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溥等口粮、紅船、脚力,合行前路官司,一體應付,其發去刀一把、弓一張,轉發官庫收,取庫收繳報,仍仰徑自會 奏施行,先具抄案依准,各 另呈來.”
 
溥等口粮、紅船、脚力,合行前路官司,一體應付,其發去刀一把、弓一張,轉發官庫收,取庫收繳報,仍仰徑自會 奏施行,先具抄案依准,各 另呈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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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의안(議案)의 사리(事理)에 따라 최부 등은 곧 본사(本司)에서 비문(批文)으로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__王)을 차출하여 북경으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지나는 각지의 역체(驛遞)에 이첩하여 파견 관원의 늠급(豪給, =봉급) · 참선(站船, 운수용 선박)과 아울러 호송 군여(軍餘) 및 최부 등의 구량(口糧)· 홍선(紅船). 각력(脚力, 운반비)을 지급하게 하라. 앞길의 관사(官司)도 이첩하여 모든 것을 제공하게 하라. 보내는 칼 한 자루와 활 한 장은 전송(轉送)하여 관고(官庫)에 보관하도록 하고, 창고에서 꺼낼 때는 보관증을 받도록 하라. 직접 상주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먼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초안(抄案)을 갖추니 각기 따로 보고하기 바란다.
 
공동 의안(議案)의 사리(事理)에 따라 최부 등은 곧 본사(本司)에서 비문(批文)으로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__王)을 차출하여 북경으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지나는 각지의 역체(驛遞)에 이첩하여 파견 관원의 늠급(豪給, =봉급) · 참선(站船, 운수용 선박)과 아울러 호송 군여(軍餘) 및 최부 등의 구량(口糧)· 홍선(紅船). 각력(脚力, 운반비)을 지급하게 하라. 앞길의 관사(官司)도 이첩하여 모든 것을 제공하게 하라. 보내는 칼 한 자루와 활 한 장은 전송(轉送)하여 관고(官庫)에 보관하도록 하고, 창고에서 꺼낼 때는 보관증을 받도록 하라. 직접 상주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먼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초안(抄案)을 갖추니 각기 따로 보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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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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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6일 (일) 22:32 판

十一日,在杭州,是日陰,楊秀祿、顧壁共來見臣,壁曰:“我杭城西山八盤嶺有古剎,名高麗寺,寺前有二碑記古跡,距此十五里,趙宋時,高麗使來貢而建也,你國人越境,尚且造寺,則其崇佛之意,可知矣!”臣曰: “此則高麗人所建也,今我朝鮮,關異端,尊儒道,人皆以入孝出恭、忠君信友,為職分事耳,若有影首者,則並令充軍,”壁曰:“凡人不事佛,則必祀神,然則你國事鬼神否?”臣曰:“國人皆建祠堂,以祭祖爾,事其當事之鬼神,不尚溢,”俄而楊秀祿辭出,壁以一公文示臣,乃杭州府報前路各府縣驛送臣等文也,其文曰:“杭州府:〈為海洋聲息事》,奉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简付抄,蒙欽差鎮守浙江司設監太監張慶、巡按浙江監察御史暢亨會案前事,「據總督浙江備倭署都指揮僉事黃宗、巡視海道浙江按察司副使吳文元呈,并定海、昌國等衛及台州府等衙門各狀申報,《弘治元年正月十七日,瞭見海門衛桃诸千戶所牛頭外洋有船,使入師子寨》等因,為照,係于海洋船隻重事,就經併行督、巡海、分守、分巡官員,督指揮僉事黃宗等呈,備桃诸千戶所申,《該千百戶柳春等,帶領旗軍,前去臨海縣二十都,與同當地火甲,獲住人船,押送到所審問,語言難辨,據寫姓名來歷緣由,抄單呈報前來》會同巡按浙江監察御史暢亨議,看得單內開《審夷人崔溥,雖據供寫,朝鮮國人往濟州等處海島,為暴風所逆,得到天子大國之界》等情,但恐夷人多許,真偽難測,況無開報所泊船內,會否點擔有何器械、并別項行李等件,俱合勘審,又經行據撼督備倭署都指揮僉事黃宗、巡視海道副使吳文元、分守右參議陳潭、分巡副使楊峻呈,《該把烟松門等衛所備倭指揮同知劉澤呈送夷人四十三人,會同審據一人寫名云云,再三會審無異,隨將印信、馬牌、枋錄、文籍、冠帽、衣包等件,點看明白,給與崔溥等收領,及將所獲夷船,拖閣上塢外,備由連人并刀一把、一張解送到職》會同浙江都布按三司掌印都指揮僉事崔徹、左布政使徐主、副使魏福,覆審相同,緣係遭風外夷人船事理,擬合通行,除外,仰抄領人案回司.」照依會案內事理,即將崔溥等,本司給批差委指揮僉事楊旺,管送赴京,及行所屬驛遞,應付差去官員虞給、站船,并伴送軍餘及崔一把擒并所屬沿海軍衛巡司出海等官,部領軍船哨究,操守備,續據署都力

