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pattern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강화양명학)
(디지털 큐레이션의 교육학적 연구)
1번째 줄: 1번째 줄:
 
==디지털 큐레이션의 교육학적 연구==
 
==디지털 큐레이션의 교육학적 연구==
 +
 +
 +
 +
"오늘의 학생들을 어제처럼 가르치면 이는 학생들의 미래를 빼앗는 것이다.If we teach today's students as we taught yesterday's, we rob them of tomorrow." 존 듀이의 말이다. 엘빈 토플러는 “과거의 획일회된 정책으로는 교육, 의료, 고용 등 다양한 분량에 걸친 양극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대량 사회, 대중의 시대에 썼던 방법이 아니라 다원화되고 개인화된 문제에 걸맞는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또 “인터넷과 새로운 통신서비스의 공공활용을 확산시키는 것이 국익을 창출하는 길이다”고 조언했다. 그런가하면 한국의 교육방식에 대해 비판한 적도 있다. 그는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f> 출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별세…“한국 학생들, 불필요 지식 위해 하루 15시간 낭비”중앙일보. 2016.06.30]</ref>
  
 
*디지털 큐레이션
 
*디지털 큐레이션
 +
디지털 큐레이션(Digital Curation)은 디지털 자원을 제공, 보존, 유지, 수집, 아카이빙하는 것을 지칭한다. 넓게 보면 현재와 장래에 이용될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정보를 유지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대체로 해석할 수 있다(Digital Curation Center). 즉 디지털 큐레이션은 연구자, 과학자, 역사학자 등이 현재와 장래에 참고할 수 있도록 디지털 자원의 장기 보존소를 설립하고 개발하는 과정이다. 이 정의는 디지털 아키이빙과 보존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수한 데이터 생산과 관리에 필요한 과정,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되도록 데이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용어이다. 디지털 정보원의 큐레이션과 장기적인 보존은 연구 및 교육 분야의 광범위한 활동에서 점차 더 중요해 질 것이다.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예측해 보면 디지털 정보원과 데이터들은 압도적인 비율로 증가하면서 복잡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 중에서도 과학데이터, 예를 들면 인공위성, 입자가속장치, 유전자염기서울분석과 같은 정보원의 생산비용은 매우 높다. 이러한 데이터는 학술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한 증거 기반이면서 그 결론을 확인하고 이를 재현하기 위한 기본원리로서 매우 중요하다. 큐레이션은 데이터가 학술적 및 과학적으로 관심대상이 되는 생애주기동안 이러한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이는 데이터의 재현과 재이용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ref> 출처: [도서관 용어 해설. 디지털 큐레이션(Digital Curation) https://wl.nl.go.kr/usr/com/prm/BBSDetail.do?bbsId=BBSMSTR_000000000458&menuNo=13001&upperMenuId=13&nttId=4560&boardTab=null&boardGubun=null]</ref>
 +
 +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는 ‘보살피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류라레(curare)에서 유래했다. ‘보살피다’, ‘돌보다’는 뜻 외에도 이 단어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역사적으로 사회 기반 시설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를 두고 큐레이터(curator)라 칭했다. …. ‘보살피다’는 의미는 박물관 및 미술관 큐레이터의 기원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16세기와 17세기 당시 아주 부유한 수집가들은 이른바 ‘호기심의 방(Cabinets of Curiosities)’ 또는 ‘분더카머(Wunderkammer)’라고 불리는 방을 만들어 과학기기에서부터 고대 유물 조각에 이르기까지 온갖 진귀한 것들을 한데 모아두곤 했다. 그리고 그 수집품이 훼손되거나 도난당하지 않도록 돌보는 것은 하나의 직업이 됐다.”(책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저) “이제는 누구나 큐레이터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개인적 선택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기도 하지요. 요컨대 오늘날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는 개인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해 미술 비평가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큐레이션은 그 의미가 서서히 변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처음에는 보살피고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 그런데 박물관이 점차 단기전시를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물품을 선별 및 배치하고 전시하는 데 압박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큐레이터는 단순히 전시품을 건사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때로는 미술가로 때로는 기획자로서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주요 작품을 알아보는 역할까지 맡게 됐습니다.” (책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저) “정치 및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던 큐레이션은 미술계에서 사용되던 것을 지나 인터넷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개념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웹 콘텐츠의 과잉 현상에 대응했던 각종 기술은 이제 오프라인으로 넘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은 사실 긴 호황 직후의 과잉 현상에도 상당한 가치를 입증하기도 했다. 큐레이션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현상을 모두가 반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이 단어는 사용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며 그 의미 역시 한층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 구글 트렌드 결과를 보면 사람들이 어떤 단어를 검색했는지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검색된 단어부터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큐레이션 콘텐츠, 디지털 큐레이션, 데이터 큐레이션, 큐레이션 정의, 소셜 큐레이션, 큐레이션 도구, 큐레이션 의미, 아트 큐레이션, 미술관 큐레이션, 미디어 큐레이션. …. 여기서 말하는 큐레이션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활동’이다. 사람들은 큐레이션에 필요한 도구를 알고 싶어 한다. 콘텐츠 큐레이션은 그저 앉아서 구경하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는 활동이다.”(책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저) <ref> 출처: [인터넷 필수 용어가 된 '큐레이션'의 역사는 놀랍다. 고평석. 허프북스. 2017.02.13] </ref>
 +
  
 
*연결주의
 
*연결주의

2019년 4월 18일 (목) 17:59 판

디지털 큐레이션의 교육학적 연구

"오늘의 학생들을 어제처럼 가르치면 이는 학생들의 미래를 빼앗는 것이다.If we teach today's students as we taught yesterday's, we rob them of tomorrow." 존 듀이의 말이다. 엘빈 토플러는 “과거의 획일회된 정책으로는 교육, 의료, 고용 등 다양한 분량에 걸친 양극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대량 사회, 대중의 시대에 썼던 방법이 아니라 다원화되고 개인화된 문제에 걸맞는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또 “인터넷과 새로운 통신서비스의 공공활용을 확산시키는 것이 국익을 창출하는 길이다”고 조언했다. 그런가하면 한국의 교육방식에 대해 비판한 적도 있다. 그는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1]

  • 디지털 큐레이션

디지털 큐레이션(Digital Curation)은 디지털 자원을 제공, 보존, 유지, 수집, 아카이빙하는 것을 지칭한다. 넓게 보면 현재와 장래에 이용될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정보를 유지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대체로 해석할 수 있다(Digital Curation Center). 즉 디지털 큐레이션은 연구자, 과학자, 역사학자 등이 현재와 장래에 참고할 수 있도록 디지털 자원의 장기 보존소를 설립하고 개발하는 과정이다. 이 정의는 디지털 아키이빙과 보존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수한 데이터 생산과 관리에 필요한 과정,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되도록 데이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용어이다. 디지털 정보원의 큐레이션과 장기적인 보존은 연구 및 교육 분야의 광범위한 활동에서 점차 더 중요해 질 것이다.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예측해 보면 디지털 정보원과 데이터들은 압도적인 비율로 증가하면서 복잡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 중에서도 과학데이터, 예를 들면 인공위성, 입자가속장치, 유전자염기서울분석과 같은 정보원의 생산비용은 매우 높다. 이러한 데이터는 학술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한 증거 기반이면서 그 결론을 확인하고 이를 재현하기 위한 기본원리로서 매우 중요하다. 큐레이션은 데이터가 학술적 및 과학적으로 관심대상이 되는 생애주기동안 이러한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이는 데이터의 재현과 재이용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2]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는 ‘보살피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류라레(curare)에서 유래했다. ‘보살피다’, ‘돌보다’는 뜻 외에도 이 단어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역사적으로 사회 기반 시설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를 두고 큐레이터(curator)라 칭했다. …. ‘보살피다’는 의미는 박물관 및 미술관 큐레이터의 기원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16세기와 17세기 당시 아주 부유한 수집가들은 이른바 ‘호기심의 방(Cabinets of Curiosities)’ 또는 ‘분더카머(Wunderkammer)’라고 불리는 방을 만들어 과학기기에서부터 고대 유물 조각에 이르기까지 온갖 진귀한 것들을 한데 모아두곤 했다. 그리고 그 수집품이 훼손되거나 도난당하지 않도록 돌보는 것은 하나의 직업이 됐다.”(책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저) “이제는 누구나 큐레이터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개인적 선택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기도 하지요. 요컨대 오늘날 큐레이션이라는 단어는 개인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해 미술 비평가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큐레이션은 그 의미가 서서히 변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처음에는 보살피고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 그런데 박물관이 점차 단기전시를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물품을 선별 및 배치하고 전시하는 데 압박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큐레이터는 단순히 전시품을 건사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때로는 미술가로 때로는 기획자로서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주요 작품을 알아보는 역할까지 맡게 됐습니다.” (책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저) “정치 및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던 큐레이션은 미술계에서 사용되던 것을 지나 인터넷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개념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웹 콘텐츠의 과잉 현상에 대응했던 각종 기술은 이제 오프라인으로 넘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은 사실 긴 호황 직후의 과잉 현상에도 상당한 가치를 입증하기도 했다. 큐레이션의 의미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현상을 모두가 반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이 단어는 사용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며 그 의미 역시 한층 중요성을 더해가고 있다. …. 구글 트렌드 결과를 보면 사람들이 어떤 단어를 검색했는지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검색된 단어부터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큐레이션 콘텐츠, 디지털 큐레이션, 데이터 큐레이션, 큐레이션 정의, 소셜 큐레이션, 큐레이션 도구, 큐레이션 의미, 아트 큐레이션, 미술관 큐레이션, 미디어 큐레이션. …. 여기서 말하는 큐레이션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활동’이다. 사람들은 큐레이션에 필요한 도구를 알고 싶어 한다. 콘텐츠 큐레이션은 그저 앉아서 구경하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는 활동이다.”(책 ‘큐레이션’, 마이클 바스카 저) [3]


