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침략"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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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남잡지)
(성호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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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운부군옥==
 
==대동운부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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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오랑캐 병사가 이르자 사람들이 굴 속으로 들어가 피하고 방수별감을 뽑아 지키게 하였다.<br> 고종 45년에 몽고병이 가수굴과 양파혈을 침공하였다.<br> 양파혈은 상, 중, 하 세 개가 있는데 몽고병이 산 위로부터 밧줄로 갑사를 굴 입구에 내려보냈으나 창과 도끼가 들어갈 수 없었다.<br> 이에 또 풀에 불을 질러 굴 속에 던지니 지키는 병졸들이 모두 어지럽게 흩어져 항복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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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년에 몽고의 군사가 와서 서경을 노략질하였다.<br> 여러 성들은 위도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있을 때, 김방경이 병마판관이 되었다.<br> 섬 가운데 평탄해서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사방 십여 리 가량 있었으나, 바다의 조수가 밀려들어 개간을 할 수 없었다.<br> 김방경이 바다를 막고 파종을 하게 하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이 되어 곡식이 잘 여물자 그 덕에 살아갈 수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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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침략해옴에 창고가 고갈되었음을 알려왔다.<br> 이에 왕이 주선을 감하도록 명하였다.<br> 또 창감을 소환하였으나 끝내 이르지 않았으므로 왕이 성을 내면서 그의 관직을 빼앗고자 하였다.<br> 그러나 얼마 후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늘 비록 관직을 박탈시킨들 내일 반드시 복직될 것이니 무슨 징계가 되겠는가?"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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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가서 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br> 황제가 본국의 악관들에게 『감황은곡』을 연주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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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돌아가신 뒤로부터 원나라 황제가 늘 집정을 뽑아 원나라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니, 모두들 두려워서 감히 가지를 못하였다.<br> 이색이 재상이 되어 말하기를, "지금 원나라와 우리나라에 틈이 있는데, 왕은 어려서 갈 수가 없으니, 이것은 늙은 나의 책임이다"라고 하고 자청하여 원나라 조정에 들어갔다.<br> 우리 태조가 그것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강개하도다.<br> 이 늙은이여!"라고 하였다.<br> 나라 사람들이 모두 늙었다고 말렸으나, 이색은 스스로 자신이 죽을 곳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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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이 몽고의 병사가 수도로 침략하는 것을 피해 강화로 들어가 그곳을 '강도'라 불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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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신은 어려서 원나라에서 자랐는데 황제가 한번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서 명하여 궁궐에서 숙위를 하도록 명하였다.<br> 이 때문에 오랜 동안 어머니를 뵙지 못하자 황제에게 고하여 어머니를 뵙기를 청하였다.<br> 황제가 금강산에 향을 주라고 명한 뒤에 가서 어머니를 뵙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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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고구려의 혈구군인데 신라 원성왕이 진을 두었다.<br> 고종이 몽고의 병사를 피하여 수도를 옮겼으므로 강도라고 부른다.<br> 본조에 들어와 도호부로 되었는데 사면이 바다로 둘러 있으며 안으로는 마니, 혈구에 의거하고 밖으로는 용진, 백마와 경계하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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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 2년에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서 참람하게 일컫는 말을 일체 금하니 이에 충렬왕이 '사(赦)'를 고쳐 '유(有)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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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초에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우리나라 위상에 넘치게 사용해 오던 용어를 일절 금지시켰다.<br> 이에 '주(奏)를 고쳐 정(呈)으로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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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이 원나라에서 가서 왕이 오회에 갈 때 따라갔고 또 여항에서 나그네로 묵기도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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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몽고병이 춘주를 침범할 때 목책을 몇 겹이나 세우고 참호를 한 길 남짓 파고서 며칠 동안 공격하니, 수령 조효립이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아내와 함께 불에 뛰어 들어가 죽었다.<br> 안찰사 박천기는 계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자 먼저 성안의 재물과 곡식을 불사르고 나서 목책을 무너뜨리고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참호를 만나 나갈 수 없어 한 사람도 탈출한 자가 없었다.<br> 몽고병이 드디어 그 성의 사람을 모두 죽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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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장수가 서경에 주둔하며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오랜 객지 생황에 무료하니 물고기를 잡으려 즐겨야겠다"라고 했다.<br> 김방경이 "어디에서 고기잡이 할까요?" 하니 "대동강을 지나 초도로 들어가리라"고 했는데 김방경은 따르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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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랑 기자오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들어가 순제의 두 번째 황후가 되어 황태자를 낳았다.<br> 공민왕이 후모 이씨를 부에 두고 이름을 경항이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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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침략하니 주현이 시들어 피폐하고 노소가 골짜기에 많이 뒹굴어 아이를 나무에 달아매고 가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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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42년 여름 몽고병이 쳐들어와 의주, 정주에 주둔하였는데, 군사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br> 20 여 기마병이 곧장 승천부에 이르러 개경이 계엄에 들어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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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수가 원나라에 조회하러 가니 황태자가 공을 불러 광한전에 올랐다.<br> 태자가 거문고를 가지고서 타다가 곡조를 잊어버려 이루지 못하자 공이 즉시 꿇어앉아서 말하기를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고, 거문고의 한 두 곡조는 잊어버린들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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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이 원나라에 조회를 가서 황제에게 축수를 올렸더니 황제가 「고려가」를 부르도록 명하였다.<br> 왕이 송영 등에게 「쌍연곡」을 부르도록 하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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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면의 옛 지역 가운데 오직 공주만이 가장 편벽되고 멀다.<br> 원나라 말엽에 사람과 연기가 완전히 없어져서 가시밭이 된 지 수십 년이 되었다.<br>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됨에 미쳐서 고을로 승격하여 경원부가 되었다.<br> 유민들을 끌어 모아서 거진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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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원나라 황제의 딸에게 장가들었다.<br> 유경이 말하기를 "공주가 임금에게 시집온 이후 나라 사람들이 안도하고 지내게 되었다.<br>"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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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공주를 고려왕에게 시집보내어 대대로 장인과 사위의 우호를 돈독히 하였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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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14년 봄, 궁문 밖 큰 길에서 판교까지 지렁이가 나와 혹은 실이 얽힌 것처럼 혹은 산대를 펼친 것처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얼마 뒤에 몽고군이 크게 쳐들어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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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몽고 사신이 와서 국신을 요구했다.<br> 그러나 최우는 위로하고 타일러 그냥 보내게 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몽고 침략의 재앙은 이때부터 싹텄다"라 하였다.<br> 윤해가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조회갈 때 행장과 공물의 재화를 관장하였는데, 귀국하여서는 쓰고 남은 물건을 모두 국신고에 반납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을 칭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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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무도와 경필의 예식을 행하는 것을 금하는 조칙을 내려 그것을 없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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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금묘년부터 준동하는 북쪽 오랑캐 사람들. 이것은 고종 신묘년에 몽고 병사가 비로소 침략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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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몽고가 침략하여 노략질하자, 백돈명이 동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어 백성들을 몰아 성보에 들어가서는 출입을 금지시켰다.<br>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벼를 수확하지 못하였으니 적병이 이르기 전에 교대로 나가서 벼를 베어오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br> 그러나 백돈명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고 간언하는 사람을 죽였다.<br> 이에 고을 사람들이 분노하고 원망하였는데, 적병이 성 아래에 이르자 병사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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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행주로, 총랑 기자오의 막내딸이다.<br> 원나라에 선발되어 들어가 순제의 둘째 황후가 되고 태자를 낳으니 이가 기황후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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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주이며 평장사를 지낸 김태서의 아들이다.<br> 풍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장중하였으며 온화하고 너그럽고 지혜롭고 용감함이 뛰어났다.<br>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br> 고려 고종 때 정주분도장군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강을 건너 정주로 침략하였다.<br> 김경손이 기지를 발휘해 대비하였는데 변란에 대응하는 재주가 귀신같아 적이 포위를 풀고 갔다.<br>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우니 조정이나 재야에서 의지하며 귀중히 여겼다.<br> 최항에게 해를 입자, 사람들이 모두 애통해 하였다.<br> 벼슬이 추밀원부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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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상산, 호는 난계이다.<br>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에 보임되었다.<br>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br> 뒤에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재차 홍건적을 평정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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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의 사람이다.<br> 성품이 널리 정통하였고 경개하기가 남달랐다.<br> 과거에 합격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서 시어사가 되었다.<br> 그때 몽고가 장수를 보내어 해마다 침략을 해왔는데 왕이 수강을 보내어 더 이상 침략하지 말 것을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br> 벼슬은 중서사인에 이르렀고 끝내 재상에 임명되지 않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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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이 김해다.<br> 공민왕 때 여러 장수와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이 있었다.<br>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책립하였을 때 김유가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있으면서 절개를 지키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br> 돌아오자 공신에 녹훈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찬성사가 되었다.<br> 바다를 건너 대명에 조회하러 가는데 바닷길이 험악하여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였다.<br> 고황제가 대리부로 유배보내었다.<br> 2만 8천 리나 떨어진 곳인데 3년 동안 지낸 뒤에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br> 이인임이 또 어떤 일로 무함함으로써 순천으로 유배되었는데 도중에 졸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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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사람이다.<br> 고종 때 충주방호별감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고을을 90일 동안이나 포위하여 군량미가 거의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br> 김윤후가 병사들을 격려하자 모두들 죽을 각오로 싸워 몽고병이 점차 기가 꺾여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였다.<br> 그는 그 공으로 상장군에 올랐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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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의 아전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해장이다.<br> 고종 말기에 몽고군이 쳐들어와 그 어미를 사로잡아 갔다.<br> 그 어미가 죽은 줄로만 알고 최복을 입어 상제를 마쳤다.<br> 나중에 그 어미에 원나라 요양에서 종살이하며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금을 가지고 가서 속량하여 돌아왔다.<br> 나라에서 그 마을에 정려를 내려 '효자지'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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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권한공이 호종을 하면서 관리의 선발을 주관하였다.<br> 왕이 돌아오자 늘 대궐에 출입하니 친척과 친구들에게 함부로 높은 벼슬을 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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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부에 「납민가」가 있다.<br> 원나라 가짜 승상인 납합이 출입하며 우리나라의 동북쪽 변방에 침략하므로 우리 태조가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쫓아 버렸다.<br> 정도전이 이 노래를 지어서 그 공을 칭송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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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이 복위했을 때 원나라의 백안은 묵은 감정이 있어 조적의 도당과 함께 대질을 하게 되었다.<br> 이조년이 분개하여 이제현에게 "내가 마땅히 글을 올리고 죽어 우리 임금이 죄가 없음을 밝히리라. 그대는 나의 편지를 쓰라"라 하고 밤에 일어나 목욕하고 떠나려 하는데 백안이 실각하였다.<br>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골이 송연하여 말하기를 "쓸개가 몸보다 크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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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군대는 '대포차'로써 구주를 공격해 오자 장군 박서 역시 '대포차'로서 돌을 날려 공격하여 무수히 죽였다.<br> 몽고 장수가 성루와 무기를 둘러보고는 탄식해서 말하기를 "성 안에 있는 여러 장수들은 다른 날 반드시 다 장수나 정승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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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니 원나라 황제가 성을 내어 병사를 파견하여 진상을 물었다.<br> 원나라 장군 살리타가 송경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하니 잡단설신이 군중에 있으라고 붙잡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 속담에 다른 나라의 대관이 남쪽 강을 건너는 것은 불길하다는 말이 있습니다"라 하였다.<br> 그러나 원나라 장군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강을 건너 가다가, 처인성에 이르러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br> 이에 원나라 병사들이 설신이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다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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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조카에게 몽고에 들어가서 독로화가 되라고 하였는데 독로화는 중국말로 인질이란 뜻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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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5년이 되자 생활물품이 부족하였다.<br> 심왕의 무리들이 그것을 알고 나라 창고를 닫고 물품을 수송해 가는 것을 막았다.<br> 윤선좌가 찰관 조관에게 격문을 보내어 물품을 주관하는 자를 독책하게 하자, 물품의 수송이 이루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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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18년(1231) 겨울에 몽고군이 경성 문 밖에 주둔했는데 왕이 종실 정을 보내어 강화를 청하니 몽고 장군이 동락을 주었다.<br> 정이 권유에 따라 능히 먹고 마시니 몽고 장군이 크게 기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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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지정 연간에 설손 단주를 지키다가 적에게 성이 함락되면서 창에 맞고 빠져나와 동쪽으로 달아났다.<br> 공민왕은 그가 종유하였기 때문에 예를 갖추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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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순제가 덕흥군을 세워 왕으로 삼고 병사 만 명을 갖추어 보내니, 공민왕이 우리 태조에게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br> 적이 수주의 달천에 주둔했는데 우리 태조의 말이 진창에 들어가 빠져 위태로움이 심했으나 말이 훌쩍 뛰어 나오니 무리들이 경이롭게 여겼다.<br> 드디어 형세를 합하여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br> 우리 태조가 또 해주의 동정에서 왜적을 칠 때 전투가 마침 한창이었는데 한 자 남짓한 진창을 만났는데 태조의 말은 한 번에 뛰어서 지나갔으나 따르는 자들은 모두 건널 수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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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에 몽고병이 경성의 사문(四門) 밖에 주둔하니 왕이 사자를 시켜 몽고 장수에게 말다래와 말 가슴걸이 등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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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br> 돌아가기를 청하자 어떤 사람이 말렸다.<br> 숙이 말하기를 "충신과 효자는 이름이 비록 다르지만 실상은 서로 같은 것입니다.<br> 하물며 임금을 섬길 수 있는 날은 많이 남아 있고 어버이를 섬길 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있지 않음에랴? 만일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br> 드디어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만나보고는 기뻐서 병이 바로 나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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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서 제주에 목장을 설치하였다.<br> 목장의 오랑캐들이 발호하여 관리를 살해하기도 하였다.<br> 공민왕이 도통사 최영을 보내어 토벌하여 없애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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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몽고병이 북방 변경을 침략하였다.<br> 지병마사 홍희는 여색을 좋아하고 군무를 돌보지 않았다.<br> 이에 왕이 김지대가 재략이 있다고 생각하여 홍희를 대신하여 가서 지키게 하였다.<br> 김지대가 백성들을 은혜와 신의로서 어루만지니, 서북의 40여 성이 이에 힘입어 편안하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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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낭장이 되어 몽고병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몽고병이 철주성 아래 이르렀을 때 문대로 하여금 고을 사람들에게 '진짜 몽고병이 왔으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라고 소리치게 하였다.<br> 문대가 소리치기를 "가짜 몽고병이다.<br> 항복하지 말라!"라고 하였다.<br> 몽고 사람들이 목을 베려다가 다시 소리치게 하였더니 다시 전처럼 하였다.<br> 마침내 그의 목을 베고 얼마 있지 않아서 성이 함락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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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원종이 원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장차 옛 수도를 회복하려 할 때 임유무가 병사를 거느리고 대항했는데 홍문계가 상장군 송송례와 모의하여 공격했다.<br> 임유무가 "사자가 누구인가?"라고 묻자, "홍 중승입니다"라고 하니, 임유무는 간담이 떨어져 마침내 패배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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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 몽고가 죽주를 침공하였다.<br> 송문주는 몽고 군사가 성을 공격하는 전술을 쓸 줄을 미리 짐작하고서 그 계획을 먼저 헤아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br> 이에 말하기를 "오늘 적은 반드시 어떤 무기를 설치할 것이니 마땅히 어떤 무기를 준비하여 대처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br> 사졸들이 모두 그를 '신명'이라고 일컬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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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죽산으로 상서 인석의 아들이다.