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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過劉城鎭。是日晴。曉發船。過九里山至洞山。山有十王殿。又過秦梁洪鋪,茶城店,梁山寺。至境山市。鎭山有上下寺。皆巨刹。又過集殿白廟,兒鋪,夾溝淺。至夾溝驛。驛丞忘其姓名。不從陳萱之言。供饋臣等甚優。贈杜玉以一斗米。萱與玉爭奪。玉枇萱額。自驛至黃家閘。閘上有眉山萬翼碑。臣令程保告楊旺請觀之。旺不肯。强而後許之。其碑撰略曰。洪惟我朝太祖高皇帝。龍飛淮甸。混一寰宇。迺建都南京。以臨天下。曁我太宗文皇帝。紹基鴻業。遷都北京。于時方嶽諸鎭及四夷。朝聘貢賦。每歲咸會於畿內。而滇蜀,荊楚,甌越,閩淛。悉由楊子江。泛東海。沿流北入天津。度潞河詣京師。其江海之闊。風波之險。京儲轉輸爲難。故我太宗文皇帝慮東南海運之艱。乃召股肱大臣。往徐,楊,淮,濟。度地勢順水性。東自瓜洲。西自儀眞。咸作垻以截之。俾不泄於江。仍因近世舊規。鑿漕引水爲河。而總會于楊。由楊到淮。由淮至徐。由徐至濟。自濟以南。則水勢南下接黃河。會淮入海。自濟以北。則水勢北流接衛河。會白河。亦入於海。 上復以地形南北。高下不一。分泄水勢。無以貯蓄。非經久計。仍命有司置閘。或五七里一閘。或數十里一閘。瀦水濟舟。迨今淵源不竭。自是方嶽蕃鎭。與夫四夷朝聘會同及軍民貢賦轉輸。商賈貿易。皆由於斯。而舟楫之利。始通乎天下。以濟萬民。無復江海風濤之厄。我太宗是作。實纘禹之功。補天之不足。開萬世太平之盛典也。矧徐迺古彭城。東方大郡。襟淮帶濟。爲南北兩京喉舌。徐之北黃家村之東。有山溪一派。南流入閘。水勢洶湧多洑流。走沙壅塞淤淺。舟楫經此。恒爲阻隘。民甚病焉。天順戊寅春。有司具疏聞于朝。我英宗睿皇帝丕纘洪休。益篤前烈。迺召有司。立閘以通之。設官以理之。自是舟楫往來。無復前患云云。閘官開閘。令人巭撁上臣船以過。又行過義井黃家鋪,候村鋪,李家中鋪,新興閘,新興寺,劉城鎭。夜三更。至謝溝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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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 ||
− | “우리나라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 + | “우리나라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회전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통일하고 남경에 도읍을 세워서 천하에 군림하셨다. 우리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에 이르러 큰 제업(帝業)을 계승하여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셨다.<ref>[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attlcar&logNo=220862727510&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대도 북경을 설계한 승려 유병충]</ref> 당시에 방악(方嶽)과 제진(諸鎭) 및 사이(四夷)의 조빙(朝聘)과 공부(貢賦)가 해마다 모두 기내(畿內)로 모였다. 그리고 전촉·형초·구월·민절이 모두 양자강을 경유하여 동해에 떠서 물의 흐름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천진(天津)에 들어와 노하(路河)를 건너서 경사에 이르렀다. |
