96-午門의 동남쪽에 있다. 永樂18년(1420)에 만들었는데 嘉靖11년(1532) 九廟로 바꾸어 15년에 완성되었다. 20년에 八廟가 落雷로 불에 탔으나 24년 重建되었다. 오늘날에는 勞動人民文化宮이 들어섰다.
 
97. 洪武3년(1370)에 大宗正院을 설치하였다가 22년에 개명하였다. 勳戚大臣이 府의 일을 관리하였는데, 官을 두지 않아 일의 권한은 禮部에 예속하였다. 皇族의 屬籍, 玉牒의 修理, 宗室子女의 嫡庶, 名封, 嗣襲, 生卒, 婚嫁, 諡葬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98. 六部의 하나로 전국의 戶口, 土地, 賦稅, 재정수지 등의 政令을 관장하였다. 屬部로 河南, 山東, 山西, 陝西, 浙江, 江西, 湖廣, 廣東, 廣西四川, 福建, 雲南, 貴州의 12 淸吏司를 두었다. 部에 尙書 1인(정2품), 左·右侍郞 각 1인을 두었고, 아래에 司務廳 을 설치하고 司務 2인을 두었다. 淸吏司에는 郞中, 員外郞, 主事 등을 두었다. 관할기 관에는 寶勤提擧司, `紙局, 印紗局, 寶鈔廣惠庫, 廣積庫, 藏罰庫, 甲字·乙字·丙字 ·丁字·戊字庫, 廣盈庫, 外承運庫, 承運庫, 行用庫, 太倉銀庫, 御馬倉 등이 있었다.
 
99. 동쪽 뒤편임.
 
100_ 中軍, 左軍, 右軍, 前軍, 後軍의 5都督府를 가리킨다. 최고의 군사기관으로 洪武13년(1380)에 大都督府를 나누어 설치하였다. 各府마다 左·右都督, 都督同知, 都督僉事 등의 官을 두었다. 아래에 經歷司를 설치하였다. 中軍의 아事官이 五軍의 刑獄을 모두 담당하였다. 군대의 일을 관장하여 각 都指揮使司, 行都指揮使司 및 親軍 외의 각 京衛를 나누어 거느렸으며, 兵部에 보고하였다.
 
101 傳旨, 冊封 등의 일을 관장하는 기구이다. 司正(정7품) 1인, 左·右司副(종7품) 각 1인, 行人(정8품) 37인을 두었다. 詔勅의 行, 宗室의 冊封, 四方으로의 撫諭, 賢의 초빙 및 賞賜, 慰問, 恤, 軍旅, 祭祀 등의 일은 그 行人을 파견하여 사신으로 나가게 하였다.
 
102-洪武10년(1377)에 설치하였는데, 洪武帝는 政事가 물 흐르는 것과 같이 늘 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通政'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通政使 1인, 左右通政使 각 1인, 譽黃右通政 1인, 左·右參議 각 1인을 두었다. 그 부속기관으로 經屬司의 經歷과 知事 가 있다. 帝命의 出納, 下情의 通達, 關防公文의 合, 四方臣民의 實封建言의 奏報, 陳情과 伸訴 및 軍情과 災異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103-後軍都督府의 남쪽으로는 太常寺, 通政使司, 錦衣衛가 차례대로 있을 뿐 行人司는 後府의 서북쪽에 있어 崔薄의 傳言과는 다르다.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編, 《明淸北京城圖》(地圖出版社, 1986) 참조.
 
104-洪武15년(1372)에 설치하였다. 左·右都御史, 左·右副都御史, 左·右僉都御史 등을 두었다. 아래에 經歷司, 司務廳, 照磨所, 司獄司를 설치하였다. 또 浙江 등 13道로 나누어 監察御史 110명을 두었다. 內外百司를 규찰하고 憲綱을 總領하며 筋法을 肅改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105_ 審議하고 刑獄을 바로잡는 등의 政令을 관장하였다. 卿이 長官이고 左·右少卿과 左 右寺丞이 卿을 보좌하였다. 하부기관에 司務廳이 있고, 司務 2인을 두었다. 左 ·右 2寺로 나누고 각각 寺正 1인, 寺副 2인, 評事 4인을 두었다. 刑部, 都察院, 五軍斷事 官이 推問한 형사사건은 모두 大理寺가 復審한다. 大獄은 三法司가 會審하는데, 初審 은 刑部와 都察院이, 覆審은 大理寺가 주관하였다. 弘治 전에는 大理寺에 刑具와 監獄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弘治 후에는 단지 案件만을 살필 뿐 죄수는 寺에 데려오지 않았다.
 
106-制話, 修史, 圖書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長官은 掌院學士이고, 그 아래에 侍讀學士, 侍講學士, 侍讀, 侍講, 修撰, 檢討 등의 官을 설치하였는데, 모두 翰林이라 불렀다. 明의 제도는 進士 가운데 庶吉士를 선발하고, 館을 설치하여 교습해서 考選에 대비케 하였다. 우수한 자는 編修와 檢討로 삼아 머물게 하고, 그 다음은 給事中 내지 御史로 삼았다. 內閣 및 吏部, 禮部의 尙書와 侍郞은 대부분 翰林院 출신이었다.
 
107-洪武25년(1392)에 원래의 舊事院을 고쳐 설치하였다. 管事(정3품) 1인, 少管事(정4품) 2인, 府丞(정6품) 2인을 두었고, 아래에 主簿, 錄事, 通事舍人 등의 官을 두었다. 左 右春坊 및 司經局을 거느렸고, 다司는 太子를 輔導하는 것이었다. 府, 坊, 금의 官은 翰林院과 서로 겸임하여 侍讀, 試士, 修書가 모두 그 일에 참여하였다. 嘉靖 후에 는 太子가 閣에 나아가 講讀할 때에는 매번 다른 官에 맡겼기 때문에 府, 坊, 局은
 
단지 翰林官이 거쳐 가는 것으로 되었다.
 
108_ 牧羊과 戰馬 등에 관한 政令을 관장하였다. 寺에는 卿(정3품)1인, 少卿 3인, 寺죠 4인을 두어 正官으로 하였다. 卿은 전체 牧馬에 관한 政令을 관장하고, 少卿 1인이 그 보조관이었다. 나머지 2인은 나누어 京營과 畿甸의 馬匹을 관장하였다. 네 寺丞은 나누어 京衛와 畿內 및 山東, 河南 6府의 모든 華牧과 寄牧의 馬匹을 관장하였다. 屬官에는 主簿廳知事主簿, 常盈庫大使 등이 있었다. 하부의 아문에는 각 牧의 監正, 監副, 錄事 및 각 群의 群長 등이 있었다. 109-몽골 제국 제5대 칸(재위 1260-1294)인 元世祖이다. 이름은 쿠빌라이이고, 칭기즈칸의 손자이다. 憲宗 때 中國大總督이 되어 교묘한 經略으로 중국의 풍부한 자원과 인재를 얻어, 후일 元朝 성립의 요인을 만들었다. 막내아우 아릭부카와의 황제 쟁탈전에서 이긴 다음, 지금의 北京으로 수도를 옮겨 大都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元이라 하였다. 1279년에 南宋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으로서 최초의 중국 통일을 이루었다.
 
110_ 南宋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호는 文山이다. 1255년 進士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소문이 떠돌자, 이에 반대하는 글을 올려 지방관에서 쫓겨났다. 송나라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포로가 되었다가, 그 뒤 도망하여 원나라에 대항하였지만 五坡玲 전투에서 다시 잡혔으며, 자살하려고 독약을 먹었으나 실패하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통지서.
 
122. 牙行은 客商 대신 매매 업무를 하는 중간 상인으로 매매 과정에서 상품을 소개하거나 시장가격을 전하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그 외에 객상을 위하여 상품을 구매하고 車船人丁을 고용하거나 객상의 宿食을 제공하는 등의 일도 담당하였다. 牙行은 官府 에서 발행하는 印信文簿에 객상의 鄕貫, 姓名, 路引의 字號, 物貨의 數目을 기재한 뒤 매달 官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였다.
 
 
===24일===
 
二十四日,自會同館發程,是日晴,百戶張述祖與其子仲英,討車三輛於順天府遞運所而來, 臣則騎馬,從者或坐車,或乘臟,從玉河橋,出自崇文門,復過通州新·舊城,至潞河睾,睾吏李鳳煎茶來饋.
 
 
회동관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백호 장술조가 아들 중영(仲英)과 함께 수레 3량을 순천부체운소(順天府遞運所)에서 청구해 가져왔습니다.
 
 
신은 말을 타고 종자들은 수레에 타기도 하고 당나귀를 타기도 하였습니다.
 
 
옥하교에서 나와 숭문문(崇文門)으로부터 다시 통주(通州)의 신성(新城)과 구성(舊城)을 지나서 노하역(潞河驛)에 이르니, 역리(驛吏) 이봉(李鳳)이 차를 끓여 와서 대접하였습니다.
 
 
*기후
 
*건축물
 
*인명
 
*지리
 
*지명
 
*의전
 
 
24th Day. Setting out from the Central Post Hotel. This day was fair.
 
 
Centurion Chang Shu-tsu and his son Chung-ying ordered three carriages at the Shun-t'ien-fu Transfer Station and came. I mounted a horse, and my staff either sat in the carriages or got on donkeys. We went out Ch’ung-wen Gate by way of Jade River Bridge, passed again through the new and old walls of T’ung-chou, and came to Lu-ho Station. Li Feng, an official of the station, boiled tea and served it to us.
 
 
===25일===
 
二十五日,陰,過白河,河以久旱水淺,略設土橋,又過火燒屯、照里鋪、煙角集、馬義坡、夏店鋪、柳河屯,至夏店疇,所過曠野中,
 
有童山在路之北十餘里外,望之如土阜然,上有昊天塔,即通州之孤山也。通州在平野,無高山,只有此山而已,又過白浮圖鋪、東關遞運所,入三河縣城南門,過進士門,至大僕分寺,縣在七渡、鮑丘、臨三河之中,故名,城中有縣治及興州後、營州後屯等衛,縣之北十五里間,有靈山、古城山,其西北有鹿兒山、蛇山等山.
 
 
흐렸습니다.
 
 
백하(白河)를 지났는데, 백하는 오랜 가뭄으로 물이 얕았고, 대충 흙 다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화소둔(火燒屯)·조리포(照里鋪)·연각집(煙角集)·마의파(馬義坡)·하점포(夏店鋪)·유하둔(柳河屯)을 지나서 하점역(夏店驛)에 이르렀습니다.
 
 
지나온 광활한 들판 가운데는 민둥산이 길 북쪽의 10여 리 밖에 있었는데, 바라보니 마치 흙 언덕 같아 보였습니다. 그 위에 '''호천탑(昊天塔)'''이 있었으니 곧 통주(通州)의 고산(孤山)이었습니다.
 
 
통주는 평평한 들판에 있었으므로 높은 산은 없고 다만 이 산뿐이었습니다.
 
 
또 백부도포(白浮圖鋪), 동관체운소(東關遞運所)를 지나서 삼하현성(三河縣城) 남문으로 들어갔다가 진사문(進士門)을 지나서 태복분시(太僕分寺)에 이르렀는데, 삼하현은 칠도(七渡)·포구(鮑丘)·임구(臨河)의 세 하천 가운데에 있는 까닭에 삼하(三河)'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성안에 삼하현의 치소(治所)와 홍주후둔(興州後屯), 영주후둔(營州後屯) 등의 위(衛)가 있었습니다.
 
 
삼하현의 북쪽 15리 사이에 영산(靈山)과 고성산(古城山)이 있고, 그 서북방에는 토아산(鹿兒山)·타산(脫山) 등이 있었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건축물
 
*언어(어원)
 
 
25th Day. Cloudy.
 
 
[We went from the Pai River to San-ho County.]
 
 
===26일===
 
二十六日,陰,清早,三河知縣姓吳、縣丞姓范、主簿姓楊,俱失其名,以 飯米一盤、肉一斤、酒一瓶、菜一盤,來問慰,復出自南門,至草橋店,店之東有臨河“河,積草為橋,又過煙屯鋪、石碑店、東嶺鋪,至公樂驟.
 
 
흐렸습니다.
 
 
이른 아침에 이름은 잊었지만 삼하지현(三河知縣) 오(吳)씨123, 현승(縣丞)범(范)씨와 주부(主簿) 양(楊)씨가 쌀 1쟁반, 고기 1근, 술 1병, 소채 1쟁반을 가지고 찾아와 위로하였습니다.
 
 
다시 남문으로부터 나와서 초교점(草橋店)에 이르니, 초교점의 동쪽에 임구하(臨河河)가 있었는데 풀을 쌓아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또 연둔포(煙屯鋪)·석비점(石碑店)·동령포(東嶺鋪)를 지나서 공락역(公樂驛)에 이르렀습니다.
 
 
*기후
 
*인명
 
*풍습(음식)
 
*지명
 
*지리
 
*토목
 
 
26th Day. Cloudy.
 
 
Early in the morning, Wu, the Magistrate of San-ho County, Fan, the Vice Magistrate, and Yang, the Auditor [Chu-pu], (I have lost the given names of them all) brought a plate of rice, one catty of meat, one jar of wine, and a plate of vegetables and asked how we were.
 
[We went from there to Kung-lo Station.]
 
 
123. 康熙《三河縣志》〈秩官志)를 보면 “盧毅, 景泰年任, 吳賢, 見宮業, 張鳴鳳, 由進士, 弘治年任”이라고 되어 있고, 官政志, 宮業을 보면 “吳賢, 河南儀封人, 弘治二年任 ...” 이라고 되어 있다. 최부가 만난 吳知縣이 吳賢을 가리킨다면 宦業에 기재된 弘治二年’은 ‘元年의 잘못일 것이다.
 
 
===27일===
 
二十七日,至漁陽驛, 遇謝恩使臣,是日陰,夜大雨,過白潤鋪、二十里铺、十里鋪,至漁陽睾,睾在蓟州城南五里許,驛之南有南關遞運所,驛丞乃曹鹏也,蓟州即秦漢漁陽郡,唐安祿山叛據之,後取古薊門關以名,盤龍山在西北,崆峒山在東北,城中有州治及薊州衛、鎮朔衛、營州右中衛治,所治西北隅有張堪廟,堪為漁陽太守時,教民種植,童謠云:“麥秀兩歧’云云,有去思立廟如新,臣等欲起程時,有一人馳報云:’朝鮮國使臣來.’臣語諸張述祖曰:“我本國使臣來在一刻間,若於路上相逢,則不過一辑而
 
過,我姑留待,以認本國家山之事,”述祖曰:“諾,”日哺,謝恩使知中樞成健、書狀官尹璋及崔自俊、禹雄、成仲溫、金孟敬、張佑奇、韓忠常、韓謹、吳近位、金敬熙、權熙止、成後生、李義山、朴、鄭興祖等來寓驟中. 臣請謁使臣于中庭,使臣下階,亦俯伏語臣曰:“上體平安,國家無事,爾家鄉亦亡悲,上聞爾漂海無歸處,啟下禮曹,令各道觀察使通沿海各官,不輕搜寬,急速啟聞,且於對馬島及日本諸島使送人書契修答時,右辭緣并錄 通識,右承旨慶俊次知啟依允,聖恩何可量哉?”臣拜伏退舍,謂金重等日:“我等,小民也,如媳姑嫂蝶之生死於天地.
 
 
p. 442
 
中,生不為天地之益,死不為天地之損,豈意 聖念及於小民若此若此?聖念若此,我等所以萬死得一生也。”金重等亦感泣,少選,書狀官與崔自俊,借到于臣所寓,備語鄉國潮來之事,因曰:“初聞漂沒之報,人皆以死為嘆,成希顏獨大言曰我心以為崔溥不死海,早晚必生還云云,及今相遇, 果驗其言”當昏,使臣邀臣同坐,饋臣以晚飯,下及陪吏,臣謝曰:“小人 罪逆深重,不自死滅,禍延先人,未及瓣踊于殯側,反為颶(母)[母]所驅,五內分崩,無復望生,幸到閩東,行過六千餘里間,亦顧無親,語音不 曉,悲辛艱楚,欲訴誰因?今遇令公,如見父母,”使臣曰:“我初於東八贴,遇安合公之行,聞爾生到浙江等處,喜氣欲顯,今日邂逅,顧非幸嗽?”又曰:“我之此行,有養馬者,中途斃死,跋涉萬里,俱生實難,爾帶去人,亦有死者否?”臣曰:“凡我四十三人,幸得不死,與之借來。”使臣曰:“天實生之, 天實生之,非徒生之, 實由 上德, 是可喜也.” 臣又承 使臣之間,略陳漂寓之故,所過滄溟之險,山川之勝跡,風俗之有異,使臣曰:“我行過此等地,獨以為壯觀,爾之眼界,難為水也。”
 
 
어양역(漁陽驛)에 이르러 사은사신(謝恩使臣)을 만났습니다.
 
 
이 날은 흐리고 밤에는 큰비가 내렸습니다.
 
 
백간포(白潤鋪)124. 이십리포(二十里鋪)·십리포(十里鋪)를 지나서 어양역에 이르니, 어양역은 계주성(__州城) 남쪽 5리가량에 있었습니다. 125 어양역의 남쪽에 남관체운소(南關遞運所)가 있었는데 역승(驛丞)은 조붕(曹鵬)이었습니다.
 
 
계주<ref>[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fcs=&fcsd=&cf=&cd=&gb=&aa10up=&aa10no=kh2_je_a_vsu_24518_006&aa15no=006&aa20no=24518_006_0004&gnd1=&gnd2=&keywords=&rowcount=10 무오기행문,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ref>는 곧 진한(秦漢)시대의 어양군(漁陽郡)인데 당나라 [http://kcm.kr/dic_view.php?nid=39555 안록산(安祿山)]<ref>[https://www.hankyung.com/society/article/2011032499031 양귀비, 현종·안록산과 '양다리 사랑놀음'…唐을 파산시킨 그 치명적 유혹, 한국경제, 2011.03.25]</ref>126이 반란을 일으켜 점거했던 곳으로 후에 옛 계문관(__門關)을 따서 '계주(__州)'라고 이름지었던 것입니다.
 
 
반룡산(盤龍山)은 서북방에 있고 공동산(__山)은 동북방에 있었습니다.
 
 
성안에 계주의 치소와 계주위(__州衛), 진삭위(鎭朔衛), 영주우둔위(營州右屯衛)의 치소가 있었습니다.
 
 
치소의 서북 모퉁이에 장감(張堪)의 사당이 있었습니다.
 
 
장감이 어양태수(漁陽太守)였을 때 백성들에게 씨뿌리고 심는 법을 가르쳤더니 동요(童謠)에, 보리 이삭 두 가닥이 패었네 운운3했다 하였습니다. 이임할 때 그의 선정(善政)을 기리어 세운 사당이 새 것 같았습니다.
 
 
신 등이 길을 떠나려고 할 때 한 사람이 달려와서 “조선국 사신이 오고 있습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신이 장술조에게 말하기를,
 
 
“우리 본국 사신이 곧 도착할 터인데 만약 노상에서 만난다면 읍(駐) 한 번만 하고 지날 수밖에 없으니, 내 잠시 머물러 기다려서 고향 소식을 알고 싶습니다” 라고 하니 장술조가 “좋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질 무렵 사은사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건(成健)32, 서장관(書狀官)133 윤장(尹__)과 최자준(崔自俊)·우웅(禹雄)·성중온(成仲溫)·김맹경(金孟敬)134 · 장우기(張佑奇)·한충상(韓忠常)·한근(韓)·오근위(吳近位)·김경희(金敬熙)·권희지(權熙止)·성후생(成後生)·이의산(李義山)·박선(朴__)·정흥조(鄭興祖) 등이 와서 어양역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나아가서 사신을 중정(中庭)에서 뵈니 사신이 섬돌에서 내려와 역시 몸을 굽히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성상의 옥체도 평안하시고 나라도 무사하며 그대의 집이 있는 고향도 별 탈이 없소. 임금께서 그대가 표류되어 간 곳이 없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조(禮曹)135에 명을 내려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연해의 각 급 관원에게 널리 알려 수색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고 속히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하셨소. 또 대마도와 일본 여러 섬의 사송인(使送人)에게 회답을 쓸 때 위의 '''사연을 함께 기록'''해서 널리 알릴 것을 우승지(右承旨)136 경준(慶俊)이 아뢰자 이를 윤허하셨으니 성은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절하고 엎드렸다가 객관으로 물러 나와 김중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미천한 백성이므로 마치 쓰르라미와 하루살이가 천지 간에 살다가 죽는 것과 같아 살아도 천지의 이로움이 되지 못하고 죽어도 천지의 손실됨이 없는데, 어찌 성상의 염려가 미천한 백성에게 미치심이 이와 같을 줄을 생각했겠는가? 성상의 염려하심이 이와 같았으므로 우리들이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중 등도 또한 감격해 울었습니다.
 
 
조금 후에 서장관이 최자준과 함께 신이 머물고 있는 곳에 와서 고국에서 요즘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이야기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처음에 표류되어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듣고는 사람들이 모두 그대의 죽음을 탄식하고 있었는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731 성희안(成希顔)]139만은 혼자 큰 소리로, '내 생각에 최부는 바다에서 죽지 않고 조만간에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운운하였소. 지금 와서 서로 만나 보게 되니 과연 그의 말이 맞았소"라고 하였습니다.
 
 
*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3933 중종반정]
 
*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8667 반정3대장]
 
 
저녁에 사신이 신을 맞이하여 같이 앉아 신에게 저녁밥을 대접하고 배리(陪吏)들에게까지도 먹였습니다.
 
 
신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소인은 죄지은 것이 매우 무거운데도 스스로 죽지 못하여 재앙이 선인(先人)에게 미치게 되었는데, 빈소 곁에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슬퍼하기도 전에 도리어 회오리바람에 몰린 바 되었으니, 오장이 무너지는 듯하여 다시 살아나기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민동(圃東)140에 도착하여 6천여 리를 지나는데 돌아보아도 의지할 데가 없었으며, 말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 비참하고 고생한일 을 호소하려고 한들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지금 영공(令公)을 만나니 마치 부모를 뵈는 것과 같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사신이 말하기를,
 
 
“나도 처음 동팔참(東八站)에서 안(安) 영공의 행차를 만나 그대가 살아서 절강 등지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매우 기뻐했는데, 오늘 서로 만나게 되니 다행이 아니겠소?”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나의 이번 행차에 말을 돌보던 자(養馬]4가 중도에서 죽었소.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만 리 길을 가노라면 모두 다 살아남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오. 그대가 데리고 간 사람 중에도 죽은 사람이 있지 않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43인은 다행히 죽지 않고 모두 함께 왔습니다.”
 
 
“실로 하늘이 살린 것이오! 실로 하늘이 살린 것이오! 그냥 살린 것이 아니라 실로 임금의 덕<ref>[https://korean.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092357&ctg= [우리말바루기] 승은/성은
 
중앙일보, 2008.03.31]</ref><ref>[https://www.korean.go.kr/nkview/nknews/199908/13_1.htm 드라마 속의 동어 반복과 부적절한 어휘 선택, 김희진(金希珍), 국립국어연구원]</ref> 때문이니 이야말로 기쁜 일이오."
 
 
신은 또 사신의 물음을 받고는 표류하고 기거(壽居)한 사유와 지나온 창해의 험한 물결과 산천의 뛰어난 유적과 풍속의 다른 점을 대략 진술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지방을 지나면서도 혼자 장관이라 생각했는데 그대가 보기에는 별 것이 아니겠구료”라고 하였습니다.
 
 
*기후
 
*인명
 
*지명
 
*지리
 
*역사
 
*사당
 
*사회(노래)
 
*외교
 
*관직
 
*충의, 성은
 
*유학
 
*행정
 
*심리(위안,기쁨)
 
*심리(자긍심)
 
*경천
 
 
 
27th Day. Arriving at Yü-yang Station and Meeting an Envoy of Thanksgiving. This day was cloudy; at night there was heavy rain.
 
 
[We went from Pai-chien Stop to Yü-yang Station, about five li south of Chi-chou.]
 
Chi-chou had been the Yü-yang-chün of Ch’in and Han. When An Lushan of T’ang rebelled [755-763], he occupied it. Later it took the name of the old Chi-men Pass. P’an-lung Mountain is in the northwest and K’ung-t’ung Mountain in the northeast. Inside the wall are the prefectural capital and the headquarters of Chi-chou Garrison, Chen-shuo Garrison, and Ying-chouyu-t’un Garrison. In the northwest corner of the headquarters is the shrine of Chang K’an. When K’an was Governor of Yü-yang, he taught the people to plant. A children's song says, “Two ears on each stalk of wheat ..."23 That is in memory of him. His shrine is kept like new.
 
When we were about to set out, a man rushed up and reported that an ambassador from Korea was coming. I talked it over with Chang Shu-tsu: “An envoy from my country is coming shortly. If we meet on the road, we must pass with no more than a bow. I should like to stay here a little and hear things about my homeland.”
 
Chang Shu-tsu said, “All right.”
 
That afternoon, Song Kôn, Chief Secretary in the Privy Council and Envoy of Thanksgiving, 24 First Secretary Yun Chang, Ch’oe Cha-jun, Wu Ung, Sống Chung-on, Kim Maeng-gyỏng,25 Chang U-gi, Han Chỉung-sang, Han 23
 
Kữn, O Kũn-wi, Kim Kyõng-hui, Kwồn Hui-ji, Sông Chun-saeng, Yi Ủi-san, Pak Son, and Chong Hùng-jo came and lodged at the station. When I called on the Envoy in the central garden, he came down the steps, returned my low bow, and said to me, “His Highness is well, the State is without incident. Your home district has also been spared misfortune. When His Highness heard that you had drifted to sea and not returned, he sent down instructions to the Board of Rites to order the governors of all the provinces to notify all officials along the coast to search thoroughly and report back quickly. Moreover, copies of these instructions were sent to Tsushima Island and the islands of Japan by earliest envoys.26 Kyongjun, Right Receiver of the Royal Edicts, in turn made the instructions known accordingly. How impossible it is to measure His Highness's graciousness!”
 
I bowed and left. I said to Kim Chung and others, “We are little people. Like the life and death of cicadas and flies, our life is no gain to Heaven or earth, and our death is no loss. How wonderful that His Highness's thoughts should go out like that to little people! It has been by such royal sympathy that our lives have been saved from certain death as they have.” Kim Chung and the others wept with emotion.
 
In a short while, the First Secretary and Ch'oe Cha-jun came to the place where I was staying and talked more fully about recent affairs at home. They said, “When we first heard the report that you had drifted away and drowned, everyone lamented your death. Sơng Hi-an alone said loudly, 'I feel that Ch'oe Pu cannot die at sea. Sooner or later he must return alive. Now we meet and prove the truth of what he said.”
 
| At dusk the Envoy invited me to sit with him. He offered me dinner and had some sent to my secondary officials, and I thanked him: “I am an unfilial son, my sins have been great: not having died myself, misfortune extended to my dead father. I have not yet beaten my breast or stamped my feet by the coffin; rather, I have been driven by a typhoon, my insides have collapsed, and I have thought I should not survive. I went east more than six thousand li and fortunately arrived at Min. Still, when I looked around me, I knew no one, and my speech was not understood. I have wanted to tell someone of my grief and suffering; meeting you now, therefore, is like seeing my father and mother.”
 
The Envoy said, “I first heard that you had reached Chekiang and other places alive when I met His Excellency An's party at Tung-pa [Stop?]. I was weak with joy.27 Is it not fortunate that I have met you unexpectedly today?” He then said, “A groom in this group of mine died on the way. It is certainly hard to keep everyone alive over thousands of li. Did some of the men who went with you also die?”
 
I said, “Fortunately, all forty-three of us survived. All of us have come here."
 
The Envoy said, “Heaven really saved you, really saved you. Not only saved you, but did it through His Highness's virtue. We can be happy for that.”
 
I was then questioned by the Envoy and described in general the circumstances of my drifting and staying at places, the dangers of the ocean we crossed, the outstanding geographical sites, and the differences of custom. The Envoy said, “When my party passed some places, I thought we were doing great things. When I have seen what your eyes have beheld, there will be little left to impress me."
 
 
124. 嘉靖《州志》권2, 郵驛, 鋪舍附에는 百間鋪로 되어 있다.
 
125. 民國《縣志》 권8, 故事에 의하면 어양역은 1州城 남문에서 3리의 거리이다. 嘉靖《州志》권2, 郵驛에 의하면 어양역의 舊名은 州驛이다.
 
126. 唐玄宗 때 반란을 일으킨 무장이다. 6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그는 무역담당관이 되었고, 뒤에 范陽節度使 밑에서 무관으로서 공을 세워 范陽·河東節度使를 지냈다. 황태자와 당시 재상인 楊國忠이 玄宗과의 사이를 이간질하자, 755년 15만 대군을 거느리고 중원으로 쳐들어왔는데, 이를 '安祿山의 亂'이라 한다. 이듬해 스스로 大燕 황제라 칭하고, 한때 화북지방의 주요부를 점령하였다. 이듬해 후계자 문제로 둘째 아들인 安慶緖에게 살해당했다.
 
127. 秦漢시대에 설치된 漁陽郡은 魏晉시대에는 幽州에 속했는데, 隋代에 다시 漁陽郡을 두었다가 唐 開元18年(730)에 과거의 門關이 있었다는 이유로 1州라 부르게 되었다. 《舊唐書》권39, <志十九地理2;《明一統志》권1, 〈京師등 참조.
 