<br> 고종 때 서북면병마사가 되었을 때 몽고병이 귀주를 침략하였다.<br> 박서가 기미를 타서 임기응변으로 잘 대처하여 견고하게 지키니 몽고병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br> 어떤 몽고 장군 한 명은 성 아래에서 성루와 무기들을 둘러보고는 탄복하면서 가 버렸다.<br> 뒤에 관직이 평장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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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혁지, 본관은 춘주. 처음 이름 동보를 고쳤다.<br> 고려 고종 때 몽고 군대가 고을을 함락했을 때 부모 시체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부모와 모양이 비슷한 사람의 시체 삼백 구를 다 거두어 묻었다.<br>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br>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할 때 군기에 대한 조처는 모두 박항이 내놓은 것이다.<br> 일찍이 인사(人事)를 담당했을 때 발탁하는 사람이 모두 자기에게 은혜가 있는 옛날 사람들이었다.<br>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보잘 것 없는 인물로 여겼다.<br> 시호는 문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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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하여 대사동으로 옮겨가고자 했는데, 하천조가 말하기를 "이 골짜기는 백호가 입을 벌린 지세이니 지금 몽고병이 가득한데 임금과 신하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감이 옳겠습니까?"라고 하니, 이에 그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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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45년에 원나라 병사가 내침했는데, 용진 사람 조휘 등이 병마사를 죽이고 화주 이북 땅으로써 반란하여 원나라에 붙으니,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두고 조휘를 총관으로 삼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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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크게 이르니 여러 도의 산성에 모두 방호별감을 두어 수비하게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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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어머니가 몽고병에게 잡혀가니, 당시에 김천의 나이가 15세였는데, 밤낮 울부짖으며 상복을 입고 상기를 마쳤다.<br> 14년 후에 어머니 서신을 가지고 와서 전하는 사람이 있어 어머니가 요양 북쪽 고을에 생존하고 있음을 알고 백금 50냥으로써 속환했다.<br> 그 아버지 종연도 또한 탈이 없어 김천이 종신토록 효를 다하니,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표창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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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천 사람이다.<br> 고종 때 몽고 적병이 경성을 포위하자 왕이 강화도로 피하였다.<br> 변려가 붙잡혀 수로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br> 포락의 고문을 받고도 '수로가 매우 험하다'고만 대답하였다.<br> 적들이 그의 말을 믿어 배를 붙태우고 물러갔다.<br> 왕이 상장군을 제수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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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 때 탐라가 원나라로부터 다시 고려에 속하게 되자, 왕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홍정, 자의, 보개 등의 물건을 하사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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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13년에 원나라 황제가 조칙을 반포하여 지원보초와 중통보초를 통행하여 쓰게 하되, 지원보초 1관의 가치를 중통보초 5관의 가치에 해당하게 하여 자모로 삼아 사용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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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황제가 고려 충선왕에게 명하여 보타굴에 경향사로 가게 했는데 이제현이 수행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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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간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있었다.<br> 왕이 토번으로 유배를 가서 세상을 마치자 이릉간이 '상여를 받들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울고불고 하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애쓰며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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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하루는 옷을 갈아입다가 땅에 엎어져 이가 부러졌다.<br>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충선왕을 참소하고 받들어 모시는 데는 힘을 쓰지 않았다.<br> 그리하여 부자 간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더 벌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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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이 성절을 축하하러 원나라에 갔다.<br> 때마침 황제가 북방 변경에 행차하고 없었는데, 원나라 관리들이 모든 나라의 사신들은 일체 서울에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br> 그러나 김태현이 홀로 말하기를 "해마다 조공을 하면서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이번에 만약 진하하지 못하면 죄를 지을지언정 감히 우리 임금의 명령을 폐할 수 없다.<br>"하고는 드디어 북쪽으로 가서 행재소에 도착하니, 황제가 그의 충성스러운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크게 칭찬하며 상을 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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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은혜가 멀리까지 비치니, 북쪽 몽고의 군대가 눈녹듯 쓰러진다.<br> 북몽은 몽고이다.<br> 고종 때 몽고의 병사가 해마다 침범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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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때에 원나라에서 고려에 일본에 갈 서장관을 불러오도록 하니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피하였다.<br> 곽린은 충직하고 문장을 잘 하였는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섬김에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신하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br> 재상이 그 말을 듣고 마침내 서장으로 충당을 하였다.<br> 장인 최역이 말리려고 하였으나, 곽린은 분연히 장인의 말을 돌아보지도 않고 가서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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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든 뒤로 부부의 도리를 싫어하였다.<br> 황제가 급히 왕을 불러 입조케 하였다.<br> 안유에게 묻기를 "너희 왕이 어찌 해서 공주를 가까이하지 않는가?" 하였다.<br> 안유가 대답하기를 "규문의 일은 바깥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거늘 이로써 질문하신다면 어찌 답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br> 황제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대체를 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어찌 먼 지방의 사람으로 보겠는가?"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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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가 장흥부에 부임하니 그때 합골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였으므로 국가에서 각 고을로 하여금 백성들이 들에 나가 경작하는 것을 금지시키도록 하였다.<br> 김이가 말하기를 "원나라 군사가 이 대수롭지 않은 오랑캐를 도마 위의 고기처럼 제압할 것인데, 어찌 우리나라 변방 고을에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 또 먹는 것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밭갈고 씨 뿌리는 데는 시기가 있는 것이다.<br> 국가의 명령을 따라서 경작하지 않는다면 굶어죽는 것은 백성이다.<br> 명령을 따르지 않고 경작하면 죄를 받는 사람은 나다"라고 하고는 백성들로 하여금 들에 나가 경작하도록 했다.<br> 오랑캐들은 과연 섬멸되었는데 다른 고을에서는 모두 수확을 하지 못했지만 오직 장흥부에만 크게 풍년이 들어 원근의 고을에서 여기에 힘을 입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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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의 왕비인 원나라 공주가 궁실을 지으려고 태사 오윤부에게 명하여 날을 잡게 하였다.<br> 윤부가 이르기를 "임금에게 불리하므로 신은 감히 날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br> 공주와 왕이 노하여 곤장을 쳤다.<br> 윤부가 이르기를 "날을 잡는 것은 흉함을 피하고 길한 쪽으로 가려고 함입니다.<br> 위협하여 날을 잡는다면 날을 잡이 않음만 못 합니다.<br>신은 차라리 죽더라도 감히 아부하지는 못 하겠습니다"하고 끝내 날을 잡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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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이 태자 때에 원나라에 인질로 가있었다.<br> 연경에서부터 길이 동관을 지났다.<br> 그곳 수령이 맞이 하여 화청궁에 이르러 온천에서 목욕하게 하였다.<br> 원종이 사양하면서 "이곳은 당의 명황제가 일찍이 목욕한 곳이니 비록 다른 시대의 사람이라 한들 어찌 감히 더럽힐 수 있으리오?"하였다.<br> 듣는 사람들이 원종이 예를 알고 있음에 감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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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손이 몽고 병사와 싸울 때에 호상에 걸터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다.<br> 포탄이 머리 위를 날아가자 좌우에서 상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얼굴빛도 태연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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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손이 몽고 군사와 분전할 때, '팔에 화살을 맞아 피가 뚝뚝 떨어졌으나', 그래도 손으로 북을 울리기를 그치지 않으니 몽고 군사들이 물러났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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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언기가 일찍이 네 차례나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강화함으로써 변방이 조금 안정되었다.<br> 고종이 다시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려 하자 마침 병이 들었다.<br>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송씨가 살아 있음은 국가의 복이요, 송씨가 죽음은 국가의 근심이다"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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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자주 부사 최춘명에게 유시하여 몽고에 항복하라고 하였다.<br> 그러나 최춘명이 말을 듣지 않자 최우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목을 베려 하였다.<br> 최춘명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말과 얼굴색이 전혀 변함이 없었다.<br> 몽고 사람도 풀어주기를 요청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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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고자 하여 이가노를 보내어 왕의 인장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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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에 순행하며 감시하였다.<br> 이로 인하여 이 무리들이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는데 뒤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br> 또 고려 사람으로 몽고에 잡혀갔다가 도망하여 돌아온 자들을 한 부대로 만들어 신의군이라 하니 앞의 좌, 우별초와 합쳐 삼별초라 하였다.<br> 이로부터 권신들이 정권을 잡음에 이들을 측근 호위군으로 삼으면서 혹 그들에게 사적인 은혜를 베풀어주니, 그들이 경쟁적으로 앞장서서 힘을 다 바쳤다.<br> 임유무가 죽자, 그들이 스스로 이상한 분위기에 회의를 느끼고는 사(士)와 서민들을 약탈하였다.<br> 그리고는 배를 타고 남쪽으로 진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곳에 관부를 두었다.<br> 뒤에 김방경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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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이고 친분으로는 사위와 장인이다.<br> 고려가 원종 충렬왕 이후로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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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장수 조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주 지역에 웅거하였다.<br> 우리 태조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끝내 환난을 일으킬 것이니,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서, 그를 쳤다.<br>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쇠촉을 박은 화살을 쓰지 않고 박두를 가지고 쏘아 맞혔다.<br> 조무가 수십 걸음 밖에서 말에서 내려 절을 하여 그를 생포하였다.<br> 조무가 마음으로 복종하여 끝내 심복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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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말년에 몽고의 장수가 강도의 내외 성을 무너뜨리자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달아날 계획을 세워 다투어 배를 사니, 배의 날로 가격이 날로 올랐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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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선왕을 폐하고자 하니 김이가 충선왕이 수봉한 조책을 가져다 몰래 허리에 차고 다른 종이를 빈 선갑 안에 넣어 예전처럼 봉하였다.<br> 며칠 있다가 과연 선갑을 도둑을 맞아 충선왕이 크게 놀라니 김이가 몰래 말하기를 "신이 뜻하지 않은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 일찍이 가져다 보관하였습니다"하고 차고 있던 책명을 꺼내 보여주었다.<br> 그 의논이 마침내 가라앉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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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원나라 말기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원나라 황제가 이제현에게 명하여 '정승의 일을 겸임하여' 정동성의 일을 임시로 처리하도록 했다.<br> 그때 나라가 텅 비어 있었기에 이 조치가 적절했고 나라 사람들이 여기 힘입어 안정될 수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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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병사가 침략하여 강도성을 훼손하니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빠른 우레와 같아 거리의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다 울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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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쳐들어 와 죽주성을 공략하였다.<br> 대포로 성을 공격하여 사방의 성문이 곧바로 무너졌다.<br> 성 안에서도 대포로 맞아 싸우니, 몽고병이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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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다가 충렬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별똥별이 흘러내리듯 빨리 걸어' 10여 일 만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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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포로로 잡아 간 사람이 남녀 20여 만 명이나 되었고 죽인 자는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br> 이에 왕이 고정매를 소복별감에 임명하였는데 고정매가 주색에 탐닉하고 백성을 갈취하여 사리를 취하니 백성들이 도리어 더 고통을 받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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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군이 죽주를 포위하고 관솔불과 볏짚을 갖추어 불을 놓아 공격하였는데 방호별감 송문주가 그들을 물리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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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몽고에 네 번 사신 사거 강화조약을 맺으므로 변경지역이 다소 안정되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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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창고를 봉하고 국새를 거두었다.<br> 왕이 강화로 물러나서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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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손이 몸고병을 방어함에 기미를 따라 대비하였고, 변화에 대응하기를 귀신과 같이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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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몽고병의 핍박을 받고 강화도에 천도하였는데, 강화도를 수내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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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의 부모는 몽고의 병란에 죽었다.<br> 이에 박항은 시신 중에 부모의 모습과 비슷한 것을 거두어 묻어준 것이 300명이나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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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손이 몽고와 싸움에 적의 대포가 자기 머리 위를 지나가서 자기 뒤에 있는 위졸을 때려 몸과 머리가 박살이 났다.<br> 그러나 김경손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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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이 원나라 성종황제를 숙위하였다.<br> 황제가 죽었을 때 충선왕과 승상 불화가 책략을 평정하고 무종을 맞아 들였다.<br> 그 공으로 심양왕에 봉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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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를 살펴보니 원나라 신호위대장군 장서가 고려 말에 피난하여 동쪽으로 와서 아산에 본관을 두고 드디어 토성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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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영녕공 준을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면서 '애자'라고 일컬었다.<br> 황제가 말하기를 "너는 왕자가 아닌데 아들이라고 일컬을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준이 말하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자라나 왕을 아버지로 여기로 왕비를 어머니로 알았지 친아들이 아닌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하였다.<br> 황제가 사신 최린에게 "애자와 친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애자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로 삼는 것입니다.<br> 만일 자기 소생의 아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사랑한다는 말을 붙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br> 황제가 예전의 표를 확인해보니 모두 애자라고 일컬었다.<br> 그래서 불문에 부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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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때 몽고 사신이 와서 고려가 육지로 나오지 않은 것을 질책하고 성을 내면서 돌아가고자 하였다.<br> 이에 왕이 앵무잔을 선물로 주어 화해할 수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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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의 누이가 뽑혀 원나라 정승에게 시집가게 되었다.<br> 조반도 누이를 따라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누이가 시집한 집의 여동이 재주와 여색을 겸비한 것을 보고 반해 정이 매우 도타웠다.<br> 명나라 군사가 원나라로 쳐들어가자 원나라 황제가 북쪽으로 피해 갔다.<br> 공이 그 여자를 버리고 귀국하자, 여자가 뒤쫓아 왔는데 두 발이 부르트고 찢어졌다.<br> 강가에 있는 높은 누각에 이르러 여자가 누각 밑의 못으로 몸을 던져 순식간에 죽고 말았다.<br> 공이 더욱 그녀의 절개에 감복하여 항상 비통해 마지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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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8년에 몽고군이 침략해 왔다.<br> 구주의 병마사 박서가 힘을 다하여 그들을 막았다.<br> 힘이 다하였으나 오히려 항복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br> 그 공으로 고을을 승격하여 정원대도호부로 삼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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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선왕이 오래도록 원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정을 쏟은 여인이 있었다.<br>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왕이 연꽃 한 송이를 꺾어서 주고 이로써 작별하였다.<br> 하루 저녁에 왕이 그리운 정을 이기지 못하여 이제현으로 하여금 가서 보게 했는데 여자가 누대 안에서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이미 여러 날이었다.<br> 여인이 억지로 붓을 잡고 절구 한 수를 쓰기를, "보내주신 연꽃 조각, 처음에는 매우 붉었네. 가지를 떠난 지 지금 며칠인가, 초췌함이 나와 같구려!" 하였다.<br> 이제현이 돌아와 아뢰기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고 하니 왕이 매우 원망하여 땅에 침을 뱉었다.<br> 다음해 이제현이 뜰 아래 엎드려 그 시를 올리고 그때의 일을 말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경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한 것이니 참으로 충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이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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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몽고의 병사가 춘주를 함락하였다.<br> 그 고을의 아전인 박항이 부모의 시신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모습이 비슷한 것은 모두 거두어 묻어주었는데 무려 3백 명이나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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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이 죽었을 때 세자가 원나라에 있어 여러 신하들이 멀리서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충렬왕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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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병이 귀주로 처들어와 구름 사다리로 성을 공격하였다.<br> 성을 지키던 장수 박서가 대우포를 적을 맞아 싸워 물리쳤다.