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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은 절강삼사(浙江三司)의 보고에 의하면 운운했는데 그 끝머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그 글은 절강삼사(浙江三司)의 보고에 의하면 운운했는데 그 끝머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최부의 안(案)은 절강포정사(浙江布政司)가 파견한 위임관인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楊旺)을 시켜 호송케 하고, 연도의 위소(衛所)에도 공문을 보내어 적절히 관군(官軍)을 차출(差出)하여 경사(京師)로 호송토록 한 것 외에 낱낱이 열거하여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습니다. 본부관(本部官)이 삼가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의안(議案)의 초본(抄本)을 직방청리사(職方淸理司)에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다시 본부(本部)의 명을 받고 절강포정사의 비문(批文)에 의거 파견된 지휘 양왕이 전항(前項)의 이인(夷人)을 호송하여 왔습니다. 조사해보니 성화(成化) 6년(예종1년; 1470) 11월 중에 해당 절강진수(浙江鎭守) 등 관원이 아뢰고 송치해 온 조선국의 풍랑 만난 김배회(金益廻)<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0201007_003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 1월 7일 경진 3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한치의가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오다]</ref><ref>[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0633 ‘조선국’ 세 글자 써 보였더니, 차와 죽을 대접했다, ‘조선국’ 세 글자 써 보였더니, 차와 죽을 대접했다, 제주신보, 2019.06.24]</ref>32 등 7명을 본부에서 상주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 방한복을 적절히 지급해 주고, 각력(脚力)과 구량(口糧)을 제공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한 바 있었습니다. 지금 올라온 상기 의안(議案)이 본부에 도착하였는데, 살펴보니 조선의 풍랑 만난 최부 등 43명은 비록 해양에서 정찰 중 체포한 이인(夷人)이기는 하지만, 이미 해당 절강진수, 순안(巡按)과 삼사(三司) 등의 관원이 회동하여 조사해 본 결과, 특별히 간세(姦細)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각 이인(夷人)이 풍파에 밀려 떠다니느라 의복과 식량이 결핍되어 있는 만큼 조정에서 먼 나라 사람을 회유(懷柔)하는 대의(大義)로 헤아려 보더라도 응당 후하게 구휼해야 하니, 마땅히 예부(禮部)에 이문(移文)을 보내어 갈아입을 옷을 적절히 지급해 주도록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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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red">최부</span>의 안(案)은 절강포정사(浙江布政司)가 파견한 위임관인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楊旺)을 시켜 호송케 하고, 연도의 위소(衛所)에도 공문을 보내어 적절히 관군(官軍)을 차출(差出)하여 경사(京師)로 호송토록 한 것 외에 낱낱이 열거하여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습니다. 본부관(本部官)이 삼가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의안(議案)의 초본(抄本)을 직방청리사(職方淸理司)에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다시 본부(本部)의 명을 받고 절강포정사의 비문(批文)에 의거 파견된 지휘 양왕이 전항(前項)의 이인(夷人)을 호송하여 왔습니다. 조사해보니 성화(成化) 6년(예종1년; 1470) 11월 중에 해당 절강진수(浙江鎭守) 등 관원이 아뢰고 송치해 온 조선국의 풍랑 만난 김배회(金益廻)<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0201007_003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 1월 7일 경진 3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한치의가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오다]</ref><ref>[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0633 ‘조선국’ 세 글자 써 보였더니, 차와 죽을 대접했다, ‘조선국’ 세 글자 써 보였더니, 차와 죽을 대접했다, 제주신보, 2019.06.24]</ref>32 등 7명을 본부에서 상주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 방한복을 적절히 지급해 주고, 각력(脚力)과 구량(口糧)을 제공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한 바 있었습니다. 지금 올라온 상기 의안(議案)이 본부에 도착하였는데, 살펴보니 조선의 풍랑 만난 최부 등 43명은 비록 해양에서 정찰 중 체포한 이인(夷人)이기는 하지만, 이미 해당 절강진수, 순안(巡按)과 삼사(三司) 등의 관원이 회동하여 조사해 본 결과, 특별히 간세(姦細)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각 이인(夷人)이 풍파에 밀려 떠다니느라 의복과 식량이 결핍되어 있는 만큼 조정에서 먼 나라 사람을 회유(懷柔)하는 대의(大義)로 헤아려 보더라도 응당 후하게 구휼해야 하니, 마땅히 예부(禮部)에 이문(移文)을 보내어 갈아입을 옷을 적절히 지급해 주도록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본부에서는 응당 관인(官人) 최부에게 참마(站馬)와 [https://www.wordrow.kr/%EC%9D%98%EB%AF%B8/%EB%8A%A0%EA%B8%89/ 늠급(廩給)], 나머지 사람에게 각력(脚力)과 구량(口__)을 지급해 주며 전 구간에 걸쳐 수레를 주어 행장을 싣게 하고, 해당 부(府)에 이첩하여 관원 한 사람을 차출하여 호송토록 하며 연도(沿途)의 군위(軍衛)에서는 군부(軍夫)를 적절히 차출해서 호송토록 하되, 요동(遼東)에 이르러서는<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saNoYixNwkkJ:contents.nahf.or.kr:8080/directory/downloadItemFile.do%3FfileName%3Ddn_058_0050.pdf%26levelId%3Ddn_058%26type%3Dpdf+&cd=14&hl=ko&ct=clnk&gl=kr 조선 전기 요동에서 사행(使行)호송군(護送軍)의 역할과국제무역의 경계]</ref> 진수(鎭守), 순안(巡按) 등 관원의 지시에 따라 별도로 통사(通事)인원을 차출하여 조선 국경까지 보내주어 그들 스스로 돌아가도록 해야하겠지만, 풍랑 만난 이인(夷人)을 귀국시키는 일이고 또 삼가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성지(聖旨)의 사리(事理)를 받들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홍치(弘治) 원년 4월 1일 태자태보(太子太保) 본부상서(本部尙書) 여(余) 등이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고, 다음날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옳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외에, 자문(咨文)을 보내오니 번거롭겠지만 본부에서 상주하여 받은 성지(聖旨)의 사리(事理)에 따라 삼가 그대로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자문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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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에서는 응당 <span style="color: red">관인(官人) 최부</span>에게 참마(站馬)와 [https://www.wordrow.kr/%EC%9D%98%EB%AF%B8/%EB%8A%A0%EA%B8%89/ 늠급(廩給)], 나머지 사람에게 각력(脚力)과 구량(口糧)을 지급해 주며 전 구간에 걸쳐 수레를 주어 행장을 싣게 하고, 해당 부(府)에 이첩하여 관원 한 사람을 차출하여 호송토록 하며 연도(沿途)의 군위(軍衛)에서는 군부(軍夫)를 적절히 차출해서 호송토록 하되, 요동(遼東)에 이르러서는<ref>[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saNoYixNwkkJ:contents.nahf.or.kr:8080/directory/downloadItemFile.do%3FfileName%3Ddn_058_0050.pdf%26levelId%3Ddn_058%26type%3Dpdf+&cd=14&hl=ko&ct=clnk&gl=kr 조선 전기 요동에서 사행(使行)호송군(護送軍)의 역할과국제무역의 경계]</ref> 진수(鎭守), 순안(巡按) 등 관원의 지시에 따라 별도로 통사(通事)인원을 차출하여 조선 국경까지 보내주어 그들 스스로 돌아가도록 해야하겠지만, 풍랑 만난 이인(夷人)을 귀국시키는 일이고 또 삼가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성지(聖旨)의 사리(事理)를 받들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홍치(弘治) 원년 4월 1일 태자태보(太子太保) 본부상서(本部尙書) 여(余) 등이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고, 다음날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옳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외에, 자문(咨文)을 보내오니 번거롭겠지만 본부에서 상주하여 받은 성지(聖旨)의 사리(事理)에 따라 삼가 그대로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자문을 보냄.”
  
