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1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30번째 줄: | 30번째 줄: | ||
“석주산(石柱山)152 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신을 이끌고 문밖에 나가서 석주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 “석주산(石柱山)152 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신을 이끌고 문밖에 나가서 석주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 ||
− |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ref>[https://news.joins.com/article/22175278 [차이나 인사이트] 장안과 베이징 … 중국 왕조 도읍은 왜 변두리였나]</ref>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 |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ref>[https://news.joins.com/article/22175278 [차이나 인사이트] 장안과 베이징 … 중국 왕조 도읍은 왜 변두리였나]</ref>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 | “5천8백여 리입니다.” | ||
“양자강(揚子江)<ref>[http://kcm.kr/dic_view.php?nid=40345]</ref><ref>[https://blog.naver.com/starcity0121/100208281973 장강과 양자강의 구분]</ref>은 몇 리쯤에 있습니까?” | “양자강(揚子江)<ref>[http://kcm.kr/dic_view.php?nid=40345]</ref><ref>[https://blog.naver.com/starcity0121/100208281973 장강과 양자강의 구분]</ref>은 몇 리쯤에 있습니까?” | ||
84번째 줄: | 85번째 줄: | ||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 ||
− | *기후 | + | *기후: 맑았습니다 |
− | *지명 | + | *지명: 도저소, 천태현(天台縣), |
− | *지리 | + | *지리: 천태산, 안탕산, 북쪽, 석주산 |
*언어(어원) | *언어(어원) | ||
*인물 | *인물 | ||
− | *인명 | + | *인명: 왕해(王海), 종규(鍾道) |
− | *풍습( | + | *풍습: 부적(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
− | *심리( | + | *역사: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
+ | *심리: 즐거움(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 ||
*건축물 | *건축물 | ||
− | *제도(관직) | + | *제도(관직): 진사(進士) |
*제도(시험) | *제도(시험) | ||
− | *사회 | + | *사회: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왜적 |
*행정(체송) | *행정(체송) | ||
*모화 | *모화 | ||
− | *기물 | + | *기물: 초상화 |
*제도(외교) | *제도(외교) | ||
*유학 | *유학 |
2019년 10월 20일 (일) 23:39 판
