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금성

North Korea Humanities

백세빈(JBNU202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9일 (화) 21:51 판 (토월회와 데뷔)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백세빈(JB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석금성(石金星)
출처 :
 
한글명 석정의 한자명 石丁義 영문명 SEOK JEONG-HUI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907년년 몰년 1995년년 출신지 평안남도 전공 배우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석금성은토월회에서 데뷔하여 1930년대까지 중요 배우로 활약한 여배우이다. [1] 평안북도 출신으로 1925년 광무대 공연의 <추풍감별곡>의 주역인 추향을 맡아 첫 무대를 밟았다. [2] 대표작은 <희생하든 날 밤> · <춘향전> · <산 송장> · <쟌발쟌> · <혈육> 등이었는데, 영화계로부터 출연 교섭이 잇따랐다. [3] 본래 <약혼>이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연극만큼 각광을 받지는 못했다. 본래 영화보다는 연극체질이었고 따라서 <아리랑고개> · <모란등기> 같은 무대극에서 보다 많은 인기를 끌었다. [4]



생애


유년 및 가족관계

평안남도의 서민의 딸로 태어난 석정의인물는 일찍 서울로 이주하여 진명(進明)여학교기관를 다니다가 기방에 들어갔다. 그 뒤 기생의 몸으로 여기저기 요정에서 일하다가 극단 토월회기관 전무였던 이서구인물(李瑞求)의 눈에 띄어 광무대 시절 토월회 배우로서 연극계로 진출하였다. [5] 데뷔 한 해 충청남도 이충직인물과 결혼 후 3년만에 이혼, 이후 연극인 최승일인물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뒀으나 1946년 남편과 자식이 월북해 소식이 끊겼다.[6]


토월회와 데뷔

석금성의 데뷔는 토월회의 광무대 상연과 관련이 깊다. 토월회는 재정난으로 인해 고난을 겪고 있었고, 당시에는 여배우를 구하는 것이 시급하고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런데 이서구는 기생 일을 중단하고 있던 석정희를 설득하면, 여배우로 출연시킬 수 있음을 간파하였으며, 석금성은 어렵지 않게 승낙하였다.[7] 석금성이 처음 출연한 연극은 <추풍감별곡>이었다고 밝혔다. 당시의 배역은 ‘추향’이었다.[8] 하지만 이 작품보다 석금성이 먼저 출연한 작품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25년 5월 11일부터 15일까지 공연된 <카추샤>에 석금성이 출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백수가 주인공 공작역을 맡았고, 김성(金星)이 ‘카추샤’를 맡았다고 했다. ‘김성(金星)’이라는 배우는 없었으며, 당시 상황을 참조했을 때 ‘석금성’의 ‘금성(金星)’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9]


정서적 연극의 강점 확립

석금성은 영화 <약혼>으로 영화배우로서 데뷔하였다. 영화 약혼은 팔봉 김기진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석금성 자신이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진술 이외에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10] 1929년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토월회는 <간난이의 설움>을 조선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공연에서 석금성은 ‘간난이’ 역을 맡았다. 석금성은 ‘시골 색시’를 연기했는데, 동작이 음성과 조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1] 이전에는 캐릭터 구축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 작품에서 조화로운 연기의 가능성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석금성이 인물 분석을 통해 역할을 이해호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시작했음을 확인시켜 준다.[12]


전성기를 이끈 <아리랑고개>

<아리랑고개>는 1929년 11월 21일부터 28일까지 상연된 작품이다. <아리랑고개>는 민요<아리랑>을 각색한 작품이었다. 석금성의 배역 ‘봉이’는 주요한 세 장면에 등장했다. 1)서사가 책을 읽을 때 처녀들과 함께 배경 그림을 만드는 장면, 2)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되면서 길용과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 그리고 길용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구슬픈 눈물을 흘리고 민중의 노래를 부르며 정서를 폭발시키는 장면이었다. [13] “석금성양의 최후의 아리랑은 듯는 사람의 머리 끗을 쭙볏하게” 만들었다. 검열 때문에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절름발이인<아리랑 고개>”였지만 관객들은 극에서 “흉년이 들어 여러 가지 박두한 문제로 말미암아 전답을 빼앗기고 집을 빼앗기고 남부녀대하고 나”가던 현실을 읽어낼 수 있었다.[14]