128. 盤山의 다른 이름으로 그 외에 田盤山, 徐無山, 四正山 등으로도 불린다. 民國《縣志》권1, 地理,
 
129. 後漢初의 인물로 16세 때 長安에서 공부하여 聖童이라 불려졌다. 光武帝가 즉위하자 郞中에 임명되었고, 후에 蜀郡太守가 되어 蜀의 公孫述을 평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騎都尉에 임명되어 흉노를 격파하였으며, 漁陽太守가 되어 狐奴 지방에 稻田 8천여 項을 개간케 하고 백성에게 농업을 진작시켰다. 큰 치적을 쌓아 백성으로부터 추앙을 받고, 흉노도 더 이상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고 한다. 《後漢書》 권31, 列傳제20.
 
130. 班固의 《東觀漢記》권15, 張甚에 장감이 漁陽太守였을 때 선정을 베풀어 稻田 8천여項을 정비하는 한편 경작 방법을 가르쳐주어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해지자 “桑無附 枝, 麥穗兩岐, 張君爲政, 樂不可支”라는 동요가 생겼다고 한다. 원문의 '麥秀兩岐가 바로 麥穗兩岐'로서 풍년의 조짐을 상징한다. 후대에는 지방관의 선정을 뜻하는 말 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131. 中樞府는 朝鮮前期 王命의 출납, 兵器, 軍政, 宿衛 등의 일을 맡았다. 1392년에 中樞院을 설치하였고, 정종2년(1400)에 三軍府로 고쳤다가 태종9년(1409)에 중추원으로 복구하였으나, 세조12년(1466) 중추부로 고쳐 文武 堂上官으로서 任職이 없는 자를 일정한 사무를 맡기지 않고 우대하는 의미로 두게 되었다. 정원은 領事(정1품) 1명, 判事 2명, 知事 2명, 同知事 7명, 僉知事 8명, 經歷 1명, 都事 1명을 두었다. 知中樞府事는 바로 위의 知事를 말한다.
 
132.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昌寧이고, 자는 子强이며 시호는 文惠이다. 세조8년 (1462)에 司馬試에 합격하고 146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檢閱, 典籍, 持平, 掌令, 執義 등 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486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에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1488년 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후에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면서 각 부의 判書職을 두루 거쳤다.
 
133. 중국에 보내던 朝鮮 使節의 일행인 正使, 副使, 書狀官 등의 세 使臣 가운데, 書狀官은 기록관을 말하며 외교문서에 관한 직무를 분담하였다. 사행 중 매일 매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돌아온 후에 왕에게 見聞한 바를 보고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정사나 부사보다 지위는 낮았으나 行臺御史를 겸하여 일행을 감찰하고, 강을 건널 때에는 일행의 人馬와 下 등을 점검하였다.
 
134. 조선 전기의 驛官이다. 성종 원년(1470) 명나라에서 姜浩라는 사신이 와서 태평관에 머물러 있을 때 사신이 앵두를 보고 서로 對句를 짓자고 청했는데 여기에서 거침없이 응대하여 찬사를 받았다. 명나라 사신과의 聯句를 잘 지었다 하여 韓明로부터 鹿皮 한 장을 상으로 받았다. 1486년 賀正使 柳子光을 따라 통사로 北京에 다녀왔다.
 
135. 조선시대의 관청으로 南宮 혹은 春官이라고도 한다. 庶政을 집행하던 중앙 행정관청인 六曹의 하나이다. 禮樂, 祭祀, 宴享, 외교, 학교, 科擧 등을 맡아 관장하였다. 관원으 로는 判書(정2품), 參判(종2품), 參議 각 1명을 두어 이를 三堂上 또는 禮堂이라 하였으며, 正郞(정5품), 佐郞(정6품) 등 堂下官 각 3명을 두어 이를 郞官이라 하였다.
 
136. 조선시대의 관직으로 承政院에 소속되어 있던 정3품의 당상관직이다. 태종 원년(1401)에 승정원 소속 정3품 堂上官이었던 右承旨의 이름을 바꾼 것이며, 정원은 1명이다. 우승지는 禮曹와 그 부속 아문에 관련한 王命의 출납과 보고 업무를 맡아보 았으나, 右代言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戶口, 貢賦, 田稅 및 유통관계 사무와 관련한 戶房의 업무를 담당했다. 세종15년(1433)에 명칭이 다시 우승지로 환원되었다.
 
137.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善이다. 세조12년(1466) 강원도 別試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고, 承政院注書, 工曹佐郞, 司諫院司諫 등을 거쳐 忠州牧 使로 나갔다가 이어 掌諫院判決事, 承政院左副承旨·右副承旨를 거쳐 中樞府僉知事에 이르렀다.
 
138 출전은 다음과 같다. “朝萬不知晦깨, 應站不知春秋”《莊子》권1, 〈內篇 逍遙遊); “春夏之月, 有网者, 因雨而生, 見陽而死” 《列子》 권5, (湯間).
 
 
139. 조선의 문신으로, 호는 仁齋이다. 成宗11년(1480) 생원이 되고 148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正字를 지냈다. 燕山君11년(1504) 이조참판 겸 부총관 때 양화도(楊花渡) 놀이에서 연산군의 횡포를 풍자한 시를 지어 바쳤다가 미움을 사 吏曹參判에서 종9품 副司勇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연산군의 정치가 더욱 난폭해지자, 그는 燕山君13년 (1506) 박원종 등과 中宗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우고 형조판서 가 되었다. 이어 昌山府院君에 봉해지고 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反正의 불가피성을 납득시켰다. 귀국한 뒤 우의정을 거쳐, 中宗5년(1513) 영의정에 이르렀다.
 
 
===28일===
 
二十八日,朝雨而陰,使臣叫臣至前,又饋早飯,因贈以口粮十__、管帽二事、扇十把、理中二十丸及諸般餵物,又叫件送臣等之百戶,語日:“你送我國人,善自護恤,嘉喜嘉喜”贈以笠帽、扇子等物,又分帽、扇于臣之陪吏等,書狀官亦臣以夏衣一領、布鞭一雙,崔自俊、禹雄亦各以扇二柄為行豔,使臣又搞臣之從者以酒肉,各有差,因謂臣曰:“日漸惠熱,路猶阻長,少不調護,疾病纏身,努力加餐,好還本國,以孝慈闡云云。時有李(預)【禎]醉感,使臣所饋,突入前,極陳在海浮沉之苦,臣即告辭而別,過永濟橋,橋跨龍池河,一名漁水,流入白龍港,談傅此橋乃安祿山所築也,又過泰山東岳廟、五里店、八里鋪、別山里、石河鋪、枯樹里,至陽樊露, 뒷부분 없음. 덧붙일 것.
 
 
아침에 비 내리다 흐렸습니다.
 
 
사신이 신을 불러 앞에 오게 하고는 또 아침밥을 접대했으며, 이어 [https://ko.dict.naver.com/small_search.nhn?kind=all&query=%EA%B5%AC%EB%9F%89 구량(口糧)] 10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0643 입모(笠帽)] 2개, 부채 10자루, [https://ko.dict.naver.com/small_detail.nhn?docid=30693400 이중환(理中__)]142 20알과 여러 가지 음식물을 주었습니다.
 
 
또 신 등을 호송하는 백호(百戶)를 불러,
 
 
"당신이 우리나라 사람을 호송하면서 잘 보호해 주었으니 가상한 일이오, 가상한 일이오”라 하고는 입모, 부채 등 물건을 선사했으며, 또 모자와 부채를 신의 배리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서장관도 신에게 여름 옷 한 벌과 베버선 한 쌍을 선사했으며, 최자준과 우웅도 각기 부채 두 자루를 전별하는 선사품으로 주었습니다.
 
 
사신이 또 신의 종자들에게 술과 고기를 각기 '''차등 있게''' 주고 위로하였습니다.
 
 
이어 신에게,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데 길은 아직 험하고 머니, 조금이라도 몸조리를 하지 않는다면 병이 생길 것이오. '''애써 밥을 더 먹고 본국으로 잘 돌아가서 자당(慈堂)에게 효도'''를 하시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이 때 이정이 술에 취한 데다 사신이 베푼 대접에 감격하여 갑자기 앞으로 뛰어나와 바다에 있을 때 물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던 고생한 이야기를 빠짐없이 늘어놓았습니다.
 
 
신은 곧 하직을 고하고 작별하였습니다.
 
 
영제교(永濟橋)<ref>[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8%81%EC%A0%9C%EA%B5%90(%E6%B0%B8%E6%BF%9F%E6%A9%8B) 경복궁 영제교]</ref>를 지나니 영제교는 어수(漁水)라고도 하는 [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10287&sType=&q=&secType=uf&&fq=cateType2_fct%3A%EC%A7%80%EB%AA%85%2F%EC%9E%90%EC%97%B0%EC%A7%80%EB%AA%85&fq=cateArea1_fct%3A%EC%A4%91%EA%B5%AD 용지하(龍池河)]<ref>[http://m.blog.daum.net/greatcoreaen/1946?tp_nil_a=2 열하일기 4.관내정사(關內程史)]</ref>에 걸쳐 있었는데 백룡항(白龍港)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민간에서는 이 다리를 바로 안록산이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또 태산동악묘(泰山東岳廟)·오리점(五里店)·팔리포(八里鋪)·별산리(別山里)·석하포(石河鋪)·고수리(枯樹里)를 지나서 양번역(陽樊驛)에 이르렀습니다.
 
 
*기후
 
*시간
 
*음식
 
*약
 
*외교
 
*인명
 
*기물
 
*음식
 
*유학
 
*심리(안도,감격,한탄)
 
*토목
 
 
28th Day. The morning was rainy and cloudy.
 
 
The Envoy called me before him, served me breakfast and then presented to me ten pecks of ration rice, two rain hats, ten fans, twenty li-chung (pills],28 and several kinds of food. He then called for the Centurion who was escorting us and said to him, “You are escorting my countrymen well, giving them your own protection and sympathy. I am extremely pleased.” He then presented to him rain hats, fans, and other things. He distributed hats and fans to my secondary officials. The First Secretary also presented to me one summer gown and a pair of cloth slippers. Ch’oe Cha-jun and Wu Ung also each gave us two fans as farewell gifts.
 
The Envoy feasted my followers, each according to his rank, with wine and meat. He said to me, “The days are gradually getting hotter, and the way is long and dangerous. If you are even a little careless, sickness will cripple you. If you take pains to eat enough, you will return safely home to be filial to your mother.” Just then Yi Chòng, beside himself with gratitude for what the Envoy had given him, came suddenly to the very front and described the hardships of drifting at sea. I took my leave and went.
 
[We went from Yung-chi Bridge to Yang-fan Station.]
 
 
140. 복건의 동부 지역을 뜻한다. 그러나 최부 일행이 도착한 곳은 鬪東이 아닌 浙東 즉浙江이므로 이는 착오이다.
 
141. c馬는 말을 돌보는 직책
 
142. 소화를 촉진하고 영양을 보하는 알약.
 
 
===29일===
 
二十九日,過玉田縣,遇天使於道上,是日晴,過扣鋪,至宋亭橋,橋跨藍水河,至玉田縣,-->이 부분 해석 없음. 해야함.
 
 
 
由藍田門入城,至藍田遞運所,小泉·徐無等山,俱在東北二三十里間,燕山在西北,距城二十餘里,蘇軾詩所謂燕山如長虫也,千里限夷漢者也,臣間諸張述祖曰:“傅聞此地乃漢右北平之地,李廣射虎沒羽之石,在何方?”述祖曰:“距此東北三十里有無終山,山下有無終國舊基及北平城遺址,城即李廣出獵遇石之處,山上又有燕昭王之嫁”臣等又過孝子李茂雄門,出城東門,門即興州左衛之門也,行過韓家莊二里許,遇有二官人乘轎而至,有節鐵、鋼牌,前導者呼曰:“下馬,”臣即下馬,二宫人呼臣來前,日:“你是何許人?”臣未及對,上官人令臣寫其手掌,有張仲英奄至,備陳臣之姓名及遭風漂還之事,上官人顧謂臣曰:“你國人已知你生
 
 
p.444
 
到中國”云云,臣謝辑而退,問其官人為誰,仲英曰:“前去者乃翰林學士董越,後者乃給事中王敬,前月間奉皇帝,往頒你國,今是回還之時也。”又過兩家店、沙流河鋪,至永濟驛。
 
 
옥전현(玉田縣)을 지나 천사(天使)143를 길에서 만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구유포(加諭鋪)를 지나서 채정교(采亭橋)에 이르니 채정교는 남수하(藍水河)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달려서 옥전현에 이르러 남전문(藍田門)을 통하여 성안으로 들어가 남전체운소(藍田遞運所)에 이르렀습니다.
 
 
소천산(小泉山)과 서무산(徐無山)은 모두 동북방의 20-30리 사이에 있고 연산(燕山)<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ovepirate&logNo=220731407526&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조선 후기 고지도를 통해 살펴보는 조선의 국경]</ref>은 서북방에 있어 성과의 거리가 20여 리였는데, 곧 소철(蘇轍)<ref>[http://luckcrow.egloos.com/v/2544062 명(明)과 원(元)은 (송과 달리) 동류가 아니다 (동북공정 관련 기록)]</ref>의 시에 이른바 '연산(燕山)은 긴 뱀과 같아, 천리에 걸쳐 오랑캐와 중국을 갈라놓았네'<ref>[http://m.blog.daum.net/manjumongol/991?tp_nil_a=1 명나라계주는 북경시이다]</ref><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attlcar&logNo=220862727510&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144라고 한 곳이었습니다.
 
 
신이 장술조에게 묻기를, “전해 듣건대 이 지방은 곧 한(漢)나라 우북평(右北平)의 땅이라 하니, [http://www.next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71 이광(李廣)이 범을 쏘아서 활촉이 박혔다는 바위]<ref>[http://www.jeju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904 중석몰시, 제주신문, 2015.10.20]</ref><ref>[http://m.gamey.kr/index.php?fn=view&code=E116&idx=10 서한때 비강군이라 불린 장수는? gameY]</ref>가 146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이곳에서 동북으로 30리 떨어진 지점에 무종산(無終山)이 있고, 무종산 아래에 무종국(無終國)<ref>[https://bobjyeon.tistory.com/355 중원(中原)을 두렵게 한 고조선(古朝鮮) 거수국(渠帥國), 산융(山戎)1, 2018.12.07]</ref>147의 옛 터와 북평성(北平城)<ref>[https://earthlin9.tistory.com/13]</ref>의 유지(遺址)가 있습니다. 북평성이 바로 이광이 사냥하러 나가서 바위를 만났던 곳입니다.
 
 
산 위에는 [http://yangco.net/bbs/board.php?bo_table=inmyung&wr_id=163&page=2 연소왕(燕昭王)]148의 무덤도 있습니다.”
 
 
신 등은 효자(孝子) 이무(李茂)의 정문(産門)을 지나서 성의 동문으로 나왔는데, 동문은 곧 홍주좌둔위(興州左屯衛)의 문이었습니다.
 
 
가다가 한가장(韓家莊)을 지나서 2리가량을 가니 두 관인이 교자를 타고 왔습니다.
 
 
절월(節鍼)과 납패(鎭牌)를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말에서 내리시오”라며 소리치기에 신은 즉시 말에서 내렸습니다.
 
 
두 관인은 신을 불러 앞에 오게 하고 말하기를,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상관인(上官人)149 이 신으로 하여금 자기 손바닥에 쓰도록 했는데, 장중영(張仲英)이 재빨리 나타나 신의 성명과 함께 바람을 만나 표류되었다가 돌아가는 일을 상세히 진술하였습니다.
 
 
상관인은 신을 돌아보고, “당신 나라 사람들은 그대가 살아서 중국에 도착한 것을 이미 알고 있소” 운운하였습니다.
 
 
신은 감사하여 읍(__)하고 물러 나와 그 관인이 누구인가를 물으니 장중영이 말하기를,
 
 
“앞에 가신 분이 한림학사(翰林學士)5 [http://thesaurus.minchu.or.kr/search/view;jsessionid=B4E419007B3A3B453AFBB0C352694B94?dataId=4341&sType=&q=&secType=tt&&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B%AC%B8%EC%82%AC%2F%ED%95%99%EC%9E%90 동월(董越)]이고, 뒤 에 가신 분이 급사중(給事中) 왕창(王敬)입니다. 지난 달 황제의 칙서(勅書)를 받들고 당신 나라에 가서 반포하고 지금 돌아오는 길입니다 5'라고 하였습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kia_12502014_002&type=view&reSearchWords=&reSearchWords_ime= 성종실록 287권, 성종 25년 2월 14일 계유 2번째기사, 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우의정 허종의 졸기]</ref>
 
 
또 양가점(兩家店), 사류하포(沙流河鋪)를 지나서 영제역(永濟驛)에 이르렀습니다.
 
 
29th Day. Passing Yü-tien County and Meeting Imperial Envoys on the Road. This day was fair.
 
 
We passed K'ou-lun Stop and came to Ts’ai-t’ing Bridge, which spanned the Lan-shui River. Soon we came to Yü-t’ien County, entered the wall through Lan-t'ien Gate, and came to Lan-t'ien Transfer Station. Hsiao-ch'uan, Hsü-wu, and other mountains were twenty or thirty li to the northeast. The Yen Mountains were in the northwest, about twenty li from the wall. It is of them that it is said in Su Che's poem, “The Yen-shan are like a long snake,/ Separating Chinese from barbarians for a thousand li.”:29
 
I asked Chang Shu-tsu a question: “I have heard it said that this land was the land of Yu-pei-p’ing of Han. Where is the rock in which Li Kuang, shooting for a tiger, buried [the arrow] to the feathers ?”'30
 
Chang Shu-tsu said, “Thirty li northeast of here is Wu-chung Mountain, and at the bottom are the old site of Wu-chung-kuo and the ruins of the wall of Pei-p'ing. The wall was the place from which Li Kuang went out hunting and came upon a rock. On top of the mountain is also the tomb of Yen Chao Wang (traditionally r. 311 B.C.–279].”
 
We then passed the banner gate of Filial Son Li Mao and went out the east gate of the wall, which was the Gate of Hsing-chou-tso-t’un Garrison. When we had gone about two li past Han-chia Village, we met two officials, who rode up in sedan-chairs. They had tallies and halberds and pewter shields. The scouts shouted, “Dismount!” I dismounted.
 
The two officials called to me to come forward and said, “Who are you?”
 
Before I had answered, the senior official ordered me to write in the palm of his hand. Chang Chung-ying came up quickly and issued a statement of my name and the circumstances of my meeting winds, going adrift, and returning. The senior official turned and said to me, “Your countrymen already know that you reached China alive.”
 
I bowed in thanks and left. When I asked who the officials were, Chung-ying said, “The one in front is Tung Yüeh, Chancellor of the Hanlin Academy, and the second one is Wang Ch'ang, a Supervising Secretary. Last month they received orders from the Emperor to go to your country with gifts, and now they are returning.”31
 
We passed Liang-chia Stop and Sha-liu-ho Stop and came to Yung-chi Station.
 
 
143. 天子 즉 중국의 皇帝가 파견한 使臣을 말한다.
 
144.《模城集》권16에 실린(燕山)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燕山如長蛇, 千里限夷漢. 首銜西山麓, 尾掛東海岸, 中開哆箕畢, 未路牽一線, 却顧汝漢平, 南來獨飛, 居民 異風氣,自古智耕戰,上論召公奭,禮樂比姬旦,次稱望諸君,術客亞狐管,子丹號無策, 亦數遊俠冠, 割棄何人斯, 喔環久不辭. 哀哉漢唐餘, 左#今已半. 玉帛非足云, 子 女强蹈踐. 區區用我素, 久爾藤郡縣. 從來帝王師, 要在海仁亂. 攻堅甚攻玉, 乘易冰泮, 中原但堂治, 敵勢要自變, 會當挽天河, 洗此生齒萬."
 
145. 漢武帝 때의 장군으로 집안이 대대로 射法에 뛰어나 文帝14년(B.C.166)에 良家子로서 匈奴의 토벌에 참가하였고, 吳楚七國의 亂에서도 위용을 떨쳤다. 漢武帝 시대에 들어와 衛靑 등과 함께 흉노를 토벌하여 성공하기도 하였으나, 元狩4년(B.C.119)에 는 흉노 토벌 계획을 잘못 써서 軍中에서 자살하였다. 상으로 하사받은 것은 전부 부하에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를 위해 죽기를 바랄 정도였다고 한다.
 
146.《史記》권109 (李將軍列傳〉에 이광이 사냥을 나가서 돌을 범으로 생각하여 활을 쏘았더니 활촉이 돌에 박혔다는 故事가 전해진다.
 
147. 춘추시대 國名.
 
148. 戰國時代 燕나라의 군주(재위 B.C.311-B.C.279)이다. B.C.315년에 연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齊나라가 기회를 틈타 공격하여 燕王과 그의 아들을 죽였다. 韓나라에 유랑하고 있던 그가 귀국하여 B.C.311에 즉위하였다. 자신을 낮추고 후한 폐물로 인재를 초빙하니, 樂毅 등이 연나라로 왔다. 그는 악의를 上將軍에 임명하였고, 국세 가 날로 강해졌다. B.C.284년에 각국이 연합하여 齊나라를 공격하는데, 악의를 파견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70여 성을 점령하였다.
 
149. 長官에 대한 존칭.
 
 
===30일===
 
三十日,過豐潤縣,是日陰,早發行至漢水,一名還鄉河,下流入梁河. 諺傅唐太宗征遼還時所名,又過登雲門,至豐潤縣城西門,門之重城內,有火神廟,入其城,過武安王廟、騰霄門、繡衣門,復出城東門,門之楣刻書‘興州前衛,門外有在城總鋪,鋪之東有東關遞運所,所有官員姓名田能也,鬚眉皓白,頗示款待之意,請藏吏鄭文宗,速討車輛,以送臣等,文宗啡然怒撥田能之巔,其大無官衙上下之節類如此,縣有鴉鵑、靈應二山在西北,陳宮山在北,崖兒口山在東北,馬頭、明月、腰帶三山在東,唯鴉鵑近城。臣等又過林城鋪,至義豐驛.
 
 
풍윤현(豐潤縣)<ref>[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fcs=&fcsd=&cf=&cd=&gb=&aa10up=&aa10no=kh2_je_a_vsu_24518_006&aa15no=006&aa20no=24518_006_0007&gnd1=&gnd2=&keywords=&rowcount=10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ref><ref>[https://wkiss.wikim.re.kr/m/board/publication/download/16/1 김치와 김장문화의 인문학적이해, 세계김치연구소]</ref>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일찍 출발하여 환향하(還鄕河)<ref>[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fcs=&fcsd=&cf=&cd=&gb=&aa10up=&aa10no=kh2_je_a_vsu_24518_006&aa15no=006&aa20no=24518_006_0006&gnd1=&gnd2=&keywords=&rowcount=10 ]</ref>라고도 하는 경수(硬水)에 이르렀는데 물길은 양하(梁河)로 흘러 들어갔습니다.<ref>[http://m.blog.daum.net/manjumongol/668?np_nil_b=-1 고구려 오골성을 찾았다.]</ref>
 
 
* 열하일기에 나오는 환향하 참고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당태종(唐太宗)152 이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에 지은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등운문(登雲門)을 지나서 풍윤현성(豐潤縣城) 서문에 이르니 서문의 겹성의 안에 화신묘(火神廟)가 있었습니다.
 
 
그 성으로 들어가 무안왕묘(武安王廟)153, 등소문(騰門), 수의문(繡衣門)을 지나서 다시 성의 동문으로 나오니, 동문의 문미(門)154에는 '홍주전둔위(興州前屯衛)'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동문 밖에 재성총포(在城總鋪)가 있고, 그 포의 동쪽에는 동관체운소(東關遞運所)가 있었습니다.
 
 
체운소에 있는 전능(田能)이라는 관원은 수염과 눈썹이 하얀 노인이었는데 자못 간곡히 대접하려는 뜻을 보이면서, 장타리(藏採吏)155 정문종(鄭文宗)을 꾸짖어 속히 수레를 준비하여 신 등을 보내게 하자 정문종은 발끈 성을 내며 전능의 수염을 뽑아 버렸습니다.
 
 
관아에서 상하의 예절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이와 같은 정도였습니다.
 
 
풍윤현에는 아골산(__鴻山), 영응산(靈應山) 두 산이 서북쪽에 있고, 진궁산(陳宮山)이 북쪽에 있고, 애아구산(崖兒口山)<ref>[http://m.blog.daum.net/han0114/17050065?np_nil_b=-1 우즈베키스탄과 철문관]</ref>이 동북쪽에 있고, 마두산(馬頭山), 명월산(明月山), 요대산(腰帶山) 등이 동쪽에 있었는데, 아골산만이 성에 가까웠습니다.
 
 
신 등은 또 임성포(林城鋪)5%를 지나서 의풍역(義豐驛)에 이르렀습니다.
 
 
*기후
 
*지명
 
*언어(어원)
 
*역사
 
*지리
 
*묘소
 
*인명
 
*인물
 
*유학
 
 
30th Day. Passing Feng-jun County. This day was cloudy.
 
 
[We went from the Keng River past Feng-jun County to I-feng Station.]
 
 
150. 翰林院은 掌院學士가 1인으로 정5품이다. 그 아래가 侍讀學士와 侍講學士로 각 2인이며 모두 종5품이다. 制話, 史冊, 文翰의 일을 관장하였다. 제도를 연구하고 의논하 며 문서를 상세히 알고 바로잡아 황제의 顧問에 대비하였다. 經筵에서 日講을 하였 고, 實錄을 纂修하였으며, 史志諸書로 勅을 받든 것은 모두 맡아 하였다. 品은 비록 낮지만 지위는 우대 받았다.
 
151. 弘治帝가 太子였을 때 東宮侍講을 지낸 적이 있는 左春防右庶子 兼翰林侍講 董越은 弘治帝의 즉위를 알리는 詔書를 들고, 頒詔正使의 신분으로 바로 弘治원년(1488) 2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 朝鮮에 들어왔다. 이때 工科右給事中 王아이 副使로 동행 하였다. 董越은 귀국 후에 《朝鮮賦》를 남겼다. 본인의 見聞과 조선 측에서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의 地志, 풍속, 산천, 인물, 畜産, 제도, 使行의 路程과 조선의 明使 접대 등을 정리 소개했다. 《朝鮮成宗實錄》 19년 2월 壬戌; 2월 癸亥 참조.
 
152. 唐의 황제(재위 626-649)로, 이름은 李世民이다. 총명하고 사려가 깊으며, 무술과 병법에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어, 소년 시절부터 사람들의 신망 이 두터웠다. 태자인 형과 동생을 죽이고 高祖를 강제 퇴위시킨 뒤 제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 돌궐을 비롯한 사방의 이민족을 누르고 세계 제국을 이루었다. 사사로운 마음을 멀리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정치를 하여, 이에 貞觀의 治라 칭송받았고, 뒤에 제왕 통치의 모범이 되었다.
 
153. 關羽를 제사지내는 묘. 宋 建炎연간에 壯穆義勇武安王으로 賜額되었다. 《明一統 | 志》권70 참조.
 
154. 문의 두 기둥 위에 가로로 댄 나무. 上引.
 
155. 庫藏의 庶務를 전담하는 관리.
 
 
===5월 1일===
 
五月初一日,陰,曉,至漢州地方,中國以州為商之孤竹國,我國李詹以海州為孤竹國,二說不同,未知孰是,又過鐵城鋪、狼窩鋪、杏兒、榛子鎭、忙牛橋店、個子里鋪,至遷安縣地方新店遞運所,其東洋家領驛.驛之東北三十里外,望有都山、蟒山、團山、黃臺、龍泉、晒甲等山,都山尤高峻特秀。
 
 
흐렸습니다.
 
 
새벽에 난주(漢州)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중국에서는 난주를 상(商) 나라의 고죽국(孤竹國)<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804041710515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5) 기자의 본향 ‘고죽국’
 
, 경향신문, 2008.04.04]</ref>이라 하고157, 우리나라 [http://a-joseon.mir9.co.kr/data/literature/view/227.do 이첨(李詹)은 해주(海州)를 고죽국]이라 하여 두 설이 다른데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 배구전<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1208&content_id=rp070312080001&search_left_menu=7]</ref>
 
* 고죽국, 고구려 <ref>[https://news.joins.com/article/5147388 고조선 유민 추, 옛 고죽국 땅서 고구려 건국 시동, 중앙선데이, 2011.03.06]</ref>
 
* 3단계 고조선史<ref>[https://www.yna.co.kr/view/AKR20160806025900005 "단군-기자-위만 '3단계 고조선史' 이제는 달리 봐야", 연합뉴스, 2016.08.07]</ref>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146 허종]<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cp0521&index_id=cp05210802&content_id=cp052108020001&search_left_menu=4 허종]</ref>
 
 
또 철성포(鐵城鋪)159, 낭와포(狼窩鋪), 행아현(杏兒峴), 진자진(榛子鎭), 망우교점(忙牛橋店), 전자리포(伯子里鋪) 지나서 천안현(遷安縣) 지방의 신점체운소(新店遞運所)에 이르니, 그 동쪽이 칠가령역(侯家嶺驛)이었습니다.
 
 
그 역의 동북쪽 30리 밖으로 도산(都山), 망산(山), 단산(島山), 황대산(黃臺山), 용천산(龍泉山), 쇄갑산(西甲山) 등이 보였는데, 도산이 더욱 높고 험준하며 특히 수려하였습니다.
 