<br> 대우포는 큰 칼날을 댄 거대한 병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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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 때 원나라 사신들이 끊임없이 오가면서 기세를 부리고 포악하였다.<br> 이에 조련이 말을 부드럽게 하여 대하니 사신들이 문득 성냄을 풀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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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제신은 오랫동안 원나라에 있었다.<br> 원나라 황제에게 청하기를 "신은 어미를 오래도록 뵙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그의 말에 감격하여 향금강산을 내리라 명하고, 금으로 쓴 원패를 주었다.<br> 그것은 그의 떠남을 빛나게 하고, 그의 돌아옴을 빠르게 하려는 것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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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조회하러 갔는데,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국왕의 인장을 빼앗았다.<br> 그때 김태현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는데, 충숙왕이 김태현을 가두었다.<br> 풀려난 뒤 김태현이 가족을 데리고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였으니, 혐의를 멀리 하기 위함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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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43년 몽고 군대가 중원주성을 무찌르고 또 산성을 공격하였다.<br> 관리와 노약자들은 막지 못하게 되자 '월악산의 신사'로 올라갔다.<br> 문득 구름과 안개와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번갈아 일어났다.<br> 몽고 군사들은 신의 도움이 있다고 생각하여 공격하지 않고 물러났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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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듣건대 여러 기관의 관료들이 직무에 태만하다 하니 매월 말에 그들의 잘잘못과 근면함 그리고 태만한 점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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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장군 조무가 조선 태조에게 잡혀서 마침내 시양이 되어 종신토록 복역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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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 가자 시종하던 백관들이 모두 달아나 숨었는데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다가 적의 창에 맞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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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게 시집갔다.<br> 고려 고종 때 호수가 맹주의 수령이 되었었는데, 몽고의 군사가 처들어와 함락되는 바람에 호수도 피해를 입었다.<br> 유씨는 적에게 몸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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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 있다가 함거를 타고 게양에 유배되었다.<br> 수레가 너무 빨리 달려서 그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므로 게양에 이르기도 전에 길에서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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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천자가 충선왕을 토번에 유배시켰는데 그곳은 수도에서 만오천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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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에 몽고 병사가 침략하니 여러 성 사람들이 해도 가운데로 들어갔다.<br> 섬 안에는 샘과 우물이 없어서 사람들은 항상 육지로 가서 물을 길었는데 왕왕 몽고 병사에게 잡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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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때 유청신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글을 올려 고려 본국에 행성을 세워 원의 내지와 같이하기를 청하였는데, 원나라 사인 왕관이 승상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불가하다고 말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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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병사가 춘주성을 포위하여 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 놓고 여러 날 공격하니 성 안에 샘과 우물이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찔러 피를 마셔서 군졸들의 곤궁함이 심했다.<br> 수장 조효립이 처와 함께 불에 뛰어 들어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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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가 동녕의 전쟁에서 원나라 장수 처명을 붙잡았는데 죽이지 않았다.<br> 처명이 은혜에 감사하여 화살자국을 어루만질 때마다 목이 메이고 눈물을 흘렸으며 곁에 따라다니면서 모셨다.<br> 운봉에서 전쟁을 할 때는 처명이 힘껏 싸워 공을 세우니 당시 사람들이 의리 있다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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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몽고 병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정주를 침략해 왔다.<br> 김경손이 관아에 있는 결사대 12명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니 몽고병이 물러나 달아났다.<br> 그 뒤에 다시 침략해옴에 조짐에 따라 대비하여 변화에 대응하기를 귀신과 같이 하였다.<br> 이에 적들이 "적은 병사로 많은 병사를 대적하는 것은 하늘이 도운 바이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br>" 하고 퇴각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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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 사람이다.<br> 철주 판관이 되었을 때 몽고병이 성을 공격함이 다급하였다.<br>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자 이희적이 성안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불을 질러 죽였으며 또 장정들을 이끌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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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때 몽고 군사들이 귀주로 들어와 노략질하였다.<br> 장작에 사람 기름을 적셔서 두텁게 쌓아 불을 지르며 성을 공격하였다.<br> 장군 박서가 물로 끄려 하였으나 불길이 더욱더 타올랐다.<br> 이에 진흙을 물에 타서 뿌리니 비로소 꺼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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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병사가 귀주에 들어와 도적질을 하는데 사람 기름으로 땔나무를 적셔서 불을 놓아 태우니 사람들이 그 불을 끌 수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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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23년 몽고가 쳐들어와 죽주성을 침략할 때 사람의 기름을 준비해 짚에 부어 불을 지펴서 공격하였다.<br> 당시 송문주가 죽주성의 방호별감으로 있었는데 성안의 사졸들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자 몽고병은 여러 방면으로 공략하였으나 성을 하락시키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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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김태현에게 행성의 직무를 대행하라고 하였다.<br> 이에 김태현은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금상산에 유람을 가버렸는데, 원나라에서 역마를 보내 불러서 다시 행성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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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황제는 충렬왕에게 조서를 내려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하고 충렬왕을 일수왕에 봉하였다.<br> 세자는 충선왕을 말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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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이 조카 왕고를 궁중에서 양육하여 자식처럼 돌보았으며 드디어 세자로 세워 심왕의 자리를 전해주었다.<br> 이에 왕고는 스스로 태위왕이라 칭하였고 원나라 황제는 그를 심왕에 임명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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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이후 4분의 임금은 연이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었기에, 정치와 법령이 모두 원나라에서 나오게 되었다.<br> 나라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원나라 왕으로 연결되어 양국을 왕래하며 시기하고 참소하였다.<br> 그리하여 자식이 왕위에 오르면 아버지가 폐하게 되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면 자식이 폐하게 되었다.<br> 새로운 임금 세우기를 도모하는 사람은 옛 임금을 욕하였으며 본국을 배반한 자는 어떤 사건을 만들기를 좋아하여 다시는 군신과 부자의 사이의 도리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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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이 서북면병마판관이 되었다.<br> 때마침 몽고가 여러 성을 침공함에 공이 보위도로 들어갔다.<br> 그 섬에는 우물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육지에 나가 물을 길러 오다가 왕왕 포로가 되었다.<br> 이에 공이 제방을 쌓아 조수를 막고, 빗물을 모아서 큰 못을 만들었다.<br> 그리하여 여름에는 물을 길렀고 겨울에는 얼음을 뚫어 물을 공급하였다.<br> 이로부터 육지에 물을 긷기 위해 갔다가 포로가 되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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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이 몽고병의 침략을 당하여 강화로 도읍을 피했는데, 원나라 병사가 추격하여 해안에 이르러 말하기를 "갑옷을 쌓으면 건널 수 있겠다"고 하니, 후에 그 나루를 이름하여 갑곶이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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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병사가 자주를 매우 급박하게 포위하였는데 부사 최춘명은 굳게 지키면서 항복하지 않았다.<br> 나라에서 화친을 한 뒤에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타일렀는데도 최춘명은 문을 닫고 상대하지 않았다.<br> 최우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목을 베려 하였다.<br> 몽고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는 비록 명을 거스른 것이지만 당신네 나라로 보면 충신인데 성을 온전히 지켜낸 충신을 죽이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며 풀어주기를 요청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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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이 북쪽으로 원나라 황제의 행재소에 이르니 황제가 가상하게 여겨 황제의 음식을 하사하여 총애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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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서 충정왕을 폐위키시고 국새를 몰수해서 가버렸다.<br> 왕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br> 판삼사사 이제현이 정승을 겸하여 정동성의 일을 임시로 처리하였는데, '조치하는 바가 알맞아'. 사람들이 그것에 힘입어 편안할 수가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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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 사람이다.<br> 일찍이 문학으로서 춘주에 있을 때 몽고 병사가 겹으로 포위하였다.<br> 성 안의 우물과 샘이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찔러서 피를 마시니 사졸의 곤궁함이 심했다.<br> 효립은 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처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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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혔다.<br> 언양군 김륜이 당시 집에 있으면서 이 소식을 듣고 문득 일어나 여러 재상과 함께 글을 올려 사정하고사 하여 이제현으로 하여금 초안을 잡게 하였다.<br> 그러나 나라의 원로가 많이 서명하지 않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br> 윤이 종신토록 울분이 쌓여 언어와 안색에까지 나타났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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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때에 원나라 사신이 왔다.<br> 윤석이 술잔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 왕의 앞에 서 있었다.<br> 원나라 사신이 황제의 뜻을 전하였는데 두 왕자를 입시케 하라는 것이었다.<br> 석이 마음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아우를 시종하리라' 하였다.<br> 집으로 돌아와 그 아버지 만비에게 말하였다.<br> 만비가 말하기를 "시종하는 것은 후일을 위한 계책이다.<br> 형이 있는데 아우가 먼저 나라를 소유하겠는가?" 하였다.<br> 석이 말하기는 "제가 아우를 보면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형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br> 이것이 제가 아우를 시종하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하였다.<br> 그리고는 드디어 아우를 시종하였다.<br> 형이 과연 일찍 죽었다.<br> 아우가 바로 충숙왕이다.<br> 충숙왕이 즉위하자 윤석은 형의 폐행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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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1년 몽고병이 우리나라의 고을을 크게 노략질하여 포로가 된 남녀가 2만 6천 8백여 명이었고, 죽은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br> 그들이 스치고 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병의 난리가 이것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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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때 몽고가 해마다 침략하여 왔으므로 왕이 김수강을 몽고에 보내어 병사를 파할 것을 간청하였다.<br> 김수강이 몽고 황제의 물음에 상세하고도 정성스럽게 대답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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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자 안축이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는 것은 신하의 치욕이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라 하고는 이에 원나라에 글을 올려 임금의 무죄를 소송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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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용이 원나라에 갔을 때 원나라 정승이 우리나라의 호구수를 물었다.<br> 이장용이 '손으로 격자창을 가리키면서 그 숫자를 묻자' 원나라 승상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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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사신이 충혜왕을 잡아서 돌아갔다.<br> 김륜은 그때 집에 있었는데 '원나라 조정에 아뢰어 빌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자 권한공이 막았다.<br> 김륜이 엄한 목소리로 "신하의 임금에 대한 관계는 자식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와 같소. 차마 구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니, 드디어 글을 올리기로 결정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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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때 몽고 병사가 국경을 억압하며 자주 충하고 꾸짖었다.<br> 이규보가 오랬동안 양제에 재직하면서 글을 짖는 것을 관장하였는데, 이에 진정표를 지어 올렸다.<br> 몽고 황제가 그것을 보고 감동하고 깨닫는 점이 있어 드디어 병사를 철수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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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이 공주와 함께 오랑캐 옷을 입고 원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백관들이 예복을 입고 가기를 청하였다.<br> 송분이 윤수 등을 사주하여 회초리를 들고 말을 달리며 예복을 입은 자들을 때려서 쫓아내니 시종하는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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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에서 왕을 불러들여 조회하게 하였다.<br> 고려 고종이 족자를 왕자라 일컫고 그를 보내었다.<br> 들어가서 인질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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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병사들이 대거 침략하여 노략질하자 최이는 고종을 협박하여 수도를 강화도에 옮기려고 하였다.<br> 이에 유승단이 말하기를 "도성을 버리며 또 종묘를 내던지고서 바다 섬에 도망가 숨어 있으면서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은 국가를 위한 장계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지만, 최이는 이 건의를 들어주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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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때에 궁인 백야단이 임금의 총애를 한창 많이 받아 중앙과 외방에서 횡포한 직을 제멋대로 하였다.<br> 세자가 원나라에서 공주의 상에 달려와 왕에게 아뢰기를 "공주가 질환에 걸리게 된 것은 안으로 총애한 것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br> 국문을 하여 모두 참수하십시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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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숙왕의 종신 백응구가 도망하여 고려로 돌아오니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돌려보내라고 칙명을 내렸다.<br> 왕이 받들어 시행하지 않으니, 심양왕 고가 충숙왕이 황제의 칙명을 찢어버렸다고 참소하자 황제가 힐책하여 다시 왕의 인장을 빼았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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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수가 원나라에 들어가 덕흥의 난리에 동조하지 않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로 돌아오니, 천하 사람들에게 그의 충의가 알려졌다.<br> 그가 연경의 문을 나와서 하인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 다시 이와 같은 것이 있겠는가?"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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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용이 원나라에 가니 원나라 승상이 "고려국의 주군의 호구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다.<br> 이장용이 "모릅니다"라 대답하니, 승상이 "그대는 나라의 재상이면서 어찌 그것을 모른단 말입니까?"라 하였다.<br> 이장용이 창문살을 가리키며 "승상은 저 창문살이 몇 개라고 생각합니까?" 하니 승상이 "모른다"고 하였다.<br> 이장용이 "저의 나라의 주군의 호구 숫자에 대하여는 담당 관원이 따로 있으니 비록 재상이라고 한들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승상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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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득유와 노진의가 김방경을 무고하여 죄를 주려 하였다.<br> 원나라 장수 홍다구가 황제에게 아뢰어 국문하는데 매우 참혹하였다.<br> 황제가 조서를 내려 모두 수도로 압송하여 대질 신문하여 분변하게 하였다.<br> 위득유는 중도에서 혀가 썩어 죽었고 노진의도 수도에 이르러 역시 혀가 썩어 죽었다.<br> 사람들이 하늘이 주벌한 것이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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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군대가 귀주를 공격할 때 대포로서 성곽을 파괴하자 박서가 무너지는 대로 보수하였는데 '쇠 밧줄'로 감으니 몽고 군대가 다시는 공격하지 못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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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8년 봄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 푸른색의 지렁이가 궁문에서 밖으로 판교에 이르기까지 길에 가득하였다.<br>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피하였다.<br> 15년 봄에 또 궁문에서부터 서문에 이르기까지 길에 푸른색 지렁이가 있었다.<br> 길이가 세 치쯤 되는데, 비를 따라 많이 내려왔다.<br> 3년도 되지 않아 몽고의 군사들이 크게 쳐들어왔다.<br> 왕이 강화로 피하여 도읍을 옮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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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군사들이 서해도 산성을 공격하였다.<br> 성은 험하여 겨우 사람과 말이 통행할 정도였는데 몽고 군사들이 불화살을 성 안으로 쏘니 초막에 모두 불길이 번져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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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재지며 본관은 완선이다.<br> 나이가 차서 벼슬에서 물러난 득평의 아들이다.<br>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br> 아버지의 풍모가 있어서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았다.<br> 그래서 세인들의 추중을 받았다.<br> 충혜왕이 붙잡혀서 원나라에 가자 왕이 설치했던 모든 것을 다 고치고 혁파하였다.<br> 도감을 세워서 최재를 판관으로 삼았다.<br> 재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왕의 실덕은 바로 왕의 측근들이 왕의 뜻을 맞추어 준 것이다.<br> 앞에서 맞추어 주었다가 뒤에서 들어올리는 짓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고는 드디어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br> 공민왕 때 완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정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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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강화도에 도읍을 옮기자 원나라 황제가 매양 사신을 보내 육지로 나오는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br> 이에 김수강이 병사를 철수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육지로 나오지 않는 것으로 핑계를 삼았다.<br> 김수장이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사냥꾼이 짐승을 몰아 굴로 들어가게 하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그 앞에 지키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렇게 하면 곤경에 빠진 짐승이 어디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또 얼고 눈보라치는 참담한 겨울에 땅이 얼어붙게 되면 초목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라 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기고 군사를 되돌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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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사신이 와서 대접이 불만족하다 하여 활을 펼치고 몽둥이를 잡고서 쏘기도 하고 치기도 하자, 관반 등이 달려서 문을 나가 곧 자물쇠를 걸었으므로 몽고 사신이 나오지 못했다.