  • 연결주의
  • 영상 세대, 이미지 세대
  • 빅데이터
  • 스몰데이터
  • 온톨로지
  • 탐구정신

양명학

주자학과 양명학은 유학 경전 <대학>을 해석하는 데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대학>은 격물(格物) · 치지(致知) · 성의(誠意) · 정심(正心) ·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8조목이 핵심이다. 이 중 특히 처음 두 조목인 격물, 치지의 뜻을 파악하는 데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다름이 두드러진다. 주희는 격물치지를 ‘사물의 이치를 철저하게 파악하여 앎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한 반면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은 격물치지를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해서 앎을 이룬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즉, 주희는 진리탐구를 중시하고 왕수인은 도덕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 되어, 오늘날 주자학을 이학(理學), 양명학을 심학(心學)이라고도 하게 된 것이다. 해석의 차이는 먼저 글자의 뜻을 달리 파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주희는 격물치지의 ‘격(格)’을 ‘사물의 이치를 철저히 파악한다’, 즉 ‘궁리(窮理)’의 뜻으로 이해한 반면 왕수인은 격에 자격의 뜻이 있다고 하여, 격을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 즉 ‘정기부정(正基不正)’으로 이해했다. 이렇게 할 경우 ‘물(物)’의 의미도 심각하게 달라진다. 주희에게 물은 나와 따로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일 뿐이지만 왕수인에게 물은 바를 수도 있고 바르지 않을 수도 있어서 내가 주체가 되어 파악하여야 할 ‘주관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왕수인은 평소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를 구한다는 것은 가령 부모에게서 효의 이(理)를 구한다는 말과 같다.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면 효의 이는 과연 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부모의 몸에 있는가?”(왕수인 <견습록>, 민음한국사총서 02, 92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왕수인이 주희를 비판한 말이다. 앞에서 양명학은 도덕적 실천을 중시한다고 했다. 왕수인에 의하면 부모를 모시는 데 불효한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이런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아 효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격물’이 되는 것이다. 주자학이 객관주의라면 양명학은 주관주의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인류 역사의 모든 사상은 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용어에 포괄된다. 가톨릭이 객관주의라면 프로테스탄티즘은 주관주의다. 가톨릭은 객관적 권위(교황)를 절대화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이 바이블이나 기도를 통해 교황의 개입 없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농업이 객관주의라면 상업은 주관주의다. 농사는 객관적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상업에는 매번 개인의 주관적 결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적으로 16세기는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농업에서 상업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중앙집권체제와 정착민의 삶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방분권체제와 유목민의 삶은 주관적이어야 한다. 조선에서는 16세기에 양명학이 대두되었지만 주자학에 밀려 세를 얻지 못했다. [4]

주자학 일변도로 정착되어 있던 당시의 유학계에서는 양명학 배척론이 우세하여 그 유입을 금하고, 양명학을 수용하고자 노력했던 학자들을 이단(異端)또는 사문난적(斯文亂的)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이것은 박세당(朴世堂)이 주자학을 비판하자 이를 사문난적이라 하여 유배시킨 사건과 흡사하다. 양명학 반대론자의 대표자는 이황(李滉)으로서, 그는『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양명의『전습록』이론을 성리학에 의하여 비판하였다. 그를 따르던 학자들과 후대의 성리학자들이 참여하여 양명학 배척의 분위기가 고조 되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왕양명이 주자학을 비판한 것을 다시 조목별로 반박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이후 조선 유학계를 더욱 성리학 일변도로 만들어 고답적이고 고지식한 경향을 띠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양명학 찬성론자들은 주자학 일변도를 비판하고 조선 유학의 활성화를 위하여 양명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양명학을 연구한 학자로는 남언경(南彦經), 이요(李謠),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등이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는 조선 양명학 연구의 최고봉이다. 후일 실학자 이익(李瀷)은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 경향의 공리공론을 비판하였으며, 구한 말 박은식(朴殷植)은 유교를 대중화하고 민중의 유교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양명학이 필수적이라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정인보(鄭寅普)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하여 미지의 영역이었던 한국 양명학의 연원을 찾는 데 중대한 시금석을 마련하였다.[5]

조선 양명학은 정제두에 이르러 집대성됨으로써 절정을 이루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활동하였던 정제두는 주자학을 정통 학술로 삼았던 조선 학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는 남언경과 장유의 학설을 수용하여 발전시키고 최명길의 학풍에도 접근하여 조선 양명학을 계통적으로 이어나갔을 뿐만 아니라, 정주학자 중에서 기대승(奇大升)과 윤증(尹拯)의 학문을 존중하여 자신의 양명학 체계에 수렴하였다. 주자학이 지배하던 학문 풍토 속에서 양명학에 대하여 심도 깊은 연구를 수행하던 그의 학문 태도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성학(聖學)에 대한 굳은 신념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이는 훗날 강화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계승 발전되었다. 정제두는 1711년(숙종 37) 8월 경기도 안산에서 강화로 이주하는데, 이를 계기로 생을 마칠 때인 1736년(영조 12)까지 그곳에 거주하면서 정후일(鄭厚一)과 이광사(李匡師) 등에게 강학하였다. 이후 이영익(李令翊), 이충익(李忠翊), 정동유(鄭東愈), 이면백(李勉伯), 이시원(李是遠) 등을 거쳐 신작(申綽), 이건창(李建昌), 이건방(李建芳) 등에게로 이어져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를 일반적으로 ‘강화학파’라고 부른다. 강화학파의 학풍은 근대의 정인보에게 전수되었으며, 박은식(朴殷植)이나 송진우(宋鎭禹) 역시 정인보와 교유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다. 조선후기 실학파와 개화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학의 형성에 영향을 준 것으로는 서구의 종교 및 과학 사상, 청대의 고증학과 양명학 등을 들 수 있는데, 학문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주자학의 편협성과 배타성을 비판하고 현실 타개를 중시하여 지도 이념과 현실 일치를 주장한 양명학의 사상과 정신이 실학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양명학은 주자학의 정통적 권위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통로를 열어 주었고, 실학사상의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이 시대 사상사에 의미 있는 기능을 담당하였다.[6]

양명학은 기준과 중심이 내 마음 안에 있다고 본다. 따라서 내 마음 밖의 이치와 원칙이 중심인 주자학과 대비한다. 주자학을 출세를 위한 관학(官學)으로, 양명학을 민학(民學)으로도 구분하기도 한다. 양명학은 지행합일, 즉 아는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양명학은 주자학을 지배 이데올로기화한 조선시대 지배층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양명학은 ‘양지’(良知)를 찾는 학문이다. 양지란 우리가 통상 말하는 양심(良心)이나 유교의 천성이나 본성. 불교의 불성, 기독교의 영성과도 다르지않다. “자기만 살려는 행동은 본래 양지가 아니다. 살면서 형성되어은 습심(濕心)이다. 우리가 경쟁적으로 자기 욕망만 위해 달리다보니, 본래 가진 양지를 잃어버리고 후천적 습관에 의해 형성된 습심에 의해 행동하고 만 것이다.”“양명학자인 독립운동가 정인보 선생은 ‘간격(間格·막힘)에 의해 죽고, 감통(感通·느낌이 통함)에 의해 산다’고 했다. 소통이 주로 언어가 통하는 것을 말하는데 비해 감통이란 감정이 통하고 마음이 통한 것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 그와 한마음으로 통해 구해주겠다고 물로 뛰어드는게 감통이다. 온 국민이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과 마음이 통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고 있다. 감통이 된 것이다.”그는 “왕양명 선생이 모든 유기체는 다 하나라는 천지만물일체론을 내놓았는데, 이해타산과 욕심이 차면 일체임을 잃어버리게 된다”며 “세월호 사건은 마음으로 우리의 일체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유교의 본질은 오륜이다. 삼강은 변질된 것이다. 진시황이 통일제국을 이루면서 법가의 이론을 유학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신하의 근본이라는 군위신강(君爲臣綱)같은 주종관계는 유학의 본질이 아니다. 군신유의(君臣有義)가 본질이다. 군신유의란 임금이라서 따르는게 아니라 옳은 것을 따르는 것이다. 군위신강은 깡패라도 따르라는 것이지만 군신유의는 옳지않으면 따르지 않은 것이다. 삼강은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지만 오륜은 사리와 공의를 구분해 정의를 실현하게 한 것이다.각자가 자신의 양지에 따라 정의를 지킨다면 이런 불행이 생길 수 없다.”[7]

주자학에서 이(理)는 도덕과 이념, 기(氣)는 욕망과 현실이다. 성리학이 ‘이’에 집착한다면 양명학은 ‘기’ 또한 중시했다. 조선은 ‘이’가 독주하는 나라였다. ‘이’에 집착하면서 사화가 반복해 일어났으며 위정척사가 탄생했다. 임건순은 “성리학과 달리 양명학은 상인과 무인에게 어울린다.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다. 기업을 창업하는 것과도 잘 맞는다”면서 “대한민국은 ‘고려 DNA’를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생전의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도 “우리는 대원제국과도 싸운 나라”라면서 “동아시아의 고슴도치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8]