 
*기후
 
*지명(외교? 독도와 다케시마)
 
*시간
 
*지리
 
*풍경
 
 
1st Day, Fifth Month. Cloudy.
 
[We went from Luan-chou to Ch’ai-chia-ling Station.]
 
 
157. 康熙《漢州志》권1, 世編에 의하면 商湯이 墨台(墨胎라고도 함. 伯夷·叔齊의 世祖이다)를 孤竹(濠州의 故地)에 封했다고 한다.
 
158. 麗末鮮初의 문신으로 본관은 新平이다. 자는 中叔이고, 호는 雙梅堂이다. 공민왕14년(1365) 監試에 합격하고, 공민왕17년(1368) 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유배생활도 두 차례나 하였다. 조선 건국 후 또한 여러 관직을 거쳐 知議政府事에 올라 登極使로 明에 다녀와서 正憲大夫가 되었다. 《三國史略》을 撰修했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에 《楮生傳》, 《雙梅堂集》 등이 있다.
 
159. 漢州의 ___로서 서쪽으로 豊潤縣과의 경계가 된다. 光緖《漢州志》권10, 建置.
 
 
===2일===
 
初二日,至永平府城南,是日晴,過沙河,至濠河,其間所過,有沙窩、色山、赤宰、白佛院、石梯子等鋪,藻河源自口北開平而來,北方諸山之水,合流為一,下流為定流河,入于海,臣等舟渡行七八里,又渡漆河,河與肥如河合流,繞永平府城西南,流入藻河,故又名護城河,伯夷、叔齊廟,在河之岸上,行二里,過迎恩、世英、冠英、尚義等門,至藻河睾,睾北二里有城,城上列建成樓,其一乃望高樓也,城中有府治及盧龍縣、永平衛、盧龍衛、東勝左衛治所,府即金之南京,盧龍即古肥子國,所謂盧龍塞外者也,有龍山、洞山、雙子、周王、馬鞍、陽山、灰山、筆架諸山,聯綿回抱,亦一形勝之地,購之南阜有景致,其上有寺,驛丞白思敬曰:“此開元寺也”時有錦衣衛官人拿的强盗來驛後廳,
 
 
영평부성(永平府城)<ref>[http://m.blog.daum.net/haedod/15670591 단군조선의 수도를 찾았다. 야호야호야호야호야호 야호 야호^o^]</ref>의 남쪽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사하(沙河)를 지나서 난하(漠河)<ref>[http://blog.daum.net/manjumongol/293]</ref>에 이르렀는데, 중간에 지난 곳으로 사와(沙窩), 색산(色山), 적봉(赤峯), 백불원(白佛院)'이, 석제자(石梯子) 등의 포(鋪)가 있었습니다.
 
 
난하는 원류가 장성 이북의 개평(開平)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북방 여러 산의 물이 합류하여 하나가 되고 하류는 정류하(定流河)가 되어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신 등은 배를 타고 건넌 뒤 다시 7-8리를 가서 또 칠하(漆河)를 건넜습니다.
 
 
칠하는 비여하(肥如河)와 합류하여 영평부성 서남쪽을 감아 돌아 난하로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호성하(護城河)라고도 불렀습니다.
 
 
백이(伯夷)·숙제(叔齊)<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oonhdu&logNo=220955360993&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의 사당은 칠하의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2리를 가서 영은문(迎恩門)·세영문(世英門)·관영문(冠英門)·상의 문(尙義門) 등을 지나서 난하역(豫河驛)에 이르니, 난하역 북쪽 2리에 성이 있었습니다.
 
 
성 위에는 많은 누각이 죽 늘어서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망고루(望高樓)였습니다.
 
 
성안에는 영평부치(永平府治)와 노룡현(盧龍縣), 영평위(永平衛), 노룡위(盧龍衛), 동승좌위(東勝左衛)의 치소가 있었습니다.
 
 
부(府)는 곧 금(金)나라<ref>[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25/2014062503300.html 고려를 부모로 모시던 여진족, 금나라 건국 후에는...조선일보, 2014.06.26]</ref> 남경(南京)이고, 노룡이 옛날의 비자국(肥子國)으로서 이른바 노룡새외(盧龍塞外)란 곳입니다.
 
 
용산(龍山)·동산(洞山)·쌍자산(雙子山)·주왕산(周王山)·마안산(馬鞍山)·양산(陽山)·회산(灰山)·필가산(筆架山) 등 여러 산이 길게 잇달아 둘러싸고 있었으니, 또 하나의 절경이었습니다.
 
 
역 남쪽 언덕은 풍경이 좋았는데 그 위에 절이 있었습니다.
 
 
역승(驛丞) 백사경(白思敬)이, “이곳이 개원사(開元寺)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금의위(錦衣衛)의 관인 이 강도를 잡아 역 뒤에 있는 청사(廳舍)로 왔습니다.
 
 
*기후
 
*지명
 
*지리
 
*인명
 
*언어(어원)
 
*건축물
 
*역사
 
*풍경
 
*불교
 
*사당
 
 
2nd Day. Arriving South of the Wall of Yung-p’ing Prefecture. This day was fair.
 
 
[From the Sha and Luan rivers we came to Luan-ho Station, near the wall of Yung-p’ing Prefecture.] The wall was two li north of the station, and a line of towers was built on top of it. One was Koryo-Lookout [Wang-kao] Tower. Inside the wall were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 of Lu-lung County, and the headquarters of Yung-p’ing Garrison, Lu-lung Garrison, and Tung-sheng Left Garrison. The prefecture had been a Nan-ching of Chin.32 Lu-lung had been old Fei-tzu-kuo and is the same Lu-lung that is often used to mean the land beyond the Wall. Lung, Tung, Shuang-tzu, Chou-wang, Ma-an, Yang, Hui, and Pi-chia mountains were there, linked one to the next and curving round in a natural barrier.
 
South of the station a mound dominated the scenery, and on top of it was a Buddhist temple. Pai Ssu-ching, the Station Master, said “This is K’ai-yuan Temple.” At that time, an official of the Imperial Bodyguard, coming to arrest bandits, came to the office behind the station.
 
 
===3일===
 
初三日,在灤河驛,是日晴,張述祖令其子仲英還于北京,仲英誤懷兵部交付臣等于廣寧太監之關文而去,述祖使人追之,日暮乃返,故不得已而留,夜,大雷電以雨,
 
 
난하역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장술조가 그 아들 중영을 북경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중영이 잘못하여 병부에서 신 등을 광녕태감(廣寧太監)에게 넘겨주는 관문(關文)을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장술조가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는데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와 하는 수 없이 하루 더 묵게 되었습니다.
 
 
밤에 큰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렸습니다.
 
 
*기후
 
*지명
 
*인명
 
*행정
 
 
3rd Day. At Luan-ho Station. This day was fair.
 
 
Chang Shu-tsu ordered his son Chung-ying to return to Peking. Chung-ying left, taking with him by mistake the document by which the Ministry of War was to transfer us to the Overseer of Kuang-ning. Chang Shu-tsu sent a man after him, but since it was sunset when he returned, there was nothing to do but stay there.
 
At night there were heavy thunder, lightning and rain.
 
 
===4일===
 
初四日,至撫寧衛,是日晴,過東關遞運所,至聽槽河,河之北岸,有大石如槽,號為石槽,該傳唐張果飼聽之器,又過國家鋪、十八里鋪、雙望鋪、儀院嶺鋪、蘆宰口鋪、讓消鋪,至陽河,河源出列陀山,經撫
 
p.446
 
寧縣城西八里許,又過民壯教場門,入撫寧縣城西門,過關王廟,寓于撫寧衛,兔耳、罐子、大崇、連宰諸山,圍城之南北,治西有西關遞運所,
 
 
무녕위(撫寧衛)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동관체운소(東關遞運所)를 지나서 여조하(驪槽河)에 이르렀습니다.
 
 
여조하의 북쪽 언덕에는 구유 같은 큰돌이 있는데, 석조(石槽)라 호칭하였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당나라 장과(張果)165가 당나귀를 먹이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국가포(國家), 십팔리포(十八里鋪), 쌍망포(雙望鋪), 의원령포(儀院嶺鋪), 노봉구포(盧峯口鋪), 녹궁포(遠遠鋪)를 지나서 양하(陽河)에 이르렀는데, 양하의 원류는 열타산(列陀山)에서 나옵니다.
 
 
무녕현성(撫寧縣城) 서쪽을 8리가량 지났습니다.
 
 
또 민장교장문(民壯敎場門)을 거쳐서 무령현성의 서문으로 들어가 관왕묘(關王廟)를 지나서 무령위에 유숙하였습니다.
 
 
토이산(兔耳山)168, 화자산(罐子山), 대숭산(大崇山), 연봉산(連峯山)169 등 여러 산들이 성의 남북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치소의 서쪽에 서관체운소(西關遞運所)가 있었습니다.
 
 
4th Day. Arrival at Fu-ning Garrison.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Tung-kuan Transfer Station to Fu-ning Garrison and stopped there.]
 
 
165. 속칭 張果老라고 하며, 唐代의 인물이다. 도교 8의 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中條山에 은거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에게 長生의 비술이 있다고 하였고, 스스로 수 백세라고 하였다. 일찍이 武則天의 부름을 거절하였다. 開元22년(734)에 玄宗이 洛 陽의 궁중에 불러들여 후한 예우를 하고는 治道와 신선의 일을 물었다. 銀靑光祿大夫의 직함과 通玄先生이란 호칭을 내렸으며, 은거하는 곳에 棲霞觀을 지어 주었다. 
 
166. 康熙《永平府志》권6, 公廨에는 義院嶺背陰鋪가 있어 본문의 儀院嶺鋪의 儀는 義字의 誤記로 보인다.
 
167. 康熙《永平府志》권6, 公廨에 盧峯口鋪에서 10리 거리에 綠灣鋪가 있는데 본문의 遠消鋪가 이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
 
168. 撫寧縣治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서 두 개의 봉우리가 토끼의 귀처럼 솟아올라 耳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康熙《撫寧縣志》 권2, 地理.
 
169. 撫寧縣治에서 동남 방향으로 30리 거리의 聯峰山을 지칭하는 듯하다. 그 속명은 蓮峰山이다. 康熙《撫寧縣志》 권2, 地理.
 
 
===5일===
 
初五日,過山海關,是日晴,由調橋入山海衛西門,至儒學門,問所謂味鋪,--> 이 부분 이상함.
 
 
至榆關店,店舊為關,今移為山海關,店之東有河,河之上有臨涂山,隋開皇中伐高句麗時,漢王諒帥兵出檢關者,即此地也,又過檢關驛、半山鋪而行,路西北有海陽古城,城之北有列陀山,山高聳為諸山之雄,又過張 (古)【果】老河,至娘子河,日已薄暮,河邊有人居三四屋,借器做飯,又過十餘里,停車于名不知路街,
 
 
유관역(__關驛)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청운득로문(靑雲得路門)을 지나 성 동문을 나간 다음 흥산포(興山鋪), 배시포(背時鋪)를 지나서-->??
 
 
 
유관점(關店)에 이르렀습니다.
 
 
유관점이 옛날에는 관(關)이었으나 지금은 산해관(山海關)으로 옮겼습니다.
 
 
유관점 동쪽에 투하(兪河)가 있고 유하 상류 쪽에 임투산(臨流山)이 있었습니다.
 
 
수(隋) 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고구려를 칠 때 한왕(漢王) 양(詠)이 군사를 거느리고 유관을 나왔는데 바로 이곳이었습니다.<ref>[http://m.blog.daum.net/rkdauddbs/16493289]</ref>
 
 
또 유관역, 반산포(半山鋪)를 지나서 가니, 길 서북쪽에 해양고성(海陽古城)이 있었습니다.
 
 
고성의 북쪽에는 열타산이 있었는데 열타산은 높이 솟아 여러 산의 으뜸이었습니다.
 
 
또 장과로하(張果老河)를 지나서 낭자하(娘子河)에 이르니 해는 벌써 저물었습니다.
 
 
강가에 인가 서너 채가 있었으므로 그릇을 빌어 밥을 지었습니다. 또 10여 리를 지나 이름 모르는 길거리에서 수레를 멈추었습니다.
 
 
5th Day. Passing Yü-kuan Station. This day was fair.
 
 
We passed Ch'ing-yün-te-lu Gate and went out the east gate of the wall. We passed Hsing-shan Stop and Pei-shih Stop and came to Yü-kuan Stop. The stop had formerly been a pass which had now been moved to Shan-hai-kuan. East of the stop was the Yü River, and Lin-yü Mountain was above the river. When Kogury> was being brought to submission in the K’ai-huang period [581-600] of Sui, that was the Yü-kuan from which Han Wang Liang led troops.33
 
We went on, past Yü-kuan Station and Pan-shan Stop. Northwest of the road was the old wall of Hai-yang, north of which was Lieh-t'o Mountain. The mountain was high and majestic, the boldest among the mountains. We passed the Chang-ku-lao River and came to the Niang-tzu River. The day was already growing dark. On the river bank, where there were three or four houses, we borrowed utensils to make a meal. We passed more than ten villages and stopped the carriages at a road whose name I do not know.
 
 
===6일===
 
初六日,晴,行至石河,南有五花城,乃唐太宗征高句麗時薛仁貴所築也,至遷安驛,驛在山海衛城西門外,城之東南有孤山臨海濱,城北有角山吃立,山海關當其中,北負山,南帶海,相距十餘里間,為夷夏要險之地,秦將蒙恬所築長城,跨出于角山之腹, ____爲衛之東城,以達于海. 有東門遞運所在城中.
 
 
맑았습니다.
 
 
가다가 석하(石河)에 이르렀습니다.
 
 
남쪽에 오화성(五花城)이 있었는데,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4&cp_code=rp0703&index_id=rp07032258&content_id=rp070322580001&search_left_menu=8 설인귀(薛仁貴)]<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orebs&logNo=130117278485&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가 쌓은 것이었습니다.174
 
 
천안역(遷安驛)에 이르니 천안역은 산해위성(山海衛城)175 서문 밖에 있었습니다.
 
 
성 동남쪽에는 고산(孤山)이 바닷가에 접해 있고 성 북쪽에는 각산(角山)이 높이 솟았는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7225 산해관]<ref>[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rp0702&index_id=rp07020221&content_id=rp070202210001&search_left_menu=4]</ref><ref>[http://visitchina.or.kr/m/area/area03.asp?Action=view&Title=%ED%97%88%EB%B2%A0%EC%9D%B4%EC%84%B1&idx=288]</ref><ref>[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52263 갈석산과 산해관이라는 경계를 통해 만나는 우리 역사, 코리안스피릿, 2018.08.10]</ref><ref>[http://www.cmnews.kr/chinatravel/364993 만리장성 동쪽 끝에 자리한 산해관(山海館)‧노용두(老龍頭)‧각산장성(角山長城), 차이나매거진, 2019.01.26]</ref>이 그 복판에 있어 북으로 산을 등지고 남으로 바다를 면해 있는 10여 리가량의 거리가 오랑캐와 중국의 요충의 땅이었습니다.
 
 
* 각산+발해=산해관
 
 
진(秦)나라 장수 몽염(蒙店)이 쌓은 장성(長城)이 각산<ref>[http://m.blog.daum.net/hhl6103/988?np_nil_b=-1 열하일기 따라가기12 - 만리장성(각산장성, 산해관, 노룡두)]</ref> 복판을 타고 나와 비스듬히 뻗어서 산해위(山海衛)의 동쪽 성이 되어 바다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동문체운소(東門遞運所)가 성안에 있었습니다.
 
 
6th Day. Fair.
 
 
We went on, coming to the Shih River. In the south was the wall of Wu-hua, which had been built by Hsüeh Jen-kuei34 when T’ang T'ai Tsung was campaigning against Koguryð.
 
We came to Ch’ien-an Station, which was outside the west gate of the wall of Shan-hai Garrison. Southeast of the wall was Mt. Ku, overlooking the seashore. Mt. Chüeh was north of the wall, and at its very peak stood Shan-haikuan. There were some ten li between the mountains that pressed against the north and the sea that skirted the south. It was a strategic point between barbarians and Chinese. The Great Wall built by the Ch'in general Meng T’ien35 was projected from the waist of Mt. Chüeh, passed as the east wall of the garrison, and extended to the sea. In the wall was Tung-men Transfer Station.
 
 
174.《明一統志》권5, 〈永平府)에는 唐太宗征遼時所築이라 되어 있다.
 
175. 山海衛는 山海關內에 설치한 衛로서 10千戶所를 거느리고 北平都指揮使司에 예속되었는데, 永樂 연간 遷都 이후 畿輔로 바뀌면서 北平都司가 혁파되고 後軍都督府에 직속되었다. 宣德初 左中 2千戶所를 遼東에 배속시키고 山海衛는 나머지 8千戶所를 관할하게 되었다. 《山海關志》권1, 地理, 域.
 
 
===7일===
 
初七日,過山海關,是日晴,由주橋入山海衛城西門, 至儒學門, 門所謂味甘之雙文井,人皆以雙宰答之,過步雲門、給事元門、靈應兩,至東北第一關,即所謂山海關也,關之東有鎮東公館,有兵部主事官一員,率軍史常川坐館,東西行人皆識察是非以出入之,雖汲婦、樵童,亦皆給牌以表驗,張述祖列寫臣等姓名,告主事官,主事官一一呼名姓點之,然後乃出,出自關東城門,門之上建東關樓,門外有東關橋,跨海子,關外有望鄉臺、望夫臺,證傳望夫臺秦築城時,孟姜女尋夫之處,又過東遼一鋪、鎮遠鋪,鋪之東一里有小河,不記其名,又過中前千戶所城,城轄于廣寧之前屯衛也。城東又有小河,過至高嶺睾,睾有城。自此以後,瞬皆築城,遞運所同在一城中,
 
 
산해관<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105man&logNo=220354210879&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ref>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조교(調橋)를 경유하여 산해위성 서문으로 들어가 유학문(儒學門)에 이르러 이른바 물맛이 달다는 쌍문정(雙文井)을 물으니 사람들이 모두 쌍봉(雙峯)에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보운문(步雲門)·급사방아원문(給事方亞元門)·영응묘(靈應廟)를 지나서 동북제일관(東北第一關)에 이르니 이른바 산해관이었습니다.
 
 
산해관의 동쪽에 진동공관(鎭東公館)이 있는데 병부주사관(兵部主事官) 한 명이 군리(軍吏)를 거느리고 항상 그 공관에 앉아서 동서로 지나가는 자들 모두를 시비를 가려서 드나들게 하니, 비록 물 긷는 아녀자나 나무하는 동자일지라도 모두 패(牌)를 주어서 증표로 삼도록 하였습니다.179
 
 
장술조가 신 등의 성명을 죽 써서 주사관에게 알리니, 주사관은 일일이 성명을 불러서 점검한 뒤에 나가게 하였습니다.
 
 
산해관 동쪽 성문으로 나왔는데 문 위에는 동관루(東關樓)가 세워져 있고, 문 밖에는 동관교(東關橋)가 해자(海子)에 걸쳐 있었습니다.
 
 
산해관 밖에는 망향대(望鄕臺)와 망부대(望夫臺)가 있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망부대는 곧 진 나라가 장성을 쌓을 때 맹강녀(孟美女)'가 남편을 찾았던 곳'이라 하였습니다.
 
 
또 동요일포(東遠一鋪)·진원포(鎭遠鋪)를 지나니 진원포의 동쪽 1리에 작은 강이 있었지만 그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또 중전천호소성(中前千戶所城)을 지났는데 성은 광녕(廣寧)의 전둔위(前屯衛) 소속이었습니다. 성 동쪽에 또 작은 강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 고령역(高嶺驛)에 이르니 고령역에는 성이 있었습니다.
 
 
이곳부터는 역에 모두 성을 쌓았으며 체운소도 한 성 안에 같이 있었습니다.
 
 
7th Day. Passing Shan-hai kuan. This day was fair.
 
 
We entered the west gate of the wall of Shan-hai Garrison by way of Tiao Bridge and came to Ju-hsüeh Gate. When I asked about what has been called the Shuang-wen Wells of the excellent water, everyone called them Shuangfeng. 36 We passed Pu-yün Gate, Chi-shih-fang, Ya-yuan Gate, and Ling-ying Shrine and came to No. 1 Northeast Pass, which was called Shan-hai-kuan. East of the pass was Chen-tung Official Guest House. One Administrative Secretary of the Ministry of War, in charge of military petty-officers, was regularly stationed in the guest house. Everyone going east or west was inspected and allowed or forbidden to pass. Everyone, even women drawing water or servants gathering firewood, was issued a pass to show for inspection. Changtsu wrote a list of our names and reported them to the Administrative Secretary, who passed us only after he had called out the names one by one and verified them.
 
We went out Kuan-tung-ch'eng Gate, on top of which Tung-kuan Tower was built. Outside the gate was Tung-kuan Bridge, which spanned a lake. Outside the pass were Look Homeward Tower and Husband-Lookout [Wang-fu] Tower. According to legend, Husband-Lookout Tower was the place from which Meng Chiang-nü37 had sought her husband when Ch’in was building the Wall. We passed Tung-liao Stop 1 and Chen-yuan Stop. One li east of the stop was a small river, the name of which I do not remember. We passed the wall of Chung-ch'ien Chiliad, which was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Ch’ien-t’un Garrison of Kuang-ning. East of the wall was another small river. We passed it and came to Kao-ling Station, which had a wall. From there on, walls were built round all the stations, and the transfer stations were inside the same walls.
 
 
179. 關法에 의하면 文憑을 검사하고, 나이와 용모를 따져 출입토록 하였다. 宣德년 (1434) 처음으로 兵部郎中이 와서 관장했는데 후에 主事로 바뀌었다고 한다. 《山海 關志》권2, 關隆.
 
 
===8일===
 
初八日,過前衛,是日陰,高嶺驛人,頑悍暴橫之無甚者,臣之軍人文者催聽時,驛人以杖杖文之頭顱进血,張述祖與臣等行至前衛,于衛管軍都指揮晟銘,即差人拿其辱人,臣等至衛,將近城,城西二里有石子河,由城南門而入,過迎恩、承恩、治政、永安等門,至衛館,指揮楊相來暫話,容貌魁偉者,又出城東崇禮門而行,前衛城即舊大寧路瑞州之地,有大山,西連山海關而來鎮于衛之東北,即三山,俗謂之三山頂,又過東嶽廟,至沙河驛,城西所過小水,即沙河也,
 
 
전둔위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고령역 사람은 비할 데 없이 사나웠습니다.
 
 
신의 군인 문회(文廻)란 자가 당나귀를 재촉할 적에 그 역 사람이 몽둥이로 문회의 머리를 때려서 머리에서 피가 솟았습니다.
 
 
장술조가 신 등과 함께 가다가 전둔위에 이르러 전둔위의 관군도지휘(管軍都指揮) 성명(__銘)에게 사실을 호소했더니 즉시 사람을 보내어 그 역 사람을 잡아 왔습니다.
 
 
신 등이 전둔위에 이르러 성 가까이 갔는데 성 서쪽 2리에 석자하(石子河)가 있어 성 남문을 경유하여 들어갔습니다.
 
 
영은문(迎恩門)·승은문(承恩門)·치정문(治政門)·영안문(永安門) 등을 거쳐서 전둔위의 객관에 이르니 지휘양상(__楊相)이 와서 잠깐 동안 이야기했는데 체구가 크고 훤칠하였습니다.
 
 
또 성 동쪽의 숭례문(崇禮門)으로 나가서 앞으로 갔습니다.
 
 
전둔위성(前屯衛城)은 곧 옛날 대녕로(大寧路) 서주(瑞州)의 땅이었습니다.
 
 
서쪽으로 산해관과 접한 큰산이 전둔위의 동북을 제압하고 있었습니다.
 
 
이 산이 바로 삼산(三山)으로 세상에서는 삼산정(三山頂)이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또 동악묘를 지나서 사하역성(沙河驛城)에 이르렀습니다.
 
 
성의 서쪽을 지나는 작은 강이 사하(沙河)<ref>[http://m.blog.daum.net/haedod/15670591]</ref>였습니다.
 
 
8th Day. Passing Ch’ien-t'un Garrison. This day was cloudy.
 
 
The men of Kao-ling Station were exceedingly cruel and overbearing. When Munhoe, one of my soldiers, was urging his donkey forward, a man from the station struck him on the head with a stick, making blood spurt forth. Chang Shu-tsu went with us to the Ch'ien-t'un Garrison and complained to Sheng Ming, Commissioner for the Garrison Forces, [Wei-kuan-chün tu-chih-hui], who sent men to arrest the man at the station.
 
[We went on to a place west of Sha-ho Station.]
 
 
===9일===
 
初九日,晴,過張公墓、雙數鋪、王公墓,至前衛之中後千戶所城,由
 
 
p.448
 
南門而入,門即瑞寧門也,至所館,與千戶劉清話別,復出自城東慶春門,而行至東關驛,是日所渡河有三,日十子、狗兒、六州等,河北有殷惡山,
 
 
맑았습니다.
 
 
장공묘(張公墓), 쌍돈포(雙數鋪), 왕공묘(王公墓)를 지나서 전둔위의 중후천호소성(中後千戶所城)'에 이르렀습니다.
 
 
남문을 거쳐 들어갔는데 남문이 서녕문(瑞寧門)이었습니다. 천호소(千戶所)의 객관에 이르러 천호 유청(劉淸)과 환담하다 헤어졌습니다.
 
 
다시 성 동쪽 경춘문(慶春門)으로 나와서 동관역(東關驛)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 건넌 강이 셋이었는데 십자하(十子河), 구아하(狗兒河), 육주하(六州河)였습니다. 북쪽에는 은악산(殷惡山)이 있었습니다.
 
 
9th Day. Fair.
 
 
[We went from Chang-kung Tomb to Tung-kuan Station.]
 
 
===10일===
 
初十日,晴,過曲尺河鋪、大沙河,至寧遠衛之中右千戶所城,由南薰門而入,過武安王廟,至所館,城之北望有甲山、羊角山,復出自永和門,過小沙河而行,路東南有燒場城,海浦環抱于城之東北,至曹莊驛城。
 
 
맑았습니다.
 
 
곡척하포(曲尺河鋪), 대사하(大沙河)를 지나서 영원위(寧遠衛)182의 중우천호소성(中右千戶所城)에 이르렀습니다.
 
 
남훈문(南薰門)을 경유해 들어가서 무안왕묘(武安王廟)184를 거쳐 천호소의 객관에 이르렀습니다.
 
 
성 북쪽에서 바라보니 갑산(甲山)과 양각산(羊角山)185 이 있었습니다.
 
 
다시 영화문(永和門)으로 나와 소사하(小沙河)를 지나 앞으로 가니 길 동남쪽에 소염장성(燒鹽場城)이 있었으며, 바닷가가 성의 동북쪽을 빙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달려서 조장역성(曹莊驛城)에 이르렀습니다.
 
 
10th Day. Fair.
 
[We went from Ch’u-ch’ih-ho Stop to Ts'ao-chuang Station.]
 
 
182. 寧遠衛城 泰和街에 있다. 宣德5년(1430)에 설치되었다. 康熙《寧遠州志》 권2, 建置.
 
183. 中右千戶所는 寧遠衛城에서 서남 방향에 있는데, 宣德 연간에 설치된 것이다. 康熙 《寧遠州志》권1, 輿地.
 
184. 西八里莊의 關帝廟를 가리킨다. 民國《遼陽縣志》권5, 壇廟.
 
185. 寧遠衛城에서 서로 145리의 거리에 羊家山이 있다. 康熙《錦州府志》권1, 輿地.
 
 
===11일===
 
十一日,過寧遠衛,是日晴,大風,自曹莊驛至寧遠衛城,城南又築長垣,坦南乃講武場,女兒河來繞城東北而西而南注之,城之西有鐵冒山,北有立山、虹螺山,南有青粮山,虹螺三疊獨秀起,臣等由城南門而入,過迎恩、進士、崇敬等門,至迎恩街,街中作二層樓,樓西懷遠門,北靖邊門,東景陽門,又馳至衛館,少歇。城中又有左·右·中·前·後五所,臣等從春和門出城東,城東四里許,有聖塘溫泉,張述祖引臣至,則果有溫湯三井,建浴室,又過桑樹鋪,至連山睾,睾之南有胡蘆套,西有三首山,北有塞兒山,購之得名以此。
 
 
영원위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조장역(曹莊驛)으로부터 영원위성(寧遠衛城)에 이르니 성 남쪽에는 긴 담을 쌓았는데 담의 남쪽이 강무장(講武場)이었습니다.
 
 
여아하(女兒河)가 흘러 와서 성 동북쪽을 둘러서 서쪽으로 갔다가 남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성 서쪽에는 철모산(鐵冒山)186이 있고 북쪽에는 입산(立山)과 홍라산(虹螺山)이 있고 남쪽에는 청량산(靑糧山)이 있었는데, 홍라산의 세 봉우리가 유독 빼어났습니다.
 
 
신 등은 성 남문으로 들어가 영은문(迎恩門)·진사문(進士門)·숭경문(崇敬門) 등의 문을 지나서 영은가(迎恩街)에 이르렀는데, 거리 가운데는 2층 누각을 지어 놓았습니다.
 
 
누각 서쪽에는 회원문(懷遠門), 북쪽에는 정변문(邊門), 동쪽에는 경양문(景陽門)이 있었습니다.
 