<br> 김희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 타이르니 그 노여움이 점차로 풀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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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는데, 광주가 서울과 강화도의 중간에 위치한 큰 진읍인 까닭에 이세화를 자사로 보냈다.<br> 이때 몽고군이 포위하고 온갖 꾀를 써서 공격하였으나, 이세화가 주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여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니 오랑캐가 드디어 포위를 풀고 나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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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숙왕이 참소를 당하여 원나라에 머물렀을 때 왕의 재물이 이미 비었다.<br> 이때에 정척이 궁궐도감이 되어 도감의 옛날 비용 가운데 명분이 없는 것을 가벼이 하여 연경의 충숙왕 처소에 실어보내니 왕이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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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이 이자겸의 난을 만나 궁궐이 연속해서 불타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도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겠다"라 하고 문을 닫아걸고 불길에 몸을 던져 죽었다.<br> 고종 40년에 조효립이 춘주의 원님이 되었다.<br> 몽고의 군사가 성을 포위하자 조효립이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처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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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황제가 충선왕을 형부에 가두고 아울러 김륜을 옥에 가둔 뒤 5부의 관원들을 시켜서 심문하게 하였다.<br> 심왕과 조적 등 구변이 좋은 자가 많았으나 김륜은 편언으로 그들을 꺾었는데 말이 간단 직절하니 5부의 관원들이 모두 용모를 가다듬고 주목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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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병이 귀주를 공격하는데, 풀과 나무를 실은 수레를 몰고 진격하였다.<br> 장군 김경손이 포차로써 끓는 쇠물을 뿌려 수레에 적재한 풀을 태우니, 몽고인들이 퇴각하여 달아났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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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병이 죽주성을 노략질함에 포로써 성을 공격하니, 성문이 문득 무너졌다.<br> 송문주가 방호별감이 되어 또한 포로써 마주 공격하자 몽고병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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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 몽고가 귀주에 침략했는데 대포가 달린 수레로써 여러 갈래로 성을 공격하니, 장군 김경손이 호상에서 전투를 독려했다.<br> 대포가 경손의 머리 위로 지나가 뒤에서 호위하는 병졸을 치니 몸과 머리가 부서졌다.<br> 좌우에서 호상을 옮길 것을 청하니, 경손이 말하기를 "내가 움직이면 사람들 마음이 동요할 것이다.<br>"하고, 정신과 기색이 변함이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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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이 몽고군을 피하여 강화에 들어가 도읍을 정했는데, 변려가 적에게 사로잡혀 수로에 대해 추궁을 당하여 살을 지지는 형을 받았으나 변려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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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규가 붙잡혀서 원나라에 머물기가 8년에 이르렀는데, 하루는 인규의 아들 서가 여러 아우를 거느리고 길가에서 황제를 알현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인규의 환국을 허락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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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위상 납합출이 북쪽 경계에 침략하자 공민왕이 조선조 태조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였다.<br> 태조가 홍원의 달단동에서 적을 만났는데 태조가 먼저 병사를 매복시키고 자기 홀로 말을 타고 돌진하였다.<br> 공방을 거듭하다가 아군이 매복한 곳에 이르자 매복병이 일어나서는 태조와 합세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br> 이에 납합출이 달아나니 동북 지역이 다 평정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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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병이 곧장 갑곶 강 너머까지 쳐들어와 고종이 최린을 보내 몽고의 군영으로 가서 토산물을 바치고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br> 이 때문에 개경에 계엄이 해제되었다.<br> 각 도가 전란을 겪어 주, 군의 세 가지 세금 외에 잡역을 모두 면제하였다.<br> 그리고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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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서 충선왕을 토번으로 유배하였다가 뒤에 방환하였다.<br> 이제현이 왕을 맞이하면서 임조를 지나서 하주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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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경이 일찍이 사록이 되었는데, 원나라 사신이 무례하게 대했다.<br> 정운경이 직책을 버리고 떠나자 원나라 사신이 이마에 피를 흘리며 사과하고 돌아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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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이 대거 침략해 들어왔을 때 최이가 고종을 위협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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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황산을 홍산으로 바꾸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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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몽고병을 피하여 강화도에 도읍을 옮겼고, 또 백성들도 감독하여 해도에 들어와 보전하게 하였다.<br> 송길유는 성격이 잔인하고 혹독하였는데 이때 수로방호별감이 되었다.<br> 그는 백성들이 재산을 아까워하며 고향 떠나기를 어려워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집과 돈 그리고 곡식을 불사르니 이에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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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년 몽고병이 대거 압록강을 건너 왔다.<br> 가주, 박천 두 고을 사이에 불 기운이 하늘에 잇달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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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서해도 산성을 공격했다.<br> 이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오직 사람과 말이 통행할 정도의 길 하나만 있었는데 방호장이 험준한 지형만 믿고 방비하지 않았다.<br> 몽고군이 성에 임하여 대포를 설치하고 또 석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와 불붙은 활로 쏘자 초막에 모두 불이 번져 성이 함락되었는데 죽은 사람이 무려 5천 명 남짓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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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귀주까지 침략했는데, 박서가 병마사가 되어 기미를 타고 변고에 응하여 굳게 수비하니 몽고병이 드디어 물러갔다.<br> 몽고 장군의 나이가 거의 일흔에 이른 자가 성 아래 이르러 기계를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내가 나이 들어 군진에 종사한 이래 이와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br> 성 안의 여러 장수가 후일 반드시 모두 장상이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후에 박서가 과연 평장사가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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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군대가 구주를 공격할 때 누거 및 목상을 만들어 소가죽으로 싸 가지고 그 가운데 무기를 감추어 성 밑까지 밀고 들어와서 지하통로를 팠다.<br> 장군 박서가 성에 구멍을 뚫고 쇳물을 쏟아 부어 누거를 불태웠고 또 썩은 띠풀에 불을 붙여 목상을 태워버리니 몽고 군사들이 놀라 어찌할 줄 모르고 흩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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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이 몽고 군대를 피하여 강화도에 들어가 도읍으로 삼았다.<br> 몽고가 여러 차례 군사를 두입하여 육지로 나오도록 독려하였고, 사람들 보내어 '내외의 성곽을 헐었다.<br>' 성곽 무너지는 소리가 급한 천둥 같았다.<br> 골목의 아낙네나 거리의 아디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br>
  
 
==성호사설==
 
==성호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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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여러 번 우리 국경을 침범하고 공갈과 위협을 일삼아 왔으나 또한 원이 무서워서 우리나라 안에까지는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였고 우리는 항상 구원을 요청하여 그 힘을 입어 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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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9년에 몽고의 난을 당하자 당시의 권신인 최우(崔瑀)가 왕을 협박하여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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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왕이 먼저 승천부(昇天府)에 들어가서 바다 안에 수도를 정하고 그곳에서 28년을 지내더니 몽고가 군대를 풀어서 안팎의 성을 모두 철수하게 하자, 원종(元宗) 원년에 다시 송도로 환도하였으니, 이는 몽고의 압력에 의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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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원 헌종(元憲宗)이 죽고 임금의 자리를 넘겨다보는 사람이 있어서 사정이 매우 위급할 때였으므로 그는 세자를 보고 놀라고 반가워하며, ‘고려는 당 태종이 멀리 가서 토벌하였는데도 굴복하지 않았던 나라인데, 이제 스스로 나에게 돌아와 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br>’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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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또 본국에서 고종(高宗)이 죽자 원 나라에서는 곧 세자를 세워 왕을 삼고 호송하여 본국에 나아가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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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충렬왕(忠烈王)이 원 나라 공주(公主)에게 장가들면서부터는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무슨 말이든지 모두 들어 주었고, 행성(行省)의 여러 사람들도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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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 때에 원 나라에서 만자군(蠻子軍) 1만 4천 명을 보내어 해주(海州)ㆍ염주(鹽州)ㆍ백주(白州)의 3개 주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만자군은 남만 지방의 해귀족(海鬼族)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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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얼마 안 가서 요(遼)와 금(金)이 교대로 일어나고 북원(北元)이 간혹 다시 침략해 들어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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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황제는 그에게 금패(金牌)를 주고 조서를 내리어 그곳을 몽고에 편입시키고 명칭을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선으로 확정하고 탄(坦)을 총관(總管)에 임명하고 군대 3천 명을 서경(西京)에 보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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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前朝)에도 글안(契丹)ㆍ몽고(蒙古)ㆍ홍건적[紅巾]이다.<br> 이 구성ㆍ삭주ㆍ의주ㆍ철산의 길을 따라 쳐들어오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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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몽고(蒙古)로부터 도망해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들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神義軍)이라 이름했으니, 합하여 별초(三別抄)가 된 것이고, 그 후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키자 김방경(金方慶)이 원(元) 나라 군사를 이끌고 3년 만에 비로소 평정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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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9년(1232) 몽고(蒙古)군사가 충주(忠州)를 침략해 왔을 때 성을 지키기로 합의하고, 부사(副使) 우종주(于宗柱)는 양반 별초를, 판관 유홍익(庾洪翼)은 노예군과 잡류 별초(雜流別抄)를 거느리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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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史臣)의 논평에, “팔방상은 나라에 태평성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오락이다.<br> 이제 몽고의 침략을 입고 섬으로 피난하는 실정인데 최이가 망령스레 호화스러운 연회를 열어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그 죄는 죽임을 당함이 마땅하다.<br>”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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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나라 때에는 우리의 국호를 없애고 행성(行省)을 두며, 두발(頭髮)을 깎고 관복(冠服)의 제도를 바꾸려고까지 했는데, 백방으로 애걸하여 겨우 모면하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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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서북면 안무사(西北面安撫使)가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와서 전하기를,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니, 방(榜)에, ‘호부(戶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元) 나라에 소속시키고 개원(開元)에서 관리하는 군인(軍人) 중에 한인(漢人)ㆍ여진(女眞)ㆍ달달(達達)ㆍ고려는 그냥 요동에 소속시켜 둔다고 씌어 있다.<br>” 하므로 드디어 요동을 공격할 계획을 결정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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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辛禑) 14년(1388), 다시 내린 조서에 “탐라(耽羅)란 섬은 원 세조(元世祖)의 목마장(牧馬場)이었는데, 지금 돌아오지 못한 원의 자손이 매우 많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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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이 지나 다시 북원(北元)의 선광(宣光)이라는 연호를 쓰다가 이듬해에 또 명 나라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1368~1398))라는 연호를 쓰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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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高宗) 8년(1221) 최우(崔瑀)가 집정(執政)할 때 몽고(蒙古)에서 사신(使臣)이 왔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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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갈 때 변수(邊帥)를 시켜 전송했는데 사람들은 “화가 여기서 싹트게 될 것이다.<br>” 하였다.<br> 19년(1232)에 이르러 도읍을 강화(江華)로 옮겨 몽고의 침략을 피하려 할 때 유승단(兪升旦)이 도읍 옮기는 것을 잘못이라고 강력히 간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가, 나중에는 도성이 다 헐린 후에 환도하게 되니 그 화가 극도에 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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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忠烈王) 4년(1278)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가 원(元) 나라 의복을 입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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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는 재상(宰相)으로부터 하료(下僚)에 이르기까지 체발(剃髮)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오직 금내(禁內)에 있는 학관(學官)만이 하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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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지(左承旨) 박항(朴恒)이 집사관(執事官)을 불러 효유하자 이에 학생까지 체발하게 되었으니 이는 대개 원 나라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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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忠肅王) 때 이르러서는 원 나라에서 행성(行省)을 세우고 국호를 없애려고까지 했는데 굳이 간청한 결과 면하게 되었고, 또 신우(辛禑)에 이르러서는 호복(胡服)으로 고쳐 입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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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표(禁標) 외의 전지를 빼앗아 농사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잘못으로 첫째이고, 여허(汝許)의 여자는 이미 약혼한 곳이 있었는데 이를 억눌러서 몽고(蒙古)에 시집보내게 하였으니 이것이 잘못으로 둘째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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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명(明) 나라는 돈과 비단으로 몽고와 재새(宰賽)를 꾀어서 만여 명이 넘는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와서 싸우게 했으나 모두 귀영개에게 사로잡히고 죽음을 당했으니 그의 세력은 진실로 강대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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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에 성을 쌓고 궁궐도 지었으나, 원(元) 나라 군사가 두 차례나 출동하여 육지로 나오도록 협박한 다음 백성을 시켜 헐어 버림으로써 성도 궁궐도 자취가 없게 되고 온 나라 백성은 병만 들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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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으로부터 몽고에 이르기까지 무릇 세상이 세 번이나 변했었는데, 앞 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고도 경계하지 않고 뒤에 이르러서 서로 빠지게 되었으니 이상하다 하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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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충선왕(忠宣王)과 충혜왕(忠惠王)은 비록 서로 잇달아 원 나라에 구속까지 되어 스스로 떨칠 수 없었지만, 찬탈하는 화를 면하게 됨은 원 나라를 두렵게 생각한 때문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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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나라 말엽에 미쳐서는 남쪽의 환란이 유래없이 참혹하였으니 태조의 신용(神勇)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힘입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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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에도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이 귀주(龜州)를 지킬 때 몽고(蒙古) 군사가 밀어닥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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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앞서 원종(元宗) 11년(1270)에는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최탄(崔坦)과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西京) 이서를 원 나라에 붙여 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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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경은 지금 평양(平壤)인데 원 나라에서 그들의 내속(內屬)으로 만들고 이름을 고쳐 동녕부(東寧府)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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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충렬왕 4년(1278)에 왕이 원 나라에 가서 조회할 때는 의주(義州)의 북서쪽 모든 고을이 이미 다 동녕부에 소속되었는데 오직 의주(義州)ㆍ정주(靜州)ㆍ인주(獜州) 이 세 고을만이 영접하고 공궤했다고 하였으니, 이때 딴 고을은 모두 우리나라에 속하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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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원 나라 임금이 순응하지 않았다면 평안도(平安道)의 한 지대는 팔짱만 끼고 앉아 잃어버렸을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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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2년(1369)에는 우리 군사가 이미 동녕부(東寧府)를 쳐부수고 국교를 끊는다는 뜻을 보였고, 이듬해에는 오랑캐 이원경(李原景) 등과 원 나라 평장사(平章事) 기새인(奇賽因)ㆍ첩목아(帖木兒) 등이 와서 동녕부를 점거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비 기철(奇轍)을 죽였다 하여 북쪽 변방을 침략하면서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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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9년(1376)에 이르러 북원(北元)이 신우(辛禑)를 책봉(冊封)하여 고려왕(高麗王)으로 삼고 다시 원 나라의 선광(宣光) 연호를 사용하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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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恭愍王)은 원(元) 나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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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元宗)이 세자가 되어 원(元) 나라에 조회차 들어갔다가 2년을 머물러 있었는데 이때에 황제의 아우 홀필렬(忽必烈)이 군사를 사열하러 강남으로 가자, 세자는 먼 길을 달리어 양초(梁楚)에까지 갔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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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차라리 압록강으로 한계선을 삼아 큰 갓과 긴 띠에 붓을 쥐고 책을 읽도록 맡겨 두어, 지혜는 사장(詞章)에 피폐되고, 힘은 과거(科擧)에 다 빠지게 하여 그 직공(職貢)만을 닦아 조회의 열에 서게 하는 것만큼 득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원 나라 황제의 본뜻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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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왕이 오랫동안 원(元) 나라에 머물면서 본국의 엄인(閹人) 15명을 봉하여 군(君)으로 삼은 일이 있었다.<br>
  
 
==송남잡지==
 
==송남잡지==

2021년 8월 15일 (일) 20:00 기준 최신판

침략

내정간섭, 조회, 문화적 억제와 강요, 행패, 유배, 억류, 원나라와의 혼인.

