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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목포의 눈물)
(다방의 푸른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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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노래도 없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내용=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노래도 없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에 ‘신민요’의 일종인 ‘향토노래’로서 발표되었음에도, 해방 후 이른바 ‘트로트 왜색(倭色) 논쟁’에서 대표적인 일본풍의 가요로 지목되기도 했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논쟁의 와중에도 ‘목포의 눈물’은 특유의 지역적 공간을 나타내는 제목과 가사 내용으로 인해 호남 지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으로 널리 인정받았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에 ‘신민요’의 일종인 ‘향토노래’로서 발표되었음에도, 해방 후 이른바 ‘트로트 왜색(倭色) 논쟁’에서 대표적인 일본풍의 가요로 지목되기도 했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논쟁의 와중에도 ‘목포의 눈물’은 특유의 지역적 공간을 나타내는 제목과 가사 내용으로 인해 호남 지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으로 널리 인정받았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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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콧소리로 민족의 울분을 토해 낸 이난영의 노래는 일제강점기 고통 받는 민족의 슬픔과 울분을 대변하는 한의 가락으로 평가받는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1934년 조선일보주최 전국 6대도시 ‘애향가’ 가사 공모전에 응모된 3천여 편의 작품 중 목포의 문일석 작품 ‘목포의 눈물’이 당선되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오케레코드는 고복수를 위해 만든 손목인 곡 ‘갈매기 항구’ 멜로디에 이 가사를 넣어 목포출신가수 이난영에게 부르게 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대중가요 전성시대를 연 공전의 히트곡인 ‘목포의 눈물’은 식민지 조선을 흐느낌으로 잠기게 했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애절한 콧소리로 민족의 울분을 토해 낸 이난영의 노래는 일제강점기 고통 받는 민족의 슬픔과 울분을 대변하는 한의 가락으로 평가받는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1934년 조선일보주최 전국 6대도시 ‘애향가’ 가사 공모전에 응모된 3천여 편의 작품 중 목포의 문일석 작품 ‘목포의 눈물’이 당선되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오케레코드는 고복수를 위해 만든 손목인 곡 ‘갈매기 항구’ 멜로디에 이 가사를 넣어 목포출신가수 이난영에게 부르게 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대중가요 전성시대를 연 공전의 히트곡인 ‘목포의 눈물’은 식민지 조선을 흐느낌으로 잠기게 했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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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의 가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노적봉과 관련된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부분이 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이 가사 때문에 ‘목포의 눈물’은 조선총독부의 사전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뻔 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그러나 검열을 위해 가사를 제출하면서 ‘삼백년 원한 품은’ 부분을 ‘삼백년 원앙품은’으로 바꿨고, 한글 받힘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승인을 해줬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목포의 눈물’은 발매이후 재발매를 거듭하면서 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목포의 눈물’의 가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노적봉과 관련된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부분이 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이 가사 때문에 ‘목포의 눈물’은 조선총독부의 사전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뻔 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그러나 검열을 위해 가사를 제출하면서 ‘삼백년 원한 품은’ 부분을 ‘삼백년 원앙품은’으로 바꿨고, 한글 받힘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승인을 해줬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목포의 눈물’은 발매이후 재발매를 거듭하면서 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ref>『[https://music.bugs.co.kr/musicpost/BUTP6FZBT8SKH71WN51G#:~:text=%EC%98%A4%EC%BC%80%EB%A0%88%EC%BD%94%EB%93%9C%EB%8A%94%20%EA%B3%A0%EB%B3%B5%EC%88%98%EB%A5%BC%20%EC%9C%84%ED%95%B4%20%EB%A7%8C%EB%93%A0%20%EC%86%90%EB%AA%A9%EC%9D%B8%20%EA%B3%A1%20'%EA%B0%88%EB%A7%A4%EA%B8%B0,%EB%AA%A9%ED%8F%AC%EB%A5%BC%20%EC%95%A0%ED%8B%8B%ED%95%9C%20%EC%B6%94%EC%96%B5%EC%9D%98%20%EB%AA%85%EC%86%8C%EB%A1%9C%20%EB%90%98%EC%82%B4%EB%A6%AC%EB%8A%94%20%EB%A7%88%EB%A0%A5%EC%9D%84%20%EB%B0%9C%ED%9C%98%ED%96%88%EB%8B%A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 벅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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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식민지 조선의 음반시장이 정점에 이르던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이난영은 당시 평균적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세 곡의 두드러지는 재즈풍의 곡을 발표한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스윙재즈 양식의 ‘바다의 꿈’과 <span style="background:#AFEEEE">블루스가 가미된 ‘다방의 푸른 꿈’</span>, 그리고 경쾌한 집시스윙 양식의 ‘항구의 붉은 소매’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특히 큰 인기를 얻었던 <다방의 푸른 꿈>은 중일전쟁 기간 일본의 블루스 음악 유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했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이 시기 일본식 블루스는 일반적으로 미국 본토의 블루스와 양식적 유사성이 많지 않았던 반면, ‘다방의 푸른 꿈’은 오히려 일본식 블루스보다 상대적으로 미국적 블루스의 향취를 더 많이 자아낸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블루스 특유의 반음 내린 3음(블루노트)을 쓴 김해송의 파격적 선율구사와 더불어 이를 잘 소화해낸 이난영의 가창력이 합작해낸 결과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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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식민지 조선의 음반시장이 정점에 이르던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이난영은 당시 평균적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세 곡의 두드러지는 재즈풍의 곡을 발표한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스윙재즈 양식의 ‘바다의 꿈’과 <span style="background:#AFEEEE">블루스가 가미된 ‘다방의 푸른 꿈’</span>, 그리고 경쾌한 집시스윙 양식의 ‘항구의 붉은 소매’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특히 큰 인기를 얻었던 <다방의 푸른 꿈>은 중일전쟁 기간 일본의 블루스 음악 유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했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이 시기 일본식 블루스는 일반적으로 미국 본토의 블루스와 양식적 유사성이 많지 않았던 반면, ‘다방의 푸른 꿈’은 오히려 일본식 블루스보다 상대적으로 미국적 블루스의 향취를 더 많이 자아낸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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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 특유의 반음 내린 3음(블루노트)을 쓴 김해송의 파격적 선율구사와 더불어 이를 잘 소화해낸 이난영의 가창력이 합작해낸 결과다.<ref>(최유준 전남대 HK교수,)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11138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html><online style="color:purple">『월간중앙』<sup>online</sup></online></html>,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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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9일 (화) 12:26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조해경(K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이난영(李蘭影)
이난영.jpg
출처 : (이준희,) 「[1]」, 『오마이뉴스』online, 오마이뉴스, 작성일: 2015년 04월 10일.
 