<span style="color:red">그 강해(江海)의 광활함과 풍파의 험난함으로 경사로의 운반 수송이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우리 태종문황제께서 동남방의 해운이 곤란함을 염려하여 이에 고굉대신(股肱大臣)을 불러 서주, 양주, 회남, 제남(濟南)에 가서 지세를 헤아리고, 물길을 따라 동쪽은 과주(瓜洲)로부터, 서쪽은 의진(儀眞)으로부터 모두 제방을 만들어서 물을 막아 [https://www.youtube.com/watch?v=tKRFvwoX7aI 장강]<ref>[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nNewsNumb=20151018567&nidx=18568 [여행] 장강 싼샤 단풍 따라 600㎞ 크루즈]</ref>으로 새지 않도록 하셨다. </span> | <span style="color:red">그 강해(江海)의 광활함과 풍파의 험난함으로 경사로의 운반 수송이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우리 태종문황제께서 동남방의 해운이 곤란함을 염려하여 이에 고굉대신(股肱大臣)을 불러 서주, 양주, 회남, 제남(濟南)에 가서 지세를 헤아리고, 물길을 따라 동쪽은 과주(瓜洲)로부터, 서쪽은 의진(儀眞)으로부터 모두 제방을 만들어서 물을 막아 [https://www.youtube.com/watch?v=tKRFvwoX7aI 장강]<ref>[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nNewsNumb=20151018567&nidx=18568 [여행] 장강 싼샤 단풍 따라 600㎞ 크루즈]</ref>으로 새지 않도록 하셨다. </span> | ||
− | 이어서 근세(近世)의 | + | 이어서 근세(近世)의 구규를 따라 뱃길을 파서 물을 끌어들여 강을 만들어 모두 양주에 모이게 했으므로, 양주를 경유하여 회안(淮安)에 이르고, 회안을 경유하여 서주에 이르고, 서주를 경유하여 제남에 이르게 하였다. |
제남에서 남쪽은 수세(水勢)가 남쪽으로 흘러내려 황하와 접하여 회수를 만나 바다로 들어가고, 제남에서 북쪽은 수세가 북쪽으로 흘러 위하(衛河)에 접하여 백하(白河)를 만나 또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 | 제남에서 남쪽은 수세(水勢)가 남쪽으로 흘러내려 황하와 접하여 회수를 만나 바다로 들어가고, 제남에서 북쪽은 수세가 북쪽으로 흘러 위하(衛河)에 접하여 백하(白河)를 만나 또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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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red">이로부터 배가 왕래하면서 다시는 예전과 같은 우환이 없어지게 되었다.</span>” | <span style="color:red">이로부터 배가 왕래하면서 다시는 예전과 같은 우환이 없어지게 되었다.</span>” | ||
− | 갑관(官)이 갑문을 열더니 인부로 하여금 신의 배를 들어 올려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의정(義井)·황가포(黃家鋪) · 후촌포(侯村鋪)·이가중포(李家中鋪). 신흥갑(新興間)·신흥사(新興寺)·유성진(留城鎭)을 지나서 밤 3경에 사구갑( | + | 갑관(官)이 갑문을 열더니 인부로 하여금 신의 배를 들어 올려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의정(義井)·황가포(黃家鋪) · 후촌포(侯村鋪)·이가중포(李家中鋪). 신흥갑(新興間)·신흥사(新興寺)·유성진(留城鎭)을 지나서 밤 3경에 사구갑(謝溝閘)에 이르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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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ck official opened the lock and ordered laborers to pull my boats up, and we passed. [We went from l-ching-huang-chia Stop to Hsiehkou