二十一日,在桃诸所,是日晴,外人麋至觀臣,王海指壁上真像,曰:“你知此畫乎否?”曰:“不曉得,”海曰:“此乃唐朝進士鍾馗也.”臣曰:“鍾馗平生不得進士,何以謂之進士?”海等喧噪大笑,又有白髮老翁來,臣問曰:“天台、腐蕩等山,距此地幾里?”翁答曰:“天台山在天台縣北,距此二日程,天台山之南一日程,有隔蕩山:”臣又問:“此城主山何?”曰:“石柱山也.”引臣出門,指點石柱山,則果石壁作,當山頂有大石如柱形,臣曰:“自此距北京幾里?”翁曰:“五千八百有餘里,”問:“距楊子大江幾里?”翁曰:“在北二千有餘里,臣又舉李暹所泊楊州府以問曰:“距此幾里?”翁曰:“在楊子江之北,你去過江,則便是揚州之境也.”又問:“距南京幾里?”翁曰:“在西北二千餘里,然皆腹料耳,未敢的知”云云,有大官人前後擁,軍儀整肅而至,坐 于皇華館,問之則乃把總松門等處備指揮劉澤也,招“臣等來前,日:“以汝類私越邊境,本當處以軍法,恐其中情有可粉,站未盡数,有無侵犯上國情狀,從實供寫施行:”臣供曰:“姓崔名溥,居朝鮮國全羅道羅州城中,再登文科,為國王近臣,去丁未九月十七日,奉王命為濟州等處敬差官,濟州今戊申正月三十日,聞父喪,正月初三日,不候風便,顛倒過海,為風所逆,驚濤掀浪,載沈載傾,飲食渴水,十生九死,以今月十二日到泊名不知海島,有漁船來問曰:“你是何人?”答以朝鮮國人漂流之故,因問:「此何國地面?”其人答曰:此大唐國寧波府下山云云,其夜有賊船二十餘人來,以研刀恐嚇欲斬,攘奪衣粮行裝等物,遂截去繼而去,復漂流大洋,十七日,又到泊地名不知海岸,又有漁船六隻列立,恐其如前所遇海賊之類,捨丹緣陸,過二嶺六七里許有人居,相次遞送,夜至仙岩里,其里人爭以偶枚亂擊劫体,遞至一處,遇有官人,驅至于此城,”又問曰:“你登第何年?歷仕幾官? 所帶人住何川縣地?行李有何器械?原有船幾隻?”臣曰:“我於成化丁酉,格進士試第三人; 壬寅, 中文科乙科第一人, 為校書館著作,為博士, 為軍資監主簿, 為成均館典籍,為司憲府監察,為弘文館副修撰,為修撰,丙午,中文科重試乙科第一人,為弘文館副校理,為龍襄衛司果,為副司直,所帶人陪吏四人,光州牧吏程保、(化)(和順縣吏金重、羅州牧吏孫孝子、濟州 收吏李孝枝,伴率一人李慎,京都人,鎮撫一人安義,濟州人,驛吏一人崔巨伊山,羅州青農驛人,奴子莫金等二人,濟州官奴權松等四人,(好)[護]送軍金來等九人,船格軍許尚理等二十人,皆濟州人,所乘船只一大隻,橋帆危样,遭風而失, 牆__遇賊失. 所賣之物, 印信一顆、馬牌一隻、紗__ 、角帶、所治文書、重試榜錄、書册、弓一張、刀一把及各人所穿衣
p.374 裳外, 無他器械,”把總官配點印信等物, 又問曰: “汝國地方遠近幾何? 府州幾何?兵粮約有幾何?本地所產,何物為貴?所讀詩書,尊崇何典?衣冠、禮樂,從何代之制?一一寫述,以憑查考:”臣曰:“本國地方,則無慮數千餘里,有八道,所屬州府郡縣,總三百有餘,所產即人材、五穀、馬牛雞犬,所讀而尊崇者,四書五經,衣冠、禮樂,則一遭華制,兵粮則我以儒臣,未會經請,未詳其數,”又問曰:“汝國與日本、琉球、高麗相通乎?”臣曰:“日本、琉球,俱在東南大海中,相距隔遠,未相通信,高麗革爲今我朝鮮,”又問曰:“汝國亦朝貢我朝廷否?”臣曰:“我國每歲如聖節、正朝,貢獻愈謹,”又問曰:“汝國用何法度?別有年號乎?”臣曰:“年號、法度,一大明.”把總官問罪,因曰:“汝邦屢歲朝貢,義有君臣之好,既無侵逆之情,當遇以禮,各宜安心,勿生他慮,轉送赴京,遣還本土,急促行裝,不許稽緩,”即饋以茶果.臣即做謝詩以拜,把總官曰:“不要拜,“臣不知所言,敢拜之,把總官亦起, 相對答禮.
도저소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왕해(王海)가 벽의 한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당신은 이 그림을 압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은 곧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151랍니다.”[1][2][3][4][5][6][7][8]
“종규는 평생에 진사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진사라고 하는 것입니까?” 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또 백발노인이 왔기에 신이 묻기를, “천태산(天台山)[9][10]과 안탕산(雁蕩山)[11] 등은 이곳에서 몇 리나 떨어져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천태산[12][13][14][15][16][17][18]은 천태현(天台縣)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이틀 거리이고, 천태산의 남쪽으로 하루 거리에 안탕산이 있습니다.”
“이 성(城)의 주산(主山)은 무슨 산입니까?”
“석주산(石柱山)152 입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신을 이끌고 문밖에 나가서 석주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과연 석벽으로 산이 만들어졌고 산꼭대기에는 기둥처럼 생긴 큰 돌이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북경[19]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5천8백여 리입니다.”
