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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등은 배를 타고 지났기 때문에 구경할 수가 없었으니''', 볼 수 있는 것은 진회루(鎭准樓)뿐이었습니다. 진회루는 곧 성의 남문으로서 3층이었습니다. | '''신 등은 배를 타고 지났기 때문에 구경할 수가 없었으니''', 볼 수 있는 것은 진회루(鎭准樓)뿐이었습니다. 진회루는 곧 성의 남문으로서 3층이었습니다. | ||
− |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하국공(夏國公)의 신도묘(神道廟)·관음당(觀音堂)·회원장군(懷遠將軍) 난공(蘭公)의 | + |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하국공(夏國公)의 신도묘(神道廟)·관음당(觀音堂)·회원장군(懷遠將軍) 난공(蘭公)의 무덤·안공묘(晏公廟)·황건파(黃巾)·북래사(北來寺)·죽서정포(竹西亭鋪)·수정청(收釘廳)·양자만순검사(揚子灣巡檢司)·만두관황묘(灣頭關荒廟)·봉황교돈(鳳凰橋數)·회자하포(子河鋪)·하박팔탑포(河泊八塔鋪)·제오천포(第伍淺鋪)·세과국(稅課局)·사리포(四里鋪)·소백보공사(卽伯寶公寺)·영은문(迎恩門)을 지났는데, 지나온 곳에 갑 2개가 있었습니다. |
소백역(邵伯驛)에 이르니 역 북쪽에는 소백태호(邵伯太湖)가 있었습니다. | 소백역(邵伯驛)에 이르니 역 북쪽에는 소백태호(邵伯太湖)가 있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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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섬이 표착했다 돌아간 전말을 물으니 조감이 말하기를, | 이어서 이섬이 표착했다 돌아간 전말을 물으니 조감이 말하기를, | ||
− | <span style="color:red">“이섬이 처음에 바람을 만나 양주 굴항채(掘港寨)에 도착하니, 수채관(守寨官) 장승(張昇)이 백호 상개(桑愷)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아와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어느 순검(巡檢)이 '서방사(西方寺) | + | <span style="color:red">“이섬이 처음에 바람을 만나 양주 굴항채(掘港寨)에 도착하니, 수채관(守寨官) 장승(張昇)이 백호 상개(桑愷)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아와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어느 순검(巡檢)이 '서방사(西方寺)에 편히 묵게 하라’라 말하고, 배를 타고 지나온 길을 심문하느라 1개월 가까이 머물렀는데, 연해비어도지휘(沿海備禦都指揮) 곽(郭) 대인이 이섬에게 '돛 열 폭이 바람을 막아내지 못했네'라는 글귀가 있음을 보고는 그가 좋은 사람임을 깨닫고 손님과 벗의 예로 대접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span> |
다시 신에게 묻기를, “당신이 배를 댔던 해안에서 이곳까지는 모두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다시 신에게 묻기를, “당신이 배를 댔던 해안에서 이곳까지는 모두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
2020년 12월 13일 (일) 14:27 기준 최신판
過楊州府。是日雨。朝發廣陵驛。過楊州府。城府。卽舊隋江都之地。江左大鎭。十里珠簾。二十四橋三十六陂之景。爲諸郡最。所謂春風蕩城郭。滿耳沸笙歌之地。臣等由舟而過。不得觀望。所可見者。鎭淮樓而已。樓卽城南門。有三層。沿河而東而北。過夏國公神道廟,觀音堂,懷遠將軍蘭公之塋,晏公廟,黃巾垻,北來寺,竹西亭鋪,收釘廳,楊子灣巡檢司,灣頭關荒廟,鳳凰橋,墩淮子河鋪,河泊八塔鋪,第伍淺鋪,稅課局,四里鋪,邵伯寶公寺,迎恩門。所過有閘二座。至邵伯驛。驛北有邵伯太湖。棹傍湖邊二三里許。至邵伯遞運所。因水漲風亂。不得夜過湖。故經宿焉。自杭城所經衛所。亦遞差百戶以護送之。有楊州衛百戶趙鑑者謂臣曰。前六年間。你國人李暹亦漂來到此還國。你曉得否。臣曰。然。因問暹之漂還始末。鑑曰。暹起初被風打。到楊州掘港寨。守寨官張昇差百戶桑愷。領軍捉獲。拘囚獄中。有一巡檢言說。放在西方寺安歇。推所乘舡所去處。留在幾一箇月。沿海備禦都指揮郭大人。見暹有布帆十幅不遮風之句。知其爲好人。以賓朋相待。又問臣曰。你所到泊海岸至此凡幾里。臣曰。自牛頭外洋。至桃渚所。至杭州。又至楊州。所過路無慮二千五百有餘里。鑑曰。暹到此。猶以遠於家山爲憂。今你所憂。倍於暹矣。臣曰。暹則徒以路遠爲憂。我所痛者。父新死未斂。母垂老在堂。子職已虧。客路愈遠。悲痛之心。天蒼地黑。
양주부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아침에 광릉역을 떠나 양주부성을 지났습니다.