한국인 집단정서의 이중구조를 잘 살펴야 한다. 한국인 집단정서에는 외곬의 순수주의 지향이 똬리 틀고 있다. 일테면 조선시대 시조에서 가장 빈번한 시어가 "명월(明月)"이고, "청산(靑山)"이며, "고죽(孤竹)", "송림(松林)" 등이다. 온통 지조-절개의 상징어들인데, 한국인은 그만큼 못 말리도록 순수를 좋아한다. 유감스럽게도 그게 때론 편협함으로 치닫는다. 조선조 당쟁도 그렇고, 양명학조차 사문난적으로 규정해 주자학만을 고집하는데서 보듯 우린 작은 차이나 현실에서 묻은 때를 참지 못한다. 그게 지나치게 명분에 매달리며 흑백논리에 대한 집착을 낳고 고질적인 근본주의를 키운다. 그렇다. 순수함이란 약이자 독인데, 그건 국민 심성의 차원을 넘어 정치사회사적 유산이기도 하다. 시시때때로 폭민(暴民)정치로 돌변하는 한국정치의 소용돌이, 지구촌 최악인 북한 전체주의의 광기도 결국엔 그 차원이다. 순수주의가 편협함으로 흐르고 그게 끝내 악성종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9]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며 동아시아 근세사상사에서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양명학은 근세 일본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까? 통설에 의하면 일본인이 양명학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660년 전후의 시기라고 한다. 또 이 17세기는 일본에서 신유교(新儒敎)가 활발하게 수용되어 사상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이며 주자학파와 양명학파 이외에도 유교사상의 안티테제로서 출발한 고학파(古學派), 고문사학파(古文辭學派) 등이 성행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자학의 사상사적 위상에 비하여 도쿠가와 시대 일본에서의 양명학은 비록 다수의 양명학자를 배출했다고는 하나 그다지 주목받는 사조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양명학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막말유신기이며, 메이지시대가 되어 비로소 그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근세 이후 일본 지식인층에서의 유교사상에 대한 인식은 다름 아닌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대한 초월과 극복의 과정이었으며, 양명학은 막말기(幕末期) 일본 지식인층들에게 지사정신(志士情神)으로서 높이 숭앙받았던 사상적 조류였다. 그 단적인 예가 주자학의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고학파(古學派)와 국학파(國學派), 미토학(水戶學)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양명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양명학(=요메이가쿠)이라는 명칭 자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신조어(新造語)이며 본토 중국에서의 명칭은 요강학(姚江學)이나 심학(心學)으로 불리던 것이었다. 고지마 쓰요시(小島毅)는 근년 근대 일본의 양명학(近代日本の陽明学)(講談社, 2006)을 간행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 근대 메이지(明治) 제국을 지탱한 세 가지 사상 축으로서 칸트(독일 철학자)와 양명학 및 무사도(武士道)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은 이 책의 에피소드 넷째 부분에서 소제목으로서 명명한 「제국을 지탱한 사상─칸트․무사도(武士道)․양명학(陽明學)─」이라는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 근대 메이지시대의 대표적 양명학자인 미시마 주슈(三島中洲)는 1877년 도쿄(東京) 치요다쿠(千代田区) 고지마치(麹町)의 자택에서 한학(漢學) 전문학교를 개설하고 후에 도쿄 구단(九段)에서 니쇼가쿠샤(二松学舎)를 설립하였다. 이 니쇼가쿠샤(二松学舎)는 미시마 주슈(三島中洲)의 학문정신에 의거하여 양명학에 의한 교육을 표방하는 학교였다. 지금도 일본의 양명학 연구의 메카라 하면 이 학교를 꼽고 있으며 양명학 정신에 의거한 건학 정신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덧붙이면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등 일본 근대의 대표적 지식인들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일본 근대기에 양명학을 보편화시킨 인물로서 미야케 세쓰레이(三宅雪嶺)와 그가 참여한 국수주의자들의 문화단체인 세이쿄샤(政敎社)에 주목해 보면 이것은 양명학을 국수주의적 입장과 연결시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메이지시대에 양명학이 기독교와 매우 닮아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양명학을‘기독교화(基督敎化)’하려 했던 인물로서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의 존재도 있다. 우치무라 간조는 그 자신이 영어로 정리한 대표적 일본인代表的日本人(1894년)이라는 저서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양명학자였다고 하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구미(歐美) 지역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폭넓게 인지시키는 효과를 얻기도 하였다. 이와 비슷하게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의 무사도武士道(1899년)도 무사도정신의 기초로서 양명학을 언급한다. 이처럼 메이지시대가 되어 양명학은 다양한 측면에서 각광받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막말유신기부터 서서히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왜 주자학이 아니고 양명학이 일본에서 각광을 받았던 것일까? 그것은 양명학이 지닌 특징이 ‘이론 지향’보다는 ‘실천 지향’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담당자들이 활동한 시대적 상황이 막말유신기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중국 양명학은 명대 중기부터 명대 말기까지 성행하였는데, 이 시기는 명조(明朝)가 대내외적으로 혼란과 위기를 겪고 있던 시기이며 이러한 점이 일본의 막말유신기와 유사하다는 점―, 그리고 중국의 양명학자들이 사회질서의 구축과 유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이 일본의 재야 지식인층에게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10]

대만과 중국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같은 유교권 국가에는 모두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 또는 대성전(大聖殿)이 있다. 문묘의 주인공은 물론 유학의 시조로 불리는 공자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한 문도의 위패를 모시고 함께 제사 지낸다. 4자(四子)라 하여 안자(안회) 증자(증참) 자사자(자사) 맹자(맹가)를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받든다. 공자의 수제자 10명을 뜻하는 공문십철(孔門十哲)이 그 다음이요, 다시 십철을 제외한 72현(賢) 중 다른 인물과 한대 송대 명대의 명유(名儒)가 포함된다. 이를 배향(配享)이라 부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현(聖賢)이라 함은 엄밀히 말해 여기에 배향된 유학자를 말한다. 그러데 그 구성원이 유독 한국만 다르다. 하나는 있음에서 나오고 다른 하나는 없음에서 나온다. 있음은 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송시열 같은 한국의 명유를 ‘동국18현’이라 하여 함께 모신 것을 말한다. 일본은 자체 유학자를 배향하지 않았다. 없음은 육구연과 왕수인(왕양명)으로 이어지는 심학(心學) 계열의 유학자가 빠져있는 것을 말한다. 심학은 곧 양명학이다. 성리학의 이칭인 이학(理學)에 대응하는 말이다. 성리학을 송대 유학자 주희가 집대성해 주자학으로 불리듯 양명학은 명대 유학자 왕양명이 확립했기에 양명학으로 불린다. 그런데 왜 양명학 계통의 유학자가 한국의 문묘에만 쏙 빠졌을까.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이 왕양명의 이론이 겉으론 유학을 내세우지만 속으론 불교와 도교와 다름없다며 유교의 이단자를 일컫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 유성룡은 왕양명에 대해 묻는 선조에게 스승의 말을 전했는데 “만약 이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만나 그 뜻을 행하였다면 그 화가 진시황 때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심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퇴계는 오로지 전습록만 읽고 “주희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고 한 왕양명의 말이 거짓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유학의 본토였던 중국은 물론 조선을 통해 성리학을 수입한 일본에서조차 폭력의 위협과 이익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도덕성의 함양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으로 공인받았다. 주자학이 성현의 가르침을 이치에 맞게 이해하는 게 초점을 맞췄다면 양명학은 성현 말씀의 문자적 해석보다 내면의 깨침을 더 중시했다. 불교에 비유하자면 주자학은 교종이고, 양명학은 선종이다. 주희가 기독교 교부철학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경전을 집대성한 해석학의 대가라면 왕양명은 종교혁명을 촉발한 마르틴 루터처럼 그 말씀을 내면화해 각자의 실천(지행합일)을 역설한 혁명가였다. 이는 ‘대학’에 등장하는 성인의 덕목으로 팔조목의 해석차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팔조목이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다. 주자학은 뒤의 네 조목을 단계적으로 풀이한다. 먼저 자신의 심신을 닦고, 집안을 평안히 한 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리리라는 것이다. 반면 양명학은 이를 동시간적으로 바라본다.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는 일은 평생을 가도 끝내기 어렵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병행할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인군자가 되느냐를 두고도 차이가 발생한다. 중국의 계급질서는 ‘황제-제후-공경-대부-사-서인’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공경은 삼공과 구경이라는 고위직을 맡는 상층귀족을, 대부는 중하위귀족을 말한다. 사(士)는 중앙정부의 말단관료거나 제후나 공경의 가신을 뜻한다. 서인은 생산에 종사하는 농부 공인 상인이다. 고대에 성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황제나 제후여야 가능했다. 공자는 군자라는 말로 그 가능성을 확대했다. 하지만 현실에선 대부 정도까지만 가능했다. 송대 성리학은 이를 사대부로 확산시켰다. 사대부란 대부(大夫)와 사(士)를 합친 단어인데 하위직인 사(士)가 고위직인 대부(大夫)의 앞으로 나서는 역전이 발생했다. 혈통을 중시하는 귀족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선발된 전문 관료가 중앙정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현상에 조응한 변화였다. 명대에 성립한 양명학은 성인의 경지를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했다. 왕양명의 ‘전습록’에 등장하는 ‘만가성인(滿街聖人)’이란 표현이 이를 상징한다. 온 거리가 성인으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양명학의 이런 강렬한 평등의식을 퇴계와 그의 후예들은 간과했다. 동아시아 3국 중에서도 유독 한국에서 천주교 신자가 넘쳐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조선 유학자들이 사농공상 계층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양명학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양명학이 상륙하지 못함에 따라 생긴 지적 공백을 ‘천주 앞에 만인의 평등’을 내세운 천주학이 대체했기 때문 아닐까. 2500년 전 공자는 이미 ‘만가성인’의 사상을 품고 있었다. 왕족과 귀족 자제를 위한 사교육 시장만 넘쳐나던 시대에 사립학교를 열고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육포 한 묶음의 수업료만 내면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너희도 학문을 통해 성인군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를 압축한 공자의 말이 ‘오직 가르침만 있을 뿐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의 ‘유교무류(有敎無類)’다. 공자가 만세의 사표로 불리는 진정한 이유다. [11]

강화양명학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인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와 이광려 등을 주축으로 한 학파를 이르는 말이다. 정제두는 강화도를 거점으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면서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이 확립된 이후 그 아들인 정후일(政厚一)과 그의 문인인 이광명(李匡鳴), 이광려(李匡呂)등에게 전승되었다. 이후 가학(家學)으로 전승되었는데, 이와 같이 정제두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학통을 '하곡학', '강화학', '강화양명학', '강화하곡학', 등으로 부르고 이러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를 강화학파라고 하였다. 학술의 내용으로 보면, 그들은 정제두 이래로 양명학을 수용하고 도교와 불교까지 섭렵하고자 했고, 이학(理學:유학)보다는 한학(漢學)을 연구하고 동시에 국학(國學)을 일으켰다.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소화했으며, 훈민정음연구·국어학·국사학·서법(書法)·문자학·문헌학 분야에서 탁월한 논저들을 남겼다. 강화학파의 학자들에는 서법에 이광사(李匡師), 국사학에 이긍익(李肯翊)과 황현(黃玹), 한학(漢學)에 신작(申綽), 훈민정음연구에 유희(柳喜), 문자학에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 남극관(南克寬) 등 오늘날 국학 분야에서 거론되는 선구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학맥에 속한다. 홍양호(洪良浩)나 이종휘(李種徽)같은 학자들도 이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12]

