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도사건 (高下島 事件, 1897-1897)은 1897년 목포가 개항된 직후에 고하도를 둘러싼 열강들, 즉 러시아와 일본 간의 이권 다툼과 무안감리 진상언의 대응으로 전개되었다. 러시아가 고하도의 토지를 매입하려 하자, 일본이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이윤용의 이름을 빌려 토지를 선점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가 고하도의 토지를 매입하려고 한 것은 동아시아 진출을 위해 부동항 획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함선(艦船)의 정박지(碇泊地)로서 고하도(孤下島)를 적격지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발단은 러시아영사관의 부영사인 스트렐비츠키가 영사관 건립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1897년 12월 18일에 목포항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영사관 부지확정 후 목포의 각국 조계 앞바다에 있는 당시 智島郡 소속의 고하도 역시 측량하고 토지의 구매 또한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무안감리 진상언은 해당 토지가 비록 조계 내 10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바다로 막혀 있어서 육지로 연결된 경우와는 다르며, 조약에 그 매매 가능 여부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였다. 이 사건 이전에 일본인에 의한 삼학도 암매사건도 발생하여 당시 무안감리와 주민들은 열강의 토지 침탈의 움직임에 대해 매우 경계하는 입장이었다. 이후 러시아는 외교당국을 통해 한국의 중앙정부에 계속적으로 요청하였고, 일본 역시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민간을 통해 고하도를 매입하여 근거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진상언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여 시간이 흘러갔고 결국 두 나라 모두 영구 임차 계약이 미루어지는 가운데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고하도 전체에 대한 권리를 차지하였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