연구


토월회와 데뷔

석금성의 데뷔는 토월회의 광무대 상연과 관련이 깊다. 토월회는 재정난으로 인해 고난을 겪고 있었고, 당시에는 여배우를 구하는 것이 시급하고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런데 이서구는 기생 일을 중단하고 있던 석정희를 설득하면, 여배우로 출연시킬 수 있음을 간파하였으며, 석금성은 어렵지 않게 승낙하였다.[15] 석금성이 처음 출연한 연극은 <추풍감별곡>이었다고 밝혔다. 당시의 배역은 ‘추향’이었다.[16] 하지만 이 작품보다 석금성이 먼저 출연한 작품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25년 5월 11일부터 15일까지 공연된 <카추샤>에 석금성이 출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백수가 주인공 공작역을 맡았고, 김성(金星)이 ‘카추샤’를 맡았다고 했다. ‘김성(金星)’이라는 배우는 없었으며, 당시 상황을 참조했을 때 ‘석금성’의 ‘금성(金星)’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17]


정서적 연극 강점 확립

석금성은 영화 <약혼>으로 영화배우로서 데뷔하였다. 영화 약혼은 팔봉 김기진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로, 석금성 자신이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진술 이외에 이 영화에 출연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18] 1929년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토월회는 <간난이의 설움>을 조선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공연에서 석금성은 ‘간난이’ 역을 맡았다. 석금성은 ‘시골 색시’를 연기했는데, 동작이 음성과 조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 이전에는 캐릭터 구축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 작품에서 조화로운 연기의 가능성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석금성이 인물 분석을 통해 역할을 이해호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기 시작했음을 확인시켜 준다.[20]


전성기를 이끈 <아리랑고개>

<아리랑고개>는 1929년 11월 21일부터 28일까지 상연된 작품이다. <아리랑고개>는 민요<아리랑>을 각색한 작품이었다. 석금성의 배역 ‘봉이’는 주요한 세 장면에 등장했다. 1)서사가 책을 읽을 때 처녀들과 함께 배경 그림을 만드는 장면, 2)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되면서 길용과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 그리고 길용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구슬픈 눈물을 흘리고 민중의 노래를 부르며 정서를 폭발시키는 장면이었다. [21] “석금성양의 최후의 아리랑은 듯는 사람의 머리 끗을 쭙볏하게” 만들었다. 검열 때문에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절름발이인<아리랑 고개>”였지만 관객들은 극에서 “흉년이 들어 여러 가지 박두한 문제로 말미암아 전답을 빼앗기고 집을 빼앗기고 남부녀대하고 나”가던 현실을 읽어낼 수 있었다.[22]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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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김남석,「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2), 111-150.
  2. "석금성 (石金聖)"『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3. "석금성 (石金聖)"『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4. "석금성 (石金聖)"『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5. "석금성 (石金聖)"『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6. "최승일 (崔承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남석,「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3쪽.
  8. 김남석,「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5쪽.
  9. 김남석,「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5쪽.
  10. 김남석, 「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6쪽
  11. 김남석, 「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9쪽
  12. 김남석, 「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20쪽
  13. 김남석, 「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22쪽.
  14. 김재석,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연구, 2011, 37쪽
  15. 김남석,「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3쪽.
  16. 김남석,「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5쪽.
  17. 김남석,「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5쪽.
  18. 김남석, 「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6쪽
  19. 김남석, 「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19쪽
  20. 김남석, 「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20쪽
  21. 김남석, 「배우 석금성(石金星)의 연기 변모 양상 연구」, 연세사학연구회, 한국극예술연구, 2005, 122쪽.
  22. 김재석,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연구, 2011, 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