“양자강(揚子江)[20][21]은 몇 리쯤에 있습니까?”
“북쪽 2천여 리에 있습니다.”
신은 또 이섬이 정박했던 양주부(揚州府)[22]를 들어 묻기를, “여기에서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양자강 북쪽에 있습니다. 당신이 가다가 강을 건너면 바로 양주 땅[23]입니다.”
“서북 2천여 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충 헤아린 것일 뿐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고관이 앞에선 갈도(喝道/喝導)54하고 뒤에선 옹위하며 엄정하게 군대를 정렬시켜 오더니 황화관(皇華館)155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물어보았더니 곧 송문등처비왜지휘(松門等處備倭指揮)156 유택(劉澤)이었습니다.
그는 신 등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더니 말하기를,
“너희들은 사사로이 변경을 넘어왔으니, 본래 군법으로 처단해야 하지만 혹 불쌍히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을까 싶어 아직 죽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사실대로 공술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공술하기를, “성은 최, 이름은 부로 조선국 전라도 나주 성내에서 살았습니다. 두 번 문과에 올라 국왕의 근신(近臣)이 되었습니다. 지난 정미년 9월 17일에 왕명을 받들고 제주 등지의 경차관이 되었습니다. 제주는 남해 가운데 있으므로 나주와는 거리가 수로로 천여 리입니다. 그 해 11월 12일에 바다를 건너가 인정(人丁)을 추쇄(推刷)하다가 일을 채 마치지 못했는데, 금년 무신년 정월 30일에 아비의 상을 듣고 윤정월 3일에 순풍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바다를 건너다가 역풍을 만났습니다. 노도와 격랑 속에 배는 잠겼다가 기울어지기도 하고 굶주리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달 12일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섬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어선이 와서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오?' 하고 묻기에, 조선국 사람으로서 표류해 온 까닭을 들어 답변하고 이어서 '이곳은 어느 나라의 땅이오?'하고 물으니, 그 사람은 '이곳은 대당국 영파부의 하산이오'라는 등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날 밤 해적선의 20여 인이 와서 칼로 위협하며 목을 베려다가 의복, 양식, 행장 등의 물건을 빼앗고 마침내 배의 노와 닿을 끊어버리고 떠나가 버려 다시 큰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17일에는 또 지명을 알 수 없는 해안에 이르러 정박하니, 또 어선 6척이 죽 늘어서 있었습니다. 앞서 만났던 해적과 같은 무리인 듯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고개 둘을 넘어 6-7리가량 가니 인가가 있었으며, 서로 차례로 번갈아 가며 다음 마을로 보냈습니다. 밤에 선암리에 이르니 그 마을 사람들은 다투어 각진 몽둥이로 함부로 치면서 물건을 빼앗았습니다. 체송(遞送)되어 한 곳에 이르자 한 관인을 만났으니 그가 이 성까지 몰아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너는 어느 해에 등과하고, 어떠한 관직을 역임했으며, 데리고 온 사람들은 어느 주현에 거주하고, 행장에는 무슨 무기가 있으며, 원래 있던 배는 몇 척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성화(成化) 정유년(1477)에 진사시(進士試) 제3등으로 합격하고 임인년(1482)에 문과(文科) 을과 (乙科)58의 제1등으로 합격하여 교서관저작(校書館著作), 박사(博士)160,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164, 수찬(修撰)165이 되었으며, 병오년(1486)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 제1등으로 합격하여,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166, 용양위사과(龍巖衛司果), 부사직(副司直)168이 되었습니다.
