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10월 사태(1946年10月 事態)는 목포시 남교동 파출소 방화 사건에서 비롯된다. 이 사태는 이미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에 따라 9월의 총파업과 10월의 전국적인 폭동과 동일한 맥락이었다. 목포 시내 중등학교 학생 수백명이 목포역전에서 가두행진을 했고, 노동자 수백명도 해안통 항무청 근처에서 시위했다. 오전에는 목포민주청년동맹원 7백여명이 파출소 세곳을 습격했고, 8명이 검거되었다. 시위 진압을 위해 미군과 경찰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시위는 해산되었다. 미군정이 목포시내의 경계를 강화했으며 야간 통행금지와 무장 순찰을 지속되는 가운데, 11월 1일에 목포와 인접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송재경('목포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이 광주에서 체포되었고, 반면에 우익정당과 단체들('한민당', '독립촉성국민회'(이남규))이 세력을 강화했다.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 정치 단체들의 영향력이 지역사회에서 강화된 계기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