Lock.] | The lock official opened the lock and ordered laborers to pull my boats up, and we passed. [We went from l-ching-huang-chia Stop to Hsiehkou Loc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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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过刘城镇。是日睛。晓发船,过九里山至洞山,山有十王殿。又过秦梁洪铺、茶城店、梁山寺至境山——市镇山——有上下寺,皆巨刹。又过集殿、白庙儿铺、夹沟浅至夹沟驿。驿丞——忘其姓名——不从陈萱之言,供馈臣等甚优。赠杜玉以一斗米,萱与玉争夺,玉批萱额。自驿至黄家闸,闸上有眉山万翼碑。臣令程保告杨旺请观之。旺不肯,强而后许之。其碑撰略曰:“洪惟我朝太祖高皇帝龙飞淮甸,混一寰宇,乃建都南京以临天下。暨我太宗文皇帝绍基鸿业,迁都北京。于时,方岳诸镇及四夷朝聘贡赋,每岁咸会于畿内。而滇蜀、荆楚、瓯越、闽浙,悉由扬子江泛东海,沿流北入天津,渡潞河诣京师。其江海之阔,风波之险,京储转输为难,故我太宗文皇帝虑东南海运之艰,乃召股肱大臣往徐、扬、淮、济,度地势,顺水性,东自瓜州,西自仪真,咸作坝以截之,俾不泄于江。仍因近世旧规,凿漕引水为河,而总会于扬,由扬到淮,由淮至徐,由徐至济。自济以南,则水势南下,接黄河会淮入海;自济以北,则水势北流,接卫河会白河亦入于海。上复以地形南北高于不一,分泄水势无以贮蓄,非经久计,仍命有司置闸,或五、七里一闸,或十数里一闸,潴水济舟,迨今渊源不竭。自是方岳番镇与夫四夷朝聘会同,及军民贡赋转输、商贾贸易,皆由于斯。而舟楫之利始通乎天下,以济万民无复江海风涛之厄,我太宗是作实缵田禹之功,补天之不足,开万世太平之盛典也。矧徐乃古彭城东方大郡,襟淮带济,为南北两京喉舌。徐之北,黄家村之东,有山溪一派,南流入闸,水势汹涌多洑流,走沙壅塞淤浅,舟楫经此恒为阻隘,民甚病焉。天顺戊寅春,有司具疏闻于朝,我英宗睿皇帝丕缵洪休,益笃前烈,乃召有司立闸以通之,设官以理之。自是舟楫往来无复前患”云云。闸官开闸,令人巭牵上臣船以过。又行过义井、黄家铺、侯村铺、李家中铺、新兴闸、新兴寺、刘城镇,夜三更至谢沟闸。 | ||
2020년 12월 11일 (금) 23:29 기준 최신판
過劉城鎭。是日晴。曉發船。過九里山至洞山。山有十王殿。又過秦梁洪鋪,茶城店,梁山寺。至境山市。鎭山有上下寺。皆巨刹。又過集殿白廟,兒鋪,夾溝淺。至夾溝驛。驛丞忘其姓名。不從陳萱之言。供饋臣等甚優。贈杜玉以一斗米。萱與玉爭奪。玉枇萱額。自驛至黃家閘。閘上有眉山萬翼碑。臣令程保告楊旺請觀之。旺不肯。强而後許之。其碑撰略曰。洪惟我朝太祖高皇帝。龍飛淮甸。混一寰宇。迺建都南京。以臨天下。曁我太宗文皇帝。紹基鴻業。遷都北京。于時方嶽諸鎭及四夷。朝聘貢賦。每歲咸會於畿內。而滇蜀,荊楚,甌越,閩淛。悉由楊子江。泛東海。沿流北入天津。度潞河詣京師。其江海之闊。風波之險。京儲轉輸爲難。故我太宗文皇帝慮東南海運之艱。乃召股肱大臣。往徐,楊,淮,濟。度地勢順水性。東自瓜洲。西自儀眞。咸作垻以截之。俾不泄於江。仍因近世舊規。鑿漕引水爲河。而總會于楊。由楊到淮。由淮至徐。由徐至濟。自濟以南。則水勢南下接黃河。會淮入海。自濟以北。則水勢北流接衛河。會白河。亦入於海。 上復以地形南北。高下不一。分泄水勢。無以貯蓄。非經久計。仍命有司置閘。或五七里一閘。或數十里一閘。瀦水濟舟。迨今淵源不竭。自是方嶽蕃鎭。與夫四夷朝聘會同及軍民貢賦轉輸。商賈貿易。皆由於斯。而舟楫之利。始通乎天下。以濟萬民。無復江海風濤之厄。我太宗是作。實纘禹之功。補天之不足。開萬世太平之盛典也。矧徐迺古彭城。東方大郡。襟淮帶濟。爲南北兩京喉舌。徐之北黃家村之東。有山溪一派。南流入閘。水勢洶湧多洑流。走沙壅塞淤淺。舟楫經此。恒爲阻隘。民甚病焉。天順戊寅春。有司具疏聞于朝。我英宗睿皇帝丕纘洪休。益篤前烈。迺召有司。立閘以通之。設官以理之。自是舟楫往來。無復前患云云。閘官開閘。令人巭撁上臣船以過。又行過義井黃家鋪,候村鋪,李家中鋪,新興閘,新興寺,劉城鎭。夜三更。至謝溝閘。
유성진(留城鎭)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배를 출발시켜 구리산(九里山)을 지나 동산(洞山)에 이르니, 산에는 시왕전(十王殿)이 있었습니다.