 
또 달려서 영원위(寧遠衛)의 객관에 이르러 조금 쉬었습니다.
 
 
성안에는 또 좌소(左所)·우소(右所)·중소(中所)·전소 (前所)·후소(後所) 등이 있었습니다.
 
 
신 등이 춘화문(春和門)에서 성 동쪽 으로 나가니 성 동쪽 4리가량에 성당온천(聖塘溫泉)이 있었습니다.
 
 
장술조가 신을 안내하여 이르니 과연 온탕(溫湯) 삼정(三井)이 있는데 욕실(浴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상수포(桑樹鋪)를 지나서 연산역(連山驛)에 이르니, 연산역 남쪽에는 호로투(胡蘆套), 서쪽에는 삼수산(三首山)', 북쪽에는 채아산(__兒山)이 있었습니다.
 
 
연산역이란 명칭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11th Day. Passing Ning-yuan Garrison. This day was fair with high winds.
 
[We went from Ts'ao-chuang Station past Ning-yuan Garrison to Lien-shan Station.]
 
 
186.《遼東志》권1 地理, 山川, 寧遠衛에는 '鐵帽山으로 되어 있다.
 
 
===12일===
 
十二日,晴,行過五里河,至塔山所城,所寧遠衛之中左千戶所也,由城南門而入,門即海寧門也,過進士門,至所館,又由城東門而出,至香山驛,驛東有杏兒山故名,北又有長嶺山.
 
 
맑았습니다.
 
 
가다가 오리하(五里河)를 지나서 탑산소성(塔山所城)에 이르니, 탑산소는 곧 영원위의 중좌천호소(中左千戶所)이었습니다.
 
 
성 남문으로 들어가니 문은 곧 해녕문(海寧門)이었습니다.
 
 
진사문을 지나서 천호소의 객관에 이르고, 또 성 동문으로 나와 행산역(杏山驛)에 이르렀습니다.
 
 
행산역 동쪽에 행아산(杏兒山)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습니다. 북쪽에는 또 장령산(長嶺山)이 있었습니다.
 
 
 
12th Day. Fair.
 
[We went from Wu-li River to Hsing-shan Station.]
 
 
===13일===
 
十三日,陰,行至中屯衛之中左千戶所城,由靖安門而入,從定遠門而出,至凌河驛,驛北有占茂山.
 
 
흐렸습니다.
 
 
가다가 중둔위(中屯衛)의 중좌천호소성(中左千戶所城)에 이르러 정안문(靖安門)으로 들어갔다가 정원문(定遠門)으로 나왔습니다.
 
 
능하역(凌河驛)에 이르니 능하역 북쪽에는 점무산(占茂山)이 있었습니다.
 
 
 
13th Day. Cloudy.
 
[We went as far as Ling-ho Station.]
 
 
===14일===
 
十四日,晴,瞬之城東,有小凌河,渡河過荊山鋪,至左屯衛之中左千戶城,由海寧門而入,從臨河門而出,城西有紫荊山,北有道遙寺,城之東七八里外,又有大凌河,兩河相距可四十餘里,興安鋪、東岳廟,臨河之東岸,河之東北六七里間,有白沙場,沙窩鋪當其中,白沙隨風簸(楊)(揚],填塞鋪城,城之不沒於沙僅一二尺,到十三山驛,城東有十三山,以有十三宰故名,曝亦因山得名,北又有小昆命、能奉諸山,有官人乘而至,行案有物大如飘,其中有酒,劈然後可飲,張述祖謂臣曰:“此果乃椰子酒也,嶺南多產,人或飲此為生產者,此則乃廣東布政司進獻,至尊,至尊又實廣寧太監的,”
 
 
맑았습니다.
 
 
능하역 성 동쪽에 소릉하(小凌河)가 있었습니다.
 
 
소릉하를 건너 형산포(荊山鋪)를 지나서 좌둔위(左屯衛)의 중좌천호소성(中左千戶所城)에 이르러 해녕문으로 들어갔다가 임하문(臨河門)으로 나왔습니다.
 
 
성 서쪽에는 자형산(紫荊山), 북쪽에는 소요사(逍遙寺)가 있었습니다.
 
 
성 동쪽 7-8리 밖에 또 대릉하(大凌河)가 있었는데, 두 강과의 사이가 40여 리였습니다.
 
 
흥안포(興安鋪)와 동악묘(東岳廟)는 대릉하 동쪽 언덕에 접해 있었습니다.
 
 
대릉하 동북쪽 6-7리 사이에 백사장(白沙場)이 있고 사와포(沙窩鋪)가 그 중간에 있었습니다.
 
 
흰모래가 바람에 날려서 포성(鋪城)을 꽉 메우니, 성의 1-2척 만이 모래에 파묻히지 않았습니다.
 
 
십삼산역(十三山驛)에 이르니 성 동쪽에 십삼산(十三山)<ref>[http://blog.daum.net/manjumongol/134 십삼산의 비밀 | 조선중후기영토]</ref>이 있었습니다. 13봉(峯)이 있어 '십삼산'이라 이름지었고, 역명도 이로 인해 얻어진 것이었습니다.
 
 
북쪽에는 소곤륜산(小昆命山)과 웅봉산(熊奉山) 등 여러 산이 있었습니다.
 
 
관인이 역마를 타고 왔는데, 행낭에는 크기가 바가지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속에 술이 있었는데 쪼갠 뒤에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장술조가 신에게 말하기를,
 
 
“이 과실이 야자주(柳子酒)입니다. 영남(嶺南)189에서 많이 산출되는데 사람들은 간혹 이를 마시고 아이를 낳기도 합니다.
 
 
이는 곧 광동포정사(廣東布政司)가 지존(至尊)에게 진헌(進獻)한 것인데 지존께서 다시 광녕태감(廣寧太監)에게 상으로 주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4th Day. Fair.
 
 
The Hsiao-ling River was east of the wall of the station. We crossed the river, passed Ching-shan Stop, and came to the wall of the Chung-tso Chiliad of Tso-t’un Garrison. We went in through Hsi-ning Gate and out through Linho Gate. Tzu-ching Mountain was west of the wall and Hsiao-yao Temple was north. Seven or eight li east of the wall was also the Ta-ling River. The two rivers were about forty li apart. Hsing-an Stop and Tung-yüeh Shrine overlooked the east bank of the river. For six or seven li northeast of the river there was a stretch of white sand, in which stood Sha-wo Stop. The white sand, winnowed by the wind, had drifted against the wall of the stop until only one or two feet of the wall were not buried in it.
 
We came to the wall of Thirteen Mountains Station. The Thirteen Mountains were in the east and were so named because they had thirteen peaks. The station also got that name from the mountains. The Hsiao-k’un-lun and Hsiungfeng mountains were also in the north.
 
An official arrived in a courier carriage (jih) with a thing in his travel bag the size of a gourd. In it was wine that one could drink after splitting it open. Chang Shu-tsu said to me, “That is coconut wine; Ling-nan produces much of it. If a man drinks it, it makes him productive. That was in a gift from the Kwangtung Administration Commissioner to the Emperor. The Emperor, in turn, awarded it to the Overseer of Kuang-ning.”
 
 
187.《盛京通志》권30, 城池二, 錦州府, 寧遠州界內諸堡에는 ‘雙樹論'로 되어 있다.
 
188. 寧遠衛城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서 사람 머리 모양을 한 봉우리가 셋이 있어 三首山이 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遼東志》卷 1.
 
189. 越城, 都龐, 騎田, 大庾의 五 以南 지역으로 오늘날 廣東·廣西 2省과 越南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15일===
 
十五日,晴,過山後鋪、榆林鋪,到閭陽驛,有山自十三山之北,横亘東走,過此驛之北,以抵于廣寧衛之北而東,其中有龍王、保住、望海、分水、望城崗、祿河等諸宰,通謂之醫巫閭山,此琴正當其陽,故名間陽,嘗聞出檢關以東,南濱海,北限大山,盡皆粗惡不毛,主山峭拔,摩空蒼翠,乃醫巫闆,正謂此也。
 
 
맑았습니다.
 
 
산후포(山後鋪), 유림포(楡林鋪)를 지나서 여양역(閭陽驛)에 이르니, 산이 십삼산의 북쪽에서부터 옆으로 뻗어, 동쪽으로 달려 이 역의 북쪽을 거친 다음 광녕위(廣寧衛)의 북쪽에 이르렀다가 동쪽으로 갔습니다.
 
 
그 중간에 용왕봉(龍王峯)·보주봉(保住峯)·망해봉(望海峯)·분수봉(分水峯)·망성강(望城岡)·녹하봉(祿河峯)등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통틀어 이를 '의무려산(醫巫閭山)<ref>[https://news.joins.com/article/4367124 <4>연행사들의 魂이 담긴 醫巫閭山<의무려산>: 바람에 실려오는 홍대용의 탄식, 중앙일보, 2002.10.25]</ref>190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역이 바로 그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여양(閭陽)'<ref>[http://blog.daum.net/manjumongol/134 여양은 난하근처에있었는데 요하근처로 조선후기에 옮겨졌다. 조선중후기영토]</ref>이라 한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유관(__關)에서 동쪽은 남으로 바다에 접하고 북으로 큰 산과 맞닿아 있는데 모두 토질이 조악한 불모의 산해관으로부터 [http://www.mapnall.com/ja/%E5%9C%B0%E5%9B%B3-%E9%81%BC%E9%99%BD%E5%B8%82_1110573.html 遼陽]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역참로 땅이라고 들었습니다.
 
 
주산(主山)이 험준하여 푸른 하늘에 높이 솟아 있었는데 의무려산은 바로 이곳을 일컫는 것이었습니다.
 
 
15th Day. Fair.
 
 
[We went from Shan-hou Stop to Lü-yang Station, south of the l-wu-lü Mountains.] I had heard that the great northern mountains that bordered the sea southeast from Yü-kuan were rugged and evil, without green cover, and that the chief mountains soared boldly into the blue sky. Those things could truly be said of the I-wu-lü.
 
 
190. 巫는 無로 쓰기도 한다. 廣寧縣城에서 서쪽으로 10리의 거리에 있다. 舜이 12山을 封할 때 의무려산을 幽州의 鎭山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北鎭이라고도 한다. 康熙《錦州府志》권1, 輿地,
 
 
===16일===
 
十六日,至廣寧驛,遇聖節使臣,是日晴,過四塔鋪,又過二鋪及接官亭,至廣寧衛城,由城西迎恩門而入,過進士坊,至廣寧曝,聖節使參判蔡壽、質正官金學、書狀官鄭而得及閔琳、蔡年、朴明善、陳思達、吳誠文、張良、李郁、李懿、李亨良、洪孝誠、鄭殷、申繼孫、辛自剛、尹仲連、金從孫、金春等,馳至驛中,書狀、質正先入臣所寓,略語鄉國之音,臣往拜于使臣,使臣引臣上座,日:“不意今日得相見於此,漂汝活汝,天實使之,到泊中國界,是乃得生之地,因問臣以所歷山川、形勝、人物、繁夥,臣略陳之,使臣亦語浙江以南江山地方,如語會經之地,謂臣曰:“我國人物,親見大江以南者,近古所無,汝獨歷覽若此,豈非幸乎?”臣辭退,夕,使臣又使人問曰:“汝漂寄他國,行李粮釀,必有缺乏,缺乏何物?我其補之”臣曰:“我則重蒙 皇帝厚恩,生到于此,過此後,不數日間,馳至本國,令公之行,必過七月乃還,則客中有物,亦有限量,不可輕與人,敢辭,”使臣招臣之從者,以米二斗、麓二束贈之,曰:“喪中作客,無物可食,故以之.”夜乘月,使臣坐中庭,邀臣至前,設酌以慰。
 
 
광녕역(廣寧驛)에 이르러 성절사신(聖節使臣)을 만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사탑포(四塔鋪)를 지나고 또 이포(二鋪)와 접관정(接官亭)을 거쳐서 광녕위성(廣寧衛城)에 이르렀습니다.
 
 
성 서쪽 영은문(迎恩門)을 경유해 들어가 진사방(進士坊)을 지나서 광녕역에 이르니, 성절사인 참판(參判)192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617 채수(蔡壽)]', 질정관(質正官)194 김학기(金學起)195, 서장관(書狀官) 정이득(鄭而得)과 민임(閔琳)·채연(蔡年)·박명선(朴明善)·유사달(思達)·오계문(吳誠文)·장량(張良)·이욱(李郁)·이숙(李塾) · 이형량(李亨良)·홍효성(洪孝誠)·정은(鄭殷)·신계손(申繼孫)·신자강(辛自剛)·윤중연(尹仲連)·김종손(金從孫)·김춘(金春) 등이 광녕역 안으로 말을 달려왔습니다.
 
 
서장관과 질정관이 먼저 신의 처소로 들어와서 고향과 나라 소식을 대강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신이 가서 사신에게 절하니 사신이 신을 상석으로 안내하고 말하기를,
 
 
“뜻하지 않게 오늘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소. 그대를 표류시키고 살리는 것은 실로 하늘의 힘인데, 중국의 땅에 닿았으니 이는 곧 살길을 얻은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신에게 지나온 산천의 지리와 사람과 산물의 번성을 묻기에, 신이 대략 진술하였습니다.
 
 
사신도 절강 이남의 강산과 지방을 마치 전에 지나가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는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대강(大江) 이남을 직접 본 이가 근자에 없었는데, 그대만이 두루 관람했으니 어찌 행운이 아니겠소?" 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하직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저녁에 사신이 또 사람을 시켜 묻기를,
 
 
“그대는 표류되어 타국에 머무르고 있으니 물품과 식량 및 반찬이 반드시 모자랄 것이오.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내가 그것을 보충해주겠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저는 황제의 두터운 은혜를 거듭 입어 살아서 이곳에 도착하였으니, 이곳을 지난 후에는 며칠 지나지 않아 본국에 이를 것입니다.
 
 
영공(令公)의 행차는 반드시 7월을 넘어야만 돌아오게 될 것이고, 객지에서 가진 물건 또한 한정이 있으므로 가벼이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감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신은 신의 종자를 불러서 쌀 2되와 미역 2속(束)을 선사하면서 말하기를,
 
 
“상중(喪中)에 손 노릇을 하는데 먹을 만한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보내는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달밤에 사신이 뜰 가운데 앉아 신을 불러 맞이해서 술자리를 베풀어 위로해 주었습니다.
 
 
16th Day. Arriving at Kuang-ning Station and Meeting an Envoy for the Imperial Birthday. This day was fair.
 
 
We passed Ssu-t’a Stop, two other stops, and Chieh-kuan Pavilion, and came to the wall of Kuang-ning Garrison. We went in through Ying-en Gate, the west [gate] in the wall, passed Chin-shih-fang, and came to Kuang-ning Station. Soon afterwards, Board Vice-President Ch’ae Su, an Envoy for the Imperial Birthday,38 Kim Hak-ki, the Controller of Standards,39 Chòng 1-dúk, the First Secretary, Min Nim, Ch’ae Nyon, Pak Myöng-sön, Yu Sa-dal, O Kye-mun, Chang Nyang, Yi Uk, Yi Suk, Yi Hyong-nyang, Hong Hyo-sõng, Chong Un, Sin Kae-son, Haeng Cha-gang, Yun Chung-nyÖn, Kim Chong-son, and Kim Ch’un came into the station. The First Secretary and the Controller of Standards came first into the place where I had been lodged and told me in a general way about news from home. I went and bowed to the Envoy, who took me to an upper seat and said, “It never occurred to me that I should meet you here today. Indeed, it was Heaven that set you adrift and rescued you, and the coast of China on which you landed was the Earth that saved your life.” Then he asked me about strategic mountains and rivers and the densely populated [places) through which I had passed, and I described them roughly.
 
The Envoy, for his part, talked about river and mountain regions from Chekiang south as one would talk about places through which one had already passed. He said to me, “No one from our country in recent times has personally even seen the Yangtze River and the places south of it; you alone have passed through them and seen them as you have. How fortunate you are!" I left.
 
In the evening, the Envoy again sent a man to make an inquiry: “Since you drifted to a foreign country, your baggage and rations must want things. What do you need? I shall supply them.”
 
I said, “I have repeatedly received the Emperor's generous graciousness and have reached here alive. After we pass here, it will not be many days before we reach our own country. His Excellency's party will take over seven months to return, and while abroad many things they have also will be limited.
 
You should not give them away lightly." I ventured to refuse.
 
The Envoy summoned my followers and gave them as presents two pecks of rice and two bunches of green beans. He said, “He is a guest in mourning, and there is nothing he may eat. That is why I am giving you this.”
 
At night the Envoy sat in the central garden in the moonlight and invited me to come before him. He served me wine to console me.
 
 
191. 聖節은 황제의 생일을 뜻한다. 聖節使臣은 곧 황제의 생일을 慶賀하기 위하여 파견된 조선의 사신 즉 聖節使를 말한다. 使節團의 구성은 모두 30명으로 정하였는데, 正使, 副使, 書狀官 각 1명, 代通官 3명, 護貢官 24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밖에 從人은 일반적으로 250명 정도였으나, 영조31년(1755)에는 541명에까지 이르러 말썽을 빚기도 하였다.
 
192. 조선시대 六曹에 속해 있던 종2품의 관직으로 亞卿이라고도 한다. 세종14년(1432)에 설치한 各曹의 判書 다음가는 차관으로, 정원은 각각 1명씩이다. 隸下 주요기관의 提調를 겸하였다. 고종31년(1894)의 甲午改革 이후에는 協辦(勅任官)이라 하였다.
 
193.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仁川이다. 자는 着之이고, 호는 懶齋이다. 예종 원년(1469) 秋場文科의 初試, 覆試, 殿試에 장원, 조선 개국 이래 三場에서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1478년 應敎가 되어 都承旨 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하여 좌천시켰다. 1479년 貞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했다가 파직당하였으나, 그 뒤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咸昌에 은거하여,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194. 조선시대 使臣의 일원으로 중국에 보내던 임시관직이다. 글의 音韻이나 제도와 사물 등 특정 사안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가서 질문하여 알아오는 일을 맡아 하였는데, 조선 초기에는 冬至使와 聖節使 등의 使行에 정규사신의 일원으로 書狀官 등과 함께 동행했으나, 중기 이후에는 서장관이 질정관을 겸임하는 것이 관례화 하였다.
 
19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공주이고 자는 文伯이다. 세조6년(1460) 別試文科 丙科에 급제하였고, 관직은 直提學까지 지냈다. 承文院校理로 있던 성종9년(1478) 盧思愼, 姜希孟 등과 함께 纂集廳의 郎廳이 되어 《東文選》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82년에는 《蘇文忠公集》 가운데 어려운 부분을 주해하는 데 참여하였다. 서예에 뛰어나 세조 때 제1인자라 일컬어졌다.
 
 
===17일===
 
十七日,在廣寧驛,是日晴,使臣與書狀、質正,俱到臣所寓,良久話別,夕,鎮守太監韋朗、都御史徐、都司大人胡忠、兵官綠謙、參將崔勝同議,以臣等漂死復生,情可憐,今曝官百戶柳源將全猪一頭、黃酒四盆、稻米一斗、粟米二來慰,臣分諸陪吏、軍人等,以飲食之,
 
 
광녕역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사신이 서장관, 질정관과 함께 신의 처소에 와서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습니다.
 
 
저녁에 진수태감 위낭(韋朗), 도어사(都御史) 서관(徐韓), 도사대인(都司大人) 호충(胡忠), 총병관 구겸(淡), 참장(參將)196 최승(崔勝)이 함께 의논해서 신 등이 표류해서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그 정상이 딱하다는 이유로 역관(官)인 백호(百戶) 유원(柳源)을 시켜서 통돼지 1마리, 황주(黃酒) 4동이, 쌀 1되, 좁쌀 2곡(斜)을 가져와 위로하였으므로, 배리와 군인들에게 나누어 먹게 하였습니다.
 
 
17th Day. At Kuang-ning Station. This day was fair.
 
 
The Envoy came with the First Secretary and the Controller of Standards to the place where I was lodged, talked a good long time, and left.
 
In the evening, Wei Lang, the Grand Defending Overseer, Hsü Kuan, a Censor-in-Chief,40 His Excellency Hu Chung, of the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Regional Commander Kou Ch’ien, and Local Commander [Ts’anchiang] Ts’ui Sheng, held a conference and, in view of the lamentable circumstances of our drifting toward death and regaining life, ordered Centurion Liu Yüan, the Station Master, to console us with a whole pig, four jugs of yellow wine, one peck of paddy, and twenty pecks of millet. I divided them among the secondary officials and soldiers to be eaten and drunk.
 
 
196. 武官의 하나로 總兵官 혹은 副總兵 밑에 두어졌다. 홀로 1路를 지키는 경우 分守라고 불렸다. 品級이 없고 定員이 없었다. 明初에는 勳戚으로 充任하였는데, 그 후 권한과 지위가 날로 내려갔다.
 
 
===18일===
 
十八日,在廣寧驟,是日陰,張述祖告別向北京,謂臣曰:“隨路千有餘里,情志有甚戀慕,我年已耳順,脚力且衰,豈復與足下相再見乎? 第念足下若得志於本國,則他日必有進貢朝天之時,我家在順城門內石騎馬家前對門,其記今日之情,可賜一問否?”因解襯衣,贈吳山,盖述祖在途,嘗以吳山為手足故也,參將崔勝金玉邀臣等,玉,遼東人也,頗解我國語,臣令程保等從玉以往,勝大設酒釀,甚盛以饋,
 
 
광녕역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장술조가 북경으로 간다고 작별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천여 리 길을 수행하노라니 정이 깊이 들었습니다. 내 나이 이미 60이요, 다리 힘도 쇠약하니, 어찌 다시 족하와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컨대, 족하께서 만약 본국에서 뜻을 이루신다면 후일에 반드시 공물을 바치고 천자를 알현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제 집은 순성문(順城門)197 안 석(石)부마(__馬)의 집 앞에 대문을 마주하고 있으니, 오늘의 정을 기억해 두셨다가 한 번 찾아주시지 않겠습니까?”라 하였습니다.
 
 
이어서 속옷을 벗어 오산에게 주었는데 대개 장술조가 길에서 오산을 수족(手足)으로 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장 최승은 김옥(金玉)으로 하여금 신 등을 맞이하게 했는데 김옥은 요동 사람으로서 우리말을 제법 할 줄 알았습니다.
 
 
신은 정보 등에게 김옥을 따라가게 했더니, 최승은 술상을 크게 차려 매우 융숭히 접대해 주었습니다.
 
 
18th Day. At Kuang-ning Station. This day was cloudy.
 
 
Chang Shu-tsu announced his departure for Peking. He said to me, “I have accompanied you over one thousand li, and I feel great love for you. I am already sixty years old, and my legs are weak; how unlikely it is that I shall ever see you again! Yet it occurs to me that if you are a success in your own country, some day you will come with tribute. When you go to Court, my house is inside Shun-ch'eng Gate, opposite Master of Second Horses41 Shih's house. I hope you will remember the feelings of this day and pay me a call.” He took off his underclothing and gave it to O San, because on the way he had made O San his closest companion.
 
Local Commander Ts’ui Sheng ordered Chin Yü to invite us [to be entertained]. Yü was a man of Liao-tung and understood our language rather well. I ordered Chong Po and the others to go with him, and they were entertained lavishly, with an overwhelming service of wine and food.
 
 
197. 오늘날 북경의 宣武門.
 
 
===19일===
 
十九日,在廣寧驟,是日雨,太監、總兵官、都御史、都司、參將等,令柳源及驛寫字王禮等,載衣服、帽華等件來騷,分給臣及從者,臣所受,生福青圓領一件、白夏布擺295一件、白三棱布衫一件、大氈帽一項、小衣一件、白鹿皮鞋一雙、襪一雙,程保以下四十二人,每人白三棱布衫各一件、小衣各一件、氈帽各一項、華各一雙、糖各一雙,又以全猪一頭、酒二盆,源謂臣曰:“三堂老爹說你回國200,以今日所受之物,俱要啟于國王前”云云,夕,程保等四十餘人,羅跪臣前,日:“自古漂流,船雖或不敗,或渴水,或陷海,或病死,死者十居其半,令我等屢經患難,俱無死傷,此一幸也,漂到他國者,或致邊將所疑,或翻轉,或拘囚,或鞭(桂)「達」,隨之以問按驗之,今我等一無被拘困苦,到處皆敬待,飽以餐飯,此二幸也,前此难義人從李縣監而漂死者頗多,拘攣亦甚,到皇都,無賞賜,
 
 
p.452
 
渴困苦,僅得生還,今我等到皇都,皇帝有賞賜,到廣寧,鎮守、三司賜衣裳帽華,軍人空手而來重負而還,此三幸也,凡此三幸,莫知其所由致也。”臣曰:“此皆由我聖上仁以撫眾,誠以大之德也。”
 
 
광녕역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태감, 총병관, 도어사, 도사, 참장 등이 유원과 역서기(驛書記) 왕례(王禮) 등을 시켜 의복, 모자, 가죽신 등을 신고 광녕역에 와서 신과 종자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신이 받은 것은, 생복청원령(生福靑圓領)198 1건(件), 백하포파(白夏布擺)199 1건, 백삼사포삼(白三布 )200 1건, 대전모(大帽)201 1정(頂), 소의(小衣)202 1건, 백록피화(白鹿皮華)203 1쌍, 전말(模) 1쌍이고, 정보 이하 42인이 받은 것은 1인당 백삼사포삼 각 1건, 소의 각 1건, 전모(帽) 각 1정, 가죽신 각 1쌍, 전말 각 1쌍씩이었습니다. 그 외에 통돼지 1마리, 술 2동이를 주어 위로하였습니다.
 
 
유원이 신에게, “삼당(三堂)204 대감께서 당신이 본국에 돌아가면 오늘 받은 물건을 모두 국왕에게 아뢰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라 운운하였습니다.
 
 
저녁에 정보 등 40여 인이 신의 앞에 죽 꿇어앉아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표류하면 배는 비록 파손되지 않더라도 마실 물이 떨어지기도 하고,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병들어 죽기도 해서 죽는 사람이 절반은 되었는데, 지금 우리들은 여러 번 환란을 겪었으나 죽은 자가 없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행운입니다. 타국에 표류된 사람은 변장(邊將)에게 의심을 받아서 결박되기도 하고, 구금되기도 하고, 매 맞기도 하고, 또는 국문(問)하여 조사를 당하기도 했는데, 지금 우리들은 한 사람도 구금당해 고생한 적이 없고, 이르는 곳마다 모두 환대를 받아 밥을 배불리 먹게 되었으니 이것이 두 번째 행운입니다. 이전에 정의현(佐義縣) 사람들은 이(李) 현감(縣監)을 따라서 표류하다가 죽은 자가 자못 많고 속박도 심했을 뿐더러 황도(皇都)에 도착해서는 상도 없었고 기갈에 시달리다가 겨우 살아서 돌아왔는데, 지금 우리들은 황도에 도착하니 황제께서 상을 내리시고 광녕에 도착하니 진수(鎭守), 삼사(三司)가 의복, 모자, 가죽신을 주어 군인들이 맨손으로 왔다가 가득 짊어지고 돌아가니 이것이 세 번째 행운입니다. 이 세 가지 행운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모두 우리 성상께서 인(仁)으로써 백성을 어루만지고 성심으로써 대국을 섬기신 덕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9th Day. At Kuang-ning Station. This day it rained.
 
 
The Overseer, Regional Commander, Censor-in-Chief, Regional Military Commissioner, and Local Commander ordered Liu Yüan and Station Scribe Wang Li to bring clothing, hats and boots to the station and issue them to me and my followers. I received one bright blue round-collar, one white Chinese linen wrap, one white three-shuttle cloth gown, one big felt hat, one small gown, one pair of white deer skin boots, and one pair of felt socks. Each of the forty-two men from Chòng Po down received one white three-shuttle cloth gown, one small gown, one felt hat, one pair of boots, and one pair of felt socks. They also feasted us with one whole pig and two jugs of wine. Yüan said to me, “The three chiefs42 say that when you return to your country you should report everything you have received today to your King.”
 
In the evening Chong Po and the other forty-odd men knelt round me and said, “From olden days, even when boats that have gone adrift have not been wrecked, some of the people have been parched for water, some have fallen into the sea, and some have died of sickness. Half of every ten have died. We have had to endure hardships, but none of us has died or been hurt. That is one blessing. Of those who drift to foreign countries, some are suspected by coast guards, some are bound, some are imprisoned, and some are whipped and then examined and judged. We, now, have not suffered a single imprisonment. Everyone has treated us respectfully and given us plenty to eat. That is a second blessing. Before this, a great many of the men who went adrift with Junior Director Yi died. [The group] were also violently seized, and when they reached the capital, they were not awarded gifts. They suffered from hunger and thirst and were barely able to return alive. When we, now, reached the capital, the Emperor awarded us gifts; when we came to Kuang-ning, the Three Authorities presented to us clothing, hats, and boots. The soldiers came with empty hands and return heavily laden. That is a third blessing.
 
“We do not know what has brought about these three blessings.”
 
I said, “They have all been brought about by the virtue of our sage Highness in benevolently caring for the people and sincerely serving China.”
 
 
198. 生은 生衣 즉 비단으로 만든 옷을 가리키고, 福은 福色 즉 紫色을 가리킨다. 圓領은깃이 둥근 官服,
 
199. 夏布는 곧 葛布이다. 李麻纖維로 만든 베로서 夏衣를 만드는 데 적합하다. 江西, 湖南, 廣東, 四川 등지에서 많이 생산된다. 布擺는 면포로 만든 홑치마.
 