데리고 온 사람으로는 배리(陪吏)가 4인으로, 광주목리(光州牧吏) 정보, 화순현리(和順縣吏) 김중, 나주목리(羅州牧吏) 손효자, 제주목리(濟州牧吏) 이효지이고, 반솔(伴率) 1인 이정은 서울 사람, 진무(鎭撫) 1인 안의는 제주 사람, 역리(驛吏) 1인 최거이산은 나주(羅州)청암역(靑巖驛) 사람이며, 종은 막금 등 2인이고, 제주관노(濟州官奴)는 권송 등 4인이고, 호송군(護送軍)은 김속 등 9인이고, 배의 곁군[格軍]은 허상리 등 20인으로 모두 제주 사람입니다. 타고 온 배는 큰 배 1척뿐인데, 돛대와 상앗대는 바람을 만나 잃고, 닻과 노는 해적을 만나 잃었습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인신(印信) 1개, 마패 1척, 사모, 각대, 공문서, 중시방록(重試榜錄)169, 서책, 활 1장, 칼 1자루와 각자가 입는 의상 이외에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파총관(把總官)은 즉시 인신 등 물건을 점검하고는 또 묻기를, “너희 나라의 영토는 얼마나 되며, 부·주(府州)는 몇이나 되며, 군량은 대략 얼마나 있으며, 그 땅에서 생산되는 물품에는 어느 물품이 귀한 것이며, 읽는 시서(詩書)는 어느 경전을 존숭하며, 의관과 예악(禮樂)은 어느 시대 제도를 따르고 있는가? 낱낱이 써 내어 조사하는데 근거가 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본국은 영역이 대개 수천 여 리이고 팔도가 있으며, 소속된 주(州).부(府)·군(郡)·현(縣)[26][27]이 300이 넘고, 생산되는 것은 인재(人材), 오곡, 소, 말, 닭, 개이고, 읽고 존숭되는 것은 사서(四書)·오경(五經)이고, 의관과 예악은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군량은 내가 유신(儒臣)으로서 일찍이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수량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 다.”
“너희 나라는 일본, 유구, 고려와 서로 통교하는가?”
“일본과 유구는 모두 동남방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어 거리가 아주 멀어 서로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고려는 지금 우리 조선으로 바뀌었습니다.”
“너희 나라도 우리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는가?”
“우리나라는 해마다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에 공물 바치는 것을 특히 엄수하고 있습니다.”[28][29]
“너희 나라는 어떤 법도를 사용하며, 별도의 연호가 있는가?”
“연호[30]와 법도는 한결같이 명(明)나라를 따르고 있습니다.”
파총관은 묻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이어서 말하기를,
"당신 나라가 해마다 조공을 하여 군신간의 의리가 있고 침범하거나 반역한 정상은 없어 마땅히 예절로 대우할 것이니, 각자 안심하고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북경으로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급히 행장을 차리고 지체하지 마오”라고 하고 곧 다과를 접대하였습니다.
신은 즉시 사례하는 시(詩)를 지어 절하려고 하니, 파총관은 “절할 필요는 없소”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절을 하니 파총관 또한 일어나 마주보고, 답례하였습니다.
- 기후: 맑았습니다
- 지명: 도저소, 천태현(天台縣),
- 지리: 천태산, 안탕산, 북쪽, 석주산
- 언어(어원)
- 인물
- 인명: 왕해(王海), 종규(鍾道)
- 풍습: 부적(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 역사: 당(唐)나라 때 진사(進士) 종규(鍾道)
- 심리: 즐거움(왕해 등은 떠들며 크게 웃었습니다)
- 건축물
- 제도(관직): 진사(進士)
- 제도(시험)
- 사회: 바깥사람들이 모여들어 신을 구경하였습니다, 왜적
- 행정(체송)
- 모화
- 기물: 초상화
- 제도(외교)
- 유학
- 심리(안심)
- 시는 어떤 클래스에?
21st Day. At T’ao-chu Chiliad. This day was fair.
People came in crowds to look at me. Wang Hai pointed to a portrait on the wall and said, “Do you know that picture?” I said, “I am not acquainted with it.”