신은 효자를 시켜 쌀을 술로 바꾸어서 정춘 등에게 주도록 하자 정춘이 신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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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span style="color: red">효자</span>를 시켜 쌀을 술로 바꾸어서 정춘 등에게 주도록 하자 정춘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체면을 무릅쓰고 와서 선물을 달라는 것은 동전이든 토포(土布)는 다른 여러 가지 산물(産物)이든 가져다 쓰려고 하는 것이지, 술에 한번 취해보자는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체면을 무릅쓰고 와서 선물을 달라는 것은 동전이든 토포(土布)는 다른 여러 가지 산물(産物)이든 가져다 쓰려고 하는 것이지, 술에 한번 취해보자는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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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표류되어 사지도 보전치 못하다가 겨우 살게 되었으니 어찌 몸뚱이 외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의 행장을 살펴보고 만약 한 가지 물건이라도 있으면 가져가시오.” 천천히 그들의 의중을 살펴보니 신이 입은 '''옷'''에 생각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나는 표류되어 사지도 보전치 못하다가 겨우 살게 되었으니 어찌 몸뚱이 외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의 행장을 살펴보고 만약 한 가지 물건이라도 있으면 가져가시오.” 천천히 그들의 의중을 살펴보니 신이 입은 '''옷'''에 생각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신은 이정을 시켜서 양식을 덜어 돈 10문(文)을 바꾸어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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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span style="color: red">이정</span>을 시켜서 양식을 덜어 돈 10문(文)을 바꾸어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종주는 받지 않고서 신의 앞에 내던져 버리고는 정춘과 함께 몹시 성을 내면서 가 버렸습니다.  
 