200. 三布는 松江에서 생산되는 일종의 統絲이다. 白三布衫은 흰색 삼사포로 만든 적삼을 일컫는다.
 
201. 帽는 털모자를 뜻한다.
 
202. 內衣의 일종.
 
203. 白鹿의 가죽으로 만든 신발.
 
204. 布政使와 按察使 및 都指揮使를 함께 지칭하는 말.
 
 
===20일===
 
二十日,陰,大風,過察院、普慈寺,出城東門,即泰安門也,又過鍾秀橋、泉水、平面、潮溝等鋪,至盤山驛,有指揮楊俊來待饋以茶,瞬城北望有黑山、岐山、蛇山,山皆醫巫間之東支也。
 
 
흐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찰원(察院)·보자사(普慈寺)를 지나 성의 동문으로 나오니 곧 태안문(泰安門)이었습니다.
 
 
또 종수교(鍾秀橋)·천수(泉水)·평전(平句)·조구(潮溝)등 포(鋪)를 지나서 반산역(盤山驛)에 이르니 지휘 양준(楊俊)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를 대접하였습니다.
 
 
역성(驛城) 북쪽에서 바라보니 흑산(黑山)·기산(岐山)·사산(蛇山)이 있었는데, 그 산들은 모두 의무려산의 동쪽지맥(支脈)이었습니다.
 
 
20th Day. Cloudy. High winds.
 
[We left the station and went as far as P’an-shan Station.]
 
 
===21일===
 
二十一日,時而風。過要站鋪,至高平疇,過清泉鋪、新河橋、通河橋、通河鋪,至沙嶺驛,
 
 
맑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요참포(要站鋪)를 지나서 고평역(高平驛)에 이르렀고, 청천포(淸東鋪), 신하교(新河橋), 통하교(通河橋), 통하포(通河鋪)를 지나서 사령역(沙嶺驛)에 이르렀습니다.
 
 
 
21st Day. Fair but windy.
 
[We went from Yao-chan Stop to Sha-ling Station.]
 
 
===22일===
 
二十二日,晴風,過高墩鋪,至新關門,有長土城,北附長城而南,關門正當其中,即成化年間所新築也,又過大臺、三官廟、河灣舖,至三叉河,河即遼河也,源自開原東北,經鐵嶺,至此與渾河、(泰)(太子河合流 為一,故名三汉,盖遼地瀕海而高亢,支河皆逆流,故泰子、渾河,皆自東而西,又有境外支河,皆自北而南,曲折紫迴,俱會于此,作浮橋,橫截河流,又挽舟而渡,號為遼河渡,有一官人坐于河岸小廳,以識察往來行人,其南有聖母媽媽廟,又過臨河橋,到牛家莊露,又過石井鋪、沙河在城鋪,至在城睾,睾在海州衛之城西門外,故名,衛亦巨鎮也,東有西车城山。
 
 
맑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고돈포(高數鋪)를 지나서 신관문(新關門)에 이르니 장토성(長土城)205이 북쪽으로 장성(長城)에 붙어서 남쪽으로 뻗었고, 관문(關門)은 바로 그 복판에 있었으니 곧 성화(成化) 연간에 새로 쌓은 것이었습니다.
 
 
또 대대(大臺), 삼관묘(三官廟), 하만포(河灣鋪)를 지나서 삼차하(三가河)에 이르니 삼차하가 곧 [https://www.google.com/maps/place/Liaohe+River/@42.0920547,120.1435467,6.57z/data=!4m5!3m4!1s0x5e2539355fda341b:0x7cd9156650cd0768!8m2!3d42.1330079!4d123.1860818 요하(遼河)]<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5ov9&articleno=13391502&_bloghome_menu=recenttext 요하문명(遼河文明)의 발견과 동북아 상고사-우실하 교수]</ref><ref>[https://www.yna.co.kr/view/AKR20120223082800005 "고구려시대 압록강은 요하(遼河)였다", 연합뉴스, 2012,02.23]</ref><ref>[https://www.yna.co.kr/view/AKR20170322168700005 고조선의 서쪽 경계 '요하'는…"현재의 랴오닝강" vs "더 서쪽", 연합뉴스, 2017.03.22]</ref><ref>[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9A%94%ED%95%98%EC%A7%80%EC%97%AD%EC%97%90%EC%84%9C-%EB%B0%9C%EA%B2%AC%EB%90%9C-%EC%8B%A0%EB%B9%84%EC%9D%98-%EC%99%95%EA%B5%AD 요하지역에서 발견된 ‘신비의 왕국’한국인의 고향,‘신비의 왕국’찾았다(8), the Science Times, 2007.11.06]</ref><ref>[http://contents.nahf.or.kr/iscdViewer/item.do?levelId=iscd.d_0003_0010_0010&page=010 요하문명론]</ref>였습니다.
 
 
그 원류는 개원(開原)의 동북으로부터 시작하여 철령(鐵嶺)<ref>[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13024002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서울신문, 2018.03.12]</ref><ref>[http://m.blog.daum.net/3002kumsukangsan/8450480?np_nil_b=2 윤여동설 - 고려는 “철령(鐵嶺)” 때문에 망했다]</ref><ref>[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4&levelId=tg_002_0920&ganada=&pageUnit=10 철령위, 우리역사넷]</ref>을 지나 이곳에 이르러서 혼하(渾河), 태자하(太子河)206 와 합류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삼차하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요동 지대는 바다에 가깝지만 지대가 높아서 지류가 모두 역류하기 때문에 태자하와 혼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습니다.
 
 
또 이 지역 밖의 지류는 모두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굽이지고 빙 둘러서 모두 이곳으로 모이니 부교(浮橋)를 만들어 하류(河流)를 가로막아 끊었으며, 또 배를 당겨 건너게 되므로 요하도(遼河渡)라고 불렀습니다.
 
 
한 관인이 강가의 작은 청사에 앉아서 왕래하는 행인들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 남쪽에는 성모양양묘(聖母壤壤廟)가 있었습니다.
 
 
또 임하교(臨河橋)를 지나서 우가장역(牛家莊)에 이르고, 다시 석정포(石井鋪)·사하재성포(沙河在城鋪)를 지나 재성역(在城驛)에 이르렀습니다.
 
 
재성역은 해주위(海州衛)의 성 서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재성역이라 이름한 것이었습니다.
 
 
해주위 또한 큰 진(鎭)이었습니다. 동쪽에 서모성산(西牟城山)이 있었습니다.
 
 
 
22nd Day. Fair but windy.
 
[We went from Kao-tun Stop across the Liao River to Hai-chou Garrison, which was also a big market town.]
 
 
205. 명대 遼東 지역에 쌓은 邊牆.
 
206. 民國《遼陽縣志》 권2, 山川에는 '太子河'로 기재되어 있다. 康熙《遼陽州志》 권7, 山川에도 太子河가 혼하 및 요하와 합류하여 三叉河를 이룬다고 하고 있다. 《方輿記 要》에 의하면 “太子河는 곧 옛 衍水이다. 燕 太子 丹이 衍水에 숨어들었기 때문에 後人이 太子河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3일===
 
二十三日,至遼陽驛,是日,陰而雷,自曝傍城而西北而東,過遞運所、土河铺、甘泉鋪、關王廟,至鞍山睾,睾之東有遼高山,西有遼下山,又過武安王廟、長占鋪,至沙河鋪,有二水俱帶于鋪之東西,名皆沙河,盖自通州以來,地多沙土,故水以沙河得名者多,又過首山鋪,至遞運所城,城即八里莊也,過接官亭,至遼陽在城驛,驛在遼東城西,
 
 
[https://www.google.com/maps/place/%EC%A4%91%EA%B5%AD+%EB%9E%B4%EC%98%A4%EB%8B%9D+%EC%84%B1+%EB%9E%B4%EC%98%A4%EC%96%91+%EC%8B%9C/@41.2707726,123.118284,12z/data=!3m1!4b1!4m5!3m4!1s0x5e2f462869fdc941:0xfe1c7bc15de1c93b!8m2!3d41.267244!4d123.236944 요양역(遼陽驛)]<ref>[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100 쓰다소키치, 어떻게 고려국경선 날조했나, 코리아히스토리타임스, 2018.07.24]</ref>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날은 흐렸다가 천둥이 쳤습니다.
 
 
재성역에서 위성(衛城)을 따라 서쪽으로, 북쪽으로 다시 동쪽으로 가서 체운소(遞運所), 토하포(土河鋪), 감천포(甘泉鋪)207, 관왕묘(關王廟)를 지나 안산역(鞍山驛)에 이르니 안산역의 동쪽에는 요고산(遼高山), 서쪽에는 요하산(遼下山)이 있었습니다.
 
 
또 무안왕묘(武安王廟), 장점포(長店鋪)를 지나서 사하포(沙河鋪)에 이르니, 두 강물이 모두 포(鋪)의 동쪽과 서쪽을 두르고 있었는데 모두 '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통주(通州)로부터는 사토가 많았기 때문에 '사하'라고 불리는 강이 많았습니다.
 
 
또 수산포(首山鋪)를 지나서 체운소성(遞運所城)에 이르렀으니, 체운소성이 곧 팔리장(八里莊)<ref>[http://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jsessionid=A835B68271336AC38B684E15B318A031?levelId=kr_113r_0010_0040_0010 최영, 고려시대사료]</ref>이었습니다.
 
 
접관정(接官亭)을 지나서 요양재성역에 이르렀는데, 역은 요동성의 서쪽에 있었습니다.
 
 
23rd Day. Arrival at Liao-yang Station. This day was cloudy, and there was thunder.
 
[We went from the wall of the garrison to Liao-yang-tsai-ch'eng Station, which was west of the wall of Liao-tung.]
 
 
207.《全逸志》권1, 圖考, 遼陽城에는 井泉鋪로 되어 있다.
 
 
===24일===
 
二十四日,晴,有僧戒勉者能通我國語音,謂臣曰:“僧系本朝鮮人,會祖父逃來于此,今已三世矣,此方地近本國界,故本國人來往者甚夥,中國人最怯懦無勇,若遇賊,皆投戈奔竄,且無善射者,必抄本國人向化者,以謂精兵,以為先鋒,我本國一人,可以當中國人什百矣,此方即古我高句麗之都,奪屬中國千有餘載,我高句麗流風遺俗,猶有未验,立高麗祠,以為根本,敬__不怠,不忘本也。嘗聞鳥飛返故鄉,狐死必首丘,我等亦欲返本國以居,但恐本國反以我等為中國人,刷還中國,則我等必服逃奔之罪,身首異處,
 
故心欲往而足超耳:”臣曰:“汝以清淨之流,宜在深山之中,何為僧冠俗行,出入於閩閣之中乎?”曰:“僧入山中久矣,今為官吏所招來”臣曰:“招以何事?”曰:“大行皇帝尊崇佛法,巨利半於天下,方袍多於編戶,會等安队飽食,以修釋行,新皇帝自為東宮,素惡僧徒,及即位大有剪去之志,今則 下詔天下,凡新設寺庵,並令撤去,無度牒僧刷令還俗之令,急於星火,故三堂老爹令吏招僧,自今日壞寺長髮云云,僧徒顧安所容一身
 
 
p.454
 
乎?”臣曰:“此乃撤寺利為民舍,毁銅佛為器皿,髮影首充軍伍之漸,乃知大聖人之所為,出於尋常萬萬也,汝徒嘗祝釐曰:“皇帝陛下萬萬歲,汝之祝釐如是,大行皇帝之崇佛如是,寺利僧佛之盛又如是,大行皇帝壽未中身,八音遠遏,汝之祝釐之勤,安在哉?”言未眠,勉辭謝而退,
 
 
맑았습니다.
 
 
우리말에 능통한 계면(戒勉)이란 중이 신에게 말하기를,
 
 
“소승(小僧)은 본디 조선 사람인데, 소승의 할아버지가 이곳으로 도망 온 지 지금 벌써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본국(本國)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에 왕래하는 본국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중국 사람은 겁이 많고 용맹스럽지 못하여 도적을 만나면 모두 창을 던지고 도망해 숨어버리며, 또 활을 잘 쏘는 사람도 없어 반드시 본국인으로서 귀화한 사람을 뽑아서 정병(精兵)이라 하여 선봉으로 삼으니, 우리 본국의 한 사람이 중국사람 열 명, 백 명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지방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95557.html#csidx090bff06830f8f7bdbe7f625e76e41d“고구려 후기의 도읍 평양의 진짜 위치 탐구중입니다”, 한겨레신문, 2015.06.11]</ref><ref>[https://www.yna.co.kr/view/AKR20090623182700005 "장수왕 천도 평양은 평양 아닌 랴오양"
 
, 연합뉴스, 2009.06.23]</ref><ref>[http://kookminnews.com/news/view.php?idx=21015&mcode=m547z30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북한 평양아닌 요양]</ref><ref>[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60407/77462991/1 랴오양(遼陽)이 고구려의 평양? 中요동 고구려계 고분벽화 국내 공개, 동아일보, 2016.04.08]</ref><ref>[http://www.bhgoo.com/2011/?mid=share2&page=38&document_srl=606593&sort_index=regdate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고미숙・길진숙・김풍기 엮고 옮김, 북드라망, 2014, p.94-95]</ref><ref>[http://shindonga.donga.com/3/all/13/114209/1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신동아, 2015.08.21]</ref><ref>[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47046 고대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다, 코리안스피릿, 2016.07.11]</ref><ref>[http://orumi.egloos.com/7390129 고려 평양이 중국 요양이라고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ref><ref>[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517
 
HOME 이슈 평양 위치가 중국? 엉터리 연구에 놀아난 한국'수학으로 푼 고지도의 비밀', 뉴스토프, 2018.01.22]</ref>인데 중국에게 빼앗긴 지 천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옛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게 제사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듣건대,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 가고, 여우는 죽을 때 살던 굴로 머리를 돌린다208고 하였으니, 우리들도 본국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다만 본국에서 도리어 우리들을 중국 사람으로 간주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내면, 우리들은 반드시 외국으로 도망한 죄를 받아서 목을 잘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가고 싶지만 발이 머뭇거릴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그대는 청정(淸淨)의 무리209이므로 깊은 산 속에 있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중의 관(冠)을쓰고 속인(俗人)의 행동을 하면서 여염에 드나들고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소승은 산 속에 들어간 지 오래됐는데 지금 관리에게 불려온 것입니다."
 
 
“무슨 일로 부르던가?”
 
 
“대행황제(大行皇帝)께서 불법을 존숭하시어 큰 사찰이 천하에 반을 차지하고, 방포(方__)210가 편호(編戶)'보다 많았으며, 중들은 편안히 누워있고 배부르게 먹으면서 수행하였습니다.
 
 
새 황제께서는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중들을 미워하시더니 제위(帝位)에 오르시고는 아주 제거해 버릴 뜻을 가지셨습니다.
 
 
지금은 천하에 조칙(詔勅)을 내려 새로 설치한 암자는 모두 철거하도록 하고 도첩(度牒)이 없는 중은 모조리 환속시키라는 명령이 성화(星火)보다 급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삼당(三堂) 대감께서 관리로 하여금 저를 불러서 오늘부터는 절을 부수고 머리를 기르도록 하라 운운하셨으니, 僧徒는 어디서 이 한 몸 받아 줄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신이 이르기를 “이것은 곧 사찰을 철거하여 민가로 만들고, 청동불상을 부수어 구리 그릇으로 만들며, 깎은 머리를 기르게 하여 군적(軍籍)에 충당시키시려는 의도이니, 이제야 대성인(大聖人)께서 하시는 일이 비범함을 알겠다. 너희들은 일찍이 '황제폐하 만만세'라 축원하였다. 너희의 축원이 이와 같았고 대행황제의 불교를 숭상하심이 이와 같았으며 사찰과 중들의 번성이 또 이와 같았으나, 대행황제는 장수(長壽)하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으니, 213 너희가 축원한 수고로움은 어디 있는가?”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계면은 하직하고 물러가버렸습니다.
 
 
24th Day. Fair.
 
 
A monk there, Chieh Mien, could understand our language. He said to me, "Originally my ancestors were Koreans, but my grandfather fled to this place.
 
It has been three generations now. Since this region is near the border of the old country, a great many men from there come here to live.
 
“The Chinese are extremely cowardly. If they meet bandits, they all throw away their spears and flee. They have no good bowmen, moreover, and must seize immigrants from the old country and use them as vanguards, calling them picked troops. One man from our country is a match for ten or even a hundred Chinese.
 
“This region was the capital of our old Koguryo. It was taken into China over one thousand years ago, but the traditional customs of our Koguryo have not yet all died out. We have built a Koryð temple and use it as a center. We sacrifice regularly and do not forget our origins.
 
“I have heard, ‘Birds fly home to die, and foxes head for their burrows.?43 We, too, want to return to our country to live, but we are afraid that our country will consider us Chinese and send us back to China. Then we should be charged with having fled and lose our heads. Our hearts, therefore, want to go but our feet hesitate.”
 
I said, “As an anchorite, you ought to be deep in the mountains. Why do you frequent the streets like a layman in a monk's hat?”
 
Chieh Mien said, “For a long time I was in the mountains; now I have been called out by the officials.”
 
I said, “Why have you been called?”
 
Chieh Mien said, “The late Emperor respected the Buddhist law. Great monasteries were built all over the Empire, and there were more monks than people. We lay at ease, ate our fill, and did the Buddhist rounds.
 
“Since the new Emperor was Heir-Apparent, he has consistently hated the monks. When he took the throne, he was determined to do away with us. Now he has handed down an edict ordering all newly established temples and monasteries to be abolished. Monks who do not have official certificates are to be returned to the laity, and this is to be done in the greatest haste.44 The Three Chiefs, therefore, ordered sub-officials to call out the monks. From now on the temples will be destroyed, and the monks will have to grow their hair. That is why I am like this."45
 
I said, “That way, the abolished temples become people's houses, the destroyed bronze Buddhas become vessels, and the heads that once were bald and now are hairy fill the army ranks. These actions are the deeds of a Sage Emperor, far superior to the ordinary sovereign.
 
“You people have prayed, saying, 'Long live His Majesty the Emperor.' If you so prayed for good fortune, and the late Emperor so respected Buddhism, and the temples and priests so flourished, what good was your earnest praying when the late Emperor died before he was middle-aged?” Before I finished speaking, Chieh Mien made excuses and left.
 
 
208.《進南子》권16 (說林)에 “鳥飛反鄕, 走歸窟, 狐死首丘”라는 말이 있다.
 
209. 죄악과 번뇌를 멀리하여 세속을 떠난 승려를 말함.
 
210. 方袍란 僧服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승려를 가리킨다.
 
211. 戶口冊에 편입된 人家.
 
212. 官府에서 尼에게 발급한 出家 증명서.
 
213. 成化帝는 재위시 많은 佛寺와 道觀을 만들고 長生術을 추구했지만, 만 40세가 되지 못한 나이에 급사했다.
 
 
===25일===
 
二十五日,晴,通事千戶王憲、百戶吳鹽來語臣曰:“館夫不說你輩留此經日,故我等在家不知,所以來看之晚也”聖遂引程保、金重等,三堂大人根前,告以漂來首末,三堂大人都指揮使鄧玉、分守總兵官韓斌、布政司副使吳玉、巡按監察御史陳琳琳等也,夕,指揮使命吏將黃酒三盆、全猪一頭、稻米一斗、栗米一斛,來臣等,
 
 
맑았습니다.
 
 
통사인 천호 왕헌(王憲)과 백호 오새(吳靈)214가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관부(館夫)가 당신들이 이곳에 며칠 묵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까닭에 우리들은 집에 있으면서 알지 못하여 와서 뵙는 것이 늦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새는 마침내 정보, 김중 등을 이끌고 삼당(三堂) 대인의 앞에 나아가서 표류해서 온 전말을 고하였습니다.
 
 
삼당 대인은 곧 도지휘사(都指揮使)215 등옥(鄧玉), 분수총병관(分守總兵官) 한기(韓旗), 포정사부사(__政使副使) 오옥(吳玉), 순안감찰어사(巡按監察御史) 진림(陳琳) 등이었습니다.
 
 
저녁에 지휘사(指揮使)가 이속(吏屬)을 시켜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99%A9%EC%A3%BC(%E9%BB%83%E9%85%92) 황주(黃酒)]<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411071657341 [경제학자의 우리 술 이야기]중국 황주와 우리 술, 경향신문, 2014.11.07]</ref> 3동이, 통돼지 1마리, 쌀 1되, 좁쌀 1되를 가지고 와서 신 등을 위로하였습니다.
 
 
25th Day. Fair.
 
 
Chiliarch Wang Hsien and Centurion Wu Hsi, the interpreters, came and talked with me: “The porters at the inn did not tell us that you would stay here several days, and not knowing, therefore, we stayed at home. That is why we are late in coming to see you.”
 
Wu Hsi took Chong Po, Kim Chung, and others to call on the chiefs of the Three Authorities. Before them, they reported the whole story, from our going adrift to our arrival. The chiefs of the Three Authorities were Teng Yü, Regional Military Commissioner; Han Pin,46 Deputy Regional Commander; Wu Yü, Administration Vice Commissioner [Pu-cheng ssu fu-shih]; and Ch’en Lin, Regional Inspector.47
 
In the evening, the General ordered an officer to bring us three jugs of yellow wine, one whole pig, one peck of rice, and ten pecks of millet for a feast.
 
 
214. 吳靈는 이 때보다 4년이 지난 후에 鳳凰城의 鎭撫가 되어 있었고, 명나라 사신 艾꽃이 곧 조선으로 나갈 것이라는 소식을 조선에 알려주었다. 《朝鮮成宗實錄》 23년 5월 乙酉.
 
215. 都指揮使司 및 行都指揮使司의 장관으로 정2품이다. 都指揮同知, 都指揮僉事와 함께 한 省의 軍政을 관장하였다. 司의 일을 총괄하는 자는 掌印이라 하였다. 1인은 練兵을, 1인은 屯田을 통괄하였는데, 僉書라고 불렀다. 巡捕, 軍器, 漕運, 操練, 備御 의 여러 직무를 모두 통괄하였다. 모두 流官으로 충임하였으며, 조정에서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26일===
 
二十六日,晴。王憲復來,曰:“貴國及海西、毛鄰、建州等衛,皆路經于此,貴國使臣往來,接待唯我與吳靈二人耳,我今年老畏暑,故總兵官差郵件送你,鄭亦好人,你可好還本國,可勿憂也,大抵道途之遠,客旅之中,四體不得息,寝食不以時,疾病易以纏,故不數月間,貴國使臣若韓鑽、李世弱相繼道死,其行道若是其難也,今你則歷盡鯨濤疆浪、越南、燕北,全其身全其從者而還,天所以置諸危而全之,措諸禍而福之,從可知矣!”臣曰:“我之保全而來,都是皇恩所賜,抑又我先人亡靈,必有陰佑之功故也。”
 
 
맑았습니다.
 
 
왕헌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귀국과 해서위(海西衛), 모린위(毛鄰衛), 건주위(建州衛)등으로 가는 길이 모두 이곳을 거치게 되는데, 귀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 접대하는 사람이 나와 오새 두 사람뿐입니다.
 
 
내가 지금 나이가 많아 더위를 견디지 못하므로 총병관께서 오새로 하여금 당신을 호송하게 하셨습니다.
 
 
오새도 좋은 사람이어서 당신은 본국으로 잘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개 먼 길을 여행 중에는 몸을 쉬지 못하고 먹고 자는 것을 제 때 하지 못하여 병이 쉽게 생깁니다.
 
 
그런 까닭에 몇 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귀국의 사신 가운데 한찬(韓贊), 이세필(李世弼) 같은 이가 잇달아 길에서 죽었던 것18이니 먼 길을 간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험한 파도와 월남(越南), 연북(燕北) 지방을 두루 다 거치면서도 자신과 종자들이 모두 온전히 돌아가게 되었으니, 하늘이 위험에 처하게 했다가 온전히 구해주시고 재앙 속에 빠트렸다가 복을 내려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내가 몸을 보전해 온 것은 모두 황제의 은혜 덕택이고, 또 저의 선친(先親)의 신령이 반드시 몰래 도와주신 공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6th Day. Fair.
 
 
Wang Hsien came again and said, “The road to your country and those to Hai-hsi, Mao-lin, and Chien-chou garrisons pass through here. Only Wu Hsi and I are here to receive the envoys' of your country who pass to and fro. I am old now, and I dread the summer heat. The Regional Commander, therefore, has commissioned my colleague Wu Hsi to accompany you as escort. Wu Hsi is also a good man. Do not worry, you will get back safely to your country.
 
“Generally, during a long trip the body gets no rest, and sleeping and eating are irregular, so that one easily falls sick. That is why within a few months envoys from your country like Han Ch’an and Yi Se-p’il died one after another on the way. So hard is the journey! Yet you, now, have passed through mountainous seas and come all the way from south of Yüeh to north of Yen. You are going home safe yourself and your followers safe; from that it is evident that Heaven has made dangers to save you and calamities to bring you through them in good fortune.”
 
I said, “My arrival safe and sound is entirely a gift of the Imperial graciousness. It must also be because my dead father's spirit has been giving me secret help.”
 
 
===27일===
 
二十七日,陰,吳璧來,曰:“總兵官差我以騎馬四十三匹、默載馬十五匹,送你等還國,其中一匹,乃我所騎,你等行李,約有多少?”臣曰:“我四十三人,原有行李合而載之,不滿一二默,但受賞於皇帝之胖綿榜,皆冬節之衣,又有所受於廣寧衣韓等物耳。”夔曰:“行李少則行路可便矣.”
 
 
흐렸습니다.
 
 
오새가 와서 말하기를, “총병관께서 나를 보내 타는 말 43필과 짐 싣는 말15필로써 당신들을 귀국시키도록 하셨는데 그중 1필은 내가 탈 것입니다. 당신들의 행장이 대략 얼마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43인이 원래 지닌 행장은 합하여 실어도 한 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10231555001 바리]에 지나지 않고 황제에게 상으로 받은 반오(胖煥)와 면고(綿榜)가 모두 겨울옷이고, 그밖에 광녕에서 받은 의복과 가죽신 등 물품이 있을 뿐입니다.”
 
 
“행장이 적으면 길 가기가 편할 것입니다.”
 
 
27th Day. Cloudy.
 
 
Wu Hsi came and said, “The Regional Commander has commissioned me to escort you back to your country with forty-three horses and fifteen pack horses. One of the animals will be ridden by me. About how much baggage do you have?”
 
I said, “If we loaded together the baggage the forty-three of us had originally, it would not fill one or two packs. But the padded jackets and trousers we received as awards from the Emperor are winter clothes. There are also the gowns, shoes, and other things we received at Kuang-ning, and that is all.”
 
Wu Hsi said, “If there is little baggage, the trip can be easy."
 
 
===28일===
 
二十八日,大雨,吳鑒又來,曰:“今日治任將行,天雨雨奈何?”臣曰:“以我式端之心,難過一刻之留,憂此兩者,我一人而已,今年大旱,自二月不雨,以至于今,幸而得雨,則其喜之者,人與萬物也,天實為之,謂之何哉?”璽日:“正是正是。”O遼東舊我高句麗之都,為唐高宗所滅,割屬中原,五代時為渤源(太)[大]氏所有,後又為遼、金、胡元所併,城中有都司、察院、布政司、大僕分司、閱馬司,又有左·右·中·前·後衛,自城西昇平橋,以至肅清、迎恩、澄清、楊武、威振、四路等門及進士門八座,以至高麗市間,民居可謂繁夥,揆之江南,可與嘉興府相頡頑矣,但嘉興城外,市間相接,遼東城外,雞鳴狗吠,不得相聞,海子路傍,土飄飄耳,城東又別築東寧衛城,首山、千山、木場、駱駝、太子、杏花諸山,環拱于城之西南東,其北則平曠無現之野,
 
 
큰비가 내렸습니다.
 
 
오새가 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은 행장을 차려 떠나려 했는데 하늘이 비를 내리시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나의 조급한 마음으로는 한 순간도 머물기 어려워 이 비를 근심하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입니다. 올해에는 크게 가물어 2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오늘에야 다행히 비가 내리니 사람과 만물이 모두 기뻐합니다. 실로 하늘이 하신 일인데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요동219은 곧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이었는데<ref>[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2361 여호규 교수, ‘고구려, 광개토왕 때도 요동 벗어나지 못했다’,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즈2017.10.27]</ref><ref>[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1392 [역사산책] 고구려와 한나라의 요동 전쟁, 동포뉴스, 2016.04.21]</ref><ref>[http://m.greatcorea.kr/626 고구리의 요동·요서는 어디인가? (4부), 고구려역사저널, 2015.10.10]</ref><ref>[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5160 태조대왕의 요동진격 이야기, 민플러스, 2018.05.24]</ref> 당고종(唐高宗)에게 멸망을 당하여 중원에 예속되었습니다.<ref>[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jsessionid=D57A6395A2FD089CAFB470468CCCAC9D?levelId=sg_022r_0020_0410 삼국사기 > 髙句麗本紀 第十 > 보장왕(寶藏王) > 당 고종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ref>
 
 
오대(五代) 시대에 발해(渤碑) 대씨(大氏)의 차지가 되었으나 후에 또 요(遼)나라 금(金)나라 원(元)나라에게 병탄되었습니다.
 