양주부[1][2]는 곧 옛날 수(隋)나라 강도(江都)의 땅으로서 강좌(江左)의 큰 진(鎭)이었습니다.
10리의 주렴(珠簾), 24교(橋), 36피(陵)의 경치는 여러 군(郡) 가운데 제일이었으니, 이른바 '봄바람이 성곽을 흔들고, 귓전에 가득한 노랫가락'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신 등은 배를 타고 지났기 때문에 구경할 수가 없었으니, 볼 수 있는 것은 진회루(鎭准樓)뿐이었습니다. 진회루는 곧 성의 남문으로서 3층이었습니다.
강을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하국공(夏國公)의 신도묘(神道廟)·관음당(觀音堂)·회원장군(懷遠將軍) 난공(蘭公)의 무덤·안공묘(晏公廟)·황건파(黃巾)·북래사(北來寺)·죽서정포(竹西亭鋪)·수정청(收釘廳)·양자만순검사(揚子灣巡檢司)·만두관황묘(灣頭關荒廟)·봉황교돈(鳳凰橋數)·회자하포(子河鋪)·하박팔탑포(河泊八塔鋪)·제오천포(第伍淺鋪)·세과국(稅課局)·사리포(四里鋪)·소백보공사(卽伯寶公寺)·영은문(迎恩門)을 지났는데, 지나온 곳에 갑 2개가 있었습니다.
소백역(邵伯驛)에 이르니 역 북쪽에는 소백태호(邵伯太湖)가 있었습니다.
노를 저어 호수를 따라 2-3리가량을 가서 소백체운소(邵伯遞運所)에 이르렀는데, 물이 불어나고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 밤에 호수를 지나갈 수가 없으므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항주성 이후부터는 지나온 위소(衛所)에서 또한 백호를 번갈아 차출하여 호송하였습니다.
양주위백호(揚州衛百戶) 조감(趙鑑)이란 자가 신에게 말하기를,
“6년 전에 당신 나라의 이섬이란 분이 또한 이곳에 표류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알고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렇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이섬이 표착했다 돌아간 전말을 물으니 조감이 말하기를,
“이섬이 처음에 바람을 만나 양주 굴항채(掘港寨)에 도착하니, 수채관(守寨官) 장승(張昇)이 백호 상개(桑愷)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잡아와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어느 순검(巡檢)이 '서방사(西方寺)에 편히 묵게 하라’라 말하고, 배를 타고 지나온 길을 심문하느라 1개월 가까이 머물렀는데, 연해비어도지휘(沿海備禦都指揮) 곽(郭) 대인이 이섬에게 '돛 열 폭이 바람을 막아내지 못했네'라는 글귀가 있음을 보고는 그가 좋은 사람임을 깨닫고 손님과 벗의 예로 대접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신에게 묻기를, “당신이 배를 댔던 해안에서 이곳까지는 모두 몇 리나 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두 앞 바다에서 도저소에 이르고, 항주를 거쳐서 또 양주에 이르렀으니, 지나온 길이 무려 2천5백여 리는 될 것입니다.”
조감이 말하기를, “이섬은 이곳에 이르러 오히려 고향이 멀다고 근심했는데, 지금 당신의 근심은 이섬보다 배는 되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섬은 단순히 길이 멀다고 근심했지만, 내가 괴로운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염습도 하지 못했고, 어머니는 늙어 살아 계시지만 자식의 직분을 못했으며, 나그네의 길은 멀기만 하니, 비통한 마음은 천지가 캄캄할 정도입니다.”
