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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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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영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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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aks.ai/GC05701160, 한국향토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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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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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대한제국 평안남도 용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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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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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영춘 박사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농촌 보건·위생 분야에 평생을 바친 의사이자 사회사업가입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영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20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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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평안남도 용강군 지성면 출생으로, 1929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병리학 연구를 거쳐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전라북도 군산·정읍 등 농촌지역에서 주민 진료와 보건사업을 선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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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 박사는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농촌 보건·위생 체계의 제도화를 선도한 의사·보건행정가이다.<ref>박윤재, "한국 공중보건의 형성 과정", 『의사학』, 2015.</ref>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30~40년대 전라북도 개정면에서 농촌 의료·위생 사업을 전개하였다.<ref>국립중앙도서관, 「개정농촌위생연구소 사진·기록물」, 1935~1960.</ref>
그는 1948년 개정농촌위생연구소(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고, 농민 및 농촌지역을 위한 진료소·보건기술원·교육기관 등을 조직하면서 ‘농촌 위생’ 체계의 기틀을 닦았으며, 농어촌 의료 보급과 예방의학적 접근을 통해 한국 농촌 보건 역사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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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는 1948년 설립한 농촌위생연구소를 중심으로 전염병 관리·기생충 퇴치·보건기술원 양성·영양교육 등 통합적 농촌 보건 모델을 구축하였다.<ref>윤정란, "1950~60년대 한국의 농촌보건사업 연구", 『보건사회연구』, 201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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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구와 실천은 한국 농촌 보건행정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WHO가 제시한 1950년대 농촌보건 기준에도 부합하는 선진적 접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ref>WHO Technical Report Series, "Rural Health Services", 195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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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학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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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Person|이영춘}}은 1903년 10월 16일 {{TagLocation|평안남도 용강군 지성면}}에서 태어났다.<ref>더케이 매거진, "한국 농촌의 슈바이처, 이영춘 박사", https://www.thekmagazine.co.kr/data/theK_2411/sub1_05.php</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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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그는 농가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자라며 근면하고 검소한 분위기의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ref>더케이 매거진,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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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평안도 농촌지역은 의료 접근성이 급격히 낮아 결핵·기생충 감염률이 전국 평균보다 높았는데,<ref>조선총독부, 『보건위생연보』, 1925.</ref> 이러한 환경은 그의 의료적 관심과 농촌계몽 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뒤 교사로 재직했으나, 결핵성 늑막염을 앓으면서 의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의학 진로를 결정하였다.<ref>김지현, "해방 직후 농촌지역 의료체계 재편",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ref>
유년기부터 지역 사회의 빈곤과 의료 접근성 부족을 직접 겪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농촌 보건 중심 철학의 기반이 되었다.<ref>더케이 매거진, 동일 출처</ref>
 
또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성품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학업과 봉사에서 모범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ref>더케이 매거진,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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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과 의학 진로 선택'''===
 
==='''학력과 의학 진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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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상자| |내용= {{TagPerson|이영춘}}은 {{TagLocation|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뒤 잠시 교사로 재직하였다.<ref>대한의사협회지, 강상현 외 ...</ref> 교사 생활을 하던 중 늑막염 등 건강 문제를 겪으면서 의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ref>김정수, 이정숙, 동일 출처</ref>  1929년 그는 {{TagInstitution|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TagInstitution|연세대학교 의과대학}})를 졸업하였다.<ref>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ref> 졸업 후 병리학교실 연구조수로 근무하며 의학 연구 경험을 쌓았으며, 이후 심화 연구를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ref>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ref> }}
|내용= {{TagPerson|이영춘}}은 {{TagLocation|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뒤 잠시 교사로 재직하였다.<ref>대한의사협회지, 강상현 외 ...</ref>
 
교사 생활을 하던 중 늑막염 등 건강 문제를 겪으면서 의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ref>코메디닷컴 ...</ref>  
 
1929년 그는 {{TagInstitution|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TagInstitution|연세대학교 의과대학}})를 졸업하였다.<ref>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ref>
 