“하곡 이전에 양명학을 연구한 남언경·장유·최명길·이유 등을 하곡학의 연원으로 꼽을 수 있다. 하곡학파를 형성한 초기 인물로는 이광명·이광사·이광신·심육 등이 있다. 그 다음 세대로는 이영익·이충익·신대우·정동유·이면백 등이며, 또 그 다음 세대의 이시원·이지원·이건창·이건승·이건방을 거쳐 정인보에 이르렀다.”하곡학의 특징은“조선 후기 실학의 실질적인 발상지였다. 하곡의 직계 제자들은 ‘실심실학(實心實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실심실학이 바로 하곡학의 핵심이다. 해방 이후 우리 학계에서 ‘실학’은 경세치용·이용후생의 실리적 측면만 주목 받았다. 하곡학으로 실학의 실체를 다시 파악해야 한다. 실학에서 학파로서 실제 존재했던 것은 하곡학파였다.”“‘실심’이란 자기를 속이지 않는 참된 마음을 가리킨다. 실학이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부단히 변화하는 현실에서 실천하는 학문을 말한다. 실심실학은 자기의 사적인 실리만을 챙기면서 도덕을 빠트린 ‘실용실학’과 차별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맹목적 명분에 빠진 이상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이다. 하곡학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실심을 강조하여 우리의 역사와 한글을 연구하는 실학의 원류가 되었다.”[13] 하곡과 같은 시대에 중국과 일본에선 조선과 달리 양명학이 번성했다. 20세기 이후 세계 유학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양명학이다. 김수중 회장은 "안으로 내 마음의 양지(良知.배우지 않고도 선악을 구별할 수 있도록 타고난 마음의 본체)를 기반으로 하면서 밖으로 인간 사회를 여실히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대동정신이 양명학의 특징"이라고 했다. [14]

대동정신

강화학파는 1709년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가까이 지내던 소론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강화도로 물러나 은거하면서 소론학자 중심의 학맥이 200여 년 동안 형성된 것을 지칭한다.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의 양명학설을 따른 강화학파는 비록 이기론을 사상적 기초로 삼았지만 ‘공평의 원칙’과 시세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적인 실사구시’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주어 한말 민족주의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을뿐 아니라 강화 3·1 운동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한국 전통사회에 전래된 가톨릭은 ‘척사위정’의 유교적 가치관과 갈등과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인해, 가톨릭에 대한 강력한 박해로 귀결되었다. 황사영이 로마교황청에 보내려다 중도에 발각된 것이 「황사영백서」 사건인데, 그 서신에 ‘전함 수백 척과 정병 5~6만을 내어 대포 등 강력한 무기를 다량으로 싣고 와서’ 엄포를 놓으라고 요청한 사실에서 ‘나라는 없어져도 교회는 존속해야한다’는 반민족적인 주장이 확인되었고 이는 한국전통사회가 반가톨릭적 입장을 견지하게 하여 나중에 전래된 개신교 또한 배척하기에 이른 것이다. 개신교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게 된 전통 유교사회에서 강화개신교는 적극적으로 한국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탈피하고자 ‘민족교회’로서의 방향을 설정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강화의 3·1운동은 길상면 지역의 감리교 교인이 중심이 되어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강화중앙교회 100년사』). 강화의 감리교 개신교의 전래와 강화학파와의 관련성을 보다 집중적으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제는 정제두의 양명학을 ‘강화학파’로 지칭하여 세계화에 힘쓰는 지역 지식인 중 다수가 크리스찬임을 생각할 때 강화의 문화지형은 감리교 개신교가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15]

강화양명학은 하곡 정제두선생으로부터 이어져오는 강화의 대표적인 학문, 사상분파로서 당색으로는 소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강화양명학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 말과 실천은 하나(知行合一), 실천에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특징은 주자학과 달리 강력한 주체의식과 평등의식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학문적 경향으로 강화양명학자들은 구한말 명분을 내세우던 주자학자(이완용등 노론세력)와 현실참여를 지향하던 개화파(박영효등)의 상당수가 친일을 통해 현실과 타협한 데 비해 단 한명의 부역자 없이 현실에서는 쓰라리고 어려웠으나 올곧은 정신을 유지하였다. 서여 민영규 선생이 쓴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 이와 같은 사연이 절절이 담겨있다. 영재 이건창의 동생인 경재 이건승, 난곡 이건방, 그리고 그의 제자인 위당 정인보선생이 그러하다. 그들은 강화에 있으면서 계명의숙을 설립하여 교육운동에 매진하였으며, 만주로 망명해서는 정원하, 홍승헌, 이석영, 이회영, 이상설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분이다. [16]

서울의 우당 이회영, 안동의 백하 김대락, 석주 이상룡, 충청도 진천의 홍승헌·정원하, 강화도의 이건승 등이다. 나라를 찾겠다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은 대부분 소론 계열이다. 이 집단 망명을 주도한 이는 우당 이회영이었다. 이회영과 이상룡 등은 전 재산을 털어 만주에 경학사, 부민단 등 민단자치조직을 만들고 신흥무관학교를 열었다. 독립전쟁사의 서막을 연 것이다. 전국적·조직적으로 이뤄진 이 집단 망명자들의 사상적 배경을 탐색해 나간다. 그 중심에 양명학이 있다. 홍승헌과 정원하, 이건승은 양명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망명일기’에서 ‘왕양명실기’를 읽은 소감을 적어놓은 석주 이상룡 역시 양명학에 깊이 공감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소론이라는 당파적 동일성과 양명학이라는 학문적 동질성으로 연결돼 있었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취급받은 양명학은 사대부의 계급적 우월을 절대시하는 성리학과 달리 인간의 선천적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세계관은 곧 천지만물을 하나로 보는 대동사회 건설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저자는 공화주의와 아나키즘과 만난다고 본다.‘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리는 명문 가문 출신으로 아나키스트가 된 이회영에게도 양명학의 연결고리가 있다. 양명학이 이회영이 속한 소론 가문의 전습 사상이었다는 점, 양명학을 공부한 이상설과 함께 공부했으며 평생지기였다는 점, 강화학파들과 사전 계획 끝에 동시에 망명했다는 점 등다. 저자는 아나키즘 이론이 양명학의 대동사회론과 비슷한 점이 많아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본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이회영은 고종의 망명을 추진하기도 했다.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가 고종의 복위나 조선왕조의 복벽을 시도한 건 아니란 평가다. 고종을 통해 독립을 세계적인 정치문제로 제기하고 한편으론 고종을 따르는 양반사대부들로부터 군자금을 얻어내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회영과 함께 집단 망명을 한 석주 이상룡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선임된 인물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내각책임제 책임총리였던 셈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군주제를 전면부인하고 공화제를 주장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1919년 공화제를 주창한 것에는 이상룡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저자는 평가한다. 저자는 특히 그가 이끈 대한협회 안동지회와 경학사 등 단체와 사상에 아나키즘적 요소가 적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집단 망명가들이 전 생애를 걸고 독립전쟁에 나선 사상적 배경을 동양의 전통사상에서 찾았다는 데 이 책의 새로움이 있다. 특히 전통적 사상인 양명학이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밝힌다. 독립운동가들은 양명학의 사해동포주의에서 공화주의의 근거를 찾았고 이런 사상으로 자치조직인 경학사, 부민단 등을 운영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것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17]

나라가 사라지고 만 1910년 경술년 겨울이었다. 중국 간도 땅 유하현 횡도촌에 몇 무리 사람들이 모였다. 모인 사람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강화도에서 온 양명학자 이건승과 홍승헌, 정원하 그리고 소론 출신 서울 갑부 이회영 6형제와 이동녕. 안동에서 온 이상룡도 합류했다. 이상룡은 부유하되 권력과 거리가 먼 남인 출신 안동 사대부였다. 이상룡의 손자며느리 허은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회영, 이시영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합방이 되자 이동녕씨와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해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 그들이 만주로 향하는 동안 한 줌 되지 않는 친일파들은 나라를 팔아먹고 있었다.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이 일어나고 '위로 진산, 동으로 진주, 남은 목포로부터 일본군이 그물을 쳐놓은 것 같다. 강한 자는 적진에 돌진해 싸우다 죽고 다친 자는 꾸무럭대다 칼을 받았다. 갈 곳이 다하니 죽은 자가 무려 수천명이었다.'(황현, '매천야록') 의병 사망자가 1만7779명, 부상 376명, 포로 2139명. 말 그대로 초토화였다. 체포된 의병들은 해남에서 하동까지 이어지는 도로 건설에 투입됐다. 도로명은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했다.(한민족문화대백과)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과의 전쟁은 전선을 옮겨야 했다. 많은 무리가 간도와 연해주로 망명해 독립군으로 변신했다.

1909년 그 잔인한 가을, 광양 선비 황현은 강화도에 있는 이건창의 무덤 앞에 있었다. 이건창은 황현, 김택영과 함께 구한말 삼재(三才)라 불리던 사람이다. 이건창은 양명학자다. 할아버지 이시원은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가 프랑스에 넘어가자 동생 지원과 함께 자결했다. 막내 희원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며 담소를 나누다 숨이 끊겼다고 했다. 이건창은 그 피를 이어받고, 집안 대대로 공부한 양명학에 정통한 학자였다. 집권층인 노론이 성리학과 사대주의에 몰두해 있을 때 실용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던 학자였다. 벼슬아치 시절 이건창은 앞뒤 안 가리는 강퍅한 성질로 세도가들과 친하지 못했다. 대신 민심은 크게 샀다. 타협할 줄 모르는 그는 수시로 암행어사로 탐관오리들을 척결해 권력가들 불만을 샀다. 서울 송파와 강화도, 인천 모도에는 그의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이건창이 사는 강화도에는 많은 후학이 와서 공부를 했다. 이들 양명학자를 강화학파라 부른다. 제도권에는 있되 권력과 거리가 있던 소론파, 현실 직시파들이었다.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과 건방, 동학 정원하, 홍승헌과 함께 황현은 선배 이건창에게 술잔을 올리고 낙향했다. 이듬해 9월 10일 황현은 자결했다. 유언은 이러했다. '식자(識者)로 살기가 쉽지가 않구나.' 황현이 죽고 2주가 지난 1910년 9월 24일 새벽 이건승은 만주로 떠났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자살 미수에 그쳤던 그였다. 이건승에 이어 속속 만주에 합류한 이들은 홍승헌, 정원하 그리고 신채호와 박은식이다. 모두 양명학자다. 이건창의 막냇동생 이건방은 강화도에 남았다. 동행하겠다는 동생을 형인 이건승이 '양명학을 이으라'며 눌러 앉혔다. 그 이건방이 만든 계명의숙에서 사학자 정인보가 공부를 했다.[18]

1909년 가을, 매천 황현(黃玹)은 전라도 구례에서 서울로 향했다. 중국으로 망명했던 김택영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택영은 이미 재출국했고 황현은 이건방·이건승 같은 양명학자들과 강화도로 가서 이건창의 묘소를 찾았다. 황현은 이건창을 위로하는 오언율시를 지었다. ‘외롭게 누웠다고 슬퍼하지 말 것을/ 그대는 살아서도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在日已離群). 절창이었다. 황현은 귀로에 서울 남산에 올라가 대궐을 굽어보며 통곡했다. 이듬해 나라가 망하자 ‘난리 속에 지내다 머리가 세었네/ 몇 번이나 버리려던 목숨이었나’라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은 그가 스스로 끊은 목숨만큼이나 날카로운 붓으로 시대를 비판한다. ‘매천야록’은 고종이 스스로 노론(老論)으로 자처하면서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노론이면 ‘친구’(親舊)라고 부르고, 소론이면 ‘저쪽 편’(彼邊), 남인·북인일 경우에는 ‘그놈’(厥漢)이라고 비하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고종이 친구로 여긴 노론의 마지막 당수 이완용은 친구와 민족을 배신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다. 황현 자결 직후 이건방·이건승 등의 양명학자들은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숙의 끝에 이건방은 남아서 조선 양명학을 전수하기로 하고, 이건승은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건방은 국내에서 정인보 같은 양명학자이자 역사학자를 배출했고, 이건승은 망명해 극도의 궁핍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건승이 자리 잡은 곳은 만주 유하현 횡도촌(橫道村)이었다. 만주의 작은 마을 횡도촌에는 이건승뿐만 아니라 충청도 진천의 양명학자 정원하도 있었고, 서울에서 집단 망명한 우당 이회영 일가도 있었다. 경상도 안동에서 망명한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가도 모였다.