 
성안에 도사(都司)·찰원(察院)·포정사(布政司)·태복분사(太僕分司)·열마사(馬司)가 있고, 또 좌위(左衛)·우위(右衛)·중위(中衛)·전위(前衛)·후위(後衛)가 있었습니다.
 
 
성 서쪽의 승평교(昇平橋)에서 숙청문(肅淸門)·영은문(迎恩門)·징청문(澄淸門)·양무문(揚武門)·위진문(威振門)·사로문(四路門) 및 진사문(進士門) 등 팔좌(八座)로부터 고려시(高麗市) 사이에 민가는 번창하다고 할 만하니, 강남으로 가늠한다면 가흥부(嘉興府)와 서로 겨룰 만하였습니다.
 
 
다만 가흥은 성 밖에까지 시가(市街)가 잇닿아 있었는데 요동의 성 밖은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았으며 해자(字) 길 가에는 흙먼지만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성 동쪽에는 또 동녕위성(東寧衛城)을 별도로 쌓았는데 수산(首山)222 · 천산(千山)·목장산(木場山)·낙타산(協駝山)·태자산(太子山)·행화산(杏花山) 등 여러 산들이 성 서쪽 남쪽 · 동쪽으로 빙둘러 있었으며, 그 북쪽은 평평하고 툭 트여서 끝이 없는 벌판이었습니다.
 
 
28th Day. Heavy rain.
 
 
Wu Hsi came again and said, “Today we were to pack the baggage and start, but it is raining hard; what shall we do?”
 
I said, “It is hard for me, impatient as I am, to delay a moment. I alone am distressed by the rain. There has been a severe drought this year; it has not rained since the Second Month. Now that we are fortunate enough to get rain, men and all things are happy. If Heaven truly has done it, what can I say?”
 
Wu Hsi said, “True, true.”
 
XXX Liao-tung was the capital of our old Koguryo. It was taken and attached to China by T’ang Kao Tsung [r. 650-683]. Originally in the Five Dynasties period, it was held by the overlords of Po-hsieh.48 Later it was absorbed by Liao, Chin, and Barbarian Yuan.
 
Inside the wall are the Regional Military Commission, the Office of Surveillance [Ch’a-yüan],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the Local Office of the Imperial Stud, and the Inspectorate of Horses. 49 There are also Left, Right, Center, Forward, and Rear garrisons. From Sheng-p'ing Bridge west of the wall to Su-ch’ing, Ying-en, Ch’eng-ch'ing, Yang-wu, Wei-chen, and Ssu-lu gates; and between Chin-shih-men-pa-tso and Koreatown, the houses can be called dense. By standards south of the Yangtze, [the city] can be pitted against Chia-hsing Prefecture. But outside the wall of Chia-hsing Prefecture, villages stretch one after another; outside the wall of Liao-tung, neither the crowing of cocks nor the barking of dogs is to be heard. Along the Hai-tzu Road, there is nothing but great altars stretching like beads on a string. The wall of Tung-ning Garrison is built separately east of the city. Mt. Shou, Mt. Ch’ien; Mu-ch’ang, Lo-to, T'ai-tzu, and Hsing-hua mountains circle the city to the east, south, and west. To the north is a flat, endless plain. XXX
 
 
219. 요동은 넓게는 遼河의 以東 지방을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좁은 의미의 遼東 즉 遼東都司가 위치한 遼陽을 가리킨다.
 
220. 唐의 제3대 황제(재위 649-683)로서 즉위 초기에 永徽律令과 律疏를 제정하고 《五經正義》를 반포 발행하여, 唐의 典章制度를 모두 마무리지었다. 655년 새로 則天武后를 황후로 맞아들인 뒤부터는, 武后에게 점차 권력을 빼앗기게 되었다.
 
221. 渤海의 시조인 高王(재위 699-719) 大祚榮을 가리킨다. 696년 李盡忠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을 이용하여 고구려 유민<ref>[https://news.joins.com/article/22327904 [한국 속 중국] 고선지 장군, 중국 역사를 만든 고구려의 후손, 중앙일보, 2018.01.29]</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46533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 나폴레옹보다 낫다", 오마이뉴스, 2011.04.04]</ref><ref>[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03 고구려 후손 고선지 장군①…파미르 고원을 넘다, 오피니언유스, 2018.04.07]</ref><ref>[http://www.opinio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94 고구려 유민들의 디아스포라… 20여만명 끌려가, 오피니언뉴스, 2018.03.24]</ref>과 말갈족을 이끌고 자립을 꾀하였다. 699년 지금 의 吉林省 敦化縣 지역인 東牟山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어 국호를 震, 연호를 天統이라 하였다. 이후 唐은 유화정책으로 나와 唐中宗이 705년 사신을 보내 왔고, 大祚榮도 아들 大武藝를 唐에 보냄으로써 답례하였다. 713년에 국호를 渤海로 바꾸었다.
 
222.《遼史》에 의하면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할 때 이곳에 주둔하고 石碑를 세워 戰功을 기록했다고 한다. 民國《遼陽縣志》 권2, 山川.
 
 
===29일===
 
二十九日,自遼東登程,是日晴,吳鹽與千戶田福惜至驛,引臣等行,出驛城東門外,不一里,乃遼東城也,兩間有關王廟,行過兀良哈館、泰和門、安定門,至我朝鮮館,館前立(標)[標]1,扁畏天保國”四字,又過石河兒,入高麗洞,過大石門嶺、小石門嶺,兩嶺間有王都督墓,又過柳河
 
 
p.456
 
兒、湯河兒、頭巾站、狼子山,至顯得寨里而歇,里有三四家,乘昏,里人偷去臣之帽匣,匣中藏紗帽、囊佩及江南人所贈詩彙,程保告于璽,訊里人索之不得,鹽謂臣曰:“慢藏海盗,向誰给乎?”
 
 
요동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오새가 천호 전복(田福)과 함께 역에 이르러 신 등을 이끌고 출발하였습니다.
 
 
역성의 동문 밖으로 나와 채 1리도 되지 않는 곳이 요동성이었습니다.
 
 
두 성 사이에 관왕묘(關王廟)<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948 관왕묘]</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987 서울동관왕묘]</ref><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jkks&logNo=220744259872&parentCategoryNo=&categoryNo=9&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section [전북 남원] 관왕묘(關王廟)_삼국지의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ref>가 있었습니다.
 
 
가다가 올량합관(元良哈館)<ref>[http://m.blog.daum.net/jkkimmest/434?tp_nil_a=1 조선(朝鮮)을 받아들인 올량합(兀良哈)의 정체(6)-누루하치는 오도리(吾都里) 출신-]</ref>223. 태화문(泰和門) · 안정문(安定門)을 지나서 우리 조선관(朝鮮館)<ref>[http://www.ptsisa.com/news/articleView.html?idxno=5356 기획특집-평택 밖의 평택, 중국에서 평택 찾기 6 - 홍익한·오달제의 흔적, 심양 삼학사 유적-2, 평택시사신문, 2013.10.10]</ref>224에 이르니, 조선관<ref>[http://yulgon.kr/board/contents_print.php?board_num=8&rowid=128 연원직지(燕轅直指) / 봉황성기(鳳凰城記)]</ref> 앞에 푯말을 세워 '외천보국(畏天保國)225이란 네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또 석하아(石河兒)를 지나서 고려동(高麗洞)<ref>[http://web.yonsei.ac.kr/yonmin/article/26/26-13.pdf 고려동 유적 정비의 필요성에 대하여]</ref><ref>[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7930 [경남 문화재 여행] 함안 고려동유적지, 경남일보, 2015.07.20]</ref>으로 들어와 대석문령(大石門嶺)과 소석문령(小石門嶺)을 지나니, 두영 사이에 왕(王) 도독(都督)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또 유하아(柳河兒)·탕하아(湯河兒)·두건참(頭巾站)·낭자산(狼子山)<ref>[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15221&sType=&q=&secType=tt&&fq=cateType1_fct%3A%EC%A7%80%EB%AA%85&fq=cateArea1_fct%3A%EC%A4%91%EA%B5%AD 삼류하]</ref>을 지나서 현득채리(縣得寨里)에 이르러 쉬었는데, 마을에는 서너 채의 집이 있었습니다.
 
 
황혼(黃昏)을 틈타 마을 사람이 신의 모자갑을 훔쳐 갔는데 모자갑 속에는 사모(紗帽)·낭패(囊佩)와 강남 사람이 지어준 시고(詩)가 들어있었습니다.
 
 
정보가 오새에게 알려서, 마을 사람을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오새가 신에게 말하기를,
 
 
“소홀히 간수하여 도적을 불렀으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29th Day. Setting out from Liao-tung. This day was fair.
 
 
Wu Hsi and Chiliarch T’ien Fu came to the station and set out, leading us. Less than one li outside the east gate of the station wall was the wall of Liaotung. Kuan-wang Shrine was between the two walls. We passed Urianghai House, T’ai-ho Gate, and An-ting Gate and came to our Korea House. In front of the house stood a plaque with the (four) words, “Dread Heaven, Defend the State.”
 
[We went from Shih-ho-erh to Hsien-te-chai Village, where we stopped.] There were three or four houses in the village.
 
Under cover of dusk, villagers stole my hat box. I had packed light silk gauze hats, satchel pulls, and the manuscript of a poem presented to me by a man south of the Yangtze in the box. Chòng Po reported it to Wu Hsi, who questioned the villagers but did not get it. Wu Hsi said to me, “Carelessness in putting things away teaches others to steal. Who is at fault?”
 
 
223. 거쳐가는 元良哈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하여 마련한 客館,
 
224. 조선 使臣을 접대하기 위한 客館으로 康熙《遼陽州志》권10, 〈驛站)에 舖遞의 항목으로 열거되어 있다. 《遼東志》의 〈遼東都司治衛山川地理之圖〉에 의하면 조선의 사신을 留宿시킨 懷遠館 즉 朝鮮館을 遼陽城 밖 동남방에 따로 지었다고 한다.
 
225. 畏天保國'이란 하늘을 두려워하며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지만, 여기서 '畏天'의 '天이란 결국 '天子'나 '天朝'의 뜻으로 즉 明朝를 가리킨다. 《春秋集義》에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畏天者, 保其國”이란 구절이 있다. 결국 '畏天保國'이란 네 글자를 朝鮮館 앞에 걸어 놓은 의미는 “明朝에 충실하게 事大를 함으로써 朝鮮을 잘 보존하도록 하라”는 암시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월 1일===
 
六月初一日,晴,日食,逾顯得嶺、青石嶺,二嶺間青石路,又過水河兒,西南望有黑山高險,橡子洞有塔寺,東南聯高嶺,嶺曬岩盤曲,過泰子河,至連山關,守關千戶黃文邀臣及吳璧、田福、房祥、張勇、沈榮,做飯以饋,福、祥、勇、榮及王升、馬牛忽、洪傑、吳洗、金清、周端等及百戶三十人、軍人二百餘人、館夫十人,皆遼東總兵官所差護送臣等者也,連山河而上,暮投白家莊民家,
 
 
맑고 일식(日食)이 있었습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2310018_002 성종실록 270권, 성종 23년 10월 18일 을묘 2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문신으로 조심성 있고 치밀한 자를 선택하여 천문과 산학을 익히게 하다]</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5878 천문학(天文學)]</ref>
 
 
현득령(顯得嶺)·청석령(靑石嶺)을 넘었는데 두 영 사이에는 청석(靑石)이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또 첨수하아(括水河兒)를 지나서 서남쪽을 바라보니 높고 험준한 흑산(黑山)이 있었고, 상자동(豫子洞)에는 탑사(塔寺)가 있었습니다.
 
 
동남쪽으로 고령(高嶺)을 넘으니, 고개는 깎아지른 듯하고 바위는 꼬불꼬불하였습니다.
 
 
태자하(太子河)<ref>[http://m.blog.daum.net/manjumongol/107?np_nil_b=-1]</ref>를 지나서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니 관(關)을 지키는 천호 동문(董文)이 신과 오새·전복·방상(房祥)·장용(張勇)·심영(沈榮)을 맞이하여 밥을 지어 접대해 주었습니다.
 
 
전복·방상·장용·심영 및 왕승(王升)·마총(馬摠)·홍걸(洪傑)·오세(吳洗)·김청(金淸)·주단(周端) 등과 백호 30인, 군인 200여 인, 관부(館夫) 10인은 모두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의 명으로 신 등을 호송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연산하(連山河)를 거슬러 올라가서 저녁에 백가장(百家莊)의 민가에 투숙하였습니다.
 
 
1st Day, Sixth Month. Fair. An eclipse of the sun.50
 
 
[From Hsien-te Range we came to Lien-shan Pass.] Tung Wen, the Pass Chiliarch, invited me, Wu Hsi, T’ien Fu, Fang Hsiang, Chang Yung, and Shen Jung [to join him). He had food prepared and served to us. Fu, Hsiang, Yung, and Jung; and Wang Sheng, Ma Tsung, Hung Chieh, Wu Hsi, Chin Ch’ing, and Chou Tuan, with thirty centurions, over two hundred soldiers, and ten porters from the inn, were men who had been commissioned by the Regional Commander of Liao-tung to escort us.
 
We went up the Lien-shan River and at sundown stopped at people's houses at Pai-chia Village.
 
 
===2일===
 
初二日,晴,朝至分水嶺,自嶺以北,地勢北下,豁豁諸水,俱會于泰子 河,西入于遼河,自嶺以南之水,俱會于八渡河,嶺之得名以此。至通遠堡,堡有新·舊城,龍宰山當其後,前有龍宰河,西南有德山,又其南有飯 山,一名簽北山,又過李海市,里人曰:“昨夜,千戶馬牛忽所管護送軍人,先到于此,有虎攬傷所乘馬,自昔無此患,故過此者,皆山行野宿,今適有之,亦可畏也。”過斜哨屯河,時水漲湍急暴下,軍人高福者蹉跌赴流,吳鑒適浴,見其溺而援之,至李勝屯.
 
 
맑았습니다.
 
 
아침에 분수령(分水嶺)<ref>[http://www.water.or.kr/encyclopedia/encyclopedia/encyclopediaview.do?seq=527&p_group_seq=526&menu_mode=4&currentPageNo=19&search_Hangulindex=%E3%84%B7&search_Engindex=&TERM_SEQNO=6733&HANGULTERM=&ENGTERM=&COMM_CODE=&ATTFILE_SEQNO=&languege=h&searchTextBefor=&searchText= 대륙분수령]</ref><ref>[http://m.blog.daum.net/salvia24/15381533?tp_nil_a=1 백산정계비를 세운 청대 분수령(分水嶺)은 명대 분수령과 같은 준령 (完)]</ref><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4841 분수령]</ref>에 이르렀습니다.
 
 
분수령 이북은 지세가 북쪽으로 내려가 골짜기의 여러 물이 모두 태자하(太子河)로 모여서 서쪽으로 요하(遼河)로 들어가고, 분수령 이남의 물은 모두 [https://www.itsfun.com.tw/%E5%85%AB%E6%B8%A1%E6%B2%B3/wiki-7370297-2466467 팔도하(八渡河)]<ref>[https://baike.baidu.com/item/%E5%85%AB%E6%B8%A1%E6%B2%B3 팔도하]</ref><ref>[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2248662&language=ko_KR “八渡河”考]</ref>로 모이니 '분수령'이란 고개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D%86%B5%EC%9B%90%EB%B3%B4(%E9%80%9A%E9%81%A0%E5%A0%A1) 통원보(通遠堡)]<ref>[https://books.google.co.kr/books?id=6lxTCwAAQBAJ&pg=PT94&lpg=PT94&dq=%ED%86%B5%EC%9B%90%EB%B3%B4(%E9%80%9A%E9%81%A0%E5%A0%A1)&source=bl&ots=t6US_79tMt&sig=ACfU3U30hN_Bi_mNdoZ34dV0WkCgJdqh9A&hl=ko&sa=X&ved=2ahUKEwjuuJGkkOjjAhVRL6YKHW-SBiwQ6AEwA3oECAkQAQ#v=onepage&q=%ED%86%B5%EC%9B%90%EB%B3%B4(%E9%80%9A%E9%81%A0%E5%A0%A1)&f=false 조천일기]</ref><ref>[https://books.google.co.kr/books?id=6vSPDwAAQBAJ&pg=PT154&lpg=PT154&dq=%ED%86%B5%EC%9B%90%EB%B3%B4(%E9%80%9A%E9%81%A0%E5%A0%A1)&source=bl&ots=9sXhJfxryq&sig=ACfU3U1pVnwjoLwIF6oByG0h-hDdZrJmbg&hl=ko&sa=X&ved=2ahUKEwjuuJGkkOjjAhVRL6YKHW-SBiwQ6AEwBHoECAgQAQ#v=onepage&q=%ED%86%B5%EC%9B%90%EB%B3%B4(%E9%80%9A%E9%81%A0%E5%A0%A1)&f=false 열하일기]</ref><ref>[http://rexhistoria.net/community_western/133200 [계산기정(薊山紀程)] 통원보에 얽힌 설화]</ref>에 이르니 통원보에는 신성(新城)과 구성(舊城)이 있었습니다.
 
 
용봉산(龍峯山)은 그 뒤에 있고, 앞에는 용봉하(龍峯河)가 있었으며, 서남쪽에는 덕산(德山)이 있었습니다.
 
 
또 그 남쪽에 증산(山)이 있었는데 일명 옹북산(瓷北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또 이해둔(李海屯)을 지나니 마을 사람이 말하기를,
 
 
“어제 밤에 천호 마총이 관할하는 호송 군인들이 먼저 이곳에 도착했는데, 타고 온 말을 호랑이가 잡아채서 상처를 입혔습니다. 예로부터 이런 걱정은 없었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산길을 걷고 들에서도 유숙했는데, 지금 마침 이런 일이 있으니 또한 두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초둔하(斜哨屯河)를 지나는데 마침 물이 불어서 물살이 급하였습니다.
 
 
군인 고복이란 자가 미끄러져 넘어져서 떠내려갔는데, 오새가 마침 목욕하다가 빠진 것을 보고 건져주었습니다.
 
 
이승둔(李勝屯)에 이르렀습니다.
 
 
2nd Day. Fair.
 
 
[We went from Watershed Range to Li-hai-t’un, where] a villager said, “Last night escort soldiers commanded by Chiliarch Ma Tsung came here ahead of you. A tiger seized and wounded one of the horses they had been riding. We have not had that trouble since long ago; that is why everyone who passed here would walk in the mountains and sleep out of doors. Now that this has happened, there is reason to be afraid again.”
 
We passed the Hsieh-shao-t’un River. The water was then a flooding torrent, racing violently downstream. Ko Pok, a soldier, slipped and fell into the stream. Wu Hsi happened to be bathing and saw him drowning and rescued him.
 
We came to Li-sheng-t’un.
 
 
===3일===
 
初三日,晴,過斜哨大嶺,至八渡河,以其八渡其水故名,或謂之半塗河,以其自我 朝鮮京城,至中國北京,此河正在其中界兩半故名,又過長嶺兒、薛里站、白言嶺、奴哥秀、奴哥河兒、奴哥嶺、干河兒,至鳳凰山,東寧衛方才撥軍夫,築城于此,吳鑒謂臣曰:“此城乃為貴國使臣往來,防道梗而築也。”過開州城、王斌吉塔里、餘溫者介河兒,至寬得洛谷,露宿焉,谷之東有海青山,又名松鶴山,
 
 
맑았습니다.
 
 
사초대령(斜哨大嶺)을 지나서 팔도하에 이르렀는데 강물을 여덟 번 건너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습니다.
 
 
반도하(半塗河)<ref>[http://m.blog.daum.net/manjumongol/1226?np_nil_b=-1 조선의 압록은 베이징북쪽 칠도하가 맞더라]</ref>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 조선의 경성(京城)으로부터 중국의 북경에 이르자면 이 강이 바로 그 중간의 절반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또 장령아(長嶺兒)· 설리참(薛里站)·백언령(白言嶺)·노가독(奴哥)·노가하아(奴哥河兒)·노가령(奴哥嶺)·간하아(干河兒)를 지나서 봉황산(鳳凰山)<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hIe&articleno=8768388&categoryId=323255&regdt=20160429234430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ref>에 이르니, 동녕위(東寧衛)에서 이제 막 군부(軍夫)를 뽑아 이곳에 성을 쌓고 있었습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6004_003 성종실록 217권, 성종 19년 6월 4일 병신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에 성 쌓는 일이 중요함을 상언하다]</ref>
 
 
* 봉황성: http://www.palhae.org/sogilsu/travel/cholli-12.htm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023 건주여진정벌(建州女眞征伐)]
 
*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1%B4%EC%A3%BC%EC%82%BC%EC%9C%84(%E5%BB%BA%E5%B7%9E%E4%B8%89%E8%A1%9B) 건주삼위]
 
* 여진족을 둘러싼 명과 조선의 각축<ref>[http://b2b.mekia.net/previewEPUB/BK0000147495/OEBPS/Text/Section0002.xhtml]</ref>
 
오새(吳__)226가 신에게 말하기를,
 
* 이만주의 아들 귀순<ref>[http://sillok.history.go.kr/id/kfa_10306105_002 단종실록 14권, 단종 3년 윤6월 5일 기유 2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세조가 이두리를 의정부에서 만나보다]</ref>
 
“이 성은 귀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길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개주성(開州城)·왕빈길탑리(王法吉塔里) · 여온자개하아(餘溫者介河兒)을 지나서 관득락곡(寬得洛谷)에 이르러 노숙하였습니다.
 
 
관득락곡의 동쪽에 해청산(海靑山)<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2555 해동청]</ref>이 있었는데, '[http://kostma.aks.ac.kr/dataSearch/dataSearch.aspx?cateQ=&mE=&query=%EC%86%A1%EA%B3%A8%EC%82%B0 송골산(松巖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3rd Day. Fair.
 
 
We passed Hsieh-shao Great Range and came to Eight Crossings River, which was named for its eight ferries. Some called it Halfway River. It was so named because it was exactly halfway between Ching-ch'eng [Seoul] of our Korea and Peking of China. We passed [several places] and came to Fenghuang-shan-tung-ning Garrison. Military laborers had been sent out and were just then building a wall there. Wu Hsi said to me, “That wall is being built to protect the road along which envoys from your country pass.”?51
 
[We went from K’ai-chou Wall to Hai-ch’ing Mountain.]
 
 
226. 吳璽는 4년 후에 鳳凰城을 수비하는 鎭撫로 승진하였음이 확인된다. 《朝鮮成宗實錄》 23년 5월 乙酉.
 
 
===4일===
 
初四日,渡鴨綠江,是日晴,清晨,過湯山站、名不記二小河,至九連城。城額只有土築舊址,又謂婆婆堡,堡前有江,即楓浦也,又舟渡吾夜江,二江同源而分,復合為一,通謂之狄江,又舟渡鴨綠江,牧遣軍官尹遷善,慰臣于江邊,薄暮,又舟渡難子江,二江亦以一而分,下又合流,夜三更,馳入義州城,城正當唐人、野人等往來之衝,城之制,狹小顏殘,城中里開零落,良可恨也。
 
 
自牛頭外洋至桃诸所一百六十餘里,自桃诸所至寧海縣四百餘里間,俱是沿海僻地地,無館驛,到越溪巡檢司,始有鋪,到寧海縣,始見白崎驛,自白崎過西店、連山、四明、車廠、姚江、曹娥、東關、蓬萊、錢清、西興,至杭州府武林驛,自桃诸所至此一千五百有餘里也。又自武林過吳山、長安、__林、西水、平望、松陵、姑蘇、錫山、毗陵、雲陽,至鎮江府
 
 
p.458
 
京口驛,自杭州至此一千有餘里也,過楊子江,至揚州府廣陵驛,自此以後, 路分水陸,水路則有邵伯、孟城、界首、安平、淮陰、清口、桃源、古城、鍾吾、直河、下邳、新安、房村、彭城、夾溝、泗亭、沙河、魯橋、南城、開河、安山、荊門、崇武、清陽、清源、渡口、甲馬營、梁家莊、安德、良店、連窩、新橋、磚河、乾寧、流河、奉新、楊青、楊村、河西、和合,至通州潞河水馬驛,自楊州至此共三千三百有餘里也,陸路則有大柳、池河、紅心豪、梁王莊、固鎮、大店、睢陽、夾濟、桃山、黃澤、利國、膝陽、界河、城、昌平、新嘉、新橋、東原舊縣、銅城、淮山、魚丘、天平、安德、東光、阜城、樂城、瀛
 
海、鄂城、歸義、汾水、涿鹿,至固節驛,自楊州至此二千五百有餘里也,水有紅船,陸有鋪馬,凡往來使命、貢獻、商賈,皆由水路,若或因旱乾,開河水淺,不能通船,或有火馳星報之事,則由陸路,盖楊州府近南京,只隔三驛,且閱湖以南,皆路經此府,以達 皇都,故驛路甚大,陸購相距,或六十里,或七八十里,水驛則自武林至兴山三十里,自潞河至會同館四十里,皆水路中之陸路,故相距近,其他則或六七十里、八九十里,或過百里,相距甚遠,鋪之相距,或十里,或二三十里,自楊州後,水邊又設淺,或六七里,或十餘里,以記里,臣所經自牛頭外洋至桃诸所,至杭州,至北京會同館,大哭共六千有餘里,自會同館,過潞河、夏店、公樂、漁陽、陽樊、永濟、義豐、七家镇、灣河、盧峯口、榆關、遷安、高嶺、沙 河、東關、曹家莊、連山島、杏兒、小凌河、十三山、間陽、廣寧、高平、沙嶺、牛家莊、海州在城、鞍山、遼陽等驟,至遼東城,遼陽即遼東 在城驛,驛相距,或三四十里,或五六十里,共千七百有餘里,山海關以內,十里置煙臺,以備烽火,過關後,又間五里置小墩,立標以記里,自遼東,過頭官、__水、通遠堡、斜里、開州、湯站等站,至鴨綠江,又三百有餘里,山海關以東,又築長墙,置堡子,以防野人,瞬遞皆有城,與防禦所一般,又不設府州縣,置衛所,雖若驛遞之官,皆以軍職填之,臣又傳聞,自三叉河,又有一路,過海州衛、西木城、矫岸城、驚拿河屯、牢房林子屯、獨塔里屯、林江河、蒲蘆葫屯,至鴨綠江,僅二百餘里,亦是中大路,路左有舊城基,廢為安市里,證傳拒唐兵處,大明洪武間,又築長墙以禦胡,頭接秦長城東而來,三叉河以西不可詳也,以東則北過長靜、長寧、長安、長勝、長勇、長營、靜遠、上榆林、十方寺等堡,又東過平洛泊堡,至(潘)【潘】陽城,又北過蒲河、懿路縣、凡河、鐵嶺衛、腰站等城,至開原城,又過東撫順所城,南至東州、馬跟單、清河、鹹場、靈陽、十叉口等堡,至鴨綠江,凡數千餘里,回抱定遼左二十五衛巡城,亦有路云云,然未可的知。
 
 
奉化縣以南並海濱,多高山峻嶺,奇岩亂石,溪澗榮繞,花卉明媚,大江以南,地多塗泥波滞,然天台、四明、會稽、天目、天平諸山,錯綜橫巨乎其間,淮河以南,地多湖浸泥淖沮,以北則地多墳起,漕河跟岸,高於平地,決圈流移,水陸變遷,濟寧州之北,有分水廟,自願以南,水勢皆.
 
 
p.460
 
南下,以北則皆北下,武城縣以北,地多泥沙,若長蘆等處,斥鹵多鹹,即《禹貢》海濱廣斥之地,天津衛以北,水勢又皆南下,通至張家灣,平沙無際,隨風流轉,至北京則天壽等諸山,環拱于北,其西支則通連大行、王屋諸山,以達于河南之境,其東支則東走過三河、蓟州,至玉田縣之北為燕山,又東過豐潤縣,至榛子鎮,又分為二支,其南支則東過藻州昌黎縣,至碣石山,直抵于海,其北支則通連燕山之脉,東過遷安、永平,至撫寧之東,直抵于山海關,關外又蜿蜒而東,至廣寧衛之西北為醫巫闊山,自北京以至于此,山皆童不毛,其間,大江以北,大行以東,燕山·醫巫圖以南數千里間,四野平衍,東通大海,延入于廣寧之東、海州衛之西、遼東之北為大野,即所謂鶴野也,海州衛之東,始有鞍山紫紅,而南為千山,自此以後,幫宰疊嶂,如列戟圍屏,東南抵于鴨綠江,東入野人之境,遼東之南,有分水嶺,自嶺以北,則水勢皆北下,以南則皆南下,石門嶺以南,山多林木茂密,潤水澄碧,自北京以至鴨綠江,其間名為河者,都是小川,皆雨漲旱乾,唯藻河、三叉河為大,其次若白河、大·小凌河、泰子、八渡等河也,大江以南,地多軟石,陸則皆璧石鋪路,或橫截渴淖,跨上山脊,如寧海、奉化縣等處為多,水則皆鍊石建虹門橋,築堤捍江湖,如吳江縣等處為多,淮河以北,一無石橋,或有造舟為浮橋,或有略設木橋者,陸路則沙塵漲天,自連山關以後,鳥道如線,荒草合,蚊虻撲面,行者甚苦,自淮河以南,地多水田沃饒,稻梁為暖,徐州以北無水田,遼東以東,天又晚懷早寒,五穀不盛,惟泰生之,在昔江湖福建以南漕運,皆會于大江,浮于海,達于潞河,以至于北京,胡元順帝時,始鑿運河,築堤置閘,以通漕轉,至我永樂間,決黃河,注于准,導衛河,通于白河,大加修築,水瀉則置堰壩以防之,水淤則置堤塘以捍之,水淺則置閘以貯之,水急則置洪以逆之,水會則置嘴以分之,壩之制,限二水內外兩傍,石築作堰,堰之上植二石柱,柱上橫木如門,橫木鑿一大孔,又植木柱當横木之孔,可以輪迴之,柱間盤亂孔,又劈竹為繪纏結於木柱,以短木爭植亂孔以辰之,乾舟而上,上壩逆難,下壩順而易,聞之制,兩岸築石堤,中可容過一船,又以廣板塞其流以貯水,板之多少,隨水淺深,又設木橋於堤上,以通人往來,又植二柱於木橋兩傍,如壩之制,船至則撤其橋,以索繫之柱,勾上廣板通其流,然後木奢丹以過,過復塞之,洪之制,兩岸亦築石堰,堰上治手牽路,亦用竹系覽以逆挽之,挽一船,人獎則百餘人,牛則十餘頭,若若若洪,皆有官員,聚人契牛隻以待船,至堤塘與嘴皆石築,亦或有木栅者,浙江鎮守差楊旺,送臣等于皇都,限在四月初一日,故楊旺率臣等督行畫夜,順風則懸机,逆風則木舟,水淺則撑舟,水深則掉舟,驛支口糧,遞運所換船,凡使命及貢獻往來皆然,
 