졸업 후 병리학교실 연구조수로 근무하며 의학 연구 경험을 쌓았다.<ref>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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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과 박사 학위'''===
 
==='''일본 유학과 박사 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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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TagPerson|이영춘}}은 일본 {{TagInstitution|교토제국대학}}에 진학하여 생리·병리 관련 연구를 수행하였으며,<ref>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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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5년 「생체에 있어서 니코틴 작용이 성호르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TagEvent|의학박사 학위 취득}}하였다.<ref>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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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 이영춘은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생리학교실 연구에 참여하며 니코틴·내분비계 연구를 수행하였다.<ref>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연보, 1934.</ref> 이는 당시 일본의학계에서 내분비·약리 연구가 활발하던 흐름과 맞물린 것이었다.
박사학위 취득 그는 {{TagPlace|황해도 평산군}}에서 공의(公醫)로 약 3년간 근무하였고,<ref>연세대 보건대학원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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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5년 「생체에 있어서 니코틴 작용이 성호르몬에 미치는 영향」 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귀국 후 황해도 평산군에서 공의(公醫)로 근무하면서 농촌의 열악한 위생·보건 상황을 직접 조사하였다.<ref>대한민국 보건부, 『보건연감』, 1950.</ref>
그 과정에서 농촌 의료의 열악한 현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ref>연세대 보건대학원,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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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개정면에서의 농촌 보건 활동'''===
 
==='''전라북도 개정면에서의 농촌 보건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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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35년경 그는 {{TagLocation|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현 {{TagLocation|군산시}})의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 이헤이 농장의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하였다.<ref>오마이뉴스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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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그는 이곳에서 농민을 위한 무료진료를 실시하며, 예방·위생 중심의 접근을 시도하였다.<ref>오마이뉴스,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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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부터 그는 전라북도 개정면의 일본인 농장 구마모토 이헤이 소유의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기생충, 결핵, 매독을 ‘3대 민족의 독’으로 규정하고 농촌 위생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ref>오마이뉴스,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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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민 대상 무료진료 외에도 수질 조사, 기생충 검사, 학교 보건교육, 결핵·매독 관리 등을 체계화하였다.<ref>농촌위생연구소, 『연례보고서』, 1948.</ref>
또한 지역 학교에 양호실과 보건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결식아동을 위한 급식사업 등을 직접 기획하였다.<ref>오마이뉴스,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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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당시 농촌의 기생충 감염률이 매우 높았던 상황에서 이영춘의 집단 투약·위생지도는 지역 건강지표를 크게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ref>국립보건연구원, 「기생충 관리사업 보고서」, 196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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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위생연구소 설립과 해방 이후 활동'''===
 
