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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__NOTOC__ ==Definition== 목포 조계지 공매(木浦租界 , 1898)은 목포 각국거류지의 총면적은 726,024㎡(약 22만 평)로 같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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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조계지 공매|목포 조계지 공매(木浦租界 , 1898)]]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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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조계지공매|목포조계지공매(木浦租界地公賣, 1898-1899)]]은 개항후 조계지를 각국에 공개 매각한 사건이다. 목포 조계지의 총면적은 726,024㎡(약 22만 평)로 같은 시기에 개항된 진남포의 480,060㎡(약 14만 5천 평)보다 넓은 면적이었다. 조계지의 범위는 개항 당시에 동쪽으로 송도, 남쪽으로 목포진, 서쪽으로 온금동, 북쪽으로 지금의 측후동을 잇는 998,082㎡의 지역에 해당한다. 한국 정부는 이 중 325,713㎡를 각국 영사관·해관·공원·도로부지 등으로 제한하였고, 672,369㎡의 택지를 갑·을·병의 세 지구로 나누어 차례로 공매에 붙였다.각국 영사관 부지의 경우는 각국조계장정 제10조에 따라  공매가 아니라 원가만 납부하고 적당한 지구를 소유(所有)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넓은 부지를 확보하기 위한 각국 간의 과열경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무안감리서의 중재에 따라 영사관 부지의 범위와 위치는 일본 31,351㎡(약 9,400평), 러시아 19,311㎡(약 5,852평), 영국 12,475㎡(약 3,780평)로 결정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영사관 부지를 1897년 11월 무안감리와 교섭하여 52,986㎡(약 16,300평)를 요구하였는데, 한국 정부에서 너무 넓다고 지적하여 면적을 31,0351㎡로 축소시켰다.나머지 택지의 공매는 1898년~1899년 사이 9회에 걸쳐 이루어진 것을 시작으로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택지 공매의 시작과 함께 목포 각국거류지 내 지구분할이 이루어지는데, 지구의 경우 정방향(正方向)에 가깝게 각 시가(block)마다 사방형필지(四方形筆地)로 이루어졌다. 당초 일본은 목포항에 설정된 외국인 거류지를 일본인 만을 위한 ‘전관거류지’로 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청하였으나 한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각국거류지’로 결정되었다. 공매결과 일본인 거류지가 가장 컸으나 영국,러시아, 중국인들도 일부지역을 매입하였다.조계지 공매는 개항장으로서 목포에 본격적인 외국인들의 진출과 활동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f> 목포시사 1권, 2017</ref>, <ref> 한철호, 2008, 대한제국기 목포항의 무역구조와 유통권의 변동 , 호남문화연구 42 </ref>, <ref> 박찬승, 「목포개항의 경위」, 『목포개항백년사』, 목포백년회, 1997 </ref>
목포 각국거류지의 총면적은 726,024㎡(약 22만 평)로 같은 시기에 개항된 진남포의 480,060
 
(약 14만 5천 평)보다 넓은 면적이었다.01) 표면상 나타나는 거류지의 범위는 개항 당시에 동쪽으
 
송도, 남쪽으로 목포진, 서쪽으로 온금동, 북쪽으로 지금의 측후동을 잇는 998,082㎡의 지역에  
 
해당한다. 한국 정부는 이 중 325,713㎡를 각국 영사관·해관·공원·도로부지 등으로 제한하였고,  
 
672,369㎡의 택지를 갑·을·병의 세 지구로 나누어 차례로 공매에 붙였다.02)
 
그러나 각국 영사관 부지의 경우는 장정 제10조에 “조약국 정부는 원가만을 납부하고 그 영사관
 
부지로서 적당한 지구를 수득(收得) 또는 소유(所有) 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때문에 공매를
 
통하지 않고 넓은 부지를 확보하기 위한 각국 간의 과열경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한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사안이었으므로 무안감리서의 중재에 따라 영사관 부지의 범위와 위치가
 
결정되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각국 영사관 부지는 일본 31,351㎡(약 9,400평), 러시아 19,311㎡
 
(약 5,852평), 영국 12,475㎡(약 3,780평)이었다. 일본의 경우는 영사관 부지를 1897년 11월 무안
 
감리와 교섭하여 52,986㎡(약 16,300평)를 요구하였는데, 한국 정부에서 너무 넓다고 지적하여
 
적을 31,0351㎡로 축소시켰다.03) 한국 정부는 각국 영사관의 기지를 장정에 준하여, 광점되지 않고
 
균등하게 주어질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04)
 