Hai said, “It is Chung K’uei, a Chin-shih of the T’ang Dynasty.” I said, “Never in his life did Chung K’uei rise to Chin-shih. How can you call him a Chin-shih?” Wang Hai and the others laughed uproariously. 39 Then a white-haired old man came, and I asked him, “How many li from here are the T’ien-t'ai and Yen-tang mountains ?”?40 The old man answered, “Mt. T’ien-t’ai is north of T’ien-t’ai County, two days' journey from here. Mt. Yen-tang is one day's journey south of Mt. Tien-t'ai. I then asked, “What is the guardian mountain of this town?” He said, “Mt. Stone Pillar.” He led me outside the gate and pointed out Mt. Stone Pillar, which was, indeed, a mountain of stone cliffs, at the peak of which there was a great stone shaped like a pillar. I sai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to Peking?” The old man said, “Over 5,800 li.”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the Yangtze River.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 I mentioned Yang-chou Prefecture, at which Yi Sõm had landed, and asked, “How many li is it from here?”' The old man said, “After you cross to the north of the Yangtze River, you are in Yang-chou.” I asked how many li it was to Nanking. The old man said, “Over two thousand li to the northwest. But all these are only estimates; I should not presume to know.” A great official came, heralds before him and throngs behind, troops impressively drawn up in display. He sat in the Huang-hua-kuan, and I asked about him. He was Liu Tse, Anti-Japanese Commander for Sung-men and Other Places.41 He called us before him and said, “Since you crossed the border illegally, you ought to be judged by military law, but because I think that some of the circumstances in the case may warrant sympathy, I have not, for the time being, put you to death. State truthfully whether or not you encroached on China, so that we can act accordingly.” I stated, “My name is Ch’oe Pu, and I live in the capital of Naju, Cholla Province, Korea. I placed twice on the examination lists and was a minister close to the King. On the 17th Day, Ninth Month of last year, I received the King's command to be a Commissioner for Cheju and other places. Cheju is in the South Sea and is over one thousand li from Naju by sea. On the 12th Day, Eleventh Month of the same year I crossed the sea. I was correcting entries on registers and the work was not completed when I heard, on the 30th Day of this First Month, that my father had died. On the 3rd Day, Intercalary First Month, not waiting for a favorable wind, I set out in confusion to cross the sea. We were driven off course by the wind and in the terrible, mountainous waves, would first almost sink and then almost capsize. We hungered for food, thirsted for water, and almost died. On the 12th Day of this month we arrived at an island,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nd moored there. Fishing boats came and asked, “What country are you from?' We answered that we were Koreans and [told] how we came to have gone adrift. “Then we asked, 'What country's territory is this?' "The men answered, 'It is Hsia-shan, Ning-po Prefecture, China.' "That night pirate boats and over twenty men came. They scared us with their swords and wanted to cut off our heads. They seized our clothing, rations, and baggage and then cut away our oars and anchor and left, and we drifted again in the open ocean. "On the 17th Day we came again to land and moored on a shore the name of which I do not know. Again there were fishing boats, six in a row, and I was afraid that they were of the type of the pirates we had met previously. We left the boat, went ashore, and crossed two ranges. In about six or seven li there was a settlement, from which we were passed along successively, reaching Hsien-yen Village at night. The villagers fought to beat us with crooked sticks and rob us. They turned us over to a place where we met an official, and he drove us on to this town.” He then asked, “What was the year in which you placed on the examination list? What offices have you held? In what departments and districts do the men who accompany you live? What articles are in your baggage? How many boats did you have originally?”.
