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4.19학생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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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inition

목포방송국 개국(木浦放送局 開局, 1942~) 4·19혁명 학생 시위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저항해 4월 26일 목포시민들이 일으킨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3월 3일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목포역 연설 방해, 3월 11일 유옥우, 정중섭 두 두의원 연설 방해 등 자유당의 선거 방해가 계속되었다. 3월 15일 선거 당일 목포에서는 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공개투표 등 부정 투표와 민주당 참관인 입장 불허 등 개표 부정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대구 2·28민주운동을 시작으로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대한 시민과 학생의 규탄이 계속되었으며, 3·15 부정선거 이후 4·11 마산항쟁을 시작으로 시위는 4월 19일 서울까지 확산하였다. 신안군 가거도 출신으로 4·19 시위에 참여했던 김부련(당시 19살)이 총탄에 맞아 사망하게 되었고, 4월 26일 낮 시신이 목포역에 도착했다. 낮 12시 그를 추모하기 위해 1천여 명의 학생이 목포역에 집결했으며, 김부련의 유해를 안고 “이승만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했다. 총 3만여 명의 목포시민들이 시위대에 호응했으며, 이날의 시위는 사고 한 건 없이 진행되었다. 김부련은 1962년 4월 김부연은 건국보장을 수여받았으며, 2013년 6월 신안군 가거도출장소 앞에 김부련열사 흉상이 건립되었다. .[1]

  1. 동아일보,1960.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