23rd Day. Passing Yang-chou Prefecture. This day it rained.
At dawn we left Kuang-ling Station and passed the wall of Yang-chou Prefecture. The prefecture was the site of the old Chiang-tu of Sui, the great market of the lower Yangtze. The splendors of the ten li of pearled blinds, the twenty-four bridges, and the thirty-six banks were the greatest of all the prefectures. This was the land celebrated by the lines, “The spring breezes caress the city, and music fills the ears.”Passing by boat, we could not look about, and the only thing we were able to see was Chen-huai Tower, which was the south gate of the wall and had three stories. [From there we went to Shao-po Transfer Station.]
The garrisons and places through which we had passed since the city of Hang-chou had sent centurions in relay to escort us. The Centurion from Yang-chou Garrison, one Chao Chien, said to me, “Six years ago a countryman of yours, Yi Sõm, also drifted here and returned home. Did you know that?” I said, “Yes.” Then I asked for the whole story of Yi Sõm's going adrift and returning.
Chien said, “In the beginning, Yi Som was driven by winds to Chüeh-chiang Stockade, Yang-chou. The Fortress Commander, Chang Sheng, sent Centurion Sang K’ai at the head of troops to arrest him. They imprisoned him. A Patrol Commander said that he should be placed in Hsi-fang Temple to stay, and they took him there in the boat in which he had come. He stayed there about a month. His Excellency Kuo, Coast Guard Commissioner, saw Yi Sõm's line, We spread ten sails but did not catch a wind,' and knew that he was a good man. He treated him like a visiting friend.” Then he asked me, “How many li is it from the coast on which you landed to here?”
I said, “The road we took from Niu-t’ou-wai-yang to T’ao-chu Chiliad, Hang-chou, and Yang-chou was altogether over 2,500 li long." Chien said, “When he came here, Yi Sõm seemed to grieve because he was far from home. What saddens you now is many times (worse than what saddened] him.” I said, “Yi Som was sad only because the road was long. What pains me is that my father died recently and has not yet been put into his coffin, and my mother is growing old in the house. I have neglected my filial duties, and the road to be traveled is very long; in my grieving heart, the world is black.”
二十三日
过扬州府。是日雨。朝,发广陵驿,过扬州府城。府即旧隋江都之地,江左大镇,——十里珠帘、二十四桥、三十六陂之景为诸郡最,——所谓“春风荡城郭,满耳沸笙歌”之地。臣等由舟而过,不得观望,所可见者,镇淮楼而已。楼即城南门,有三层。沿河而东而北,过夏国公神道庙、观音堂、怀远将军兰公之茔、晏公庙、黄巾坝、北来寺、竹西亭铺、收钞厅、扬子湾巡检司、湾头关荒庙、凤凰桥墩、淮子河铺,河泊八塔铺、第五浅铺、税课局、四里铺、邵伯宝公寺、迎恩门,——所过有闸二座,——至邵伯驿。驿北有邵伯大潮,棹傍湖边二三里许,至邵伯递运所。因水涨风乱不得夜过湖,故经宿焉。自杭城所经卫所亦递差百户以护送之。有扬州卫百户赵鉴者,谓臣曰:“前六年间,你国人李暹亦漂来到此还国,你晓得否?”臣曰:“然。”因问暹之漂还始末。鉴曰:“暹起初被风打到扬州掘港寨,守寨官张升差百户桑恺领军捉获,拘囚狱中。有一巡检言说,放在西方寺安歇,推所乘船所去处,留在几一个月。沿海备御都指挥郭大人,见暹有‘布帆十幅不遮风’之句,知其为好人,以宾朋相待。”又问臣曰:“你所到泊海岸至此凡几里?”臣曰:“自牛头外洋至桃渚所,至杭州,又至扬州,所过路无虑二千五百有余里。”鉴曰:“暹到此,犹以远于家山为忧,今你所忧倍于暹矣。”臣曰:“暹则徒以路远为忧,我所痛者,父新死未殓,母垂老在堂,子职己亏,客路愈远,悲痛之心,天苍地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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