대동운부군옥

고려 때 오랑캐 병사가 이르자 사람들이 굴 속으로 들어가 피하고 방수별감을 뽑아 지키게 하였다.
고종 45년에 몽고병이 가수굴과 양파혈을 침공하였다.
양파혈은 상, 중, 하 세 개가 있는데 몽고병이 산 위로부터 밧줄로 갑사를 굴 입구에 내려보냈으나 창과 도끼가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또 풀에 불을 질러 굴 속에 던지니 지키는 병졸들이 모두 어지럽게 흩어져 항복하였다.
고종 3년에 몽고의 군사가 와서 서경을 노략질하였다.
여러 성들은 위도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있을 때, 김방경이 병마판관이 되었다.
섬 가운데 평탄해서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사방 십여 리 가량 있었으나, 바다의 조수가 밀려들어 개간을 할 수 없었다.
김방경이 바다를 막고 파종을 하게 하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이 되어 곡식이 잘 여물자 그 덕에 살아갈 수 있었다.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침략해옴에 창고가 고갈되었음을 알려왔다.
이에 왕이 주선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또 창감을 소환하였으나 끝내 이르지 않았으므로 왕이 성을 내면서 그의 관직을 빼앗고자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늘 비록 관직을 박탈시킨들 내일 반드시 복직될 것이니 무슨 징계가 되겠는가?"라 하였다.
충선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가서 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
황제가 본국의 악관들에게 『감황은곡』을 연주하게 하였다.
공민왕이 돌아가신 뒤로부터 원나라 황제가 늘 집정을 뽑아 원나라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니, 모두들 두려워서 감히 가지를 못하였다.
이색이 재상이 되어 말하기를, "지금 원나라와 우리나라에 틈이 있는데, 왕은 어려서 갈 수가 없으니, 이것은 늙은 나의 책임이다"라고 하고 자청하여 원나라 조정에 들어갔다.
우리 태조가 그것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강개하도다.
이 늙은이여!"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늙었다고 말렸으나, 이색은 스스로 자신이 죽을 곳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고려 고종이 몽고의 병사가 수도로 침략하는 것을 피해 강화로 들어가 그곳을 '강도'라 불렀다.
염제신은 어려서 원나라에서 자랐는데 황제가 한번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서 명하여 궁궐에서 숙위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문에 오랜 동안 어머니를 뵙지 못하자 황제에게 고하여 어머니를 뵙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금강산에 향을 주라고 명한 뒤에 가서 어머니를 뵙도록 하였다.
본래는 고구려의 혈구군인데 신라 원성왕이 진을 두었다.
고종이 몽고의 병사를 피하여 수도를 옮겼으므로 강도라고 부른다.
본조에 들어와 도호부로 되었는데 사면이 바다로 둘러 있으며 안으로는 마니, 혈구에 의거하고 밖으로는 용진, 백마와 경계하고 있다.
고려 충렬왕 2년에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서 참람하게 일컫는 말을 일체 금하니 이에 충렬왕이 '사(赦)'를 고쳐 '유(有)라고 하였다.
충렬왕 초에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우리나라 위상에 넘치게 사용해 오던 용어를 일절 금지시켰다.
이에 '주(奏)를 고쳐 정(呈)으로 했다.
' 이제현이 원나라에서 가서 왕이 오회에 갈 때 따라갔고 또 여항에서 나그네로 묵기도 하였다.
고려 때 몽고병이 춘주를 침범할 때 목책을 몇 겹이나 세우고 참호를 한 길 남짓 파고서 며칠 동안 공격하니, 수령 조효립이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아내와 함께 불에 뛰어 들어가 죽었다.
안찰사 박천기는 계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자 먼저 성안의 재물과 곡식을 불사르고 나서 목책을 무너뜨리고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참호를 만나 나갈 수 없어 한 사람도 탈출한 자가 없었다.
몽고병이 드디어 그 성의 사람을 모두 죽였다.
원나라 장수가 서경에 주둔하며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오랜 객지 생황에 무료하니 물고기를 잡으려 즐겨야겠다"라고 했다.
김방경이 "어디에서 고기잡이 할까요?" 하니 "대동강을 지나 초도로 들어가리라"고 했는데 김방경은 따르지 않았다.
총랑 기자오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들어가 순제의 두 번째 황후가 되어 황태자를 낳았다.
공민왕이 후모 이씨를 부에 두고 이름을 경항이라고 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침략하니 주현이 시들어 피폐하고 노소가 골짜기에 많이 뒹굴어 아이를 나무에 달아매고 가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다.
고려 고종 42년 여름 몽고병이 쳐들어와 의주, 정주에 주둔하였는데, 군사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
20 여 기마병이 곧장 승천부에 이르러 개경이 계엄에 들어갔다.
이공수가 원나라에 조회하러 가니 황태자가 공을 불러 광한전에 올랐다.
태자가 거문고를 가지고서 타다가 곡조를 잊어버려 이루지 못하자 공이 즉시 꿇어앉아서 말하기를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고, 거문고의 한 두 곡조는 잊어버린들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라 하였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조회를 가서 황제에게 축수를 올렸더니 황제가 「고려가」를 부르도록 명하였다.
왕이 송영 등에게 「쌍연곡」을 부르도록 하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동북면의 옛 지역 가운데 오직 공주만이 가장 편벽되고 멀다.
원나라 말엽에 사람과 연기가 완전히 없어져서 가시밭이 된 지 수십 년이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됨에 미쳐서 고을로 승격하여 경원부가 되었다.
유민들을 끌어 모아서 거진이 되었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원나라 황제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유경이 말하기를 "공주가 임금에게 시집온 이후 나라 사람들이 안도하고 지내게 되었다.
"하였다.
원나라 공주를 고려왕에게 시집보내어 대대로 장인과 사위의 우호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고려 고종 14년 봄, 궁문 밖 큰 길에서 판교까지 지렁이가 나와 혹은 실이 얽힌 것처럼 혹은 산대를 펼친 것처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얼마 뒤에 몽고군이 크게 쳐들어왔다.
고종 때 몽고 사신이 와서 국신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우는 위로하고 타일러 그냥 보내게 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몽고 침략의 재앙은 이때부터 싹텄다"라 하였다.
윤해가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조회갈 때 행장과 공물의 재화를 관장하였는데, 귀국하여서는 쓰고 남은 물건을 모두 국신고에 반납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을 칭찬하였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무도와 경필의 예식을 행하는 것을 금하는 조칙을 내려 그것을 없앴다.
최근 금묘년부터 준동하는 북쪽 오랑캐 사람들. 이것은 고종 신묘년에 몽고 병사가 비로소 침략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이다.
고종 때 몽고가 침략하여 노략질하자, 백돈명이 동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어 백성들을 몰아 성보에 들어가서는 출입을 금지시켰다.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벼를 수확하지 못하였으니 적병이 이르기 전에 교대로 나가서 벼를 베어오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백돈명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고 간언하는 사람을 죽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분노하고 원망하였는데, 적병이 성 아래에 이르자 병사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
본관은 행주로, 총랑 기자오의 막내딸이다.
원나라에 선발되어 들어가 순제의 둘째 황후가 되고 태자를 낳으니 이가 기황후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평장사를 지낸 김태서의 아들이다.
풍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장중하였으며 온화하고 너그럽고 지혜롭고 용감함이 뛰어났다.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고려 고종 때 정주분도장군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강을 건너 정주로 침략하였다.
김경손이 기지를 발휘해 대비하였는데 변란에 대응하는 재주가 귀신같아 적이 포위를 풀고 갔다.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우니 조정이나 재야에서 의지하며 귀중히 여겼다.
최항에게 해를 입자, 사람들이 모두 애통해 하였다.
벼슬이 추밀원부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상산, 호는 난계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에 보임되었다.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뒤에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재차 홍건적을 평정하였다.
고종 때의 사람이다.
성품이 널리 정통하였고 경개하기가 남달랐다.
과거에 합격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서 시어사가 되었다.
그때 몽고가 장수를 보내어 해마다 침략을 해왔는데 왕이 수강을 보내어 더 이상 침략하지 말 것을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벼슬은 중서사인에 이르렀고 끝내 재상에 임명되지 않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본관이 김해다.
공민왕 때 여러 장수와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이 있었다.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책립하였을 때 김유가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있으면서 절개를 지키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돌아오자 공신에 녹훈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찬성사가 되었다.
바다를 건너 대명에 조회하러 가는데 바닷길이 험악하여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고황제가 대리부로 유배보내었다.
2만 8천 리나 떨어진 곳인데 3년 동안 지낸 뒤에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인임이 또 어떤 일로 무함함으로써 순천으로 유배되었는데 도중에 졸하였다.
고려 때 사람이다.
고종 때 충주방호별감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고을을 90일 동안이나 포위하여 군량미가 거의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김윤후가 병사들을 격려하자 모두들 죽을 각오로 싸워 몽고병이 점차 기가 꺾여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 공으로 상장군에 올랐다.
명주의 아전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해장이다.
고종 말기에 몽고군이 쳐들어와 그 어미를 사로잡아 갔다.
그 어미가 죽은 줄로만 알고 최복을 입어 상제를 마쳤다.
나중에 그 어미에 원나라 요양에서 종살이하며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금을 가지고 가서 속량하여 돌아왔다.
나라에서 그 마을에 정려를 내려 '효자지'라 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권한공이 호종을 하면서 관리의 선발을 주관하였다.
왕이 돌아오자 늘 대궐에 출입하니 친척과 친구들에게 함부로 높은 벼슬을 주었다.
악부에 「납민가」가 있다.
원나라 가짜 승상인 납합이 출입하며 우리나라의 동북쪽 변방에 침략하므로 우리 태조가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쫓아 버렸다.
정도전이 이 노래를 지어서 그 공을 칭송하였다.
충혜왕이 복위했을 때 원나라의 백안은 묵은 감정이 있어 조적의 도당과 함께 대질을 하게 되었다.
이조년이 분개하여 이제현에게 "내가 마땅히 글을 올리고 죽어 우리 임금이 죄가 없음을 밝히리라. 그대는 나의 편지를 쓰라"라 하고 밤에 일어나 목욕하고 떠나려 하는데 백안이 실각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골이 송연하여 말하기를 "쓸개가 몸보다 크다"라고 하였다.
몽고 군대는 '대포차'로써 구주를 공격해 오자 장군 박서 역시 '대포차'로서 돌을 날려 공격하여 무수히 죽였다.
몽고 장수가 성루와 무기를 둘러보고는 탄식해서 말하기를 "성 안에 있는 여러 장수들은 다른 날 반드시 다 장수나 정승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니 원나라 황제가 성을 내어 병사를 파견하여 진상을 물었다.
원나라 장군 살리타가 송경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하니 잡단설신이 군중에 있으라고 붙잡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 속담에 다른 나라의 대관이 남쪽 강을 건너는 것은 불길하다는 말이 있습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장군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강을 건너 가다가, 처인성에 이르러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원나라 병사들이 설신이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다고 하였다.
고종이 조카에게 몽고에 들어가서 독로화가 되라고 하였는데 독로화는 중국말로 인질이란 뜻이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5년이 되자 생활물품이 부족하였다.
심왕의 무리들이 그것을 알고 나라 창고를 닫고 물품을 수송해 가는 것을 막았다.
윤선좌가 찰관 조관에게 격문을 보내어 물품을 주관하는 자를 독책하게 하자, 물품의 수송이 이루어졌다.
고려 고종 18년(1231) 겨울에 몽고군이 경성 문 밖에 주둔했는데 왕이 종실 정을 보내어 강화를 청하니 몽고 장군이 동락을 주었다.
정이 권유에 따라 능히 먹고 마시니 몽고 장군이 크게 기뻐했다.
원나라 지정 연간에 설손 단주를 지키다가 적에게 성이 함락되면서 창에 맞고 빠져나와 동쪽으로 달아났다.
공민왕은 그가 종유하였기 때문에 예를 갖추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원나라 순제가 덕흥군을 세워 왕으로 삼고 병사 만 명을 갖추어 보내니, 공민왕이 우리 태조에게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
적이 수주의 달천에 주둔했는데 우리 태조의 말이 진창에 들어가 빠져 위태로움이 심했으나 말이 훌쩍 뛰어 나오니 무리들이 경이롭게 여겼다.
드디어 형세를 합하여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우리 태조가 또 해주의 동정에서 왜적을 칠 때 전투가 마침 한창이었는데 한 자 남짓한 진창을 만났는데 태조의 말은 한 번에 뛰어서 지나갔으나 따르는 자들은 모두 건널 수 없었다.
고려 고종 때에 몽고병이 경성의 사문(四門) 밖에 주둔하니 왕이 사자를 시켜 몽고 장수에게 말다래와 말 가슴걸이 등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유숙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돌아가기를 청하자 어떤 사람이 말렸다.
숙이 말하기를 "충신과 효자는 이름이 비록 다르지만 실상은 서로 같은 것입니다.
하물며 임금을 섬길 수 있는 날은 많이 남아 있고 어버이를 섬길 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있지 않음에랴? 만일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드디어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만나보고는 기뻐서 병이 바로 나았다.
원나라에서 제주에 목장을 설치하였다.
목장의 오랑캐들이 발호하여 관리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공민왕이 도통사 최영을 보내어 토벌하여 없애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고종 때 몽고병이 북방 변경을 침략하였다.
지병마사 홍희는 여색을 좋아하고 군무를 돌보지 않았다.
이에 왕이 김지대가 재략이 있다고 생각하여 홍희를 대신하여 가서 지키게 하였다.
김지대가 백성들을 은혜와 신의로서 어루만지니, 서북의 40여 성이 이에 힘입어 편안하게 되었다.
고종 때 낭장이 되어 몽고병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몽고병이 철주성 아래 이르렀을 때 문대로 하여금 고을 사람들에게 '진짜 몽고병이 왔으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문대가 소리치기를 "가짜 몽고병이다.
항복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몽고 사람들이 목을 베려다가 다시 소리치게 하였더니 다시 전처럼 하였다.
마침내 그의 목을 베고 얼마 있지 않아서 성이 함락되었다.
고려 원종이 원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장차 옛 수도를 회복하려 할 때 임유무가 병사를 거느리고 대항했는데 홍문계가 상장군 송송례와 모의하여 공격했다.
임유무가 "사자가 누구인가?"라고 묻자, "홍 중승입니다"라고 하니, 임유무는 간담이 떨어져 마침내 패배했다.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죽주를 침공하였다.
송문주는 몽고 군사가 성을 공격하는 전술을 쓸 줄을 미리 짐작하고서 그 계획을 먼저 헤아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말하기를 "오늘 적은 반드시 어떤 무기를 설치할 것이니 마땅히 어떤 무기를 준비하여 대처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사졸들이 모두 그를 '신명'이라고 일컬었다.
본관은 죽산으로 상서 인석의 아들이다.
고종 때 서북면병마사가 되었을 때 몽고병이 귀주를 침략하였다.
박서가 기미를 타서 임기응변으로 잘 대처하여 견고하게 지키니 몽고병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어떤 몽고 장군 한 명은 성 아래에서 성루와 무기들을 둘러보고는 탄복하면서 가 버렸다.
뒤에 관직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자는 혁지, 본관은 춘주. 처음 이름 동보를 고쳤다.
고려 고종 때 몽고 군대가 고을을 함락했을 때 부모 시체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부모와 모양이 비슷한 사람의 시체 삼백 구를 다 거두어 묻었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할 때 군기에 대한 조처는 모두 박항이 내놓은 것이다.