필자는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곳이 횡도촌이란 사실에서 전국적 규모의 집단 기획 망명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1911년 봄,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 자치 조직인 경학사(經學社)를 만들었으며 그 부설로 신흥무관학교를 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군사 교육 외에 역사 교육도 병행했는데, 그 중에서도 고대사를 중시했다. 민족의 뿌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독립 전쟁에 나설 수 있는 원동력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가 교재였다. 이 책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상룡이 망명하면서 쓴 망명 일기 ‘서사록’(西徙錄) 등의 기록을 보면 그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현재까지도 쟁점이 되는 것이 한(漢)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다. 조선총독부는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국사가 식민지로 시작한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이상룡은 일제가 이런 역사 왜곡에 나설 것을 알았다는 듯이 ‘한사군은 모두 요동에 있었다’고 갈파했다. 북한은 1962년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출간하면서 ‘낙랑군=평양설’을 폐기시키고 ‘낙랑군=요동설’을 채택했다. 그러나 남한의 강단 사학계는 북한이 56년 전에 이미 폐기 처분한 ‘낙랑군=평양설’을 이른바 ‘정설’이라고 떠받들고 있다. 북한이 남한을 식민지라고 비판했던 근거 중의 하나가 조선총독부 학설을 추종하는 ‘식민 사학’이었다. 현 정부는 석주 이상룡의 옛 집인 임청각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건물 복원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는 이상룡의 역사관을 복원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 적폐 중의 가장 오랜 적폐는 아직도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식민 사학 적폐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많은 국민들은 현 정권이 식민 사학을 청산하고 석주 이상룡과 단재 신채호 등의 역사관을 복원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현 정권 들어 식민 사학자들은 제 세상 만난 듯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바로 이런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공수처 실종 등 지지부진한 개혁 진행 상황과 함께 현 정권 지지율 하락의 근본 원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19]

1910년 서울, 이회영 형제

이건승이 만주로 떠난 석 달 뒤 서울에 살던 이회영 집안이 만주로 갔다. 건영, 석영, 철영, 회영, 그리고 시영과 호영 6형제다. 망명은 넷째인 이회영이 주도했다. 서울 명동 상동교회에서 만든 민족단체 신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양기탁 같은 활동가와 독립운동을 기획해갔다. 1908년 만주로 답사를 떠난 이회영은 만주에 해외독립기지 설립을 결정했다. 뜻이 있었고, 돈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있었다. 이회영 집안은 충북 진천에 사는 양명학자 홍승헌 집안과 친했다. 역시 집안 어른인 이상설 또한 홍승헌과 동향이었다. 강화학파가 차례차례 만주로 떠나고, 이회영 일가는 서울과 경기도에 있는 토지 수백만 평을 모두 팔았다. 이미 이상설은 용정을 거쳐 헤이그밀사로 갔다가 연해주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11년 안동, 이상룡과 김동삼 안동은 반골 도시였다. 임진왜란 이후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였다. 권력은 없었으나 고집과 기개는 강했다. 석주 이상룡도 그러했다. 의병활동을 하고 있던 이상룡은 신민회와 이회영의 계획에 동참했다. 혼맥으로 인연을 맺은 김동삼도 동참했다. 그리하여 1910년 12월 안동의 사대부 이상룡과 김동삼과 김대락 가족은 집과 논과 밭을 팔아 만주로 떠난 것이다. 김동삼의 의성 김씨 문중과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이 각각 150명씩, 그리고 혼맥으로 이어진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안동의 흥해 배씨,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 문중이 모두 동참해 미래의 독립운동기지를 향해 떠난 것이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상룡씨는 경상도 혁명 대표로 오신 분이라.'(이은숙, '서간도시종기')

1911년 1월 횡도촌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만난 곳이 만주 땅 유하현 횡도촌이었다. '응당 거기엔 억제됐던 감정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승이 남긴 기록 어느 구석에도 그런 흔적을 찾지 못한다. 비정하리만큼 무장된 함구(緘口)가 있을 따름이었다.'(민경규, '강화학 최후의 광경' - 이덕일, '근대를 말하다' 재인용) 감정 폭발 대신 그들은 자치기구인 경학사를 만들고 만주 독립운동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조선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을 길렀다. 자신들 또한 이념과 주장을 접고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해 요직을 지냈다.

1910년 10월 7일 조선 귀족 비장하고 스산했던 1909년과 1910년 그렇게 많은 이들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나라를 버렸다. 그런데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사라지고 두 달 뒤인 10월 8일, 조선 총독부 관보 38호 1면에 고시(告示)가 공포됐다. 제목은 '授爵, 敍任及辭令(수작, 서임 급 사령)'이다. 2면 한가득 명단이 게시돼 있는데, 모두 76명에게 '조선 귀족' 작위를 수여한다는 내용이다.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망명을 준비하는 사이, 고위직과 왕족으로 권세를 누리다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이다. 거액의 은사금과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작호를 받은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후작: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윤택영, 박영효 백작: 이지용, 민영린, 이완용(李完用) 자작: 이완용(李完鎔), 이기용, 박제순, 고영희, 조중응, 민병석, 이용직(3·1운동 가담 박탈), 김윤식(3·1운동 가담 박탈), 권중현, 이하영, 이근택, 송병준, 임선준, 이재곤, 윤덕영, 조민희, 이병무, 이근명,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김성근 남작: 윤용구(거부), 홍순형(거부), 김석진(거부), 한창수, 이근상, 조희연(반납), 박제빈, 성기운, 김춘희, 조동희, 박기양, 김사준(독립운동, 작위 박탈), 장석주, 민상호, 조동윤, 최석민, 한규설(거부), 유길준(거부), 남정철, 이건하, 이용태, 민영달(거부), 민영기, 이종건, 이봉의, 윤웅렬(박탈), 이근호, 김가진(임시정부 망명), 정낙용, 민종묵, 이재극, 이윤용, 이정로, 김영철, 이용원, 김종한, 조정구(거부), 김학진, 박용대, 조경호(거부), 김사철, 김병익(박탈), 이주영, 정한조, 민형식 [20]


그간 한국 아나키즘의 사상적 뿌리에 대해서는 연구된 적이 드물었다. 필자(이덕일)가 앞에서 든 몇 편의 논문에서 아나키즘과 양명학의 상관성을 언급한 것이 최초의 분석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이런 착안을 하게 된 것은 모든 사상에는 연원이 있다는 철학사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이런 사고를 가지고 시야(是也) 김종진(金宗鎭)이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회영의 천진(天津) 우거(寓居)에 찾아와 “무정부주의로 전향한 동기”에 대해서 물었을 때 이회영의 답변에서 일종의 힌트를 얻었다. 이회영은 김종진에게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또는 전환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만 한국의 독립을 실현코자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그 방책이 현대의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서로 통하니까 그럴 뿐이지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식으로 본래는 딴 것이었던 내가 새로 그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이회영이 ‘지금 깨달으니 과거가 잘못되었다.’는 ‘각금시이작비’의 결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한국 아나키즘의 연원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받아들인 아나키즘 사상이 과거의 사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 따른 전향이 아니라 과거의 사상에 뿌리를 둔 연장선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이전에 어떤 사상을 갖고 있었는지를 먼저 밝혀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인물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 약전(友堂 李會榮 先生 略傳)』을 저술한 이정규는 “(이회영)선생의 친척인 보재(溥齋) 이상설은 이러한 자유·평등의 혁명적인 면에서 선생과 친근하게 되었고 지기(志氣)가 서로 들어맞아 생사를 함께 하는 동지가 되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회영과 친척이자 지기였던 이상설은 고종 31년(1894) 문과에 급제한 후 1905년 정 2품인 의정부 참찬까지 올랐는데 고관 출신으로 대한제국을 집어삼키려는 일제와 한치의 타협도 없이 싸웠던 인물로서 초기 독립운동의 기둥이었다. 이정규는 “(이회영)선생도 이상설과 사귀면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과 정치·사회의 분야에서 많은 계발을 받았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상설은 세상을 떠나면서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는데, 이 유언을 들은 조완구, 이동녕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실제로 유언을 이행한 결과 이상설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직접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이회영이 젊은 시절 이상설과 함께 공부했다는 일부 사료가 남아 있어서 그 사상의 편린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李始榮)은 이상설이 서울의 장동(長洞)과 저동(苧洞:지금의 명동 성모병원 부근)에 살 때를 회상하며, “당시 보재(溥齋)의 학우는 자신(이시영)과 그의 백형(伯兄)인 우당 회영을 비롯하여 남촌(南村)의 3재동(才童)으로 일컬었던 치재(?齋) 이범세(李範世), 서만순(徐晩淳)과 미남이요 주옥같은 글씨로써 명필로 이름을 남긴 조한평(趙漢平), 한학(漢學)의 석학인 여규형(呂圭亨), 절재(絶才)로 칭송되던 시당(是堂) 여조현(呂祖鉉) 등이 죽마고우”라고 회상했다. 또한 이시영은 “보재(溥齋)가 16세 되던 1885년 봄부터는 8개월 동안 학우들이 신흥사(新興寺)에 합숙하면서 매일 과정을 써 붙이고 한문(漢文)·수학(數學)·영어(英語)·법학(法學)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고 회고했다. 이상설과 이회영·시영 등이 함께 공부했다는 것이다. 이관직도 “(이회영) 선생은 이상설과 숙의하여 이상설의 집에 서재(書齋)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모여 이상설·여준(呂準)·이강연(李康演) 등과 함께 담론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런 증언들을 통해 이회영은 이상설과 함께 합숙까지 하면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 이상설의 사상은 어떠했을까? 양명학에 대한 이상설의 사상을 알려면 그가 성리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를 살펴보면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설의 유학사상의 단초를 알 수 있는 글이 유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재(剛齋) 이승희(李承熙)에게 보낸 「강재 선생을 전별하면서(奉?剛齋先生)」라는 글이다.