한글명 이난영 한자명 李蘭影 영문명 Lee Nan-young 가나명 岡蘭子 이칭 이옥례(李玉禮)
성별 여성 생년 1916년 몰년 1965년 출신지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 42 전공 가수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시드는 청춘」,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 등을 부른 가수.[1] 1935년 가사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 가요계의 새별로 등장하였다.[2]


생애


어린 시절

본명 이옥례(李玉禮). 전라남도 목포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 이봉룡(李鳳龍)과 함께 불우하게 자랐다.[3]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4] 엄마와 함께 제주도의 생활이 시작되고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의 아이를 돌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를 높이 평가하게 된 집주인이 그녀를 소위 막간가수(영화나 연극이 시작 되기전 나와 노래하는 가수)로 활동하게 하였다.[5]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리 가극단장의 권유로 특별단원으로 채용된 것이 1932년 열여섯살 되던 해였다.[6]


데뷔

단체가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李哲)에게 발탁되어, 1933년에 염석정 작곡의 「향수」를 취입하였다.[7] 하지만 그보다 조금 앞서 태평레코드에서 발매된 「시드는 청춘」, 「지나간 옛 꿈」이 이난영의 데뷔곡이다.[8] 이후 1935년 가사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9]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恨이) 서린 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10]


혼인 및 활동

1936년 20세가 되던 해에 가요작곡가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였다.[11] 그녀가 같은 오케레코드사 소속의 작곡가이자 가수 겸 연주자였던 김해송과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하게 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교감만이 아니라 김해송이 추구한 재즈풍의 음악과 이난영의 음악적 지향이 공명을 이루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12] 공연단의 일원으로서 이난영과 김해송 부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연 무대에 동반 출연했는데, 재즈와 즉흥연주에 능했던 김해송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전해진다.[13] 뒤이어 그녀는 이봉룡 작곡의 「목포는 항구다」, 김해송 작곡의 「다방의 푸른 꿈」등으로 당대 최고의 유명 가수가 되었다.[14]


광복과 한국 전쟁

그녀는 광복 후에도 무대가수로 활약하였고 레코드가수로서 세상에 알려졌지만, 태양극단에 입단했을 때부터 무대예술가로서 성공하고픈 꿈이 있었고 배우로서의 기질도 다분했다.[15]

해방 직후 그녀는 남편 김해송의 K.P.K악단 무대를 통해 십대 때부터 꿈꿔왔던 배우의 꿈을 이루어내는 듯했다.[16] 김해송이 제작한 대규모 악극 <카르멘>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연 배우로 활약했으나, 이 사실은 한국전쟁 이후 쉽게 잊혀졌다.[17] 한국전쟁 와중에 김해송의 납북이라는 불행한 사고가 없었다면, 그가 이끈 K.P.K악단이 한국 최초의 뮤지컬 전문극단으로, 이난영은 한국 최초의 성공한 뮤지컬 배우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18]

그녀는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손수 운영하였다.[19]


이후 생애

김해송이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어 북으로 가는 길에 죽게 되면서, 이난영은 7남매를 포함한 대가족의 생계를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20]