또 진량홍포(秦梁洪鋪), 다성점(茶城店), 양산사(梁山寺)를 지나서 경산시진(境山市鎭)에 이르렀습니다.
경산(境山)에는 상사(上寺)와 하사(下寺)가 있는데 모두 큰절이었습니다.
또 집전(集殿), 백묘아포(白廟兒鋪), 협구천(夾溝淺)을 지나 협구역(夾溝驛)에 이르렀는데, 성명은 잊었지만 어떤 역승이 진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신 등에게 음식을 매우 넉넉하게 주었습니다.
두옥(杜玉)에게도 쌀 한 말을 주었는데, 진훤과 두옥은 서로 빼앗으려고 다투다가 두옥이 진훤의 이마를 쳤습니다.
협구역에서 황가갑(黃家間)에 이르니, 황가갑 위에 미산만익비(眉山萬翼碑)가 있었습니다.
신이 정보를 시켜 양왕에게 보기를 청하였습니다.
양왕은 내켜하지 않았지만 강하게 조르니 허락하였습니다.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회전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통일하고 남경에 도읍을 세워서 천하에 군림하셨다. 우리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에 이르러 큰 제업(帝業)을 계승하여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셨다.[1] 당시에 방악(方嶽)과 제진(諸鎭) 및 사이(四夷)의 조빙(朝聘)과 공부(貢賦)가 해마다 모두 기내(畿內)로 모였다. 그리고 전촉·형초·구월·민절이 모두 양자강을 경유하여 동해에 떠서 물의 흐름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천진(天津)에 들어와 노하(路河)를 건너서 경사에 이르렀다.
그 강해(江海)의 광활함과 풍파의 험난함으로 경사로의 운반 수송이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우리 태종문황제께서 동남방의 해운이 곤란함을 염려하여 이에 고굉대신(股肱大臣)을 불러 서주, 양주, 회남, 제남(濟南)에 가서 지세를 헤아리고, 물길을 따라 동쪽은 과주(瓜洲)로부터, 서쪽은 의진(儀眞)으로부터 모두 제방을 만들어서 물을 막아 장강[2]으로 새지 않도록 하셨다.
이어서 근세(近世)의 구규를 따라 뱃길을 파서 물을 끌어들여 강을 만들어 모두 양주에 모이게 했으므로, 양주를 경유하여 회안(淮安)에 이르고, 회안을 경유하여 서주에 이르고, 서주를 경유하여 제남에 이르게 하였다.
제남에서 남쪽은 수세(水勢)가 남쪽으로 흘러내려 황하와 접하여 회수를 만나 바다로 들어가고, 제남에서 북쪽은 수세가 북쪽으로 흘러 위하(衛河)에 접하여 백하(白河)를 만나 또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다.
황제께서는 다시 지형의 남쪽과 북쪽이 높고 낮음이 같지 않아 물길이 나뉘어져 물을 모아놓을 수 없는 것은 장기적인 계책이 못된다는 이유로 곧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갑(間)을 두되, 5-7리에 1갑을 두기도 하고 십 수리에 1갑을 두기도 해서 물을 모아 배를 건너게 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물의 연원이 마르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방악(方嶽)과 번진(蕃鎭) 및 사이(四夷)의 조빙(朝聘)와 회동(會同), 군민(軍民)의 공부(貢賦) 수송, 상고(商賈)의 무역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게 되고, 배의 이로움이 비로소 천하에 통하여 만민을 구제하고 다시는 장강과 바다에 풍랑의 재액이 없게 되었다.
우리 태종께서 하신 이 일은 실로 우왕(禹王)의 공적을 계승하여 하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만세의 태평을 열어놓은 성대한 사업이었다. 하물며 서주는 곧 옛 팽성(彭城)으로서 동방의 큰 군(郡)이며, 회수를 끼고 제수(濟水)를 둘러싸 남경과 북경의 길목이 되었음에랴!