p.392 溥等口粮、紅船、脚力,合行前路官司,一體應付,其發去刀一把、弓一張,轉發官庫收,取庫收繳報,仍仰徑自會 奏施行,先具抄案依准,各 另呈來.”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양수록(楊秀祿)과 고벽이 함께 신을 보러 왔습니다.

고벽이 말하기를, “우리 항주성 서쪽 산인 팔반령(八盤嶺)에 고찰이 있는데 이름을 고려사(高麗寺)[1][2]라 합니다. 절 앞에 2개의 비(碑)가 있어 옛 사적을 기록했는데 이곳과는 15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곧 송나라 때 고려의 사신이 와서 공물을 바치고 세운 것입니다. 당신 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와서도 힘써 절을 지었으니 불교를 숭상하는 뜻을 알 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


신이 말하기를, “이는 고려 사람이 세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 조선은 이단(異端)을 물리치고[4] 유도(儒道)를 높이어 사람마다 모두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어른에게 공손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머리를 깎은 자가 있으면 모두 군역(軍役)에 편입시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사람들은 부처를 섬기지 않으면 반드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데, 그렇다면 당신 나라는 귀신을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사당을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당연히 섬겨야 할 귀신만 섬기고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조금 후에 양수록은 하직하고 나갔습니다.

고벽이 공문(公文) 한 장을 신에게 보여주었는데 바로 항주부에서 앞으로 가야할 각 부·현·역(府縣驛)에 신 등의 호송을 통지하는 공문이었습니다. 그 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항주부 : 〈해양 상황에 관한 건) 절강등처승선포정사사(浙江等處承宣布政使司)의 차부(箚付)를 받았는데 내용은 이하와 같습니다.

흠차진수절강사설감태감(欽差鎭守浙江司設監太監) 장경(張慶)과 순안절강감찰어사(巡按浙江監察御史) 창형(楊亭)의 전사(前事)에 대한 공동의안(議案)을 받들었는데,