일찍이 인사(人事)를 담당했을 때 발탁하는 사람이 모두 자기에게 은혜가 있는 옛날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보잘 것 없는 인물로 여겼다.
시호는 문의다.
고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하여 대사동으로 옮겨가고자 했는데, 하천조가 말하기를 "이 골짜기는 백호가 입을 벌린 지세이니 지금 몽고병이 가득한데 임금과 신하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감이 옳겠습니까?"라고 하니, 이에 그쳤다.
고려 고종 45년에 원나라 병사가 내침했는데, 용진 사람 조휘 등이 병마사를 죽이고 화주 이북 땅으로써 반란하여 원나라에 붙으니,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두고 조휘를 총관으로 삼았다.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크게 이르니 여러 도의 산성에 모두 방호별감을 두어 수비하게 했다.
김천의 어머니가 몽고병에게 잡혀가니, 당시에 김천의 나이가 15세였는데, 밤낮 울부짖으며 상복을 입고 상기를 마쳤다.
14년 후에 어머니 서신을 가지고 와서 전하는 사람이 있어 어머니가 요양 북쪽 고을에 생존하고 있음을 알고 백금 50냥으로써 속환했다.
그 아버지 종연도 또한 탈이 없어 김천이 종신토록 효를 다하니,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표창했다.
태천 사람이다.
고종 때 몽고 적병이 경성을 포위하자 왕이 강화도로 피하였다.
변려가 붙잡혀 수로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포락의 고문을 받고도 '수로가 매우 험하다'고만 대답하였다.
적들이 그의 말을 믿어 배를 붙태우고 물러갔다.
왕이 상장군을 제수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 탐라가 원나라로부터 다시 고려에 속하게 되자, 왕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홍정, 자의, 보개 등의 물건을 하사했다.
충렬왕 13년에 원나라 황제가 조칙을 반포하여 지원보초와 중통보초를 통행하여 쓰게 하되, 지원보초 1관의 가치를 중통보초 5관의 가치에 해당하게 하여 자모로 삼아 사용하게 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고려 충선왕에게 명하여 보타굴에 경향사로 가게 했는데 이제현이 수행했다.
이릉간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있었다.
왕이 토번으로 유배를 가서 세상을 마치자 이릉간이 '상여를 받들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울고불고 하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애쓰며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하루는 옷을 갈아입다가 땅에 엎어져 이가 부러졌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충선왕을 참소하고 받들어 모시는 데는 힘을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자 간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더 벌어졌다.
김태현이 성절을 축하하러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황제가 북방 변경에 행차하고 없었는데, 원나라 관리들이 모든 나라의 사신들은 일체 서울에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태현이 홀로 말하기를 "해마다 조공을 하면서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이번에 만약 진하하지 못하면 죄를 지을지언정 감히 우리 임금의 명령을 폐할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북쪽으로 가서 행재소에 도착하니, 황제가 그의 충성스러운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크게 칭찬하며 상을 주었다.
성스러운 은혜가 멀리까지 비치니, 북쪽 몽고의 군대가 눈녹듯 쓰러진다.
북몽은 몽고이다.
고종 때 몽고의 병사가 해마다 침범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충렬왕 때에 원나라에서 고려에 일본에 갈 서장관을 불러오도록 하니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피하였다.
곽린은 충직하고 문장을 잘 하였는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섬김에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신하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재상이 그 말을 듣고 마침내 서장으로 충당을 하였다.
장인 최역이 말리려고 하였으나, 곽린은 분연히 장인의 말을 돌아보지도 않고 가서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든 뒤로 부부의 도리를 싫어하였다.
황제가 급히 왕을 불러 입조케 하였다.
안유에게 묻기를 "너희 왕이 어찌 해서 공주를 가까이하지 않는가?" 하였다.
안유가 대답하기를 "규문의 일은 바깥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거늘 이로써 질문하신다면 어찌 답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대체를 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어찌 먼 지방의 사람으로 보겠는가?" 하였다.
김이가 장흥부에 부임하니 그때 합골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였으므로 국가에서 각 고을로 하여금 백성들이 들에 나가 경작하는 것을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김이가 말하기를 "원나라 군사가 이 대수롭지 않은 오랑캐를 도마 위의 고기처럼 제압할 것인데, 어찌 우리나라 변방 고을에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 또 먹는 것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밭갈고 씨 뿌리는 데는 시기가 있는 것이다.
국가의 명령을 따라서 경작하지 않는다면 굶어죽는 것은 백성이다.
명령을 따르지 않고 경작하면 죄를 받는 사람은 나다"라고 하고는 백성들로 하여금 들에 나가 경작하도록 했다.
오랑캐들은 과연 섬멸되었는데 다른 고을에서는 모두 수확을 하지 못했지만 오직 장흥부에만 크게 풍년이 들어 원근의 고을에서 여기에 힘을 입었다.
충렬왕의 왕비인 원나라 공주가 궁실을 지으려고 태사 오윤부에게 명하여 날을 잡게 하였다.
윤부가 이르기를 "임금에게 불리하므로 신은 감히 날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공주와 왕이 노하여 곤장을 쳤다.
윤부가 이르기를 "날을 잡는 것은 흉함을 피하고 길한 쪽으로 가려고 함입니다.
위협하여 날을 잡는다면 날을 잡이 않음만 못 합니다.
신은 차라리 죽더라도 감히 아부하지는 못 하겠습니다"하고 끝내 날을 잡지 않았다.
원종이 태자 때에 원나라에 인질로 가있었다.
연경에서부터 길이 동관을 지났다.
그곳 수령이 맞이 하여 화청궁에 이르러 온천에서 목욕하게 하였다.
원종이 사양하면서 "이곳은 당의 명황제가 일찍이 목욕한 곳이니 비록 다른 시대의 사람이라 한들 어찌 감히 더럽힐 수 있으리오?"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원종이 예를 알고 있음에 감탄하였다.
김경손이 몽고 병사와 싸울 때에 호상에 걸터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다.
포탄이 머리 위를 날아가자 좌우에서 상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얼굴빛도 태연하였다.
김경손이 몽고 군사와 분전할 때, '팔에 화살을 맞아 피가 뚝뚝 떨어졌으나', 그래도 손으로 북을 울리기를 그치지 않으니 몽고 군사들이 물러났다.
송언기가 일찍이 네 차례나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강화함으로써 변방이 조금 안정되었다.
고종이 다시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려 하자 마침 병이 들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송씨가 살아 있음은 국가의 복이요, 송씨가 죽음은 국가의 근심이다"하였다.
고종이 자주 부사 최춘명에게 유시하여 몽고에 항복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최춘명이 말을 듣지 않자 최우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목을 베려 하였다.
최춘명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말과 얼굴색이 전혀 변함이 없었다.
몽고 사람도 풀어주기를 요청하였다.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고자 하여 이가노를 보내어 왕의 인장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였다.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에 순행하며 감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 무리들이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는데 뒤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 고려 사람으로 몽고에 잡혀갔다가 도망하여 돌아온 자들을 한 부대로 만들어 신의군이라 하니 앞의 좌, 우별초와 합쳐 삼별초라 하였다.
이로부터 권신들이 정권을 잡음에 이들을 측근 호위군으로 삼으면서 혹 그들에게 사적인 은혜를 베풀어주니, 그들이 경쟁적으로 앞장서서 힘을 다 바쳤다.
임유무가 죽자, 그들이 스스로 이상한 분위기에 회의를 느끼고는 사(士)와 서민들을 약탈하였다.
그리고는 배를 타고 남쪽으로 진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곳에 관부를 두었다.
뒤에 김방경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이고 친분으로는 사위와 장인이다.
고려가 원종 충렬왕 이후로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다.
원나라 장수 조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주 지역에 웅거하였다.
우리 태조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끝내 환난을 일으킬 것이니,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서, 그를 쳤다.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쇠촉을 박은 화살을 쓰지 않고 박두를 가지고 쏘아 맞혔다.
조무가 수십 걸음 밖에서 말에서 내려 절을 하여 그를 생포하였다.
조무가 마음으로 복종하여 끝내 심복이 되었다.
고종 말년에 몽고의 장수가 강도의 내외 성을 무너뜨리자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달아날 계획을 세워 다투어 배를 사니, 배의 날로 가격이 날로 올랐다.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선왕을 폐하고자 하니 김이가 충선왕이 수봉한 조책을 가져다 몰래 허리에 차고 다른 종이를 빈 선갑 안에 넣어 예전처럼 봉하였다.
며칠 있다가 과연 선갑을 도둑을 맞아 충선왕이 크게 놀라니 김이가 몰래 말하기를 "신이 뜻하지 않은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 일찍이 가져다 보관하였습니다"하고 차고 있던 책명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 의논이 마침내 가라앉았다.
공민왕이 원나라 말기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원나라 황제가 이제현에게 명하여 '정승의 일을 겸임하여' 정동성의 일을 임시로 처리하도록 했다.
그때 나라가 텅 비어 있었기에 이 조치가 적절했고 나라 사람들이 여기 힘입어 안정될 수 있었다.
몽고의 병사가 침략하여 강도성을 훼손하니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빠른 우레와 같아 거리의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다 울었다.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쳐들어 와 죽주성을 공략하였다.
대포로 성을 공격하여 사방의 성문이 곧바로 무너졌다.
성 안에서도 대포로 맞아 싸우니, 몽고병이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다가 충렬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별똥별이 흘러내리듯 빨리 걸어' 10여 일 만에 이르렀다.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포로로 잡아 간 사람이 남녀 20여 만 명이나 되었고 죽인 자는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왕이 고정매를 소복별감에 임명하였는데 고정매가 주색에 탐닉하고 백성을 갈취하여 사리를 취하니 백성들이 도리어 더 고통을 받았다.
몽고 군이 죽주를 포위하고 관솔불과 볏짚을 갖추어 불을 놓아 공격하였는데 방호별감 송문주가 그들을 물리쳤다.
일찍이 몽고에 네 번 사신 사거 강화조약을 맺으므로 변경지역이 다소 안정되게 되었다.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창고를 봉하고 국새를 거두었다.
왕이 강화로 물러나서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김경손이 몸고병을 방어함에 기미를 따라 대비하였고, 변화에 대응하기를 귀신과 같이 하였다.
고종이 몽고병의 핍박을 받고 강화도에 천도하였는데, 강화도를 수내라 하였다.
박항의 부모는 몽고의 병란에 죽었다.
이에 박항은 시신 중에 부모의 모습과 비슷한 것을 거두어 묻어준 것이 300명이나 되었다.
김경손이 몽고와 싸움에 적의 대포가 자기 머리 위를 지나가서 자기 뒤에 있는 위졸을 때려 몸과 머리가 박살이 났다.
그러나 김경손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 성종황제를 숙위하였다.
황제가 죽었을 때 충선왕과 승상 불화가 책략을 평정하고 무종을 맞아 들였다.
그 공으로 심양왕에 봉해졌다.
족보를 살펴보니 원나라 신호위대장군 장서가 고려 말에 피난하여 동쪽으로 와서 아산에 본관을 두고 드디어 토성이 되었다.
고종은 영녕공 준을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면서 '애자'라고 일컬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너는 왕자가 아닌데 아들이라고 일컬을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준이 말하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자라나 왕을 아버지로 여기로 왕비를 어머니로 알았지 친아들이 아닌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사신 최린에게 "애자와 친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애자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로 삼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소생의 아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사랑한다는 말을 붙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가 예전의 표를 확인해보니 모두 애자라고 일컬었다.
그래서 불문에 부쳤다.
원종 때 몽고 사신이 와서 고려가 육지로 나오지 않은 것을 질책하고 성을 내면서 돌아가고자 하였다.
이에 왕이 앵무잔을 선물로 주어 화해할 수 있었다.
조반의 누이가 뽑혀 원나라 정승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조반도 누이를 따라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누이가 시집한 집의 여동이 재주와 여색을 겸비한 것을 보고 반해 정이 매우 도타웠다.
명나라 군사가 원나라로 쳐들어가자 원나라 황제가 북쪽으로 피해 갔다.
공이 그 여자를 버리고 귀국하자, 여자가 뒤쫓아 왔는데 두 발이 부르트고 찢어졌다.
강가에 있는 높은 누각에 이르러 여자가 누각 밑의 못으로 몸을 던져 순식간에 죽고 말았다.
공이 더욱 그녀의 절개에 감복하여 항상 비통해 마지않았다.
고종 18년에 몽고군이 침략해 왔다.
구주의 병마사 박서가 힘을 다하여 그들을 막았다.
힘이 다하였으나 오히려 항복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고을을 승격하여 정원대도호부로 삼았다.
고려 충선왕이 오래도록 원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정을 쏟은 여인이 있었다.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왕이 연꽃 한 송이를 꺾어서 주고 이로써 작별하였다.
하루 저녁에 왕이 그리운 정을 이기지 못하여 이제현으로 하여금 가서 보게 했는데 여자가 누대 안에서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이미 여러 날이었다.
여인이 억지로 붓을 잡고 절구 한 수를 쓰기를, "보내주신 연꽃 조각, 처음에는 매우 붉었네. 가지를 떠난 지 지금 며칠인가, 초췌함이 나와 같구려!" 하였다.
이제현이 돌아와 아뢰기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고 하니 왕이 매우 원망하여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해 이제현이 뜰 아래 엎드려 그 시를 올리고 그때의 일을 말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경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한 것이니 참으로 충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때 몽고의 병사가 춘주를 함락하였다.
그 고을의 아전인 박항이 부모의 시신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모습이 비슷한 것은 모두 거두어 묻어주었는데 무려 3백 명이나 되었다.
원종이 죽었을 때 세자가 원나라에 있어 여러 신하들이 멀리서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충렬왕이다.
몽고병이 귀주로 처들어와 구름 사다리로 성을 공격하였다.
성을 지키던 장수 박서가 대우포를 적을 맞아 싸워 물리쳤다.
대우포는 큰 칼날을 댄 거대한 병기다.
충숙왕 때 원나라 사신들이 끊임없이 오가면서 기세를 부리고 포악하였다.
이에 조련이 말을 부드럽게 하여 대하니 사신들이 문득 성냄을 풀었다.
염제신은 오랫동안 원나라에 있었다.
원나라 황제에게 청하기를 "신은 어미를 오래도록 뵙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그의 말에 감격하여 향금강산을 내리라 명하고, 금으로 쓴 원패를 주었다.
그것은 그의 떠남을 빛나게 하고, 그의 돌아옴을 빠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조회하러 갔는데,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국왕의 인장을 빼앗았다.
그때 김태현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는데, 충숙왕이 김태현을 가두었다.
풀려난 뒤 김태현이 가족을 데리고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였으니, 혐의를 멀리 하기 위함이었다.
고려 고종 43년 몽고 군대가 중원주성을 무찌르고 또 산성을 공격하였다.
관리와 노약자들은 막지 못하게 되자 '월악산의 신사'로 올라갔다.
문득 구름과 안개와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번갈아 일어났다.
몽고 군사들은 신의 도움이 있다고 생각하여 공격하지 않고 물러났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듣건대 여러 기관의 관료들이 직무에 태만하다 하니 매월 말에 그들의 잘잘못과 근면함 그리고 태만한 점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원나라 장군 조무가 조선 태조에게 잡혀서 마침내 시양이 되어 종신토록 복역했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 가자 시종하던 백관들이 모두 달아나 숨었는데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다가 적의 창에 맞았다.
호수에게 시집갔다.
고려 고종 때 호수가 맹주의 수령이 되었었는데, 몽고의 군사가 처들어와 함락되는 바람에 호수도 피해를 입었다.