서주의 북쪽 황가촌(黃家村)의 동쪽에 산에서 흐르는 시냇물 한 가닥이 남쪽으로 흘러 갑문으로 들어가는데, 수세가 용솟음치고 돌아 흐르는 곳이 많아 모래가 밀려 내려와 쌓여 하천을 막으니, 배가 이곳을 지나는데 항상 장애가 되어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천순(天順) 무인년(1458) 봄에 유사가 자세히 상소하여 조정에 알리니, 우리 영종예황제(英宗睿皇帝)께서 유업을 계승하여 이를 빛내고 전대의 공업(功業)을 더욱 두터이 하려고, 이에 유사를 불러 갑문을 세워서 이를 통하게 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이를 관리하게 하셨다.
이로부터 배가 왕래하면서 다시는 예전과 같은 우환이 없어지게 되었다.”
갑관(官)이 갑문을 열더니 인부로 하여금 신의 배를 들어 올려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또 가다가 의정(義井)·황가포(黃家鋪) · 후촌포(侯村鋪)·이가중포(李家中鋪). 신흥갑(新興間)·신흥사(新興寺)·유성진(留城鎭)을 지나서 밤 3경에 사구갑(謝溝閘)에 이르렀습니다.
5th Day. Passing Liu-ch'eng Market.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Chiu-li Mountain to Chia-kou Station.] The Station Master, whose name I have forgotten, did not go by what Ch’en Hsüan said and served us food lavishly. He presented a bushel of rice to Tu Yü. Hsüan struggled with Yü for it, and Yü hit Hsüan on the forehead. From the station we came to Huang-chia Lock, on which was Mei Mountain Myriad Carriers Stone Marker [Mei-shan wan-i pei]. I ordered Chòng Po to ask Yang Wang to let us look at it, but Yang was not willing to do so. He gave permission only after we had insisted. Briefly, the inscription on the stone said,
“Magnificent, the Exalted Emperor T'ai Tsu [1368-1398] of our ruling house rose, a dragon flying, from the region of the Huai and united the world. He built his capital at Nanking to watch over the Empire. With the succession to the great duties of our Cultured Emperor Tai Tsung [1403-1424], he moved the capital to Peking. Then the Four Mountains, all the guardian mountains, and the Four Barbarians76 paid tribute and taxes to the Court. Every year, they all gathered in the Imperial domains. But Tien, Shu, Ching, Ch'u, Ou, Yüeh, Min, and Che77 sailed, by way of the Yangtze River, the Eastern Sea, following it north to Tientsin. They went up the Lu River78 and reached the capital.
“The distances of the river and sea and the dangers of wind and waves made transporting (grain) and accumulating it at the capital hard. Our Cultured Emperor T'ai Tsung, therefore, mindful of the difficulty of transport in the Southern and Eastern seas, had his greatest ministers go to the Hsü, Yang, Huai, and Chi and survey the land and regulate the rivers. East from Kuachou and west from I-chen they built embankments along them all to block them and keep them from leaking into the Yangtze. Making use of existing channels, they cut canals and led in streams to make a river, converging in the Yang. From the Yang it went to the Huai, from the Huai to the Hsü, and from the Hsü to the Chi.
“From the Chi south, rivers flowed south and joined the Huang River. That converged with the Huai and entered the sea. From the Chi north, rivers flowed north and joined the Wei River. That converged with the Pai River and also entered the sea. His Majesty, realizing that the land north and south, being of uneven height, dissipated the waters and kept none and that such a condition was not good in the long run, ordered those in charge to put up locks: in some places one lock every five to seven li, in others one every ten li or more, in order to catch the water and let boats pass. To the present day, that fountainhead [of benefits] has not been exhausted.
“From then on, the gathering of tribute to the Court from the Four Mountains, the guardian mountains, and the Four Barbarians; the transportation and accumulation of military and civilian taxes; and all commerce and trade have come by way of it. For the first time, the advantages of water transport extend throughout the Empire to the benefit of the people. There will not again be danger from the wind and waves of the Yangtze and the sea.