“총독절강비왜서도지휘첨사(摠督浙江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黃宗), 순시해도절강안찰사부사(巡視海道浙江按察司副使) 오문원(吳文元)의 정문(呈文)과 아울러 정해위(定海衛), 창국위(昌國衛) 등 및 태주부(台州府) 등 아문(衙門)이 각기 올린 보고서는, 홍치(弘治) 원년 윤정월 17일에 해문위(海門衛) 도저천호소(桃渚千戶所)의 우두산(牛頭山) 앞 바다에 배가 있는 것을 멀리서 보고 사자채(師子寨)로 들어오도록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해양의 선박에 관한 중대한 일이므로 곧 총독(總督)·순해(巡海)·분수(分守)·분순(分巡)의 관원에게 아울러 이첩하여, '파총(把總) 및 소속 연해(沿海) 군위(軍衛)의 순사(巡司)·출해(出海) 등 관원을 독려하여 군선(軍船)을 거느리고 정찰하며 빈틈없이 방비하라’고 지시하였다. 또 이어서 받은 도저천호소의 보고서가 첨부된 서도지휘첨사(署都指揮僉事) 황종 등의 정문(呈文)에 해당 천호(千戶)·백호(百戶) 유춘(柳春) 등이 기군(旗軍)을 거느리고 임해현(臨海縣) 20도(都)로 가서 그 곳 화갑(火甲)과 함께 사람과 배를 붙잡아 유치하고, 도저소로 압송하여 심문했으나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하며, 성명과 내력 및 사유를 쓴 초단(抄單)을 보내왔다. 순안절강감찰어사 창형과 회동하여 논의하며 초단을 살펴보니, 이인(夷人) 최부를 심문하여 공술에 의거, <조선 사람으로 제주 등지의 섬에 갔다가 폭풍을 만나 천자가 다스리는 대국(大國) 땅에 도착한 것'이라는 사정을 써 놓았지만, 이인(夷人)들은 속임이 많아 사실인지 거짓인지 헤아리기 어렵고, 더구나 정박한 배 안에 무기나 별도의 행장 등을 점검했는지 여부를 보고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모두 실지 조사를 해야할 것이다. 다시 공문을 보내고 나서 받은 총독비왜서도지휘첨사(總督備倭署都指揮僉事) 황종과 순시해도부사(巡視海道副使) 오문원 · 분수우참의(分守右參議) 진담(陳潭)·분순부사(分巡副使) 양준(楊竣)의 정문(呈文)은 '해당 파총송문등위소(把摠松門等衛所) 비왜지휘동지(備倭指揮同知) 유택(柳澤)이 이인(夷人) 43명을 정문과 함께 보내 왔으므로, 회동하여 심사하고 한 사람씩 이름을 써서 ... 운운하였다. 두세 차례 모여 심사해 보았으나 별 이상이 없었고, 바로 인신(印信)·마패(馬牌)·방록(榜錄)·문적(文籍)· 관모(冠帽)·의포(衣袍) 등을 하나씩 점검해 보아도 분명하였으므로 최부 등에게 내주어 수령하게 하였다. 압류한 이인(夷人)의 선박은 선거(船渠)로 끌어다 올려두는 한편 사유서를 갖춘 관련 인원을 칼 한 자루, 활 한 장(張) 딸려서 본직(本職)에게 보낸다'는 것이었다. 이에 절강 도(都) · 포(布)·안(按) 삼사(三司)의 장인도지휘사(掌印都指揮僉事) 최윤(崔__), 좌포정사(左布政使) 서규(徐圭), 부사(副使) 위복(魏福)과 회동하여 복심(覆審)해 보아도 앞뒤가 서로 동일하였다. 사연이 풍랑을 만난 외이(外夷)의 사람과 배에 관한 사항이므로 응당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 외에, 인원 인수의 건을 초록(抄錄)한 다음 포정사사(布政使司)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공동 의안(議案)의 사리(事理)에 따라 최부 등은 곧 본사(本司)에서 비문(批文)으로 지휘첨사(指揮僉事) 양왕(__王)을 차출하여 북경으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지나는 각지의 역체(驛遞)에 이첩하여 파견 관원의 늠급(豪給, =봉급) · 참선(站船, 운수용 선박)과 아울러 호송 군여(軍餘) 및 최부 등의 구량(口糧)· 홍선(紅船). 각력(脚力, 운반비)을 지급하게 하라. 앞길의 관사(官司)도 이첩하여 모든 것을 제공하게 하라. 보내는 칼 한 자루와 활 한 장은 전송(轉送)하여 관고(官庫)에 보관하도록 하고, 창고에서 꺼낼 때는 보관증을 받도록 하라. 직접 상주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먼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초안(抄案)을 갖추니 각기 따로 보고하기 바란다.