 
大抵百里之間,尚且風殊俗異,况乎天下風俗,不可以一躯論之,然其大柴以楊子一江分南北而觀,其人煙盛衰,則江以南諸府城縣衛之中,繁華壯麗,言不可悉,至若鎮、若巡檢司、若千戶所、若寒、若驛、若鋪、若里、若壩所在附近,或三四里,或七八里,或十餘里,多或至二十餘里間,闇闇撲地,市肆夾路,樓臺相望,軸髓接纜,珠玉·金銀·寶貝之產、稻梁·鹽鐵·魚蟹之富、羔羊·鵝鴨·雞豚·聽牛之畜、松拿·藤棕·龍眼·荔枝·橘柚之物甲于天下,古人以江南為佳麗地者以此,江以北若楊州、淮安及淮河以北若徐州、濟寧、臨清,繁華豐阜,無異江南,臨清為尤
 
 
p. 462
 
盛,其他若官府所治之城,則亦間有富盛繁夥者,若鎮、若寒、若驛、若鋪、若里、若集、若嘴、若廠、若灣、若鳩、若蘭、若壩、若遷之間,人煙不甚繁盛,里開蕭條,通州以東,人煙漸少,過山海關行百里,僅得一里社,不過二三草屋,唯羔羊雞豬聽駱牛馬之畜,籠絡原野,楊柳桑案之樹,茂騎交柯,八道河以南,荒曠無人居,其弟宅,則江南,盖以一瓦,鋪以颠,階砌皆用鍊石,亦或有建石柱者,皆宏壮華麗,江北,草屋矮小者,殆居其半.其服飾,則江南人皆穿寬大黑糯榜,做以綾羅、網網、匹段者多,或戴羊毛帽、黑匹段帽、馬尾帽,或以巾帕裏頭,或無角黑中、有角黑中,官人紗帽,喪者白布巾,或麗布巾,或着難,或着皮鞋、革翁輕、芒簇,又有以巾子纏脚,以代護者,婦女所服皆左,首飾,則寧波府以南,圓而長而大,其端中約華飾,以北,圓而銳,如牛角然,或戴觀音冠,飾以金玉,照耀人目,雖白髮老姻,皆垂耳環,江北服飾,大樂與江南一般,但江北好着短窄白衣,資遺懸翡者,十居三四,婦女首飾,亦圓而尖,如雞喙然,自滄洲以北,女服之,或左或右,至通州以後,皆右,山海關以東,其人皆麗,衣冠系藍縷,海州、遼東等處人,半是中國,半是我國,半是女真,石門嶺以南,至鴨綠江,都是我國人移住者,其冠裳語音及女首飾,類與我國同,人心、風俗,則江南和順,或兄弟、堂兄弟·再從兄弟,有同居一屋,自吳江縣以北,間有父子異居者,人皆非之,無男女老少,皆踞繩床交椅,以事其事.江北人心强悍,至山東以北,一家不相保,關國之聲,戲開不絕,或多有劫盗殺人,山海關以東,其人性行尤暴悍,大有胡狄之風,且江南人以讀書為業,雖里閉童稚及津夫、水夫,皆識文字,臣至其地,寫以問之,則凡山川、古蹟、土地、沿革,皆曉解詳告之,江北則不學者多,故臣欲問之,則皆曰:“我不識字,就是無識人也,且江南人業水虞,乘飛艋,載答奢,以單單简算取魚者千百爲墓,江北則唯濟寧府南旺湖等處外,不見捕魚之具,且江南婦女,皆不出門庭,或登朱樓,捲珠簾以觀望耳,無行路服役於外,江北則若治田掉舟等事,皆自服勞,至如徐州、臨清等地,華粧自籌,要價資生以成風,且江南人號為官員者,或親執役,為卒徒者,或踞胡床,冠帶無章,尊卑無位,似若殊無禮節,然在官衙,則威儀整肅,在軍中,則號令嚴切,正伍循次,無敢喧嚣,一出令時,聞一鋅聲,遠近雲集,莫或有後,江北亦然,但山東以北,凡出合,非鞭不能整之,且江南戎器,則有缩、劍、矛、乾,其甲、胃、桶等物,皆火書勇字,然無弓箭戰馬,江北始有帶弓箭者,通州以東及遼東等地,人皆以馬為業,然箭竿以木為之,且江南好治容,男女皆帶鏡盒、梳、宽、刷牙等物,江北亦然,但不見帶之者,江南市中使金銀,江北用銅錢,江南市兒以錫約臂,江北以鉛穿鼻,江南力農工商賈,江北多有遊食之徒,江南陸路行用轎,江北或馬或臆,江南無良馬,江北馬大如龍,江南人死,巨家大族,或立廟族門者有之,常人略用棺不理,委之水傍,如紹興府城邊,白骨成堆,江北如楊州等地,起墳坐或於江邊、或田畔里開之中,江南喪者、個人或食肉不食董,江北則皆血食茹董,此江南、江北之所以異也,其所同者,尚鬼神,崇道佛,言必搖手,怒必麼口唾沫,飲食鹿糖,
 
 
p.464
 
同卓同器,輪以食,蠟蟲必咀嚼,砧杵皆用石,運磨使聽牛,市店建帝(標)(標],行者擔而不負戴,人皆以商賈為業,雖達官巨家,或親袖稱鍾,分析貓蛛之利,官府]常刑,如竹片決杖、續指、「擔石之屬,其他若山川形勝、臺樹古蹟有膽灸人口者,雖盡毛穎,不能悉記,而臣之歷覽,千載難又,然在衰經之中,不敢觀望遊賞,採取勝釀,令陪史四人逐日觀標榜,問地方,掛一漏萬,記其大略耳.
 
 
압록강<ref>[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60615/78678631/1 고려 압록수(鴨綠水)는 북한 압록강이 아닌 중국 요하(遼河)?, 동아일보, 2016.06.15]</ref>을 건넜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이른 새벽에 탕산참(邊山站)<ref>[http://kostma.korea.ac.kr/dir/viewIf?uci=RIKS+CRMA+KSM-WD.0000.0000-20150331.OGURA_046 관화약초(關話畧抄)]</ref>과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두개의 작은 강을 지나서 [http://korean.people.com.cn/196254/196484/196490/12103179.html 구련성(九連城)]<ref>[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6131 [고구려대탐험] 4.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지, 경기신문, 2008.01.09]</ref><ref>[http://blog.daum.net/3002kumsukangsan/8450421 단동의 호산장성은 가짜 구련성이다]</ref>에 이르렀습니다.
 
 
성은 무너져버리고 흙으로 쌓은 옛 성터만 남아 있었는데 파사보(婆婆堡)라고도 하였습니다.
 
 
파사보 앞에 강이 있었으니 풍포(楓浦)였습니다.
 
 
다시 배로 오야강(吾夜江)을 건넜습니다.
 
 
두 강이 연원은 같으면서 나누어졌다가 다시 합쳐서 하나가 되었는데 통칭 '적강(狄江)'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배로 압록강을 건너니 목사(牧使)가 군관(軍官) 윤천선(尹遷善)을 보내어 신을 강가에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황혼에 또 배로 난자강(難子江)을 건넜는데 두 강 또한 연원은 하나로서 나뉘어 흐르다가 다시 합류한 것이었습니다.
 
 
밤 3경에 말을 달려 의주성(義州城)으로 들어가니 의주성은 바로 당인(唐人)과 야인(野人)228 등이 왕래하는 요충에 해당하였습니다.
 
 
성의 규모는 협소하고 퇴락했으며 성 안 민가도 보잘 것 없었으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두 앞 바다에서 도저소(挑者所)까지는 160여 리, 도저소에서 영해현(寧海縣)까지는 400여 리인데 모두 바닷가 외진 땅이므로 객관(客館)과 역사(驛舍)가 없었습니다.
 
 
월계순검사(越溪巡檢司)에 도착하니 비로소 포(鋪)가 있었고, 영해현에 도착하니 비로소 백교역(白崎驛)이 보였습니다.
 
 
백교역에서 서점(西宮)·연산(連山)·사명(四明)·거구(車)·요강(姚江)·조아(曹娥)·동관(東關)·봉래(蓬萊)·전청(錢淸)·서흥(西興)을 거쳐 항주부(杭州府)의 무림역(武林驛)에 이르렀는데, 도저소에서 이곳까지는 1천5백여 리였습니다.
 
 
또 무림역에서 오산(吳山)·장안(長安)·조림(自林)·서수(西水)·평망(平望) · 송릉(松陵)·고소(姑蘇)·석산(錫山)·비릉(此陵)·운양(雲陽)을 거쳐 진강부(鎭江府)의 경구역(京口驛)에 이르렀는데, 항주에서 이곳까지는 천여 리였습니다.
 
 
양자강을 지나서 양주부(揚州府)의 광릉역(廣陵驛)에 이르렀는데 여기서부터는 길이 수로와 육로로 나뉘어졌습니다.
 
 
수로는 소백(邵伯)·우성(孟城)·계수(界首) · 안평(安平)·회음(淮陰)·청구(淸口)·도원(桃源)·고성(古城)·종오(鍾吾)·직하(直河)·하비(下邪)·신안(新安)·방촌(房村)·팽성(彭城)·협구(夾溝)·사정(泗亭)·사하(沙河)·노교(魯橋)· 남성(南城)·개하(開河)·안산(安山)·형문(前門)·숭무(崇武)·청양(淸陽)·청원(淸源)·도구(渡口)·갑마영(甲馬營)· 양가장(梁家莊)·안덕(安德)·양점(良店) · 연와(連)·신교(新橋)·전하(傳 河)·건녕(乾寧)·유하(流河)·봉신(奉)·양청(楊靑)·양촌(楊村)·하서(河西)·화합(和合)을 거쳐서 통주(通州)의 노하수마역(路河水馬驛)에 이르는데, 양주에서 이곳까지는 합계 3천3백여 리였습니다.
 
 
육로는 대류(大柳)·지하(池河)·홍심(紅心)·호양(濠梁)·왕장(王莊)·고진(固鎭)·대점(大店)·수양(雕陽)·협기(夾기)·도산(桃山)·황택(黃澤)·이국(利國)·등양(勝陽)·계하(界河)·주성(都城)·창평(昌平)·신가(嘉)·신교(新橋)·동원(東原)·구현(舊縣) · 동성(銅城)·임산(産山)·어구(魚丘)·태평(太平)·안덕(安德)·동광(東光)·부성(阜城)·낙성(樂城)·영해(爐海)·근성(근城)·귀의(歸義)·분수(가水)·탁록(鹿)을 거쳐서 고절역(固節驛)에 이르는데, 양주에서 이곳까지는 2천5백여 리였습니다.
 
 
수로에는 홍선(紅船)229이 있고 육로에는 포마(鋪馬)230가 있었습니다.
 
 
왕래하는 사자(使者)·공헌(貢獻)·상고(商賈)들은 모두 수로를 이용하였습니다.
 
 
만약 가뭄으로 인하여 갑하(開河)의 물이 얕아져 배가 통행할 수 없거나 빨리 달려가서 급히 보고할 일이 있으면 육로를 이용하였습니다.
 
 
양주부는 남경과 가까워 단지 세 역(驛) 정도만큼 떨어진 거리였고, 또 복건과 절강 이남 지방에서 모두 이 부(府)를 경유하여 황도(皇都)에 갔기 때문에 역로(驛路)가 매우 넓었습니다.
 
 
육로의 역은 그 사이의 거리가 60리 혹은 70-80리 정도 되었습니다.
 
 
수로의 역은 무림(武林)에서 오산(吳山)까지 30리, 노하(路河)에서 회동관(會同館)까지 40리였는데, 모두 수로 중의 육로였던 까닭에 그 사이가 가까웠습니다.
 
 
그 외에는 60-70리, 80-90리, 혹은 100리가 넘기도 하여 그 사이가 매우 멀었습니다.
 
 
포(鋪) 사이의 거리는 10리, 혹은 20-30리였습니다.
 
 
양주 이후로는, 물가에 천(淺)을 6-7리, 혹은 10리마다 설치하여 이수(里數)를 기록하였습니다.
 
 
신의 경로는 우두 앞 바다에서 도저소, 항주로 해서 북경의 회동관(會同館)에 이르렀으니 대개 합계 6천여 리였습니다.
 
 
회동관에서 노하(路河)·하점(夏店)·공락(公樂) · 어양(漁陽)·양번(陽樊)·영제(永濟)·의풍(義豊)·칠가령(七家嶺)·만하(灣河)·노봉구(盧峯口)·유관(關)·천안(遷安) ·고령(高嶺) 사하(沙河)·동관(東關)·조가장(曹家莊)·연산도(連山島)·행아(杏兒)·소릉하(小凌河)·십삼산(十三山) · 여양(固陽)·광녕(廣寧)·고평(高平)·사령(沙嶺)·우가장(牛家莊)·해주재성(海州在城)·안산(鞍山)·요양(遼陽) 등 역을 거쳐 요동성에 이르렀는데 요양역, 곧 요동재성역(遼東在城驛)이었습니다.
 
 
역 사이의 거리가 30~40리, 혹은 50~60리였는데 합계 1천7백여 리였습니다.
 
 
산해관에서 안쪽은 10리마다 연대(燃臺)232를 설치하여 봉화(陰火)를 갖추어 놓았고 산해관을 지난 후에는 5리 간격으로 작은 돈대(數臺)233를 설치하여 푯말을 세워서 이수(里數)를 기록하였습니다.
 
 
요동에서 두관(頭官)·첨수(話水)·통원보(通遠堡)·사리(斜里)·개주(開州)·탕참(湯站) 등 여러 참(站)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또 300여 리였습니다.
 
 
산해관에서 동쪽은 또 긴 원장(垣墻)을 쌓고 보자(堡子)를 설치하여 야인(野人)을 방비하였습니다.
 
 
역체(驛遞)에는 모두 성이 있었으니 방어소(防禦所)와 같았습니다.
 
 
또 부(府)·주(州)·현(縣)을 두지 않고 위소(衛所)를 설치하여 역체의 관원 같은 것도 모두 군직(軍職)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신이 또 전해 듣건대, 삼차하(三叉河)에서부터 또 한 길이 있어 해주위(海州衛)·서목성(西木城)·수안성(鎬岸城)·앵나하둔(篇拿河屯)·뇌방림자둔(牢房林子屯)·독탑리둔(獨塔里屯)·임강하둔(林江河屯)·포로호둔(蒲蘆屯)을 거쳐서 압록강에 이르는데 겨우 200리로서 중대로(中大路)라 합니다.
 
 
길 왼편에 옛 성터가 있어 황폐하여 안시리(安市里)가 되었는데 전해지는 말로는 '당 나라 군사를 막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또 긴 원장을 쌓아 오랑캐를 방어했는데 머리 쪽이 진 나라 장성(長城)에 닿아 동쪽으로 나왔습니다.
 
 
삼차하에서 서쪽은 상세히 알 수 없지만 동쪽은 북으로 장정(長靜)·장녕(長寧)·장안(長安)·장승(長勝)·장용(長勇)·장영(長營)·정원(靜遠)·상유림(上林) · 시방사(十方寺) 등 보(堡)를 지나고, 또 동으로 평락박보(平洛泊堡)를 거쳐서 심양성(瀋陽城)에 이르고, 또 북으로 포하(蒲河)·의로현(路縣)·범하(凡河)·철령위(鐵嶺衛)·요참(腰站) 등의 성을 지나서 개원성(開原城)에 이르고, 또 동쪽 무순소성(撫順所城)을 지나서 남으로 동주(東州) 마근단(馬跟單)·청하(淸河)·함장(誠場)·애양(駿陽)·십차구(十口) 등 보를 거쳐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수천 리입니다.
 
 
정요좌(定遼左)235 25위(衛)의 돌아서 포진하고 있는 성(城)을 빙 둘러서 또 길이 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봉화현(奉化縣)에서 남쪽은 모두 해변으로 고산준령과 기암괴석이 많고 시내가 빙 둘러 있으며 화훼(花軒)가 아름다웠습니다.
 
 
대강(大江)에서 남쪽은 습지와 호수가 많았지만 천태산(天台山)·사명산(四明山)·회계산(會稽山)·천목산(天目山)·천평산(天平山) 등 여러 산들이 그 사이에서 서로 얽혀서 가로 뻗어 있었습니다.
 
 
회하(淮河)에서 남쪽은 호수, 진흙, 습지가 많았고 북쪽은 솟아 오른 땅이 많았습니다.
 
 
운하의 방죽이 평지보다 높았으므로 언덕이 터져 물이 흘러내리면 수로와 육지의 모양이 바뀌었습니다.
 
 
제녕주(濟寧州)의 북쪽에 분수묘(分水廟)가 있었는데, 분수묘에서 남쪽은 물이 모두 남쪽으로 흐르고 북쪽은 모두 북쪽으로 흘렀습니다.
 
 
무성현(武城縣)에서 북쪽은 진흙이 많았고 장로(長蘆) 등지와 같은 곳은 개펄로서 염분이 많았으므로, <우공)에서 이른바 '해변은 넓고도 소금기가 많다236고 한 땅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천진위(天津衛)에서 북쪽은 물이 또 모두 남쪽으로 흘러 장가만(張家灣)에 이르는데 평평한 모래톱이 끝이 없어 바람부는 대로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북경에 이르니 천수산(天壽山) 등 여러 산들이 북쪽에서 빙 둘러 있었으며, 그 서쪽 지산(支山)은 태항산(太行山)·왕옥산(王屋山) 등 여러 산에 이어져 하남(河南)의 경계에 도달하고, 그 동쪽 지산은 동쪽으로 달려서 삼하(三河), 계주(州)를 거쳐 옥전(玉田縣)의 북쪽에 이르러 연산(燕山)이 되고, 또 동쪽으로 풍윤현(豊潤縣)을 거쳐 진자진(榛子鎭)에 이르러 다시 두 지산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 남쪽 지산은 동쪽으로 난주(漢州)와 창려현(昌黎縣)을 지나서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바로 바다에 도달하고, 그 북쪽 지산은 연산의 산맥으로 죽 이어져 동쪽으로 천안(遷安), 영평(永平)을 거쳐서 무령(撫寧)의 동쪽에 이르러 바로 산해관에 도달했으며, 산해관 밖에서 또 산맥이 길게 연하여 동쪽으로 광녕위(廣寧衛)의 서북쪽에 이르러 의무려산(醫巫山)이 되었습니다.
 
 
북경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산들이 모두 민둥민둥하여 초목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의 대강(大江)에서 북쪽, 태항산에서 동쪽, 연산, 의무려산에서 남쪽의 수천 리 사이는 사방의 들이 평탄하고 넓었습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통하고 광녕(廣寧)의 동쪽과 해주위(海州衛)의 서쪽과 요동의 북쪽으로 길게 뻗어 들어가서 큰 들판이 되었으니 곧 이른바 학야(鶴野)란 곳입니다.
 
 
해주위의 동쪽에 비로소 안산(鞍山)이 얽혀 있고 남쪽이 천산(千山)이었습니다.
 
 
이 뒤부터는 중첩된 산봉우리들이 마치 죽 벌여 놓은 선창과 둘러 친 병풍 같았는데 동남쪽으로 압록강에 도달하고, 동쪽으로 야인(野人)의 땅으로 뻗어 들어갔습니다.
 
 
요동의 남쪽에 분수령(分水嶺)이 있으니, 분수령에서 북쪽은 물이 모두 북쪽으로 흐르고 남쪽은 모두 남쪽으로 흘렀습니다.
 
 
석문령(石門嶺)에서 남쪽은 산에 삼림이 우거지고 시냇물이 맑았습니다.
 
 
북경에서 압록강까지는 그 사이에 명색이 강이지만 모두 작은 내였으므로 비가 오면 물이 불었다가 가물면 말라버렸는데, 난하(溪河)와 삼차하(三河)만이 크고 그 다음이 백하(白河)·대릉하(大凌河)·소릉하(小凌河)·태자하(太子河)·팔도하(八渡河) 등의 강이었습니다.
 
 
대강에서 남쪽은 연한 돌이 많아 육로는 모두 돌을 캐서 길에 깔았는데, 진흙길을 가로지르거나 산등성이에 걸쳐 오르기도 했는데 영해현(寧海縣), 봉화현(奉化縣) 등지에 많았습니다.
 
 
수로는 모두 돌을 다듬어 홍문교(虹門橋)를 세우고 제방을 쌓아 강과 호수를 막았는데 오강현(吳江縣) 등지에 많았습니다.
 
 
회하(河)에서 북쪽은 돌다리 하나 없었는데 배로 부교(浮橋)를 놓기도 하고 나무다리를 대강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육로는 모래 섞인 먼지가 공중에 가득하였습니다.
 
 
연산관(連山關) 이후부터는 조도(鳥道)가 실과 같았으며, 거친 풀이 사방에 우거지고 모기가 얼굴을 물어뜯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습니다.
 
 
회하에서 남쪽은 대부분 비옥한 수전(水田)이어서 벼와 메조가 흔하였습니다. 서주(徐州)에서 북쪽은 수전이 없었으며, 요동에서 동쪽은 기후가 또 더디게 따뜻해지고 일찍 추워지므로 오곡은 잘 자라지 못하고 기장만 날뿐이었습니다.
 
 
옛날에는 강소(江蘇)·절강(浙江) ·복건(福建)의 이남에서 조운(遭運) 할 적에는 모두 대강으로 모여들어 바다로 나가 노하(路河)에 도달한 뒤 북경에 이르렀는데, 원(元) 나라의 순제(順帝) 238 때에 와서 비로소 운하(運河)를 파서 제방을 쌓고 갑문을 설치하여 조운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239 우리 영락(永樂) 연간에 이르러 황하(黃河)를 터서 회하로 끌어대고, 위하(衛河)를 이끌어 백하(白河)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240
 
 
크게 수축(修築)을 가해서 쏟아지는 물은 보[]와 방죽을 설치하여 막고, 진흙이 가라앉은 물은 제방을 쌓아 막고, 물이 얕으면 갑문을 설치하여 저장하고, 물이 급히 내려가면 홍(洪)을 설치하여 늦추고, 물이 모이면 귀때를 설치하여 나누었습니다.
 
 
방죽 제도는 두 물의 안팎 양옆으로 돌로 쌓아 보[]를 만들고 그 보의  위에 두 개의 돌기둥을 세우는데, 돌기둥 위에 문처럼 나무를 가로지른 뒤, 그 가로지른 나무에 한 개의 큰 구멍을 뚫고, 또 나무기둥을 세워 가로지른 나무의 구멍에 맞춰서 수레바퀴처럼 돌도록 하고, 기둥 사이에 여기 저기 구멍을 뚫고 또 대나무를 쪼개 새끼를 만들어서 배를 얽어 나무기둥에 매고는 짤막한 나무를 여기 저기 있는 구멍에 끼워서 이를 고정시키고 배를 당겨 올립니다.
 
 
방죽 위로 올리는 것은 역류여서 어렵고 방죽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순류여서 쉬웠습니다.
 
 
갑문 제도는 양 언덕에 돌 제방을 쌓고 가운데는 배 한 척이 지나갈 만하게 하고 또 넓은 판자로 그 흐름을 막아서 물을 모아 두는데, 판자의 많고 적음은 물의 깊고 얕음에 따라서 하였습니다.
 
 
또 나무다리를 제방 위에 설치하여 사람들이 오고가게 하고, 다시 두개의 기둥을 나무다리의 양옆에 세우기를 방죽 제도와 같이하여, 배가 이르면 그 다리를 치우고는 새끼로 기둥에 매고 넓은 판자를 당겨 올려서 그 흐름을 통하게 한 후에 배를 당겨서 지나가게 하고, 배가 지나가면 이를 다시 막았습니다.
 
 
홍(洪)의 제도도 양 언덕에 돌로 보堰]를 쌓고, 그 보 위에 배를 끌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대나무로 만든 닻줄을 사용하여 이를 거슬러 당기니, 한 척의 배를 당기는 데 인부는 100여 명이 들고 소는 10여 마리 들었으며, 방죽·갑문 · 홍에 모두 관원이 있어 인부와 소를 모아놓고 배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방과 귀때 모두 돌로 쌓았는데 더러 목책(木)인 것도 있었습니다.
 
 
절강진수(浙江鎭守)가 양왕(楊표)을 시켜서 신 등을 황도(皇都)로 호송케 하였습니다. 기한이 4월 초1일이었기 때문에 양왕은 신 등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독촉하여 가는데, 바람이 순풍이면 돛을 달고 바람이 역풍이면 배를 당겼으며, 물이 얕으면 상앗대를 쓰고 물이 깊으면 노로 저었습니다.
 
 
역에서는 식량을 지급하고 체운소에서는 배를 바꾸어 주었으니, 사자(使者)와 공헌(貢獻)이 왕래할 적에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대개 백 리의 사이에서도 오히려 풍속이 다른 법인데 하물며 천하의 풍속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략 양자강으로 남북을 나누어 본다면 그 인가의 성쇠는 강남 여러 부·성(府城)과 현·위(縣衛)의 번화· 웅장·화려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진(鎭)·순검사(巡檢司)·천호소(千戶所)·채(寨) 241. 역(驛)·포(鋪)·리(里)·파(廟) 등의 소재지 부근에 3-4리, 7-8리, 10여 리, 혹 20여 리 사이에 여염(周潤)이 가득하고 상점이 즐비했으며, 누대(樓臺)는 서로 바라다 보이고 배는 죽 이어져 있었습니다.
 
 
주옥 금은보화의 산출과 도량(稻梁)· 염철(鹽鐵) · 어해(魚蟹)의 풍부함과 염소 · 양 · 거위 ·오리·닭·돼지·당나귀·소의 축산과 송황(松掌)·등종(藤綜)·용안(龍眼)·여지(枝)·귤유(橘袖)의 물산은 천하의 으뜸이었습니다.
 
 
옛날 사람이 강남을 살기 좋은 아름다운 땅으로 보았던 것은 이때문이었습니다.
 
 
강북의 양주(楊州), 회안(淮安) 같은 곳과 회하에서 북쪽 의 서주(徐州), 제령(濟寧), 임청(臨淸) 같은 곳은 번화하고 풍부하기가 강남과 다를 바 없었는데 임청이 특히 번화하였습니다.
 
 
그 외에 관부(官府)의 소재지 또한 간혹 번성한 곳이 있었습니다.
 
 
진(鎭)·채(寨) · 역(驛)·포(鋪)·__(里)·집(集)·취(嘴)·창(r)·만(灣)·오(烏)·파(歸)·갑(間)·천(遷)같은 곳에는 인가가 그다지 번성하지 않고 마을도 쓸쓸하였습니다.
 
 
통주(通州)에서 동쪽은 인가가 점점 적어져서 산해관을 지나 100리를 가니 겨우 마을 하나가 있었으나 초가집 두세 채에 지나지 않았으며, 양·염소·닭·돼지 · 노새·낙타·소·말 등의 가축이 들판에 널려 있고 미류·버들·뽕· 대추나무가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팔도하(八渡河)에서 남쪽은 거칠고 텅 비어서 인가가 없었습니다.
 
 
주택은 강남은 기와를 얹고 벽돌을 깔고 계단은 모두 다듬은 돌을 쓰는데 돌기둥을 세우기도 하여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습니다.
 
 
강북은 조그마한 초가가 거의 절반이었습니다.
 
 
복식은 강남 사람들은 모두 넓고 큰 검은 속옷과 바지를 입었는데 능라(綾羅)·견초(絹)·필단(匹殺)으로 지은 옷이 많았습니다.
 
 
양모모(羊毛帽)· 흑필단모(黑匹殺帽)·마미모(馬尾帽)를 쓰기도 하고, 두건과 머리띠로 머리를 싸매기도 하고, 귀가 없는 흑건(黑巾)이나 귀가 있는 흑건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관인은 사모(紗帽)를 쓰고 상인(喪人)은 백포건(白布巾)이나 추포건(麗布市)을 씁니다.
 