“This act of our T’ai Tsung has truly carried on the virtuous accomplishments of Yü. It has made up a deficiency of Heaven. It has begun a glorious procedure for all ages and all alike."
"That is all the more so in that Hsü had been the old P’eng-ch'eng, a great prefecture of the east. It strategically dominated the Huai and Chi and was a controlling pass between the northern and southern capitals.
“North of Hsü and east of Huang-chia Village was a mountain stream that flowed south into a lock. Its force was torrential, and it had many whirlpools. Drifting sand having silted it up and made it shallow, boats passing there were constantly obstructed, and the people were extremely distressed by it."
"In the spring of T’ien-shun wu-yin [1458], the authorities drew up a memorial and laid it before the Court. Our Sagacious Emperor Ying Tsung [1457-1464] carried forward the tremendous and good work, adding much to the previous accomplishment. He ordered the authorities to set up locks and make a passage there, and he established an official to take charge of it. Thereafter, boats went to and fro, and there was no more of the previous distress.”
The lock official opened the lock and ordered laborers to pull my boats up, and we passed. [We went from l-ching-huang-chia Stop to Hsiehkou Lock.]
初五日
过刘城镇。是日睛。晓发船,过九里山至洞山,山有十王殿。又过秦梁洪铺、茶城店、梁山寺至境山——市镇山——有上下寺,皆巨刹。又过集殿、白庙儿铺、夹沟浅至夹沟驿。驿丞——忘其姓名——不从陈萱之言,供馈臣等甚优。赠杜玉以一斗米,萱与玉争夺,玉批萱额。自驿至黄家闸,闸上有眉山万翼碑。臣令程保告杨旺请观之。旺不肯,强而后许之。其碑撰略曰:“洪惟我朝太祖高皇帝龙飞淮甸,混一寰宇,乃建都南京以临天下。暨我太宗文皇帝绍基鸿业,迁都北京。于时,方岳诸镇及四夷朝聘贡赋,每岁咸会于畿内。而滇蜀、荆楚、瓯越、闽浙,悉由扬子江泛东海,沿流北入天津,渡潞河诣京师。其江海之阔,风波之险,京储转输为难,故我太宗文皇帝虑东南海运之艰,乃召股肱大臣往徐、扬、淮、济,度地势,顺水性,东自瓜州,西自仪真,咸作坝以截之,俾不泄于江。仍因近世旧规,凿漕引水为河,而总会于扬,由扬到淮,由淮至徐,由徐至济。自济以南,则水势南下,接黄河会淮入海;自济以北,则水势北流,接卫河会白河亦入于海。上复以地形南北高于不一,分泄水势无以贮蓄,非经久计,仍命有司置闸,或五、七里一闸,或十数里一闸,潴水济舟,迨今渊源不竭。自是方岳番镇与夫四夷朝聘会同,及军民贡赋转输、商贾贸易,皆由于斯。而舟楫之利始通乎天下,以济万民无复江海风涛之厄,我太宗是作实缵田禹之功,补天之不足,开万世太平之盛典也。矧徐乃古彭城东方大郡,襟淮带济,为南北两京喉舌。徐之北,黄家村之东,有山溪一派,南流入闸,水势汹涌多洑流,走沙壅塞淤浅,舟楫经此恒为阻隘,民甚病焉。天顺戊寅春,有司具疏闻于朝,我英宗睿皇帝丕缵洪休,益笃前烈,乃召有司立闸以通之,设官以理之。自是舟楫往来无复前患”云云。闸官开闸,令人巭牵上臣船以过。又行过义井、黄家铺、侯村铺、李家中铺、新兴闸、新兴寺、刘城镇,夜三更至谢沟闸。
- 기후
- 지명
- 시간
- 지리
- 불교
- 의전
- 인명
- 사건(중국인들간의 다툼)
- 건축(미산만익비)
- 중화
- 제도(관직)
- 유학(경세제민)
- 제도(교통)
- 사회(경제)
- 기술
- 토목
표해록역주 p.412
- ↑ 대도 북경을 설계한 승려 유병충
- ↑ [여행 장강 싼샤 단풍 따라 600㎞ 크루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