11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Yang Hsiu-lu and Ku Pi came to see me. Ku Pi said, “On Pa-p’an Range in the mountains west of Hang-chou is an old monastery named Koryo Temple. In front of the temple are two stone tablets that commemorate the old ruins.21 They are fifteen li from here. In the Sung period an envoy from Koryo came with tribute and built [the temple). That your countrymen build temples even beyond their own borders must mean that they revere the Buddha.”

I said, “But that was built by a man from Koryo. Our Chosón, now, has exposed heresies and respects the Confucian Way. The people consider as their duties only filial piety in the home and courtesy outside it, loyalty to their lords, and sincerity with their friends. Anyone who shaves his head is banished.” Ku Pi said, “All people who do not serve the Buddha sacrifice to gods. That being so, does your country serve gods and spirits? I said, “All my countrymen build shrines and sacrifice to their ancestors. They serve the gods and spirits they ought to serve and do not respect unorthodox sacrifices.” Presently Yang Hsiu-lu left, and Ku Pi showed me an official document. It was a document in which Hang-chou Prefecture notified each prefecture and county on the road ahead that they were sending us on by stations. The text said, “Hang-chou Prefecture on a matter of maritime intelligence: “We have received a copy of orders from the Provincial Administration Office of Chekiang and Other Places. We have received the joint judgment on the above matter of Chang Ch’ing, Overseer of the Imperial Grand Defending Directorate of Chekiang (Ch’in-ch'ai chen [shou] Che-chiang Ssu-she-chien t'ai-chien] and Ch’ang Heng, Regional Investigating Censor for Chekiang [Hsün-an Che-chiang chien-ch'a yü-shih].22 According to a report from Huang Tsung, Supreme Anti-Japanese Commander for Chekiang and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and Wu Wen-yuan, Chekiang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the Maritime Circuit, and reports of respective conditions in Ting-hai, Ch’ang-kuo, and other garrisons, and in T’ai-chou Prefecture and other garrison ports: “On the 17th Day, Intercalary First Month, Hung-chih 1, a ship was clearly seen to sail into Shih-tzu Stockade from Niu-t’ou-wai-yang, T’ao-chu Chiliad, Hai-men Garrison. Accordingly, the matter was held to be an important one of seagoing ships, and we ordered maritime and local defending and touring offices of the Supreme Command, coast guards and naval officers in their commands, and warships under control of the Ministry to reconnoiter and take firm precautions.

“Continuing, according to the report of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Huang Tsung, etc., and the reports of the T'ao-chu Chiliarch: “Liu Ch’un, Centurion [Po-hu] of the said Chiliad, and others led banner troops out to Division 20 in front of Lin-hai County and with the local militia of the area arrested the men, seized the boat, and drove [the men] to the Chiliad. When they were questioned, their speech was difficult to understand. Their names and backgrounds, as they wrote them, were copied into a statement, reported, and have come to hand. We met with Ch’ang Heng, Regional Investigating Censor for Chekiang, and discussed the matter. We saw that the contents of the statement began with an interrogation of the barbarian Ch’oe Pu. Although, according to his statement, he was a Korean who had gone to Cheju and other islands and been driven off by violent winds, arriving at the border of the country of the Son of Heaven, we feared that barbarians are often deceitful, and it is hard to judge what is true and what false. That was the more so in this case, since there was no report on the contents of the boat – whether they had been inspected, what implements there were, and what items of baggage there were. It was appropriate that all that be examined.