이종주는 받지 않고서 신의 앞에 내던져 버리고는 정춘과 함께 몹시 성을 내면서 가 버렸습니다.  
  
밤에 신이 우연히 안의· 이효지 등에게 말하기를, “송(宋) 나라 때 너희 제주 사람이 표류되어 소주(蘇州)에 이르렀는데, 그 배에 크기가 연밥만한 삼씨가 있었다. 소주 사람이 이를 얻어서 심었더니 몇 년 후에는 점점 작아져서 보통 삼씨와 같아졌다. 지금 너희 지방에 이른바 삼씨가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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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신이 우연히 <span style="color: red">안의· 이효지 </span>등에게 말하기를, “<span style="color: red">송(宋) 나라 때 너희 제주 사람이 표류되어 소주(蘇州)에 이르렀는데, 그 배에 크기가 연밥만한 삼씨가 있었다. 소주 사람이 이를 얻어서 심었더니 몇 년 후에는 점점 작아져서 보통 삼씨와 같아졌다. 지금 너희 지방에 이른바 삼씨가 있는가?</span>”라고 하였습니다.  
  
안의가 말하기를, 그것은 옛날 일입니다. 지금은 보통 삼씨도 희귀한 까닭에 <span style="color:red">무릇 공천(公賤)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541 공포(貢布)]를 거둘 적엔 모두 갈추포(葛덟布)를 바치게 되니, 나라에는 소용이 없고 백성에게는 해만 있습니다. 만약 공물을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따라서 해산물 같은 것으로 정한다면 편할 것입니다</span>”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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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 red">안의</span>가 말하기를, 그것은 옛날 일입니다. 지금은 보통 삼씨도 희귀한 까닭에 <span style="color:red">무릇 공천(公賤)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541 공포(貢布)]를 거둘 적엔 모두 갈추포(葛덟布)를 바치게 되니, 나라에는 소용이 없고 백성에게는 해만 있습니다. 만약 공물을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따라서 해산물 같은 것으로 정한다면 편할 것입니다</span>” 라고 하였습니다.
  
  