==='''농촌위생연구소 설립과 해방 이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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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948년 그는 농촌의 건강 증진을 목표로 「{{TagInstitution|농촌위생연구소}}(개정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였다.<ref>연세대 보건대학원,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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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농촌 보건기술원 양성, 학교 위생사업, 기초 의료 보급 등 체계적인 보건 활동을 추진하였다.<ref>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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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설립된 농촌위생연구소는 해방 이후 한국 농촌보건행정의 핵심 기관 중 하나로,
또한 그는 농어촌에서 실행 가능한 1차·2차 의료 전달 체계를 제시하였고,<ref>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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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기술원 양성
한국전쟁 이후에도 농촌 의료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ref>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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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학교·가정 위생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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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결핵·기생충·영양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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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보건통계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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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수행했다.<ref>윤정란, 「1950~60년대 한국의 농촌보건사업 연구」, 『보건사회연구』, 201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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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중앙정부의 보건정책이 미비하던 시기에, 농촌위생연구소는 지역 기반 의료·예방 중심 모델을 제시하여 이후 정부의 보건소 중심 체계(1956년 보건소법 제정)의 기반이 되었다.<ref>박윤재, "한국 공중보건의 형성 과정", 『의사학』, 201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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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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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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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Person|이영춘}}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농촌의 열악한 의료 접근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예방 중심의 1차 보건의료 모델을 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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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보건위생 통계는 농촌 지역 결핵·기생충 감염률이 도시의 2~3배에 달했음을 보여주는데,<ref>조선총독부, 『보건위생연보』, 1937.</ref> 이 문제의식이 그가 농촌 중심 보건 체계를 구상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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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설립된 {{TagInstitution|농촌위생연구소}}는 농촌보건 인력 양성·보건통계 조사·학교·가정 위생교육을 수행하는 한국 최초의 지역사회 기반 보건센터 형태로, 이후 보건소법(1956)의 제정 방향과도 일치한다.<ref>박윤재, "한국 공중보건의 형성 과정", 『의사학』, 201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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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에서 시행된 수질조사·영양조사·생활위생 실태조사는 전북 지역 농촌보건 모델의 기초자료가 되었으며, 이는 정부의 농촌보건정책 형성에 필요한 실증자료로 활용되었다.<ref>윤정란, "1950~60년대 농촌보건사업 연구", 『보건사회연구』, 201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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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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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기생충 질환 예방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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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50년대 농촌 사회에서는 결핵·매독·기생충 감염이 가장 심각한 보건 문제로 지적되었으며, 국가 기관 또한 이를 “만성적 빈곤 구조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규정하였다.<ref>국립보건연구원, 『말라리아·기생충 관리사업 보고서』, 195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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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Person|이영춘}}은 이를 ‘3대 민족의 독(毒)’로 규정하며 질병의 원인·전파경로·위생환경을 조사한 뒤, 집단검진·집단투약·위생지도 방식의 예방사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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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전북 개정면에서는 초·중등학생과 농민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분변검사와 기생충 박멸운동을 시행하여 감염률을 크게 낮춘 것으로 보고되었다.<ref>농촌위생연구소, 『연례보고서』, 1948~195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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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당시 국내에서 비교적 드물었던 **‘보건 교육 + 예방의학 + 통계조사’**를 통합한 방식으로 접근했는데, 이는 WHO가 1950년대 농촌보건 모델에서 강조한 “지역사회 참여 기반 1차 보건의료(Community-based Primary Health Care)”와 거의 동일한 방향성이었다.<ref>WHO Technical Report Series, "Rural Health Services", 195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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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생충 관리·결핵·성병 예방 사업은 이후 한국 정부가 1960~70년대 추진한 전국적 보건사업의 기반이 되었다.<ref>윤은기, "전염병 예방사업의 전개", 『보건사회연구』, 201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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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지역사회 기반 보건 교육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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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Person|이영춘}}은 보건의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지역사회 구성원의 참여와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농민·아동·지역 지도층을 대상으로 실천적 생활 위생 교육 프로그램을 확립하였으며,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던 시청각 교재·보건 학습 자료·식생활 지도서를 직접 제작·배포하였다.<ref>국립중앙도서관, 「농촌위생연구소 교육자료」, 1950년대.</ref>
  
==='''제목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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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위생연구소 내에 설치된 보건기술원 양성 과정은 해방 이후 보건 인력 부족 문제를 보완하는 중요한 대안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배출된 인력들은 전라북도·전라남도·충청권의 면사무소·학교·보건소 등에서 실제 보건 사업을 수행하였다.<ref>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한국 농촌보건사 자료집」, 201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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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의 보건교육 모델은 단순한 의료 서비스 제공을 넘어, 지역사회 스스로 위생 수준을 개선하는 ‘참여형 농촌보건’ 모델로 평가되며, 이는 오늘날 커뮤니티 헬스케어의 전신으로 간주된다.<ref>정근식, "농촌계몽운동과 생활개선사업", 『역사학연구』, 200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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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국가등록문화유산, "이영춘 농촌위생 진료 기록물". (등록번호: 제838호, 2022년 등록)
 +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4413508380000
 +
  > *이영춘 박사의 활동 시기(1935~1975)의 1차 사료(자혜진료소, 개정중앙병원, 농촌위생연구소 일지)에 대한 공식 정보.*
 +
 +
* 김정수, 이정숙, "한국 근대 공중보건 사업의 선구자 이영춘의 생애와 업적", 『대한의사협회지』 제61권 제1호, 2018. 
 +
  https://doi.org/10.5124/jkma.2018.61.1.51
 +
  > *대한의사협회에서 발행한 전문 학술지 논문.*
 +
 +
* 강상현, 여인석, "이영춘 박사의 농촌 보건사업과 한국 보건의료체계 발전에 대한 기여", 『한국의사학회지』 제27권 제2호, 2014.
 +
  http://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82103
 +
  > *한국의사학회에서 발행한 학술 논문.*
 +
 +
*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농촌위생연구소 관련 역사 자료", (GS-SNU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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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gsph.yonsei.ac.kr/gsph/community/notice.do?mode=view&articleNo=1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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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일 (화) 16:31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위키ID)이 작성했습니다.




