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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4·19 학생 시위|목포 4·19 학생 시위]] 4·19혁명 학생 시위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저항해 4월 26일 목포시민들이 일으킨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3월 3일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목포역 연설 방해, 3월 11일 유옥우, 정중섭 두 두의원 연설 방해 등 자유당의 선거 방해가 계속되었다. <ref> 조선일보, 1960.03.04. ; 동아일보,1960.03.12. </ref> 3월 15일 선거 당일 목포에서는 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공개투표 등 부정 투표와 민주당 참관인 입장 불허 등 개표 부정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대구 2·28민주운동을 시작으로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대한 시민과 학생의 규탄이 계속되었으며, 3·15 부정선거 이후 4·11 마산항쟁을 시작으로 시위는 4월 19일 서울까지 확산하였다. 이날 서울에서 있었던 4·19 시위로 목포 출신의 김부련, 채광석이 사망하고, 고종채가 부상을 당했다. 4월 26일 김부련의 시신이 목포역에 도착했다. 12시 그를 추모하기 위해 1천여 명의 학생이 목포역에 집결했으며, 김부련의 유해를 안고 “이승만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했다. 총 3만여 명의 목포시민들이 시위대에 호응했으며, 이날의 시위는 사고 한 건 없이 진행되었다. <ref> 조선일보, 1960.04.27. </ref> 5월 28일 10시 목포역 광장에서는 목포 중·고등학생들과 유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부련, 채광석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거행되었다. <ref> 조선일보, 1960.06.02. </ref> 목포에서는 4·19로 희생당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유달산 아래 사월혁명학생기념비를 건립했으며, 2008년 4월 19일 상동 달맞이공원에 목포 4·19혁명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ref> 목포시청 홈페이지 </ref>
 
 
[[한일회담 반대시위|한일회담 반대시위]] 한일회담 반대시위(韓日會談 反對示威)는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여 1964년 6월 4일 목포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재원 조달을 위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나섰으며, 1064년 봄 한일회담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6월 3일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에 나섰고, 정부는 군대를 투입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하루 뒤인 6월 4일 오전 10시, 목포 동광중·고등학교(현 목포 홍일중·고등학교) 학생 수십여명은 목포 역전에서 “애국학생 즉시 석방하라”, “경찰은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1965년 3월 민정당은 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에서 규탄시위를 가졌으며, 27일 오후 북교초등학교에서는 장택상, 유옥우 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일본굴욕외교반대강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날 강연에서 유옥우가 정부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연행되기도 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국회 비준으로 한일회담은 종결되었다. <ref> 地方 다섯 곳서 學生들 『데모』(동아일보, 1964.06.04.) </ref> <ref> 朴正權의 對日交涉 辛辣히 糾彈(동아일보, 1965.03.29.) </ref> <ref> 劉씨 光州로 押送(동아일보, 1965.04.01.)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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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일 (금) 12:40 판

목포 4·19 학생 시위 4·19혁명 학생 시위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저항해 4월 26일 목포시민들이 일으킨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3월 3일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목포역 연설 방해, 3월 11일 유옥우, 정중섭 두 두의원 연설 방해 등 자유당의 선거 방해가 계속되었다. [1] 3월 15일 선거 당일 목포에서는 3인조 공개투표, 대리투표, 공개투표 등 부정 투표와 민주당 참관인 입장 불허 등 개표 부정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대구 2·28민주운동을 시작으로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대한 시민과 학생의 규탄이 계속되었으며, 3·15 부정선거 이후 4·11 마산항쟁을 시작으로 시위는 4월 19일 서울까지 확산하였다. 이날 서울에서 있었던 4·19 시위로 목포 출신의 김부련, 채광석이 사망하고, 고종채가 부상을 당했다. 4월 26일 김부련의 시신이 목포역에 도착했다. 12시 그를 추모하기 위해 1천여 명의 학생이 목포역에 집결했으며, 김부련의 유해를 안고 “이승만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했다. 총 3만여 명의 목포시민들이 시위대에 호응했으며, 이날의 시위는 사고 한 건 없이 진행되었다. [2] 5월 28일 10시 목포역 광장에서는 목포 중·고등학생들과 유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김부련, 채광석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거행되었다. [3] 목포에서는 4·19로 희생당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유달산 아래 사월혁명학생기념비를 건립했으며, 2008년 4월 19일 상동 달맞이공원에 목포 4·19혁명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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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 반대시위 Event 사건 한일회담 반대시위(韓日會談 反對示威) 한일회담 반대시위 韓日會談 反對示威 http://dh.aks.ac.kr/~mokpo/wiki/index.php/한일회담 반대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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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한일회담 반대시위
이칭
유형 사건
설명 1964년 4월 박정희 정부의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주화운동
시대 현대
날짜 1964.06.04., 1695.03.27
관련인물 박정희, 유옥우, 장택상
관련단체 목포 동강중고등학교(현 목포 홍일중고등학교), 민정당 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관련장소 전남 목포시 영산로 98(목포역 광장)
관련유물 유적
관련사건 한일회담 반대시위

Contextual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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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4·19 학생 시위 목포 동강중고등학교 president 시위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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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4·19 학생 시위 유옥우 president 민정당 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1. 조선일보, 1960.03.04. ; 동아일보,1960.03.12.
  2. 조선일보, 1960.04.27.
  3. 조선일보, 1960.06.02.
  4. 목포시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