2020년 12월 13일 (일) 16:54 기준 최신판

洒雨。禮部吏鄭春,李從周等。賫兵部所移禮部咨來示臣。其文據浙兵三司所報云云。其末端云。其崔溥案。仰浙江布政司差委官指揮僉事楊旺管送。及行沿途衛所。量撥官軍。防護赴京外。開坐具本。該本部官欽奉 聖旨。該部知道。欽此欽遵。抄出送司案。候間續奉本部送。據浙江布政司批差指揮楊旺伴送前項夷人前來。査得。成化六年十一月內。該浙江鎭守等官奏送朝鮮國遭風夷人金盃廻等七名。本部已經奏准。量給禦寒衣服及應付脚力口粮還國去。訖今該前因案呈到部。看得。朝鮮遭風夷人崔溥等四十三名。雖係海洋哨獲夷人。已該浙江鎭守巡按三司等官會同審驗。別無姦細情由。況各夷風波飄蕩。衣粮缺乏。揆之朝廷柔遠大體。相應優恤。合無行移禮部。量給替換衣服。本部應付官崔溥站馬廩給。餘人脚力口粮。通與車輛。裝載行李。及行該府。差官一員伴送。沿途軍衛。量撥軍夫防護至遼東。聽鎭巡等官另差通事人員。送朝鮮地界。令其自行回還。緣係處置遭風外夷歸國。及奉 欽依。該部知道事理。未敢擅便。弘治元年四月初一日。太子大保本部尙書余等具題。次日奉聖旨。是。欽此欽遵。擬合通行除外。合開咨前去。煩照本部奏奉欽依內事理。欽遵施行。須至咨者。臣令孝子將米粮換酒。以饋鄭春等。春謂臣曰。我二人來討些人情面皮。或銅錢或土布或諸般產物以去用耳。意不在一醉也。臣曰。我當漂海。四體不保。僅能得生。豈有身外之物乎。你看吾行李。若有一物。便將去之。徐觀其意。意在臣之所穿衣。臣令李禎減粮換錢十文以贈之。李從周不受。撒之臣前。與鄭春盛怒而去。夜。臣偶謂安義,李孝枝等曰。當在宋時。爾濟州人漂至蘇州界。其船有麻子。如蓮仁大。蘇人得而種之。後年差小。與尋常麻子一般。今爾土有所謂麻子乎。義曰。此古代事也。今則尋常麻子。亦且稀貴。故凡公賤收貢。皆納葛麤布。無用於國。有害於民。若貢以隨土所產如海物。則庶可便矣。



부슬비가 내렸습니다.

예부의 서리 정춘(鄭春), 이종주(李從周) 등이 병부에서 예부로 보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와서 신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글은 절강삼사(浙江三司)의 보고에 의하면 운운했는데 그 끝머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최부의 안(案)은 절강포정사(浙江布政司)가 파견한 위임관인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楊旺)을 시켜 호송케 하고, 연도의 위소(衛所)에도 공문을 보내어 적절히 관군(官軍)을 차출(差出)하여 경사(京師)로 호송토록 한 것 외에 낱낱이 열거하여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습니다. 본부관(本部官)이 삼가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의안(議案)의 초본(抄本)을 직방청리사(職方淸理司)에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다시 본부(本部)의 명을 받고 절강포정사의 비문(批文)에 의거 파견된 지휘 양왕이 전항(前項)의 이인(夷人)을 호송하여 왔습니다. 조사해보니 성화(成化) 6년(예종1년; 1470) 11월 중에 해당 절강진수(浙江鎭守) 등 관원이 아뢰고 송치해 온 조선국의 풍랑 만난 김배회(金益廻)[1][2]32 등 7명을 본부에서 상주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 방한복을 적절히 지급해 주고, 각력(脚力)과 구량(口糧)을 제공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한 바 있었습니다. 지금 올라온 상기 의안(議案)이 본부에 도착하였는데, 살펴보니 조선의 풍랑 만난 최부 등 43명은 비록 해양에서 정찰 중 체포한 이인(夷人)이기는 하지만, 이미 해당 절강진수, 순안(巡按)과 삼사(三司) 등의 관원이 회동하여 조사해 본 결과, 특별히 간세(姦細)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각 이인(夷人)이 풍파에 밀려 떠다니느라 의복과 식량이 결핍되어 있는 만큼 조정에서 먼 나라 사람을 회유(懷柔)하는 대의(大義)로 헤아려 보더라도 응당 후하게 구휼해야 하니, 마땅히 예부(禮部)에 이문(移文)을 보내어 갈아입을 옷을 적절히 지급해 주도록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합니다.

본부에서는 응당 관인(官人) 최부에게 참마(站馬)와 늠급(廩給), 나머지 사람에게 각력(脚力)과 구량(口糧)을 지급해 주며 전 구간에 걸쳐 수레를 주어 행장을 싣게 하고, 해당 부(府)에 이첩하여 관원 한 사람을 차출하여 호송토록 하며 연도(沿途)의 군위(軍衛)에서는 군부(軍夫)를 적절히 차출해서 호송토록 하되, 요동(遼東)에 이르러서는[3] 진수(鎭守), 순안(巡按) 등 관원의 지시에 따라 별도로 통사(通事)인원을 차출하여 조선 국경까지 보내주어 그들 스스로 돌아가도록 해야하겠지만, 풍랑 만난 이인(夷人)을 귀국시키는 일이고 또 삼가 해당 부(部)에서 알아서 하라'라는 성지(聖旨)의 사리(事理)를 받들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홍치(弘治) 원년 4월 1일 태자태보(太子太保) 본부상서(本部尙書) 여(余) 등이 제본(題本)을 갖추어 올렸고, 다음날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옳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삼가 이를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외에, 자문(咨文)을 보내오니 번거롭겠지만 본부에서 상주하여 받은 성지(聖旨)의 사리(事理)에 따라 삼가 그대로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자문을 보냄.”