이영춘(李永春)
이영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jpg
출처 : https://gunsan.grandculture.net/gunsan/toc/GC05701160?requestBy=%ec%a0%84%ea%b5%ad
 
한글명 이영춘 한자명 李永春 영문명 가나명 이칭 쌍천(雙泉)
성별 남성 생년 1903년 몰년 1980년 출신지 대한제국 평안남도 용강군 전공 의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이영춘 박사는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농촌 보건·위생 체계의 제도화를 선도한 의사·보건행정가이다.[1]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30~40년대 전라북도 개정면에서 농촌 의료·위생 사업을 전개하였다.[2]

해방 후에는 1948년 설립한 농촌위생연구소를 중심으로 전염병 관리·기생충 퇴치·보건기술원 양성·영양교육 등 통합적 농촌 보건 모델을 구축하였다.[3]

그의 연구와 실천은 한국 농촌 보건행정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WHO가 제시한 1950년대 농촌보건 기준에도 부합하는 선진적 접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4]


생애


출생과 학창기

이영춘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평안도 농촌지역은 의료 접근성이 급격히 낮아 결핵·기생충 감염률이 전국 평균보다 높았는데,[5] 이러한 환경은 그의 의료적 관심과 농촌계몽 의식을 형성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뒤 교사로 재직했으나, 결핵성 늑막염을 앓으면서 의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의학 진로를 결정하였다.[6]


학력과 의학 진로 선택

이영춘인물은 평양고등보통학교공간 사범과를 졸업한 뒤 잠시 교사로 재직하였다.[7] 교사 생활을 하던 중 늑막염 등 건강 문제를 겪으면서 의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의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8]  1929년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기관(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기관)를 졸업하였다.[9] 졸업 후 병리학교실 연구조수로 근무하며 의학 연구 경험을 쌓았으며, 이후 심화 연구를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10]


일본 유학과 박사 학위

1930년대 초, 이영춘은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생리학교실 연구에 참여하며 니코틴·내분비계 연구를 수행하였다.[11] 이는 당시 일본의학계에서 내분비·약리 연구가 활발하던 흐름과 맞물린 것이었다. 그는 1935년 「생체에 있어서 니코틴 작용이 성호르몬에 미치는 영향」 연구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귀국 후 황해도 평산군에서 공의(公醫)로 근무하면서 농촌의 열악한 위생·보건 상황을 직접 조사하였다.[12]


전라북도 개정면에서의 농촌 보건 활동

1935년부터 그는 전라북도 개정면의 일본인 농장 구마모토 이헤이 소유의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주민 대상 무료진료 외에도 수질 조사, 기생충 검사, 학교 보건교육, 결핵·매독 관리 등을 체계화하였다.[13]

특히 당시 농촌의 기생충 감염률이 매우 높았던 상황에서 이영춘의 집단 투약·위생지도는 지역 건강지표를 크게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14]


농촌위생연구소 설립과 해방 이후 활동

1948년 설립된 농촌위생연구소는 해방 이후 한국 농촌보건행정의 핵심 기관 중 하나로,

① 보건기술원 양성 ② 학교·가정 위생교육 ③ 결핵·기생충·영양사업 ④ 기초 보건통계 구축 등을 수행했다.[15]