유씨는 적에게 몸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 있다가 함거를 타고 게양에 유배되었다.
수레가 너무 빨리 달려서 그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므로 게양에 이르기도 전에 길에서 죽었다.
원나라 천자가 충선왕을 토번에 유배시켰는데 그곳은 수도에서 만오천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고려 고종 때에 몽고 병사가 침략하니 여러 성 사람들이 해도 가운데로 들어갔다.
섬 안에는 샘과 우물이 없어서 사람들은 항상 육지로 가서 물을 길었는데 왕왕 몽고 병사에게 잡혔다.
충숙왕때 유청신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글을 올려 고려 본국에 행성을 세워 원의 내지와 같이하기를 청하였는데, 원나라 사인 왕관이 승상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몽고 병사가 춘주성을 포위하여 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 놓고 여러 날 공격하니 성 안에 샘과 우물이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찔러 피를 마셔서 군졸들의 곤궁함이 심했다.
수장 조효립이 처와 함께 불에 뛰어 들어 죽었다.
조선 태조가 동녕의 전쟁에서 원나라 장수 처명을 붙잡았는데 죽이지 않았다.
처명이 은혜에 감사하여 화살자국을 어루만질 때마다 목이 메이고 눈물을 흘렸으며 곁에 따라다니면서 모셨다.
운봉에서 전쟁을 할 때는 처명이 힘껏 싸워 공을 세우니 당시 사람들이 의리 있다고 하였다.
고종 때 몽고 병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정주를 침략해 왔다.
김경손이 관아에 있는 결사대 12명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니 몽고병이 물러나 달아났다.
그 뒤에 다시 침략해옴에 조짐에 따라 대비하여 변화에 대응하기를 귀신과 같이 하였다.
이에 적들이 "적은 병사로 많은 병사를 대적하는 것은 하늘이 도운 바이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 하고 퇴각하였다.
고려 고종 때 사람이다.
철주 판관이 되었을 때 몽고병이 성을 공격함이 다급하였다.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자 이희적이 성안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불을 질러 죽였으며 또 장정들을 이끌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
고종 때 몽고 군사들이 귀주로 들어와 노략질하였다.
장작에 사람 기름을 적셔서 두텁게 쌓아 불을 지르며 성을 공격하였다.
장군 박서가 물로 끄려 하였으나 불길이 더욱더 타올랐다.
이에 진흙을 물에 타서 뿌리니 비로소 꺼졌다.
몽고의 병사가 귀주에 들어와 도적질을 하는데 사람 기름으로 땔나무를 적셔서 불을 놓아 태우니 사람들이 그 불을 끌 수가 없었다.
고려 고종 23년 몽고가 쳐들어와 죽주성을 침략할 때 사람의 기름을 준비해 짚에 부어 불을 지펴서 공격하였다.
당시 송문주가 죽주성의 방호별감으로 있었는데 성안의 사졸들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자 몽고병은 여러 방면으로 공략하였으나 성을 하락시키지 못하였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김태현에게 행성의 직무를 대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김태현은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금상산에 유람을 가버렸는데, 원나라에서 역마를 보내 불러서 다시 행성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원나라 황제는 충렬왕에게 조서를 내려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하고 충렬왕을 일수왕에 봉하였다.
세자는 충선왕을 말한다.
충선왕이 조카 왕고를 궁중에서 양육하여 자식처럼 돌보았으며 드디어 세자로 세워 심왕의 자리를 전해주었다.
이에 왕고는 스스로 태위왕이라 칭하였고 원나라 황제는 그를 심왕에 임명하였다.
충렬왕 이후 4분의 임금은 연이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었기에, 정치와 법령이 모두 원나라에서 나오게 되었다.
나라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원나라 왕으로 연결되어 양국을 왕래하며 시기하고 참소하였다.
그리하여 자식이 왕위에 오르면 아버지가 폐하게 되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면 자식이 폐하게 되었다.
새로운 임금 세우기를 도모하는 사람은 옛 임금을 욕하였으며 본국을 배반한 자는 어떤 사건을 만들기를 좋아하여 다시는 군신과 부자의 사이의 도리가 없었다.
김방경이 서북면병마판관이 되었다.
때마침 몽고가 여러 성을 침공함에 공이 보위도로 들어갔다.
그 섬에는 우물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육지에 나가 물을 길러 오다가 왕왕 포로가 되었다.
이에 공이 제방을 쌓아 조수를 막고, 빗물을 모아서 큰 못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여름에는 물을 길렀고 겨울에는 얼음을 뚫어 물을 공급하였다.
이로부터 육지에 물을 긷기 위해 갔다가 포로가 되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
고려 고종이 몽고병의 침략을 당하여 강화로 도읍을 피했는데, 원나라 병사가 추격하여 해안에 이르러 말하기를 "갑옷을 쌓으면 건널 수 있겠다"고 하니, 후에 그 나루를 이름하여 갑곶이라 했다.
몽고 병사가 자주를 매우 급박하게 포위하였는데 부사 최춘명은 굳게 지키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화친을 한 뒤에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타일렀는데도 최춘명은 문을 닫고 상대하지 않았다.
최우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목을 베려 하였다.
몽고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는 비록 명을 거스른 것이지만 당신네 나라로 보면 충신인데 성을 온전히 지켜낸 충신을 죽이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며 풀어주기를 요청하였다.
김태현이 북쪽으로 원나라 황제의 행재소에 이르니 황제가 가상하게 여겨 황제의 음식을 하사하여 총애했다.
원나라에서 충정왕을 폐위키시고 국새를 몰수해서 가버렸다.
왕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
판삼사사 이제현이 정승을 겸하여 정동성의 일을 임시로 처리하였는데, '조치하는 바가 알맞아'. 사람들이 그것에 힘입어 편안할 수가 있었다.
고려 고종 때 사람이다.
일찍이 문학으로서 춘주에 있을 때 몽고 병사가 겹으로 포위하였다.
성 안의 우물과 샘이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찔러서 피를 마시니 사졸의 곤궁함이 심했다.
효립은 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처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혔다.
언양군 김륜이 당시 집에 있으면서 이 소식을 듣고 문득 일어나 여러 재상과 함께 글을 올려 사정하고사 하여 이제현으로 하여금 초안을 잡게 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원로가 많이 서명하지 않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윤이 종신토록 울분이 쌓여 언어와 안색에까지 나타났다.
충선왕 때에 원나라 사신이 왔다.
윤석이 술잔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 왕의 앞에 서 있었다.
원나라 사신이 황제의 뜻을 전하였는데 두 왕자를 입시케 하라는 것이었다.
석이 마음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아우를 시종하리라'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그 아버지 만비에게 말하였다.
만비가 말하기를 "시종하는 것은 후일을 위한 계책이다.
형이 있는데 아우가 먼저 나라를 소유하겠는가?" 하였다.
석이 말하기는 "제가 아우를 보면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형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아우를 시종하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아우를 시종하였다.
형이 과연 일찍 죽었다.
아우가 바로 충숙왕이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윤석은 형의 폐행이 되었다.
고종 41년 몽고병이 우리나라의 고을을 크게 노략질하여 포로가 된 남녀가 2만 6천 8백여 명이었고, 죽은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스치고 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병의 난리가 이것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고종때 몽고가 해마다 침략하여 왔으므로 왕이 김수강을 몽고에 보내어 병사를 파할 것을 간청하였다.
김수강이 몽고 황제의 물음에 상세하고도 정성스럽게 대답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자 안축이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는 것은 신하의 치욕이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라 하고는 이에 원나라에 글을 올려 임금의 무죄를 소송하였다.
이장용이 원나라에 갔을 때 원나라 정승이 우리나라의 호구수를 물었다.
이장용이 '손으로 격자창을 가리키면서 그 숫자를 묻자' 원나라 승상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원나라 사신이 충혜왕을 잡아서 돌아갔다.
김륜은 그때 집에 있었는데 '원나라 조정에 아뢰어 빌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자 권한공이 막았다.
김륜이 엄한 목소리로 "신하의 임금에 대한 관계는 자식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와 같소. 차마 구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니, 드디어 글을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고종때 몽고 병사가 국경을 억압하며 자주 충하고 꾸짖었다.
이규보가 오랬동안 양제에 재직하면서 글을 짖는 것을 관장하였는데, 이에 진정표를 지어 올렸다.
몽고 황제가 그것을 보고 감동하고 깨닫는 점이 있어 드디어 병사를 철수하였다.
원종이 공주와 함께 오랑캐 옷을 입고 원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백관들이 예복을 입고 가기를 청하였다.
송분이 윤수 등을 사주하여 회초리를 들고 말을 달리며 예복을 입은 자들을 때려서 쫓아내니 시종하는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다.
몽고에서 왕을 불러들여 조회하게 하였다.
고려 고종이 족자를 왕자라 일컫고 그를 보내었다.
들어가서 인질이 되었다.
몽고 병사들이 대거 침략하여 노략질하자 최이는 고종을 협박하여 수도를 강화도에 옮기려고 하였다.
이에 유승단이 말하기를 "도성을 버리며 또 종묘를 내던지고서 바다 섬에 도망가 숨어 있으면서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은 국가를 위한 장계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지만, 최이는 이 건의를 들어주지 않았다.
충렬왕 때에 궁인 백야단이 임금의 총애를 한창 많이 받아 중앙과 외방에서 횡포한 직을 제멋대로 하였다.
세자가 원나라에서 공주의 상에 달려와 왕에게 아뢰기를 "공주가 질환에 걸리게 된 것은 안으로 총애한 것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국문을 하여 모두 참수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고려 충숙왕의 종신 백응구가 도망하여 고려로 돌아오니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돌려보내라고 칙명을 내렸다.
왕이 받들어 시행하지 않으니, 심양왕 고가 충숙왕이 황제의 칙명을 찢어버렸다고 참소하자 황제가 힐책하여 다시 왕의 인장을 빼았았다.
이공수가 원나라에 들어가 덕흥의 난리에 동조하지 않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로 돌아오니, 천하 사람들에게 그의 충의가 알려졌다.
그가 연경의 문을 나와서 하인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 다시 이와 같은 것이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장용이 원나라에 가니 원나라 승상이 "고려국의 주군의 호구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다.
이장용이 "모릅니다"라 대답하니, 승상이 "그대는 나라의 재상이면서 어찌 그것을 모른단 말입니까?"라 하였다.
이장용이 창문살을 가리키며 "승상은 저 창문살이 몇 개라고 생각합니까?" 하니 승상이 "모른다"고 하였다.
이장용이 "저의 나라의 주군의 호구 숫자에 대하여는 담당 관원이 따로 있으니 비록 재상이라고 한들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승상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위득유와 노진의가 김방경을 무고하여 죄를 주려 하였다.
원나라 장수 홍다구가 황제에게 아뢰어 국문하는데 매우 참혹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모두 수도로 압송하여 대질 신문하여 분변하게 하였다.
위득유는 중도에서 혀가 썩어 죽었고 노진의도 수도에 이르러 역시 혀가 썩어 죽었다.
사람들이 하늘이 주벌한 것이라고 하였다.
몽고 군대가 귀주를 공격할 때 대포로서 성곽을 파괴하자 박서가 무너지는 대로 보수하였는데 '쇠 밧줄'로 감으니 몽고 군대가 다시는 공격하지 못했다.
고종 8년 봄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 푸른색의 지렁이가 궁문에서 밖으로 판교에 이르기까지 길에 가득하였다.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피하였다.
15년 봄에 또 궁문에서부터 서문에 이르기까지 길에 푸른색 지렁이가 있었다.
길이가 세 치쯤 되는데, 비를 따라 많이 내려왔다.
3년도 되지 않아 몽고의 군사들이 크게 쳐들어왔다.
왕이 강화로 피하여 도읍을 옮겼다.
몽고 군사들이 서해도 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은 험하여 겨우 사람과 말이 통행할 정도였는데 몽고 군사들이 불화살을 성 안으로 쏘니 초막에 모두 불길이 번져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자는 재지며 본관은 완선이다.
나이가 차서 벼슬에서 물러난 득평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아버지의 풍모가 있어서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세인들의 추중을 받았다.
충혜왕이 붙잡혀서 원나라에 가자 왕이 설치했던 모든 것을 다 고치고 혁파하였다.
도감을 세워서 최재를 판관으로 삼았다.
재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왕의 실덕은 바로 왕의 측근들이 왕의 뜻을 맞추어 준 것이다.
앞에서 맞추어 주었다가 뒤에서 들어올리는 짓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고는 드디어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공민왕 때 완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정이다.
고종이 강화도에 도읍을 옮기자 원나라 황제가 매양 사신을 보내 육지로 나오는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이에 김수강이 병사를 철수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육지로 나오지 않는 것으로 핑계를 삼았다.
김수장이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사냥꾼이 짐승을 몰아 굴로 들어가게 하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그 앞에 지키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렇게 하면 곤경에 빠진 짐승이 어디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또 얼고 눈보라치는 참담한 겨울에 땅이 얼어붙게 되면 초목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라 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기고 군사를 되돌렸다.
몽고 사신이 와서 대접이 불만족하다 하여 활을 펼치고 몽둥이를 잡고서 쏘기도 하고 치기도 하자, 관반 등이 달려서 문을 나가 곧 자물쇠를 걸었으므로 몽고 사신이 나오지 못했다.
김희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 타이르니 그 노여움이 점차로 풀렸다.
고종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는데, 광주가 서울과 강화도의 중간에 위치한 큰 진읍인 까닭에 이세화를 자사로 보냈다.
이때 몽고군이 포위하고 온갖 꾀를 써서 공격하였으나, 이세화가 주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여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니 오랑캐가 드디어 포위를 풀고 나갔다.
고려 충숙왕이 참소를 당하여 원나라에 머물렀을 때 왕의 재물이 이미 비었다.
이때에 정척이 궁궐도감이 되어 도감의 옛날 비용 가운데 명분이 없는 것을 가벼이 하여 연경의 충숙왕 처소에 실어보내니 왕이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김진이 이자겸의 난을 만나 궁궐이 연속해서 불타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도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겠다"라 하고 문을 닫아걸고 불길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고종 40년에 조효립이 춘주의 원님이 되었다.
몽고의 군사가 성을 포위하자 조효립이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처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원나라 황제가 충선왕을 형부에 가두고 아울러 김륜을 옥에 가둔 뒤 5부의 관원들을 시켜서 심문하게 하였다.
심왕과 조적 등 구변이 좋은 자가 많았으나 김륜은 편언으로 그들을 꺾었는데 말이 간단 직절하니 5부의 관원들이 모두 용모를 가다듬고 주목하였다.
몽고병이 귀주를 공격하는데, 풀과 나무를 실은 수레를 몰고 진격하였다.
장군 김경손이 포차로써 끓는 쇠물을 뿌려 수레에 적재한 풀을 태우니, 몽고인들이 퇴각하여 달아났다.
몽고병이 죽주성을 노략질함에 포로써 성을 공격하니, 성문이 문득 무너졌다.
송문주가 방호별감이 되어 또한 포로써 마주 공격하자 몽고병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고가 귀주에 침략했는데 대포가 달린 수레로써 여러 갈래로 성을 공격하니, 장군 김경손이 호상에서 전투를 독려했다.
대포가 경손의 머리 위로 지나가 뒤에서 호위하는 병졸을 치니 몸과 머리가 부서졌다.
좌우에서 호상을 옮길 것을 청하니, 경손이 말하기를 "내가 움직이면 사람들 마음이 동요할 것이다.