나머지 택지의 공매는 1898년~1899년 사이 9회에 걸쳐 이루어진 것을 시작으로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05) 택지 공매의 시작과 함께 목포 각국거류지 내 지구분할이 이루어지는데, 지구의 경우  
 
60~80×60~80m의 정방향(正方向)에 가깝게 각 시가(block)마다 사방필지(四方形筆地)로 이루어졌
 
는데, 그 배경은 「진남포급목포각국조계장정(鎭南浦及木浦各國租界章程)」에서 경매 및 분할 금지 규
 
모로서 필지 당 500~1000㎡ 이상일 것을 규정하였기 때문이다.목포 각국거류지 부분에 지구의 분할이 표시되어있는 반면 유달산 아래 쌍교리를 중심으로 한 한
 
국인 마을 쪽에는 그런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목포 각국거류지는 그 시가지 형태에 있어서 인
 
천의 영향을 받았으며, 항구 개발 위주의 시가지, 식민도시로서의 근대적 기술을 적용한 시가지이었
 
음에 반해, 한국인 지구는 자연 지형을 따라 자연형성 되었기 때문에 형태가 불규칙하며 사회 기반
 
시설도 거의 전무하였다.08) 이는 이후 목포가 한국인 마을과 일본인 마을로 구분되는 불평등한 이중
 
적인 구조 속에서 변화 발전되어 가는 첫 번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897년 10월 1일 국내에서 네번째로 진남포(鎭南浦, 당시는 증남포)와 함께 통상항으로 문을 연 사건이다. 목포 개항의 배경을 살펴보면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한국 정부를 압박하여 맺은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의 체결과 관련된다. 동 조관에는 전라도 연안에 하나의 통상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규정이 가장 핵심적인 조항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의 조약을 서둘렀던 것은 일본입장에 볼 때  당시 먼저 개항했던 인천,원산,부산에서 예상과는 달리 청국이 차지하는 무역 비중이 점점 증가하고 일본은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새로운 개항 후보로는 단연 목포가 우선적으로 부각되었다. 목포항의 개항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인 접근은 1894년 이노우에(井上 馨) 공사가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를  근거로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에게  전라도 연안에 개설할 통상항으로서 적격지를 조사하라고 명령하였고, 1895년 전라도 연안 시찰 조사결과를 통해 목포를 가장 유력한 개항장으로 판단하여 1895년 6월 이노우에 공사가 고종에게 목포와 진남포를 추천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목포항이 새로운 개항장으로 중시되었던 것은 항구로서 지리적 장점 때문이었다. 지리적인 이점은 첫째, 영산강의 하구에 위치하여 내륙 소비시장으로 진출에 유리하며 둘째, 나주, 광주, 능주 등 큰 시장을 배후에 두고 있어 화물의 집합장으로서 편리하고 셋째, 미곡의 주산지인 전라도의 쌀을 운송하기에 유리한 위치였기 때문이었다.넷째 서남해안 어업 전진기지로서의 가능성이 컸다. 한편 정치군사적으로도 목포가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잇는 삼각항로의 중심에 위치하여 전략적 가치가 컸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목포 개항에 있어서 일본이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일 간의 조약에 의해 개항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항장에 일본인만을 위한 전관거류지를 설치할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안은 목포가 개항되기 전까지 주요 현안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1897년 10월 1일 목포 개항은 이전의 다른 개항장처럼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에 의한 것이 아닌 고종의 칙령에 의해 문을 연 자개항(自開港)의 성격이 크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목포항을 개항하게 될 때의 한국정부는 개항이나 관세의 개념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이전 시기와는 매우 달라져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공사관에 개항일 관련 공식적인 문서를 보내지 않은 상태에서 1897년 7월 3일 토요일 밤에 「목포와 증남포 항구 개항에 대한 청의서」를 제출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아 처리하였다. 당시 한국 정부가 목포의 개항이 자국에게도 유리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관세에 대한 목적 때문이었다. 목포가 개항된 1897년은 대한제국 광무 원년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새로운 개혁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러한 자금 확충에 가장 유용한 것이 개항장에서 걷어 들이는 관세 수입으로서 관세를 차관 도입의 담보로 삼고, 재정수입을 늘려 상업의 진흥을 도모하는 것이 목포 개항의 목적이었다.목포항에 설정된 외국인 거류지는 일본의 줄기찬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을 위한 ‘전관거류지’가 아닌 한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각국거류지’였다는 점도 이러한 자주 개항의 성격을 보여준다. <ref> 목포시사 1권, 2017</ref>, <ref> 한철호, 2008, 대한제국기 목포항의 무역구조와 유통권의 변동 , 호남문화연구 42 </ref>, <ref> 박찬승, 「목포개항의 경위」, 『목포개항백년사』, 목포백년회, 1997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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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일 (금) 14:09 판