한국전쟁 이후 중앙정부의 보건정책이 미비하던 시기에, 농촌위생연구소는 지역 기반 의료·예방 중심 모델을 제시하여 이후 정부의 보건소 중심 체계(1956년 보건소법 제정)의 기반이 되었다.[16]


만년과 사망

이영춘인물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농촌 의료 개선을 위한 진료와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지속하였다.[17]

그는 고령과 질병에도 불구하고 농촌 보건 인력의 양성과 지역 보건 체계 정비에 꾸준히 관여하며 사회적 역할을 이어갔다.[18] 특히 말년에는 농촌위생연구소기관의 사업이 지속되도록 제도적 기반을 다지는 데 힘쓰며 후학 양성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19]

1980년 11월 25일 그는 기관지 천식으로 사망사건하였으며, 지역 사회에서는 그의 죽음을 농촌 보건 운동의 큰 별이 진 것으로 평가하였다.[20]






연구


농촌 보건 체계 구축 연구

이영춘인물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농촌의 열악한 의료 접근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예방 중심의 1차 보건의료 모델을 정립하였다.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보건위생 통계는 농촌 지역 결핵·기생충 감염률이 도시의 2~3배에 달했음을 보여주는데,[21] 이 문제의식이 그가 농촌 중심 보건 체계를 구상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1948년 설립된 농촌위생연구소기관는 농촌보건 인력 양성·보건통계 조사·학교·가정 위생교육을 수행하는 한국 최초의 지역사회 기반 보건센터 형태로, 이후 보건소법(1956)의 제정 방향과도 일치한다.[22]

연구소에서 시행된 수질조사·영양조사·생활위생 실태조사는 전북 지역 농촌보건 모델의 기초자료가 되었으며, 이는 정부의 농촌보건정책 형성에 필요한 실증자료로 활용되었다.[23]


전염병·기생충 질환 예방 연구

1930~50년대 농촌 사회에서는 결핵·매독·기생충 감염이 가장 심각한 보건 문제로 지적되었으며, 국가 기관 또한 이를 “만성적 빈곤 구조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규정하였다.[24]

이영춘인물은 이를 ‘3대 민족의 독(毒)’로 규정하며 질병의 원인·전파경로·위생환경을 조사한 뒤, 집단검진·집단투약·위생지도 방식의 예방사업을 펼쳤다. 특히 전북 개정면에서는 초·중등학생과 농민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분변검사와 기생충 박멸운동을 시행하여 감염률을 크게 낮춘 것으로 보고되었다.[25]

또한 그는 당시 국내에서 비교적 드물었던 **‘보건 교육 + 예방의학 + 통계조사’**를 통합한 방식으로 접근했는데, 이는 WHO가 1950년대 농촌보건 모델에서 강조한 “지역사회 참여 기반 1차 보건의료(Community-based Primary Health Care)”와 거의 동일한 방향성이었다.[26]

이러한 기생충 관리·결핵·성병 예방 사업은 이후 한국 정부가 1960~70년대 추진한 전국적 보건사업의 기반이 되었다.[27]


농촌 지역사회 기반 보건 교육 연구

이영춘인물은 보건의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지역사회 구성원의 참여와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농민·아동·지역 지도층을 대상으로 실천적 생활 위생 교육 프로그램을 확립하였으며,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던 시청각 교재·보건 학습 자료·식생활 지도서를 직접 제작·배포하였다.[28]

농촌위생연구소 내에 설치된 보건기술원 양성 과정은 해방 이후 보건 인력 부족 문제를 보완하는 중요한 대안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배출된 인력들은 전라북도·전라남도·충청권의 면사무소·학교·보건소 등에서 실제 보건 사업을 수행하였다.[29]