“According, then, to the report of Huang Tsung, Supreme Anti-Japanese Commander and Concurrent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Wu Wenyüan,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the Maritime Circuit; Ch'en T’an, Right Assistant Administration Commissioner; and Yang Chün, Regional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and the report of Liu Tse, the said AntiJapanese Commissioner for Sung-men and Other Garrisons and Chiliads and Vice Commander [T’ung-chih]:

“The forty-three barbarians were brought together and investigated by having each man write his name and so forth. A second and third time they were all questioned, and there were no discrepancies. Accordingly, the seal, horse permit, records, documents, hats, bundles of clothing, and other things were taken and each checked carefully. Receipts were given to Ch’oe Pu and the others. The seized boat was also towed outside Ko-shang-wu and a statement of its details prepared. The men, a sword, and a bow were sent off together to this office.

“We have met with [representatives of] the Three Authorities of Chekiang, Ts’ui Yin, Assistant Military Commissioner for Documents [Chang-yin tuchih-hui ch’ien-shih]; Hsü Kuei, Left Provincial Administration Commissioner; and Wei Fu,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and held another investigation. Since the facts and theories concerning the barbarians and their boat, aside from the encounter with the wind, are consistent and in harmony, we put aside that one fact and ordered that the notes of the proceedings in the matter of the men be turned over to this office. In accordance with the facts and principles involved in the case, in respect to Ch’oe Pu and the others, this office grants its endorsement and commissions Commander Yang Wang to take charge of escorting them to the capital. Let the stations and transfer stations under this office give to the dispatched official food and boats and to the escorting troops and Ch’oe Pu and his company rations, red boats, and laborers. It is fitting that all offices on the road ahead should comply. Let the sword and bow that have been sent out be turned over to the Public Treasury to be stored. When we have received a report from the Treasury that it has taken them in, we shall order direct individual and group memorials requesting the arrangements to be allowed. First, let copies of the handling of the case be prepared and, as acknowledgement, individually reported here.”

  • 기후
  • 인명
  • 지명
  • 불교
  • 역사
  • 유학(효,충,신,불교억제)
  • 풍습(귀신)
  • 유학(조상제사)
  • 행정(공문)
  • 고려 문종의 4남인 대각국사 의천은 중국에 건너가 송나라 철종의 환대를 받았으며 각지를 다니며 중국의 고승들과 토론했습니다. 항저우 혜인사원(慧因寺院)에서 존경하던 정원(淨源)법사를 만났고 7,500권 정도의 불경을 기증했습니다. 당(唐)대에는 도교 숭상정책으로 불교가 탄압 받아 경전들이 많이 멸실했기 때문에 의천이 기증한 경전은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 뒤로 절의 이름이 고려사가 되고, 선종에서 화엄종 절로 바뀌었습니다. 귀국한 뒤에도 의천은 화엄종 불경 170권과 화엄경각 보수를 위해 금 2,000냥을 쾌척했습니다. 절은 태평천국의 난 때 완전히 없어졌지요. 1989년에 가 보니 주춧돌과 우물만 있더군요. 그래서 3차례 방문해 중건 문제를 항저우시 당국과 협의했고, 지난달 왕궈핑(王國平) 시 공산당 서기와 만나 중건에 합의했습니다. 항저우시 종교국장도 중건에 참고하기 위해 해인사 불국사를 둘러보고 갔습니다." 김 이사장은 "지난해 항저우를 방문한 한국인은 20만명으로 외국인 중 가장 많았다"며 "고려사가 서호 인근인 데다 옆에 호텔 신축계획도 있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5]
  • 인파 끊긴 고려사, 인파 넘치는 영은사, 법의 알맹이는 사라지고 겉치레만 요란, 미디어붓다, 2010.08.19
  • 고려 대각국사 의천과 항주 혜인사(慧因寺) 정황
  • 퇴계와 승려
  • 성종실록 272권, 성종 23년 12월 4일 경자 4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이세좌·안호 등이 금승법을 시행할 경우의 이로움과 시행하지 않을 경우의 해로움을 다섯 가지씩 들어 상소하다
  • 한국인터뷰/ 김준엽 사회과학원 이사장 - 한중교류의 성과와 나아갈 길, 한국일보, 2004.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