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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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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통계 : 중국인 - 44% , 부미푸트라인(말레시아 원주민) - 39%, 인도인 - 14%, 기타 - 3%
 
*인구 통계 : 중국인 - 44% , 부미푸트라인(말레시아 원주민) - 39%, 인도인 - 14%, 기타 - 3%
  
원래 작은 마을이었던 이포는 1880년대에 주변 킨타천(Kinta River) 분지에서 거대한 양의 주석 퇴적물이 발견되면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892년에 대화재로 마을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면서 이포를 보다 체계적으로 도시 재개발할 기회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 크게 성공한 하카 출신 광부 Yau Tet Shin은 1905년과 1914년 사이에 킨타천 건너편으로 마을을 확장했다. 1908년까지 그는 이포의 신도시에 216채의 집을 지었다. 이포는 이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양철광업 붐의 결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당시 말레시아가 영국 식민지여서 많은 서양식 건물들이 건립되었으며 중국인을 비록한 많은 사람들이 이포로 들어오면서 다문화도시가 되었다. 1941년 12월 15일에 일제가 쳐들어와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시대 때 페락주의 주도가 되었고 1942년 3월부터 1912년에 건립된 남성 기독교 학교인 '성 미카엘 학당(St. Michael's Institution)이 페락주에 있는 일본 행정부의 본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이포가 페락의 주도로 남았다. 그러나 1970년대 주석 퇴적물 고갈과 주석 가격 폭락으로 수십 년 동안 쇠퇴와 방치를 겪었다. 최근 10년 동안, 영국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으로 관광지로서의 이포의 인기는 크게 높아졌다. 이 도시는 또한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고 석회암 언덕과 불교 사찰이 세워진 동굴과 같은 자연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포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 중 하나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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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작은 마을이었던 이포는 1880년대에 주변 킨타천(Kinta River) 분지에서 거대한 양의 주석 퇴적물이 발견되면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892년에 대화재로 마을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면서 이포를 보다 체계적으로 도시 재개발할 기회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 크게 성공한 하카 출신 광부 Yau Tet Shin은 1905년과 1914년 사이에 킨타천 건너편으로 마을을 확장했다. 1908년까지 그는 이포의 신도시에 216채의 집을 지었다. 이포는 이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제2의 양철광업 붐의 결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당시 말레시아가 영국 식민지여서 많은 서양식 건물들이 건립되었으며 중국인을 비록한 많은 사람들이 이포로 들어오면서 다문화도시가 되었다. 1941년 12월 15일에 일제가 쳐들어와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시대 때 페락주의 주도가 되었고 1942년 3월부터 1912년에 건립된 남성 기독교 학교인 '성 미카엘 학당(St. Michael's Institution)이 페락주에 있는 일본 행정부의 본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이포가 페락의 주도로 남았다. 그러나 1970년대 주석 퇴적물 고갈과 주석 가격 폭락으로 수십 년 동안 쇠퇴와 방치를 겪었다. 최근 10년 동안, 영국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으로 관광지로서의 이포의 인기는 크게 높아졌다. 이 도시는 또한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고 석회암 언덕과 불교 사찰이 세워진 동굴과 같은 자연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포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 중 하나로 유명하다.
  
 
==사례==
 
==사례==

2021년 6월 18일 (금) 11:11 판

지역 소개

  • 지명 : Ipoh(페락주의 주도)
  • 인구 : 657,892(말레시아의 4번째 큰 도시)
  • 면적 : 643km2
  • 인구 밀도 : 1,023/km2
  • 인구 통계 : 중국인 - 44% , 부미푸트라인(말레시아 원주민) - 39%, 인도인 - 14%, 기타 - 3%

원래 작은 마을이었던 이포는 1880년대에 주변 킨타천(Kinta River) 분지에서 거대한 양의 주석 퇴적물이 발견되면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1892년에 대화재로 마을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면서 이포를 보다 체계적으로 도시 재개발할 기회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 크게 성공한 하카 출신 광부 Yau Tet Shin은 1905년과 1914년 사이에 킨타천 건너편으로 마을을 확장했다. 1908년까지 그는 이포의 신도시에 216채의 집을 지었다. 이포는 이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제2의 양철광업 붐의 결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당시 말레시아가 영국 식민지여서 많은 서양식 건물들이 건립되었으며 중국인을 비록한 많은 사람들이 이포로 들어오면서 다문화도시가 되었다. 1941년 12월 15일에 일제가 쳐들어와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시대 때 페락주의 주도가 되었고 1942년 3월부터 1912년에 건립된 남성 기독교 학교인 '성 미카엘 학당(St. Michael's Institution)이 페락주에 있는 일본 행정부의 본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이포가 페락의 주도로 남았다. 그러나 1970년대 주석 퇴적물 고갈과 주석 가격 폭락으로 수십 년 동안 쇠퇴와 방치를 겪었다. 최근 10년 동안, 영국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으로 관광지로서의 이포의 인기는 크게 높아졌다. 이 도시는 또한 음식으로 잘 알려져 있고 석회암 언덕과 불교 사찰이 세워진 동굴과 같은 자연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포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 중 하나로 유명하다.

사례

건축물 예시

활용 사례

홍보 사례

참고 자료

[3]

주석