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해방(8.15解放)은 단순히 일본인들의 철수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방 공간은 새로운 권력과 새로운 사회 운영 방식을 요구하며 진공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정치적인 관심과 발언과 행동이 급증했다. 따라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방후 국가와 사회 통합의 커다란 과제는 마침내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일제가 항복한 이후에, 곧바로 미군이나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입하지 않았는데, 그 사이 ‘건국준비위원회’가 정체(政體)로서 미약한 역할을 했다. 해방 무렵, 목포의 전체 인구는 8만5천명 가량이었고, 그 가운데 일본인들이 1만명 정도였다. 비교적 일본인들이 숫적으로도 많고 영향력도 커서 목포의 8.15해방은 역동적인 시대구분점이 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