I said, “I passed the Chinsa examination in third place in 1477, and 1482 I was the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 have been writer and Doctor of Learning in the Printing Office, Auditor in the Military Supplies Commission, Archivist in the National Academy, Supervisor in the Office of the Inspector-General, and Assistant Writer and Writer in the Oslice of Special Counselors. In 1486 I was first man in the second category of the Civil Service Second Examination. I was Junior Fifth Counselor in the Ollice of Special Counselors, and Lieutenant and Assistant Captain of the Yongyang Garrison. "Of the men with me, there are four secondary officials – Chòng Po,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Kwangju; Kim Chung, an official of Hwasun District; Son Hyo-ja,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Naju; and Yi Hyo-ji, an official under the Prefect of Cheju. There is one companion, Yi Chòng, from the capital. There is one Security Officer, An Úi, from Cheju; one Station Master, Ch’oe Kõisan, from Ch’ongam Station, Naju; and two slaves, Makkům and another. There are four Cheju public slaves, Kwon Song and others; nine loyal escort troops, Kim Sok and others; and twenty marine privates, Hồ Sang-ni and others. They are all from Cheju. “We sailed in only one large boat. Masts, sails,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wind, and anchor and oars were lost when we met the pirates. “As to the things we have, there are one seal, one horse permit, silk gauze hats, horn girdles, pertinent documents, an examination list for my Second Examination, books, one bow, one knife, and the clothes worn by the individual men. There is nothing else.” The Commander checked over the seal and other things. He asked, “How far away is your country? How many prefectures and departments are there? About how great are the military supplies? What things produced in your country do you prize? Which of the books you read do you revere? Y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follow the styles of what dynasty? Answer in writing, one by one, as a basis for verification.” I said, “My country is some several thousand li away. It has eight provinces, in which the prefectures, departments, counties, and districts total more than three hundred. Our products are talented men, the five grains, horses, oxen, fowls and dogs. The things read and revered are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ll our clothing, ceremonies, and music honor the Chinese styles. As to military supplies, being a Confucian minister, I have had no experience with them and do not know the figures exactly.” He asked, “Does your country have relations with Japan, Ryukyu and Koryo?”:42 I said, “Japan and Ryukyu are in the great sea to the southeast. They are far away, and we do not communicate with them.43 Koryo has become our present Choson.” He asked, “Does your country, too, pay tribute to our Court?”. I said, “Every year at such times as the Imperial Birthday and the New Year, we most respectfully pay tribute.” He asked, “What regulations does your country have? Do you have your own reign-titles?” I said, “In our reign-titles and regulations we follow Ming completely.” When the Commander had ended his questioning, he said, “Your state has paid tribute for years; you have acted as a good subject state. Since there is nothing to indicate seditious intent, you shall be treated courteously. Be at ease, each of you, and do not worry; we shall send you to the capital and let you go home. Hurry with your baggage. I will permit no delay.” He served us tea and cakes. I wrote a poem of thanks and bowed. The Commander said, “You need not bow," but I did not understand what he said and ventured to continue bowing. The Commander rose, too, and returned the courtesy.
151. 와병 중이었던 唐玄宗의 꿈에 나타난 大鬼로서, 소란을 피우던 小鬼를 죽인 뒤 玄宗의 물음에 終南山의 進士 鍾道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玄宗이 꿈에서 본 종규는 검은 의관을 걸치고, 눈이 크고 수염이 많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칼을 차고 있었으므로, 唐玄宗은 그와 똑같은 畵像을 그려 수호신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종규는 민간에서 악귀를 잡는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권6. 1752. 1國《臨海縣志》권3, 疆域, 敍水.
115?). 처음 양자강은 揚州와 鎭江 사이의 河段을 가리켰으나, 후에 儀眞 이하의 長江을 지칭하다가, 마지막에는 長江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154. 지체 높은 사람이 행차할 때 驅從이 소리를 질러 일반인의 통행을 잠시 금하는 일.
155. 지방에서 使臣을 접대하는 공관.
156. 松門衛·海門衛·昌國衛 등을 통할하는 把總指揮를 가리킨다.
154. 조선시대 文科試 합격자를 禮曹에서 殿試를 보아 성적에 따라 분류하는 둘째 등급. | km2로 시험하여 7명을 뽑았으며 이들은 정8품의 품계를 주었고, 기성 관리로 승진을 위해 응시한 자는 2품을 올려주었다.
194) 校書館은 經籍의 인쇄와 반포 및 香祝, 印蒙 등의 일을 관장한 조선시대의 관서이다. 태조 원년(1392)에 설치하였으며, 判校(정3품) 1명, 校理(종5품) 1명, 別座(종5품)
156.?