신은 효자를 시켜 쌀을 술로 바꾸어서 정춘 등에게 주도록 하자 정춘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체면을 무릅쓰고 와서 선물을 달라는 것은 동전이든 토포(土布)는 다른 여러 가지 산물(産物)이든 가져다 쓰려고 하는 것이지, 술에 한번 취해보자는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표류되어 사지도 보전치 못하다가 겨우 살게 되었으니 어찌 몸뚱이 외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우리의 행장을 살펴보고 만약 한 가지 물건이라도 있으면 가져가시오.” 천천히 그들의 의중을 살펴보니 신이 입은 에 생각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신은 이정을 시켜서 양식을 덜어 돈 10문(文)을 바꾸어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종주는 받지 않고서 신의 앞에 내던져 버리고는 정춘과 함께 몹시 성을 내면서 가 버렸습니다.

밤에 신이 우연히 안의· 이효지 등에게 말하기를, “송(宋) 나라 때 너희 제주 사람이 표류되어 소주(蘇州)에 이르렀는데, 그 배에 크기가 연밥만한 삼씨가 있었다. 소주 사람이 이를 얻어서 심었더니 몇 년 후에는 점점 작아져서 보통 삼씨와 같아졌다. 지금 너희 지방에 이른바 삼씨가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안의가 말하기를, 그것은 옛날 일입니다. 지금은 보통 삼씨도 희귀한 까닭에 무릇 공천(公賤)의 공포(貢布)를 거둘 적엔 모두 갈추포(葛덟布)를 바치게 되니, 나라에는 소용이 없고 백성에게는 해만 있습니다. 만약 공물을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품에 따라서 해산물 같은 것으로 정한다면 편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7th Day. Showers.

Cheng Ch’un and Li Ts’ung-chou, sub-officials [li] of the Ministry of Rites, came with a statement that the Ministry of War had sent to the Ministry of Rites and showed me the text: “According to a report of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

At the end it said: “In the case of that Ch’oe Pu, we instructed the Chekiang Administration Commissioner to send Assistant Commander Yang Wang on special commission to take charge of the escort and instructed the garrisons and transfer stations on the way to allot officials and troops to guard [the party] on the journey outside the capital, and to hold hearings and prepare reports. "The officials of this Ministry received His Majesty's instructions: 'Let the proper ministry take note. Respect this.' Between the time that we respectfully copied that out and the time that we sent the authorities' decision, this Ministry continuously sent on whatever it received.

“According to the endorsement of the Chekiang Administration Commissioner, he has sent Commander Yang Wang to escort forward the aforementioned barbarian. Research has shown that in the Eleventh Month, Ch’eng-hua 6, the said Chekiang Grand Defender and other officials memorialized, [asking] to send forward Kim Maeng-hoe* and six other barbarians of Korea who had encountered winds. The Ministry memorialized and received permission to issue clothing against the cold and appropriate porters and rations and send them back to their country. Now, in the matter stated above, which has been sent to the Ministry, it is our view that though Ch'oe Pu and the forty-two other barbarians from Korea who encountered winds fall into the class of barbarians arrested by maritime patrols, the said Chekiang Grand Defender, Regional Inspector, and Three Authorities have met and judged that they are not spies, especially since the winds and waves have battered them all and they lacked clothes and food. Considering the general policy of the Court of bringing peace to distant areas, it is proper that they be treated with consideration. It is fitting that the matter not be transferred to the Ministry of Rites and that we allot a change of clothing to them. This Ministry will provide post horses and official rations to the official Ch’oe Pu and porters and rations to the other men. They will go with carriages, into which they will load their baggage, passing through the proper prefectures. We shall send one official to escort them to the Korean border and let them return home themselves. Since the case is one of managing the return to their country of foreign barbarians who have encountered winds, and since we have received the notation, ‘Let the proper ministry take note,' we have not ventured to arrange matters on our own initiative alone.