이 무렵부터 이난영은 자신의 딸들을 ‘김시스터즈’라는 이름의 걸그룹으로 키워내기 시작한다.[21] 알려진 바대로 김시스터즈는 오래지 않아 미국 라스베이거스 무대로 진출하여 상당히 큰 성공을 거둔다.[22]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한국에서의 이난영은 몰락하고 있었다.[23] 오케레코드사의 동료가수였던 남인수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도 이 무렵부터인데, 기혼자였던 그가 불륜의 관계 맺기를 감행했던 것은 이난영이 겪었을 모종의 상실감에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한다.[24] 이난영 또한 연하의 남인수에게 의지하고 매달렸으며, 불치병을 앓고 있던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기도 했다.[25] 하지만 세간의 화제를 뿌리고 불륜에 대한 사회적 비난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유지되던 이들의 애정관계 역시 1962년 남인수의 죽음으로 짧게 매듭지어졌다.[26] 같은 해 12월에 이난영은 김시스터즈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서 라스베이거스의 무대에 함께 서기도 하고 ‘에드 설리번 쇼’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지만, 8개월 정도의 미국생활을 접고 1963년 8월 돌연 귀국했다.[27] 그녀는 국내에서 연예활동을 하고 있었던 세 아들들의 음악적 전열을 정비하여 그해 11월에 ‘김브라더스’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진출시킨다.[28]

이제 한국에서 홀로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난영의 삶은 이후 1년 남짓 유지되다가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의 자택에서 마무리되었다.[29]





연구


목포의 눈물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노래도 없다.[30]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에 ‘신민요’의 일종인 ‘향토노래’로서 발표되었음에도, 해방 후 이른바 ‘트로트 왜색(倭色) 논쟁’에서 대표적인 일본풍의 가요로 지목되기도 했다.[31] 논쟁의 와중에도 ‘목포의 눈물’은 특유의 지역적 공간을 나타내는 제목과 가사 내용으로 인해 호남 지역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으로 널리 인정받았다.[32]

애절한 콧소리로 민족의 울분을 토해 낸 이난영의 노래는 일제강점기 고통 받는 민족의 슬픔과 울분을 대변하는 한의 가락으로 평가받는다.[33] 1934년 조선일보주최 전국 6대도시 ‘애향가’ 가사 공모전에 응모된 3천여 편의 작품 중 목포의 문일석 작품 ‘목포의 눈물’이 당선되었다.[34] 오케레코드는 고복수를 위해 만든 손목인 곡 ‘갈매기 항구’ 멜로디에 이 가사를 넣어 목포출신가수 이난영에게 부르게 했다.[35] 대중가요 전성시대를 연 공전의 히트곡인 ‘목포의 눈물’은 식민지 조선을 흐느낌으로 잠기게 했고, 항구도시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했다.[36]

‘목포의 눈물’의 가사에는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노적봉과 관련된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부분이 있다.[37] 이 가사 때문에 ‘목포의 눈물’은 조선총독부의 사전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뻔 했다.[38] 그러나 검열을 위해 가사를 제출하면서 ‘삼백년 원한 품은’ 부분을 ‘삼백년 원앙품은’으로 바꿨고, 한글 받힘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승인을 해줬다.[39] ‘목포의 눈물’은 발매이후 재발매를 거듭하면서 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40]


다방의 푸른 꿈

식민지 조선의 음반시장이 정점에 이르던 1939년과 1940년 사이에 이난영은 당시 평균적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세 곡의 두드러지는 재즈풍의 곡을 발표한다.[41] 스윙재즈 양식의 ‘바다의 꿈’과 블루스가 가미된 ‘다방의 푸른 꿈’, 그리고 경쾌한 집시스윙 양식의 ‘항구의 붉은 소매’다.[42] 특히 큰 인기를 얻었던 <다방의 푸른 꿈>은 중일전쟁 기간 일본의 블루스 음악 유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했다.[43] 이 시기 일본식 블루스는 일반적으로 미국 본토의 블루스와 양식적 유사성이 많지 않았던 반면, ‘다방의 푸른 꿈’은 오히려 일본식 블루스보다 상대적으로 미국적 블루스의 향취를 더 많이 자아낸다.[44]

블루스 특유의 반음 내린 3음(블루노트)을 쓴 김해송의 파격적 선율구사와 더불어 이를 잘 소화해낸 이난영의 가창력이 합작해낸 결과다.[45]


제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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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이난영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이난영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이난영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목표의 예술인 이난영online, 목포문화원.
  5. 목표의 예술인 이난영online, 목포문화원.
  6. 목표의 예술인 이난영online, 목포문화원.
  7. 이난영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 이난영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이난영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목표의 예술인 이난영online, 목포문화원.
  11. 이난영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월간중앙』online,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
  13.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월간중앙』online,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
  14. 이난영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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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이난영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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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월간중앙』online,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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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월간중앙』online,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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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online, 벅스
  34.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online, 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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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online, 벅스
  37.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online, 벅스
  38.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online, 벅스
  39.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online, 벅스
  40. 한국 대중음악 100년의 역사와 기록 2편online, 벅스
  41. (최유준 전남대 HK교수,) 「탄생 100주년 가수 이난영의 삶과 사랑」, 『월간중앙』online, 중앙일보에스, 작성일: 2016년 0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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