157. 고려 德宗 때 처음 실시한 國子監試의 별칭으로 賦와 詩를 시험했다. 조선 태조4년(1395) 12월에 없앴다가 세종 때 다시 두었고, 26년(1444)에 폐지했다가 단종 즉위년 (1452) 12월에 부활했다. 小科의 하나인 進士試의 합격자는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이 부여되고 또 하급관리로 등용될 수도 있었다. 소과는 가을에 실시하는 初試와 이듬해 봄에 서울에서 보는 2차 시험인 試를 보았다. 초시와 복시 모두 2場이 있었으니 이를 初場과 終場이라 한다. 초시와 복시의 초장은 賦 1편, 古詩, 銘, 箴 가운데 1편을 보았고, 종장에서는 五經義, 四書疑 2편을 보았다. 복시의 初場에 합격한 자를 進士라고 하였다.
158. ? 159. ?
160. 조선시대의 정7품 관직으로 중국의 經書를 위주로 한 古今의 학문을 섭렵하여 制撰, 敎育, 校 등의 일을 보좌케 하였다. 정원은 成均館 3인, 弘文館 1인, 承文院 2인, 校書館 2인이었다. 校書館 박사는 태종원년(1401) 처음 설치되었는데, 燕山君 때 他官員의 겸직으로 되었다가 1506년 中宗反正으로 환원되었다.
161. 軍資監은 조선시대의 관청으로 군수품의 저장과 출납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태조원년(1392)에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本監과 分監으로 구분했다. 관원으로는 正(정3 품 堂下官)과 副正(종3품) 각 1명, 僉正(종4품) 2명, 判官(종5품), 主簿(종6품) 각 3명, 直長(종7품), 奉事(종8품), 副奉事(정품), 參奉(종9품) 각 1명이 있었다. 한편 主簿는 敦寧府, 奉常寺, 軍資監, 司譯院, 訓鍊院 등 東·西班의 30여 官衙에 설치되었던 종6품직으로, 세조12년(1466) 1월 관제 개정 때 종래의 注簿와 副使 등이 主簿로 개칭되었다. 각 아문의 문서와 簿籍을 주관하는 임무를 맡았다.
162.成均館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유학교육을 위한 국가의 최고학부로 일명 學宮 혹은 泮宮이라고도 한다. 최고의 책임자로 정3품직인 大司成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 祭酒, 樂正, 直講, 博士, 學正, 學錄, 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과거제도와 긴밀히 연결되어서, 초시인 生員試와 進士試에 합격한 儒生 에게 우선적으로 성균관 입학의 기회를 주었다. 한편 典籍은 成均館의 정6품직으로, 정원은 13명이었다. 圖籍의 收藏과 출납, 관리의 일을 맡았다. 司成 이하 典籍 이상은 宗學敎官을 겸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성균관의 전적 중 1인은 養賢庫의 注簿를 겸하고, 또한 典籍 이하는 四學의 學官을 겸하였다.
163. 司憲府는 조선시대 刑曹, 漢城府와 더불어 三法司 또는 出禁三衙門의 하나로, 당시의 정치에 관하여 논의하고 모든 벼슬아치의 비행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규탄하며, 풍기와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들 사이에 원성이 있는가를 살피는 등의 일을 맡아보았 다. 또 司憲府와 司諫院을 병칭하여 그 관원을 모두 臺諫이라 불렀다. 사헌부는 관원 의 인사에도 관여하여 임금이 결정 임명한 관원의 자격을 심사하여 이에 대한 동의 여부를 결정하는 署經기관이기도 했다. 한편 監察은 조선시대 司憲府의 정6품 관직을 말한다. 정원은 초기에 다소의 변화가 있다가 세조 때 24명으로 정해졌다. 전. 外官의 불법행위를 실제로 감찰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국고출납, 祠祭, 朝廷禮會, 科學 등 모든 면에 걸쳐 감찰하여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아보았다.
164. 弘文館은 조선시대 궁중의 經書, 史籍의 관리, 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玉堂, 玉署, 瀛閣이라고도 하며, 司憲府司諫院과 더불어 三司라고 불렀다.