 
가죽신을 신기도 하고 솜을 넣은 장화와 짚신을 신기도 했으며 또는 수건으로 다리를 감아서 버선을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부녀가 입는 옷은 모두 좌임(左)242 이었습니다.
 
 
머리장식은 영파부(寧波府)에서 남쪽은 둥글면서 길고 크게 하고, 그 중간에 화려한 장식을 돌렸으며, 북쪽은 둥글면서 뾰족하여 마치 소뿔처럼 생겼습니다.
 
 
관음관(觀音冠)을 쓰기도 했는데 금과 옥으로 장식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현란케 하였습니다.
 
 
비록 백발노인일지라도 모두 귀고리를 달았습니다.
 
 
강북의 복식도 대개는 강남과 같았지만 강북에서는 짧고 좁은 흰옷을 입기를 좋아하고, 가난하여 해진 옷을 입은 이가 10명에 3-4명은 되었습니다.
 
 
부녀의 머리장식 또한 둥글면서도 뾰족하여 닭의 부리와 같았습니다.
 
 
창주(滄洲)에서 북쪽은 여자의 옷이 좌임도 있고 우임(右狂)도 있었으나, 통주로부터는 모두 우임이었습니다.
 
 
산해관에서 동쪽은 사람들이 모두 누추하고 비루하며 의관은 남루하였습니다.
 
 
해주, 요동 등지에는 중국인 · 조선인 · 여진인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석문령(石門嶺)에서 남쪽으로부터 압록강까지의 주민은 우리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어서 관(冠)과 의복과 말씨와 여인의 머리장식이 대개 우리나라와 같았습니다.
 
 
인심과 풍속은, 강남은 온화하고 유순하여 형제나 당형제(堂兄弟), 재종형제가 한 집에 같이 살기도 했는데, 오강현(吳江縣)에서 북쪽은 간혹 부자도 따로 살아 사람들이 모두 이를 그르게 여겼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승상(床)243과 의자에 걸터앉아서 일을 하였습니다.
 
 
강북은 인심이 사나워서 산동에서 북쪽은 한 집안 안에서도 화목하지 못하여 싸움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약탈하고 도적질하며 사람을 죽이는 일도 많았습니다.
 
 
산해관에서 동쪽은 사람들의 성품과 행실이 더욱 사나워서 오랑캐의 기풍이 강하였습니다.
 
 
또 강남 사람들은 글 읽기를 즐겨하여 비록 마을의 어린아이나 진부(津夫)와 수부(水夫)일지라도 모두 문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이르러 글자를 써서 물어보면 산천, 고적, 토지, 연혁도 모두 환해서 상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강북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신이 물으려고 하면 모두 “나는 글자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곧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강남 사람들은 지소(池沼), 하천의 일로 직업을 삼으므로 거룻배에 종다래끼를 싣고 그물과 통발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떼를 지었는데, 강북은 제령부(濟寧府)의 남왕호(南旺湖) 등지 외에는 물고기를 잡는 도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강남의 부녀들은 모두 문밖을 나오지 않고 주루(朱樓)에 올라주렴(珠簾)을 걷고 밖을 바라볼 뿐이며 길을 다니거나 밖에서 일하는 자가 없었는데, 강북은 밭 매는 일이나 노 젓는 일들을 모두 부녀자들이 직접 하였습니다.
 
 
서주와 임청 같은 지방의 부녀들은 화려한 단장을 하고 몸을 팔아서 생활을 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또 강남 사람은 관원이라 칭하는 자가 몸소 일을 하기도 하고 졸도(卒徒)라 칭하는 자가 호상(胡床)에 걸터앉기도 하였으며, 관대(冠帶)에는 무늬가 없고 존비에는 서열이 없었으니 전혀 예절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아(官衙)에서는 위의(威儀)가 정숙하고, 군중(軍中)에서는 호령이 엄정하고 대오가 바르며 감히 시끄럽게 구는 자가 없었습니다.
 
 
호령을 내릴 때 징 치는 소리가 들리면 원근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뒤처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강북도 그러했지만 산동에서 북쪽은 무릇 호령을 내릴 적에 회초리를 들지 않으면 정돈시킬 수 없었습니다.
 
 
또 강남의 무기로는 창·검·세모창·미륵창이 있고, 갑옷 · 투구·방패 등에는 모두 불로 용(勇)이라고 새겨 넣었지만 활과 화살·전마(戰馬)는 없었습니다.
 
 
강북에서야 비로소 활과 화살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통주에서 동쪽과 요동 등지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일삼았지만 화살대는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또 강남에서는 얼굴을 단장하기를 좋아하여 남녀가 모두 거울달린 화장갑 ·빗·빗치개 · 칫솔 등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강북도 그러했지만 이런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강남은 시중에서 금은을 사용하고 강북은 동전을 사용하였습니다.
 
 
강남의 건달244은 주석으로 팔뚝을 묶고, 강북은 납으로 코를 뚫었습니다.
 
 
강남은 농업 · 수공업·상업에 힘을 썼는데 강북은 놀고먹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강남은 육로로 갈 때는 교자를 이용하고 강북은 말이나 당나귀를 이용하였습니다.
 
 
강남은 좋은 말이 없었는데 강북은 말의 크기가 용(龍)과 같았습니다.
 
 
강남은 사람이 죽으면 거가대족(巨家大族)으로서 사당과 정문(雄門)을 세우는 자가 있고, 일반인은 대개 관(棺)을 사용하되 매장하지 않고 물가에 버리니, 245 소흥부성(紹興府城) 가에는 백골이 쌓여 있었습니다.
 
 
강북의 양주 등지에서는 봉분을 강가나 밭가 혹은 마을 가운데에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강남은 상제와 중이 더러 고기를 먹지만 훈채는 먹지 않는데 강북은 모두 고기와 훈채를 먹었습니다.
 
 
이상이 강남과 강북의 다른 점입니다.
 
 
동일한 점은 귀신을 숭상하고 도교와 불교를 존숭합니다.
 
 
말할 때는 손짓을 하고 성낼 때는 입을 찡그리며 침을 뱉습니다.
 
 
변변찮은 음식을 한 탁자와 식기를 사용하여 젓가락을 돌려가며 먹습니다.
 
 
이는 입에 넣어서 씹고, 다듬잇방망이는 모두 돌을 사용하며, 맷돌을 돌릴 적에는 당나귀나 소를 부리고, 시점(市店)에는 주기(酒旗)를 세웁니다.
 
 
길가는 사람은 짐을 메기는 해도 머리에 이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상업을 직업으로 삼아 비록 고관이나 거가대족의 사람일지라도 몸소 저울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사소한 이익을 따집니다.
 
 
관부의 통상적인 형벌은 대나무 조각으로 매를 때리고 손가락을 끼우며 돌을 메도록 하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 외에 산천의 뛰어난 경치와 대사(臺)246의 고적으로서 인구에 회자되는 것들을 비록 붓이 다 닳더라도 모두 기록할 수 없습니다.
 
 
신이 두루 돌아 본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였지만, 상중(喪中)의 몸이라 감히 유람하며 구경하거나 빼어난 경치를 찾아보지 못하였고, 단지 배리(陪吏) 4인으로 하여금 날마다 표방(標榜)을 보고 지역을 묻도록 했으나, 하나를 건지면 만(萬)을 흘린 셈이므로 그 대략만을 기록할 따름입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2301014_003 성종실록 261권, 성종 23년 1월 14일 을유 3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최부를 인견하고 표류할 때의 일 등을 묻다]</ref>
 
 
4th Day. Crossing the Yalu River. This day was fair.
 
At dawn we passed T’ang-shan Stop and two small rivers, whose names I do not remember, and came to Chiu-lien Wall. The wall was in ruins; there were only the old foundations made of earth. It was also called P’o-so-pao. A river in front of it was the Feng-p’u. We crossed the Wu-yeh River in boats. The two rivers rose together, split, and then reunited; together they were called the Ti River. We crossed the Yalu River in boats. The Prefect had sent Yun Ch’onsõn, a military officer, to comfort me at the river bank. In the evening we crossed the T’anja River in boats. These two rivers, too, split from a single one and flowed together again downstream.
 
Hurrying, we entered the wall of Diju in the third watch of the night. The wall was squarely at a crossroads for passing Chinese and barbarians. It was of skimpy dimensions, and it was in ruins. The streets inside the wall were desolate and depressing.
 
XXX [A summary list of the stations between Ning-hai and Peking, and a list of stations on an alternate land route from Yang-chou to Peking.)
 
On water there are red boats and on land relay horses. All envoys, tribute, and commerce come and go by water. If either the water in the locks and rivers is too shallow because of drought to let boats pass or there is a very urgent matter, the overland route is taken. The fact is that Yang-chou Prefecture is near Nanking, only three stations away. All the roads from Fukien, Chekiang, and places to the south, moreover, go through it to reach the capital. For that reason, its stations are big and the roads wide.
 
Some of the land stations are sixty li apart, some seventy or eighty li. As to water stations, the thirty li from Wu-lin to Wu-shan and the forty li from the Lu River to the Central Post Hotel are land passages within the water route. Those intervals, therefore, are short. Otherwise, some [stations] are sixty or seventy li apart, some eighty or ninety li apart, and some as much as over one hundred li apart. Between stops the intervals are sometimes ten li and sometimes twenty or thirty li. After Yang-chou, shoals have also been made at the water's edge, some six or seven li apart, some over ten li apart, to mark the distances. Altogether, the distance over which I passed from Niu-t’ou-waiyang to T’ao-chu Chiliad, Hang-chou, and the Peking Central Post Hotel was approximately six thousand li or more.
 
[From the Central Post Hotel we passed more stations, coming to Liaotung.] The intervals between stations were sometimes thirty or forty li, sometimes fifty or sixty li. Altogether they exceeded 1,700 li. Inside Shan-hai-kuan, beacon towers had been built every ten li to hold signal fires. Beyond the pass, too, small earth mounds had been put up at intervals of five li, and on them signs had been stood to mark the distance.
 
From Liao-tung we passed T’ou-kuan, T’ien-shui, T’ung-yüan, Pao-hsieh-li, K’ai-chou, T’ang-chan, and other stops (chan) and came to the Yalu River.
 
That was another three hundred li or more.
 
From Shan-hai-kuan east, another long wall had been built and earthwork strongholds put up to guard against nomads. All the stations and transfer stations had walls and were of the same type as defense points. Prefectures, departments, and counties had not been established, but garrisons and chiliads (wei-so) had been put up. The officials who manned them, though like those of the stations and transfer stations, were all military.
 
I also heard it said that from Three Branch River there was another road, which passed Hai-chou Garrison, Hsi-mu-ch'eng, Hsiu-an-ch'eng, Ying-naho-t’un, Lao-fang, Lin-tzu-t’un, and P’u-lu-hu-t’un and reached the Yalu River in a mere two hundred li or so. It was also a main road. To the left of the road were the foundations of an old wall that, abandoned, had become An-shih Village. According to legend, it was the place where the T’ang troops had been resisted.
 
In the Hung-wu period (1368-1398] of Great Ming, another long wall had been built to ward off the Mongols. It started from the Great Wall of Ch’in and came east. I do not know its exact course from Three Branch River west, but from there east52 it went north past Ch’ang-ching, Ch’ang-ning, Ch’ang-an, Ch’ang-sheng, Ch'ang-yung, Ch'ang-ying, Ching-yian, Shang-yü-lin, and Shih-fang-ssu places. It then went east past P’ing-lo-po-pao as far as the wall of P’an-yang [Mukden?]. Then it went north past P’u-ho, l-lu-hsien, Fan-ho, T'ieh-ling, and Wei-yao-chan towns and came to the wall of K’ai-yuan. It then went east, passing south of the wall of Fu-shun-so and, touching Tung-chouma, Ken-tan, Ch'ing-ho, Hsien-ch’ang, Ai-yang, and Shih-ch’a-k’ou places, reached the Yalu River. Altogether it curved round several thousand li and made secure the twenty-five garrison and patrol stations left of the Liao. There is another road - but I cannot know that for certain. XXX
 
XXX From Feng-hua County south, many high and steep mountain ranges with fantastic cliffs and scattered rocks line the coast. Rivulets and mountain torrents wind sparkling among green growth. From the Yangtze River south, the land is often soft, miry, and watery; but the T’ien-t’ai, Ssu-ming, K’uai-chi, T'ien-mu, and T’ien-p’ing mountains lie helter-skelter across it. From the Huai River south, the land has many lakes and swamps. From there north, the land is often rolling. The Grand Canal within its banks is higher than the plain. It erodes [the banks] and shifts its course, land and water exchanging places.
 
North of Chi-ning Department is Watershed Shrine. From the shrine south all waters flow south; from there north all flow north. From Wu-ch'eng County north the land is frequently muddy and sandy, as at Ch’ang-lu and other places. It is salt land, with much brackish water; the land of Yü kung's [statement], "Near the sea were wide tracts of salt land” [Legge, III: 102]. From T’ien-chin Garrison north, all the waters flow south to Chang-chia-wan. Flat sands stretch endlessly, streaming and shifting with the wind. At Peking, the T’ien-shou and other mountains curve round in the north. Their western branch joins the Tahsing and Wang-wu mountains and extends to the border of Honan. Their eastern branch runs east past San-ho and Chi-chou and, as the Yen-shan, reaches north of Yü-t'ien County. It continues east past Feng-jun County and reaches Chen-tzu Market. It then splits into two branches, of which the southern branch goes east past Luan-chou and Ch'ang-li County to Chieh-shih Mountain and directly reaches the sea; and the northern branch joins the Yen-shan range, goes east past Ch’ien-an and Yung-p’ing to east of Fu-ning and directly reaches Shan-hai-kuan. Outside the pass it wriggles about and goes east to northwest of Kuang-ning Garrison as the l-wu-lü Mountains. The mountains from Peking there are bare of green growth.
 
In that space, from the Yangtze River north, Ta-hsing east, and Yen-shan and l-wu-lü Mountains south, everywhere for thousands of li a fine, level plain reaches east to the ocean. It extends east of Kuang-ning, west of Haichou Garrison, and north of Liao-tung as a great plain, that which is called Hao-yeh.
 
There were the An Mountains for the first time east of Hai-chou Garrison. They twisted round toward the south as the Ch’ien Mountains. After that, peaks rose in range after range, like a screen of ranks of halberds. They extended to the Yalu River in the southeast and crossed the nomads' boundaries in the east.
 
South of Liao-tung was a Watershed Range. From the range north, all waters flowed north, and from there south, all flowed south.
 
From Shih-men Range south, the mountains were many, the woods thick, and the streams clear and blue. From Peking to the Yalu River, everything named river (ho) was a small stream (ch'uan). All of them flooded in rains and dried up in droughts. Only the Luan River and Three Branch River were big; after them were such rivers as the Pai River, Ta-ling River, Hsiao-ling River, and T'ai-tzu and Eight Crossings rivers.
 
From the Yangtze River south were many places with soft stone. Everywhere on land the stone was cut and laid on roads or across mud and salt flats. There were many places, such as Ning-hai and Feng-hua County, where it capped mountain ridges. Everywhere on water arched gates and bridges were built up of the stone. There were many places, such as Wu-chiang County, where levees against rivers and lakes were built of it.
 
From the Huai River north, there was not a single stone bridge. Either boats were made into floating bridges or wooden bridges were put crudely up. Along the roads, sand and dust filled the sky.
 
After Lien-shan Pass, the winding roads were like threads. Wild grass grew on all sides. Travellers, their faces bitten by mosquitoes and gadflies, suffered cruelly.
 
From the Huai River south were many irrigated fields, rich with paddy, and grain was cheap. From Hsü-chou north, there were no irrigated fields. From Liao-tung east, the weather was hot in the evening and cold in the morning, and the five grains did not thrive. Only glutinous, panicled millet (shu) grew there.
 
In olden times, all water transport from Chekiang and Fukien south met at the Yangtze River and sailed by sea, passing up the Lu River to reach Peking. The Grand Canal was first dug in the period of the barbarian Yuan Shun Ti [r. 1333-1367]. Levees were built and locks put into place to let the transport pass. In our Yung-lo period [1403-1424], the Huang River was opened into the Huai, and the Wei River was led into the Pai River. There was much enlarging and rebuilding. Where water overflowed, dams were put up to prevent it. Where water brought silting, levees were put into place to resist it. Where water was shallow, locks were established to hold it. Where water was swift, floods were laid to hinder it. Where wood jammed, wedges were placed to split it. 53
 
The plan for embankments: At the nearest point between two bodies of water, dams are built on both the inner and outer sides. Two stone posts are stood on top of each dam. A wooden beam is laid like a gate across the posts and a large hole bored in it. Then a wooden post is inserted into the hole of a cross-beam so that it can be turned. Irregular holes are bored along the post. The boat is fastened to the wooden post, split and twisted bamboo being used for line. A short wooden pole is forced into an irregular hole and turned, and the boat is pulled up. It is hard to move it up the embankment, there being resistance; it is easy to let it down, there being gravity.
 
The plan for locks: On both banks, stone levees are built so as to allow one boat to pass between them. Then the current is blocked with wide planks and the water held. The number of planks depends on the depth of the water. A wooden bridge is set up on top of the levees to let people pass. Two posts are also implanted at both ends of the bridge, as in the plan for embankments. When boats come, the bridge is removed, and they are tied to the posts. After the wide planks have been drawn up with hooks and [the water] let flow, the boats are pulled past. When the boats have passed, [the river] is again blocked.
 
The plan for floods: Again, dams of stone are built on both banks. Tow-paths are laid on top of the dams, and bamboo line is used again for the pulling. It takes over one hundred laborers or ten oxen to pull one boat. At all embankments, locks, and floods are officials who gather laborers and oxen to be ready for the boats.
 
| All dams and wedges are built of stone. There are also some that have wooden palisades.
 
When the Chekiang Grand Defender commissioned Yang Wang to escort us to the capital, he set a time limit of the 1st Day, Fourth Month. Yang Wang, therefore, led us forward night and day. In favoring winds we set sail, in head winds we pulled the boats. If the water was shallow we poled the boats, if the water was deep we rowed them. At the stations we were issued rations, and at the transfer stations we changed boats. The traffic of all envoys and tribute was like that. XXX
 
XXX Generally, there are different manners and customs within a hundred li; how much more is that so in the Chinese Empire. It is impossible to discuss the customs and manners of the whole. I shall consider them in broad outline, taking the Yangtze River as the boundary between north and south:
 
As to the prosperity of the settlements, they are elegant and beautiful beyond words in all the prefectural towns, counties, and garrisons from the river south. Whether it is market town, police station, chiliad, fortress, station, stop, village, or embankment post, sometimes for three or four li, sometimes for seven or eight li, sometimes for over ten li, and often for as much as twenty li around them, village gates crowd the ground, markets line the roads, towers look out on other towers, and boats ply stem to stern. The product-pearls, jade, gold, silver, and precious things —; the riches – rice, kaoliang, salt, iron, fish and crabs —; the animals -- sheep, geese, ducks, chickens, pigs, donkeys, and cattle-; and the things – pines, bamboos, vines, coir palms, longans, lichees, oranges, and pumelos - are first in the Empire. It was because of that that men of old considered the land south of the river a beautiful land.
 
From the river north, both Yang-chou, Huai-an, and from the Huai River north; and Hsü-chou, Chi-ning, and Lin-ch’ing, are handsome and prosperous, the same as places south of the river. Lin-ch’ing is the most thriving. There are other places, such as among the walled towns governed by public offices, that are also prosperous and thronged. But among the market towns, fortresses, stations, stops, villages, markets, wedges, storehouses, bays, banks, locks, embankments, and camps, the settlements are not very thriving, and the streets are desolate. From T’ung-chou east, the settlements gradually become fewer. After Shan-hai-kuan, one can go one hundred li and barely find a single village altar and not more than two or three houses with thatched roofs. There are, however, animals - sheep, chickens, pigs, donkeys, camels, and horses – ruling the wild plain. Willows, mulberries, and jujubes grow thickly, their branches intertwining. The land from Eight Crossings River south is a plain without houses.
 
As to houses, south of the river they are roofed with tile and paved with brick. All steps are built of stone, and sometimes stone pillars are also erected. All [the houses) are spacious and beautiful. North of the river, about half the houses have thatched roofs and are low and small.
 
As to dress, south of the river all the people wear big, black jackets and trousers. Many things are made of silk gauze, raw silk, and satin. Some wear wool hats, black satin hats, or horse-tail hats. Some wrap their heads in turbans, either cornerless black turbans or cornered black turbans. Officials have light silk gauze hats. Mourners have white cloth turbans and coarse cloth turbans. Some wear boots, some leather boots, Wu boots, and straw sandals. There are some who bind their legs in cloths (chin-tzu) instead of socks. Everything worn by women is buttoned to the left.
 
As to the head-dress, from Ning-po Prefecture south, it is curved, long, and large. Pretty ornaments are attached to the ends and the middle. From there north, it is curved and pointed like an ox's horn. Some wear Kuan-yin caps decorated with gold and jade and dazzling to the eye. Even white-haired old women wear earrings.
 
Dress and ornaments north of the river are generally of the same sort as south, but north of the river short, narrow, white gowns are often worn. Three or four of every ten are threadbare and ragged. The women's headdress is also curved and pointed like a chicken's beak. From Ts'ang-chou north some women button their clothes on the left and some on the right. From T’ung-chou on, everyone buttons his on the right. From Shan-hai-kuan east, the people are rough and their clothing ragged. In Hai-chou, Liao-tung, and other places, some of the people are Chinese, some are from our country, and some are Jurchen. From Shih-men Range south to the Yalu River, all the people are emigrants from our country. Their clothing and speech and the women's head-dress are the same as those of our country.
 
As to the temperament of the people and the manner and customs, south of the river they are peaceful and compliant. Brothers, paternal first cousins, or paternal second cousins live together under one roof. In some places from Wuchiang County north, there are fathers and sons living separately. All the people frown on this. The people, whether male or female, young or old, sit on their beds and chairs and do their work.
 
The people north of the river have violent dispositions. From Shantung north, those of a single family do not defend each other. Quarreling voices clamor endlessly. There are apt to be many bandits and murderers. From Shanhai-kuan east, the people's passions are most explosive. There is a strong barbarian influence.
 
People south of the river, moreover, read books. Even village children, ferrymen, and sailors can read. When I came to their region and wrote questions to ask them, they understood everything about the mountains, rivers, old ruins, places, and dynastic changes and told me about it minutely.
 
North of the river, the unschooled are many. That is why when I wanted to ask them something they would all say, “We do not understand the characters.” They were illiterate.
 
The work of the men south of the river is the mastery of the waters. Hundreds and thousands of them get into small boats carrying bamboo baskets and catch fish with traps. North of the river, I did not see fishing equipment except at Nan-wang Lake, Chi-ning Prefecture and some other places.
 
None of the women south of the river goes outside the house. Some go up red towers, roll up the pearl-embroidered screens, and look out, but that is all. They do not walk in the streets or work outside. North of the river they work fields, row boats, and do other labor themselves. At some places, such as Hsü-chou and Lin-ch'ing, they make themselves up and sell their charms. They demand money, on which they live.
 
Some of the people called officials south of the river do tasks themselves like servants. Some, their caps and belts without insignia, sit in armchairs without regard for rank as if they had lost all decorum. But at the office, their behavior is correct and serious. In the army, orders are strict, and the regular ranks fall into formation, not presuming to complain. When a command is given a clang is heard, and [the men) gather like clouds from near and far. There are no laggards. That is so north of the river also, but from Shantung north, a command given can never be effected without whips or sticks.
 
Weapons south of the river are spears, swords, lances, and halberds. The word “valor” (yung) is branded into all the helmets, armor, and shields. But there are no bows, arrows, or war horses. There were first men with bows and arrows north of the river. From T’ung-chou east and in places in Liao-tung, the men occupy themselves with bows and horses. The shafts of the arrows are made of wood.54
 
South of the river, people pay much attention to their appearance. Both men and women carry mirror cases, coarse and fine combs, and toothpicks.55 North of the river there is the same [liking], but I did not see anyone carrying those things. South of the river, gold and silver are used in the markets; north of the river, copper cash are used.56 Children for sale south of the river have their arms braceleted with tin; those north have their noses pierced with lead. [People] work hard at farming, manufacturing, and commerce south of the river. North of the river there are many wastrels. Travelers by land south of the river use sedan-chairs; those north use horses or donkeys. There are no good horses south of the river; the horses north of the river are as big as dragons.
 
When people die south of the river, some of the great families put up shrines and banner gates. Most people simply use coffins and do not bury them but simply leave them by the water. 57 At such places as Shao-hsing Prefecture, white bones make piles beside the wall. At such places as Yang-chou north of the river, burial mounds are made at the edge of a river, between fields, or at a village gate. Mourners and priests south of the river sometimes eat meat but not garlicky or oniony plants. North of the river, everyone eats such plants and meat.
 
Those are differences north and south of the river. As to similarities, [the people] honor gods and demons and revere the Taoist gods and the Buddha. When they talk, they always wave their hands. When they are angry, they always purse their lips and slaver. Their food is coarse. They eat with chopsticks at a common table and from common bowls. They always chew their lice. They use stone for all their laundry blocks and beaters. To turn mills they use donkeys and oxen. The shops are marked with signs and pennants. Travelers carry baggage across their shoulders but not on their backs or heads. Everyone does business; even some successful officials and men from powerful families carry balances in their own sleeves and will analyze a profit of pennies. The usual punishments of the public offices are those like the “bamboo strips,” “flogging,” “pressing the fingers,” and “carrying stones.”'58
 
There are other things, such as mountains, rivers, strategic places, towers, pavilions, and old ruins known to all. Even if I were to wear all the hair off my brush, I could not record them all, nor could one see them all, even if one had a thousand years. I, moreover, did not care to go sightseeing or to pick out scenic spots while I was in mourning. I'merely ordered my four secondary officials to look at honors lists and inquire about localities every day. I have noted a little and missed much. I have recorded only a summary.
 
 
The End
 
 
228. 동북 변경의 女眞族을 가리킨다.
 
229. 遞運所에 갖추어 놓은 배로서 300料에서 600까지 4種이 있다. 1油로 칠하여 꾸몄으므로 紅船으로 불렸는데 官用物資 등을 수송하였다.
 
230. 陸驛 즉 馬驛에 갖추어 놓은 馬匹.
 
231. 淺이란 않은 여울에 배를 끌기 위하여 설치한 淺鋪를 가리키는데 일종의 교통시설에 해당한다. 주로 揚州府 高郵에서 徐州府 沛縣 일대 사이에 두어졌다.
 
232. 봉화대를 말함.
 
233. 위급한 상황의 신호를 보내는 臺.
 
234. 山海關에서 鴨綠江에 이르는 邊牆으로 遼東邊牆이라고도 한다.
 
235. 左軍都督府 소속 遼東都司의 定遠左衛를 가리킨다. 明은 전국의 衛所를 五軍都督府로 나누어 각 도독부에 귀속시켰다. 左軍도독부에는 留守左衛를 비롯한 ‘在京衛와 浙江都司, 요동도사, 산동도사 소속 위소가 귀속된다. 요동도사에는 定遠左衛를 비롯한 20개 衛가 포함된다. 《諸司職掌》 권5, 兵部).
 
236. 원문에서 斥은 짜서 소금을 만들 수 있다는 말로 '와 같은 의미이다.
 
237. 험준하고 좁은 산길.
 
238. 원의 마지막 황제(재위 1333-1370)이다. 궁궐 안의 파벌 싸움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1332년에 황제가 된 친아우인 寧宗이 재위 43일 만에 죽자, 이듬해 황제가 되었다. 文宗(제9대) 이후의 漢文化 존중주의로 돌아가 遼, 金, 宋 세 나라의 역사를 편찬하는 등 원나라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적, 재정적으로는 실패하여 1351년에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반란이 확대되어 1368년에 수도가 함락되자 피신하였다가 應昌에서 죽었다.
 
239. 元 惠宗 至正11년(1351) 總治河防使 賈魯가 주관한 黃河 水利 사업을 가리킨다.
 
240. 永樂 연간 宋禮 등이 주관한 會通河 일대의 水利 사업과 陳道 등이 주관한 淮河 유역의 水利사업을 가리키는 듯하다.
 
241. 宋代 諸어나 중요 지역에 巡檢司가 두어져 그 소속 兵士의 屯所를 높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軍의 城專가 두어진 곳이 村落化하여 寨라는 地名으로 바뀌게 되었다.
 
242. 옷을 입을 때 오른 쪽 섶을 왼쪽 섶 위로 여밈.
 
243. 접을 수 있는 의자로 胡床이라고도 한다. 隋代에는 交床으로 부르던 것을 唐代에 繩床이라 改名하였다.
 
244. 원문은 市兒이다. 市兒는 시정 바닥에서 활동하는 건달 혹은 무뢰배를 가리킨다.
 
245. 水葬 또는 海葬이라고 부르는 漢族의 喪葬 풍속 중 한 가지로서 중국의 동남 연해지방에서 성행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을 거행한 다음 물 속에 넣어 葬事를 지내는데, 때로는 棺을 해변에 두었다가 밀물이 들 때 자연스럽게 바다 속으로 쓸려 보내기도 한다. 《中國風俗辭典》(上海辭書出版社, 1990).
 
246. 臺는 흙을 높이 쌓아 그 위에 세운 전망대, 는 목조로 높이 만든 정자.
 
 
==출처/참고==
 
 
<references/>
 

2020년 10월 12일 (월) 01:08 기준 최신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