"하고, 정신과 기색이 변함이 없었다.
고려 고종이 몽고군을 피하여 강화에 들어가 도읍을 정했는데, 변려가 적에게 사로잡혀 수로에 대해 추궁을 당하여 살을 지지는 형을 받았으나 변려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조인규가 붙잡혀서 원나라에 머물기가 8년에 이르렀는데, 하루는 인규의 아들 서가 여러 아우를 거느리고 길가에서 황제를 알현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인규의 환국을 허락했다.
원나라 위상 납합출이 북쪽 경계에 침략하자 공민왕이 조선조 태조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였다.
태조가 홍원의 달단동에서 적을 만났는데 태조가 먼저 병사를 매복시키고 자기 홀로 말을 타고 돌진하였다.
공방을 거듭하다가 아군이 매복한 곳에 이르자 매복병이 일어나서는 태조와 합세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납합출이 달아나니 동북 지역이 다 평정되었다.
몽고병이 곧장 갑곶 강 너머까지 쳐들어와 고종이 최린을 보내 몽고의 군영으로 가서 토산물을 바치고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때문에 개경에 계엄이 해제되었다.
각 도가 전란을 겪어 주, 군의 세 가지 세금 외에 잡역을 모두 면제하였다.
그리고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하였다.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토번으로 유배하였다가 뒤에 방환하였다.
이제현이 왕을 맞이하면서 임조를 지나서 하주에 이르렀다.
정운경이 일찍이 사록이 되었는데, 원나라 사신이 무례하게 대했다.
정운경이 직책을 버리고 떠나자 원나라 사신이 이마에 피를 흘리며 사과하고 돌아갔다.
몽고군이 대거 침략해 들어왔을 때 최이가 고종을 위협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겼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황산을 홍산으로 바꾸게 하였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하여 강화도에 도읍을 옮겼고, 또 백성들도 감독하여 해도에 들어와 보전하게 하였다.
송길유는 성격이 잔인하고 혹독하였는데 이때 수로방호별감이 되었다.
그는 백성들이 재산을 아까워하며 고향 떠나기를 어려워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집과 돈 그리고 곡식을 불사르니 이에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고종 3년 몽고병이 대거 압록강을 건너 왔다.
가주, 박천 두 고을 사이에 불 기운이 하늘에 잇달았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서해도 산성을 공격했다.
이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오직 사람과 말이 통행할 정도의 길 하나만 있었는데 방호장이 험준한 지형만 믿고 방비하지 않았다.
몽고군이 성에 임하여 대포를 설치하고 또 석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와 불붙은 활로 쏘자 초막에 모두 불이 번져 성이 함락되었는데 죽은 사람이 무려 5천 명 남짓했다.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귀주까지 침략했는데, 박서가 병마사가 되어 기미를 타고 변고에 응하여 굳게 수비하니 몽고병이 드디어 물러갔다.
몽고 장군의 나이가 거의 일흔에 이른 자가 성 아래 이르러 기계를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내가 나이 들어 군진에 종사한 이래 이와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
성 안의 여러 장수가 후일 반드시 모두 장상이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후에 박서가 과연 평장사가 되었다.
몽고 군대가 구주를 공격할 때 누거 및 목상을 만들어 소가죽으로 싸 가지고 그 가운데 무기를 감추어 성 밑까지 밀고 들어와서 지하통로를 팠다.
장군 박서가 성에 구멍을 뚫고 쇳물을 쏟아 부어 누거를 불태웠고 또 썩은 띠풀에 불을 붙여 목상을 태워버리니 몽고 군사들이 놀라 어찌할 줄 모르고 흩어졌다.
고려 고종이 몽고 군대를 피하여 강화도에 들어가 도읍으로 삼았다.
몽고가 여러 차례 군사를 두입하여 육지로 나오도록 독려하였고, 사람들 보내어 '내외의 성곽을 헐었다.
' 성곽 무너지는 소리가 급한 천둥 같았다.
골목의 아낙네나 거리의 아디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성호사설

그들은 여러 번 우리 국경을 침범하고 공갈과 위협을 일삼아 왔으나 또한 원이 무서워서 우리나라 안에까지는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였고 우리는 항상 구원을 요청하여 그 힘을 입어 왔다.
  고종 19년에 몽고의 난을 당하자 당시의 권신인 최우(崔瑀)가 왕을 협박하여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했다.
  도리어 왕이 먼저 승천부(昇天府)에 들어가서 바다 안에 수도를 정하고 그곳에서 28년을 지내더니 몽고가 군대를 풀어서 안팎의 성을 모두 철수하게 하자, 원종(元宗) 원년에 다시 송도로 환도하였으니, 이는 몽고의 압력에 의한 것이다.
마침 원 헌종(元憲宗)이 죽고 임금의 자리를 넘겨다보는 사람이 있어서 사정이 매우 위급할 때였으므로 그는 세자를 보고 놀라고 반가워하며, ‘고려는 당 태종이 멀리 가서 토벌하였는데도 굴복하지 않았던 나라인데, 이제 스스로 나에게 돌아와 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 하였다.
  마침 또 본국에서 고종(高宗)이 죽자 원 나라에서는 곧 세자를 세워 왕을 삼고 호송하여 본국에 나아가게 하였다.
  그러다가 충렬왕(忠烈王)이 원 나라 공주(公主)에게 장가들면서부터는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무슨 말이든지 모두 들어 주었고, 행성(行省)의 여러 사람들도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
  충렬왕 때에 원 나라에서 만자군(蠻子軍) 1만 4천 명을 보내어 해주(海州)ㆍ염주(鹽州)ㆍ백주(白州)의 3개 주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만자군은 남만 지방의 해귀족(海鬼族)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요(遼)와 금(金)이 교대로 일어나고 북원(北元)이 간혹 다시 침략해 들어왔다.
  몽고의 황제는 그에게 금패(金牌)를 주고 조서를 내리어 그곳을 몽고에 편입시키고 명칭을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선으로 확정하고 탄(坦)을 총관(總管)에 임명하고 군대 3천 명을 서경(西京)에 보냈다.
  전조(前朝)에도 글안(契丹)ㆍ몽고(蒙古)ㆍ홍건적[紅巾]이다.
이 구성ㆍ삭주ㆍ의주ㆍ철산의 길을 따라 쳐들어오지 않았던가?  그 당시 몽고(蒙古)로부터 도망해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들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神義軍)이라 이름했으니, 합하여 별초(三別抄)가 된 것이고, 그 후에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키자 김방경(金方慶)이 원(元) 나라 군사를 이끌고 3년 만에 비로소 평정하였다.
고종 19년(1232) 몽고(蒙古)군사가 충주(忠州)를 침략해 왔을 때 성을 지키기로 합의하고, 부사(副使) 우종주(于宗柱)는 양반 별초를, 판관 유홍익(庾洪翼)은 노예군과 잡류 별초(雜流別抄)를 거느리게 되었다.
사신(史臣)의 논평에, “팔방상은 나라에 태평성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오락이다.
이제 몽고의 침략을 입고 섬으로 피난하는 실정인데 최이가 망령스레 호화스러운 연회를 열어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그 죄는 죽임을 당함이 마땅하다.
” 하였다.
원 나라 때에는 우리의 국호를 없애고 행성(行省)을 두며, 두발(頭髮)을 깎고 관복(冠服)의 제도를 바꾸려고까지 했는데, 백방으로 애걸하여 겨우 모면하게 되었다.
또 서북면 안무사(西北面安撫使)가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와서 전하기를,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니, 방(榜)에, ‘호부(戶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철령(鐵嶺) 이북ㆍ이동ㆍ이서는 원(元) 나라에 소속시키고 개원(開元)에서 관리하는 군인(軍人) 중에 한인(漢人)ㆍ여진(女眞)ㆍ달달(達達)ㆍ고려는 그냥 요동에 소속시켜 둔다고 씌어 있다.
” 하므로 드디어 요동을 공격할 계획을 결정하였다.
신우(辛禑) 14년(1388), 다시 내린 조서에 “탐라(耽羅)란 섬은 원 세조(元世祖)의 목마장(牧馬場)이었는데, 지금 돌아오지 못한 원의 자손이 매우 많다.
  9년이 지나 다시 북원(北元)의 선광(宣光)이라는 연호를 쓰다가 이듬해에 또 명 나라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1368~1398))라는 연호를 쓰게 되었다.
  고종(高宗) 8년(1221) 최우(崔瑀)가 집정(執政)할 때 몽고(蒙古)에서 사신(使臣)이 왔었다.
그가 돌아갈 때 변수(邊帥)를 시켜 전송했는데 사람들은 “화가 여기서 싹트게 될 것이다.
” 하였다.
19년(1232)에 이르러 도읍을 강화(江華)로 옮겨 몽고의 침략을 피하려 할 때 유승단(兪升旦)이 도읍 옮기는 것을 잘못이라고 강력히 간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가, 나중에는 도성이 다 헐린 후에 환도하게 되니 그 화가 극도에 달하였다.
충렬왕(忠烈王) 4년(1278)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가 원(元) 나라 의복을 입게 되었다.
이때에는 재상(宰相)으로부터 하료(下僚)에 이르기까지 체발(剃髮)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오직 금내(禁內)에 있는 학관(學官)만이 하지 않았다.
승지(左承旨) 박항(朴恒)이 집사관(執事官)을 불러 효유하자 이에 학생까지 체발하게 되었으니 이는 대개 원 나라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이르러서는 원 나라에서 행성(行省)을 세우고 국호를 없애려고까지 했는데 굳이 간청한 결과 면하게 되었고, 또 신우(辛禑)에 이르러서는 호복(胡服)으로 고쳐 입었다.
금표(禁標) 외의 전지를 빼앗아 농사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잘못으로 첫째이고, 여허(汝許)의 여자는 이미 약혼한 곳이 있었는데 이를 억눌러서 몽고(蒙古)에 시집보내게 하였으니 이것이 잘못으로 둘째이다.
이때 명(明) 나라는 돈과 비단으로 몽고와 재새(宰賽)를 꾀어서 만여 명이 넘는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와서 싸우게 했으나 모두 귀영개에게 사로잡히고 죽음을 당했으니 그의 세력은 진실로 강대하였다.
강화에 성을 쌓고 궁궐도 지었으나, 원(元) 나라 군사가 두 차례나 출동하여 육지로 나오도록 협박한 다음 백성을 시켜 헐어 버림으로써 성도 궁궐도 자취가 없게 되고 온 나라 백성은 병만 들었다.
거란으로부터 몽고에 이르기까지 무릇 세상이 세 번이나 변했었는데, 앞 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고도 경계하지 않고 뒤에 이르러서 서로 빠지게 되었으니 이상하다 하겠다.
나중에 충선왕(忠宣王)과 충혜왕(忠惠王)은 비록 서로 잇달아 원 나라에 구속까지 되어 스스로 떨칠 수 없었지만, 찬탈하는 화를 면하게 됨은 원 나라를 두렵게 생각한 때문이었다.
원 나라 말엽에 미쳐서는 남쪽의 환란이 유래없이 참혹하였으니 태조의 신용(神勇)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힘입었겠는가? 고려 때에도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이 귀주(龜州)를 지킬 때 몽고(蒙古) 군사가 밀어닥쳤다.
이보다 앞서 원종(元宗) 11년(1270)에는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 최탄(崔坦)과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西京) 이서를 원 나라에 붙여 주었다.
이 서경은 지금 평양(平壤)인데 원 나라에서 그들의 내속(內屬)으로 만들고 이름을 고쳐 동녕부(東寧府)라 하였다.
  그러므로 충렬왕 4년(1278)에 왕이 원 나라에 가서 조회할 때는 의주(義州)의 북서쪽 모든 고을이 이미 다 동녕부에 소속되었는데 오직 의주(義州)ㆍ정주(靜州)ㆍ인주(獜州) 이 세 고을만이 영접하고 공궤했다고 하였으니, 이때 딴 고을은 모두 우리나라에 속하지 않았다.
만약 원 나라 임금이 순응하지 않았다면 평안도(平安道)의 한 지대는 팔짱만 끼고 앉아 잃어버렸을 것이다.
홍무(洪武) 2년(1369)에는 우리 군사가 이미 동녕부(東寧府)를 쳐부수고 국교를 끊는다는 뜻을 보였고, 이듬해에는 오랑캐 이원경(李原景) 등과 원 나라 평장사(平章事) 기새인(奇賽因)ㆍ첩목아(帖木兒) 등이 와서 동녕부를 점거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비 기철(奇轍)을 죽였다 하여 북쪽 변방을 침략하면서 원수를 갚으려고 했던 것이다.
홍무(洪武) 9년(1376)에 이르러 북원(北元)이 신우(辛禑)를 책봉(冊封)하여 고려왕(高麗王)으로 삼고 다시 원 나라의 선광(宣光) 연호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은 원(元) 나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원종(元宗)이 세자가 되어 원(元) 나라에 조회차 들어갔다가 2년을 머물러 있었는데 이때에 황제의 아우 홀필렬(忽必烈)이 군사를 사열하러 강남으로 가자, 세자는 먼 길을 달리어 양초(梁楚)에까지 갔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압록강으로 한계선을 삼아 큰 갓과 긴 띠에 붓을 쥐고 책을 읽도록 맡겨 두어, 지혜는 사장(詞章)에 피폐되고, 힘은 과거(科擧)에 다 빠지게 하여 그 직공(職貢)만을 닦아 조회의 열에 서게 하는 것만큼 득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원 나라 황제의 본뜻이었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왕이 오랫동안 원(元) 나라에 머물면서 본국의 엄인(閹人) 15명을 봉하여 군(君)으로 삼은 일이 있었다.

송남잡지

박유(朴褕)가 상소(上疏)하여 "사람마다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두면 원나라에서 와서 여자들을 데려가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재상 중에 아내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어서 의론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반드시 흰말을 쓰는 이유는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백마 여든 필(匹)로 원나라에 장가를 든 것에서 시작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원종(元宗) 때 원나라에서 매빙사(媒聘使)를 파견하여 만자(蠻子)에게 시집보낼 아내를 찾게하니 이때에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충열왕(忠烈王)이 국내의 혼인을 금지하고 원나라에 여자를 바치려하자 당시에 딸을 둔 사람들은 날을 잡지 않고 곧바로 혼인을 시켰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서 "원종(元宗) 때 왕이 벼슬아치의 자제로 원나라에 인질로 가는 왕을 따라간 사람들을 번을 나누어 숙위(宿衛)케 하였으니 홀치라 불렀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에서 충렬왕(忠烈王)이 처음으로 흰옷을 금지하고 머리를 깎고 원나라의 의관을 입었다고 한다.
충렬왕(忠烈王)이 원나라의 공주를 맞아들이고 군신이 겁구아(怯仇兒)를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였다.
'겁구아(怯仇兒)'는 몽고말로 머리를 깎는 것이다.
북평(北平)의 손승택(孫承澤)이 저술한 《춘몽여록(春夢餘錄)》에 "《고려사》를 살펴보면 원나라가 강성할 때에 고려사람 치고 머리를 깎지 않은 이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즉위하자 정승에 임명하여 국정을 총섭하도록 하고 정동행성의 일을 권단하게 하였다.
몽고의 노장이 성을 포위할 때 성루를 보고 말하였다.
몽고의 달단족(韃靼族, '타타르 족'의 음역어)이 우리나라의 국격에 친입하여 근심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몰아냈지만 없앨 수 없었는데, 신령한 중이 몽둥이를 가지고 그들을 쫓으니 몽고달단(蒙古韃靼)이 두려워하며 절을 떠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