165. 조선시대 弘文館의 관직으로 修撰은 정6품, 副修撰은 종6품이었다. 세조9년(1463)에 弘文館이 신설된 뒤에 증설된 것으로 생각된다. 修撰은 文翰 편수의 임무를 맡고, 副修撰은 修撰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는다. 副提學 이하 副修撰까지는 知製敎를 兼帶 한다. 三司 관원의 일원으로 언론활동에도 참여하였다. 문과 합격자 중 圈點을 통하여 선발하여 弘文錄에 등재하였다.
166. 副校理는 조선시대 弘文館의 종5품직이다. 세조 9년에 홍문관이 신설된 뒤, 정5품직의 校理와 함께 부교리의 직이 두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교리는 서적의 異同과 正誤를 조사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부교리는 교리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經筵 官, 史官, 知制敎를 당연직으로 겸임하였으며, 司憲府·司諫院과 함께 三司의 일원으로 국정의 시비를 가리는 諫言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61 龍康衛는 朝鮮前期 중앙군의 근간인 5衛의 하나이다. 1457년 용양사가 용양위로 바뀌어 5위 중 左衛를 맡았다. 5衛에는 각기 신분별로 편성된 2-3개의 특색 있는 단위 부대를 두었는데, 용양위는 別侍衛와 隊卒로 구성되었다. 별시위는 5衛의 12개 단위 부대 중 신분별로는 가장 상위의 서열에 드는 부대로서 태종 원년(1401)에 설치되어 軍의 성격을 띠었다. 한편 司果는 조선시대 5衛에 속하는 정6품의 무관직으로, 정원은 21명이다. 고려시대 2군, 6위에 200명 단위 부대의 지휘관으로 정6품의 郞將 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조선 건국 초까지 지속되다가 태조3년(1395)에 副司直으 로 개칭되었다. 세조12년(1466)의 관직 정비 때에 다시 사과로 고쳐져 고정되었다. 사직과 마찬가지로 正品職이므로 遞兒職으로 배정되지 않았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였다. 167. ?
168. ?- ↑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 이야기 ④ 귀신 잡는 귀신 이야기 중국판 전우치전, 종규전전(鐘馗全傳), 조선일보, 2010.04.13]
- ↑ 종규(鐘馗) - 중국의 역신(疫神)
- ↑ [1]
- ↑ [2]
- ↑ [3]
- ↑ [4]
- ↑ [5]
- ↑ [6]
- ↑ 중국 천태산 지도
- ↑ 톈타이산
- ↑ 중국 10대 명산으로 꼽히는 절강성 안탕산
- ↑ 천태산 국청사, 법보신문, 2011.06.08
- ↑ 중국 천태산 고승들의 기담
- ↑ 천태산과 한국불교의 깊은 인연
- ↑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킨 의통법사義通法師, 관문사, 2018.06 Vol.234]
- ↑ ⑨보운존자(寶雲尊者) 의통(義通), 금강신문, 2011.05.04
- ↑ 중국 대륙에 산재한 해동 구도자의 자취를 찾아서, 불교신문, 2006.01.08
- ↑ 대각국사 의천의 해동 천태종 창시
- ↑ [차이나 인사이트 장안과 베이징 … 중국 왕조 도읍은 왜 변두리였나]
- ↑ [7]
- ↑ 장강과 양자강의 구분
- ↑ [8]
- ↑ 양주관광.1-수서호(瘦西湖).당성유지박물관.최치원기념관
- ↑ 중국 도시 이야기 ⑪ 난징(南京), 중앙일보, 2011.10.05
- ↑ [9]
- ↑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의 정비에 관한 연구 - 주 (州) 부 (府) 군 (郡) 현 (縣) 을 중심으로
- ↑ 주부군현각도
- ↑ 중국에 하던 조공, 굴욕이었을까 무역이었을까, 아시아경제, 2017.06.23
- ↑ 조공국은 속국이 아니다
- ↑ 신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