“1st Day, Fourth Month, Hung-chih 1. Prepared by Yü, Senior Guardian of the Heir-Apparent and Minister [of War), and others. “On the following day an edict was received by this Ministry, saying 'Respect this; carry it out.' In addition to setting the correct procedure, it is proper that we should refer the matter to your Ministry. Hence this communication.” I order Hyo-ja to barter some rations of rice for wine and offered it to Cheng Ch'un and the other. Cheng Ch’un said to me, “The two of us hoped to receive some gratuity, some cash or cloth or any kind of goods that we can take away to use. We do not intend to get drunk.”

I said, “When I was drifting across the sea, my own limbs were not safe. I was barely able to survive; how can I have anything but what is on me? Look at my baggage. If there is a single thing there, feel free to take it away.” When I considered their motives carefully, [I found] that they wanted the clothes I was wearing. I ordered Yi Chong to reduce the rations, exchange some for ten cash, and give them that. Li Ts’ung would not take it; he scattered it in front of me and left with Cheng Ch’un, very angry.

At night I happened to be talking with An Ŭi and Yi Hyo-ji: “In the Sung period a man from your Cheju drifted to the shores of Su-chou. In his boat were hemp seeds as big as lotus pods. A man of Su-chou got them and planted them, but in later years they grew small, like ordinary hemp seeds.10 Do you have such hemp seeds in your land now?”

An Ủi said, “That is a thing of the past. Now even ordinary hemp seeds are rare. That is why, when both nobles and commoners assemble tribute, they give coarse, arrowroot cloth, which is useless to the country and harmful to the people. If the tribute were governed by what is produced in the land, such as things from the sea, everyone would be benefitted.”




初七日

洒雨。礼部吏郑春、李从周等赍兵部所移礼部谘来示臣。其文“据浙江三司所报”云云。其末端云:“其崔溥案,仰浙江布政司差委官指挥佥事杨旺管送,及行沿途卫所量拨官军防护赴京外,开坐具本,该本部官钦奉圣旨该部知道。钦此钦遵。抄出送司案候间,续奉本部送据浙江布政司批差指挥杨旺伴送前项夷人前来。查得成化六年十一月内,该浙江镇守等官奏送朝鲜国遭风夷人金杯回等七名,本部已经奏准量给御寒衣服及应付脚力、口粮还国去。讫今该前因案呈到部,看得朝鲜遭风夷人崔溥等四十三名虽系海洋哨获夷人,己该浙江镇守巡按三司等官会同审验,别无奸细情由。况各夷风波漂荡,衣粮缺乏,揆之朝廷柔远,大体相应优恤,合无行移礼部量给替换衣服。本部应付官崔溥站马、廪给,余人脚力、口粮,通与车辆装载行李,及行该府差官一员伴送,沿途军卫量拨军夫防护。至辽东,听镇巡等官另差通事人员,送朝鲜地界,令其自行回还。缘系处置遭风外夷归国,及奉钦依该部知道事理,未敢擅便。弘治元年四月初一日,太子太保、本部尚书余等具题。次日奉圣旨是钦此钦遵。拟合通行除外,合开谘前去,烦照本部奏奉钦依内事理,钦遵施行,须至谘者。”臣令孝子将米粮换酒以馈郑春等。春谓臣曰:“我二人来讨些人情面皮,或铜钱,或土布,或诸般产物以去用耳,意不在一醉也。”臣曰:“我当漂海,四体不保,仅能得生,岂有身外之物乎?你看吾行李若有一物便将去之。”徐观其意,意在臣之所穿衣。臣令李桢减粮换钱十文以赠之。李从周不受,撒之臣前,与郑春盛怒而去。夜,臣偶谓安义、李孝枝等曰:“当在宋时,尔济州人漂至苏州界,其船有麻子如莲仁大。苏人得而种之,后年差小与寻常麻子一般。今尔土有所谓麻子乎?”义曰:“此古代事也。今则寻常麻子亦且稀贵,故凡公贱收贡皆纳葛粗布,无用于国,有害于民。若贡以随土所产,如海物则庶可便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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