성리학과 양명학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리(理)를 해석하는 방식인데, 성리학은 심(心)과 성(性)의 개념을 구분해서 성즉리설(性卽理說)를 주장했다. 성즉리설은 성리학의 주요 이론 중의 하나이다. 이승희의 부친이 영남 유림의 거두였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인데, 그는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나 조선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같은 주자학자들이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 것과 달리 심(心)이 곧 리(理)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해서 성리학이 주도하던 유림(儒林)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심즉리설(心卽理說)은 퇴계이래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이단으로 몰았던 왕양명(王陽明)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이상설도 이런 심즉리설에 동조하는 글을 「강재 선생을 전별하면서(奉?剛齋先生)」에서 피력했다. 이상설은, “마음은 능히 선(善)을 알 수 있고, 선을 좋아할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선을 아는 능력이 있으며, 선을 좋아하는 능력이 있으며, 선을 행하는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주희의 성즉리설(性卽理說)을 부인하고 왕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동조한 것이었다. 1896년 약관(弱冠) 27세 때 성균관의 교수 겸 관장에 임명되었던 저명한 유학자였던 이상설이 영남 유림의 거두이자 이진상의 아들인 이승희에게 심즉리설에 동조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자신이 양명학자라고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다. 마지막 양명학자인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보재(이상설)와 치재(이범세)가 사랑채 뒷방에 몸을 숨기고 왕양명(王陽明)하며 하곡(霞谷:정제두) 등 강화소전(江華所傳)을 읽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나도 어디에선가 글로 쓴 적이 있다”라고 이상설이 양명학을 공부했다고 기술했다. 이상설의 「강재 선생을 전별하면서(奉?剛齋先生)」는 민영규 교수의 이런 글이 사실임을 말해준다. 이상설의 양명학을 받아들였다면 이상설이 망명 당시 국내의 모든 일은 “오직 (이회영) 선생에게 부탁할 뿐이라는 당부의 말을 여러 차례”했으며 망명하는 이상설을 성 모퉁이에서 전송한 인물도 이회영이었다.라는 둘의 사정을 비춰볼 때 이회영의 사상도 양명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망국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망국의 원인을 깊게 분석한 결과 유학 사대주의가 망국의 주요원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일제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사관에 맞서는 민족사학을 개척했던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이 성균관 대사성과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정통 유학자임에도 나라가 망하자 대종교에 입교하는 것이나 역시 유학자였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이 「몽배금태조전(夢拜金太祖傳)」을 저술해 금나라 태조 아골타를 우리 역사상의 인물로 포함시키는 역사관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 등은 모두 유학 사대주의를 버린 결과였다. 그러나 이상설·이회영 등은 성리학 비판과 동시에 양명학을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학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사대부 계급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선천적인 것이며 이 계급만이 정치를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양명학은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힘쓰면 미칠 수 있’으면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부분이 조선의 주자학자들로부터 가장 큰 반감을 사서 이단으로 몰리게 된 대목이었다. 주자학자들은 표면적 왕양명의 ‘심(心)과 리(理)’, 또는 ‘양지(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에 대해 비판했지만 속으로는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양명학에 계급적 반감을 느껴 이단으로 몰았던 것이다.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양명학은 망국기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이 될 수 있었다.

만주로 집단 망명한 양명학자들과 한국 아나키즘의 양명학 수용 과정을 살펴보자.

그간 양명학이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거의 없다. 『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만주로 망명해 1914년 순국한 양명학자 홍승헌(洪承憲)의 몰년(沒年)을 물음표(?)로 적고 있을 정도이니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홍승헌과 함께 망명했던 정제두의 후손 정원하(鄭元夏)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원하는 『동아일보』 1925년 12월 2일자에서 그의 순국 사실을 보도했음에도 상황은 같았다.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선생이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던 강화학파들, 즉 한말의 양명학자들에 대해 부분적으로 서술한 것이 양명학과 독립운동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후 일제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사관을 추종하는 세력이 한국의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그간 이런 사실은 철저하게 베일에 갇혀 있었다. 홍승헌과 정원하의 말년 자체가 묻혀진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제 차차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망국 당시 주자학을 신봉하던 집권 노론이 당수 이완용을 필두로 조직적 매국에 나선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론 계열의 양명학자들과 이상룡, 김대락 등 성리학에 비판적이고 양명학에 우호적이었던 영남 남인들이 집단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사실도 차차 밝혀지고 있다. 당사자들과 함께 했던 가족들의 증언도 나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재종조부가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이자 그 자신이 석주의 손부(孫婦)였던 허은(許銀) 여사의 수기이다. 허은 여사는 이회영 집안과 이상룡 집안의 망명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이시영 씨 댁은 이참판 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이시영 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 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안동의 석주 이상룡이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를 알게 된 것에 대해 허은은 “그 전에 의병활동하면서 뜻 있는 사람들끼리 의기투합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의병 활동보다는 신학문이나 신사상 교육관계로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룡은 1909년 3월 대한협회 안동지회장에 취임했으며, 이상룡의 처남 김대락은 자신의 가옥을 출연하여 협동학교를 만들었다. 이회영은 1908년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한 이상설을 만나 “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교육을 장려할 것”을 결의했는데 교육 운동을 장려하는 과정에서 양자가 만나 의기투합했을 가능성이 크다. 독립운동 가문의 계보와 속사정에 정통한 허은 여사는 “(이상룡이) 이회영, 이시영 씨 형제분과 이동녕 씨와 의논해서 망명하기로 결정을 보았다”고 집단 망명임을 전하고 있다. 허은 여사는 망명 과정에 대해 “우당 이회영 씨와 함께 미리 와 서간도에 자리 잡고 있던 유기호 씨, 하재우 씨 등이 며칠 뒤 왕산댁이 계시는 다황거우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이분들이 이민 오는 동포들의 대책반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국 단위의 양명학자들을 주축으로 한 집단 망명을 성공시키기 위한 조직적 구조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안동의 석주 이상룡은 망명 일기인 「서사록(西徙錄)」에서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를 읽고 그 소감을 적었는데, 여기에서도 양명학을 언급하고 있다.

“대개 양명학은 비록 퇴계 문도의 배척을 당했으나 그 법문(法門)이 직절하고 간요하여 속된 학자들이 감희 의론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또 그 평생의 지절은 빼어나고 정신은 강렬하였다. 본원을 꿰뚫어 보되 아무 거칠 것이 없었으며, 세상의 구제를 자임하였으되 아무 두려움이 없었으니 한대(漢代)와 송대(宋代)를 통틀어 찾는다 해도 대적할 만한 사람을 보기 드물다. 또 그의 독립과 모험의 기개는 더욱 오늘과 같은 시대에 절실하다 할 것이다.”

‘송대를 통틀어 찾는다 해도 대적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라는 말은 송나라 주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왕수인(王守仁:왕양명)을 주희보다 상위의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상룡은 나아가 “우리들 중 어떤 사람이 능히 의연하게 자임하여 300년간의 학설을 세속된 무리와 도전하여 결투할 것인가?”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300년간의 학설이란 퇴계 이래의 성리학을 뜻하는데 이 학설과 ‘도전하여 결투’하자고까지 말하는 것은 양명학에 깊이 공감하고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집권 노론에서는 당론 차원에서 나라를 팔아먹은 반면 조선 후기 내내 야당이었던 소론과 재야였던 남인 계열에서 집단 망명에 나섰는데, 그들의 공통된 사상 기반이 양명학이었던 것이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는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하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李宣九)씨가 마중 나와 처소(處所)로 간다”고 역시 조직적인 과정을 거친 집단 망명임을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상룡 일가가 1911년 2월 7일 첫 번째로 정착한 곳이 유하현 횡도천(橫道川)이다. 이상룡은 당일 “오후에 김비서장(金賁西長)이 계신 곳을 찾아갔다”라고 적고 있는데 김비서장은 이상룡의 처남 백하 김대락(金大洛)이다. 김대락은 그보다 이른 1911년 1월 15일 횡도천에 도착했다. 그런데 횡도천에는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양반 사대부들이 있었다.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인물들로서 모두 강화학파, 즉 조선의 양명학자들이었다. 횡도천이라는 만주의 작은 마을에 서울의 이회영 일가와 안동의 김대락·이상룡 일가, 그리고 충청도 진천과 강화도의 양명학자들이 모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 없다. 이회영은 신민회원들과 함께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사전 답사까지 다녀왔던 터였다. 횡도촌도 이 과정에서 이회영 일행이 물색한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 횡도천에 가장 먼저 망명한 양명학자는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였다. 정원하는 강화도로 이주해 조선 양명학의 기틀을 놓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의 7세 장손이다. 정원하의 가문도 소론이었는데 이회영 일가처럼 드물게 현달한 집안이었다. 정원하의 조부 정문승(鄭文升)은 고종 12년(1875) 종1품 숭정대부까지 올랐으며 부친 정기석(鄭箕錫)은 지평 현감, 안성 군수를 역임했다. 정기석은 충청도 진천에 터를 잡는데, 진천에는 역시 횡도천으로 망명했던 양명학자 홍승헌(洪承憲)의 조부 홍익주(洪翼周)가 진천현감을 역임하면서 별업(別業)을 일으켜 자손들이 진천에 정착할 터를 잡게 되었다. 홍승헌은 영조·정조 때의 명신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5대 종손인데, 홍익주와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음으로써 진천은 강화도와 함께 양명학의 주요한 근거지이자 소론 반향(班鄕)이 되었다. 역시 소론 가문이었던 이상설(李相卨)이 진천 출신인 것과 이건방의 문인 정인보가 한때 진천에 자리 잡은 이유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이는 진천 출신 이상설이 양명학을 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강화도에서 망명한 이건승(李建昇)은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이자 병인양요 때 자결 순국한 이시원(李是遠) 형제의 손자였다. 이건승이 강화도의 고향집을 나선 것은 1910년 9월 24일. 9월 26일에는 강화 승천포에서 개경으로 올라가 홍문관 시강(侍講)을 역임한 원초(原初) 왕성순(王性淳)의 집에 유숙한다. 왕성순은 이듬해(1911) 중국 상해에서 황현의 유고 문집 『매천집(梅泉集)』을 간행하는 양명학자 창강 김택영(金澤榮)의 문인이므로 역시 양명학자였다. 왕성순의 집에서 홍승헌을 만난 이건승은 10월 3일 신의주에 도착했다가 12월 초 하루 중국인이 끄는 썰매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현 단동)에 도착했다. 안동현 구련성(九連城)에서 망명객으로서 첫 밤을 보낸 이건승과 홍승헌은 아침 일찍 북상길에 올라 12월 7일 횡도촌(橫道村)에 도착했다.