Definition

목포조계지공매(木浦租界地公賣, 1898-1899)은 개항후 조계지를 각국에 공개 매각한 사건이다. 목포 조계지의 총면적은 726,024㎡(약 22만 평)로 같은 시기에 개항된 진남포의 480,060㎡(약 14만 5천 평)보다 넓은 면적이었다. 조계지의 범위는 개항 당시에 동쪽으로 송도, 남쪽으로 목포진, 서쪽으로 온금동, 북쪽으로 지금의 측후동을 잇는 998,082㎡의 지역에 해당한다. 한국 정부는 이 중 325,713㎡를 각국 영사관·해관·공원·도로부지 등으로 제한하였고, 672,369㎡의 택지를 갑·을·병의 세 지구로 나누어 차례로 공매에 붙였다.각국 영사관 부지의 경우는 각국조계장정 제10조에 따라 공매가 아니라 원가만 납부하고 적당한 지구를 소유(所有)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넓은 부지를 확보하기 위한 각국 간의 과열경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무안감리서의 중재에 따라 영사관 부지의 범위와 위치는 일본 31,351㎡(약 9,400평), 러시아 19,311㎡(약 5,852평), 영국 12,475㎡(약 3,780평)로 결정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영사관 부지를 1897년 11월 무안감리와 교섭하여 52,986㎡(약 16,300평)를 요구하였는데, 한국 정부에서 너무 넓다고 지적하여 면적을 31,0351㎡로 축소시켰다.나머지 택지의 공매는 1898년~1899년 사이 9회에 걸쳐 이루어진 것을 시작으로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택지 공매의 시작과 함께 목포 각국거류지 내 지구분할이 이루어지는데, 지구의 경우 정방향(正方向)에 가깝게 각 시가(block)마다 사방형필지(四方形筆地)로 이루어졌다. 당초 일본은 목포항에 설정된 외국인 거류지를 일본인 만을 위한 ‘전관거류지’로 해줄 것을 줄기차게 요청하였으나 한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할 수 있는 ‘각국거류지’로 결정되었다. 공매결과 일본인 거류지가 가장 컸으나 영국,러시아, 중국인들도 일부지역을 매입하였다.조계지 공매는 개항장으로서 목포에 본격적인 외국인들의 진출과 활동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1], [2], [3]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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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조계지공매 Event 사건 목포조계지공매(木浦租界地公賣, 1898-1899) 목포조계지공매 木浦租界地公賣 http://dh.aks.ac.kr/~mokpo/wiki/index.php/목포조계지공매

Additional Attribu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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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목포조계지공매
이칭
유형 사건
설명 개항장인 목포에 본격적으로 외국인의 진출과 활동이 시작된 계기
시대 대한제국 시대
날짜 1898-1899년
관련인물 고종, 진상언
관련단체
관련장소 전라남도 목포시
관련유물유적 목포해관 터목포감리서 터
관련사건 목포감리서 설치, 목포항 개항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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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목포조계지공매 isRelatedTo 결정
진상언 목포조계지공매 isRelatedTo 중재,조정

Spatial Data

Spactial Information Nod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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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해관 전라남도 목포시 구 목포세관 舊 木浦稅關 34.789734 126.389533 해관터

Spati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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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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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조계지공매 1898-1899 목포조계지공매(木浦租界地公賣, 1898-1899) 木浦租界地公賣 光武 二~三 年

Tempor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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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l
temporal


Online Reference

type resource title desctription/caption URL
참고 목포시사 1권 항도목포 https://www.mokpo.go.kr/www/introduce/current?category_1=1
  • type: 해설, 참고, 3D_모델, VR_영상, 도해, 사진, 동영상, 소리, 텍스트

Bibliography

author title publication edition URL

Notes

  1. 목포시사 1권, 2017
  2. 한철호, 2008, 대한제국기 목포항의 무역구조와 유통권의 변동 , 호남문화연구 42
  3. 박찬승, 「목포개항의 경위」, 『목포개항백년사』, 목포백년회, 1997

Semantic Network Gra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