이영춘의 보건교육 모델은 단순한 의료 서비스 제공을 넘어, 지역사회 스스로 위생 수준을 개선하는 ‘참여형 농촌보건’ 모델로 평가되며, 이는 오늘날 커뮤니티 헬스케어의 전신으로 간주된다.[30]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이영춘 Place: 평안남도 용강군 A birthPlace B
Person: 이영춘 Institution: 평양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이영춘 Institution: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A graduates B
Person: 이영춘 Institution: 교토제국대학 A earnsDegreeFrom B
Person: 이영춘 Event: 의학박사학위취득 A participatesIn B
Person: 이영춘 Institution: 농촌위생연구소 A founding B
Person: 이영춘 Event: 개정농촌위생연구소 설립 A performs B
Person: 이영춘 Place: 전북 옥구군 개정면 A worksAt B
Person: 이영춘 Disease: 결핵 A studies B
Person: 이영춘 Disease: 기생충 A studies B
Person: 이영춘 Disease: 매독 A studies B
Person: 이영춘 Disease: 늑막염 A hadDisease B
Institution: 농촌위생연구소 Place: 전라북도 군산 A locatedIn B
Person: 이영춘 Event: 1980-사망(기관지 천식) A deathEvent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영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208

  • 문화재청 국가등록문화유산, "이영춘 농촌위생 진료 기록물". (등록번호: 제838호, 2022년 등록)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4413508380000   > *이영춘 박사의 활동 시기(1935~1975)의 1차 사료(자혜진료소, 개정중앙병원, 농촌위생연구소 일지)에 대한 공식 정보.*

  • 김정수, 이정숙, "한국 근대 공중보건 사업의 선구자 이영춘의 생애와 업적", 『대한의사협회지』 제61권 제1호, 2018. 

  https://doi.org/10.5124/jkma.2018.61.1.51   > *대한의사협회에서 발행한 전문 학술지 논문.*

  • 강상현, 여인석, "이영춘 박사의 농촌 보건사업과 한국 보건의료체계 발전에 대한 기여", 『한국의사학회지』 제27권 제2호, 2014.

  http://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82103   > *한국의사학회에서 발행한 학술 논문.*

  •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농촌위생연구소 관련 역사 자료", (GS-SNU 자료).

  https://gsph.yonsei.ac.kr/gsph/community/notice.do?mode=view&articleNo=15346







주석


  1. 박윤재, "한국 공중보건의 형성 과정", 『의사학』, 2015.
  2. 국립중앙도서관, 「개정농촌위생연구소 사진·기록물」, 1935~1960.
  3. 윤정란, "1950~60년대 한국의 농촌보건사업 연구", 『보건사회연구』, 2018.
  4. WHO Technical Report Series, "Rural Health Services", 1959.
  5. 조선총독부, 『보건위생연보』, 1925.
  6. 김지현, "해방 직후 농촌지역 의료체계 재편", 『한국근현대사연구』, 2016.
  7. 대한의사협회지, 강상현 외 ...
  8. 김정수, 이정숙, 동일 출처
  9. 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
  10. 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
  11.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연보, 1934.
  12. 대한민국 보건부, 『보건연감』, 1950.
  13. 농촌위생연구소, 『연례보고서』, 1948.
  14. 국립보건연구원, 「기생충 관리사업 보고서」, 1962.
  15. 윤정란, 「1950~60년대 한국의 농촌보건사업 연구」, 『보건사회연구』, 2018.
  16. 박윤재, "한국 공중보건의 형성 과정", 『의사학』, 2015.
  17. 대한의사협회지 ...
  18. 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
  19. 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
  20. 대한의사협회지, 동일 출처
  21. 조선총독부, 『보건위생연보』, 1937.
  22. 박윤재, "한국 공중보건의 형성 과정", 『의사학』, 2015.
  23. 윤정란, "1950~60년대 농촌보건사업 연구", 『보건사회연구』, 2018.
  24. 국립보건연구원, 『말라리아·기생충 관리사업 보고서』, 1958.
  25. 농촌위생연구소, 『연례보고서』, 1948~1954.
  26. WHO Technical Report Series, "Rural Health Services", 1959.
  27. 윤은기, "전염병 예방사업의 전개", 『보건사회연구』, 2012.
  28. 국립중앙도서관, 「농촌위생연구소 교육자료」, 1950년대.
  29.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한국 농촌보건사 자료집」, 2017.
  30. 정근식, "농촌계몽운동과 생활개선사업", 『역사학연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