홍승헌과 정원하는 모두 고종 때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인물들이었다. 홍승헌은 홍문관 교리와 수찬을 역임했고, 이조참판까지 지냈으며, 정원하도 고종 19년(1882)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고 고종 23년(1886) 이조참의, 고종 30년(1893)에는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다. 유하현 횡도촌이라는 작은 마을에 서울의 우당 이회영 일가, 안동의 백하 김대락·석주 이상룡 일가, 충청도 진천의 홍승헌, 강화도의 이건승 등 전국 각지의 사대부 출신 양명학자들이 집결했다. 민영규 교수는 “이건승·홍문원(홍승헌)·정기당(정원하) 일행과 이회영 일곱 가족과는 얼기설기 세교가 얽혀 있는 가족들”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이런 세교는 소론이라는 당파적 동일성과 양명학이라는 학문적 동질성이 바탕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국망의 위기에 처하자 양명학자들은 해외로 망명했다. 이회영 등이 간여했던 비밀 결사조직인 신민회에서 1909년 봄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군관학교설치’를 결의하는데, 이런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론에도 왕양명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인식이 뒷받침되었을 수 있다.

이정규는 1908년에 이회영과 이상설이 이미 ‘만주에다 광복군 양성 훈련의 기지를 만들 것’에 대해 결의했다고 전하면서 상동 기독교회가 신민회의 비밀기지가 되어 이회영·전덕기·이동녕·양기탁 등이 조석으로 밀의를 거듭했다고 기록했다.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론은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꾸릴 인적·물적 자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은 더 설명할 것이 없다. 이들 양반 사대부들은 갖고 있는 사재를 모두 털어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섰다. 1911년 경학사가 이렇게 만들어지고, 신흥무관학교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1912년 부민단의 이념을 이상룡이 삼권분립에 의한 민주공화제로 삼고 있는 것 역시 양명학이 갖고 있는 사민평등 사상의 발현일 것이다.

그러면 양명학이 어떻게 아나키즘과 접맥되는지를 살펴보자. 1923년 이회영과 절친했던 유학자 김창숙(金昌淑)은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등의 아나키스트들과 북경 귀족들의 거처인 모아호동(帽兒胡同)에 사는 한인(韓人) 친일파 집을 털어 활동자금을 마련한 모아호동 사건을 일으켰다. 김창숙은 성즉리설을 비판하고 왕수인의 심즉리설을 지지해 파문을 일으켰던 영남 유림의 거두 이승희의 제자였다. 유학자가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김창숙과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사상적 친연성이 없었다면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김창숙은 끝내 아나키스트로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혁신 유림으로 남지만 이회영은 달랐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회상기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에는 이런 회상이 있다.

?하루는 몽사(夢事)를 얻으니, 가군께서 사랑에서 들어오시며 희색이 만면하여,

“내 일생에 지기(知己)를 못 만나 한이더니, 이제는 참다운 동지를 만났다.”

하시며 기뻐하시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홀연히 깨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곰곰 몽중(夢中)에 하시던 말씀을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이 오려나 하였더니, 그 날 오정쯤해서 이을규(李乙奎)씨 형제분과 백정기(白貞基)씨, 정화암(鄭華岩)씨 네 분이 오셨다.?

이은숙 여사는 이때가 계해년(癸亥年), 즉 1923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때 이회영의 나이 이미 57세로 환갑을 바라보던 때였다. 그러나 정작 이때 이회영을 찾아온 4명 중의 한 명인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선생이 사상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확정된 때는 1922년 겨울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같은 책에서 “선생의 사상이 확정되는 계기”는 1923년 9월에 있었던 ‘이상 농촌 양타오 촌 건설 계획’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 회고를 종합하면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받아들인 때는 1922년 겨울쯤이지만 이를 실제 확정지은 때는 1923년 9월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촌 건설은 아나키스트들만이 아니라 대종교인들도 백두산 산록에 이상촌을 건설하여 했던 것으로 봐서 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공통의 과제이기도 했다.

이회영은 김종진과의 대화에서 “결론으로서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大同)의 세계, 즉 하나의 세계를 이상하는 것”이라고 규정지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대동(大同)이란 것이다. 이회영에 따르면 대동의 세계란 “각 민족 및 공동생활 관계를 가지는 지역적으로 독립된 사회군(社會群[국가군])이 한 자유연합적 세계 연합으로 일원화”되는 사회를 뜻한다. 즉 “각 민족적 단위의 독립된 사회나 지역적인 공동생활권으로 독립된 단위 사회가 완전히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 자체 내부의 독자적인 문제나 사건은 독자적으로 해결하고 타와 관계된 것이나 공동적인 것은 연합적인 세계 기구에서 토의 결정”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동은 서양에서 온 정치사상이 아니라 동양의 전통 사상이었다. 조선의 율곡 이이를 비롯해 대부분의 개혁정치가들은 대동 사회를 지향했고,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그 다음 단계인 소강(小康)사회를 지향했다. 동양 전통의 대동 사회는 “자?타의 구별을 넘어선 보편적 인류애”가 넘치는 사회이자 소외된 계급과 계층[矜寡孤獨廢疾者]이 없는 사회를 뜻한다. 제(濟)나라 공양고(公羊高)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세상을 난세(亂世)·소강(小康)·대동(大同)으로 나누어 해설한 삼세지학(三世之學)을 설파하는데, 물론 동양의 이상 사회는 대동 사회다.

대동 사회는 공자가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 “대도(大道)가 행해질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大道之行天下爲公],”라고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대동사상은 동양 사회의 개혁적 정치가들이 공통으로 주창했던 이상 사회의 모습이었다. ????예기???? ?예운?편은 대동 사회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대도가 행해질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발탁해서 신의를 가르치게 하고 화목을 닦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어버이만 어버이로 여기거나 자신의 자식만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편안히 인생을 마칠 수 있었고 젊은이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었다. 과부·고아·홀아비·병자를 다 부양했으며 남자는 직업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었다. 재물이 낭비되는 것은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신이 소유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 일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음모도 생기지 않았고 도둑질도 일어나지 않았고 난리도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바깥문을 잠그지도 않았는데 이를 일러 ‘대동’이라고 한다.


이 대동의 동(同)에 대해 주석은 “동은 화해[和]와 평등[平]과 같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대동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이 항산(恒産)에 힘쓰지만 그 생산물을 자기만의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과 서로 나누면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회를 뜻한다.

대동 사회의 모습은 아나키즘에서 이상으로 삼는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양명학의 천하일가 사상도 공자의 대동 사회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회영과 신채호를 비롯한 유학자들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이 ‘지금 깨달으니 과거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회영이 김종진에게 “무정부주의의 궁극의 목적은 대동의 세계”라고 규정지을 수 있었던 것은 이회영이 아나키즘 사회를 대동 사회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왕양명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양지를 깨닫게 하고 그것으로써 서로 편안하게 해주고 서로 도와주며 사리사욕의 폐단을 제거하고 시기, 질투하는 습성을 일소하여 마침내 ‘대동(大同)’을 실현”(王陽明, ????傳習錄???? 中)한다고 말했다. 왕양명의 이 말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회영이 ‘약관이 지나면서부터 스스로 솔선하여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하려 했다는 이정규의 설명은 단순히 이회영의 천품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양명학 학습의 결과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 아나키즘의 사상적 연원을 양명학으로 잡고 나면 많은 문제가 설명된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이서(吏胥)와 노비에 대한 차별적인 언사부터 평등한 경어(敬語)로 개(改)하려 노력하였으며 적서(嫡庶)의 차별을 폐하고 개가·재혼을 장려 단행”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도 젊은 시절 이상설 등과 함께 양명학을 공부한 사상의 실천일 수 있다. 단재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체계로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다가 끝내 여순감옥에서 옥사하게 된 것도 양명학의 대동사회를 아나키즘의 이상사회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국 아나키즘이 서양에서 만들어진 사상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동양 고대 사회에서 여러 지식인이 이상으로 삼았던 대동의 사회사상이 양명학을 거쳐 접맥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록 아직 신채호를 비롯해서 한때 유학자였던 인물들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는 과정 등에 대해서는 조명되지 못했지만 한국 아나키즘의 사상적 연원을 찾기 위해서 이 부분은 앞으로 깊게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나키즘은 또한 과거의 사상이 아니라 21세기 현재에 실천 가능한 오늘의 사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21]

우당을 비롯해 구한말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적 뿌리는 '양명학'에서 출발한다. 우당과 뜻을 같이했던 경북 안동의 석주(이상룡 선생)는 망명 일기인 《서사록》에서 양명학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대개 양명학은 비록 퇴계 문도의 배척을 당했으나 그 법문이 적절하고 간요하여 속된 학자들이 감히 의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양명학은 중국 왕수인이 명대에 집대성한 신개념의 유학이다. 사대부의 이익을 절대시하는 성리학과 양명학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달랐다. 나라의 국민은 자유롭고 평등해야 하며, 이런 개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도 서로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문헌엔 우당이 노비 등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경어를 썼으며 적서(嫡庶)의 차별을 없앴다. 재혼을 장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전국 팔도의 사대부들을 만주 유하현에 집단 망명시켜 만든 횡도촌(橫道村)은 지금으로 치면 적게는 협동조합, 크게는 지방자치조직이다. 상당수 양반 사대부들이 민족주의 노선으로 간 것과 달리 우당이 사회주의 사상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아나키즘을 선택한 것은 당시로선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맞습니다. 성리학이 너무 조선왕조를 이상스럽게 만드니 그렇게 된 겁니다. 영조 때부터 위정척사파들이 임금을 꼼짝 못하게 하지 않았나요. 성리학이 극단화돼 나온 것이 위정척사 아닙니까. 이걸 깨지 못하면 개화도 어렵고, 부국강병도 어렵다고 본 게 당시 양명학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당도 그 생각을 따른 거지요. 양명학은 성리학에 대한 철저한 비판에서 시작된 겁니다." 이종찬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우당의 형제 7명 중 6명은 "빼앗긴 나라에선 한시도 살 수 없다"며 가산을 모두 정리해 만주로 건너갔다. 일곱 형제 중 무려 여섯 형제가 뜻을 같이했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그렇게 만주로 가서는 삼원보에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결과적으로 우당은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아 숨졌지만 형제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끝내 광복의 기틀을 마련했다. 바로 아래 동생인 이시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초대 부통령에 올랐다.) [22]

우당은 노비 해방, 적서(嫡庶)차별 타파, 여성에 대한 부당한 인습에 반대, 개가(改嫁)를 장려하였다. 당시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사고를 했는데…. “우당은 진보적이었고, 어떤 점에서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래서 현실과 안 맞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철저한 행동주의자였다. 상해 임시정부에 가 있으니 서로 다툼을 하다 에너지가 다 소모될 것 같으니 다시 베이징에 와서 행동하는 흑색공포단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만들어 대일 항쟁을 했다. 당신이 66세였을 때, 아나키스트들이 누가 거사에 갈지 투표를 하는데, 투표를 정지시키고 이번에는 자기 차례를 달라고 하셨다. 당신이 여기까지 오느라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여기 남아있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하셔서 당신이 들어가겠다고 해서 들어갔다. 들어가다 잡혔지만 행동주의자, 이상주의자였다.”

