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inition
목포의 눈물 탄생(木浦의 눈물 誕生, 1935)은 일제하 '민족의 노래'였고 지금은 국민 가요라 할 수 있는 "목포의 눈물"이 1935년 이난영의 노래로 세상에 나온 사건이다. 1934년 조선일보는 일제의 탄압 아래 질식되고 있었던 민족정서를 북돋우기 위해 OK레코드사와 함께 향토노래 가사를 공모했고, 목포출신 문일석이 쓴 '목포의 노래'가 1등을 차지했다. 이를 손목인씨가 작곡했고, '목포의 눈물'로 제목을 바꾸어 1935년 당시 18살이었던 목포출신 가수 이난영이 불러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는 2절 가사부분을 문제 삼아 작사가와 작곡가가를 소환하였다. 일제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귀절이 1592년 임진왜란 때부터 1910년 한일합방 등으로 이어지는 3백년 한을 나타내는 반일 민족적 의미가 아닌가 추궁했고 작사가와 작곡자는 순수한 동기로 만든 노래며 가사에 다른 숨은 의도가 없다고 해명했다. 결국 '삼백년 원한 품은’은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이라고 임기응변으로 넘어갔다는 일화가 있다. "목포의 눈물"은 4분의 2박자 트로트 형식으로 이후 국내 전통 트로트의 모델이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당시 나라를 잃은 한민족의 한을 승화시키고 독립을 염원하는 의지를 심어 주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호남인들의 애창곡을 넘어 국민가요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목포의 눈물은 1958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흥행을 거두었으며, 1969년 대중가요로서는 국내 최초로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건립되었다.목포시에서 악기점을 하던 박오주(朴午周)씨가 600만원을 기증하여 세워진 노래비이다. 목포의 눈물과 관련하여 이난영 가요제가 1968년 개최되었고,2003년 목포시 양동에 있는 이난영 생가에 소공원이 조성되었으며, 2006년 경기도 파주에 있던 이난영 묘지를 삼학도 난영공원으로 이전하였다.[1], [2]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Additional Attributes
propertyName |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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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
목포의눈물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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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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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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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목포를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민족의 노래 목포의 눈물이 취입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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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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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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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인물 |
이난영, 손목인,문일석,박오주,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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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단체 |
OK레코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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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장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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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유물유적 |
목포의 눈물 노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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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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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xtual Relations
Spatial Data
Spactial Information Nodes
gid |
region |
label |
hanja |
latitude |
longitude |
altitue |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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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눈물 노래비 |
전라남도 목포시 |
목포의 눈물 노래비 |
木浦의 눈물 노래 碑 |
34.789379 |
126.378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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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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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tial Relations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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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t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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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Data
Temporal Information Nodes
tid |
timeSpan |
label |
hanja |
koreanEra |
japaneseEra |
indexDate |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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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눈물 |
1935 |
목포의 눈물 탄생(木浦의 눈물 誕生, 1935) |
木浦의 눈물 誕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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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 10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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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Relations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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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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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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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 Reference
- type: 해설, 참고, 3D_모델, VR_영상, 도해, 사진, 동영상, 소리, 텍스트
Bibliography
author |
title |
publication |
edition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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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 ↑ 목포시사 2권, 2017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포의 눈물, 한국학중앙연구원
Semantic Network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