-우당이 고종 망명계획에도 관여했나. “1910년에 망명할 당시, 우리 가문과 안동의 이상룡 가문, 강화도의 양명학파가 다 올라갔다. 따로 갔지만 만주 황도천에 모여서 경학사를 설립했다. 경학사에 기반을 두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흉년이 2년간 들었다. 돈이 다 떨어져가자 우당 선생이 1913년에 국내에 잠입했다. 예전에 ‘돈 다 대줄게, 따라갈게’하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니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일본의 통치가 강화돼 돈을 줄 수가 없다고 하니 우당의 고민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돈은 안 주고 세상은 변한 것이다. 그렇지만 고종을 망명시키면 돈을 안 낼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공작을 시작했다. 고종의 매부인 우리 외할아버지의 딸과 우당의 아들을 결혼시켰다. (그 결혼으로 낳은 아들이 이종찬) 당시에는 양자를 들이더라도 임금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결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고종에게 접근했다. 당시에는 일본이 고종도 감시하고 있었는데, 결혼 이야기를 하러 들어가서 슬쩍 망명을 이야기했더니 고종이 결심을 했다. 그러면서 고종이 ‘내 돈 중에 일부가 민영달한테 있으니 찾아서 쓰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당이 민영달한테 가서 고종의 허가를 받았다고 하니 당시 5만원을 줬다. 그 돈을 받아 베이징에 집도 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 고종은 독살당했다.”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광복군이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지청천, 이범석이고, 학생이 김원봉, 김학규다. 지청천은 광복군 총사령관, 김원봉은 참모장 겸 임시정부 군무부장·광복군 1지대장, 이범석은 2지대장, 김학규는 3지대장이다. 광복군은 창설할 때 3개 지대와 1개의 사령부로 이뤄졌다. 그 우두머리가 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아니면 졸업생이므로 전통을 이은 거라고 할 수 있다. 또 광복군의 모든 매뉴얼을 윤기섭이 만들었다. 전북 전주에 신흥고등학교가 있는데, 광복군 군가가 교가다.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신흥고를 나왔는데,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해서 북한에 갔을 때 공항에서 북한 사람들이 교가를 연주했다고 한다. 가사는 다르지만. 그래서 정 전 의장이 왜 북한에서 신흥 학교 교가를 연주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광복군 군가였다. 학교 설립자가 연결이 돼 있어 그렇게 됐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는 경희대학교와도 인연이 있다. 경희대는 원조를 따지자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학우단이 세운 학교다. 학우단이 이시영 부통령을 앞세워 설립했다. 그러나 조영식 전 총장이 부산 피난 당시 학교를 가져갔다.” [23]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보낸 고인은 경북 영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구 계명대 철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시간강사로 강단에 섰다. 이후 아나키스트 철학자 하기락의 영향으로 화담 서경덕에게 매료되어 동양철학에 눈을 떴다. 그리고 양명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유명종 박사를 찾아 동아대 대학원에서 박사를 마쳤다. 1998년 <전통문화와 미래사회>를 공저했다.[24]


  • 강화학파 이건승 [[1]]
  • 하곡학과 실학 [[2]]

기독교

강화양명학과 함께 강화의 근대정신에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의 수용이다. 1893년부터 본격적으로 성공회, 감리교 등 기독교의 선교가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설립한 교회와 학교는 근대문물을 익히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특히 성재이동휘가 1907년 조선군대해산 당시 대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후일 교육운동으로 돌아서면서 합일학교, 보창학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게된다. 이때 이동휘 등이 설립한 학교와 교회는 1919년 강화군 3.1만세운동의 근거지가 된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강화양명학파의 해외망명과 독립운동이 있었다면 1919년 3.1운동 이후 강화의 독립운동은 상해임시정부와 사회주의운동으로 확산되어간다. 일본군 장교 살해협의로 인천감리서에 수용중이던 백범 김구는 기독교계열의 강화 독립지사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황해도를 거쳐 망명길을 떠났으며, 3.1운동으로 옥살이했던 죽산 조봉암은 일본유학을 통해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고 조선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설립한다. 일제시기동안 조선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였던 죽산은 해방후 전향선언을 하고, 제헌국회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죽산은 이승만대통령에 의해 ‘진보당사건’을 빌미로 1959년 사형되었으나 2011년 무죄로 판명되었다. [25]



  • 강화도성지순례 [[3]]
  • 한국 기독 교회사 [[4]]
  • 한국교회 문화유산 답사기 ⑫ ] 강화도 [[5]]
  • [202호 기독교 유적지 답사⑥] 이야기 섬, 강화 가는 길 [[6]]
  • 강화도 기독교 역사 이야기 8회 [[7]]
  • "개신교 성장, 하곡학과 관련있다" [[8]]
  • 한국교회사 [[9]]
  • 뼛 속까지 유교 숭배자, 예수 따르다 [[10]]
  • 이야기 한국교회사(1) 조선의 바울 김창식 목사 [[11]]
  • 장로교와 감리교 [[12]]
  • 개신교 감리교의 강화도 전래와 문화변동 [[13]]

독립운동

  • 강화 기독교인들, 3.18 만세운동 주도 [[14]]
  • 스무 살 청년 마음속'애국애족의 횃불'타오르다 [[15]]
  • 丁未의병서 만세운동까지.. 항일투쟁 맥 이은 '결사대장 유봉진'[[16]]
  • 강화도 백범길···역사 탐방지로 만든다 [[17]]
  • 1946년 11월 18일 김구선생 강화방문 사진 발견 [[18]]

교육

디아스포라

  1. 출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별세…“한국 학생들, 불필요 지식 위해 하루 15시간 낭비”중앙일보. 2016.06.30]
  2. 출처: [도서관 용어 해설. 디지털 큐레이션(Digital Curation) https://wl.nl.go.kr/usr/com/prm/BBSDetail.do?bbsId=BBSMSTR_000000000458&menuNo=13001&upperMenuId=13&nttId=4560&boardTab=null&boardGubun=null]
  3. 출처: [인터넷 필수 용어가 된 '큐레이션'의 역사는 놀랍다. 고평석. 허프북스. 2017.02.13]
  4. 출처: [주자학과 양명학, 어떻게 다른가 [2017년 5월 12일 / 제121호]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61]
  5. 출처: [양명학 논쟁 ([陽明學 論爭]) http://www.laborsbook.org/dic/view.php?dic_part=dic05&idx=2444 ]
  6. 출처: [양명학(陽明學)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6%91%EB%AA%85%ED%95%99(%E9%99%BD%E6%98%8E%E5%AD%B8)]
  7. 출처: [주종 복종은 유학이 아니다 http://well.hani.co.kr/469656]
  8. 출처: [역사에서 찾은 문재인 정권 뿌리론. 신동아. 2019.03.06]
  9. 출처: ['대세 문화상품'으로 뜬 시인 윤동주. 미디어펜. 2019.03.07]
  10. 출처: [일본 근대 학술사조와 양명학- 신현승 http://www.asiaticresearch.org/front/board/view.do?board_master_seq=3740&board_seq=46639]
  11. 출처: [동북아 3국 중 유독 조선에서 천주학이 성행한 이유. 동아일보. 2018.09.23]
  12. 출처: [강화학파 http://dh.aks.ac.kr/Encyves/wiki/index.php/%EA%B0%95%ED%99%94%ED%95%99%ED%8C%8C]
  13. 출처: [‘실학의 뿌리’ 하곡학은 퇴계·율곡학과 함께 조선 3대 학파. 중앙일보]
  14. 출처: [강화도에 '유배' 간 양명학 시대 뛰어넘은 개혁성 조명 중앙일보]
  15. 출처: [문화·종교·사상이 어우러진 공간-강화도 _ 옥한석 로컬리티의 인문학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5/6 Vol]
  16. 출처: [강화군 지역정치의 어제와 오늘(1) http://www.gang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13]
  17. 출처: [임시정부 주도한 소론, 사상적 뿌리엔 아나키즘이. 헤럴드경제. 2019.02.22]
  18. 출처: [박종인의 땅의 歷史 "너희가 팔아먹은 나라, 우리가 찾으리라" 조선일보 2017.10.1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0/18/2017101800063.html]
  19. 출처: [지지율 하락의 근본 원인. 광주일보. 2018.12.06]
  20. 출처: [박종인의 땅의 歷史 "너희가 팔아먹은 나라, 우리가 찾으리라" 조선일보 2017.10.1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0/18/2017101800063.html]
  21. 출처: [한국 아나키즘 운동의 역사적 위상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http://peoplesculture.or.kr/laboratory/laboratory03.php?ptype=view&code=laboratory03&idx=5150]
  22. 출처: [이종찬 "좌우 모두 아우른 임시정부가 국론 통합 모델" 시사저널 2019.04.16]
  23. 출처: [황호택이 만난 사람③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아주경제. 2019.03.14]
  24. 출처: [농사짓는 동양철학자 김성범 작고 2019.02.27]
  25. 출처: [강화군 지역정치의 어제와 오늘(1) http://www.ganghw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